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스파르타쿠스 전쟁
1.2.2.1 탈주
무슨 일이 있었건 간에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는 노예가 되어 이탈리아로 끌려와 검투사가 되었다.
스파르타쿠스가 들어가게 된 검투사 양성소는 '렌툴루스 바티아투스'라는 남자가 소유한 곳이었다. 트라키아인과 갈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플루타크 영웅전의 기록에 의하면 다른 곳보다도 상당히 가혹한 곳이었던 듯하다.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양성소의 잔혹한 대우에 반발하여 70명의 동료 검투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바티아투스에 대한 기록은 이후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검투사 동료들만의 소규모 탈주극에 불과했다. 스파르타쿠스와 그 동료들은 베수비오 화산의 산악 지대로 도망쳤다. 보통 화산지역은 암석만 그득한 황폐한 지역이지만 베수비오 화산은 제정시대에 분화하기 전에는 화산인지도 모를 정도로 삼림이 울창한 곳이니 산적질 하기 딱 좋은 지역이었다. 이들은 이 곳에서 터잡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짐을 터는 전형적인 산적질을 하였다.
마침내 카푸아에서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소규모의 진압대를 파견하였는데 스파르타쿠스 일당은 이들을 패배시키고 빼앗은 무기와 갑주로 무장한 뒤 더 심하게 날뛰었다. 이럴수록 이들의 유명세는 높아져 갔고 이를 듣고 합류한 노예, 불량배, 부랑자등로 인해 카푸아 도시 정부로써는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내 로마 정부가 나서게 되었다.
1.2.2.2 검투사, 로마군을 격파하다
처음엔 로마 정부는 이들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하였으며 때문에 정규 로마 군단병 레기온이 아닌 시민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3천명의 신병이 긴급히 징집되었고 이들은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이피아누스의 기록에는 '바리니우스 글라베르'라고 되어 있다)의 지휘하에 스파르타쿠스를 토벌하러 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법무관 글라베르는 베수비오 화산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을 막고 차근차근 올라가며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을 포위하여 섬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산 위에 있던 야생 포도넝쿨을 엮어 로프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절벽을 내려와 글라베르의 군대의 후방으로 돌아가 기습했다. 전혀 예상밖의 기습에 로마군은 혼란에 빠져 참패하고 만다.
그러자 로마 정부는 2차로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지휘 아래 다시 시민군 4000을 편성하여 보냈다. 이때 바리니우스는 그의 부관인 루키니우스 코시니우스에게 2000명을 쪼개어 지휘하게 하였다가 각개격파당하여 대패한다.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밤 중에 시체를 주둔지에 세워놓고 빠져나가서 피하는 속임수를 썼다. 이 사실을 알아낸 로마군은 곧바로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했지만 결과는(...) 덕분에 코시니우스는 별장에서 마음 놓고 목욕을 하다가 스파르타쿠스의 기습을 받아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죽임을 당했고, 바리니우스는 도망치긴 했지만 말과 파스케스, 군기를 모조리 스파르타쿠스에게 빼앗겼다. 군대가 군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죽을 죄였고,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묶어서 만든 도끼인 파스케스[1]는 그 당시 로마 고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였다. 바리니우스는 로마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스파르타쿠스의 권위를 크게 높여준 셈이다.
두 차례에 결쳐 로마 정부가 파견한 토벌대를 무찌르자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은 로마 전역에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전역의 노예들이 반란에 합류하였다. 특히 양치기들이 많이 합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의 양치기 노예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발이 빨랐으며 난폭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게다가 스파르타쿠스는 고의적으로 양치기들이 많은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양치기들 역시 노예로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었으니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더불어서 노예만이 아니라 그들과 처지가 별로 다를 것 없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하층민들도 반란에 합류하였다. 이들의 줄이은 합류로 인해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산적떼는 4만으로 불어나게 된다. 일단 문헌마다 숫자가 4만, 7만, 9만, 12만 등으로 다양하지만, 가장 적은 수인 4만이라도 고대에는 엄청난 수였다.
이리하여 스파르타쿠스의 탈주는 단순한 노예 탈주 사건이 아니라, 로마 역사상 유래가 없는 사상 최대의 노예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노예군은 누케리아, 투리, 메타폰툼 등의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병력을 보충하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약탈을 막으려고 했지만, 로마인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친 노예군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벌써 이 당시에 스파르타쿠스가 "이탈리아에 머물면 죽게 되니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노예들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동지인 크릭수스 역시 "로마놈들을 죽이자!"는 의견을 가졌고, 이 때문에 둘이 갈라졌다는 주장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스파르타쿠스의 주장이 옳았다.
