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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진보적 자유주의자?

가/ㅗ 2007. 3. 13. 09:01 Posted by 로드365


저서




한국의 글쟁이들/(17)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

고종석(48)에게는 열성독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가 있다. 2004년 문을 열어 270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고종석 팬 카페(cafe.daum.net/kjsfreedom)’는 인문서 저자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인문서 저자의 팬 카페는 손으로 꼽을 수 있다. 16권에 이르는 그의 책의 평균 판매부수는 5천부 안팎, 신간을 무조건 구입하는 고정 독자는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즘 같아선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진입이 무난한 ‘엄청난’ 숫자다.

인문서 저자=지금까진 <코드 훔치기>(마음산책·2000)가 제일 많이 팔렸다. 고종석은 책을 곱게 만들어준 편집자와 이 책을 논술교재로 활용한 논술학원 강사에게 그 공을 돌린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것이 단지 ‘연줄’ 덕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겸손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과 책에 대한 독자의 호응을 ‘시장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다. 그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고종석은 출판계에서 “아주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통한다. 아름다움보다 정확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도의 정확성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한 학생 독자는 “고종석의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느낌, 시야가 넓어진다는 느낌”을 전한다. 고종석의 절친한 벗인 강금실 전법무장관은 그의 시집비평집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2006)에 대해 “고종석의 평론은 매우 균형잡힌 시각에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논평한다. 고종석의 글은 어느 대학 논술시험의 지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기자=고종석은 기자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초창기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한겨레> 재직시절, 기사문답지 않은 기사가 논란을 빚기도 하였으나, 기자의 문체가 살아있는 기사문의 이정표를 세운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주재기자 때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죽음을 색다르게 해석해 전달한다. “고갈된 일흔 살 삶을 스스로 끝장냄으로써, 그 자신이 곧잘 ‘철학적 일화’로써 거론하던 엠페도클레스의 전설적 자살이 있은 뒤 2천5백년 뒤에, 서양 철학사에 또 하나의 일화를 보탰다.” 그 후 ‘친정’인 한국일보사에 복귀하였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지금은 객원 논설위원으로 있다.

 
“모르겠어요. 기자가 되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 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모집공고 보고 시험 봐서 잡은 직장이거든요. 글쎄요.” 기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부족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1993)에 나오는 ‘기자숙명론’으로 채운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이지만 그 기록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남에 대한 기록이다. 남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자기가 엿본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광고충동, 그런 것들이 기자의 운명이 아닐까.”

소설가 장편 <기자들> 말고도 고종석은 단편소설집 <제망매>(문학동네·1997)와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2003)를 펴낸 바 있다. 소설은 왜 쓰게 됐나요? “기사가 사람 이야기를 그리긴 하지만 기사문의 언어는 그물코가 성긴 거죠. 빠져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어요. 기사에서 새나가는 부분, 사회가 옳다 그르다 결정해주는 그런 선악·미추에 잡히지 않는 어떤 개인적인 선악과 미추, 개인적인 가치와 진실들은 기사가 잡아낼 수 없어요. 소설의 언어는 좀 달라요. 기사의 언어보다는 소설의 언어가 촘촘하지 않겠나, 덜 빠져나가지 않겠나 싶어 시작했어요.” ‘내 소설의 근간은 현실’이라는 고종석의 지론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벽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고종석은 남의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어느 출판사 사장의 목격담이다. 어떤 소설가의 출판기념 모임에서 소설가가 자신이 펴낸 책을 고종석에게 주자, 그는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더란다. “고맙지만 나는 소설을 안 읽는다. 귀한 책 아끼기 위해서라도 다른 분께 주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 두 권에 수록된 작품들이 더 낫다는 나의 독후감을 밝혔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면 장편을 써야겠죠.”

언어학자

=이글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해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고종석이 말한 “영어공용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층간 영어능력의 격차를 줄이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한동안 나를 헛갈리게 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의 한 구절이다. 이글은 <감염된 언어>(개마고원·1999)에서 볼 수 있다.

절친한 벗 강금실도 애독자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

 아무튼 영어공용화의 긍정적 측면을 헤아리는 사람이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명료한 개념 정의와 개념의 결을 세심하게 구분한 사례는 근간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2006)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종석은 반미 친북 좌파가 고스란히 겹치는 것인지, 그 하나하나가 비난받을 일인지, 무엇보다 이런 딱지가 붙여진 이들이 정말로 반미 친북 좌파인지 되묻는다. “좌파는 친북보다도 훨씬 더 여러 겹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핵심은 흔히 ‘복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회연대를 조직하는 데 정부가 일정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는 세계관과 관련돼 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몇 해 전, 그가 엿본 출판사 편집자의 우직한 원칙주의가 빚어낸 엽기적 풍경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그가 읽던 고려시대 번역문집 문장 한가운데서 ‘미얀마제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마귀란 뜻의 당랑(螳螂)을 옮긴 ‘버마재비’를, ‘버마제비’의 오자로 예단한 교열자는 버마의 바뀐 나라이름에 맞춰 ‘미얀마제비’로 바로잡았던 것. 편집자가 ‘버마재비’의 어원이 ‘범(호랑이)의 아재비(아저씨)’라는 걸 알았더라도 수난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그의 판단에도 공감하지만, 이글의 결론은 더 공감한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번역자=고종석이 우리말로 옮긴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문학동네·1996)가 전부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에요. 문장 하나를 우리말로 만족스럽게 옮기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번역이야말로 제대로 한다면 뼈를 깎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영어나 스페인말이나 프랑스말이나 어설프게 읽을 줄은 아니까 주변에서 ‘너, 왜 번역 안 하느냐?’ 하는데, 저는 책 한 권 번역하려면 평생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번역은 일종의 평론인데 그렇게 하긴 정말 어렵죠.”

