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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색잡지 [허슬러]를 들고, 그가 일하던 [에스콰이어]의 표지모델이 되다.
(1976년 11월호)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남자를 꼽는다면 누가 있을까?

최대 강대국의 대통령인 부시? 아니면 재산이 많은 빌 게이츠? 아니면 절대권력의 김정일? 오, 노노...

그들은 가진 것이 많은 만큼 그에 대한 절대적 비난이나 혹은 독점적 지위로 인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여기 이 사람, [플레이보이] 최고경영자이자 수석 편집자인 휴 헤프너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부러울 것이 없는 남자가 아닌가 한다.

대인의 (여자들의) 위용

왜냐, 전 미국 최고의 쭉방걸을 늘상 곁에 두고, 그들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 때마다 므흣한 파티를 열어 전세계를 휘어잡는 미 연예계의 인사들과 함께 밤을 즐겨도 대놓고 뭐라 그러는 놈 없으며, 오히려 부러워 하지 않는가? 부시나 빌게이츠가 이러고 놀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얼마전 국내에서도 플레이보이 모델을 뽑아서는, 그 선발된 모델의 누드 사진을 휴 헤프너의 저택에서 촬영했다 하지 않은가? 이렇게 휴 헤프너는 이제 그저 남의 나라 할아버지의 얘기만은 아닌 것이다.

그리하야 이미 오래전 여러분의 손에 한번쯤은 거쳐갔을 미국 최대의 춘화잡지 [플레이보이]를 창간한 휴 헤프너 대인을 오늘의 진상조사 주인공으로 모셨다.

대인의 탄생

대인은 1926년 4월 9일(포르노 스타 제나 제임슨의 생일과 같은 날이다) 일리노이즈의 시카고에서 태어났는데, 어느 밤 하늘에서 별똥이 떨어지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의 부모는 네블스카에서 온 농부라고 하는데, 휴 헤프너는 전형적인 농가의 감리교인으로 자랐다. 하지만 그의 아이큐는 놀랍게도 152가 넘는 천재였다. 헤프너는 시카고의 초중고를 거쳐 미국 육군에 입대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동안 근무를 했다. 제대 후 대인은 일리노이즈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여기서 그의 첫부인이 되는 밀리 군(Mildred Williams)을 만나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인은 [섀프트 Shaft]라는 유머잡지를 만들었고, 잡지에 카툰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의 첫직업은 마분지 판지에 인쇄를 하거나 제작을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일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잡지업계로 진출을 하게 된다.


백화점 외판원을 거쳐 남성잡지 [에스콰이어]의 카피라이터가 되지만, 1952년 그곳을 떠나 [Children's Activities]라는 출판하는 곳으로 옮긴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도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가구를 400달러에 저당잡히고, 45명의 투자자를 만나 10,000달러의 사업자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호색잡지 PLAYBOY의 탄생

본래 [플레이보이]에 대한 아이디어는 헤프너가 대학에 다닐 때부터였다고 한다. 이 잡지의 이름은 애초에 [수컷파티 Stag Party]라고 지으려고 했으나 이미 [Stag Magazine]이란 잡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에 고심하고 있던 차에 그의 친구인 Eldon Sellers가 한량, 난봉꾼, 바람둥이를 뜻하는 [플레이보이]를 추천하여 주었고, 토끼가 동물세계의 플레이보이라고 착안하여 결국은 토끼를 상징으로 하는 [플레이보이]를 창간하게 된 것이다.

플레이보이의 창간호

그는 1953년 창간호를 만들면서 당시 [나이아가라] 스타가 되었던 마릴린먼로의 데뷔 전 누드 사진을 200달러에 입수, 표지로 장식하면서 무려 54,000부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렸다.

[플레이보이]는 다들 아시다시피 독특한 발행형태를 지금까지도 고수하고 있는데, 당해 월의 모델을 플레이메이트(PLAYMATE)라고 명하고, 그들의 칼라누드화보를 중간에 접어 넣음(Centerfold)으로 구매력을 이끌었다. 비디오가 나오면서 그들의 영상을 촬영하여 판매하였고, 한 해가 지나면 각 달의 플레이메이트를 모아 캘린터영상을 만들어팔았다.

그 첫 번째 센터폴드의 내력이 재밌는데, 1955년 사무실에 사환아가씨가 있었는데 헤프너가 그녀에게 누드를 한 번 찍어볼 것을 권했다. 이에 응한 그녀는 그해 6월 센터폴드로 잡지에 실리게 되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Janet Pilgrim이었다(본명은 Charlene Drain).

