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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ㅓ 2008. 1. 3. 10:15 Posted by 로드365


  
로벤 아일랜드 박물관 출입구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20세기 민주화와 인권의 3대 영웅


오늘은 내가 케이프타운에 가면 반드시 가보리라고 다짐했던 로벤 아일랜드 섬에 가는 날이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계사적 대전환기에서 최고의 인물인, 내 개인적인 판단만은 아닐 것이지만, 넬슨 만델라가 ‘다시 태어난 곳’이다. 만델라는 이스턴케이프 주의 음타타(Mthatha. 움타타)에서 태어나 요하네스버그의 소웨토에 살았으나 고독한 외딴 섬인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 세계인으로 우뚝 솟았다.


미소를 중심으로 한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제3세계의 군부독재가 몰락하면서 민주화가 이뤄지고, 제국주의적 인종차별이 종식되고 흑백공존의 다문화 세계로 옮겨가는 20세기말 대전환기의 중심에 만델라가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평생 투쟁한 만델라는 이념을 뛰어넘어 보편적 민주화를 추구하면서, 다민족 다문화로 가는 21세기 세계의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는 만델라가 21세기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 본다.


20세기는 냉전의 이념적 대결로 인한 전쟁과, 군부독재와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충돌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민중 항쟁이 벌어졌으나 그 와중에 세계적 지도자들이 탄생했다. 제3세계 민주화의 상징으로 아프리카에서는 남아공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 아시아에서는 한국 전 대통령 김대중, 동유럽에서는 체코 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을 꼽을 수 있다.


넬슨 만델라는 백인 제국주의의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시킴으로써 모든 인종은 평등하다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천했으며, 김대중은 제3세계 군부독재의 종식을 통한 민주주의 체제의 보편성을 확인하고, 하벨은 공산독재 붕괴를 통해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줌으로써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질적 인민주권의 가치를 실현하였다.


우리 시대에 영웅을 갖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영웅을 우상화할 필요는 없지만, 깎아내리는 것은 참 어리석은 짓이다. 기나긴 투옥과 사형이라는 압제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온 삶을 희생했던 영웅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이나마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세계는 이들 영웅들에 대해 인색하지 않았다. 만델라와 김대중, 하벨은 모두 대통령으로 그 나라의 지도자가 되었고, 만델라와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나는 멀지 않아 하벨도 노벨평화상을 받으리라 믿는다. 90살이 가까운 나이에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고 국제원로그룹인 ‘디 엘더스(The Elders)’를 만들어 세계 평화와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만델라를 보면 한없이 존경스럽다. 우리의 젊은이들 중 저 나이에도 각자 맡은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한국의 만델라, 마더 테레사, 달라이 라마 등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로벤 아일랜드의 모습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드디어 나미비아 비자를 받다


로벤 아일랜드는 오후에 가기로 되어 있어 나는 오전에 케이프타운에서 해야 할 일들을 서둘러야 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다. 월요일 오전 관공서가 문을 열기가 바쁘게 비자를 받으러 나미비아관광청으로 달려갔다. 에티오피아와 짐바브웨에서 두 번이나 나미비아 비자를 받지 못해 걱정이 앞선다. 인터넷 여행카페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나미비아관광청이 있다는 스탠더드 뱅크 센터 빌딩으로 찾아갔으나 몇 년 전에 옮겼다고 한다. 물어물어 건너편의 피너클 빌딩으로 가니 나미비아관광청이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여직원이 먼저 “굿모닝, 비자”하면서 친절하게 맞는다. 나미비아관광청에 외국인이 올 일이라고는 비자신청밖에 없으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여직원이 방문목적을 미리 안다. 친절한 여직원의 인사말에서 이미 비자는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에티오피아와 짐바브웨의 나미비아 대사관에 갔을 때는 여직원의 말부터 퉁명스러웠다.


여직원은 비자 신청서를 기록하는데 도와주기고 하고, 사무실 밖까지 나와 비자요금 내는 은행의 위치를 가르쳐준다. 비자요금은 다른 나라와 달리 비자담당 직원이 직접 받지 않고, 바로 앞 건물의 남아공 최대은행인 ‘압사(ABSA) 은행’에 가서 돈을 내고 영수증을 받아오라고 한다. 은행납부 영수증을 가지고 가니 이미 여권에 비자를 찍어놓고 기다리고 있다. “멋진 여행을 즐기세요”라는 인사말과 함께 여직원이 비자가 찍힌 여권을 돌려준다. 그동안 나미비아 비자 때문에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나기도 했으나, 케이프타운의 여직원의 친절을 보니 나미비아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말끔히 사라졌다.


