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이 많은 분야.
우리 두 딸, 어떤 학교에 보내야할까요
돈독 오른 '386학원'과 문익환 '늦봄학교' 사람들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강남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한 학원의 소개서에 적힌 섬뜩한 문구입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학원은 과거에 소위 잘나가는 '운동권' 출신이 운영하는 곳. 돈벌이가 아무리 좋다지만….
3~4개월 전 한 후배는 그 학원의 소개서가 담긴 내부 문건을 내게 건네면서 "대표를 비롯해 많은 운동권 인사들이 강사로 들어가 있는 학원에서 어떻게 이런 문구가 나왔는지 미칠 지경"이라고 혀를 내두르더군요.
과거 핏대를 세워가며 인성교육을 외쳤던 자들의 화려한 변신. 독재정권을 겨냥했던 총구를 이젠 자신의 친구, 다른 수험생에게 돌리라는 그들. 은유적 표현이긴 하겠지만, 학생들에게 적개심을 충동질하는 그들의 모습은 '정치인 386'의 행태 못지않게 우울한 일면입니다.
"배워서 남주는 늦봄학교 만만세!"
오래된 이 일을 갑자기 떠올리게 된 것은 며칠 전(16일)의 특별한 만남 때문입니다. 한 지인의 소개로 참석한 자리는 '돈독'이 오른 일부 386과는 달리 지역에서 묵묵히 대안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선생님과 학부모들의 모임.
경기도 의왕시의 한 음식점에서 5시간 넘게 그들의 자식 농사 얘기를 들었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자리를 떴습니다.
"하늘의 큰 뜻과 사랑 가득한 참세상의 꿈이 여기에 있네. …즐겁게 배우고 배워서 남주는 늦봄학교 만만세!"
그들의 자녀가 다닌다는 전남 강진의 늦봄 학교(www.bomedu.com) 교가의 일부분입니다. 제목은 '배워서 남주자'. 적들의 책장을 운운하는 '운동권 학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Fucking U.S.A'란 곡을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윤민석씨의 작품이랍니다.
이 노랫말에는 늦봄 문익환 목사님의 큰 뜻을 이어받자는 취지로 설립된 이 학교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통일시대를 이끌 민족지도자를 양성하자는 거죠.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강진 만덕산을 배경으로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 세워진 아름다운 학교랍니다. 흙집 교실 등 5동의 건물이 남쪽에 위치한 강진만을 바라보고 있는 아담한 대안교육 공간입니다.
아이들이 살아있구나!
이날 한 자리에 모인 사람은 남주 아빠 김대기씨(김남주 시인과 한자까지 똑같다더군요), 재경이 아빠 박인철씨, 지원이 아빠 김영은씨, 그림이 아빠 임종길씨. 그리고 늦봄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승요 대표길잡이, 철학과 의학을 가르친다는 박현 길잡이 등입니다.
지난해 3월 4일 개교한 이 학교의 중학 과정에 자녀들을 입학시킨 학부모들은 1년 전과 지금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있구나! 지난 81년 풀무농업고등학교에 갔을 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었다. 늦봄학교에 내 아이를 편입학시킨지 불과 2~3달되었는데, 얼마 전 겨울방학 축제에 갔다가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조명과 영상, 사회 등 모든 것을 아이들이 직접 진행했다. 우리 아이도 기가 살아있고 건강도 좋아졌다. 그리고 이젠 공부도 혼자 한다." (남주 아빠)
"우리 그림이의 성적표를 본 뒤 신기하기도 해서 스캔해 두었다. '꿈찾기'라고 적힌 성적표에 선생님들이 수기로 20여개 평가 항목을 평가했더라. 생활, 노작활동, 동아리 활동…. 아이들과 밀착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싫은 소리 하지 않는 사회다. 선생님들의 평가서가 입시에 반영되기 때문에 잘못 말하면 돌맞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성적표에는 아이의 단점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술돼 있더라. 이런 게 공교육의 뿌리 아닌가. 둘째 아이도 보낼 생각이다." (그림이 아빠)
"난 재경이의 성적표를 보고 연말에 평가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왜 넌 수학시간에 선생님을 봐야지 소정이를 보고 있냐'고 묻기도 했다. 아이들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는 성적표였다." (재경이 아빠)
[궁금증①] 어른들 생각을 주입하는 거 아냐?
ⓒ 김병기 |
"길잡이들이 잘못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아이들이 빼빼로데이가 다가오자 친구들에게 줄 빼빼로를 숨겨놨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길잡이들은 상업적 목적의 행사에 대해 아이들의 의견이 어떤지 물어보기 위해 빼빼로데이를 주제로 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중 한 아이가 기막힌 제안을 했습니다. 빼빼로데이 때 가래떡을 들고 민족이 하나되는 것을 실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주방에서 부랴부랴 가래떡을 만들고 가래떡 행사를 했습니다. 누가 강요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얘들끼리 토론하다보면 정답이 나오더라고요. 빼빼로를 준비한 학생은 1명뿐이었습니다."
