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평가
작품의 구성 자체는 두말한 나위 없이 훌륭하며 흡입력 또한 대단하다.
로마사를 다룬 책들은 이 시리즈를 제외하면 전부 너무 학술적이어서 공부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지루하고 재미가 없거나, 너무 단편적이거나 역사소설 수준의 양극에 있는게 거의 전부지만 이 시리즈는 그 중간을 타기 때문에 재미있고 유익하다. 특히 로마의 인프라에 대해서도 터치하고 지나간 것은 돋보인다.
그리고 이 책이 흥행한 덕에 고대 로마를 다룬 여러 저서들이 꽤나 많이 번역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본래 카이사르의 작품인 내전기는 로마인 이야기 이전에는 한국에서 번역되지도 않았다가 이 책이 인기를 끌면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로마사를 널리 알린 것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마이너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를 널리 알린 책이기도 하다. 현재 갈리아 전기는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던 사람들은 거의 필수적으로 구매하는 책이 되었다. 사실 4권의 경우 대다수는 갈리아 전기 번역에 할애했으며, 정식 번역은 아니더라도 원문과 대조했을때 별 차이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서사적 구성은 (당연하겠지만) 이쪽이 낫다. 갈리아 전기에 없는 묘사를 끼워넣은 부분도 있지만, 취미로 읽는 경우에는 로마인 이야기로 대체해도 상관 없다. 원전과 대조하면서 봐도 재밌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들을 기억하고 또 로마 역사가 어떻게 흘렀는지 파악하는데 저 작품은 상당한 도움을 준다. 역사상 벌어진 일들에 대한 왜곡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며, 또한 지나치게 자세하지도 않고 생략되지도 않은 적절한 상황 묘사는 다른 작품들이 흉내내기 어렵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있어 지나치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템포로 진도를 나갈 수 있게 도와준다.
특히 위기의 3세기를 묘사하는 부분은 대단히 훌륭하다. 이 시기는 군인황제들 난입과 어지러운 정세의 변화로 인해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많은 역사서에서 이 부분을 통채로 생략하고 아우렐리아누스 같은 중요한 인물들 몇몇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이들 황제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중요한 일들의 생략없이 짜임새 있게 묘사하여 한권으로 요약하였는데 이때의 막장스러운 상황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때 상황을 이렇게 잘 정리해준 책은 로마인 이야기 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로마 역사가 대략 천년에 가깝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14권[4]만으로 로마 역사 전체의 흐름을 가감없이 파악할 수 있게 서술했다는 점에서 로마 역사의 접근성을 크게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봐도 로마인 이야기는 다른 로마에 관련된 저서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고 따라서 수작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다.
역사학과에 처음 입문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역사학의 재미를 알게하기 위해서 교수들이 학생들로 하여금 읽어보고 감상문을 써오라고 하는 교양도서 중 하나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로마인 이야기를 신봉하는 교수도 상당수 존재한다.(거기엔 신학과 교수도 있다) 물론, 그 교수들도 로마인 이야기에 대해서 깊게 들어가면, 일본쪽 사학계와 마찬가지로, 해당책의 부족함을 지적하지만 일반인들로 하여금 고대 로마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준 책으로는 높이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 정도로 로마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는 책은 전공자로부터건 비전공자로부터건 그동안 찾기 힘들었다. 이 책으로 인해 지중해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이 무척 많다.
3 한계
다만 어디까지나 교양수업에 국한된 얘기. 전공과목 수업을 들을 때는 쓰지 말자. 실제 전공 과제 제출시 '로마인 이야기를 참고 문헌에 올렸다가 역사서가 아닌 소설을 참고문헌에 올렸다는 이유로 감점당하는 사고도 발생한다.
리포트를 쓸 때 자료의 출처를 '로마인 이야기'라 밝히는 경우는 '아직은 진정한 서양사를 배우지 않았습니다'라는 것과 같다. 물론 로마인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역사학에서 교양서의 인용은 금기 중 하나다.[5] 참고하도록 하자.