  
정상이 짙은 구름에 싸인 테이블마운틴.앞쪽 건물은 케이블카 타는 곳.
ⓒ 김성호
테이블마운틴

오르지 못한 테이블마운틴


케이프타운 기차역에 있는 인터케이프 버스 사무실에 가서 다음날 나미비아의 빈트후크 가는 버스표를 예매한 뒤 택시를 타고 테이블마운틴으로 갔다. 케이블카를 타고 테이블마운틴 정상에 오를 참이다. 정상에 올라 케이프타운 시내를 감상하리라는 기대를 안고서. 그러나 케이블카 타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나의 기대는 깨어졌다. 마침 강한 바람으로 케이블카가 운행하지 않고 있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악마의 정상'이라는 뜻의 데블스 피크에서부터 테이블마운틴 정상이 모두 하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산허리까지만 보이고 정상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 마운틴은 강한 바람과 짙은 구름으로 보통 때도 자주 정상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케이블카 운행이 중단되는 경우가 많다.


남아공 사람들은 테이블마운틴 정상을 가리는 구름이 마치 보자기처럼 감싸 안는다고 해 짙은 구름을 ‘테이블보(Table Cloth)’라고 한다. 데블스 피크의 이름도 담배를 즐기던 골초 두 사람이 담배 많이 피우기 시합을 하다가 한 사람은 악마가 되고, 그들이 피운 담배 연기가 구름 테이블보로 변해 테이블마운틴을 덮어 버렸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케이블카의 흑인 여직원이 “미안하다”며 강한 바람 때문에 운행이 중단됐다고 설명한다. 내가 오후 늦게 오면 탈 수 있느냐고 하자 “오늘은 바람이 계속 불어 어려울 것 같다”며 “내일 아침 일찍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케이블카는 10분마다 운행하고, 밑에서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 4분 정도 걸린다.


정상에 오르지 못했어도 케이블카 타는 곳에서 바라보는 전망도 탁 트였다. 케이프타운 시내 전경이 다 들어온다. 멀리 테이블 베이와 빅토리아&알프레드 워터프론트 항구가 보인다. 시내 쪽은 날씨가 맑은데, 이상하게도 테이블마운틴 산허리 중간부터 짙은 안개가 끼고 바람이 강하게 분다.


정상까지 걸어갈 수도 있는데 결국 포기했다. 정상까지 2시간이면 걸어가는데 치안이 문제이다. 테이블마운틴에 오기 전 숙소직원에게 물어보니 “혼자 올라가는 경우 산 중간에서 강도를 당할 우려가 있다”며 꼭 케이블카를 타고 가라고 당부한다.


  
로벤 아일랜드 가는 워터프론트 선착장과 쾌속선
ⓒ 김성호
워터프론트 선착장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의 유배지


숙소로 돌아온 뒤 오후에 로벤 아일랜드 투어에 나섰다. 넬슨 만델라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투쟁을 벌이다 투옥된 27년 가운데 무려 18년을 보냈던 외딴 섬이다. 로벤 아일랜드로 가는 배를 타는 선착장인 테이블 베이의 워터프론트 항구에는 ‘넬슨 만델라 게이트’라는 작은 전시관이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투쟁역사를 보여주는 3층짜리 전시관이다. 로벤 아일랜드와 아파르트헤이트 역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설명이 벽에 붙어 있는데, 승차권 판매소에서 페리 탑승장까지 가는 통로를 자연스럽게 걸어가면서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1960년대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 바느질하는 넬슨 만델라의 사진과 1960년 3월 21일 통행법에 반대하는 흑인들에 대한 샤프빌 학살 사진, 1976년 6월 16일 소웨토 항쟁 사진,  넬슨 만델라와 현 대통령인 타보 음베키의 아버지인 고반 음베키 등 흑인 지도자들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코사족의 예언자인 마카나(Makana)는 1819년 영국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 로벤 아일랜드에 유배됐으나 탈출하는 도중 물에 빠져 숨졌다.”


