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프린세스
A PRINCESS OF MARS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즈 Edgar Rice Burroughs 지음
오 학영 옮김
―나의 아들 잭에게
□ 등장인물
존 카터 지구인. 버지니아 출신의 남군(南軍) 대위.
타르스 타르카스 화성의 녹색인. 서크 족의 둘째 우두머리.
데저 소리스 적색인. 헤리움 황제의 손녀.
소라 녹색인 시녀.
사르코쟈 녹색인. 음흉한 시녀.
타르 하쥬스 녹색인. 서크 족의 흉맹한 황제.
롤크워스 프토멜 녹색인. 서크 족의 왕.
타르도스 모르스 적색인. 헤리움의 황제.
모르스 카쟉 적색인. 소(小) 헤리움의 왕.
칸토스 칸 적색인. 헤리움의 군인.
다크 코바 녹색인. 흉폭한 와푼 족의 왕.
산 코시스 적색인. 조댕거의 황제.
사브 산 적색인. 조댕거의 왕자.
머리글 독자 여러분에게.
카터 대위의 세상에서도 희귀한 원고를 책으로 엮어 내놓으며 이 놀라운 인물에 대하여 두세 가지 진술하고자 하는데, 아마도 독자 여러분의 흥미를 돋우리라고 생각한다.
카터 대위를 회상할 때 맨 먼저 나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대위가 버지니아에 있는 나의 아버지 집에서 지내던 여러 달 동안의 일이다. 그때는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나는 그 즈음 겨우 5살의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내가 잭 아저씨라고 부르던 키가 크고 얼굴색이 거무스름하고 면도를 깨끗이 한 떡 벌어진 몸집의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대위는 늘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같은 나이의 남녀가 오락을 즐길 때와 다름없는 열성으로 아이들하고도 스스럼없이 터놓고 놀았으며, 그런가 하면 1시간 이상이나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나이 드신 우리 할머니에게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경험한 그의 야성적인 생활의 토막들을 이야기해 드리는 것이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대위를 사랑했고 노예들은 그가 밟았던 땅이라도 핥을 만큼 그를 받들었다.
대위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키는 넉넉히 1미터 90센티미터가 넘었고 넓은 어깨는 떡벌어져 있었으며, 허리는 날씬하고 단단하여 몸가짐이 과연 단련을 쌓은 군인다웠다. 용모는 이목이 수려하고 단정했으며, 머리털은 검은 색으로 짧게 깎아서 손질하고 있었다. 한편 눈은 강철같은 잿빛으로 불처럼 타올라 진취적인 기질이 풍부한 강한 성실성을 나타내고 있었다. 예절은 더할 나위 없어, 최상류 계급 남부 신사의 독특한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승마 솜씨, 특히 사냥개의 뒤를 쫓아갈 경우의 솜씨는 마술(馬術)에 능한 사람이 많은 곳으로 유명한 이 지방에서도 놀랄 만한 것이어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했다. 그의 지나친 용맹성에 대하여 이따금 나의 아버지가 주의를 주었으나, 그는 다만 웃으며 "내가 말에서 떨어져 죽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를 떨어뜨릴 만한 말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하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대위는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리고는 거의 십 오륙 년 동안이나 한 번도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 예고도 없이 훌쩍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대위가 전혀 늙지 않은 데 대하여 몹시 놀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여전히 붙임성 있고 명랑한 사람이었으나 혼자 있게 되면 생각에 잠기는 듯했고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듯, 그러면서도 하는 수 없다는 듯한 서글픈 표정을 짓고 언제까지나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늘 그런 식으로 꼼짝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었는데,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는 몇 년 뒤에 그의 원고를 읽을 때까지 알지 못했다.
대위는 전쟁이 끝난 뒤 애리조나에서 얼마 동안 광산을 시굴(試掘)하기도 하고 채광(採鑛)하기도 했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그 일이 굉장히 성공했다는 것은 그가 늘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실로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그 동안의 생활에 대하여 대위는 우리에게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사실 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려 들지 않았다.
약 1년쯤 대위는 우리와 함께 살다가 뉴욕에 나가 허드슨 강가에 아담한 저택을 샀다. 나는 1년에 한 번씩 뉴욕의 시장으로 출장을 갈 겸 그를 찾아갔다―그 무렵에 아버지와 나는 버지니아 주 일대에 잡화 연쇄점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카터 대위의 집은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산뜻한 작은 저택이었다. 1885년 겨울, 대위의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나는 그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집필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원고를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대위는 만일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재산을 관리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며, 서재에 있는 금고 속 칸막이의 열쇠를 나에게 주고, 그 안에 유서와 그밖의 개인적인 지시서가 들어 있으니 하나도 어김없이 충실히 이행해 주기 바란다고 나에게 맹세시켰다.
그날 밤, 그가 허드슨 강 위에 솟아 있는 낭떠러지 끝에 달빛을 받으며 서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을 나는 창으로 내다보았다. 기도를 하고 있나 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었다. 하긴 엄밀한 뜻에서 대위가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여러 달이 지난 다음, 아마도 1886년 3월 1일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로부터 빨리 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나는 그가 가까이 지내는 젊은이들 가운데서 가장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허겁지겁 달려갔다.
1886년 3월 4일 아침, 나는 그의 소유지에서 1마일 떨어진 작은 정거장에 닿았다. 그리고 삯마차꾼에게 카터 대위 댁으로 가자고 하자 그는 "혹시 당신은 대위와 가까운 분이 아니신가요. 그렇다면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위가 바로 그날 아침 동틀 무렵에 죽어 있는 것을 옆집 야경꾼이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 나는 이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의 유해를 인수하고 뒷처리를 하기 위해 급히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좁은 서재에는 대위를 발견한 야경꾼이 경찰서장이며 마을 사람 몇 명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야경꾼은 시체를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가 와 닿았을 때에는 아직 시체에 따뜻한 기운이 있었다고 한다.
대위는 두 팔을 절벽 끝을 향해 뻗치고 눈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고 야경꾼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장소가 지난번에 대위를 방문했을 때 밤마다 애원하듯이 두 팔을 하늘로 향해 뻗고 있던 그의 모습을 본 것과 같은 장소라는 것이 머리에 퍼뜩 떠올랐다.
유체(遺體)에는 다른 사람의 습격을 받은 흔적은 없었다. 그 고장 의사의 도움을 받아 검시 배심(檢屍陪審)은 죽은 원인이 심장마비라고 곧 결론을 내렸다. 서재에 혼자 남아 나는 금고를 열고 지시하는 말이 씌어 있는 서류가 들어 있다고 대위가 가르쳐 주었던 서랍을 열고 그것을 꺼냈다. 개중에는 매우 색다른 지시도 있긴 했으나, 나는 최후의 한 가지에 이르기까지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실행했다.
그는 유체에는 방부 조치를 하지 말고 버지니아에 옮겨 전부터 마련해 두었던 무덤 속의 뚜껑이 열려 있는 관 속에 눕혀 달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무덤은 충분히 통풍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 지시서를 읽고서 나는 사람의 눈을 피해야 할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대로 실행이 되도록 직접 감독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위의 재산은, 기본 재산이 나의 것이 되기까지의 25년 동안 불어나는 전체 수입이 나의 수중으로 들어오도록 지시되어 있었다. 또한 이 원고에 대하여는 발견되어진 때부터 11년 동안 개봉하지 말아야 하며, 그가 죽은 지 21년이 지날 때까지 그 내용을 누설해서도 안된다고 지시하고 있었다.
대위의 유해가 지금도 잠들고 있는 그 무덤에는 기이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두터운 문에 커다란 금 도금의 용수철 자물쇠가 하나 달려 있고 <내부에서만> 열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즈애리조나의 언덕에서
나는 꽤 나이를 많이 먹었다. 몇 살인지 나도 잘 모른다. 아마도 백 살일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더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만큼 늙지 않았다는 탓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혀 없는 탓이기도 하다. 기억하는 한에 있어서 나는 늘 어른, 그것도 30살쯤 된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40년 전의 생김새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대로 장차 영원히 살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며, 언젠가는 두번 다시 소생할 수 없는 채 죽으리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내가 어째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지난날 두 번이나 죽었었고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내가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여러분이 품고 있는 것과 같은 공포감을 품고 있으니 말이다. 나 자신 언젠가는 죽을 몸이라는 사실을 이토록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죽음에 대한 이러한 공포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확신 때문에 나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있어서의 흥미진진한 기간의 전말(顚末)을 기록해 두려고 결심했다. 이 이상한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힘겨운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낱 풍운아로서 붓을 들어, 나의 시체가 애리조나의 동굴 속에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던 그 10년 동안에 나의 신상에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여기에 기록하는 것뿐이다.
그 이야기는 여태껏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고, 또한 이 원고는 내가 영원히 잠든 뒤에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란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믿으려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대중이며 목사며 신문 등의 화제거리가 되어 허풍장이라는 말을 듣고 웃음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나로서는 언제인가는 과학에 의해 실증될 틀림없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내가 화성(火星)에서 얻은 교훈이나 여기에 적어서 알려 줄 수 있는 견문(見聞)이 지구의 자매 별의 수수께끼―여러분에게는 여전히 수수께끼이겠지만 나에게는 이미 수수께끼가 아니다―에 대하여 여러분의 이해를 빨리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고 싶다.
나는 존 카터. 버지니아의 잭 카터 대위로 통하고 있다. 남북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수십만 달러(남부)와 지금은 해산되고 없는 남군 기병대의 대위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인도 없고 돈도 없고 게다가 유일한 생계의 방편이었던 전쟁도 끝이 났으므로 나는 남서부에 진출하여 금광을 찾아 비운(非運)을 돌이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또 한 명의 남군 장교인 리치먼드의 제임스 K 파웰 대위와 함께 나는 광산을 시험 채굴하는 데 약 1년을 소비했다. 우리는 매우 열을 올렸다. 왜냐하면 겹치는 가난 속에 허덕이다가 1865년 겨울이 끝날 무렵에 우리는 꿈에만 그리던 순도 높은 황금을 함유하고 있는 석영(石英)의 광맥을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광산 기사로서의 교육을 받은 파웰은 앞으로 석 달 동안에 백만 달러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원광(原鑛)을 발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우리의 장비는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도회지로 나가서 필요한 기계를 구입하고 철저한 채굴을 하기에 충분한 일손을 모아 오기로 의논이 되었다.
파웰은 이 지방에 대한 식견도 있었고 채굴에 필요한 기계류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그가 가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이 일치하였다. 나는 금광을 찾아서 방랑하는 어느 누구인지도 모를 무리에게 만의 하나라도 빼앗기지 않도록 우리의 선유권(先有權)을 지키기로 했다.
1866년 3월 3일 파웰과 나는 식량이며 장비를 두 필의 당나귀에 실었다. 그는 작별을 한 다음 말에 올라타고 골짜기를 향하여 산허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골짜기를 건너가는 것이 이번 여행의 첫 도정(道程)이었다.
애리조나에서는 대개 매일 아침 그렇지만, 파웰이 출발한 아침도 맑게 갠 날씨였다. 파웰과 짐을 실은 당나귀가 산허리를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오전 동안에는 그들이 높은 언덕을 오를 때나 평평한 땅을 지날 때는 이따금 그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파웰이 골짜기의 맞은편 산그늘에 들어가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그리고 반시간 가량 지났을 무렵, 나는 언뜻 골짜기를 건너다보다가 아까 나의 친구와 두 필의 당나귀가 보이던 거의 같은 지점에 작은 점이 세 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본디 나는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성미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지나간 길에서 본 그 점은 영양(羚羊)이거나 아니면 야성의 말이지 파웰의 신변에 별다른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타이르려고 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 발을 들여놓은 뒤로, 우리는 적의를 품은 인디언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아주 무관심하게 되었고, 산길에 출몰하는 그 무자비한 무리의 손에 넘어간 백인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고문을 하며 즐기는 흉악한 살육자가 우글거린다는 이야기를 가볍게 웃어넘기게 되었던 것이다.
파웰이 충분한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더구나 그는 인디언과의 싸움에는 노련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북부 지방의 스우 족 틈에서 생활하며 그들과 싸운 경험이 있었으므로 뒤를 쫓아오는 교활한 아파치 일행에게 걸리면 파웰에게 승산이 희박함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근심 걱정으로 고민하며 그 이상 더 참을 수가 없어서 콜트 회전 권총 두 자루와 카빈 총 한 자루를 지니고 탄대(彈帶) 둘을 허리에 감고는 말에 올라 아침에 파웰이 가던 길을 더듬어 갔다.
비교적 평탄한 지면에 이르자 곧 말을 몰아 그 속도를 유지할 수 있는 데까지 달리게 했다. 그리고 땅거미가 질 무렵에 파웰의 발자국에 다른 발자국이 섞이어 있는 지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말굽을 박지 않은 세 필의 말이 재빠르게 달린 발자국이었다.
나는 급히 뒤따라갔다. 마침내 밤의 장막이 드리워졌으므로 달이 뜨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리며 나는 이렇게 추적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어느 신경질적인 할머니처럼 있지도 않은 위험을 공연히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아마도 파웰을 따라붙이고 나면 이런 지나친 걱정을 한 것을 함께 웃어 넘기게 되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주춤거리는 성미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되든 의무 관념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것이 나의 생애를 통한 일종의 맹목적인 신조였다. 뒷날 세 나라에서 갖가지 영예를 받았고, 유서 깊고 권력도 있는 황제며 작은 나라의 군주를 위해 여러 번 칼을 피로 물들이며 싸워서 훈장과 우정을 수여 받은 것도 모두 이런 이유였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9시쯤이 되어 겨우 달빛이 앞이 보일 만큼 밝아져서 전속력으로 달리며 뒤를 쫓아갈 수 있었다. 빠르게 달리기는 어렵지 않았으며, 한밤중에는 파웰이 캠프를 치고 있을 마른 웅덩이에 이르렀다. 나 자신도 예기치 않은 동안에 그 장소에 이르렀는데, 전혀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고 조금 전에 캠프를 친 듯한 흔적도 없었다.
뒤쫓아가고 있는 무리의 말 발자국은―지금은 틀림없이 그렇다고 나는 확신하고 있다―물가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잠시 멈추었을 뿐 죽 파웰과 같은 속도로 계속 뒤쫓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걱정이 되었다.
추적자가 아파치 족이라면, 파웰을 사로잡아 고문을 하며 짐승처럼 즐거움을 맛보려 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헛수고인 줄 알면서도 적동색(赤銅色)의 악한들이 그를 덮치기 전에 따라잡아야겠다고 말을 힘껏 몰았다.
그러자 갑자기 앞쪽에서 두 방의 총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이야말로 파웰은 나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나는 곧 말을 몰아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전속력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 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1마일 내지 그 이상을 달려갔을 무렵 고갯마루 언저리에서 앞이 내다보이는 자그마한 평지가 나타났다. 머리 위에 절벽이 튀어나온 좁은 고개를 내내 달려 올라오다가 이린 평지를 만났으므로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며 당황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평지에는 인디언의 천막이 하얗게 펼쳐 있었고, 거의 500명 가량이나 되는 인디언 전사(戰士)들이 진지 중앙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주의는 그 흥미의 초점에 못박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들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협곡의 어두운 그늘로 무사히 도망쳐 나오는 일도 쉽사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래도 굽히지 않고 나아갔더라면 나는 영웅이라고 불리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른 것은 다음날이 되어서였으므로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들 영웅이라고 불리어질 자격은 없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영웅적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자진해서 행동했기 때문에 몇 백 번이나 죽음과 맞닥뜨린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경우이건 그때부터 몇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그 자리에서 자기가 취한 행동을 대신하는 다른 수단이 머리에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머리를 써야 한다는 몹시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거의 무의식 속에서 의무감을 느껴 곧바로 돌진하게끔 머리의 구조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하고, 나는 내가 겁쟁이 하고는 인연이 먼 사나이라는 것을 후회해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이 경우, 물론 주의의 표적이 되어 있는 것은 확실히 파웰이었다. 생각과 행동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 광경이 눈 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지체없이 권총을 뽑아 계속 쏘아 대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전사들의 무리 한가운데로 향해 돌진해 갔다. 혼자 몸으로서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전법을 달리 생각할 수 없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얼이 빠진 인디언들은 적어도 1연대쯤 되는 병사가 습격해 오는 줄로 착각하고 산산이 흩어지며 활과 화살과 총을 가지러 뛰어갔던 것이다.
그들이 당황하며 흩어진 뒤에 드러난 광경을 보고 나의 가슴에는 불안과 노여움이 울컥 솟아올랐다. 애리조나의 맑고 밝은 달빛을 받으며 파웰은 누워 있었다. 몸에는 전사들의 적의가 가득찬 화살이 수없이 꽂혀 있었다. 그가 이미 숨을 거두고 있음을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일 가능하기만 했다면 재빠르게 행동하여 그를 죽음의 손으로부터 구출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다만 그의 유해가 아파치의 손에 걸려 갈기갈기 찢기기 전에 구출해 내는 길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바로 옆까지 말을 몰고 가서 안장 위에서 손을 뻗어 탄대를 붙잡고 안장 앞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지금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이대로 평지를 통과하는 것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자, 말에 박차를 가하여 평지의 맞은편 끝에 보이는 산길을 향해 달려갔다. 그 산길은 고개로 통해 있었다.
이때쯤 되어 인디언들은 내가 혼자임을 알고 일제히 저주의 말과 화살과 총알을 쏘아대며 뒤쫓아왔다. 다행히도 달빛 아래에서 정확하게 와 닿는 것은 저주의 말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밖의 것으로는 겨냥을 정확하게 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내가 전혀 예상 밖의 행동으로 나온 탓으로 그들은 당황했고 나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적의 갖가지 무서운 무기의 공격을 피해 뒤쫓아오는 무리들이 대열을 정돈하기 전에 주위에 있는 산그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말이 거의 제멋대로 가게 내버려두었다. 고개로 통하는 산길은 나보다 말이 아마도 더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안전한 골짜기와 통해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던 고개의 산길로 나가지 않고, 산맥 꼭대기로 통하는 좁은 길로 헤매어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목숨을 건진 것도, 그 뒤 10년 동안 멋진 체험을 하고 갖가지 모험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가 그 잘못 탓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뒤쫓아오던 야만인들의 환성이 나의 왼쪽 방향에서 갑자기 희미해지며 멀어져 가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그래서 그들이 평지 끝에 있는 거칠거칠한 암층(岩層)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말은 나와 파웰의 시체를 태우고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던 것이다.
아랫길과 왼쪽 방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조금 튀어나온 평지로 나오자 나는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멈추었다. 추적해 오던 야만인 무리가 옆 산의 산허리를 돌아 모습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지금쯤 인디언들은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발자국을 찾기만 하면 다시 이쪽으로 방향을 돌려 올 것이다.
그곳에서 조금 나아가자 가파른 절벽을 따라 멋진 산길이 뚫려 있었다. 평탄한 길로 상당히 폭도 넓고 오르막길로 되어 있었으며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뚫려 있었다. 절벽은 나의 오른쪽에 이삼 백 미터의 높이로 솟아 있었고, 한편 왼쪽에는 그것과 비슷한 절벽이 바위가 거친 골짜기 밑에서 거의 수직으로 솟아 있었다.
이 길을 백 미터 가량 더듬어 올라가자 길은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여들어 있었으며 앞쪽에 큰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동굴 입구의 높이는 악 1미터 20센티미터, 폭은 1미터가 조금 못되었고, 길은 여기서 그쳐 있었다.
그때쯤 새벽이 벌써 밝아 오고 있었다. 이것은 애리조나의 놀라운 특징인데, 동틀녘이라는 게 거의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침이 찾아오는 것이다.
말에서 내려온 나는 파웰을 땅에 눕혔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써도 그가 살아날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다문 죽은 사람의 입술 사이로 물을 억지로 흘려 넣고 얼굴에 물을 부어 씻어 준 다음 손을 부벼 주었다. 숨이 끊어진 것을 알면서도 1시간 이상이나 열심히 간호했다.
나는 파웰을 무척 좋아했었다. 모든 점으로 보아 참으로 사나이다운 사나이였고 세련된 남부의 신사,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였다. 나는 깊은 슬픔 속에서 그를 소생시켜 보려는 덧없는 노력을 마침내 포기했다.
바위 선반 위에 누워 있는 파웰의 유해를 그대로 두고, 나는 정찰을 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 안은 뜻밖에도 넓어서 폭이 30미터, 높이는 천장까지 12미터쯤이나 될 것 같았다. 바닥이 닳고 매끄러운 점이며 그밖의 많은 사실이 오랜 옛날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동굴 안쪽은 너무 어두워서 들여다보이지 않았고, 달리 또 방이 있어 그것과 통하고 있는지 어떤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살피고 있는 동안 졸음이 솔솔 온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먼 거리를 맹렬하게 달려온 피로와, 싸움과 쫓김으로 흥분했던 마음이 졸음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나는 이 동굴에 있는 한 비교적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설사 적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하더라도 이 동굴에 뚫려 있는 작은 길이라면 혼자서 대항해 나갈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졸음이 밀려와 동굴 바닥에 몸을 내던지고 잠시 쉬어야겠다는 강한 욕구를 이겨 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인디언의 손에 걸려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 습격해 올지 모른다. 간신히 나는 동굴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술에 취한 사람처럼 다리가 비틀거려서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며 쓰러지고 말았다.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다
물리칠 수 없는 졸음에 사로잡혀 근육이 풀리며 자고 싶다는 욕망에 막 몸을 내맡기려고 하는데, 다가오는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귀에 들려 왔다. 벌떡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나는 당황했다. 졸음은 깨끗이 달아났으나 몸이 마치 돌처럼 굳어져 근육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동굴 안에 증기가 엷게 자욱하다는 것을 알았다. 매우 희미하여 밖의 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는 입구 쪽을 보고서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와 함께 코를 쿡 찌르는 듯한 냄새가 났다. 일종의 유독 가스에 중독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으나, 지능은 여전히 살아 있으면서도 어째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나는 동굴 입구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곳으로부터는 동굴에서 낭떠러지가 휘어진 모퉁이까지의 짧은 거리의 산길이 보였다. 산길은 그 모퉁이를 돌아 낭떠러지를 따라 계속되어 있었다. 다가오던 말발굽 소리가 딱 멎었다. 인디언들은 나의 산송장이 누워 있는 동굴로 통하는 좁은 바위 선반을 몰래 기어오고 있을 것이다. 놈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나에게 심한 보복을 할 것이다.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몸이 오싹해지므로 차라리 놈들이 나를 재빠르게 처리해 주기를 바랐던 것을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기다릴 것도 없이 살살 다가오는 소리가 나서 그들이 가까이에 이르렀음을 알았고, 이어서 깃털 장식이 달린 인디언 모자가, 그리고 줄무늬로 칠한 얼굴이 낭떠러지의 모퉁이에서 조심스럽게 훌쩍 나오더니 잔인한 눈이 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른 아침의 태양이 동굴 입구를 비쳐 들어와 나의 몸을 비추고 있었으니 동굴의 희미한 빛 속에서 그의 눈에 틀림없이 띄었을 것이다.
그 사나이는 다가오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입을 떡 벌린 채 그저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다른 흉포한 얼굴이 나타났다. 이어서 세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이 차례 차례로 얼굴을 내밀었는데, 바위 선반이 좁아 다가올 수 없으므로 앞에 있는 놈의 어깨 너머로 목을 길게 뽑고 있었다. 어느 얼굴에나 놀라움과 공포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뒤 10년이 지난 뒤까지도 알지 못했다. 앞에 있는 놈이 작은 소리로 뭐라고 뒤에 있는 놈에게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또 다른 전사들이 그 녀석들 뒤에 있음이 분명했다.
그때 갑자기 낮긴 하나 뚜렷한 신음 소리가 나의 등 뒤에 있는 동굴 구석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 인디언들은 혼비백산하여 등을 돌리더니 허겁지겁 달아나고 말았다. 나의 등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데 정신이 빼앗겨 전사 한 사람은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하며 밑의 바위밭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동안 그들의 소란스러운 고함 소리가 메아리치더니 마침내 모든 것은 아까대로 조용해졌다.
그들에게 겁을 주었던 신음 소리는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의 등 뒤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하기에는 그 한 마디로도 충분했다. 공포감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표현이므로 그때의 나의 감정은 그 날까지 내가 위험한 입장에 놓여졌을 때 경험한 감정이나 그 뒤 위험을 만났을 때의 체험과 비교하여 비로소 측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 뒤의 몇 분 동안에 내가 견디어 낸 감정이 공포라는 것이라면, 신도 이 겁쟁이를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포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겁쟁이들이 받는 벌이기 때문이다.
한 무리의 늑대로부터 양 떼들이 정신없이 달아나듯이 흉맹한 아파치도 그 목소리를 듣기만 하고는 앞을 다투어 달아나 버렸다. 그토록 소름이 끼치는 듯한 알 수 없는 위험에 등을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건장한 육체에 넘쳐흐르는 모든 에네르기를 쏟아 가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에 익숙한 사나이에게 있어 그 이상의 공포는 없었을 것이다.
그 무엇인가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희미한 소리를 몇 번인가 등 뒤로부터 들은 듯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것조차도 조용해져서 그 뒤로는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할 수 있었다. 움직일 수 없게 된 원인에 대하여는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을 뿐, 다만 이렇게 되었을 때처럼 갑자기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동굴 앞에서 고삐를 늘어뜨린 채 우뚝 서 있던 나의 말은 오후가 이슥해지자 천천히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먹을 것과 물을 찾아서 갔을 것이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奇怪)한 <일행>과 친구의 시체와 함께 내버려진 것이다. 파웰의 시체는 오늘 아침 일찌기 내가 눕혀 놓은 바위 선반 위에 있었으며, 내가 있는 곳에서 잘 보였다.
그 뒤 한밤중으로 여겨지는 시간까지 온누리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죽음의 정적(靜寂)이라는 것이리라. 그러자 갑자기 오늘 아침에 들은 그 무서운 신음 소리가 다시 들려와 나는 깜짝 놀랐다. 또다시 어둠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소리, 가랑잎이 살며시 술렁이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 왔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고 있던 나의 신경으로서는 그것은 펄쩍 뛰어오를 만큼 큰 충격이었다. 나는 초인적인 힘을 쥐어짜며 이 무서운 포승을 뿌리치려고 했다. 힘이라고 하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으므로 근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의지의, 그리고 신경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렇긴 해도 참으로 굉장한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뭔가가 느슨해지는 듯하더니 그 순간 나는 구토증을 느꼈고, 강철의 줄이 끊어지는 듯한 둔한 소리가 나며 나는 동굴의 벽에 기대어 알 수 없는 적과 마주서 있었다.
그때 달빛이 동굴 안으로 가득 비쳐 들어왔다. 그러자 나의 눈앞에서 나의 몸이 여태껏 쓰러져 있던 대로의 모습으로 바깥의 바위 선반을 응시하며 손을 축 늘어뜨린 채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동굴 바닥의 그 빈 껍데기를 보고는 어리둥절하여 나 자신을 훑어보았다. 거기에 누워 있는 나는 옷을 입고 있는데 서 있는 나는 태어났을 때 그대로의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갑자기, 그리고 예기치 못했던 변화가 일어났으므로 한순간 나는 자신의 이상한 변신(變身) 이외의 일은 모두 잊고 말았다. 그럼,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맨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실제로 나는 영원히 저 세상에 온 것일까! 그러나 그런 일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여태껏 나를 얽어매고 있던 그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온 힘을 쥐어짰기 때문에 아직도 몹시 뛰고 있는 심장을 또렷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흡은 허덕이듯 빨랐고 식은땀이 온 몸의 털구멍에서 솟아나오고 있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흔히 그랬듯이 나는 내 손으로 살을 꼬집어 보았다. 그리하여 어쨌든 유령이 아닌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때 동굴 구석에서 그 기분 나쁜 신음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으므로 나는 순간적으로 눈앞에 닥친 사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실오라기 하나 감고 있지 않았고 또한 쇠붙이 하나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나를 위협하고 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과 대항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회전 권총은 나의 빈 껍데기가 차고 있었는데, 웬일인지 그것을 만지려고 해도 만질 수가 없었다. 카빈 총은 자루에 넣어 안장에 매달아 놓았었는데, 그 말이 어디로인지 가 버렸으니 나에게는 내 몸을 지킬 만한 방도가 없는 셈이다. 다만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동굴의 어둠 속에서 나에게 덮치려고 살며시 다가오는 듯한 기색을 나타낸 그것이 또 다시 바삭바삭하는 소리를 냈을 때 나의 결심은 섰다.
오직 이 무서운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는 재빠르게 입구를 빠져서 애리조나의 맑디맑은 별빛 아래로 뛰쳐나왔다. 동굴 밖의 상쾌하고 신선한 산 공기는 곧바로 강장제(强壯劑) 역할을 하여 새로운 생명과 용기가 온 몸에 넘쳐흐름을 느꼈다. 나는 바위 선반에 잠시 멈추어 서서 지금으로서는 아무 까닭도 없는 것같이 여겨지는 조금 전의 불안에 떨던 자신을 나무랐다. 동굴 속에서 무방비 상태로 몇 시간이나 누워 있었는데도 나에게 위험한 해를 끼친 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마침내 똑똑히 조리있게 생각하게 되자 그 소리는 단순한 자연의, 그것도 매우 하찮은 원인에서 일어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 동굴은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그런 소리가 나게끔 구조가 되어 있는 것이리라.
한번 조사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먼저 머리를 번쩍 쳐들고 신선하고 상쾌한 산의 밤 공기를 가슴 가득히 들이마셨다. 저 멀리 밑에는 바위투성이의 좁은 골짜기와 선인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평원의 아름다운 경치가 달빛을 받아 촉촉히 반짝이며 이상한 매력을 지니고 펼쳐져 있었다.
달빛에 비치는 애리조나의 아름다운 경치만큼 사람에게 생기를 돋우어 주는 것은 서부에 없을 것이다. 은빛으로 빛나는 저 멀리 펼쳐져 있는 산들, 둥근 언덕과 좁은 골짜기의 가느다란 흐름에 깃든 기묘한 빛과 그림자, 거칠면서도 아름다운 선인장 가지의 모양, 이러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해주는 동시에 또한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한 폭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멸망하여 잊혀졌던 딴 세상을 비로소 눈 앞에서 보는 듯, 이 지구상의 어떠한 경치와도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꼼짝하지 않고 명상에 잠겨 있다가 나는 주위의 경치에서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어 이 땅 위의 아름다운 경치에 어울리는 호화스러운 뚜껑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의 눈은 곧 저 멀리 지평선 끝에 있는 하나의 커다란 빨간 별에 못박혔다.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노라니 영혼을 빼앗기는 듯한 황홀한 상태로 이끌리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저것은 화성(火星), 전쟁의 신(마르스)이다. 나와 같은 군인에게 있어 저 별은 항상 물리치기 어려운 매력을 지닌 별이었다. 지나간 먼 옛날의 그날 밤, 내가 뚫어지게 바라보았을 때 저 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공간을 넘으며 나를 이끌어, 마치 자석(磁石)이 쇠조각을 빨아들이듯이 나의 마음을 유인했던 것이다.
그 별에 대한 나의 동경은 누를 수 없으리만큼 강해졌다. 나는 두 눈을 감고 나의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신에게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길도 없고 끝도 없는 공간으로 몸이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느꼈고, 순간 맹렬한 추위와 암흑이 밀려왔다.화성 도착
눈을 뜨자 낯선 기분 나쁜 풍경이 눈에 띄었다. 나는 자신이 화성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신이 돌았나, 아니면 정말 눈을 뜨고 있나 하는 의심은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자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새삼스럽게 꼬집어 볼 필요도 없다. 내가 화성에 있다는 사실을 잠재의식이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이것은 자신이 지구에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마음 속으로 알고 있는 것과 똑같다. 여러분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나는 노르스름한 이끼 같은 식물이 깔려 있는 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 식물은 나의 주위에 온통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보아하니 깊은 원형의 움푹 패인 땅에 누워 있는 듯했고 주위에는 낮은 언덕이 울퉁불퉁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대낮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어서 벌거벗은 몸에 따갑게 여겨졌다. 그러나 애리조나의 사막에서 같은 상태에 놓일 경우를 생각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이곳에는 석영을 함유한 바위가 조금 고개를 내밀고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왼쪽 약 백 미터 떨어진 곳에 1미터 20센티미터쯤 되는 낮은 벽에 에워싸인 장소가 있었다. 물은 없고 이 이끼 말고는 아무런 식물도 눈이 띄지 않았다. 목이 조금 말랐으므로 나는 탐험해 보기로 했다.
벌떡 일어나 보고 나는 화성에서의 첫 놀라움을 체험했다. 지구에서라면 땅 위에 일어설 수 있는 힘으로 나는 화성의 공중을 약 이삼 미터 높이까지 튀어 올라갔으며 그러면서도 몸에 아무런 충격도 느끼지 않고 살며시 땅 위로 내려설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시초로 그때도 매우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던 일련의 진기한 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걸음마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구에서는 문제없이 안전하게 걸을 수 있던 근육의 기능이 화성에서는 참으로 우스운 어릿광대의 춤을 추게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지 걸으려고 애를 써도 똑바로 나아갈 수 없고 다리가 자꾸만 공중에 떠서 한 걸음마다 땅에서 오륙 십 센티미터씩이나 뛰어올랐으며 두세 걸음 나아가다가는 그대로 큰 대자로 엎어지거나 엉덩방아를 찧는 것이었다. 지구의 중력에 완전히 익숙해 있던 근육이 화성의 보다 작은 중력과 보다 낮은 기압에 마주서게 되자 나에게 혼란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그래도 보아하니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유일한 표시인 어떤 낮은 건물이 눈에 띄었으므로 그곳을 살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보행(步行)의 기본적 원리로 돌아가자는 독자적인 계획이 머리에 떠올랐다. 즉 기어서 가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마침내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담장 옆에 이르렀다.
가까운 벽에는 창도 문도 없는 것 같았으나 벽 높이가 겨우 1미터 20센티미터쯤이었으므로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그 위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여태껏 본 일도 없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지붕은 두께가 약 10센티미터나 되는 든든한 유리로 되어 있었고 그 밑에는 둥글고 눈같이 흰 커다란 달걀이 수백 개 줄지어 있었다. 달걀의 크기는 대개 비슷했는데, 지름이 75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대여섯 개는 이미 부화(孵化)되어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모양의 것이 햇빛을 쬐며 눈을 껌벅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나는 나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동물은 거의가 머리로 되어 있었고 겨우 명색뿐인 동체(胴體)가 달려 있었다. 목은 길고 다리는 여섯 개―이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다리가 둘, 팔이 둘, 그리고 그 중간에서 마음대로 다리로도 쓰고 팔로도 쓸 수 있는 여분의 것이 두 개 달려 있었다. 눈은 머리의 양쪽으로 중심에서 약간 윗부분에 하나씩 달려 있었고, 제각기 따로따로 앞뒤를 볼 수 있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므로 이 괴상망측한 동물은 머리를 돌리지 않고도 어느 방향으로든지 볼 수 있고 또한 동시에 두 방향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귀는 눈 바로 위에 달려 있는데, 눈보다는 서로 가까이 자리잡고 있으며 크기도 작고 컵 같은 모양과 안테나가 머리에서 3센티미터 조금 못되게 나와 있었다. 코는 얼굴 한복판의 입과 귀의 중간에 세로줄이 나 있을 뿐이었다.
몸에는 털이 하나도 없고 굉장히 엷은 황록색을 띠고 있었다. 조금 뒤에 금방 알게 되었지만, 어른은 이 색보다 더욱 짙은 올리브색이었고 여성보다 남성이 더욱 짙었다. 그리고 어른의 머리는 갓난아기의 경우와는 달리 몸 전체로 보아 균형이 잡혀 있었다.
안구(眼球)의 홍채(虹彩)는 흰자위처럼 핏빛이었고 이것과는 반대로 동공(瞳孔)은 검은 빛이었다. 안구 자체는 새하얗고 이(齒)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무서운 형상(形相)인데 이라는 것이 더욱 흉측스러운 겉모습을 띠게 했다. 아래턱의 엄니는 위를 향해 구부러져 있었고 끝이 날카롭게 뾰족했으며, 지구인이라면 눈이 달려 있을 언저리까지 뻗어 있는 것이었다. 이의 흰빛은 상아와 같은 흰 색이 아니라 도자기처럼 새하얗게 반들거렸다. 올리브 빛의 짙은 피부빛 위에서 그 엄니는 한층 더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이 무기는 도저히 얕잡아 볼 수 없는 인상을 주었다.
이러한 자잘한 점은 나중에 알게 된 것들이었다. 나에게는 놀랄 만한 이 새로운 발견을 찬찬히 관찰할 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있는 달걀이 지금 부화하는 도중에 있음을 알았다. 나는 보기만 해도 끔찍한 괴물의 아기가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것을 정신없이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한 무리의 어른 화성인이 뒤에서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극지(極地)의 한랭 지대(寒冷地帶)와 여기지기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경작지를 빼고는 화성의 거의 모든 땅을 뒤덮고 있는 발소리가 나지 않는 부드러운 이끼 위를 걸어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를 쉽사리 붙잡을 수 있었겠지만, 정말 그보다 훨씬 사악한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장서 있던 전사가 입고 있는 장구(裝具)가 쩔그럭하고 소리를 냈기 때문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때 나의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으니, 그토록 쉽사리 달아날 수 있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들 우두머리의 안장 옆에 매달려 있던 총이 흔들리며 금속의 창 끝이 달린 길다란 장대에 닿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음의 신이 바로 옆에 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그만 소리에 나는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나의 가슴팍에서 3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번쩍번쩍 빛나는 창 끝이 달린 12미터나 되는 무시무시한 창의 끝이 있고 내가 여태껏 보고 있던 작은 도깨비들과 똑같은 녀석이 어떤 동물 위에 올라타 앉아 그 창을 옆에 끼고서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증오와 복수와 죽음의 무시무시한 화신(化身)에 비하면 아기들은 참으로 작고 가련하게 보였다. 그 남자―이렇게 부르는 것이 적당할지 어떨지 알 수 없으나―는 키가 넉넉히 3미터 반, 몸무게는 지구에서라면 아마도 180킬로그램은 될 것 같았다. 우리들이 말을 타는 것처럼 하지(下肢)로 동물의 몸통을 끼고 올라탔으며, 두 개의 오른팔로 긴 창을 동물의 옆구리에 대어 들고 있었다. 동물에게는 재갈이며 고삐 같은 것을 일체 물리지 않았고, 그 남자는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두 개의 왼팔을 옆으로 뻗고 있었다.
더구나 그 녀석이 타고 있는 동물이라니! 지구의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깨까지의 높이가 3미터나 되고 양 옆구리에 각각 다리가 4개씩. 위쪽보다도 끝이 퍼져 있는 폭넓은 넓적한 꼬리―달릴 때에는 이것을 뒤로 빳빳이 뻗친다. 그리고 코에서부터 길다랗고 늠름한 목에 이르기까지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 놓은 듯이 떡 벌어진 입.
올라타고 있는 녀석과 마찬가지로 그 동물에게도 털은 한 오라기도 없었고 거무스름한 회색 가죽은 매우 매끄럽고 번들거렸다. 배는 흰색이었고 어깨와 엉덩이의 회색이 다리 부분에서 차츰 변화하여 밭 끝에 이르러서는 화려한 노란 색이 되어 있었다. 발은 통통하게 살이 쪄 있고 발톱은 없었다. 다가올 때 발소리가 나지 않은 것도 이것이 한 까닭이었는데, 다리 수가 많은 것과 아울러 이것은 화성 동물의 특징으로 꼽힌다. 최고급 인종과 화성에 존재하는 유일한 포유동물만이 온전한 손톱과 발톱을 가지고 있을 뿐, 이곳에는 발굽을 가진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최초로 나에게 덮쳐 온 이 괴물의 뒤에는 모든 점에서 같은 종류로 보이는 19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가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이긴 해도 정확하게는 완전히 똑같은 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들도 하나 하나가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토록 길다랗게 늘어놓은 이 광경―이라기보다 오히려 현실로 되어 나타난 악몽은, 내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피가 얼어붙는 듯한 순간적인 인상으로서 뇌리에 새겨진 것들이었다.
나는 무기도 지니지 않은 알몸이었으므로 지금 이 급한 사태에 대처하려면 자연의 첫째 법칙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돌진해 오는 창 끝을 피하는 일이다. 결국 나는 매우 지구인다운, 그리고 동시에 초인적인 도약을 해치웠던 것이다. 나는 화성인의 부화기(孵化器)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건물의 지붕을 향해 뛰어올라갔던 것이다.
이 도약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화성인 전사들은 깜짝 놀라는 것 같았는데, 나 자신의 놀라움도 그것에 못지 않았다. 아무튼 이 도약으로 나의 몸은 공중으로 넉넉히 10미터는 떠올라 그들에게서 30미터 떨어진 울타리 저쪽에 서 있었으니까.
나는 부드러운 이끼에 가볍게 무사히 내려섰다. 뒤돌아보았더니 적은 저쪽 벽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어떤 자는 매우 놀란 표정―이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밖의 자는 내가 갓난아기에게 손을 대지 않는 데 대하여 분명히 마음을 놓은 것 같았다.
그들은 작은 소리로 서로 말을 주고받고 연방 몸짓을 해 가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내가 화성인의 갓난아기를 해치지 않았고 무기도 없는 것을 알았는지 아까보다는 덜 무서운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렇게 뛰어오를 수 있는 걸 보임으로써 나 자신을 구출했던 것이다.
화성인은 거대하고 골격도 컸으나 화성의 인력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근육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몸무게에 비해 지구인보다 덜 민첩했고 힘도 약했다. 만일 그들이 갑자기 지구에 끌려온다면 자기의 무게 때문에 일어설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아마도 일어설 수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때의 나의 비상한 재주는―지구에서 했다 해도 같은 결과를 초래했겠지만―화성에서도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나를 죽일 작정이었던 그들이 이번에는 갑자기 동료들에게 보여 줄 좋은 선물로 나를 붙잡아 가지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재빠른 행동을 했기 때문에 다음 계획을 노리는 전사들의 용모를 찬찬히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나로서는 바로 하루 전에 나를 뒤쫓아오던 인디언과 이 전사들을 마음 속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전사들이 긴 창 이외에 대여섯 종류의 무기를 각기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뛰어서 달아나지 않은 것은 얼핏 보기에 일종의 소총임을 알 수 있는 무기를 그들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들은 어쩐지 그것을 능란하게 다룰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소총은 하얀 금속 부분과 목제(木製)의 총대로 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나무는 매우 가볍고 딱딱한 나무로서 화성에서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는데, 우리 지구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총신의 금속은 알루미늄과 강철을 주로 하여 만든 합금(合金)으로, 지구인에게 낯익은 강철을 훨씬 능가하는 경도(硬度)에 이르기까지 단련하는 방법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소총은 비교적 가벼웠다. 그리고 소구경(小口徑)으로, 폭발력이 있는 라듐 총알을 사용했으며 총신이 굉장히 길다. 이러한 점에서 이 소총은 지구에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의 사정(射程) 거리를 가진 무서운 무기였던 것이다. 이론상 이 소총의 유효 사정 거리는 3백 마일(1마일은 약 1.6킬로미터)인데, 무선 탐지기와 조준기를 달아 실제로 사용하면 아마 2백 마일 정도일 것이다.
이 점만을 생각해도 화성인의 총기에 대하여 완전히 탄복하고 말았지만, 그때에는 어떤 정신 감응력(精神感應力) 같은 것이 작용하여 대낮에 이들 스무 자루의 무서운 총구를 뚫고 달아나야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단념시켰던 것이다.
잠시 동안 서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던 화성인들은 방향을 바꾸어 한 사람만 울타리 옆에 남겨 놓고 아까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2백 미터쯤 나아간 곳에서 멈추어 서서 기수(騎首)를 이쪽으로 돌리고 울타리 옆에 남아 있는 전사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그 사나이는 하마터면 나를 찔러 죽일 뻔했던 창의 주인으로서, 아마도 그 부대의 대장인 듯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의 명령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음이 틀림없으니까. 그들이 멈춰 서자 대장은 탈것에서 내려 창이며 작은 무기를 땅에 내던지고 완전한 맨주먹, 그리고 머리와 손발과 가슴에 장식물을 감았을 뿐인 나와 똑같은 알몸으로 부화기 저쪽에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약 15미터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는 커다란 금속제 팔찌를 풀어서 손바닥에 얹어 나에게 내밀며 맑고 잘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말을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듯이 말을 끊고 안테나 같은 귀를 세우며 기이하게 생긴 눈을 나에게로 한층 더 내밀었다.
잠시 침묵이 계속되어 마침내 숨막히는 순간에 이르렀다. 나는 상대가 화해하자는 뜻임을 알아차리고 이쪽에서도 대담하게 말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기를 집어던진 것이며 나에게로 다가오기 전에 부하들을 후퇴시킨 것은 지구상에서든 어디서든 평화 사절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화성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나는 왼쪽 가슴에 한 손을 얹고 그 화성인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한 다음 당신의 말은 알 수 없으나 당신의 행동은 모두 평화와 우호를 뜻하는 것이어서 현재의 나의 마음을 굉장히 감동시켰습니다, 라고 말했다. 물론 나의 연설은 상대방에게 있어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나 다를 바가 없었겠지만 내가 나타내는 태도를 그는 이해한 것 같았다.
