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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에게 논쟁은 일상적이었다. '도그마 선언'에 이은 [백치들]의 파격, 여성혐오증에 대해 거센 비판을 받았던 [브레이킹 더 웨이브], '안티-무비'라는 표현을 얻기도 한 [도그빌] 등 그리고 최근 나치 관련 발언까지, 영화 안팎에서 그는 언제나 좋게 말하면 이슈메이커였고, 비하하면 말썽쟁이 같은 존재였다. 이런 행보는 최근까지도 여전하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개봉된 [님포매니악]은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에 이은 그의 '우울 3부작'을 완결하는 작품. 이 영화의 라스 폰 트리에는, 항상 그랬듯 과감하고 적나라하며 경계를 모른다.



아버지인 울프 트리에. 나중에 생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어머니인 잉거 호스트. 강한 자립심을 지녔던 여성으로, 라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공무원의 딸이었던 어머니 잉거 호스트(1915 ~ 89)는 독일 나치가 덴마크를 점령하던 시절 공산당에 가입해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1943년에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만난 울프 트리에(1907 ~ 78)는 유태인. 그도 나치를 피해 스웨덴으로 온 상황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결혼했고 1945년에 첫 아들 올레 트리에를 낳았다. 울프는 확고한 사회 민주주의자로 정치 경제학을 전공한 후 공무원으로 일했고, 어머니 잉거도 같은 분야를 전공한 후 공무원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56년 4월 30일, 그들은 둘째 아들 라스 트리에를 낳았다.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감독이 된 후의 예명이다.)


이 시기 트리에 패밀리는 전원 지역으로 이주했고, 라스는 숲과 자연 속에서 성장한다. 코펜하겐까지 기차로 45분 거리에 있는 라브네홀름 지역은 '리틀 스위스'로 불릴 정도로 삼림이 우거진 곳이었다. 집엔 수많은 책과 피아노와 그림들이 있었고, 부모의 교육 철학은 철저한 방임주의였다. 그들은 아이들을 훈육하는 것에 철저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성장기에 대해 '문화적 급진주의'라는 표현을 쓰는데, 나체 주의자였던 부모를 따라 종종 누드 캠프에 가기도 했고 여름엔 휴양지가 아닌 파리 같은 문화적 도시로 휴가를 떠났으며, 부모 손을 붙잡고 수시로 오페라 하우스와 극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어린 시절의 라스 폰 트리에.


라스의 생부인 프리츠 미카엘 하트만(왼쪽)의 젊은 시절 모습과, 20대 때의 라스 폰 트리에.

부작용도 있었다. 특히 강한 자립심을 지녔던 어머니는 라스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오히려 소년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었다.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하게 된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핵폭탄이 지구를 멸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래서 밤마다 홀로 지구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의식을 거행하곤 했다." 이후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라스 폰 트리에는 더욱 큰 삶의 절망에 빠지게 된다. 너무나 자유로운 가정생활과 엄격한 학교생활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보이 스카우트도 지원했지만 역시 적응하지 못했고, 심한 따돌림 속에서 '문제 아동'으로 찍혀 10살도 되기 전에 숱한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진단 결과는 '적응 장애'였다.


여기서 그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울프는 그의 생부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1989년 죽기 직전 유언처럼 진실을 털어놓았는데, 레지스탕스 시절에 만났던 프리츠 미카엘 하트만(1909 ~ 2000)이 생부라는 걸 이야기해 준 것. 유명한 음악가 가문의 후손인 하트만은 종전 후 관료로서 일했는데, 어머니 잉거의 상관이기도 했다. 유태계 아버지를 두었다고 30년 넘게 살았던 라스는, 독일계인 하트만이 아버지라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생부를 네 번 정도 만났으나 더 이상 만남을 이어가진 않았고,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유태계 아버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하지만 2009년 그는 자신의 종교적 지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주 형편없는 가톨릭 신자다. 아니, 점점 무신론자에 가까워지고 있다."




▶ 열 살 때 카메라를 잡다.


라스 폰 트리에가 11세에 만든 애니메이션 [스쿼시랜드 여행].


12세 때 배우로 출연한 TV 시리즈 [은밀한 여름].

곤경에 빠진 소년을 구원한 건 어머니가 쓰던 엘모 스탠더드 8mm 카메라였다. 열 살의 라스 폰 트리에는 카메라의 메커니즘에 단숨에 사로잡혔다. 특히 외삼촌인 보르게 호스트는 당시 다큐멘터리와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기술 쪽 일을 하던 영화인이었는데, 그의 편집실은 어린 폰 트리에의 가장 좋은 놀이터였다. 이후 외삼촌은 조카에게 오래된 스플라이서(필름을 자르고 붙이는 도구)를 선물했고, 폰 트리에는 낡은 16mm 필름들을 자르고 붙이며 놀곤 했다.


그의 첫 영화는 직접 촬영한 것이 아닌, 기존의 필름을 이용한 편집물이었다. 삼촌의 편집실에 굴러다니던 바퀴벌레에 대한 다큐 필름과, 덴마크의 거장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가 만든 걸작 [잔 다르크의 수난](1928) 16mm 필름 일부분을 주워다 교차 편집시킨 몽타주 필름이었고, 직접 필름을 채색해 흑백을 색채 필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직접 카메라로 촬영한 첫 영화는 11세 때 만든 2분짜리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인 [스쿼시랜드 여행] Turen til Squashland (1967)이었다.


