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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쓰여진 글이라 지금과는 또 많이 다르겠지만 참고할 만 합니다.
지금은 아예 한국 에로영화 시장이 고사되어 버린 상황이라고 함.



나는 어떻게 에로 비디오 작가로 시작해 감독으로 활동하다 모바일 야설 아티스트가 되었는가
 
프롤로그

최소 오백만원 정도의 예산이 들어가는 에로 비디오를 한 편 만들어 대여점에 판매하면 대략 만원 정도가 남는다. 그렇다면 전국의 대여점에 팔려나가는 에로 비디오 테잎의 수는 몇 개나 될까? 정답 : 오백개 미만. 한마디로 안 하는게 남는 장사다. 실제로 대부분의 업체들은 이름만 걸어둔 채 개점 휴업 상태가 된 지 오래 됐고 몇몇 업체들은 모바일 야동, 야설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업종을 변경한 후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 대중 문화 최후의 서브컬쳐였던 에로 비디오 시장의 몰락은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되면서부터 급격하게 진행되어 갔고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일본 본토 메이저 포르노 제작사들의 양질의 컨텐츠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루트가 대중화된 지금 대여점용 에로 비디오 시장은 멸종했다고 봐도 좋다.
나는 에로 비디오 업계가 단군 이래 최전성기를 맞이한 후 불과 몇년 만에 다시 저물어가기 시작할 무렵 우연한 기회에 로망포르노의 야망을 품고 에로 비디오 업계에 뛰어들었다가 몇년 후 비디오 업계에서는 더 이상 일자리를 찾지 못해 현재 모바일 업체에서 프리랜서 신분으로 성인 정통 장르 문학을 집필하며 언더그라운드 서브 컬쳐 바닥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모바일 야설 아티스트이다.
 
 충무로 연출부를 그만둔 후 공모전만 기다리다 지쳐 에로 비디오 작가가 되다
나는 충무로 연출부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내 나이 20대 중반일 무렵 아는 선배의 소개로 충무로 메이저 영화사 소속의 극영화 연출부 자리를 소개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1960년대의 반문화적 교육을 받은 후 섹스, 마약, 로큰롤 영화를 만들어대던 뉴 아메리칸 씨네마에 경도되어 있던 터라 당연히 내가 몸담고 있던 충무로라는 곳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그러나 영화 감독이 되려면 연출부 한 편 정도는 해야 된다는 소문이 돌던 때라 꾹 참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 편을 별 탈 없이 끝냈다. 그렇게 내가 아무렇게나 찍어도 더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오만 불손하고 치기 어린 감정만을 마음 깊숙한 곳에 간직한 채 충무로를 떠났다.
그 때부터 오만불손했던 내 마음 속에는 로망포르노에 대한 동경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실 로망포르노 세계에 대한 동경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어떤 내용을 찍어도 상관없고 다만 베드신이 몇 개만 포함되어 있다면 무조건 오케이라는 조건이 있다는 사실은 60년대 뉴 아메리칸 씨네마를 꿈꾸고 있던 어린 영화학도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로망포르노 시스템이야 말로 멜로와 코메디만 판치고 있는, 문화적 다양성 없이 획일화된 한국 영화계를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 당시 유행이었던 씨네마 테크와 불법 비디오 대여점을 찾아 로망포르노를 찾기 위한 순례를 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사당동의 문화학교 서울과 홍대 앞에 위치했던 영화 공간 빛은 매니아들의 성지였고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았다는 10대 컬트 영화 리스트를 읊조리는 정성일 씨의 심야 음악 방송은 지금 이곳에 없는 다른 세상의 뭔가를 꿈꾸던 욕구 불만의 매니아들에게는 성경과도 같았다. 그랬다. 20대 초반의 나는 극장에서 하는 영화들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남들이 좋다는 영화들에는 침을 뱉고만 싶었던 질풍 노도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수오 마사유키 감독
로망포르노와의 만남은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찾아 왔다. 씨네버스라는 씨네마테크에서 수오 마사유키의 <변태 가족 그리고 형의 새색시> 란 작품이 상영된다는 소식을 그 당시만 해도 전복적이고 참신했던 영화 주간지 씨네21에서 보게 되었다. 요즘과는 달리 정성일 씨나 김홍준 씨가 외국에서 어떤 영화를 봤는데 죽인다고 하면 영화를 직접 볼 기회가 없던 매니아들은 별 수 없이 깜빡 죽어야 했던 그 시절에, 전설로만 떠돌고 있던 로망포르노의 걸작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건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변태 가족 그리고 형의 새색시>를 보러 씨네마테크로 달려 갔다.
 
