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원칙과 소신이 굴절되어 다른 가치에 매달릴 때 사회는 정서적 공황상태에 빠질 수 있다. 시민사회 구성원들은 대개 새로운 환경에 영합하려 한다. 전망 부재와 회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칙과 신념은 다시금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신중함과 조심성으로 주저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개혁’이 신기루였음이 드러났음에도 <한겨레>에는 당파성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지율이 높게 나온 한나라당 대선 후보군을 비판적 평가 없이 크게 소개하는 한편, 이에 맞선 대항마로 진보를 내세우는 상상력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진보 정치세력에도 한계가 있지만, 한겨레에 민중지향의 상상력과 고민이 잘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상 민주화는 모두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었던 명료한 명분이었고, 민주세력에 대한 광범위한 신뢰와 개혁정권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현 정권의 실정이 가져온 민심 이반과 혼란은 과거 정권의 실패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 민주세력으로 불린 이들에 대한 신뢰와 기대의 반대급부가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차가운 여론은 그 파업 주체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노동환경 개선이 민주화라는 대의명분과 함께 했던 과거와 다르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오늘 진보와 개혁의 명확한 구분은 실질 민주화의 전제가 된다. 민중적 기대와 희망은 언제나 유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겨레의 당파성 부재는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 대선 당선에 관한 12월5일치 기사와 사설에서도 드러난다. ‘조중동’ 등이 그들의 당파성으로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중남미의 좌파정권 도미노 현상을 ‘포퓰리즘’ 운운하며 깎아내리는데 열심일 때, 한겨레는 가령 베네수엘라의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있는가? ‘차베스 승리의 빛과 그림자’라는 사설 제목이 시사하듯, 양비론적이거나 기계적 중립주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빈곤층 위주의 정책으로 빚어진 계급적 갈등으로 사회가 양분되고 …”라는 사설 내용은 베네수엘라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맹폭 아래, 예컨대 1989년에 빈곤층이 인구의 3분의 2, 그 중 극빈층이 30%에 이른 민중의 구체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러한 시각은 기사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어, “고유가로 생기는 수입을 투자보다 공공지출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은 경제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라거나, “1998년 1만7000여개였던 베네수엘라의 제조회사는 현재 8000여개에 불과하다”라는 내용의 <뉴욕 타임스> 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아래 이윤을 추구하는 제조회사가 줄어든 대신, 민주적, 자주적 운영방식, 생산수단의 공동소유, 잉여소득 평등 분배, 친환경적 개발 등을 원칙으로 하는 대안경제 체제와 소액금융 사업 아래 베네수엘라의 사회경제를 실현하는 협동조합의 수가 4만개(2003년 11월 현재)를 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한겨레는 <뉴욕 타임스> <비비시> <타임> 등 시장주의를 반영하는 구미 매체의 관점을 따름으로써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당파성의 부재가 학습의 부재를 불러왔고, 학습의 부재가 당파성의 부재를 가져온” 예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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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편집인칼럼] 한겨레, 사회동력에 소홀 /홍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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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잘 알다시피 우리 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기 어렵다. 애당초 노블레스 자체가 없는 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가당치도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에서 비롯되는 부채의식도 찾기 어렵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에게 가져야 하는 부채의식이 없는 터에, 생존하려고 힘겹게 소외노동을 하는 구성원들에 대한 부채의식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없고 부채의식도 찾기 어려운 땅에서 사회 연대란 토대 구축은 우물에서 숭늉을 구하는 격이다. ‘반공·방첩’ 구호가 사라진 대신 “기업하기 좋은 나라”란 구호가 나라 곳곳에서 나풀댄다.
과거 민주화 운동 경력을 무기삼아 ‘개혁’을 내걸고 집권한 세력이 권좌에 앉아 반민중적 행위를 거침없이 벌이는 것은 그들이 안으로부터도 밖으로부터도 견제받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과거 독재정권 시절 ‘정치 사형수’였던 철도공사 사장은 고속철 여승무원들을 거리로 내쫓는 일에서 거침이 없다. 그의 행위는 오히려 “민주화된 시대에 분신이라니 …”라는 언설과 코드가 맞기에 나중에 그에게 장관 자리 하나 얻게 해줄지 모른다.
오늘 ‘세금폭탄’이라는 말처럼 황당한 것 중의 하나가 ‘개혁진보세력’이라는 말이다. 개혁과 진보를 두루뭉술하게 한데 섞어 사용하는 것은 오늘의 집권세력에 가당치도 않게 ‘좌파’ 딱지를 붙인 수구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겨레>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자율적 인격체가 사라진 사회에서, 개혁과 진보를 ‘개혁진보’세력이라고 싸잡아 말하는 것은 내부 견제력이 작동하지 않는 자유주의 보수세력과 그것이 작동할 수 있는 진보세력을 싸잡아 말하는 것 이상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나 비정규직, 대추리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집권세력은 수구세력과 가깝지, 진보세력과는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여 있다.
기존 정치세력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이합집산에 따른 정치공학적 숫자놀음을 벌이고 있을 때, 진보적 사회 동력은 지금 거리에 나설 참이다. 오늘(22일) 전국에서 노동기본권 쟁취, 사회 양극화 해소,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를 내건 민중 총궐기대회가 열린다. 민주노총이 파업에 들어가고 전농도 동참한다. 전교조도 교원평가에 반대하는 연가투쟁에 나선다. 신자유주의에 맞선 사회동력이 총집결하는 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폭풍 전야라 할 21일, 그러나 이날치 한겨레에선 관련기사를 찾을 수 없다. 1면 머릿기사로 “이명박 왜 지지? 능력-경제 때문”은 나중으로 미루어도 상관없다.
과거 한겨레 기사 중에는 기사화되기까지 특별한 사연을 안고 있는 것도 있었고, 구성원의 고뇌와 결단이 필요한 기사도 있었다. 물론 오늘 상당한 정도의 민주화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위해 진보와 개혁의 구분을 더욱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온라인을 통한 신속하고 다양한 정보와 익명성으로 보호받는 언로의 출현, 시민사회 단체들의 활동과 더불어 오늘의 사회 구성원은 종이 신문에 만족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사회 동력의 움직임까지 소홀히 한다면 독자에게서 사회 변화를 위한 긴장을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한겨레에 열독률 저하 조짐이 있다면, 그것은 긴장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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