나는 상대방 쪽으로 팔을 내밀고 앞으로 나아가 그의 손바닥에서 팔찌를 집어들어 팔뚝에 끼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미소를 던지며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커다란 입이 대답하듯 활짝 벌어졌고 그의 가운데 팔 하나가 나의 팔을 감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발길을 돌려 그의 탈것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그는 부하들에게 전진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이쪽으로 와아 밀려왔지만, 그는 몸짓으로 멈추게 했다. 아마도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하면 이번에는 어디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리지 않을까 하고 겁을 먹은 모양이다.
그는 부하들과 뭐라고 말을 주고받은 다음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뒤에 타라고 나에게 지시하고는 자기도 자기의 탈것에 올라탔다. 지명당한 전사는 손을 두세 개 내어밀어 나를 자기 뒤의 번쩍번쩍 빛나는 동물 등으로 끌어올렸다. 나는 화성인의 무기며 장식이 달려 있는 혁대와 끈을 붙잡고 열심히 매어달렸다.붙잡힌 몸
악 10마일쯤 나아갔을 무렵, 갑자기 오르막이 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화성인과 만난 장소는 먼 옛날에 말라 버린 화성의 바다 가운데 하나로, 지금 우리는 그 바다의 해안선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산기슭에 이르렀다. 그리고 좁은 협곡을 세로로 가로질러 드넓은 골짜기로 나왔다. 그 골짜기 끝에는 낮은 대지(垈地)가 있었고, 그 대지 위에 웅대한 도시가 서 있었다. 그곳을 향해 모두들 질주하여 황폐한 도로를 지나 도시로 들어갔다. 도로는 대지 끝에서 끊어졌고, 그곳에서 갑자기 폭넓은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며 자세히 관찰해 보고 건물에는 인기척이 없음을 알았다. 그다지 낡은 것은 아니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어쩌면 몇 세기 동안이나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듯 싶었다. 도시의 중심부 가까이에 드넓은 광장이 있고, 이 광장과 그 바로 주위의 건물에는 나를 붙잡은 녀석들―그들이 나에게 올가미를 씌운 방법은 매우 정중했으나 그래도 나는 붙잡힌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과 비슷한 생물이 9백 명에서 1천 명쯤 진을 치고 있었다.
장신구(裝身具)를 달고 있는 것 이외에는 모두 알몸이었다. 여성도 겉모양은 거의 남성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그저 키의 크기에 비해 엄니가 훨씬 크고, 개중에는 구부러진 엄니가 머리 위에 달려 있는 귀까지 뻗어 있는 자도 있었다. 남자보다도 몸집이 작고 피부색도 엷고 손발 끝에는 퇴화된 손톱의 흔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성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징이었다. 여자 어른의 키는 3미터에서 3미터 반쯤이었다.
아이들의 몸 빛깔은 여성보다 더욱 연하고 개중에는 키가 큰 아이도 있다는 것―아마도 나이가 좀 들었기 때문이겠지―말고는 나에게는 모두 똑같이 보였다.
몹시 늙은 자도 보이지 않았으며 약 40살의 성숙기에 이른 자로부터 천 살쯤에 이르기까지 외관상으로는 그다지 두드러지게 다른 데가 없었다. 천 살쯤 되면 그들은 자진하여 이스 강을 향하여 이상한 죽음의 순례(巡禮) 길을 떠난다. 이 이스 강은 어디를 향하여 흐르고 있는지 살아 있는 화성인은 아무도 모르며, 또한 그곳에서 돌아온 화성인도 없다. 일단 그 차갑고 어두운 강 위에 배를 띄운 자는 비록 돌아온다 해도 그냥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화성인 가운데 병으로 죽은 자는 천 명에 한 사람 정도이며 대개 20명쯤이 자발적으로 순례의 길을 떠난다. 나머지 979명은 결투나 수렵이나 비행이나 전쟁으로 죽는다. 그러나 사망률이 가장 높은 것은 뭐니뭐니해도 갓난아기 시절이며, 화성인의 많은 갓난아기들이 거대한 흰 원숭이의 밥이 되어 버린다.
어른이 된 화성인은 대체적으로 300년쯤 사는 것이 보통인데, 변사(變死)의 원인이 되는 갖가지 요소가 없다면 천 살 가까이 살 수 있다. 이 혹성(惑星)의 천연자원은 자꾸만 감소되어 가고 있으므로 의술의 발달에 의해 연장된 수명을 이제는 저하시키는 대책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화성에서는 인명을 경시하는 경향이 생겼고 그 결과 위험한 운동이 유행했으며, 각 부족간에는 거의 전쟁이 그칠 날 없게 되었다.
인구가 줄어드는 경향을 띠게 된 원인은 그밖에도 있었고, 또한 자연의 원인도 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경향을 가장 강하게 조장한 것은 화성인이 남녀를 막론하고 망국(亡國)의 무기를 자진하여 손에서 내놓으려 하지 않는 데 있었다.
광장에 다가가는 나의 모습이 눈이 띄자 순식간에 몇백 명이나 되는 화성인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그들은 호위병 뒤에 타고 있는 나를 끌어내리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것 같았다. 우두머리의 불호령으로 이 소동은 그쳤다. 우리는 광장을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러 여태껏 인간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건물 입구에 이르렀다.
그것은 낮은 건물이었으나 면적은 넓었고 금과 보석이 수없이 박힌 빛나는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서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정문은 폭이 35미터쯤으로 건물 자체에서 튀어나와 현관 위에서 거대한 뚜껑을 이루고 있었다. 계단은 없으나 건물의 이층으로 나아가는 비스듬한 경사면이 있고 회랑(回廊)에 둘러싸인 널따란 방과 이어져 있었다. 방 안에는 훌륭한 조각이 되어 있는 목제 의자며 책상이 놓여 있고, 사오십 명의 화성인 남자가 연단(演壇)에 오르는 층계를 에워싸고 있었다. 연단 위에는 금속제 장신구며 화려한 색깔의 깃털이며 보석을 교묘하게 박아 아름답게 꾸민 가죽 장식을 온 몸에 더덕더덕 매단 거대한 전사 한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그 어깨에는 새빨간 비단으로 선을 두른 흰 털가죽의 짧은 케이프를 걸치고 있었다.
이 집회와 넓은 방을 보고 내가 가장 기이하게 느낀 것은 이 화성인들의 덩치가 책상이며 책장이며 그밖의 가구 크기와 전혀 균형이 잡혀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들 가구는 나만한 인간에게 꼭 알맞았으므로 화성인의 큰 몸집으로서는 도저히 그 의자에 앉을 수 없을 것이고, 그 길다란 다리를 책상 밑에 쑤셔 넣을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화성에는 틀림없이 나를 사로잡은 이 그로테스크한 화성인 이외에도 거주자가 또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나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고색 창연한 사실은 이 건물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먼 옛날에 생존했다가 이미 오래 전에 멸망해 버린 잊혀진 다른 민족의 것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모두들은 건물 입구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대장의 신호로 나는 땅에 내려섰다. 그는 나하고 다시 팔짱을 끼고 나란히 알현실(謁見室)로 들어갔다. 화성인 우두머리와 만나는 데 대단한 예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나를 붙잡은 남자는 연단으로 성큼성큼 다가갔고, 다른 이들은 그가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켰다. 우두머리는 일어섰다. 그리고 우두머리가 나를 데리고 온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남자는 멈추어 서서 이 지배자의 칭호와 이름을 부르며 응답했다.
그때에는 이 예의도, 그들이 입에 올린 말도, 나로서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이것이 화성 녹색인의 관례(慣例)로 되어 있는 인사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른 나라 사람끼리여서 서로 통성명을 하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그들은 묵묵히 장식품을 교환하게 되어 있었다. 하긴 이것은 우호적인 교제를 할 경우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서로 총을 쏘거나 아니면 몸에 지니고 있던 다른 무기로 싸움을 하여 결말을 짓는 것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타르스 타르카스라는 남자로서 사실상 이 부족의 둘째 우두머리인데, 정치가이며 전사인 매우 유능한 남자였다. 그는 나를 붙잡은 일을 포함하여 이번 원정 중에 일어났던 일들을 짤막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우두머리는 나에게 상당히 장황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여기에 응답하여 영어로 지껄였으나 서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뚜렷이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내가 조금 미소짓자 그도 역시 미소짓는 것 같았다. 이 사실과 내가 타르스 타르카스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같은 현상이 일어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우리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미소짓는 능력―따라서 웃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유머 감각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화성인의 미소는 그저 겉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이 정말 웃으면 아무리 굳센 남자조차도 벌벌 떨릴 만큼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화성 녹색인의 유머 개념은 유머, 즉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자극물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개념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 이 괴상한 생물이 가장 크게 웃을 때는 숨이 넘어갈 듯한 동료의 고통을 볼 때이며, 그들 사이에 가장 흔한 오락의 가장 큰 즐거움은 교묘하고도 무서운 수단으로 포로를 죽이는 일이었다.
모여 있던 전사며 족장(族長)들은 나의 근육과 피부를 만져 보고 자세히 검사했다. 우두머리는 내가 뛰어오르는 것이 보고 싶었는지 따라오라는 신호를 하여 타르스 타르카스와 함께 광장으로 나갔다.
그런데 처음에 걸어 보려다가 실패하고 나서부터 나는 타르스 타르카스의 팔을 꼭 붙잡지 않고는 걸어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하는 수 없이 책상이며 의자 사이를 메뚜기 귀신 모양 뛰고 엎어지며 나아갔다. 이리하여 심한 타박상을 입은 끝에―화성인들은 굉장히 좋아했다―이번에는 기어서 나아가기로 했으나 이것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 나의 참담한 상태를 보고 가장 크게 웃었던 구름을 찌를 듯이 큰 남자가 나를 잡아 일으켰다.
그는 나를 거칠게 일으켜 세우더니 몸을 굽혀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야만스럽고 무례한 짓으로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취급을 받았을 경우 신사가 취하는 유일한 방법을 해치웠다. 즉 주먹을 휘둘러 상대방의 턱에다 정통으로 먹였던 것이다. 적은 황소처럼 풀썩 쓰러졌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자 나는 가까이에 있는 책상을 등지고 섰다. 한 무리가 와아 밀려와서 보복할 것을 예기했기 때문이다. 나는 불리한 조건 밑에서 목숨껏 용감하게 싸워야겠다고 각오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에 깜짝 놀라서 숨을 죽이고 있던 화성인들은 마침내 와아 웃음을 터뜨렸으며, 이어서 소나기 같은 박수를 쳤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그들의 습관에 익숙해졌을 때 나는 내가 그들의 칭찬을 받았음을 알았다. 그것은 그들이 좀처럼 겉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한 대 얻어맞은 남자는 그대로 뻗어 있었으나 동료들은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타르스 타르카스가 나에게 다가오며 팔 하나를 내밀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그 이상 아무런 지장 없이 광장으로 나아갔다. 물론 나는 모두가 이 광장으로 나온 이유를 몰랐으나, 금방 알게 되었다. 그들은 우선 <사크>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리고 타르스 타르카스가 여러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뛰어오르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 나에게 "사크!" 라고 말했다. 그들이 나에게 무엇을 시키고 싶은지 알았으므로 나는 몸을 다잡고 <사크>를 했다. 40미터는 충분히 넘을 만큼의 훌륭한 도약이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평형을 잃고 쓰러지는 일도 없이 사뿐히 내려섰다. 이어서 7미터에서 10미터의 가벼운 도약을 되풀이하며 몇몇 전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수백 명의 화성인들이 이 도약을 보았다. 다시 한 번 해 달라는 요구가 곧 나왔다. 그러나 배가 고팠고 목도 말랐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해 주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요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곧 판단했다. 그래서 <사크>라는 요구가 여러 번 되풀이되는 것을 무시하고 그들이 그럴 때마다 나는 입으로 손을 가져갔다가는 배를 부비는 몸짓을 했다.
타르스 타르카스와 우두머리가 두세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군중 속에 있던 젊은 여자 하나를 불러내어 뭔가 지시하고는 나에게 그녀를 따라가라고 신호했다. 나는 그녀가 내미는 팔을 붙잡고 둘이 함께 맨 끝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향해 광장을 가로질러 갔다.
피부색이 연한 나의 동행자는 키가 2미터 45센티미터쯤으로 이제 막 성숙기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키가 다 큰 것은 아니었다. 피부는 엷은 올리브 빛으로 보드랍고 반들반들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는 소라라는 이름으로, 타르스 타르카스의 종자(從者) 가운데 하나였다. 그녀는 광장을 향해 서 있는 건물 안의 어떤 넓은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바닥에 비단이며 털가죽이 깔려 있으므로 나는 화성인의 침실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커다란 창이 여러 개 있어서 방 안은 알맞게 밝았고 벽화며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형용할 수 없는 고풍스러운 맛이 방 안의 온갖 것에 감도는 듯했으므로 이러한 멋진 조형(造型)의 설계자며 건축가와 지금 이것들을 차지하고 있는 멋없는 짐승 같은 무리들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음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소라는 나에게 방 가운데쯤에 쌓아올린 비단 위에 앉으라고 몸짓으로 신호했다. 그리고 몸을 홱 돌리더니 옆방에 있는 자에게 퓨우 하고 기묘한 소리로 신호를 했다. 그녀의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여 나타난 화성의 새로운 도깨비를 보고 나는 다시 놀라게 되었다. 그놈은 10개의 짧은 다리로 어정어정 걸어오더니 유순한 강아지처럼 그녀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커다란 셰틀랜드 포니(셰틀랜드 군도 원산의 키가 1미터 정도 되는 작은 말)만 했는데, 턱에 길고 날카로운 엄니가 세 줄 있는 점을 빼고는 머리 모습이 개구리와 비슷하였다.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와
소라는 이 동물의 심술궂은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두세 마디 명령하고 나를 가리켰다. 그리고 방에서 나갔다. 이 보기만 해도 사나운 괴물이 나 같은 연한 살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혼자 있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겁낼 필요는 없었다. 괴물은 잠시 동안 나를 찬찬히 바라보더니 방을 가로질러 바깥의 큰길과 통해 있는 유일한 출구(出口)로 가서 문지방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화성의 파수 보는 개에게 감시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이 동물은 내가 녹색인의 포로가 되어 있는 동안 내내 방심하지 않고 나를 지켜 주어 두 번이나 나의 목숨을 구했고, 잠시도 제멋대로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소라가 없는 동안 나는 내가 갇혀 있는 방 안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벽화에 그려진 풍경은 희한한 것이었고 또한 굉장히 아름다왔다. 산, 강, 호수, 바다, 목초지, 나무와 꽃, 꾸불꾸불한 길, 햇빛이 내리쬐는 뜰―그것은 지구의 경치를 그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닮아 있었으나, 식물의 색깔이 다르다. 틀림없이 훌륭한 솜씨를 지닌 화가의 손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참으로 완벽한 기교가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건 동물이건 생물의 모습은 하나도 없었으며, 녹색인과는 다른 종족―아마도 소멸해 버렸으리라고 여겨지는 화성의 거주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이 그림으로서는 판단할 재간이 없었다.
화성에 온 뒤로 지금까지 맞닥뜨린 예사롭지 않은 사태에 그럴싸한 설명을 붙일 수 없을까 하고 공상이 떠오르는 대로 멋대로 억측을 하고 있는데 소라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내 옆의 바닥에 그것을 놓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나를 찬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먹을 것은 치즈만큼 딱딱한 덩어리였는데, 거의 아무 맛도 없었고, 마실 것은 동물성의 젖 같았다. 약간 시금떨떨하긴 해도 그다지 맛이 나쁘진 않았으며 차츰 꽤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젖은 동물의 젖이 아니라―화성에서는 포유동물은 한 종류밖에 없고 그것도 매우 수가 적다―거의 수분 없이 자라면서도 땅의 양분이며 공기 중의 습기며 태양 광선을 받아 많은 즙을 증류(蒸溜)하는 커다란 식물에서 채취한 것이었다. 이 종류의 식물 한 그루에서 하루에 8리터 내지 10리터의 즙을 채취할 수 있다고 한다.
다 먹고 나자 매우 기운을 차렸으나 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비단 이불 위에 길게 누워 마침내 잠이 들었다. 아마 여러 시간 잠들었던 모양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어둡고 몹시 추웠다. 누군가가 털가죽을 덮어 주는 기척이 느껴지고 그것이 조금 흘러내렸으나 어두워서 고쳐 덮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손이 그 털가죽을 다시 덮어 주고는 그 위에다 한 장 더 덮어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주의 깊게 돌보아 주는 것은 소라일 테지.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접촉한 모든 녹색 화성인 가운데 이 아가씨만이 동정과 친절과 애정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나를 빈틈없이 돌보아 주었고, 그녀가 진정으로 나를 위해 신경을 써 주었기 때문에 나는 많은 고통과 곤란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화성의 밤은 지독히 추웠다. 사실상 해질녘도 동틀녘도 없었으므로 낮이 순식간에 밤으로 변했고 기온의 변화도 급격하여 매우 불쾌했다. 화성의 밤은 대단히 밝거나 아니면 새까맣거나 어느 한쪽이었고, 두 개 있는 화성의 달이 아직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을 때에는 거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 되어 버린다. 공기가 없는 탓이라기보다는 공기가 극도로 희박한 탓으로 별빛이 광범위하게 비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달이 둘 다 하늘에 떠 있는 밤에는 지표(地表)가 휘황하게 비쳐지는 것이었다.
화성과 두 달의 간격은 우리 지구와 달의 간격보다 훨씬 가까웠다. 지구와 달의 간격이 약 25만 마일 떨어져 있는 데 비해, 화성에서는 가까운 쪽의 달은 불과 5천 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고, 먼 쪽의 달도 1만 4천 마일쯤 떨어져 있을 뿐이다. 가까운 쪽의 달은 화성 주위를 7시간 반 남짓하면 완전히 한 바퀴 돌므로 매일 밤 두 번 내지 세 번, 그때마다 달의 모든 면(面)을 보이며 거대한 유성처럼 하늘을 뚫고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먼 쪽의 달은 화성 주위를 30시간 15분 주기(週期)로 운행하며, 그 자매 위성과 함께 화성의 밤 경치를 장려(壯麗)하고도 기분 나쁘게 비쳐 준다. 자연이 그토록 우아하게 그리고 아낌없이 화성의 밤을 비쳐 주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다. 왜냐하면 녹색 화성인은 그다지 지능이 발달하지 못한 유목 민족이므로 인공적으로 조명을 만드는 데 있어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밖에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로 촛불 종류에 속하는 횃불과 가스가 발생하여 심지가 없어도 타는 매우 색다른 램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램프는 먼 곳까지 비치는 강렬한 하얀 광선을 내었다. 램프를 켜려면 거기에 필요한 천연유(天然油)를 채굴해 오는 수밖에 없는데, 그 장소는 먼 곳에 몇 군데밖에 없고 또한 서로가 각각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녹색인들은 좀처럼 램프를 쓰지 않는다. 그들은 손재간을 부리는 일을 싫어하므로 먼 옛날부터 여태껏 반미개(半未開)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소라가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난 뒤 나는 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같은 방에 사는 다섯 명은 다 여성으로, 모두 알록달록한 비단 헝겊이며 털가죽을 높이 쌓아올리고서 아직 잠들어 있었다. 문지방에는 그 불침번인 동물이 어제 그대로의 모습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분명히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다. 그 눈은 나에게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만일 내가 달아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모험을 찾아, 군자(君子)는 위험한 것에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말의 반대되는 행동을 해 왔다. 그래서 이 동물이 나에게 과연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좀더 확실한 방법은 방에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일단 건물 밖으로 나가면 뒤쫓아와도 달아날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나의 도약하는 힘에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리가 짧은 점으로 보아 이 동물이 뛰어오를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아마 달리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살며시 일어섰더니 웬걸 파수 보는 녀석도 같은 짓을 하지 않는가. 나는 발을 조금씩 질질 끌어 보았는데, 상당히 빨리 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균형도 잡을 수 있음을 알았으므로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옆에까지 갔더니 파수 보는 개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길을 비켜 지나가게 해주었다. 그리고 인기척이 없는 큰길을 걸어가는 나의 열 발자국 뒤쯤에서 따라왔다.
(아니, 저 녀석의 임무는 나를 지켜 주는 일뿐인 모양이로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도시의 변두리에 다다르자 파수 보는 개는 갑자기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보기 흉하고 사나온 엄니를 드러내며 내 앞으로 달려나왔다. 이 녀석을 놀려 주는 것도 재미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녀석을 향해 돌진하다가 거의 부딪치기 조금 전에 깡충 뛰어 올라 녀석을 훨씬 넘어 도시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녀석은 곧 방향을 바꾸어 여태껏 본 일도 없는 놀랄 만한 속도로 나를 향해 돌진해 왔다. 다리가 짧아서 빨리 달릴 수 없으리라고 얕잡아 보았는데, 그 속도는 이 녀석과 사냥개를 경주시킨다면 토끼와 거북이 이상의 차이가 날 만큼 빨랐다. 이것이 화성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임을 나는 나중에 알았고, 영리하고 충실하고 또한 잔인하기 때문에 수렵이며 전쟁에 사용되고 화성인의 호위를 하는 데 유능한 동물이었다.
곧바로 달아나다가는 이 동물의 엄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나는 금방 깨달았다. 그래서 그 녀석을 향해 다시 돌아오다가 거의 물리기 직전에 살짝 몸을 비켜서는 책략에 성공하여 나는 매우 유리하게 되어 파수 보는 개보다 훨씬 앞장서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쫓아오는 그 녀석을 뒤에 남긴 채 골짜기 위의 건물 정면에 있는 땅 위 약 10미터 되는 창으로 뛰어올라갔다.
창틀을 꼭 붙잡고 기어올라가 건물 안도 살펴보지 않고 그곳에 앉아 밑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파수 보는 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내가 기뻐한 것은 순식간이었고, 창틀에 제대로 앉을까말까하는데 커다란 한 손이 불쑥 등 뒤에서 뻗어나와 나의 목덜미를 붙잡고 방 안으로 난폭하게 끌어내렸다. 나는 방 안에 내동댕이쳐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올려다보았더니 머리 꼭대기에 한 줌의 굵은 털이 곤두서 있는 것 말고는 털이 한 오라기도 없는 새하얀 원숭이 같은 동물이 나를 덮치듯 서 있는 것이 아닌가.흰 원숭이와의 싸움
이 원숭이 같은 괴물은 여태껏 만났던 화성인보다도 더 지구인과 비슷했다. 거대한 한쪽 팔로 나를 바닥에 짓누르고 있던 이 녀석은 나의 등 뒤에 있는 한패에게 캑캑 소리를 지르며 몸짓으로 신호했다. 저쪽에 있는 녀석도 뭐라고 대답한다. 또 한 마리는 틀림없는 한패로 굉장히 큰 돌방망이를 메고 이쪽으로 왔다. 그 돌방망이로 나의 머리를 쳐부술 작정인 모양이다.
그들은 꼿꼿이 서면 키가 거의 3미터에서 4미터 반쯤 되는데, 녹색인과 마찬가지로 상지(上肢)와 하지(下肢) 중간에 또 한 쌍의 팔 또는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두 눈은 서로 붙었으나 튀어나와 있지는 않았다. 귀는 위쪽에 달려 있으나 녹색인보다 옆에 붙어 있고 콧등이며 이는 아프리카의 고릴라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요컨대 녹색인과 비교하여 특별히 보기 흉하다고는 할 수 없는 맹수였다.
돌방망이가 나의 위로 향하고 있는 얼굴을 향해 막 내리쳐지려는 순간 다리의 수가 엄청나게 많은 괴물이 출입구에서 번개처럼 달려오더니 나의 사형 집행인의 가슴팍으로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나를 누르고 있던 원숭이는 공포와 비명을 지르며 열린 창으로 튀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한패는 나의 생명의 은인과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생명의 은인이란 다름 아닌 나의 충실한 파수 보는 개였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괴물을 도무지 개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재빠르게 일어나 벽에다 등을 기대고 서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격투를 목격했다. 지구의 인간이 아는 한에 있어서, 이 두 동물의 강함과 민첩함과 지칠 줄 모르는 광포성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나의 파수 보는 개는, 처음에는 그 강력한 엄니로 상대방의 가슴팍 깊숙이 물고 늘어져 우세했다. 그러나 상대방 원숭이는 녹색인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강한 근육의 굵은 팔과 손발로 호위병의 목을 움켜쥐고 서서히 죄어서 머리와 몸을 활처럼 등 쪽으로 힘껏 휘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내 호위병의 목이 뚝 부러지고 축 늘어지는 것처럼 여겨졌다.
원숭이의 가슴에는 파수 보는 개의 강력한 턱이 도르래처럼 파고 들어가 있었으므로 상대방의 목을 꺾으려면 가슴의 살점이 뜯기어 나갈 우려가 있었다. 두 마리는 마루 위를 이리저리 뒹굴었으나 어느 쪽도 공포의 소리나 고통의 신음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마침내 나의 호위병의 커다란 두 눈이 눈구멍에서 완전히 튀어나왔고 콧구멍에서 피가 확 뿜어져 나왔다. 그의 힘이 차츰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옆에서 보아도 뚜렷이 알 수 있었는데, 원숭이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몸부림치는 힘이 서서히 약해지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는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그 강력하고도 이상한 본능에 사로잡혀 이 격투가 시작될 때 바닥에 떨어졌던 돌방망이를 집어들고는 있는 힘을 다하여 원숭이의 머리 위에 똑바로 내리침으로써 달걀 껍질을 부수듯이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새로운 위험에 맞닥뜨렸다. 한패인 또 한 마리의 원숭이가 조금 전의 공포의 충격에서 벗어나 건물 안을 지나 이 싸움 현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그 녀석의 모습이 출입구에 이르기 직전에 얼핏 보였다. 지금 한패가 숨이 끊어진 채 마루 위에 길게 뻗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원숭이는 울부짖고 미친 듯이 뛰며 입에서 거품을 내뿜었다. 그것을 보고 솔직히 말하여 나는 무서운 예감이 가슴 가득히 퍼져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경우가 아닌 이상 용감하게 싸우는 것을 떳떳하게 생각하지만, 이 경우 나의 초라한 힘을 쥐어짜서 이 미지의 세계에 사는 미친 듯이 날뛰는 괴물의 강철같은 근육이며 귀신같은 광포성(狂暴性)에 대항한들 명예스럽지도 못하고 이롭지도 못하다. 실제로 이대로 싸운들 눈 깜짝할 사이에 죽임을 당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나는 창가에 서 있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괴물이 미처 따라오기 전에 무사히 광장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달아나는 것이 적어도 살아날 가능성이 많다. 그와는 반대로 여기 머물러 있으면 아무리 있는 힘을 쥐어짜서 싸워도 아마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돌방망이는 가지고 있었지만 상대방의 굵은 네 팔에 대항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최초의 일격으로 팔 하나를 부러뜨렸다 하더라도―상대방이 돌방망이를 피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서의 이야기지만―내가 두 번째의 공세를 취하기 전에 나머지 팔을 뻗어 나를 깨끗이 처치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으므로 나는 창문 쪽으로 가려고 몸을 홱 돌렸다. 그러나 나의 파수 보는 개의 모습이 눈에 띄자 달아나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도와 달라고 애원하듯이 커다란 눈으로 나를 지켜보며 마루 위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었고, 생각해 보면 그가 나를 위해 해주었듯이 나도 그를 위해 힘 있는 데까지 싸우지도 않고서 생명의 은인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날뛰는 숫원숭이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주저없이 몸의 방향을 돌렸다. 돌방망이를 효과적으로 휘두르기에는 상대방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있으므로 다가오는 큰 몸뚱이에다 있는 힘을 다해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돌방망이는 무릎 바로 밑에 명중하여 원숭이는 고통과 노여움으로 울부짖었다. 그 일격으로 균형을 잃고 원숭이는 힘껏 팔을 앞으로 뻗으며 비틀거렸다.
여기에서 또 다시 어제처럼 지구의 전술을 쓰기로 했다. 우선 오른쪽 주먹을 휘둘러 턱 끝에 일격을 먹여 놓고 이어서 명치에 왼쪽 주먹을 먹여 댔다. 이것은 훌륭한 효과를 나타냈다. 두 방을 맞고 조금 옆으로 비켜난 흰 원숭이는 휘청거리며 쿠당탕 마루 위에 쓰러지더니 아픔 때문에 몸을 뒤틀며 숨을 헐떡거렸다. 쓰러진 몸을 뛰어넘어 나는 돌방망이를 집어들고 괴물이 일어서기 전에 그 숨통을 끊어 놓았다.
내가 결정적인 일격을 내리칠 때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뒤돌아보았더니 타르스 타르카스와 소라와 서너 명의 전사들이 출입구에 서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또다시 그들의 칭찬을 받았음을 알았다. 하긴 그들은 여전히 애써 그런 티를 겉으로 나타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이 자리에 나타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에서였다. 즉 소라는 잠에서 깨어나 내가 없는 것을 알고 급히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가서 알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곧 부하를 이끌고 나를 찾아 나섰다. 도시 끝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그 숫원숭이가 미친 듯이 날뛰며 거품을 뿜고 건물 안으로 달려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그 원숭이의 행동이 나의 소재를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들은 곧 뒤따라왔다. 그리고 나와 원숭이의 목숨을 건 짧은 결전을 목격했던 것이다. 어제의 전사와의 격투며 위로 뛰어오르는 재주를 보인 일과 아울러 이 싸움으로서 나는 그들로부터 굉장한 존경을 받게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우정이니 애정이니 하는 따위의 고도의 감정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으나 용감한 행위나 표면에 나타나는 용기라면 두말없이 숭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술이며 완력이며 용기를 되풀이하여 실증하는 것만이 그들의 최고의 칭찬을 획득하는 길이었다.
스스로 자진하여 이 수색대에 가담한 소라는 내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은 단 하나의 화성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의 몸을 걱정하여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괴물의 숨통을 끊어 놓자마자 내가 다치지나 않았나 하고 나의 몸을 찬찬히 조사해 보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그녀는 생긋이 웃으며 나의 손을 잡고 출입구를 향하였다.
타르스 타르카스와 전사들은 방 안에 들어가 나의 생명의 은인이며 또한 나도 그의 목숨을 구해 준 파수 보는 개를 내려다보았다. 파수 보는 개는 바야흐로 급속도로 원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타르스 타르카스들은 서로 의논을 하는 듯했다. 마침내 그중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타르스 타르카스를 보았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말과 몸짓으로 그 남자에게 명령하고는 방을 나가려는 나와 소라의 뒤를 따라왔다.
그러나 그 동물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어쩐지 살기가 있는 것을 느낀 나는 되어 가는 사태를 보기 위해 그 방에서 나가지 않았다. 확실히 그 방에서 나가지 않기를 잘했다. 왜냐하면 그 전사는 기분나쁜 권총을 빼어들고 그 동물의 숨통을 끊어 놓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달려가서 그의 팔을 탁 쳤다. 총알은 창틀에 명중하여 나무와 밖의 돌벽을 꿰뚫고 구멍을 뚫어 놓았다.
나는 겁을 집어먹고 있는 동물의 한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일으켜 세우고는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나의 이 행동에 깜짝 놀란 화성인들의 표정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그들의 이러한 감사와 동정의 표현은 아주 조금, 그것도 매우 유치할 정도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내가 권총을 쏘려는 팔을 친 그 전사는 의아스러운 듯이 타르스 타르카스의 얼굴을 보았는데, 타르카스는 하는 대로 내버려두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모두들 광장으로 물러갔다. 나의 용감한 파수꾼은 곧 뒤따라왔고 소라는 나의 팔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나는 화성에서 적어도 두 친구를 얻었다. 어머니 같은 마음씨로 나를 돌보아 주는 젊은 여성과 말 못하는 가엾은 동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동물은 멸망한 도시며 물이 말라 버린 바다 밑을 방황하는 500만 명의 화성인을 합친 것보다도 더욱 강한 사랑과 충성심과 감사의 정을 그 보기 흉한 몸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화성인의 육아법
아침 식사는 그 전날과 똑같은 음식으로, 그 뒤 내가 녹색인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내내 거의 같은 것뿐이었다. 식사를 끝낸 뒤 소라는 나를 광장으로 데리고 갔다. 광장에는 부족 전원이 나와 있었는데, 거대한 맘모스 같은 동물에게 커다란 삼륜차를 매고 있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고 있었다. 탈것은 무려 250대나 되었으며 한 마리의 동물이 각각 한 대씩 끌고 있었는데, 어느 동물이건 짐을 가득 실은 짐차를 힘들이지 않고 넉넉히 끌 수 있는 것 같았다.
탈것은 크고 넓었으며 호화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 속에는 금속제 장식이며 보석, 비단, 털가죽 등을 몸에 잔뜩 붙인 여자 화성인이 앉았고, 수레를 끌고 있는 동물의 등에는 젊은 마부가 타고 있었다. 전사들이 타고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이 운반용 동물에는 재갈도 고삐도 물려 있지 않았다. 화성인들은 그 동물을 주로 정신 감응력으로 부리고 있었다. 이 정신 감응력은 화성인 전체에 굉장히 발달하여 그들의 언어가 단순하고, 오랜 시간의 대화에서조차도 거의 말이 오가지 않는 까닭은 주로 이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화성에서는 공통어로서 이 모순에 가득 찬 세계에서 고등동물도 하등동물도 이것을 통하여 서로 의사를 통할 수 있었는데, 그 동물의 지능 정도나 발육 정도에 따라 의사 소통이 좌우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모두들 한 줄로 죽 늘어서서 행진 태세를 취하자 소라는 나를 이끌고 빈 수레에 올라탔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전날 내가 이 도시에 들어올 때 지나온 지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 행렬의 선두에는 약 2백 기(騎)의 전사가 다섯씩 옆으로 줄을 지어 나아갔고, 이것과 같은 수의 전사들이 그 뒤를 따라갔으며, 한편 25기 내지 30기가 모두들 양쪽을 호위하고 있었다.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 엄하게 무장을 하고 있었다. 각 수레 뒤에는 화성의 사냥개가 한 마리씩 종종걸음으로 따라갔고, 나의 파수 보는 개도 뒤에서 반드시 따라왔다. 사실 이 충실한 동물은 내가 화성에서 지내던 10년 동안 내내 자기 스스로 내 곁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모두들 도시 앞의 작은 골짜기를 건너 언덕을 지나 내가 그 부화기에서 광장으로 오는 도중 가로질러 온 물이 말라 버린 바다 밑을 향해 나아갔다. 이 날의 여행 목적지는 그 부화기가 있는 곳이었다. 바다 밑의 평지에 닿자 모두들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으므로 곧 목적지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렀다.
목적지에 닿자 수레는 울타리에 둘러싸인 땅의 사방에 군대식으로 가지런히 줄을 짓고 멈추어 섰다. 거대한 몸집의 우두머리를 선두로 타르스 타르카스와 다른 대여섯 명의 족장을 포함한 열 명의 전사가 탈것에서 내려와 울타리 안의 땅으로 들어갔다. 타르스 타르카스가 우두머리에게 뭐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이 우두머리의 이름을 그럭저럭 영어로 고치면 롤크워스 프토멜 왕(제드)이 된다. 왕은 칭호이다.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곧 알아차렸다. 타르스 타르카스가 소라를 불러 나를 그의 곁으로 보내라고 신호했기 때문이었다. 이때쯤에는 화성의 중력 밑에서도 걸을 수 있는 요령을 터득했으므로 나는 곧 명령에 따라 전사들이 줄지어 서 있는 부화기 옆으로 나아갔다.
그들 옆에 가 보았더니 몇몇 알만 제외하고는 모두 부화되어, 부화기에는 보기에도 끔찍스러운 작은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들의 키는 90센티에서 1미터 23센티미터쯤이었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지 울타리 안을 우물우물 돌아아니고 있었다.
내가 앞에 가서 멈추어 서자 타르스 타르카스는 부화기 위를 가리키며 <사크>라고 말했다. 어제 부린 재주를 다시 한 번 롤크워스 프토멜에게 보여 주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위로 뛰어오르는 나의 멋진 힘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곧 그가 바라는 대로 부화기 저쪽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수레를 단숨에 뛰어넘어 보였다. 다시 돌아오자 롤크워스 프토멜은 신음하는 듯한 소리로 나에게 뭐라고 말했고 그 다음 전사들에게 부화기에 관한 것을 두세 마디 명령했다. 그들은 그 이상 나에게 관심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곧 옆에 남아 그들의 작업을 견학하도록 허용되었다. 작업은 우선 부화기 벽에다 이 화성인의 아기가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을 뚫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구멍이 뚫리자 그 양쪽에 여자와 젊은이―남녀 모두―들이 늘어서서, 삼륜차 사이를 지나 저쪽의 벌판까지 두 줄로 견고한 사람의 울타리를 만들었다. 이 울타리 사이를 화성인 아기들은 사슴처럼 깡충깡충 뛰며 달려갔다. 아기들은 이 통로의 끝에서 끝까지 달려도 좋게 되어 있었고 그것을 여자며 나이 먹은 아이들이 닥치는 대로 한 명씩 붙잡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줄의 맨 마지막에 있는 자가 이 통로에 맨 먼저 닿은 아기를 붙잡으면 그 맞은편에 있는 자가 다음 아기를 붙잡고 하여 아기들이 모두 울타리 밖으로 나가 젊은이나 여자의 손에 넘어갈 때까지 이 의식(儀式)은 계속되었다.
의식―이렇게 부름으로써 이 행사에 위엄이 붙는다면―이 끝나자 나는 소라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우리들의 수레 안에서 소름끼치는 아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녹색 화성인 아기의 교육은 주로 이야기하는 법과 태어난 첫해부터 주어지는 무기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5년 동안 부화 기간을 알 속에서 지낸 아기들은 몸의 크기만 빼고는 충분히 발육하여 태어난다. 어머니들은 자기의 아이를 가려 내지 못했고, 또한 아이 아버지를 정확하게 지명하기도 어려웠으므로 아이들은 부족의 공유물이 되어 그들의 교육은 부화기를 떠났을 때 그를 붙잡은 여성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양어머니 가운데는, 예를 들어 소라처럼 그때 자기의 알이 부화기 속에 없는 자도 있다. 그녀의 경우, 남의 아기 어머니가 되기 1년 전까지만 해도 알을 낳은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녹색 화성인 사이에서는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구인에게 있어서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애정이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화성인에게는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가엾은 화성인들이 모든 섬세한 감정이며 고도의 도덕적인 본능을 상실한 것은 여러 세대 동안 계속된 이 무서운 습관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모의 애정을 모르고 가정이라는 말의 뜻을 모른다. 아이들은 생존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몸집과 광포성으로 나타낼 수 있을 때까지는 그저 살려 두어 준다는 사실을 배울 뿐이다. 만일 어디에 결함이 있든지 병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곧 사살당한다. 그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많은 쓴맛을 보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른 화성인이 쓸데없이, 또는 각별히 아이들을 잔혹하게 다룬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멸망해 가고 있는 혹성(惑星) 위에서 그들은 가혹한 생존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혹성의 천연자원은 시시각각 줄어들고 있으므로 이 부족 사이에 새로이 태어나는 생명 하나 하나가 물자의 부족을 증가시키고 있음을 뜻하는 데까지 이르러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중히 선발하여 가장 든든한 자만을 골라서 기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신통하리만큼 출산율을 사망에 의한 인구 감소를 보충할 수 있을 만큼 규제하고 있다. 어른 화성인 여자는 대개 해마다 13개의 알을 낳는다. 그리고 크기와 무게와 비중 테스트에 합격한 알은 부화하지 않도록 온도를 낮게 한 지하의 저장실 구석에 숨겨 둔다. 이 알들은 해마다 20명의 우두머리로 구성되는 위원회에 의하여 신중히 심사되며, 해마다 반입되는 알 가운데 대략 백 개의 가장 완전한 알만을 보존하고 그 이외는 전부 파괴시킨다. 그러므로 5년째의 끝에 가서는 몇천 개가 넘는 반입된 알 가운데 거의 완전한 알 약 500개만이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알들은 거의 밀폐된 상태의 부화기 속에 넣어지고 다시 5년을 거쳐 태양 광선에 의해 부화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지켜본 부화는 바로 그 전형적인 하나의 예로, 약 1퍼센트의 알을 제외하고는 이틀 동안에 모두 부화되었던 것이다. 만일 남은 알이 부화한다 해도 그 갓난아기의 운명은 알 길이 없다. 그들은 불초(不肖)의 자식인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의 자손은 부화 기간을 연장시키는 성질을 유전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 온 제도, 즉 어른 화성인들이 부화기로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하는 기초가 되어 있던 제도가 뒤바뀌게 된다. 그들은 부화에 대해, 어느 날 몇 시라는 것까지 정확하게 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화기는 다른 부족에게 발견될 우려가 없는 구석진 땅의 울타리 속에 설치해 놓는다. 만일 발견되면 그 뒤 5년 동안 그 부족에게는 갓난아이가 하나도 태어나지 않는 결과가 된다. 다른 부족의 부화기가 발견되었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 나는 뒷날 목격했다.
내가 운명을 같이하게 된 녹색 화성인의 부족은 약 3만 명으로 이루어졌고, 남위(南緯) 40도에서 80도 사이의 넓은 건조 지대와 아(亞) 건조 지대를 방랑하고 있었다. 이 드넓은 지역의 동서에 넓고 기름진 땅이 맞닿아 있고, 그들의 본거지는 이 지역 남서부의 한 모퉁이, 소위 두 가닥의 화성 운하가 교차하고 있는 부근에 있다.
부화기는 그들 영토의 북쪽 끝에 있는, 거주하는 자도 없고 오가는 자도 없는 지역에 설치되어 있으므로, 그곳에서 더욱 앞으로 나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는 무서운 여행이 되는데, 물론 나는 그런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다.
폐허의 거리로 돌아온 다음 며칠 동안 나는 비교적 한가하게 지냈다. 부화기가 있는 곳에서 돌아온 다음날 전사들 모두가 아침 일찌기 말을 타고 출발하여 어두워지기 바로 전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알을 보존하고 있는 지하실에 들어가 알을 부화기에 날라다 놓고 그 뒤 5년 동안의 세월에 대비하여 바람벽을 막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아마도 또다시 그곳으로 찾아가는 자는 없을 것이다.
부화기에 옮길 수 있게 될 때까지 알을 숨겨 두는 지하실은 부화기에서 몇 마일이나 남쪽에 떨어져 있고 1년에 한 번 20명의 위원이 방문하게 되어 있다. 어째서 지하실이나 부화기를 좀더 본거지 가까이에 만들어 놓지 않는지 나는 늘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다른 많은 화성의 수수께끼와 마찬가지로 이 수수께끼도 끝내 풀지 못했으며 또한 지구인의 이치나 습관으로 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도 아기도 모두 돌봐 주어야 했기 때문에 소라의 일은 곱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둘 다 모두 그다지 애를 먹이지 않았다. 그리고 둘이 모두 화성의 교육 정도에 있어 수준이 같았으므로 소라는 둘을 함께 훈련시키기로 했던 것이다.
그녀가 소중하게 키우던 아이는 키가 약 1미터 20센티미터인 남자아이로, 매우 힘이 세고 더할 나위 없는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기억력도 좋아 나와 그 아이가 서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심하게 겨루고 있는 모습은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재미있었다. 화성의 말은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매우 간단하여 나는 일주일 동안에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상대방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고, 말을 걸어오면 대강 알아들을 수도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라의 지도가 뛰어나 정신 감응력이 몸에 배어 얼마 뒤에는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거의 모두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소라가 가장 놀란 것은 내가 다른 화성인이 보내는 정신 감응력에 의한 통신을―그것도 나에게 보내는 것이 아닌 것조차도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 쪽에서는 어떤 경우이건 나의 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나도 어리둥절했으나 나중에는 그것이 오히려 좋게 생각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확실히 화성인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었다.비행선단의 출현
부화기의 의식이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본거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선두가 도시 앞의 빈터에 한 발 들여놓자마자 곧 되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러자 마치 벌써 오랜 햇수 동안 특별히 이 명령을 위해 연습해 온 것처럼 녹색 화성인들은 가까이 있는 건물의 커다란 출입구 안으로 안개처럼 빨려 들어가 3분도 채 못되어 수레며 맘모스며 기병의 행렬은 그림자도 형태도 없어지고 말았다.
소라와 나는 도시의 앞쪽에 있는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그곳은 내가 흰 원숭이와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건물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후퇴 명령의 원인을 알아보려고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창을 통해 눈을 크게 뜨고 골짜기와 저쪽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황급히 숨은 까닭을 알았다. 가장 가까운 언덕 위에 선체(船體)가 길고 평평한 커다란 회색 비행선이 천천히 날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한 대, 또 한 대, 모두 20대의 비행선이 나지막하게 날며 천천히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각 비행선의 현측(舷側) 위에는 머리에서 꼬리에 걸쳐 기묘한 깃발이 나부꼈고 머리에는 무언지 이상한 것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이 햇빛을 받아 반짝여 비행선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앞 갑판과 현측에 많은 사람이 보인다. 우리를 발견했는지 아니면 그저 폐허가 되어 버린 도시를 바라볼 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들은 거친 영접을 받게 되었다. 녹색 화성인들은 갑자기 아무 경고도 없이, 큰 비행선이 서서히 다가오는 골짜기를 향한 건물에서 맹렬하게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장면은 마술을 부린 듯이 일변했다. 선두의 비행선은 현측을 이쪽으로 돌리고 반격의 불꽃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정면을 약간 평행으로 날아 크게 선회(旋回)하려고 선수를 돌렸다. 그 결과 또다시 우리의 화선(火線)과 상대하는 위치로 돌아갔다. 다른 비행선도 그 뒤를 따라 각각 사격 위치에 서자 한꺼번에 쏘아 댔다. 그러나 이쪽의 포화(砲火)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빗나간 탄환은 25퍼센트도 못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토록 정확한 사격은 본 일이 없었다. 마치 한 방이 터질 때마다 비행선 위의 작은 사람 그림자가 하나씩 쓰러지는 듯싶었다. 그러는 동안 적은 이쪽의 전사들이 퍼붓는 탄환을 막을 길이 없어 깃발이며 현측이 잇달아 불길에 싸였다.