<변태 가족 그리고 형의 새색시>가 상영되는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조금 과장해서 눈을 한번도 감지 않았던 것 같다.
항상 아카데믹한 신전에만 모셔져 있던 거장 오즈의 연출 스타일이 슬픈 색정에 달뜬 남녀의 에로틱한 베드씬에 처음부터 끝까지 줄창 패러디되어 있는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에로 영화는 단지 남자들 자위 보조 기구일 뿐이라는 기존의 편견과는 달리 영화는 감동적이었고 그 속에 바로 오즈의 세계를 능가하는 하드코어한 인생의 진리가 담겨져 있었다. 그 데카당스한 전복과 파괴의 정신이란...! 이런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온 가슴이 뿌듯했다. 그 때부터 로망 포르노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구로자와 기요시, 모리타 요시미츠 등 당시 씨네마테크의 인기 감독들이었던 일본의 80년대 자주 영화 세대들부터 멀게는 오시마 나기사라는 거장까지 다 로망포르노부터 영화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버린 후 그렇다면 나도 그런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쪽팔림을 무릅쓰고 한국의 로망포르노인 에로 비디오를 찾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한 말로 한국의 에로 비디오 세계는 일본의 걸작 로망포르노의 세계와 비교하기 곤란할 정도로 어이 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한국 씨네마테크까지 흘러 들어온 걸작 로망 포르노와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걸러지지 않은 범작 에로 비디오를 단순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설정이긴 하지만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쉽사리 에로 비디오 업계에 뛰어 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나는 영화의 이야기 부분을 빨리 보기 버튼을 눌러 대강 돌려 보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혁명적인 로망포르노를 시작해 보겠다고 했던 마음은 그렇게 젊은 날의 치기로 흐지부지 사라지고 있었다. 사람은 지금껏 살아 온 꼬락서니가 아무리 맘에 들지 않아도 그 익숙함에서 쉽게 벗어나거나 도망치기 힘든 법이다. 이 때문에 아무런 정보도 아는 사람도 없는 에로 비디오 업계에서 스스로 뭔가 시작해 볼 엄두는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야심찼던 프로젝트는 일단 포기하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충무로로 돌아가야겠다 결심하고서 장편 시나리오를 써서 이곳 저곳에다 언론사에 홍보 자료 돌리듯 복권 사 놓고 당첨되기 기다리는 심정으로 보내 보았다. 연출부 생활하며 내가 쓰면 저 거보다 훨씬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어이 없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여기 저기 보내면서 몇 달 후면 당연히 내 시나리오가 영화화 되겠지 라고 내 멋대로 생각하고 여유를 즐기고 있었는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 어느 회사에서도 연락은 오질 않았고 가끔 영화사에서 온 이메일을 들뜬 마음으로 열어보면 귀하의 시나리오는 우리 영화사의 컨셉과는 맞지 않네 어쩌네 하는 내용 뿐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젊은 치기로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시 쓰고 또 보내길 몇 번 반복했는데 역시 결과는 같았다. 내가 우습게 보던 충무로 코믹 멜로 상업 영화를 만드는 작가와 감독들이 존경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과거 습작들을 보면 쪽팔릴 뿐이지만 그 당시에는 충무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에 좌절해 한동안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중 영화 잡지 귀퉁이에서 에로 비디오 대본 공모전을 한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내 머릿 속에서는 <중경삼림>의 '캘리포니아 드림'이 BGM으로 울려 퍼지면서 편의점과 네온사인을 배경으로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양조위와 왕정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렇게 왕가위의 세계를 한국적 에로 비디오로 패러디해 보면 어떨까라는 영감이 떠오른 것이다. 당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키보드를 두들겨 대며 두 어시간 만에 에로 비디오 대본 한 편을 완성했다. 신사동 같은 번화가를 배경으로 청춘 남녀들이 색정으로 얽히는 이야기였는데 제목은 <신사동 이야기>였다.(출시 제목은 <그녀는 떠났다. 지중해로...>)
 

에로 비디오 작가 데뷔작 
<그녀는 떠났다. 지중해로...>
 
영화 배경이 신사동이었기 때문에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보낼 때도 일부러 신사동에 위치한 우편 취급소를 이용했던 기억이 난다. 몇 달 후, 나의 재능을 인정해 주지 않은 세상을 원망하며 늘 그렇듯이 낮잠을 자고 있던 어느 날, 난데없이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혹시 신사동 이야기 쓰신 작가분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안녕하세요. 저는 ㅇㅇㅇ 감독이라고 합니다.'
나의 에로 비디오 작가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