로마인 이야기는 교양서와 소설의 사이 쯤에 위치한 책으로, 작가 자신이 역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연구서가 아닌 일반 독자들을 층으로 삼은 책이라고 밝혔다. 즐겁게 빠져들 수 있는 입문서라 생각하는 것이 좋다. 연구서에는 꼭 필요한 레퍼런스(인용 출처)도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다. "서양 역사학자들이 한 말" 같이 써두면 그게 누군지 우리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일부분은 순전히 재미를 주기 위한 작가의 창작이다. 주로 "나이"나 "출신"에 바탕을 둔 인물의 성격 묘사나 감정 묘사 같은 것인데, 소설다운 재미를 주기는 하나 현대인인 우리가 그 시대 사람들의 심정을 직접 알 길이 없으므로 이런 서술들은 어디까지나 창작에 불과하다. 창작한 부분과 창작이 아닌 부분이 모호하게 뒤섞여 있어서 혼동할 여지가 많다.
그리고 많은 해석이나 연구는 꽤 오래 전의 것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최신 연구가 제대로 반영되지는 않았다. 서울대 교수 주경철이 쓴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에는 먼나라 이웃나라와 함께 로마인 이야기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구성도 좀 문제가 많은데, 사실 제정의 정점기라고 할 수 있는 티베리우스 이후에는 확실히 긴장도가 떨어지고 오현제 시대 조차도 전반부에 곁들여지던 작자의 픽션도 아예 어디 가버리고, 건조한 편년체식으로 사실만을 나열하는 무성의로 일관한다. 마치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용두사미가 연상되는 바이다.
로마에서 개최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참석한다는 말에 일본 사학과 교수들이 불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적도 있다 한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시오노 나나미는 결코 학자가 아니고, 그 이유가 학교에서 수학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쓴 글이나 역사에 대한 접근이 학자의 그것이 아니라 작가의 그것이기 때문. 김훈 등의 작가가 역사소설을 썼다고 그들을 학자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책을 읽은 이후 로마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책을 참고하면 좋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경우엔 이 책으로 입문하여 읽기에는 무리가 없으나 18세기의 시각이 현재와 다르기 때문에 주의를 요하며 현재 번역된 책들로 필립 마티작 로마 공화정이나 에이드리언 골즈워디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의 정적인 키케로를 다룬 안토니 에버릿의 로마의 전설 키케로 같은 책도 읽을만하다. 카이사르가 직접 쓴 갈리아 전기, 내전기나 타키투스의 연대기[6] 수에토니우스의 저작인 열두명의 카이사르 역시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전반적인 로마 통사에 대한 책으로는 프리츠 하이켈하임 저 로마사도 괜찮다는 얘기가 있는듯. 역사 교양서를 많이 출판하는 까치(까치글방)의 책들 중에서도 찾아보면 좋은 책이 있으며 특히 '로마 제국사'가 꽤 괜찮은듯하다.
국내에는 로마사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마이너에 가까웠으나 이 저작을 전후로 로마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외국의 로마 관련 서적 번역이 활발해지고 있다. 관심이 있다면 다음 링크를 참조해봐도 괜찮을듯.# 시오노 나나미가 참조했다고 스스로 밝힌 책들 중에선 현재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책도 있고 영어가 된다면 영문서를 사는것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에서 로마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시오노의 책이 평가 받을 지점은 분명 있을것이다.
4 비판적 시각
4.1 역사적 주장에 대한 논란
작가가 전문 역사가가 아니란 탓도 있고, 당시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몇몇 가설들을 반박하였으며, 일부 역사가들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에 반발하는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상당히 까인다. 여기에 대해서 옹호하는 사람들은 작품 내에서 작가는 자신의 가설을 단정한 경우는 없고, 다른 사람들의 역사관 역시 소개했으며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겼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미묘한 부분에서 제시한 자기 주관에 대한 비난을 면피하려 든다는 식의 비판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이렇게 피해가며 은근슬쩍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만이 진실인양 적어놓기도 한다.
이미 기술된 내용이지만 학술서로써 받아들이는 것은 안된다.
4.2 역사관에 대한 논란
구체적으로 로마를 들어 작은 정부-감세등의 보수주의 옹호가 현저하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또한 철인적 엘리트 혜민주의에 대한 긍정 내지 환상을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 보수 지식인층의 정치관이다.[7]
일본이 로마를 닮았다고 박박 우기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거 없다.
