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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트만 이야기

라/ㅗ 2002. 4. 4. 05:51 Posted by 로드365



세상에서 가장 멋진 노인네.
헐리우드 제작 시스템이 문제라구?
이 노인네처럼 극복하면 되는것 아닌가?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 아쉬울 뿐.
그의 말대로 길위에서 신을 신은 채 마지막을 맞이했는지 모르겠다. 




`알트먼 스타일`이 만들어지기까지

알트먼의 명성을 확고히 한 영화는 블랙코미디 <매쉬>(1970)이다. 이후 알트먼 영화가 세련된 복합성을 지닌 작품으로 변화하는 것은 촬영감독 빌모스 지그몬트의 참여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지그몬트는 <맥케이브와 밀러부인>(1971), <이미지>(1972) 그리고 <기나긴 이별>(1973)에서 알트먼과 함께 작업했다. 그는 당시 막 명성을 쌓아나가기 시작하던 새로운 감독들과 많은 작업을 같이 했는데, 그중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슈가랜드 특급>(1974), <미지와의 조우>(1977)), 마이클 치미노(<디어 헌터>(1978), <천국의 문>(1980)), 존 부어맨(<서바이벌 게임>(1972)) 등이 포함되어 있다.
70년대 이루어진 장르영화의 쇄신에 지그몬트의 유려한 영상이 큰 몫을 담당했음을 주목해둘 필요가 있다. 마이클 치미노의 대작 서부극 <천국의 문> 작업 당시, 지그몬트는 <맥케이브와 밀러부인>에서와 달리 필터촬영을 자제하고 대신 퍼져나가는 연기와 먼지 등을 이용해서 화면을 가득 채워놓았다. 그 외 클로드 소테와 함께 작업한 바 있는 장 보페티는 <우리 같은 도둑들>(1974)과 <퀸테트 살인게임>(1979)에서 알트먼과 함께했다.

알트먼의 초기 경력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하나는 바로 배우 셜리 듀발이다. 알트먼이 <브루스터 맥클라우드>(1970) 작업 당시 발견한 그녀는 본디 화장품 판매원이었다. <맥케이브와 밀러부인>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던 그녀는 이후 주연으로 출연한 <우리 같은 도둑들>에서의 연기를 통해 주목받게 되었다. <내쉬빌>(1975),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1976), <세 여인>(1977), <뽀빠이>(1980) 등의 알트먼 영화에는 빠짐없이 그녀의 이름이 올라 있다. 또한 듀발은 우디 앨런의 <애니 홀>(1977)에서 앨런의 데이트 상대자 가운데 하나로 출연했고, 큐브릭의 <샤이닝>(1980)에선 잭 니콜슨과 공연하기도 했다. 다양한 배우들과 작업하기를 즐기며 종종 탈중심화된 방식으로 인물들을 보여주곤 하는 알트먼의 성향을 고려해볼 때 분명 셜리 듀발의 존재는 특이한 것이다.

알트먼 초기 영화에선 레온 에릭슨이나 앤서니 매스터스- 매스터스는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와 데이비드 린치의 <사구>(1984) 등을 작업했다- 이 프로덕션 디자인을 담당했지만, <은밀한 명예>(1984) 이후 최근 <고스포드 파크>에 이르기까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는 그의 아들 스티븐 알트먼이 이를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최근의 알트먼 영화에서 같이 작업하고 있는 이들을 살펴보는 것은 거의 의미없는 일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알트먼은 어떤 스탭이나 배우와 작업하더라도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창조해는 진짜 ‘감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Filmography
 
The James Dean Story(1957)
The Delinquents(1957)
Nightmare in chicago(TV 1964)
Countdown(1968)
That Coid Day in the Park(1969)
M.A.S.H(1970) <야전병원 매쉬>
Brewster McCloud(1970)
McCabe & Mrs. Miller(1971)
The Long Goodbye(1973)
Thieves Like Us(1974)
California Split(1974)
Nashville(1975) <내쉬빌>
Buffalo Bill and the Indians, or Sitting Bulls History Lesson(1976)
A Wedding(1978)
Quintet(1979) <퀸텐트 살인 게임>
A Perfect Couple(1979)
H.E.A.L.T.H(1979)
Popeye(1980)
Come Back to the Five and Dime, Jimmy Dean, Jimmy Dean(1982)
Streamers(1983)
O.C & Stings(1983)
Secret Honor(1984)
Fool for Love(1985) <사랑의 열정>
Beyond Therapy(1987)
"Les Boreades"-segment in Aria(1987)
Vincent & Theo(1990) <빈센트와 테오>
The Player(1992) <플레이어>
Short Cuts(1993)<숏컷>
Pret-a-porter(1994) <패션쇼>
Kansas City (1996) <캔사스시티>
The Gingerbread Man(1999)<진저브레드맨>
Cookie′s Fortune(1999)


감독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겨운 싸움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헐리우드에서, 더욱이 독립된 자본으로 말이다. 로버트 알트 만이 그러하다면 분명 그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1925년 캔사스시티 출생으로 올해 74세의 노장이다. 그럼에도 알트만은 노익장이라도 발휘하듯 내용과  형식적인 면에서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한다.

알트만의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우선, 헐리우드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영화의 틀을 깨려는 작업이다.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작품상을 각각 수여한 <야전병원 매쉬>와 <플레이어>는 이러한 특징을 대표할 만한 작품이다. <야전병원 매쉬>에서 그는 맥아더 장군의 사명감있는 자막과 전쟁과는 상관없이 장난치기 좋아 하고 줄창 여자만 밝히는 군인들을 대조시키면서 블랙코메디의 효과를 낳는다. 무거운 주제를 해프닝의 연속으로 풀어내면서 그 가벼움이 오히려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연출한다. 이러한 특징은 <플레이어>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단지 줌인과 줌아웃, 트랙 인과 트랙 아웃만으로 컷 하나 없이 롱테이크-실제 이 오프닝 시퀀스는 8분 14초나 된다.-를 유지하는데 이러한 촬영의 의도는 인물과 인물이 어떤 식으로든 계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려주며, 또한 내러티브를 구축할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즉, '이 얘기는 무슨 내용입니다.'를 지시하고 관객을 이끌어 간다. 주인공 그리핀은 전형 적 인물로서 헐리우드 상업 영화의 주체이며, 알트만은 그를 통해 헐리우드 산업과 영화 그 자체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와 함께 영화에 대한 영화를 완성한다. 영 화 오프닝-영화 촬영 장면-과 엔딩 시퀀스-작가가 쓰려는 시나리오가 바로 그리핀의 현실을 다룬 <플레이어>-가 서로 맞물리면서 영화의 틀을 깨고 브레히트 의 서사 구조와 소격 효과(Verfremdungseffekt)에까지 나아가며 영화를 계속해 나간다. 화제를 몰고 왔던 <패션쇼>에서도 파리 쁘레따 뽀르떼를 둘러싼 음모와  배신, 치부 등을 낱낱이 파헤쳐 보여주면서 헐리우드에 대한 조롱과 비평 정신을 회복하고 있다.

알트만 영화 작업의 또다른 특징으로는 모두가 주변 인물인 셈인 다중 인물군과 그들의 심리를 다루는 경향이다. 그는 엄격한 카메라로 정제된 양식으로 찍기  보다는 일단 인물과 내러티브를 벌여 놓고 거기서 나오는 즉흥된 연기-단적으로 <패션쇼>에서 디자이너가 색깔이 다른 부츠를 모델에게 갖다 주자 앵커인 킴베 이싱어가 색맹인 줄 자기만 왜 몰랐을까라고 하자, "대사에 없던 거니까"라고 받아치는 장면이 있다. 놀란 그녀의 행동과 표정을 알트만은 느린 장면으로 잡아내 고 있다.-와 거기서 다발적으로 분산되는 심리적 반응을 선호하는 스타일을 가졌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모습을 그는 <숏컷>에서 소시민인 아홉쌍의  부부를 통해 풀어내고 있다. 그의 영화는 다소 산만하게 진행되지만 사건들과 사물들의 이미지-우유, 죽음, 사랑 등-를 중첩시킴으로써 인물군에서 다른 인물군 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전체 영화가 가지는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축해 내고야 만다.

