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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 키튼, 위대한 무표정

바/ㅓ 2008. 1. 15. 17:07 Posted by 로드365
 


기상천외한 아크로바틱과 무표정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희극배우, 매체와 관객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고 탐구했던 코미디의 왕. 바로 많은 감독들로부터 찬사와 존경의 거장으로 추앙받아온 버스터 키튼이다. 사망 40주기를 맞아 그를 회상한다.

여기 할리우드의 퇴락한 배우들이 한데 모여 포커에 열중하고 있다. 자신이 여전히 전성기라고 생각하는 노년의 여배우에게 초청된 이들은 흡사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희생당한 유령들 같아 보인다. 카메라가 그들의 우울한 모임을 천천히 비추는 사이, 침울한 표정들 사이로 놀랍도록 크고 맑은 눈동자를 가진 초로의 남자가 스친다. 누구시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남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고, 우리는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낸다. 버스터 키튼이다. 찬란했던 무성영화 시대의 영광을 지나 거대 스튜디오 제작 시스템 속에서 빛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진 버스터 키튼이다. 노쇠한 천재의 눈가에서 피곤함을 읽던 찰라, ‘코미디의 왕’ 버스터 키튼은 한 마디 대사도 없이 화면에서 사라져버린다. 단지 그뿐이었다.

빌리 와일더가 <선셋대로>(1950)에서 버스터 키튼을 카메오로 캐스팅한 의도는 명백했다. 당시 할리우드는 버스터 키튼을 ‘한때 유명했으나 토키(talkie) 방식과 스튜디오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도태당한’ 배우 정도로 생각했고, 이것이 ‘시대에 밀려난 여배우의 서글픈 착각’이라는 영화의 내용과 맥락상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라임라이트>(1951)에서의 조연 출연은 그야말로 비참한 것이었다. 한때 희극영화계의 양대 산맥이자 최대 라이벌로 거론됐던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한 키튼은 필생의 연기를 펼쳐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수치심을 감수해야만 했다. 실제 당시 키튼의 상황이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서른 편 가까운 작품을 발표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달려왔던 키튼은 거대 영화사 MGM과의 작업과 유성영화 부흥에 직면하며 위기를 맞이한다. 대사가 아닌 몸짓으로 그 이상을 표현해내는 이 배우에게 유성영화란 타협하기 힘든 변화였다. 더군다나 그의 목소리는 그간의 연기와 달리 지나치게 무겁고 어두웠다. 결국 쇠퇴일로를 걷던 키튼은 40년대 후반, 후배 코미디 배우들에게 아이디어나 제공하는 작가 신세로 전락한다. 종지부를 찍은 나탈리 탈마즈와의 결혼생활과 이어진 알코올 중독 또한 심각한 악재였다. ‘너무나 비참해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액수의 고료를 챙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키튼은 그렇게 대중들로부터 잊히는 듯했다.

60년대는 키튼에게 허락된 마지막 역전의 시기였다. 1960년 32회 아카데미시상식은 버스터 키튼에게 공로상을 수여했고, 65년 22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회고전을 통해 그를 망각의 세월에서 끄집어 올렸다. <제너럴>(1926)의 엔딩 크레딧이 은막에 뿌려지는 순간, 극장 안의 관객들은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 놀라운 영화와 감독 겸 배우를 향해 무려 20분 동안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럴싸한 광경이지만 오랜 세월 유기됐던 그의 이력을 되돌아볼 때 이는 잔인한 풍광이기도 했다. 뒤늦은 재발견과 찬사는 버스터 키튼에게 어떤 느낌이었을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삼십 년이나 늦게 찾아온 영광이었다”고 쓸쓸히 회고한 위대한 희극배우는 그 이듬해인 1966년 2월 1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지고야 만다. 비록 늦게 찾아온 영광이었지만 주위의 정당한 평가 속에서 맞이한, 비교적 행복한 죽음이었던 셈이다.




