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 평론가 생활을 오래하다가 '카페 느와르'로 영화 감독 데뷔를 하였다.[1] 영화를 감독하면 책을 내겠다고 약속을 했었기 때문에 감독 데뷔에 맞추어 '필사의 탐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 두권의 책도 출판되었다.
국내 평론가 중에서도 영화를 심도 깊게 평론하기로 유명하다. 동료 영화 평론가 허문영이 평가하기를, "누군가 정성일의 어떤 하나의 평론보다 더 뛰어난 평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정성일처럼 매순간 모든 영화에 대해서 평론가의 자의식으로 대결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한국에서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글이 좀 어려운 경향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어렵게 써서 그런것도 있지만 정성일 본인이 젊었을때 했던 번역가 시절의 문체가 남아 있어서 그런 문체가 되었다. 스스로도 이 때문에 문체가 엉망이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가뜩이나 어려운글이 번역체로 써있다고 생각해보라(…) 흠좀무
영화 잡지 키노에서 글을 기고할 때부터 이미 이 분야에서는 유명인사였다. 책도 언젠가 영화 감독이 되면 출간하겠다고 할 정도로 글을 모아 출판하는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의 글을 모아놓은 웹페이지는 정성일 본인이 만든게 아니라 팬인 만든 것인데, 정성일의 저서에도 이 사이트에 대한 언급이 나올 정도로 실로 대단한 사이트.
정성일이 좋아하는 한국인 영화 감독은 임권택, 김기덕, 홍상수가 있다. 이중 임권택과 김기덕에 관해서는 정성일 본인이 제작, 편집의 이름으로 책을 냈을 정도.[3]
이름 모를 예술 영화나 감독을 자주 추천하기 때문에 허세를 부린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정성일의 경우 영화제의 심사위원 등을 맡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소개할 때도 자주 있다. 물론 이유는 좋은 영화를 모두와 함께 보고 싶어서. 당연히 허세라는 표현은 부당하다.
2000년 제 1회 전주 국제 영화제의 초대 프로그래머로서, 영화제의 중심 목표인 디지털, 독립 영화라는 특성, 현재도 진행되는 프로그램들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다만 전주시와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사표 내고 본인이 만들다시피 한 영화제와 인연을 끊은 것은 유명한 흑역사. 결국 그 해 정성일 평론가가 빠진 전주 영화제는 급하게 치뤄져 휘청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천영화제 사태 이전에 이미 영화제에 정치권이 손대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지 보여주었던 사례.
그 후 2007년에 시네마 디지털 서울 (이른바 CinDi) 이라는 영화제를 세워, 현재까지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영화제를 꾸려나가고 있다. 스타일은 아시아 신인 감독들의 디지털 영화라는 점에서 위의 전주 국제 영화제와 비슷하다.
박찬욱, 곽재용, 이준익 감독과는 데뷔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잡지 '말'에 연재하기 전에는 입에 풀칠하느라 글도 더 쉽고 단순하게 썼었고, 정성일 본인이 혐오하는 별점평가까지도 했었다. 스스로도 이때를 흑역사로 생각하고 있고, 이때의 필명을 밝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팬들의 노력으로 당시 필명이 '정예린'이었고 이때의 글들도 다 찾아놨다(…) 남의 흑역사를 들춰내지마!
[1] 영화 인터뷰글이 올라와있다. (#) [2] 질 들뢰즈의 잠언 [3] 직접 쓴것은 아니다. 임권택에 관한 책은 인터뷰 모음이고, 김기덕에 관한 책은 편집에 참여했다
I LOVE CINEMA 정성일, 정성일 식으로 말하다
정성일, 그는 블록버스터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허망한 영화들 속에서 전투적인 심정으로 다시 후 샤오시엔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영화 속 맘보 리듬이 얼마나 깊고 넓은 파장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자기 식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번 볼 가치가 없는 영화는 한 번 볼 가치도 없는 영화' 라면서.
후 샤오시엔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
상대를 껴안기와 혼자서 흔들기, 당신의 춤은?
