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를 있는 그대로 두라. 신념을 쫓는 '사람'으로.
알베르토 코르다라는 사진 작가가 있다. 요즘 시중에 나돌고 있는 그 유명한 체 게바라 포스터를 찍은 사람이다. 국내 일간지에 얼마전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 외신은 그의 항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을 요즘처럼 상품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체도 그것을 바라지 않고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후세에게 원래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거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백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육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백인 침략자들과의 일전을 각오하는 출전의식이 지금은 백인 관광객들의 박수와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치러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모습은 이런 사실을 반증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전부터 계속되는 체에 대한 갑작스런 주목과 열풍은 일종의 '붐'을 연상하게 한다. 한 인물을 기억하고자 애를 쓰는 이유는 단지 인물자체로서의 한 사람만을 기억하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그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맥락에서 과연 어떤 이유로 자신만의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역사와 후세에 어떤 영행과 결과를 남겼는지 우리는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 역사적 인물 기억하기의 가장 기본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체 게바라에 대한 우리세대의 기억하기는 과연 올바른 것일까.
*** 체 게바라는 어떤 사람인가?
체에 대한 평전도 이미 수차례 나왔고, 그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만 95년에 자신의 칼럼집을 통해 게바라를 그리워했던 정운영씨의 글을 통해 그를 알아보자.
"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건축가의 맏아들로 태어난 게바라는 비교적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다. 두 살때 발병한 천식이 그의 일생을 괴롭히지만 그는 운동과 여행을 아주 좋아했다.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그림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으나, 음악은 백지였다.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라고 부를만큼 시에 심취하여 로르카, 네루다. 베를렌, 보들레르를 암송하기도 했다.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알레르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와 전문의사 자격증을 받았다. ...(중략)...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용병대의 쿠데타로 (과테말라)정부가 무너지자, 그는 제국주의의 정체를 목격하고 "혁명적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혁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아무튼 아르벤스의 편에서 싸웠던 그는 반도들의 총구를 피해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뒷날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싸웠다"고 술회했다. 과테말라에서 탈출한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에서 운명의 동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이 무렵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쿠바의 망명동지들에 의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체'는 본래 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간투사인데, 그 어원은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라고 한다. 카스트로와의 첫 대면을 게바라는 이렇게 묘사했다. " 나는 밤새워 피델과 이야기했다. 그리고 새벽녘에 쿠바 원정대의 의사로 등록했다. 독재에 맞서 혁명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중략)...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를 출발한 82명의 대원 가운데 크리스마스까지 쿠바의 거점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집결한 사람은 15명 뿐이었다. 그중에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들어 있었다. 1959년 혁명군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하기까지 게바라는 의사로서 전사로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으며, 특히 그가 지휘한 산타 클라라 기지의 전투는 바티스타 독재를 전복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운영. -피사의 전망대- 부분 인용)
여기까지가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게바라의 대략적인 역정이다.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진다. 모든 혁명 일세대가 파괴와 전복의 과정을 통해 혁명을 시작하지만 새로운 건설의 과정에서의 혁명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되듯이 게릴라들도 혁명성공 이후 온갖 악전고투를 겪는다.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장관을 지내면서 고립무원의 쿠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게바라는 보장되어진(?) 명예와 안전을 버리고 다시 무기를 들었다.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싸워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전장을 찾아간다"는 요지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남긴 채로 말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제국주의와 정부군에 맞서 투쟁하던 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과의 교전 끝에 생포되어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미국의 지시에 의해 사살된다. 그를 체포한 볼리비아 장교가 생포 직전 총구를 겨누며 물었단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혁명의 불멸성에 대해 생각중이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자신이 쫓던 신념의 지극한 한 면을 생각할 줄 아는 그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목숨을 걸었던 일에 대해 마지막까지도 굳건한 믿음을 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 요란했던 쿠바의 체 유골 발굴과 카스트로에 대한 위험한 혐의
1997년 피델 카스트로는 두 번째로 게바라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해 나선다. 1995년 11월 볼리비아의 바예그란데 인근의 매장장소를 발굴하려던 실패에 이은 '체 게바라 찾기'의 노력이었다.
