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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아/ㅏ 2007. 3. 15. 09:18 Posted by 로드365


[나는 전설이다] 광기의 시네아스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가 묵고 있는 호텔 27층까지 올라가는 중이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이 자꾸 눈앞에 겹쳐진다. 문득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홀리 마운틴>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예수를 닮은 주인공이 도심 한가운데 솟아 있는 정체불명의 탑을 발견한다. 그는 큰 재물을 뺏을 요량으로 가느다란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탑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구멍까지 위태롭게 기어올라간다. 가까스로 구멍에 닿아 안쪽을 바라보니 길고 긴 통로가 뻗어 있고, 그 통로 끝에는 기하학적 모양의 방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방 한가운데 앉아 있던 연금술사는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천천히 일어서 환영하다가, 박진감 넘치는 동작으로 그를 바닥에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투명한 요강에 주인공의 배설물을 받아 금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영화 속 연금술사를 연기한 건 조도로프스키 자신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클럽라운지의 두터운 문을 열었다. 적막으로 뭉쳐진 찰나의 순간. 연금술사, 아니 조도로프스키가 거기 있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누인 채 턱을 괴고 있다. 바짝 긴장했다. 가공할 동양 무술로 귀찮은 불청객을 패대기치듯 내쫓거나, 금으로 만들어줄 테니 요 앞에 똥을 누라고 하면 어쩌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점심에 뭘 먹었는지 기억해내려 애쓰고 있는데 조도로프스키가 뭔가를 불쑥 내민다. 드디어 투명한 요강인가! 싶어 소름이 다 돋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악수를 나눴다. 일흔아홉 살 먹은 광기의 시네아스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아이처럼 방긋, 웃었다.



<판도와 리스>에서 <엘 토포>까지


한때 그의 영화를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앉아 지글지글 조악한 화질의 불법복제 비디오로 한두 번 감상해보지 않은 영화광이 어디 있을까. 혹은 '이것이 컬트다!'라는 대문짝만 한 카피가 찍혀 있던 <성스러운 피>(1989)의 국내 개봉 포스터라도 기억날 만하다. 영화광들의 무의식 속에 흐릿한 듯 어렴풋하지만 동시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영화작업은 예기치 못한 계기로 시작됐다.


1962년 조도로프스키는 페르난도 아라발(전위 연극의 기수, 대표작 <건축가와 아시리아의 황제>), 롤랑 토포르(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션 감독, 대표작 <판타스틱 플래닛>)와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인 ‘파닉 무브망(panic movement)'을 주창한다. 이들은 여러 가지 해프닝과 전위 연극,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많은 화제를 낳았다. 1968년 조도로프스키는 우연히 꽤 넉넉한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투자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 돈을 가지고 장편영화를 찍어보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이미 1957년 프랑스에서 단편영화를 연출하면서 영화라는 매체의 힘과 미덕에 매료된 바 있는 조도로프스키는 “영화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사심이 없는 복합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동료인 아라발의 1958년도 연극 ’판도와 리스‘를 영화화하기로 마음먹고 작업에 착수했다. 홀로 흐느끼는 리스를 가운데 두고 저 멀리 나선형의 절벽을 따라 올라가는 판도. 그 모습을 좇으며 끊임없이 회전하는 카메라의 유려함은 이 초짜 감독의 미학적 가능성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판도와 리스 커플이 ’타르‘라는 이름의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추적하는 <판도와 리스>는 파격적인 몇몇 장면들(특히 임신한 여성이 돼지새끼를 낳는) 탓에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영화가 처음 상영된 멕시코 아카풀코영화제에선 성난 관중들이 조도로프스키를 향해 돌을 던지고 야유를 하며 주먹을 내질렀다. 심지어 멕시코 정부까지 나서서 상영 금지시킬 정도로 파장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조도로프스키의 야심찬 행보는 이제 막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70년, 그는 <엘 토포>를 선보인다.


