지난주 화요일(3월18일) 내가 다니는 영국 리즈대학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회가 열렸다.(지젝이 누군지 모르는 이들은 알라딘 같은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서 저자 소개 검색해보면 충분할 것이다. '먹물들의 연예인'이라고 할 철학박사다.)
나는 지젝이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내가 듣는 과목의 강사가 열심히 추진한 강연이라 참석했다. 부활절 휴가가 막 시작되어 학교가 한산한 편인데, 강연에는 500명이 훨씬 넘는 이들이 몰렸다. 청중은 20대의 젊은 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교수까지 다양했다. 지젝의 인기를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강연회장 입구에 학생회가 설치한 지젝 책 판매대 바로 옆에 '사회주의노동자당'(영국의 국제사회주의자들이다. 한국의 다함께가 이들과 아마 자매단체쯤 될 것이다.)이 책 판매대를 설치했다는 점이다. 지젝도 여기서는 '급진 좌파' 계열에 드는 듯 하다.
먼저 지젝의 강연회 모습 따위를 찍어 편집한 영상이 상영됐다. 지젝이 알몸으로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 철학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는 대목도 나온다. (참 안쓰럽다. 이렇게까지 해야 먹고 사는가.) 아주 재미있는 영상이었다. 지젝은 코미디언으로 나서도 될 듯 하다.
오후 6시쯤 지젝이 직접 등장해서 거의 두시간쯤 말을 했다. 우선 이 연예인, 사람 혼을 빼놓는 데 특기가 있다. 말을 하면서 거의 1분에 한번 꼴로 자기 코를 만진다. 또 약 3-4분에 한번 꼴로 옷을 만진다. 게다가 영어 발음은 죽음이다. 나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정말 고역이다. (예컨대 '폼(form)'을 '포름'이라고 발음한다.) 정신이 사나워서 집중이 안된다. 게다가 이 사람 정말 수다쟁이다. 딱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말을 참 수다스럽게 한다. 그리고 사용하는 영어 단어는 꽤 한정되어 있다. 영어가 외국어니 어쩔 수 없다. 덕분에 나같은 사람도 금방 적응이 됐다.
이 강연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 사람이 라캉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마르크스 팔아먹기, 재미있는 농담으로 청중 웃기기, 영화 이야기로 흥미 유발하기를 적절히 결합해서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는 것이다.
먼저 마르크스 팔아먹기다. "내가 너무 나이브하게 마르크스주의자로 말하는 것 같죠", "나는 프로이드-마르크스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따위의 주장으로 자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는 걸 암시한다. "모든 포스트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언론의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다" 따위의 주장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거리를 두는 것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이미지 형성 효과를 발휘한다.
급진적이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깝지만 고루하거나 꽉 막히지 않은 좌파, 그러면서도 '불온하거나 과격하지 않은 좌파' 이것이야말로 지젝의 판촉 핵심이고, 지젝이라는 '서양 먹물들의 대중적인 열기'의 본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른바 포스트주의자들이 결정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다. (이제 누가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을 좌파라고 하는가!)
강연은 미합중국의 이라크, 이란 정책 비판으로 시작해서(별 내용은 없다. 그저 흔한 이야기다.), 역시 영화 이야기로 이어진다. 1988년 존 카펜터가 감독한 미합중국 영화 '데이 라이브(They live)'를 언급했다. 이 영화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가난한 노동자 이야기다. 어떤 색안경을 쓰면 미합중국 자본주의의 본질이 보인다는 내용이다. 색안경을 쓰는 순간, 거리의 화려한 광고판에 '복종하라'는 메시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를 두고 "전통적으로 철학은 눈을 가리는 막을 벗어야 진실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안경을 써야 진짜 자본주의 이념이 보인다고 말한다"고 논평했다. (카펜터 감독이 심오한 생각에서 이렇게 만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로스앤젤레스의 거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안경을 벗으면 세상의 진실이 보인다는 걸 표현하기는 곤란하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려고 살짝 비틀어서 우연히 얻은 색안경을 쓰니 진실이 보인다고 한 게 아니겠는가? 여기에 무슨 대단한 진실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조금 우스꽝스럽다. 이미 이 세상은 자본주의 이념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안경을 쓴다는 행위는 존재 조건인 자본주의 이념을 벗어버리고 '진짜 맨 눈'으로 보는 것의 영화적 장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어서 자신이 최근에 쓴 책 '폭력'에 대해 약간 언급했다. 주장의 핵심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 또는 '관용'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것',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상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고 떠드는 것, 그것이 진짜 폭력이라는 이야기다. 밑바닥의 인종 차별적 인식을 감추는 은폐 도구로서 '관용', '포용' 대신 솔직하게 서로 다르다는 걸,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다만 이 거리두기는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화의 의미에서 거리두기라고 한다. (이 부분은 약간 흥미있다. 다만 '정치적 올바름'에 지치다 못해 진저리를 치는 '1990년대 서양 사회'라는 아주 특정 시기, 특정한 맥락에서만 그렇다. 아직도 생짜배기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 그리고 생짜배기 폭력이 '테러리즘'이라는 초강력 무기를 들고 다시 등장하고 있는 요즘의 미합중국과 유럽 사회에서는 턱도 없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시효가 끝났다. 지젝은 너무 늦게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아니면 요즘 미합중국이, 영국이 어떤지, 서유럽이 어떤지 진짜 따져들어가는 건 '너무 불온'하기 때문일까?)