그림이 아빠는 이 대목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습니다. 혹시 어른들의 생각을 주입식으로 강요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끼리 걸어서 대추리에 갔는데, 거기서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율동을 하더라. 너무 일찍 아이들의 머리 속에 무언가를 주입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가졌다. 물론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좋은 경험이었지만, 그래도 교육이라는 게 참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얘기가 끝나자 이승요 대표길잡이도 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쪽으로 아이들을 몰지는 않는다. 아이들 스스로 결정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한 토론을 진행했는데 엄청났다. 아이들의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됐다. 토론을 하다보면 소위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하다."
이 대표길잡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현 길잡이는 "그래도 극우는 아니죠"라고 말하며 웃습니다.
[궁금증②] 학벌사회에서 살아야할 아이들, 학업능력은
대안학교를 보내고 싶어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역시 '학업 능력'입니다.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아직까지는 학벌이 중시되는 사회이니까요. 아이들의 미래 때문이겠지요. 늦봄학교 학부모들은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더군요.
"전 오히려 학습 문제를 걱정했다. 포항의 경우 포항공대가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괴외비가 강남과 비슷하다. 고급과외는 과목당 200만~300만원 정도이다. 이곳에 보내기 전에 우리 아이도 수학 과외를 몇 달 시켰다. 늦봄학교에 와서 그 때 수업을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하더라." (남주 아빠)
"지원이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공부 열심히 하더라. 잘은 모르겠지만 민족과 사회를 위한 책임감이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소명의식 때문인지 혼자서 공부한다. 사실 책에서나 본 것이지만 조국이 어려울 때 12~13살 먹은 아이들이 민족을 해방시키겠다고 만주로 떠났던 시대도 있지 않았나. 너무 잘 보냈다고 생각한다."(지원이 아빠)
그렇다면 개교 첫해인 지난 1년, 40명의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했을까요?
우선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택견을 하고 자연산책을 하면서 명상을 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그후 오후 3시까지는 국어·수학·영어·과학·역사·사회·철학·통일과 평화·우리의학·꿈찾기·생각나누기 수업시간. 그 후에는 잠자리에 들 때까지 노작(노동작업) 활동·저녁밥상 명상·풍물·뽐내기(자유공연)·노래·자율독서 등의 시간을 가졌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 때는 지리산을 종주하거나 백제권 기행을 떠났고, 겨울방학 때는 금강산 기행을 떠나거나 섬기행을 떠날 예정이랍니다. 또 한달에 한 차례씩 역사·문화·통일·생태 기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지난해 10월에는 2박3일동안 왕복 100km를 걸어서 '땅끝기행'을 했고, 강진에서 15명의 학생들이 걸어서 대추리까지 가기도 했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학부모와 선생님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학부모들은 각종 직업을 갖고 있다. 시간이 나면 아이들을 불러서 체험학습을 한다. 화가 선생은 그림을 가르치고, 암벽타는 학부모는 아이들에게 암벽타기를 체험하게 한다." (그림이 아빠)
"난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불량 아빠'다. 하지만 북쪽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에 있기 때문에 금강산에 몇 달간 상주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겨울방학 때 금강산 기행을 하게되면 내가 길잡이로 나선다." (지원이 아빠)
[궁금증③] 교육비 만만치 않을텐데
박현 길잡이는 "올해 2년차 학생의 경우 해외 이동수업을 실시할 예정"이라며 "2달 일정으로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에서 공부하는 민족 현실과 통일희망'이란 주제의 수업을 진행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3년차는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에서 '제3세계 역사 현실 꿈' 수업을 하고 4년차는 독일 6·15공동사무국에 상주하면서 이동수업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말하더군요. 5년차 학생의 경우 자신이 세운 꿈을 직접 체험하는 '인턴십 과정'. 전문가 아래서 인턴을 하면서 앞으로 자신이 그 직종에서 활동할 수 있을지를 가름하는 일종의 직업체험 학습이랍니다.
이쯤되면 학부모들이 부담할 학비가 궁금해집니다. 사실 일부에선 '대안교육=귀족학교'라는 비아냥도 흘러나오고 있거든요. 기본적으로 기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죠.
수도권 지역 운영위원장인 재경이 아빠가 이에 답변을 합니다.
"기숙사비를 포함한 학비는 매월 40만원에서 60만원까지 낼 수 있다. 그 사이에서 학부모가 선택하는 것이다. 좀더 낼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사람은 60만원을 채우고, 아닌 사람은 40만원 이상 한도내에서 자유롭게 내고 있다. 난 50만원을 낸다." (기부금과 입학금은 별도.)