<엘 토포>는 '컬트영화의 최고봉'이라는 수사가 다소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명사가 된 경우다. <엘 토포>는, 그냥 <엘 토포>인 것이다. 조도로프스키가 직접 주인공 ‘엘 토포’를 연기하고, 그의 아들 브론티스 조도로프스키가 엘 토포의 어린 아들 역으로 출연한 이 영화는 서부극 <더 데이 오브 이블 건>(1968)의 버려진 세트 위에서 수일 만에 촬영됐다. 성서의 변용이자 재해석으로 종종 해석되는 <엘 토포>는 심야극장에서 장기 상영되면서 수많은 관객들을 매료시켰는데, 이 영화에 열광한 사람 중에는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도 끼어 있었다. 존 레논은 매니저 앨런 클라인에게 <엘 토포>의 판권을 사들이도록 주문했다. 이때의 인연을 토대로, 이후 조도로프스키가 만들게 될 모든 영화를 앨런 클라인이 제작하도록 하는 계약도 체결됐다.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지만 앨런 클라인의 존재감은 훗날 조도로프스키의 인생에 있어 두고두고 걸림돌이 되고 만다. 


누가 조도로프스키 영화의 불법 비디오를 퍼뜨렸나


‘파닉 무브망’의 이론을 <엘 토포>보다 더욱 극한까지 밀어붙인 <홀리 마운틴>(1973)의 연출 이후 조도로프스키는 앨런 클라인과의 갈등에 휩싸인다. 에로영화를 연출할 것을 종용한 앨런 클라인의 요구에 조도로프스키가 난색을 표하며 계약관계를 청산할 뜻을 비치자, 앨런 클라인이 “나와 더 이상 영화를 안 찍겠다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당신 영화를 볼 수 없게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은 것. 단순협박이 아니었다. 앨런 클라인은 두 영화의 상영을 철저히 막았다. 조도로프스키는 저 두 편의 영화로 거의 한 푼도 벌지 못했다.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도로프스키 본인에게 있는 VHS 비디오테이프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원하는 전세계 관객들에게 손수 뜬 비디오테이프를 보내줬다. 한국의 영화광들이 오래전에 봤던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 불법복제 테이프는, 놀랍게도 조도로프스키가 유포시킨 것이었다!


최대 난국은 따로 있었다. 1975년 조도로프스키는 프랭크 허버트의 SF걸작 ‘듄’을 영화화하는 원대한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아들 브론티스가 주인공 폴 아트레이드 역을 맡고 오손 웰스가 바론, 살바도르 달리가 황제, 믹 재거가 페이드 라우타, 알랭 들롱이 던칸, 제랄딘 채플린이 제시카를 연기하며, 댄 오배넌과 조도로프스키가 각본을 쓰고 핑크 플로이드, HR 기거, 장 지로(뫼비우스)가 스탭으로 참여하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초특급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조도로프스키의 <듄> 프로젝트는 어이없게 무산되고 만다. 모든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절대 영화화될 수 없다”며 시나리오를 거부했고, 이미 예정돼 있던 투자계획도 철회했기 때문이다. 이때 계획됐던 비주얼 이미지와 미술 세트들은 몇 년 후 HR. 기거와 장 지로가 참여한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에서 그대로 활용된다. 조도로프스키는 구상했던 바를 영화로 만들 수 없다면 책으로라도 구현해야겠다며 장 지로와 저 유명한 그래픽 노블 ‘잉칼-존 디풀의 모험’(1980)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마저 십수 년 뒤 뤽 베송의 <제5원소>에 의해 무단으로 표절되는 부침을 겪고 만다.


악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도에서 만든 <터스크>(1980)가 제작사의 도산으로 인해 조도로프스키가 원하는 대로 편집이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결국 엉뚱한 가족영화가 탄생했고, 조도로프스키는 여태 <터스크>를 본인이 만든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89년 공개된 <성스러운 피>는 조도로프스키의 건재를 알리는 동시에 비평적 대중적 호평을 동시에 받은 유일한 작품으로 기록됐다. 악셀, 브론티스, 테오, 에이단 등 4명의 아들을 전부 출연시키고 자신도 카메오로 등장한 <성스러운 피>는 서커스단에서 자란 소년이 유년 시절의 정신적 외상을 딛고 마더 콤플렉스를 이겨내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다. 조도로프스키의 그 어떤 영화보다 뚜렷한 서사와 장르적 묘사가 흘러넘쳐 보는 재미가 각별한 작품이었다. 오죽하면 한국까지 수입돼 개봉관에 걸렸을까.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이 수입한 것으로 알려진 <성스러운 피>는 무지막지한 검열의 가위질을 받고 30분가량 잘린 채 1994년 11월 개봉, 5일 만에 간판을 내린 바 있다.


