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필요한 건 영웅뿐만이 아니다. 영웅적인 대통령 렉스 루터가 이끄는 메트로폴리스의 슈퍼맨이란 얼마나 무의미한 존재할 것이며, 광대 친구 조커가 아이들에게 매일같이 선물을 건네며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고담 시티에서 배트맨이란 또 얼마나 쓸 곳 없는 존재일 것인가.
현실 속 대한민국이라면 꼭 악당이 없더라도 박근혜 대통령처럼 반신반인의 위대한 영웅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영웅이 존재하려면 그 못지않은 악당이 있어야 하는 것이 만화의 법칙. ㅍㅍㅅㅅ의 만화 특집을 맞아, 황색 찌라시답게 우리가 준비한 것은 흔한 영웅 모음 대신 바로 그 악당 모음이다.
※ 주의 : 만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히무로 마사토(미악의 꽃)
등장인물 소개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남자...
그의 부모는 자본주의에게 살해당하였고, 그의 이모는 그에게 미군 상대로 매춘을 강요하였으며, 그의 여자친구는 (왠지 러시아인처럼 생긴) 불량학생에게 강간당하고 자살하였다. 그는 돈과 범죄에 복수하기 위해 얼굴과 함께 이름을 버리고 미남자 히무로 마사토로 태어나 악의 정점에 서려고 한다.
사회생활에 성공할만한 요소로 자신을 도배한 히무로 마사토는 원대한 야망과, 별 이유 없이 잘 나가는 아이돌을 파멸시키는 짓궂음 (악당의 2대 요소인 음험함과 쪼잔함)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를 위협적인 악당으로 만드는 진정한 능력은 따로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범위 안 인물의 지적 능력을 저하시켜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방사능이다. 이 방사능의 영향을 받은 자는 사고능력을 상실한 바보가 되지만, 수학적 계산 밑 지시수행은 문제 없애 해내어 작업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는 이 특수능력을 이용하여 감출 생각이 없는 고급 매춘업소를 운영하고, 노골적으로 코카인을 판매함에도 (유리가면에서 자판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급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불구하고 경찰의 의혹을 피하고 있고, 그의 범죄수단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아마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주의의 정상에 선 후, ‘바보 이반’의 나라처럼 화폐를 폐지하고 농경 사회로 회귀하여, 잉여문화를 억제하여 욕심을 탄압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발생하는 모든 악을 제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악의 꽃 2부를 기대해 보도록 하자.
한마 유지로(그래플러 바키)
무섭다(…)
지금은 바키의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인터넷 밈으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작중 그의 황당하면서도 미묘하게 SF적인 설득력을 갖춘 압도적인 강함은 여타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강자들과 비교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무력의 의의와 진정한 강함 등등을 짐승이 철학이라도 하는 마냥 토로하지만, 실제로는 이유 없이 원숭이를 죽이고 지 자식을 낳고 길러준 사람을 베어허그로 죽이는 등 힘자랑하는데 여념 없는 단순한 깡패였다. 더군다나 한때는 보디빌더에게 완력으로 밀리기도 하고, 마취총과 그물 앞에 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한때의 모습 덕분에 ‘유지로의 강함이 우주보다도 더 빨리 팽창하고 있다’는 설정을 대강 무마할 수 있었다. 이건 ’맛의 달인’의 우미하라가 노망에 걸리면서(…) 성격이 순해진 후, 자신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는 듯 뻔뻔스럽게 일본문화의 상징인 척 의젓하게 행동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이 진행되며 작가가 유지로를 통해 표현하고 싶어했던 ‘강함’의 정의는 보다 상대적으로 변화해가는 한편, 되려 거기에 개념적인 절대성을 부여하려는 듯한 정신승리 시도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결국 유지로는 ‘미국이 공인하였기 때문에 세계최강이 된 생물’이자, ‘너무 강한 나머지 살 의욕이 안 나는 권태기의 중년’이라는 미묘하게 비굴한데다가 소심한 정체성이 확립되고 만다. 갖은 악행에도 불구하고 악당이라고 쳐주기도 미흡한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도노반(베르세르크)
그가 남긴 희대의 명대사, “등짝을 보자!”
