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를, 내가 그려낸 세계 그곳에 데려다 놓고 싶다”
“저는 독자에게 어떤 세계를 제시하고, 상상해 보라고 하고 싶지 않아요. 독자를 그 세계에 데려다가 앉혀 놓는 게 저의 목적이에요.”
작가 정유정씨(47·사진)가 쓰는 소설의 힘은 이런 직접성에서 비롯된 강한 이미지에서 나온다. 그는 힘껏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세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낸 뒤 독자의 코앞에 들이민다. 그래서 “재미 있다”, “진짜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작가로서 짜릿한 희열을 느낀다.
문단과 출판계에서는 올해 가장 활약이 기대되는 작가로 서슴없이 정씨를 꼽는다. 2011년 발표한 장편소설 <7년의 밤>의 후속작이 올 6월쯤 나오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삶의 은유다. 나의 관심은 결국 인간이고, 인간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막다른 상황을 만드는 게 나의 소설이다.” 정유정씨는 “아직 신인이니까 나의 역량을 확대하는 큰 이야기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 김기남 기자
교통사고로 소녀를 죽인 뒤 댐에 유기한 전직 야구선수와 딸의 복수를 꿈꾸는 잔혹한 의사 출신 아버지의 대결을 그린 <7년의 밤>은 25만부의 판매량을 기록한 동시에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허문 작품, 나아가 우리 소설의 미래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07년 41세의 늦깎이로 등단한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후속작인 <화양 28>(가제·은행나무) 역시 전작이 보여준 폭발적 에너지와 묵직한 주제의식을 담아낼 것으로 기대된다. 상황은 더욱 절박하고 위협적이다. 서울 인근 소도시 화양에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이 퍼지면서 도시가 봉쇄된다. 무자비한 동물 살처분이 이뤄지고 죽음을 목전에 둔 시민들의 탈출시도가 이어지면서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이 된다. 28일 동안 인구 29만명 중 26만명이 죽어나간 도시는 이후로도 6개월간 봉쇄된다.
“이번 작품은 규모가 더 커졌습니다. 전염병 확산이라는 기본 줄거리에다 주요 등장인물 6명의 이야기가 가지를 치게 되거든요. 제가 안 될 것 같은 일에 도전하는 걸 즐기는데 이 소설도 못 쓸 것 같지만 꼭 쓰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
소설을 착상한 건 전국을 휩쓴 구제역 사태를 접하면서다. 소와 돼지를 무자비하게 살처분하는 광경을 보고 “모든 생명은 나름대로 생존의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살처분 대상인 동물이 인간과 가장 가까운 개라면. 그 때부터 전염병, 방역, 의학 등의 자료조사를 시작했고 수의사, 119 구조대 팀장, 여기자, 간호사, 소방공익요원, 개 링고까지 시점 인물을 만들어갔다. 수의사와 119 구조대 팀장이 동물과 인간의 입장을 대변하는 투 톱이다. 소방공익요원이 살생을 즐기는 사이코패스란 점도 흥미롭다.
<화양 28>의 시놉시스는 <7년의 밤> 출간 직전인 2010년 말에 나왔고, 이듬해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 증도에 들어가 한달간 원고지 2500장의 초고를 썼다. 초고의 형태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탈고에 탈고를 거듭하는 그의 작업 스타일로 보면, 지난해 진도가 많이 나갔어야 한다. 그런데 등단 이후 처음으로 슬럼프가 찾아와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4개월간 지리산 암자에 들어가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스스로 정한 원고 마감 시한을 3개월여 남긴 현재, 소설은 4번째 탈고에 들어갔다. <7년의 밤>을 쓸 때 8번 뒤집은 것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었다. “초고는 수많은 소설과 드라마, 영화에서 보았던 줄거리가 무심코 튀어나온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는 그는 “고치고 또 고치는데 이야기가 크고 분량도 긴 이번 작품은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특히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서 수의학자인 우희종 서울대 교수에게 중간 점검과 감수를 받으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소설을 쓴다는 게 알래스카 설원에서 꽃삽을 들고 도시를 조성하는 것처럼 막막할 때가 있어요.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읽는 사람이 ‘에이~’하면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실패라고 봅니다. 책장을 덮을 때 ‘여기가 어디지?’란 느낌이 들 만큼 독자를 홀려놓는 소설을 쓰고 싶어요.”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나온 그는 2009년 세계문학상 수상작 <내 심장을 쏴라>, 2011년 <7년의 밤>, 올해 <화양 28>에 이르기까지 2년마다 꼬박꼬박 장편소설을 내왔다. 그런데 2000년부터 등단 이전까지 이미 3권의 장편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냥 책을 내면 될 줄 알았는데 전혀 주목받지 못한 채 묻혔다. 처음 두 권은 사소설에 가까웠고, 세 번째 작품부터 소설의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그만큼 오늘의 작가 정유정이 탄생하기까지 혹독한 수련과 무명의 세월이 존재했다. 전남 함평 출신인 그는 광주기독간호대학교를 나와 광주 보훈병원에서 중환자실 간호사로 5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9년간 일했다.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일과 살림을 병행하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다가 본격적으로 문학에 투신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뒤에도 6년간의 등단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지금도 광주에 사는 그는 꼭꼭 숨어서 작품에만 매진하고 싶어한다.
“소설 쓰는 게 너무 어렵고 전혀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앞으로 좀더 쉬워졌으면, 탈고를 덜 해도 됐으면 좋겠고요.(웃음) 많은 작품을 꾸준히 쓰면서도 ‘정유정 소설이라면 웬만큼은 된다’는 믿음을 독자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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