마카나의 사진과 설명이 붙어 있다. 마카나는 ‘은셀레(Nxele, 코사어로 ‘왼손잡이’라는 뜻)’라고도 불리는데, “선조들이 바람의 힘을 가지고 돌아와 백인 침략자들을 몰아낼 것”이라며 코사족에게 백인 식민 지배자들과의 투쟁을 독려했다. 로벤 아일랜드는 아파르트헤이트 이전에도 영국의 식민지배에 투쟁했던 흑인 추장들을 투옥했던 장소였다.


전시관의 자료에 보니 1658년 케이프식민지의 원주민인 코이코이족 지도자인 아우츄마토(Autsumato)가 네덜란드에 의해 로벤 아일랜드에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19세기 백인들의 식민지배가 본격화 된 뒤, 코사족 추장인 마코마(Maqoma)가 1871년 이 섬에 유배 중 사망하고, 콰줄루-나탈지역의 추장인 랑갈리발레레(Langalibalele)도 1874년 유배되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내가 타고 간 고속 페리의 이름도 코사족 예언자를 기념한 ‘마카나’호였다. 로벤 아일랜드에는 40여분만에 도착했다. 케이프타운에서 12km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이다. 섬의 항구에는 물개가 헤엄치고 방파제에는 물새들이 날아다닌다. ‘로벤(Robben)’이 네덜란드어로 ‘물개’라는 뜻이니, ‘로벤 아일랜드’는 ‘물개가 많이 사는 섬’이라는 의미다. 섬 이름대로 로벤 아일랜드에는 내가 갔을 때도 방파제와 섬 해안가에 물개들이 넘쳐 났다.


알제리의 혁명가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린다면 ‘저주받은 땅’ 아프리카의 ‘저주받은 자들’의 유배지에 첫 발을 내렸다. 로벤 아일랜드의 첫 인상은 푸른 나무들이 우거진 아름다운 유원지 같았다. 오랫동안 제국주의의 탄압과 인종차별의 상징의 장소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로벤 아일랜드는 전체가 박물관으로 지정되어 있고 1999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로벤 아일랜드의 채석장과 대피동굴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정치범들이 채취한 해초가 한국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는데...


배에서 내린 승객들이 걸어서 로벤 아일랜드 박물관의 입구로 들어가자 버스가 승객들을 태운다. 안내자가 버스에 올라와 설명한다. 섬을 먼저 둘러보는 투어를 한 뒤, 맨 마지막에 넬슨 만델라와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던 교도소를 방문하는 순서이다. 버스가 섬을 돌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나무가 우거진 사이로 돌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센병 묘지”라고 쓰여 있었다. 나무숲 사이로 여러 개의 돌비석이 있는 무덤이 보였다.


그 옆으로 ‘좋은 목자의 교회(Church of Good Shepherd)’라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교회도 보인다. 로벤 아일랜드는 형무소뿐 아니라 1836년부터 1931년까지 한센병 환자와 정신병자들을 격리하는 집단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예전에 한센병은 환자의 곁에만 있어도 전염된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동서 어디서나 외딴 섬에 격리수용했었다.


10여 마리의 펭귄이 도로까지 올라와 여행객을 맞는다. 왼쪽으로 노란색 시멘트 건물이 보이는데 안내자는 “로버트 소부크웨 하우스”라고 말한다. 작은 단층건물이다. 예전에는 교도관들이 사용하던 건물이었으나, 흑인지도자인 로버트 소부크웨가 한때 수용되었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조그만 네모난 칸막이 건물은 교도소 경비견들의 우리이다. 로버트 소부크웨는 급진 흑인민족주의 조직인 ‘범아프리카회의(PAC)’의 초대 의장인데, 넬슨 만델라의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경쟁관계였다.


영국성공회 교회도 보이고, 초등학교도 보인다. 1894년 세워진 초등학교는 예전 혼혈인 교도관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였는데, 두 명의 교사가 있었다고 안내자가 설명한다.


