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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 프란시스 코폴라

자/ㅣ 2004. 2. 27. 17:46 Posted by 로드365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의 탄생

“이 모든 일이 과연 일어나긴 한 걸까?”

편집기사 월터 머치가 소설가 마이클 온다체에게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의 탄생을 이야기하다

월터 머치는 할리우드의 진짜배기 괴짜다. 진정한 지식인이며, 영화 창작의 다채로운 폭풍 중심에 서 있는 지혜롭고 비밀스러운 인물이다. 머치는 <청춘낙서> <도청> <대부> 시리즈와 <프라하의 봄> <잉글리시 페이션트> <리플리> 같은 영화에서 음향과 편집, 또는 둘 중 하나를 맡았다. 2년 전에는 오슨 웰스가 스튜디오에 보냈으나 무시된 58쪽짜리 메모에 기초해 <악의 손길>을 재편집했으며 `선(禪)과 편집 예술`이라는 주제를 다룬 <눈을 깜박이는 동안>(In the Blink of an Eye)이라는 제목의, 영화 만드는 이와 관객 못지않게 글쓰는 사람들과 독서가들의 관심도 끌 만한 책을 내기도 했다.

작가인 나는 한권의 책을 만드는 작업의 마지막 2년은 편집에 투자된다는 사실을 터득한 바 있다. 책을 쓰기 위해 4, 5년을 어둠 속에서 보낼 수도 있지만 창조하고자 그토록 몸부림쳤던 대상의 형태를 파악하는 일은 그 다음부터다. 두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고나서 나는 픽션은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물을 촬영하고 쓰는 데에 몇달, 또는 몇년을 보내고 나면, 그 내용에 형상을 부여해 거의 새로 발견된 스토리처럼 만드는 일이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창작자는 종종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작품의 도덕적 톤과 목소리를 발견한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 제작의 주변부를 맴돌며 월터 머치를 지켜보는 동안 내가 목격한 일들은 ‘이거야말로 영화만들기 작업 중 문학 창작에 가장 근접한 일’이라고 부를 만했다.

2000년 봄, 머치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제안을 받아 본인이 1977년부터 79년까지 사운드 디자이너이자 공동편집자로 참여했던 <지옥의 묵시록> 재편집에 들어갔다. 잃어버린 장면과 버려진 `패`들이 20년 묵은 창고에서 끄집어내져 재고 대상이 됐다. <지옥의 묵시록>은 영화계의 신화 속으로 걸어들어간 영화이며 미국인들의 무의식 일부다. 그러므로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작업에 참여한 이들은 이제 `공공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클래식을 해체하고 재편한다는 거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지옥의 묵시록>은 문화의 일부가 됐습니다”라고 머치는 말한다. “또한 그것은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이 작품이 문화를 건드린 만큼, 문화 역시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이 영화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2000년의 <지옥의 묵시록>은 1979년의 물리적으로 똑같은 <지옥의 묵시록>과 아주 다른 작품입니다.”

새로운 <지옥의 묵시록>은 좀더 유머러스하다. 윌라드 대위(마틴 신)가 탄 초계정(哨戒艇)의 병사들은 그들이 통과하는 풍경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욱 가깝게 관련되고, 다가오는 상황에 좀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그들은 킬고어 대령(로버트 듀발)의 연설을 구경할 뿐 아니라 대꾸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대령의 `신성한` 서핑보드를 훔치기까지 한다. 에피소드들을 잇는 `다리`들을 재건함으로써 <지옥의 묵시록>은 응집력을 높였다. 무엇보다도 코폴라와 머치는 사라진 세개의 긴 시퀀스를 복원했다. 플레이보이 모델들이 나오는 헬리콥터신과, 프랑스 고무농원의 귀기어린 장례식과 만찬, 그리고 러브신, 커츠가 건설한 요새에서 나오는 말론 브랜도의 추가장면들이 그것이다. “세상의 모든 편집실에서는 `영화를 얼마나 잘라도 말이 되나`를 둘러싼 전쟁이 벌어지는데, 이 시퀀스들은 바로 그 희생물들이었다”라고 머치는 말한다.

묵시록, 과거

마이클 온다체(이하 온다체): <지옥의 묵시록>에서 편집기사로서 당신이 해결해야 했던 문제의 하나는 이 영화의 에피소드 나열식 구성이었을 것 같다.

월터 머치(이하 머치): 그것은 이 특정한 괴물이 가진 성격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그 점을 상쇄하는 요소로 강이 있다. 강은 많은 에피소드들이 끌고 들어오는 막간극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를 앞쪽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물길 역할을 한다.

온다체: 주인공이 여행중에 발생하는 사건들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으로 엮인 탐험 장르(quest genre) 자체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윌라드는 그리 드라마틱한 주인공은 아니니까.

머치: 사실이다. 1979년 버전에서 윌라드는 대단원에서 커츠를 살해하기 전까지 완전히 소극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강을 거슬러올라가는 여행에서 그가 보인 행동 가운데 어떤 자극에 대한 `반작용`이 아닌 행동은 마주친 거룻배에서 총상을 입은 여인을 권총을 꺼내 절명시킨 일이 유일했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에서 윌라드는 덜 수동적이다. 아주 약간이지만. 덧붙이자면, 나는 코폴라가 애초 하비 카이틀을 윌라드 역으로 캐스팅했다가 촬영 한달 뒤 마틴 신으로 교체한 이유도 이와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신의 얼굴에는 개방성과 부드러움이 있어 관객은 그의 얼굴을 믿을 수 없는 전쟁의 반영을 비춰주는 거울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카이틀은 아마 암살자로서는 조금 더 그럴 듯했겠지만, 자신을 통해 제3의 것을 보여주기보다 자기 자체를 보여주는 배우에 가깝다. 코폴라가 처음의 방향을 고집했다면 아주 다른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한달의 촬영 뒤 그는 잠깐 멈춰서서 큰 변화를 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카이틀뿐 아니라 남은 프로덕션에 관련된 모든 작업에 대해서 말이다.