그래도 스파르타쿠스의 "내년에 로마군이 쳐들어올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그는 야생마를 잡아 기병대를 조직하고 양치기들을 모아 군인으로 키우는 등의 준비를 했다.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의 군사적 역량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보초를 세우고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등 기초적인 군사 지휘를 할 수 있었고, 로마군을 속이는 놀라운 계략을 여러 차례 써보였다. 또한 금이나 은 같은 사치품의 구입을 금지하고 철이나 구리를 구입하게 함으로서, 장래에 쓸 무기를 만드는 치밀함을 보였다.
1.2.2.3 로마군 달아나다
이듬해 로마 정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 판단하였고 그해에 선출된 두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 푸블리콜라와 흔히 클로디아누스로 알려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에게 각각 2개 군단씩 편성한 뒤 스파르타쿠스의 진압을 맡겼다. 현직 집정관이 2개 군단을 지휘하는 것은 완전한 정식 정규군이었음을 의미하였고 두명의 집정관이 동시에 군단지휘권(임페리움)을 한 국가가 아닌 산적떼 토벌에 쓰는 것은 로마 역사상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일례로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로 침입했을때 로마 정부는 두명의 집정관들에게 각각 두개 군단을 이끌고 상대하게 하였다. 산적떼 두목이었던 스파르타쿠스가 한니발과 같은 취급을 받은 것이었다. 이 무렵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그의 동료 크릭수스가 일부 병력을 데리고 떠나가는데, 로마 집정관 겔리우스의 군단병들이 이들을 잡아 완파시키고 크릭수스를 죽인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쿠스는 나머지 병력과 북상하여 갈리아로 달아나려고 시도하였고 이를 렌툴루스가 가로막았다. 두명의 집정관이 출정했는데, 한사람만 앞길을 막은 이유는 당시 로마 집정관들은 둘이서 합쳐서 이기기 보다는 본인의 병력만으로 이기고 싶어했는데 이는 군사적 영광을 공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렌툴루스는 자신의 군단병만으로 급히 싸움을 걸은 것이 큰 원인이었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렌툴루스의 군단병을 거짓말처럼 격파하였고, 이때 로마군은 수치스럽게도 스파르타쿠스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한니발을 제외하면 이런 위업을 이룬 자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뒤이어 추격해오는 겔리우스의 병사를 상대하여 이 병력도 격파했으며, 갈리아 총독이자 전직 집정관인 카시우스의 병력까지도 격파한다. 이는 지중해 최고의 군사적 영광에 빛나는 로마에게 있어 큰 치욕이었다. 이 시대에 노예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그런 '물건'에 불과한 노예 검투사가 이끄는 도적떼들에게 로마의 현직 집정관 2명과 전직 집정관 1명이 연달아 패배한 것이다. 군단수만 따져봐도 집정관 1인당 2개 군단이니 6개 군단이 패배를 당한 셈.
그 다음에 들어온 소식은 로마 고위층의 분노를 폭발시킨다. 스파르타쿠스는 포로로 붙잡은 로마인들에게 검투사 경기를 시켜 서로 죽이게 했던 것이다. 이 경기는 전사한 크릭수스를 위해 벌인 것이며, 전사자를 위해 경기를 바치는 것은 로마의 높으신 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일로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은 매우 높아지게 된다. 이렇게 당대에 높아진 명성 때문에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로마사에 꼭 등장하게 되었다.
두 집정관을 패배시킨 뒤에도 스파르타쿠스와 동료들은 계속 북상하였고 가는 길에 합류하는 인원덕에 12만까지 불어난다. 해당 기록이 로마시대 역사가 아피안의 기록이고 당시의 경향을 볼때 어느정도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청난 숫자로 불어난 셈이다. 이들은 알프스까지 행군하였고 더 이상 로마군은 이들의 탈출을 막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목적지를 트라키아로 잡은 듯 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다시 남하를 시작, 나폴리 지방으로 내려온다. 이렇게 갑자기 방향을 돌린 이유는 불분명한데, 트라키아 출신이 아닌 노예들이 의식주를 충족하기 매우 어렵고 야만족이 들끓는 트라키아로 향하는 것을 거부했다거나, 로마를 점령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싸우면 이기는 우리가 왜 도망가야 합니까?