등대가 있는 바닷가에는 오래 전 좌초한 어선들의 파편이 그대로 나뒹굴고 있었고, 대서양의 파도에 죽은 해조류들도 밀려오고 있었다. 차가 뒤로 돌아가자 나무 하나 없는 사막지대 같이 황량한 땅이다. 만델라와 수감자들이 돌을 캐는 노역을 하던 석회암 채석장과 만델라가 일을 하다 폭풍우가 오면 임시로 대피하던 동굴이 나온다. 수감자들이 캐낸 돌은 도로자갈용으로 사용되었다.


만델라가 노역하던 채석장을 보니 미국 작가인 폴 서룩스의 영문판 아프리카 여행기인 <다크 스타 사파리(Dark Star Safari)>에 나오는 내용이 생각났다. 지난 1979년부터 1984년까지 로벤 아일랜드에 수감 중 매일 육체노동을 했던 정치범 락스 시코아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섬 주변 바다에서 10피트(약 3m) 크기의 해초(Seaweed)를 채취하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그 해초는 대만과 한국에 수출되었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워낙 미역과 다시마, 파래 등을 좋아하니 당시 로벤 아일랜드의 정치범들이 수확한 해초를 수입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야 로벤 아일랜드의 수감자들이 채취한 사실은 모르고, 남아공산 미역과 다시마로 알았겠지만.


2차 세계대전 때 참호 겸 벙커를 지나 섬을 한 바퀴 돌아오니 옛 교도소가 나타났다. 그 옆으로는 ‘크라마트(Kramat)’라는 이슬람 성소가 있는데, 1754년 로벤 아일랜드 유배 중 숨진 케이프타운의 이슬람 성직자 셰이크 마두라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정책에 반대한 동남아시아 출신 이슬람 정치범들도 흑인지도자들과 함께 이곳에 수감되었다.


  
'빌리 네어'라는 이름의 수감자 개인기록카드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죄수들이 먹는 음식에도 인종차별을


40여 분간의 섬 일주 여행을 마친 뒤 우리는 넬슨 만델라와 흑인정치범들이 수용되었던 교도소로 갔다. ‘최고 보안 교도소(Maximun Security Prison)’이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은 ‘벤자민’이라는 70대 후반의 노인이다. 큰 키에 인자하면서도 친절한 그는 넬슨 만델라와 함께 로벤 아일랜드에서 11년간 투옥한 역전의 용사였다. 로벤 아일랜드의 안내자들은 대부분 옛날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투쟁을 벌이다 이곳에 투옥되었던 사람들이다. 인권투사에서 여행 안내자, 아니 역사 해설가로 바뀐 노년의 영웅의 안내를 받으며 교도소 안으로 들어가니 더욱 뭉클할 수밖에 없다.


교도소는 구역별로 나눠져 있었는데, A(에이)동에서 C(시)동은 독방이었고, D(디)동에서 F(에프)동은 보통 정치범이나 일반 죄수들을 수용하던 곳으로 최고 60명을 함께 수용하던 집단 수용방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간 F동은 마치 학교 교실처럼 넓었는데, 사이잘 매트리스와 작은 개인 사물함 등이 놓여 있었다. 백인정권은 교도소에서도 철저하게 인종차별을 했다. 인종 등을 고려해 수감자들을 가장 좋은 A그룹에서 가장 나쁜 D그룹으로 나눠 차별대우를 했다. 수감자들이 교도소에 들어와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바로 등급이 매겨진 개인기록카드(ID-card) 발급받는 일이다.


교도소 안에는 신분증명서나 다름없는 당시의 개인기록카드가 표본으로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1964년 파업 중 파괴행위(사보타주)혐의로 20년 형을 선고 받은 ‘빌리 네어(Billy Nair)’라는 사람은 종교는 힌두교인데 “B그룹”으로 분류되어 좌우 엄지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 인도계 사람으로 보이는 빌리 네어는 죄수번호(수인번호)가 “69/64”였다. 1964년도 69번째 죄수라는 뜻이다. 넬슨 만델라의 죄수번호는 “466/64”인데, 1964년도 466번째 죄수라는 의미이다.