온다체: 놀랄 만한 오프닝 시퀀스는 윌라드를 우리에게 소개할 뿐 아니라 이 영화의 모든 측면을 감싸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프닝 시퀀스의 착안과 창조과정에 대한 말해줄 수 있나.

머치: 마틴 신을 캐스팅하고 나서 코폴라는 윌라드의 성격 가운데 마틴 신이 끌어낼 능력이 있는데도 그 자질들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하게 고립시키고 있는 모종의 분노와 연약함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감독은 호텔방장면을 하나의 연기연습으로 설정했다. 코폴라는 오프닝장면을 서로 직각을 이루는 두대의 카메라를 이용해 거의 다큐멘터리처럼 찍었다. 리허설을 하되 마치 향을 피우듯 카메라를 돌리고 필름을 쓰면서 진행하는 방식은 코폴라가 전에도 이용했던 테크닉이었다. 필름에 노출되면 사물들을 좀더 깊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반응이고 이 장면이 어쩌면 완성된 영화에 포함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야기한다. 조건이 갖춰지고 운이 좋다면 이는 보통의 즉흥연기가 좀처럼 이뤄내지 못하는 내용을 배우의 영혼과 정신 속에 생생히 새겨넣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원래 이 장면은 영화에 쓰일 예정이 없었지만, 호텔방장면에는 뭔가 도발적인, 오프닝 전체를 주변에 달라붙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나레이션, 나란히 누운 여인에게 속삭이듯

온다체: 윌라드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마이클 헤르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은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있었나? 아니면 나중에 추가된 것인가.

머치: 내레이션은 존 밀리어스의 원본 시나리오에 있었다. 윌라드는 본디 내면의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77년 8월에 내레이션을 삭제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우리는 본래 12월 개봉을 위해 4개월 안에 영화를 마치게 돼 있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영화가 처한 상태를 고려할 때 비현실적인 스케줄이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12월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보았다면 유일한 방법은 내레이션을 되살리는 거였다. 앞서 말했듯 윌라드는 소극적이고 불명료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보이스오버는 더 필요했다. 그가 관객에게 대놓고 말하지도 않고 별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내레이션의 매개를 통해서니까. 결국 내레이션 아이디어가 채택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온다체: 마이클 헤르는 뒤에 내레이션을 수정하도록 영입됐다. 그가 쓴 책 때문이었나.

머치: 나는 밀리어스가 <지옥의 묵시록> 각본을 쓰면서 마이클 헤르의 <에스콰이어> 기사 일부를 각색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아마 헤르의 승인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조치는 헤르를 영화의 협력자로서 우리 동아리 속에 끌어들이는 방법이기도 했다. 외부자로서 영화를 보며 `어, 잠깐! 저건 내가 쓴 거야!`라고 외치게 하지 말고 말이다. 결국 헤르는 내레이션 전부를 다시 썼다.

온다체: 나는 보이스오버가 아주 맘에 들었다. 내레이션이 들려주는 내용뿐 아니라 내레이션하는 방식, 관객이 그것을 듣게 되는 방식이 좋았다. 그렇게 친밀한 내면의 목소리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머치: 재미있는 사실은 프레드 진네만의 <줄리아>와 존 휴스턴의 <모비딕>의 내레이션과 <지옥의 묵시록> 내레이션이 직접 연결된다는 점이다. <줄리아>에서 만난 음향효과 에디터인 레스 호지슨은 <지옥의 묵시록>의 음향효과를 편집했고 <모비딕>에도 참여했다. 우리는 <줄리아>에서 내레이션이 내면의 표현이 되길 원했다. 하지만 어떻게? 레스는 우리에게 <모비딕>에서 리처드 베이스하트와 내레이션을 녹음하고 있을 때 휴스턴이 내레이션의 사운드가 친밀감보다 낭독조의 느낌을 준다는 데에 불만을 표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휴스턴은 1층에, 베이스하트는 높게 설치된 부스에 있었는데, 베이스하트가 우연히 마이크가 입술에 거의 맞닿을 정도로 몸을 기울이며 `존, 다음엔 뭘 해야 하지?`라고 물었다. 휴스턴이 소리쳤다. `바로 그거야! 그게 바로 자네가 다음에 할 일이야! 모든 내레이션을 그런 식으로 하라고.` <지옥의 묵시록>에서도 기본은 같았다. 나는 마틴 신에게 마이크로폰이 자기 옆에서 베개를 베고 누워 있는 여인의 머리이고 자신은 지금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다고 상상하라고 말했다.

온다체: 내레이션의 믹싱과 재녹음에는 특별한 방법을 동원했나.