여기에서 법무관 크라수스가 패주한 집정관의 군대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징집한 병사를 합친 8개 군단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집정관이 패배한 싸움에 등급이 낮은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나선 이유는 두 집정관들이 이미 산적떼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당했으므로 더이상 군단을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8명의 법무관 중에서도 수석 법무관이었고 따라서 두 집정관의 패배 뒤 그가 지휘할 차례였던 것이었다. 또한 원로원이 로마 제일의 부자였던 크라수스가 사비를 털어 병력을 소집하기를 기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2.2.4 임페라토르의 최후
크라수스는 패배한 집정관의 군단들에게 10분의 1의 형을 내렸다. 이는 한 부대의 10명 중 한명을 제비로 뽑아 남은 9명의 동료가 때려죽이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내려 전 군단에게 본보기로 삼은 뒤 스파르타쿠스를 조이기 시작한다.
결국 숫적 불리함에 서서히 밀린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 발끝 까지 몰렸고, 불리함을 깨달은 스파르타쿠스는 해적들과 접선해서 배를 얻어 이탈리아를 탈출하려 했지만 해적들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뗏목을 동원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실패한다. 현대에는 시칠리아로 달아나서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칠리아는 몇년 전에도 노예 반란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
이때 스파르타쿠스에게 나쁜 소식이 전해진다. 외국으로 원정을 나갔던 로마군단이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를 불모지에 몰어넣고 포위망을 완성한 크라수스의 병력들은 "이제 폼페이우스가 오면 넌 죽는다"고 상대를 조롱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파르타쿠스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돌파해버린다. 그러나 노예군 일부가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갈라지고, 이들은 곧 로마군에게 섬멸당한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겸사겸사 스파르타쿠스를 추적하던 크라수스의 기병대에게 역습을 걸어서 패퇴시킨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한 항구에는 이미 동방에서 돌아온 로마군단이 상륙하고 있었다. 길이 막힌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후퇴하면서 활로를 모색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로마놈들과 싸우자"며 후퇴명령을 거부한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 전투를 벌이지만 압도적인 숫적 차이에 열세에 몰렸다. 물론 카르헤 전투에서 보듯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그가 동원한 8개 군단의 수는 무려 5만여에 달하였고 이들의 무장의 질은 산적떼에 지나지 않는 스파르타쿠스 군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가령 동시대의 인물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10개 군단만으로 갈리아 전역을 제패한 바 있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일종의 배수진으로서 노예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좋은 말을 많이 얻을 것이고, 진다면 더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말을 베어버린 뒤, 마지막 수단으로 돌격대를 이끌고 크라수스를 죽이기 위해 돌진한다. 성공했다면 승리했겠지만, 로마군은 전력을 다해 이를 저지했고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쓰러지고 만다.
로마의 역사가 플로루스는 "그는 거의 임페라토르처럼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원래 임페라토르는 장군이나 사령관을 의미했지만, 플로루스의 시대에는 '황제'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일개 검투사가 황제처럼 싸우다 죽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다른 역사가들 역시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스파르타쿠스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묘사한 기록은 두 가지 중 하나다. 하나는 스파르타쿠스가 동료들의 버림을 받은 후에도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릎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동료들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스파르타쿠스가 자유의 투사다운 최후를 맞이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가 화려한 의복이 아닌 노예군 전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는지, 스파르타쿠스의 전사는 거의 확실하지만 로마군은 전투 후에도 전장에 쓰러진 시신 중 어느 것이 그의 시신인지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은 노예군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것으로 전쟁은 막을 내린다.
크라수스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추태만 보인 시정잡배로 묘사된 인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실제로 크라수스는 단순히 축재만 한 것이 아니고 공공시설 건설등에도 사재를 많이 기부했으며 정치가로서도 상당한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가령 크라수스가 선출된 법무관의 직위는 해마다 단 8명만이 선거로 선출되는 직위이므로 인기가 없다면 얻을 수 없는 직책이었다. 게다가 당시 역사서에는 그를 로마 정계의 위엄있는 주요인사로 묘사했다. 따라서 역시 젊은 나이부터 로마 정계의 주요인사인 폼페이우스에 강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가 이미 엄청난 군사적 성취를 이미 이룬데다 또 그해에 히스파니아에서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에 그에 대항하고자 자신이 이 희대의 노예반란을 진압했다는 명성을 얻길 원했다. 그리고 그는 대군이었던 스파르타쿠스의 군을 멋지게 격파하여 기대에 부응한다. 이걸 보면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도 그렇게 욕먹을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로마역사가들에겐 카르헤 전투가 로마 역사상 최대의 참사 중 하나였으므로 그의 군사적 재능을 최대한 깎아야 그나마 체면치례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카르헤 전투에 맞먹는 참사는 아루시오 전투와 칸나이 전투 정도인데 아루시오 전투의 경우 게르만족이 상당한 대군이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있었고 칸나이 전투의 경우 한니발이 너무 명장이라 체면치례가 가능하였다. 하지만 카르헤 전투의 경우 수레나스라는 역사에 잠깐 등장한 인물에게 상당한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7개 군단이 전멸당하다시피 하였으므로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을 최대한 깎아야만 로마의 체면이 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은 상당수의 패잔병들이 서둘러 로마로 강행군하는 폼페이우스군을 만나 격파당했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마무리 지었노라고 원로원에 서신을 보낸다. 이것을 원로원은 그대로 인정하였다. 물론 원로원이 크라수스의 공적을 모를리가 없었다. 하지만 원로원에겐 크라수스가 군사적 성취를 얻어 정계의 중심인물로 급부상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어차피 스페인에서의 활약으로 개선식을 할 것이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에게 겸사겸사 개선식을 거행하게 하고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를 부린 것이었다. 덕분에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이 아닌 한단계 아래인 오베이션이라는 퍼레이드를 주었다.