나는 아직도 영화를 두 번 볼 때 배운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실 영화를 한 번 보고 알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나는 여기에 DVD를 다루는 이 잡지의 미덕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안하지만 나는 홈시어터 설비에는 관심이 없으며, 대부분 그런 멋진 홈시어터를 갖춘 집에 가서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DVD 컬렉션 목록을 보고 한숨을 내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영화를 한 번 보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영화를 한 번 더 보아야 할지 아니면 잊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일뿐이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두 번 볼 만한 영화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에 몰려가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집단적 낭비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더욱이나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천만 명씩 몰려가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다. 나는 인구 4천7백만 명의 나라에서 단 한 편의 영화를 천만 명이 보는 현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 나라 영화의 빈곤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충무로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혹은 그 기괴한 현상을 보고 한국 영화는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그것은 시장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 거기에는 절망이 있을 뿐이다. 영화는 서로 다른 취향을 존중하고, 서로 다른 견해를 나눌 수 있는 바탕에 놓여야 한다. 어쩌면 나는 서문을 빙자하여 푸념을 너무 길게 늘어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해해주시길. 이 난에 ‘두 번 볼 만한’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 내 자리에 대해서 나 스스로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진 채, 이 어이없는 상황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지금, 여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이 글은 더 없이 공허하게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글을 일종의 전투적인 심정으로 쓰는 중이다. 당신은 영화를 일상생활의 구경거리로 생각하시겠지만,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은 사건처럼 보일 수도 있으시겠지만, 세상에는 영화에 관한 자기 자신의 입장을 걸고 세계관의 내기를 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나에게는) 그 내기의 일부이다. 그러니 비통한 심정을 안고, 하지만 희망을 걸고 이 글을 읽어주시길.
감상법을 교정하라, 그래야 그들의 영화가 보인다
(거두절미하고) 내 생각에 지금 영화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감독은 두 사람인 것 같다. 한 명은 데이빗 린치이고, 다른 한 명은 후 샤오시엔이다(만일 한 명 더 넣는 것이 허락된다면 마노엘 데 올리베이라이다. 그런데 올리베이라는 많이 나아갔다기보다는 차라리 신기한 영화를 ‘발명’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한동안 영화는 이제 더 이상 더 멀리 나아가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고다르에게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조립된 세계가 되었으며, 타르코프스키에게서 시간은 시각적 물질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영화는 사실상 자기가 영화임을 부정하였다. 그 다음에 포스트 모던이 찾아왔다. 영화는 그 자신을 조롱하였다. 영화는 스스로 자신을 패스티시 그 자체라 불렀고, 시뮬라크라 덩어리라 지칭하였으며, 심지어 아무리 진정성을 추구해도 궁극에는 키치의 재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며 낄낄거렸다. 그리고 서둘러 영화의 종말이 선언되었다(90년대에 나온 많은 영화 이론서들의 제목들, 혹은 결론들). 그런데 데이빗 린치와 후 샤오시엔은 다른 자리에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영화의 화법을 끌어안았다. 내가 가장 놀랍게 생각한 것은 그 두 사람의 영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영화를 보는 방법을 교정시켰다는 점이다. 그것이 새로운 세기의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과거의 영화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영화에 다가가면 그 사유의 방식을 (롤랑 바르뜨의 표현을 빌리자면) ‘캐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야기의 앞과 뒤를 버렸다. 혹은 그 중간의 과정을 뒤집었다. 그것은 영화의 필연적 법칙과 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어떤 경우에도 중간부터 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DVD로 중간부터 보거나, 처음 보는 영화를 되돌려서 특정 부분부터 다시 보는 것은 사실 ‘반칙’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를 스스로 배신하는 일이다. 영화란 보면서 스스로의 기억과 경쟁하는 예술이므로.
중단과 반복, 혹은 중단의 연속인 비디오의 화법으로
데이빗 린치는, 혹은 후 샤오시엔은 영화에서의 기억과 구조라는 그 두 개의 메커니즘과 다툰다. 그러나 이 말이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야기의 기억, 혹은 주인공의 기억이 아니라 그것이 서술하고 있는 방식의 기억이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이어 붙일 때 구조의 일시적 붕괴가 일어난다. 하지만 그 붕괴 자체가 구조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그 붕괴 속에서 테마를 찾는다면 영화의 화법에서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물론 이것은 파졸리니가 영화에서 자유간접화법을 말하면서 가장 먼저 제기했던 문제이다. 그러나 파졸리니는 그것을 자기 영화에서 실천하지 않았다. 파졸리니의 세대와 데이빗 린치, 혹은 후 샤오시엔의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시네아스트의 이름이 아니라 비디오의 체험이다(그것을 들뢰즈는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미처’ 쓰지 못한 그의 세 번째 영화 책 이름으로 ‘이미지-비디오’라고 불렀다. 잘 알다시피 들뢰즈는 자살하였다). 비디오는 화법의 중단과 반복, 혹은 중단의 연속이라는 체험을 안겨주었다. 그럼으로써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후’ 사건은 ‘이전’ 사건 이전에 올 수 있다는(혹은 그 역)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과거와 현재로 대립시키는 대신, 혹은 기억과 사건으로 연결하는 대신, 서로 다른 계열로 옮겨가는 매듭을 찾아내어 그 안에서 기억의 관점을 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 영화들의 새로운 출발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왕가위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혹은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같은 길을 가는 시네아스트들이다. 그들도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데이빗 린치나 후 샤오시엔만큼 밀고 나가지는 않고 있다.