알트만은 여러 가지 기법들을 매번 버리고 새로운 것을 취하는 게 아니라 발전시키고 완성된 영화를 위해 효과적인 쓰임새를 부여한다는 데 있다. 최근의 <캔사 스시티>에 와서는 알트만표 기법들을 집대성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추구해 왔던 헐리우드의 컨벤션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이젠 장르까지도 변용과 절합을 적절 히 해내는 감독이 된 것 같다. 즉흥 연주로 경연을 벌이는 열정적인 잼 세션(Zam Battle)과 반복적으로 들리는 재즈 선율이 삽입되면서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하 위 플롯으로서 또한 스릴러 장르를 보완하는 사운드로서 완벽한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후 <진저브레드 맨>에서는 다중 인물들 간의 관계나 다중의 심리 등이  깊이가 없이 무의미하게 흘러가 버리고 만다. 장르도 너무 정리없이 마구잡이로 혼융되어 일관된 내러티브로 모여지는데 버겁다.

누가 뭐라 해도 그의 영화에는 '알트만식'이라는 꼬리표가 당당히(!) 붙어 있다. 카메라의 줌(Zoom)과 트랙(Track)을 활용해서 장시간 찍는 것, 다중의 인물군 으로 다중 플롯을 이끌어 내는 것, 그리고 사운드로 내러티브를 구축해는 것까지. 이 모든 기법은 그가 독립 자본으로 영화를 완성하려는 고집처럼 헐리우드의  컨벤션에 저항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헐리우드를 비판하고 영화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그는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를 되물을 수 있도록 관객에 게 끊임없이 자극을 보낸다.

최근 영화계는 크쥐쉬도프 키에슬롭스키와 구로사와 아키라, 최근의 스탠리 큐브릭까지 너무나 많은 거장들을 잃었다. 또다시 거장을 잃는다는 것은 서러운 일 이다. 로버트 알트만의 건강과 진정한 영화 작가(Auteur)로서의 작품을 기대한다.

손 언 숙
boboar@kofilm.com




<고스포드 파크>, 혹은 인간 난장의 오만한 지휘자 로버트 알트먼

예정된 파국, 하지만 유쾌하도다

또다시 반전이다. 1980년대의 침체를 <플레이어>(1992)로 보기 좋게 역전시켰던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장 르누아르의 시선으로 추리한 앙상블 미스터리 <고스포드 파크>로 근작 <진저브레드 맨>과 <닥터 T>가 남긴 미진한 뒷맛을 후련하게 일소했다. <고스포드 파크>에서도 인간 군상들의 쇼는 알트먼 영화에서 늘 그렇듯이 난장판으로 끝나고, 그 아수라장을 빚어나가는 솜씨는 경이롭다.
유사시 연출을 대행할 감독을 두고 메가폰을 잡는 77살의 나이에도 인간 일반과 주류 할리우드를 향한 독설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는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지금도 차기작을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고 있다. 최근 본 할리우드영화를 묻는 질문에 “기억이 잘 안 난다”라고 대답하는 이 오만하고 냉정한 노장의 스테이지 뒤쪽을 영화평론가 유운성이 들여다보았다. 편집자

1990년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사망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 구로자와 아키라와 모리스 피알라는 각각 <꿈>(1990)과 <반 고흐>(1991)에서 이 불운했던 화가의 삶을 자신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끌어들였다. 화려했던 70년대를 뒤로 하고 지지부진하게 80년대를 보내던 로버트 알트먼 또한 <빈센트>(Vincent & Theo, 1990)를 통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90년대를 열어보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단지 반 고흐를 끌어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 속에 자신의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이는 오직 한 사람, 모리스 피알라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버트 알트먼은 여전히 잊혀져가는 감독일 따름이었다.

<플레이어>(1992)와 <숏 컷>(1993)이 없었더라면 알트먼의 90년대는 얼마나 초라한 것이 되었을까? 특히 당시 우리나라의 영화광들에게, 즉 알트먼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시시껄렁한 영화로 간주될 만한 <야전병원 매쉬>(MASH, 1970)나 기이한 심리극 <사랑의 열정>(Fool for Love, 1985) 정도만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나와 같은) 이들에게, 이 두 영화는 진정 거장의 힘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다가왔었다. 이후 알트먼은 완전히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다중적 서사구조를 채택한 <패션쇼>(Pre^t-a`-Porter, 1994)와 <캔사스 시티>(1996) 등의 영화가 차례로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를 찾아오는 알트먼의 영화는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의 무대를 1932년의 영국으로 옮겨놓은 느슨한 미스터리극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2001)이다.

장르의 역사는 오직 부수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영화학자 노엘 캐롤은 <인유(引喩)의 미래: 70년대의 할리우드>라는 논문에서, 장르를 옮겨다니며 거기에 개인적인 비전을 새겨넣는 미국감독들에 대해 언급하며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정말이지 현역 미국감독들 가운데 알트먼만큼이나 여러 장르를 옮겨다니며 작업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서부극(<멕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1976)), 필름 누아르(<기나긴 이별>(1973), <플레이어> <진저브레드맨>(1998)), 전쟁영화(<야전병원 매쉬>(1970)), 공상과학영화(<카운트다운>(1968), <퀸테트 살인게임>(Quintet, 1979)), 뮤지컬(<뽀빠이>(1980)), 그리고 갱스터(<우리 같은 도둑들>(1974), <캔자스 시티>) 영화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오가며 작업한다. 다소간 장르영화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내시빌>(1975), <패션쇼> 같은 영화도 고전기 할리우드의 백스테이지 뮤지컬로부터 서사구조를 차용해오고 있다. 물론 캐롤은 알트먼이 오직 장르 내부에서만 작업하는 감독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비록 알트먼이 장르를 오가며 작업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영화들을 장르영화로 간주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영화들은 장르의 쇄신이라기보다는 장르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단적으로 알트먼의 영화에서 장르의 역사는 오직 부수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시팅 불의 역사수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시팅 불’(Sitting Bull)은 이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추장의 이름이다- 은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쇼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미국 개척사를 재조명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영화 전체의 구조와 맞물릴 때 매우 아이러닉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주로 존 포드에 의해 발전, 완성된 서부극에 대한 재검토를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서부극의 영웅은 일개 쇼비즈니스의 광대이자 사기꾼의 모습으로 축소된다. 물론 이러한 뒤집기는 알트먼 최고의 걸작으로 꼽힐 만한 서부극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 이미 시도되었다. 그가 장르의 틀 안에서 다룬 인물들은 언제나 매우 유약하고 무능력하거나(<기나긴 이별> <우리 같은 도둑들> <퀸테트 살인게임> <진저브레드맨>), 비열하다(<플레이어>).

그러나 알트먼이 자신의 영화에서 즐겨 사용하곤 하는, 모종의 이화효과를 노린 장치들은 로빈 우드와 같은 평론가들에 의해 저열하고 일개 ‘속물근성’의 발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사실 이건 전혀 근거없는 비난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생각건대 알트먼의 영화가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장르의 역사에 대한 어떠한 향수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듯싶다. 스스로가 오랜 기간 쌓아올렸던 성채, 혹은 그 자신을 매혹시켰던 그 무언가를 직접 무너뜨려야 한다는 데서 오는 아픔 따위는 알트먼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와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거리는 바로 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혹은 버트 랭카스터가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와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에서 각각 맡은 역할이 그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다른 느낌을 주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알트먼 특유의 ‘냉담함’을 확인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알트먼의 몇몇 영화는 오직 ‘머리로만 만들어진’ 영화의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빌모스 지그몬트가 촬영을 맡은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필터촬영이 불러일으키는 노스탤지어의 감각,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눈에 파묻혀 죽어가는 멕케이브(워런 비티)의 모습 등을 통해 알트먼의 장르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깊은 정서적 공명을 끌어내기도 한다.

쇼는 언제나 망쳐진다, 그럼에도 계속된다?

알트먼에게 있어서 세상은 쇼비즈니스가 펼쳐지는 무대이다. 즉 그에게 세상은 허위로 가득한 것이라는 말이다. 아마 <내시빌>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플레이어> 그리고 <패션 쇼> 등이 가장 직접적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숏 컷>이나 <캔자스 시티> 또한 이러한 알트먼의 인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알트먼의 관심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쇼 자체가 아니라 무대 뒤(backstage)에서 벌어지는 추악하고 속물적인 인간들의 거래에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팀 로빈스(<밥 로버츠>(1992))와 폴 토마스 앤더슨(<매그놀리아>(2000))의 세계관은 모두 알트먼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때 알트먼의 영화는 백스테이지 뮤지컬과 유사한 것이 된다. 쇼는 언제나 망쳐지고야 만다. 그럼에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 왜?