피델과 체의 끈끈하고도 아름다운 관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67년 사망한 체의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체의 유골을 발굴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필자는 여기에 추측 가능한 작고 위험한(?) 혐의 하나를 둘까 한다.
미국의 그칠줄 모르는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에 시달리고 있는 쿠바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는 일종의 연착륙 정책과 더불어 유화국면도 조성하기 하지만 쿠바에 대해서는 끈질기고 완강하게 적대적 노선을 보이고 있다. 아무래도 자기의 앞마당에 들어선 빨갱이 정권은 붕괴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카스트로 정권 붕괴를 위한 피그만 상륙작전에서 당한 망신과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 벌어진 이른바 '쿠바위기' 이후 갖게된 잠재적 위험요소에 대한 본능적 태도일 수 있다.
경제봉쇄는 쿠바인민들의 카스트로에 대한 존경과는 무관하게 에너지 위기 등으로 촉발된 생활상의 어려움과 난민들의 대규모 탈출사태를 수반하면서 일정한 불만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탁월한 게릴라 전투 지휘자이자 타고난 선동가이기도 한 카스트로가 이 사태를 넘어서기 위해 모든 혁명 1세대들이 강조하는 인민규합 방식인 '혁명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호소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북한에서도 늘 볼 수 있는 '유격대 정신으로!'라거나 '고난의 행군' 등의 구호는 늘 항일 빨치산 정신을 강조해 인민들을 단합시키려는 호소로 작용하고 있듯이 말이다.
카스트로의 생각이 어찌되었거나 "죽은 게바라가 산 카스트로를 돕는" 형국이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산타클라라에 안장되는 체를 기념하는 장례식 행사에는 수십만의 쿠바인민들이 모여들었고 카스트로는 다시한번 옛 동지를 상기시키며 '혁명정신으로 돌아가'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호소할 수 있었다.
*** "나는 누구인가?"
카스트로가 게바라 유해 발굴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추측에 이어 그 이후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의 체 게바라의 열풍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신념과 사상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지와는 무관하게 오늘날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그를 부활시키려는 '기획'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시각일까?
영웅이 없는 시대, 영웅이 아닌 게릴라이고자 했던 사람을 애써 기억하려는 것과 혁명이 없는 시대 혁명가이고자 한 사람에 대한 열광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68년 혁명과정에서 학생들은 체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그의 정신, 가치관 그리고 무엇보다도 뚜렸했던 실천적 삶을 이어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97년 쿠바에서 시작된 체에 대한 새로운 열광은 무엇이든 시장으로 끌어들이고 상품으로 만들어가려는 자본주의의 요구와도 맞닿는다.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은 쿠바에서 첫 사체발굴 작업을 들어간 직후 체의 사체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볼리비아 바예그란데 시장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 바예그란데 시장은 체의 나머지 사체가 매장되었다면, 이는 분명히 바예그란데 어느 근처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는 그의 묘지를 만들 생각'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그에 이어질 관광정책 계획을 말하기 전에 말이다. 그는 '체의 행로'같은 관광상품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수입으로 도시 간접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했으며, 재원은 이탈리아의 한 민간단체에서 지원받기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혁명가와 그의 행적을 상품화하겠다는 계획은 단지 거기에서만 끝났을까? 가령 자신의 음악을 기획할 때, 책을 출판할 때, 옷을 만들 때 체의 사진을 넣거나 그의 이름을 인용하는 행위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에서도 한 출판사가 마련한 체게바라 평전이 얼어붙은 출판시장을 무시하듯 엄청난 수요가 팔려나가고 그의 사진을 넣은 T-셔츠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과연 그가 끝까지 고집했던 '혁명가와 혁명'에 대한 존경과 추종의 의미일까. 영웅과 전설, 그것을 적절하게 포장하여 대중에게 접근하고 '혁명'을 주장하던 그의 위험한 사고와 지향에서 '뇌관'을 제거한 채 적절하게 신화화하는 오늘의 모습을 안다면 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답을 이렇게 찾아보자