베르세르크 3, 4권에 걸쳐 잠시 등장하였을 뿐이지만 그는 가츠라는 캐릭터를 만든 악당이다. 근육질 육체와 전장을 누비는 공격적인 성격에서 볼 수 있듯, 도노반은 남성호르몬 분비가 과다하여 성욕을 통제하는 데에 애로 사향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흑코브라가 가녀린 소년의 통통한 흰 엉덩이를 눈앞에 두고 폭발하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다.
작중에서 그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돈을 줘서 책임을 공유하며, 죄책감을 모면하기 위해 가능한 한 소년에게 입힐 정신적인 상처를 덜고자 “등짝을 보자”라 속삭이며 자신의 행위를 외면한다. 그러나 동시에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가츠와는 진실된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매우 잔혹하고 인간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참고로 일본어 원어 버전에서는 그 인간적 고뇌를 드러내는 “등짝을 보자”라는 대사 대신 몹시 심심한 대사를 하는 관계로 그가 만화의 흔히 나오는 인종차별적인 감옥 강간마로만 보인다.
치세(최종병기 그녀)
생긴 건 이래도 세기의 대악당
‘최종병기 그녀’는 세카이계라는 개념이 확립될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올바른 감상법은 주연의 감정선에 주목하되 세계의 폐쇄성으로부터는 눈을 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현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이족보행의 영장류로 사람의 말을 하기 때문에, 독자로서도 시비를 잡을 권리 정도는 있을 것이다.
먼저 <최종병기 그녀>의 세계관에는 일본군이 존재하며, 일본을 봉쇄한 외부세력의 명칭은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영어를 주로 사용하고, 때때로 프랑스어가 보이기도 하니 UN이 틀림 없을 것이다. (… 아니면 캐나다던가) 일본이 고립된 상황에서 치세를 비롯한 주변인물들이 별다른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고 현실의 일본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으니 엄청난 미디어/ 교육통제가 행해지고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역시 직접 명시되지는 않지만 일본이 고립된 상태에서 세계를 상대로 방어전이라고 자칭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은, 우연히 강력한 병기를 개발하여 제2일본제국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외국과 시비가 붙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일행은 전쟁의 피해로부터 대체로 무사한 반면, 치세는 세계의 각 도시를 파괴하고 있으니 주인공은 평범한 소년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부유한 지역에서 거주하는 특권층일 것이다.
물론 작품은 치세를 탓하지 않고, 악의 포커스를 인류의 통제에서 벗어난 과학기술과 멋대로 여고생을 개조한 군대, 평화를 협상하지 않는 외부세력에 돌리지만, 이 무기가 사용자의 감정에 따라 쉽사리 삑싸리 난다는 것은 작중 드러난 바가 있다. 그리고 치세는 비록 병기이지만 평상시 풍족한 생활을 누리며 특권계층과 건전함 감정적 교류를 나누며 물질적, 사회적 욕구를 전부 충족하고 있다. 그렇다면 치세는 일본군이 마련한 풍족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틀어지는 바람에 대량학살을 일으킨 인간말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지구방위대인 미군마저 패배했으면 이제 세계에는 희망이 없다.
슈퍼맨(슈퍼맨 시리즈)
믿었던 슈퍼맨마저!
이라코 세이겐(시구루이)
칼잡이
남자라고!?
천민으로 태어나 도둑질로 연명하던 이라코는 살인의 손쉬움을 깨달은 이후 칼잡이가 된다. 하지만 칼 좀 쓴다고 일자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하릴없이 도장이나 격파하던 이라코는 코간류 도장에서 패배를 맛보고 여기에 입문한다.
이후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받고 후계자로 지목되기까지 하지만, 눈 마주치는 여자마다 후리는 버릇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사부의 부인과 불륜 관계가 탄로나는 바람에 시력을 빼앗기고 파문당한다. 그는 운 좋게도 은인을 만나서 밥도 얻어먹고 맹인검술도 전수받지만 은혜를 느끼지는 못한다.
이라코는 이렇듯 죄를 짓고 곤장을 맞은 후 곤장 때린 놈을 저주하는 유치한 심보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과장된 검술만화 캐릭터들을 통틀어도 손꼽힐 정도로 강력한 이와모토 코간을 능가하는 강자이다.
그는 눈이 멀고 약자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위를 향해 기어오른다. 그의 원동력은 야심이지만, 야심을 부채질하는 것은 철통같이 구조된 봉건사회에서 주어진 것 이상을 쥐려는 몸부림이자, 그러한 사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자기 신분에 대한 자기혐오이다.