고대-중세의 전이단계를 단순히 로마적 정신의 쇠퇴로 인한 퇴화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노예노동에 의존하는 고대적인 시스템으로는 더이상 국가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화적으로 중세가 퇴화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야만족인 게르만족이 점령한 서유럽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로마제국의 법통을 계승한 비잔티움이나 각지의 고대문명을 자양분삼아 새로운 문명을 개척한 이슬람은 고대보다 훨씬 더 번영된 사회를 누리고 있었음을 볼때, 중세가 고대보다 퇴화라고 보기도 어렵다.
4.2.1 반비잔티움 역사관
15권에 가까이 갈수록 이전 권과 비교해볼 때 비잔티움 제국에겐 유독 비난이 많아진다. 로마 전성기 때에 황제들과 비교하면서 이것도 제대로 된 국가원수냐는 식으로 비난한다.[8]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법학, 음악, 신학, 역사학 등 여러 학문에 두루 능통한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었음에도, 시오노 나나미의 눈에 걸리면 별 교양도 없는 데 불가사의한 업적을 거둔 군주가 된다.[9] 그리고 유스티누스 2세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로 표기하는 등[10], 한마디로 비잔티움사 자체가 싫은 나머지 제대로 보지도 않은 게 역력히 드러난다.
《로마 이후의 지중해 세계》라는 책에서는, 로마 이후에 지중해권에 유통된 금화들을 나열하면서 이슬람의 디나르 금화, 베네치아, 피렌체의 금화는 소개하면서 그들보다 일찍 유통되었던 비잔티움의 솔리두스 금화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르네상스빠 동로마까 성향이 여기서 드러났구만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고대 로마제국과는 달리 강력한 상비군의 전통이 없는 비잔틴제국은 용병을 쓰는데 익숙했다.”(1권 059 쪽)는 글이 있다.
알렉시스 콤네누스 치하에서, 비잔틴 군의 총수는 70,000 명에 달했으며, 그 가운데 20,000은 상비군이었다.(Under Alexius Comnenus the total strength of Byzantine army was about 70,000 men, with about 20,000 of that total in the standing army.) -Men at arms Armies of the Crusades 17page
물론 비잔틴 제국은 용병을 쓰는데 익숙했다. 하지만 앞 서술은 오류이다. 비잔틴 제국은 테마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오랫동안 거대한 상비군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십자군 시대 당시에도 아주 거대한 상비군 조직이 있었다.
다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테마 제도 하에서 둔전병들은 완전한 상비군은 아니었다. 테마 제도에서 상비군이라 할 부대는 각 군관구의 중심부에 위치한 소수 부대였다. 동로마 제국에서 상비군이라 할 군대는 타그마타와 용병 부대였으므로 고대 로마의 군단과 비교할만한 상비군 조직이 부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10세기 이후로 동로마 제국의 상비군 조직은 꾸준히 확충되어 왔으며 약 100년 동안 당시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상비군 조직을 갖춘 국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용병도 상비군이 될 수 있다. 예컨대 바랑인 친위대는 용병이지만 가장 믿을만한 상비군이기도 했다. 즉 동로마 제국은 용병과 대비되는 국민군이 부재했던 것도 아니며, 상비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1081년 시점에서는 연이은 내전과 두라초 전투의 패배로 용병의 비율이 높아져 있었을 수는 있으나, 강력한 상비군 전통이 없다고 한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은 비잔티움 역사 문화에 대한 비논리적인 혐오에 따른 무지와 비잔티움은 무조건 로마제국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편견의 산물이다.
4.2.2 반그리스인 성향
그리스인은 창의적이고 진취적 성향이 있다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비잔티움 비판이 강해지는 것과 궤도를 같이하여, 15권에 가까이 갈수록 그리스인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인종차별 직전의 영역에 도달하게 된다. 이 책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내놓는다면 당장 그리스에서 일본에 항의할지도 모른다.
4.2.3 반일신교 역사관
전체적으로 일관해서 기독교, 유대교, 그 외 일신교로 간주되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는 로마제국 말기를 다루는 후반부의 권에서는 한 페이지에 최소 한번 이상은 기독교 비판이 들어갈 정도.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이 없지만(애시당초에 로마인 이야기 시간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대신 이슬람이 나오는 다른 작품들에서는 기독교보다 더 깐다).