복잡한 시간-기억 구조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운 영화
후 샤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는 (내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오랫동안 계획된 영화는 아니다(서둘러 말하자면, 나는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다음 기회에 이 관점의 연장선에서 논할 것이다). 그는 <해상화>가 끝난 다음 사실 <타이페이 블루스>라는 영화에 매달렸다. 이 영화는 동경에서 ‘사고치고 도망친’ 노쇠한 야쿠자가 타이페이에 오는 이야기이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혹은 만들면서 수없이 이야기를 고치는 후 샤오시엔의 스타일 때문에 알아도 소용없지만), 주연은 기타노 다케시로 정해져 있었다(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타노의 스케줄 때문에 자꾸만 미뤄지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타이페이를 방문했을 때 후 샤오시엔은 내게, 일단 그 영화는 미뤄둔 채 <밀레니엄 맘보>라는 이름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0년의 일이다. 그런데 그때는 방송국에서 일하는 나이 들고 이제 한물 간 DJ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대만 가요에서부터 테크노, 펑크, 뉴 웨이브, 혹은 슈가 팝에 이르는 음악들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후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나는 그 음악적 스펙트럼이 의외로 넓다는 사실에 늘 놀라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기대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이 영화를 보았다. 선입관은 무서운 것이어서,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거의 종잡을 수 없었다. (도대체 그 DJ는 언제 나오는 거야?) 그래서 두 번째 다시 보았을 때 비로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이번에는 그 순서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밀레니엄 맘보>는 왕가위의 <동사서독> 이후 가장 복잡한 시간-기억 구조를 가진 영화이다. 물론 그 둘이 그것을 사유하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 이 영화는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이야기를 복기해 보면 의외로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보고 “소녀 비키가 그녀의 스무 살 시절을 보낸 다음 통한의 마음으로 십년 전을 돌아보는 영화”라고 한 다음 중언부언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대부분의 글들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것과 같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내 질문은 그 다음이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되었다는 건데? 후 샤오시엔의 논쟁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이페이의 바깥은? 오, 눈 내리는 유바리의 거리
첫 장면, 그러니까 비키(서기)가 어두운 밤길 푸른색 형광등이 켜진 기나긴 육교를 달려가는 걸 뒤에서 따라가는 카메라는 사실상 이 영화의 화법을 설명하는 계몽의 쇼트이다. 비키는 달려가다가 자꾸만 뒤돌아본다. 그 시간의 통과. 그 지나가버린 시간을 비키는 문득 문득 뒤돌아본다. 영화는 두서없이 돌아보는 그 시간을 배열한다. 이 영화의 모든 쇼트가 예외 없이 신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기억의 단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기억에 대한 두 개의 서로 다른 재현 방식을 지닌 쇼트-신이 있다는 점이다. 첫째는 그 쇼트가 하나의 신으로 완전하게 구성되어 있는 그 자체로서 자발적인 쇼트-신과, 그렇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일부가 삭제되거나 결여된 의지적인 쇼트-신이 있다. 그 둘 사이의 대조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후 샤오시엔은 그 안에서 기억의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을 통해 비키가 찾으려는 것과 잊으려는 것을 나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두 번째이다. 다른 하나는 외형적으로는 지정학적인 차이에서 온 분류이다. 타이페이에서의 쇼트는 예외 없이 롱 테이크 신이지만, 유바리에서의 신은 쇼트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후 샤오시엔이 새롭게 만든 것은 그것을 나누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붙이는 방법이다. <밀레니엄 맘보>는 두 개의 도시가 무대인데 하나는 타이페이이고, 다른 하나는 유바리이다(중간에 도쿄가 잠깐 나온다). 그런데 타이페이는 모두 실내 장면이다. 말하자면 타이페이는, 마치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 것처럼 밀폐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유바리의 장소로 이동한다. 의도적으로 후 샤오시엔은 타이페이에서 유바리로 가기 위해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나리타 공항에서 내려서, 동경으로 간 다음, 거기서 유바리로 가는 장면을 생략하였다. 그러니까 영화적으로 말하면 타이페이의 실외는 유바리이고, 유바리의 실내는 타이페이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도시가 상상적 공간으로 하나의 도시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불가능한 도시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타이페이와 유바리라는 서로 다른 도시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타이페이는 한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남국 도시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유바리엔 늘 눈이 오고 있다. 그러니까 눈이 오지 않는 도시 타이페이의 바깥으로 나가면 눈이 내리는 유바리의 거리이다. 여기서 후 샤오시엔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눈 내리는 거리이다. 혹은 비키가 기억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밀레니엄 맘보>는 단지 기억을 찾아가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기억의 새로운 방식에서 새로운 삶의 태도에 관한 배움을 말하는 중이다. 그것은 아시아에서 함께 살아가는 태도에 대한 사유의 제안이다.