머치: 재녹음을 하면서 우리는 싱글 사운드트랙을 스크린 뒤에 설치된 세개의 스피커로 똑같이 출력했다. 속삭이는 듯한 소리의 벽이 관객을 향해 다가올 수 있도록. 이건 보통 중앙 스피커에서만 흘러나오는 인물 사이의 대화와는 다르게 들린다. 스크린에서 들려오는 내레이션은 뚜렷한 모양이 생겨 다른 다이얼로그와는 다른 음향을 갖게 됐다.

브랜도, 커츠에서 레일리로, 다시 커츠로

온다체: 말론 브랜도가 영화 촬영중 시나리오에 관해 기여한 바가 있나.

머치: 말론 브랜도는 필리핀제도에 도착할 때부터 스크립트에 불만이라고 공언했다. 이어진 토론은 그가 약속한 것보다 체중이 불어 역할이 요구하는 연기를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악화되기만 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코폴라는 `좋아, 그럼 그냥 <암흑의 심장>을 읽으시오`라고 말했고, 브랜도는 `나는 <암흑의 심장>을 읽었고 아주 싫은 책이었소`라고 대답했다. 프로덕션은 일주일간 스톱됐고 브랜도와 코폴라는 브랜도의 요트에서 승강이를 계속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의도였는지 그 요트에는 <암흑의 심장>이 한권 나뒹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브랜도는 머리를 싹 민 채 나타나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선명해졌소`라고 말했다. 그는 존 밀리어스의 시나리오가 <암흑의 심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브랜도는 한번도 원작소설을 접한 적이 없었다. 앞서 그가 스크립트를 읽었을 때 브랜도는 `나는 커츠라는 이름이 싫소. 미국 장군들은 그런 이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들은 남부 출신의 화려한 이름을 갖고 있어요. 나는 레일리 중령으로 불리고 싶어요`라고 말했고 코폴라는 동의했다. 그런데 브랜도는 콘래드의 책을 읽고 나더니 갑자기 다시 `커츠`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윌라드가 자기 임무를 받는 신을 비롯해 여러 신이 이미 `레일리 중령`이라는 이름을 써서 촬영된 다음이었다. 결국 우리는 대사를 다시 녹음해야 했다.

윌라드의 시선, 우리가 베트남전쟁을 경험하는 눈

온다체: 촬영 방식 때문에 편집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이 있었나.

머치: 코폴라가 배우들로 하여금 카메라를 직접 들여다보도록 한 연출은 대단했다. 프레임을 깨부수거나 인물이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보통은 액션을 멈춰가면서 카메라를 쳐다보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배우들이 끊임없이 카메라를 쳐다보는 행동이 아주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통합된다. 어떤 흐름이 제지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 관한 어떤 연구나 관찰도 그 점에 대해 지적한 것을 읽거나 들어본 적이 없다. 윌라드가 장군에게 임무 브리핑을 받는 장면에서 장군, CIA 요원, 부관 모두가 윌라드에게 말할 때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본다. 만약 그렇다면 윌라드도 카메라를 보게 하는 것이 수학적으로 올바른 처리일 것이다. 그러나 윌라드는 관습적인 영화의 문법에 따라 카메라의 왼편을 쳐다본다. 장군의 경우 관객은 그가 관객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않고 윌라드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신을 찍은 카메라 오퍼레이터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코폴라는 그에게 `당신이 지루해지면 언제든지 카메라를 움직이시오`라고 지시했다. 그 장면에서 윌라드가 매우 심한 숙취로 고생하고 있는 상태였고 카메라의 포지션은 윌라드의 시점이었다. 하지만 편집에서는 이런 촬영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과제였다. 대체 언제 누가 카메라에 잡힐지 예상할 방도가 없었다. 긴 대사 중간에 카메라는 갑자기 왼쪽으로 흘러가버리곤 했다. 카메라가 언제 그들을 주목할지 확신할 수 없었던 배우들은 연기에 관해 불안정한 감을 가졌고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장면에서 윌라드가 카메라를 쳐다볼 때 관객은 그가 관객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당신은 믿을 수 있나?`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는 이 영화가 지닌 강력한 주관성, 즉 윌라드야말로 우리가 베트남전쟁을 경험하는 눈과 귀라는 사실과 연관된다고 본다. 모든 점이 논리적으로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런 영화적 장치들이 이만큼 물흐르듯 억지스러움 없이 작동한다는 점은 여전히 경이롭다. 나는 이런 성취를 해낸 어떤 다른 영화도 알지 못한다.




새로운 장면들

온다체: 윌라드가 킬고어 대령의 서핑보드를 훔치고 보트로 뛰어들어가 어린아이처럼 웃어대는 새로운 장면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많이 바꿔놓았다. 여기서 윌라드는 사춘기 소년과 다를 바 없다. 전체 스토리를 통틀어 윌라드가 가장 행복한 대목이기도 한 이 장면은 우리가 품고 있는 윌라드라는 인물의 초상에서 다른 부분까지 흔들어놓는다.

머치: <니노치카>를 어떻게 홍보했던가? `그레타 가르보가 웃었다!`라는 카피였다.

온다체: 수상스키장면을 뒤쪽으로 옮기면서 흥분과 희열이 생겼다. 현실적인 필요가 충족되면서 좀더 강력한 느낌이 생겨난 것이다.