<내쉬빌>의 무대만큼이나 온갖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추악하게 얽혀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온 가수들, 선거전을 펼치기 위해 몰려든 정치인들, 가수가 될 꿈을 안고 서성이는 가련한 인물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취재하기 위해 온 기자 등등. 결국 이 혼란한 무대 위에서 최종적으로 쇼 진행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은 뜻밖의 저격사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야 만다. 그럼에도 ‘여기는 내시빌’이기 때문에 계속 노래가 불리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수와 그의 뜻을 좇아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군중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우습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한 것이다. <패션 쇼>는 알트먼이 <내시빌>의 무대를 90년대에 다시 한번 불러들인 영화이다.

알트먼의 영화는 종종 다른 곳으로부터 영화의 중심적인 공간이 되는 곳으로 인물들이 이동해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쇼비즈니스가 다루어지는 영화들은 물론이고,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 <세 여인>(1977) <퀸테트 살인게임> <뽀빠이> <사랑의 열정> <고스포드 파크> 등의 영화도 그러하다. 여기서 알트먼의 영화는 근본적으로 웨스턴과 유사한 것이 된다. 이동해온 인물들은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모종의 갈등에 휘말려들게 된다. 아니 차라리 이동해온 인물들 자신이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갈등을 비로소 불거져나오게끔 만든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때 선과 악의 결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헤어나올 길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단 <뽀빠이>만은 예외이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떠한 인물과의 감정이입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알트먼의 전략으로 인해 파국은 언제나 낯설고 기이하다. 이러한 전략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숏 컷>은 그것이 대단한 정서적 효과를 끌어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알트먼 특유의 냉담함이 슬쩍 가셔진 <패션 쇼> <캔자스 시티>나 <고스포드 파크>와 같은 영화들은 분명 그의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럽영화에의 한없는 지향

만일 알트먼을 사로잡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럽영화에 대한 한없는 지향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걸작으로 평가되는 <내시빌>이나 <숏 컷>, 그리고 최근의 <고스포드 파크>가 보여주는 다중적 서사구조가 르누아르로부터 끌어온 것임은 분명하다. 여러 인물들의 대사의 중첩, 대화 도중 소음이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불쑥 끼워넣기- 알트먼의 사운드 활용방식은 특별히 주목받아왔다-, 그리고 다분히 즉흥적인 연기 또한 이른바 르누아르적인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다. 캐롤은 알트먼의 작업이 “르누아르적 전통으로부터 영향받았다기보다는 그것을 모방하고 확장하는 쪽에 보다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알트먼이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한다고 여겨지는 것도 대체로 이 영역에서이다.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과 <캔자스 시티> 같은 영화도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작업의 영역 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알트먼이 자주 사용한 줌인·줌아웃과 단조로운 팬과 틸트는 영화의 성격에 따라 다소 다른 의미를 띤다. 장르에 대한 재해석의 성격이 강한 영화들에서 이는 고전영화의 미장센과 그 영웅주의를 조롱하기 위해 존재한다(이를테면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뽀빠이> 등). 반면 심리극적인 성격이 강한 영화들에서 이는 황량함, 불확실성의 느낌 등을 강화하기 위해 존재하며(<세 여인> <퀸테트 살인게임> <사랑의 열정>), 다중서사구조의 영화들에서는 완벽한 혼란의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어떤 식이든 간에 알트먼이 자신의 영화에서 활용하는 영화적 장치들은 그의 영화가 명백히 깊은 자의식을 지닌 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알트먼이 1977년에 발표한 <세 여인>은 영화가 담고 있는 그 불길함만큼이나 그 자신에게도 불길한 징후가 되었다. 알트먼이 여기서 끌어들이는 것은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1966)이다. 베르히만의 영향은 SF영화 <퀸테트 살인게임>에서도 감지되는데- 이 영화에는 베르히만 영화에 자주 등장한 비비 안데르손도 출연하고 있다-, 이 두편의 영화에서 알트먼은 그 스스로 완전히 혼란에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두 영화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밀리(셜리 듀발)를 동경하다 그 자신 스스로 밀리가 되어버리는 <세 여인>의 핑키(시시 스페이섹)나, 목숨을 담보로 한 기괴한 게임에 빠져드는 <퀸테트 살인게임>의 폴 뉴먼은 거의 알트먼 자신의 반영처럼 보인다.

그의 추종자들조차 입다물게 만들어버릴 만한 실패작 <뽀빠이>로 80년대를 시작한 알트먼은 오랜 기간 자신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원작만화의 캐릭터들을 고스란히 끌어오고 슬랩스틱 코미디, 뮤지컬 그리고 무성영화의 스타일을 한데 버무려놓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오직 올리브 역을 맡은 셜리 듀발의 독창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 하는 기억밖에 남지 않는다. 그게 또 알트먼의 의도였을 테지만, 여하간 이 영화는 작가의 ‘냉담함’이 영화의 정서적 매력을 완전히 거세시켜버릴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예이다. 달리 보면 <뽀빠이>는 알트먼의 ‘진정한’ 실험영화일 수도 있다.

주로 텔레비전에서 작업했던 80년대 후반, 알트먼은 장 뤽 고다르, 데릭 자만, 켄 러셀, 그리고 니콜라스 뢰그 등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 <아리아>(1987)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그는 18세기 귀족들의 오페라 극장에 눈요깃거리로 초청된 정신병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외 <사랑의 열정>- 이 영화에서 알트먼은 <기나긴 이별>에 이어 다시 한번 (빔 벤더스를 경유해서) 안토니오니를 불러들인다. 또한 알랭 레네의 영향도 조금쯤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위험한 사랑>(Beyond Therapy, 1987)이 이 시기의 필모그래피를 채운다.

설득력 있는 파국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침체기를 거친 뒤에 나타난 <플레이어>와 <숏 컷>은 진정 놀라운 영화이다. 알트먼은 이후 자신의 영화들에서 단지 냉담한 시선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거의 해부학적이라 할 만한 꼼꼼함으로 그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구조를 파헤치는 한편 그것에 통렬한 저주를 퍼붓는다. 파국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 되었다(<숏 컷> <패션 쇼>). 이전의 영화들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계급의 문제가 부상하고 이는 유머 가득한 영화의 구조 속에서 오히려 더욱 신랄하게 다루어진다(<캔자스 시티> <닥터 T>(Dr. T & the Women, 2000), <고스포드 파크>).

물론 알트먼은 한동안 상승곡선을 그리던 그의 경력에 찬물을 끼얹은 <진저브레드맨> 같은 영화도 내놓았다. 이건 <기나긴 이별>에 비하면 지나치게 평범한 필름 누아르이다. 하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은 상류층 여성에게만 나타난다는 ‘헤스티어 콤플렉스’에 걸린 아내, 한껏 멋을 낸 옷차림으로 병원에 찾아와 수다를 떨어대는 부르주아 여성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놓인 혼란에 빠진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닥터 T>는 아주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흥미로운 부분들을 찾을 수 있는 영화이다.

이제 <고스포드 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온전히 르누아르의 세계로 들어간 알트먼은 정말로 그 세계의 ‘확대’를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가 비록 <숏 컷>만큼의 흥분을 가져다주진 못하겠지만, 아마도 <캔자스 시티> 이후 잠시 알트먼을 잊고 있었던 이들에게 그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로버트 알트만, 《고스포드 파크》리뷰  

계급 분석과 계급 감정의 중요성
(Class analysis and feeling mean a great deal)

미국의 베테랑 감독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이 미국 대선, 더 정확히는 조지 W. 부시(알트만은 그를 "멍청이"라며 경멸한다)의 집권 뒤에 제작에 착수한 첫 번째 영화가, 계급 사회와 그 잔혹상을 탐구하고 있는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2001)라는 점은 무척이나 시사적이다. 이런 손쉬운 추측은 늘 그렇지만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 이 영화를 제작하려고 계획한 건 부시가 선거에서 승리하기 1년 전인 2000년 1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위 사실이 영화의 제작자들이 반(半)의식적으로나마 더 깊고 일반적인 자극, 즉 현대 사회에 더욱 넓어진 계급 격차에 대한 대응임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전반적으로 《고스포드 파크》는 훌륭한 작품이다. 한계가 없지 않지만, 1930년대 초반의 영국 사회에 대한 묘사는 조금의 손색도 없다. 영화에는 진실의 "냄새가 느껴진다". 즉 최소한 진실이 펼쳐질 만한 조건은 갖춰져 있다. 요즘의 미국 영화치고는 참 드문 경우다. 이 영화는 이 작품만의 방식으로, 사상과 예술계의 모든 분야에서 "계급적 관점이 유효"(트로츠키)하다면 왜 그러한 것이고 어떻게 그러한지를 다시 한 번 입증하고 있다.