게바라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의 변혁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고 압제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과 실천은 단지 소위 운동을 하거나 변혁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신은 이른바 청년정신이고 불굴의 도전정신으로도 보여질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불확실한 시장의 움직임과 조직의 정체에 '이윤과 생존'이라는 시달림에 고통받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체에서도 자신들의 피고용인들에게 이러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혁명의 불멸성에 대한' 사고만 거세해 낸다면 게바라의 이상과 삶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좁은 취업문을 통과할 수 있는 훌륭한 권장 덕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간파한 많은 장사꾼들이 그의 잘생긴 사진과 몇몇 일화를 중심으로 그를 상품화하는데 성공한 것이 아닐까
게바라와 카스트로 일행이 쿠바에 상륙한 이후 벌어진 교전중에 다급하게 퇴각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동료가 보급품을 버려두고 달아나자 게바라는 챙겨갈 것을 종용했다. 동료는 지금은 그것을 따질때가 아니라면서 외면했다. 게바라는 고민한다. 다 들고 갈수는 없다. 탄약상자와 의약품상자중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게바라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의약품이냐, 탄약이냐? 나는 누구인가? 의사인가, 혁명가인가? 나는 결국 탄약통을 짊어졌다."
위급한 순간에 던져진 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기필코는 혁명가이고자 했던 게바라는 자신의 존재이유였던 '혁명'이 사상된채 빚어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열풍에 비참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답은 과연 억측일까.
*** '체'를 '체'이게 놔두자.
때론 순진하고 때론 불같았던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는 포장된 그 무엇과는 달리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지극히 순진무구했다.
그의 일기와 그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끊임없는 도전의 자세는 어쩌면 그가 자기 내부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더한 극한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려는 일종의 반전행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자. 그를 영웅으로, 전설과 신화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게바라를 온전하게 기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전태일을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듯이, 우리의 숱한 열사가 전설이 아닌 투쟁과 전진의 살아있는 북소리로 부활할 때 단순한 '추모'를 넘어서는 '계승'을 통한 더 많은 전태일로 열사로 우리가 거듭나듯이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살다간 게바라에게도 같은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 지금,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체가 볼리비아 장교에게 마지막으로 했다던 말을 되새겨보자.
"게바라,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혁명의 불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그가 마지막까지 생각했던, 생명을 바쳐가며 온갖 지위와 명예와 부귀영화를 버려가며 부여잡고자 했던 그것이 무엇이던 그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이 모두 다 혁명의 불멸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듯한 지나치게 가볍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 말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갈 인생의 거시적 목표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게바라에게서 우리가 배워 지닐 것은 그의 사진이나 구호가 남겨진 티셔츠나 책 따위가 아니고 무언가 가슴에 품을 '세상과 나'를 규정할 화두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23세에 라틴아메리카를 횡단하며 민중의 삶을 보고 느꼈으며 26세에 과테말라에서 총을 들고 제국주의와 싸웠으며 스물 여덟살의 나이에 쿠바로 떠나는 혁명가들의 배에 몸을 싣고 서른한살이되던 59년에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서른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총을 손에서 놓지 않고 신념을 위해 싸웠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나이는 얼마인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죽을때까지 움켜쥐고 갈 무기와 신념은 무엇인가?
자! 볼리비아 장교가 당신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묻는다.
"당신은 이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체 게바라는 그 대답 속에 있다.