Janet Pilgrim

또한 문제도 있었는데, 1958년 엘리자베스 앤 로버츠라는 모델의 누드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녀의 사진이 잡지에 실리고 나서 그녀의 엄마가 주정부에 체포가 되는 일이 생겼는데, 그녀의 나이가 18세가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헤프너는 그녀로부터 18세가 넘었다고 들었던 것이다. 결국 아이의 사진을 실을 수 없었다.


대인의 여인들

아까 말했듯이 그는 첫 번쨰 부인이 될 여자를 대학교에서 만났다. 그녀와의 사이에 크리스티 헤프너(현 경영자)가 태어났다. 그리고 컴퓨터프로그래머인 아들 데이비드가 있다. 헤프너는 첫 번째 부인과 1949년에 결혼, 1959년에 이혼했다.

Kimberley Conrad

그후 1988년 플레이메이트 출신인 킴벌리 콘라드(Kimberley Conrad)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그후 1989년애 PMOY(PlayMate Of the Year)가 되었다.이 결혼 또한 1998년 깨졌으며, 그의 일부일처 생활은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후론 그는 결혼은 하지 않고 18~19 세 되는 그해의 플레이메이트를 불러다 집에서 지내고는 했는데, Donna Michelle, Marilyn Cole, Lillian Muller, Patti McGuire, Terri Welles, Shannon Tweed, Brande Roderick, Mary Warren, Barbi Benton, Karen Christy, Sondra Theodore, Carrie Leigh 등이 그녀들이다.

Shannon Tweed

킴벌리 콘라드와 헤어지고 나서는 18~28세의 금발 미녀들을 데리고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는데, 그는 어느 잡지에서 이랬다고 한다.

놀랍게도 말이죠... 그녀들도 원한다는 거에요. ^^

니덜도 원한다고? 사실이야? 진짜야?

이런 닝기리...

여튼, 늘 최고의 시간을 보낸다는 이 80세의 할아버지... 돈있지, 여자있지, 큰집있지... 세상천지에 부러울 게 뭐란 말이냐. ㅜ.ㅜ;;;

어떤가, 다들 부럽지 않은가?

이런 거 해보고 싶잖아!!!

* 출처 : 남로당(www.namrodang.com)





모든 세대들에게 휴 헤프너라는 이름은 불가피하게 섹스라는 주제와 연관지어져 왔다.

명성과 함께 악평을 받고 있기도 한 이 플레이보이 기업의 창시자이자 최고편집인이 뒷골목과 술집에서 은밀히 얘기하던 주제들을 TV와 라디오 등의 공개 석상에서 논의할 수 있게 만들어 1960년대 성 혁명에 불을 지폈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다.

성 혁명에 불을 지피다
헤프너의 공헌이 없었더라면 성 치료 전문가인 루스 웨스트하이머 박사나 MTV의 솔직한 시청자 전화참여 토크쇼 ‘러브라인’처럼 자세하고 공개적으로 성적인 담론을 나눌 수 있는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공로로 플레이보이사의 토끼 표상은 미국의 상징이 됐으며, '나는 플레이보이지의 사진을 보는 게 아니라 기사를 읽는다'라는 유머 문구를 사실상 미국 도처에 퍼지게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헤프너는 ‘센터폴드(centerfold)'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 단어는 현재 영어 사전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역자주: centerfold는 잡지 한 가운데에 누드 사진 등을 접어 넣는 페이지를 말하며, ’섹시한 여자‘라는 속어로도 쓰인다)


시카고에서 태어나
헤프너는 1926년 4월9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글렌과 그레이스 헤프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헤프너의 양친은 모두 교사였다. 헤프너의 부모님은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였으며, 그를 잘 양육하긴 했으나 애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헤프너는 “(부모님은) 꼭 껴안아주거나 키스해주지 않았으며,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게다가 부모님은 네브라스카주 농장 출신들로, 본인들도 전형적인 억압적 환경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수줍음 많던 젊은이
1940년 슈타인메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헤프너는 수줍어하는 성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지르박을 배웠고, 난생 처음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헤프너는 “내 인생의 절정, 이팔청춘이었던 42년 그 해 여름, 그녀는 잡화점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그 근처 극장의 안내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그녀를 태우고 볼링을 치거나 춤을 추러 가곤 했다”며 “정말 즐겁고 재밌는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읽고 싶은 잡지를"
1944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헤프너는 군대 신문사의 기자로 미국 육군에 입대한다. 1946년, 군대에서 명예 제대한 헤프너는 에스콰이어지에서 선전용 팜플렛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남성 잡지를 출판하겠다는 생각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에스콰이어지는 줄곧 장년층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변화해왔고, 인기 있는 여타 잡지와 마찬가지로 남성간의 유대나 야외에서의 모험을 집중적으로 다뤘다”며 “나는 좀 더 세련되고 남성의 관점에서 본 로맨틱한 이성 관계에 확실히 초점을 맞춘 잡지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플레이 보이' 대성공
1953년 헤프너가 6백달러를 갖고 시작한 플레이보이는 즉각 성공을 거뒀다. 헤프너는 여배우 마릴린 먼로의 누드 사진을 실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판단했다. 플레이보이 첫 호는 전국에서 5만부가 팔렸다.

