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걸작일까, 범작(凡作)일까. 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커뮤니티·SNS 모두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화제다. <설국열차>다. 평론가들의 입장도 엇갈리고 있다. 영화의 결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고 싶었던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은 과열양상이다.
당사자는 어떻게 말할까. 8월 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설국열차>의 봉준호 감독을 만나 영화를 둘러싼 논란과 작품에서 담으려 했던 주제의식 등에 대해 물어봤다.(단, 이 인터뷰는 영화 내용에 대한 많은 언급을 담고 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읽기 전에 참고하기 바란다.)
인터뷰하기 힘들겠다. 대부분 새롭지 않은 질문일 텐데,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 설명해야 할 테니.“꼭 그렇지는 않다. <설국열차>에 대한 질문은 비교적 다양한 것 같다. 계속 같은 질문이 반복되는 영화도 있는데, ‘설국’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대목이 많아서인지 다채로운 질문이 많은 편이다.”
블로그나 SNS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체크하지 않나.
“논란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영화가 좋다는 사람과 싫다는 사람이 나뉘어서 논쟁하고 있는 걸 봤다. 처음 며칠은 열심히 읽었는데 지금은 안 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 <설국열차>를 두 번 봤다. 다시 확인하니 확실히 ‘옥에 티’가 있다. 극 중에서 송강호가 분한 남궁민수가 초반에 성냥을 첸이라는 꼬마한테 뺏긴다.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다시 갖고 있게 되는가.
“그것뿐만 아니라 ‘디테일’에서 의문을 품을 만한 대목이 서너 군데 있다. 사실 첸이 갖고 있었던 성냥을 남궁민수가 ‘야 임마 이거 내놔’ 하고 꿀밤을 때리면서 다시 가져가는 장면을 찍었다. 그 장면은 극의 흐름상 편집과정에서 잘라냈다. 섬세하게 본 사람은 의문을 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라스트 신에서 흑인 남자애가 입고 있는 털옷도 마찬가지다. 원래 약에 취해서 막 싸우는 사람들 중 그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계속 보여준다. 그것도 남궁민수의 딸 요나가 뺏어서 흑인 남자애에게 가져가는 장면이 있는데 영화의 ‘리듬’에 저해되어 편집했다.”.
엔딩 장면에 대해 지금 말이 제일 많다. 엔딩 장면에 등장하는 북극곰을 두고 ‘기승전콜라’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들어봤나.
“공감한다.(하하) 기승전콜라라….”
북극곰은 지구온난화 해결의 아이러니를 보여주기 위해 등장시킨 것인가.
“그렇다. 지구온난화의 슬픈 현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줄어든 얼음조각 위에 올라선 북극곰의 비극이 흔히 예시된다.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이 영화에서는 바깥 세상의 생명이 멸종되었다고 설정했다. 나는 사실 100% 희망적인 엔딩을 생각하고 찍었다. 한 시스템이, 한 체제가 종말을 고했고, 인류의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마지막에 남은 아이들이 아담과 이브 아니냐는 해석이 있는데 그 해석이 맞는 것인가.
“기차 밖으로 나온 요나가 모자를 싹 벗는다. 숨도 쉬어지는 것이다. 정말 얼어죽을 것 같으면 그렇게 했겠나. 숨을 쉬는 게 가능한 정도로 온도가 올라가 있고, 또 생명체를 본다는 말이다. 비관적 엔딩으로 본 사람들은 이들이 그 곰한테 잡아먹히리라고 생각한 건가.”
어쨌든 생존하기 힘들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렇긴 하다. 딱 기차에서 나왔는데, 눈 덮인 산모퉁이를 돌았더니 거기 마을이 있고 모닥불이 타오르고, 이렇게 설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지만, 여전히 그것은 가시밭길일 것이고. 그렇지만 잘 헤쳐나가기만 바랄 뿐이다. 중간에 보면 ‘얼어 죽은 7인’이라고 나온다. 교실에서 창밖을 봤을 때 기차에서 나갔다가 얼어 죽은 사람들이다. 하나의 체제를 전복하거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다면 분명히 희생이나 대가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얼어 죽은 것은 기차 안 교실에서 매년 학습교재로 사용된다. 말하자면 ‘쟤네 봐. 너희들 나가면 저 꼴 된다’는 경고로 사용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거네. 사실 기후변화 문제는 좌나 우,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지 않나. 엔딩을 CW-71이라는 물질을 사용하면서, 지구온난화의 희생의 상징이었던 곰은 살아남고 인류는 생존이 불투명해졌다는 메시지로 읽었다.
“일단 엔딩 장면에 깔려 있는 음악을 보라. 상당히 포지티브한 음악이다. 그리고 여자애와 남자애가 살아남은 것으로 상정했다. 아직 후손이 생기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겠지만,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다. 물론 앵글로 색슨이 멸종했지만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고….”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 CW-71이 살포되는 시점이 2014년 7월 1일 오전 6시다. 왜 그때로 설정했나. 혹시 원작에 그런 언급이 있었나.
“원작과는 아주 다르다. 원작에서 가져온 것은 사실 기본 세팅 즉, 생존자들이 열차에 있고 바깥은 빙하기, 그런데 열차 내 사람들의 계급은 나누어져 있다는 정도다. 2014년으로 내가 설정한 이유는 ‘개봉한 바로 다음해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일종의 근미래 혹은 현재의 느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사실 사건이, 스토리가 벌어지는 때는 2031년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2031년에서 2032년으로 넘어가는 때의 이야기다.
