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후미진 골목 여인숙 숙박계 막장에 나를 또박또박 적어넣어 본 적
이 있으신가?
밤새 오갈 데 없는 어린 눈송이들이 낮은 처마 끝을 맴돌다 뿌우연 창문에
달라붙어 가뭇가뭇 자지러지는
그 어느 외진 구석방에서 캐시밀론 이불을 덮어쓰고 또박또박 유서 쓰듯 일
기를 써본 적이 있으신가?
이른 아침 조으는 주인 몰래 숙박계 비고란을 찾아 ‘참 따뜻했네’ 또박또박
적어넣고
덜컹, 문을 열고 나서면 밤새도록 떠돌던 본적지 없는 눈송이들을 막다른
골목 끝으로 몰아가는 쇠바람 속
그 쓸리는 숫눈 위에 가볍게 목숨을 내려놓듯, 첫 발자국을 또박또박 찍으
며 걸어가본 적이 있으신가?
언젠가는 흔적도 없이 지워질 그 가뭇없는 기록들을.... 당신은 또박또박
-
시집『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니,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이덕규 시집 [다국적 구름 공장 안을 엿보다]의 自序 중에서
-
간만에 시 한편 읽고 울림을 느낀다.
오랜만이고 반갑다.
뭣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저녁.
'사 > 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지 잉크 (0) | 2013.02.18 |
---|---|
수원 토막살인 사건 (1) | 2012.08.09 |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 남부 뱀파이어 시리즈, 샬레인 해리스 (0) | 2011.08.02 |
슈퍼문 Super Moon, 전 세계 슈퍼문 풍경, 달은 가던 길 가는 것 뿐 (0) | 2011.06.22 |
슈구 (Shoe GOO) (0) | 2011.06.08 |
쉴드 - 쉴드치다. 한국사회 신조어 (0) | 2011.05.25 |
슈퍼카, 남자의 로망 (0) | 2011.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