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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바/ㅣ 2011. 7. 4. 15:19 Posted by 로드365
고흐 작품의 대중성을 활용한 재능기부 프로그램.
가능성 크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

 

네덜란드의 화가. 인상파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풍을 확립하였다. 작품에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등이 있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목사였다. 그의 어머니(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는 1857년에 그의 동생을 낳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 테오도루스라고 이름 지었다. 1864년 빈센트는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빈센트는 숙부가 운영하는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하여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당시 빈센트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1873년부터는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도 브뤼셀 지점 구필화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1873년 3월 빈센트는 헤이그를 떠나 구필화랑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영국에 머물렀으며 1875년부터는 파리지점에서 일하였다. 빈센트는 런던에서 부터 신비주의에 빠져 화랑일을 소홀히하였다. 빈센트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었으며 그는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하였다.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였던 빈센트는 파리를 떠나 영국 램스케이트로 건너갔다. 그는 매일 성경을 탐독하고 설교 활동을 하였으며 복음 전도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였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빈센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였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6개월간 평신도로서 전도활동만을 허가하였다. 빈센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며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 교회로 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0년 실의에 빠진 빈센트는 그동안 계속 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센트는 미술공부를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드로잉에 관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빈센트는 라파르트라는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 배웠다. 이후 빈센트의 외사촌이자 헤이그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빈센트는 그동안 열광했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사인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곤했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그에게 그림을 지도하던 안톤 모베와도 절교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크리스틴이라는 매춘부 출신의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콜 중독에 매독 환자였다. 빈센트의 가족은 그가 크리스틴과 지내는 것을 우려하였고 동생 테오는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하였다. 빈센트는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였지만 생활비를 줄이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그녀와 어린아이를 저버리게 되었다. 빈센트는 이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오랫동안 고통받게 되었다.


마침내 빈센트는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빈센트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 《해바라기》와 같은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장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빈센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빈센트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한때 건강회복으로 발작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다시 쇠약해져 끝내 권총자살을 하였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때로는 사파이어처럼 눈부시고, 때로는 뜨거운 태양열의 주조해 내는 금속과 크리스탈과 같은 구름이 있는 하늘 아래에서, 금과 다이아몬드, 진귀한 옥이 용광로에서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분출해 넘실거리며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가 있는 장엄한 빛의 효과 아래서 쉬지 않고 변화무쌍한 자연의 모습이 펼쳐진다. 그 모습은 한순간 완전하게 현실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이며 과장된 자연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존재, 사물, 그림자와 빛, 형태 그리고 색채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열광적인 의지와 함께 솟구쳐 오르다가 더욱더 강해지면서 가장 밀도가 강하고 불과 같이 고조되면서 소리 높여 자신의 본질을 노래하는 것이다. 싸움터의 거인처럼 꼬여 있는 나무들, 옹이가 위협적으로 보이는 가지들 그리고 녹색 갈기를 흔드는 불굴의 힘, 피처럼 끓어오르는 활력, 폭풍처럼 가혹한 자연에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편백나무는 악몽과도 같은 검은 색의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다. 산은 매머드, 무소의 등이나 활처럼 휘어져 있다. 백색과 금빛은 처녀의 이상적인 꿈처럼 보인다. 


집도 환희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생각하는 것처럼 격정적으로 일그러져 있다. 돌, 대지, 나뭇가지, 초원으로 덮여 있는 들판, 정원 그리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광천수가 스며 있는 강은 윤기가 나고 희미한 빛을 발하는가 하면 무지개 빛을 내기도 하면서 황홀감을 불러일으켜 준다. 나뭇잎은 고대청동, 말끔한 유리, 실유리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화단의 꽃도 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루비, 마노, 에메랄드, 광옥, 자수정으로 만든 것 같다. 만물이 우주적이고, 광기어리고 또 눈이 멀 것 같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모든 것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며 열광적으로 뒤틀리면서 격정의 정점에까지 올라간다. 그것은 악몽이 되어가고 있는 형상이다. 색채, 불길이 되고, 용암, 그리고 값비싼 돌이 되는 것이다. 빛은 큰 불로 변화된다. 삶은 열기가 된다. 이와 같은 느낌들이 같은 네덜란인으로 과거 오래 전의 거장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후손인 반 고흐의 낯설고, 격정적이며, 열광적인 작품을 처음으로 대했을 때 망막에 남아 있는 인상이다.


