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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프로’에 1546억 빌려준 제일저축 … 담보는 아가씨

18~23% 대출 알고보니 ‘눈먼 돈’

2009년 11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대형 유흥주점. 이른바 ‘텐프로’로 불리는 이 주점의 업주인 추모(50)씨는 여종업원 김모씨를 사무실로 불렀다. 추씨는 “업소를 키우려면 은행 대출을 받아야 한다”며 “마에킨(선불금)을 받았다는 가짜 서류 하나만 써달라”고 말했다. 업주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라는 생각에 김씨는 5억원을 빌렸다는 가짜 차용증에 사인했다. 업소 동료 중엔 8000만원을 빌렸는데 1억2000만원으로 부풀려 차용증을 써준 경우도 있었다.

 추씨는 자신의 친척과 지인의 명의까지 빌려 가짜 서류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2009년 11월부터 그가 조작한 서류는 300여 장에 달했다. 강남권에만 4개의 대형업소를 운영하는 추씨는 이 증서를 갖고 서울 가락동 제일저축은행 본점을 찾았다. 이 은행은 ‘마에킨 서류’만 있으면 대출을 해주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강남 유흥가 사이에선 ‘눈먼 돈의 집합소’로 통했다. 추씨는 가짜 서류를 담보로 총 197억원을 빌렸다. 대출이율이 18~23%인 ‘강남 유흥업소 대출 특화상품’을 통해서였다. 속칭 ‘아가씨 담보 대출’이었다.

 제일저축은행이 2009년 3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이 특화상품으로 대출을 해준 유흥주점은 73곳에 달했다. 주로 룸을 30~40개 두고 많게는 70명의 종업원을 고용한 대형업소였다. 총 대출금은 1546억원으로 담보가 된 여성종업원만 수백 명이었다. 은행 측은 현장실사나 재무상태 검증은 생략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업주들의 상환 능력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은 채 대출을 해줘 은행에 손해를 입힌 혐의(배임수재)로 제일저축은행 전무 유모(52)씨 등 임직원 8명을 입건했다. 업주 94명에 대해선 허위로 서류를 작성한 혐의(사기)로 입건했다. 경찰은 “잘 모르고 마에킨 서류를 써준 종업원들은 고스란히 자신의 빚이 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업주들은 대출받은 돈을 개인 빚을 갚는 데 쓰거나 새로 들어온 종업원들에게 선불금으로 빌려줬다. 경찰에 따르면 총 대출금 중 지금까지 업주들이 갚은 금액은 21%인 325억원에 불과했다. 30개 업소는 폐업했고, 입건된 업주 중 36명은 신용불량자였다. 경찰은 “은행장의 결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별도의 불법대출 사건으로 구속된 이용준(52) 행장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효은 기자 

◆마에킨(前金·선불금)=유흥업소 업주가 여종업원에게 고리의 이자로 빌려주는 돈을 뜻한다. 유흥가에선 ‘마이낑’으로 부르기도 한다. 종업원들은 이 돈을 갚을 수 없어 업소를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