정치평론인=고종석은 정치현상을 보는 눈이 밝다.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머리말의 한마디는 그런 눈이 흐려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게 한다. 그마저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니. 2003년 1월 중순 발행된 <인물과사상 25>(개마고원)에 실린 글을 통해 내가 서둘러 은근한 기대조차 접는데 일조한 그가 아니던가. “우선 그의 지지자들부터,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그가 자신의 임기 중에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의 집권이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에 줄 긍정적 충격을 생각하면, 그 집권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업적, 그의 지지자들이 그와 더불어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이다.” 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에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혜안과 안목을 접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긴 줄었죠.”

대표작 네 권을 꼽는다면= “<기자들>은 첫 책이라서, <제망매>는 내가 소설가가 됐구나,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는 내가 저널리스트구나, <감염된 언어>는 내가 약간은 언어학도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했지요. 이 세 개가 제 정체성인데, 셋 다 얼치기이긴 하지만 이 책들에 기자로서, 소설가로서, 언어학도로서 정체성이 있는 같아요.” 그럼, 이 셋을 합치면 뭐가 될까요? 문화전달자가 어떨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뭔지는.”
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2007.3.8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위하여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진보주의자’…한국 지식계의 축복, 그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세상이 오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께 질문을 하나 드리겠다. 민주노동당(민노당)이 창당 기념일 행사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여론 형성에서 민노당의 발전과 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지식인에게 감사장을 수여한다면, 1순위로 누구를 꼽겠는가?

가장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

나는 고종석이다. 고종석의 반열에 오를 만한 다른 지식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의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 고종석이 펴낸 <바리에떼: 문화와 정치의 주변 풍경>(개마고원)이라는 책을 읽기를 권한다. ‘사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고종석의 ‘복잡성’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니 무심코 읽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나는 자칭 ‘고종석 전문가’로서 그가 얼마나 ‘복잡한 사람’인지에 대해 이제부터 예비 지식을 드리고자 한다. 고종석에 대한 칭찬도 비판도 아니다. 담담하게 해부해보는 것이다.

고종석은 “개인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나는 진보 정당의 지지자가 아니다”(203쪽)라고 했다. 고종석은 진보주의자가 아닐뿐더러 집단주의를 혐오한다. 그는 “만국의 개인들이여, 흩어져라! 흩어져서 싸우라! 민족주의의 심장에, 모든 집단주의의 급소에 개인주의의 바이러스를 뿌려라!”(30쪽)라고 선동적인 개인주의 선언을 한 바 있다. 고종석이 낙관적 열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는 염세주의자에 가깝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탐욕과 포악과 비굴에서 사람에게 맞설 만한 동물이 있을지 모르겠다”(291쪽)고 털어놓았다.

이 정도면, 고종석을 잘 모르는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런 사람에게 왜 민노당이 감사장을 줘야 한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고종석만큼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를 역설한 지식인은 찾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이다.

민노당 당원이거나 당원은 아니더라도 민노당 색깔을 가진 진보적 지식인들은 평소 글쓰기 활동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민노당 당원들도 잘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로 논문식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다수다. 대중적인 글을 쓰는 지식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보수(자유주의 포함) 정당 비판에만 몰두한다. 보수 정당 비판이 곧 민노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충분히 입증된 것 같은데도, 이들은 왜 민노당을 지지해야 하는지 겸손하고 간곡한 자세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보수 정당 지지자들에 대한 호통, 야유, 조롱이 주요 메뉴다. 비극은 많은 민노당 당원들이 그걸 말리면서 “손님 쫓아내지 말라”고 고언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고 속 시원해라” 하면서 즐긴다는 사실이다.

호통, 야유, 조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차분하고 정중한 설득보다는 그게 더 필요할 때도 있고 효과를 낼 때도 있다. 문제는 시종일관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다. 나를 위한 진보인가, 민중을 위한 진보인가?

고종석은 시종일관 겸손하게 민노당 지지를 설득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극우 편향을 개탄하면서 ‘이념적 정상화’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이 민노당에 표를 던져야 한다고 타이르고 호소한다. 이 책에도 그런 호소가 나와 있지만, 고종석이 정치를 주제로 쓴 많은 글엔 명시적·암묵적인 민노당 선전이 들어 있다.

고종석이 묘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한국 사회의 야만에 대해 그 어떤 진보주의자보다 더 진보적 의분을 표출해왔으면서도, 자신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딱 잡아떼니 말이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고종석의 소설집 <제망매>에 쓴 발문에서 고종석의 묘한 이념 지향성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

“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었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더 우파적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고종석은 한국형 진보주의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진보 세력이 ‘고종석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선 큰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 시험의 이름은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관계 정립 문제다.

개인주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도 개인주의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해 유보적 자세를 취하곤 했다. 예컨대, 미국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사회주의에 공감했지만 사회주의가 개인과 천재에 반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개인뿐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런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1년에 낸 <인간의 영혼과 사회주의>에서 “우리가 사회주의를 통해 이르고자 하는 것이 개인주의”라고 주장했으며, 조레스는 1898년에 낸 <사회주의와 자유>에서 “사회주의는 완전하고 논리적인 개인주의”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를 개인주의의 논리적 완성으로 보았으며, 빅토르 바슈는 1904년에 낸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에서 “일관성 있는 개인주의는 사회주의로 귀결된다”고 주장했다.(알랭 로랑의 <개인주의의 역사>)

△ 고종석은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주노동당 지지를 제시했다. 2003년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개최된 열린우리당 창당대회.(사진 / 한겨레 김정효 기자)

한국에서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주의’를 시사한 이는 한양대 교수 임지현이다. 그는 “낡은 전통에 가위 눌려 있는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를 거친 사회에서만 건설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회한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 것일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론 없이 곧장 실천으로 들어간 대표적 인물이 바로 고종석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종석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 가운데 사회주의자는 얼마나 되겠는가? 고종석은 진보주의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고종석은 한사코 자신이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가? 개인주의와 진보주의가 양립하지 못하는 한국의 진보주의 풍토를 정면 돌파할 뜻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그게 고종석의 개인주의가 요구하는 ‘책임 윤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책임 윤리가 박약한 편이다. 책임 윤리란 어떤 일을 할 때 나타난 결과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윤리의식을 말한다. 옳은 일이니까 결과에 개의치 않고 무조건 밀어붙인다는 진보주의는 책임 윤리가 없는 모험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에선 곧잘 모험주의가 진보주의로 통용되기도 한다. 독재정권 시절에 형성된 습속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지속된 탓이다.