이라코는 배은망덕하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악당이지만 사실 변호할 수도 있는 것이, 이 작품에는 그를 비판할 정도로 도덕적으로 온전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작 그나마 존경할만한 인품을 지닌 이라코의 은인은 그를 부정하지 않는다.)
류 (썬갓V)(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커플놈들
미에현을 지키는 정의의 합체로봇, 썬갓V 3호기의 파일럿.
1, 2호기가 하늘을 날고 땅을 가를 때 3호기는 썰물을 피해 조심조심 해변가를 달려야만 한다. 또한 썬갓V의 합체 메커니즘 상 도저히 3호기가 낄 구석이 없다! 썬갓의 프로토타입일지도 모르며, 사실은 전투에 참전하는 용도의 기체인지조차 모르겠지만 얼떨결에 3호기의 파일럿이 되어 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있다. 모친에게 생활을 의존한다고 치면 봉급도 그렇게 넉넉하지 않은 등 여러 불이익을 맛보고 있는 중이다.
미에현 보호세력이 어째서 썬갓3호기를 만들었는지는 수수께끼지만, 어찌되었든 류라는 인물은 모든 사회적 악을 대표하는 악당으로 변화하였다. 조직사회의 일원임에도 차별당하고, 약함을 자극 당함으로써 콤플렉스를 생성하고, 조직 내에서 해소할 수 없는 콤플렉스는 곧 악의로 돌변한다. 곧 내부로부터 외부의 악이 비롯된 셈이다.
정의의 영웅, 혹은 일시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 썬갓V가 라스트보스로 추정되는 류를 쓰러트린다고 하더라도, 구조적인 문제가 바뀌지 않는 이상 같은 타입의 악당은 또 다시 탄생할 것이다. 썬갓V는 악당을 해치울 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능력은 없는 것이다.
마치 아군이 적을 만들어내는 듯한 현실적인 악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으로, 혹시 TV시리즈가 제작된다면 필히 챙겨봄은 물론 값비싼 일본판 DVD도 구매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제는 쓸만한 감독이 재미있게 만들기를 기대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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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악당 열전 (2) – 코브라부터 데빌맨까지
크리스탈 보이(코브라)
크리스탈 보이
우주해적길드와의 끝없는 전투로부터 탈진한 코브라는 죽음을 가장하고 자신의 외모와 기억을 조작하여 샐러리맨 죤슨으로서 평범하지만 평화로운 생활을 보낸다. 하지만 죤슨은 우연히 자신이 코브라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새로운 자극을 찾아 우주를 도약한다.
비록 시작은 중년의 일상일탈을 다룬 아저씨만화 같았지만 ‘우주해적 코브라’는 주간소년점프에서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연재한 소년만화이다. 본 작품은 세계관의 핵심설정인 해적길드의 정체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각종 매체를 거쳐 수차례 재창작을 거쳐왔으나, 해적길드의 간부인 크리스탈 보이만큼은 코브라의 숙적으로서 그가 상대하는 악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잡아 주었다.
코브라 최대의 무기는 운과 유머지만, 그의 가장 상징적인 무기는 왼팔에 장착된 사이코 건이다. 이 무기는 스토리의 필요성에 따라 위력과 한계가 변동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역할을 맡는데, 크리스탈 보이는 특수재질로 만들어진 육체로 사이코 건을 씹어먹음으로써 강력함을 어필하고 절박감을 조성했다.
그의 최대의 매력은 코브라와 나란히 작품의 세계관을 축약하는 비주얼에 있다. 투명한 육체를 넘어 관능적으로 드러난 내장과 금색 골격, 그리고 얼굴에 덮인 철판은 그의 비인간적인 냉혹함을 노골적으로 그려냈으며, 오른팔에 장착된 집게는 사이코 건과 완벽한 거울 대칭을 이루는 악역다운 무기이다.
크리스탈 보이는 초반에 사망하는 단역 악당으로 설정되었으나, 우월한 디자인의 혜택을 받아 차후 코브라의 왼팔을 잘라낸 인물이라는 설정이 붙으며 그의 라이벌로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숙적이자 자신의 육체를 박살낸 원수인 코브라의 위장사망을 파악하지 못하고, 사이코 건을 보고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얼빠진 모습을 보이는 등 설정구멍의 희생자가 되었다.