심지어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침공한 것까지 일신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신교인 그리스에 대한 공격이라는 언급고대의 십자군?을 하기도 한다.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공격한 것은 종교에도 원인이 있다는 주장인데, 이 전쟁이 종교가 원인이었다는 당대 사료는 전혀 없으며 당사자인 그리스인들 조차 종교가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추론이라고 가정해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제국 내의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던 점을 보면 이런 추론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종교 꼴통인 유대인들 조차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관용 정책을 시작한 키루스 2세를 다른 나라의 왕에게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극찬하여 칭송했을 정도이다.
작품 내내 일신교에 대한 다신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자주 발견된다. 이것은 일본의 신도를 고대 로마의 다신교와 동일시하여, 간접적으로 신도를 칭찬하려는 의도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일신교적 역사관은 에드워드 기번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는 로마제국의 쇠망의 주요 원인으로 기독교의 부흥을 꼽았다. 데이비드 흄도 <일신교와 다신교에 관하여>라는 에세이에서 비슷한 점을 주목한다. 즉 시오노 나나미의 일신교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18세기 계몽주의 전반의 역사관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4.3 구체적인 오류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데키우스 브루투스로 잘못 표기하였다. 번역 오류인줄 알았는데 일본어 원문에도 데키우스 브루투스라고 되어 있어서 빼도박도 못하게 오기 확정.
일부 부분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창작 역사관을 채용.
노예제도를 터무니없이 미화하였다. 마치 노예제가 현대의 고용-피고용이나 입양-피입양 관계처럼 묘사되었다. 로마시대의 노예들은 근세기의 아프리카 흑인노예와 달리 가족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주인이 죽을 땐 해방시켜주는게 다반사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로마 시대때엔 도시 노예, 교외 노예 둘로 나뉘었으며 시오노 나나미가 설명한 이런 노예는 도시 노예에만 해당되었을 뿐이다. 이 도시 노예들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엘리트 노예들이였고, 이런 노예는 노예들 중 아주 일부에 불과했을 뿐이였다. 노예의 대부분은 교외 노예가 되는 신세였으며 교외 노예의 운명은 현대 미국의 아프리카 인 노예 이상으로 가혹하였다. 특히 광산에서 일하는 노예들의 운명은 상상을 초훨할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소녀(미소년도 포함) 노예들은 주인의 성욕의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트 노예들 역시 그리스 귀족들이 해적에게 잡히거나 전쟁을 지휘하다가 패배해서 포로로 잡혀 팔린 그야말로 재수가 제대로 옴붙은 경우인데 주인이 죽을 때 해방시켜준다는 것만 가지고 미화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라틴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하는데 고대음과 중세음을 혼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대음인 "카이사르"와 중세 라틴어음인 "체자레"의 음가 차이를 단순히 학설의 차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건 그녀가 라틴어 발음변천사나 고전 라틴어나 속라틴어의 차이를 잘 모른다는 이야기.
언급한 내용 중 사료와 불일치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령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던 시절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에 배급할 토지 분배를 놓고 언쟁을 벌일 때 원로원들과 카이사르의 세력이 민중 집회에서 차례대로 연설을 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아피안의 사료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원로원을 배제한채 평민집회를 열었으며 이를 안 원로원 의원들이 달려가자 민중들을 동원해 이들을 구타하였으며, 이때 동료 집정관이었던 비불루스는 주위의 폭도들에게 잡해 '죽일 테면 죽여라' 라며 외치다 카이사르에 의해 끌려나갔다. 카토는 연단에 몰래 올라가서 민중들 상대로 자신의 견해를 말하려고 하였으나 폭도들은 카토를 잡고 무리 밖으로 끌어내려버렸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에선 카이사르의 지휘아래 원로원 의원들이 참석하였으며 이들 앞에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차례대로 연설을 하였고 비불루스가 거부권을 행사하려들자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론 카이사르와 그 일당들은 원로원 의원들의 참석자체를 물리적으로 저지하였기 때문에 이런 연설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콤모두스는 그의 애첩과 근위대장에 의해 암살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 '동기를 전혀 알 수 가 없다' 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콤모두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역사가 헤로디안은 콤모두스의 암살 정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면서 그들이 왜 콤모두스를 살해했었는지의 정황을 기록에 남겼다. 즉 콤모두스가 검투사 막사에 들어가 살겠다고 하자 그의 애첩과 근위대장이 콤모두스를 말렸었고 이에 분개한 콤모두스가 이들을 죽이려고 살생부를 작성한 뒤 목욕을 하러 갔는데 그의 애첩이 그 근위대장과 자신의 이름이 적힌 살생부를 보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선수를 쳐서 콤모두스를 독살하였고 독을 먹어도 죽지 않자 레슬링코치인 나르키소스를 보내 죽인 것이었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무엇때문인지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동기는 전혀 모른다. 그들이 콤모두스를 죽이면 손해인데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서술한다.