ABC 방송의 쇼프로 '폴리티컬리 인커렉트(Politically Incorrect)'의 진행자인 코미디언 빌 마허는 “헤프너가 플레이보이를 제안했을 때 그는 사업에 쏟아넣을 돈 조차 구하지 못했었다"며 "알다시피 그는 플레이보이에 관한 아이디어를 출판업자들에게 팔려고 했으나 그가 '성은 확실한 상품'이라고 얘기하면 출판업자들은 '잘 모르겠다. 벌거벗은 여성을 실은 잡지라니 모험적 발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라고 말했다.


결혼과 이혼
헤프너가 잡지 편집인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그의 개인적 생활은 전환 국면을 맞는다. 그는 1959년 첫번째 아내 밀리에와 이혼을 했다.

헤프너와 첫번째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두 자녀 중 하나인 딸 크리스티는 "나는 너무나 어렸다. 그렇지만 설명을 하고자 한다면 부모님이 너무 어릴 때 결혼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여긴다. 나는 그들이 당시 세대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세대는 우리 세대와는 달리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곧장 결혼을 하곤 했다. 그래서 상대방에 대해서, 자신이 장차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그리고 21살 때 자신이 결혼할 준비가 돼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알기가 어렵다"고 얘기했다.


'플레이보이의 펜트하우스'
헤프너는 이혼한 그 해, 헤프너는 그 당시에 등장한 새 미디어의 이용권을 장악해 '플레이보이의 펜트하우스'라는 TV 쇼의 진행을 맡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플레이보이라는 상표를 확장해 '플레이보이 클럽'으로 알려진 회원제 나이트클럽 체인점까지 개장했다.

헤프너는 플레이보이의 외설물 관련법 위반 혐의로 1963년 체포됐다. 그러나 이후 공판에서 무죄로 석방됐다. 헤프너는 성은 플레이보이가 다루고 있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이후 재즈 뮤지션 마일즈 데이비스를 인터뷰한 알렉스 헤일리와 최근 사망(1997년)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 등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쓴 기사와 작품 등을 실음으로써 이를 입증했다.


"섹스 잡지가 아니다"
헤프너는 "솔직히 말해 이제까지 플레이보이를 섹스 잡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플레이보이를 항상 성을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하는 생활양식 잡지라고 여겨왔다"고 얘기했다.

남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성 연구 과정을 맡고 있는 로이스 배너 교수는 플레이보이를 창간함에 있어 헤프너가 시기와 장소를 잘 만났다고 말했다.


때를 잘만난 사나이
배너 교수는 "그는 때와 장소를 잘 만났고, 대단히 대담하기도 했다"며 "헤프너는 경영자로 훨씬 뛰어났다. 그가 반드시 문화적 아이콘의 창조자로서 많은 수완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화적 아이콘은 여성들이고, 그는 단지 그것을 문화의 광범위한 현상의 하나로 키워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매달 발행되는 플레이보이지는 1971년, 발행부수 7백만을 돌파하며 전성기를 맞는다. 같은 해 플레이보이사는 주식을 공개한다. 당시에는 플레이보이 양식의 음주와 연예를 제공하는 23개의 플레이보이 클럽이 운영되고 있었다. 말했다.

헤프너는 1971년 서부로 이주해 베버리 힐즈에 있는 광대한 캘리포니아 맨션을 구입했다. 이 집이 '플레이보이 맨션 웨스트'가 됐다.


대통령 후보 인터뷰
1976년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에 민주당의 지미 카터 후보가 플레이보이와 인터뷰를 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로써 카터는 플레이보이지와 인터뷰를 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 후보가 됐다. 잡지에 실린 인터뷰 내용 중 카터가 한 말은 선거 유세의 논쟁거리가 됐다.