머치: 1979년판에서 수상스키장면은 킬고어 대령이 나오는 시퀀스들 전, 그러니까 훨씬 앞부분에 나온다. 우리는 <…리덕스>에서 이 신을 원래 시나리오가 배치한 자리, 플레이보이 바니 쇼 다음 순서로 옮겼다. 1979년 버전에는 `이 보트, 이 병사들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사납고 미쳐 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랜스가 수상스키 타는 장면이 보트의 병사들을 소개한 직후 나오기 때문이다. 새 편집판에서 관객은 승무원들이 태평스러우면서도 미쳐 있는 점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토리의 궤적이 그리는 호가 좀더 부드러워지면서 영화의 파편화된 인상이 줄어들게 됐다. 이제 보트의 병사들은 킬고어의 광기에서 살아남아 정글의 호랑이로부터 도망쳐 플레이보이 쇼에 다다르는 것이다.

온다체: 부상자를 구출하는 헬리콥터 시퀀스도 추가됐다. 그 시퀀스는 영화에 어떤 변화를 주었나.

머치: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윌라드가 아들에게 보내는 커츠의 편지를 읽을 때 보트가 불타는 헬리콥터를 지나고 주변 나무에 시체들이 걸려 있다. 그리고 구출 헬리콥터를 부르는 사령관의 무전소리를 듣는다. 새로운 편집본에서 사령관은 강 상류에 있는 헬리콥터 캠프에 미리 무전을 치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뭔가가 잘못됐다. 그래서 <…리덕스>에서 우리는 불타는 헬리콥터로부터, 보트가 헬리콥터 기지에 도착하는 새로운 신으로 디졸브했다. 윌라드는 보트에서 뛰어내려 기지 지휘관이 몇주 전 지뢰를 밟았고 후임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군인들은 우왕좌왕하고 캠프 전체는 완벽한 혼란상태다. 이건 머치 여왕벌 없는 벌집의 형국이다. 또 플레이보이 버니 헬리콥터가 여기 착륙해 전장의 부상자와 사망자들을 수송하도록 징발당한 바 있지만 지금은 연료가 떨어져서 빌 그래함과 세명의 플레이보이 버니들이 진창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걸 발견한다. 윌라드는 그래함과 협상해서 거래를 맺는다. 여자들과 몇 시간을 보내는 대신 2통의 디젤 연료를 주겠다는. 그리고는 주방장으로 불리는 병사와 그의 이상형 미스 12월(실은 미스 5월), 랜스와 올해의 플레이메이트 사이의 더블신이 이어진다. 우습고 섹시하고 특이한 시퀀스다. 문제는 윌라드와 빌 그래함이 흥정하는 장면을 찍어놓은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온다체: 그럼 없는 장면은 어떻게 처리했나.

머치: 생략법을 썼다. 윌라드가 텐트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초계정 병사들 사이의 드잡이장면과 교차편집했다. 관객이 키득거리고 야유하고 빗속에서 구르는 사춘기 사내아이들 같은 싸움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으면 윌라드가 돌아와 거래의 내용을 발표하며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다.

온다체: 나로서 가장 주목한 추가분은 프랑스농원 시퀀스다. 이 장면은 영화의 정치성을 심화하는 동시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전에 이 장면을 쓰지 않은 이유는.

머치: 아마도 가장 까다로운 문제는 어떻게 그 시퀀스에 진입하느냐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한 문제는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였다. 1978년에 이 문제는 우리를 정말 괴롭혔다. 구조적으로 이 시퀀스는 내용에 비해 너무 늦게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베트남 개입에 관한 열정적이고 논리적인 토의는, 영화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광기에 물든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영화가 2/3 흘러간 뒤가 아니라 영화의 초반 1/3에 들어가야 할 것처럼 보인다. 코폴라는 이 시퀀스의 첫 부분을 재촬영했는데, 영화에 나온 선창가는 태풍에 의해 파괴돼 있었으나 코폴라는 현장을 보더니 더 잘됐다, 폐허가 된 편이 좋다라고 말했다. 프랜시스는 이미 촬영단계부터 농원 사람들이 정말 실존 인물일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해 응답하고 있다. 어디서 생필품을 보급받으며 어떻게 이 장소에 들어왔다 나갔는지 어떻게 고무를 내다팔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질문들 말이다. 그러나 끝낼 방법이 없었다. 시퀀스의 엔딩은 망가지기 전 선창가에서 단 한번 촬영됐다. 원판 편집 당시 프랑스농원 부분의 작업을 하지 않았고 촬영분도 다 보지 못했던 나는 그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자료들을 보았다. 그중 윌라드와 오로레 클레망이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여자는 침대 밖으로 나와 옷을 벗고 모기장을 침대 주변에 드리운 다음 모기장 그물을 통해 윌라드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는 그물 너머 그녀를 끌어당겨 사랑을 나눈다. 나는 모기장에 여자의 실루엣이 비친 프레임을 캡처해서 지켜보다 생각했다. `그녀는 마치 유령같이 보이는군.` 그리고 우리가 만약 농원 부분을 클린(로렌스 피시번)의 죽음 다음으로 넣을 수 있다면, 보트를 안개 속에 들여보내 한참을 흘러가게 한다면 프랑스농원은 안개 속에서 무너진 상태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며 안개 속에서 유령 같은 존재도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나면 시퀀스는 코폴라의 표현을 따르자면 브뉘엘적인 부조리한 분위기가 감도는 저녁식사 토론으로, 다시 윌라드와 오로레 클레망의 캐릭터가 아편을 피우며 섹스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여자가 유령 같은 실루엣을 모기장 반대편에 비치게 된다. 그러면 영화는 다시 안개 속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안개가 영화 속에 진입해 그 이미지를 이어받고 관객은 우윳빛으로 하얗게 된 배경 위를 배회하면서 여성의 실루엣에 젖은 채 남는다. 우리는 침실신을 윌라드가 모기장을 통해 여자를 끌어안기 직전에 끝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몸을 그물을 통해 끌어안는 순간의 이미지로 말이다. 그것은 무척 관능적인 이미지지만 그 무렵이면 여자는 이미 비물리적인 존재로 변해 있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보트로 돌아온다. 이 모든 일이 과연 일어나긴 한 걸까? 혹시 꿈은 아니었을까? 그들은 혹시 25년 전에 농원 사람들이 살았던, 영적인 힘의 장을 통과한 것이 아닐까? 게다가 클린이 죽은 직후 그의 시신도 이 유령 같은 장소에 묻혔다. 농원의 프랑스인들 역시 죽음과 유령에 대해 생각하면서 여기 묻힌 게 아닐까?

