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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민은 데뷔 이래 줄기차게 발칙했다. 기억에 남아 있는 가장 발칙한 짓은 전시장 앞에서 남자의 몸으로 원피스를 입고 솜사탕을 나눠주며 ‘peace!’를 외친 퍼포먼스다. 당시 그는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윗옷과 아랫도리를 벗어 던지고 원피스로 갈아입곤 했다.


 더위와 청바지에 지친 자신과 세계 평화를 위해서!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예쁘고 별난 아티스트 낸시 랭과 ‘낸시 랭 패션쇼’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기획한 인물이기도 하다. 2005년에는 <내셔널 플래그(National Flag)> 展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개인전을 열었는데, 극우주의자들의 돌팔매를 맞아 죽었을수도 있었다. “이놈, 감히 신성한 태극기를 훼손하다니!” 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태극기의 태극을 걷어내고 하트 태극을 그려 넣는 작태는 매국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태연자약하고도 해맑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예쁘지 않아요? 갖고 싶죠? 나는 더 많은 사람이 태극기를 좋아하면 좋겠어요.” 그런데 최근 그가 또 다른 발칙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게다가 이번에는 퍼포먼스도 전시도 아니다. “유니언이오. 협동조합, 팝 아트 협동조합.” 강영민이 글자마다 방점을 찍으며 말했다.



팝 아트 협동조합이라굽쇼?


우리가 아는 한 ‘조합’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우리에겐 농협이 있고, 프랑스에는 와인 양조업자 조합이 있다. 창고를 함께 쓰고, 올해는 어떤 작물의 어떤 품종을 심을지 함께 논의한다. 그렇다면 팝 아트 협동조합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은 모여서 도대체 무엇을 하나?



“제가 팝 아트 1세대잖아요. 낸시 랭이 중간 정도고. 2세대 작가들과 함께 일을 벌이고 있어요.”


지난해 10월에 처음 모여 그룹전을 열었다. 타이틀은 <해골전>. 핼로윈데이를 기념하자는. 1만원 옥션도 했고, <용전시>도 했고, 강연과 전시가 동시다발로 진행되는 <이것이 대중미술이다> 展은 광화문 한복판 세종문화회관에서 성황리에막을 올리고 박수와 찬사 속에 막을 내렸다. 여느 그룹전이 그렇듯 기획자가 아티스트들을 끌어 모아 벌인 전시가 아닌 팝 아트 협동조합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조합의 규모는 커지고 있다. 올여름 최대 블록버스터 영화<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2012년 여름을 동시에 기념하기 위해 기획된 <배트맨 다크 나이트 라이즈> 展에 참가한 작가는 81명이나 된다. 강영민과 낸시 랭을 포함해 애꾸눈 토끼 탈을 쓰고 애꾸눈 토끼의 환상 모험을 그리는 아티스트 더잭, ‘회사원에서 아티스트로’라는 기적의 아이콘 밥 장, 낸시 랭과는 또 다른 섹시함으로 무장한 미녀 작가 마리 킴등이 포함돼 있다. 이 조합은 듣도 보도 못한 스케줄로 전시를 기획하고 연다. 


“우리 모토가 ‘백화점 스케줄’이에요. 2월에는 밸런타인데이 기념전, 3월에는 신학기 전시회, 4월에는 만우절 전시, 5월에는 가정의 달과 어린이날을 위한 전시, 7월에는 바캉스 전시, 가을에는 추석전…. 이런 식이죠. 쉴 틈이 없어요.”


이 조합의 정체는 무엇인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진짜 오디너리 라이프(Ordinary Life) 있잖아요, 흔해 빠진 일상. 우리 누구나 겪는. 그걸 다루는 곳이 백화점이라 생각해요. 그건 곧 내 삶이 백화점 스케줄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 스케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일상을 어루만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팝 아트가. 일상 자체를 더 의미있게 하고 셀러브레이션하는 것, 그것이 팝 아트의 모토잖아요. 우린 그 정신을 실현하려는 거예요. 초심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초심으로 돌아가서 그들은 정말 재미있고 의미 있는일을 한다. <해골전>을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 <해골전>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은 좀 실망했다. 예술이 핼로윈데이를 기념해 축제를 연다는 점은 신선했지만, 해골이야말로 식상한 소재가 아닌가. 일찍이 데미안 허스트가 다이아몬드를 촘촘히 박아 넣은 해골을 선보였고,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매퀸의 해골 스카프가 동대문시장을 점령한 것도 벌써 몇 년전 일이니까.