이념을 떠나 일상의 차원에서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공직을 맡는 걸 두려워한다. 책임 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공직자,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책임 윤리 부재 또는 박약을 들겠다. 대부분 고위 공직을 출세로 생각한다. 그건 ‘출세’가 아니라 ‘봉사’하는 거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봉사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하고 남이 자신보다 좋은 봉사 기회를 갖게 되면 배 아파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단 말인가?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함부로 공적 단체를 만들지도 않는다. 공공의 목적을 위한 단체면 성공 가능성을 검토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만들고 보는 게 우리 시민사회의 풍토다. 하다 안 되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책임? 공익을 위한 이타적 활동에 무슨 책임? 책임 윤리가 강한 사람은 이타성을 면죄부로 내세우는 그런 반문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책임 윤리 유전자를 가진 고종석이 영원히 공직을 맡거나 상시적인 공적 단체를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물론 아닐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여태까지 내가 분석해온 고종석은 그렇다는 것이다.

선뜻 “나 진보요!”라고 하지 않는 이유

고종석은 진보마저도 책임 윤리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뜻 “나 진보요!”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진보를 고위 공직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백철의 평가를 다시 읽어보라. 가슴에 와 닿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고종석은 과격한 개인주의 선언을 하였지만, 나는 실천에선 내가 고종석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내가 이기주의에 더 충실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 12월 나는 고종석과 민주당 분당 문제로 논쟁을 한 바 있다. 이와 관련된 글이 <바리에떼>에 실려 있으므로, 이 이야기를 좀 해보자.

민주당 분당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선 나와 그의 생각은 같았지만, 전체 또는 집단을 생각한다는 점에선 고종석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고종석은 “가난한 부모가 창피하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세상에서 따돌림당하는 자식을 거두어 보살피는 어미의 심정으로 호남 유권자들은 신당을 감싸야 한다”(187쪽)는 주장을 폈다.

나는 이런 ‘부모·자식·어미’론이 부적절한 유추라고 생각한다. 고종석이 ‘참여정부의 파산’을 염려해 열린우리당 지지를 역설하고, 다른 대안으로 민노당 지지를 제시한 건 나로 하여금 “이 양반 개인주의자 맞나?”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고종석은 나의 주장이 ‘민주당 지지’를 ‘암시’한다고 해석했지만, 나는 “이 양반 진짜 개인주의자 맞나?” 하는 생각을 했다. 혹 ‘대안 중독증’이나 ‘독수리 5형제 신드롬’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노무현의 해체주의는 ‘창조적 파괴’라고 예찬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그건 노무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말이냐고 내심 쏴붙였다.

나는 열린우리당은 내가 반대한 정당이므로 열린우리당이 파산하건 말건 아무런 책임 의식이 없는 반면, 고종석은 대선에서의 투표에 대한 책임을 말하면서 노 정권에 대한 책임 윤리마저 역설하는 게 아닌가! 고종석이 자유주의자요, 개인주의자라고?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노무현은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민의를 폄하하면서 결과야 어떻게 되든 모험주의라고 불러주기조차 어려운 도박주의로 치달리는데도 고종석은 그런 노무현까지 어미의 마음으로 껴안자고 역설했으니, 나로선 “오지랖도 참 넓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종석은 “노무현이 아무리 나빠도 최병렬이나 이회창보다는 수백 배 덜 나쁘고, 전두환보다는 수만 배 덜 나쁘다”(199쪽)는 논리를 내세워 특검법 통과에 한나라당과 공조한 민주당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나는 여기서 고종석의 평소 ‘쿨함’이 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이는 그가 ‘개인’보다는 집단적 ‘대의’를 앞세운 탓이리라.

나도 평소 대안을 어지간히 강조하는 편이지만, 잘못된 것을 비판함에 있어서 늘 그 결과와 대안까지 미리 생각하고 비판에 임하진 않는다. 그런데 고종석은, 비록 그가 ‘국가’와 ‘민족’이라는 단어를 혐오할망정, 사실상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는 지극한 애국심을 발휘했으니 이 어인 일인가.

<바리에떼>엔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 대한 성실한 반론이 실려 있다. 87쪽에서 137쪽에 이르는 긴 글이다. 고종석 스스로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 이상이다. 최근 홍수처럼 쏟아져나오고 있는 식민지 시절에 대한 모든 논란에 대해 명쾌한 교통정리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종석은 복거일을 내내 비판하지만 그의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하다. 나는 복거일에 대한 과분한 대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거일은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이며,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니 보수주의니 하는 건 편의적으로 동원되는 것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나는 고종석이 복거일의 자기 교정 가능성에 대해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건 자신이 복거일로부터 배운 점이 있다는 것에 대한 책임 윤리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자에게

고종석과 같은 희귀한 지식인이 있다는 건 한국 지식계의 축복이지만, 내가 정작 높이 평가하는 그의 미덕은 매사를 깊이 꿰뚫어보는 시력이다. 내 기준으론 보아선 과도할망정 고종석의 엄격한 책임 윤리가 곳곳에 스며드는 그런 세상이 되면 좋겠다. 물질적으론 낮은 곳에 있을망정 정신적으론 높은 곳에 서서 진보 아닌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부 진보주의가 고종석형 진보주의로 교체되는 그런 세상은 언제 올 것인가?