인종차별의 극치는 죄수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이다.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에서는 철저히 인종에 따라 혼혈과 아시아계(Coloured/Asiatics)는 B그룹으로, 아프리카흑인(Bantus)은 C그룹으로 나눠 음식물까지 차별했다. 교도소에 남아 있는 죄수 식단표에는 “하루에 고기는 B그룹에 60oz(온스), C그룹은 5oz으로, 식사도 B그룹은 옥수수 죽과 쌀밥, 콩을 섞어 주고 C그룹은 옥수수 죽만 주며, 잼(Jam)은 B그룹은 주고, C그룹은 주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다.


최하위 급수인 D그룹은 넬슨 만델라처럼 고위 정치범들이 속했다. 교도소 안에서도 인종간 차별대우를 통해 통치하려는 제국주의의 치졸한 ‘분열통치’방식, 이이제이 책략을 엿보게 된다.


나는 궁금증이 생겼다. A그룹은 어디에 있는가.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의 죄수 개인기록이나 음식물 제공분류에서 A그룹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는 전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전 읽었던 넬슨 만델라의 자서전인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김대중 옮김·1995·두레)>을 여행 후 다시 꺼내 읽고서 해답을 찾았다. “로벤 아일랜드에는 어떠한 흑인 교도관도, 어떠한 백인 죄수도 없었다.” 분명히 백인 죄수가 A그룹에 속했을 텐데, 로벤 아일랜드에는 백인 죄수가 한 명도 없다 보니 A그룹에 대한 자료가 있을 턱이 없다.


집단수용 교도소를 지나, 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한 흑인 정치범들이 수용된 독방감옥인 A, C동과 B동으로 갔다. A동과 C동은 같은 방향에 있었다. A동에는 보통 10~20년간 장기 투옥된 사람의 이름과 사진, 투옥기간이 방마다 붙어 있었다. 1.5㎡의 크기에 침대 1개만 있다. 철창문으로 되어 있고 복도식으로 양쪽에 방이 있다.


  
만델라가 수감되었던 교도소 안마당에 세워져 있는 3개의 사진판자(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정치범 출신 안내자)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평범한 만델라의 수용실


마지막으로 넬슨 만델라가 수감되어 있어 ‘만델라동’으로 알려진 B동으로 갔다. 4m 높이의 시멘트벽으로 둘러 처져 있다. B동은 만델라처럼 가장 요주의 대상의 정치범들이 수용되다보니 보안시설이 철저했다. 담장 위에 철조망이 처져 있고 감시탑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A동에서 B동으로 가는 데는 중간에 커다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는 안마당이 있었다. 평소 작업장으로 쓰이는 안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영웅 안내자’ 벤자민이 잠시 멈추더니 상념에 젖는다.


벤자민이 멈춰선 교도소 안마당 담벼락 쪽에는 3개의 사진 판자가 세워져 있었다. 맨 왼쪽의 사진은 옛 정치범들이 민주화 이후 로벤 아일랜드를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이고, 가운데 사진은 정치범들이 안마당에서 돌을 망치로 때려서 자갈로 만드는 모습(앞쪽)과 우편자루를 실로 꿰매어 만드는 노역장면(뒤쪽), 오른쪽의 사진은 넬슨 만델라와 그의 정치적 동지로 같이 투옥된 월터 시술루가 노역중 이야기 하는 1966년의 사진이다. 월터 시술루는 백인 아버지와 코사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만델라와 함께 종신형을 선고받고 로벤 아일랜드에 복역했고, 아프리카민족회의 부의장을 역임했다.


사진 앞에서 회상에 젖은 벤자민은 당시 수감생활에 대해 설명했다. “공부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았고, 땡볕 아래 이곳 안마당 땅바닥으로 끌려나와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을  망치로 깨 자갈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안마당을 가로질러 가자 B동의 입구에는 “B-섹시에(SEKSIE)”라는 글자와 두 개의 열쇠가 십자형으로 교차해 그려져 있고, 위에는 정의의 저울이 그려져 있다. 섹시에는 아프리칸스어로 ‘구역’을 말하는데 영어의 섹션(Section)이다. ‘정의의 저울’ 그림을 보니 아파르트헤이트가 정의에 부합한 정책인지 부끄러울 따름이다.