여기서 그 둘을 연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비키가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물론 그녀의 연애가 실패한 것이다. 새로운 의미를 덧붙일 수 없을 만큼 그것은 자명하다. 후 샤오시엔에게서 중요한 것은 비키의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좀 더 정확하게 그 사랑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지점의 설정이다. 그러니까 이 사랑은 기억이 시작되었을 때 사실상 이미 끝난 것이다. 거기서 시작할 때 비키는 새로운 지점을 향해 나아가려는 몸짓을 하는 중이다. 그때 비키에게 주어진 세상은 깨어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다시 설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감싸여 있는 것을 열려는 순간을 잡으려는 것이다. 혹은 멈춘 세상을 움직이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후 샤오시엔에게 이 영화는 신세계의 사고방식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주어진 세상을 벗어나서, 새로운 세기에 살기 위해 주어진 세상을 찾는 것은 그것을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을 후 샤오시엔은 거대한 담론에서 시작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를테면 ‘허풍선이’로 판명 난 <매트릭스> 3부작!)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스펙터클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닫혀 있는 세상을 펼치는 일이다. 그것이 펼쳐질 때 후 샤오시엔은 그의 시간 여행을 보여주는 타임머신이라고 할 직진 카메라 이동을 등장시킨다. 눈 내리는 유바리로 향하는 한없이 기나긴 카메라의 수직 운동(이를테면 <연연풍진>의 첫 장면에서 기차와 함께 수직 운동하는 카메라, 혹은 <남국재견>에서의 첫 장면, 혹은 영화 중간에 언덕길을 오르는 오토바이와 함께 산 정상까지 단 한 개의 쇼트로 오르는 카메라). 그때, 그러니까 유바리에 와서야 비로소 영화는 자유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공간을 넘나들고, 인물 사이를 오가기 시작한다. 거기서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라는 믿음의 쇼트가 등장한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려면, 점핑! 세상으로 나오라
닫혀 있는 장소에서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것은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대하는 쇼트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 샤오시엔은 비키가 새로운 세기를 살아가기 위해서 그녀 스스로 배워가는 태도를 보려고 한다. 그것은 안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다. 세상으로 나오지 않으면, 그녀는 결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후 샤오시엔은 아시아에로의 점핑을 거기서 본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점핑이다. 그것 없이는 머물 뿐이다. 세상은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키가 꼼짝달싹 못하는 타이페이에 머문다면, 그래서 여전히 남자 친구에게서 머뭇거린다면, 그 끝날 줄 모르고 반복되는 테크노 음악의 선율처럼 같은 장소에 머물면서 그 삶을 반복한다면, 그녀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지 못할 것이다. 비키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세상의 차이에서 공존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밀레니엄 맘보>는 그것을 가르쳐주는 영화이다.
시간의 맘보, 끝이면서 시작이고 시작이면서 끝인…
그러나 후 샤오시엔이 거기서 낙관과 희망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복잡한 시간적 구조를 갖는 이유이다. 후 샤오시엔은 여기서 기억과 상상의 경계 사이를 미묘하게 병렬시킨다. 그래서 비키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고 말하는 중이다. 몇 번이고 다시 보면서 생겨난 생각은 비키가 유바리에 갔다 온 것은 그냥 그녀의 상상일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그녀는 타이페이의 테크노 바에서 두 일본 청년을 만난 다음 유바리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유바리에 다녀온 다음 갑자기 영화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거기서 이미 끝난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다시 유바리가 나올 때 단지 텅 빈 거리에 눈 내리는 영화의 거리만이 보여지는 장면에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것이 매우 이상한데도 후 샤오시엔은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희망과 함께 상실의 테마가 자리 잡는다. 그 둘의 공존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후 샤오시엔은 이 영화의 시간적 진행을 자꾸만 멈칫거리게 만든다. 나아갈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은 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시간의 맘보에 관한 영화이다. 발걸음을 내딛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돌아서 걸을 것인가? 거기에 희망이 있는가, 실망이 있는가? 그 질문들에 대답해야 할 것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우리들의 발걸음이다. 당신의 새로운 세기를 향한 춤은 세상을 함께 살기 위해 상대를 껴안을 것인가, 아니면 혼자서 흔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