비행선 측의 공격은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안 일이지만 최초의 일제 사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탑승원들은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고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추는 녹색 화성인의 사격을 받아 화기(火器)의 조준 장치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종래의 전투와 상황이 비슷했을 경우 녹색 화성인 전사들은 각기 일정한 사격 목표를 서로 나누어 겨냥하게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예를 들어 가장 우수한 저격병 일대(一隊)는 상대방 비행선단의 대포 무선 탐지 조준 장치에 집중 사격을 퍼붓는다. 또 다른 일대는 역시 마찬가지로 그보다 작은 화기를 겨냥한다. 나머지는 포수(砲手)를 겨냥하여 쏘고 또 다른 자는 장교를 겨냥한다. 한편 다른 자들은 현측이며 조종기(操縱器)며 추진기(推進器)에 매달려 있는 탑승원에게 사격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최초의 일제 사격에서 25분이 지난 뒤 비행선단은 방향을 돌려 처음에 나타났던 방향을 향해 물러갔다. 몇 대는 눈에 뜨일 만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인원수가 줄어 버린 탑승원의 손으로 간신히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의 포격은 완전히 그쳤고 퇴각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듯싶었다. 그러자 녹색인 전사가 숨어 있던 건물의 옥상에 뛰어올라가 퇴각하는 선단을 향해 잇달아 맹렬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그래도 비행선은 한 척씩 저 멀리 언덕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뒤에 남은 것은 간신히 날고 있는 한 대뿐이었다. 이 한 대는 우리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탑승원이 전멸한 모양이었다. 비행선 위에는 사람의 움직임이 없었다. 비행선은 서서히 궤도에서 벗어나 허둥지둥 떠다니는 듯한 가련한 모습으로 빙빙 돌다가는 이쪽으로 돌아왔다. 전사들은 곧 일제 사격을 그쳤다. 비행선은 완전히 힘을 잃어 우리에게 공격을 가하기는커녕 퇴각하려고 해도 조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비행선이 도시에 접근하자 전사들은 그것을 맞이하려고 평지로 뛰어내려갔다. 그러나 아직 고도가 너무 높아서 비행선에 오를 수는 없었다. 탑승원의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이 내가 있는 건물의 창문으로 잘 내다보였으나 어떤 생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비행선은 산들바람을 타고 천천히 남동쪽으로 흘러갔는데, 그 안에 살아 남은 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른 비행선단이나 구조대가 다시 올 경우에 대비하여 옥상에 오르라는 명령을 받은 100명쯤을 빼고는 모든 전사들이 땅 위 약 150미터 언저리에서 표류하고 있는 비행선의 뒤를 쫓아갔다. 이윽고 비행선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약 1마일 남쪽에 있는 건물 정면에 충돌할 것이 분명하게 되었다. 나는 전사들이 뒤따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무리의 전사가 비행선을 앞질러 달려가 타고 있던 동물에서 내린 다음 비행선이 가 닿으려고 하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비행선이 건물에 접근하여 충돌하기 직전에 화성인 전사들은 창에서 일제히 비행선으로 옮겨 타고 긴 창을 받쳐서 충돌의 충격을 누그러뜨렸다. 비행선은 곧 밑에 있는 전사의 손에 의해 땅 위로 끌어내려졌다.
비행선을 단단히 고정시키자 전사들은 현측에 올라가 머리에서 꼬리에 이르기까지 샅샅이 수색했다. 그들이 죽은 탑승원을 조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숨을 아직 쉬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한 떼가 어떤 작은 생물을 끌고 아래에서 나타났다. 그 생물의 키는 녹색 화성인 전사의 절반도 못되었다. 내가 있는 발코니에서 그 생물이 두 다리로 서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아직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종류의 괴물인 듯싶었다. 그들은 포로를 땅 위에 옮기고는 선내를 샅샅이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몇 시간이나 걸렸다. 그리고 전리품(戰利品)을 운반하기 위해 차가 여러 대 징발되었다. 전리품은 무기, 탄약, 비단 헝겊, 털가죽, 보석, 색다른 조각이 되어 있는 석기(石器), 그리고 다량의 고형식품(固形食品)과 음료 등으로, 그 중에는 내가 화성에 온 이후 처음 보는 물건도 많이 있었다.
마지막 짐을 들어내고 전사들은 선체를 남서쪽의 골짜기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두세 명이 타고서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쪽에서 보건대 아마도 유리병에 든 것을 승무원의 시체며 비행선 바닥이며 기계류 위에 뿌리고 있는 듯싶었다.
이 작업이 끝나자 그들은 현측을 급히 뛰어넘어 쳐놓은 망을 타고 땅 위로 내려왔다. 마지막에 남은 한 사람이 뒤돌아 서서 비행선 안에 뭔가 집어던지고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한순간 멈추어 섰다. 던진 것이 명중한 곳에서 불길이 조금 뿜어 나오자 그는 현측에 매달리더니 재빠르게 땅 위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쳐 놓았던 그물이 걷히고 전리품을 약탈당하여 가벼워진 우주선에서 붉은 연꽃 같은 불길이 일어나오며 천천히 공중으로 날아올라갔다.
비행선은 서서히 남동쪽으로 흘러가면서 목조로 된 부분이 타자 무게가 줄어들어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나는 옥상에 나가서 비행선이 차츰 멀어져 마침내 저 먼 하늘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몇 시간이나 지켜보고 있었다. 광막한 화성의 하늘에 조종하는 자도 없이 불길에 싸여 떠돌아다니는 거대한 무인(無人) 비행선. 공중에서의 화장(火葬). 그 광경은 그야말로 장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죽음과 파괴의 표류선은 이 기괴하고도 야만스러운 녹색인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이며, 비행선이 그들의 적의에 가득 찬 손아귀에 떨어진 것은 운명의 장난이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혀―어째서 그토록 우울해지는지 스스로도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나는 천천히 큰길로 내려섰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녹색인 전사가 같은 화성인인 적을 쫓아 버렸다기보다 오히려 나의 동포인 군대가 패배 당하여 전멸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망상(妄想)과도 같은 이런 기분은 어떻게도 해석할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서 지워 버릴 수도 없었다.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 이 낯모를 적을 그리는 이상한 기분이 싹트고 있어, 지금에라도 그 비행선단이 다시 돌아와 그토록 무자비하고 야만스럽기 이를 데 없는 녹색인 전사들에게 보복 공격을 해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솟아나는 것이었다.
나의 바로 뒤에는 파수 보는 개 울러가 따라오고 있었다. 울러가 거기에 있는 것은 이제는 당연한 일로 되어 있었다. 내가 큰길에 모습을 나타내자 여태껏 나를 찾고 있었는지 소라가 급히 달려왔다. 녹색인들이 광장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 본거지로 돌아가게 되어 있던 예정은 취소되었다. 사실 비행선의 반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귀국의 행군이 다시 시작된 것은 일주일 이상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롤크워스 프토멜은 빈틈없는 역전(歷戰)의 지휘자였으므로 수레와 아이들의 행렬이 가리울 것도 없는 평원(平原)에서 습격 당하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두들은 위험이 지나갔다는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폐허의 도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소라와 함께 광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언뜻 어떤 광경을 목격하고 나는 희망과 공포의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격정을 느껴 온 몸이 저려 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안도와 행복감 쪽이 훨씬 더했던 것이다. 사람이 몰려 있는 곳에 다가가자 두 명의 녹색인 여자에게 이끌리어 바로 옆에 있는 건물로 붙잡혀 온 그 비행선의 포로를 얼핏 보았던 것이다.
나의 눈에 띈 것은, 내 과거의 세계인 지구의 여성과 하나에서 열까지 똑같은 날씬한 젊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나를 못 보았으나, 이제부터 그녀의 감옥이 될 건물 입구로 모습을 감추기 직전에 언뜻 뒤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은 긴 편으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이목구비는 하나하나가 선이 뚜렷하고 섬세했으며, 둥근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물결치는 검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서 색다르긴 해도 잘 어울리는 머리 모양으로 땋아 올리고 있었다. 피부는 엷은 적동색으로, 홍조를 띤 두 뺨과 예쁜 루비빛 입술이 살결과 대조되어 반짝이며 요염한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녹색인과 마찬가지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훌륭한 장신구를 달고 있을 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 균형이 잡힌 흠 잡을 데 없는 몸은 어설픈 의상을 걸치고 있지 않으니만큼 한층 더 아름다웟다.
나를 보고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리고 자유스러운 한쪽 손으로 살짝 신호를 보냈는데, 물론 무슨 신호인지 알 수 없었다. 한순간 두 사람은 서로 응시했다. 그리고 나를 발견했을 때 나타났던 희망과 용기를 되찾은 듯한 생기는 가시고 혐오와 경멸이 뒤섞인 완전한 실망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녀의 신호에 대답하지 않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화성인의 습관을 모르긴 해도 그녀가 구조와 보호를 청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의 무지(無知)가 원인이 되어 그것에 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인기척이 없는 건물 속으로 이끌리어 그 모습을 감추었다.화성의 말
나는 제 정신으로 돌아오자 이 만남을 지켜보고 있는 소라를 언뜻 보았다. 그리고 여느 때는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음을 알고 매우 놀랐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일상 생활에 불편이 없을 정도의 화성어(火星語)밖에 모르므로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 입구에 이르자 다시금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전사가 무기며 장식품이며 그밖에 그의 것과 똑같은 장구(裝具) 한 벌을 들고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는 한두 마디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들고 온 물건을 내밀었다. 그 태도는 공손했으나 동시에 위압적이었다.
나중에 소라는 몇몇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몸집이 작은 나에게 맞도록 장구를 고쳐 주었다. 그것이 끝나자 나는 전투를 위한 장비를 몸에 걸치고 걸어다녔다.
그날부터 소라는 갖가지 무기의 깊이 숨은 뜻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화성인 아이와 함께 광장에 나가서 날마다 몇 시간씩 연습을 하며 지냈다. 아직 모든 무기에 익숙해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비슷한 지구의 무기에 정통한 덕분에 흔히 볼 수 없는 머리 좋은 학생이라는 인정을 받으며 나날이 솜씨를 발휘했다.
나나 아이들의 단련은 전적으로 여자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여자는 아이들에게 개인적인 방어와 공격의 방법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기술자이기도 했으므로 손으로 하는 일은 온통 도맡아서 만들었다. 여자들은 화약이며 약협(藥莢)이며 화기(火器)를 만들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모두 여성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녀들은 예비군의 일부에 편입되었으며, 일단 유사시에는 남자를 훨씬 능가하는 총명성과 흉포성을 발휘하여 싸우는 것이었다.
한편 남성은 더욱 고도의 전쟁 기술, 즉 전략이나 대부대를 지휘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필요에 따라 법률을 제정한다. 긴급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법률을 하나 만들어 먼젓번 예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심판했다. 그들은 긴 세월 동안 되풀이함으로써 습관을 계승해 왔으며, 습관을 깨뜨리는 자가 나왔을 경우에는 범죄자와 같은 신분에 있는 자가 되어 배심원이 하나하나 처벌하게 되어 있다. 판결이 빗나가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어느 쪽인가 하면 지위가 높은 자일수록 판결은 가볍게 내려지는 듯했다. 화성인은 적어도 한 가지 점에 있어 행복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호사라는 것이 없으니까.
처음 만난 뒤 며칠 있다가 또다시 그 포로를 얼핏 보았는데, 그녀는 내가 처음 롤크워스 프토멜과 만났던 대알현실(大謁見室)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나는 감시인이 그녀에게 부당하게 심한 취급을 하고 있음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소라가 나에게 표시하는 모성적인 정다움과 노고를 아끼지 않고 나를 따뜻하게 대접해 주는 두세 명의 녹색인의 정중한 태도와는 실로 정반대의 것이었다.
먼젓번에도, 그리고 이번에도 이 포로가 감시인과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이 공통적인 말을 쓰고 있거나 적어도 의사가 서로 통할 수 있는 공통어를 알고 있음이 뚜렷했다. 이 때문에 한층 더 자극을 받은 나는 화성어를 더 많이 가르쳐 달라고 재촉하여 소라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 뒤 이삼 일 동안에 나는 상대방과 통할 만큼의 대화를 할 수 있었고, 더구나 한 번 들은 것은 거의 모두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화성어를 습득하였다.
그 무렵 우리 숙소에는 소라와 그녀가 키우고 있는 아이와 나와 개 울러 이외에 서너 명의 여자와 최근 부화한 아이가 살고 있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어른들은 잠들기까지의 잠시 동안 두서없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 습관이었다. 이젠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므로 나는 내 편에서 결코 말참견은 하지 않았지만 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포로가 알현실을 찾아왔던 날 밤에는 그것이 화제에 올랐다. 나는 온 정신을 귀에 집중시키고 들었다. 그 포로를 처음 만났을 때 소라의 얼굴에 나타난 기묘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아름다운 포로에 대해 묻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 표정이 질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지구의 척도로 모든 일을 측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관심을 쏟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소라의 태도를 더욱 뚜렷이 알 수 있을 때까지는 무관심을 가장하는 편이 가장 좋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숙소에 머무르고 있던 나이 많은 여자인 사르코쟈는 포로 감시인의 한 사람으로서 알현실에 입회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질문의 화살이 쏟아졌다.
한 여자가 물었다.
"언제 그 적색인이 괴로와하며 죽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롤크워스 프토멜 왕은 그 여자를 인질로 붙잡아 둘 작정일까?"
"그 여자를 서크까지 함께 데리고 가기로 했어. 타르 하쥬스님의 어전에서 개최되는 경기 대회에서 그 여자의 최후의 고통을 모두에게 보인다는 거야" 하고 사르코쟈는 대답했다.
"어떤 식으로 죽을까?" 소라가 물었다. "그 여자는 그렇게 작고 예쁘니까 인질로 잡아 두면 좋을 텐데 말이야."
사르코쟈와 다른 여자들은 소라의 마음 약함을 나무랐다.
"소라, 너는 100만 년 전에 태어나지 못해서 안됐어" 하고 사르코쟈는 비꼬았다. "그 당시에는 땅이 움푹 패인 곳에는 모두 물이 가득 괴어 있었고, 그 물 위를 항해하는 자들은 그 물처럼 연약했거든. 지금 우리들은 진보했지. 그런 감정은 겁쟁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자가 가지는 것이야. 네가 그런 썩은 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타르스 타르카스님이 아시면 좋지 않을걸. 그렇게 되면 너 같은 여자에게 육아의 중대한 임무를 맡길는지 의심스럽구나."
"그 적색인 여자에게 내가 흥미를 나타냈다고 해서, 조금도 나쁠 것은 없지 뭘 그래." 소라는 반발했다. "그 여자가 우리에게 몹쓸 짓을 한 것도 아니니까. 비록 우리가 그 여자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야.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 일족의 남자들이며, 그것도 내가 보기에는 우리 쪽의 태도가 나빴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그런 태도로 나왔거든. 적색인은 하는 수 없이 전쟁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사이좋게 살고 있어. 그런데 우리는 아무하고도 사이좋게 지내려 하지 않아. 적색인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우리 일족 사이에서도 늘 전쟁이 그칠 날 없으니까. 우리 부족끼리도 서로 싸움을 하잖니. 우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이 세상에 나왔다가 저 신비의 강의 품 안에 기꺼이 안길 때까지 날이면 날마다 무서운 유혈의 연속. 그 옛날부터 흐르는 이스 강의 검은 물결은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데리고 가지만, 그래도 그렇게 되면 적어도 추악하고 무서운 이 세상에 이 이상 더 살아 남을 필요가 없게 되는 거야! 일찍 죽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고자질할 테면 해도 좋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억지로 살아야 하는 이 무서운 생활을 계속하는 것만큼 가혹한 운명은 없으니까."
소라의 이 무모한 말에 여자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두세 마디의 그리 심하지 않은 꾸지람이 오가고 난 뒤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는 마침내 잠들어 버렸다. 그 가엾은 여자에 대해 소라가 호의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것은 이날 밤의 수확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 아닌 소라에게 맡겨진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소라가 나에게 호의를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참혹함과 야만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 나는 그 포로와 함께 달아나는 일에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물론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피신해 간 곳이 지금보다 좋은 곳일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이상 더 이 추악하고 피에 굶주린 녹색 화성인 밑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나와 같은 모습의 인간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드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나 천지 창조 이래 지구의 인간들이 악착같이 찾아다녀도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생명의 샘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소라에게 나의 기분을 털어놓고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을 가슴에 꼭 품고 나는 비단과 털가죽에 싸여 꿈도 꾸지 않으며 편안히 잤다.족장으로 승진
다음날 아침에는 일찍 눈을 떴다. 도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어디로든지 가고 싶은 데로 가도 좋다는 소라의 말대로 나에게는 상당한 행동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라는 무기를 지니지 않고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왜냐하면 고대 화성 문명의 폐허에는 반드시 내가 두 번째로 만났던 그 큰 흰 원숭이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라는 그때, 어쨌든 이 도시의 경계선에서 나가려고 하면 울러가 방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울러의 경고를 무시하고 금지 구역에 너무 가까이 감으로써 그의 흉포한 성품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특별히 다짐했다.
"만일 끈질기게 울러에게 대항하면 그는 생사를 가리지 않고 당신을 데리고 돌아올 거예요.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차라리 죽여서라도 말이에요" 하고 덧붙였던 것이다.
이날 아침 새로운 길을 선택하여 살피고 있던 나는 갑자기 도시의 경계선으로 나오고 말았다. 눈 앞에는 낮은 언덕이 펼쳐져 있고, 매력적인 좁은 골짜기가 언덕 사이를 누비며 달리고 있었다. 나는 눈 앞의 땅을 탐험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그 피를 이어받고 있는 왕년의 개척자들이 하던 대로 시야를 가리는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구릉(丘陵) 저쪽의 경치가 과연 어떻게 전개되어 있는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이것은 울러의 성질을 알아보는 매우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맹수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은 있었다. 인간이니 동물이니 하는 점을 제쳐놓고 화성의 어느 동물보다도 그가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를 나는 보아서 알았다. 자기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 준 데 대한 감사의 기분이 참혹하고 애정이 없는 주인들에 의해 지금까지 심어진 의문감을 훨씬 능가할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경계선에 가까이 가자 울러는 근심스러운 듯이 내 앞으로 달려와서 나의 다리에 몸을 비벼 댔다. 그 몸짓은 흉포하기보다는 애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큰 엄니를 드러내거나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경고하지도 않았다. 나는 인간다운 우정이나 교제를 맺을 수 없었으므로, 소라와 울러에게 적지 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 괴물에게도 같은 본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 본능에 호소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으며, 실망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지금까지는 안아 주거나 쓰다듬어 주는 일이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땅에 앉아 기르는 개에게 하듯이 그의 굵은 목을 끌어안고 쓸어 주며 갓 익힌 화성어로 말을 걸었다. 내가 나타낸 애정에 대해 그는 상당히 명확한 반응을 보였다. 커다란 입을 힘껏 벌리고 위턱에 가지런히 나 있는 엄니를 끝에서 끝까지 드러내며 큰 눈이 주름 사이로 거의 감추어질 정도로 콧등에 주름을 지었다. 콜리 개가 웃는 것을 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울러의 일그러진 얼굴을 다소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위로 몸을 젖히고 나의 발 밑에서 거의 뒹굴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들어 그 무거운 몸무게로 나를 떠밀어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쓰다듬어 달라고 등을 내미는 장난꾸러기 강아지처럼 나의 주위를 대굴대굴 구르며 다녔다. 나는 이 모습을 보고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어 배를 움켜쥐고 한껏 웃었다. 이렇게 웃은 것은 참으로 며칠 만일까. 생각해 보면 파웰이 캠프를 출발하던 날 아침, 오랫동안 부리지 않았던 나의 말이 갑자기 파웰을 콩이 들어 있는 냄비 속으로 거꾸로 떨어뜨렸을 때 그만 한바탕 웃고는, 그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내가 웃는 것을 보고 울러는 우스꽝스러운 시늉을 그치고 가련하게 다가와서 보기 흉한 머리를 나의 무릎 사이로 슬며시 집어넣었다. 그 순간 웃는 것이 화성에서는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생각이 났다―고문, 고통, 그리고 죽음이다.
나는 웃기를 그치고 이 가엾은 맹수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어 주며 잠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위엄이 가득한 어조로 따라오라고 명령하고는 일어서서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이미 우리 사이에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주종 관계(主從關係)가 이루어져 있었다. 이때 이후 울러는 나의 헌신적인 노예, 그리고 나는 그에게 있어 둘도 없는 주인이 되었다. 언덕까지는 걸어서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일껏 오긴 했으나 그다지 흥미를 끌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빛깔을 띤 기묘한 모양의 양성(兩性) 꽃이 좁은 골짜기에 수없이 많이 피어 있었고, 가장 가까운 언덕 꼭대기로부터 북쪽을 향해 언덕이 잇달아 계속되어 있었다. 하나의 언덕 저쪽에 또 다른 언덕이 솟아 있곤 했는데, 그 끝은 상당히 높은 산맥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하긴 천 이삼 백 미터를 넘는 산이 화성에서는 흔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이 경우, 크다고는 하지만 상대적인 뜻에 지나지 않는다.
이날 아침의 산책은 나로서는 아주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타르스 타르카스가 호위하기 위해 나를 따라다니게 했던 울러와 완전히 서로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이제 비로소 나는 겉으로는 갇힌 몸이지만 사실상 자유의 몸임을 알았다. 그래서 울러가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음을 녹색인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급히 도시 안으로 돌아갔다. 이 모험에 의해 나는 영원히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준비가 될 때까지는 행동이 허용되어 있는 지역 밖으로 두번 다시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만일 들키면 틀림없이 나의 자유는 제한 당할 것이고 더구나 울러는 책임상 사살당할 테니까.
광장에 이르렀을 때 나는 세 번째로 그 여자 포로를 보았다. 그녀는 감시인과 함께 알현실 입구 앞에 서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자 거만한 눈초리를 흘긋 던지더니 등을 홱 돌렸다. 그 몸짓이 너무나도 여자다웠고 또한 지구인 여성과 똑같았으므로 나는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옛친구를 만난 듯한 따사로운 기분이 되었다. 이 화성에서 나 말고도 문명인다운 정상적인 인간 본능을 지니고 있는 자가 있음을 알고 기뻤다. 비록 그 때문에 억울한 생각이나 고통을 느끼는 한이 있더라도.
아마도 화성인 여자가 증오나 경멸을 표현하려면 칼로 찌르든지 총의 방아쇠를 당기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감정은 대부분 퇴화되어 있으므로 그런 격정을 불러일으키려면 상당히 감정이 상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미리 말해 두지만 소라는 다르다. 소라가 잔인한 행위나 난폭한 거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늘 친절했고 마음씨가 상냥했다. 같은 녹색인이 평했듯이 매우 구식이었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받으며 살던 조상이 되살아난 듯한 보기 드문 호인이었던 것이다.
그 포로가 주목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발길을 멈추고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기다릴 것도 없이 롤크워스 프토멜과 그 부하인 족장들이 건물로 다가오더니 감시인에게 포로를 데리고 따라오라고 지시하고는 알현실로 들어갔다. 나는 운을 하늘에 맡기고 알현실로 슬그머니 따라 들어가서 회의하는 모습을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갇힌 몸이긴 해도 내가 어느 정도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화성어를 완전히 습득할 때까지는 무리하게 말상대가 되기 싫었으므로 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붙여 달라고 소라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말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전사들은 모른다는 확신이 있었다.
위원들은 연단 위에 앉았고 그 발 밑에 포로와 두 감시인들이 서 있었다. 감시인 한 사람은 사르코쟈였다. 이것으로 그녀가 어제 사문회(査問會)에 입회한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그 일에 대한 모든 것을 어제 저녁에 나의 숙소에 함께 있는 여자들에게 보고했었는데, 포로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거칠고 가혹했다. 이 가엾은 여죄수의 살 깊숙이 손톱을 세우기도 하고 팔을 비틀어서 심한 고통을 주기도 했다. 여기저기로 옮겨갈 필요가 있을 때에는 거칠게 잡아끌거나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떠밀며 뒤에서 따라갔다. 아마도 사르코쟈는 자기 몸을 지킬 방도도 없는 이 가엾은 여자에게, 유구한 옛날의 흉포한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아 태어나 지금까지 900년 동안 품어 오던 증오와 잔혹성과 흉포성과 원한을 있는 대로 모조리 터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또 한 명의 감시인은 그 포로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으므로 사르코쟈 만큼 잔인하지 않았다. 만일 이 여자에게만 맡기어졌다면―다행히도 밤에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그녀는 심한 취급은 당하지 않았겠지만, 또한 조금의 보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을 들어 포로에게 말을 걸려고 하던 롤크워스 프토멜의 눈에 내가 띄었다. 프토멜은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며 짜증스러운 듯한 몸짓을 했다. 타르스 타르카스가 대답을 했다.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으나, 그것을 듣고 롤크워스 프토멜은 히죽이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롤크워스 프토멜은 포로에게 물었다.
"헤리움에 사는 모르스 카쟉의 딸 데저 소리스."
"그래, 원정의 목적은?"
"그것은 헤리움의 황제인 제 할아버지의 명령을 받고서 기류도(氣流圖)를 다시 만들어 대기의 밀도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순전한 과학 조사대였습니다." 아름다운 포로는 침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전쟁 준비는 하지 않고 왔었습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 깃발의 색깔이나 선체의 색깔이 표시했듯이 우리는 평화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었어요.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일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신들에게도 크게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노력과 과학 활동의 성과 없이는 화성에서 단 한 사람도 살아갈 만한 공기며 물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오랫동안 그다지 큰 손실도 없이 거의 같은 양의 공기와 물을 확보해 왔습니다. 그것도 당신네 녹색인의 야만스럽고 무지스러운 방해를 받으며 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네들은 어째서 동족끼리 사이좋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다가는 멸망하는 그 날까지 지금 당신들을 섬기고 있는 어리석은 야수들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글자를 갖지 못하고 예술도 없고 가정도 없고 사랑도 없는 민족. 당신들은 여러 세대에 걸친 무서운 공동체 사상의 희생자입니다. 여자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공유(共有)하고 있으면서도 당신들은 결국 무엇 하나 가지고 있지 못하는 셈이 되어 있습니다. 다른 민족을 미워하듯이 당신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미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공통된 조상의 습관으로 돌아가십시오. 동정심과 우호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당신들 앞에 길은 열려 있습니다. 적색인이 당신들의 힘이 되어 주려고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우리가 서로 도우면 이 멸망해 가고 있는 혹성을 소생시키는 일에 있어 한층 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적색인 황제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황제의 손녀인 나의 소원입니다. 들어 주시겠습니까?"
롤크워스 프토멜과 전사들은 잠시 말없이 이 젊은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들의 마음 속에 무엇이 오갔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들이 감동을 받은 것만은 확실했다. 만일 그들 가운데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하나라도 종래의 습관을 초월할 만한 기개(氣槪)를 가지고 있다면 이 순간을 기해 위대한 화성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는 타르스 타르카스가 일어서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녹색인 전사의 얼굴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표정은 그가 마음 속에서 자기 자신과 전통과 낡은 습관과 심하게 싸우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다정하면서도 온화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표정이 떠올라 한순간 흉맹스럽고 무서운 얼굴이 싱싱하게 빛났다.
그러나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뻔했던 중대한 말은 끝내 나오지 않고 말았다. 바로 그 순간 연장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재빠르게 눈치챈 한 젊은 전사가 연단의 층층대에서 뛰어내려와 연약한 죄수의 얼굴에 일격을 가하여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게 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쓰러진 죄수의 몸을 한쪽 발로 짓누르고 모여 있는 위원들을 둘러보며 커다랗게 소리내어 웃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냉혹한 웃음이었다.
한순간 나는 타르스 타르카스가 그를 때려 죽이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롤크워스 프토멜도 이 야수가 취한 행동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런 기색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본디 성질이 다시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들은 일제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들이 큰 소리로 웃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불길한 전조(前兆)를 느꼈다. 왜냐하면 녹색 화성인의 유머 윤리로 볼 때 젊은이의 행위는 그야말로 배를 움켜쥐고 웃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위트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그 일격을 받았을 때의 상황을 이렇게 장황하게 썼다고 해서 한참 동안 내가 속수무책으로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위를 우러러보며 애원하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일격이 가해지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이미 도약의 태세를 취하여 몸을 굽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의 손이 내리쳐지기 전에 나는 넓은 방을 절반쯤 뛰어넘고 있었다.
그의 징그러운 웃음 소리가 울려퍼진 것도 순식간,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 야수는 키가 3미터 50센티미터나 되었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있었으므로, 넓은 방에 있는 녀석들을 모두 때려눕힐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뛰어올랐다. 그리고 나의 경고의 소리를 듣고 뒤돌아본 그 녀석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렸다. 상대가 단검을 뽑자마자 나도 단검을 뽑아 다시 상대의 가슴팍으로 날쌔게 달려들었고, 상대방 권총의 총대에 발을 걸치고 왼손으로 큰 엄니를 움켜쥐고는 그 가슴을 몇 번이나 찔렀다.
내가 바짝 달라붙어 있었으므로 상대는 마음대로 단검을 쓸 수가 없었다. 일대일의 결투에서는 덮친 상대가 쓰고 있는 무기 이외의 무기를 쓰며 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화성의 규칙이었으나, 이 규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는 권총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정말은 나를 떨쳐 버리려고 덮어놓고 몸부림칠 뿐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큰 몸집이었으나 나보다 그다지 강하지 못했으므로, 불과 일이 분 사이에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데저 소리스는 한쪽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바닥으로 내려가서 그녀를 안아 일으켜 방 한구석에 있는 벤치로 옮겨 놓았다.
이때에도 나를 방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의 비단 케이프 한 자락을 찢어 그녀의 코에서 흐르고 있는 피를 멈추게 하려고 했다. 상처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그저 코피가 흐를 뿐이었으므로 피는 곧 멎었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녀는 나의 팔에 손을 걸치고 나의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지요? 내가 무서운 일을 당하던 첫 무렵에는 친절한 눈길조차도 보이지 않으시던 당신이! 그런 당신이 목숨을 걸고 나를 위해 한패를 죽이시다니, 알 수 없어요. 당신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당신은 녹색인과 가까이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의 모습은 우리 종족과 같고 피부빛은 그 흰 원숭이보다 약간 검어요. 가르쳐 주셔요. 당신은 인간입니까? 아니면 인간 이상의 분이십니까?"
"아주 기묘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길고, 도대체가 나 자신도 정말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이니, 과연 다른 사람이 믿어 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당신 편입니다. 나를 사로잡은 패들이 허용하는 한 당신의 보호자 겸 하인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그럼, 당신도 포로인가요? 그렇다면 그 서크 족의 족장만이 지니는 무기와 기장(記章)을 가진 건 무슨 뜻이지요? 당신의 이름은? 조국은?"
"데저 소리스, 나도 포로랍니다. 이름은 존 카터. 지구의 아메리카 합중국 버지니아가 나의 고향입니다. 어째서 무기를 휴대하도록 허용되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지만, 이 기장이 족장의 것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이때 전사들이 다가왔으므로 우리들의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그들은 무기며 장신구며 장식품을 날라왔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 머리에 떠올라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보았더니 나와 결투한 상대의 시체는 몸에 걸쳤던 것이 몽땅 뺏겨져 있었다. 결투의 상품을 날라온 전사들은 위압적인 동시에 공손한 태도로 그것을 내밀었으므로 나는 지금 내가 몸에 지니고 있는 무기며 장신구를 가지고 왔던 전사가 역시 같은 태도를 나타냈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때 이 알현실에서 처음으로 싸웠을 때 나의 일격이 상대를 죽게 했던 사실이 생각났던 것이다.
어째서 그들이 나에게 이런 태도를 나타내는지 이제야 뚜렷해졌다. 말하자면 나는 명성을 떨친 것이다. 그리고 화성에서 대인 관계를 늘 좌우하는 거친 정의―이것은 내가 특히 이 별을 <모순의 혹성>이라고 부르는 이유이지만―의 이름 밑에서 나에게 승리자의 영예, 즉 쓰러뜨린 상대의 장구와 지위가 주어진 것이다. 나는 이미 틀림없는 화성인 족장이었다. 그 덕분에 자유가 인정되었고, 알현실에서의 일도 너그럽게 봐 주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뒤돌아서서 죽은 전사의 소지품을 받으려고 할 때 타르스 타르카스와 몇몇 족장이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놀리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바로 이삼 일 전만 해도 벙어리나 귀머거리와 다름없던 네가 바로슴 말(화성어)을 술술 지껄이다니. 어디서 배웠지, 존 카터?"
"다름아닌 당신 덕분입니다, 타르스 타르카스." 나는 대답했다. "저에게 유능한 여교사를 딸려 주신 것은 당신이 아니십니까. 내가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소라 덕분입니다."
"그녀는 참으로 잘했군그래.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 너의 교육은 아직 연마할 필요가 있어. 네가 장식을 앗은 그 두 명의 족장 가운데 한 명이라도 미처 죽이지 못했다면 그런 무모한 행동의 결과로서 네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미처 죽이지 못한 자에게 도리어 죽임을 당했겠지요" 하고 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화성인이 포로를 죽이는 것은 자기 방어로서 부득이한 경우 뿐이야. 포로는 다른 목적을 위해 살려 둔다."
그때 그의 얼굴은 생각만 해도 오싹하는 일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너는 헤어날 길이 하나 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만일 타르 하쥬스가 너의 용맹 과감한 행동과 훌륭한 솜씨를 인정하시고 부하로 삼을 값어치가 있다고 인정하시면, 너는 부족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져 온전한 서크 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타르 하쥬스의 본진(本陣)에 도착하는 동안, 너는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존경을 받게 되었으니 충분한 대우를 해주라는 것이 롤크워스 프토멜의 명령이다. 우리는 너를 서크 족의 족장으로 대하겠다. 그러나 너보다 윗자리에 있는 족장들에게는 위대하고도 가장 용맹한 우리의 지도자에게로 너를 무사히 연행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잘 알았소, 타르스 타르카스." 나는 대답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바르슴 사람(화성인)은 아니오. 여러분과 나는 습관이 다르오. 나는 앞으로도 역시 마찬가지로 나의 양심에 따르고 내 나라 사람의 기준으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준다면 나는 성가시게 굴 생각은 없소.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와 교제하는 바르슴 사람들에게 이방인으로서의 나의 권리를 존중해 주도록 주선해 주기 바라오. 아니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보증할 수 없소. 한 가지만 분명히 해 두고 싶은 일이 있소. 여러분이 마지막에 가서 이 불행한 여성을 어떻게 할 작정인지 알 수 없으나, 앞으로 이 여성을 해치거나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와 결투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오. 당신은 관대하고 동정심 있는 마음을 일체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다르오. 나는 이런 감정이 전투 능력과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당신의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전사들에게 보여 줄 수 있소."
여느 때는 나는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큰소리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녹색 화성인의 급소를 찌를 셈이었다.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나의 열변은 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 뒤 그들은 한층 더 경의에 찬 태도로 나를 대하게 되었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나의 대답을 듣고 기뻐하는 듯했으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나는 서크의 황제 타르 하쥬스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데저 소리스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도와 일으켜서 족장들의 살피는 듯한 눈길이며 당황하고 있는 매정한 할망구들을 뒷전에 남기고 출입구로 향했다. 이젠 나도 족장이 아닌가! 그렇다면 족장으로서의 임무를 받아들이자. 그들은 방해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헤리움의 공주 데저 소리스와 버지니아의 신사 존 카터는 모두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충실한 개 울러를 거느리고 바르슴에 있는 서크 족의 왕 롤크워스 프토멜의 알현실에서 퇴장했던 것이다.화성의 역사
밖으로 나오자 데저 소리스의 감시역을 맡은 두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또 다시 그녀를 끌고 가려고 했다. 가엾은 그녀는 무서워하며 나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그녀의 가냘픈 손이 나의 팔을 꼭 쥐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손을 흔들어 여자들을 쫓고 앞으로는 소라가 이 죄수를 돌보아 준다고 말하며, 사르코쟈에게 이 이상 더 데저 소리스에게 심하게 굴면 살려 두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이 위협은 역효과로서 오히려 데저 소리스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다 주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알았지만 화성에서는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르코쟈는 우리 쪽을 심술궂은 눈으로 노려보았을 뿐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곧 소라를 찾았으므로 지금까지 나를 보호해 왔듯이 데저 소리스를 보호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사르코쟈가 손을 대지 못하도록 다른 장소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고 나 자신은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숙소를 옮기겠다고 덧붙여 말했다.
소라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장신구며 어깨에 걸치고 있는 것에 눈길을 주었다.
"이제 당신은 훌륭한 족장입니다, 존 카터"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므로 당신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이건 기꺼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당신이 그 장신구를 뺏은 남자는 젊은이였으나 훌륭한 전사로서 승진을 거듭하여 상대를 쓰러뜨려 타르스 타르카스의 지위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타르스 타르카스는 롤크워스 프토멜 다음의 자리에 있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11번째랍니다. 이 부족에는 당신보다 뛰어난 솜씨를 가진 사람이 10명 있는 셈이지요."
"만일 내가 롤크워스 프토멜을 쓰러뜨린다면?"
"당신이 첫째가는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존 카터. 그러려면 당신과 롤크워스 프토멜의 결투를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그 영예를 당신에게 주어야만 합니다. 그 외에는 그쪽에서 당신을 공격해 왔을 경우입니다. 그럴 경우, 정당방위로 상대방을 죽여도 좋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가 있지요."
나는 웃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특별히 롤크워스 프토멜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하물며 서크 족의 왕이 되고 싶은 기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라와 데저 소리스를 데리고 새로운 숙소를 찾아 나섰다. 찾아 낸 곳은 지금까지의 숙소보다도 알현실에 가까운 한층 더 어마어마한 건물 안이었다. 여기에는 어엿한 침실이 있어서 훌륭한 금속제의 침대가 대리석 천장에서 굵은 쇠사슬로 묶이어 늘어뜨려져 있었다. 바람벽의 장식은 굉장히 정성들여 만들어진 것으로, 내가 여태껏 살펴본 다른 건물에 있던 프레스코 화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구도로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그려진 인물은 나와 같은 인간으로, 피부색은 데저 소리스보다 조금 희었다. 모두 우아하고 여유 있는 긴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그 옷에는 귀금속이며 보석이 박혀 있었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은 금발이거나 또는 붉은 기가 도는 청동색으로 남자들은 수염이 없고 무기를 가지고 있는 자는 아주 드물었다. 대부분 금발에 피부색이 흰 사람들이 즐겨 놀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었다.
데저 소리스는 먼 옛날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그려진 이 멋진 예술 작품에 넋을 빼앗기며 감탄의 소리를 지르고 두 손을 마주잡았다. 이와 반대로 소라는 그런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데저 소리스와 소라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이층의 이 방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구석진 다음 방을 부엌 겸 저장실로 삼았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나는 소라에게, 돌아올 때까지 내가 데저 소리스를 감시하겠다고 말하며 침구와 필요한 음식과 부엌 도구를 가지고 오라고 말했다.
소라가 나가자 데저 소리스는 가냘픈 미소를 띠며 나를 보았다.
"당신이 감시를 게을리 한다고 해서 내가 달아날 수가 있나요? 그보다 당신을 따르고 당신의 보호를 청하며 지난 며칠 동안 당신에게 적의를 품었던 사실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겠어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둘이 함께 달아나야 합니다."
"당신이 타르스 타르카스라는 남자에게 도전하시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렇게 하면 당신이 이 종족 속에서 어떤 입장에 놓이게 되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당신이 바르슴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점이에요. 그래서 저는 저의 조상님의 이름을 걸어 여쭙겠습니다만, 당신은 대체 어디서 오셨지요? 우리 혈족과 비슷하시지만 그러면서도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말을 하시지만 그것도 최근에 익히셨다고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말씀하셨지요? 바르슴 사람은 얼음에 싸인 남쪽 끝에서 얼음에 싸인 북쪽 끝까지 글자는 달라도 같은 말을 씁니다. 이스 강물이 코러스 바다로 들어가는 하구(河口)에 있는 돌 골짜기에서만이 다른 말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르슴 사람이 코러스의 강변 돌 골짜기에서 이스 강을 거슬러서 돌아온 일이 있다는 기록은 우리들의 전설 속에 있을 뿐이에요. 설마 당신이 그렇게 해서 돌아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만일 그것이 진실이라면 이 바르슴에 있는 한 당신은 무참하게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부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녀의 눈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야릇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냘픈 손을 나의 가슴에 대고 마치 나의 마음에서 부정의 말을 쥐어짜려는 듯이 눌렀다.
"나는 당신들의 규칙을 모릅니다, 데저 소리스. 그러나 나의 고향 버지니아에서는 신사는 자기가 살아나기 위해 거짓말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나는 돌 골짜기에서 온 사람은 아닙니다. 수수께끼에 싸인 이스 강을 본 적도 없고, 코러스 바다에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믿어 주시겠습니까?"
그때 갑자기 나는 그녀가 믿어 주기를 열렬히 바라고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것은 바르슴 사람의 천국인지 지옥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내가 그곳에서 돌아왔다고 모두가 생각하기만 하면 나는 파멸해 버릴 우려가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어째서 이다지도 마음에 걸린단 말인가?
나는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동자는 그녀 영혼의 깊숙한 곳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녀와 눈길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녀가 믿어 주기를 열망하는 이유를 알았다―그리고 몸을 떨었다.
같은 감정이 그녀의 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싶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열성에 찬 아름다운 얼굴을 들어 나에게 속삭였다.
"믿겠어요, 존 카터. 나는 신사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으며 버지니아라는 곳은 들은 적도 없어요. 하지만 바르슴에서는 남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있답니다. 당신의 고향인 그 버지니아란 어디에 있나요, 존 카터?"
징다운 고향의 이름이 어디 한 점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을 때처럼 아름답게 울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세계의 인간입니다. 당신과 같이 태양 주위를, 우리가 화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바르슴의 바로 안쪽 궤도를 따라 공전(公轉)하고 있는 지구라는 별에서 왔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곳에 왔는지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고, 여기 있기 때문에 데저 소리스에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온 것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난처한 듯한 눈길로 한참 동안 의아한 듯이 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내가 하는 말이 믿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고, 아무리 나의 말을 믿어 주기 바란들 그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나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데저 소리스의 그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본 남자라면 아무리 사소한 그녀의 요구일지라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윽고 그녀는 미소지으며 일어섰다.
"비록 모른다 해도 믿어야겠지요. 당신이 바르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쉽사리 알겠습니다. 당신은 우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십니다―하지만 이런 일을 자꾸만 생각할 필요가 어디 있겠어요. 믿고 싶으니까 믿는다고 나의 마음이 가르치고 있는걸요!"
훌륭한 논리, 이것이야말로 지구 여성의 논리이다. 그것으로 그녀가 만족한다면 물론 나로서도 이의는 없다.
실제 문제에 있어 나의 신상에 꼭 들어맞는 논리란 아무래도 이것 말고는 달리 바랄 수 없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일반적인 화제로 옮겨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도 하고 대답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지구인의 습관을 알고 싶어했고 지구상의 일을 놀랄 만큼 잘 알고 있어 그것을 차례차례로 말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듯하여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소리내어 웃으며 외쳤다.
"바르슴 학생들은 모두 지리며 동식물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혹성과 같을 정도로 당신들 혹성의 역사도 잘 알고 있거든요.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씀하시는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환히 보인답니다. 가리우는 것도 없이 중천에 뚜렷이 떠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하여 나의 이야기에 그녀가 놀랐듯이 이번에는 내가 당황할 차례였다. 내가 그 사실을 말하자 그녀는 적색인이 오랜 동안 사용하고 개량을 거듭해 온 기구에 대하여 대강 설명해 주었다.
그 기구를 사용하면 어느 혹성에서 일어난 일이건 또 다른 많은 항성(恒星)에서 일어난 일이건 완전한 영상으로서 스크린에 비쳐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영상을 사진으로 찍어서 확대시키면 자잘한 점까지 참으로 똑똑히 알 수 있으므로 풀잎 정도 크기의 것도 명확하게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뒷날 나는 헤리움에서 그 사진을 많이 보았고 물론 사진을 찍는 기구도 보았다.
"그토록 지구에 대해 자세히 아신다면 내가 그 혹성에 사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을 어째서 모르십니까" 하고 나는 물었다.
그녀는 끈질기게 물어 오는 아이에게 진절머리가 난 어른처럼 다시 미소지었다.