1990년 오마 샤리프, 피터 오툴 등의 유명 배우와 투합해 만든 <무지개 도둑>은 조도로프스키의 할리우드 혐오증을 극단까지 끌어올렸다. 연출가의 요구를 따르지 않는 스타급 배우들의 엉뚱한 자존심과 할리우드 거대 자본의 간섭은 조도로프스키의 상상력을 거세시켜버렸다. 이후 조도로프스키는 앨런 클라인과의 판권 분쟁과 제작비 수급에 곤란을 호소하며 단 한 편의 영화도 만들지 못한다. 그의 평생 숙원이자 <엘 토포>의 속편 프로젝트인 <엘 토포의 아들>도 앨런 클라인의 ‘엘 토포’ 제목에 대한 권리 주장으로 인해 <엘 토로의 아들>로, 다시 <아벨카인>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예산 문제로 티저 포스터까지 나온 상태에서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영화란 신성한 것입니다


2002년 앨런 클라인과 조도로프스키 사이의 길고 지루한 판권 분쟁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방구석의 <엘 토포> 불법복제 비디오를 내다 버려도 좋다. 당장 15일부터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을 씨네큐브와 필름포럼에서 만날 수 있으며, 오는 5월에는 <판도와 리스>부터 <성스러운 피>까지를 한꺼번에 일별할 수 있는 ‘조도로프스키 컬렉션’이 앵커베이에서 발매된다. 격세지감이란 말은 이럴 때 딱 어울리는 것. 두 편 모두 불법복제 비디오로 본 것과는 다른 영화처럼 보인다.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의 개봉을 맞아 한국을 찾은 조도로프스키는 시차 적응에 실패했는지 꽤나 피곤해 보였다. 그와 대화한 내용의 전문을 싣는다.

감독님 영화에 직접 출연하시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1962년부터 1973년까지 초현실주의 운동인 ‘파닉 무브망’을 조직해 이끌었었죠. 거기서 세운 원칙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연출한 영화나 연극에 직접 출연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었어요. 나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까지 모아 출연시켰던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죠. 물론 출연료가 싸게 먹힌다는 장점도 있지만요.(웃음)


‘파닉 무브망’을 이끌면서 굳이 영화라는 매체를 끌어들인 이유가 있으셨나요? 그때는 이미 마임 연기나 전위 연극의 권위자이셨는데요.

당시에는 영화를 모든 매체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태의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산업적, 상업적 측면과 필수적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는 여타 예술 행위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는데, 영화야말로 그런 연관고리를 끊고 순수한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는 도구라고 믿었죠. 물론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면서 그런 믿음이 깨졌지만요.


감독님의 영화를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존 워터스의 영화와 간접적으로 비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특히 <싸이코>와 <성스러운 피>를요.

존 워터스의 영화는 제대로 본 게 없어요. 히치콕의 영화는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의 영화나 연출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에요. 제 생각에 영화는 관객에게 여러 가지 해석과 반응을 이끌어내야 하는데, 그의 영화는 한 가지 반응만을 기대하고 유도하거든요. 저와는 스타일이나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요.


“많은 감독들이 그들의 눈으로 영화를 만들지만, 나는 내 성기로 만든다”고 말하신 걸 들었는데요.

관객의 반응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순수하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한 겁니다. 관객들이 이 화면을 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미리 신경 쓰지 말자는 거죠. 너무 독단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국에는 저 같은 생각을 가진 감독이 없나요? (있지만 메인스트림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대답하자) 음, 그럴 거예요. 뭐, 어차피 난 유별난 변태니까요.(웃음)


신체를 변형하고 훼손할 때 나오는 힘으로 서사를 이끄는 다른 영화들의 경우와 달리, 감독님의 영화는 이미 변형된 신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열하는 데서 힘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장애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전 모든 신체를 아름답게 보는데요, 그렇게 ‘변형된 신체’라고 표현하신 그런 모습을 일반적인 신체보다 훨씬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이상한 게 아니라, 아름답고 색다르며 개성적인 것으로요. 변형된 신체나 신체를 일그러뜨리는 주제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두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말이 많은 사람들은 그런 묘사를 두고 정치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지적하기도 해요.

<홀리 마운틴>에서 사지가 없는 남자가 군인 복장을 하고 등장하는 대목을 예로 들어보죠. 그 장면에서 중요한 건 사지가 없는 난쟁이가 군복을 입었다는 문자적 사실이 아니라, 총체적인 의미의 이미지 자체에요. 정서의 흐름상 그 대목에서 그런 식의 이미지가 필요했던 거죠. 군인이 전쟁터에서 그렇게 다쳐 장애를 입은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판도와 리스>를 빼면 모든 작품의 음악을 직접 작곡하셨어요.