《고스포드 파크》는 1932년 11월 어느 주말, 윌리엄 경과 실비아 맥코들 부인(각각 마이클 갬본,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扮)의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열린 수렵 파티를 소재로 한다. 우리는 두 가지 세계를 보게 된다 : 하인들의 세계와 그들 "주인"들의 세계. 알트만은 의도적으로 하인들의 관점에서 이야기의 틀을 잡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하인이 있을 경우에만 우아하신 분들이 카메라에 잡히죠. … 그래서 방안의 논쟁도 하인이 들어가면 끊어집니다. 하인이 방을 나가면, 카메라 역시 나가죠."

따라서 영화의 시작이 가장 어린 신출내기 하인인 메리(켈리 맥도널드 扮)의 움직임을 따라간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트렌섬 백작부인(매기 스미스 扮)의 하녀로서, 자동차를 타고 윌리엄 경의 저택을 향하는 백작 부인의 수발을 든다. 까다로운 성미에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도 많은 백작부인 때문에, 메리는 영화 시작 5분 동안 폭우에 세 번씩이나 몸을 흠씬 젖는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분위기를 예고한다.

전천후 호색한인 윌리엄 경은, 가난한 귀족 가문 출신의 세 딸 중 한 명과 결혼한 사업가다. 저택에 참석한 사람들은, 돈만 밝히는 여러 친척들과 식객들, 스타 배우이자 작곡가인 이보르 노벨로(제레미로 노담이 연기하는 이 자만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현실적인 인물이다)와 그의 헐리우드 동료인 두 명의 미국인이다. 그 중 한 명은 찰리 챈 영화의 제작자인 모리스 와이스만(밥 밸러반 扮)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시종이라 생각되는 헨리 덴튼(라이언 필립 扮)이다. 경제적 형편이 말이 아닌 이들 모두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며 위아래 층으로 바삐 옮겨다닌다.

영화에는 의미 심장한 장면이 수십 군데 나오고, 플롯과 서브 플롯도 굉장히 많다. 실비아의 두 누이, 루이자(제랄딘 소머빌 扮)와 라비니아(나타샤 위트만 扮)를 식별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더 봐야 할 지도 모른다. 줄거리의 묶음 중 서너 가닥만을 말해봐도 영화가 얼마나 복잡한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경과 실비아 부인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없다. 실비아는 다른 누이 하나와 카드 게임을 해서 부자 사업가 남편과 그의 돈을 얻었던 사정 때문이다. 윌리엄은 최고참 하녀인 엘시(에밀리 왓슨 扮)와 바람을 피고 있다. (엘시는 무례를 무릅쓰고 갑자기 윌리엄 경을 변호하려는 장면이 있다.) 반면, 실비아는 와이스만의 시종인 덴튼과 잠자리를 가진다. 자기 아내의 돈을 다 탕진한 프레디 네스빗(제임스 윌비 扮)은 윌리엄 경의 딸인 이사벨(카밀라 루더포드 扮)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식객인데, 그녀의 아버지에게 자리 하나를 부탁해달라고 이사벨을 협박하고 있다. 그런 동안 루퍼트 스탠디쉬(로렌스 폭스 扮) 경은, 윌리엄 경의 재산 중 자기 몫을 챙길 심산으로 주말동안 이사벨에게 구애한다.

중령인 앤소니 메레디스(톰 홀랜더 扮)는 윌리엄 경의 처남으로서, 윌리엄 경이 자신과의 사업 계약을 파기하지 않도록 설득하지만 실패한다. 찰리 챈 영화의 제작자인 와이스만은 최근 작품의 캐스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캘리포니아와의 전화에 허비하고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반(反)유대주의적 태도를 내색하진 않지만, 스톡브리지 경(윌리엄 경의 처남 중 하나)이 와이스만의 이름을 듣고 애써 웃는 척(double-take)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인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사연과 비밀이 있다. 최고참 가정부인 윌슨 부인(헬렌 미렌 扮)과 수석 요리사인 크로프트 부인(에일린 앗킨스 扮)은 서로를 무시하는데, 왜 그런지는 대부분의 하인들도 모른다. 스톡브리지 경의 시종인 로버트 팍스(클리브 오웬 扮)는 자기만의 어두운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집사 제닝스(알란 베이츠 扮)는 지기 힘든 부담 때문에 술을 들이키곤 한다. 그는 하녀 도로시(소피 톰슨 扮)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 한편 메리는 영국 교외의 미로 같은 저택의 반(半)봉건적 세계를 (직접 그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 부딪치게 된다. 이 곳은, 하인들의 침실에 창문도 하나 없고, "하인들"(help)도 제 주인의 사회적 위계의 순서대로 식사 테이블에 앉으며, 하인들이 그들이 모시는 주인의 이름에 따라 호명되는(일테면, 그녀는 '트렌섬'으로 불린다) 그런 곳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하인들이 미화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설정된 다양한 사회적·개인적 관계 다음 터지는 살인 사건으로 사태는 더욱 꼬여만 간다.

감독은 분명, 관객이 낱낱의 이야기를 모조리 꿸 수 있을지 여부보다는 사회 전반 및 사건 전체의 소용돌이를 조감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이 점에서 그의 시도는 거의 성공적이다. 많이 쓰인 방법은 아니지만, 어느 장면에선가 배우 모두에게 마이크를 달아주고 각자 즉석에서 대사를 하도록(그 중 제일 좋은 것으로 최종 사운드트랙을 제작) 했는데, 이 때문에 영화는 전반적으로 훨씬 짜임새 있어진다.

여러 사회 단면들이 읽혀진다. 고용자의 입장에선, 하인들은 본질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존재들일 뿐이다. 프레디와 이사벨의 은밀한 순간을 한 시종이 방해하지만, 프레디는 다음 말로 이사벨을 안심시킨다 : "아무도 아냐." 살인 사건을 맡은 탐정(스티븐 프라이 扮)은, 하인들이 조사중에도 계속 일을 해도 되는지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 "하인들에는 관심이 없어요. 고인과 실질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이 누구죠?" 엘시는 "윗분들"(betters)에 관해 메리와 얘기를 나누다가, "왜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일생을 다 바쳐야 하는 거지?"라고 묻는다. 그리고 윌슨 부인은 후반부에서 비참하게 "나는 완벽한 하인이야. 내 삶 같은 건 없어."라고 읊조린다.

몇 가지 점은 서툴다. 너무 대충인 듯도 싶다. 몇몇 점에서 대개 사회를 깊이 있게 탐색하지 못하고 있다. 미묘함은 오직 간단없는 숙련의 결실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영화의 최종 장면에서 윌리엄 경이 이전에 그가 운영하던 공장의 여공들을 건드렸음이 다소 멜로드라마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부분은 자본가-노동자 관계의 근본적인 잔인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정당하며, 동시에 감정에 절절히 호소하는 힘까지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알트만은 인간을 혐오하는 경향(misanthropy)이 있어서, 자신의 캐릭터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을 너무 자주 드러내곤 한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이런 취향을 대체로 자제하고 있다. 심지어 혐오를 받을 만한 경멸적인 인물에게조차도 말이다. 알트만은 탁월한 인물이다. 그의 최고작은, 1971년에서 1978년에 제작된 영화들일 것이다. (《맥코비와 밀러 부인》(McCabe & Mrs. Miller), 《긴 작별인사》(The Long Goodbye), 《우리는 도둑놈》(Thieves Like Us), 《캘리포니아의 분할》(California Split), 《내쉬빌》(Nashville), 《세 여인》(Three Women), 《결혼식》(A Wedding) 등은 전후 미국의 어느 작품과도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트만은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예술가이자 지식인임이 분명하다.