‘거리두기 실패’는 양이 아닌 질

646호 성한용 선임기자의 반론에 부쳐

<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의 반론에 감사드린다. 나는 성 선임기자가 노무현 정권을 비판한 칼럼·기사들이 많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성 선임기자는 “강 교수가 이런 칼럼이나 기사를 혹시 일부러 외면한 것이라면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반은 인정한다. ‘일부러’의 의미가 이중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제기했던 문제는 ‘거리두기’의 양보다는 질이었기에, 성 선임기자가 노 정권을 비판한 칼럼·기사들이 많이 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집중적으로 문제 삼은 노 정권의 ‘남 탓’은 성 선임기자의 다른 칼럼·기사들의 비판 주제와는 다른 것이었으며, 이런 성격의 ‘거리두기’는 전체적 평균보다는 각 글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따라서 내가 문제 삼은 글들이 거리두기에 실패했다는 나의 비판은 유효하다고 본다.

그러나 내 글이 방금 설명한 원칙을 밝힘으로써 성 선임기자의 평소 저널리즘 활동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 오해할 소지를 차단해야 할 노력을 하지 않은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 점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했더라면 훨씬 더 설득력이 높은 글이 되었으리라 믿기에 나도 아쉽다.

<한겨레>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계량화된 수치를 내놓을 순 없지만, 적어도 정치적 논조에선 나는 성 선임기자가 <한겨레>의 대표 필진급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뒷받침할 나름의 근거가 있다. 사실 이런 문제 제기를 염두에 두고 <한겨레>의 사설 분석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성 선임기자의 반론처럼 양의 균형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어 좀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노 정권의 집요한 ‘언론 탓’과 나 같은 사람의 시비 사이에서 시달리는 성 선임기자의 노고에 위로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인터뷰]'자유주의자 고종석을 만났다' 
현재 한국일보에서 '고종석의 글과 책', '오늘 속으로'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고종석 편집위원을 8일 오후 한국일보 근처에 있는 까페 FLOEM에서 만났다.

소설가, 에세이스트,언어학자,저널리스트,언론인 등 글쓰기에 있어서 여러가지 직함을 가진 고종석 편집위원은 '흠잡을데 없는 문장력을 지닌 스타일리스트, 그의 문장은 완벽한 예술품이다'라는 평가와 함께 '주장의 강약이 잘 드러나지 않아 답답하다. 유럽풍의 문장이라 우리 정서에 맞지 않다'는 일부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고종석씨는 이에 대해 "주장이 약하게 읽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서 옳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 고민의 흔적들이 문장 구석구석에서 되살아나 설득력을 더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진중권씨는 '폭력과 상스러움'이라는 책을 통해 우리나라 지식인 중 유일한 '자유주의자'는 고종석 뿐이라고 했고, 문학평론가인 연세대 국문과 김철 교수는 고종석씨에 대해 "그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안쓰러운 애정은 아둔한 비평가의 눈에도 한눈에 보였다.그는 우리나라의 어떤 좌파들보다도 더 좌파적이었고, 어떤 우파들보다도 우파적이었다. 인간과 세상의 진보를 아니 진보의 험난한 좌절들을 진실로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는 충실한 좌파였고, 많은 좌파들을 부끄럽게 만들 줄 안다는 의미에서 또한 충실한 우파였다"고 평했다.

흑백으로 구분되는 시대에 그의 조심스러움과 고민은 자칫 회색으로 매도될 수도 있지만,그는 좌파, 우파 모두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다.

저서로는 기자들(소설), 고종석의 유럽통신(에세이),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에세이), 책읽기, 책일기(에세이), 제망매(소설), 7일간의 영어여행(에세이), 감염된 언어(에세이), 언문세설(에세이), 국어의 풍경들(에세이), 코드훔치기(에세이)가 있다.

다음은 고종석 편집위원과의 일문일답이다.

-지승호 - 진중권씨가 '유일한 자유주의자는 고종석 뿐'이라고 했는데,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개념이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복거일씨나 유시민씨의 자유주의와 본인의 자유주의는 어떻게 다르다고 보십니까?

=고종석 - 복거일씨의 경우 래디컬 리버럴리즘 또는 리버태리어니즘(Libertarianism), 근본적 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정부주의에 가까울만큼 국가나 사회에서 개인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구요. 저는 미국의 민주당 노선이나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노선 정도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유시민씨는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고 봅니다. 사람들이 하도 자유주의하니까 귀찮아서 그렇다고 말해버리는 것 같은데요.(웃음)

-지승호 - "윤리는 선에 대한 욕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다. 선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은 악을 감소시키려는 노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라고 하셨는데요. 이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고종석 - 제가 좀 비관주의자입니다(웃음) 인간의 내부에 악한 심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거죠. 과학적 사회주의 등등 인간이 이상적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열망을 가지고 급격한 변화를 실천하려할때는 부작용이 생긴다고 봅니다. 레닌 역시 좋은 뜻으로 혁명을 했겠지만, 소련이라는 사회에 강제노동수용소를 만드는 등 자유는 자유대로 빼앗고, 복지도 서유럽 등의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더 낫지도 않았습니다. 욕심을 줄이자는 거죠. 좋은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보다 나쁜 일을 안하도록, 줄이도록 하자. 뭐 그런겁니다.

-지승호 - "한국인의 복잡한 경어체계와 한국 사회의 비민주적 특성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이 있을 수가 있다"고 하셨는데요. 젊은층에서 사용하는 통신언어에 대해 일부 기성세대는 '국어를 파괴한다'고 하는데요.

=고종석 -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사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지승호 - 저도 통신을 꽤 했지만, 한동안 유행했던 소위 '지랄체'의 경우 알아보기 힘들던데요. 그것이 비민주적 특성을 깨기 위한 무의식적인 시도라고 볼 수 있을까요?

=고종석 - 규범을 언중에게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 체계 아닐까요? 그런 언어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보편화되면 국어사전에도 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일종의 사회적 방언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방언이라고 해서 인위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없애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지승호 - "복잡한 경어체계를 지닌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루는데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을 지닌 셈이다"라고도 하셨는데요.