무성 희극영화 시대의 거장

루이스 부뉴엘, 살바도르 달리 같은 초현실주의자들부터 장 뤽 고다르를 위시한 누벨바그 작가들, 그리고 아크로바틱 액션 연기의 ‘2인자’(우리는 지금 그 1인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성룡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고백 받았던 버스터 키튼은 1895년 10월 4일 미국 캔사스 주의 소박한 공연배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보드빌 쇼(지역을 순회하며 펼쳐지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해 무대인생을 시작한 그는 일찍부터 연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특히 고무를 방불케 하는 유연한 신체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본명이 ‘조셉 프랭크 키튼 주니어'인 그가 '버스터(buster-뭐든 때려 부수는 단단하고 폭발적인 것) 키튼'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미 생후 6개월 되던 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도 손가락 하나 부러지지 않았던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천부적인 신체능력을 십분 발휘해 연극 무대에서 배우로서의 자아를 형성해나갔고, 1917년 유명 희극배우인 로스코 패티 아버클의 눈에 띄어 영화에 데뷔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는 금세 아버클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게 됐고, 알코올 중독과 수많은 가십성 스캔들로 인해 재기 불가능 상태에 이른 아버클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희극배우로 지목됐다. 이때부터 약 십여 년간, 그러니까 1920년 작 <일주일>에서 1928년 작 <카메라맨>에 이르는 짧은 시기 동안 키튼의 다시없을 전성시대가 열렸다(그는 이때 무려 서른세 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주연을 맡았다). 바야흐로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채플린과 키튼 가운데 누가 무성 희극영화 시대의 진정한 대가냐는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같은 곤란한 질문에 비할 바 아니다. 이를 판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단순히 누가 더 웃기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코미디 대중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에 앞서 영화언어를 연구하고 발전시킨 작가이기도 했다. 채플린이 “클로즈업은 비극, 롱샷은 희극”이라며 드라마 속에서 관객의 정서를 지배하는 방법을 연구했다면, 키튼은 관객과 영화매체가 소통하는 방식을 온몸으로(문자 그대로다) 사유해냈다. 버스터 키튼의 진정한 최고 걸작 <셜록 주니어>(1924)에서 우리는 관객과 영화 사이를 지배하는 무의식의 공기가 의식의 표면으로, 상징과 상상이 현실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광경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의 아버지로부터 도둑이라는 오해를 받은 영사기사 주인공은 직장으로 돌아와 영화를 상영하는 도중 잠에 빠져든다.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자아를 둘로 분열시킨 주인공은 잠에 빠진 자신의 몸뚱어리를 뒤로 한 채 영화가 상영중인 스크린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그 안에서 명탐정 셜록 주니어가 돼 진짜 도둑을 잡아낸 주인공은 잠에서 깨어나 이제 막 오해를 푼 연인으로부터 뜨거운 포옹과 키스를 받는다.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 가깝게는 웨스 크레이븐의 <영혼의 목걸이>나 나카다 히데오의 <링>에서 목격했듯이, 이 마술과도 같은 지점에서 미디어와 현실의 경계는 사라지거나 혼합되고 영화는 관객의 욕망을 투사하는 격정어린 환상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버스터 키튼은 이미 수십 년 전에 대중과 미디어의 관계를 고민하고 이를 영화적으로 실험했던 것이다.