온다체: 콘래드의 소설에서 말로우(원작소설에서 윌라드 캐릭터의 이름)와 커츠가 만났을 때 나누는 모럴에 관한 토론은 결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말로우가 커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벌인 싸움에 관해 이야기한 섬뜩한 한 문단이 나올 뿐이다. 영화의 피날레에는 영화의 다른 부분이 담고 있는 위험과 명징함이 없는 대신 내가 완벽하게 납득하지 못한 신비적 요소가 있었다. 재편집 과정에서 이와 관련해 발견한 자료가 많았나.

머치: 각각 20분, 25분에 달하는 말론 브랜도의 독백 두개가 있었다.

온다체: 그건 즉흥연기였나.

머치: 브랜도가 어떤 텍스트도 암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즉흥연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랜도와 코폴라는 그가 이야기할 내용에 대해서는 상의했다. `면도날 위의 달팽이`에 관한 대사와 소아마비 주사를 맞은 아이들의 팔에 대한 대사들은 첫 번째 모놀로그에서 나온 것이다. 두 번째 모놀로그에서 영화 속에 살아남은 것은 `공포… 공포`라고 되뇌는 부분뿐이다.

온다체: 나는 결말부의 말론 브랜도 시퀀스가 너무나 어두침침하고 추상적이라는 점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머치: 우리가 추가한 또다른 장면은 잘린 팔들의 목격담으로 넘어가는 장면에 나오는 브랜도의 대사들이다. 윌라드가 감금돼 탈진하는 일련의 장면 중 마지막 대목이다. 땡볕에 내놓은 철제 컨테이너 안에서 구워지다시피한 윌라드에게, 행복한 부처마냥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커츠는 <타임>에 실린 베트남전쟁의 전망에 대한 세개의 짧은 글을 읽어준다. 기사에 대해 조금 역설적인 코멘트를 단 다음 그는 `이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좋다. 도망치려 하지 마라. 그러면 총을 맞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윌라드는 일어서려 하다 쓰러지고 곧이어 사원 안으로 옮겨진다. 윌라드를 `고문`하는 과정의 끝은 영화 속에서 이런 식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관객은 비로소 햇빛 속에서 브랜도의 전신을 본다. 그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단단하게 통합된, 아이러니와 권위의 존재다.

* 이상은 2002년 미국 크노프(Knopf)출판사와 영국의 블룸즈버리출판사에서 발간 예정인 온다체와 머치의 인터뷰집 <대화: 월터 머치와 영화의 편집>에 실릴 마이클 온다체의 원고로 <필름 코멘트> 2001년 5·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씨네21>과 <필름 코멘트>는 기사제휴 관계에 있습니다

마이클 온다체/소설가.<잉글리시 페이션트> <아닐의 유령>







<지옥의 묵시록> Now and Then

암흑의 심장에 위대한 마침표를 찍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오리지널에서 49분 추가, 코폴라의 예술적 야심을 보다 완벽하게 담아낸 걸작

어느 영화 감독의 고백에 따르자면, 영화를 완성하는 감독은 없다. 감독들은 다만 어떤 단계에 이르러 영화를 ‘포기’할 뿐이다. 그리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아마 역사상 누구보다 어렵게 영화를 ‘포기’한 감독일 것이다.

1979년 봄 코폴라는 16개월에 걸친 전쟁과도 같은 촬영과 2년여의 편집을 마치고 오리지널 <지옥의 묵시록>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 묵시록은 종말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결말 처리에 대한 고민을 “손톱으로 유리벽을 기어오르는 것 같다”고 표현할 만큼 코폴라는 고통받았다. 한편의 영화가 그토록 엄청난 시간을 삼키고 많은 스캔들을 토하는 괴물이 된 광경을 본 경험이 없었던 1970년대 말의 언론이 호들갑을 떨어대는 와중에, 코폴라는 경솔하게도 결말에 대한 불안을 외부로 흘렸고 아니었으면 아무 생각 없었을 평론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엔딩의 흠을 찾기 시작했다.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쏟아진 엔딩에 관한 질문들에 화가 난 코폴라는 급기야 극장을 따로 잡아, 자신의 요트에 싣고온 다른 버전의- 커츠의 왕국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윌라드와 랜스의 보트숏으로 끝나는- 프린트를 상영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지옥의 묵시록>은 1979년 칸에서 <양철북>과 나란히 황금종려상을 탔지만 트로피는 영화의 매듭이 되지 못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돈이 많이 든 장면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던 배급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의 권고에 따라 35mm판의 엔딩 크레디트에는 커츠의 부락이 폭격당하는 스펙터클이 추가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작가적 신념의 결핍을 대변하는 듯한 이런 설왕설래는 평단의 불신만 높였고, 이후 오랫동안 마니아들 사이에는 5시간이 넘는 해적판 비디오가 원혼처럼 떠돌아다녔다.