=고종석 - 아무래도 그렇겠죠. 한국어의 특성상 위계를 정하지 않으면 한마디도 할 수 없습니다. 말하는데 있어서 위계가 정해져 버리거든요.

-지승호 - '존칭 인플레이션'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도 없는 것 같은데요.

=고종석 - 불리한 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고 반말쓰기 운동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젊은 층에서 반말은 늘어나고 있죠. 언어라는 것은 '반말이 늘어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막을 필요는 없지만, '반말쓰기'를 강요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 혁명후 '반말쓰기'를 강제한 적이 있습니다. 몇년가다가 말았죠. 민주화가 진척되면 반말이 늘 것입니다. 사회와 언어가 있으면 사회가 먼저인거죠.

-지승호 - '언어의 개선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은데요. 제대로 된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겨레 신문 같은 경우 '페널티킥'을 '벌칙차기'라고 하는 등 용어를 한국어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요.

=고종석 - 그 분들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런 것들이 효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16~17세기 독일에서 라틴어를 쓰지 말자고 했지만, 당시에 효과가 없었구요. 북한의 경우에도 어휘정리, 말다듬기 운동을 했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문서를 보면 한자말 투성이거든요.

-지승호 - "미래에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제어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과학전문가들은 자신들이 직업적으로 의존하는 기관들의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의견을 내놓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미국의 경우 군산복합체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군수업체 이사가 국방부장관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 대해 "테크놀러지 없는 사회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적절히 제어된 테크놀러지"라고 쓰신 걸 봤습니다. 우리가 테크놀러지의 무서운 질주를 어떻게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을까요?

=고종석 - 소설가 프랑수아 라블레는 1532년 쓴 소설 '팡타그뤼엘'에서 '자각없는 앎은 정신의 폐허'라는 말로 과학이 윤리에 의해 적절히 제어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명백히 했습니다. 하지만 그시절의 과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날 과학은 인류를 수십번 몰살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과학이 윤리에 의해 적절히 규제돼야 한다는 주장에 원론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때 대처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시민운동 뿐인데, 시민운동이 자본과 정치권력에 힘을 보여줘야 하고, 과학자 개인개인의 양식에 호소하는 수 밖에 없는데, 사실은 무력한 대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승호 - "민족주의는 역사를 통해서 대체로 이성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것은 낭만주의로 시작해서 전체주의로 끝났다. 저항적 민족주의가 공격적 민족주의로 변하는 것은 순간이다. 그래서 민족주의에 대한 제어, 더 나아가 애국심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요. 이번 월드컵을 보시면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고종석 - 일부 신문에서 월드컵의 응원열기를 민족주의로 환원시키려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 6월의 함성이라면서 20년전의 광주나 6월 항쟁과 연관시키기도 했는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박노자씨 같은 경우 파시즘의 그림자를 봤다고 하는데, 전 많은 사람들이 놀러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파시즘의 망령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백만명이 나와서 대한민국만 외친다는 것이 끔찍하고 무섭기는 했습니다.

적당한 비유는 아니고, 좀 심한 비유가 될지는 몰라도 히틀러에 대해 독일국민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지지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몇백만이 모였는데, 피켓을 통해 다른 정치적 구호도 선보일만 한데,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미증유의 열정이 이렇게만 소비되어도 될 것인가?'하는 안타까움도 있었구요.

-지승호 - 일부지식인들의 경우 붉은 악마가 '레드콤플렉스'를 해소시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고종석 - 농담으로 할 수 있는 얘기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빨간색에 대한 금기가 없어진 것 뿐이죠.

-지승호 - '가족의 유연화'라는 표현으로 미래에는 가족의 유대감이 점점 엷어질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아탈리의 말에 의하면 동시에 여러 가정을 원하게 될 것이라도 하고, 관습의 수준에서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권리가 누구에게나 인정될 것이라고도 전망하셨습니다. 그것이 불륜을 소재로한 드라마 또는 현실 속에서 어느 정도 실현이 되고 있다고도 보여지는데요. 그렇다면간통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종석 - 원칙적으로는 없애야죠. 하지만 쉽게 얘기할 문제는 아닙니다. 1부1처제는 계급사회가 발명한 제도중 가장 평등한 제도로 볼 수 있죠. 그것이 깨지면 성이라는 재화가 훨씬 불평등하게 나눠질 것입니다. 얘기하신대로 관습의 수준에서 그렇게 될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이 좋은 일인지,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지승호 - 동시적 가족의 등장은 결국 여성해방, 동성애자들의 해방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간통죄 폐지를 반대하는 여성단체의 입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종석 -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낮은 상태에서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지승호 - 세계에서 유일하게 차이나 타운이 없는 나라가 한국인데, '우리'와 '그들'을 심하게 나누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고종석 - 우린 외국인과 함께 살아본 경험이 없잖아요. 개항이후에나 외국인들을 집단적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 아닐까요?

-지승호 - 그것을 '자본주의적 국가주의'와 연결해서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고종석 - 국가주의가 먼저인지 폐쇄성이 먼저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군요.

-지승호 - 지식인과 대중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21세기에는 지식인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고종석 - 전통적 의미의 지식인 개념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회현상에 관한 발언이나 도덕을 논하는 것 역시 특수한 계층의 지식인들이 독점할 것 같지는 않구요. 장기적으로는 소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승호 - "에밀 졸라, 파블로 네루다, 김지하, 황지우 같은 작가들은 그 시대의 지식인상을 대표했다. 하지만 강준만 교수가 지적한 '부드러운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새 얼굴의 기성체제에 작가들이 더 쉽게, 더 깊게 포섭되고 있다"고 지적하셨는데요. 이문열 같은 작가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종석 - 자본주의가 난숙해지기 때문이겠죠. 예전의 작가들은 그런 유혹을 덜 받았을 것입니다. 소설이 100만부씩 팔리는 대중시대와 관련있겠죠. 매스미디어가 그 사회의 가장 큰 권력이 되어 있어 작가들도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름이 곧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니까요. 이문열씨도 예전에 태어났다면 그런 생각은 해보지도 않는 선비였겠죠.