사이코 건을 무시하는 육체, 사격을 무효화하는 분신술, 편이에 따른 부활능력 등 악당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춘 크리스탈 보이지만 위에 언급한 건망증 외에도 또다른 약점이 있다. 에너지 병기를 무효화하는 그의 육체는 의외로 실탄공격에 맥없이 금이 가고는 한다. 안습.
그리고 또 하나 흠을 잡자면, 지금까지 크리스탈 보이라고 적었으나 사실 그의 이름의 영문표기법은 Crystal Bowie. 즉 데이빗 보위와 성이 같으며, 크리스탈은 멋들어진 별명이 아니라 그의 진짜 이름이다. 이것은 스트리퍼들이 자주 사용하는 가명이기도 하다.
혈풍당(어둠의 도키)
혈풍당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래 결성된 혈풍당은 각종 무예와 기예에서 뽑아낸 실용적인 살인기술을 이용하는 암살자 무술가 집단이다. 오오타니는 전국시대의 종료와 함께 목적의식을 상실하고 살인집단으로 변모한 혈풍당에 실망하여 퇴출을 결행하지만, 그들은 비기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오오타니를 추적한다.
그는 은둔하는 동안 토키를 양자로 삼고 혈풍당의 비전을 전수하지만 결국 추적자들에게 살해당하고, 토키는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암살자들을 쫓는다.
토키는 수명의 혈풍당원을 죽이고 그들의 원수로 지목되지만, 그들의 지도자인 무묘사이는 야규 주베이가 이끄는 사무라이 집단의 암살자사냥으로부터 조직의 비전을 지켜내기 위해 원한을 잊고 목숨을 바쳐 토키를 지켜내고 그에게 혈풍당의 비기를 전부 전수한다.
혈풍당은 초인적인 무술실력과 기상천외한 암살기술을 터득한 강력한 적으로 등장하지만, 요코야마 미쓰테루 작품의 악역답게 불쌍할 정도로 비정하게 썰려나간다. 그들은 본인들이 인정할 정도로 동정의 여지가 없는 살인집단이지만, 그래도 평생을 가꾸어 완성한 암살기술만은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예술가적인 미련이 돋보이는 독특한 악역이다.
주인공 토키는 최후에는 선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혈풍당과 같은 어둠에 몸담은 자로서 사무라이가 대표하는 정도에 도전한다. 암살자와 사무라이, 양방이 주장하는 정당한 폭력에 관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묵묵히 혈투하는 토키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뒤늦게 ‘어둠의 토키’가 스포츠 만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6명의 감시자(마즈)
6명의 감시자
자연이 파괴될지언정 인간이 죽을 뿐이고, 생명이 멸종할지언정 우주는 끊임없이 돌아간다. 하지만 고작 지구조차 파괴하지 못하는 인간이 뭐 대수롭게 보였는지 외계문명은 인류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여섯 명의 감시자를 배치한다.
그들은 지구의 문명이 우주진출에 다다랐을 때에 각성하여 대륙 하나를 파괴할 수 있는 슈퍼 웨폰 육신체(六神体)를 이용하여 인류를 멸망시키게끔 프로그램되어있다. 하지만 그들은 화산폭발로 수십 년 앞서 각성하여 버리고, 핵병기가 대략 위협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어찌 되었든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한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감시자의 우두머리이자 일찍 깨어나는 바람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마즈 뿐이다.
하지만 마즈의 신체(神体) 가이아는 육신체가 전멸할 시 자폭하여 지구를 소멸시키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마즈는 압도적인 힘이 아니라 지혜를 발휘해서 교묘하게 짜맞춰 진 지구파괴 메커니즘을 타파하여야 한다.
감시자들은 일견 지구파멸을 꾀하는 흔한 악당 같지만 아 아저씨들은 어째 주인공 마즈와 그 주변인물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질문하지 않고, 자신의 창조주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전문적인 일꾼이다. 그들의 목표는 잔인하고 행동은 기계적이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워낙 뜨거운 나머지 그들을 무참하게 짓밟는 마즈가 냉혹한 배신자로 보일 정도이다.
마즈의 선택을 아쉬워하고 그에게 인류절멸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모습에서는 작중 어떤 캐릭터들보다도 강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감시자들이 이 작품에서 가장 목표의식이 분명한, 가장 사상이 명확한, 가장 뜨거운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즈의 행동원리가 명확하지 않고 작가가 고뇌와 같은 복잡한 감정선을 연출하지 못하는 탓도 크다.