카터는 인터뷰에서 "나는 욕정을 품고 수많은 여성들을 관찰해왔다. 마음 속으로 여러번 간음을 저질러왔다. 하느님은 내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며, 나를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년에 닥쳐온 위기
그러나 1980년대 들어 플레이보이의 인기는 많이 시들해졌다. 창간 30년이 가까워지면서 플레이보이는 '중년의 위기' 같은 것을 맞게 됐다. 플레이보이의 '올해의 연인'이었던 도로시 스트라텐이 1980년에 살해됐다. 스타 트리뷴에 따르면 플레이보이사는 1982년에 5천1백만 달러 이상을 손해봤으며, 1988년에는 미국에 있던 마지막 플레이보이 클럽이 문을 닫았다. 헤프너는 1985년 가벼운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그가 자신의 생활 방식을 되돌아보고 있다고 보도된 후 헤프너는 딸인 크리스티에게 플레이보이 경영권 전부를 넘겼다.

크리스티 헤프너는 "나는 아버지와 연관지어졌다. 가장 어려운 일로부터 보호받았던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크리스티로 보지 않고, 휴 헤프너의 딸로 대했다. 여론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위기 극복과 재혼
크리스티는 1980년대가 플레이보이지에 있어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는 점을 시인했다. 그녀는 "확실히 우리는 성 혁명과 페미니스트의 시대가 끝난 80년대에 플레이보이지의 역할을 두고 고전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89년,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헤프너는 올해의 연인이었던 킴벌리 콘라드와 재혼했고,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됐다.

누드 모델과의 결혼, 또 이혼
콘라드는 "사진 촬영을 위해 그곳에 갔다. 그리고 6~7개월 후 그가 내게 사귀자고 제안했다. 그는 과도기에 있었다. 그는 애인과 헤어진 상태였고, 그래서 내게 사귀자고 했다. 나는 몇 차례 거절을 했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침내 사귀기 시작했고, 정말 잘 지냈다"고 연애 기간을 설명했다.

헤프너-콘라드 부부는 1998년 별거에 들어가 결국 이혼을 했다. 그녀는 현재 플레이보이 맨션 웨스트 구내에 있는 한 집에서 아이들과 살고 있다.

대학생들에게 인기
"콘라드와의 결혼 생활에 불화가 있기는 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여전히 계속됐지만, 일단 헤어지자는 결정은 내려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남자들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아이들은 양친이 함께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1999년경, 스타 트리뷴은 플레이보이가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학 캠퍼스의 예약구독이 전년도에 비해 62%나 증가했던 것이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다
1998년 헤프너는 미국 잡지 편집인 협회 명예의 전당에 오르며 출판-잡지계에서 그가 일궈놓은 제국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코스모폴리탄의 헬렌 컬리 브라운, 미즈 매거진의 글로리아 슈타이넘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황금 시대
2003년 플레이보이 창간 50주년을 앞두고 헤프너 왕국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인기 미디어를 통해 다시금 각광받고 있다. 플레이보이의 인터넷 사이트는 "우리는 우리의 아파트를 좋아한다. 우리는 칵테일과 함께 전채요리 한 두가지를 먹는 것을 즐기며, 포르노와 무드 있는 음악을 틀어 놓고 아는 여성을 초대해 피카소나 니체, 재즈, 섹스 등을 주제로 조용히 대화 나누는 것을 즐긴다"라고 밝힌 1953년 창간호의 메시지를 싣는 새로운 창구가 되고 있다


놀라운 수익을 올리다
플레이보이사는 2002년 말 이전에 온라인 분야에서 수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인터넷 사이트는 수익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플레이보이사는 2001년 4분기 수익이 18% 상승한 7백70만 달러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와이어드 매거진은 플레이보이가 인터넷 사이트 운영으로 지난 2년 간 5천만 달러의 손실을 봤으며, '이달의 모바일 연인(Mobile Playmate of the Month)'이라고 불리는 이동 전화 사진 서비스를 개시해 부분적으로 수익을 올릴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플레이보이사는 자사의 온라인 카지노가 인터넷 상에서 수익을 올리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75세 생일 파자마-란제리 파티
플레이보이사는 그 자체로 4억2천5백만 달러의 자산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플레이보이지의 미국내 유료 발행부수는 총 3백15만부에 달한다. 또한 이 회사는 5백만명의 성인이 추가적으로 플레이보이지의 17개 국제판을 읽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헤프너는 지난해 75번째 생일을 맞아 그 유명한 튜더 양식의 플레이보이 맨션에서 유명 스타들을 초대해 떠들석하게 '파자마·란제리 파티'를 여는 등 획기적인 사건을 벌였다.