B동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수용실이 있었는데 만델라가 수감되어 있던 방은 오른쪽 3번째 방이었다. 영웅의 수용실은 평범했다. 수용실이 한 인간을 영웅으로 만든 것이지, 수용실이 영웅일 수는 없다. 특별한 표시 없이 만델라 방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1.5㎡ 크기의 시멘트건물에 철창문으로 되어 있다. 철창문에 이어 이중 나무문으로 닫을 수 있게 특별 보안장치를 해 놓았다.


작은 방에는 담요와 사이잘로 만든 매트, 모직깔개, 작은 나무탁자와 철판 식기, 붉은색의 덮개 있는 변기통이 있고, 3개의 작은 철판 사물함이 벽에 붙어 있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얇은 매트와 깔개를 깔고 담요를 덮고 자야 했는데, 모직깔개에는 “슈퍼 심바”의 회사상표와 사자 그림이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만델라는 이 교도소에서만 1964년부터 1982년까지 18년을 산 뒤 케이프타운 근처의 교도소로 이감되었다가 1990년 석방되어 마침내 자유를 찾게 된다. 전 세계에서 온 여행객들은 모두 만델라 수용실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20세기 최고의 영웅 이전에 만델라라는 한 인간에게 빚지지 않은 세계인이 누가 있으랴.


  
만델라가 수감되었던 수용실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체 게바라가 수감 중인 만델라에게 전한 편지
 
최하위 대우이자 가장 요주의 인물인 D급 죄수 만델라에게 주어진 자유는 6개월마다 허용된 한 명의 면회객과 한 통의 편지였다. 1965년 말  어느 날 당시 부인 위니 만델라가 방문해 만델라에게 전달한 편지는 뜻밖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체 게바라의 편지였을 테니까. 콩고민주공화국의 탕가니카 호수 근처 키부 주에서 게릴라활동을 벌이고 있던 체 게바라는 1965년 8월 탄자니아쪽 탕가니카 호수로 건너와 남아공에서 달려온 위니 만델라를 비밀리에 만났다. 게바라는 자신이 쓴 편지를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에 있는 만델라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1963년 넬슨 만델라의 네 시간에 걸친 인종차별 정책 비난 연설에 감명 받았던 체 게바라는 1964년 12월 쿠바 대표로서 뉴욕 유엔본부 연설을 통해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제국주의적 차별정책이라며 강하게 규탄했다. 어떤 제국주의적 억압과 인간 차별에도 저항했던 체 게바라가 넬슨 만델라에 동지의식과 연대감을 느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영국 전 수상 마가레트 대처와 현 미국 부통령 딕 체니는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유대인 출신의 딕 체니는 1986년 공화당 하원의원 시절 만델라의 석방을 촉구하는 하원 결의안에 반대 투표했는데, 아버지 H. W. 부시 대통령 때 국방장관에 이어 아들 W. 부시 정부에서는 부통령에 올랐다. 군사력에 의한 미국 주도의 세계재편을 꾀하며 이라크 침공과 대북한 강경정책,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중동사태의 격화 등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는 신보수주의자 네오콘의 핵심인물이다.


  
만델라가 수감되었던 수용실 안 모습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만델라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만델라는 두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 번은 27년간이란 긴 세월 동안 투옥에도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향한 머나먼 길에서 결코 타협하거나 변절하지 않는 투철한 신념을 보여주었다.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랜 투옥에서 석방되어 세계인들 앞에서 선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만델라의 모습이었다.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나 특별한 인종차별을 느끼지 못했던 만델라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운동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이스턴 케이프 주의 포트헤어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포트헤어 대학은 흑인대학으로 만델라뿐 아니라 올리버 탐보와 고반 음베키, 로버트 소부크웨 등 남아공의 쟁쟁한 인권투사, 그리고 짐바브웨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와 허버트 치테포 등의 해방투사들을 배출한다.

  

44세에 종신형을 선고 받고 27년의 세월이 흘러 반백의 72세의 나이에 자유를 찾은 만델라는 화해와 용서의 세계 지도자로 우뚝 선다. 로벤 아일랜드의 작은 수용실에서 신념과 용서의 정신을 배웠던 것이다. 만델라는 석방된 뒤 당시 백인정권의 프레데릭 드 클레르크 대통령과 평화적인 민주화 이행에 대한 합의를 통해 350여 년에 걸친 인종차별을 종식시킨다.