감독은 현재 76세인데(보험사에서는, 알트만이 촬영을 끝마치지 못할 경우 스티븐 프리어즈(Stephen Frears)가 대신 작업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요구했다), 그는 근래 들어 주로 자신의 시나리오에 의지해 왔다. 이번에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쓴 영국의 노련한 연극배우, 쥴리안 펠로우즈(Julian Fellowes)의 시나리오는 알트만에게는 만족스러웠지만, 완전무결할 정도는 아니다. 영화에는 관습적이고 인위적이며 불필요한 요소들이 있다. 사건 조사관 역은 작품과는 완전 상관없는, 덧붙여진 것처럼 보인다. (알트만 :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열 소년 인디언』(Ten Little Indians)과 [프랑스 감독 장 르느와르(Jean Renoir)의] 《게임의 규칙》(Rules of the Game)의 결합물이다." 그러나 그가 크리스티의 팬이 아니라고는 말하지만, 이 영화로 보건대 그 말이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얼빵한 수사관의 대사는 서툴고 다소 우스꽝스럽다. 만약, 영화가 주말의 수렵파티가 "자연스런" 과정을 밟도록만 했어도 잃을 것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였다. 아마도 영화의 제작진은 자신들의 사회 비판에 또는 이 비판이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이리라.

알트만과 펠로우즈는 여러 인터뷰에서 《고스포드 파크》가 재현하는 세계의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알트만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1932년, 이 때는 영화에서 보이는 종류의 노역(奴役)이 사라질 즈음이었죠. 이 사람들은 노역을 하면서 자신의 전 인생을 보내야 했죠. 아주 고역이었죠. 가족을 치워 없애는 것에 기뻐들 했죠. 침대에서 넷이 아니라 단 셋이 잘 수 있었으니까요. 딸아이가 하녀가 되면, 보살핌도 받고 입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죠. 노역을 맡은 사람들은 한두 집에서만 거의 한평생을 다 바쳐 일했어요. 그러나 2차 대전이 전환점이었죠. 그 후, 젊은 여성들은 하녀 이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그러한 억압이 전적으로 지나간 시대에만 있었다면, 이 영화는 사람들이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고 돌아다녔다거나 우유를 슈퍼마켓에서 사먹는 게 아니라 배달해서 먹었다거나 하는 이야기와 같은 역사적 골동품에 불과했을 것이다. 영화의 정서적 효과는, 삶의 전 영역을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현대의 계급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메리의 고민, 엘시의 곤경, 팍스의 분노, 윌슨 부인의 극심한 슬픔, 또는 이것도 포함할 수 있다면, 윌리엄 경의 헤어날 길 없는 처지, 실비아 부인의 활기 없는 권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예술적 재현의 성취 정도가 제약하는 수준 내에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상의 것들이 계급 사회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스포드 파크》는 지적·도덕적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현대적 상황 때문에 관객들에게 공명을 일으킨다. 그리고 비록 한계가 없지 않지만 알트만이 한 말들이 이를 확인시킨다. 지난 해 여름, 그는 "조지 W. 부시 치하의 미국에 관한" 영화를 생각해본 적 있냐는 질문에 대해 다음처럼 대답했다 : "저는 부시와 그가 이끄는 전 무리를 경멸하지만, 그런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이 영화에 유머를 가미할 수 있을 거라 믿을 수 없거든요. 나는 부시의 집권을 미국에 대한 최고로 역겨운 고발이라고 생각할 뿐이며 당황해 하고 있는 겁니다."

자살 폭탄 테러 직후, 알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9·11은 끔직한 사건이었습니다. 끔찍한 걸로 치자면, 이 나라에서 진행되는 돈의 게임도 기본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들[영화사의 제작 이사들]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영화들 몇 개를 파기해야만 했죠. 그래서 강은 조금은 정화됐지만, 지난 세 달간 큰 변화는 없었다고 봐요. 그러나 미국에 대한 제 마음은 변했어요. 대선이 있던 지난 해 저는 영국에 있었는데, 동료들에게 말했어요. '대선이 대법원으로 넘어가는 게 좋을 거야.'라고 말이죠. 그러나 대법원이 그 문제를 맡지 못했고,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지를 우리는 알고 있죠. 그렇게 바보 같은 기분을 맛본 적은 없었어요. 저는 76살이에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까지 미국이란 나라를 믿어왔어요. 그 정도로 어리석을 나이는 아닐텐데 말이죠. 지금 제게는 이 나라에 대한 애국적인 연대감 같은 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답니다."

다소 부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선택한 1930년대 잉글랜드의 교외 저택과 휘황찬란하지만 한물 간 사회 계급은 아마도 다소 손쉬운 목표물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바로 지금 이 시대와의 연관성이 간과되거나 심지어 부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미 영화사에 큰 공헌을 한 알트만에게 이런 요구를 할 이유는 없지만, 우리는 계속 기다릴 것이다. 현대 미국 사회의 계급 분할을 진지하게 탐색하는 영화적 시도를 말이다. 결국, 미국의 백만장자 한 명의 부(富)만으로도 윌리엄 경의 재산이 우스워지고, 기업 고용주와 그보다 수백 배 적은 임금으로 살아가는 피고용자의 간극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시대가 바로 현대가 아닌가. 누가 이러한 조건과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설득력 있는 예술적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그러한 작품은 탄생되어야만 한다.

최선의 즉, 가장 적절한 순간에 우리는 《고스포드 파크》를 통해 "계급적 기준"이 인간의 정신적·감정적 경험과 긴밀히 연관된 것임을 상기할 수 있었다. 이는 자신들의 고된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다양한 하인들이 일을 하다 말고 잠깐 짬을 내어 복도나 층계에 모여 이보르 노벨로가 치는 피아노와 노래를 듣는 장면에서 가장 통렬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그 장면은, 이 영화에서는 다소 어색하고 환상적인 모습으로 표현되고는 있지만, 인간의 집합적 의식으로부터 결코 사라지는 법이 없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대한 희구, 또 다른,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더 따뜻하고 호의적인 인간 관계에 대한 바람을 포착하고 있다.

『문학과 혁명』(Literature and Revolution)에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영혼과 영혼을 잇는 다리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이다. 오직 공통성을 통해서만 독특성을 알게 된다 :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는 가장 심원하고 영속적인 인간의 조건들이 공통적인 것을 결정한다. 역사적 인간 사회의 사회적 조건은, 무엇보다 계급 관계라는 조건이다."

사회의 특권층에 기반하고서, 자기-몰입적으로 당대의 중대한 사회 문제에는 나 몰라라 하며,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천재성"과 "재능"(대개 가장 천박하고 별 볼 일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마는)에 대한 막무가내식 믿음에 사로잡힌 천박한 스튜디오 또는 독립 영화 감독은, 사회의 중심 축인 계급 투쟁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함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것을 통해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한 현상이 보통의 현대 감독에 의해 인식되기라도 하는 경우에는, 예술 제작의 초월성에 대해 끔찍하게도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며 호되게 비판받기 일쑤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거짓은 없을 것이다. 완숙한 예술적 수완이라면(이 조건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투쟁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인간의 "영혼"에 관한 근본적 진리들로 향해 갈 것이다.

▷ 원문 : http://www.wsws.org/articles/2001/dec2001/gosf-d28.shtml

 작성자 : 데이비드 월쉬(WSWS)    http://www.wsws.org  

 


하나, 찰리 챈(Charlie Chan) : 이 영화를 통해 새로 알게 된 인물. 그는 3∼40년대 헐리우드 탐정물의 단골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중국인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백인 배우가 연기했으며, 그의 아들들 역에는 아시아인 배우가 캐스팅됐다고 한다. 어쨌든, 기묘한 조화다. 90년대 들어서며 헐리우드 영화를 인종(ethnicity)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비평 흐름이 성행하면서 재조명되고 있다. 백인 남성의 두려움과 욕망이 투영된 그에게서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나 뭐래더나∼

둘, DJUNA : 이 글과 『Kino』의 DJUNA의 글을 비교해 보라. DJUNA가 영화에 대한 정말 뛰어난 안목을 지닌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출처 : 지진





“이렇게? 흠, 이건 어때?”