헤프너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사실상 7명의 애인을 두고 있으며 우리는 한 무리의 아이들 같다"고 밝혔다.


"나는 꿈을 실현시킨 아이"
성적으로 억압받던 1953년, 헤프너의 통찰력은 성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의식을 바꿔놓는데 일조했고, 미국에서 성 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문을 여는 데도 한몫했다. 플레이보이라는 이름의 성공과 존경받는 작가들이 쓴 기사를 제공하겠다는 플레이보이의 의도는 결국 헤프너를 선구적인 잡지 출판인이며, 꿈꾸는 사람으로 인식시키는 역할을 했다.

헤프너는 "사회와 성 의식 면에서 세상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바꿔놓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며, 그렇게 되면 정말 기쁠 것"이라며 "나는 꿈꾼 바를 실현시킨 아이"라고 말했다.







며칠동안 흥분했었다. 내가 남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한번도 플레이보이지를 이처럼 떳떳하게 본 적이 없었으므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고개를 떳떳하게 들고 정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약간의 희열마저 가져왔다.

플레이보이에 대한 모든 것을 뒤져 보면서 플레이보이지 뿐만 아니라 여자들이 보면 안 될 것 같은 잡지들을 샅샅이 봤고 또 나름대로 등급도 매기게 되었다. 천한 잡지, 추한 잡지, 타부잡지, 변태 잡지, 예술 잡지.

내 관점으로 보는 플레이보이지는 분명 예술 잡지였다. 여자인 내가 봐도 정말 아름다운 몸매, 풍만한 가슴, 개미허리, 탄력있는 엉덩이, 신비로운 그 곳… 플레이보이지의 사진사들은 여자의 몸애가 어떤 각도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플레이메이츠들은 절대 아무 각도에서나 옷섬을 헤치거나 다리를 벌리지 않았다. 비록 가끔 배구공만한 가슴을 단 이상한 여자들이 나오긴 했지만… 타 잡지들처럼 천하지도 않았고, 금기시하는 것들을 다루는 잡지도 아니였으며, 절대 징그럽지 않은 사진들을 다루고 있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여자들의 몸, 섹스]가 절대로 플레이보이지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 플레이보이지를 보면 요즘 정치계도 알 수 있고, 유행 물품도 알 수 있으며, 사회적인 이슈도 알 수 있다. 물론 주제는 [여자의 몸과 섹스]이지만…

 
며칠전 친구와 케이블 TV에서 휴 헤프너의 75세 생일파티 스페샬을 본 적이 있다. 7명의 동거녀들, 화려한 저택, 3000궁녀와 의자왕이 부럽지 않았다. 그의 생일 파티때마다 세계의 난다 긴다(정치계, 연예계 등)하는 남자들은 메일박스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고 한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은 아카데미 시상식에 가는 표를 받는 것보다 더욱 기뻐했다. 그의 플레이보이 맨션에 가면 항상 쭉쭉 뻗은 벌거벗은 미녀들이 있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파티가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을 컨트롤 하는, 휴 헤프너, 그가 있었기 때문에.


유명한 섹스폰 연주자들의 반주에 맞춰 토끼띠를 두른 미녀들과 함께 부르스를 추고,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코메디언들을 초대해 직접 즐기며, 앞마당에 있는 온천에서 미녀들과 함께 목욕을 하며 칵테일을 마신다. TV에 나온게 이 정도인데 이 후에 일어나는 일은 조금 더 방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내가 남자라도 그 파티에 한번 가 봤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광란의 밤을 보내는게 틀림없다. 만약 이런 파티가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흐미… 상상이 간다.

 
미국의 섹스 심벌 마릴린 몬로와 그의 인연도 필연인 듯. 바로 플레이보이지 창간호의 표지 모델이 마릴린 몬로였던 것. 54년 플레이보이지 창간호 표지 모델로 그가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를 쓴 것은 53년 개봉한 <나이애가라> 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등장한 마릴린 먼로의 탄생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헤프너는 그 다음해 그녀를 창간호 표지모델로 세웠고 단돈 8,000달러 자본금의 이 회사는 75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27세의 별 볼일 없는 만화가였던 휴 헤프너의 인생은 마릴린 몬로와 플레이보이지 덕분에 열임금이 부럽지 않은 인생으로 바뀐 것.

