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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계, 이덕규

사/ㅜ 2011. 5. 20. 04:32 Posted by 로드365

 

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 본 적

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

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 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

며 걸어가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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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니,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이덕규 시집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의 自序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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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시 한편 읽고 울림을 느낀다.

오랜만이고 반갑다.

뭣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