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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니 킹

라/ㅗ 2001. 10. 21. 20:18 Posted by 로드365

20110601
LA폭동때 피해 본 수많은 한인들을 생각해서라도 잘 살았어야 하는데.

그후 로드니 킹의 행보는 아쉽다.
그 사건을 계기로 세상을바꾸는 소금이 될 수도 있었던 운명적인 기회를 그는 놓쳤구나.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 2011.4.20

아리랑TV '리얼 토크', 로드니 킹 인터뷰

(서울=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아리랑TV의 미국 현지제작 토크쇼 '리얼 토크'(Real Talk)는 오는 23일 오후 7시30분 '4.29 LA 폭동'의 단초가 된 로드니 킹을 초대, 사건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로 인한 변화를 알아본다.
로드니 킹 외에 LA 폭동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해 어바인 시장이 된 강석희 씨와 LA시의원 버나드 팍스, 4.29폭동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한 변호사 데이비드 김이 출연해 LA 폭동 사건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1992년 4월 29일 이후 LA 한인들에게 4월은 잔인한 달로 기억된다. 
미국 경찰의 인종 차별에 분노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6일동안 53명이 숨지고 2천여명이 다쳤으며 3천건이 넘는 화재가 발생했다. 이로 인한 재산 피해액은 7억달러로 이 중 절반가량이 한인들이 입은 피해액이었다.
사건은 1991년 3월 3일 LA에서 과속운전을 한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들이 검거 과정에서 난폭하게 구타했고 이 장면이 찍힌 비디오가 공개되면서 시작됐다.
과잉진압 논란이 일었지만 법원에서 이듬해 4월 29일 경찰관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okko@yna.co.kr
 

★ 2011.3.4

LA폭동 도화선 로드니 킹 사건 20주년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최재석 특파원 =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흑인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로드니 킹 사건이 일어난 지 3일(현지시간)로 20주년이 됐다.
이 사건은 1991년 3월 3일 LA에서 과속운전으로 도주하던 흑인 청년 킹이 백인 경찰들에게 붙잡혀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를 당했고, 이 장면을 인근 주민이 촬영해 언론사에 제공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비디오를 촬영했던 조지 홀리데이는 이 날짜 LA타임스에 당시 상황을 다시 전했다.
그는 자정 직전 요란한 경찰 사이렌 소리에 잠에서 깨 소형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아파트 옥외난간으로 나갔다.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고 9분간 촬영한 비디오는 구타에 가담한 백인 경찰 4명의 재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당시만해도 비디오 카메라가 아주 귀한 시절이었다. 홀리데이는 "정말 우연이었는데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백인 경찰관들은 기소됐으나 이듬해 4월 29일 백인이 다수였던 배심원단으로부터 무죄평결을 받았고 이에 분노한 흑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50여명이 사망하고 LA경찰국장이 사임하는 등 미 전역에 큰 충격을 줬다.
폭동 당시 흑인 거주지역과 가까운 LA 한인타운도 습격 대상이 돼 2억달러 이상의 큰 피해를 봤다.
폭동 후 관련 경찰관들은 다시 기소돼 유죄가 선고됐고, 킹은 1994년 LA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 380만 달러를 받았다.
그 후 킹은 1993년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았고, 1999년에는 가정폭력 사건으로 90일 징역형을 선고받는 등 그동안 크고 작은 여러 사건에 연루돼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찰리 벡 LA경찰국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확실하게 LA경찰은 더 향상됐다"며 로드니 킹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LA경찰이 공권력 행사와 불평 처리에 대해 대대적인 개혁을 했고 시민의 감시도 강화됐다며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경찰 활동으로 지역의 긴장을 완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bondong@yna.co.kr



★ 2010.9.9

지난 1992년 'LA 폭동'의 발단이 됐던 로드니 킹(44)이 당시 LA시를 상대로 제기했던 민사소송의 배심원과 결혼할 것으로 알려져 또 다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킹은 1994년 소송에서 이겨 380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아냈다.
연예뉴스전문사이트 '레이더온라인'은 킹이 당시 배심원 '넘버 5'로 알려진 신시아 켈리에게 청혼했다고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킹은 지난 1991년 3월 새벽 무렵 음주운전혐의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백인경찰 네명으로부터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했다. 인근 주민이 이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 LA의 한 방송국이 이를 방영하자 흑인사회로부터 엄청난 분노를 샀다.
 
연방검찰은 해당 경찰관들을 민권법 위반혐의로 기소했으나 백인과 아시안이 주축이 된 배심원들이 무죄평결을 내려 이 바람에 1992년 4월 29일 흑인 폭동이 일어나게 됐다.

폭동 후 관련 경찰관들은 다시 기소돼 결국 유죄가 선고됐다. 이어 킹은 1994년 LA시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내 승소했다.
켈리는 '레이더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배심원들은 킹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말했으나 내가 설득해 보상금지급 평결이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킹과 켈리는 배심원 재판 후 사귀었으나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한 후 헤어졌다. 그러다가 4개월 전부터 다시 만나기 시작해 결혼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편 LA 폭동으로 상당수 한인업소들이 불에 타거나 약탈당해 재산피해액만도 2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한인 한명도 숨져 LA 폭동은 한인 이민 역사상 최악의 사태로 꼽힌다.