"그건 이렇답니다, 존 카터. 이 바르슴의 상태와 비슷한 대기 조건을 가진 별이나 혹성에서는 십중 팔구 당신이나 나와 비슷한 동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들로서는 알 수 없는 괴상한 헝겊으로 거의 모두가 몸을 감싸고 있고 머리에는 보기 흉한 것을 쓰고 있더군요. 그런데 당신이 서크 족의 전사에게 발견당했을 때에는 몸에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으셨지요? 당신이 장식품 하나 몸에 걸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바르슴 태생이 아니라는 유력한 증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괴상한 것도 걸치고 있지 않으셨으니 지구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나는 지구를 떠나올 때의 자세한 상황을 설명했고, 지구상에 있는 나의 몸은 그녀가 말하는 소위 지구인의 기묘한 옷을 단정하게 입고서 누워 있다고 설명했다. 바로 이때 소라가 소지품과 그녀가 기르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이 아이는 당연히 그녀들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소라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누가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몹시 놀라는 것 같았다. 이층인 이 방으로 올라올 때 그녀는 사르코쟈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사르코쟈가 엿들었음에 틀림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대한 일을 이야기한 것도 없으므로 서로 충분히 주의하자고 약속했을 뿐 그 이상의 신경은 쓰지 않았다.
그러고 난 다음 데저 소리스와 나는 이 건물에 있는 갖가지 아름다운 방의 건축 양식이며 장식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러한 예술을 창조한 인종이 번영한 것은 아마도 10만 년 이상이나 전의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들 종족의 먼 옛 선조에 해당하며 그들은 화성 초기의 다른 큰 종족, 즉 피부색이 굉장히 짙어서 거의 검은 색에 가까운 민족과 같은 시대에 번영했던 적황색 민족과 혼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들 뛰어난 화성의 3대 종족은 하는 수 없이 강대한 동맹을 결성했다. 그 까닭은 화성의 바다가 말라 버려서 본디부터 그리 넓지 못했지만 그나마 차츰 줄어들고 있는 비옥한 지역을 찾아야만 했으며, 새로운 생활 조건 밑에서 야만스러운 녹색인 무리로부터 몸을 지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친밀한 관계와 잡혼(雜婚) 때문에 적색 인종이 태어났다. 데저 소리스는 그 일족의 아름다운 자손이었다. 고난을 겪으며 녹색인과 투쟁해야 했고, 아울러 같은 종족끼리의 끊임없는 싸움이 그칠 사이 없었으므로 잇달아 변하는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동안에 금발 화성인의 훌륭한 문명과 많은 미술품이 자꾸만 상실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적색 민족은 새로운 발견을 하기도 하고 한층 더 실용적인 문명을 낳기도 함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고대 바르슴 사람들과 함께 파묻혀서 지금은 소생시킬 방도조차 없는 모든 것을 보충했다고 느낄 만큼의 진보를 이룩했던 것이다.
고대 화성인은 고도로 세련된 교양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 그때그때 적응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여러 세기에 걸친 고난의 변천(變遷)을 거듭하는 동안에 진보며 생산이 완전히 정지했을 뿐만 아니라 고문서(古文書)며 기록이며 문학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데저 소리스는 고상하고도 정취(情趣)있는 이 잃어버린 민족에 관한 수많은 흥미있는 사실이며 전설들을 들려주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 도시는 본디 코랏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 도시는 웅대한 언덕에 둘러싸인 천연의 우수한 항구 위에 구축되어 있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항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도시의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뿐이고, 언덕을 누비며 옛날의 바다 밑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운하였던 자리로서, 여기를 통해 배가 도시의 입구까지 왔었다고 한다.
고대의 바다 연안에는 그러한 도시가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다의 중심부에 가까와짐에 따라 수가 줄어들고 있기는 하나 더 작은 도시가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 무렵 주민은 해안선에서 차츰 멀어져 가는 바닷물의 뒤를 쫓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필요에 의해 이른바 화성의 운하에다 최후의 구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건물 안을 조사하고 이야기하는 일에 열중하였기 때문에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오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롤크워스 프토멜의 명령을 받들고 온 심부름꾼에 의해 겨우 현실로 되돌아왔다. 나더러 당장에 출두하라는 명령이었다. 데저 소리스와 소라에게 작별을 하고 울러에게 뒤에 남아서 지키라고 명령한 다음 나는 알현실로 급히 갔다.
롤크워스 프토멜과 타르스 타르카스가 연단 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권력을 가진 포로
들어가서 경례하자 롤크워스 프토멜은 앞으로 나오라고 신호하고는 크고 무서운 눈알을 부라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우리와 함께 지낸 것은 이삼 주일에 지나지 않지만, 너는 그 동안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우리 사이에서 높은 지위를 획득했다. 그것은 그런 대로 좋다. 그러나 너는 우리 일족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충성을 다할 의무는 없다. 너는 기묘한 입장에 서 있다. 너는 포로이면서도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너의 명령은 지켜져야만 한다. 너는 이방인이면서도 서크 족의 족장이다. 몸은 비록 작아도 주먹 한 대로 강한 전사를 죽일 수도 있다. 그런데 너는 또 하나의 다른 민족인 포로와 함께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 포로는, 포로 자신의 말을 빈다면 네가 돌 골짜기에서 돌아왔다고 반쯤 믿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너는 두 가지 일로 탄핵(彈劾)을 받고 있는 셈인데, 그 어느 한 가지가 입증되든 너를 처벌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공정한 민족이니만큼, 우리가 서크로 돌아가는 대로 타르 하쥬스가 재판을 명령하면 너는 재판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하고 그는 어조도 거칠게 나직한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일 네가 그 적색인 여자와 달아나면 타르 하쥬스에게 해명을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타르스 타르카스와 대결해야만 한다. 그 결과 나에게 명령권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든지, 아니면 죽임을 당하여 나보다 뛰어난 자에게 장신구를 빼앗기게 되겠지. 그것이 서크의 율법이니까. 나는 타르스 타르카스와 사이가 나쁘지 않다. 우리 두 사람은 협력하여 녹색인의 작은 여러 부족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부족을 통치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동족끼리 싸우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존 카터, 네가 죽는 일이 나에게는 기쁨이 된다. 그러나 타르 하쥬스의 명령 없이 너를 죽일 수 있는 길은 둘밖에 없다. 그것은 가령 네가 우리 둘 가운데 하나를 공격하여 일대 일로 결투한 끝에 정당방위의 이름 밑에 죽이는 경우와, 또 하나는 네가 도망치는 것을 체포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그토록 중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두 가지 구실 가운데 하나에 해당하는 일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공정한 입장에서 경고해 둔다. 적색인 여자를 무사히 타르 하쥬스에게 데리고 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서크 족이 그런 포로를 잡은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적색인 황제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황제의 손녀이거든. 그 황제는 우리에게 많은 원한을 안겨 준 숙적(宿敵)이기도 하지.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다. 그 적색인 여자는 우리에게 부드러운 감정도 인정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정하고 정직한 민족이다. 물러가도 좋다."
나는 발꿈치를 들려 알헌실에서 나왔다. 드디어 사르코쟈의 박해가 시작되었는가! 롤크워스 프토멜에게 이렇게도 빨리 보고한 자가 사르코쟈를 빼놓고 또 누가 있겠는가! 나는 그 대화 가운데에서 도망 계획과 나의 정체를 말했음이 뒤늦게 생각났다.
사르코쟈는 그 무렵 타르스 타르카스의 지배 아래 있는 여자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여자였고, 가장 신뢰받는 여자였다. 한편 타르스 타르카스는 유능한 둘째 우두머리로서 어느 전사보다도 롤크워스 프토멜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었으므로, 그런 위치에 있는 사르코쟈는 권력 뒤에 숨어서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긴 해도 롤크워스 프토멜을 알현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달아나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기는커녕 거꾸로 도망 계획에 온 힘을 기울이는 결과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적어도 데저 소리스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게 해야겠다는 신념이 전보다 더욱 굳어졌다. 왜냐하면 타르 하쥬스의 본진에서 어떤 무서운 운명이 틀림없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소라의 말에 의하면 이 괴물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잔인성과 흉악성의 화신(化身) 같은 녀석이어서 냉혹하고 교활하고 빈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족의 다른 사람들과 현저하게 다른 점은 타르 하쥬스가 이 멸망해 가고 있는 혹성에서 출산의 요구가 줄어들어 감에 따라 화성인의 가슴 속에서 거의 꺼져 가고 있는 동물적인 욕정의 노예라는 점이었다.
그 깨끗하고 맑은 데저 소리스가 그런 헤아릴 수 없는 욕정의 마수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인디언의 수중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던 다부진 변방(邊方)의 백인 여성들처럼 우리도 최후의 갈림길에서는 자살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음산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 광장을 헤매고 있는데 알현실에서 돌아오던 타르스 타르카스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태도에 달라진 데는 없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에 헤어졌는데도 마치 오랫만에 만난 사람 같은 태도로 인사했다.
"자네의 숙소는 어디지, 존 카터?" 그는 물었다.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대답했다. "저 혼자만이 있을 수 있는 숙소를 정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전사들과 같이 있어야 할지 당신의 의견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서크 족의 규율을 아직 잘 모르니까요" 하고 나는 싱긋이 웃었다.
"같이 가세" 라고 그는 말하고는 앞장서서 갔다. 우리는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어떤 건물에 이르렀다. 기쁘게도 그 건물은 소라와 데저 소리스가 살고 있는 건물 바로 이웃이었다.
"내 숙소는 이 건물의 일층일세." 타르스 타르카스는 말했다. "이층도 전사들로 가득 차 있지만 3층은 비어 있으니 자네는 그 중에서 고르게나."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는 자신의 시중을 들던 여자를 적색인 포로에게 돌렸더군. 자네 말대로 자네와 우리는 습관이 다르네. 그러나 자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인물이야. 그러므로 여자를 포로에게 주건 말건 그것은 자네 마음대로일세. 그러나 족장으로서 자네는 자기의 신변을 돌보아 주는 여자를 가질 필요가 있어. 우리의 습관에 따라 지금 자네가 몸에 붙이고 있는 장신구의 소유자였던 남자의 시종 속에서 여자들 모두이건 또는 그중 몇 사람만이건 골라 가져도 좋네."
"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식사 준비 말고는 남의 손을 빌지 않아도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그는 식사 준비를 시킬 여자를 몇 명 보내 주마고 약속하고, 그밖에 무기의 손질이나 탄약의 제조도 게을리 해서는 안될 일이므로 그런 일도 시키라고 말했다. 나는 결투의 전리품으로서 나의 것이 된 비단 이부자리와 털가죽을 가지고 오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밤에는 몹시 추운데 나는 내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알았다고 말하고는 가 버렸다. 혼자 남게 되자 나는 나에게 적당한 방을 찾기 위해 꾸불꾸불한 복도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이 건물에도 아름다운 것이 많이 있었다. 나는 전처럼 그런 것을 조사하기도 하고 새로운 발견에 열중하기도 했다.
이윽고 3층의 복도 쪽으로 향한 방을 골랐다. 조금이나마 데저 소리스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방은 옆 건물의 이층에 있다. 여기라면 연락을 취할 수단을 강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금방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무언가 부탁하고 싶을 때라든지 나의 보호가 필요할 때에 그녀는 신호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침실에는 욕실과 화장실이 딸려 있고 다른 침실이나 거실과 맞붙어 있었으며, 모두 10개쯤 되는 방이 3층에 있었다. 구석진 방의 창문은 넓은 안뜰을 향하고 있었다. 이 안뜰을 중심으로 건물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각각 큰길을 향하고 있었다. 현재 이 안뜰은 그러한 건물에 살고 있는 전사들이 가지고 있는 갖가지 동물을 매어 두는 장소로 되어 있다.
이 안뜰에는 화성의 거의 온 땅을 뒤덮고 있는 그 노란 이끼 같은 식물이 빽빽이 돋아 있었는데, 그래도 분수며 벤치며 정자 같은 것이 잔뜩 있어서, 즐거운 듯한 금발의 사람들이 광채를 더해 주던 왕년의 아름다움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준엄하고도 변하지 않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온갖 것으로부터 추방당했고, 지금은 자손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어렴풋한 전설 속에서 그 그림자만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 옛날, 화성의 식물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그 소담한 잎들이 이 안뜰에 생명과 색채를 흘러넘치게 하던 광경은 쉽사리 상상할 수가 있다―미인의 유연한 자태, 용모가 수려한 남자들, 뛰노는 행복한 아이들―모든 것은 햇빛을 받아 행복하고 평화스러웠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감은 좀처럼 솟아나지 않았다. 그들은 여러 해에 걸친 암담과 잔혹과 무지의 저편으로 내던져졌으나, 그들이 이어받아 온 문화적이고 인도적인 본능은 최후의 혼혈 민족 속에 다시 되살아나 현재 그 민족이 화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몇 명의 젊은 여자가 나타나 나의 몽상은 중단되었다. 여자들은 무기며 비단 헝겊이며 털가죽이며 보석이며 음식 만드는 도구며 통에 담은 음식과 음료 등을 잔뜩 짊어지고 왔다. 그 속에는 그 비행선에서 얻은 전리품도 상당히 많이 섞여 있었다. 아마 이것들은 내가 쓰러뜨린 두 족장의 소지품인 듯싶었다. 나의 지시로 여자들은 날라온 것을 구석진 어떤 방에 넣고 나가더니 또다시 짐을 짊어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소유물 모두라고 가르쳐 주었다. 두 번째로 돌아왔을 때 여자들은 10명 내지 15명쯤 되는 젊은이를 데리고 왔다. 아마도 죽은 두 족장의 시종들인 모양이다.
그들은 족장의 가족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또한 하인도 아니었다. 이 관계는 일종의 독특한 것이어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지구인의 척도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녹색 화성인 사이에서는 재산은 모두 부족에 의해 공유된다. 단 개인의 무기며 장식품이며 비단 침구며 털가죽은 예외였다. 그들이 무조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들뿐이었고, 또한 그것조차도 실제로 필요한 양 이상의 것은 소유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소유물 가운데 여분의 것은 보관하고 있을 뿐, 필요에 따라 부족의 젊은이들에게 양도하게 되어 있었다.
시중을 들어 주는 여자와 아이들은 하나의 군대로 비유할 수가 있을 것이다. 주인은 모든 뜻에서 이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을 지도하고 훈련하고 유지시켜야 하며, 자주 있는 방랑의 여행이며 다른 부족이나 적색인과의 끝없는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한다. 여자들은 절대로 아내는 아니다. 녹색 화성인은 이 지구어(地球語)의 뜻에 해당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결혼은 주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이루어지며, 개인적인 취향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각 부족의 우두머리나 족장에 의해 이루어지는 위원회는, 켄터키 경마에 나가는 말의 소유주가 말 종류 전체의 개량을 위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말을 과학적으로 교배(交配)시키듯이 이 문제를 확실하게 조정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매우 좋은 것같이 보이지만, 이론이라는 것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경우, 긴 세월에 걸친 부자연스러운 습관의 결과 아이에게 표시하는 흥미가 어머니보다 부족이 앞섰는데, 그것이 이 생물의 냉혹성과 그 음산하고도 사랑이 없는 무미한 생활 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타르 하쥬스 같은 변질자(變質者)는 예외지만 녹색 화성인 남녀 모두가 정숙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따금 조금 도가 지나치는 일이 있긴 하나, 인간의 성격이 균형잡혀 있어서 좋다.
좋든 싫든 관계없이 어쨌든 이 여자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체념하고 그녀들을 이층으로 데리고 가서 방을 정해 주고 3층은 내가 쓰기로 했다. 간단한 요리를 만들게 하기 위해 한 여자를 요리 당번으로 임명했다. 다른 여자들에게는 지금까지 그녀들이 각기 맡아 해 왔던 일을 하라고 명령했다. 그 다음부터 좀처럼 그녀들을 만나는 일도 없었고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화성에서의 사랑
비행선단과의 싸움이 있은 뒤 적이 보복해 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어느 정도 설 때까지 부족은 며칠 동안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리 호전적인 녹색인이라 하더라도 수레며 아이들을 한 부대 이끌고 가다가 방패막이도 없는 평원에서 공격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그 기간 동안에 타르스 타르카스는 서크 족의 전쟁 법규며 전법을 많이 가르쳐 주었다. 그 속에는 전사를 태우고 나르는 그 큰 동물을 타는 방법이며 부리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트라고 부르는 이 동물은 그것을 타는 사람과 비슷할 정도로 위험하고 성깔이 고약했지만, 일단 복종시키면 녹색인의 명령에 잘 따랐다.
내가 쓰러뜨린 족장의 소트 두 마리가 나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화성의 전사들만큼이나 잘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다루는 방법은 간단했다. 기수가 정신 감응으로 전하는 명령에 재빠르게 응하지 않으면 권총 손잡이로 동물의 정수리를 세게 한 대 때리면 되었다. 만일 그래도 소트가 반항하면 굴복시키든지, 아니면 기수가 떨어지든지 할 때까지 이 거친 치료법은 계속되는 것이다.
기수가 떨어졌을 경우에는 사람과 동물의 서로 목숨을 건 투쟁이 시작된다. 만일 권총을 재빠르게 쏠 수 있으면 기수는 살아서 다시 탈 수 있지만―하긴 이 경우 또 다른 소트에 타게 되지만―그렇지 못하면 기수는 갈기갈기 찢기고 말며, 여자들이 그 시체를 긁어모아 서크 족의 법규에 따라 화장한다.
울러와의 경험으로 보아 나는 소트를 시험삼아 친절하게 취급해 보기로 했다. 우선 나를 떨어뜨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나의 권위와 지배력을 심어 주기 위해 정수리를 심하게 때려 주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지구의 말에 대해 여러 번 시도한 것과 꼭같은 방법으로 차츰 그들의 신뢰감을 얻었다. 본디 나는 동물을 잘 다루었다. 동물을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또 그렇게 하는 편이 오히려 오래 계속되는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늘 동물에 대해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하기로 했던 것이다. 도리도 모르고 책임을 진다는 것도 모르는 가엾은 동물을 죽이느니 차라리 인간의 목숨을 앗는 편이 훨씬 마음 편할 것이다.
이삼 일 지나는 동안에 나의 소트는 온 부족들 사이에 놀라움의 대상이 되었다. 나의 소트는 개처럼 뒤따라와서 나의 몸에 커다란 콧등을 비비며 어설프게 애정을 나타냈고 명령에는 민첩하고도 유순하게 따랐으므로 화성인 전사들은 내가 그들이 모르는 지구인의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마술을 걸었지?"
어느 날 오후 내가 소트의 커다란 턱 사이에 팔을 집어넣고 있는 것을 보고 타르스 타르카스가 물었다.
"친절하게 해주었을 뿐이지요." 나는 대답했다. "아시겠습니까, 타르스 타르카스. 부드러운 감정은 그 나름으로 값어치가 있습니다. 전사들에 대해서조차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한창 전투를 하고 있을 때에도 행군할 때와 마찬가지로 나의 소트는 나의 명령에 순순히 따를 겁니다. 따라서 전투 능력이 훨씬 올라갑니다. 친절한 주인이기 때문에 우수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당신의 부하가 나의 방법을 채용한다면 그들을 위해서도, 또 부족을 위해서도 이득이 될 겁니다. 이 몸집이 큰 동물이 변덕스러워서 이길 수 있는 싸움에도 지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중요한 순간에 말뚝처럼 서서 기수를 떨어뜨리거나 밟아 죽이기 때문이라고 바로 이삼 일 전에도 당신 자신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타르스 타르카스는 선뜻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 말 좀 해보게나."
그래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차근차근히 동물 다루는 법을 설명했다. 그 뒤 그는 롤크워스 프토멜과 여러 전사들 앞에서 나에게 그것을 다시 설명하게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 가엾은 동물들에게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가 롤크워스 프토멜의 부족에게서 떠날 때까지 누구에게 보이든 부끄럽지 않은 유순하고 얌전한 기마대가 탄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는 만족했던 것이다. 이 결과 군대 생활이 두드러지게 정확하고 또한 민첩하게 되었으므로 롤크워스 프토멜은 부족에 대한 나의 공헌이 크다 하여 그 표시로서 금으로 만든 굵은 발고리를 자기 발목에서 풀어 나에게 주었다.
비행선과의 투쟁 후 이레째 되는 날 롤크워스 프토멜은 보복 공격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대오를 짜고 서크를 향해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 이삼 일 동안은 데저 소리스를 만나지 못했다. 타르스 타르카스로부터 화성의 전법을 배우기도 했고 소트를 훈련시키기도 하며 매우 바빴기 때문이었다. 두세 번 그녀의 숙소를 찾아갔으나 그녀는 소라와 함께 거리를 산책하거나 광장 가까운 건물을 보러 가거나 하여 집에 없었다. 나는 커다란 흰 원숭이의 흉맹성을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흰 원숭이가 나타날지도 모르니 광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가지 않도록 그녀들에게 주의를 주었었다. 하긴 울러가 어디든지 따라다녔고 소라도 충분히 무장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걱정할 일은 없었다.
떠나기 전날 밤 동쪽에서 광장으로 들어가는 큰길에서 데저 소리스와 소라가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두 사람을 만나, 내가 데저 소리스를 지킬 테니 소라는 가 보라고 하며 하찮은 심부름을 시켜서 돌려보냈다. 나는 소라가 좋았고 신용도 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데저 소리스와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지구에서 사귀던 친한 친구와의 교제 속에 남겨 놓고 온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4천 8백만 마일이나 떨어진 우주의 공간을 뚫고 나가는 두 개의 다른 혹성에서 서로 다른 생명을 받은 자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긴밀하고도 한지붕 밑에 태어난 동지 같은 연대감이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녀도 나와 똑같이 느끼고 있음에 틀림이 없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어두운 표정이 사라지고 기쁜 듯이 미소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오른손을 나의 왼쪽 어깨에 얹고 정식으로 적색인의 인사를 했다.
"당신이 완전히 한 사람 몫을 하는 서크 족이 되었다고 사르코쟈가 소라에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당신을 그다지 자주 볼 수 없다고요."
"사르코쟈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서크 족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랑인 듯합니다만."
데저 소리스는 웃었다.
"비록 부족의 한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시리라고 믿었어요. <전사는 장신구를 바꾸는 일은 있어도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바르슴 사람 사이에 있으니까요. 모두들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애쓰고 있어요."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왜냐하면 당신이 근무를 끝마칠 무렵이 되면 반드시 타르스 타르카스의 시종 가운데 나이 먹은 여자가 소라와 나를 어디론지 보낼 구실을 만드니까요. 우리를 건물 밑 지하실에 보내어 지긋지긋한 라듐 가루를 섞는 일이나 무서운 총알을 만드는 일을 시키거든요. 그런 것은 인공 조명 밑에서 제조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태양 광선을 보이면 반드시 폭발하니까요. 그들의 총알이 목표에 명중하여 폭발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불투명한 겉껍데기가 파괴되면 끝에 아주 적은 양의 라듐 가루를 넣은 유리로 만들어진 원통(圓筒)이 나타나지요. 햇빛이 이 가루에 닿는 순간, 비록 그것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느다란 광선일지라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을 만큼 힘차게 폭발한답니다. 밤의 전투를 보시면 이런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거예요. 그래도 그 전투의 다음날 아침에는 해가 뜨자마자 지난 밤에 발사되었던 총알이 작렬(炸裂)하는 소리가 들린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밤에는 폭발하지 않는 폭탄을 사용하게 되어 있지요.) 내가 이 화약을 설명하며 라듐이라는 말을 쓴 것은 지구에서도 최근에 라듐이 발견된 사실에 비추어 보아 이것은 라듐을 기제로 한 혼합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터 대위의 원고에는 이 화약은 줄곧 헬륨에서 쓰는 명칭으로 적혀 있었고, 또 상형 문자로 적혀 있어서 그대로 옮겨쓰기가 힘들었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데저 소리스에게서 전쟁에 관한 이런 굉장한 말을 듣고 매우 흥미를 느끼면서도 그녀가 받고 있는 대우에 대한 당면 문제가 한층 더 마음에 걸렸다. 그들이 나에게서 그녀를 멀리 하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놀라운 것은 아니었으나, 위험하고도 힘이 드는 일을 시키는 데 대하여는 뱃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노여움이 복받쳐올랐다.
"심한 대우를 받거나 모욕을 당하진 않았습니까, 데저 소리스?"
나는 이런 질문을 하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용감한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뜨거운 피가 온 몸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별로 그렇진 않아요, 존 카터. 자존심은 상합니다만, 제가 혈통이 연면(連綿)한 황제의 자손이어서, 조상의 계보(系譜)를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대운하 건설자까지 끊기지 않고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들은 알고 있어요. 그러므로 신분이 천한 여자들은 나를 시샘하고 있답니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의 끔찍스러운 운명을 마음 속으로 저주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 아무리 동경해도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모두를 상징하고 있는 나에게 심한 분풀이를 하는 거예요. 그 여자들을 가엾게 생각해 줍시다, 나의 족장님. 비록 그녀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녀들을 동정할 만한 여유가 있어요. 우리는 그녀들보다 위대하고 또한 그녀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적색인 여자가 남자에게 나의 족장님이라고 불렀을 경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알았다면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그 뒤 몇 달이 지난 다음에도 나는 그 뜻을 몰랐다. 바르슴에는 아직 내가 모르는 일이 많이 있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미련없이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데저 소리스. 그러나 녹색인이든 적색인이든 핑크빛이든 보랏빛이든, 어쨌든 이번에 당신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무례한 짓을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나의 공주님."
데저 소리스는 나의 이 마지막 한 마디를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뚫어지게 보았다. 숨결이 가빠졌다. 그리고 입가에 장난기 어린 보조개를 지으며 기묘한 웃음 소리를 조금 내고는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당신은 아주 어린애 같군요! 늠름한 전사이면서도 아직 아장아장 걷는 어린애 같아요."
나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제가 무슨 짓을 했단 말입니까?"
"이제 아시게 될 거예요, 존 카터. 만일 목숨이 붙어 있으면 말이에요. 하지만 내 편에서 가르쳐 드릴 수는 없어요. 타르도스 모르스의 아들 모르스 카쟉의 딸은 화를 내지 않고 한쪽 귀로 흘려 보내겠습니다."
마지막 말은 혼잣말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금 명랑하고 평화스러운 기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음이 여리고 인정이 많은 내가 동시에 용감한 서크 족의 전사라니, 참으로 대조적이라고 나를 놀렸다.
"만일 어쩌다가 적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면 당신은 그 적을 데리고 돌아와서 다 나을 때까지 치료해 주겠군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웃었다.
"말씀대로 지구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적어도 문명인 사이에서는 말입니다."
이 대답이 또다시 그녀를 웃게 했다.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마음씨가 착하고 여자다우며 부드럽지만, 그녀가 화성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화성인에게는 적은 죽여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적을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살아남은 자가 많이 분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 그녀가 그토록 동요한 것이 내가 뭐라고 말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짓을 했기 때문인지 몹시 알고 싶어서 부득부득 가르쳐 달라고 끈질기게 졸랐다.
"아니에요, 안돼요." 그녀는 외쳤다. "당신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고 또한 내가 귀를 기울였다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앞으로 그것을 알게 될 날이 오고 내가 만일 이 세상에 없다면―먼 쪽의 달이 바르슴을 앞으로 12바퀴 돌 때까지 내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거의 결정적인 일이지만요―내가 당신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 그리고―미소지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쪽이 끈질기게 물으면 물을수록 그녀는 단호한 태도로 거절하므로 나는 실망하며 단념하기로 했다.
이미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바르슴의 달이 두 개 비치어 지구가 밝은 녹색 눈처럼 내려다보이는 넓은 큰길을 거닐고 있으려니까 이 우주에 우리 두 사람만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나는 행복할 것이다.
화성의 밤의 냉기가 으스스하게 살갗 속으로 스며들므로 나는 비단 헝겊을 벗어서 데저 소리스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팔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다른 사람에게 닿았을 때에 느껴 보지 못한 전율이 나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조금 몸을 기대는 것 같았으나 확실히 그렇다고는 할 수 없었다. 비단 헝겊을 제대로 덮어 주고 난 다음 다시 팔을 얹었는데도 그녀가 몸을 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묵묵히 멸망해 가는 혹성 위를 거닐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의 가슴 속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불멸의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나는 데저 소리스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맨살 어깨에 손을 얹고 그것을 뚜렷이 알았다. 저 죽음의 도시 코랏드의 광장에서 처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죽음의 결투
처음에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곧 그녀의 의지할 곳 없는 입장을 생각했다. 사로잡힌 몸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 또한 서크에 닿자마자 그녀가 대결해야 할 몇천이라는 숙적으로부터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 하나뿐인 것이다. 받아들여질 것 같지도 않은 사랑을 고백하여 이 이상 더 그녀의 고뇌를 더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런 경솔한 짓을 하면, 그녀의 입장은 현재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내가 그녀의 입장이 약하다는 것을 기회로 삼아 그녀의 기분을 좌우하려 한다고 오해할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결국 나는 입을 다문 채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말이 없으십니까, 데저 소리스? 소라가 기다리고 있는 당신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여기 있는 것이 즐거워요. 이방인인 존 카터와 함께 있으면 어째서 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더구나 이렇게 하고 있으면 아무런 위험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당신과 함께 금방이라도 아버지의 궁전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억센 포옹과 어머니의 눈물과 입맞춤을 볼에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녀가 사용한 말의 뜻을 물어 보았더니 설명해 주었으므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바르슴에서도 입맞춤을 합니까?"
"부모, 형제, 자매는 서로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하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애인끼리도요."
"데저 소리스는 부모님과 형제 자매도 있으십니까?"
"네."
"그럼, 애인도?"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이 물음을 되풀이할 용기는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바르슴의 남성은 어머니와 그리고 자기가 싸워서 쟁취한 여성이 아니면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나도 싸워서 당신을......" 하고 말하다가 나는 나의 혀를 자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퍼뜩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을 때에는 이미 그녀는 나를 외면하고 내가 걸쳐 주었던 비단 헝겊을 어깨에서 걷어서 내밀고는 아무 말 없이 꼿꼿이 고개를 들고 여왕 같은 걸음걸이로 숙소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녀가 무사히 건물로 다다르는 것을 지켜보았을 뿐 뒤를 따라가지는 않았다. 그리고 울러에게 그녀를 따라가라고 명령한 다음 애달픈 기분을 안고 발길을 돌려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이나 비단 이불 위에 다리를 꼬고 말없이 앉아서 생명이 있는 가엾은 인간을 조롱하는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했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걸까! 다섯 대륙을 두루 돌아다니고 그것을 에워싸는 바다를 방랑하는 동안 나는 사랑과는 인연이 먼 인간이었다. 미인을 만난 적도 있었고 마음이 움직이는 듯한 기회도 있었다. 어중간한 사랑을 구하면서도 또한 외곬수로 이상의 여성을 애타게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아마도 인간이긴 하겠지만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생물에게서 열렬하고도 또한 절망적인 사랑을 느끼다니! 알에서 태어나 수명은 천 년이 넘고 풍습도 사고방식도 다른 종족의 여자. 아마도 희망도 쾌락도 정조 관념도 선악의 기준도 녹색인과 마찬가지로 나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일는지 모른다.
확실히 나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사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더할 나위 없는 비참한 기분에 빠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르슴의 모든 부귀와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버릴 생각은 없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한 연인이란 이런 것이다.
나에게는 데저 소리스가 완전한 모든 것―정숙과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선(善)의 모든 것이었다. 바르슴의 두 달 가운데 가까이 자리잡고 있는 달이 서쪽 하늘을 건너 지평선을 향하여 오랜 옛날에 만들어진 방의 황금이며 대리석이며 보석을 박은 모자이크를 환하게 비추고 있던 코랏드의 그 밤. 비단 이부자리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마음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진정으로 나는 그렇게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는 작은 서재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이미 그때로부터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중 10년 동안 나는 데저 소리스와 그 일족을 위해 싸웠고, 나머지 10년 동안은 그녀의 추억을 양식(糧食)으로 삼으며 살아 왔다.
서크를 향해 출발하는 날 아침은 맑게 개었고 더웠다. 극지(極地)에서 눈이 녹는 6주일 말고는 화성의 아침은 1년 내내 이렇다.
출발하는 수레가 붐비는 속에서 데저 소리스의 모습을 찾아냈으나 그녀는 얼굴을 돌려 버렸다. 볼이 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당신을 화나게 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변명하든지, 또는 적어도 내가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면 아마도 절반쯤이라도 화해를 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사랑으로 인하여 오히려 고집스러워졌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편히 있는지 어떤지를 보살펴 주는 것이 나의 임무였으므로 수레 속을 들여다보고는 비단 이불과 털가죽을 다시 덮어 주었다. 그때 그녀의 한쪽 복사뼈가 수레 옆구리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숨이 콱 막힐 만큼 깜짝 놀랐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냐?" 나는 소라에게 소리질렀다.
"사르코쟈가 생각해 낸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요."
그녀의 말에는 찬성하지 못하겠다는 빛이 담겨 있었다.
족쇄를 살펴보았더니 든든한 용수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열쇠는 어디 있지, 소라? 이리 다오."
"사르코쟈가 가지고 있습니다, 존 카터."
나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홱 돌려 타르스 타르카스를 찾아 내었다. 그리고― 애인으로서의 나의 눈으로 보아―데저 소리스가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고 잔혹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심한 어조로 탓했다. 그는 대답했다.
"존 카터, 자네와 데저 소리스가 서크 족으로부터 도망칠 생각이 있다면 아마도 이 여행 도중에 할 걸세. 그녀와 같이 가지 않는다면 자네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거야. 자네가 강한 전사라는 것은 자네 스스로가 증명했네. 그래서 자네에게는 족쇄를 채우고 싶지 않아. 그러므로 도망을 막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 낸 셈이지. 내 말을 알아듣겠나?"
나는 그의 설명이 일리가 있음을 곧 알았고, 그러한 방침을 거두어 달라고 호소하는 것도 소용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사르코쟈에게서 열쇠를 빼앗고 앞으로는 그 포로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명령해 달라고 부탁했다.
"타르스 타르카스, 내가 당신에게 품고 있는 우정을 보아서라도 그만한 일은 해줄 수 있을 겁니다."
"우정이라고?" 그는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런 것은 없네. 그러나 자네의 부탁대로 해주지, 존 카터. 그 여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사르코쟈에게 명령하고, 열쇠는 내가 보관하겠네."
"나에게 그 열쇠를 맡기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하시지요."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고 나서 입을 열었다.
"타르 하쥬스의 궁전에 닿을 때까지 자네도 데저 소리스도 탈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열쇠를 주고 그 쇠사슬도 이스 강에 던져 버리겠네."
"열쇠는 당신 자신이 가지는 것이 좋을 겁니다, 타르스 타르카스" 하고 나는 대답했다.
그는 싱긋이 웃으며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밤 우리가 캠프를 치고 있을 때 그가 제 손으로 데저 소리스의 족쇄를 풀어 주는 것을 나는 보았다.
잔인하고 냉혹하면서도 타르스 타르카스의 마음 속에는 무엇인가가 흐르고 있어, 늘 그것을 억누르려고 싸우고 있는 듯했다. 먼 옛 조상이 지녔던 인간적인 본능의 흔적이 그의 마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와 종족의 끔찍스러운 행적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데저 소리스의 수레로 다가가려고 나는 사르코쟈의 옆을 지나갔다. 그녀의 독살스러운 험악한 눈초리를 보고 나는 오랜만에 가슴이 후련해지는 듯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꽤 나를 미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몸에는 증오의 가시가 칼로 벨 수 있을 만큼 빽빽이 돋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사르코쟈가 자드라는 전사와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 녀석은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녀석이었는데 아직 한 번도 족장을 쓰러뜨린 적이 없으며, 따라서 아직도 오맛드, 즉 이름이 하나밖에 없는 사나이였다. 족장을 하나 쓰러뜨리고 그 장신구를 지니지 않는 한은 두 번째의 이름을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에 의하여 나는 내가 쓰러뜨린 두 족장 가운데 어느 쪽 이름이건 댈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사실 전사들 가운데는 나를 도탈 소저트라고 부르는 자도 있었다. 이것은 내가 장신구를 빼앗은 두 족장, 다시 말하여 내가 공정한 결투로 쓰러뜨린 두 족장의 성을 합친 것이었다.
사르코쟈가 자드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자드는 가끔 흘끔흘끔 내가 있는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사르코쟈는 자드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끈질기게 조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그 다음날 그때의 일이 수긍될 만한 사건이 일어나 나는 어렴풋이나마 그녀의 미움의 정도를 알았고 나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수단을 가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데저 소리스는 그날 저녁에도 내 마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고, 내가 거기 있어도 눈 하나 깜짝 않은 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생각다 못한 나는 여느 연인들이 하는 것처럼 해보기로 했다. 즉 상대방의 마음 속을 친한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려 한 것이다. 이럴 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소라였다. 나는 그녀를 캠프 안의 다른 장소에서 붙잡았다.
"데저 소리스가 왜 저러지?" 나는 느닷없이 물었다. "왜 나에게 말을 안하는지 모르겠어?"
소라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왜 그렇게 묘한 행동을 하는지, 그녀는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녀는 당신이 화를 내게 했다고 우겨 대고 있어요. 그 말 외에는 『나는 왕의 딸로 황제의 손녀다. 그런 내가 우리 할머니가 기르는 소락크의 이를 닦을 자격도 없는 자에게 모욕을 당했다』고 할 뿐이었어요."
"그런데 그 소락크라는 것은 뭐지, 소라?"
"적색 화성인 여자가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는 나의 손만한 크기의 작은 동물을 말하는 거예요."
소라가 설명해 주었다.
할머니가 기르는 애완동물의 이를 닦을 자격도 없는 남자라고! 내참, 데저 소리스의 평가로는 내가 아주 보잘것없는 사나이로군. 그러나 이 기묘한 말에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주 잘 알려진 표현이며, 그러기에 또 극히 지구적(地球的)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고향이 그리워졌다. 이 말은 <그 여자의 구두를 닦을 자격도 없다>는 표현과 똑같지 않은가. 그러자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도 않던 일이 차례차례로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향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나와 인연이 깊은 카터 집안은 버지니아에 살고 있으며, 나는 훌륭한 아저씨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나는 그러한 당치도 않은 존재인 것이다. 나는 어디를 가나 25살에서 30살로 통하고 있는데, 훌륭한 아저씨라고 불리니 정말 낯간지러운 일이다. 나의 생각이나 느낌은 소년과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카터 집안에는 어린아이가 두 명이나 있다. 나는 이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고,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잭 아저씨만큼 훌륭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달이 휘황하게 밝은 바르슴의 하늘을 머리 위에 두고 서 있으니 그들의 모습이 뚜렷이 눈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몹시 그립게 느껴졌다. 이처럼 사람이 그리워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방랑 생활을 좋아한 나는 가정이라는 말의 참뜻을 몰랐으나, 카터네 집의 호올은 나에게 있어 가정이라는 말이 뜻하는 모든 것이었다. 지금 이 차갑고 불친절한 종족 속에 팽개쳐져 나는 아득히 먼 카터네 집으로 홀로 생각을 달리고 있었다. 데저 소리스마저 나를 경멸하다니! 나는 천한 사람이다. 그녀의 할머니가 기르는 애완동물의 이를 닦을 자격도 없을 만큼 천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비단과 털가죽으로 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가 달빛이 비치는 땅바닥 위에서 건강한 전사답게 곤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일찌기 모두들 캠프를 걷고 해가 지기 바로 전까지 단 한 번 쉬었을 뿐 계속 나아갔다. 행군하는 동안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 여행의 지루함을 없애 주었다. 정오가 다 되어 우리는 저 멀리 오른쪽 방향에서 분명히 부화기 같은 것을 발견했다. 롤크워스 프토멜은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조사를 하라고 명령했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나를 포함하여 12명의 전사를 이끌고 빌로오도 같은 이끼 위를 달려서 그곳으로 향했다.
그것은 분명히 부화기였으나, 내가 화성에 처음 와 닿았을 때 부화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것과 비교하면 알이 매우 작았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말에서 내려 그 둘러싸인 곳을 자세히 조사해 보더니, 이것은 녹색인인 와푼 족의 것으로서 벽을 막은 시멘트도 아직 마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놈들은 우리보다 하루도 안되는 거리를 앞서 가고 있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그 사나운 얼굴에 벌써 투지(鬪志)를 불사르며 소리쳤다.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전사들은 그 부화장 입구를 부수고, 둘이서 그곳을 지나 안으로 쑤시고 들어가 단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알을 모조리 산산조각으로 부숴 버렸다. 그런 다음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 본대로 되돌아가 합류했다. 도중에 나는 기회를 얻어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지금 우리가 알을 부수고 온 와푼 족은 그가 이끄는 서크 족보다 몸집이 작으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들이 알을 부화시키고 있는 것도 보았었는데, 그들의 알은 그것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하고 나는 덧붙여 말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아까 그 알은 그곳에 갖다 놓은 지 얼마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녹색인의 알이든지 부화기 속에 5년 동안 들어가 있는 사이에 커져서 내가 바르슴에 처음 와 닿았을 때 부화하던 것을 보았던 그 알의 크기만큼 자란다고 한다. 그것은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아무리 몸집이 크다 할지라도 녹색 화성인 여자가 다리 넷 달린 아이가 기어나오는 그 거대한 알을 낳는다는 것은 당치도 않는 일이라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갓 낳은 알은 여느 거위 알과 그다지 다름이 없는 크기로, 더구나 햇빛을 받기 전까지는 자라기 시작하지 않으므로 족장들은 저장실에서 부화기까지 한 번에 수백 개의 알을 문제없이 나를 수 있었던 것이다.
와푼 족의 알 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되어 우리는 동물을 쉬게 하기 위해 멈췄다. 그날 두 번째의 흥미있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사이의 일이었다. 그날 나는 두 마리의 동물을 번갈아 쓰고 있었으므로 한 마리의 동물 등에 얹혀 있던 천을 다른 한 마리의 동물 등으로 옮기고 있었는데, 자드가 옆으로 다가와서 아무 말도 없이 장검을 빼더니 무서운 기세로 나의 동물을 내리쳤다.
이런 경우 녹색 화성인이 어떻게 응하는지 그다지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굉장히 격노한 나머지, 권총을 빼어서 이 짐승을 쏘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은 장검을 빼들고서 나를 겨누고 있었으므로, 공정한 결투를 하려면 그가 택한 무기와 같은 것이나, 아니던 그 이하의 무기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도 장검을 뺄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무기보다 약한 무기라면 써도 되게끔 되어 있었으므로 단검이나 단도나 도끼나 또는 만일 나만 상관없다면 주먹을 쓸 수도 있었다. 어느 것을 택하거나 나의 마음대로이지만, 상대방이 장검만으로 겨누고 있을 때는 총이나 활이나 창은 금물이다.
그가 전부터 장검의 솜씨를 자랑하는 있던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나도 상대방과 같은 무기를 쓰기로 했다. 나는 이왕 그를 쓰러뜨릴 바에는 그가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무기로 쳐부수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투는 끝없이 계속되어 다시 행군을 시작한 것은 한 시간이나 늦어져서였다. 우리들의 결투를 위하여 지름 30미터쯤 되는 장소를 비워 주고 모두들 빙 둘러섰다.
우선 자드는 황소가 이리를 향해 덤벼들듯이 돌진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민첩하게 움직였다. 내가 옆으로 비켜서서 그의 공격을 되받아 칠 때마다 그는 그대로 내 옆을 맹렬한 기세로 빠져나가, 나의 칼에 팔이며 등을 맞기가 일쑤였다. 처음 시작부터 그는 가볍기는 하지만 여섯 군데나 상처를 입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내 쪽에서는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기회를 여간해서 잡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전법을 바꾸어 나왔다. 빈틈없이 겨누어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전법으로, 힘으로는 이루지 못한 일을 이번에는 꾀를 써서 해 보려고 했다. 내가 참을성에 있어 그보다 뛰어나다는 것과 화성의 인력이 적기 때문에 굉장히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 없었다면 그처럼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한동안 상대방에게 이렇다할 상처도 주는 일 없이 같은 장소를 빙빙 돌며 서로 틈을 엿보고 있었다. 길게 뻗은 바늘과 같은 날카로운 칼은 햇빛을 받아 번뜩이고 무섭게 마주칠 때마다 흰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정적 속으로 울려 퍼졌다.
마침내 나보다 더 지쳤다는 것을 깨달은 자드는 접근전으로 급소에 일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두려고 결심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가 돌진해 온 바로 그때, 번쩍 한 줄기의 빛이 정면으로 비쳐 와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가 접근해 온 것도 보이지 않았고, 무서운 칼 끝이 급소를 향해 날아온다는 것을 느낀 듯싶어 무턱대고 옆으로 비키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왼쪽 어깨에 심한 아픔을 느끼며, 비켜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상대방의 모습을 찾아 눈길을 돌렸을 때, 어떤 광경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은 지금 막 일시적으로 장님 상태에 빠져서 받은 상처를 잊게 할 수 있을 정도의 광경이었다. 데저 소리스의 수레 위에 세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앞에 있는 군중의 머리 너머로 이 싸움을 보기 위해서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것은 데저 소리스와 소라와 사르코쟈였는데, 흘긋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을 때 나는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데저 소리스가 젊은 암호랑이처럼 맹렬하게 사르코쟈에게 덤벼들어 위로 올린 사르코쟈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쳐서 떨어뜨렸다. 그것은 햇빛을 받아 번쩍 섬광을 내고 빙빙 돌며 땅 위로 떨어졌다. 이것으로 그 싸움의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눈을 안 보이게 했던 것의 정체를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사르코쟈가 스스로 손을 쓸 필요도 없이 나를 죽일 방법을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도 알았다. 그뿐이 아니다. 나는 지금 하나의 광경을 목격하고 그 순간 나의 적에 대한 일을 완전히 잊고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데저 소리스가 사르코쟈의 손에서 작은 거울을 쳐서 떨어뜨리자 사르코쟈는 증오와 그 속임수가 폭로된 분노 때문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단도를 홱 뽑기가 무섭게 데저 소리스를 향해 무서운 일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 소라가, 그 사랑스럽고 충실한 소라가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큰 칼이 장식을 단 그녀의 가슴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거기까지밖에 볼 수 없었다.