※ 영상 보러가기 : [스쿼시랜드 여행] (1967)



14세에 만든 [왜 도망칠 수 없는 곳에서 도망치려 하냐고? 왜냐하면 겁쟁이이기 때문에].


15세에 만든 [꽃]. 라스 폰 트리에가 직접 출연했다.

1968년 라스 폰 트리에는 지역 신문에 실린 오디션 공고를 보고 배우에 도전한다. 덴마크와 스웨덴이 공동 제작하는 아동용 TV 시리즈 [은밀한 여름] Hemmelig sommer (1968)의 주인공을 뽑는 자리였는데, 연출을 맡았던 토마스 윈딩은 당시 폰 트리에가 "영화의 메커니즘에 대해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어느 위치에 서면 어떻게 보인다는 걸, 12세 소년이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아역 배우가 된 폰 트리에에게 가장 좋았던 건, 3주 동안 '합법적으로' 학교에 안 가도 된다는 사실.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무비 스타'라며 빈정거리며 놀렸지만, 당시 폰 트리에는 자신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돈을 버는 능력을 지닌 아이였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 받았던 돈은 3,000크로나. 그 돈으로 자신이 만든 단편영화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전자 오르간을 구입했다.


은행 강도에 대한 1분짜리 단편 [굿나잇, 디어] Nat, skat (1968)는 최초의 실사 영화. 그리고 다음 해엔 [체스 게임] Et skakspil (1969)과 [너무나 지루한 경험] En røvsyg oplevelse (1969)를 만든다. 이때까지는 모두 8mm로 제작된 1 ~ 2분 길이의 초단편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1970년, 그는 [왜 도망칠 수 없는 곳에서 도망치려 하냐고? 왜냐하면 겁쟁이이기 때문에] Hvorfor flygte fra det du ved du ikke kan flygte fra? Fordi du er en kujon 라는 긴 제목의 단편을 만든다. 7분짜리로, 그가 최초로 나름의 극적 구성을 시도한 영화였다. 그리고 그 해, 라스 폰 트리에는 14세에 학교를 그만둔다.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이후 그는, 영화는 물론 독서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더욱 빠져든다. 이때 만든 [꽃] En blomst (1971)은 15세 소년의 작품이라고 보기엔 놀라운 완성도를 지닌 작품으로 한 소년과 꽃 한 송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비장미를 만들어낸다.


※ 영상 보러가기 : [왜 도망칠 수 없는 곳에서 도망치려 하냐고? 왜냐하면 겁쟁이이기 때문에](1970)


※ 영상 보러가기 : [꽃] (1971)




▶ 코펜하겐 대학과 필름그룹 16


젊은 시절의 라스 폰 트리에.


코펜하겐 대학에서 만난 마르틴 드라우지 교수.

3년 동안 학교에 다니지 않고 영화와 문학과 회화에 빠져 있던 라스 폰 트리에는 17세에 다시 학교에 도전했지만 두 달 만에 자퇴 반 퇴학 반으로 그만둔다. 이후 그는 건축 노동자로 용돈을 벌었고, 어머니의 사무실에서 잡일을 하기도 했다. 군대에 갈 생각도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받았던 정신과 치료 전력 때문에 거부당했다. 뭉크에 매료된 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지만, 그의 작품을 받아주는 전시회는 없었다. 롱 코트에 부츠를 신고 스카프를 맨, 비쩍 마른 틴에이저는 끊임없이 몸부림을 쳤다. 예술 아카데미, 저널리스트 스쿨, 국립연극학교 등에 들어가려 했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다. 외삼촌이 교사로 있던 덴마크 영화학교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소설을 쓰기도 했지만 수많은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 결국, 그는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했고, 1976년 스무 살에 코펜하겐 대학 영화과에 들어간다.


대학에서 그는 웬만한 교수보다 영화에 대해 더 많이 아는 학생이었다. 이때 그의 유일한 스승은 바로 마르틴 드라우지였다. 도미니크 수도사였던 그는 1953년에 덴마크로 건너와 영화 평론 활동을 하며 루이스 브뉘엘을 연구했고 잉마르 베리만에 대한 수업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권위자가 되었다. 그는 폰 트리에와 사제지간을 넘어 친구 사이가 되어 시간 날 때마다 영화 이야기와 함께 농담을 주고받았고, 폰 트리에의 단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오키드 가드너]의 라스 폰 트리에.


섹슈얼한 테마가 두드러지는 [멘테 - 축복 받은 자].

대학에서 그는 두 편의 단편을 연출했다. 하지만 영화과에서 만들지 않고, 16mm 작업을 하던 '필름그룹 16'(filmgruppe 16)에서 연출한 것이었다. 첫 작품은 [오키드 가드너] Orchidegartneren (1977). 37분짜리 흑백 영화로 그는 제작비를 위해 잔디를 깎았고, 영사기사가 되었으며, 공군 격납고에서 일하기도 했다. 폰 트리에가 직접 주인공 빅토르 마르세 역을 맡아 불안감, 성 정체성, 엘리자라는 여성에 대한 사랑 등을 표현한다. 실험 영화적 성격이 다분한 작품이다. [멘테 - 축복 받은 자] Men the - la bienheureuse (1979)는 마조히즘 문학의 대표작인 [O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으로, 역시 상징적인 이미지와 섹슈얼한 아이콘이 두드러진다. 아테네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두 작품에 대해 "영화의 스타일에 대해 고민했던 흔적들"이라고 평가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항상 영화감독이 되려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인정받는 많은 감독도 처음엔 모두 웃음거리였다. 모두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과거 한 번 낙방을 경험했던 덴마크영화학교에 입학한다.