작가의 대표작인 ‘바벨2세’에서도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비록 정의롭지만 그저 실용적이고 기계적인 주인공 바벨 2세보다, 사리사욕을 충족하기 위해 초능력을 악용하는 요미가 더욱 정감 있고 따듯한 인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야기에서 지독한 악역이 아름다운 비주얼 탓에 독자들에게 옹호 받고 회개하는 사례는 흔히 있으나, 용서할 요소가 전혀 없는 악당에게 이토록 감정이입 할 수 있게 그려내는 작가는 무척 드물 것이다.
사탄(데빌맨)
데빌맨의 사탄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공룡보다 앞서 지상을 장악했던 존재들이 있었다. 데몬이라고 불리는 그 생물들은 더욱 강한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고 융합하였다.
신은 진화론이 모독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처분하지만, 신의 사도 사탄은 오히려 그들의 편에 서서 신과 맞선다. 그러나 사탄은 무참하게 패배하고 데몬들과 지하 깊숙이 매장되어 두꺼운 얼음 아래에 잠들게 된다.
그렇게 수억 년간 잠들어 있던 그들은 인간들이 초래한 지구온난화와 함께 각성한다. (수억 년간 수차례 간빙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하도록 하자.)
후오쿠 아키라라는 이름의 소년은 부모가 실종된 이후 소꿉친구의 집에 얹혀 지내는 것도 모자라 학교에서는 왕따에 시달리는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게이 친구 아스카 료에게 유혹당하여 요상한 현대 오컬트 의식을 치른 이후 인간의 마음을 지닌 악마, 데빌맨으로 탄생한다.
데빌맨은 부활하는 데몬들을 보이는 족족 때려잡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게이 친구의 정체가 사실은 데몬의 수장이자 신을 배신한 사탄이며, 사탄은 양성이기 때문에 그는 게이가 아니었으며, 아키라를 데빌맨으로 만든 것은 무척 개인적이고 은밀한 이유 때문이었고, 어차피 데빌맨보다 사탄이 훨씬 세기 때문에 작품 자체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는, 매우 나가이 고 적이고 허무한 결론만이 남는다.
사탄은 주인공과의 끈끈한 관계와 압도적인 강함 탓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는 악역으로 남기는 하였으나, 분위기를 제외하면 좀처럼 깊은 알맹이를 찾기 힘든 캐릭터이기도 하다.
결국 데빌맨은 ‘강력한 힘을 지낸 게이 소년인 료가 연모하는 상대인 아키라가 게이가 아닌 데다 일본에선 동성혼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양성구유가 되었다가 급기야는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내용의, 환경보호와 게이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비뚤어진 교훈이 담긴 이야기라고 간추릴 수 있다.
시레누(데빌맨)
시레누
데빌맨을 치기 위한 자객 중 한 명이며 긍지가 강한 반인반조 형 데몬이다. 아몬 (아키라와 융합한 악마)과는 과거 인연이 있는 듯, 그가 인간에게 사역 당하는 신세를 동정하고 데빌맨을 죽이기로 한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과 끈질긴 집착을 발휘하여 데빌맨을 몇 번이고 궁지에 몰아넣는다. 또 치명상을 당한 이후에도 동료 데몬 카임과 합체하여 계속해서 맹공을 쏟아부은 끝에, 데빌맨에게서 패배 선언을 받아내며 만족스런 표정으로 사망하였다.
합체한 데몬 카임의 경우, 사실은 악마왕 제논을 소환하려고 하였으나 갑툭튀한 것이 이 카임이었다. 카임이 소환된 순간 시레누의 표정에서 실망한 빛이 역력하다.
사실 원작의 활약상만 놓고 보면 카임 외에는 친구가 없었다는 것과 나름 실력 있는 데몬이라는 정도 외에는 정보가 부족하지만, 상대적으로 감정선이 살아 있는 캐릭터이기도 했고 섹시한 여성형 몬스터+여전사 기믹이 겹쳐 높은 인기를 끌면서, 데빌맨 관련 작품이 나올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간판 캐릭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다만 외전 격 작품에서 캐릭터성을 주려고 시도할 때마다 오히려 평소의 날카로운 맛이 사라지는 감이 있고, 최근의 ‘데빌맨’ 관련 매체에서는 서비스신만 남발하기 때문에 올드팬들이 경악하고 있다.