“그렇다. 사건이 벌어진 후 17년에서 18년째 되는 때인데 사실상 기차 자체가 거대한 움직이는 타임 캡슐이다. 2014년 이후에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게 어떻게 보면 그때부터 멈춘 것이다. 영화에서 마모되고 멸종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중요하다. 총알이 ‘멸종’되었고 담배가 멸종되었다. 기계부품도 마찬가지이고, 그것을 대신해 아이들이…, 마모된다, 멸종된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다. 열차의 엔진을 고안한 윌포드는 뭔가 영원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서는 그것을 가르치지만 사실은 시간은 멈춰져 있고 마모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영원이라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열차의 동력원이 영화에서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원작 만화의 설정을 따르면 열차의 엔진은 영구기관인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추측해 봤다. 영구동력 기관은 인류 역사상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열역학 법칙에 위배되어 불가능한 것이다. 이게 판타지가 아니고 SF이다 보니까 굳이 과학적 근거를 찾는다면 윌포드가 만든 엔진은 일종의 핵융합 원자로가 아니었을까 상상을 해봤다. 미국에 펜실베이니아호라는 핵잠수함이 있는데, 이론적으로 연료를 재주입하지 않아도 20년에서 25년 동안 바닷속에서 운항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잠수함은 석 달에서 6개월에 한 번씩 항구에 들어가곤 하는데, 그건 사실 승무원들의 식량이나 정신적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다. 핵심은 엔진의 영원성은 허구였다는 것이다. 영원하다고 신성시하고 ‘엔진은 성스럽다’는 식으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부품이 마모됨에 따라 아이를 거기에 넣어서 유지하는, 어떤 초라하고 참혹한 모습이 진실이었다.”
영화 <설국열차> 촬영현장에 선 봉준호 감독. |모호필름
평론가들의 리뷰를 봤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상징한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반면 ‘SF나 판타지는 그들 자신이 상정한 세계관에 충실해야지, 자꾸 현실에 대한 상징만 찾으면 작품의 세계를 왜소하게 만든다’는 반론도 있었다. 감독이 영화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명시적인 표현은 없고 미국 월가에서 벌어진 점령(occupy)운동에 대해 말한 것은 있다.
“월가의 점령시위도 기자 양반들이 물어보니까 답한 것이다. (하하) 사실 주로 이야기한 것은 비행기의 이코노미 칸 같은 비유였다. 비행기가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 클래스로 칸이 나뉘어 있지 않나. 보통, 이코노미 칸에 탄 사람들은 12시간 동안 시달리면서 오다가 착륙하고 앞쪽 문으로 내릴 때 처음으로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 칸을 지나가게 된다. 자리도 넓고, 의자가 막 수평으로 젖혀져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에이씨, 이 사람들은 이렇게 왔다는 말이야’ 하는, 확 열 받는 그럴 때가 있지 않나. 똑같이 12시간 타고 온 것인데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것이다. 그런 감정을 영화로 옮기고 싶었다. 근본적으로 그것이 봉건주의건,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실패한 어떤 체제이건 간에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고, 그것을 기차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상징적으로 풀려고 했던 것이다. 아주 구체적으로 신자유주의,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시스템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고, 보다 본질적인, 더 추상화된 형태로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 SF의 매력이 아닐까.”
더 궁금한 것이 있다. 열차의 뒤 칸과 앞 칸을 사회의 계급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생각한다면 영화에서 그리는 세상은 아큐파이 운동의 99대 1%의 사회도 아니고, 무산자와 유산자가 대립하는 전통적인 좌파적인 세계관도 아니다. 사실 이 체제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면, 앞 칸의 가진 자들이 완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지 않나. 뒤 칸의 사람은 그냥 무임승차자, 일종의 잉여에 불과한 것이고.
“물론 과거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미국 남부의 목화밭 같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뒤 칸 사람들을 휴먼리소스, 그러니까 노예 풀처럼 쓰는 것은 사실이다. 첫 장면이 뒤 칸에서 바이올린을 켤 수 있는 사람을 차출하는 것인데, 아우슈비츠도 다 가스실로 차례로 보내지만 기술이 있는 유대인은 더 오래 살려놓았었다. 앞쪽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여러 인력자원을 활용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만약 필요하지 않았다면 다 몰살시키거나 뒤 칸을 떼어내버리면 되는 것 아니었겠나. 자신들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할 수 없는 극한의 3D 노동은 뒤 칸의 꼬마애들을 데리고 와서 하는 것이고.”
그런데 영화가 깔고 있는 것은 혁명이나 그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에 대한 냉소인 것 같다. 나중에 폭로되는 뒤 칸의 지도자였던 길리엄과 윌포드의 관계도 그렇고.
“이 스토리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주인공 커티스가 길리엄으로부터 윌포드로 가는 여정이다. 기껏 온갖 고생과 희생을 치르고 윌포드까지 갔더니, 결국 윌포드가 길리엄이었다, 그 둘이 하나였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내적으로 붕괴되는 스토리다. 사실 스포일러에 해당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끝부분에서만 드러난다. 길리엄을 연기한 존 허트는 그것을 다 전제하고 연기했다. 그래서 커티스를 계속 말린다. 커티스에 대한 애정은 있으니 ‘꼭 가야겠냐, 여기까지 온 것도 많이 온 게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결국 어느 시점에 커티스가 통제되지 않자 길리엄은 슬픈 얼굴로 그를 내보낸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게 끝에 다 가봐야 아는 것이니, 그것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으니 이 영화는 두 번 보면 훨씬 더 재미있다. 반복관람하시라. (하하)”
남궁민수의 입장이 재미있다. 일종의 아나키스트라고나 할까.
“일종의 극 후반에 투입되는 ‘조커’의 역할이라고 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정말 확신한 것일까. 문 밖으로 나가면 살 수 있다고.