-지승호 - 예전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볼테르의 "나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견해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싸우겠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옹호했는데요. 그 말과 반대로 요즘 한나라당과 이 후보를 비판하는 언론인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종석 - 이회창 후보가 특별히 그렇다기보다는 원칙대로 행동하는 정치인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것을 추궁하려면 우선 지식인들에게 책임을 추궁해야한다고 봅니다.

-지승호 - 민주당 경선을 통해 불렀던 이른바 '노풍'이 급속도로 꺼져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고종석 - 제 개인적으로는 YS를 찾아가 박종웅 의원을 부산시장 후보로 달라고 할때였습니다. 참모들의 판단이었겠지만, 결정은 노후보가 했겠죠. 아무리 YS와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해도 박종웅씨가 어떤 사람입니까? 언론사 세무조사때 언론탄압한다고 단식까지 한 사람 아닙니까? 대통령의 세 아들 문제는 노 후보의 정체성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언제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노 후보의 행보가 실망스럽긴 했지만, 대통령 선거때는 지지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지승호 - 유럽에서는 지난세기 후반 이래로 시가 힘을 잃었다고 하셨는데요. 아직 우리나라는 시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종석 -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는 대중가요 가사에 가깝죠. 문학적인 시들은 외면받고 있지 않나요? 유럽과 비슷하게 가고 있다고 봅니다.

-지승호 - 시나 소설이 미래 세계에서는 문화의 가장자리로 밀려날 것이라고 전망하셨는데요.

=고종석 - 소설은 모르지만 시는 확실합니다. 소설 역시 영화라는 장르를 받치는 장르가 될 것이구요. 본격적인 소설은 잘 안팔릴 것입니다. 대중의 등장과도 관련이 있겠죠.

-지승호 - 기술의 발달이 점점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도덕주의자들은 '떳떳하면 거리낄 것이 없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런 현상의 가속화를 어떻게 보십니까?

=고종석 - 큰 딜레마죠. 프라이버시와 안전에 대한 욕구라는 중요한 두개의 가치가 상충하는 건데요. 안전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곳곳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면 어떠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사회의 가장 부유한 계급은 프라이버시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다른 계급을 감시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죠. 도덕적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유리벽 속의 삶을 긍정하고,'투명한 사회'를 옹호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투명해지는 것은 권력자나 부자들을 빼놓은 일반시민들의 사생활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유의 옹호자라면 입법투쟁을 통해서라도 프라이버시의 영역을 넓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프라이버시는 가장 밀도 있는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지승호 - 미국과 프랑스의 공인에 대한 프라이버시 인식이 틀리다고 하셨는데요.

=고종석 - 제 눈에 비친 것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미테랑의 숨겨놓은 딸을 프랑스 언론은 사생활의 영역이라고 보고 보도하지 않는데 비해, 미국의 경우는 이혼경력까지 문제가 되는 것 같더군요. 정책과 관련된 일이 아닌한 프라이버시는 보호해줘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지승호 - 우리의 경우는 미국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이중적인 면이 있는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이혼이나 혼외정사 같은 것에 대단히 민감한 면이 있는 가 하면, '영웅은 호색'이라는 식으로 오히려 미화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요. 또 그러면서도 진보적인 인사들의 경우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요.

=고종석 - 네. 미국과 비슷하죠. 강압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있지만, 어떤 사람의 말대로 성욕도 하나의 행복추구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보적인 성향과 플레이보이 기질(?)이 반드시 모순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웃음)

-지승호 - 우리 역사를 볼때 정치가 종교의 영향을 서구에 비해 덜 받았던 것이 사실인데요. 외국의 종교가 국내에 들어오면 근본주의적 경향을 띄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종석 - 근대화과정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겠죠. 민족적 심성이 그랬다기 보다는요. 그런 변화는 해방 이후의 일인데, 파시즘적 속도, 조급함과 관련있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승호 - 그런 것들이 마찰을 빚기도 하는데요. 예를 들어 단군상과 관련해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싸움 같은..

=고종석 - 그 싸움으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 둘다 없어지면 좋을 것 같긴 하네요. 아, 이건 농담입니다.(웃음)

-지승호 - 성스러움을 이유로 법의 적용을 면제받는 공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정권을 견제했던 시대상황에서 필요했던 것 같은데요. 지금도 그런 성역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고종석 - 이제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 불비한 면이 있지만, 치외법권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승호 - 유시민씨는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공안정국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고 걱정하고 있는데요.

=고종석 - 아무리 그래도 노태우정권 초기만큼도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를 되돌리긴 힘들다고 봅니다.

-지승호 - '세계화 = 미국화'의 대세를 거스르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가 미국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F-15K 구매와 관련해서도 말이 많았는데요.

=고종석 - 그 부분을 시민운동이 해야하겠죠. 시민사회의 반미적인 분위기는 오히려 정부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DJ 정부는 미국에 끌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조선일보는 '왜 미국말을 안듣나?'는 식으로 보도하더군요.

-지승호 - 조선일보는 간혹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신문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종석 - 조선일보가 논리의 일관성이 있는 신문은 아니죠. 자기 확장 욕망이 강한데, 그것에 극우 이데올로기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거죠. 프랑스의 극우정치인 르펜은 '반미주의자'입니다. 제대로 된 극우라면 부당한 압력에 대해서는 '반미'를 해야하지 않을까요? 제 3세계 우파가 미국에 예속적이긴 하지만, 조선일보는 좀 심하다는 생각입니다.

-지승호 - 더 이상 노동자는 착취당하지 않고, 쓸모없는 존재로 무시당할 뿐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인데요.

=고종석 - 그렇게 되고 있죠. IMF 이후 실업자가 늘고 있습니다. 생산성이 올라갈수록 노동의 종말이 다가오는거죠. 시민운동을 통해 부의 분배를 고르게 하고, 공공부문을 강화해 노동력을 흡수하는 방법 밖에 해결책이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승호 - 진중권씨의 글을 보니까 '밤늦게 전화해 나오라고 하는 사람은 고종석씨뿐이다'고 했는데, 어떤 분들과 자주 드십니까?