민주화 이후 남아공 최초의 대통령에 올라 흑백화해와 공존의 틀을 마련한 뒤 5년 임기를 마치고 1999년 타보 음베키에게 정권을 넘기고 권좌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만델라는 대통령 재임 중에도 서방 선진국의 부당한 압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노(No)”라고 말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7년 리비아를 방문해 무아마르 카다피 대통령을 만나 비행기 폭파혐의자에 대한 제3국에서의 재판이라는 평화적 타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되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을 추구하는 데서 만델라의 진정한 힘이 나온다.


만델라는 복수에 눈이 먼 권력자가 아니라, 바티크 셔츠를 입은 금발의 인자한 지도자로 세계인에 나타났다. 베트남 지도자 호치민의 인민복처럼, 만델라가 입은 은회색의 얼룩무늬가 있는 바티크 셔츠는 ‘마디바 셔츠’로 부른다. 마디바는 코사족 추장들이 만델라를 부르는 애칭이다.


여전히 담장에 철조망이 쳐진, 지금은 남아공 정부에 의해 ‘자유의 기념관’으로 이름이 바뀐 B동 교도소 문을 나오자 교도소 입구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설치된 대포인 곡사포가 하늘을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다. 항구로 나오는 길옆의 나무숲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던 토끼 한 마리가 나를 힐끗 쳐다보다 숲으로 달아난다. 로벤 아일랜드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억압의 장소에서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평화의 섬으로 바뀌어 있었다.


로벤 아일랜드 항구 근처의 기념품 가게에 들러 나는 만델라의 수인번호인 ‘466/64’가 찍힌 검은색 티셔츠와 독일의 역사학자인 알브레히트 하게만이 쓴 영문 문고판 <넬슨 만델라 평전>(1996·폰테인출판사·남아공)을 샀다.
 
알브레히트 하게만은 <넬슨 만델라 평전>에서 만델라의 성공 비결은 한마디로 “화해자로서의 대통령”에서 찾고 있었다. 흑백 갈등뿐 아니라 부족간 심각한 이해관계 속에서 만델라가 확고한 정치적 안정을 확립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서구 민주주의 의회제도의 원칙에 충실하고 정당정치의 존중, 헌법준수, 신중한 언행을 꼽았다. 넬슨 만델라의 남아공은 “아프리카의 어두운 미래상을 걷어버리고 발전의 희망을 보여주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만델라가 수감되었던 B동 교도소의 철조망 담장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만델라와 투투가 만나 '무지개 나라'가 되다


“흑인과 백인 모두가 가슴 속에 어떤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무지개 나라를 만들겠다”는 만델라의 꿈은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를 만나면서 현실이 되었다. 민주화 이후 흑백이 공존하는 남아공을 상징하는 말이 된 “무지개 나라”는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으로 역시 노벨평화상을 받고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나는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하기 위해 방문했던 잠비아 리빙스턴의 폴티 타워 숙소에서 남아공 여행사의 안내책자를 보았는데, 겉표지에 투투 대주교의 ‘무지개 나라’를 인용하고 있었다. 나는 투투 대주교의 이 말을 여행 노트에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한 편의 시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구름 위를 걷고 있다.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믿을 수 없이 황홀한 느낌으로. 우리 남아공은 세계의 무지개 국민(Rainbow people)이 될 것이다.”


인종차별정책이 폐지된 뒤 투투 대주교는 1994년 남아공이 나아갈 길을 이렇게 말했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오른 뒤 1996년 설치된 ‘진실화해위원회’의 위원장이 된 투투 대주교는 “고백 없이 용서 없고, 용서 없이 미래 없다”며 흑인과 백인 모두를 설득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자행된 국가의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진실은 밝히되 처벌하지 말자는 뜻이다.


평소 “백인의 독재도 흑인의 독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만델라의 생각과 같았다. 만델라와 투투의 ‘용서와 화해’ 정신은 350년간에 걸친 인종차별을 끝내고 남아공을 다민족 다문화의 무지개 나라로 가는 터전을 마련했다. 두 사람은 ‘용서보다 더 큰 힘은 없다’는 진리를 보여줬다.