“대사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10년을 꾸준히 관찰해 왔다고. 에카테리나 다리에서 비행기를 10년 동안 꾸준히 관찰했다. 10년 전에는 꼬리만 보였는데 이제 다 보인다고. 심지어 자기 딸과도 같이 나갈 비전이 있기 때문에 그로서는 아주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얼어붙은 7인’의 맨 앞의 여자가 에스키모 이누이트 여자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아마 누구나 상상하겠지만 그 여자가 바로 남궁민수의 부인, 요나의 엄마일 것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상상은 아닐 것 같다.
“내가 상상했던 서브스토리는 이것이다. 영화에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 부인 내지는 요나의 엄마는 ‘얼어붙은 7인’ 반란의 주도자인데, 주도자일 수밖에 없는 게 그가 에스키모 이누이트 출신이기 때문이다. 추위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다, 이거다. 하지만 너무 일찍 나갔다. 혁명을, 시스템 전복 내지는 탈출을 너무 일찍 한 것이다. 그때가 요나를 낳은 직후였을 것 같은데, 15년 전에 ‘얼어붙은 7인’ 혁명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요나는 한두 살 때였을 것이다. 남궁민수는 따라 나가지는 못했을 것 같다. 대신 자신이 기차에서 아직 어린애를 돌보고, 그 일곱 명이 먼저 나가 거기에 어떤 정착촌이나 커뮤니티를 만들면 어차피 1년 후엔 기차가 다시 돌아오니. 1년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남궁민수는 애를 맡았고. 그런데 설레는 마음으로 1년 후에 그 자리에 돌아와 봤더니 고개 하나를 못 넘고 거기서 얼어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남궁민수는 그 후로 오랫동안 그 비전을 포기하지 않고 신중하게 되짚어봤을 것이다. 확신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딸에게 이야기했을 것이고.”
이전 영화들까지 다 합쳐서 이야기한다면, 혁명이나 운동에 대한 냉소적 시각, 그런 것도 결국 시스템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냐, 그런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를 든다면 <괴물>의 뚱게바라는 386세대의 전형성을 갖는 인물로 상정한 것인가.
“전형성을 갖는 인물은 아니다. 박해일도 끝까지 싸우지 않나. 그런데 뚱게바라 같은 인물들은 분명히 있고. 그 혼란 속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설국열차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결국은 혁파시켜 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 입장은 명확하다.”
봉준호라는 이름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 부담이 많지 않나.
“당연. 어떤 사람이 ‘나 자신의 과거 작품과 계속 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모든 감독들에게 공통된 숙명일 것이다.”
호불호가 유난히 극단적으로 나뉘고 있다. 왜 그런 것 같나.
“모르겠다. 이 영화 프로젝트가 워낙 4~5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무슨 대작이고 외국의 유명배우가 나오고 글로벌 어쩌고 하는 여러 수식이 붙어 있었다. 이미 프라이팬이 달궈질 대로 달궈진 상태에서 음식을 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감자를 올리든 고기를 올리든, 아니면 생선을 올리든 불이 확 탈 수밖에 없는. 행복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경험해 봤지만 아무런 관심도 못받고 극장에서 간판을 내린 그런 영화들도 많은데. 영화를 어떻게 보든지 다 고마운 일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인터뷰]'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시스템 조악한 실체 들춰내고파"
2013-08-04
고대 로마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73년부터 기원전 71년까지 노예 계급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 반란군의 우두머리로서 노예제에 반대해 계급 투쟁을 벌여 한때 로마 남부 전역을 장악하기도 했지만, 결국 진압돼 처참하게 처형 당한 그의 삶이 주는 여운은 강렬하다.
당시 "너희 가운데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는 로마 장군 크라수스의 물음에 진압된 반란군이 "내가 스파르타쿠스요"라며 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일화는, 그 존재가 이미 개인을 넘어 억압받는 계급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소설, 영화, 드라마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그만큼 그가 살던 때와 지금의 시대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봉준호(43) 감독은 자신의 다섯 번째 장편 영화 '설국열차'도 스파르타쿠스 전설의 변주곡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기차 속 스파르타쿠스의 집단 반란이라는 역동성을 살린 것"이다.
"프랑스 작가가 그린 원작 만화의 구성은 영화에는 맞지 않았어요. 남자 주인공 한 명이 기차의 뒤에서부터 앞으로 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일들을 잔잔하게 알려 주는 식인데 사색적인 철학자가 말하는 듯해요. 영화로 만들려면 긴박한 구성이 필요했죠. 반란군이 앞으로 치고 나갈 때의 격렬한 쾌감 같은 것이 중요했어요. 이야기는 제가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쳤죠. (웃음)"
새로운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기다란 열차에 타 있고, 그 안에서 계급별로 나뉜 사람들이 서로 싸운다는 원작 만화의 설정에 대해 봉 감독은 "위대한 발상"이라고 치켜세웠다.
"만화 영화 '은하철도 999'를 보고 자란 세대는 어릴 적부터 칙칙폭폭 달리는 기차에 대한 로망들이 있잖아요. 기차를 다룬 영화도 흔하지 않고요. 설국열차의 원작 만화를 접했을 때 그래서 더 관심이 갔죠. 책을 펼치니 간단한 내용이 아니예요. 노아의 방주처럼 하나의 거대한 사회가 된 기차 안에 생존자들이 타 있는데 서로 싸워요. 기차 밖에는 눈이 내리고 가차 안은 바글바글……. 처음 몇 페이지를 보는데 설정이 무척 강렬했죠."
그는 자신이 홍대 앞 만화 가게에서 설국열차를 발견해 영화로 만들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했다.