49분이 길어졌지만, 더 짧게 느껴져

<지옥의 묵시록>을 두고 코폴라는 파우스트와 계약이라도 맺었던 것일까? 1980년대 이후 태작의 목록이 길어지면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점차 거인의 풍모를 잃어갔다. 그러나 완성되기를 갈구하는 ‘묵시록’의 메아리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6년 전 코폴라는 런던의 호텔방에서 우연히 <지옥의 묵시록>을 다시 보고 놀라움을 느꼈다. 1970년대 말 당시 지나치게 긴 영화, 괴상한 영화로 악명높았던 <지옥의 묵시록>은 더이상 그렇게 이상한 영화로 보이지 않았다. 세월의 강이 이 대작을 다른 기슭에 데려다놓은 것이다. 아마 코폴라는 그 기슭에서 다시 출항하면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의도한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리지널이 개봉된 지 20년이 지난 1999년 코폴라는 자신이 소유한 포도농원으로 원판을 편집했던 월터 머치와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트라로를 초대해 복원판 제작에 뜻을 모으고, 2000년 3월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에 착수했다. 그리고 올해 2월26일 칸영화제는 2001년 영화제에서 <…리덕스>를 공개한다고 엄숙하게 발표했다.

경쟁부문이었더라면 하마터면 두개째 황금종려상을 받을 뻔한(?) 존경어린 호평 속에서 칸영화제 퍼레이드를 벌이고 한국 극장가에 당도한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는, 과연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보다 훨씬 아름답고 장대하며 최초의 예술적 야심에 충실하다. 부활한 <지옥의 묵시록>은 우선 윤기있는 화면을 보여준다. 테크니컬러 삼색 프로세스를 현대화한 방식이라는 색-전사시스템(dye-transfer system of printing)으로 비토리오 스트라로의 지휘 아래 재인화된 화면은, 한층 색이 깊고 풍부하며 회화적 디테일을, 메콩 강물 위에 부서지는 햇빛의 결까지 풍부하게 되살려낸다. 그러나 관객에게 무엇보다 먼저 체감되는 <…리덕스>의 변화는 ‘연결’이 매끄러워졌다는 점. 아예 통째로 들어냈던 시퀀스들이 복원되고 에피소드가 풍부해지면서, 마치 대서사시의 하이라이트처럼 파편화돼 보였던 영화에 응집력이 생겼다. 덕분에 49분이 더 길어진 <…리덕스>의 상영시간이 오리지널보다 오히려 더 짧게 느껴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더 자극적이고 더 웃기고 더 로맨틱하며 더 강력한 역사적 관점을 가지게 됐다”는 코폴라의 <…리덕스>에 대한 자평은 그저 자화자찬이 아니라 추가된 시퀀스들이 영화 전체에 끼친 효과에 대한 적확한 묘사라 할 만하다. 플레이보이 바니걸들과 프랑스 고무농원의 여인이 윌라드 일행과 접촉을 갖는 오리지널판에 없던 장면들은, 전쟁의 포연이 미향(微香)처럼 감도는 관능적 매력을 영화에 불어넣고, 윌라드와 병사들이 서핑을 위해 마을을 포격하는 킬고어 중령의 서핑보드를 훔쳐내 술래잡기를 벌이는 시퀀스는 1969년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사춘기적 유머를 더하며 윌라드와 병사들의 캐릭터에 생기와 입체감을 준다. 이 영화의 가장 골치아픈 수수께끼였던 말론 브랜도의 커츠 대령 캐릭터도 그의 철학과 정치적 입장을 암시하는 대사들이 보충되면서 설득력을 보강했다. 평론가 하워드 햄튼이 지적한 대로 <…리덕스>의 재편집은 오디세이의 고전적 비극과, '아무하고나 자고 아무나 죽이는' 비치파티 영화의 결합물로서의 <지옥의 묵시록>을 더욱 완전하게 다듬어낸 셈이다.

안개 속에 홀연히 등장하는 고무농원 시퀀스는 1979년판에서 완전히 생략됐던 대목. 베트남전쟁 당시까지 농원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이라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농원의 프랑스인들은, 윌라드의 여정에 몽환적인 간주곡을 제공하지만 그들의 대사는 현대사의 맥락 안에서 베트남전쟁이 점하는 좌표를 지적하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농원이 우리 것이니까 싸운다. 하지만 당신네들은 뭐지? 당신네 미국인들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무(無)를 위해 싸우고 있어.”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를 더욱 단단하고 완전한 형상으로 다듬어낸 힘은 단순히 추가된 장면에서만 나오지 않았다. 22년이라는 시간의 경과는, <지옥의 묵시록>을 영화이기에 앞서 하나의 스캔들로 변질시켰던 필요 이상의 뒷이야기들로부터 거리를 갖게 만들었다. 물론 지난 20년간 영화가 점점 이벤트화 되어가면서 <지옥의 묵시록>이 자아낸 소란 정도는 심상한 일이 되기도 했다. 이 영화에 쏟아졌던 “자기도취적”이라는 비난은 영화 만들기의 패션이 극단화하고 관객의 수용방식도 다양하게 변모한 오늘에 와서는 무색해져버렸다. 세월은 또한 관객의 시야를 넓혔다. 예컨대 베트남전쟁 때까지 버틴 프랑스인들의 고무농원장면이 1979년 당시 들어갔다면 그 현실적 가능성을 놓고 말이 많았겠지만 2001년의 관객은 그 장면을 하나의 판타지 또는 코멘트로서 보는 시학적 관용을 갖게 됐다. 반면 영화 만들기의 지난했던 과정 자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혼미한 채 광기의 심장부로 노저어가는 윌라드의 여행 그리고 전쟁의 부조리한 본질과 일치됨으로써 발생한 <지옥의 묵시록>의 에너지는 여전하다. 삶을 모방한 예술의 위용 역시 수그러들지 않았다. <지옥의 묵시록>은 오래 지속되는 장점과 수명 짧은 단점으로 이루어진 영화였고 <…리덕스>는 22년 뒤 그것을 증명한 것이다.