이어서 지젝은 프랑스 학자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를 언급했다. (이 학자는 지젝이 비판하는 자크 데리다의 제자이고, '헤겔의 미래'라는 책을 썼다. '말라부는 데리다의 후속판이다'는 말까지 나온다는 것 같다.) 솔직히 지젝이 말라부에 대해서 한 말은 잘 모르겠다. 말라부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없어서 그렇다. 그저 말라부의 분석이 일리가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는 정도다. 강연을 들을 때는 대강 어느 부분을 비판하는지 감을 잡는 정도였는데, 메모를 해둔 것도 없고 지금은 기억이 전혀 없다. 지젝이 데리다와 '각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라부를 언급하는 맥락을 짐작할 수 있다. 말라부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다음의 인터뷰를 읽어보시라. 영어로 된 것이다. (말라부 인터뷰(pdf 파일))
마지막으로 지젝은 역시 마르크스를 '전유'함으로써 마무리를 지었다. 그는 마르크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는 빼앗긴 존재이고, 다시 표현하면 '실체 또는 본질 없는 주체'(subject without substances)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세가지 프롤레타리아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생태 측면에서 박탈당하는 존재, 두번째는 상징적으로 박탈당하는 존재, 세번째는 내적 의식 측면에서 박탈당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말해 21세기 인간의 조건은, 생태적으로 착취당하고, 상징적으로(권력과 미디어의 상징 조작 때문에) 착취당하고, 마침내 의식 내부 차원에서까지 착취당하는, 무산계급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더는 이대로 세상이 지속될 수 없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데, 그게 뭔지는 나도 솔직하게 모른다." 그리고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반세계화주의자들의 행사인) 세계사회포럼의 일각이 주장하는 '작은 지역 공동체의 회복'은 해법이 아니다. 작은 공동체를 회복하기는 너무 늦었다. 보편적이고 큰 싸움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내가 공감한 딱 두가지 대목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한 대목은 "포스트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언론의 이름 붙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마지막으로 지젝 숭배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지젝은 자신의 적수를 기껏 주디스 버틀러로 설정하고 있었다. (자기 입으로 '에니미(enemy)'라고 직접 말했다.) "어떤 좌파가 주디스 버틀러를 두려워하랴!"
-출처 : http://blog.jinbo.net/marishin
고진과 지젝
한 문학평론가가 다음처럼 말한다. <아주 거칠게 단순화시키자면, 현재 한국에서 21세기형 비평가의 이상적(?) 모델은 가라타니 고진형과 슬라보예 지젝형으로 이분화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문학의 영토에서 시작되어 철학의 고원으로 이전해 간 가라타니 고진, 그리고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지층에서 시작하여 영화를 비롯한 전방위적인 문화 비평으로 나아간 슬라보예 지젝. 평론가들은 이들 텍스트를 수많은 각주로 소비하지만, 비평가라는 존재의 윤리적 차원에서 두 사람은 더더욱 복합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이들 모형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문학의 영토에서 철학의 고원으로 이전하는 것>보다 오히려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이 좋을 듯하고, <전방위 문화비평으로 가기> 전에 차라리 철학과 정신분석학이라도 차분하게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과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내가 칸트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독해가 엉터리라고 이야기해 보았자, 아마 <그가 해석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 칸트, 맑스, 소쉬르, 데카르트는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라는 의문을 지닌 영혼에게는 별로 공감이나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의문에서 왜 <자처한다>는 개념을 사용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그 자처하는 자들이 바로 철학을 공부한 자들일 것인데, 그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아는 척 하거나 혹은 전문가인 척 <자처>하는 것으로 비추어진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런 영혼에 대해서 격분한 것이 바로 칸트이다. 수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수학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는 영혼들이 철학의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진짜 전문가인 양 자처하고 철학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이런 영혼들이 갖고 있는 헛된 착각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아마 언제나 고진형이나 지젝형으로 상징되는 우상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칸트에 대한 고진의 주장 중의 하나가, 혹은 그 핵심이 칸트의 물자체가 타자라는 것이다. 즉 인격을 지닌 목적적 존재로서 타자이다. 그러나 좋게 해석해서 칸트의 물자체는 바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이며, 지식과 경험을 구성하는 구성조건이 아니라, 그 제약 조건일 것이다. 이 제약 조건 때문에 우리는 과학적 지식의 월권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지식으로서 가능한 것은 거칠게 말해서 선험적 통각, 선험적 주체, (일본에서 그렇게 사용하는 것 같은데) 초월론적 주체일 것이다. 그런데 고진에 의하면 이 초월론적 주체가 바로 그가 주장하는 <강한 시차>의 한 축이며, 따라서 초월론적 주체의 태도, 그 관점은 바로 물자체에서 생각하는 것, 타자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카라타니 고진이 하듯이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초월론적 주체와 물자체의 구분 자체가 사라진다. 이것은 그가 초월론적 주체를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규정하는데에서도 나타난다.