사실 <판도와 리스>도 제가 작곡했습니다. 만들어놓고 보니 너무 창피해서 가짜 이름을 달고 내보낸 거예요.(웃음) <엘 토포>나 <홀리 마운틴>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지금까지는 제대로 된 감상이 힘들었죠. 판권 문제 때문에 일체의 음반이나 DVD가 없었으니까요. 오는 5월이면 DVD와 음반이 모두 출시될 예정입니다.


<판도와 리스>가 처음 공개됐던 아카풀코영화제에서 큰 소동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런 영화가 처음이라 그랬는지, 관객들이 절 죽이려고 했어요. 돌도 던지고 욕도 하고 말이죠. 무서웠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싶어서 어둠을 틈타 리무진 밑에 기어들어가 한 시간 동안 숨어 있었어요.(웃음)


대부분의 영화들이 성서를 변용하거나 재해석하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영화는 뭔가 신성한 것과 결부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그야 영화 자체가 이미 신성한 예술이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제가 딱히 기독교 신자는 아니고요, 내가 동양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불교적인 세계관을 투영시켰겠죠.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단호합니다. 지상의 모든 제도화된 종교는 사악하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작비를 어떻게 충당하는 편이신가요?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죠. 도둑질 빼고 다 해봤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도둑질도 했습니다. 위조지폐를 발행해서 그걸 판 돈으로 영화를 만든 적도 있어요. 무슨 영화인지는 비밀이고요.(웃음) 위조수표업자, 강도들과 어울려 영화를 자주 찍었고, <성스러운 피>를 찍을 때는 강도들이 영화 기자재들을 보호해주기도 했어요.


존 레논이 <홀리 마운틴> 제작비를 백 퍼센트 지원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정작 감독님은 그 가운데 절반만 쓰신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 절반은 뭐에 쓰셨나요?(웃음)

잘 알고 계시네요. 백오십만 달러를 받아서 절반만 썼죠. 그런데 절반밖에 못 쓴 이유가 있어요. 배우 한 명이 제작비 절반을 들고 도망가버렸거든요. <엘 토포> 때 같이 일했던 실제 도둑들 가운데 하나였어요. <홀리 마운틴>에서 독재자로 출연하기도 했던 그 친구죠. 제가 범죄자들과 자주 어울려서 천벌을 받았나 봐요.(웃음)


뤽 베송이 ‘잉칼-존 디풀의 모험’을 베껴 <제5원소>를 만들었을 때 기분이 나쁘셨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소송을 한 것도 내가 아닌 출판사 편집장이고요. 그 소송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사람이 뭔가를 훔친다는 건, 그게 탐이 나고 욕심이 나고 좋아 보여서 가져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일종의 존경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앨런 클라인과의 판권 분쟁은 완전히 끝난 건가요?

거의 30년 동안 아예 등 돌리고 살았는데, 세월이 모든 걸 치유해주더군요. 이제 DVD도 나올 수 있게 되고 이렇게 한국에서 개봉도 할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에게 감사합니다.


<엘 토포>의 속편 프로젝트는 제작비 문제로 진행되지 못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당신같이 위대한 감독이 돈이 없어서 영화를 찍지 못한다는 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세상 구석구석 잘 알려져 있다고 한들, 영화산업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기획에만 자본을 투자합니다. 일단 마릴린 맨슨이 출연하기로 한 <킹 샷>을 스페인에서 먼저 찍을 거고요, 연말 정도면 <엘 토포의 아들>도 만들 수 있게 될 것 같아요. 정확히 밝힐 순 없지만, 희망이 보입니다. 앞으로는 테크닉도 많이 들어가고, 서사의 긴장감보다는 시각적인 경험이 주가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한국에 와서 경험한 가장 감격적인 대목으로,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풍경을 꼽았다. 자기 영화가 한국의 극장에서 상영되고, 자신이 쓴 대사가 한글로 번역돼 깔리고, 그걸 한국의 젊은 관객들이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가슴을 방망이질 쳤단다. 심장마비가 온 줄 알았다며 손사래를 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 분이 그 광기의 시네아스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조도로프스키의 영화는 시공을 초월해 당대 정치사회 현실과 꾸준히 융합되면서 새로운 경지의 담론과 해석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 모든 과정을 살아서 직접 목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거장의 모습이 문득 책 속의 삽화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전설이다. 허지웅


[필름2.0 3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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