"설국열차의 영어 제목은 열차가 송곳처럼 눈을 뚫고 나간다는 뜻의 '스노우 피어서(Snow piercer)'입니다. 원래 프랑스어 제목은 '눈꽃을 뚫고서'라는 시적인 뜻이라고 들었어요. 영어 사전에는 없는 단어여서 한국 출판사에서 스노우 피어서라고 지었답니다. 공교롭게도 만화 설국열차가 프랑스와 우리나라에서는 출간됐는데, 영어권에서는 안 나왔데요. 만약 영어로 된 만화가 있었다면 이미 할리우드에서 달려들어 '캐리비안의 해적' 풍의 블록버스터로 만들었을 테니 저한테는 행운이죠, 하하."
-왜 기차인가.
"기차는 다양한 상징성을 지녔다. 예전 영화들을 보면 남성의 성기로도 표현되지 않나. 기차가 터널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남녀의 섹스를 나타냈듯이 말이다. 기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기차 자체가 터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앞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격정적인 느낌을 그리고 싶었다. 기차는 거대한 관이다. 우회로가 없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차의 핸디캡이자 매력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막막했다. 마치 복도에서 영화를 찍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복도하고 다르게 움직이잖아'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실제로 촬영이 진행된 체코의 바란도프 스튜디오에는 100m 길이의 복도가 있었는데, 세트가 만들어지기 전에 거기서 사람들과 시뮬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웃음)"
-이어 붙이면 500m짜리 기차 세트가 압권이다.
"극 초반 반란군이 꼬리칸에서 감옥칸까지 한번에 통과하는 장면을 찍으려면 최소 4칸은 연결해야 했다. 제작비 4000만 달러(약 450억 원)를 들였는데 예산 대비 만족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제작비가 1, 2억 달러였으면 기차 칸도 더 많았을 것이다. 타이트하게 준비한 대로 정확하게 찍었다. 예산 절감을 위해 칸을 더 줄이라는 압박도 있었지만 더 늘리고 싶은 마음에서 받아들일 수 없지 않나. 감독이 예산 탓하면 안된다. (웃음) 극중 수족관 칸은 유리, 물고기 모두 컴퓨터그래픽이다."
-기차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조명은 어땠나.
"세트 촬영이 많았던 만큼 조명도 거의 다 통제된 것이다. 실제로 기차를 타 보면 칸에 들어오는 빛이 묘하게 움직이지 않나. 영화 속에서도 조명기를 움직여 이를 극대화한 장면이 있다. 횃불 전투신에서는 변화무쌍한 빛의 움직임을 보여 주기 위해 실제로 횃불을 밝히고 찍었다. 인위적인 조명을 비추면 신을 망칠 것 같았다. '레디'라고 외치면 불을 붙였다. 부상 위험도 있었는데 무사히 마쳤다."
-설국열차 제작자로 나선 박찬욱 감독과의 관계는.
"우리의 정신적 지주였다. 설국열차와 선배님의 할리우드 데뷔작 '스토커' 촬영기간이 겹친 탓에 나는 체코, 그분은 미국 뉴멕시코에서 전화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찡얼거리기라도 할라 치면 '내가 더 힘들다'고 하더라. 할리우드 시스템에서는 감독이 힘을 못 쓰지 않나. 촬영 막바지에야 체코로 찾아왔었다. 선배가 캐스팅 아이디어도 많이 제안했다. 열차의 절대자 윌포드 역의 에드 해리스가 그렇다. 원래 이 역은 더스틴 호프만을 염두에 뒀었지만 그가 '다른 일정과 겹쳐 체코까지 갈 수 없다'고 해 무산됐다. 박찬욱 선배가 10명의 윌포드 후보를 줬는데 그중 에드 해리스가 있어서 '아! 이사람이야' 했다."
-설국열차를 돌직구 같은 영화라고 했는데.
"스토리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했다. 정말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였다. 인간 사회의 모습을 단순화하고 극단화시켜 보여 주는 SF 장르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기차 안의 생존자다. 그 틀 안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었으면 한다. 물론 상징을 읽어내자면 끝이 없을 수도 있다. 구구절절 생각하기 보다는 역동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극중 신격화된 엔진이 인상적이다.
"엔진은 기차를 움직이는 힘을 만든다. 옛날 기차로 치자면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은 영국 산업혁명의 대명사 격으로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있게 한 핵심 요소다. 엔진 자체가 한 체제나 시스템을 상징하는 셈이다. 영구동력기관을 만들려는 인류의 시도는 상징적인 욕망이다. 엔진을 신격화한다는 것은 기차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곧 자본주의가 영원했으면 하는 기득권의 바람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다. 설국열차에서도 엔진의 실체가 드러난다. 일단 관객들에게 엔진의 신비한 느낌은 보여 줘야 했기에 아티스트들이 매달려 엔진칸 디자인만 수백 장을 했다."
-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읽히는데.
"인간은 항상 새로운 체제, 시스템에 대한 갈구가 있다. 지금의 시스템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극중 반란의 리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꼬리칸에서 나와 기차라는 더 큰 시스템을 접하게 된다.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는 다른 차원에서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출을 원한다. 그 시스템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도 담았다. 극 말미 윌포드가 커티스를 유혹하는 장면이 그러한데, 그 달콤한 유혹이 관객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랐다. 윌포드의 대사도 철저하게 그의 입장에서 쓰려고 했고, 촬영 당시 에드 해리스에게도 '최선을 다해서 관객들에게 윌포드의 논리를 설득시켜 달라'고 주문했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사회학과를 졸업했는데, 학교 다닐 때 영화 동아리에만 매달려서 사회학은 잘 모른다. (웃음) 설국열차는 장르가 SF인 만큼 사회학이나 정치학 개념을 담고 있다. 우리 영화는 직설적이다. 비행기 이코노미 좌석에 끼어 와서는 내릴 때 비즈니스 석에 넓게 펼쳐져 있는 신문을 보면서 드는 일상의 기분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압축해서 기차라는 독특한 공간에 녹여낸 것이다."