칸자키 사토루(에어리어 88)
칸자키 사토루
자살을 기도한 모친의 살해시도로부터 살아남은 칸자키는 고아원에 맡겨지고 그곳에서 운명의 친구인 카자마 신과 만나게 된다. 칸자키는 카자마와 함께 파일럿의 꿈을 이루지만, 실력이 우월할 뿐 아니라 항공회사 사장의 딸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 카자마 신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그를 속여서 용병부대에 팔아넘긴다.
이후 그는 항공회사에서 높은 자리를 꿰차는데, 부정을 서슴지 않고 사장자리를 노리기도 하며, 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용병부대에 암살자를 보내기도 한다. 사실 그는 욕망과 열등감 탓에 스스로의 가치관을 상실한, 어느 정도 사실적인 악당… 일 뻔했다. 원작의 스케일이 산으로 가기 전에는.
칸자키는 무기상인으로 이루어진 음모 집단에 몸을 담고 정치의 배후에서 전쟁을 조작한다. 한편 제대 후 아프리카 난전에 참가한 카자마 신은 어쩌다가 대통령의 비자금을 물려받고 용병부대에 항공모함을 조달하며 무기상인들에게 대항한다(…).
그런데 사실 신과 칸자키는 일본 제일의 갑부의 후손이고 먼 친척관계이며, 칸자키는 어머니의 죽음의 원인이 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지니고 있다는, 아침 드라마와 전쟁 영화가 섞인 전개가 이어진다.
작가가 만들어낸 억지 드라마에 매몰된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칸자키 또한 어차피 작가의 창작품. 그냥 그런 인물이다.
유우키 미치오(MW)
유우키 미치오
아역배우였던 유우키 미치오는 촬영을 위해 방문한 오키노마후네 섬에서 불량청년들에게 납치되어 산 위 동굴에 감금당한다. 가라이는 유우키를 감시하기 위해 동굴에 남지만 하룻밤이 지나도 그의 일행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산한 가라이와 유우키가 발견한 것은 청년들과 섬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체의 산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유우키는 중독된 듯 발작을 일으키지만 무사히 생존한다. 미군의 화학병기 MW의 유출이 초래한 참사는 어둠에 묻히고 진실은 유우키와 가라이 사이에서만 남게 된다.
이후 가라이는 수도사의 길을 걷고, 유우키는 은행원을 가장한 쾌락범죄자로 성장한다. 그는 유괴 살인으로 돈을 모으며, 가라이의 육욕과 죄책감을 자극하고 그에게 애정을 호소하며 죄에 끌어들인다. 가라이는 도덕적 괴로움에 시달리는 도중 유우키가 MW와 관계된 자들만을 죽인다는 연관성을 발견하고 그를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그의 공범이 되어 그를 멈추기로 한다. 하지만 유우키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라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병기 MW 그 자체였다.
흔히 휴머니스트로 평가되는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인 MW에서 유우키가 악의 화신임을 납득하기는 어렵지 않다. 유우키 미치오는 수많은 데즈카 오사무의 악당 캐릭터들과는 다른, 악으로서의 완전성을 지닌 인물이다. 유우키는 인류의 천적도, 세계를 멸할 마왕도 아니라 인간, 즉 일반적인 감정을 전부 지닌 감성적으로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랑을 이해한다. 악은 자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임을 감안하면, 완벽한 악은 오로지 완성된 자의식만이 구성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을 이기지도 못하지만 절대 사라지지도 않는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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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속 악당 열전 (3) – 잔혹한 신부터 뱀파이어까지
그레그 롤랜드 (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그레그 롤랜드
미국인 소년 제르미 버틀러의 어머니 산드라의 결혼 상대인 그는 겉으로는 매우 이상적인-어쩌면 영국신사라는 단어만으로는 형용하기 부족할 정도로-영국신사, 내지는 남편상이다. 무역상사를 운영하는 자산가에 저택과 호수 딸린 숲을 소유하고 있고, 엘리트 교육을 받았으며, 품행도 무척 신사적이고,수상쩍어 보일 정도의 은혜로운 선물공세를 퍼붓는다. 또한 회사에서도 유능하고 믿음직한 존재고, 가정에서는 인자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등 여러모로 이상적인 중년남성으로 보인다.