칸나이 전투에 대한 서술에서 한니발이 사용한 전술을 완전히 잘못 소개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한니발의 선두부대를 로마 보병이 뚫자 뒤에 있던 정예 보병이 가로막았고 패주한 선두부대가 양익으로 협공했다고 서술하였는데 실제론 한니발은 전체부대를 초승달 대형으로 짰고 뚫리지 않은채 포위한 것이며, 로마군의 옆구리를 친 것은 정예부대다. 실제로 로마 보병은 한니발의 보병의 두배가 넘었는데 이중으로 전선을 짰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이런 전술은 어느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카이사르의 업적에 대해 설명하면서 로마를 재창조하였고 이로써 400년간 로마의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말하였고 갈리아 제패가 전무후무한 군사적 업적인 것으로 칭송하는데 이러한 주관에 문제가 있다.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전복시키고 왕조로 바꾸어 놓았는 것을 재창조로 보기는 어려운데 그 이유는 로마의 공화정이야 말로 당시 고대 국가에서 매우 보기 힘든 법치주의+투표로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이었으며 따라서 카이사르가 '재창조' 했다는 왕정보다 더 현대 민주주의와 비슷한 정부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근대기 유럽에서 도입한 민주주의 제도는 카이사르가 뒤엎어 버린 로마 공화국의 모습을 많이 본땄으며 따라서 공화정을 전복시키고 동양 그리고 아프리카 부족들도 할 수 있는 왕정으로 대처한 것이 어째서 재창조인지는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11] 뿐만 아니라 갈리아 제패의 경우 당시 갈리아는 게르만 족에게 복속되기 일보 직전에 놓였으며 따라서 게르만 족대신 불러들인 게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는 이런 갈리아의 정세를 이용하여 게르만 족을 격파한 뒤 이에 불만을 품은 친 게르만 파 갈리아 족을 패주시키는 것만으로 갈리아 족을 제패할 수 있었다.[12] 따라서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뜬금없이 쳐들어와 식민지로 삼아버린 게르마니아나 혹은 브리타니아 제패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13]
12, 13, 14권에서 계속 반복되는 오류: 로마 제국이 선방어 전략을 포기하고 종심 방어 전략을 채택한 것은, 로마 제국 자체의 내적 역량이 약화된 탓도 있으나 근본 이유는 국경 지대 자체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이전과는 달리 갈수록 가중되었기 때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것이 파밀리아라는 개념의 쇠퇴라고 설명하지만 근거없는 해석이다. 적이 국경에 들어온 다음에야 요격하는 체제가 문제라고 거듭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3세기 때처럼 일단 방어선이 뚫리고 나면 적에게 강요하는 희생은 거의 없는 채 발칸 반도에서 뚫린 타격이 아테네까지 그대로 가는 그런 상황은 정상적인가?
선방어를 하기 위해 로마군은 예방전쟁을 해서 국경을 지켰다는 근거를 들기도 하나 예방전쟁 역시 국가적으로 엄청난 물자가 투입되므로 단지 국경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이런 전쟁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오현제 시기에 로마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던 상황과 야만족이 전반적으로 분열되었다는 상황이 겹친 한정된 조건에서 가능했던 것일 뿐이다.