-열차가 곧 세상인 시나리오를 쓸 때 어려움은.
"2010년 1월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히더라. 먼저 영어 이름이었다. 한국 영화할 때는 이름을 지으면서 인물에 정을 붙이고 시작했는데 영어권 이름은 그게 잘 안 되더라. 원작 만화에서 가져온 이름은 하나도 없다. 예전에 봤던 외국 소설, 영화, 드라마를 뒤지며 며칠을 고민했다. 또 다른 어려움은 극중 인종 배분이었다. 결국 너무 고민하지 말고 쉽게 가자고 생각했다. 굳이 인종 배분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는 자와 죽는 자의 운명이 시나리오를 쓰면서 자연스레 갈리더라.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결말도 마음에 든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극중 아이들의 인상이 강렬하다.
"두 번째 장편 '살인의 추억'(2003년)을 준비하면서 실제 9차 사건의 피해자인 김미정 양의 사진을 갖고 다녔다. 만약 살아 있다면 지금쯤 직장인이 됐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순화됐지만 그 아이는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조사를 위해 사건 현장을 돌아보면서 분노가 끓어 올랐다. 연쇄살인범 문제를 떠나 1980년대라는 시대가 그 아이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에 말이다. 세 번째 사건에서 범인을 체포했다면 네다섯 번째 피해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가 그 아이를 지켜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 체험이 영화적 패턴이 된 것 같다. 체제나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사회적 약자가 나오기 마련인데 그 정점에는 아이들이 있다."
-전작 '괴물'(2006년)에 이어 또 다시 송강호 고아성을 내세웠다.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성격이다. 무엇보다 비빌 언덕이 있었으면 했다. 시나리오 완성되기 전에 두 사람을 캐스팅했는데 효과가 컸다. 짧은 영어로 체코의 촬영 현장에서 씨름하다가 저 멀리서 두 사람의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리면 이번 영화도 한국에서 찍었던 전작들의 연장선이라는 편안함이 생기더라. 송강호 선배는 내가 존경하는 세계적인 배우다. 선배가 외국의 명배우들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내 생각을 확인하고, 외국 배우들에게도 충격을 주고 싶었다."
-할리우드의 러브콜은.
"제2의 이안 감독이 될 생각도, 설국열차를 발판으로 삼을 마음도 없다. 차기작은 '옥자'라는 한국 영화다. 괴물을 내놓은 뒤 할리우드에서도 시나리오를 받고 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어떠냐는 것이다. 나를 매혹시키고 흥분하게 만드는 이야기 말이다. 창작자로서 연출자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발라드가 대세라고 랩하던 가수가 발라드를 할 수 없듯이 말이다."
-자신의 영화 속편을 만들 생각은 없나.
"나이가 들다 보니 '이 속도로 영화를 찍으면 몇 편이나 만들까?' '제작자와 투자자가 나를 언제까지 원할까?'라는 계산을 하게 되더라. 새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괴물2가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설국열차도 속편이 나왔으면 한다. 하지만 감독은 내가 아닐 것이다. 속편이나 리메이크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른 하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으니까." 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한강에 괴물이 산다 봉준호가 말하는 <괴물>
[필름 2.0 2005-07-19 20:00]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이 세 번째 영화로 오랜 꿈의 프로젝트 <괴물>을 들고 나왔다. 머릿속 괴물의 구상에서 크랭크인까지, 앞으로 넘을 무수한 산들까지 봉준호 감독을 통해 <괴물>을 듣는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영화가 있고, 그렇지 않은 영화가 있다. '한강변에 괴물이 출몰해 일가족이 사투를 벌인다.' 지금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거기까지다. 단지 스포일러의 차원이 아니다. 영화가 나온 뒤 시각적으로 보지 않고선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PPP, '더 리버'라는 가제로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이 제작 발표를 한 이후, 프리프로덕션에만 근 9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간 '더 리버'라는 가제가 <괴물>로 바뀌었고, 해외 유수의 비주얼 업체와 영화의 주요 캐릭터인 괴물의 비주얼 협력이 성사됐다. 영화의 주무대가 될 한강 답사도, 괴물과 사투를 벌일 주인공 강두 가족의 캐스팅도 모두 정비되었다. 마침내 지난 6월 29일 기대작 <괴물>이 크랭크인하기까지 제작사는 아닌 말로 괴물의 꼬리 하나조차 드러내길 꺼려했다. 촬영과 후반 작업을 합쳐 앞으로 1년 반 이상의 기간, 봉준호 감독은 영화 속 괴물과 맞서 싸우는 강두 일가족 못지않는 정력으로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한다.
"이미 18년 전, 고등학교 때부터 준비해온 프로젝트다. 전작 <살인의 추억>의 성공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영화의 기술력이 이 정도 수준을 해낼 수 있기 때문에 2005년 이 시점에 <괴물>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하고 싶어서 그냥 할 뿐이다."
영화 한 편을 준비하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봉준호 감독이 <괴물>을 구체화시킨 건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01년 여름,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봉준호 감독의 첫 장편영화 <플란더스의 개>에 후한 점수를 주었던 제작사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가 "다음 영화는 함께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때 봉준호 감독은 세 번째 작품으로 '한강에 괴물이 출몰하고 사람들이 괴물에 맞서 싸운다'는 짤막한 내용을 내놓았다. 하루 이틀의 생각도, 갑작스런 결정도 아니었다. 한강변에 괴물이 등장한다는 다소 얼토당토않은 설정은 이미 봉준호가 감독을 꿈꾸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이미지였다. 당시 잠실 장미아파트에 살던 학생 봉준호에게 한강은 낯선 곳이 아니었다. 심심하면 공놀이하고, 물에 떠내려온 썩은 물고기를 보며 낄낄대던 생활의 공간이었다. 바로 그 즈음 수험생 봉준호의 눈에 각인된 '똥덩어리 같이 시커먼 물체가 한강의 교각을 올라가는 모습'은 그 수험생이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는 반드시 영화화 해야 할 절대 과제로 남아버렸다.