나와 결투를 벌이고 있는 상대방은 다시 태세를 고쳐, 싸움은 아주 흥미진진한 단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마지못해 상대를 해주고 있었으나, 속마음은 다른 데로 가 있어 건성으로 손을 놀리고 있었다.
몇 번이나 심하게 부딪치다 보니 갑자기 상대방의 날카로운 칼끝이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이미 받아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칼을 힘껏 앞으로 내밀며 온 몸으로 덤벼들었다. 안되면 상대방과 서로 맞찌르며 죽을 각오였다. 강철의 칼날이 나의 가슴을 콱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눈 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은 혼란 상태에서 소용돌이쳤으며, 무릎이 힘없이 꺾어지는 것을 느꼈다.소라의 신상 이야기
의식을 되찾자, 쓰러져 있었던 것은 불과 한순간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서 칼을 찾았다. 칼은 자드의 녹색 가슴에 깊숙하게 손잡이 있는 데까지 박혀 있었다. 자드는 고대(古代) 바다 밑의 황토빛 이끼 위에 쓰러져서 숨져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차리자 그의 칼이 나의 왼쪽 가슴을 꿰뚫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늑골(肋骨) 표면의 근육 사이를 누비고 왼쪽 가슴의 중심부에 꽂혀, 어깨 바로 밑을 뚫고 나갔을 뿐이었다. 상대방을 찌르는 순간 몸을 피하여 상대방의 칼은 근육 밑을 꿰뚫었을 뿐이었으므로 아픔을 느끼기는 했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나는 몸에서 칼을 뽑아 낸 다음 상대방의 몸에서도 내 칼을 뽑았다. 그리고 끔찍한 시체를 뒤에 남기고 종자(從者)와 소지품을 실은 내 수레 쪽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언짢고 상처는 욱신욱신 아파 왔다. 관중들 사이에서 칭찬하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녹초가 되어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이런 일은 여자들의 특기인지라 나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 주었다. 그것은 치명상을 입어 즉사하지 않는 이상, 무슨 상처라도 그 자리에서 낫는 묘약(妙藥)이었다. 사신(死神)도 화성인의 여자에게는 한 팔 접어 두고 있을 정도이다. 이윽고 치로가 완전히 끝나자 피를 너무 많이 홀려서 정신이 좀 멍하고 상처 근처가 조금 쑤시는 것 말고는 그다지 아픔을 느끼지 않았다. 이 관통 상처를 만일 지구식으로 치료받았다면 적어도 며칠은 누워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치료가 끝나자 나는 서둘러서 데저 소리스의 수레 쪽으로 갔다. 가엾게도 소라는 가슴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녀는 사르코쟈에게 한 번 찔렸으나 대단한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사르코쟈의 단도는 소라의 금속제(金屬製) 가슴 장식의 가장자리에 맞아 빗나가는 바람에 조금 외상(外傷)을 입혔을 뿐이었다.
다가가 보니 데저 소리스는 비단천과 털가죽 위에 엎드려 늘씬한 다리를 떨면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몰랐고, 수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소라에게 내가 말을 걸고 있는 것도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머리를 데저 소리스에게로 기울이면서 소라에게 물었다.
"저 여자는 상처를 입지 않았나?"
"네, 그 여자는 당신이 죽은 줄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제 할머니네 애완동물의 이를 닦을 녀석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있겠군?"
나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저 여자의 일을 오해하고 있어요, 존 카터." 소라는 말했다. "나는 저 여자와 당신의 풍습을 잘 몰라요. 하지만 황통연면(皇統連綿)한 황제의 손녀딸이 자기보다 신분이 천한 자의 죽음을 그처럼 슬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니,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 거예요. 저 여자의 일족(一族)은 사랑스러운 민족이지만, 모든 바르슴 인과 마찬가지로 공정해요. 당신은 저 여자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했든가 아니면 창피를 주었을 거예요. 그래서 저 여자는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엔 당신을 용서하려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당신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있지만요." 소라는 말을 계속했다. "바르슴에선 여간해서 눈물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그 뜻을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데저 소리스 외에 지금까지 운 사람을 둘 본 일이 있어요. 한 명은 슬퍼서 울고, 또 다른 한 명은 분해서 눈물을 흘렸어요. 먼저 말한 사람은 우리 어머니예요. 어머니는 그 옛날 살해되기 전에 울었어요. 두 번째 사람은 사르코쟈예요. 그 여자는 오늘 나에게서 강제로 떼내어졌을 때 눈물을 흘렸어요."
"어머니도?" 나는 외쳤다. "그러나 소라, 소라는 어머니를 알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도." 그녀는 말을 이었다. "만일 당신이 이상한 바르슴 인답지 않은 신상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오늘밤에 제 수레로 오세요, 존 카터.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이야기를 들려 드릴께요. 자아, 이제 행군 개시의 신호가 났어요. 저쪽으로 가 보셔야지요."
"오늘밤에 갈께, 소라." 나는 약속했다. "데저 소리스에게 나는 펄펄하게 살아 있더라고 잊지 말고 전해 줘. 무리하게 만나는 것은 그만두겠어. 그리고 내가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고 말하면 안돼. 만일 나와 말할 기분이 들면 그녀 쪽에서 말을 걸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지."
소라는 행렬의 위치로 돌아가려고 움직이기 시작한 수레를 집어탔다. 나는 나의 탈것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부지런히 갔다. 그리고 모두들의 맨 뒷줄인 타르스 타르카스 옆의 내 자리로 힘껏 달려갔다.
우리가 노란 땅을 가로질러 긴 행렬을 이루고 늠름하게 행진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아름답게 꾸민 극채색(極彩色)의 수레가 250대, 앞쪽에는 약 200명의 말탄 전사와 족장(族長) 5명이 횡대(橫隊)를 이루어 100미터 간격으로 행진하고, 맨 뒤에는 같은 수의 인원이 같은 대형을 이루고 뒤따랐으며, 10기(騎) 또는 그보다 더 많은 말탄 전사가 행렬의 양쪽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밖에 여분으로 기르는 무거운 짐을 나르는 동물로서 지티다알이라 불리는 코끼리 같은 동물 50마리와 오륙 백 마리의 말이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일제히 달려가고 있었다. 남자 여자 모두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과 호화로운 보석 장식품을 몸에 달았으며 지티다알과 말(우리가 탄 동물)도 똑같이 장식됐을 뿐 아니라 그 사이사이에 눈부실 만큼 화려한 비단천과 털가죽과 깃털이 나부끼고 있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은 인도의 왕후(王候)마저도 선망(羨望)의 눈길을 보낼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수레바퀴도, 바닥에 두툼하게 살이 붙은 동물들의 발도 이 이끼로 덮인 해저(海底)에서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우리는 마치 거대한 환영(幻影)인 양 엄숙하게 행진했다. 다만 때때로 지티다알이 쫓기어 으르렁대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말이 싸움을 하여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기도 하여 그 고요를 깨뜨릴 뿐이었다. 녹색 화성인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입을 열 때는 대개 단음절(單音節)로 먼 곳에서 울려오는 듯한 우뢰 소리처럼 낮게 말했다.
우리는 이끼가 잔뜩 깔려 있는 길이 없는 황야를 가로질러서 행진했다. 이끼는 굵은 수레바퀴며 동물의 발에 밟혀 쓰러졌다가는 지나간 뒤에 다시 본디대로 꼿꼿이 일어서므로 우리가 지나간 흔적은 조금도 남지 않았다. 소리 하나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행진하는 우리의 행군은 바로 그 멸망해 가는 혹성(惑星)의 사해(死海)를 가는 사자(死者)의 망령(亡靈)으로 보였다. 사람과 동물의 대집단이 먼지도 내지 않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행진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화성에서는 겨울철에 경작된 지역에서만 먼지가 날 뿐이며, 그것마저도 그곳에선 센 바람이 불지 않으므로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
그날 밤은 이틀에 걸쳐서 목표로 삼고 행진해 온 언덕 기슭에다 캠프를 쳤다. 언덕은 이 바다의 남쪽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물들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마시지 못했었다.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 두 달 가까이나, 즉 서크를 떠나온 직후에 물을 마신 뒤로 물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타르스 타르카스의 이야기로는, 동물들은 거의 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바르슴을 덮고 있는 이끼만 먹고서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작은 이끼 줄기는 수분을 듬뿍 지니고 있으므로 그다지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동물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로 치즈 같은 음식과 식물유(植物乳)를 먹고 난 다음 나는 소라를 찾아나섰다. 그녀는 횃불 아래에서 타르스 타르카스의 마구(馬具)를 손질하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자 고개를 들고 웃는 얼굴로 맞아 주었다.
"잘 와 주셨어요. 데저 소리스가 잠들어 버려서 마침 혼자 쓸쓸했던 참이에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상대해 주지 않아요, 존 카터. 내가 너무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인가 봐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슬픈 숙명이에요. 나는 가끔 사랑도 희망도 지니지 않은 순수한 녹색 화성인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곤 해요. 하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 버렸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겠어요.
나의 신상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이것은 오히려 우리 부모의 신상 이야기예요. 당신 일이며, 당신 나라 사람들의 습관에 대해 내가 아는 바로 판단하면, 당신은 틀림없이 이 이야기를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러나 녹색 화성인 사이에서는 서크 족의 옛 노인들에게도 기억에 없는 사건이며, 더욱이 전설에도 없는 이야기랍니다.
우리 어머니는 자그마한 분이었어요. 정말 너무나도 작은 몸집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자격을 주지 않았을 정도였어요. 족장들은 주로 몸집이 큰 여자에게 아이를 낳게 했기 때문이에요. 또 어머니는 대부분의 녹색 여자들처럼 냉혹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다지 다른 사람들과 교제도 하지 않았으며, 흔히 멸망한 서크 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가까운 언덕에 올라가 활짝 핀 풀꽃 사이에 앉아서 생각에 잠기거나 꿈을 꾸며 살았지요. 이것은 지금 서크 족의 여자들 중에서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에요. 부모가 물려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머니는 그 언덕 위에서 젊은 전사를 만났어요. 놓아 먹이는 지티다알과 말이 언덕 저쪽으로 가 버리지 않도록 지키는 게 그 전사가 맡은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두 사람은 거의 서크 부족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나, 어느덧 여러 번 만나게 되자―물론 그 무렵 두 사람은 이미 우연히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자신에 관한 일이며 취미와 야심, 희망을 이야기하게 되었지요. 어머니는 그 전사를 믿고 일족(一族)의 잔인함과 앞으로도 사랑이 없는 지겨운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데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어요. 그리고 그의 차갑게 다문 입술에서 당연히 폭풍우와 같은 비난의 말이 둑이 터진 듯 쏟아져 나오려니 각오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않고서 어머니를 끌어안고 입을 맞춘 거예요.
두 사람은 6년 동안이나 그들의 사랑을 비밀로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타르 하쥬스의 종자였고 연인(戀人)은 자기 장신구를 달고 있는 그저 평범한 전사였어요. 만일 두 사람이 서크 족의 전통을 배반한 일이 드러나면 둘 다 타르 하쥬스와 군중이 지켜보는 투기장(鬪技場)에서 벌을 받게 될 거예요.
내가 태어나기로 되어 있던 알은 고대 서크의 거의 폐허화된 탑 중에서 가장 높고 가까이 가기도 힘든 탑 위의 큰 유리그릇 아래에 숨겨 두었어요. 알은 부화되기까지 5년 동안이나 거기 놓여 있었는데, 그 사이 어머니는 1년에 한 번씩 찾아왔었습니다. 어머니는 일부러 자주 찾아오는 것을 피하려 하셨지요. 심한 양심의 가책으로, 자신의 일거일동이 감시를 받고 있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했던 거예요. 그러는 동안에 나의 아버지는 공훈을 세우고 몇몇 족장에게서 장신구를 빼앗았어요.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소홀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의 가장 큰 야망은 다름 아니라 타르 하쥬스 그 사람에게서 장신구를 빼앗는 일이었어요. 그리하여 서크 족의 지배자가 되어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연인을 떳떳이 내 것이라고 선언하고, 동시에 만일 사실이 드러나면 곧 처분 당하고 말 자기 자식을 권력으로서 지키려 한 것이지요. 불과 5년 동안에 타르 하쥬스의 금속 장식을 빼앗겠다는 일은 당치도 않은 꿈이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승진은 눈부실 만큼 빨랐으며 이윽고 서크 족의 위원회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야심을 이룩할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되었어요―적어도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구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게 되었어요. 얼음이 얼어붙은 남방(南方)으로 장도(長途)의 원정을 떠나라는 명령이 내렸기 때문이지요. 그 고장의 주민들과 전쟁을 일으켜 털가죽을 약탈하기 위해서였는데, 어쨌든 필요한 것을 자기네들의 손으로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전쟁을 하여 약탈해 오려는 것이 녹색인의 수단 방법이었지요.
아버지는 떠난 뒤 4년 동안 소식이 없었어요.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3년이나 늦은 뒤였죠. 왜냐하면 아버지가 떠난 뒤 약 1년 뒤에 부족의 부화기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데리러 간 원정대의 일행이 돌아오기 직전에 탑 위의 알이 부화한 거예요. 그렇게 되자 어머니는 나를 헌 탑에 그대로 숨겨 두고 밤마다 찾아와서는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 주었습니다. 그런 사랑은 일족의 공동 생활 속에 있었으면 서로 맛볼 수 없었을 거예요. 부화기에서 원정대가 돌아오면 타르 하쥬스의 본진(本陣)에 할당되는 아이들 속에 나를 집어넣는 일이 어머니의 염원(念願)이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녹색 화성인의 옛 풍습을 어긴 일이 드러났을 때 틀림없이 내려질 벌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는 서둘러서 나에게 부족의 말과 풍습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어느날 밤 지금 제가 당신에게 말해 준 이야기를 들려 주었어요. 그리고 그 일을 절대로 비밀로 해 둘 것, 다른 서크 족의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면 다른 아이들보다 나의 교육 정도가 앞서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눈치채이지 않도록 조심할 것, 남들 앞에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나 내가 자신의 행동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나타내면 안된다는 것을 거듭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고서 귀에다 대고 아버지의 이름을 몰래 속삭여 주었어요.
그때 탑 속의 어두운 방 안에 밝은 불빛이 비쳤습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사르코쟈가 서 있었어요. 그녀는 증오와 모멸(侮蔑)로 흥분하여 심술궂은 눈을 번뜩이며 어머니를 노려보는 것이었어요. 그녀는 어머니를 향해 마구 욕을 퍼부어 댔어요. 어린 나는 무서움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지요. 분명히 그녀는 우리 이야기를 모조리 다 들어 버렸던 거예요. 그녀는 어머니가 밤마다 잠자리에서 빠져나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므로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을 품어 왔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운명의 날 밤, 어머니의 뒤를 밟았던 거예요.
다만 그녀는 어머니가 속삭여 준 아버지의 이름은 못 들었습니다. 즉 모르게 된 거예요. 그것은 그녀가 거듭 어머니에게 불의(不義)의 상대방의 이름을 고백하라고 못살게 군 것으로도 알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욕을 하고 괴롭히고 달래어 보아도 어머니에게서 알아 낼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나를 이유 없는 시달림에서 구해 내기 위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사르코쟈에게 그것은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며, 자식에게도 말할 생각이 아니라고 말한 거예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사르코쟈는 이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타르 하쥬스에게로 달려갔어요. 그녀가 가 버린 틈을 타서 어머니는 눈에 띄지 않도록 나를 비단과 이불에 싸서 거리로 나와 변두리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어요. 그리운 사람이 있는 먼 남쪽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갔던 거예요. 그 사람에게 보호를 요구할 수는 없더라도 그저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거예요.
도시의 남쪽 끝에 가까이 왔을 때, 언덕 사이를 누비고 도시의 문으로 통하는 한 갈랫길 쪽에서 이끼 낀 평탄한 땅을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어요. 그 길은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나 도시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어요. 우리의 귀에 들린 것은 날카로운 말의 울음 소리와 지티다알의 울부짖음과 가끔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쳤어요. 이런 소리들은 일대(一隊)의 전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어요. 갑자기 어머니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아버지가 원정에서 돌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서크 족 특유의 육감만으로 덮어놓고 뛰어나가서 맞아들일 수는 없었습니다.
문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이윽고 그들은 큰 거리로 들어왔어요. 그리고 대형을 벗어나 길 양쪽 벽이 있는 곳까지 쫙 퍼져 와글와글대며 밀려왔습니다. 행렬의 선두가 어머니 옆을 지나갈 때, 조그만 달이 튀어나온 지붕으로 얼굴을 내밀어 신비적인 빛으로 그 자리의 광경을 뚜렷이 비춰 주었어요. 어머니는 잘되었다 싶어 그림자를 이루고 있는 문 안쪽으로 몸을 웅크리고 들어갔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원정대가 아버지의 일행이 아니라 아기들을 데리고 돌아온 일대라는 것을 알았던 거예요. 그 자리에서 어머니는 계획을 결정했어요. 큰 수레가 우리가 숨어 있는 바로 옆을 지나갈 때 어머니는 수레 뒤에 매달아 끌고 가는 판자 위에 살짝 올라타 높은 가로대 뒤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앉아서 미친 듯한 사랑으로 나를 끌어안았습니다.
나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나를 끌어안을 수도 없고 또 두번 다시 서로 얼굴을 대할 수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광장의 혼란을 틈타 어머니는 나를 다른 아이들 속에 집어넣어 버렸어요. 여행하는 동안 호위를 하던 자들은 임무에서 벗어나고 우리는 커다란 방에 함께 집어넣어졌는데,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던 여자들이 먹을 것을 갖다 주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우두머리와 족장의 종자들 틈 속으로 분산시켰어요.
그날 밤을 마지막으로 나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타르 하쥬스에게 투옥되었지요.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어머니에게 실토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은 아주 잔인하고 굴욕적인 고문을 하여 모든 괴로움을 당했으나,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입을 열지 않아 아버지에 대한 정절(貞節)을 지켰으며, 마침내 어떤 무서운 고문을 받다가 타르 하쥬스와 족장들의 큰 웃음 소리를 들으며 숨을 거둔 거예요.
이것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내가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자기와 같은 운명을 걷는 일이 없도록 자기 손으로 죽여서 시체를 흰 원숭이의 먹이로 줘 버렸다고 그들에게 말했답니다. 사르코쟈만이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대요. 그녀가 나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의아심을 품는 것은 지금도 느끼고 있어요.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구태여 밝힐 마음은 없어요.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틀림없이 그러리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원정에서 돌아와 어머니의 말로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있었어요. 타르 하쥬스가 이야기해 준 거예요. 그래도 아버지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조금도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어요. 다만 타르 하쥬스가 어머니의 단말마(斷末魔)의 괴로움을 유쾌한 듯이 말했을 때 웃지 않았을 뿐이에요. 그 일을 계기로 하여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람이 되었어요. 나는 아버지가 대망(大望)을 이루고 타르 하쥬스의 시체를 발로 짓밟을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버지는 처참한 복수를 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은 처음에 아버지를 변모시킨 그 40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아버지의 가슴 속에서 무섭게 타오르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어요."
"그래, 소라의 아버님 말인데, 그 분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자기의 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나뿐이에요. 그리고 아버지가 사랑하던 사람을 죽음과 고문으로 못살게 굴었던 것은 사르코쟈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와 타르 하쥬스와 사르코쟈, 셋뿐이에요."
우리는 한동안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서운 과거의 음침한 추억에 잠기고, 나는 나대로 무자비하고 어리석은 풍습 때문에 사랑이 없는 가혹하고 증오에 찬 생활을 보내는 숙명을 걸머진 불쌍한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마침내 그녀는 입을 열었다.
"존 카터, 이 바르슴의 차가운 죽음 속에 발자국을 남긴 참다운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에요.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아버지의 이름을 가르쳐 드리지요. 언젠가 당신이나 아버지나, 데저 소리스나 또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테니까요. 나는 당신에게 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 달라는 조건을 붙일 생각은 없어요. 시기가 찾아와 진상을 이야기하는 일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거든 그때 이야기해 주세요. 당신이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그 어수룩한 습성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믿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 나라 버지니아의 한 신사로서 자기 이외의 사람을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분이기 때문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타르스 타르카스입니다."도망 계획
서크로 가는 남은 도정(道程)은 평온했다. 벌써 여행길에 오른 지 20여 일이나 지났다. 두 해저(海底)를 가로질러서 도중에 여러 개의 폐도(廢道)를 지나기도 하고 우회(迂回)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폐도는 코랏드보다 작았다. 유명한 화성의 수로(水路), 즉 지구의 천문학자가 말하는 화성 운하를 두 번이나 건넜다. 수로 근처에 오면 강력한 쌍안경을 가진 한 전사를 훨씬 앞길까지 정찰병으로 파견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리고 적색 화성인의 대군(大軍)이 주위에 없다는 것을 알면 살짝 수로로 다가가서 어두워질 때까지 그곳에서 야영(野營)을 한다. 그리고 어두워진 뒤에는 개간한 토지로 바싹 다가가 그 일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고 있는 수많은 넓은 도로를 발견해 내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살그머니 빠져나가, 저쪽 황무지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이런 곳을 가로 건너갈 때는 도중에서 쉬지 않고 5시간씩 걷는 일도 있고, 또 하룻밤이 꼬박 걸리기도 했으므로 높은 담을 둘러싼 밭에서 빠져나갈 무렵에는 이미 날이 새기 시작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어둠을 헤치고 나가면―나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다만 바르슴의 천공(天空)을 굉장한 기세로 끊임없이 달려가는 가까운 쪽의 달이 때때로 주위의 풍경을 부분적으로 비쳐 주므로 지구의 농장과 같이 담을 두른 밭이며 지붕이 낮은 건물 등이 보였다. 많은 나무가 질서 정연하게 심어져 있고, 그 중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거목도 있다. 담을 둘러친 속에는 동물을 기르는 곳도 있었다. 우리들이 데리고 있는 동물의 냄새와 그 동물보다 더 지독한 인간의 냄새를 맡고 겁에 질려서 날카로운 소리로 울거나 코를 킁킁거렸으므로 그 담 안에 동물이 들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고 있는 길과 개간된 땅 복판을 세로로 달리는 폭이 넓고 흰 도로가 엇갈리는 지점에서였다. 그 남자는 길가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다가가자 남자는 한쪽 팔꿈치를 짚고 일어나서 행진해 오는 행렬을 흘끗 보더니,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놀란 고양이처럼 재빨리 가까이에 있는 담으로 기어올라갔다. 서크 족은 이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때는 싸움을 원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모두들 발걸음을 빨리했으므로 그 남자를 보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타르 하쥬스의 영토와 경계선이 되어 있는 사막을 향해 길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데저 소리스하고는 한 번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수레에 와도 좋다는 말을 전해 오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어리석은 자존심으로 자진해서 말을 붙이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 중의 남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여자에 대해서는 약하다는 것이 나의 신조이다. 연약한 남자나 바보 같은 작자가 곧잘 여자의 환심을 사는 놀라운 솜씨를 지닌 반면, 수많은 진짜 위험에도 두려워하기 않고 맞설 수 있는 용감한 남자일수록 마치 겁먹은 아이들처럼 꽁무니를 빼고 마는 법이다.
내가 바르슴에 온 지 꼭 30일 만에 그들은 서크의 고도(古都)에 이르렀다. 이 녹색인의 종족은 먼 옛날 그곳에 살고 있던 고대 민족으로부터 그 이름까지 물려받고 있었다. 서크 족은 모두 합쳐서 약 3만 명인데, 25개 부족(部族)으로 나누어져 있다. 각 부족은 저마다 한 사람의 왕을 모시고 그 밑에 둘째 우두머리와 족장이 있었으나, 모두 다 서크의 황제 타르 하쥬스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다섯 부족이 서크 시(市)에 본진을 두고 나머지는 타르 하쥬스가 지배하는 영토 곳곳에 있는 고대의 폐도에 분산되어 있었다.
오후 일찍 우리는 대중앙 광장으로 입장했다. 귀환한 원정대를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이는 없었다.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눈 앞을 지나고 있는 전사나 여자 이름을 불렀는데―이것이 종족의 정식 인사였다―그들이 두 사람의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자 갑자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데저 소리스와 나는 흥미의 표적이 되었다.
우리는 곧 새 숙소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남은 시간은 새로운 환경에 자리를 잡는 데 소비되었다. 나의 새 거처는 남쪽에서 광장으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에 면하여 있었다. 도시의 문에서 우리가 행진할 때 거쳐온 주요 도로였다. 숙소는 그 광장의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한모퉁이에 있었으며, 나는 건물 하나를 독점하게 되었다. 코랏드의 유달리 두드러지게 특징있던 그 화려한 건축미가 여기서도 곧잘 눈에 띄었다. 다만 이쪽이 좀더 스케일이 웅대하고 호화스럽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내가 살 집은 지구라면 가장 위대한 황제가 살아도 알맞을 만한 저택이었는데, 이 기묘한 화성인들은 방의 크기를 제외하고는 건물 자체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았다. 요컨대 건물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타르 하쥬스는 전에는 널따란 공회당(公會堂)이었으리라고 생각되는 도시 중에서도 가장 큰 건물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건물은 주거로는 전혀 적당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큰 건물은 롤크워스 프토멜의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그 아래 계급 왕의 것이었는데, 다섯 왕의 최하위까지 차례대로 조금씩 작았다. 전사들은 자기가 부하로서 소속되어 있는 상관과 함께 살든가, 아니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살고 있는 사람이 없는 몇천 개의 건물 중에서 마땅한 숙사를 찾아낸다. 다만 그것은 자기의 담당 구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각 부족은 저마다 도시 안에서 특정한 구획을 지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가 속하는 부족의 구획 범위 안에서 건물을 선택해야만 했는데, 왕만은 예외로서 그들은 모두 광장에 면한 대저택을 차지하고 있었다.
겨우 집 안을 다 치우고 나자, 아니 치웠다기보다 치워져 있는 것을 모두 살펴보았을 때에는 이미 땅거미가 밀려들고 있었다. 나는 소라와 그녀가 신병(身柄)을 맡고 있는 수인(囚人)을 찾아보려고 서둘러 문 밖으로 나갔다. 데저 소리스와 이야기를 하고 그녀를 도망치게 할 수 있도록 방법을 궁리해 낼 때까지는 적어도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리라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찾아 헤매다 보니 커다랗고 새빨간 해 윗부분이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자 그때 나의 숙사 맞은편에 있는 광장 옆의 건물 이층 창문에서 울러가 흉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건물의 이층으로 통하는 나선상의 통로를 단숨에 뛰어올라가서 도로에 면한 큰 방으로 달려들어갔다. 울러는 미칠 듯이 기뻐하며 나를 맞아들였다. 커다란 몸집으로 달려들었으므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나를 만난 것을 너무도 기뻐하여 혹시 잡아먹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울러는 온 얼굴에 입만 있는 듯이 크게 벌린 채 세 줄로 늘어선 엄니를 드러내 놓고 도깨비처럼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며 쓰다듬어 주고 나서 밀려오는 초저녁의 어둠 속에서 데저 소리스가 어디에 있을까 하고 재빨리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불러 보았다. 방 안쪽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대답이 들려 왔다. 나는 서둘러서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고색 창연한 나무의자 위에서 비단과 털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앉아 있었다. 내가 그대로 버티고 서 있으니까 그녀는 일어서서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아니, 서크의 족장 나리가 포로 데저 소리스에게 무슨 볼일이시지요?"
"데저 소리스, 나는 당신이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을 지키고 위로해 주려던 내가 당신을 화나게 하고 마음을 상하게 했다니 뜻밖입니다. 만일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도망치기 위해서는―그 일이 가능하다면 말입니다만―나를 도와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당신에 대한 소원이 아니라 나의 명령입니다. 당신이 무사히 아버님이 계신 궁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나를 마음대로 대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그 날까지는 내가 당신의 주인입니다. 당신은 나에게 복종하고 도와 줘야 합니다."
그녀는 진지한 눈초리로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듯했다.
"당신이 하시는 말은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아이와 어른, 그리고 촌스러움과 기품(氣品)이 뒤섞인 이상한 분이에요. 적어도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당신의 발 밑을 보십시오, 데저 소리스. 나의 마음은 저 코랏드에서의 하룻밤 이후로 지금도 역시 그곳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심장의 고동을 영원히 멎게 할 때까지 나의 마음은 언제까지나 당신의 것입니다."
그녀는 옆으로 다가와 무엇인가를 살피는 듯한 기묘한 손짓으로 아름다운 두 손을 내밀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지요, 존 카터?"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적어도 당신이 녹색인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될 때까지는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결심한 일을 지껄이고 있는 겁니다. 지난 20일 동안 당신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일이지요. 데저 소리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나의 몸과 마음은 모두 당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신을 섬기고, 당신을 위해 싸우고, 당신을 위하는 일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한 가지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일족(一族)으로 되돌아가서 몸의 안전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나의 명령에 반항하거나 또는 별 수 없이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 달라는 일입니다. 당신에 대한 일은 무엇이든 다 스스로 우러나오는 나의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일이 기뻐서 하는 일입니다."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하지요, 존 카터. 나를 위해서 일을 해주시려는 당신의 참마음은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베풀어주시는 행위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하겠어요. 당신의 명령에 절대로 복종하겠어요. 나는 마음 속으로 두 번이나 당신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어요. 다시 사과드리겠어요."
소라가 들어왔으므로 밀담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소라는 여느 때의 냉정하고 다부진 기질과 어울리지 않게 완전히 이성을 잃고 있었다.
"저 무서운 사르코쟈가 타르 하쥬스를 만났어요." 그녀는 소리쳤다. "그리고 광장에서 들은 소문에 의하면, 당신들 두 분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거의 살아날 가망성이 없어요."
"무슨 소문인데요?" 데저 소리스가 물었다.
"일족(一族)들이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경기대회(競技大會)에 모이는 대로 곧 당신네들을 대투기장의 미쳐 날뛰는 캬롯트(犬山) 떼 속에 집어던진다고 해요."
"소라." 나는 말했다. "소라는 서크 인이지만 그 종족의 풍습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싫어하고 있어. 어때, 우리하고 함께 이곳을 도망치지 않겠어? 틀림없이 데저 소리스가 자기의 일족 속에 소라가 살 장소를 마련해 주고 또 보호해 줄 거야. 저쪽으로 간다고 해도 소라의 운명이 이곳에 있을 때보다 더 나빠지지는 않을 테니까."
데저 소리스도 외쳤다.
"맞아요. 우리 함께 가요. 적색인이 있는 헤리움으로 가는 편이 여기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이 우리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주선해 드리겠어요. 뿐만 아니라 당신이 천성적(天性的)으로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족의 규칙에 의해 결코 혜택받을 수 없는 사람과의 애정이 있는 생활을 약속하겠어요. 우리와 함께 가기고 해요, 소라. 당신을 두고 갈 수도 있지만, 만일 당신이 우리를 도와 주기 위해서 보고도 못본 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틀림없이 심한 고통을 겪게 될 거예요. 당신은 비록 심한 고통을 당할 우려가 있어도 우리의 도망을 방해할 사람은 아니에요. 그것은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와 함께 가도록 해요. 햇빛과 행복에 찬 나라, 사랑과 호의와 감사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가기로 해요. 자아, 우리와 함께 간다고 말해 줘요. 소라, 부탁이에요."
"헤리움으로 통하는 대수로(大水路)는 불과 50마일 밖에 있습니다." 소라는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발이 빠른 말이면 세 시간 안에 달릴 수 있겠지요. 거기서 헤리움까지 5백 마일 도중의 태반은 인적이 드문 지역이에요. 그들은 곧 알아차리고 추적할 거예요. 잠시 동안이라면 대수림(大樹林) 속에 몸을 숨길 수도 있겠지만, 도망칠 가망성은 우선 없어지는 거예요. 그들은 헤리움 입구까지 쫓아갈 거예요. 당신네들은 그들을 잘 모르고 있어요."
"그밖에 헤리움으로 이르는 길은 없소?" 나는 물었다. "우리가 지나갈 도로가 있는 고장의 약도를 그려 주지 않겠소, 데저 소리스?"
"네" 하고 그녀는 대답하고 머리에서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뽑아 내더니 생전 처음 보는 바르슴의 지도를 대리석 마루 위에다 그렸다. 수많은 긴 직선이 때로는 평행으로 때로는 방사상(放射狀)으로 큰 원형(圓形)을 향해 집중되고 여러 방향으로 가로 세로 교차되어 있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선은 수로이고, 원은 도시라고 한다. 그리로 훨씬 먼 북서쪽에 있는 원이 헤리움이라고 그녀는 지적했다. 그밖에도 더 가까운 곳에 많은 도시가 있었으나, 그들이 헤리움에 대해서 우호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므로 그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그녀는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방 안 가득히 비치는 달빛 아래에서 세밀히 지도를 관찰한 뒤, 마지막으로 나는 여기서 훨씬 북쪽에 있는, 더욱이 헤리움으로 통한다고 생각되는 하나의 수로를 가리켰다.
"이 수로는 당신 할아버지의 영토를 꿰뚫고 있는 게 아닙니까?"
"네, 하지만 그것은 여기서 2백 마일 북쪽이에요. 우리가 서크로 오는 도중에 건너온 수로 가운데 하나이지요."
"우리가 그렇게 멀리 있는 수로를 건너서 도망치리라고는 그들은 생각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도망하기엔 아주 적당한 코스라고 생각되는데요."
소라는 내 말에 찬성했다. 그리고 오늘 밤 내가 말 위에 안장을 올려놓는 대로 셋이서 빨리 서크를 출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먼 거리는 말을 너무 급히 달리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각기 이틀치의 음식과 마실 것을 싣고, 한 마리는 소라가 타고 또 한 마리에는 데저 소리스와 내가 함께 타기로 했다.
나는 소라에게 데저 소리스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거리를 빠져나가 도시의 남쪽 변두리로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그곳에서 그녀들과 만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필요한 털가죽과 비단과 식량을 모으는 일은 그녀들에게 맡기고 나는 살그머니 아래층 뒤로 돌아가서 안뜰로 나왔다. 동물들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 모양인지 부스럭 움직이고 있었다. 밤에 잠들기 전에는 그런 상태로 지내는 것이 그들의 습성인 것이다.
건물 그늘에서도 밝은 화성의 달빛 아래에서도 말과 지티다알의 한떼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지티다알은 낮은 소리로 울어 대고 말은 가끔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이 째지는 소리를 질렀다.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니, 이 동물들은 죽을 때까지 이렇게 놓아 먹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사람이 옆에 없으므로 어느 정도 조용해졌는데, 나의 냄새를 맡자 그들은 더욱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며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밤에 혼자서 말들이 떼지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첫째 몹시 소란스러워지면 근처에 있는 전사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이상한 생각을 품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사소한 일이 원인이 되어, 아니 원인 같은 것은 없더라도 커다란 숫말이 다가와서 덤벼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남몰래 더구나 신속하게 일을 진행해야 하므로 오늘밤 만은 그들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위급할 때는 가까이 있는 문이나 창문으로 뛰어들어 몸의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놓고 건물 옆에 딱 붙어서서 안뜰 뒤쪽에서 거리로 나가는 큰 문을 향해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갔다. 그리고 출구에 이르렀을 때 조그만 목소리로 나의 두 마리의 말을 불렀다. 그러자 바로 안뜰 저쪽에서 두 마리의 거체(巨體)가 웅성거리는 동물의 산을 헤치고 이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성질이 거칠고 우둔한 동물의 애정과 신용을 얻어 두어야 한다는 선견지명을 내려주셨던 신의 섭리에, 나는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두 마리의 동물은 나에게 다가와 콧마루를 나의 몸에 문지르며 늘 상(賞)으로 주고 있는 약간의 먹이를 달라고 졸랐다. 나는 문을 열고 두 마리의 거대한 동물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고, 그 뒤를 따라 나도 살짝 나와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에서 안장을 얹거나 올라타지 않고 건물 밑의 그늘진 곳으로 조용히 걸어서 데저 소리스와 소라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통하는 인적 없는 큰 거리로 향했다. 마치 망령(亡靈)처럼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리를 나는 발소리를 죽여 가며 걸어갔다. 그리고 도시 저편의 평원(平原)이 보이는 곳으로 오기까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소라와 데저 소리스라면 누구에게도 눈치채이지 않게 약속 장소로 오는 데 그다지 곤란을 느끼지 않겠지만, 나는 몸집이 큰 말을 두 마리나 끌고 가니 만큼 자신이 없었다. 해가 진 뒤이므로 전사가 도시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우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먼 곳으로 떠나는 일 이외에는 아무 데고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드디어 무사히 약속 장소에 이르렀으나 중요한 데저 소리스와 소라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떤 큰 건물 현관 입구로 말을 끌고 들어갔다. 아마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여자 중 하나가 소라에게로 놀러 오는 바람에 떠나는 시간이 늦어졌으려니 하고 생각하며 나는 특별히 불안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또 반시간이 흐르자 나는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불안스러워서 더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때 밤의 정적을 깨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그 소리로 미루어 보아 남몰래 자유를 구하여 탈출을 꾀하는 도망자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곧 내 옆에까지 왔다. 나는 출입구의 어둠 속에서 그것이 말을 탄 전사들의 대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지나치며 남긴 말을 듣고 나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그 녀석은 도시를 벗어난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니까......"
거기까지 들었으나 그들은 그곳을 지나쳐 버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우리의 계획은 탄로나고 만 것이다. 이것으로 무서운 단말마를 맞이하기 전에 도망칠 기회는 거의 없어져 버렸다. 이렇게 되니 차라리 들키지 않게 데저 소리스의 집으로 되돌아가서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토록 큰 말을 끌고서 그곳까지 간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아마도 이미 온 거리가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고 잠이 깨어 있을 것이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고대 화성 도시에서는 안뜰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건물이 늘어서서 각기 하나의 구획(區劃)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말에게 따라오라고 소리를 지르며 더듬더듬 어두운 실내로 들어갔다. 말의 큰 몸집으로는 지나가기 힘든 문도 있었지만, 도시의 중요한 장소에 면한 건물은 거의 다 크게 설계되어 있었으므로 몸을 틀어서 걸리지 않고 간신히 빠져나갈 수가 있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안뜰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내가 예상했었던 대로 그곳에는 그 이끼 같은 식물(植物)이 쫙 깔려 있었다. 이것으로 전에 있던 곳으로 되끌어다 넣게 될 때까지 말의 먹이가 확보된 셈이었다. 말들이 여기서 만족하고 온순하게 있어 주리라는 확신은 있었다. 발견될 우려도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이런 변두리의 건물에는 녹색인이 두려움에 떠는 유일한 것―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즉 바르슴의 크고 흰 원숭이가 가끔 나타나므로, 그들은 안쪽으로는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말에서 안장을 떼어 내어 지금 안뜰로 들어올 때 지나온 뒷문 바로 안쪽에 감추고 말을 놓아 준 다음, 부지런히 안뜰을 가로질러서 건물 뒤로 돌아가 거기서 큰 거리로 나갔다. 일단 출구에 몸을 숨기고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 큰 거리를 부지런히 건너가 맨 먼저 눈에 띄는 문을 지나 안뜰로 들어갔다. 큰 거리를 건너갈 때는 발견될 위험성이 조금 있었지만 어쨌든 안뜰을 따라 무사히 데저 소리스의 숙사 뒤뜰에 이를 수 있었다.
의례 여기에도 근처의 건물에 살고 있는 전사들의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면 전사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데저 소리스가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뒤뜰 쪽에서 이 건물을 본 일이 있었으므로―우선 그녀의 방이 건물의 어디쯤에 있는지를 되도록 정확하게 어림잡았다. 그리고 몸에 비해 강한 체력과 민첩함을 이용하여서 단숨에 펄쩍 뛰어 그녀의 방 뒤로 보이는 이층 창틀을 잡았다. 그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건물 앞쪽으로 몰래 걸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방문 앞에 닿기 전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와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대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고 안에 있는 것이 데저 소리스인지 들어가도 위험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밖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정말 조심한 보람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들은 것은 몇 명의 남자들의 걸걸한 목소리였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정보를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껄이고 있는 것은 족장이고, 네 명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참이었다.
"그러니 만일 그놈이 이 방으로 뛰어들거든 말이야―아마 그 변두리에 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틀림없이 되돌아올 테니까―그때 너희들 네 명은 그 녀석에게 덤벼들어 무기를 빼앗는 거야. 네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들어야 돼. 그리고 녀석을 꽁꽁 묶어서 황제의 궁전 지하 감옥으로 끌고가 쇠사슬에 단단히 매야 해. 타르 하쥬스님이 분부를 내리시면 곧 데리고 나갈 수 있도록 말이야. 아무하고도 말을 하게 하면 안돼. 그 녀석이 오기 전에는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그 여자가 돌아올 염려는 없어. 지금쯤은 타르 하쥬스님에게 안겨 있을 테니까. 그 여자도 불쌍해. 어쨌든 타르 하쥬스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니까. 사르코쟈는 대단한 여자야. 오늘 밤의 일은 아주 훌륭했어. 자아, 이제 가 보겠는데, 그놈을 놓치면 네놈들의 시체를 이스 강의 차가운 물 속에 집어던져 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서크의 황제
이야기가 끝나자 족장은 방을 나오려고 내가 서 있는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지금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벌써 불안감이 가슴에 가득찼다. 나는 살짝 그 자리를 떠나 먼저 들어왔던 대로 안뜰로 되돌아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안뜰을 가로질러서 아까와는 반대쪽인 큰거리를 건너 힘들이지 않고 타르 하쥬스의 궁전 앞뜰로 나온 것이다.
아래층 방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으므로 우선 거기서부터 찾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문으로 다가가 몰래 안을 들여다보았다. 뜻밖에도 안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앞뜰에 면해 있는 대기실에는 전사며 여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3층을 올려다보니, 3층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3층으로 해서 건물 안으로 숨어 들어가기로 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3층 창문으로 뛰어올라 곧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내가 목표로 삼았던 방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복도로 나오니, 저쪽 방에 불빛이 보였다. 그 방의 출입문이라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 보니, 생각과는 달리 출입문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장소에서 두 층 아래, 즉 아래층에서 저 위쪽에 있는 천개(天蓋)와 같은 지붕까지 뚫려 있는 큰 홀의 채광을 위한 들창이었다. 이 원형의 대회당(大會堂)에는 족장과 전사와 여자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회당 한쪽 끝에는 넓은 단(壇)이 있었으며, 거기에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괴물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 남자는 녹색인 전사 특유의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두려움을 두루 갖추고 있었는데, 여러 해 동안 수욕(獸慾)에 빠져 온 탓으로 그런 성질이 더하여져 더욱 징그러워 보였다. 그 짐승 같은 용모에는 위엄이나 자존심이라고는 그림자조차 없었으며, 거체(巨體)를 쫙 펴고 주저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낙지와도 같았다. 여섯 개의 손발이 그 느낌을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강조하고 있었다.
그 괴물 앞에 데저 소리스와 소라가 서 있었다. 그가 튀어나온 큰 눈망울에 독살스러운 빛을 띠고 데저 소리스의 아름다운 지체(肢體)의 선을 기분 좋은 듯이 두루 바라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 오싹 소름이 끼쳤다. 데저 소리스는 지껄여 대고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한편 그는 낮은 목소리로 우물우물 말해서 뭐라고 대답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데저 소리스는 타르 하쥬스 앞에 의기양양한 듯 머리를 들고 꼿꼿이 서 있었다.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 보아도 그녀의 얼굴에서 모멸과 혐오의 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의연(毅然)하고 용기에 찬 시선으로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그녀야말로 그 가냘픈 몸의 구석까지 만세 일계(萬世一係)의 황통(皇統)을 전하는 자랑스러운 처녀인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구름을 찌를 듯한 큰 사나이 전사들 옆에서는 너무나도 작고 아담했으나, 그 몸에 지닌 위엄은 주위를 압도하여 옆에 있는 것은 모두 비소(卑小)한 존재로 보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으며 타르 하쥬스 쪽에서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타르 하쥬스는 포로만을 남기고 모두 방에서 나가도록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족장과 전사와 여자들은 천천히 주위에 있는 어두운 방 안으로 사라져 갔고, 데저 소리스와 소라만이 서크의 황제 앞에 남게 되었다. 단 한 사람 그 자리를 떠나기 싫어하는 모습의 족장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굵은 기둥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은 초조한 듯이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집념어린 증오를 띤 냉혹한 눈초리를 뚫어져라 타르 하쥬스에게 쏟고 있었다. 그 남자는 타르스 타르카스였다. 그의 얼굴에는 증오의 빛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듯이 잘 알 수 있었다. 40년 전에 이 짐승 앞에 섰던 다른 여자의 일이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다. 이 순간에 내가 그의 귓가에 대고 한 마디만 속삭였다면 타르 하쥬스의 치세(治世)도 끝을 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그도 방에서 나가 버렸다. 미워할 원수의 손아귀에 자기 딸의 운명을 내맡겼다는 것도 모르고.