‘뒷북’이 아닌가. 실망하기엔 이르다. 강영민과 일당들은 자신들의 첫 프로젝트에 기가 막힌 반전을 숨겨두었고, 그 반전은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우리 건 국산 해골이에요. 원효 대사의 해골. 해골이 패션코드가 된 지는 오래됐잖아요. 그런데 그건 모두 수입 해골이에요. 서양의 해골은 죽음을 의미하죠. 그런데 동양에서는 달라요. 원효 대사가 무슨 물을 마셨죠? 그래요,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에요. 해골이 바가지가 될 수 있다는 정서, 그게 우리 정서거든요. 이승과 저승이 불분명하다고요. 죽으면 인생 끝이 아니라 이승이 아니라 저승에 살 뿐이에요. 


‘음택’이라는 말 알아요?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여기서 ‘택’은 집을 의미하죠. 핼로윈데이를 맞아 이런 걸 한 번 생각해보자는 거죠. 


그게 예술의 할 일이거든요. 우린 팝 아트를 하니까 팝적인 애티튜드로 할 일을 하는 거죠.”


어떤가. ‘팝 아트 협동조합 만세!’를 외치고 싶어지지 않나? 이런 생각을 품고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조합이 더 많이 생긴다면, 그의 소원대로 우리의 일상은 즐거워질 게 분명하다. 향후 이들이 사회에 얼마나 즐거운 영향을 미칠지는 알수 없지만, 어쨌든 조합은 팝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즐겁게 자신들이 할 일을 해나가고 있다. 이를테면 전시 오프닝에 81명이 떼로 모여 단체 사진을 찍는다든지 하면서, 그렇게 진심 어린 셀러브레이션을 하면서.


하트 만국기가 세계 평화에 미치는 영향


강영민은 1세대 팝 아티스트다. 전 국민의 99%가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모르던 1990년대 중반 콧물로 풍선을 불어제치는 하트를 비롯한 ‘조는 하트’를 들고 데뷔해, 젊은 아티스트들을 위해 마련된 대안 공간에서 무럭무럭 자라났고, 어느덧 기성세대로 불려도 좋을 40대에 접어들었다.


기성 작가들이 갖게 되는 40대의 모습은 넷 중 하나다. 부자가 되거나 교수가 되거나 부자인 교수가 되거나, 불운한 경우에는 붓을 놓지도 쥐지도 못한 채 무력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강영민은 넷 중 어느 것도 아니며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2008년에 개인전 <사랑하면 진다>를 했어요. 메이저 화랑에서 하는 첫 번째 개인전이었죠. 잘됐어요. 소위 상업 화랑계에 진출한 거죠. 저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물론 그림값도 올랐어요. 그런데 그 안에 있다 보니 예전이 그리웠다고 할까요? 예술을 시작했을 때의 초심 있잖아요. 고흐를 좋아하고 앤디 워홀의 정신 나간 짓이 멋있어 보이고, 장욱진이 낮술 먹으면서 까마귀 떼 그리고 허수아비 그리고 숟가락 그리고 이런 것, 박수근이 그린 빨래터, 그런 게 좋아서 미술을 시작한 거지, 성공하려고 미술을 한 건 아니거든요. 그랬는데 미술계도 악다구니 세계가 되어 서로 뜨려고 서로 픽업되려고 악을 쓰고 빅 네임 좋아하고, 순수하지 않아요.그 세계 질서에 맞춰 사는 건 내겐 의미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조합은 2012년 현재의 강영민에게 세 끼 밥과 같은 존재다. 그는 2세대 작가들이 주는 자극을 섭취하고, 그 양분을 에너지 삼아 다음 일을 기획한다.