※ 영상 보러가기 : [오키드 가드너] (1977)




▶ 덴마크 영화학교


영화학교 재학 당시의 라스 폰 트리에.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게르트루드]. 폰 트리에가 최고로 꼽는 작품 중 하나다.

"나는 학교라는 제도에 반대한다. 대신 실습과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라스 폰 트리에지만, 덴마크 영화학교는 그가 자신의 비전을 펼치며 다듬을 수 있었던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가 영화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오키드 가드너]가 교수진의 좋은 평가를 얻었기 때문. 1979년에 들어간 영화학교 생활은, 하지만 좌충우돌이었다. 당시 함께 학교에 다녔던 동료 중 하나인 아케 산드그렌은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그는 강하고 고집불통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미 그는 장차 자신이 펼칠 영화적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영화적 아이디어와 현실적 실천 사이의 장벽은 없었다. 그는 현장에서 그 어떤 결정을 할 때에도 두려움 따위는 지니지 않았다."


내성적이면서도 도발적이고, 거침없이 이야기하면서도 때론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라스 폰 트리에. 함께 학교에 다녔던 친구들은 그가 마치 귀족처럼 제멋대로 군다고 놀렸고, '라스 트리에'에게 귀족들의 이름에 들어가는 '폰'(von)을 넣어 '라스 폰 트리에'라고 불렀다. 그는 이후 감독이 되었을 때 이 이름을 사용했는데, 역시 귀족이 아니었음에도 귀족 이름을 사용했던 조세프 폰 스턴버그나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 등의 명감독들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단지 동료들과 충돌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그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매료되어 있었는데(초기 '유럽 3부작'엔 그 영향력에 강하게 드러난다), 나치 점령을 경험한 덴마크에서 이런 영화적 취향은 용납되기 쉽지 않았다. 특히 학교 과제로 포르노를 만들겠다고 기획서를 제출했을 땐 퇴학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영화학교에서 만든 첫 필름 영화 [야상곡].


졸업 작품인 [해방의 이미지].

그럼에도 그는 우여곡절 끝에 영화학교를 마쳤고, 1980년엔 [지식의 나무] Kundskabens træ 라는 장편영화 현장을 경험했으며, 다섯 편의 비디오 프로젝트를 비롯해 세 편의 필름 영화를 완성했다. 특히 이 시절 그에게 큰 성과가 있었다면, 덴마크 영화 박물관에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영화를 접했던 것. [게르트루드](1964)는 그가 최고의 영화로 꼽는 작품인데, 라스 폰 트리에는 특히 드레이어의 삶에 매료되었다. 천재였지만 덴마크에서 추방당했고 돌아온 후에도 힘들게 살아가야 했던 드레이어를 통해 라스 폰 트리에는 예술가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드레이어가 항상 시대의 흐름에 저항했기에 그를 존경한다. 나는 저항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들은 결국 순교자가 되며, 숱한 편견 속에서 살아간다."


영화학교에서 그가 만든 첫 영화는 [야상곡] Nocturne (1980)이었다. 빛에 민감한 한 여성이 침입자의 악몽을 꾼다. 이후 그녀는 예정했던 여행을 가지 못한다. 모노크롬 스타일로 촬영된 이 영화는 이후 초기 장편영화에서 그가 보여준 비주얼의 세계를 예견하게 하는 작품으로, 1981년 뮌헨에서 열린 유럽학생영화제에 초청받았고 가장 흥미로운 단편으로 평가받으며 수상했다. 이것은 덴마크 영화학교 사상 최초의 해외 영화제 수상이었다. [라스트 디테일] Den sidste detalje (1981)은 35mm로 촬영된 갱스터 영화로, 일종의 패러디 코미디라고 할 수 있으며 상영될 때마다 수많은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해방의 이미지] Befrielsesbilleder (1982)는 57분 분량의 졸업 작품이었다. 1945년 코펜하겐을 배경으로, 라스 폰 트리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감독 중 하나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으며, 그의 스타일이 무르익었음을 보여준다. 덴마크 영화학교에서 만들어진 작품 중 최초로 극장 상영이 이뤄진 영화이기도 하다. 당시 덴마크 영화계에서 가장 강력한 유망주였던 라스 폰 트리에는 학교 졸업 후 곧장 상업영화계에 뛰어들게 되고, '유럽 3부작'을 통해 명성을 얻게 된다.


※ 영상 보러가기 : [야상곡] (1980)


※ 영상 보러가기 : [해방의 이미지] (1982)




▶ '유럽' 3부작: [범죄의 요소], [에피데믹], [유로파]


1, 2. 모노크롬 톤의 [범죄의 요소] 화면. 비주얼에 대한 폰 트리에의 야심이 잘 드러난다.


처음부터 기획한 건 아니지만, 라스 폰 트리에의 필모그래피는 여러 개의 '3부작'으로 구성된다. 그 첫 케이스인 '유럽 3부작'은 과거와 미래의 시점을 배경으로 유럽이라는 공간의 트라우마를 다루는데 그 시작은, 라스 폰 트리에의 장편 데뷔작인 [범죄의 요소](1984) 다. 원제는 '유럽의 마지막 여행자'였던 이 영화는 느와르에 대한 감독의 강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카이로에서 13년 만에 유럽으로 돌아온 피셔 형사(마이클 엘픽)가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을 담는다.