아!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는가? 과거 네덜란드의 그토록 건전하고, 훌륭하게 균형이 잡히고, 전통적인 위대한 작품과 얼마나 거리가 먼 작품들인가? 드 휴, 반 데르 미어, 반 데르 헤이덴의 작품들 그리고 조금은 부르주아적이며, 인내심을 가지고 세밀하게 그린 그림, 무기력하게 지나칠 정도로 마무리 작업에 공을 들이고, 섬세하게 정확성을 드러내는 그림들과 얼마나 거리감이 느껴지는가! 반 오르타데, 포터, 반 고엔, 루이스다엘 호베마의 그림처럼 절제되고,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오랜 시간 부드러운 색조, 요컨대 회색과 희미한 안개색조 등으로 보기 좋게 묘사한 그림들과 얼마나 거리감이 느껴지는가!


그러면서도 빈센트는 선배 화가처럼 오류를 용납하지 않고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간혹 발생하는 법칙에는 불복종했다. 


그는 뛰어난 동족과 같이 현실주의자,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에밀 졸라는 자연주의를 "성격을 통해 보여진 자연"이라고 정의했다.


그것이 "성격을 통해" 혹은 주관적인 통일성이 의문을 복잡하게 만들고 또 화가의 성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을 무색하게 만들면서 객관적인 다양성 속으로 스며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평론가는 기준을 설정함에 있어 조금은 가설적인 측면을 제기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 작품의 경우, 낯설다는 이유 때문에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려 가기도 하지만, 선입견에 젖어 있지 않고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빈센트의 작품 속에 스며 있는 순진할 정도로 깊은 진실성, 화가의 독특한 시각에 부정하거나 의문을 제가하기가 쉽지 않다. 훌륭한 믿음이라는 향기로운 품격, 그의 모든 그림에서 배어 나오는 독자적인 진실성, 주제의 선택, 가장 과도한 색조, 특징에 대한 한결 같은 연구, 사물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부단한 추구, 작가의 심오함과 어린아이와 같은 성실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의미심장한 세밀한 부분들, 자연과 진실에 대한 그의 위대한 사랑, 이 모든 것이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만이 지닌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반 고흐의 작품 자체에서 인간 아니 한 사람의 화가로서 지니고 있던 그의 개성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빈센트의 작품의 특성은 대체로 지나친 힘, 지나친 신경과민, 과격한 표현 등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물에 대해 내리는 맹목적인 단정, 종종 발견되는 과감하게 단순화된 형태, 태양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오만함, 스케치와 채색작업에서 볼 수 있는 격정적인 열정, 가장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강렬한 형상과 형태, 그것은 남성적이며, 과감하고, 매우 자주 야수성을 담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그지없이 섬세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특징들과 사물의 현실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빈센트 반 고흐의 깊고 복잡하며 또 확연하게 드러나는 예술성을 특징지어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모든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빈센트도 물질적인 현실, 그러한 현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더욱더 자주 그러한 현실이 지니고 있는 매혹적인 면이 사고의 형태를 바꾸어 주는 뛰어난 언어가 될 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상징주의자였기에 계속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확하고 무게가 있으며 만져서 지각할 수 있는 옷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거의 모든 캔버스에서 하나의 아이디어, 작품의 본질과 동시에 효과적인 마지막 근거를 발견할 수가 있다. 색채와 선으로 이어진 찬란하게 빛나는 교향곡, 화가들에게 그러한 것들이 작품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이든 간에 그것들은 단지 표현을 위한 수단이며 단순화하는 방법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연주의자의 예술 저변에 배어 있는 진정으로 이상적인 경향을 부정해 버린다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작품의 큰 부분은 전혀 이해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처럼 당당하고 수선스러우며 야성적일 정도로 빛나는 이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묘사할 수 있었겠는가?


빈센트는 항상 그들의 윤곽, 몸짓 그리고 그들의 힘든 일에 매혹당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석양 무렵의 불그스레한 하늘 아래서, 때로는 활활 타오르는 정오의 금빛 대지 한가운데 있는 그들의 모습을 쉼없이 그리게 했던 것이다. 우둔하고 산업지상주의에 젖어 있는 우리들의 속성이 망령처럼 그를 따라 다니며 괴롭혔던 고정관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의 <씨뿌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섬세하면서도 영광스런 태양신화와 연관된 이야기에 대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집착을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둥그런 태양, 그가 반복적으로 쉼 없이 편집광적으로 그려내던 화려한 해바라기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 강익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