한 시대에 대한 거대한 은유

<지옥의 묵시록>는 도어즈의 <종말>(The End)로 시작한다. 도어즈의 노래가 저주의 주문이 됐는지 아니면 축복이 됐는지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가 나온 지금 <지옥의 묵시록>은 아무도 깨어날 수 없는 꿈, 진정한 끝이 있을 수 없는 영구한 영화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것은 대담한 야심을 품었던 한 젊은 예술가의 영혼과 한 나라, 나아가 한 시대에 대한 메타포가 되었던 ‘거대한’ 영화의 고단한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앞으로 10년이나 20년이 흐른 뒤 <지옥의 묵시록 리서렉션>이나 <지옥의 묵시록 딜럭스>라는 제목의 재편집판이 발표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가 21세기의 씨네필들에게, 할리우드가 ‘위대한’이라는 고풍스런 형용사를 어색함 없이 걸칠 수 있었던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걸작을, 그 장려한 ‘신들의 황혼’을 보여줄 것이다.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오리지널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기

“뭘 만들고 있는지, 나도 몰라”

<지옥의 묵시록>의 씨앗은 남가주대(USC) 동창인 조지 루카스와 존 밀리어스가 뿌렸다. 베트남전쟁을 무대로 한 강박적 스토리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하던 그들에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조셉 콘래드의 1902년작 소설 <암흑의 심장>을 각색하라고 권했다. <암흑의 심장>은 오슨 웰스도 영화화를 기획했던 소설. 웰스는 연출은 물론 커츠와 말로우(<지옥의…>의 윌라드에 해당하는 인물)를 1인2역으로 연기하고 영화 전체를 말로우의 1인칭 시점 숏으로 찍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이루지 못했다. 밀리어스는 시나리오를 완성했지만 코폴라의 조감독이었던 루카스는 코폴라가 자기를 ‘어린애 취급’하고 있다고 느끼고 <스타워즈>를 연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옥의 묵시록>은 결국 코폴라의 손에 안착했다.

<지옥의 묵시록>의 필리핀 촬영은 ‘피크닉 가듯 해치우자’고 생각한 코폴라의 예상과 달리, 제작진 전체를 파월된 미군 병사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빠뜨렸다. 차이라면 군인들쪽이 훨씬 양호한 날씨에서 정글을 헤맸다는 정도. 촬영기간은 238일까지 늘어났고 제작비는 1300만달러에서 3천만달러로 뛰어오르면서 코폴라의 집까지 저당으로 잡아먹었다.

하루 1m씩 퍼붓는 폭우와 허리케인 올가는 세트를 완파해 스탭들을 두달간 집으로 보냈고, 공중폭격장면에서는 영화의 미술부와 소도구 창고가 초토화됐다. 배우들의 고역 역시 만만치 않았다. 바그너의 발키리를 울려대며 폭격을 지휘하는 킬고어 역의 로버트 듀발은 고소공포증이 있었고 하비 카이틀을 대신해 영입된 마틴 신은 심장마비에 시달렸다. 마틴 신은 취한 채 주먹을 휘두르는 오프닝신 촬영을 위해 계속 술을 마시며 이틀간 바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 영화의 진로가 통제불능이라고 느낀 코폴라는 마약에 손을 댔고 무엇에 홀린 듯 낭비를 멈추지 않았다. 코폴라는 스스로 커츠 대령의 정신상태에 빠져가면서 ‘메소드 연출’을 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메이킹 필름을 만든 코폴라 부인 엘레노어는 남편이 “이 영화는 사상최악이야”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면 위로는커녕 “방금 그 말 다시 크게 해볼래요?”라고 대꾸했다고 전해진다. 완성된 <지옥의 묵시록>은 북미지역에서만 3730만달러를 벌어 제작비를 거둬들였지만 코폴라 개인은 빚더미에 앉았다. 그러나 험한 소용돌이도 빠져나오고 나면 담담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된다. <…리덕스>의 개봉에 즈음해 지난 7월 말 의 <투데이>에 출연한 코폴라는 “진정으로 개인적인 작품이나 고전으로서 가치를 유지할 영화를 만들다보면 스스로 답을 모른 채 만들 수밖에 없다”라고 정리했다.
김혜리 기자