타르 하쥬스는 일어섰다. 나는 그가 의도하는 것을 한편으론 두려워하고, 한편으론 예기하며 아래층으로 통하는 나선상의 통로로 달려갔다. 주위에 방해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서 들키지 않고 아래층 대회당에 이르렀다. 거기에 타르스 타르카스가 서 있었다. 난간 기둥 뒤에 몸을 붙였다. 내가 닿았을 때 타르 하쥬스는 지껄이고 있었다.
"헤리움의 프린세스여, 너를 무사히 너의 나라로 돌려보내면 너의 일족에게서 막대한 몸값을 뜯어 낼 수 있겠지.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너의 아름다운 얼굴이 고문의 괴로움에 일그러지는 것을 바라보는 편이 천 배는 더 즐겁다. 미리 말해 두지만 고문은 쉬 끝나지 않을 거야. 내가 너의 종족에 대하여 품고 있는 호의를 나타내려면 열흘 동안 즐겨도 모자랄 테니까. 너의 무참히 죽어 가는 꼴은 앞으로 영원히 적색인의 꿈길에 떠오르게 될 거야. 적색인의 아버지가 녹색인의 무서운 복수와 타르 하쥬스의 힘과 권위와 증오와 냉혹함을 말하면 아이들은 밤의 어둠 속에서 몸을 부르르 떨겠지. 그런데 고문하기 전에 너는 잠깐 동안 나의 것이 되는 거야. 그 일도 너의 할아버지 헤리움 황제 타르도스 모르스의 귀에 들어가게 해주지. 그 말을 들으면 그는 슬픈 나머지 땅바닥에 딩굴며 고민하겠지. 고문은 내일부터야. 오늘 저녁에 너는 타르 하쥬스의 것이 되는 거다, 자아!"
그는 상단에서 뛰어내려 왁살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손이 그녀에게 닿자마자 나는 오른쪽 손에 예리한 단검을 번득이며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다.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상대방이 눈치채기도 전에 단검을 그의 썩어 빠진 심장에 꽂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검을 휘둘렀을 때, 타르스 타르카스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의 분노와 증오는 정점에 달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타르스 타르카스가 오랜 세월을 참아가며 기다리는 환희의 순간을 가로챈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단검을 휘두르는 대신 오른쪽 주먹을 휘둘러 상대방의 턱을 정면으로 쳤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마룻바닥에 고꾸라졌다.
여전히 둘레는 괴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데저 소리스의 손을 잡고 소라에게 따라오라고 눈짓을 한 다음 셋이서 함께 대회당을 빠져나와 위층으로 서둘러 올라갔다.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뒷창문에 이르자 내가 몸에 지니고 있던 끈과 가죽을 사용하여 우선 소라를, 그리고 뒤이어 데저 소리스를 땅으로 내렸다. 그리고 나서 나는 사뿐히 뛰어내려 두 사람의 손을 잡아끌고 건물에 바싹 붙어, 앞뜰을 재빨리 돌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아까 내가 변두리에서 찾아온 경로를 더듬어 돌아간 것이다. 마침내 내가 남겨 두고 온 말이 있는 앞뜰에 닿았다. 마구를 달자 서둘러 건물 내부를 빠져나와 큰 거리로 나섰다. 한 마리에는 소라를 태우고, 데저 소리스는 내 뒤에 태워 세 사람은 서크의 도시를 뒤로 하고 언덕 사이를 누비며 남쪽으로 향했다.
북서쪽 방향에 가장 가까운 수로가 있었지만 도시를 우회하여서 그곳으로 가지는 않았고, 북동쪽으로 진로를 잡아 헤리움으로 통하는 다른 주요 수로가 치닫고 있는 이끼가 낀 광야(廣野)로 나갔다. 그 수로까지는 무려 2백 마일의 위험한 도정(道程)이 기다리고 있다.
서크에서 꽤 멀리 올 때까지 세 사람은 한 마디도 지껄이지 않았는데, 가만히 우는 데저 소리스의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나를 꽉 잡고, 귀여운 머리를 나의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우리 족장님, 만일 우리와 탈출에 성공하면 헤리움은 당신에게서 은혜를 받는 셈이 될 거예요. 만일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큰 은혜를 입은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헤리움의 사람들은 영원히 알 까닭도 없겠지만. 당신은 죽음보다도 무서운 운명에서 일족의 후예를 구해 주신 겁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옆으로 손을 돌려 그곳을 꽉 잡고 있는 그리운 사람의 자그마한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세 사람은 묵묵히 저마다의 생각에 잠기며, 달빛을 받은 노란 이끼 위를 쏜살같이 달렸다. 데저 소리스의 따뜻한 몸이 찰싹 밀착해 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기쁨으로 설레는 가슴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앞길에는 아직도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실정인데, 나의 마음은 벌써 헤리움의 문을 들어선 듯 즐겁게 고동치고 있었다.
당초의 계획이 무참히도 실패로 끝났으므로 식량과 음료(飮料)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그래서 이 여행의 첫 도정(道程)의 끝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말을 다그쳐, 말에게는 상당히 무리가 가는 속력으로 달렸다.
그날 하룻밤과 다음날 온 하루를 도중에서 두세 번 잠깐 쉬었을 뿐 계속 달렸다. 이틀째 밤에는 말도 지치고 우리도 녹초가 되었으므로, 이끼 위에 누워 대여섯 시간 수면을 취하고 해가 뜨기 전에 다시 출발했다. 다음날도 종일토록 말을 타고 달렸으나 오후 늦게까지 가도 바르슴 안을 달리고 있는 대수로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지인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길을 잘못 들었다는 무서운 사실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분명히 우리는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를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고, 낮에는 태양을 밤에는 달과 별을 길잡이로 삼아 간다는 것이 가능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어쨌든 수로는 보이지 않았고, 모두들 허기와 목마름과 피로함으로 금방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저 멀리 오른쪽에 낮은 산의 윤곽이 보이고 있었다. 저곳까지 가면 산마루에서 지금 찾고 있는 수로를 찾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는 그곳까지 가기로 했다. 목적지에 닿기 전에 해가 졌다. 세 사람은 피로와 쇠약에서 실신한 것처럼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 일찍 나는 뭔가 거대한 것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잠을 깼다. 깜짝 놀라서 눈을 뜨니, 울러가 몸을 갖다대고 있었다. 이 충실한 동물은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 위해, 발자국도 없는 황야를 넘어 뒤쫓아온 것이다. 나는 울러의 목을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그런 짓을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에 대한 그의 애정을 생각하면 눈물이 솟았으나 그래도 미안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윽고 데저 소리스와 소라가 눈을 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언덕에 다다르기 위해 곧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1마일도 가기 전에 나는 내가 타고 있는 말이 아주 가엾은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비틀거리는 것을 알았다. 어제 낮부터는 무리하게 달리지 않았는데도 말은 갑자기 힘없이 쓰러지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데저 소리스와 나는 보기 좋게 엎어치기를 당해 부드러운 이끼 위에 쓰러졌다. 그러나 거의 충격은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불쌍한 동물은 우리들의 무게에서 풀려났어도 일어설 수가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였다. 밤이 되면 서늘해지고, 휴식을 취하면 곧 회복할 것이라고 소라가 말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버려 둔 채 굶어 죽게 하는 것도 불쌍한 생각이 들어 죽일 작정이었으나, 그대로 놓아두기로 했다. 마구를 떼어 한쪽에 팽개치고, 이 불쌍한 동물의 생사는 자연에 맡긴 채 우리는 남은 한 마리의 말과 함께 가는 데까지 갔다. 사양하는 데저 소리스를 억지로 남은 말에 태우고 소라와 나는 걸었다. 이리하여 우리가 고생하여, 목표로 삼고 가는 구릉에서 약 1마일 떨어진 곳까지 갔을 때의 일이었다. 데저 소리스가 말을 탄 대군(大軍)이 몇 마일 저쪽 언덕 사이의 산길을 줄지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그녀는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맨 먼저 보았던 것이다. 소라와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과연 수백 기(騎)의 기병이 뚜렷이 보였다. 그들은 남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그들이 우리를 체포하기 위해 파견된 서크 전사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으므로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급히 데저 소리스를 말 위에서 안아 내리고 말에게는 엎드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세 사람이 다 엎드려 되도록 웅크리고 있었다. 전사들의 주의를 끌게 되어서는 큰일이기 때문이다.
산길에서 줄을 지어 내려오는 것이 보이던 것은 불과 순간적인 일이었고, 그들은 산마루 뒤에 들어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에게 있어 그 산마루는 정말 하늘의 도움이었다. 만일 그들이 비록 잠깐이라고는 하나 더 이상 전망이 트인 곳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우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 마지막 한 사람이라 생각되는 전사가 산길에서 모습을 나타내어 멈춰 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소형이지만 강력한 쌍안경을 눈에 대고 해저(海底)의 사방팔방을 열심히 둘러본 것이다. 분명히 그 남자는 족장이었다. 왜냐하면 녹색인의 행군 대형은 족장이 종대(縱隊)의 뒤에 선다는 대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쌍안경을 이쪽으로 돌렸으므로 우리는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은땀이 온 몸의 털구멍에서 뿜어나왔다.
이윽고 쌍안경은, 우리들이 있는 곳으로 돌려져―그 자리에서 딱 멎었다. 세 사람의 신경은 극도의 긴장으로,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남자가 쌍안경을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잠깐 동안,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그 남자는 쌍안경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 막 산마루 뒤로 모습을 감춘 전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명령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부하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말머리를 돌리자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해 왔다.
성공의 가망성은 희박했으나 취할 길은 단 하나―되든 안 되든 급히 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엎드린 채 기묘한 형태를 이룬, 화성의 라이플 총을 어깨에 대고 겨냥을 멈춰 방아쇠를 조작(操作)하는 버튼을 눌렀다. 총알은 목표물에 명중하자 무섭게 터져 돌진해 온 족장은 달리고 있는 말등에서 떨어져 엎어졌다.
나는 후닥닥 일어나자 말을 일으켜 세워, 소라에게 데저 소리스와 함께 말을 타고 녹색인 전사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있는 힘을 다해 저 구릉까지 다다르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두 사람은 틀림없이 협곡(峽谷) 어딘가에 일시적인 은신처를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곳에서 굶주림과 목마름 때문에 죽는다 하더라도 서크 족의 손아귀에 들기보다는 나은 것이다. 호신용(護身用)과, 다시 잡혔을 때는 틀림없이 닥쳐올 무서운 죽음에서 두 사람이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나는 두 자루의 권총을 억지로 그들에게 갖게 했다. 그리고 나의 명령으로 이미 말을 타고 있는 소라의 뒤에 데저 소리스를 안아서 태웠다.
"잘 가시오, 공주님." 나는 속삭였다. "하지만 또 헤리움에서 만나뵙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보다 더 심한 경지에서 벗어난 일도 있으니까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했다.
"뭐라고요?" 그녀는 소리쳤다. "당신은 같이 가는 게 아닌가요?"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데저 소리스. 아무라도 여기 남아서 놈들을 한때나마 붙잡아 둬야 해요. 그리고 셋이 함께 도망치기보다 나 혼자 가는 편이 훨씬 손쉽게 도망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려 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소라를 향해 침착하고 위엄있는 어조로 말했다.
"도망쳐요, 소라! 데저 소리스는 여기 남아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겠어요."
그녀의 말은 나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졌다. 그 말을 지금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몇 번이고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녀의 달콤한 포옹에 단 1초 동안이라도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첫 키스를 하자 그녀를 안아올려 다시 소라 뒤에 태우고, 그녀를 힘껏 잡고 있으라고 엄격한 어조로 소라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말의 궁둥이를 철썩 손바닥으로 때려 두 사람을 싣고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데저 소리스는 끝까지 소라의 손을 떼어 내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돌아다보니 전사들이 산마루에 올라 족장을 찾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곧 족장을 발견했고 이어서 나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발견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이끼 위에 엎드려 사격을 개시하고 있었다. 라이플 탄창(彈倉)에는 마침 100발의 탄이 들어 있었고, 등에 멘 탄대(彈帶)에도 100발의 탄이 있었다. 나는 산마루 뒤쪽에서 선두로 되돌아온 전사들 전원이 죽든지 아니면 은신처를 찾아 허겁지겁 흩어져 도망칠 때까지 쏘고 또 쏘았다.
그러나 숨쉴 틈도 없이 몇천이라는 대군이 일제히 모습을 나타내어 무서운 기세로 돌격을 해 왔다. 나는 라이플 탄창이 빌 때까지 쏘았다. 그들은 나의 눈 앞에까지 밀고 들어왔다. 나는 흘긋 쳐다보고 데저 소리스와 소라가 언덕 사이로 모습을 감춘 것을 확인하자, 소용이 없게 된 총을 내던지고 일어나 두 사람이 도망친 방향과 반대쪽으로 달렸다.
화성인이 이처럼 멋진 도약(跳躍)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데저 소리스에게서 그들의 주의를 벗어나게 할 수는 있었지만, 그 반면 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들은 저돌적으로 추적해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땅바닥에 튀어나와 있는 석영(石英)에 한쪽 발이 걸려 이끼 위에 푹 쓰러져 버렸다. 얼굴을 드니 그들은 벌써 덮쳐와 있었다. 나는 이왕 죽을 바엔 죽기 전에 되도록 많은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되겠다고 각오하고 장검을 빼었으나 싸움은 어이없게 끝나 버렸다. 도저히 당할 수 없게 수많은 사람이 계속 치고 드는 바람에 눈이 안 보여 비틀거리다 보니 눈 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그들의 발치에 고꾸라져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와푼 족에게 잡히어
의식을 회복하기에는 대여섯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놀랐을 때의 그 기분을 나는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좁은 방 한구석에 비단과 털가죽 이부자리에 싸여 누워 있었다. 녹색인 전사가 몇 사람 있고, 늙어서 말라빠진 보기 흉한 여자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자 여자는 한 전사를 돌아다보고 말했다.
"이제 문제없습니다. 제드(왕)님."
"그거 잘됐군." 제드님이라 불리운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일어서서 나의 침상(寢床)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대경기회에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보니 그 남자는 녹색인인데 서크 족은 아니었다. 몸에 단 장식품도 금속 장신구도 서크의 것이 아니다. 터무니없이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으로 얼굴과 가슴에 심한 상처가 있고, 엄니가 하나 부러졌으며 귀는 한쪽만 있을 뿐이었다. 가슴 양쪽에는 인간의 두개골을 끈 끝에 매달았고 그 두개골 끝에는 말라빠진 사람의 손을 많이 매달았다.
이 사람은 대경기회라는 말을 했는데, 대경기회라면 나는 서크 족 밑에 있었을 때 싫도록 들었으므로 이건 아무래도 연옥(煉獄)에서 지옥으로 옮겨진 데 지나지 않는 모양이라고 체념했다.
그는 여자와 몇 마디 말을 나누었는데, 그 여자는 이 정도라면 이 사람은 이제 여행을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한 뒤에 제드는, 모두 말을 타고 본대(本隊) 뒤를 쫓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나는 말에 꽁꽁 묶였다. 이처럼 성질이 사나와 다루기 힘든 말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나대어 달려가거나 하지 않도록 말을 탄 전사가 나의 양쪽을 꽉 매고 그들은 본대를 뒤쫓아 무서운 스피드로 달렸다. 여자가 발라 준 약과 주사가 금방 훌륭한 효능을 발휘하였고, 상처는 교묘하게 붕대와 고약으로 조처해 두었으므로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
해가 지기 직전에 그들은 본대와 합류했다. 본대는 야영을 하기 위해 캠프를 막 치고 난 뒤였다. 나는 곧 와푼 족의 황제 앞으로 끌려나갔다. 나를 데리고 온 제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소름이 끼치는 상처가 있고 두개골과 말라 빠진 손을 늘어뜨린 가슴 장식을 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가슴 장식은 와푼 족 중에서도 위대한 전사가 다는 모양이며, 서크 족도 미칠 수 없는 용맹스러움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나를 잡은 제드 다크 코바는 비교적 젊은 황제 바르 코마스의 제드로, 황제를 몹시 질투하고 미워했다. 나는 황제에 대한 다크 코바의 태도가 거만하고 무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황제 앞에 나갔을 때, 그는 규칙으로 되어 있는 정식 인사를 일체 생략했다. 그리고 지배자 앞으로 거칠게 나를 밀어붙이더니 위협하는 듯한 큰 소리로 외쳤다.
"서크 족의 장신구를 단 묘한 생물을 잡아 왔소. 이놈을 대경기회에서 말과 싸우게 하면 재미있을 것이오."
"그를 죽이느냐 살리느냐는 너의 황제 바르 코마스가 결정할 문제야. 만일 죽인다고 한다면 황제가 택한 방법으로 죽여야 해, 알겠지?" 젊은 지배자는 말투에 힘을 주어 무게있게 대답했다.
"죽이느냐, 살리느냐라고?" 다크 코바는 악을 썼다. "나의 가슴에 단 이 죽은 사람의 손을 걸고 말하겠소. 그 놈은 죽이는 거요, 바르 코마스. 당신처럼 마음이 약한 자는 이놈의 목숨을 구할 수 없을 것이오. 흥, 참다운 황제가 이 와푼을 다스리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오. 이 나이 먹은 다크 코바 마저도 맨손으로 가슴에서 장식을 빼앗을 수 있는 그런 눈물 많은 얼간이 남자가 황제라니!"
바르 코마스는 거만하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바뀌더니 경멸과 증오를 띠고 이 오만하고 반항적인 제드를 흘끔 노려보더니, 다음 순간 무기도 빼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이 무례한 자의 목을 향해 덤벼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녹색인 전사끼리 맨손으로 싸우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이어서 벌어진 짐승 같은 흉포한 싸움은 실로 보기만 해도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귀며 눈을 잡아뜯고 번쩍거리는 엄니로 상대방을 물어뜯고 찌르고 하여 마침내는 둘이 다 머리 꼭대기부터 발 끝까지 누더기처럼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다.
황제 바르 코마스는 훨씬 우세하게 싸움을 끌고 나갔다. 그가 힘도 더 세고 민첩하고 현명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 싸움도 이제 마지막 급소를 찌르기만 하면 될 것 같았을 때, 격투에서 몸을 빼려던 바르 코마스의 발이 미끄러졌다. 다크 코바는 이 한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상대방의 몸에 덤벼들자 그는 하나밖에 없는 큰 엄니를 바르 코마스의 다리 가랑이에 박고 있는 힘을 다해 젊은 황제의 몸을 쫙 찢어 버렸다. 거대한 엄니는 황제의 턱뼈에 이르자 그곳에 박혔다. 이긴 자나 패한 자나 녹초가 되어 이끼 위에 굴러 떨어졌다. 그곳에 있는 것은 찢기어 피투성이가 된 거대한 두 개의 고깃덩어리였다.
바르 코마스는 완전히 숨져 있었다. 다크 코바가 목숨을 건진 것은 오로지 여자들이 초인적인 간호를 해준 덕이었다. 사흘 후, 그는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바르 코마스의 시체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규칙에 따라 시체는 쓰러진 장소에 내버려 둔 채 있었다. 다크 코바는 그전 지배자의 목에 발을 얹고 와푼 황제의 칭호를 자기 것으로 했다.
죽은 황제의 손과 목은 정복자의 가슴 장식에 첨가되기 위해 잘라 냈다. 잔해(殘骸)는 군중의 요란스러운 홍소(哄笑)를 받으며 여자들의 손에 의해 화장에 처해졌다.
그들은 부화기를 파괴당한 데 대한 보복을 위해 서크 족의 작은 부락을 습격할 작정으로 있었는데, 다크 코바의 상처 때문에 행군이 많이 늦어졌으므로 결국 이 원정은 대경기회가 끝날 때까지 그만두기로 했다.
만 명을 헤아리는 전사들은 와푼을 향해 철수했다.
내가 이 냉혹하고 피에 굶주린 자들을 첫 대면 했을 때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한낱 시초에 불과했고, 그런 광경은 그 후 그들과 함께 사는 동안 거의 일상다반사처럼 되고 만 것이다. 그들의 집단은 서크 족보다도 소규모였으나 훨씬 더 흉포했다. 여기저기 와푼 부족 중 몇 사람의 전사가 생사를 건 결투를 하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하루에 최고 8쌍이나 되는 죽음의 결투를 본 일도 있다.
거의 사흘이 걸려 와푼의 도시에 도착했다. 나는 곧 지하 감방에 투옥되었고, 바닥과 벽에 사슬로 단단히 연결되었다. 먹을 것은 가끔 날라왔으나 감옥 안은 캄캄했으므로 과연 며칠이나 그곳에 있었는지, 아니면 몇 주일이나, 아니 몇 달이나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것은 나의 생애에서 가장 무서운 체험이었다. 그 칠흑과 같은 어둠의 공포에 정신이 돌지 않은 것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기 짝이 없다. 감옥 안에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마구 기어다니고 있었다. 눕게 되면 차갑고 꿈틀거리는 것이 나의 몸 위를 기어갔다. 때때로 어둠 속에 환히 반짝이는 불 같은 빨간 눈이 여러 개 나타나 소름이 끼치는 눈초리로 끈질기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을 볼 때도 있었다. 지상(地上)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먹을 것을 날라오는 간수에게 처음에는 마구 질문을 퍼부었으나, 간수는 한 마디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무서운 장소에 나를 가둔 괘씸한 자들에 대한 혐오와 광기(狂氣) 어린 미움을 식사를 운반해 오는 간수에게 모두 퍼붓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이 사람은 전 와푼 족의 대표자였다.
그는 언제나 어두컴컴한 횃불을 들고 나의 손이 닿는 범위에 먹을 것을 갖다 놓기 위해 오는데, 먹을 것을 바닥 위에 놓기 위해 몸을 구부리면 그의 머리에는 대개 나의 가슴쯤에 온다. 그래서 그 다음에 그가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나는 광인(狂人) 특유의 나쁜 꾀를 내어 감옥 제일 구석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나에게 감겨 있는 굵은 쇠사슬의 늘어진 부분을 손에 잡고 마치 육식수(肉食獸)처럼 웅크리고 앉아 기다렸다. 먹을 것을 바닥에 놓으려고 그가 몸을 구부렸을 때 나는 쇠사슬을 들어올려 그의 머리를 향해 쇠사슬의 고리로 힘껏 내리쳤다. 간수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죽어 버렸다. 나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그렇지만 이미 진짜 미친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키들키들 웃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지껄여 대며 쓰러져 있는 간수에게 덤벼들어 죽은 사람의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마침내 끝에 열쇠를 여러 개 매어 단 가는 쇠사슬이 손가락에 와 닿았다. 열쇠를 만지는 순간 나는 금방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이미 나는 혼잣말을 지껄여 대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탈주(脫走) 수단을 손아귀에 넣은 정상적인 분별 있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시체의 목에서 열쇠의 사슬을 빼어 내려고 더듬으며 문득 어둠 속으로 눈길을 돌리니 번쩍이는 여섯 쌍의 눈이 깜박이지도 않고 뚫어져라 나를 노려보며 천천히 육박해 왔다. 그에 따라 나는 두려운 나머지 조금씩 뒷걸음질쳐서 늘 있던 한쪽 구석으로 되돌아가 두 손으로 앞을 가리고 태세를 갖추며 웅크렸다. 무서운 여섯 쌍의 눈은 나의 발치에 구르고 있는 시체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질질 끄는 듯한 기묘한 소리를 내며 후퇴하여 마침내 지하 감옥 어딘가 구석진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투기장의 결투
나는 서서히 평정을 되찾아, 마침내 다시 손을 내밀어 시체에서 열쇠를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어둠 속을 더듬다가 깜짝 놀랐다. 시체가 없어진 것이다. 그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그 형형하게 빛나던 눈의 소유자는 나의 희생물을 잡아먹기 위해 곧 옆에 있는 보금자리로 나꿔채어 간 것이다. 그들은 이 끝없는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하루를 천추 같이 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 시체를 끌고 들어가 먹었던 것이다.
먹을 것을 이틀 동안이나 운반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새로운 간수가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고, 나의 감옥 생활은 전과 다름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유폐의 두려움에 이성(理性)을 잃는 일은 없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얼마 안되어 다른 포로가 끌려와 내 옆에 붙들어 매어졌다. 횃불의 흐린 빛으로 그것이 적색인이라는 것을 알자, 말을 걸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간수들이 사라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자 나는 작은 목소리로 <카오올> 하고 화성의 인사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말을 하는 것은 누굽니까?" 상대방이 되물었다.
"존 카터라는 자요. 헤리움의 적색인 편이오."
"나는 헤리움 사람인데, 당신 이름은 들은 일이 없소."
그래서 나는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그에게 얘기했다. 그러나 내가 데저 소리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헤리움의 프린세스에 대한 소식을 듣고 몹시 감격했다. 그리고 나와 헤어진 장소에서라면 그녀와 소라가 안전한 장소로 쉽게 다다를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와푼 족의 전사가 나와 데저 소리스를 발견했을 때 지나온 골짜기의 산길은 자기네들이 남쪽을 향해 행군할 때 지나가는 유일한 길이므로 그 근처의 일을 잘 알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데저 소리스와 소라는 대운하의 하나에서 5마일도 떨어져 있지 않은 언덕 위로 도망쳤습니다. 지금쯤은 아마 안전한 장소에 있을 겁니다" 하고 그는 보증했다.
나의 감옥 친구는 칸토스 칸이라는 헤리움 해군의 사관(士官)으로, 서크 족의 습격을 받아 데저 소리스가 잡힌 그때의 불운한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그는 비행선대가 그 싸움에서 패한 뒤의 모습을 짤막하게 말해 주었다.
큰 손해를 입은 선대는 살아남은 소수의 대원을 태우고 천천히 헤리움으로 향했다. 그러나 바르슴의 적색인 사이에서 헤리움의 숙적(宿敵)인 조댕거의 수도(首都) 근처를 지나쳤을 때 그들은 우주선 대편대(大編隊)의 습격을 받아 칸토스 칸이 타고 있던 우주선 이외에는 모조리 파괴되었든가 나포(拿捕)되어 버렸다. 그의 우주선은 며칠 동안 조댕거의 전함 세 척의 추적을 받았으나 마침내 달이 없는 어느 날 밤에 어둠을 틈타 탈출할 수가 있었다.
데저 소리스가 붙잡혀 간 뒤 30일 후, 즉 우리가 서크로 귀환했을 무렵 그의 배는 원래는 700명이나 있던 사관과 승무원 중 살아남은 10명 가량을 태우고 헤리움에 닿았다. 곧 각 백 척의 강력한 비행선으로 이루어진 일곱 개의 대선대가 데저 소리스 수색을 위해 파견되었다. 그리고 이들 비행선에서 늘 2천 대의 소형 비행정(飛行艇)이 날아 행방 불명이 된 프린세스를 찾아 헛된 수색을 계속했다. 이 보복 군대의 손에 걸려 녹색 화성인의 부족(部族) 두 개가 바르슴에서 말살되었으나, 데저 소리스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여 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북부 일대의 부족 사이를 수색하고, 남방으로 수색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이삼 일 전의 일이었다.
칸토스 칸은 단좌 비행정(單座飛行艇)에 의한 수색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와푼의 도시를 정찰하다 불운하게도 발견되고 만 것이다. 나는 그의 용맹 과감한 행동에 감복했다. 그는 단신으로 도시의 변두리에 착륙하여 거기서 걸어 도시 내부로 침입, 광장 주위에 서 있는 건물까지 갔다. 이틀 낮과 이틀 밤, 그는 경애하는 왕녀를 찾아 와푼 족의 거처와 지하 감옥을 돌아다니며 찾아보고 데저 소리스가 이곳에 잡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 확실해졌으므로 되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와푼 일단(一團)에게 들킨 것이다.
감옥에 붙잡혀 묶여 있는 동안에 칸토스 칸과 나는 아주 친해졌으며, 개인적인 우정을 돈독히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사흘도 되기 전에 두 가람은 대경기회를 위해 지하 감옥에서 끌려나와 아침 일찍 거대한 원형 대투기장(大鬪技場)으로 호송되었다. 이 투기장은 지상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를 파 내려가 지은 것으로, 일부는 토사(土砂)에 묻혀 있었으므로 본디는 어느 정도의 넓이였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로도 와푼 부족 만 명 전원을 수용할 수 있었다.
투기장은 넓었으나 몹시 울퉁불퉁하며 손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와푼 인은 동물과 포로가 관객 사이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대 도시의 폐허에서 건물 짓는 데 사용되었던 돌을 모아다 투기장 주위에 쌓아올렸다. 투기장 양쪽 끝에는 무참한 죽음을 당할 차례를 기다리는 출장자(出場者)를 가두어 두는 우리를 만들어 놓았다.
칸토스 칸과 나는 그 우리 중 한곳에 넣어졌다. 다른 우리에는 흉포한 맹견(猛犬) 캬롯트와 소트, 눈이 뒤집힌 지티다알, 녹색인 전사, 다른 종족의 여자, 그밖의 아직 본 일도 없는 바르슴의 기괴한 맹수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포효하고 으르렁대고 외쳐대는 소리는 귀가 먹을 정도로 컸으며, 어느 것을 보나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있어 아무리 신경이 무딘 사람이라도 죽음의 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날에는 이들 포로 중 한 사람만이 자유를 얻고 나머지는 다 차가운 시체로 화하여 투기장에 흩어져 있게 된다고 칸토스 칸이 설명해 주었다. 그날 몇 가지 시합에서 이겨 살아남은 자들은 둘이 남을 때까지 일대 일로 싸우게 하여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가 인간이건 동물이건 불문에 붙여 석방된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또 새로운 일단의 희생물이 우리 속에 갇히게 되었고, 이리하여 시합은 10일 동안에 걸쳐서 줄곧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속에 갇힌 뒤 얼마 안 있어 관객이 입장하기 시작하자 1시간 이내에 만원이 되었다. 다크 코바는 제드와 족장들을 거느리고 시합장 한쪽 가운데에 있는 넓은 자리에 앉았다.
다크 코바의 신호로 두 우리의 문이 활짝 열리고, 녹색인 여자 12명이 시합장 가운데로 끌려나왔다. 각자에게 단검을 한 자루씩 주었다. 그러자 또 한쪽 끝에서 12마리의 캬롯트, 즉 야생견(野生犬)을 여자들을 향해 일제히 풀어 놓았다.
이를 드러내 놓고 거품을 문 야수(野獸)가 거의 무방비나 다름없는 여자들에게 덤벼들었을 때 나는 이 처참한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을 했다. 와푼들의 함성과 폭소가 이 시합의 훌륭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칸토스 칸이 이제 끝났다고 말하기에 시합장을 돌아보니 싸워서 이긴 세 마리의 캬롯트가 희생자를 발치에 쓰러뜨리고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여자들은 씩씩하게 싸우고 죽은 것이다.
다음으로 미쳐 날뛰는 지티다알을 한 마리 남은 개들이 있는 쪽을 향해 풀어놓았다. 이리하여 무서운 투쟁은 더운 한낮에 한없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날 처음에는 사람과,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야수와 싸웠다. 그러나 나는 장검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상대보다는 민첩하고 대부분의 경우 역량에 있어서도 우세했으므로 마치 어린이의 놀이와 같았다. 나는 피에 굶주린 관중의 박수를 여러 차례나 받았다. 종반전에 이르자 나를 투기장 밖으로 내보내어 와푼 족의 일원(一員)으로 해주라는 야유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윽고 어딘가 북방의 일족(一族) 출신인 거대한 녹색인 전사 하나와 칸토스 칸과 나, 이렇게 세 사람만이 이겨서 살아남았다. 그 중에서 칸토스 칸과 녹색인 전사 둘이서 우선 먼저 싸우고 여기서 이긴 자와 내가 최후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놓고 결전하게 되었다.
칸토스 칸은 그날 이미 여러 싸움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이겨 왔으나, 그 중에는 가까스로 이긴 시합도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이 녹색인 전사와의 시합에선 고전했다. 그날 모든 상대를 쓰러뜨려 온 이 거대한 적을 그가 쓰러뜨릴 수 있다는 기대는 거의 가질 수 없었다. 상대방은 키가 5미터 이상이나 되는 거인이며, 한편 칸토스 칸은 2미터도 안된다. 두 사람이 상대하여 나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화성인의 검기(劍技)의 비술(秘術)을 보게 되었다. 칸토스 칸은 이 비술 하나에 생명과 승리의 희망 일체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거인과의 거리가 약 7미터까지 좁혀졌을 때 그는 칼을 어깨 너머로 힘껏 치켜올리더니 칼 끝을 전사를 향해 정면으로 겨누고 있는 힘을 다해 집어던졌다. 칼은 쏜살처럼 멋지게 하늘을 가르고 불쌍한 청귀(靑鬼)의 심장을 꿰뚫어 상대방은 시합장 바닥에 힘없이 쓰러져 꼼짝도 안했다.
바야흐로 칸토스 칸과 내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싸우기 위해 접근했을 때 나는 그에게 이 시합을 어두워질 때까지 끌고 가자고 속삭였다. 어두워지면 어떻게 탈출할 방법이 발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서로 치명상을 주지 않고 싸우고 있으니까 군중은 우리에게 전의(戰意)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노하여 소리질렀다.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진 것을 알자 나는 곧 칸토스 칸에게 그의 칼을 나의 왼쪽 팔과 옆구리 사이로 찌르라고 속삭였다. 그가 그렇게 하자 나는 팔로 그 칼을 꽉 끼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치다 그대로 탁 쓰러졌다. 나의 가슴에는 그의 칼이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칸토스 칸은 나의 연극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달려와 나의 목을 발로 밟고 나의 옆구리에서 칼을 뽑아, 나의 목에 최후의 일격을 꽂은 것이다. 최후의 일격은 경동맥(頸動脈)을 절단하게 되어 있었으나, 그의 차가운 칼날은 나를 다치지 않고 투기장의 모래땅에 꽂혔다. 이제 해는 서산으로 넘어갔으므로 누가 보나 그는 정말 나를 찌른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에게 곧 자유를 구하여 도시의 동쪽에 있는 언덕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투기장에 아무도 없게 되자 나는 살그머니 지상으로 올라갔다. 이 지하의 대경기장은 광장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더구나 이 대폐도(大廢都) 중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지역에 있었으므로 그 언덕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대기 제조 공장
그 언덕에서 칸토스 칸을 이틀 동안이나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가장 가까운 운하라고 그에게서 들었던 지점을 향해 북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의 유일한 식량은 나무에서 채집할 수 있는 식물유(植物乳)로, 그 나무는 이 귀중한 액체를 풍부하게 분비해 주었다.
무려 2주일 동안이나 나는 헤매었다. 밤에는 별만을 의지하고 쓰러져 가며 걸었고 낮에는 튀어나온 바위 뒤에 숨고 산을 넘을 때는 그 산골짜기에 몸을 숨기거나 했으며, 야생동물의 습격도 여러 차례 받았다.
야수라고는 하나 본 일도 없는 아주 기괴한 동물이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므로 언제 습격을 당해도 좋도록 계속 장검을 손에 잡고 있어야만 했다. 화성에 온 뒤 몸에 익힌 정신 감응력으로 대부분의 경우는 상대방이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 감지(感知)할 수 있었는데, 딱 한 번만은 미리 알아차리기도 전에 습격을 받은 일이 있다. 내가 대지에 쓰러져 정신이 들었을 때는 흉악한 엄니가 나의 목 가까이까지 와 있었으며, 털북숭이 얼굴이 나의 얼굴을 덮쳐오고 있었다.
어떤 모습을 한 동물이 습격해 왔는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그것이 크고 무겁고 다리가 많이 달려 있는 동물이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엄니가 나의 목에 박히지 않도록 나는 손으로 상대방의 목 부분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 털북숭이 얼굴을 밀어붙이고 온 힘을 다해 상대방의 목줄기를 죄었다.
나와 야수는 소리도 내지 않고 쓰러져 있었다. 야수는 어떻게든지 무서운 엄니를 나에게 박으려 했고, 나는 나대로 손을 떼지 않고 상대방의 목을 움켜쥐고는 목에 엄니가 닿지 않도록 밀어내면서 상대방을 죽이려고 필사적이었다. 이윽고 서서히 나의 팔은 이 격투를 참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상대방의 불 같은 눈과 번쩍이는 엄니가 차차로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털북숭이 얼굴이 나의 얼굴에 닿았을 때, 이제는 끝장이라고 단념했다. 그러자 그때 주위의 어둠 속에서 뭔가 산 물체가 총알처럼 뛰어나와 나를 깔아뭉개고 있는 동물을 향해 사납게 덤벼들었다. 두 마리는 서로 상대방을 무서운 기세로 물어뜯고 잡아찢으며 으르렁거리고 이끼 위를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 구세주는 하마터면 나를 죽일 뻔했던 동물의 시체 목 위에 고개를 떨구고 서 있었다.
그때 지평선에서 홀연히 모습을 나타낸 가까운 쪽의 달이 바르슴을 비추어 나의 목숨을 살려 준 은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목숨의 은인은 울러였다. 그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떻게 나를 발견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와 준 것을 기뻐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가 왜 데저 소리스의 곁을 떠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서 재회의 기쁨도 흐려질 정도였다. 나의 명령에 그처럼 충실한 울러가 그녀를 두고 온 것으로 보면 그녀가 죽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제 완전히 올라와 환하게 비추는 두 개의 달빛으로 보니, 울러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게 여윈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의 팔에서 떨어져 발치에 있는 시체를 정신없이 뜯어먹기 시작했을 때, 이 불쌍한 동물이 아사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 자신도 그와 다름없이 허기졌으나, 날고기를 먹을 생각은 없었고 불을 피울 수단도 없었다. 울러가 다 먹고 나자, 나는 다시 정처없이 수로를 찾아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며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여로(旅路)에 올랐다.
찾아 헤맨 지 15일째 되는 새벽녘, 찾던 수로를 나타내는 키 큰 나무숲을 알아내고 나는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지친 몸에 채찍질을 해서 낮에는 거대한 건물의 문 앞에 와 닿았다. 그 건물은 약 4 평방 마일에 걸쳐 있고, 70미터나 하늘 높이 치솟아 있다. 나는 힘없이 허물어지듯 그 앞에 쓰러졌다. 작은 문을 제외하면 거대한 벽면에는 창문도 아무것도 없으며, 사람이 있는 기미는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벨도 눈에 띄지 않았으므로 만일 아주 작은 동그란 구멍이 문짝 옆 벽에 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안에 사는 주민들에게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릴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 구멍은 연필 굵기의 구멍이었는데, 아마 전성관(傳聲管) 같은 것이려니 생각하고 입을 가까이 대고 금방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자 그 구멍에서 소리가 들리며 "너는 누구냐, 어디서 무슨 볼일로 왔느냐" 하고 물었다.
나는 와푼의 손을 피해 왔으므로 굶주림과 피로로 죽을 것 같다고 설명했다.
"너는 녹색인 전사의 장신구를 달고 캬롯트를 데리고 있는데, 모습은 적색인이군. 살결은 녹색도 아니고 적색도 아니니, 대체 너는 누구냐?"
"나는 바르슴 적색인과 같은 편입니다.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문을 열어 주십시오."
그제야 눈 앞의 문짝이 뒤로 밀려들어가기 시작하더니, 벽면에서 15미터 안으로 들어가 일단 거기서 멎었다가 이번에는 스르르 왼쪽으로 열렸다. 눈 앞에 콘크리트의 가느다란 복도가 조금 있고 그 막다른 곳에는 지금 지나온 문과 똑같은 문이 있다. 나와 울러가 첫문을 통해 들어가자, 주위에는 인적도 없는데 곧 그 문이 뒤에서 스르르 닫혀 눈 깜짝할 사이에 건물 정면 벽의 본디 위치로 가서 확 닫혔다. 문이 열렸을 때 나는 그것이 아주 두터운 것을 알았다. 줄잡아 7미터는 되었다. 문이 우리 뒤에서 닫히고 다시 본디 위치로 돌아갔을 때 굵은 강철로 된 실린더가 문 안쪽의 천장에서 내려왔다. 실린더의 아랫부분은 바닥에 있는 구멍에 꼭 들어맞았다.
다시 두 번째, 세 번째의 문이 첫문과 같은 식으로 뒤로 밀리고 옆으로 열렸다. 그리고 내가 들어간 곳은 넓은 안쪽에 있는 방으로, 큰 돌 테이블 위에 음식이 놓여 있었다. 이것을 먹고 허기진 배를 채운 다음, 캬롯트에게도 먹여 주라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는 동안 모습이 없는 그 주인은 차례차례로 질문을 퍼부어 엄격하게 추궁해 왔다.
"너의 이야기는 정말 놀랍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고 그 목소리는 질문을 마쳤다. "그러나 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네가 바르슴 인이 아니라는 것도 명백하다. 너의 뇌의 구조와 내장의 기묘한 배치와 심장의 크기와 형태로 알 수 있다."
"그럼, 저의 몸 내부까지 꿰뚫어볼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소리쳤다.
"물론이지. 나는 너의 생각 이외는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볼 수 있다. 만일 네가 바르슴 인이라면 생각까지 꿰뚫어볼 수 있겠지만."
그러더니 방 안쪽 문이 열리고 기묘하게 말라빠진 미이라 같은 작은 남자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남자가 몸에 달고 있는 것은 작은 금목걸이뿐이었고, 그 목걸이에는 큰 접시 만한 장식이 가슴 위에 늘어져 있었다. 그 가슴장식에는 다이아몬드가 틈도 없이 가득 박혀 있고, 한가운데에는 종류가 각기 다른 빛을 내뿜는 지름 3센티미터 가량의 이상한 돌이 박혀 있었다. 지구의 프리즘의 일곱 가지 색과, 나머지 두 가지 색은 본 일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아름다운 광선이었다. 장님에게 빨강이란 색을 설명해 들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광선을 설명하기란 어렵다. 나로선 다만 몹시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노인은 몇 시간이고 앉아서 나와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무엇보다도 기묘했던 것은 나로선 그의 생각을 하나하나 다 알 수 있었는데, 그로선 내가 입밖에 내지 않는 한 나의 마음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일이었다.
나는 나에게 독심력(讀心力)이 있다는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수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중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만일 이때 상대방이 나의 이 이상한 능력을 눈치챘다면 그런 일은 절대로 알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화성인은 자기의 두뇌를 뜻대로 통제할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주 정확하게 사고(思考)를 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내가 있는 이 건물에는, 화성의 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인공대기(人工大氣)를 생산하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기를 만드는 비결은 전적으로 이 건물 주인의 가슴장식에 있는 큰 돌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아홉 번째 광선의 사용법에 달려 있었다.
그 광선은 이 거대한 건물의 옥상에 있는 정교하게 조정(調整)된 장치에 의해 다른 태양 광선에서 분리되어, 옥상의 4분의 3은 이 제9광선을 저장해 두는 저장소로 되어 있다. 다음 단계에서 이 제9광선은 전기적(電氣的)으로 처리된다. 그렇다기보다 정제(精製)된 전기 진동이 있는 특정량이 광선에 가해진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것을 이 혹성(惑星)의 다섯 개의 주요 공기 센터에 펌프로 내보내어, 그것이 공기 센터에서 방출될 때 우주의 에텔과 접촉하여 대기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커다란 건물 속에는 현재의 화성의 대기를 1천 년 동안 유지할 만한 제9광선이 언제나 저장되어 있다. 이곳의 주요한 이야기로는 펌프 장치에 무슨 고장이 일어나는 것이 유일한 걱정이라고 한다.
노인은 나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어느 것을 잡으나 화성 전체에 공급할 만한 혼합 대기(混合大氣)가 든 라듐 펌프 20대로 이루어진 한 세트의 장치가 있었다. 그는 8백 년 동안 이 펌프 하나하나가 하루 번갈아 일정한 시간, 즉 지구 시간으로 고치면 24시간 반이 약간 넘는 시간 동안 활동하는 것을 지켜보아 왔다. 그에게는 조수가 한 사람 있어 그와 번갈아 지키고 있다. 이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이 그 화성년(火星年)의 반, 즉 우리 날짜로 따지면 약 344일 동안을 이 외떨어진 대공장 안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다.
적색인은 누구나 유년 시절에 이 대기 제조의 원리를 배우지만, 이 거대한 건물에 들어가는 비밀을 알고 있는 자는 항상 둘밖에 없다. 건물은 두께 50미터의 벽에 싸여 있으므로 개미 한 마리 침입할 수 없으며, 게다가 옥상은 하늘에서의 공격에 대비하여 두께 2미터의 유리로 덮어씌웠다. 모든 바르슴 인은 화성 위의 만물이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이 공장이 쉴새없이 조업(操業)을 하고 있는 덕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므로, 습격해 올 우려가 있는 것은 녹색 화성인이든가, 아니면 실성한 적색인 정도였다.