(동국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동국] 45호)
알베르토 코르다라는 사진 작가가 있다. 요즘 시중에 나돌고 있는 그 유명한 체 게바라 포스터를 찍은 사람이다. 국내 일간지에 얼마전에 실린 그의 인터뷰 기사 외신은 그의 항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사진을 요즘처럼 상품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체도 그것을 바라지 않고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후세에게 원래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거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백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육된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백인 침략자들과의 일전을 각오하는 출전의식이 지금은 백인 관광객들의 박수와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치러지고 있는 아이러니한 모습은 이런 사실을 반증하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전부터 계속되는 체에 대한 갑작스런 주목과 열풍은 일종의 '붐'을 연상하게 한다. 한 인물을 기억하고자 애를 쓰는 이유는 단지 인물자체로서의 한 사람만을 기억하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그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맥락에서 과연 어떤 이유로 자신만의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역사와 후세에 어떤 영행과 결과를 남겼는지 우리는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 역사적 인물 기억하기의 가장 기본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체 게바라에 대한 우리세대의 기억하기는 과연 올바른 것일까.
*** 체 게바라는 어떤 사람인가?
체에 대한 평전도 이미 수차례 나왔고, 그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만 95년에 자신의 칼럼집을 통해 게바라를 그리워했던 정운영씨의 글을 통해 그를 알아보자.
"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건축가의 맏아들로 태어난 게바라는 비교적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다. 두 살때 발병한 천식이 그의 일생을 괴롭히지만 그는 운동과 여행을 아주 좋아했다.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그림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으나, 음악은 백지였다.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라고 부를만큼 시에 심취하여 로르카, 네루다. 베를렌, 보들레르를 암송하기도 했다.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알레르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와 전문의사 자격증을 받았다. ...(중략)...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용병대의 쿠데타로 (과테말라)정부가 무너지자, 그는 제국주의의 정체를 목격하고 "혁명적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혁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아무튼 아르벤스의 편에서 싸웠던 그는 반도들의 총구를 피해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고, 뒷날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고, 쿠바에서 싸웠다"고 술회했다. 과테말라에서 탈출한 게바라는 1955년 멕시코에서 운명의 동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다. 이 무렵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쿠바의 망명동지들에 의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로 불리기 시작했다. '체'는 본래 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간투사인데, 그 어원은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라고 한다. 카스트로와의 첫 대면을 게바라는 이렇게 묘사했다. " 나는 밤새워 피델과 이야기했다. 그리고 새벽녘에 쿠바 원정대의 의사로 등록했다. 독재에 맞서 혁명에 참가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중략)...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를 출발한 82명의 대원 가운데 크리스마스까지 쿠바의 거점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집결한 사람은 15명 뿐이었다. 그중에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들어 있었다. 1959년 혁명군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하기까지 게바라는 의사로서 전사로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으며, 특히 그가 지휘한 산타 클라라 기지의 전투는 바티스타 독재를 전복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운영. -피사의 전망대- 부분 인용)
여기까지가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게바라의 대략적인 역정이다.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진다. 모든 혁명 일세대가 파괴와 전복의 과정을 통해 혁명을 시작하지만 새로운 건설의 과정에서의 혁명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되듯이 게릴라들도 혁명성공 이후 온갖 악전고투를 겪는다.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장관을 지내면서 고립무원의 쿠바 경제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게바라는 보장되어진(?) 명예와 안전을 버리고 다시 무기를 들었다.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싸워야 한다는 성스러운 임무를 안고 새로운 전장을 찾아간다"는 요지의 편지를 카스트로에게 남긴 채로 말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제국주의와 정부군에 맞서 투쟁하던 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과의 교전 끝에 생포되어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미국의 지시에 의해 사살된다. 그를 체포한 볼리비아 장교가 생포 직전 총구를 겨누며 물었단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혁명의 불멸성에 대해 생각중이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최후의 순간에 자신이 쫓던 신념의 지극한 한 면을 생각할 줄 아는 그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목숨을 걸었던 일에 대해 마지막까지도 굳건한 믿음을 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
*** 요란했던 쿠바의 체 유골 발굴과 카스트로에 대한 위험한 혐의
1997년 피델 카스트로는 두 번째로 게바라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해 나선다. 1995년 11월 볼리비아의 바예그란데 인근의 매장장소를 발굴하려던 실패에 이은 '체 게바라 찾기'의 노력이었다.