여성이라면-특히 평균적인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표가 어느 정도인지 인식, 경험한 여성은-이런 남자가 호의를 보이면 절대 싫지는 않을 것이고, 어쩌면 횡재의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의붓아들이 된 소년을 갖은 협박과 속임수로 포로로 만든 뒤 성적, 정신적으로 학대하여 그 여린 몸과 마음을 짓밟고 갈갈이 찢어놓는 짓을 매 주말마다 반복하는 남자 역시 바로 그, 그레그 롤랜드다. 사실 그레그의 존재가 진정으로 무서운 이유는, 상상도 못할 끔찍한 행위를 범하지만 동시에 일상 생활과 현실에 충분히 존재할 법한,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즉 그레그는 직장동료일 수도, 이웃일 수도, 가족일 수도…심지어 자기 자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처형이든, 돈을 주고 산 창녀든, 의붓아들이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대신 가정의 평화는 지킨다는 그의 폭력의 논리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현실에 팽배하게 실존하는 것이기에 섬뜩하다. 나타샤와 제르미를 침묵의 공포로 몰아넣은 그의 악마적인 간교함의 정체는 그가 힘과 폭력의 구조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는 강자의 입장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인간인지를 폭로하는 것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의 폭력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알게 된 장남 이안 등 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파괴한-그 역시 점차 붕괴되지만-그의 행동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단순히 괴물이라고 치부하고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지극히 인간적인 존재이며, 따라서 근원적인 혐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산드라 버틀러(잔혹한 신이 지배한다)
산드라 버틀러
그레그가 강자이고 힘과 폭력의 논리를 꿰뚫고 있어서 악을 범하는 것이라면 산드라의 죄악은 그녀의 나약함에 있다. 죄를 알면서도 방임하는 것 역시 죄이며, 특히 당신이 성인이고 한 아이의 안녕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라는 입장일 경우 더더욱 그렇다.
아직 제르미가 10살이었을 때, 새 남자친구와 파국을 맞은 충격으로 자살시도를 한 후 어린 제르미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건은 그녀가 성인으로서, 부모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드러낸다. 사실 어린 자녀가 자신을 지켜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부모 자체가 어딘가 잘못된 것으로, 이미 이 시점에서 제르미는 친척 집에 입양되었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모자간의 높은 (상호) 의존도와 산드라의 미성숙함은 그레그가 제르미를 이용하고 협박하는 편리한 구실이기도 했지만, 사실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그 둘 사이의 일을 알면서도 방임하거나 무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아무리 그레그라도 제르미의 옛날 여자친구의 편지까지 압수할 정도로 치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 범인은 산드라.)
그녀는 단지 행복해지고 싶었던 여자였다. 1권에서 그레그를 처음 만날 때도 좀 티가 났지만, 후에 산드라의 어머니 이야기가 언급되면서 그녀에겐 결혼을 통한 계급 상승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주입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 ‘행복’은 제법 구체적인 사회경제문화적 형태를 지닌 셈이다.
이전에도 연애에 실패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등 유약한 성격이었던 산드라로선 그레그와 제르미의 관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힘겨웠으며, 무엇보다 신혼생활이 상징하는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행복을 원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그 행복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진 것인지 안다면? 만약 그것이 타인의 끔찍한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그럼에도 행복을 붙잡고 싶은가? 그러면 진정으로 행복할까? 행복해지고 싶다는 이유로, 그리고 너무나 나약하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를 범함으로써 그레그의 공범이 된 산드라. 그녀의 존재 역시 그레그와 같이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와 닮은 악의 모습을 상징한다.
마쿠베 로쿠로(뱀파이어)
마쿠베 로쿠로
첫인상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따온 이름(일본어의 표기법은 마쿠베스)답게 끊임없는 야망을 보여주는 장면, 세 명의 마녀에게 점을 보는 장면, 일말의 양심 혹은 심적 나약함으로 인해 자신이 희생시킨 피해자들의 망령에 시달리는 장면 등 맥베스와 유사한 캐릭터로 보인다.
그러나 그 실상은 맥베스보다 한층 더 비인간적이고 포악하고 간교한 천하의 대악당. 인간사회의 규율과 도덕을 무시하고 본능과 욕심대로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의 사고방식은 거의 사이코패스의 그것과 같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이용하며, 자신에 대한 진심 어린 호의나 신뢰라도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배신하고 버린다.