영화사에 등재된 디렉터스 컷

‘감독 앨런 스미디’ 지우기

요즘은 DVD를 출시할 때 삭제되었던 장면을 집어넣는다든가 다시 편집하는 게 유행처럼 되었지만(계약서에 DVD를 만들 때에는 감독의 요구대로 재편집한다는 규정을 넣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는 ‘디렉터스 컷’을 만들어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제작사가 마음대로 편집을 하거나, 소수 관객의 반응이 너무나 뜨거워서 뭔가 새로운 팬서비스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 잘린 장면 등을 추가하여 ‘디렉터스 컷’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이유는 제작사의 간섭이다. 상영시간이 너무 길거나, 관객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리면 따로 편집기사를 불러다가 독자적으로 편집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에 격분한 감독이 제작사와 너무 심하게 싸우다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빼라고 할 경우에는 ‘감독 앨런 스미디’라는 타이틀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 자신이 찍기는 했지만 ‘이건 내 작품이 아니오’라는 뜻이다. 이 정도까지 악화일로를 걸었을 때에 감독이 다시 ‘디렉터스 컷’을 만드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앨런 스미디’라는 낙인은, 거의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품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음을 의미하니까.

데이비드 린치의 <사구>를 둘러싼 분쟁과 결과는 지극히 혼란스럽다. 애초에 TV시리즈 정도의 분량으로 만들어져야 했을 프랭크 허버트의 대하SF소설 <사구>를 135분에 구겨넣은 것 자체가 실수였다. <사구>의 후반부는 보이스 오버에 의존하면서 성급히 사건들을 봉합시켜버린다. 스토리가 너무 방대하고 복잡해서 관객이 <사구>의 상황설정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제작사는 고심을 했다. 그중 하나는 ‘앨런 스미디’를 이용하는 것이다. <사구>의 DVD에는 ‘감독 앨런 스미디’로 나오는 또 하나의 프롤로그가 실려 있다. 이 프롤로그는 오로지 그림과 내레이션에만 의존하며 <사구>의 사건이 벌어지기 전 수백년 동안의 사건들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앨런 스미디판’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제작사는 데이비드 린치가 편집한 135분 버전으로 개봉했다. 그리고 극장에서 인물 설명서를 미리 배부하는 촌극을 저질렀다. 그뒤에는 50분 분량의 잡다한 장면들을 추가하여 190분 버전의 ‘스페셜 에디션’을 만들었지만, 데이비드 린치의 동의를 구하지 못해 결국 감독은 ‘앨런 스미디’가 되었다.

이처럼 제작사의 입김에 휘말려 일부 장면을 자르고, 암울한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꾸며 낙담했던 감독들에게 마지막 남은 부활의 기회가 바로 ‘디렉터스 컷’이었다. <블레이드 러너>는 가장 유명한 디렉터스 컷으로 꼽힌다. 지금은 흥행감독으로 변신했지만 한때는 ‘작가’로 평가받던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어둡고 모호하다는 이유로 전면적인 손질이 가해졌다.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꾸고, 주인공 데커드가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는 내레이션을 추가했다. 너무 불친절하다는 이유였다. 리들리 스콧의 ‘디렉터스 컷’은 내레이션을 지우고, 해피엔딩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임을 암시하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감독이 원한 것은 구체적인 설명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이었던 것이다.

너무 길고 우울하다는 이유로 2시간의 영웅담으로 바꿔버린 제작사와 기나긴 세월을 싸우다가 타협한 테리 길리엄의 <여인의 음모>는 11분을 잘라내고 131분으로 개봉되었다. ‘디렉터스 컷’에서는 삭제된 11분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디렉터스 컷’은 편집 자체를 뒤흔든다기보다는 자신이 원치 않았던 삭제 장면의 복원 정도가 가장 흔하게 이루어진다. 감독이 직접 잘라낸 경우도 마찬가지다. 뤽 베송은 <레옹>의 미국판을 편집하면서, 레옹과 마틸다의 사랑이야기 일부를 잘라냈다. 어린이에 대한 성적 표현이 금기시된 미국의 수위에 맞춘 것이다. <그랑블루> 역시 너무 길다는 이유로 미국 버전은 2시간 이내로 줄였다. 코믹한 에피소드들을 줄이고, 결말도 해피엔딩처럼 바꾸었다. 뤽 베송은 미국판에서 자른 장면들을 모두 살려내고 ‘디렉터스 컷’이란 이름을 붙였다.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는 거대한 해일이 세계 대도시들을 위협하는 장면 등을 추가하며 애초의 의도를 강화했다. <에이리언2>는 액션장면 등을 추가하는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감독판’을 보아도 감흥이 별다르지 않다. 이런 경우는 흔히 ‘스페셜 에디션’ 정도로 붙인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4, 5, 6편을 ‘스페셜 에디션’으로 내놓으면서 특수효과장면과 음향을 다시 처리했다. 스페셜 에디션이 특히 많아진 이유는 DVD 덕분이다.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통하여 화질과 음질을 개선하고, 일부 장면을 덧붙이면서 ‘스페셜 에디션’이란 이름으로 내놓는다. <엑소시스트>는 재개봉하면서 과거에 잘린 장면들을 추가했다. 감독이 직접 리마스터링 작업에 참여하고, 삭제된 장면을 추가했지만 ‘디렉터스 컷’이 아니라 ‘당신이 보지 못했던 버전’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는 감독이 다시 편집한 ‘디렉터스 컷’이지만, ‘원초적인 의미’로 되돌아갔다는 의미로 제목에 ‘리덕스’를 붙였다.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에 추가된 장면들은 감독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신화적인 느낌을 고양시켜 준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김봉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