'허걱'. 최용배 대표의 첫 반응은 이랬다. 다소 황당한 아이디어임을 봉준호 감독 역시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손수 영화의 비주얼 이미지를 준비했다. <살인의 추억> 때 배워두었던 '알량한' 포토숍 기술이 도움이 됐다. 당시 등화관제훈련 장면 등을 미리 비주얼화 해본 경험도 있었던 터라 자신 있게 준비할 수 있었다. 미리 찍어둔 한강 사진과 괴생물체의 결합. 제법 '쎄면서도' 아주 '조악한' 이미지가 완성됐다. 효력은 충분했다. "재밌겠다. 해보자." 황당한 괴생물체 사진 한 장에 최용배 대표가 흔쾌히 손을 들어주었다.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한강에서 괴물이 출몰하는 영화를 찍는다고 하자 주변 반응이 대뜸 이랬다. '이제는 애들한테 관심이 생겼냐?' '니 아들 보여 주려고 영화 만드냐?' 심지어 모 제작자는 '이번에 이무기 영화 찍는다며?'라는 말까지 하더라."
봉준호 감독만큼 주변의 편견에 이골이 난 사람도 없다. 굳이 <플란더스의 개>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다. 관객 570만의 흥행 기록을 세운 <살인의 추억> 역시 제작 초기엔 우려와 비난을 넘어 구박까지 감내해야 했던 작품이었다. 개봉 후에는 오히려 미덕이 되었던 실화가 소재라는 것이, 범인이 잡히지 않은 미 종결 사건이라는 것이, 뚜렷한 결론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 모두 제작 초기에는 영화를 죽이는 흠집으로 거론됐다. <괴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괴물=SF영화=한국영화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기술력과 시도'라는 등식이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비슷한 소재의 할리우드영화가 제 아무리 높은 완성도를 보여 줬다 해도, 또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아무리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SF 장르는 한국영화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넘어설 수 없는 금단의 영역. 봉준호 감독이 도전 의지를 불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괴물 생성에 초반 10분이 지나고, 30분 지나면 괴물 꼬리랑 발가락 끝이 나오고, 클라이맥스에 가서 주인공이 괴물과 멋있게 사투하고 처단하는 할리우드 괴물 영화의 룰은 따르지 않는다. 어느 날 강두 가족에게 닥친 수난사. 하지만 여러 가족의 차원에서 사투를 선택하고 '우리 한번 싸워볼까?'라는 허울 좋고 태평한 위기가 아니다. 절박하고 처절하고 따라서 눈물겹다."
지금 현재, 한강변을 배경으로 숨쉬는 캐릭터를 통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고통과 절박함을 전달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다. 통로는 '가족'이다.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주인공 박강두(송강호). 무기력과 무식으로 점철된 강두와 강두의 아버지(변희봉), 집안의 보배인 중학생 딸 현선(고아성), 집안의 유일한 대졸자로 하는 일없이 불평불만에만 능한 강두의 남동생 남일(박해일),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여자이지만 중성처럼 보이고 미련할 정도로 고집 센 여동생 남주(배두나)가 강두네 일가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한국식 가족의 타래, 헌데 실제 많은 가족들이 그렇듯 서로 무심하게 엮인 가족일 뿐이다. 그러나 유원지에 괴물이 끼어 들고 딸 현선이 괴물에게 집어 삼켜지는 순간, 가족에 관한 최초의 도식은 깨져버린다. 충격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행동이 된다. '한번 싸워볼까?' 정도가 아니다. 극심하고 절박하다. 분기탱천 일어선 강두 가족에겐 할리우드영화의 그 흔한 근육질 몸매도 없다. 어정쩡한 몸가짐, 어설픈 맨손. 화학 무기가 판치는 21세기에 볼썽사납게 총포상에서 빌린 조악한 총이 그들이 가진 무기의 전부다. 말 안 통하는 괴물, 그 보다 더 말 안 통하는 정부 당국과 강두 가족의 사투는 처절하다 못해 안쓰럽다.
"괴물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결해야 할 부분이었다. 연출부 두 명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완벽한 괴생물체가 등장해야 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지금은 다 결정이 나서 아주 행복한 상태다."
<플란더스의 개> 순제작비 9억, <살인의 추억> 순제작비 43억. 그러니까 <괴물>의 순제작비 90억은 봉준호 감독의 첫 장편 제작비의 10배, 국민 영화가 된 <살인의 추억>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봉준호 감독은 과감하게도 그중 절반을 뚝 떼어 영화의 메인 캐릭터라 할 '괴물 캐스팅'에 쏟아부었다. 괴물을 제외한 배우의 연기가 아무리 뛰어나도, 시나리오 완성도가 아무리 치밀해도 완벽하고 리얼한 괴생물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영화의 완성도는 기대할 수 없었다. 가장 그럴듯한 괴물의 제작은 이 영화가 반드시 풀고 가야 할 숙제였다. 하지만 그건 60~70년대 괴수 영화, 최근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를 제외하곤 한국영화에선 미지의 영역. 충무로에서 답을 찾긴 요원했다. 봉준호 감독은 해외영화의 앞선 기술력을 빌어오는 방법을 택했다.