상당히 잘나가던 공화정 시절조차 로마는 선방어로 저지한 적은 가뭄에 콩나듯 하였고, 적군이 뚫린 뒤 분탕질을 친 뒤에야 비로소 수도에서 군단을 징집한 다음 집정관이 이들을 이끌고 상대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아우구스투스와 오현제때 선방어가 성공한 것으로 보인 이유는 선방어의 위력이라기보단 게르만 족의 정세와 아우구스투스때 벌인 대규모의 게르만 원정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만 원정은 유명하고 또 네로의 전임인 클라디우스 황제땐 코르불로의 지휘하에 게르만 원정을 한 일이 있었다. 또한 오현제 시대로 넘어간 이후엔 먼 게르만족과 가까운 게르만족의 전쟁으로 로마를 넘볼 상황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오현제 시대에도 주기적인 정벌은 멈추지 않았다.)
즉, 시오노 나나미의 말대로 로마가 선방어 전략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선방어로는 도무지 국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전에조차 선방어로 적을 막지 못하는데 고작 10여만을 (대략 20개 군단 나머지는 동방과 후방) 지금의 유럽 서쪽부터 동쪽 끝까지 길게 늘어뜨려 어떻게 선에서 적을 격퇴한단 말인가?
애초에 시오노 나나미가 주장한 '리메스', '안전한 국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역사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최전성기 동안' 로마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이상적인 조건일 뿐이며, 이것을 전반적인 '로마의 대전략'이나 '제국 성립 기본 조건'으로 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틀린 얘기다.
15권 내용 상당 부분: 동로마 측에 대해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편견을 강화하는 주제만 다루고 있으며 그나마도 아예 사실과 틀린 부분이 많다. 동로마 제국이 재정 낭비만 한 것으로 다루고 있으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국의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실제로 그것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유스티누스 2세 때 재정난이 있었으나, 티베리우스 2세의 긴축 정책만으로도 제국의 국고는 다시 건전하게 회복될 수 있었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는 이런 것을 생략한다. 역시 동로마까 그냥 읽기도 싫어서 모르는 거 아닐까나
4.4 근거없는 해석
1권의 대부분 : 로마 7왕이나 당시의 에피소드들은 현재로서는 거의 전설에 가까운 설화이며 상당히 근거가 얕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사실성을 가리지 않고 너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런 전설들을 놓고 현실 정치나 군주론을 논하는 것은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각각 로마에서 자신의 반대파에 대해 정치적 테러를 가한 것에 관해, "마리우스는 단순한 복수를 했지만, 술라는 원로원 체계를 세우기 위해 반대파를 철저하게 숙청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대조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결국 승리자가 술라이고 마리우스와는 달리 승리 후에 오래 살아 있어서 체계를 다시 세울 시간이 있었던 것일 뿐. 일차적으로 두 행동은 모두 복수에 불과할 것이다.
카이사르의 간질병설을 멋대로 기각하고 있는데, 사실 근거가 좀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사료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확실히 기각할수 있는 근거도 없다. 이는 그녀의 카이사르에 대한 애정이 너무나 강한 나머지 그에 부정적인 설은 멋대로 부정했다고 봐도 된다.
이집트의 독립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로마 장군들을 미모로 홀린 클레오파트라는 전통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시오노 여사는 정반대로 혹평. 자신이 짝사랑하는 카이사르의 애인이라서 연적으로 느낌참고로 시오노 나나미는 여성 군주들에 대해 혹평하는 경향이 있어 12권에서는 제노비아도 까고 있다.
아르미니우스와 베르킨게토릭스를 비교하면서 전자에 대해 부정적, 후자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술. 로마인 이야기 6권에서 이들을 비교하면서 갈리아인들을 단결시킨 베르킨게토릭스와 게르만족과도 내전을 벌인 아르미니우스의 차이점을 들어 비교했다. 하지만 타키투스와 같은 당시대 로마인들조차 자신의 민족을 위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아르미니우스를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조금 지나칠 정도. 사실 베르킨게토릭스도 근본적으로 부족 체계인 갈리아 인들을 단결시키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그의 실패에는 갈리아 부족들의 대립 관계 역시 큰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4.5 객관성 문제
혹자는 20세기 말이 낳은 최고의 동인지라 평하고도 있다(…). 작가 본인이 좋아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면 객관성을 던져버리고 완전히 '빠순이'모드로 돌변하는 모습 때문.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성을 잃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봐도 동인지다. 시오노 할머니, 연세를 생각하세요
특히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에 대해서 카이사르의 적이었다는 이유로 저평가한다. [14]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내용도 너무 짧다. 스파르타쿠스에 비하면 무명이나 다름이 없는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시시콜콜하게 써놓으면서도, 스파르타쿠스에 대해서는 대충 언급하고 넘어간다.