2월10일 오후 9시 베를린 하얏트호텔 2층 기자회견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로버트 알트만 감독은 괴팍한 성격의 노인네`라는 소문이 근거없을뿐더러 그의 재능을 시기하는 누군가가 퍼뜨린 악성 루머라고 확신할 것이다. 포토 스탠드에서 자신들이 요구하는 온갖 표정과 포즈를 거리낌없이 취해준 그를 사진기자들은 `진짜 신사`라고 불렀다. 기자회견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는 열정적이며 성실하고 유머넘치는 매너를 보여줬고, 기자들의 다소 형식적인 질문에도 고수다운 현답을 돌려줘 우렁찬 박수세례를 받았다. 물론 이날 모습이 평소 알트만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나기 직전 받았던 생애 두 번째 금곰상 트로피가 그의 `괴팍함`을 부드럽게 간지럽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알트만이 베를린을 찾은 것은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2월20일로 일흔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입장이지만, 다른 원로 인사들처럼 세계 영화제에 얼굴을 비춰주며 안락한 `노후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는 그의 보따리에는 최근작 <고스포드 파크>가 담겨 있었다. 이미 지난해 런던영화제에서 공개된 바 있고, 골든글로브를 비롯해 AFI, 뉴욕비평가협회, 전미영화비평가협회 시상식을 통해 그에게 감독상을 안겨주기도 했던 이 작품은 비록 비경쟁 부문에 속했지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76년 금곰상 수상작 <버펄로 빌과 인디언들> 이후 알트만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베를린 관객의 환대 덕분에 주최쪽은 <고스포드 파크>의 추가상영을 잡아야만 했다.

한 상류층의 별장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는 <고스포드 파크>는 베를린에서 프랑수아 오종감독의 <8명의 여인들>에 여러 차례 비교되곤 했다. 두 작품은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선 나머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만 하는 샴쌍둥이 같은 관계였다. 모두 `Who- dunnit 무비`(제한된 공간에 갇힌 사람들 중 누가 범인인지를 가려내는 영화)의 구도로 출발한다는 점과 두 감독 모두가 이같은 장르영화와는 만리장성을 쌓아놓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인물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8명의 여인들>이 그랬듯, <고스포드 파크>는 궁극적으로 전형적인 범인 맞히기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어나간다.

이 영화의 배경은 1932년 영국 런던 교외의 한 별장. 사냥파티를 하기 위해 상류층 인사들이 모이고 수발드는 하인들도 같은 곳에 머물게 된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가며 며칠 동안 지내야 하는 이곳의 공간은 엄격하게 양분돼있다. 상류인사들의 공간은 2층이고 하인들이 차지하는 곳은 1층이다. 식사시간 등 정해진 경우가 아니면, 그들은 서로의 공간을 점유하거나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 하지만 항상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하게 규율을 위반하는 자는 있게 마련이다. 영화는 외부와는 고립된 이곳에서 별장의 주인이자 파티의 주최자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궤도를 타기 시작한다. 범인은 누구인가, 1층 사람인가 2층 사람인가, 살해 동기는 뭔가 등등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이야기는 도르르 풀려나간다.

<고스포드 파크>는 이 영화의 프로듀서이자 배우로도 출연한 밥 발라반이 알트만에게 어떤 작품이든 함께 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한 데서 출발했다. 이에 대해 알트만은 “나는 `Who- dunnit 무비`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해보고 싶다”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가 생각한 기본적인 구상은 시골의 큰 집에 사냥파티를 위해 모든 사람이 한데 모여 있고, 그 가운데 살인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을 생각하면서 나는 <10개의 인디언 인형>을 떠올렸고, 그 작품은 애거사 크리스티를, 애거사 크리스티는 영국을 떠올리게 했다. 영국에서 영국 배우들과 함께 촬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30년대 상류층 별장이라는 시공간 배경 속에서 계급적 진실과 거기에 내재한 분노, 복수심, 사랑, 질투 등을 두루마기 펼치듯 보여주는 <고스포드 파크>의 미덕은 이뿐만이 아니다. 일관되고 안정적이며 우아한 스타일은 이 영화를 빛내주는 또다른 지점이다. 훌륭하게 꾸며진 세트에서 카메라는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인간 군상들의 앞, 옆, 뒷모습과 그림자에 가려진 내면을 드러낸다. 알트만은 “왜 1932년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을 하기로 생각했나, 당시의 계급구도가 이 영화와 관계가 있나”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거야 영화에 대한 내 아이디어가 그 시대의 상황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사실 내 나이 또래에게 그때는 현대에 해당한다”며 익살을 떨기도 했다.

<고스포드 파크>가 보여주는 가장 큰 영화적 아름다움은 <플레이어> <숏컷> <패션쇼> 등에서 그랬듯, 초점을 한 캐릭터에서 다음 캐릭터로 끊임없이 이동시키며 인간관계라는 소우주를 여행한다는 점이다. 이제는 아예 `앙상블영화`라고 불리는 이 소장르의 원조 알트만은 캐릭터간의 수평이동에 1층과 2층간의 수직이동을 추가한다. 카메라는 계단을 쉴새없이 오르내리며 날줄과 씨줄로 얽혀버린 이들의 `위험한 관계`까지 탐험한다. 그런데 과연 그는 이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기 그지없는 시나리오와 콘티를 머릿속에 미리 그려놓는 것일까. “영화에 대한 구상은 촬영을 시작하기 전이 아니라 촬영을 하면서 만들어진다”는 알트만의 이야기는 알쏭달쏭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다음의 설명과 붙여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게 된다.

“사실 이런 벽화 그리기 식의 영화는 이젠 그만 찍을 예정이긴한데…. 아무튼 일단 연기자에게 역할이 넘어가면 그들은 이 벽화를 색칠하는 안료가 된다. 그들의 연기는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캐릭터이자 배우 개인으로서의) `진짜 진실`을 지켜본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 이 영화를 이 방향으로 틀 수 있겠군, 또는 저 방향으로 몰고갈 수 있겠군, 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때문에 알트만은 시나리오 작업과 병행해서 캐스팅 작업을 서둘렀고, 배우들을 미리 소집해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익히고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처럼 배우로부터 영감을 얻어 영화를 만드는 그의 스타일은 “나는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장면을 찍기 위해 영화를 만든다”는 그의 영화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비법을 소개했다. “한번도 못 본 영화를 찍으려면 우선, `이 부분에서 내가 어떻게 연기해야 하냐`라는 연기자의 질문에 답변을 회피해야 한다. 앞으로도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른들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을 거다. 한번도 보지 못한 장면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장면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그는 “나는 영화를 만들 때 일단 2차원적인 계획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캐스팅을 한 뒤 연기자를 집어넣으면 3차원을 구상할 수 있게 된다”며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믿음도 영화 제작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고스포드 파크>는 배우를 철저하게 믿는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윌슨 부인 역의 헬렌 미렌과 콩스탕스 역의 매기 스미스는 말할 나위도 없고, 케이트 윈슬렛, 라이언 필립, 클라이브 오언 등이 만들어내는 적절한 호흡의 연기는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강하게 끌어당긴다. 알트만은 “당신은 연기자들을 좋아한다고 말해왔는데, 배우가 아닌 일반 사람들도 좋아하나”는 질문을 받고, “어쩌면 내 말을 듣고 모두들 놀랄지 모르겠는데, 나는 연기자들도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확실치는 않다…. 어찌됐건 그들이 사람 흉내를 훌륭하게 낸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라고 말해 기자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평생공로상을 받으니…
“끔찍한 저질영화가 내 스승”

베를린영화제가 주는 `평생공로상` 수상 소감을 묻는 질문에 로버트 알트만은 “평생공로상을 받은 것은 물론 영광이다. 하지만 이 상이 말 그대로 평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겐 앞으로도 여러 가지 계획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면서, 오는 5월15일부터 뉴욕에서 신작 <전압>의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베를린 일간지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선 2004년쯤 자신의 78년작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알트만 감독은 “그동안 만든 영화 중 어떤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드냐”는 질문을 받고선 “당신은 자식이 있냐”고 되물은 뒤, “당신이 자식에게 그러듯, 나는 그들을 똑같이 사랑한다. 하긴 어쩌면 그중에서 가장 덜 성공한 영화를 가장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한다”라고 재치있게 답했다. 그는 이어 “사람들은 가끔씩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감독이 누구냐’고 묻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잘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게 영향을 준 영화는 정말 끔찍하고 저질 영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영화들을 보면서 저렇게는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해왔다. 당연히 나에게 영향을 준 감독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껄껄 웃기도 했다.

