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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여자

자/ㅓ 2011. 5. 21. 19:27 Posted by 로드365
사실 조선왕가에서 드라마틱한 삶은 살았던 인물은 한 둘이 아니다.
왕위를 삼촌에게 빼앗기고 어린 삶을 마감해야 했던 단종이 그렇고, 증살. 쪄죽었다는 표현이 적당할 지 모르지만 9살 뭣도 모르는 나이에 죽어야만 했던 영창이 그렇다.
이들과 더불어 무당들의 "왕가 3대 신"이 된 사도세자는 어떨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일수록 영험한 귀신이 된단다.
정조의 아버지 "뒤주 대왕"은 이렇게 무인들에게 떠받들어지고 있다는데...

그렇다고(아버지가 영험한 귀신이 되었다고) 그 아들 정조가 순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아비가 그리 죽은 어린 자식이 어찌 편안한 삶을 살았겠는가.
세손시절 옷을 벗고 잠을 자본적이 없다는 그의 고백처럼 그는 살기위해 투쟁해야만 했던 가엾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잘나 보이고 튀어 보인다.
왜 그럴까. 온갖 역경을 헤치고 위인전의 등장 인물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군주>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불린다. 
학자 군주, 개혁군주, 혁명군주,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 내 어린 시절 조선의 대왕님은 세종대왕 뿐이었고, 이병도 편 <국사대백과사전>에도 그는 심약하고 학문만을 좋아하여, 정치는 홍국영에게 맡긴채 운운했었는데. 박사님이 나를 속인게다.
그는 조선의 가장 위대한 군주였음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군주였다.

그건 그렇고, 오늘날 이 글을 쓰는 것은 드라마 <이산> 때문에 관심이 모아진 그의 여자문제 때문이다. 
여자문제.

정조의 여자들은 모두 5명이었다.
정비 효의왕후 외에 4명의 세컨드가 있었다.
참, 적지 않은 숫자이다.
우리의 정조대왕이 이리도 여자를 밝히심인가?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정비 효의왕후의 책임이 크다.
정조대왕이 자신있게 밝히신 바, 또 정조가 사랑해 마지 않던 정약용이 증언한 바, 정조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던 지극히 꺠끗한(?) 왕이셨기 떄문이다.
어쩌겠는가, 왕비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대통잇기"를 할 수 없는 몸이었으니.

효의왕후는 노론 청명당 계열 청풍김씨 김시묵의 딸이다. 
노론 청명당계란 당시 노론을 주도하던 가장 핵심적인 세력이었다.
그녀는 그런 집안의 딸로 태어나  10살의 나이에 11살의 정조를 만난다.
정조와 그녀는 사이가 무척 좋았다고 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그러니까 아직까지는 대통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그때까지, 정조에게 여자는 오로지 효의왕후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사이가 좋아도 그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것을 해서 그녀는 상상 임신까지 겪게 된다.

사실 조선시대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정확히는 아들이다) 죄인이었다.  
이는 왕비라고해서 예외일 수 없다.
가문이 앞날을 보장해 줄 만큼 확실히 든든하던지, 아니면 아이를 낳아주던지, 이도 저도 아닌 왕비는 나중에 대비가 되더라도 뒷방 늙은이 신세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오로지 자기 하나 만을 기다려주고 있는 남편에게 효의왕후는 꽤나 미안했던 것 같다.
그런 미안한 마음이 마음의 병을 불러 상상 임신까지 하게 되고, 그러나 1년을 기다려도 아이가 나오지 않자, 이 일은 헤프닝으로 끝나버린다.
그래도 그녀는 윗분들에게 효심을 다하고 남편에게 좋은 아내였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그녀도 살아남아야 되지 않겠는가.

다음의 그녀는 원빈 홍씨이다.
원빈 홍씨. 역시 좋은 가문의 딸이다.
친가, 외가로 영조, 정순왕후, 정조와 모두 연결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좋은 집안이다.
그런 그녀는 당시의 세도가였던 홍국영의 나이 어린 누이였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후사 문제에 돌입했을 때, 가장 먼저 치고 나온 것이 홍국영이었다. 
자신의 여동생을 발판 삼아 더 공고한 지위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뭐를 알까나 모를 어린 그녀를 후궁으로 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일로 공고한 지위는 얻기커녕, 정조의 곁을 영영 떠나게 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홍국영은 정조의 오른팔, 최측근, 귀척이었다.
더구나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할 정도로 그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주었었다.
그러나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외척으로써의 지위마저 얻고자 동생을 후궁으로 만들고, 그 동생이 궁에 들어온지 1년도 못되어 죽어버리자, 홍국영은 이에 광분, 동생의 죽음을 효의왕후의 독살로 단정해 버린다.
왕실의 권위를 망각한 이 일로 정조는 그를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그의 행동은 왕권을 위협하고 국가의 기강을 흔들만큼 오만방자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15살의 어린 소녀 원빈의 이야기도 끝이 난다.

그 다음은 화빈 윤씨. 판관 윤창렬의 딸이라는데 뭐 그리 절대적이고 중요한 가문의 딸은 아니라 생각된다.(잘 아려진 인물이 아니므로)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녀 역시 아이를 낳기 위해 들어온 후궁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 화빈, 정조의 여자들 가운데 가장 뽄때가 나질 않는다.
딸 하나 겨우 낳고 남 좋은 일만 시켰기 때문이다.
바로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문제의 그녀, 성송연이 이 화빈 처소의 궁녀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알려져 있다"라는 것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을 때 쓰는 말이다.
우리의 자랑스런 세계문화유산 <조선왕조실록> .
이 책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정사책이다.
그런데 이 실록은, "성씨가 어떻게 정조를 만났고, 그리고 어떻게 눈이 맞아 승은을 입었고,
또 그녀는 날마다 뭐하고 지냈는지... " 
이런 식의 친절을 우리에게 베풀기를 거부한다.