 
60년대 말이 되자 성의 표현은 더욱 화끈해졌다. '플레이보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펜트하우스'는 당시까지 금기시 됐던 여성의 음모를 과감하게 사진에 담았다. 뒤질세라 '플레이보이'도 72년부터 부랴부랴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부각시켰다. 이에 질세라 펜트하우스지는 한 술 더 떠 남자까지 등장시켰고 점점 더 변태적인 추세로 몰고 갔다. 플레이보이의 뽀샤시한 사진들은 적나라한 펜트하우스지의 사진들에 묻혀 점점 더 인기가 하락했다. 하지만 물론 그 시절보다는 더하겠지만 내가 본 펜트하우스지는 너무나 저속하다. 남자들은 이런 펜트하우스지의 도가 지나친 적나라함에 질리는 듯 다시 플레이보이의 환상속으로 파고 들어갔고 그 인기는 지금까지 계속 된다. 소위 아름다운 성을 추구한 플레이보이는 미국사회가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안전한 길을 택함으로써 오늘날 성인문화를 대표하는 승리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 후 탄탄대로였던 그의 인생은 정력 감퇴와 함께 맥을 못 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인생에 두려면 정력이 무지 세야 되겠다는 생각은 결혼을 안한 나도 가늠할 수 있는 일. 그는 16년 전부터 정력이 많이 쇠퇴했고 때에 맞춰 심장마비 증상도 보여 이 헤픈 사나이의 여자 편력이 조금 주춤할 듯 보였었다. 이 때 그는 "당분간 한 번에 한 여성과만 사귀겠다"며 믿거나 말거나인 말을 하기도 했었다. 결혼도 하고 딸도 낳은 그는 이혼 후 다시 방탕한 생활로 돌아갔지만 설상가상으로2년 전, 70개의 방이 있는 대저택에서 함께 살던 4명의 여자 친구가 '가출'을 했다. 아무리 부러울 것이 없오 보이는 그도 마음의 상처와 세월이 주는 나이가 쉬운 고비는 아니었는 듯 잠시 절망에 빠졌었다고 한다. 이 위기에서 이번엔 '비아그라'가 그를 구해줬다. '비아그라'는 말 그대로 정력이 나이애가라처럼 철철 넘치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 비아그라는 그의 자신감을 되찾아 주었고 이와 함께 여자들도 다시 붙었다.

 
젊은 여자가 노인과 결혼을 하면 기를 빼았겨서 노인은 회춘하고 여자는 늙는다는 말을 어디서 줏어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75세의 고령인 휴 헤프너는 아직도 맨질맨질한 살결을 고수하고 있다고. 휴 헤프너 자신도 "젊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문화와 세상사에 관심이 생긴다. 우리 관계는 호혜적이며 착취는 없다"고 자신의 생활을 옹호했다.

 
휴 헤프너는 〈플레이보이〉지를 창간해 인간의 실제 생활 속에 스며 들지 못했던 성의 욕망을 대중화시켰다. 즉 '성이 해방되어야 하는 가' '위선을 벗고 우리 욕망에 충실해야 하는가' 등의 대중적인 설화들을 쏟아내 성이란 무엇인가를 은연 중에 대중에게 이식시켰던 것이다. 오르가슴과 성적 욕망의 대상, 성적 자유, 그리고 성적 언어와 동작을 플레이보이에 의해 배웠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플레이보이의 열렬한 팬이다. 플레이보이지는 레이건 전대통령의 딸을 모델로 세울 수 있고, 드류 베리무어가 모델로 서도 저속하단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위치에 서있다.

 
언젠가 아는 오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녀합반이었던 그는 여학생들이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마다 여학생 탈으실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릎까지밖에 안 보이던 그 탈의실을 훔쳐 봤다고. 여학생들이 옷을 하나씩 벗을때마다 발위로 떨어지는 옷가지를 보면서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가릴건 가리고, 상상력을 동원시키는 방법을 적절하게 쓴 플레이보이가 허슬러와 펜트하우스지를 앞질러 지금까지 포르노 잡지중 최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게 조금은 이해가 된다. 아울러 모든 미국 여성들의 필수품이 된 띠팬티(Thong Panty)를 유행시키고 토끼 머리띠를 트레이트마크화 시킨 플레이보이의 대중성은 미국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자리를 굳게 보존하고 있다.

출처:msvoic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