데뷔작인 만큼 투자를 받는 과정에서 난항이 있었으나 영화의 모든 장면을 꼼꼼하게 그린 스토리보드로 돌파했다. 영어 대사와 독일 표현주의 스타일을 교차하는, 덴마크적인 느낌은 배제되고 할리우드 필름 느와르에 충실하게 다가갔는데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기술상을 수상, 폰 트리에는 자신의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도 있었으나 심사위원장이었던 더크 보가드가 극렬히 반대되어 기술상에 머물렀다고 주장했다. "나는 리얼리티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 영화들은 '영화'일 뿐"이라는 말은 데뷔작 [범죄의 요소]를 통해 그가 전달하는 영화 철학. 덴마크에선 37,000명이 관람하며 흥행에 실패했지만, 프랑스에서 폰 트리에는 거의 록스타 대접을 받으며 파리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1, 2. [에피데믹]에 출연한 폰 트리에 감독(왼쪽)과 작가 니엘스 보르셀. '영화 속 영화' 형식으로, 리얼리티와 허구의 경계를 흐린다.


나름 선방한 데뷔작 이후 몇 편의 프로젝트가 무산된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헨릭 폰토피단의 [죽은 자들의 왕국]을 옮길 예정이었으나 실패했고, 2차대전 시기 폴란드와 독일이 배경인 영화도 좌절되었다. [대발작] (The Grand Mal)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기획해 유럽의 정신적인 면을 조명하려 했는데, 펀딩 과정에서 감독 자신이 갑자기 흥미를 잃었다. 그는 스스로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에 돌입했고, 이때부터 그는 수많은 CF를 찍으며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는데 1985년 코펜하겐 공항 CF를 시작으로 '엑스트라 블라데트'라는 타블로이드 신문 CF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칸광고제에서 수상했고 컬트 팬을 거느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90년대 중반까지 광고 연출을 통해 생계와 자신의 프로덕션을 유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만든 [에피데믹](1987)은 '영화 속 영화' 형식으로, 폰 트리에와 작가인 니엘스 보르셀이 영화 속 감독과 작가로 직접 등장한다. 그들은 전염병이 유럽 전역에 돈다는 내용의 시나리오를 개발하는데, 실제 세계에서 전염병이 돌게 된다. 폰 트리에는 [에피데믹]에서 전작의 스타일리시한 모습에서 벗어나 테크닉을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역시 칸영화제에 초청받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전반적으로 좋은 평을 받아 몇 개 나라에 판매되었다. 하지만 정작 자국인 덴마크에선 개봉 과정이 녹록치 않았으며 총 관객 수는 5,000명 수준에 머물렀다.



[유로파]의 올드하면서도 압도적인 비주얼들.


 

 

한편 이 시기 덴마크 영화는 작은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었다. 사실상 칸에서 [에피데믹]을 압도했던 영화는 가브리엘 악셀의 [바베트의 만찬] (1987)이었으며, 이 영화는 덴마크 영화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했다. 빌 어거스트의 [정복자 펠레] (1988)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후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런 흐름에 폰 트리에가 합류하게 된 작품이 바로 [유로파] (1991)였다. 칸에서 심사위원상. 예술공헌상, 기술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유럽' 3부작의 완결이기도 했다.


1945년 종전 후 '독일 영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멜로와 스릴러가 접합되어 있는 영화로, 올드하면서도 압도적인 비주얼로 주목받았다. 칸에서 폰 트리에는 시사회 전부터 걸작이라고 떠들었는데, 황금종려상 수상에 실패하고 다른 상을 타자 시상식장에서 수상 인증서를 집어던졌고 심사위원장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대해 '난쟁이'라는 인신공격을 했다. 이 사건은 영화제 최고의 스캔들이 되었고 라스 폰 트리에는 거의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다. 덴마크에선 31,000명이라는 실망스러운 스코어에 머물렀다. 하지만 의외의 반응이 왔다. 이 영화를 본 스필버그가 연출 제의를 해온 것. 하지만 극도의 비행공포증으로 미국에 갈 수 없는 폰 트리에는 조용히 사양했다.




▶ [메데아]와 젠트로파


1, 2. [메데아]의 독특한 비주얼.


[에피데믹]과 [유로파]사이에, 라스 폰 트리에는 [메데아](1988)라는 TV 영화를 만든다. 유리피데스의 고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폰 트리에는 자신의 우상인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이 1960년대에 쓴 [메데아] 시나리오를 사용했다. 당시 드레이어 감독은 시나리오만 완성한 채 영화를 완성하진 못했던 것.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이미 드레이어는 세상을 떠났고 폰 트리에에 의해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그는 [메데아]에서 여전히 비주얼 실험을 한다. 3/4인치 비디오테이프로 촬영한 후 35mm 필름으로 옮긴 것을 다시 1인치 비디오테이프로 변환한 것. 그 결과 입자의 독특한 질감과 함께 이미지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회화적인 질감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평단은 혹평을 퍼부었고, 비주얼에 비해 내용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을 했다.



라스 폰 트리에의 파트너, 프로듀서 페테르 알백 옌센.


젠트로파에서 제작한 [올 어바웃 안나].