1.2.3 전쟁 이후
패배한 스파르타쿠스의 잔존 병사들 중 6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노예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반란 노예들은 놀랍게도 십자가 위에서도 의연했으며, 심지어 매달린 채로 로마군을 조롱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살아서 도망친 사람들은 산에 숨어서 산적질을 하며 살아갔지만, 이들 중 누구도 스파르타쿠스의 위업을 재현할 수는 없었고 나중에 로마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이 반란의 여파로 재발 방지를 위해 노예들에 대한 대우가 약간은 나아졌다. 그래봤자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이라 의미는 없었지만.
그리고 로마인들은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기록을 조금밖에 남기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사실 그 규모 면에서는 2명의 집정관이 털리고, 이례적인 조치로 8개 군단을 동원해서야 겨우 진압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전쟁이었음에도, 기록 남기기 좋아하는 로마인들답지 않게 남은 기록은 적고 상세함도 꽤 떨어지는 편이다. 비천한 노예 검투사에게 로마가 몇 차례나 얻어맞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건 숨겨야 해!
그러나 로마인들은 절대로 스파르타쿠스를 잊지 않았다. 키케로나 카이사르도 스파르타쿠스를 언급한 바 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가리켜 "새로운 스파르타쿠스"라고 비난한 바 있다. 안토니우스에게는 분에 넘치는 이름이다
1.3 평가
로마에서 노예 반란은 적지 않은 일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봉기하기 얼마 전에도 시칠리아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나 거의 전역이 점령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그들 중에서도 특히 뒷날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검투사라는 직업이 풍기는 잔혹하고 비정하고, 로마인의 쾌락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비참한 처지, 그 검투사들을 이끌고 세계 제국으로 발돋음 하던 로마를 상대로 봉기에 나선 스파르타쿠스의 비장함은 현대인들에게 여느 노예 반란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와 적대한 로마인들의 기록에서도 스파르타쿠스는 무분별한 살육을 제지하는 등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고 되어있어, 저 고결한 성품의 남자가 어쩌다 노예의 신분이 되어서 봉기에 나서게 되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
도망친 노예들로 이루어져 질적 수준을 기대하기 어려운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의 군대를 몇번이나 격파한 군사적 능력도 주목받는다.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들과 탈주 노예로 이루어진 질 낮은 병사들을 이끌고 그 명장 한니발 바르카에 버금가는 공포를 로마에 안겨주었다. 변변한 근거지도 없이 도적떼와 같았던 스파르타쿠스 집단의 처지에 비추어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승리를 이룩했던 것이다.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아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 그의 이름은 단순한 노예 해방의 상징을 넘어서, 끝내는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와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 부르며 극찬했고, 좌익 진영은 이후 스파르타쿠스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이 때문에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을 맡은 <스파르타쿠스>가 영화화될 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공산주의자들의 영웅을 어찌 미국에서 떠받들어주겠는가 그러나 메카시즘이 가라앉은 후에는 그런 시각도 사라졌고,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로널드 레이건은 자유를 위해 싸우고 희생한 사람의 예로 스파르타쿠스를 들었다.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리켜 "가장 정의로운 전쟁",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사실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이 가장 정의로운 전쟁이라면 세상의 독립전쟁이나 저항전쟁은 전부 기본적으로 가장 정의로운 전쟁 1순위 후보들이다.