투투 대주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권유린을 “또 다른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라고 비판하고,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를 “아프리카 독재자의 캐리커처”라며 짐바브웨의 인권침해를 비난한다.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여러 정치세력과 부족 갈등으로 인권유린이 자행됐던 다른 아프리카국가에도 하나의 모범이 되고 있다. 2006년 1월 아프리카 사상 첫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된 라이베리아의 엘렌 존슨 서리프는 ‘라이베리아판 진실화해위원회’를 발족시켜, 지난 1979년 발생한 내전으로 인한 인권유린 행위 등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고 화해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흑인이 압도적 다수이면서 백인과 혼혈인, 아시아인뿐 아니라 공용어만 11개로 많은 부족들이 어울려 사는 남아공의 미래는 공존 속의 화합을 추구하는 ‘무지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다. 일곱 색깔 무지개가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모아져 아름다운 무지갯빛으로 나타나듯이, 여러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면서 하나의 남아공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남아공의 국가 구호인 “다양성의 통일(Unity in Diversity)”은 바로 ‘무지개 나라’와 너무나 어울리는 말이다. 민주화 이후 새로 채택된 남아공 국기도 6가지 색을 사용했으나 여러 색의 조화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무지개 국기’라고 부른다.


  
로벤 아일랜드 교도소 행정빌딩과 곡사포
ⓒ 김성호
로벤 아일랜드

다민족 다문화로 가는 만델라 정신


로벤 아일랜드에 갔다 오면서 만델라의 정신을 다시 새겨본다. 왜 만델라는 남아공뿐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 나아가 전 세계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가. 똑같은 백인정권 아래서 인종차별을 받고 독립했으나 정치적 독재와 국제적 비판을 받고 있는 짐바브웨의 무가베와 비교된다.


물론, 남아공은 아직도 흑백간 빈부격차 등 실질적 평등을 위한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나, 정치적 안정을 통해 점진적인 경제적 평등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경제적 평등이란 백인을 내쫓는다고 하루아침에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델라는 깨달았다. 무가베는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흑백갈등을 교묘히 역이용했다. 만델라는 자신의 권력보다는 헌법에 따른 민주주의 통치와 원칙에 충실했고, 무가베는 민주주의 원칙보다는 권력의 유혹에 넘어갔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이동의 역사고, 이주의 역사였다. 지금도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문이 활짝 열리고, 이민 행렬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수많은 국민들이 미국과 유럽으로 이민가고, 거꾸로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이민을 오고 있다. 세계는 이미 다민족 다문화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지구상에 원주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먼저 살아온 선주민만이 있을 뿐이다. 먼저 정착한 선주민은 뒤에 오는 이주민에게 문을 열어 줘야 하고, 이주민은 선주민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화합과 공존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추구했던 길은 선주민과의 공존이 아니라, 선주민인 흑인을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적 이주였다. 유럽의 백인들이 북미와 남미, 호주대륙에서 저질렀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프리카도 이제는 예외가 아니다. 선주민인 다수의 흑인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치사회적 주권을 행사하면서 다른 인종이 공존할 수 있는 자리는 마련해줘야 한다. 설령 경제적 차이가 인종간에 존재하더라도 장기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사항이지, 그것이 결코 백인을 축출하는 ‘역인종 배척’의 사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남아공의 만델라는 옳았고, 짐바브웨의 무가베는 틀렸다. 만델라는 흑인의 주도 아래 백인과의 공존을 모색했고, 무가베는 백인의 축출로 모든 아프리카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만델라는 인류의 역사를 공존으로 보았고, 무가베는 배척으로 보았다. 만델라 쪽에는 탄자니아의 니에레레와 모잠비크 사모라 마셸이 있었고, 무가베 쪽에는 우간다의 이디 아민과 말라위의 하스팅스 반다가 있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는 지금 세계화에 발맞춰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있다. 내가 여행을 하면서 보았던 에티오피아와 우간다, 르완다, 탄자니아, 모잠비크, 보츠와나 등이 그렇다. 이들 국가들은 모두 최근 10년간(1996~2005년)의 경제성장률이 5.0% 이상으로 전 세계 평균인 3.2%를 웃돌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외국인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와 안정이 이뤄지고 있다. 짐바브웨만이 무가베의 잘못된 노선으로 살인적인 인플레와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는 등 경제가 사실상 파탄 났다.

-오마이뉴스 김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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