또 할리우드의 아웃사이더로 오랫동안 버텨온 자신의 존재 조건에 관해 알트만 감독은 “나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우리는 다만 서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한 종류의 영화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어찌됐건 메이저 스튜디오와의 관계는 이런 거다. 그들은 신발을 팔지만, 나는 장갑을 만든다. 사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셈이다”라며 여운을 남겼다. 한편 그는 이와 관련해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나는 나 자신을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장애인처럼 간주한다. 나는 절대로 흥행에 눈을 파는 작품을 만들 수 없다. 난 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밖에 없으니까.”




[Review] 고스포드 파크

■ Story
1932년 11월 잉글랜드. 산업자본가로 성공해 부를 축적하고 결혼으로 작위를 얻은 백만장자 윌리엄 매코들 경(마이클 갬본)과 냉담한 그의 부인 실비아(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는 전원 저택 고스포드 파크에서 주말사냥 파티를 열고 친지들과 다음 영화 리서치를 위해 영국에 온 할리우드 제작자(밥 발라반), 스타 배우 아이보 노벨로(제레미 노담)를 초대한다. 트랜섬 백작부인(매기 스미스)과 앳된 시중꾼 메리(켈리 맥도널드)를 필두로 당도한 손님과 그 하인들은 집사 제닝스(앨런 베이츠)와 가정부 윌슨 부인(헬렌 미렌)이 이끄는 하인들의 마중을 받는다. 위층 손님들이 이익을 교환하고 부정을 저지르고 경멸과 허세를 교환하는 동안 아래층의 하인들은 주인들의 복잡하게 얽힌 진실을 속닥거린다. 그러나 고스포드장의 파티는 사냥이 끝난 둘쨋날 밤 매코들 경이 살해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혼란 속에서 메리는 진실의 윤곽을 더듬어나가기 시작한다.

■ Review
가능하다면 이런 파티에는 초대받고 싶지 않다, 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파티의 주최자는 시야에 들어오는 젊은 여자마다 집적대고 안주인 또한 비슷한 행실로 응수한다. 어떤 남편은 돈에 혹해 결혼했다가 돈이 바닥나자 아내를 냉대하고, 어떤 친척은 집주인이 용돈과 투자를 끊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한다. 반짝이는 은식기에 담긴 정찬과 더불어 고스포드 저택의 식탁 그득 서빙되는 ‘요리’는, 경멸과 면박과 아부와 협박, 그리고 연애인지 착취인지 아리송한 성적인 접촉들이다. 게다가 집안 곳곳에는 독약 든 병들이 마치 식초라도 되는 양 태연자약하게 널려있다. 증오와 살인 동기는 모두에게 있고 무대 장치는 완벽하다. 저택 어딘가의 서재에서 “복수는 그들의 것”이라고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가 펜을 놀리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 거북한 잔치의 숨은 호스트는 로버트 알트먼 감독. 몇해 전 마틴 스코시즈가 <순수의 시대>에서 머천트 아이보리표 시대극 세트를 깜짝 방문하더니, 이번에는 알트먼 차례다. 그러나 <순수의 시대>가 장미와 레이스로 위장한 감정의 갱스터였듯, 로버트 알트먼도 1930년대 잉글랜드의 장원에서 세상 누구보다 그가 규칙에 밝은 게임을 벌인다. 보통 영화 예닐곱편은 너끈히 찍을 만한 머릿수의 인물, 많은 서브 플롯을 거느리고 굴러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스토리, 그리고 극중인물에게 도통 다정한 시선을 주지 않는 감독의 냉랭한 매너까지 <고스포드 파크>는 <플레이어> <패션쇼> <숏 컷>의 도도한 영국계 사촌이다.

미스터리 구조는, 자칫 방만해지기 쉬운 앙상블 드라마의 줄거리에 리듬을 불어넣기 위해 알트먼이 즐겨 사용해온 도구다. 추리물이자 코스튬드라마이고 매너코미디이자 풍자드라마인 <고스포드 파크>에서 알트먼은 한채의 저택으로 극적 공간을 고립시킴으로써 이야기와 스타일의 매무새를 한결 단정하게 가다듬었다. 귀족 주인을 위층에, 그들을 시중하는 하인을 아래층에 분리 수용한 고스포드 저택의 실내공간은 20세기 초 영국 계급 시스템의 다이어그램이다.

자기들의 비밀스런 회동을 하인이 목격해도 “아무도 아니야”(It’s Nobody)라며 안심하는 귀족들은 하인을 귀가 없는 가구나 비품처럼 취급하고, 하녀들의 우두머리 윌슨 부인은 “난 완벽한 하인이야. 그러니까 내 삶은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알고보면 <고스포드 파크>를 건사하는 것은 아래층 사람들이다. 관객은 위층에서 벌어지는 귀족들의 허세부리는 ‘가면무도’를 통해 인물들의 관계와 감춰진 사연의 초기 단서를 잡은 다음, 아래층의 현명한 하인들의 대화를 듣고서야 비로소 결론을 얻는다. 안락한 자리의 임자는 귀족들이지만 알트먼 감독은 하인 중 누군가가 곁에 있지 않는 한 그들에게 카메라를 비추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더 많이 아는 자가 미스터리의 권력자라면 <고스포드 파크>의 실세는 단연, 항상 고개를 정중히 숙인 채 만사를 보는 아래층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스포드 파크>의 시나리오 작가 줄리언 펠로스와 알트먼 감독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악한 속물과 선한 현자로 나누기에는 좀더 노련하다. 이 영화에서 계급은 경제적인 지위일 뿐 아니라 삶의 조건과 태도의 집합이며, 계급 갈등은 억압과 희생보다 훨씬 복합적인 알력이다. 영화에서 가장 명석하고 넓은 시야를 가진 하녀 엘시는 멸시와 연민이 뒤섞인 태도로 주인 가족을 바라보고, 오만한 트랜섬 백작부인은 하인들의 가십에 귀를 세운다. 불안한 것은 위층 사람들이다. 그들의 세계는 바야흐로 흔들리고 있고 미국에서 온 할리우드 제작자와 배우는 곧 도래할 시대의 위협을 대변한다. 영화배우가 노래할 때 귀족들은 무관심을 가장하지만 하인들은 문간에서 그 황홀함을 즐긴다. 한 발짝 떨어져서 구경하는 계급과 문화의 섬세한 마찰은 <고스포드 파크>가 주는 부정할 수 없는 재미다.

닫힌 공간에 모인 다수의 인물이 모두 용의선상에 오르는 설정부터, 숨겨진 과거사와 혈연이 단서로 동원된다는 다소 맥빠지는 추리과정까지 <고스포드 파크>는 <열개의 인디언 인형>을 비롯한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을 직접 연상시킨다. 그러나 80분이나 지나서야 시체가 나오는 이 영화에서 진정 흥미로운 것은 진범의 정체와 반전의 충격, 명탐정의 묘기가 아니라 불발로 그친 수많은 혐의의 넝쿨에 끌려나온 인간들의 드라마다. 그런 면에서 <고스포드 파크>는, 사냥 파티에 모인 표리부동한 인물들의 회동을 그린 장 르누아르 감독의 <게임의 규칙>에 다가선다. 어슬렁거리며 인물과 환경을 유려하고도 역동적으로 맺어주는 알트먼 특유의 카메라가 시대극의 풍성한 미장센과 결합해 낳는 그림도 바로 <게임의 규칙>의 그것이다.

알트먼 감독과 제작자 겸 배우인 밥 발라반의 아이디어를 영국 상류층 문화에 정통한 줄리언 펠로스가 매만진 각본은 “그게 어떤 목적에 봉사할 수 있지?”라고 되묻는 윌슨 부인의 대사처럼 한줌의 낭비도 없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돈 몇 실링의 행방까지 정산하는 꼼꼼함으로 감탄을 샀다면 <고스포드 파크>는 주인 잃은 강아지의 운명까지 챙긴다. 치밀한 각본과 정밀한 연기로 무장한 영화가 흔히 그렇듯 두번째 감상이 2배 이상 만족스러운 <고스포드 파크>는 <플레이어> <숏 컷>과 더불어 알트먼의 후기 걸작으로 손색이 없다. 촬영 당시 76살이었던 알트먼 감독은 보험사의 요구에 따라 유사시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이 메가폰을 이어받는다는 약속 아래 일했다지만, 그가 지닌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손과 인류학자의 눈은 여전히 강건하다. ‘히치코키안’이라는 단어를 만든 앨프리드 히치콕 경처럼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해도, 로버트 알트먼은 작위 대신 이름을 딴 형용사 하나쯤 수여받을 때가 됐다.