★ 2001.10.21



여러분은 '인종차별'이란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세요?
전 제일 먼저 영화 <뿌리>(1977·왼쪽 사진)가 생각납니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흑인 노예의 고난과 시련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은 미니시리즈와 드라마로도 제작돼 에미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을 탔으며, 미국 사람들에게 인종차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줬죠. 영화의 원작이된 소설 '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는 이 작품으로 77년 퓰리처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로드니 킹'입니다. 킹은 92년 미국 엘에이(LA) 흑인폭동의 원인이 됐던 사람이죠. 많은 분들이 당시 사건을 기억하시겠지만, 짧게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1991년 3월3일. 당시 25살이던 흑인청년 로드니 킹(오른쪽 사진)은 미 엘에이의 한 외곽도로를 '기분좋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게 화근이 됐죠. 그는 과속을 했고, 이를 발견한 경찰차가 그를 뒤따라 왔습니다. 얼마 가지 못해 킹은 경찰에 잡혔죠.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속도위반을 저지른 킹을 체포한 4명의 백인 경관들은 갑자기 그를 무차별 폭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만 볼트가 흐르는 레이저 총을 쏘는가 하면, 들고 있던 곤봉으로 얼굴과 온 몸을 무자비하게 때렸던 거죠. 하지만 이 장면을 한 아마추어 비디오 작가가 몰래 찍어 한 방송사에 제보하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전개됐습니다. 비디오가 방송을 통해 공개되면서 인종차별에 대한 여론이 온 미국을 뒤덮었고, 킹을 폭행한 4명의 경찰관은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게 되죠. 하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경관들은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의 평결에 의해 무죄를 선고 받고 풀려나게 되고, 이는 곧 92년 4월29일 엘에이 흑인 폭동의 도화선이 되게 되죠.

흑인 폭동이후 킹을 폭행한 경관들은 재심을 받게 되고, 이 가운데 2명은 킹의 인권을 유린한 혐의가 인정돼 징역 2년6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게 됩니다. 당시 폭행으로 뇌 손상과 함께 몸이 11군데나 부러졌던 킹은 94년 엘에이시를 상대로 거액의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해 380만달러(49억4천만원)을 보상받게 됐구요. 킹이 '흑인 인권의 상징' '흑인의 영웅'으로 부상한 것은 물론이죠. 이후 유사한 사건이 미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날 때마다 각국 언론들은 '제2의 로드니 킹 사건'으로 보도할 정도였죠.

그리고 10년...엘에이 흑인 폭동이 발생한지 10년이 지난 지금의 킹의 모습은 어떨까요? 보상받은 거액을 갖고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인권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을까요?

지난 14일 오전, 킹(36)은 엘에이 경찰에 다시 붙잡혔습니다. 그는 이날 동부 퍼모나의 한 길가에서 환각물질인 PCP를 복용한 채 흐느적거리다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됐죠. 킹은 지난 8월과 9월에도 이미 같은 동네의 모텔과 공원에서 마약을 복용하고 소란을 피우다 경찰에 체포됐었고,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는 지난 9월 공원에서 체포될 때는 환각상태로 옷을 벗고 뛰어다니다 붙잡히기도 했습니다. 킹은 이전에도 2번이나 감옥살이를 했죠. 99년에는 부인을 폭행한 혐의로 보호관찰 5년을 선고받았었고, 음주운전, 폭행 등의 전력도 갖고 있습니다. 마약 복용혐의에 대한 선고공판은 다음달에 열릴 예정인데, 2-3달 사이에만 3번이나 복용한 죄질로 봐서 아마도 실형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는 거액의 보상금은 어떻게 하고 이런 꼴이 됐을까요? 그는 보상금을 받은 직후 당시 폭행 경관들을 상대로 또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는데, 당시 변호사비로 큰 돈을 쓰고 정작 소송에서는 실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여러 가지 사업을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남은 돈도 모두 날렸구요. 10년전 영문도 모른 채 폭행을 당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웅이 되버린 뒤 거액의 보상금까지 받았던 그가 갑작스런 변화(91년 당시 킹은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에 적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흑인 폭동이후 그를 폭행한 백인 경관들은 재심을 통해 유죄를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지만, 이런 일련의 과정을 내심 불편하게 느꼈을 백인 주류의 미국 사회가 사건이후 킹의 앞길을 알게 모르게 방해했을 수도 있을 거구요.(실제 킹은 사건 이후 수차례 살해협박과 시도에 시달렸습니다)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에 저항하는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로드니 킹의 '몰락'은 여러 면에서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이상록 기자 myzodan@hani.co.kr



★ 2008

로드니 킹 사건을 GTA 커뮤니티 한 분이 재구성 했는데 재미있습니다. 보러가기



★ 2011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컴퓨터 사양과 그래픽 보드의 발전으로 GTA4 게임 그래픽은 이제 거의 실사 수준. 아주 엄청나다. 이런 그래픽에서 사람을 때려죽이면 아주 혼란스럽겠다. 게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기분이 아주 묘하겠다.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