흥미롭게 지젝이 그의 <시차적 관점>에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초월론적 주체의 정확한 위치는 칸트가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부른 것이나 마르크스가 사유의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형식이라고 부른 것의 위상이 아니다. 우선 초월론적인 나, 그 순수한 통각은 본체적이지도 현상적이지도 않은, 전적으로 형식적인 기능이다. 그것은 비어 있으며, 어떠한 현상적 직관도 그에 상응하지 않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나타나야 한다면 그러한 자기 출현은 물자체, 즉 본체의 직접적인 자기 투명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초월론적 주체의 공백과 우리의 지각의 원인이 되는 접근 불가능한 X, 초월론적 대상의 공백 사이의 비교가 잘못 이해되었다. 초월론적 대상은 현상의 외양 너머에 있는 공백인 반면에 초월론적 주체는 현상 속에서 이미 공백으로 나타난다.>
지젝이 이야기하고 있는 초월론적 대상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것이 물자체라면, 그것은 초월론적 주체와 다르다는 것이 지젝의 요지이다. 이것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을 비판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초월론적 대상, 혹은 물자체는 현상 너머에 있는 <공백>이며, 반면에 초월론적 주체는 형식적 기능이기 때문에 현상 안에서 <공백>이다.
내가 보기에는 칸트를 제 멋대로 이해하는 가라타니 고진에 비해 (그러나 <실천이성비판> 혹은 칸트 윤리학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이해는 정당하다.), 칸트에 대한 지젝의 이해가 더 올바르다. 적어도 지젝은 <순수이성비판>에 대해서 표면적 이해는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지젝이 다음처럼 주장한다.
<아마도 이 새로운 영역을 향한 칸트의 업적을 가장 잘 묘사하는 길은 “비인간/인간 아닌 것”이라는 개념의 변화된 위상에 관해 언급하는 것일 듯하다. 칸트는 부정(否定)(negative) 판단과 부정(不定)(indefinite) 판단 사이에 결정적 구분을 도입한다. “영혼은 죽는다”라는 긍정판단은 두 가지 방식으로 부정될 수 있다. 술어부가 주어에 대해 부정될 때 (즉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비술어부가 긍정될 때가(“영혼은 비죽음이다.”) 있으며, 이 차이는 스티븐 킹의 독자라면 모두 알고 있듯이, 정확히 “그가 죽지 않았다”와 “그는 죽지 않은 것(un-dead)이다.” 사이의 차이와 동일하다. 부정(不定) 판단은 기초적인 구분을 해치는 세 번째 영역을 열어 놓는다. “죽지 않은 것”은 살아 있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것으로서 그들은 정확히 괴물 같이 “살아 있는 망자(living-dead)”이다.>
나는 스티븐 킹의 독자가 아니라서 지젝의 언급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논리학의 독자로서 지젝의 언급은 거짓말이다. 칸트는 판단의 질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가 긍정판단이고 다른 하나가 부정(否定)판단이고, 또 다른 하나가 무한판단이다. 지젝의 번역판에서 <부정(不定)> 판단으로 번역한 것이 바로 무한판단이다. (혹은 이율배반에 집중하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을 비판하면서 변증법을 도입하고 싶은 지젝의 희망이 칸트가 말한 무한 판단을 고의로 <미규정>의 부정(不定) 판단으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칸트는 <범주표>에서 이것을 <제한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의미에서 전통 논리학에 익숙하다면, <영혼은 죽지 않는다> 즉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니다>라는 부정판단의 동치는 <영혼은 비(非)죽는 것이다>이다. 이것이 전통 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환질>이다. 이렇게 환질되는 명제에는 그 어떠한 차이도 없다. 그런데 칸트는 선험 논리, 즉 초월론적 논리의 관점에서 부정판단과 무한판단을 구분한다.