나는 상대방의 사고(思考)를 관찰하고 있는 동안에 어떤 사실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꼈다. 그것은 밖으로 통하는 문이 다 정신 감응력에 의해 조작된다는 사실이었다. 자물통은 대단히 정교하게 조절(調節)되어 있어, 사고파(思考波)의 어떤 조립(組立) 작용으로 문이 열리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새로 발견한 이 도구를 실지로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허(虛)를 찔러 이 사고파의 조립을 알아내리라고 생각한 나는 자연스러운 말투로 안쪽 방에서 어떻게 그 튼튼한 문의 자물통을 열어 주었느냐고 물었다. 한순간 노인의 마음 속에 9개의 화성어(火星語)가 번개처럼 번득였으나, 그것은 말해서는 안될 비밀이라고 노인이 대답하자마자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그때를 계기로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싹 달라져, 마치 허를 찔려 저도 모르게 그 중대한 비밀을 눈치채게 하지나 않았을까 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하는 태도만은 그럴 듯했지만 그의 얼굴 표정이나 사고에서는 의혹과 불안을 생생히 읽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내가 잠자리로 가기 전에 그는 가까이에 살고 있는 농업 감독관 앞으로 편지를 써서 나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 조댕거로 가는 도중, 돌봐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댕거 사람에게 네가 헤리움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을 절대로 알려서는 안된다. 어쨌든 그들은 현재 헤리움과 싸우고 있는 중이니까. 나의 조수와 나는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 둘은 바르슴 전체에 소속해 있으며, 두 사람이 달고 있는 이 부적이 어느 나라에 가든 몸을 지켜 준다. 녹색인의 나라에서도 문제없지―그야 될 수 있으면, 잘못하여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 잘 자게."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푹 자 둬―푹 말이야."
그는 상냥하게 미소지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마음 속에서, 밤에 그가 나의 머리맡에 서 있는 광경을 보았다. 칼날의 길이가 긴 단검을 재빨리 나에게 들이대며 입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됐지만 이것도 바르슴을 위해서야."
노인이 방 밖으로 나가 문을 닫자 그의 사고(思考)도 사라져 버렸다. 사고 전이(思考轉移)에 대해 그다지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로선 이 사실이 기묘하게 생각되었다.
자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렇게 두터운 벽에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몸의 위험을 깨달은 지금에 와서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은 간단하지만, 비록 상대방이 죽어도 나는 도망칠 수 없다. 대공장의 기계가 정지하면 나는 이 혹성 위의 모든 주민들과 함께―만일 데저 소리스가 죽지 않았다면 그녀까지 포함하여―죽을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데저 소리스의 일을 생각하면, 이곳 주인을 죽일 생각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울러를 데리고 그 큰 문 중에서 가장 안쪽 문을 찾으러 나섰다. 노인의 마음에서 본 9개의 화성어로, 그 큰 자물통을 어떻게든지 열어 보려는 대담무쌍한 계획이 생각난 것이다.
발소리를 죽이고 차례차례로 복도를 빠져나가, 곳곳에서 구불구불 구부러져 있는 길을 찾아 헤매이다 보니 마침내 오늘 아침에 오랫만에 식사를 한 그 큰 홀로 나왔다. 노인의 모습은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밤에는 어디에 들어가 있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홀로 발을 들여놓으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조그맣게 났다. 깜짝 놀라 나는 다시 우묵하게 들어간 복도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울러를 끌어당겨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았다.
곧 노인이 바로 옆을 지나 조금 전에 내가 빠져나가려던 흐릿한 불이 켜진 홀로 들어갔다. 그때 그가 칼날이 긴 가느다란 단검을 손에 들고 그것을 돌 위에서 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부터 가서 라듐 펌프를 검사하고 오자, 그러려면 30분 가량 걸리니까 그 일을 마치고 돌아와 침실에 가서 그 남자를 토막내자―그는 마음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호올을 빠져나가 펌프실로 통하는 복도로 사라지자, 나는 살짝 숨었던 곳에서 나와 호올을 가로질러 나와 외계(外界)를 막고 있는 세 개의 문 중에서 가장 안쪽의 큰 문 앞에 가 섰다.
나는 튼튼한 자물통에 정신을 집중하여 9개의 사고파(思考波)―화성어(火星語)―를 던졌다. 어떻게 되나 하고 숨을 죽이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마침내 큰 문은 조용히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움직이더니 소리도 없이 스르르 옆으로 열렸다. 남은 문도 차례차례로 나의 명령대로 열려 울러와 나는 자유로운 몸이 되어 어둠 속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나 배가 고프지 않은 일을 제외하면 이곳에 오기 전과 비해 사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는 거대한 건물 옆에서 빨리 벗어나 되도록 서둘러 중요 도로로 나가려고 가장 가까이 있는 십자로를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새벽녘에는 목표로 삼았던 십자로에 다다랐다. 그리고 최초에 지나왔던 곳(사방을 담으로 둘러싼 곳)으로 들어가 그곳에 사는 사람을 찾았다.
담 안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나직한 집이 복잡하게 들어서 있고 두터운 문이 그 입구를 막고 있었다. 아무리 두드리고 소리쳐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수면 부족으로 지쳐 있었으므로 울러에게 지키라고 명령을 내리고 쓰러지듯 땅바닥에 누웠다.
잠시 후에 울러의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바로 옆에 세 명의 적색 화성인이 라이플 총구를 들이대고 서 있었다.
"나는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적도 아니오." 나는 당황해서 설명했다. "나는 지금까지 녹색인에게 잡혀 있었는데, 지금 조댕거로 가는 도중이오. 나와 캬롯트에게 먹을 것과 휴식을 주고 목적지에 닿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으면 고맙겠소."
세 사람은 라이플을 내리고 상냥하게 걸어나오더니, 그들 식의 인사로 나의 왼쪽 어깨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리고 나의 신상과 방랑의 여행에 대하여 이것저것 질문한 다음 곧 가까이에 있는 그들의 동료 집으로 데리고 가 주었다.
내가 그날 아침 일찍 두드리고 소리치던 건물엔 가축과 농작물을 거둬들인 것이 있을 뿐이었다. 주거는 큰 나무가 우거진 나무숲 속에 있으며, 밤이 되면 커다란 원형의 금속제 손잡이로 지상 10여 미터까지 들어올리게 되어 있었다. 적색 화성인의 집은 다 이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 손잡이는 땅 속에 파묻은 튜우브로 올리고 내릴 수 있게 장치했는데, 집 현관에 달아 놓은 아주 작은 라듐 엔진으로 조작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적색인은 고리나 빗장 같은 것으로 문 단속을 하는 번거로움 없이, 밤에는 위험을 피하여 집을 위로 들어올릴 뿐이었다. 또 집을 비울 때를 위해 바깥 지면에서 자유자재로 집을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장치도 되어 있었다.
이 세 형제는 처자와 함께 이 농장 안에 있는 같은 세 채의 집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 농장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이지, 여기서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농업 일은 죄수나 전쟁 포로나 세금 체납자 또는 어느 적색인 정부에서나 독신자에게 과하고 있는 비싼 독신세(獨身稅)를 지불하지 못하는 독신자의 손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형제와 그 가족은 다 인정이 두텁고 친절했다. 나는 휴식을 취하고 오랫동안 계속된 노고(勞苦)를 풀기 위해 그들과 함께 며칠을 보냈다.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데저 소리스와 대기 제조 공장의 노인에 관한 일은 일체 생략했지만―그들은 자기네들의 종족과 똑같은 색으로 몸을 물들이고, 조댕거로 가서 육군이나 공군에서 직업을 찾도록 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당신 자신이 신용할 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여, 궁정의 신분이 높은 귀족들을 친구로 삼은 뒤가 아니면 당신 이야기는 아마 믿어 주지 않을 거요. 그러나 이것은 병역(兵役)에 종사하면 쉽게 될 수가 있는 일이오. 우리들 바르슴 사람도 전쟁을 좋아하는 종족이니까" 하고 한 사람이 설명해 주었다. "용사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하오."
내가 출발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적색인들이 승마용으로 쓰는 몸집이 작은 숫말을 한 마리 주었다. 그 말은 보통 크기로 성질은 아주 온순하나 빛깔과 형태는 크고 흉포한 형제들의 말인 야생마와 똑같았다.
세 형제는 빨간 기름을 가지고 와서 나의 몸 전체에 칠해 주었다. 한 사람은 꽤 길게 자란 나의 머리를 잘라서 바르슴 어디엘 가나 훌륭한 한 사람의 적색 화성인으로서 통용될 수 있도록 후두부를 모가 나는 형(型)으로 가지런히 자르고, 앞머리를 내린 유행형 스타일로 잘라 주었다. 장신구와 장식품도 푸토올 집안의 연고자로 보이도록 조댕거의 신사다운 스타일로 갖추어 주었다. 푸토올이란 나의 은인들의 가명(家名)이다.
그들은 내가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주머니 속에 조댕거의 돈을 잔뜩 넣어 주었다. 화성의 통화는 화폐가 타원형이라는 것 외에는 지구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지폐는 개인개인이 필요에 따라 발행하고 1년에 두 번 회수한다. 만일 태환(兌換)할 수 있는 이상으로 발행하면 정부가 떠맡아서 채권자에게 전액을 지불하고, 한편 부채자(負債者)는 농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며 그만한 금액을 갚는다. 농장이고 광산이고 다 국유 재산이다. 이 제도는 부채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화성의 농장은 넓고, 더구나 인가에서 떨어져 흉포한 야수와 그 야수 이상으로 흉포한 인간이 살고 있는 지대를 누비고 극지(極地)에서 극지까지 몇 가닥이나 되는 가는 띠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자발적으로 일해 주는 노동자를 필요한 만큼 모으기란 아주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은혜를 도저히 갚을 길이 없다고 내가 말하자, 그들은 바르슴에서 오래 살다 보면 갚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별의 인사를 하고 나의 모습이 흰 주요 도로 저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배웅해 주었다.조댕거 공중 정찰대
조댕거로 가는 도중에는 수많은 기묘하고도 재미있는 광경이 주의를 끌었고, 내가 숙박했던 몇 채의 농가에서도 바르슴의 생활 양식에 관한 새로운 지식과 유익한 일을 배웠다.
화성에서는 극지 지하의 팽대(膨大)한 저수조(貯水槽)에 저장해 둔 만년설(萬年雪)이 녹은 물을 관개용수(灌漑用水)로 쓴다. 물은 긴 파이프를 통해 각지의 거주 지역으로 보내어진다. 이 파이프의 기점(起點)에서 종점(終點)까지, 파이프 양쪽을 따라 농지가 계속되고 있다. 농지는 거의 같은 면적으로 구분되어 있고, 각 구분을 한 사람 내지 그 이상의 정부 관리가 관리하고 있다.
밭의 표면에 물이 흐르게 하여 막대한 양의 물을 증발시키는 것은 아까운 일이므로, 이 귀중한 액체는 지하의 대규모적인 모세관(毛細管)을 통하여 식물의 뿌리 밑으로 직접 보내어진다. 한발(旱魃)도 없고 비와 강풍도 없으며 곤충도 해조(害鳥)도 없으므로 화성의 농작물 수확고는 언제나 일정하다.
이 여행에서 나는 지구를 떠난 뒤 처음으로 고기를 맛보았다―살이 잘 찐 가축의 큰 고기로, 국물이 가득한 스테이크와 갈비였다. 또 향긋한 과일과 맛있는 야채도 먹었으나, 지구의 음식과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무, 꽃, 야채, 동물 등이 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일일이 정성들인 과학적인 재배법과 사육법에 의해 참으로 잘 개량되었으므로 거기의 것에 비하면 지구의 식물이나 동물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투숙한 집에서 나는 조댕거의 귀족 계급인 교양있는 높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헤리움의 이야기가 우연히 화제에 올랐다. 나이 많은 한 남자는 몇 년 전에 외교상의 사명을 띠고 헤리움을 찾아간 일이 있다면서, 헤리움과 조댕거 두 나라를 숙명적인 전쟁 상태로 몰아넣은 사정을 개탄하며 설명해 주었다.
"헤리움의 여자는 바르슴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분명히 그 말이 맞아요. 수많은 미녀 중에서도 모르스 카쟉의 훌륭한 딸인 데저 소리스야말로 절세의 미녀, 바로 이 세상의 꽃이지요.
그 아름다움은, 모두들 그녀가 걸어온 땅에다 대고 실제로 절을 하는 정도이니까요. 그 여자가 그 불운한 탐험 여행에서 행방불명된 뒤로는 헤리움이 온통 슬픔에 잠겨 있어요. 그 비행선단이 전투력을 잃고 헤리움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공격하다니, 우리 지배자는 정말 대단한 실책을 한 거요. 조만간 조댕거는 좀더 현명한 이를 왕좌에 오르게 해야 할 거요. 지금도 우리 군대는 헤리움을 포위하고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는 하나, 조댕거의 국민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있어요. 그것도 이번의 싸움이 올바른 도리를 벗어났다고 할까, 즉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오. 우리 군은 헤리움의 주력 선단(主力船團)이 왕녀의 수색에 나가 없는 틈을 타서 힘 안 들이고 도시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가 있었지요. 소문에 의하면, 헤리움은 먼 쪽의 달이 앞으로 두세 번 도는 사이에 함락된다고 하오."
"그래, 당신은 데저 소리스 공주가 어떻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되도록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듯한 어조로 질문했다.
"왕녀는 죽었어요. 최근 우리 군이 남방에서 잡은 녹색인 전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왕녀는 다른 세계에서 온 묘한 생물과 함께 서크 족이 있는 곳에서 도망쳤는데, 결국은 와푼 족에게 붙잡혔대요. 왕녀의 말이 해저에서 헤매고 있었다고 하며, 그 근처에서 피투성이로 격투를 벌인 흔적을 발견했다더군요."
이것은 격려가 되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저 소리스가 죽었다는 확증이 될 수도 없다. 그래서 어쨌든 되도록 빨리 헤리움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 황제 타르도스 모르스에게 내가 아는 범위에서 그의 손녀딸이 있을 만한 장소를 알리기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푸토올 집안의 삼형제와 헤어진 뒤 열흘 후에 조댕거에 도착했다. 그런데 적색 화성인과 교섭을 갖게 된 이후로 나는 울러가 곁에 있기 때문에 남의 이목을 끌어 아주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 커다란 몸집의 동물은 적색인으로선 절대로 길들여 키울 수 없는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울러를 데리고 조댕거로 들어가면 아프리카의 라이온을 데리고 한길을 산책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 충실한 동물과 헤어지는 일은 생각하기만 해도 살을 베어 내는 듯한 슬픔이었으므로 도시의 문에 도착하기 조금 전까지 이별을 연기했었다. 그러나 마침내 헤어지지 않으면 안될 때가 찾아왔다. 내가 몸의 안전을 위협받거나 불쾌한 일을 겪게 되는 것뿐이라면, 언제나 주인을 충실히 받들고 아낌없는 애정을 쏟아 주는 바르슴의 유일한 친구를 쫓아 버릴 마음이 생길 리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데저 소리스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작정인 나로서는, 수수께끼에 싸인 이 도시에 침입하는 위험을 범하려는 이때, 이 모험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비록 울러의 생명이라 하더라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그가 잠시 슬퍼하는 일을 싫다 할 수는 없다. 그는 틀림없이 곧 나를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불쌍한 동물에게 애정을 담아 이별을 고하고 만일 무사히 이 모험을 뚫고 나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찾겠다고 약속했다.
내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내가 서크 방향을 가리키니, 그는 마지못해 그쪽으로 갔다. 나는 울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으므로 의연한 태도로 조댕거 쪽을 향해 약간 아픈 마음을 억누르고 삼엄한 성벽으로 다가갔다.
푸토올 형제에게서 받아 온 편지 덕분에 곧 벽으로 둘러싸인 이 광대한 도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직 아침이 꽤 일렀으므로 거리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다. 금속제 기둥 위에 높이 올려놓은 주거지는 커다란 새 둥지 같고, 곧게 솟은 기둥은 강철의 나무줄기처럼 보였다. 상점은 원칙적으로, 위로 올리게 되어 있지 않았으며, 입구에는 고리도 빗장도 걸지 않았다. 바르슴에서 물건을 도둑맞을 염려는 전혀 없었다. 바르슴 인이 항상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암살로, 적색인이 밤이나 긴급시에 집을 지면에서 훨씬 높은 곳으로 들어올리는 것은 전적으로 그 때문이다.
푸토올 형제는 정부의 파견 기관(派遣機關)에 가깝고, 더구나 숙박 설비가 있는 장소로 가는 길을 확실히 가르쳐 주었고, 그곳 관리 앞으로 편지를 써 주기도 했었다. 찾아간 곳에는 화성 도시의 특징인 중앙 광장이 있었다.
조댕거의 광장은 1평방 마일에 이르고, 광장 주위에는 황제와 왕과 그밖의 왕후 귀족의 궁전에 늘어서 있으며, 주요한 공공 건물과 다방과 상점 등도 들어서 있었다.
훌륭한 건축과 널따란 잔디밭을 덮은 눈이 부신 진홍색 식물(植物)에 마음을 빼앗겨 계속 감탄하면서 대광장을 건너가고 있을 때 한 적색인이 씩씩한 발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남자는 나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으나 바로 내 옆에까지 왔을 때 나는 그를 알아보고, 상대방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면 말을 붙였다.
"여어, 칸토스 칸!"
남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빠른 동작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내가 손을 채 내리기도 전에 벌써 장검 끝이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누구야?" 그 사람은 소리쳤다.
다음 순간, 내가 칼 끝에서 15미터나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그는 칼을 내리고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이것은 좋은 반응인데요, 바르슴 어디를 찾아보나 고무공처럼 튀어오를 줄 아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놀랐는걸요. 존 카터, 대체 어떻게 이곳에 왔습니까? 마음대로 몸빛을 바꾸다니, 다르신(카멜레온과 같은 화성의 파충류)이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래서 와푼의 투기장에서 그와 헤어진 뒤의 모험담을 대강 말하니,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까는 놀랐소. 만일 나의 이름과 출신지가 조댕거 놈들에게 탄로되면 눈 깜짝하는 사이에 저 세상으로 가게 되니까요. 나는 헤리움 황제 타르도스 모르스를 위해 우리의 왕녀 데저 소리스를 찾으러 이곳에 와 있는 것입니다. 조댕거의 왕자 사브 산이 이 도시의 어딘가에 왕녀를 숨겨 놓았어요. 왕자는 왕녀를 애타게 사랑하고 있지요. 그의 아버지이자 조댕거의 황제 산 코시스는 만일 왕녀가 자진해서 사브 산 왕자와 결혼하면 그 댓가로 양국간의 화평을 약속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타르도스 모르스 황제는 이 요구에 응하지 않았어요. 황제는 사자(使者)를 파견하여 황제 자신이나 백성들은 황녀가 자기가 고른 상대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왕녀의 죽은 얼굴을 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전하고, 황제로서는 타르도스 모르스 집안의 문장(紋章)과 산 코시스 가문의 문장을 결합시킬 바에는 불타는 헤리움의 재(灰) 위에 몸을 눕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전하게 한 겁니다. 이 회답은 산 코시스와 조댕거 인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모욕이었지만, 헤리움의 국민들은 이 회답을 알게 된 뒤로 한층 더 황제를 사랑하게 되었고, 현재 황제의 세력은 전에 없이 증대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 온 지 사흘 되었어요." 칸토스 칸은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왕녀가 어디에 유폐되어 있는지 아직도 알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공중 정찰병으로 조댕거 공군에 참가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브 산 왕자의 신임을 얻어, 데저 소리스 공주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하는 거지요. 왕자는 공중 정찰대의 지휘관이라서요. 당신이 와 줘서 다행이군요, 존 카터. 왕녀에 대한 당신의 충성심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훨씬 효과가 있을 겁니다."
벌써 광장은 그날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왕래로 차츰 복잡해졌다. 가게는 문을 열기 시작했고, 다방은 아침 일찍부터 오는 단골 손님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칸토스 칸은 이러한 번창한 어느 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식당에선 시종일관 기계가 식사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원료가 이 건물로 운반되면서부터 따끈따끈한 맛있는 음식이 되어 손님 앞 테이블에 나타나기까지, 일체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는다. 무엇을 먹고 싶거나 작은 버튼을 누르면 그 요리가 눈 앞에 나타나게끔 되어 있었다.
식후에 칸토스 칸은 공중 정찰대 본부로 나를 동행하여 상관에게 소개하고, 이곳의 일원으로 입단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관례에 따라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칸토스 칸은 걱정할 것 없다, 그 일이라면 내가 잘하겠다고 떠맡았다.
어떻게 하는가 했더니 그는 나의 시험장 입장권을 가지고 시험관 앞으로 가 자기가 존 카터라고 말했다.
"이 대역(代役) 작전은 나중에 탄로납니다." 그는 유쾌한 듯이 설명했다. "나의 체중과 신장과 그밖의 개인적 특징을 조회해서 조사하면. 그러나 그러기까지는 몇 개월 걸리지요. 이쪽은 그보다 훨씬 전에 사명을 이행하든가 아니면 실패하든가 할 테니까요."
그리고 이삼 일은 화성인이 정찰 비행 목적에 사용하는 모양 좋은 작은 비행정의 조종법이며 수리 방법을 칸토스 칸이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 단좌정(單座艇)의 기체는 전체 길이가 약 5미터, 폭 60센티미터, 두께가 8센티미터로 양측 끝이 가느다랗고 뾰족했다. 조종자는 기체에 단 소리가 나지 않는 라듐 엔진 위의 조종석에 앉는다. 부력(浮力)의 근본이 되는 것은 바르슴 제8광선으로, 이것은 얇은 금속으로 된 기체 안의 공동(空洞)에 들어가 있다. 이 광선은 그 특성에서 추진광선(推進光線)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제9광선과 마찬가지로 이 광선도 지구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화성인은 광원(光源)이 어떤 것이건 추진력은 모든 빛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특성임을 발견한 것이다. 즉 태양빛이 여러 혹성에 다다르는 것은 제8광선의 작용에 의한다는 것, 그리고 일단 받은 빛을 다시 우주로 되보내는, 즉 <반사>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은 개개의 혹성이 지니는 제8광선이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태양의 제8광선은 화성의 지표(地表)에 흡수되나 화성의 빛을 우주로 보내는 작용을 하는 화성의 제8광선은 쉴새없이 이 혹성의 표면에서 방출되고 있으며, 인력에 대하여 반발 작용을 하는 에너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에너지를 압축하면 지표에서 어마어마한 중량을 들어올릴 만한 힘이 되는 것이다.
이 광선에 의해 완벽한 항공술이 가능해졌으므로 화성인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비행선이라도 풍선이 지구의 농후한 대기 속을 나는 것처럼 바르슴의 희박한 공기 속을 우아하게 너울너울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
제8광선이 발견되었을 당초에 화성인들이 이 훌륭한 힘을 측정하여 조절하는 방법을 알기까지는 예상 밖의 사고가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900년쯤 전의 일이다. 제8광선의 저장기(貯藏器)를 갖춘 최초의 대형 우주 전투선이 건조되었는데, 광선을 너무 많이 저장했기 때문에, 장교와 승무원 500명을 태우고서 헤리움의 하늘 높이 올라간 채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화성에 대한 우주 전투선의 반발 작용이 너무 세었으므로 우주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이다. 지금도 강력한 망원경을 통해 그것이 화성의 1만 마일 상공을 날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화성의 작은 위성(衛星)이 되어 바르슴 주위를 앞으로도 영원히 날고 있을 것이다.
조댕거에 온 지 나흘 째에 나는 첫 비행을 했다. 그 결과 승진하여 산 코시스 궁전 안에 숙소를 갖게 되었다.
도시의 상공으로 날아올라갔을 때, 나는 칸토스 칸이 한 것처럼 몇 번 선회 비행을 했다. 그리고 엔진을 최고 속도로 올려 조댕거의 도시를 꿰뚫고 있는 대수로(大水路)의 하나를 따라 무서운 스피드로 남쪽으로 향했다. 한 시간이 채 못되어 200마일 가량 날았을 무렵 아득히 눈 아래로 세 사람의 녹색인 전사가 뛰어가고 있는 작은 사람을 향해 미친 듯이 말을 달리고 있는 광경이 가물가물 보였다. 쫓기고 있는 인물은 담을 쌓아 놓은 밭 끝으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향해 급강하하여 전사들의 등 뒤로 돌아가니 그들이 쫓고 있는 사람은 적색인으로, 내가 소속하고 있는 공중 정찰대의 메달을 달고 있는 것을 곧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가까이에 그의 소형기(小型機)가 쓰려져 있었다. 둘레에 공구(工具)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고장난 곳을 열심히 수리하고 있다가 갑자기 녹색인 전사의 습격을 받은 모양이다.
전사들은 금방 그를 잡을 것 같았다. 그들이 탄 말은 무서운 속력으로 작은 사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전사들은 말 오른쪽으로 몸을 구부리고 금속 칼 끝이 달린 커다란 창을 겨누어 각기 그 불쌍한 조댕거 인들 찌르려고 앞을 다투고 있는 참이었다. 만일 내가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그도 끝장일 것이다.
나는 초스피드로 쾌속 비행정을 날려 전사들의 바로 뒤를 쫓아 눈 깜짝할 사이에 뒤따라붙었다. 그리고 그대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맨 앞에 있는 전사의 머리를 향해 기수(機首)로 들이받았다. 두께가 몇 인치나 되는 강철마저도 꿰뚫을 정도의 충격으로 목이 없어진 그의 몸은 말머리 너머로 날아가 이끼 위에 떨어졌다. 나머지 두 사람의 말은 겁에 질려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어대며 방향을 바꾸어 각기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쏜살처럼 달려갔다.
나는 속도를 낮추어 선회하다 놀란 조댕거 인의 발치에 착륙했다. 그는 때를 맞춘 구원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오늘의 일에 알맞는 보상(報償)을 하기로 약속했다. 내가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조댕거 황제의 사촌이었다.
녹색인 전사들이 말을 달래는 대로 되돌아올 것은 당연한 일이므로 이야기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두 사람은 고장난 정찰기로 달려가서 필요한 수리를 끝마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했다. 수리가 거의 끝났을 때, 두 녹색인이 전속력으로 우리의 좌우에서 달려왔다. 100미터 앞까지 왔을 때 다시 그들의 말은 떡 버티고 서서, 바로 전에 놀랐었던 비행정으로는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전사들은 말에서 내려 도망치지 않도록 말의 두 다리를 묶어 놓고 장검을 빼어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서 다가왔다. 나는 조댕거 인에게 한 사람을 상대로 하여 힘껏 싸워 달라고 말한 다음 몸집이 큰 자를 맞아 싸우려고 그쪽으로 몸을 향했다. 몇 번이고 연습을 쌓았기 때문에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여서 어이가 없을 정도로 상대방을 쉽게 쓰러뜨렸다. 그리고 조댕거 인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니 그의 목숨은 그야말로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그는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었다. 적은 그 목을 커다란 발로 밟고 급소를 찌르려고 굉장히 큰 장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나는 15미터쯤 떨어진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가 몸 앞으로 내민 칼 끝으로 녹색인의 몸을 찔렀다. 녹색인은 힘없이 칼을 떨구고 조댕거 인 위로 쓰러졌다.
조댕거 인의 몸을 살펴보았으나 치명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쉰 다음, 이 정도라면 이제 돌아갈 수 있겠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나의 작은 비행정은 혼자밖에 탈 수 없는 것이므로 그는 자기 비행정을 자기 손으로 조종해야만 했다.
급히 수리를 마치자, 두 사람은 구름 한 점 없는 조용한 화성의 하늘 위로 날아올라갔다. 그리고 무사히 전속력을 내어 곧장 조댕거로 돌아갔다.
도시에 이르러 정면에 시민과 군대가 구름처럼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군의 비행선과 일반용과 자가용 유람 비행정이 날고, 화려한 색채며 기묘하고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깃발이 바람에 날려 도시의 상공이 어두워질 정도였다.
그 조댕거 인은 나에게 속도를 늦추라고 신호를 하더니, 나의 비행정 바로 곁으로 자기 비행정을 갖다대고, 이 의식에 참관하자고 제의했다. 그의 말을 빌면 이 식전은 무훈(武勳)이 있는 장교나 용사나 그밖의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들을 표창하는 식전이라고 했다. 그는 조댕거의 왕가(王家) 사람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작은 깃발을 달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저공 비행을 하고 있는 비행선 사이를 누비고 조댕거 황제와 그 막료(幕僚)의 바로 머리 위로 나아갔다. 황제를 비롯한 전원이 몸이 작고 온순한 숫말을 타고 있었다. 마구(馬具)와 장식물에는 색채가 풍부한 깃털이 잔뜩 달려 있으며, 지구의 인디언 부대와 똑같았으므로 나는 깜짝 놀랐다.
막료 한 사람이 머리 위에 있는 나의 동행 쪽을 가리키며 산 코시스의 주의(注意)를 촉구하자 황제는 내려오라고 그에게 신호를 했다. 황제 앞에 군대가 정렬을 할 동안, 두 사람은 뭔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황제와 막료는 가끔 내가 있는 쪽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최후의 대열이 황제 앞에 정렬하자 두 사람은 이야기를 멈추고 모두들 말에서 내렸다. 한 막료가 군대 앞에 나아가, 한 병사의 이름을 부르고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막료는 황제의 칭찬을 받게 된 그 병사의 영웅적인 행위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황제는 앞으로 나와 이 행운의 병사의 왼팔에 금속 팔찌를 끼워 주었다.
이리하여 10명의 병사가 팔찌를 다 받았을 때, 부관이 "정찰 비행사 존 카터!"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이렇게 놀란 일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러나 군대의 규율을 완전히 몸에 익히고 있었으므로 곧 비행정을 사뿐히 착륙시키고, 다른 병사가 한 것처럼 앞으로 걸어나갔다. 막료 앞까지 와서 멈추자 그는 모여 있는 군대와 관중의 구석구석까지 다 들릴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존 카터, 자네는 훌륭한 용기와 수완으로 산 코시스 황제의 사촌을 지키고 세 녹색인 전사를 단신(單身)으로 쓰러뜨렸다. 우리 황제는 이를 기꺼이 여기시고 표창한다."
산 코시스는 앞으로 나와 나의 팔에 장식을 달아 주면서 말했다.
"나의 사촌은 초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네의 훌륭한 공적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황제의 사촌을 이처럼 잘 지킬 수 있다면, 황제의 옥체도 그 이상으로 훌륭히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네를 친위대의 사관(士官)으로 임명하고, 앞으로 나의 궁전에 살 것을 명령한다."
나는 황제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지시에 따라 그의 막료의 열에 끼었다. 식이 끝나자 나는 비행정을 공중 정찰대의 병사(兵舍) 옥상에 있는 격납고(格納庫)에 갖다 넣고 궁전에서 보낸 전령(傳令)의 안내로 궁전의 경호(警護)를 담당한 시종(侍從) 앞으로 출두했다.데저 소리스와의 재회
시종은 나를 황제의 신변 가까이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황제는 전쟁 때는 계속 암살의 위험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 중에는 어떠한 수단을 써도 상관없다는 것이 화성인의 전쟁 도덕의 원칙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종은 곧 산 코시스가 있는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황제는 아들 사브 산 외에 몇 명의 가신(家臣)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내가 들어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방 주위의 벽면은 훌륭한 벽걸이로 가득 차 있어, 창문과 문이 온통 가려져 있었다. 방 내부는 천장과 거기서 몇 인치 아래에 쳐 놓은 젖빛 유리 제품의 천장형 사이에 축적해 놓은 태양 광선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나를 데리고 온 시종이 벽걸이 한 장을 옆으로 잡아당기니, 벽걸이와 벽 사이에 방을 둘러싸고 있는 통로가 나타났다. 산 코시스가 방에 계신 동안 이 통로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방을 나가실 때는 그 뒤를 따라가도록 하라고 시종은 명령했다.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여 황제를 지키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임무이고, 네 시간 후에는 교대하러 다른 사람이 올 것이라고 했다. 시종은 나를 그 자리에 남겨 두고 돌아갔다.
그 벽걸이는 참으로 이상하게 짜여져 있어, 겉에서 보면 두텁고 튼튼해 보이나 내가 숨어 있는 곳에서 보면 마치 눈 앞의 시계(視界)를 막는 물건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로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환히 다 보였다.
내가 부서(部署)에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방 저쪽의 벽걸이가 좌우로 열리고 4명의 친위대 병사가 여자 하나를 에워싸고 들어왔다. 병사들은 산 코시스 앞에 오자 좌우로 갈라졌다. 황제의 앞―내가 있는 곳에서 3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웃음을 띠고 있는 것은 데저 소리스였다.
조댕거의 왕자 사브 산이 앞으로 나가서 그녀를 맞아들여 두 사람은 손에 손을 잡고 황제 바로 옆까지 걸어갔다. 산 코시스는 깜짝 놀라 시선을 들고 일어서서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아니, 헤리움의 왕녀가 납시다니, 이게 도무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틀 전에는 나의 자존심을 무시하고, 황태자와 결혼할 정도라면 오히려 서크의 녹색인 타르 하쥬스를 택하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을 텐데요?"
데저 소리스는 더욱 밝게 생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입가에 장난기 어린 보조개를 짓더니 대답했다.
"바르슴에선 본디 옛날부터 마음의 깊이를 감추고, 마음대로 기분을 바꾸는 특권이 있습니다. 산 코시스 전하, 제발 황태자처럼 폐하도 저를 용서해 주세요. 이틀 전에는 황태자가 저를 사랑해 주시고 있는지의 여부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제발 저의 무분별한 말을 잊어 주세요. 헤리움의 왕녀는 때가 되면 조댕거의 황태자 사브 산과 결혼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부디 이 약속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처럼 결심해 줘서 반갑게 생각하오." 산 코시스는 대답했다. "더 이상 헤리움의 사람들과 싸움을 계속하는 일은 나의 본의가 아니오. 당신의 약속을 문서로 꾸며 곧 일족(一族)에게 포고하기로 하겠소."
"어명인 줄은 압니다만, 산 코시스 전하." 데저 소리스는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포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헤리움의 왕녀가 전쟁 중에 적과 결혼한다면 저의 일족들에게도, 또 국민들에게도 참으로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제 곧 싸움을 끝낼 수는 없을까요?" 사브 산이 입을 열었다. "황제의 말씀 한 마디면 평화를 되찾을 수도 있을 것 아닙니까? 부탁입니다, 아버님. 저의 행복을 서둘러, 이 악평 높은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다고 한 마디만 말씀해 주십시오."
"좋아." 산 코시스는 대답했다. "헤리움 사람들이 휴전 요청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두고 보기로 하자. 일단 이쪽에서 말을 꺼내 보겠다만."
데저 소리스는 몇 마디 지껄이자 돌아서서 다시 호위를 거느리고 방을 나가 버렸다. 이리하여 나의 행복에 대한 꿈은 현실 앞에 모래 위의 누각처럼 소리도 없이 허물어져 버렸다. 내가 한 목숨을 바칠 결의를 했던 여자, 불과 얼마 전에 사랑의 고백을 한 여자가 나의 존재를 깨끗이 잊어버리고 밝은 얼굴로 가장 미워해야 할 적에게 몸을 맡기다니!
내 귀로 직접 들었으면서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방을 찾아내어 이 가혹한 진상을 본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샅샅이 듣기 전에는 납득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그 자리를 버리고 벽걸이 뒤쪽 통로를 지나, 지금 그녀가 나간 문으로 향했다. 문으로 살짝 빠져나가자 눈 앞에 미로(迷路)처럼 구불거리는 복도가 나오더니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꺾여 있다.
이 복도에서 저 복도로 뛰어다니다 보니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벽에 기대어 헐떡이고 있으려니까 가까이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말소리는 아무래도 내가 기대어 있는 벽 저쪽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곧 데저 소리스의 목소리를 가려 들을 수가 있었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저 목소리를 잘못 알아들을 리는 없다.
두세 발자국 앞에 또 다른 복도가 있고, 막다른 곳에 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가가서 뛰어들어갔다. 그곳은 좁은 대기실로, 아까 그녀가 데리고 온 네 명의 호위병이 모여 있었다.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폐하의 명령으로 왔다." 나는 대답했다. "헤리움의 왕녀 데저 소리스와 가까이서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 허가증은?" 그 사나이가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어쨌든 나는 친위대 사람이라고 말하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대기실 안쪽 문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데저 소리스의 목소리는 그 문 너머에서 들려 왔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는 되지 않았다. 호위병은 나의 앞을 막아섰다.
"황제는 허가증이나 암호 없이 사람을 보내는 일이 없다. 그중 어느 하나를 제시하지 않는 한 이곳을 지나가게 할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곳에 들어가는 유일한 허가증은―알겠나, 내 허리에 찬 이것이다." 나는 장검을 가볍게 두드리며 대답했다. "고분고분히 보내 줄 텐가, 어때?"
대답 대신 위병은 칼을 뽑아들고, 남은 세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불렀다. 이리하여 네 사람은 칼을 빼들고 내 앞길을 막아섰다.
"너는 페하의 명령으로 온 것이 아니다." 맨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던 사나이가 소리쳤다. "헤리움의 왕녀가 있는 방에 들여보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황제 앞으로 끌고 가 그 괘씸한 행동을 호되게 혼내 주어야겠다. 칼을 버려라. 우리 네 사람과 칼싸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는 음흉한 웃음을 띠고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 답하여 나는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단칼에 상대방을 쓰러뜨렸다. 이것으로 남은 적은 세 사람이 되었다. 분명히 상대방들도 부족이 없는 힘센 자들이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필사적으로 응전하는 나를 창가로 몰아넣었다. 나는 한 발 한 발 방 한구석으로 후퇴해 갔다. 그곳이라면 한 번에 한 사람씩밖에 덤벼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20분 이상이나 싸웠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좁은 방 안에 드높게 울려퍼졌다.
이 소리를 듣고 데저 소리스가 방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싸움이 끝날 때까지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었다. 소라도 나와 그녀의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데저 소리스는 얼굴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고 완전히 무표정하게 서 있었으므로 나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소라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행운의 일격에 의해 두 번째의 병사가 쓰러졌다. 그리고 이삼 분 후에는 최후의 한 사람이 피묻은 마루 위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네 사람 다 용감하고 훌륭한 전사였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죽이게 된 일을 나는 슬퍼했다. 그러나 데저 소리스 앞으로 가기 위해서라면 바르슴의 인간을 기꺼이 몰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칼을 칼집에 넣고 사랑하는 화성의 왕녀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아직도 나라는 것을 모르고 입을 다문 채 꼼짝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댕거 인이여, 당신은 누굽니까?"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비참한 나를 이보다 더 괴롭히려고 찾아온 새로운 적인가요?"
"한편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옛친구입니다."
"헤리움 왕녀 편이라면, 그 같은 장신구는 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그 목소리!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은―아니, 설마―그 분은 돌아가신걸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하시겠지만, 나의 공주님, 나는 존 카터입니다. 몸에 색을 칠하고 다른 장신구를 달았다고 해서 당신의 족장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십니까?"
내가 가까이 가자 그녀는 두 손을 내밀며 뛰어들었다. 내가 끌어안으려 하니까, 그 순간에 몸을 떨고 슬픈 신음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쳤다.
"너무 늦었어요, 이제 늦었어요." 그녀는 비탄에 잠겼다. "아아, 우리 족장님, 이제는 그렇게 부를 수도 없어요. 저는 당신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한 시간만 더 빨리 돌아와 주셨더라면―그러나 이제는 늦었습니다. 이미 늦었단 말이에요."
"그건 무슨 뜻입니까, 데저 소리스?" 나는 외쳤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조댕거의 왕자와 결혼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인가요?"
"한 번 당신에게 바친 마음을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고 생각했나요, 존 카터? 나의 마음은 당신의 시체와 함께 와푼의 해저에 파묻은 것으로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 이겨 날뛰는 조댕거 군의 전화(戰火)에게 일족(一族)을 구하기 위해 나의 몸을 다른 남자에게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살아 있습니다, 공주님. 나는 당신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조댕거 인이 방해를 하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존 카터. 나는 약속해 버렸어요. 바르슴에서는 일단 약속을 하면 취소를 못해요. 나중에 행하는 결혼식은 단순한 형식에 불과합니다. 황제의 장례 행렬이 죽음의 인(印)을 유해(遺骸)에 찍어 황제의 죽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을 행함으로써 결혼의 사실을 확인할 뿐입니다. 나는 결혼한 거나 다름없어요, 존 카터. 나를 당신의 왕녀라고 부르면 안됩니다. 이미 당신은 우리 족장님이 아닙니다."
"데저 소리스, 나는 당신네 바르슴 인의 풍습에 대해서는 거의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얼마 전 그날 와푼의 대군이 우리를 쳐들어왔을 때 당신이 남기고 간 말이 본심이라면 절대로 다른 남자가 당신을 아내라고 부르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 당신은 진심으로 말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당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 주십시오."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존 카터." 그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한 번 되풀이 말할 수는 없어요. 저는 다른 남자에게 몸을 맡겼으니까요. 아아, 당신이 우리 풍습을 아신다면―" 그녀는 거의 혼잣말처럼 말을 계속했다. "결혼 약속은 벌써 몇 달 전에 당신의 것일 수 있었는데...... 그러니 누구보다도 먼저 나를 당신의 아내로 삼을 수 있었을 거예요.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헤리움은 멸망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서크 족장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제국을 잃어도 아깝지는 않아요." 그리고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저를 화나게 한 그날 밤의 일을 당신은 기억하고 계신가요? 당신은 나에게 결혼 신청도 하지 않았는데, 나를 <나의 공주>라고 부르셨지요? 그리고 나를 위해 싸운 거라고 의기양양했었지요.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므로 나는 화를 안 내면 안되었던 거예요. 지금에야 알게 되었지요? 그러나 내가 일러 드리지 못한 일, 즉 바르슴의 적색인 사이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당신에게 일러 주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싸운 뒤에 구혼하는 여자와, 싸워도 구혼하지 않는 여자, 두 종류가 있지요. 남자는 싸워서 여자를 얻었을 경우, 그 여자를 나의 공주라든가 아무튼 그와 비슷한 소유를 나타내는 말로 불러도 됩니다. 당신은 나를 위해 싸워 주셨지만, 한 번도 나에게 구혼한 일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나의 공주라 불렀을 때 나는―" 하고 그녀는 말을 얼버무렸다. "마음이 상한 거예요 그러나 그때도 존 카터, 나는 당신을 거부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그렇게 해야 했던 거예요. 구혼만 했더라면, 나를 싸워서 빼앗았으면서 구혼도 하지 않고 오히려 웃음거리로 삼아 두 사람 사이를 좀더 악화시키는 그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제 새삼 사과를 드려 봐야 어쩔 수 없겠지요, 데저 소리스." 나는 소리쳤다. "이도 저도 다 내가 바르슴의 습관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의 소원이 주제넘고 괘씸한 일이라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나는 그때 이행치 못했던 일을 지금 이행하겠습니다. 데저 소리스, 나의 아내가 되어 주십시오. 나의 몸 안에 흐르고 있는 용감한 버지니아 인의 피를 걸고."
"안됩니다, 존 카터. 소용없는 일이에요." 그녀는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사브 산이 살아 있는 한 당신의 아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나의 공주님―사브 산은 죽습니다."
"그래도 안돼요." 그녀는 급하게 설명했다. "비록 그것이 자기 방위라 하더라도 남편을 죽인 남자하고는 결혼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규칙입니다. 우리는 바르슴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죽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당신은 저와 함께 슬픔을 견디지 않으면 안됩니다. 적어도 그것만은 함께 나눌 수 있겠지요. 슬픔과 서크에서 지낸 짧은 나날의 추억만은. 이제 그만 저쪽으로 가 보셔야 하지 않겠어요. 두번 다시 만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안녕히 계세요, 저의 추억의 족장님."
나는 의기소침하여 힘없이 방을 나왔다. 그러나 완전히 좌절한 것은 아니었으며 결혼식이 실제로 이루어지기까지는 데저 소리스를 잃었다고 인정할 작정도 아니었다.
복도를 어정어정 걷다 보니, 아까 데저 소리스의 방을 찾아내기 전에 헤매었듯이 또다시 미로(迷路)처럼 구불거리는 복도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나의 소망은 이 조댕거에서 도망치는 일뿐이었다. 그 네 사람의 위병을 죽인 일도 해명해야 하고 안내 없이는 먼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렇게 지향 없이 궁전 안을 헤매고 있는 것이 눈에 띄게 되면 틀림없이 의심을 살 것이다.
마침내 아래층으로 통하는 나선상의 통로 앞으로 나왔다. 이 통로를 통해 몇 층 아래로 내려가니까 위병이 많이 모여 있는 큰 방 입구에 닿았다. 나는 방 벽에 걸려 있는 투명한 벽걸이 뒤로 몸을 숨겼다.
위병들의 대화는 세상 이야기였으므로 별로 흥미를 끌지 않았지만, 마침내 한 사람의 장교가 들어와 헤리움의 왕녀를 호위하고 있는 병사와 교대하라고 네 사람에게 명령했다. 이거 정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는군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과연 그대로였다. 교대한 네 사람이 나가는가 했더니, 그중 한 사람이 곧 헐떡거리며 돌아와 대기실에 가 보니 네 동료가 참살 당했더라고 소리를 질렀다.
한순간 궁전 전체가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소란해졌다. 친위대의 병사나 장교 전령(傳令), 하인, 노예 등이 전언(傳言)과 명령을 가지고 방과 복도를 우왕좌왕하며 하수인의 단서를 찾아 헤매었다.