1.4 대중매체의 스파르타쿠스
1960년에 감독 스탠리 큐브릭에 주연 커크 더글라스(스파르타쿠스 역), 로렌스 올리비에(크라수스 역)란 초호화 멤버로 <스파르타쿠스>[2] 영화가 제작되었다. 다만 큐브릭의 영화판은 걸작이긴 하되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는 평[3]을 듣고 있다. 특히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제작사의 지나친 간섭과 주연 커크 더글라스와의 마찰 때문에[4] 자신의 색깔을 만들 수 없었다는 이유로 버린 자식 취급한다.[5]
2010년 미국 현지에서 영화와는 무관한 스파르타쿠스 : 피와 모래(Spartacus: Blood And Sand)라는 13부작 드라마가 방영되어 폭풍인기를 끌었다. 대부분의 위키러도 이 미드보고 검색해보셨을듯.
2011년 위 작품의 프리퀄인 6부작 스파르타쿠스 : 투기장의 신들(Spartacus: Gods Of The Arena) 방영
2012년 현재 2시즌 스파르타쿠스 : 복수(Spartacus: Vengeance)가 종영.
스파르타쿠스(Fate/Apocrypha)
발레(...)도 있다. 니콜라이 볼코프가 각본을,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안무를[6], 그리고 아람 하차투리안이 작곡을 맡았고 현재도 많은 발레단에서 공연하고 있다. 발레리나가, 혹은 발레리나와 발레리노가 동시에 부각되는 보통의 발레 작품과 달리 발레리노들이 중심이 된 힘찬 안무가 특징이다. 다만 육체미와 강건함을 표현하다보니 대개 의상이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한국에서는 2001년 국립발레단이 초연하였고, 2012년 기준으로 2012년 4월 국립발레단 공연이 가장 최근 공연이다. 볼쇼이 발레단 공연
1.5 스파르타쿠스 관련 책 링크
- 스파르타쿠스 전쟁 - 배리 스트라우스 저. 스파르타쿠스 전쟁에 대해 자세히 연구한 책이며 엔하위키의 이 문서보다 100배 더 자세하다.
- 스파르타쿠스 - '신화가 된 노예'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으며 스파르타쿠스가 신화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했다.
2 독일의 정치단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지도한 독일의 혁명당. 후일 독일 사회민주당의 좌파적 그룹들과 손을 잡고 독일 공산당이 된다. 중심 인물은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프란츠 메링 등이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개량적 행보에 반감을 품고 탈당한 사람들이 대부분. 1914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나 본격적으로 스파르타쿠스단으로 불리게 된 건 1916년.
제국주의 전쟁에 독일 사민당이 찬성하는 걸 반대했다. 계급투쟁, 사회주의혁명, 즉각적 전쟁 중지를 주장했다.
1919년 1월 혁명을 시도했으나, 정부가 동원한 진압대장 구스타브 노스케에 의해 소멸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체포되어 그 해 1월 15일 처형되었다. 그후 1월 15일은 3L(레닌,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의 날으로 매해 기려지고 있다.
스파르타쿠스단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1번 항목에서 따온 것으로, 칼 리프크네히트가 항상 스파르타쿠스라고 서명했던 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단이 해내지 못한 일을 나치는 해냈다![7]
3 그 외
현재 싸이클계의 세계 최강의 타임 트라이얼 스페셜리스트이자 최강급 클래식 레이스 선수인 파비앙 칸첼라라의 별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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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시즘이라는 명사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2] 한국에는 보통 스팔타커스 혹은 스파타커스 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3] 젊은 시절의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있다든가, 원로원의 의원으로서 카이사르를 돕는 원로원 의원의 이름이 그라쿠스라든가 등.(실제로 그라쿠스 형제는 후손을 두지 못했다.)
[4] 커크 더글라스와 제작사는 바로 전해인 1959년 전세계적인 대히트를 친 벤허같은 웅장한 대하역사극을 원했다고 한다. 특히 커크 더글라스는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적인 영웅캐릭터로 묘사해달고 요구했지만, 그 괴팍한 스탠리 큐브릭이 그런 작품을 만들리가...
[5] 영화의 유명한 대사인 "내가 스파르타쿠스다!"는 허구이다.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의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것이 통설이기 때문이다.
[6] 원래 1956년에 레닌그라드에서 있었던 첫 공연 때는 레오니트 야코브손이, 2년 뒤 모스크바에서 재연되었을 때는 이고르 모이세예프가 안무를 담당했지만, 둘 다 평이 그다지 좋지는 않아서 현재 러시아 뿐 아니라 해외 발레단들에서도 그리고로비치의 1968년 상연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7] 이 드립의 출처는 '혁명이 후끈후끈'이란 책이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