요즘 그는 하트 태극기에 이어 하트 만국기에 심취해 있다. 지난 2월 조합의 백화점 스케줄을 따라 밸런타인데이를 기념한 개인전에서 최초 공개된 하트 만국기는 깨물어주고 싶게 사랑스러운 하트가 새겨진 국기들의 집합체다.


“아, 이번엔 세계 평화예요. 만국기의 유래를 아세요? 처음만국기를 만든 건 일본 사람들이에요. 메이지 유신 후 일본사람들은 서양에 진출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파리만국박람회에도 나가게 됐죠. 거기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거예요. ‘아, 우리는 극동의 작은 나라인데 프랑스는 세계 각국을 자신들의 수도에 불러 모으는구나.’ 그래서 일본에 돌아와 종이로 만국기를 만들어 건물마다 달았어요. 그걸 보고 일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빙고! 세계 정복이에요. 일본 사람들은 조선에도 자신들의 만국기를 내걸었죠. 그런데 여기서 기막힌 반전이 일어나요. 조선 사람들은 만국기를 보면서 전혀 다른 꿈을 꾼 거예요. 바로 세계 평화.대단한 민족이죠?”


기억난다. 가을운동회 때 운동장에 걸린 만국기를 보고 가슴이 벅차오르던 일. 강영민에 의하면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개업하는 가게에 만국기를 내걸고, 주유소 지붕 아래 만국기를 펄럭이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만국기는 꿈을 꾸게 할 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실현하게 하는 대단히 긍정적인 평화 수호의 주체다. 강영민은 <만국기> 展 서문에 이렇게 썼다.


‘만국기가 걸린 길가의 윈도 갤러리를 지나치며 한 번쯤 생각해보면 된다. 중국집 배달원이 주유소에 걸린 만국기를 보며 세계 평화를 한 번 생각해보면 안 되나? 그럼 그는 배달을 보다 평화롭고 친절하게 할지도 모른다.’


지금 그는 세계 평화와 인류의 일상적 행복을 위해 자신을 최대한 귀찮게 하고 있다. 자신이 그린 만국기를 내걸기만 할 뿐 아니라 관람자에게 만국기를 그리게 하고, 하트 만국기 배지를 강매해 수익금을 기부한다.


지난 2월, 가회동 코너갤러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풍경. 5평 남짓한 갤러리 안에서는 만국기가 펄럭였고, 여러 명이 어느 나라인가의 국기를 품에 안고 셀카를 찍는 풍경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이 틈바구니에서 소녀와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태양 대신 하트가 있는 아르헨티나 국기를 그리던 모습은 또 얼마나 평화로웠는지. 강영민이라는 남자를 소개하는 마지막 신으로 “왜 이렇게 사느냐”에 대한 이 남자의 답변을 택했다.


“숟가락만 얹고 싶지는 않아요. 기승전결 중 ‘결’이 아니라‘기’에 서고 싶거든요. 그 자리에 서는 사람만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운 좋게도 우리는 당장 팝 아트 협동조합의 정체와 강영민이라는 아티스트의 진정성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팝아트 협동조합은 곧 월드비전과 함께 시청에서 기아 체험을 할 예정이며, 10월에는 다가 올 대선을 기념해 강남 한복판에서 ‘폴리티컬리 팝’을 주제로 한 전시와 퍼포먼스를 벌일것이고, 댄스 음악 같은 팝 아트에도 발라드처럼 촉촉한 정서와 블루노트 레이블 재즈 같은 심오한 음색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블루팝> 展을 연다. 그리고 이후에도 인류의 지루하고 흔해 빠진 ‘오디너리 라이프’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예정이다. 백화점 스케줄을 따라.


♣ 출처 : SK C&C 사보 ‘Create & Challenge’ 8월호 | 글 : 정이상(칼럼니스트) / 사진 : 손준석(노아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