=고종석 - 홍세화, 진중권, 인하대 김진석 교수(사회비평 주간) 등이랑 자주 마십니다.

-지승호 - 기자, 소설가, 저널리스트로서의 글쓰기가 다른 점이 있습니까?

=고종석 - 모르겠습니다. 똑같이 씁니다.

-지승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완전한 평등'을 촉구하면서도 '여성의 성직종사는 안된다'고 말한 모순을 지적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사회 지도층에서도 여성을 완전한 평등을 누릴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경우는 어떻게 보십니까?

=고종석 - 굉장히 심하죠. 국회의원 여성할당제 같은 것들이 구체적으로 도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승호 - 한국일보에서 미스코리아를 주관하고 있는데요. 미스코리아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종석 - 이런 제도가 있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생방송도 하지 않으니까요. 안티 미스코리아 같은 행사를 하는 것도 좋구요.

-지승호 - 다윈의 진화론에서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원리가 우익 이데올로기의 과학적 기반이 되며, 인간의 불평등을 정당화한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하셨는데요.

=고종석 - 진화론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기반이죠. 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교육과 환경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좌파가 갖는 견해 아닐까요?

-지승호 - 사이버 세계가 민주주의 실현의 장으로서의 사이버 에덴이 될 것인지? 감시사회로서의 사이버 감옥이 될 것인지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고종석 - 제가 책에 모르겠다고 썼는데요(웃음)

-지승호 - 그 글을 쓰신지 2년 정도 지났으니, 새로운 견해를 갖고 계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웃음)

=고종석 - 글쎄요. 감시체계가 강화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비관주의자라는 얘기죠. 장기적으로 보면 낙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제가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아 그렇게 전망하는 거겠죠.

-지승호 - "한국의 중산층 가정에 일반화된 거의 광적인 교육열은 가족주의의 산물이다. 폐쇄적 집단으로서의 가족에 대해 앙드레 지드는 '가족이라는 것, 나는 너를 증오해'라고 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 아닌 '가족주의는 야만이다'라는 책도 있는데요.

=고종석 - 가족주의는 작은 국가주의라고 할 수 있죠. 작동하는 멘탈리티가 같으니까요. 집단 내부의 동질성 강화, 강력한 통합 같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주체적 개인의 발견이 있어야 하고, 개인주의가 확산되어야 합니다. 지역주의 문제도 장기적으로는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승호 - 복거일씨의 '영어공용화론'을 찬성하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고종석 - 그건 오해에서 비롯된 겁니다. 전 '영어가 공용화되는 것이 대세라면 막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죠. 그것이 대세가 된다면 막으려고 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구요. 마찬가지로 정부에서 '영어를 쓰자'라고 캠페인을 하는 것도 반대입니다. 어떤 방향이든 강제는 반대합니다.

-지승호 - 켄로치의 영화 '빵과 장미'를 보고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그 영화를 본 착한(?) 사람들은 '히스패닉계 노동자에 대한 연대의식을 느꼈을 것이다'고 하셨는데요. 혹시 월드컵에 관해 인권운동사랑방 측에서 낸 논평을 보셨습니까? 거기에 대해 '빨갱이보다 나쁜 놈들'이라는 적개심에 찬 글들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 전 우리 사회의 관용의 수준에 대해 절망할 적이 있습니다.

=고종석 - 그건 보지 못했는데요. 인터넷 게시판이라는 것이 익명성을 무기로 일부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 않나요?

-지승호 - 전 그걸 보면서 '우리가 스머프 사회보다 나을게 뭐 있나?'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머프들은 투덜이 스머프나 심술이 스머프가 자기들과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스머프 사회를 떠나라'라는 말을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면 '저것을 북한으로 보내라'는 심각한(?) 수준을 농담을 많이 하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심지어 '인권운동사랑방을 이제 지지하지 않겠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하던데요. 소수가 좀 큰 목소리로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다수는 오히려 '즐기지 못하는 니 들이 불쌍하다'고 차라리 무시하거나, '같이 즐기자'고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 소수에 대한 정당한 태도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고종석 - 인권운동사랑방의 논평을 보지 못해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군요.

-지승호 - "복거일에 의해 반공이 잘못이 아님을 우파나 자유주의의 개념이 죄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신 적이 있으신대요. '국가보안법 철폐' '조선일보 반대' 같은 주장은 복거일씨와 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고종석 - 복거일씨 주장에도 진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복거일씨가 하이에크의 말을 인용해서 '황금만능 사회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돈 많이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가 인종적 편견, 계급적 편견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사회에 비해 더 나은 사회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죠.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야할텐데, 사실 우리 사회가 합리성의 수준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합리성 이전의 멘탈리티를 생각하면 자유지상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거죠. 물론 정치나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승호 - 질문이 너무 애매하고, 많았던 것 같아 죄송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실제의 자유민주주의는 흔히 자유과 평등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키고 있을 뿐이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자주 충돌한다. 자유는 흔히 더 힘세고 사나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권리로 변질되고, 평등은 흔히 다수의 횡포와 중우정치로 타락한다. 자유가 활개칠때 평등은 움츠려들고, 평등이라는 칼이 춤출때 자유는 상처를 입는다"고 하셨는데요. 우리에게 있어 자유와 평등을 어느 정도 조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종석 - 우리는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서유럽 정도의 사회 보장이 될 때까지는 평등쪽에 무게를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칸디나비아가 인구가 적어 표본으로 삼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평등하면서 개인적 자유는 거의 무한대로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야 그런 사회가 싫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원할 것입니다.

질문이 끝난 후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몇가지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었다. 고종석씨는 강준만 교수에 대해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가까운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프랑스에 있으면서 '김대중 죽이기' '인물과 사상' 같은 책을 보면서 '한국인인 것이 덜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고, 한국에 돌아오는 것이 덜 부담스러웠다고 고백했다.