한편 1988년에 폰 트리에는 페테르 알백 옌센이라는 프로듀서를 만난다. 동갑내기인 그들은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었고, 어머니의 강요로 공산당에 가입한 적 있었으며, 덴마크 국립영화학교 출신이고 극도로 일탈적인 성향이 있었다. 옌센의 제작사는 파산지경이었고, 폰 트리에도 두 편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의기소침했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유로파](1990) 만들었고 1992년에, 공장 지대의 버려진 담배 공장에 '젠트로파' (Zentropa) 라는 이름의 영화사를 만들었다. 한 동안 CF 제작으로 돈을 번 그들은 수익을 모두 기자재 구입에 투자했고, 1994년엔 제작 전 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젠트로파는 1990년대 말에 일련의 하드코어 포르노를 제작하는데, 이것은 메인 스트림에 속한 영화사로서는 최초의 사례였다. 대표작으로는 [콘스탄스] (1998) [핑크 프리즌] Pink Prison (1999) 등이 있으며, 약간 수위가 낮은 [올 어바웃 안나] (2005)는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젠트로파의 포르노는 여성 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후 페미니즘 포르노 감독들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젠트로파는 협력사들의 압력으로 더 이상 포르노를 만들지 않게 되었다.




▶ TV 시리즈 [킹덤]


[킹덤]의 섬뜩한 이미지.


해설자처럼 등장한 라스 폰 트리에.

오랫동안 TV 시리즈 제작과 연출을 기획했던 라스 폰 트리에는 젠트로파 설립 후 [킹덤] (1994~97)을 내놓는다. 어릴 적부터 그를 사로잡고 있었던 유령 이야기로서, 영화가 촬영된 오래된 병원(1910년 설립)에서 영감을 얻어 구체적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과학과 정신의 세계가 충돌하고, 현재와 과거가 뒤엉키며, 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섬뜩한 일들이 일어나는 [킹덤] 시리즈는 멜로드라마의 구조와 호러 장르가 묘한 지점에서 만난 작품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건 데이빗 린치 의 TV 시리즈인 [트윈 픽스](1990). "나는 [트윈 픽스]를 좋아하지만, 이 시리즈에서 린치 감독의 영화적 분위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트윈 픽스]를 좋아했던 걸까? 그건 [트윈 픽스]가 린치의 '왼손으로 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킹덤]이, 폰 트리에가 영화를 만들면서 받았던 압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철저하게 즐겼던 작업이라는 걸 말하는데, 그는 아주 쿨하게 "예전에 혹시라도 나를 좋아했던 관객이 있다면 [킹덤]을 보고 내가 상업적인 감독이 되어 버렸다면서 구역질을 할 것이다. 맞다. [킹덤]은 완전한 상업적 기획이다. 난 돈이 필요하다." 1994년에 '시즌 1'에 이어 1997년에 '시즌 2'가 나왔고, 폰 트리에 감독은 '시즌 3'으로 완결할 예정이었지만 닥터 헬머 역을 맡은 에른스트-휴고 재레가드가 1998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이루지 못했다. 한편 [킹덤]은 4시간 40분에 달하는 극장판으로도 전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큰 흥행을 거두었고, 2004년 미국에서 [킹덤]으로 리메이크되었다.




▶ 도그마 선언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베르그.


'도그마 영화' 1호인 [셀레브레이션].

1995년 라스 폰 트리에는 동료 감독인 토마스 빈터베르그와 함께 '도그마 선언'을 한다. 파리에서 열린 영화 100주년 기념 컨퍼런스에서 발제를 하게 된 폰 트리에는, 두 번째 세기를 맞이한 영화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주 구체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 작성하는 데 빈터베르그와 45분이 걸렸다는 '도그마 95 선언문'은 이른바 '순수의 서약' 10개 항이 그 핵심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로케이션 촬영만 해야 한다. 소도구와 세트는 사용되어선 안 된다. 소도구가 필요하다면, 그 소도구가 있는 곳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해야 한다. ② 이미지 없이 사운드가 존재해선 안 된다. 즉 동시 녹음이어야 한다. 음악은 그 신이 촬영되고 있는 장소에서 들리는 것이어야 한다. ③ 핸드헬드 방식으로 촬영되어 한다. ④ 컬러로 촬영되어야 하며, 특별한 조명 사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노출이 안 나오는 장면은 편집에서 잘라낸다. 정 조명이 필요하다면 카메라에 부착된 램프 한 개만 사용해야 한다. ⑤ 후반 작업의 옵티컬 효과와 촬영 때 필터 사용을 금한다. ⑥ 피상적인 액션, 즉 가짜 연기를 담아서는 안 된다. 살인이나 총기 사용 장면 등을 금한다. ⑦ 시공간적 소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 즉 영화는 과거나 미래 시제로 가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어야 한다. ⑧ 장르 영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⑨ 필름 포맷은 아카데미 35mm이어야 한다. ⑩ 크레디트에 감독 이름이 올라선 안 된다.



덴마크 이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첫 '도그마 영화'인 [연인들].


변혁 감독의 [인터뷰]는 일곱 번째 '도그마 영화'였다.