----
[1]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학계의 시각은 로마사의 권위자인 고려대 사학과의 김경현 교수의 글을 참조할 것. 시평 '시오노 나나미 현상'과 역사 바로 읽기(http://dcafe.tistory.com/174)
[2] 그래도 학계에 대체적으로 로마 제국이라고 다루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까지는 다루었다. 물론 이것도 옛말. 예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세적, 그리스적 성격을 강조했으나 8,90년대 이후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체제와 동로마 체제의 연속성을 인정한다.
[3] 시오노씨의 다른 책들을 보면 확실히 로마인 이야기와 차이가 난다. 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십자군 이야기는 문체가 엄청나게 딱딱하다. 하지만 김석희씨도 어느 정도의 번역 오류를 저질렀으며, 스스로도 자신의 번역 스타일에 대해 '성실한 추녀보다 불성실한 미녀'라고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밝혔다.
[4] 한 권은 로마 인프라만 다룬 책이니 제외
[5] 이건 다른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6]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 황제시기를 다룬다.
[7] 일본의 전통 종교와 모순되는 기독교에 적대적인 성향이나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보는 철인정치관은 다른 일본인 작가인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에도 잘 나타난다. 물론 이쪽은 민주주의와 전제주의 둘다 비판한 거지만...
[8] 비난의 이유는 거의 근거가 없다. 그냥 기독교를 믿는 황제는 시오노 나나미가 보기에 고대의 교양을 상실한 무식한 중세 군주에 불과하다는 편견을 거친 결과. 게다가 로마 제국 전성기 때는 가용한 자원이 무한대였을 때고 문제가 있어도 극복이 쉬운 시대인 데 그것을 한계 수익성이 떨어진 후대의 체제하고 함부로 비교한다는 건 아주 큰 문제가 있다. 게다가 있는 사실도 왜곡하는 사례가 너무 두드러진다. 지나친 비난 정도가 아니라 그냥 근거 없는 침소봉대라 할 수 있겠다.
[9]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15권에 나오는, 아예 잘못된 정반대의 얘기를 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행태에 대한 것이다. 통치자로써 문제 많았던 유스티니아누스의 일면과는 전혀 무관하다.
[10]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8세기 사람이고 유스티누스 2세는 6세기 사람이다. 본격 시간을 뛰어넘는 황제 단, 이것은 번역자의 실수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일본어 원문 대조 가능한 분이 추가 바람.
[11] 재창조가 아닌 퇴보라고 볼 수가 있다
[12] 가령 만일 게르만 족이 카이사르를 패주시킨 뒤 불만을 품은 친 로마파 갈리아 족을 패배시켰으면 갈리아 전역은 게르만 족이 제패하게 되었을 것이다.
[13]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는 7년만에 재패했는데 왜 아우구스투스는 수십년간 게르만 족의 엘베강까지의 지역을 제패하지 못했고 또한 클라우디우스때 브리타니아를 제패하는 것이 30년 정도가 걸렸느냐라며 비교하는데 이러한 직접적인 비교는 문제가 있다. 마치 폼페이우스는 군단을 이끌고 동방으로 오자마자 셀레우코스를 멸망시키고 유다를 점령하는데 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수백년간 셀레우코스와 싸웠으면서도 이것을 해내지 못했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14] 키케로를 입만 산 찌질이, 개혁자 카이사르 각하에게 대항하는 책상물림 따위로 표현하는 건 이미 18세기 영국에서도 퍼진 풍조이기는 하니 시오노 나나미만의 탓은 아니라지만, 이는 즉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사 인식 수준이 아직도 18세기 레벨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 비잔티움까 성향도 역시 18세기적 인식에 가깝다. 진중권이 이문열에게 한 평가를 패러디하자면, 그녀는 훌륭한 18세기 역사작가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