고종석씨는 강준만씨의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진중권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고백했다. 진중권씨는 '내 무덤에 침을 뱉으마'같이 풍자적으로 쓰는게 좋은 것 같다면서 그를 한국의 에라스무스('우신예찬'으로 교황을 풍자했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요즘 들어 그런 글쓰기가 줄어든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요즘의 강준만, 진중권 논쟁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코드 차이가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런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이 즐겁고, 그 분들의 글을 읽고나면 힘이 난다고 말했다.

박노자씨의 글에 대해 극찬을 한 글을 봤는데 외국인으로서의 핸디캡을 인정해서 한 말이냐는 좀 짖궂은 질문에 "외국사람이 쓴 글 같지 않고, 핸디캡을 고려하지 않고도 읽을만한 글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말했고, 한국어를 늦게 배운 사람의 문장력이 그 정도라는 것이 신기하다면서 '그 사람 혹시 천재가 아닌가?'라고 덧붙였다.

홍세화씨에 대해서는 가까운 사이이며, 92년 파리에서 만나 파리에서는 거의 기대서 살았다고 말했고, 새로운 소설을 구상중이냐는 질문에 '써보려고 노력한다'고 대답했다.

하니리포터 지승호 /triana@freechal.com/웹진 시비걸기 편집장 "http://www.freechal.com/sibi"
사진 이기태 /hanireporter@yahoo.co.kr 


편집시각 2002년07월10일10시24분 KST  

 


[윤대녕의 독서일기] 고종석의 유럽통신 - 고종석

◎기호론적 문체로 폭넓은 관심사 다룬 사신들
얼마전에 나는 무슨 일인가로 모 잡지의 편집자와 만난 자리에서 여담으로, 고종석의 처녀 단편 「제망매」에 대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는 그 때 만났던 편집자가 고종석씨의 친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나서 잠시 아연했던 기억이 난다.

「제망매」에 대한, 아니 그의 글에 대한 내 편집적 애정의 말이 뒤늦게 거북스러웠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쌓아두고 있던 책들 중에서 「고종석의 유럽통신」(문학동네간)을 슬쩍 먼저 꺼내 읽게 되었다. 책읽기도 때로 인연과 관계되는 일인가.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행복한 책읽기」에 속하는 것이리라.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지금 프리랜서(혹은 통신원)로 가족과 함께 파리에 체류하고 있다.

전에는 신문기자(라기 보다는 문학 칼럼니스트)였고 이미 세 해 전에 장편소설 「기자들」을 써서 소설가로 입문하기도 했다.
이 복잡한 이력은 역설적으로 말해 현재 그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자의에 의한 자비 망명의 길을 걷고 있다.
김현식으로 말하면 이 땅에는 「준수해야 할 풍속」이 없기 때문일까.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의 길을 걷고 있는 것같다.
많이 서성인 길은 굳어, 흐린 날에도 빛나게 마련이다.
인문학적 사유로 가득한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비누 묻은 손을 찬물에 담그고 오래오래 씻고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고종석의 유럽통신」은 그가 파리에 머물며 쓴 글(이라기 보다는 편지들)이다. 그러나 그 정치한 사신들은 분명 공공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의 글은 지시하는 바가 뚜렷한 기호론적 문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5월의 파리에서 광주의 5월을 얘기하고 인종, 언어, 문학, 예술, 일본, 혁명, 제국주의, 정치 등으로 관심사를 넓혀가며 지적 사변을 토해내고 있다.

그는 순결성과 민족주의가 인류 분쟁의 원범이라고 말하며 「순수함에 대한 열정, 순결함에 대한 광기는 결국 불순함에 대한 증오, 요컨대 타인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고」 한편 「세계시민주의로서의 개인주의는 불순함에 대한 사랑이고, 관용에 대한 경배」라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이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아닌,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은 관용의 철학, 수치심의 윤리」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불순함에 대한 옹호」야 말로 진정한 국제적 코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언어 혹은 글의 율법이 근본적으로 권력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감상주의자」라고 단언하고 자신의 글에서 그 율법의 틀을 무너뜨리려고 집요하게 애쓰고 있다.
거꾸로 글이, 문학이 또한 권력과 억압의 율법을 견뎌낼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1995.11.3〉



고종석, 볼테르, 홈스, 밀, 크레센초, 그리고 자유.

나는 고종석씨의 글이 너무너무 좋다. 무지무지 좋다. 고종석씨의 글보다 더 감탄하며 읽을 더 훌륭한 글들은 많지만, 박장대소를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껴가며 같은 고민점을 짚어가게 되는, 최대의 몰입력. 내가 바라고 지향하는 그 길과 같은 길 저 앞에 서 있는 대선배.

전에 읽은『자유의 무늬』를 다시 꺼내서 이것 저것 읽다보니, 어느 책에서나 마주치면 항상 그어놓는 볼테르의 말과 올리버 홈스의 말이 여기에도 있고, 여기에도 줄이 그어져 있었다. 대학 초년생 때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의 『나는 무질서한 것이 좋다』를 읽고 대단히 즐거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고종석씨가 늘상 말하는 것과 저 크레센초 선생이 하는 말이 비슷하네. 존 스튜어트 밀이 설명하는 '자유' 의 개념도 비슷한 맥락이다.

공부하라고 안 해도 아이들이 알아서 잘 하는 집 부모가 '우리는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압력을 넣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반쯤 실소가 나온다. 잘하는 애들한테 압력 안 넣는건 복종하는 노예에게 야단 안 치는 주인과 뭐가 달라. 잘하지 않아도 공부닦달 안 하는 게 대단한 부모인거지.

자유란 항상 권력자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않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일 때에나 의미가 있고, 질서와 청결과 순수주의의 결벽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가를 물었을 때 그 진정성이 밝혀진다. 다른 이야 어떻다 치더라도 난 참 고종석씨의 사상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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