우리들의 영원한 희극지왕

희극배우로서 버스터 키튼을 규정하는 특징은 ‘The Great Stone Face'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도무지 눈을 믿을 수 없이 유려한 아크로바틱 액션 연기에서 찾을 수 있다. 주먹과 발길질이 쿵짝을 이루며 직조되는 아크로바틱 무술 연기에 있어 정점을 찍었다 일컬어지는 성룡조차 버스터 키튼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다. 이는 채플린의 슬랩스틱 희극 연기에 비견되는 특징이다.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는 바지만, 곡예에 가까운 키튼의 액션 연기를 문자로 설명하는 노력은 늘 무위로 돌아간다.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목숨을 담보로 해 펼쳐지는 박자의 마술과 육체의 향연을 백 퍼센트 말로 서술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키튼의 맨몸이 보여주는 스턴트 방식은 영화 속에서 습관적으로 기계를 활용하는 방식과 절묘한 복합효과를 자아낸다. 키튼은 늘 기계에 매료돼 있었으며,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역시 카메라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일정한 속도와 방향을 갖는 기계의 물리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여기에 자신의 스턴트 기술을 결합했다. 달리는 기차, 자동차, 자전거, 보트가 등장하고 로프와 도르래가 설치된 집과 기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위에 올라타거나 작동하는 상태로 아슬아슬한 연기를 선보이는 모습들은 언제나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표정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관객의 웃음은 더 커진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던 키튼은 영화 속에서 절대적인 무표정을 고수했다. 이때의 무표정이란 세상에 달관한 도사의 그것이라기보다 대단히 난처한 상황에 직면한 소시민의 표정에 가깝다. 이는 묘하게도 슬픈 정서를 이끌어낸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갔으나 연적에게 선수를 빼앗긴 후 망연자실해 주저앉아 있는 모습(<카메라맨>), 혹은 청소를 하다 발견한 지폐를 두고 연인을 위한 선물을 사는 데 쓸 생각에 부풀어 있다 돈을 분실했다는 이에게 이를 넘겨주고, 뒤이어 찾아와 돈을 찾는 초라한 노파에게 얼마 되지 않는 전 재산까지 넘겨줄 때의 표정(<셜록 주니어>)이 그러하다. 그것은 세상에 도태되고 무시당한 소수자들을 향한 일종의 연민과도 같아 보인다. 무표정의 억눌린 듯한 슬픈 이미지가 신파적 요소의 역할을 하면서 연민의 정서는 배가된다. 이 서글픈 정서를 포착한 이들은 버스터 키튼의 정수를 아크로바틱 액션이 아닌 소수자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 찾는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박자의 묘기, 신체의 능력을 백분 활용한 기예보다는 키튼의 영화들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정서에 주목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키튼의 진정한 후계자는 성룡이 아닌 주성치다. 일련의 과장된 몸짓과 행동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지만 그 가운데 언제나 소외당한 이들에 대한 애틋한 시선(선민의식이 아닌 진정한 동지애라 할 만한)을 고수하는 주성치의 모습에서 버스터 키튼의 무표정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 공유된 정서적 유사점 외에도 둘 사이의 영화적 적자 관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지점은 더 발견된다. 주성치의 <희극지왕>과 키튼의 <극장> <셜록 주니어>는 영화와 배우, 스크린과 관객의 관계를 성찰하는 일종의 자기반성적 영화라는 점에서 또한 기묘하게 닮아 있다.

우리는 키튼이 패티 아버클과 함께 공연한 초기작 몇 편에서 드물게나마 그의 다양한 표정을 목격할 수 있다. <코니아일랜드>(1917)와 <촌뜨기 The Hayseed>(1919)의 경우 스크린 위에 작열하는 키튼의 감정 폭발은 20년대 이후 일련의 대표작들에 익숙한 이들에게 꽤 각별한 아우라를 불러일으킨다. 영화 속에서 키튼은 지나치게 크게 웃고, 지나치게 크게 운다. 놀랍도록 가슴시린 순간들이다. 우리에게 그토록 속 깊은 웃음과 울음을 주는 동안, 저 무표정한 사내의 속내에는 그토록 많은 감정들이 억눌려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때 잊힌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한시도 완벽하게 망각된 적이 없는, 그 자체가 전설로 영원히 산화된 존재다. 그의 사후 40해를 맞이했지만 그의 영화는 여전히 새롭고 재기발랄하며, 그를 능가하는 희극배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표정의 위대한 희극배우 버스터 키튼의 전모다.



ozzyz
허지웅

[필름2.0 272호 생활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