피델과 체의 끈끈하고도 아름다운 관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1967년 사망한 체의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체의 유골을 발굴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필자는 여기에 추측 가능한 작고 위험한(?) 혐의 하나를 둘까 한다.
미국의 그칠줄 모르는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에 시달리고 있는 쿠바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미국은 북한에 대하여는 일종의 연착륙 정책과 더불어 유화국면도 조성하기 하지만 쿠바에 대해서는 끈질기고 완강하게 적대적 노선을 보이고 있다. 아무래도 자기의 앞마당에 들어선 빨갱이 정권은 붕괴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카스트로 정권 붕괴를 위한 피그만 상륙작전에서 당한 망신과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는 문제를 두고 벌어진 이른바 '쿠바위기' 이후 갖게된 잠재적 위험요소에 대한 본능적 태도일 수 있다.
경제봉쇄는 쿠바인민들의 카스트로에 대한 존경과는 무관하게 에너지 위기 등으로 촉발된 생활상의 어려움과 난민들의 대규모 탈출사태를 수반하면서 일정한 불만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탁월한 게릴라 전투 지휘자이자 타고난 선동가이기도 한 카스트로가 이 사태를 넘어서기 위해 모든 혁명 1세대들이 강조하는 인민규합 방식인 '혁명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호소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북한에서도 늘 볼 수 있는 '유격대 정신으로!'라거나 '고난의 행군' 등의 구호는 늘 항일 빨치산 정신을 강조해 인민들을 단합시키려는 호소로 작용하고 있듯이 말이다.
카스트로의 생각이 어찌되었거나 "죽은 게바라가 산 카스트로를 돕는" 형국이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산타클라라에 안장되는 체를 기념하는 장례식 행사에는 수십만의 쿠바인민들이 모여들었고 카스트로는 다시한번 옛 동지를 상기시키며 '혁명정신으로 돌아가'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호소할 수 있었다.
*** "나는 누구인가?"
카스트로가 게바라 유해 발굴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추측에 이어 그 이후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의 체 게바라의 열풍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신념과 사상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지와는 무관하게 오늘날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그를 부활시키려는 '기획'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지나친 비판시각일까?
영웅이 없는 시대, 영웅이 아닌 게릴라이고자 했던 사람을 애써 기억하려는 것과 혁명이 없는 시대 혁명가이고자 한 사람에 대한 열광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68년 혁명과정에서 학생들은 체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그의 정신, 가치관 그리고 무엇보다도 뚜렸했던 실천적 삶을 이어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97년 쿠바에서 시작된 체에 대한 새로운 열광은 무엇이든 시장으로 끌어들이고 상품으로 만들어가려는 자본주의의 요구와도 맞닿는다. 프랑스 신문 <리베라시옹>은 쿠바에서 첫 사체발굴 작업을 들어간 직후 체의 사체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볼리비아 바예그란데 시장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 바예그란데 시장은 체의 나머지 사체가 매장되었다면, 이는 분명히 바예그란데 어느 근처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는 그의 묘지를 만들 생각'이라고도 말했다. 물론 그에 이어질 관광정책 계획을 말하기 전에 말이다. 그는 '체의 행로'같은 관광상품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수입으로 도시 간접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했으며, 재원은 이탈리아의 한 민간단체에서 지원받기로 되어 있다고 말했다."