여기에 두 감독은 "나는 감독으로서 개인의 취향을 자제할 것을 맹세한다. 나는 더 이상 아티스트가 아니다. 나의 최상의 목표는 나의 캐릭터와 배경에서 진실을 뽑아내는 것이다. 나는 그 어떤 탐미적인 것도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이를 이행할 것을 맹세한다. 이로써 나는 순수의 서약을 행한다." 라고 선언문을 맺는다.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100년 전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메인 스트림 안에서의 아방가르드 선언으로서 점점 커지는 제작비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을 반대하며 영화의 순수성을 지키자는 외침이었다. 첫 도그마 영화는 빈터베르그의 [셀레브레이션](1998). 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이후 폰 트리에의 [백치들](1998) 과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소렌 카우-야콥슨의 [미후네](1999), 그리고 크리스티안 레브링의 [왕은 살아 있다](2000) 가 이어졌다.


[유로파]의 주인공 레오폴드 역을 맡았던 프랑스의 배우 장 마크 바가 연출한 [연인들](1999)은 덴마크 이외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첫 도그마 영화였고, 하모니 코린의 [줄리언 동키 보이](1999)는 영미권의 첫 시도였다. 그리고 한국영화인 변혁 감독의 [인터뷰](2000)는 '도그마 7호'로 선정되었다. 도그마 사무국은 나름의 심사를 거쳐 인증서를 발급했는데, 마지막 도그마 영화는 이탈리아의 [코시 x 카소](2004). 35번째 도그마 영화였다. '순수의 서약'을 100% 준수한 영화는 없었지만, 스스로 도그마가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기도 했지만,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도그마 선언'과 그 영화들이 세기말과 세기 초의 가장 인상적인 행동주의라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 '골든 하트' 3부작: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에밀리 왓슨.


마지막 장면. 종이 울리고 그녀는 구원 받는다.

라스 폰 트리에가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6) 를 기획한 건 [유로파] 작업을 끝낸 1991년이었다. 덴마크 영화학교 시절 '에로티시즘을 넘어서는 에로틱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포르노를 만들려 한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이번엔 '제대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펼치게 된 것. 영감을 준 텍스트는 두 가지였다. 먼저 사드의 '쥐스틴'. '박해받는 순결함'에 대한 소설로, 순수한 여인 쥐스틴이 겪게 되는 고통과 타락의 운명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텍스트는 어릴 적 읽었던 동화. 그가 '골든 하트'라는 제목으로 기억하는 동화의 주인공은 한 소녀인데, 숲 속에서 모든 것을 나눠 준 후 벌거벗은 상태에 먹을 것도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동화의 마지막 장이 찢긴 상태여서, 폰 트리에는 항상 그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했다고 한다.


여기서 이른바 '골든 하트' 3부작이 탄생했는데, 세 편의 영화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비인간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순수함과 선량함'에 대해 다룬다. 첫 이야기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위해 맹목적이며 백치에 가까운 헌신을 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덴마크에서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한 작품이다. 여주인공 베스 역엔 원래 헬레나 본햄 카터가 캐스팅되었지만, 시나리오를 재차 읽으면서 섹스 신에 도저히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중도 하차했다. 이에 당시 연극 말곤 이렇다 할 경력이 없었던 에밀리 왓슨이 역할을 맡았다.



[백치들]의 한 장면.


[백치들] 현장의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이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를 '국제적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았는데 마틴 스코시즈는 199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한 편으로 [브레이킹 더 웨이브]를 꼽았고, 폴 토마스 앤더슨은 "폰 트리에의 짐꾼이라도 하고 싶다" 라고 말했으며, 조니 뎁은 "라스 폰 트리에가 언제라도 역할만 준다면 오케이다. 나는 이미 준비되었다."고 했다. 덴마크 왕실은 1997년에 기사 작위를 수여하기도 했다.(이후 폰 트리에는 작위를 반납하며 덴마크 왕족들은 "성질 더러운 단순한 놈들일 뿐"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백치들](1998)은 두 번째 도그마 영화로, 이탈리아의 마르코 페레리 감독이 만든 [그랑 부프] La Grande Bouffe (1973)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 어느 성에서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이 음식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덴마크 뉴시네마의 본격적인 시작인 [위크엔드] (1962)도 영향을 주었는데, 덴마크에서 섹슈얼리티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영화였다. 백치 흉내를 내는 집단이라는 아이디어는, 휴양차 갔던 고향 근처 숲에서 만난 일군의 사람들에서 얻었다. 10여 명의 젊은이가 사회와 단절된 삶에 대해 실험하면서, 정신 장애를 겪는다는 설정을 통해 각자 '내면에 있는 백치'를 발견하며 치유하고 있었던 것. 여기서 라스 폰 트리에는 '아웃사이더'라는 테마를 선택했다. 이 영화의 적나라하고 실제 성 묘사는 이후 [로망스] (1999), [베즈무아: 거친그녀들] (2000), [정사] (2001), [브라운 버니] (2003), [나인 송즈] (2004) 등의 영화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어둠 속의 댄서]의 한 장면.


칸영화제의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비요크.

