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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거리는 트럭의 짐 칸 위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 잭 케루악 <길 위에서> 



당신이 세상에 남긴 <길 위에서>를 읽고


나는 당신네 비트족들을 생각나게 한 친구에게 잭 다니엘 한 병 들고 찾아가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오늘따라 술집 사내가 갈색 기름종이에 술병을 싸 건네줄지도 모릅니다 


샐과 딘이 그랬던 것처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쓰레기


한 쪽 벽으로 대충 붙이고 화살처럼 등을 곧추세우고 앉아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면서 가장 진실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요


세상에 아직 숨이 붙어있는 랭보를 닮은 광기 어린 영혼들은


어느 햇볕도 들지 않는 골방에 숨어 사색하고 있을까요


다가가 문을 두드려봄직도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에게도 


먼저 사교적인 표정을 지어보여야 하는 의무같은 것은 없습니다




녹아 내립니다


불덩이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스며들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덴버에서 솔트레이크 시티 사이의 살점을 떼는 추운 밤공기로


긴 긴 여정 끝에 돌아갈 곳을 찾아 기어든 순간의 포근함과 허전함으로


권태로운 나머지 가장 은밀한 삶의 즐거움에마저 무뎌져버린


우리의 차갑게 식어버린 날숨과 무미건조한 들숨을 거두어 주세요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딘 모리아틴이 되거나


아무리 갈망해도 나는 딘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샐 파라다이스가 되거나


길 위에서 방랑하는 비트족들의 아버지 잭 케루악이 될 것입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규정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나는 숨쉬는 법 마저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배웠습니다


시월의 가을 하늘은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지나간 계절이 몹시 그리워질 거라는 사실보다


세상은 오입쟁이와 담배쟁이 거짓말쟁이를 따라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가르쳤습니다


내 안에 더러운 괴물은 이렇게나 커져버려


그럴듯한 표정으로 싸매고 숨겨보아도 자꾸만 치밀어오르고 드러나는데


사람들은 내가 오입쟁이에 미치광이라는 사실보다


자신이 오입쟁이에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 민감합니다


나는 지금 발가벗고 도서관 한 가운데에 앉아


한가로이 잭 케루악 당신의 책장을 넘기고 있습니다





마리화나와 잭 다니엘과 담배꽁초와 섹스는


삶이 허무해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숨 막히는 노력


화물열차와 히치하이킹 마음이 맞는 친구와


평생토록 광활하기만 한 대륙과 오줌발을 휘갈길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해도 축복, 저렇게 생각해도 축복입니다


길을 걷다 문득 친구가 마약하고 싶다, 말했을 때


진실된 삶의 정수가 마리화나의 환각속에서 피어나지는 않아도


진실된 의미에서 모든 것들은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르지 않다라고 대답했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길이 없는 세상 자꾸 돈이 필요하다고만 느끼게 만드는 세상


모든 일에 무기력하고 끊임없이 반복적인 조울증세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기계로 찍어낸 듯한 똑같은 처방전을 받아들고


이 약을 먹고 나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거라 희망을 품는 모습


딸깍 딸깍 누름질 몇 번으로 누군가는 돈을 벌고 누구는 몸을 팔고


누구는 희열을 느끼고 누구는 목숨을 잃으면서


누구는 예수를 믿고 누구는 부처를 믿고 누구는 자기 자신을 믿고


어리석을수록 자기 자신이 옳다는 믿음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


길을 걷다 문득 마약하고 싶다,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을 때처럼 집도 절도 없이 살면서


‘그래야 지붕있는 집의 소중함을 깨닫지요’ 라고 말했던 나의 친구는


이미 저 멀리로 가 버린지 오래인것을


나는 왜 매번 길 위에서도 온전히 길이 되지 못하고 나 자신이기만을 고집했을까요





이 거대한 자궁속의 너무나도 달콤한 온기


너무나도 오래, 누군가는 한 평생 발 담그고 사느라


추악한 부유물과 환멸스러운 악취가 나는 양수


잊고 살았지만 우리가 스스로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처럼


이제 너무나도 달콤한 자궁속의 양수를 헤엄쳐 나오기 위해 시도해야 한다고


어둡고 좁은 나팔관을 지나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호흡해야 한다고


잭 케루악 당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이었을겁니다


비트 세대들이 모두 새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버린


이 곳에는 그들이 입던 리바이스 청바지만이 남았습니다





첫 잔은 잭 케루악과 샐 파라다이스, 사랑하는 딘 모리아티를 위해


두 번째 잔은 골방에 갇혀 한 평생 사색할 고단한 운명을 타고난 모든 카프카들을 위해


세 번째 잔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보다 먼저 길을 떠난 나의 친구를 위해


그래도 바닥에 고여있는 술이 남았다면


내일부터 내 안의 괴물과 내가 좀 더 가까운 하나가 되기위해




옷을 단단히 여며쥐고


세상 사람들 모르는 곳으로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흔들거리는 트럭의 짐 칸 위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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