과외 1~2개를 하고,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용돈을 생각하면 사실 저렴한 비용입니다. 한 학생이 내는 학비를 평균 50만원으로 잡으면 매달 이 학교에 들어오는 학비 총액은 2000만원. 이 학교에는 교사진 등을 포함해 20여명이 근무합니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낸 학비로만 학교를 운영할 수 있을까요.
"우린 무조건 1년이 수습기간이다. 자기 희생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40살이 넘는 유능한 영어선생님도 한달에 60만원을 받는다."
박현 길잡이의 말입니다. 직장 개념으로 접근하면 버틸 수 없다는 것이죠.
현재 이곳은 6년 과정의 비인가 학교. 졸업을 한 뒤에도 검정고시를 봐야만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곳이랍니다. 정부 재정 지원을 받으려면 특성화 중고등학교 인가를 신청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육부가 정한 커리큘럼과 수업일수 등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독립성과 자율성을 훼손당할 우려가 있다는 게 고민이랍니다.
그래도 문익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취지에 동감한 사람들의 지원이 많았다고 합니다. 박현 길잡이의 말입니다.
"교실 한 칸을 기부한 사람이 있다. 콘테이너 박스 교실이다. 우린 그 분의 이름을 따서 교실 이름을 지으려고 했는데, 그 분이 거절했다. 오히려 친구 때문에 지원을 해 준 것이라면서 그 교실 이름을 '벗'이라고 지으면 좋겠다고 제안해 그렇게 했다. 또 2500만원을 지원해준 분도 있다. 그 지원금으로 우린 소강당을 만들었고 이를 기리기 위해 조그마한 패를 강당에 전시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얘기들이 쏟아졌습니다.
"전국적으로 친구가 생겨 방학 때도 혼자 전국을 돌아다닌다" "얘들이 광우병 때문에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고 판매하는 경제학습 프로그램이 있는데, 비오는 날에도 아이들끼리 바깥에 나가더라. 열매 한 개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수확해서 남은 돈 30만~40만원을 대추리에 헌금했다."
아이들 집 만들 벽돌 한장
ⓒ 김병기 |
"사실 안정적인 운영이 가장 큰 문제다. 가정 형편은 어렵지만, 나름대로 뜻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선 엄두를 못 낸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운영을 위해서는 기숙사를 확보하는 게 큰 일이다. 지금은 40명이지만, 6년차까지 꽉차면 240명의 학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기숙사를 마련해야 한다. 아마도 8억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할 것같다."
이 얘기가 끝나자마자 저마다 한 마디씩 아이디어를 내놓습니다.
저는 부산의 한 시민단체가 어린이도서관을 짓는 데 벽돌 한 장을 기부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소개한 뒤 늦봄학교의 교육철학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숙사 벽돌 한 장 기부운동을 벌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한 학부모는 "학생들이 벽돌을 기부한 사람의 염원이 담긴 글귀를 벽돌 한 장에 새겨넣는 것은 어때요"라고 받아쳤습니다.
그림이 아빠는 "많은 사람들이 강진 다산초당 앞에 위치한 우리 학교를 방문 코스로 이용하는 데 방문요금을 받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다른 학부모는 "자기 학교를 방문객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아이들을 모아 자율적으로 돌아가면서 소개하도록 하는 건 어떠냐"고 덧붙였습니다.
이승요 대표길잡이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수첩에 기록하더군요. 늦봄의 교육철학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겠죠.
그들과 헤어진 뒤 전 인천으로 향한다는 지원이 아빠 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지원이 아빠는 부평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조직국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44세. 강남학원을 차린 386과는 다른 투박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차만 없다면 김 기자 집 앞에서 술이나 한잔 하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적들의 책장이 넘어간다" VS "즐겁게 배워서 남주자"
그와 아쉽게 헤어진 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 두 딸인 민이와 영이는 지금쯤 온 방을 휘젓고 다니면서 곤한 잠에 빠져들었을 겁니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인 민이는 요즘 태권도와 로봇교실을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6살이 되는 영이는 자석 글씨를 냉장고에 뗐다붙였다 하면서 맨날 만지작거리더니 요즘은 제법 글을 읽고 씁니다. 그런 영이가 얼마 전, 갈치 조림 맛이 어떠냐는 엄마의 거듭된 '애원성'(?) 질문에 한방을 먹이더군요.
"엄마!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최고예요!" 그리고 잠시 뒤 이어진 말. "엄마! 이제 행복하세요."(웃음바다)
이런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선물해야 할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와 "배워서 남주자".
저도 조만간 선택의 기로에 놓일 것입니다. 그 때까지, 아니 먼 훗날까지 많은 학부모들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늦봄학교는 남아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한 벽돌쌓기 후원 행사가 열린다면, 기꺼이 기숙사의 벽돌 몇 장에 저와 아내,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글귀도 꼭 넣고 싶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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