그리고 [어둠 속의 댄서](2000)를 통해 폰 트리에는 드디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1967년 이후 덴마크 최초의 뮤지컬인 이 영화는 한 여성의 힘겨운 모성에 대한 이야기. 체코 출신인 셀마(비요크)는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살아간다. 시력을 잃어가는 그녀는 부당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처한다. "[어둠 속의 댄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 뮤지컬을 더한 것" 이라는 폰 트리에는 셀마 역을 물색하던 중 'It’s So Quiet' 뮤직비디오를 보았고 비요크에게 연락했다. 연기 경험이 있긴 했지만, 자신은 뮤지션이라고 생각했던 비요크은 처음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하지만 폰 트리에는 그녀가 바로 셀마라고 생각했고, 결국, 비요크은 현장에 서게 되었다. 셀마 그 자체가 되길 원하는 폰 트리에의 욕심과 완벽주의에 비요크은 매우 고통스럽게 연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과는 대단한 성공이었고 그녀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베스가 맹목적인 희망을 간직하고, [백치들]의 카렌(보딜 예르겐센)이 고집스런 믿음을 이어가듯, 셀마도 극단적인 상황에서 삶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특히 기계 소리에 맞춰 셀마가 춤추고 노래하는 공장 뮤지컬 신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도그마 선언'에서 벗어난 라스 폰 트리에는 [어둠 속의 댄서]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든 비난하는 사람이든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느끼게' 만든다.




▶ '미국' 미완성 3부작: [도그빌], [만덜레이], [워싱턴]


[도그빌]의 그레이스, 니콜 키드먼.


[만덜레이]의 그레이스,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어쩌면 [브레이킹 더 웨이브] 때부터 조짐이 있었지만, 라스 폰 트리에의 미국 이야기는 [도그빌](2003)에서 시작된다. 그 어조는 매우 비판적이었고 극단적 형식 실험이 수반되었다. '그레이스'라는 여성 캐릭터를 따라가는 이 영화들은 [워싱턴]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아 '미완성 3부작'으로 남아 있는데, 그가 [도그빌] 시나리오를 쓰게 된 계기는 중 하나는 2000년 칸영화제에서 겪은 일. 미국에 가본 적 없는 폰 트리에가 미국 배경의 [어둠 속의 댄서]를 만든 것에 대해 "당신은 만들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자 "미국인들이 모로코에 대해 잘 알아서 [카사블랑카](1942)를 만든 건 아니.다"라며 반박했던 것.


그리고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흐르는 노래 '해적의 제니'가 영감을 주었다. "아주 강렬했고 내가 매우 좋아하는 복수의 테마를 가지고 있었다. '해적의 제니'의 배경이 외딴 마을이었기 때문에 영화 배경으로도 외딴 장소가 필요했고 로키 산맥으로 정했다.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지만, '로키'(rocky)는 동화에 나오는 이름처럼 들렸다. 시대적 배경은 대공황으로 정했다. 그 시대라면 적당한 분위기를 조성할 것 같았다."



[도그빌]의 세트.


폰 트리에가 시니리오를 쓴 [디어 웬디].

여기엔 정치적 영향력도 있었다. 2001년 덴마크 선거 결과 이민자들(특히 이슬람)에게 적대적인 우파 정치인들에 의해 이민법이 강화된 것. 그리고 9.11 테러 이후 부시는 '악의 축'을 소탕하기 위한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미국과 함께, 이민자나 도피자에게 가혹한 사회를 아울러 비판한다. 스튜디오에 선 몇 개를 그은 후 한 마을을 표현하는 파격적인 단순성은 역시 브레히트 연극의 간소하고 뼈대만 남은 듯한 연극에서 영감을 받은 것. "무대 위에 집 같은 것이 있으면 관객은 마을을 떠올리면서 인물에게 집중할 수 없게 된다"는 게 그의 지론. 그리고 "미국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마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덧붙인다.


그레이스 역은, 이전부터 폰 트리에와 작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던 니콜 키드먼이 맡았다. "나는 시나리오를 키드먼을 위해, 아니 내가 가지고 있는 그녀의 이미지에 맞추어 썼다. 그녀는 매우 훌륭한 배우였고, 차가운 역을 주로 맡았던 여배우에게 신선한 역할을 맡겨 보는 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이어지는 [만덜레이] (2005)는 노예 제도가 남아 있는 남부의 만덜레이라는 마을 이야기. 그레이스는 그곳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원래는 니콜 키드먼이 [만덜레이]는 물론 [워싱턴]까지 3부작에 모두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도저히 스케줄 조절이 불가능했고, 결국 [만덜레이]엔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그레이스로 등장한다. 한편 같은 해 폰 트리에는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디어 웬디] (2005) 시나리오를 쓰는데, 미국 사회의 총기 문제와 폭력을 이야기한다.




▶ 코미디: [오! 마이 보스!]


[오! 마이 보스!]의 한 장면.


2. [에릭 니체의 젊은 시절]에서 라스 폰 트리에를 모델로 한 에릭 니체. 조나탄 스팡이 역할을 맡았다.

[도그빌]과 [만덜레이]에 이어 '미국' 3부작을 완성할 [워싱턴] 제작을 앞두고, 그는 프로젝트의 연기를 선언한다. [워싱턴]을 만들기엔 아직 역량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처음으로 코미디 영화에 도전한다. '오피스 코미디'인 [오! 마이 보스!] (2006)는, 2000년 이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흐른 것에 대한 반성이자, '도그마 선언' 이후 10년이 된 시점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결과물. 그는 [아이 양육] (1938)이나 [필라델피아 스토리] (1940) 같은 할리우드 스크루볼 코미디가 [오! 마이 보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며 여기에 슬랩스틱 요소가 결합되었다고 밝혔는데, 그러면서도 그 기저엔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


형식적으로는 '오토마비전'(Automavision)이라는 시도를 했는데, 현장 여러 곳에 카메라를 설치한 후 찍은 장면들을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무작위로 선정해 화면을 구성하는 것으로, 묘한 긴장감을 준다. 한편 폰 트리에는 2007년 [에릭 니체의 젊은 시절](2007) 시나리오를 쓴다. 야콥 투에센이 연출한 이 영화는 폰 트리에가 덴마크 영화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로 역시 코미디다. 당시 영화학교와 덴마크 영화계의 실제 인물을 토대로 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폰 트리에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흐른다.