김혜리 vermeer@hani.co.kr




로버트 알트먼 감독 인터뷰
“영화는 스토리보다, 벽화다”
<고스포드 파크> 같은 대규모 앙상블은 ‘실내악’급의 작은 영화보다 만들기 어려울 텐데.
더 쉽다. 만약 하나가 삐끗하면 도망갈 다른 곳이 있으니까. 두세 캐릭터가 이끄는 영화는 그 인물만 갖고 관객의 주의를 내내 붙잡아야 하니 힘들다. 나는 (영화를) 소설이나 스토리보다 벽화로 생각한다. 캐스팅만 제대로 하면 85%는 한 셈이다.

누구부터 캐스팅했나.
메리 역의 켈리 맥도널드가 처음이었고 매기 스미스,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앨런 베이츠, 데렉 자코비 등이 일찌감치 정해졌다. 인물을 관객이 혼동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 키 큰 남자가 있으면 작은 남자, 빨간 머리가 캐스팅되면 다음에는 금발을 찾았다. 긴 캐스팅이 끝나자 영화에서 내가 해야 할 창의적 작업은 거의 끝났다.

<고스포드 파크>는 당신의 영화세계의 어디쯤에 자리하나.
톱이다. 추구해온 영화를 완성했다. 이번 연기 앙상블은 아침마다 꿈이 아닌가 싶어 스스로를 꼬집어볼 정도였다. 영화 인생 중 최고의 경험이었다.

리허설을 많이 하나.
세트에서는 촬영 직전에 한다. 그 밖에 <고스포드 파크>는 두번의 모임을 가졌다. 위층 인물끼리, 아래층 인물끼리 따로 회식을 했다. 그들은 각각 하나의 재미있는 캠프를 이뤘다.

새 프로젝트에 들어갈 때마다 성공과 실패의 감이 있나.
무작정 이건 천재적 작품이 될 거다, 모두가 이 영화를 사랑할 거다라고 가정한다. 내 속은 거품투성이다. 그러나 영화가 뚜껑을 열면 거품이 사그라지고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장르 비틀기를 즐긴다. 영화를 만들다보면 선택한 장르를 버리고 싶은 시점이 오나.
물론. 나는 관객이 한 장르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를 다 사용한다. 그러고나서 적정한 기대치에서 몇치 비껴나게 만든다. “자, 이건 그 장르 맞는데 이런 식으로는 전에 본 적이 없죠?” 하는 식으로.

늘 메이저 스튜디오 밖에서 일해왔다.
스튜디오와 나는 다른 업종에 종사한다. 그들은 구두를 팔고 나는 장갑을 만든다. 구두 가게 구석에 작은 코너를 차지하고, 여기 장갑도 있다고 외칠 수 있다면 행운이지만 가게 정문 간판에는 “들어와서 구두 사세요”라고 써 있다.

<고스포드 파크>를 스튜디오와 만들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모든 영화는 만드는 도중에 크게 변한다. 이번에도 6주 반이나 찍은 다음 극중인물 둘을 자매로 만들었다. 그런 결정을 누구에게 인가받는 시스템이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그들은 아마 “우린 대본을 원해!”라고 말했을 거다.

당신은 언제나 정치적인 감독이었다. 혹시 조지 W. 부시 정권하의 미국에 관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나.
난 부시와 그 일파를 너무 경멸해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런 주제를 다루면서는 절대 유머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선거 당시 촬영 때문에 영국에 있던 나는 유럽인의 눈으로 선거 경과를 지켜봤는데 일어난 일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남들은 어떻게 믿나 모르겠다.

이제 76살이다. 좀 슬슬 할 생각은 없나.
(웃음). 2002년 늦봄쯤 뉴욕에서 영화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죽을 것이다.

이상의 인터뷰는 방송홍보용 테이프와 <인디와이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고스포드 파크, 현대의 어셔가 또는 우리들의 무의식

<고스포드 파크>에서 1932년이라는 시기는 귀족 사회가 서서히 와해되고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열려진 뇌처럼 복잡한 저택의 내부에서 하인은 귀족 사회의 무의식에 대해 은밀히 논평하는 시선의 주체로 등장한다. 억눌려온 진리의 귀환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새로운 시대로의 여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라져가는 시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식 논평은 낡은 것을 통해 새로움을 얻어내려는 알트만의 의지이다.

알트만 감독의 <고스포드 파크>는 ‘고도의 살인 미스터리’라고 하지만 혹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부르주아 판이 아닐까?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서 곧장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들어 있는 「자기 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지배의 예속」을 떠올렸을 정도로 이 영화는 이 장에서 전개되고 있는 주인과 노예의 승인투쟁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의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움베르토 에코의 말대로 <카사블랑카>가 ‘원형들의 재회’를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프로이트의 억압된 것들의 귀환과 윤무(輪舞)를 빼어나게 보여준다.

따라서 해외에서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에 버금가는 정교한 정통 실내 추리극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아무래도 ‘추리극’은 겉으로 표방된 장르상의 장치에 불과한 것 같다. 아니 좀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미스터리 추리극과는 거의 무관하다. 따라서 이 영화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극보다는 오히려 에드가 알렌 포의 「어셔 가의 몰락」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즉 부르주아들의 금지옥엽인 ‘홈 스윗 마이 홈’의 붕괴와 함께 도덕과 윤리의 담지자인 정신의 몰락을 동시에 보여주는 으시시한 공포물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말이다. 즉 현대판 ‘어셔 가’ 라고나 할까.

그러면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이 영화는 정통 추리극의 공식을 따르고 있지 않다. 즉 통상 (살인) 사건이 먼저 벌어지고 이 과정을 되밟으며 범인과 탐정이 절묘한 두뇌 게임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서 정체를 드러내면서 다시 정의가 회복되는 공식과는 거의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살인은 후반부에서 가서나 벌어지며, 범인이 누구인가는 드러나지만 그가 처벌을 받아 다시 정의가 회복되거나 하는 일은 없다. 게다가 죽은 자가 다시 살해당하며, 살해당하는 자로 여러모로 한 가족의 ‘아버지’이며 살해자들도 한 핏줄이라는 것은 이 영화를 추리 소설보다는 정신 분석적으로 읽는 편이 훨씬 더 많은 코드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가? 게다가 영화는 이처럼 중대한 인간의 비밀을 그저 잘 팔릴 수 있는 시나리오로 변형시키려는 할리우드의 통속성에 대한 비아냥과 조롱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벌써 이 영화를 추리극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에 거의 결말 부분에서 자행되는 살인에 의해 상황이 급반전 되기까지 이어지는 상류 계급의 위선과 기만에 대한 풍자적 스케치는 과연 이 영화가 추리극인가 하는 의문을 추가하게 만든다. 즉 이 영화는 ‘살인’을 다루되 그것을 기존의 추리 소설처럼 악당 대 탐정을 중심으로 하는 선악의 대결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인의 필연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면서 부르주아 사회를 정교한 임상 보고서처럼 해부하는 쪽에 더 가깝지 않을까? 결국 진짜 죽을죄를 지은 자는 누구인가, 더 나아가 정말 선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되묻는 것으로 영화를 끝맺는 것으로 볼 때 오히려 이 영화를 가장 부르주아적 장르라고 할 수 있는 추리 소설에 대한 비틀기이자 위선과 기만으로 상징되는 부르주아 사회의 모럴에 대한 통렬한 풍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왜 이 영화를 보고 헤겔과 프로이트, 포를 떠올리게 되었을까?

지배자의 공허한 향유 잘 알려진 대로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지배와 예속의 변증법을 다루면서 로마 제국에서 주인의 윤리가 노예의 종교에 굴복한 것이야말로 세계사의 역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알트만 감독은 이 영화에서 혹시 그러한 세계사적 역설이 실제로는 역설이 아니라 역사의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이 <고스포드 파크>에서 화려한 부르주아 사회, 더 구체적으로는 ‘빅토리아조의 위선’과 기만이 채 말끔히 가셔지지 않은 영국을 지배하는 주인(백작과 백작 부인들, 서 Sir)들이 실제로는 현대의 노예들인 ‘하인들’과의 변증법적 투쟁에서 패배, ‘살해당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작심한 듯하다.

-조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