그저 그녀들의 이야기란, 
아이를 낳아야  "산실청을 차렸다", 
죽기라도 해야, "누구누구가 세상을 떴다".정도이다.
그러니 그 나머지 얘기들은, 여기저기의 짧은 글들과  추측들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의빈 성씨의 이름이 송연이도 되고, 그녀가 천한 다모도 되고, 정조를 위험에서 구출하는 용맹을 떨치기도 하고  뭐 그렇게 되는 것인데,  문제의 그녀 의빈 성씨.
이름도 알 수 없고, 나이도 알 수 없다.
궁녀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적어도 평민 이상의 신분이었을 것으로만 짐작된다.

그리고 창녕 성씨인데 원래 창녕성씨에는 미남 미녀가 많다고 한다.
(물론 나의 주장이 아니다. 창녕 성씨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지탄 받을 생각은 없으므로 -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이 그의 저서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 의빈 성씨도 미인이었는지 모르겠다.
정조가 어쩌다 눈이 맞은 유일한 궁녀 출신의 후궁이니 쫌 예쁘지 않았을까.
공부하느라, 국정 돌보랴, 여력이 미력하던 정조의 눈에 " 확" 든 여자라면, 게다가 여자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한 그 정조의 눈에 든 여자라면, 뭔가 확실한 매력이 있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녀는 화빈 윤씨가 독수공방하고 있는 사이 왕자 문효세자를 낳아주고, 어느덧 딸까지 하나 낳아 주는 분발을 하고 있다.
문효세자는 정조의 첫 아들이다.
오매불망 그리던 첫 아들을 낳아주었으므로  그녀에 대한 정조의 고임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또 다시 임신한 의빈 성씨 역시 시름 앓다, 임신 약 5 개월의 몸으로 죽고 마는데.

이에 관해 우리의 <실록>에는 이상한 멘트가 덧붙여져 있다.
정조가 말씀하시길, " 병이 증세가 이상하더니... 결국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병의 증세가 이상하다는 것. 주로 독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보통 실록에는 이렇게 독살이 의심된다거나 하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기록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왕실에 누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것, 특히 정조와 같은 의학의 대가가 독살을 의심했다는 것은, 독살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임신 5개월이었던 그녀가 또 다시 아들을 낳으면 안되었던 "그 어떤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일.
누굴까, 
얼마 뒤의 수빈 박씨계일까?
알수 없다.
독살이든 아니든, 아무튼 그녀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뱃속의 아이는 세상에 나와보지도 못한채.
그런 그녀가 정조는 무척이나 가엾었나 보다.
지극히 애통해 하고, 그녀와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에 자주 거둥을 했다고 한다.

그 다음은 수빈 박씨이다.
수빈 박씨 역시 아들을 생산할 목적으로 궁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의 다른 점은 유일하게 최종 목표을 달성했다는 것.
그녀는 순조의 생모이다.
이래저래 왕실과 연결된, 또 정조 사후에는 안동김씨와 더불어 세도정치에 참여하는 반남박씨 가문의 딸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 순조는 정조에게 의미가 큰 아들이었다.
정조가 천하의 명당이라는 화산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난 후 얻은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득의로 얻은 아들.
화성의 건설과 더불어 자신은 상왕의 지위에 올라 이 아들로 하여금 평생의 소원이던 사도세자의 추숭을 실현해 보고자 했었는데 그러나 그 기대를 이루어보기도 전에 정조께서는 세상을 뜨시고.


자, 이 정도가 정조의 여자관계이다.

한 때 정조가 누굴 더 사랑했었을까, 의빈성씨일까, 효의왕후일까,하고 논란도 벌여봤는데, 다 부질 없는 짓이다.
그 누가 알겠는가, 정조의 진짜 속마음을.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정조라면 그녀가 누구이든 그 마음의 모든 것을 다했을 것이란 거다.
효의왕후에게라면 지아비로써의 도리를, 의빈 성씨에게라면 자기 자식을 낳아준 어미로써의 대우를, 그는 "마음을 다해서" 했을 것이다.

그것이 정조의 인간적인 매력이다.

정조에 대한 평가는 위의 무슨무슨 군주 외에, 이런 것이 더 있다.
"성인 중의 성인이셨다." 정조 사후 그의 행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성인. 성스러운 사람.
유교 최고의 목표는 군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군자를 뛰어 넘어 성스러운 경지에까지 이른 사람.
정조 외에 이런 찬사를 들어본 왕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도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운 웃음을 웃으시는 군주" 란 표현을 더 좋아하고 그에게 적합한 더 지극한 상찬으로 여긴다.

이만수가 쓴 행장에 나온 이 구절은 정약용의 글에도 다시 한 번 나오고 있다.
정약용이 궁궐의 연회에 불려나간 감격을 적은 글<부용정기>에, "만면에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시며 
한 대접 가득 따른 술을 원샷하기를 재촉하시는 어진 임금님"이란 내용으로 말이다.

어떤가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운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임금이므로 성인중의 성인이란 극찬을 받을 수 있는 임금님"이 아니었을까.

그 자애로운 임금님이기에 "그녀가 누구이든"  정조의 여자들은 대접을 받고 사랑을 받았을거란 생각이 든다.


-출처 : 리라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