▶ '우울' 3부작: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


[안티크라이스트]의 한 장면.


현장의 윌렘 대포와 샤를로뜨 갱스부르 그리고 폰 트리에 감독.

50대에 접어든 라스 폰 트리에를 잠식한 건 우울증이었다. 코미디 장르를 시도했던 [오! 마이 보스!] 이후, 마치 조울 현상과도 같이 그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때 그를 다시 현장으로 끌어들인 영화는, 그가 "내 영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말하는 [안티크라이스트](2009)다. 샤를로트 갱스부르와 폰 트리에의 동행이 시작된 이 영화는 이른바 '우울' 3부작의 시작으로, 이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들은 바로 감독 자신이의 분신들이기도 하다. 일단 '우울' 3부작이 나오게 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소 길지만, 그의 얘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2년 전(2007년)부터 나는 우울증을 겪었다. 나에겐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 어떤 일도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게 하찮았다. 일을 할 수 없었다. 6개월 후, 나는 시나리오를 썼다. 일종의 치료였지만, 한편으론 내가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테스트였다. 시나리오는 완성되었고, 그다지 큰 열정 없이 촬영되었다. 평소에 영화 만들 때 쓰는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의 절반 정도만 사용한 영화였다."



[멜랑콜리아]의 한 장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커스틴 던스트.

자기 치료의 일환의 써내려 간 시나리오엔 일반적인 절차나 방식이 적용되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무의미해 보이는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논리적이거나 극적인 사고와 동떨어진, 생뚱맞은 이미지들이 등장했다. 당시에 혹은 이전에 꿈꾸었던 폰 트리에 자신의 꿈에서 온 이미지들이었다. 영화의 주제는 '자연'. 하지만 그 접근 방법은 뭔가 다른, 좀 더 직접적인 방식이었다. 좀 더 개인적인 방식이기도 했다. 영화에 그 어떤 도덕적 코드도 없었고, 플롯 전개에서 '필수적인 것'들만 있을 뿐이었다.


비탄에 잠긴 부부가 숲 속의 오두막에서 살아가면서 치유의 과정을 가지려 하지만 점점 악화되는 과정을 그린 [안티크라이스트]는 "점점 호러로 변해가는 심리 스릴러"이자 "호러와 포르노의 결합"이었다. 평론가들이 [브레이킹 더 웨이브] 때부터 지적해 온 여성 혐오증이 정점에 달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했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두운 내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후 영화들은 모두 감독의 내면을 비춘 거울 같은 작품들이다.



[님포매니악]의 스테이시 마틴이.


프로모션 이미지.

[멜랑콜리아] (2011)는 아예 우울증을 제목으로 내걸었고, 여기엔 감독이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지구 종말'의 공포가 결합된다. 비행공포증을 비롯 수십 가지의 공포증을 앓고 있는 라스 폰 트리에. 특히 이 영화는 폰 트리에 영화의 독특한 결 중 하나인, 웅장하면서도 로맨틱한 그 무엇이 리얼리티와 충돌할 때의 느낌이 잘 살아 있다. 원래는 키어스틴 던스트 대신 페넬로페 크루즈가 주인공이자 감독의 분신인 저스틴 역을 맡기로 했다는 후문. 하지만 결국 던스트 차지가 되었고, 그녀는 [안티크라이스트]의 갱스부르에 이어 또다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멜랑콜리아] 작업이 끝났을 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촬영감독인 마누엘 알베르토 클라로에게 "중견 감독들이 빠지기 쉬운 덫에 빠지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남자 감독이 나이가 들어가면 점점 젊은 여배우들을 캐스팅하고, 노출 수위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다. 폰 트리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 나는 당시 내 차기작에 더 젊은 여성이 더 벗고 나오기를 완전히 의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최근작 [님포매니악]에서 '색정광'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조(스테이시 마틴/샤를로뜨 갱스부르)라는 한 여성이 겪는 육체적 오딧세이를 그린 이 영화는, 섹스의 본질에 대해 파고들면서 수학, 음악, 과학 그리고 낚시까지 동원해서 독창적인 유머를 만들어낸다.




▶ 2024년 프로젝트: [디멘션]


라스 폰 트리에와 작가 닐스 푀르셀 그리고 프로듀서 페테르 알백 옌센.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폰 트리에. 티셔츠에 'PERSONA NON GRATA', 즉 '기피 인물'이라고 써 있다.

아직 공식적인 차기작이 발표되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의 차기작이 될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1991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매년 유럽의 한 지역을 3분 동안 카메라에 담는다. 그렇게 33년 동안 담긴 필름들은 총 99분의 영화가 되고,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완성된다. 현재 [디멘션] Dimension이라고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라스 폰 트리에가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걸 목격한 후 떠올린 것. 현재 개봉 예정일은 2024년 4월 30일인데 이날은 바로 그의 68번째 생일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디멘션]에 대해 "시간이 스타인 영화"라고 말한다.


글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