전대미문의 비주얼을 선보였던 <반지의 제왕>의 비주얼 이펙트 제조업체 웨타 디지털이 괴물의 제조사로 처음 거론됐다. 웨타 디지털의 참여는 괴물의 퀄리티를 든든하게 보장해줄 것이 틀림없었다. 웨타 디지털이 작업하고 있는 피터 잭슨 감독의 <킹콩>이 끝날 즈음 <괴물>의 후반작업으로 넘어가는 스케줄도 딱 맞았다. 그러나 최종 계약 단계에서 문제가 생겼다. 웨타 디지털이 <괴물>이 아닌 다른 작품에 선뜻 손을 내밀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괴물> 제작이 주춤해질 거다, 최대 투자사인 일본의 해피넷 픽쳐스가 손을 뗄 거다 등등 여러 가지 우려가 여기저기서 불거져나왔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괴물은 이 영화가 안고 갈 핵심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고, 봉준호 감독은 이미 웨타 디지털 외에도 다른 스튜디오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곳은 바로 <씬 시티> <헬보이> <투모로우>의 비주얼 이펙트를 담당한 할리우드 비주얼 업체 오퍼너지다. 결국 오퍼너지가 <괴물>의 총시각 효과를 담당하기로 최종 결정됐다. 수퍼바이저 대부분이 ILM 출신인 이 곳은 ILM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 만든 곳으로 할리우드 시각효과 업체 중 최근 가장 각광받는 곳이다. <괴물>의 시각 효과는 그중 <쥬라기 공원 2> <스타워즈 에피소드 1> <샤크> 등의 CGI를 담당한 수퍼바이저 케빈 매거티가 전담한다. 초반 인서트 컷의 촬영이 끝나는 7월 말부터 배우들은 매일매일 실제론 보이지도 않는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연기를 해야만 한다. 봉준호 감독과 김형구 촬영감독 역시 후에 오퍼너지에 의해 창조될 괴물을 염두에 두고 촬영을 진행해야 하는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처음엔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아닌 말로 거의 하느님 흉내내는 거더라. 조물주가 된 거나 진배없었다. 메카닉한 것을 디자인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괴물은 하나의 생물체다. 어디서 먹고, 어디서 자고, 어디서 배설하고, 피는 어떻게 돌고, 이런저런 논리 구조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한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생물체가 아닌 거다. 꼬박 1년 넘게 괴물만 만들었다."
이보다 더 어려운 캐스팅은 있을 수 없었다. 지난 1년 3개월. 시나리오 3고가 나오는 인고의 시간 동안 봉준호 감독의 '괴물 오디션'에서 탈락한 캐릭터 수천 마리가 아직도 사무실 벽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고질라> <에이리언> <죠스>.... 하늘과 땅을 넘어 우주 공간까지 지금껏 스크린에 등장했던 모든 괴물이 총망라됐다. 차마 눈 뜨고 못 볼 돌연변이 생물체의 사진도 보는 족족 스크랩했다. 20~30종의 엄청난 수의 괴물이 대거 출연하는 것도 아니다. 딱 한 마리, 에이리언 정도 크기의 괴물이면 족했다. 게임 캐릭터 디자이너 장희철과 봉준호 감독은 시나리오 초고 단계부터 <괴물> 이야기를 담은 단 하나의 괴물을 만들어 나갔다. 무수한 괴물들이 '너무 외계인 같다' '너무 물고기 같다' '너무 못생겼다'는 이유로 떨어져 나갔다. 무조건 멋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백두산 천지에 출몰한 괴생물체도, 네스호에 출몰한 신비의 생명체도 아니라는 데에 봉준호 감독이 생각하는 괴물의 조건이 숨어 있다. 분명 낯설긴 낯설지만 지구 생명체, 어류, 양서류, 파충류의 변형이라는 조건을 달고 태어나야 했다. 피부 질감, 색채, 작은 주름살 하나까지 모두 '있을 법하게' 철저히 계산되어야 했다.
인물로 치자면 '연기력'이 괴물의 모양에도 세심하게 요구됐다. 사람을 집어삼킬 때 입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몸으로 가격할 때 하중이 어디에 실리는지, 척추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 관절은 어떤 모양새로 움직이는지.... 이 모든 동물학적인 이론들이 괴물의 디자인에 심각하고 중요하게 적용되어야 했다. 수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나온 주인공 괴물은 현재 영화의 미니어처, 갑옷, 소도구 등을 제작하는 업체인 뉴질랜드 웰링턴 웨타 워크숍에서 작업 중이다. 그곳으로 가 웨타 워크숍의 스탭들과 협력하는 장희철 디자이너는 아침 7시 30분에 기상, 2시간에 10분 휴식이라는 고된 일과로 괴물의 대형 사이즈 모형을 만들고 있다. 정교한 괴물 모형 제작은 3D 스캐닝을 위한 발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괴물 모형은 컴퓨터에 입력되고 애니메이터들에 의해 입이 벌어지는 모양, 피부 표면의 질감, 움직임의 변화 하나 하나가 분석된다. 이는 오퍼너지에서 CGI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되고, 그리하여 한강에서 살아 숨쉬는 괴물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한강 사진을 하도 많이 찍어서 이젠 한강이 우리집 같다. 미시적이고 세밀하고 집요한 헌팅이 수반됐다. 어느 시간대, 어떤 날씨, 어떤 각도, 어떻게 렌즈를 가져 가느냐, 물의 높이, 물이 깨끗할 때, 탁할 때의 차이 모두를 고려했다. 천변만화하는 한강의 표정, 그 표정을 <괴물>에 담고 싶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드라마와 관련이 있다. 일부러 장마철에 로케이션을 많이 잡은 것도 이유가 있다. 무슨 관광 홍보 영상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에 관련되지 않았다면 뭐하러 한강을 해부하겠나. 사람 하나를 놓고 2백개가 넘는 뼈 마디와 지구를 몇 바퀴 도는 혈관 하나하나를 다 분해하듯이 한강 하나를 놓고 다 해부해 버린 거다."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엔 부안 논의 여러 표정이 나온다. 