뱀파이어 소년 톳페이는 목숨의 은인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을의 규율에 따라 자신을 구한 마쿠베의 각종 범죄에 가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비록 그를 위기에 빠뜨린 것 역시 마쿠베였지만 말이다.) 이렇게 순진한 소년을 농락하고, 수많은 억울한 사람들을 짓밟고, 심지어 뱀파이어들의 혁명마저 이용하며, 그에게 남아있던 일말의 인간성을 상징하던 죽마고우마저 죽여버리는 마쿠베지만, 이상하게도 비난하고 책망만 하게 되진 않는다.
그것은 그의 얼굴이 데즈카 스타시스템의 미소년의 얼굴이기도 하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각종 악행이 결코 순탄치 않으며 몸소 변장하여 몸으로 뛰며 온갖 험한 일을 다 겪고 있다는 점, 또한 무엇보다 자신의 악함을 사회나 국가나 부모 등 다른 이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솔직함과 초월성 때문이리라.
비록 만화는 분노한 톳페이 어머니에게 쫓긴 끝에 바다에 몸을 던져 대만까지 헤엄쳐간 뒤(추정), 본래 자기가 이용하려고 했던 페코 일족에게 반격당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결말이 나지만, ‘블랙잭’에서 어둠의 황태자라는 (민망한) 이름으로 불리는 암흑가의 거물로 대성한 것을 볼 때, ‘뱀파이어’에서 요인암살 및 갈아치우기의 패턴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유치한 10대 수준의 뻘짓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끈질긴 생명력의 악당인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자신의 창조주인 데즈카 오사무마저 죽일 뻔한, 어쩌면 악당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놈이 아닐 수 없다!
데바닷타(붓다)
데바닷타
데바닷타는 출생부터 불행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사 반다카로, 그는 1) 왕자 시절의 붓다-싯다르타가 별로 원치도 않던 약혼녀 야쇼다라 공주를 차지하겠다고 설치다가 꼴사납게 낙마하여 사위 시험에마저 떨어진 주제에 2) 싯다르타가 출가한 틈을 타 왕이 되겠다고 설치다가 그래도 결국 야쇼다라에게 차이고 정신이 나간 나머지 3) 아무 여자라도 좋으니 결혼하고 싶다고 통통한 배구공 같은 귀족 여자에게 손댔다가 몇 시간 (혹은 몇십 분) 뒤에 썰렁하게 죽어버린, 그야말로 한심함과 찌질함의 결정체 같은 인생을 살다 간 사내였다.
이렇게 불행한 결합에서 태어나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으며 험난하게 자란 데바닷타는 일찍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배운 약육강식의 이치와 처신술, 그리고 (신기하게도 부모를 하나도 안 닮은) 빼어난 외모를 살리며 마가다국 왕자의 교육담당자 신분까지 오르게 된다. 그런 그에게 자비를 설파하는 붓다의 가르침은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지만 우연히 붓다의 기적을 목격하고 그의 제자가 된다.
그러나 교단을 지나치게 조직화, 세력화시키려 한 나머지 (그리고 자신의 미인계가 붓다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굴욕감과 분노 때문에) 붓다에게 쫓겨나 앙심을 품고, 붓다의 부재와 자신의 정치력을 이용해 교단을 분리시킨다. 이어 돌아온 붓다를 암살하려고 각종 치졸한 수법을 사용하지만 전혀 먹히지 않고, 마지막에는 손톱에 독을 물들여 할퀴어 죽이겠다는 괴이한 방법을 생각해 내지만 제풀에 엎어져 손톱이 부러져서 죽고 만다.
그 애비 못지않은 한심한 최후지만 더욱더 딱한 것은 그의 행동과 이상의 부조리함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온 악한 방식과 판이한 진리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따르고자 하지만, 정작 삶의 방식을 딱히 크게 반성하거나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붓다의 제자가 된 후에는 머리를 깎고 엄격한 규율을 세우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마가다 왕에게 독을 먹이고 그 왕자의 증오심을 부채질하며 왕자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불려 나가는 방식이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
외형적인 형태만을 바꾸는 것에 매진하는 데에서 그의 특징과 한계와 왜 그토록 증오하면서도 되고 싶었던 붓다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해답이 있다. 데바닷타는 붓다의 무엇에 이끌렸을까? 그 초능력, 위엄, 아니면 자비로움 때문인가? 인간이 어느 정도는 선을 추구하려는 본능적인 의지가 있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데바닷타가 붓다에게 느낀 끌림이라고 설명될지도 모른다. 단지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길을 잘못 들이면 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