<일반 논리학은 술어의 일체 내용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그 술어가 주어에 부가되어 지느냐 아니면 주어에 마주 세워지느냐만을 주목한다. 그러나 초월 논리학은 (즉 선험 논리학은) 판단을 순전히 부정적인 술어를 매개로 한 이 논리적 긍정의 내용이나 가치의 면에서도 고찰하고, 이 논리적 긍정이 전체 인식과 관련해서 어떤 이득을 가져오는지 고찰한다.>
그러한 구분이 도대체 어떤 이득을 주는가?
<내가 만약 영혼에 대해서 “영혼은 죽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하나의 부정판단을 통해 적어도 하나의 착오를 방지할 터이다. 그런데 나는 “영혼은 비(非)죽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논리적 형식상 실제로는 긍정을 했다. 그것은 영혼을 비(非)죽는 것들의 무제한적인 외연 속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런데 죽는 것은 가능한 존재자의 전 외연 중의 일부를 이루고, 반면에 비(非)죽는 것은 또 다른 일부를 이루는 것이므로, 나의 명제에 의해 말해진 것은 다름 아니라, 영혼이란 내가 죽는 것을 모두 제거하면 남는 무한히 많은 사물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써는 다만 모든 가능한 것의 무한한 영역이, 죽는 것이 그로부터 떼내어 지고, 그 공간의 나머지 외연에 영혼이 놓여 졌다는 그 만큼 제한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제외하고도 이 공간은 여전히 무한하다. 그리고 아직도 그 공간의 더 많은 부분들이 제거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영혼의 개념은 조금도 더 커짐이 없고, 긍정적으로 규정됨이 없다.>
<영혼은 비(非)죽는 것이다.> 이 판단, 이 무한판단이 주는 이득이 무엇인가? 이 판단은 비(非)죽는 것의 집합 속에 영혼이 한 멤버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죽는 것이 이 집합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 집합에서는 죽는 것들이 제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영혼은 비(非)죽는 것이다>라는 판단은 이런 방식으로, 즉 죽는 것이 결코 포함될 수 없는 집합 속에 영혼이 속한다는 방식으로 <제한>된 것이다. 따라서 <무한판단들은 인식 일반의 내용과 관련해서 제한적이다.> 이 제한적 기능은 긍정판단에서 보여지는 포함기능이나 부정판단에서 보여주는 배제기능과는 다른 제한기능을 한다. 아마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요지처럼 보인다.
이것이 칸트의 주장이라면 지젝이 스티븐 킹을 동원해서 말한 것, 즉 <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즉 <그는 비(非)죽은 것이다>는 판단은 살아 있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것으로서 괴물이거나 살아있는 망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와 논리적 동치이며, 제한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만 다르다.
이런 혼동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는 지젝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진짜 압권이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는 “그는 비인간이다”와 같지 않다. “그는 사람이 아니다”는 동물 또는 신성과 같이 단순히 그가 인간 범주 밖에 있다는 뜻인 반면 “그는 비인간이다”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한다. 인간도 아니고 비인간도 아니지만, 비록 우리가 인간성으로 이해하는 부분을 부정하더라도 그는 인간됨에 고유한 무시무시한 과잉의 징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칸트의 혁명과 함께 변화된 것이라는 과감한 가설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어떤 가설을 세우는가? <칸트 이전의 우주에서 인간은 단순히 인간이었으며 동물적 갈망과 신성한 광기의 과잉과 투쟁하는 이성의 존재들이었던 반면에, 칸트와 독일 관념론에서만은 싸워야할 과잉이 절대적으로 내재적이며 바로 주제성 자체의 중심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칸트 이전의 우주에서는 주인공이 미친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인간다움을 박탈당했다는 뜻이었는데 반해 칸트에게 광기는 인간의 중심 자체의 구속 받지 않은 폭발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멋있는 가설은 아주 빈약한 혹은 오류에 근거한 상상의 결과이다. <그는 비(非)인간이다>라는 것은 <그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부정판단과 논리적 동치이다. 따라서 그 명제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비인간도 아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젝은 <그는 비인간이다>라는 명제의 두 의미를 혼동하고 있다. 이 명제는 말 그대로 <그는 인간이 아니다>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는 인간답지 못하다>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만약 후자라면 그의 말처럼 <인간됨에 고유한 무시무시한 과잉의 징표>가 나타날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합리성, 주체성, 혹은 고진의 표현처럼 내성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날 것이다.
고진형과 지젝형이라는 두 유형이 주는 충격 때문에 <한국의 비평가들은 ... 고진처럼 작품과의 연루를 완전히 단절한 채로 문학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담론의 영토로 진입해야 하는가. 아니면 작품을 배제하지 않되 작품을 포월(包越)하는 방식으로, 작가론이나 작품론의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비평을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작품을 꼼꼼히 읽고 거기에서 나누어야 할 감동이나 가치를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는 건방진 영혼들에게 잘 제시해 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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