똑같은 장소를 여섯 시간에 걸쳐 찍은 장면들이다. 같은 장소인데 시간, 광선, 바람에 따라 모두 다르다. <괴물>의 전체 공간 중 50%를 차지하는 한강 역시 똑같은 앵글에서 전혀 다른 물의 색깔, 물결, 공기 같은 것을 잡아내는 데 주력한다. 1차적인 문제는 한강의 재발견에 있었다. TV 드라마에서 주인공 남녀가 싸우고 나서 화해할 때 불꽃 쏘아 올리는 전경으로만 소모되었던 한강을 제대로 그리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서 편히 쉴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서민적인 공간으로서 한강이었다. 영화의 관건은 이 일상적인 공간에 이질적인 요소를 심어놓는 것이다. 괴물의 출현에 의해 한강은 가장 드라마틱하고 낯선 공간, 판타지가 숨쉴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평범한 일상에 괴물이 끼어드는 순간의 생경한 충격. 봉준호 감독은 <괴물>의 에너지가 뿜어 나오는 지점을 이 낯선 충돌에서 찾는다. <살인의 추억>에서 평범한 농촌 마을에 여자의 변사체가 끼어 들었을 때의 충격보다 어쩌면 더 센 충격이 <괴물>에 존재한다. 한강 둔치 위를 뛰어다니는 괴물의 등장을 기점으로 늘 보던 한강, 현실의 공간은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괴물의 구현이 CG면에서의 정점이라면, 한강은 실사 촬영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저기 농촌을 이 잡듯 뒤져낸 <살인의 추억>처럼 이번엔 서울에 있는 한강의 이 다리 저 다리, 하수구 하나까지 외울 정도로 헌팅을 했다. 한강의 양쪽 끝, 한강의 한복판 모두를 담았다. 그렇다고 스펙터클이 있는 건 아니다. 봉준호 감독은 M. 나이트 샤말란의 <싸인>에서처럼 과장되지 않은 스펙터클을 예로 든다. 어느 날 문득 스펙터클로 다가오는, 절제되고 긴장감 있는 스펙터클. 영화아카데미 20주년 기념으로 찍었던 <이공> 중 한 편인 'SINK & RISE' 역시 <괴물>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이런 맥락에서 염두에 두었던 부분이다.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변희봉의 이미지, 성산대교 주변의 원 신 원 테이크를 통한 로케이션의 느낌, 동시 녹음의 감 등을 거기서 먼저 테스트 해봤다.
"<괴물>은 지금 특별히 정치적, 사회적 이슈가 있는 것처럼 포장돼 버렸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전작에 대한 인식 때문에 그런 건가? 그런 맥락이 거론되는 것조차 장르적 편견이다. 매점 주인 강두는 119 구조 요원이나 대책 본부에서 브리핑하는 '높은 곳'의 사람이 아니다. '컵 라면 하나주세요'하면 '새우탕면 드릴까요? 김치사발면 드릴까요?'하고, 눈금 선까지 물이 넘칠까 고심하는 사람들. 그들의 일상에 재앙이 닥쳤을 때 그 충격의 깊이는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이 관객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지만 이 역시 거대한 오락 영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강두네 가족은 한강변에 나타난 괴물에게 당한 뒤 사투에 나선다. 괴물에게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 합동분향소에서 오열을 하고, 국가가 통제를 하겠다고 나서지만 이 모든 것들이 강두 가족의 고통과 수난에 도움을 주진 못한다. 어쩌면 <괴물>은 <플란더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이 건드렸던 한국 사회의 치부, 한국사회의 아이러니와 모순을 향한 일침의 연장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영화를 보게 될 관객들의 해석 여하에 달려 있지만, 어쨌든 감독은 지금 이 시점, 그것을 부인한다. 봉준호 감독은 그저 이 이야기가 가장 한국적인 오락 영화일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관객들은 생경하지만 너무도 사실적인 충격, 재해 대책 상황실의 4 곱하기 6짜리 모니터를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을 목도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여러 가지 부담이 왜 없겠는가. 5초 만에 접수되는 영화, 평범한 영화를 만드는 것엔 관심 없다. 철저하게 계획하려 노력하고,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게 만들려 한다. 이 모든 건 1년, 2년, 3년, 4년... 여러 해 전부터 준비해 오던 거다. 원효대교 위에서 춤을 추다 뛰어내리는 그런 황당한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아주 평온해진다."
이화정 기자
"저는 불량아빠에 워커홀릭 입니다."
영화 '괴물'의 봉준호 감독이 가정에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솔직한 평을 털어놔 눈길을 끌었다.
봉준호 감독은 17일 오후 부산 해운대 야외무대에서 열린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의 오픈토크에 참석, 영화팬들의 궁금증에 답했다.
봉준호 감독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한 여성 영화팬으로부터 가정에서의 모습은 어떻냐는 질문을 받은 봉준호 감독은 "불량아빠에 워커홀릭일 뿐"이라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은 "그래서 힘들게 가정생활을 유지해가고 있다"며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 연속해 호흡을 맞춘 송강호와는 그런 점에서 공감대가 있다며 웃음을 지었다.
봉준호 감독은 "송강호씨는 아무런 잡기를 모른다. 영화 일을 하고 술을 마시고, 또 술을 마시면서 영화 이야기를 한다. 술 마실 때조차 영화와 연기 얘기만 할 정도다"며 "그런 면에서 잘 맞고 공감대를 느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