혁명가와 그의 행적을 상품화하겠다는 계획은 단지 거기에서만 끝났을까? 가령 자신의 음악을 기획할 때, 책을 출판할 때, 옷을 만들 때 체의 사진을 넣거나 그의 이름을 인용하는 행위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에서도 한 출판사가 마련한 체게바라 평전이 얼어붙은 출판시장을 무시하듯 엄청난 수요가 팔려나가고 그의 사진을 넣은 T-셔츠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과연 그가 끝까지 고집했던 '혁명가와 혁명'에 대한 존경과 추종의 의미일까. 영웅과 전설, 그것을 적절하게 포장하여 대중에게 접근하고 '혁명'을 주장하던 그의 위험한 사고와 지향에서 '뇌관'을 제거한 채 적절하게 신화화하는 오늘의 모습을 안다면 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답을 이렇게 찾아보자
게바라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그의 변혁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고 압제에 대한 도전정신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과 실천은 단지 소위 운동을 하거나 변혁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만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정신은 이른바 청년정신이고 불굴의 도전정신으로도 보여질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불확실한 시장의 움직임과 조직의 정체에 '이윤과 생존'이라는 시달림에 고통받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체에서도 자신들의 피고용인들에게 이러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혁명의 불멸성에 대한' 사고만 거세해 낸다면 게바라의 이상과 삶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좁은 취업문을 통과할 수 있는 훌륭한 권장 덕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잘 간파한 많은 장사꾼들이 그의 잘생긴 사진과 몇몇 일화를 중심으로 그를 상품화하는데 성공한 것이 아닐까
게바라와 카스트로 일행이 쿠바에 상륙한 이후 벌어진 교전중에 다급하게 퇴각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동료가 보급품을 버려두고 달아나자 게바라는 챙겨갈 것을 종용했다. 동료는 지금은 그것을 따질때가 아니라면서 외면했다. 게바라는 고민한다. 다 들고 갈수는 없다. 탄약상자와 의약품상자중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게바라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의약품이냐, 탄약이냐? 나는 누구인가? 의사인가, 혁명가인가? 나는 결국 탄약통을 짊어졌다."
위급한 순간에 던져진 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기필코는 혁명가이고자 했던 게바라는 자신의 존재이유였던 '혁명'이 사상된채 빚어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열풍에 비참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라는 필자의 답은 과연 억측일까.
*** '체'를 '체'이게 놔두자.
때론 순진하고 때론 불같았던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는 포장된 그 무엇과는 달리 지극히 인간적이었고 지극히 순진무구했다.
그의 일기와 그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끊임없는 도전의 자세는 어쩌면 그가 자기 내부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더한 극한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려는 일종의 반전행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자. 그를 영웅으로, 전설과 신화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게바라를 온전하게 기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전태일을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듯이, 우리의 숱한 열사가 전설이 아닌 투쟁과 전진의 살아있는 북소리로 부활할 때 단순한 '추모'를 넘어서는 '계승'을 통한 더 많은 전태일로 열사로 우리가 거듭나듯이 머나먼 이국의 땅에서 살다간 게바라에게도 같은 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 지금,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소.
체가 볼리비아 장교에게 마지막으로 했다던 말을 되새겨보자.
"게바라,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소?"
"혁명의 불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중이오."
그가 마지막까지 생각했던, 생명을 바쳐가며 온갖 지위와 명예와 부귀영화를 버려가며 부여잡고자 했던 그것이 무엇이던 그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우리시대의 젊은이들이 모두 다 혁명의 불멸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듯한 지나치게 가볍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 말고,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니고 갈 인생의 거시적 목표하나쯤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게바라에게서 우리가 배워 지닐 것은 그의 사진이나 구호가 남겨진 티셔츠나 책 따위가 아니고 무언가 가슴에 품을 '세상과 나'를 규정할 화두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23세에 라틴아메리카를 횡단하며 민중의 삶을 보고 느꼈으며 26세에 과테말라에서 총을 들고 제국주의와 싸웠으며 스물 여덟살의 나이에 쿠바로 떠나는 혁명가들의 배에 몸을 싣고 서른한살이되던 59년에 쿠바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서른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총을 손에서 놓지 않고 신념을 위해 싸웠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나이는 얼마인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죽을때까지 움켜쥐고 갈 무기와 신념은 무엇인가?
자! 볼리비아 장교가 당신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묻는다.
"당신은 이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체 게바라는 그 대답 속에 있다.
(동국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동국] 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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