발각될 공산은 컸지만 도망치려면 지금이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마침 내가 숨어 있는 앞을 지나가던 병사 일대(一隊)의 뒤를 따라 미로와 같은 궁전의 통로를 걸어갔다. 호올을 가로질렀을 때 고맙게도 하나의 큰 창문에서 햇빛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그 병사들과 헤어져 가장 가까이 있는 창문으로 살짝 다가가 도망칠 길을 찾았다. 그 창문은 조댕거의 넓은 한길 쪽으로 난 발코니로 통하고 있었다. 지면은 10미터 가량 아래에 있다. 그리고 건물에서도 10미터쯤 떨어진 곳에 두께 30센티미터 가량의 유리로 만든 높이 7미터의 벽이 있었다. 적색 화성인이면 이 길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겠지만, 지구인의 힘과 민첩함을 동원하면 벌써 도망친 거나 다름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두려워한 것은 어두워지기 전에 발견되지나 않을까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래에 있는 뜰이나, 저쪽 한길에는 조댕거 인이 우글대고 있으므로 대낮에 뛰어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은신처를 찾다가 우연히 눈에 띈 홀의 바닥에서 3미터 가량 되는 곳에 매달려 있는 큰 종 속에 숨기로 했다. 그 화분과 같은 모양을 한 큰 장식에 힘 안 들이고 뛰어올라 그 속에 자리를 잡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몇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내가 숨어 있는 바로 아래에서 발을 멈췄다. 그들이 지껄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똑똑히 들렸다.
"이것은 헤리움 인의 짓이 틀림없다" 하고 한 사람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러나 어떻게 이 궁전으로 들어왔을까요? 친위대의 감시가 엄격하다 하더라도 한 사람쯤은 침입할 수 있겠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여섯 내지 여덟 명의 병사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알 수 있겠지요. 궁정에 있는 심리학자가 이곳으로 옵니다."
곧 한 사나이가 이 무리에 가담했다. 그는 황제에게 공손히 절을 한 다음 말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폐하의 충실한 위병의 죽은 마음을 알아보고 왔습니다만,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을 쓰러뜨린 것은 몇 사람의 전사가 아니라 단 한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말하고 있는 사실의 중요성을 듣는 이의 마음 속에 침투시키려는 듯,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산 코시스는 초조한 듯이 크게 꾸짖었다.
"노오탄, 얼빠진 소리 하지 말게!"
"이것은 진실된 이야기입니다, 폐하." 심리학자는 대답했다. "사실 그 일이 분명히 네 병사의 뇌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을 쓰러뜨린 적은 키가 큰 사나이로, 우리 친위대의 장신구를 달고 있었습니다. 그의 전투력은 놀라운 것으로, 공정하게 네 사람 모두와 싸워 뛰어난 기술과 초인적(超人的)인 힘과 인내로 네 사람 다 쓰러뜨린 것입니다. 조댕거의 장신구를 달고는 있지만 이 같은 남자는 조댕거는 고사하고 바르슴의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겁니다.
헤리움의 왕녀를 조사하고 심문했습니다만, 왕녀의 마음은 공백이었습니다. 왕녀는 마음을 완전히 누르고 있어 아무것도 알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왕녀는 싸움의 일부를 목격했다고 말하며, 위병과 싸우고 있던 사람은 본 일이 없는 남자였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나를 구해 준 남자는 어디 있지?" 다른 남자가 물었다. 목소리로 보아 그는 내가 녹색인의 손에서 구해 낸 황제의 사촌임을 알 수 있었다. "맹세해도 좋다. 그것은 그 남자의 인상(印象)과 딱 들어맞는다. 특히 전투 능력으로 보아서 틀림없다."
"그 사람은 어디 있나?" 산 코시스가 소리쳤다. "곧 데리고 오너라. 너는 그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전사가 조댕거에 있다는 것도 못 들었고, 이름마저도 우리가 오늘날까지 몰랐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존 카터라는 기묘한 이름은 바르슴에선 들은 일이 없지 않은가!"
궁전 안에도 없고 공중 정찰대의 병사(兵舍)에도 없으며, 어디를 찾아봐도 내가 없다는 소식이 곧 전해졌다. 그들은 칸토스 칸을 찾아내어 심문했으나, 그도 내가 있는 곳을 알지 못했다. 그는 얼마 전에 와푼 족에게 잡혔을 때 알게 되었을 뿐, 어떤 전력(前歷)이 있는 남자인지 잘 모른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도 잘 감시해." 산 코시스는 명령했다. "그도 정체 불명이야. 둘 다 헤리움 인들인가 보다. 한 놈을 잡아 두면 머잖아 또 한 놈이 찾아올 것이다. 공중 정찰기를 네 배로 늘리고 육로로든 공로(空路)로든 도시를 빠져나가는 자는 다 엄중히 조사하도록."
거기에 전령이 또 하나 찾아와서 내가 아직 궁전 내부에 있다고 보고했다.
"오늘 이 궁전에 드나든 사람 모두의 인상 착의를 자세히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궁전에 들어왔을 때의 기록 말고는 이 새로운 친위대 사관의 인상에 부합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 곧 잡히겠지." 산 코시스는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를 찾고 있든 동안 어쨌든 우리는 헤리움 왕녀의 방으로 가서 이 사건에 대해 심문하도록 하자. 노오탄, 공주는 자네가 알아본 일 외에 뭔가 다른 일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아, 따라오너라."
그들은 홀에서 나갔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으므로 나는 은신처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발코니 쪽으로 급히 갔다. 주위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으나 가까이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나는 재빨리 유리 담으로 뛰어올라가 거기서 궁전 대지 너머의 한길로 뛰어내렸다.헤리움으로
몸을 숨길 생각도 않고 병사(兵舍)가 있는 곳까지 서둘러 갔다. 칸토스 칸이 틀림없이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병사로 다가가자 나는 좀더 신중해졌다. 예상대로 그곳은 경비가 삼엄했다. 민간인의 장식을 단 남자가 몇 명 앞 현관과 뒷문에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들키지 않고 나와 칸토스 칸의 방이 있는 위층으로 가려면 옆 건물로 침입할 수밖에 없다. 이것저것 궁리한 끝에, 몇 집 떨어져 있는 상점의 지붕 위로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지붕을 따라 옮겨가서 잠시 뒤에 칸토스 칸이 있는 건물까지 왔다. 열린 창문이 하나 있었으므로 곧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 그의 앞에 섰다. 그는 혼자 있었는데, 내가 온 일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근무 시간은 벌써 끝났으므로 좀더 빨리 오지 않을까 했지요"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오늘 궁전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하자 그는 완전히 흥분해 버렸다. 데저 소리스가 사브 산과 결혼 약속을 했다는 말을 듣고는 기절을 할 정도였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조댕거의 왕가(王家)에다 사랑하는 공주님을 내놓게 된다면 헤리움의 남자는 죽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왕녀가 그렇게 무서운 거래에 응하다니, 어떻게 된 모양이로군. 헤리움의 민중들이 얼마나 황제 일가(一家)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굴욕적 동맹을 얼마나 무섭게 생각하는가를 알 수 없을 겁니다. 존 카터, 무슨 대책이 없을까요? 당신은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헤리움을 이 굴욕에서 구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브 산과 칼싸움을 할 수 있다면 헤리움을 이 고경(苦境)에서 구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이유가 있으니 만큼 그를 쓰러뜨려서 데저 소리스 공주를 자유로운 몸으로 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을 시켰으면 합니다."
"당신은 왕녀를 사랑하고 있군요! 왕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고말고요. 그러나 왕녀는 사브 산과 약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칸토스 칸은 훌륭한 사나이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나의 어깨를 잡고는 칼을 높이 빼어들고 소리쳤다.
"바르슴 제일가는 공주님의 신랑을 고르라는 소임을 맡았다면, 나는 당신보다 더 훌륭한 신랑은 찾지 못했을 겁니다. 존 카터, 나는 당신의 어깨 위에 이렇게 손을 얹고 맹세합니다. 사랑하는 헤리움을 위해, 그리고 데저 소리스 공주님과 당신을 위해 사브 산을 꼭 내 손으로 쓰러뜨려 보이겠습니다. 당장 오늘 밤 안으로 궁전 안 그의 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어떻게 들어가겠소? 당신은 지금 엄중히 감시를 받고 있으며, 공중 순찰대도 네 배로 증강되었단 말입니다."
그는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더니 마침내 자신 있다는 듯이 머리를 들었다.
"이곳 감시만 벗어난다면 해낼 수 있소. 나는 공중에서 가장 높은 뾰족탑으로 궁전에 들어가는 비밀 통로를 알고 있습니다. 근무 중에 궁전의 상공을 순찰했을 때 우연히 알게 되었지요. 순찰에선 뭔가 이상한 사건을 목격했을 때는 조사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 높은 탑의 뾰족탑에서 누가 내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되어 가까이 가 보니 바로 사브 산 왕자였습니다. 나에게 들킨 것을 알고 그는 다소 난처해 했는데,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더군요. 탑에서 그의 방으로 직접 통하는 통로가 있는데, 그 통로가 있다는 것은 자기만 알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병사의 옥상으로 올라가 정찰기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5분도 안되어 사브 산의 방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했듯이 이 건물은 감시당하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 수 있겠소?"
"병사의 격납고는 어느 정도로 엄중하게 감시하고 있지요?"
"야간에는 보통 보초병이 혼자서 옥상에 있을 뿐이오."
"그럼 칸토스 칸, 이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거기서 나를 기다리시오."
나는 내 계획을 설명할 틈마저 아껴서 밖으로 나온 다음 서둘러 병사로 갔다. 병사에는 공중 정찰대 대원이 꽉 차 있었으므로 감히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온 조댕거 사람들이 나를 찾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건물은 참으로 거대한 것으로, 좋이 3백 미터 이상의 공중에 늠름하게 솟아 있었다. 조댕거 안에서 이만한 높이의 건물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지만, 병사의 건물보다 칠팔 미터는 더 높은 건물이 몇 군데 있었다. 우주선대에 소속하는 대 전투 비행선의 발착장은 지상에서 약 5백 미터 되는 곳에 있고, 상선대(商船隊)의 화물 비행선과 여객 비행선의 발착장도 거의 같은 높이에 있다.
이 건물의 측면을 올라가려면 시간이 걸리고 또 매우 위험하기도 했지만, 그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대로 올라가기로 했다. 바르슴의 건조물(建造物)은 장식물을 더덕더덕 붙여 놓았으므로 생각했던 것보다는 편했다. 장식이 튀어나온 부분들이 건물의 처마에 올라갈 때까지 안성마춤으로 사다리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까지 올라가자 첫 번째 장애에 부딪혔다. 처마는 내가 매어달려 있는 측면에서 7미터나 튀어나와 있어, 이 커다란 건물의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었던 것이다.
제일 위층에는 불이 켜져 있고, 많은 병사가 저마다 여가를 즐기고 있었다. 따라서 건물 안을 통해 옥상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성공할 가망성이 적고 무모한 일이긴 했지만 기회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을 해볼 수밖에 없다고 나는 각오했다. 이것도 데저 소리스를 위한 일이다. 그녀 같은 여성을 위해서라면 남자는 천 번이라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발과 한쪽 손으로 벽을 잡고, 몸에 두른 가죽띠를 끌렀다. 끝에는 큰 갈고리가 달려 있다. 이것은 무엇을 수리할 경우나 또는 전함에서 하선할 때 쓰기 위한 것이다. 나는 신중히 이 갈고리를 여러 차례 옥상으로 던졌다. 이윽고 알맞게 걸렸으므로 단단히 걸렸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살짝 가죽띠를 잡아당겨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나의 체중을 지탱할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옥상가에 살짝 걸려 있을지도 모르며, 내가 거기에 매달려 공중으로 나는 순간 벗겨져서 3백 미터 아래의 포도(鋪道)로 떨어질는지도 모른다.
한순간 나는 주저했지만 하늘에 운을 맡기고 장식이 튀어나온 부분에서 손을 떼어 벨트 끝에 매달려 공중으로 날았다.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밝은 조명(照明)이 있는 가로(街路)와 포도와 그리고 사신(死神)이 팔을 벌리고 있었다. 처마 위에서 갈고리가 미끄러져 삐걱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이제는 끝장이구나 생각하니 한순간 가슴이 철렁 했으나 갈고리는 잘 박혀 나는 무사했다.
띠(벨트)를 잡고 재빨리 올라가서 처마 끝을 잡고 옥상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러나 일어서니 코 끝에 근무 중인 보초병이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보초병은 소리쳤다.
"나는 공중 정찰대 대원이오. 아이구, 자칫하다가는 나무아미타불이 될 뻔했군. 하마터면 저 아래 한길로 떨어질 뻔했거든."
"그런데 어떻게 옥상으로 올라왔지? 벌써 한 시간 전부터 아무도 착륙하지 않았고 아래에서도 올라온 이가 없는데. 어서 빨리 설명하지 않으면 경비대를 부르겠다."
"잠깐만 기다려요. 어떻게 해서 내가 이곳에 왔으며, 그리고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지를 알려 줄 테니."
나는 옥상 가장자리를 돌아다보았다. 거기서 6미터 아래의 벨트 끝에 나의 무기가 모두 매달려 있다. 보초병은 호기심이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그가 처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려고 몸을 구부린 틈에 나는 목과 권총을 든 팔을 잡아 옥상 바닥에 그의 몸을 내동댕이쳤다. 권총은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려는 입을 손으로 막고 수건으로 재갈을 물려 눕힌 다음, 아까의 나처럼 그를 옥상 가에 매달았다. 내일 아침이 되면 발견되겠지. 아무튼 되도록 시간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
가죽띠와 무기를 몸에 매고 급히 격납고로 달렸다. 그리고 곧 칸토스 칸과 나의 비행정을 밖으로 내놓았다. 그의 비행정을 나의 비행정 뒤에 매고 엔진을 시동시켜 옥상 끝을 스치고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한길을 향해 공중 정찰기가 보통 나르는 고도보다 낮게 강하했다. 1분도 안되어 우리 두 사람의 숙사(宿舍) 옥상에 무사히 착륙했다. 칸토스 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서 있었다.
설명할 틈을 아껴 곧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칸토스 칸이 궁전으로 침입하여 사브 산을 해치우는 동안에 나는 헤리움으로 직행하기로 결정하고, 그가 성공하면 곧 내 뒤를 쫓아오기로 했다. 그는 나의 나침의(羅針儀)를 맞춰 주었다. 이것은 참으로 잘 만들어진 계기(計器)로, 바르슴의 어느 지점에서나 튼튼하게 고정해 둘 수가 있는 것이었다. 서로 이별을 고한 뒤 똑같이 상승하여 궁전 쪽을 향해서 날았다. 헤리움에 가려면 궁전 위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높은 탑에 가까이 가니 정찰기 한 대가 상공에서 강하하여 나의 비행정을 향해 강한 서치라이트를 정면으로 비추며 큰 소리로 정지 명령을 내렸다. 내가 그 명령을 무시하자 이번에는 포를 쏘았다. 칸토스 칸은 재빨리 강하하여 어둠 속으로 숨었다. 나는 자꾸 고도를 올려 화성의 하늘을 무서운 속력으로 날았다. 공중 정찰대 수십 대가 제일 먼저 나를 발견한 정찰기와 합류하여 뒤쫓고, 마침내 백 명의 승무원과 일련(一連)의 속사포를 실은 고속 대형 비행선이 추적에 가담했다. 작은 비행정을 좌우로 기울어뜨리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상승했는가 하면 갑자기 하강하여 뒤쫓아오는 서치라이트에는 거의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전술을 취했으므로 추적기와의 거리는 차차로 좁혀졌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직선 비행을 하기로 했다. 뒤는 운명에 맡기고 비행정의 속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나는 기어를 조절하여서 스피드를 늘이는 방법을 칸토스 칸에게서 배웠었다. 이것은 헤리움 군인만이 아는 비결이었다. 그러므로 한동안만 적의 탄환을 피할 수 있다면 추격기를 멀리 떼어놓을 자신은 있었다.
공중을 치달리고 있으려니까 주위에 탄환이 하늘을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도저히 도망칠 수 없다고 나는 체념했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나는 헤리움을 향해 곧장 전속력을 내어 날았다. 추적기와의 거리는 차츰 벌어져 갔다. 옳다 하고 기뻐하는 순간, 나의 비행정 앞머리 부분에서 대형 비행선이 겨누어 쏜 포탄이 터졌다. 그 충격으로 하마터면 전복할 뻔했던 비행정은 밤의 어둠을 누비고 급속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비행정의 조종을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낙하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래에서 동물의 울음 소리가 들렸던 것으로 보면 지상에 닿을까말까한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상승한 뒤, 추격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니, 까마득히 뒤쪽에 가물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아무래도 나를 찾기 위해 착륙하는 중인가 보다.
추격기의 불빛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나침반에 회중전등을 비춰 보았다. 그랬더니 포탄의 파편으로 이 유일한 길잡이와 속도계가 부서져 있는 것을 알고 나는 정신이 아찔했다. 별을 의지해서 헤리움 쪽으로 어림 짐작하여 날아갈 수도 있었지만, 도시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날고 있는 속도도 몰라서야 도시를 발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헤리움은 조댕거의 남서쪽 천 마일 지점이 있다. 나침반이 손 가까이에 있고, 더구나 도중에서 사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네댓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이미 6시간이나 날아왔는데도 아직 물이 마른 광대한 해저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마침내 큰 도시가 눈 아래에 나타났으나 헤리움은 아니었다. 헤리움의 수도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거대한 두 도시로 이루어졌고, 이 두 도시의 사이는 75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이런 수도는 바르슴 안에는 어딜 가나 없었으므로 내가 날고 있는 고도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북서쪽으로 날아온 것 같았으므로 남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오전 중에 대여섯 개의 대도시 위를 날았으나 칸토스 칸이 설명해 준 헤리움 하고는 비슷하지도 않은 것뿐이었다. 헤리움이 두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는 일 이외에 또 하나의 특징은 두 개의 거대한 탑이다. 하나는 빨간 색으로 한 도시의 중앙에 1마일 가량의 높이로 솟아 있고 또 하나는 화려한 노란 탑으로서 같은 높이인 빨간 탑과 아름다움을 겨루고 있다고 한다.타르스 타르카스의 위기
정오 무렵, 고대 화성의 광대한 폐도(廢道) 위를 저공 비행(低空飛行)했다. 그곳을 넘어 들판을 낮게 날다 보니 녹색인 전사 수천 명의 처절한 전투 장면을 만나게 되었다. 내가 그들을 알아본 것과 거의 동시에 그쪽에서도 나를 향해 포를 쏘았다. 한 발이 정통으로 맞아 비행정은 그 자리에서 부서져 힘없이 추락했다.
떨어진 곳은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 분전(奮戰)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떨어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장검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백병전의 집단에서 한순간이라도 이탈되어 나오는 전사가 있으면 조금 떨어진 장소에 있는 저격병(狙擊兵)이 금방 사살해 버리는 것이었다.
비행정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복판에 떨어졌으므로 나는 싸우든가 아니면 죽든가 그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당할 공산이 컸지만,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장검을 뽑아들고 되도록 내 몸을 지키려고 태세를 갖추었다.
내가 추락한 바로 옆에서는 거대한 괴물이 세 사람의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 투지만만한 용감한 얼굴을 흘긋 보고 서크 족의 타르스 타르카스임을 알았다. 내가 조금 뒤에 있었으므로 그는 나를 몰라보았다. 상대방은 와푼 족이었다. 그런데 그때 세 사람의 적이 동시에 덤벼들어 왔다.
실력이 있는 타르스 타르카스는 재빨리 한 사람을 쓰러뜨렸으나, 다른 일격을 피하려고 뒤로 물러나다가 딩굴고 있는 시체에 걸려 쓰러지는 바람에 금방 불리한 태세로 바뀌었다. 적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덤벼들었다. 내가 쓰러져 있는 그의 앞을 막아서서 적을 막아 내지 않았더라면 타르스 타르카스는 그 자리에서 끝이었을 것이다. 내가 한 사람을 쓰러뜨리는 동안 서크의 용사는 일어서서 나머지 한 사람을 재빨리 해치웠다.
그는 나를 흘긋 보더니 무서운 형상에 미소를 띠고 나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존 카터, 자네인 줄 몰랐네. 그러나 나를 위해 이런 일을 해줄 사람은 바르슴 전체를 찾아보아도 자네밖에 없지. 우정이라는 뜻을 안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그는 그 말밖에 하지 않았다. 와푼 인이 우리에게 덤벼들었으므로 지껄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우리는 무더운 그날 오후 내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속 싸웠다. 이윽고 전황이 싹 바뀌었다. 살아남은 용맹스러운 와푼 족은 차츰차츰 후퇴하여 말에 오르자마자 깔리기 시작한 초저녁 어둠 속으로 쏜살같이 도망쳐 버렸다. 그 대규모적인 전투에는 만 명의 전사가 참가하여 싸움터에는 3천 명의 시체가 딩굴고 있었다. 양쪽 다 부상자를 살릴 생각도 안했고, 포로를 데리고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도시로 돌아오자 우리는 그 길로 타르스 타르카스의 숙소로 갔다. 그리고 전쟁 뒤에 늘 열리는 회의에 그가 참석하고 있는 동안 나는 혼자 남았다.
타르스 타르카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옆방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쪽을 슬쩍 바라보자 그 순간 크고 흉한 동물이 덤벼들어 지금까지 누워 있던 나를 비단 이부자리와 털가죽 위에 쓰러뜨렸다. 그것은 울러였다. 충실하고 애정이 깊은 울러였던 것이다. 나중에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서크로 돌아오자 곧 내가 전에 있던 곳으로 가서 가엾게도 내가 돌아오기를 기약도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존 카터, 자네가 여기 있는 것을 타르 하쥬스는 알고 있다네." 황제의 궁전에서 돌아오자 타르스 타르카스는 말했다. "우리가 돌아왔을 때 사르코쟈가 자네를 알아본 거야. 타르 하쥬스는 오늘 밤 자네를 출두시키라고 명령하였다네. 나에게는 10마리의 말이 있지. 그 중에서 자네에게 필요한 말을 한 마리 고르게. 내가 헤리움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수로까지 데려다 주지. 타르스 타르카스는 잔인한 녹색인 전사이지만 친구가 될 줄도 아는 사나이야. 자아, 출발해야지."
"그럼, 당신이 돌아올 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요, 타르스 타르카스?"
"흉포한 캬롯트라든가, 아니면 그보다 지독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나 그것도 타르 하쥬스와 결투하는 기회가 주어졌을 경우의 일이야. 나는 오랫동안 그 기회를 기다려 왔으니까."
"여기에 있기로 하지요, 타르스 타르카스. 그리고 둘이서 오늘 밤 타르 하쥬스를 만나는 겁니다. 당신을 희생시킬 순 없어요. 어쩌면 오늘 밤 당신이 기다리던 기회가 올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완강히 반대했다. 그리고 타르 하쥬스는 나에게서 받은 그 일격이 생각날 때마다 가끔 미쳐 날뛰곤 하므로 나를 다시 붙잡기만 하면 더욱 무섭게 고문할 것이라고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서크로 가는 행군 도중 해저에서 그날 밤 소라가 말해 준 신상 이야기를 그대로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들려 주었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다. 그러나 냉혹 무참한 그의 생애를 통해 그가 사랑한 유일한 연인의 신상에 일어났던 무서운 사건을 상기하고, 얼굴의 근육이 분노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둘이 함께 타르 하쥬스와 대결하자고 내가 말하자, 그는 거역하는 빛도 없이 다만 사르코쟈하고 우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의 부탁으로 나는 사르코쟈가 있는 숙사로 따라갔다. 사르코쟈는 증오에 불타는 눈초리로 나를 쓱 훑어보았다. 그것만 보아도 우연히 서크로 돌아오게 된 나에게 앞으로 어떤 재난이 닥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사르코쟈에게 말했다.
"40년 전에 고자바라는 여자를 고문하여 죽도록 한 원인을 만든 것은 너였지. 전에 그 여자를 사랑했던 전사는 네가 그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 전사는 너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관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죽끈으로 너의 목을 흉포한 말에 매달아서, 네가 살 수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할 수는 있지. 그 이야기를 들은 이상 그 남자는 내일 아침에 이 일을 실행할 것이다. 나는 공평한 남자니까 너에게 경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온 것이다. 이스 강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다, 사르코쟈. 그럼 가 보세, 존 카터."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사르코쟈는 없어져 버렸다. 그 후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묵묵히 황제의 궁전으로 급히 갔다. 그리고 곧 황제 앞으로 안내되었다.
타르 하쥬스는 나를 기다리다가 내가 들어가니 연단(演壇) 위에 일어서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놈을 저 기둥에다 붙들어매라!" 그는 소리쳤다. "이 위대한 타르 하쥬스님을 때린 녀석이 어떻게 되는가를 깨닫게 해주마. 쇠를 달구어라. 내가 손수 놈의 눈알을 뽑아 주겠다. 저 징그러운 눈초리로 두 번 다시 나를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해줄 테다."
"서크의 왕 및 족장들이여." 나는 타르 하쥬스를 무시하고 그 자리에 모인 간부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에 나는 여러분들 사이에서 족장 노릇을 했고, 또 오늘 서크를 위해 가장 위대한 전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소. 여러분은 적어도 이제부터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의무는 있을 것이오. 나는 오늘 그만한 일은 했다고 보오. 여러분은 공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오―"
"닥쳐!" 타르 하쥬스는 짖어 댔다. "이 녀석에게 재갈을 물려 명령한 대로 묶어 버려라!"
"타르 하쥬스님, 공정함이 제일입니다." 롤크워스 프토멜이 소리쳤다. "당신에겐 지금까지 몇 대나 계속되어 온 서크의 규칙을 소홀히 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 공정함이 제일이다!" 십여 명의 목소리가 이에 호응했다. 격노한 나머지 타르 하쥬스가 거품을 뿜어 대는 동안 나는 말을 계속했다.
"여러분은 용감한 사람이오. 나는 여러분의 용감한 합의를 칭찬하오. 그러나 여러분의 위대한 황제는 오늘 전투 중에 어디 있었는가? 격전이 한찬 벌어지고 있을 때는 그를 찾아볼 수 없었소. 그는 없었던 것이오. 그는 무방비 상태인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자기 잠자리에서 갈가리 찢고 있었소. 최근 그가 남자와 싸우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그에 비하면 난쟁이 처럼 작은 나도 주먹 한 대로 그를 쓰러뜨렸던 것이오. 이런 남자가 서크의 황제란 말인가? 지금 내 곁에는 위대한 서크 인이고 뛰어난 용사이며 특히 고결한 남자가 있소. 여러분, 타르스 타르카스를 서크의 황제로 삼으면 어떻겠소?"
이 제안에 찬동하여 짖어 대는 듯한 성원(聲援)이 와아 하고 일어났다.
"남은 일은 이 위원회가 임명만 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타르 하쥬스는 군주된 자격의 유무를 증명해야만 하오. 그는 타르스 타르카스를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참된 용기의 소유자라면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결투를 신청할 것이오. 여러분의 황제 타르 하쥬스는 겁쟁이오. 나라면 맨손으로도 그를 죽일 수 있으며, 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오."
내가 입을 다물자 긴박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모두들의 눈이 타르 하쥬스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꼼짝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녹색의 곰보 얼굴은 흙빛으로 변하고 입가의 거품도 얼어붙어 버렸다.
"타르 하쥬스님." 롤크워스 프토멜은 가차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 오랜 생애에서 서크 황제가 이처럼 모욕을 받는 것은 본 일이 없소. 이 비난에 대한 대답은 단 한 가지, 이제 곧 그것을 보여 주기 바라오."
그래도 여전히 타르 하쥬스는 넋을 잃은 채 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분." 롤크워스 프토멜은 계속했다. "황제 타르 하쥬스에게 타르스 타르카스 위에 군림할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를 입증시키도록 합시다."
20명의 제드와 족장이 연단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동의를 나타내는 신호로 20개의 칼이 일제히 올라갔다. 다른 도리가 없다. 이 판결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타르 하쥬스는 장검을 빼들고 타르스 타르카스와 대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결투는 어이없으리만큼 빨리 끝나고 말았다. 죽은 괴물의 목을 발로 밟고 서서 타르스 타르카스는 서크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우선 나를 정식 족장으로 임명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포로가 되었던 이삼 주일 동안에 결투에 의해 획득한 지위였다.
나는 녹색인들이 타르스 타르카스와 나에 대해 우호적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댕거를 치려는 나에게 가세(加勢)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했다. 나는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지금까지의 나의 모험담을 들려주고 나의 기분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지금 존 카터는 한 가지 제안을 했소." 그는 위원회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거기에 찬성이오. 여러분에게도 간단히 설명하겠소. 우리 포로였던 헤리움의 왕녀 데저 소리스가 지금 조댕거 황제에게 잡힌 몸이 되어 있소. 그녀는 조댕거 군에 의해 자기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을 구하기 위해 황제의 아들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여 있소.
그런데 존 카터는 그녀를 구출하여 헤리움으로 보내 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고 있소. 조댕거에서는 훌륭한 전리품을 약탈할 수 있을 것이오. 나는 늘 생각하고 있는 일이지만, 만일 헤리움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안심하고 부화의 횟수를 늘이어 자손의 번영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바르슴의 녹색인 사이에서 최고의 지위에 앉는 것만은 확실할 것 아니겠소. 여러분, 어떻소?"
전쟁과 약탈의 기회를 듣고 그들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찬동했다. 호전적인 서크 인답게 그들은 몹시 마음이 솔깃해져 30분도 채 되기 전에 말을 탄 20명의 전령이 원정의 목적으로 종족(種族)을 소집하기 위해 말라붙은 해저(海底)를 질주하고 있었다.
사흘 뒤 우리는 조댕거를 향해 진군했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조댕거의 막대한 약탈품을 약속하고 다시 세 소부족(小部族)의 힘을 빌리는 데 성공했으므로 총세(總勢)는 10만 명이 되었다. 그들의 선두에서 나는 위대한 서크 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진군했다. 나의 뒤에는 사랑하는 울러가 따르고 있었다.
우리는 전적으로 밤에만 행군하고 행군의 시간을 잘 조절하여 낮에는 폐도에다 캠프를 치게 했다. 그리고 해가 떠 있는 동안은 폐옥(廢屋)에 틀어박혀 있고, 동물들까지도 옥내에 붙들어매어 놓았다. 행군 도중 타르스 타르카스는 타고난 훌륭한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여기저기 여러 부족에게서 다시 5만 명의 전사를 모았다. 따라서 출발한 지 열흘째 되는 날 밤에 조댕거의 수도를 둘러싼 성벽 앞에 전군이 모였을 때는 모두 15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용맹스러운 이들 녹색인의 전투 능력은 같은 수라도 적색인의 10배에 이르렀다. 이만한 수의 녹색인 전사가 모여 전쟁에 나간 것은 바르슴 사상 일찌기 없었던 일이라고 타르스 타르카스가 말해 주었다. 그들의 사이를 조종하는 일만도 대단한 일인데, 대수로운 다툼도 없이 도시까지 끌고 온 그의 능력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댕거가 가까워짐에 따라 동료간의 분쟁보다는 적색인에 대한 증오가 더욱 심했다. 특히 조댕거 인은 오랜 세월 동안 부화기를 노려 파괴하고 가차없이 녹색인을 멸망시키려고 했으므로 그들에 대한 증오는 각별히 심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조댕거에 도착할 수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내가 도시 안에 침입할 방법을 강구하기로 했다. 나는 우선 대군을 둘로 나누어 대문 양쪽에 배치하고, 조댕거 인이 알아차리지 못한 곳에서 대기하라고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일렀다. 그리고 20명의 전사를 도보로 이끌고, 같은 간격으로 벽에 늘어서 있는 작은 문 가운데의 한 문으로 다가갔다. 작은 문에는 늘 근무하고 있는 위병(衛兵)은 없었지만 대신 보초가 지키고 있었다. 보초는 지구의 경관이 담당 구역을 순회하는 것과 같은 요령으로 벽 바로 안쪽을 따라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한길을 순시하고 있었다.
조댕거를 둘러싼 벽은 높이가 25미터, 두께가 17미터로 거대한 카아보런덤(炭化硅素)의 블록을 쌓아올린 것이었다. 내가 인솔해 온 녹색인의 눈으로 보면 도시로 침입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선발되어 나를 따라온 전사는 소부족들이었으므로 아직 나의 실력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세 사람을 벽을 향해 세우고 손을 잡게 한 다음, 두 사람에게 그 어깨 위로 오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여섯 번째 되는 사람에게 다시 그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가게 했다. 그것으로 지상에서 제일 위에 있는 전사의 머리 끝까지는 12미터가 훨씬 넘었다.
이런 식으로 여섯 명의 전사를 써서 지상에서 제일 위에 있는 남자의 어깨까지 세 개의 단(段)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좀 뒤로 물러가 도움(Dome) 닫기로 한 단씩 휙휙 올라가, 최후로 맨 위에 있는 남자의 넓은 어깨에서 한달음에 거대한 벽의 윗단을 꽉 붙잡고 벽 속이 넓게 된 곳으로 살그머니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미리 하나로 연결해 놓은 여섯 전사의 가죽띠를 끌어올려, 제일 위에 있는 전사에게 한쪽 끝을 잡게 하고, 또 한쪽 끝을 벽 안쪽의 큰길 쪽으로 살살 내렸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 띠를 타고 끝까지 내려와 15미터쯤 떨어진 포도 위로 뛰어내렸다. 칸토스 칸에게서 이 문을 여는 비밀을 알아 두었으므로, 곧 20명의 거대한 전사가 운명이 걸린 조댕거의 도시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광대한 궁전 부지(敷地)의 낮은 쪽 경계(境界)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쪽으로 환히 불을 켠 궁전 건물이 보였다. 갑자기 나는 남은 전사의 대군이 병사를 공격하고 있는 동안 수병(手兵)을 이끌고 궁전으로 돌입하려고 결심했다.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전령을 보내어 이 계획을 설명하고 50명의 분견대(分遣隊)를 보내 달라고 요청한 다음 나는 10명의 전사에게 대문 하나를 확보하여 열도록 명령했다. 한편 남은 9명의 전사를 데리고 또 하나의 문을 확보하기로 했다. 행동은 은밀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발포도 금했고, 내가 50명의 서크 족을 데리고 궁전에 도착하기까지는 전진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잘 들어맞았다. 우리가 만난 보초는 둘 다 허무한 최후를 마쳤고, 두 문의 문지기 역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조댕거와의 결전
내 옆에서 커다란 문이 열리자 다름 아닌 타르스 타르카스가 인솔한 50명의 서크 분견대가 큰 말을 타고 들어왔다. 나는 궁전 바깥 벽까지 그들을 끌고 나와 도움을 받지 않고도 쉽게 거기를 뛰어넘었다. 안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문을 여는 일이 더 큰 문제였으므로 마침내 거대한 경첩을 축(軸)으로 하여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적이 안심을 했다. 곧 50명의 용맹스러운 일대(一隊)는 조댕거 황제의 궁전 뜰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궁전으로 다가가니 아래층의 큰 창을 통해 휘황한 조명이 달린 산 코시스의 알현실이 보였다. 넓은 호올은 귀족과 그 부인들로 꽉 차 있어 마치 무슨 중요한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궁전 밖에는 보초병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도시나 궁전이 모두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였으므로 아무도 침입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한쪽 끝에는 다이아몬드를 박은 훌륭한 황금의 옥좌가 있고 산 코시스와 황후가 관리와 고관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폭 넓은 통로가 있고 병사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다. 보고 있으려니까 호올 저쪽에서 행렬이 나타나 이 통로를 지나 옥좌 앞까지 갔다. 행렬의 선두는 황제의 친위대인 네 사관(士官)으로서 양쪽 끝에 각기 목걸이와 자물통이 달린 큰 금사슬을 새빨간 쿠션 위에 올려놓은 쟁반을 받쳐들고 있었다. 이 사관에 이어 다시 네 사람이 같은 쟁반을 받쳐들고 왔다. 쟁반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조댕거 왕가(王家)의 왕자와 왕녀를 위한 훌륭한 장신구였다.
옥좌가 있는 곳에서 이 두 쌍은 좌우로 나뉘어 통로를 끼고서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또 고관과 시종무관(侍從武官)과 군인이 뒤를 잇고 끝으로 두 인물이 걸어나왔다. 둘 다 온 몸에 새빨간 비단 예복을 걸치고 있었으므로 누구인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옥좌 앞까지 오자 산 코시스를 보고 섰다. 나머지 행렬이 다 들어오고 난 뒤 각자 자기 자리에 서자 산 코시스는 눈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마침내 두 명의 사관이 걸어나와 산 코시스 앞에 서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새빨간 예복을 벗겼다. 나는 칸토스 칸이 실패한 것을 깨달았다. 나의 눈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조댕거의 왕자 사브 산이었다.
산 코시스는 한쪽 쟁반에서 장신구 한 쌍을 집어들더니 금목걸이 하나를 아들의 목에 걸고 자물통을 꽉 채웠다. 그리고 다시 뭐라고 몇 마더 하더니 또 한 사람 쪽을 보았다. 여기서 사관들은 또 한 사람의 몸에서 비단 예복을 벗겼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나의 눈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헤리움의 왕녀 데저 소리스였다.
이 의식의 목적은 이제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조금 뒤에는 데저 소리스가 영원히 조댕거의 왕자와 맺어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장엄하고 아름다운 의식이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악마의 향연으로 보였다. 마침내 장신구를 그녀의 아름다운 몸에 달고 금목걸이가 산 코시스의 손으로 열렸을 때 나는 장검을 휘둘러 무거운 손잡이로 큰 유리창을 산산이 부수고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람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단상(壇上)에 있는 산 코시스 옆으로 뛰어올라가, 너무 놀란 나머지 멍청히 서 있는 그의 손에서 데저 소리스를 다른 남자와 맺어 주려던 금사슬을 장검으로 끊어 버렸다.
한순간 호올은 큰 혼란을 빚었다. 나의 주위를 수없이 많은 칼이 위협하듯이 둘러쌌다. 사브 산은 결혼식의 장신구 속에서 보석을 잔뜩 박은 단검을 뽑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그를 죽이는 일은 파리를 죽이는 일보다도 더 간단했지만 오래된 바르슴의 규칙이 나의 손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나의 심장을 향해 단검이 떨어지려는 찰나 나는 그 손목을 잡고 억센 힘으로 누르면서 장검으로 호올 안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조댕거는 함락되었다. 자아, 보란 말이다!"
모든 눈은 내가 가리키는 쪽으로 쏠렸다. 그러자 타르스 타르카스와 50명의 전사가 말을 타고 입구를 향해 노도(怒濤)처럼 밀려들어왔다.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느 누구든 공포의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곧 조댕거의 귀족과 병사들은 공격해 오는 서크 군을 향해서 돌진해 갔다.
나는 연단에서 사브 산을 밀어 내고 데저 소리스를 끌어당겼다. 옥좌 뒤에는 좁은 문이 있는데 그곳에서 황제 산 코시스가 장검을 빼들고 나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칼싸움을 시작하였으나 그는 도저히 나의 적수가 못되었다.
넓은 연단을 둘러싸고 싸우다 보니 사브 산이 아버지를 살리려고 윗단으로 뛰어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를 치려고 그가 팔을 들어올렸을 때 데저 소리스가 달려나와 그의 앞을 막았다. 이때 나의 칼이 상대방에게 꽂혔다. 이것으로 사브 산은 조댕거의 황제가 된 셈이다. 그의 아버지가 숨이 끊어져 쓰러지자 새 황제는 매어달리는 데저 소리스를 뿌리치고 다시 나와 대치했다. 곧 네 명의 사관이 합세하려고 달려왔다. 나는 황금의 옥좌를 뒤에 두고 데저 소리스를 위해 다시 한 번 싸웠다. 사브 산을 쓰러뜨리지 않고 나의 몸을 지키기는 곤란했지만, 그를 쓰러뜨리면 나의 사랑하는 여성을 빼앗을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상대방이 찌르고 들어오는 것을 슬쩍 넘겨 버리고 나는 칼날을 번개처럼 움직였다. 다시 몇 사람이 새 주군(主君)에게 가세하여 전 황제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왔을 무렵 나는 이미 두 사람의 칼을 쳐내 버리고 한 사람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다! 여자! 여자를 죽여라, 저 여자가 꾸민 음모다! 죽여라, 그 여자를 죽여라!" 하고 소리치며 몰려왔다.
데저 소리스에겐 내 뒤를 따라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는 옥좌 뒤에 있는 작은 문으로 한 발 다가갔다. 그곳에 자리를 잡으면 검사(劍士)가 몇 사람 덤벼들어도 그녀를 지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관들은 재빨리 나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그중 세 사람이 뒤로 돌아 그렇게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서크의 전사는 호올의 중앙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모두 힘껏 싸우고 있었으므로 합세를 하러 올 여유가 없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데저 소리스와 내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차차로 알게 되었다. 그때 타르스 타르카스가 주위에 몰려 있는 소인(小人)들을 헤치며 이쪽으로 오려고 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장검을 휘둘러 한꺼번에 열 두 명을 자르고 혈로(血路)를 열어 눈 깜짝할 사이에 단상에 있는 내 옆으로 와서 다행히도 적을 베어 쓰러뜨렸다.
조댕거 인의 용기는 정말 놀라울 정도여서, 아무도 도망치려는 자가 없었다. 호올의 싸움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서크 족과 데저 소리스와 나뿐이었다.
왕자 사브 산은 아버지 옆에 숨져 쓰러져 있었다. 조댕거의 귀족과 기사도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의 시체가 피의 바다에 겹겹이 쌓여 쓰러져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칸토스 칸의 일이었다. 그래서 데저 소리스를 타르스 타르카스에게 맡기고, 전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나는 궁전 밑 지하 감옥으로 부지런히 갔다. 간수도 전원이 자기가 맡은 자리를 버리고 옥좌가 있는 전투에 참가했으므로 걸리적거리는 자도 없이 미로(迷路)와 같은 지하 감옥 속을 찾을 수 있었다.
새 복도와 감금실을 발견할 때마다 칸토스 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침내 들릴락말락하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따라 드디어 어두운 감방 안에 갇혀 있는 칸토스 칸을 발견했다.
그는 나를 만나자 미칠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감옥 안까지 조그맣게 들려 오는 저 전투의 소리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알고 몹시 기뻐했다. 그는 그 궁전 탑에 이르기 전에 공중 정찰기한테 붙잡히어 사브 산과는 얼굴을 마주할 수도 없었다고 말하였다.
쇠창살 문과 그를 묶고 있는 사슬을 끊으려 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의 말대로 나는 아래층으로 올라가 시체를 조사하여 독방과 쇠사슬에 달려 있는 자물통을 여는 열쇠를 찾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처음에 조사한 한 무더기의 시체 속에 간수의 시체가 있었으므로 곧 칸토스 칸을 구출해 내어 그를 데리고 옥좌가 있는 호올로 돌아갔다.
중화기(重火器)의 포성(砲聲)에 섞여 거리에서 환성이 들려 왔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바깥 전투를 지휘하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났다. 칸토스 칸도 길을 안내하기 위해 타르스 타르카스를 따라갔다. 녹색인 전사들은 남은 적과 약탈품을 찾아 궁전의 내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데저 소리스와 나는 단둘이 남게 되었다.
그녀는 황금의 옥좌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그녀 쪽을 보니 힘없이 생그레 웃었다.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소리쳤다. "당신 같은 분은 바르슴을 다 뒤져도 찾아볼 수 없을 거예요. 지구인은 모두 당신과 같은가요? 혼잣몸으로 낯선 고장에 와서 쫓기고 협박받고 박해 당하면서도, 당신은 불과 이삼 개월 동안에 바르슴의 과거 어느 시대의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해치워 버렸어요―해저의 야만스러운 부족을 단결시켜서 적색 화성인의 편을 들어 싸우게 하다니, 아무도 흉내낼 수가 없는 일이에요."
"답변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데저 소리스." 나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데저 소리스에 대한 사랑이 시킨 일입니다. 사랑의 힘은 당신이 본 것보다 더 위대한 기적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존 카터, 이제 말씀하셔도 돼요. 저는 자유의 몸이니까요."
"그것뿐만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나는 대답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이상한 일을 해 왔습니다. 좀더 현명한 사람이라면 하려 들지 않았을 일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데저 소리스를 내 것으로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던 일입니다 어쨌든 이 넓은 우주에 헤리움의 왕녀와 같은 분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거든요. 당신이 왕녀라고 해서 기가 죽은 것은 아니지만, 다만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눈 앞에 보기만 해도 벌써 나는 구혼하는 내가 제 정신인지 어떤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기가 죽을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말로 하기 전에 이미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녀는 일어서서 사랑스러운 손을 나의 어깨에 얹었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이리하여 미쳐 날뛰는 전쟁터로 화한 도시의 죽음과 파괴가 소용돌이치는 아비규환의 갈림길에서 헤리움의 왕녀, 군신(軍神) 마르스(火星)가 점지해 주신 데저 소리스는 버지니아의 신사 존 카터와 결혼 약속을 맺은 것이다.살육에서 환희로
얼마 안 있어 타르스 타르카스와 칸토스 칸이 되돌아와 조댕거 군은 완전히 궤멸되었다고 보고했다. 조댕거의 군대는 전멸하였으며 살아남은 자는 모두 붙잡히어 더 이상 도시의 내부에서는 저항이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전투 비행선 몇 척이 도망쳤지만, 몇천 척에 이르는 군용 비행선과 상선은 서크의 감시 아래 있었다.
소부족 사이에선 약탈과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꾸물거릴 것 없이 모을 수 있는 만큼의 전사를 모아 되도록 많은 비행선에 태우고 조댕거 인의 포로도 태워 헤리움을 향해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섯 시간 뒤 거의 10만 명의 녹색인 전사를 태운 250척 이상의 전투 비행선으로 이루어진 대우주선대가 말을 실은 수송선단을 거느리고 옥상의 발착장을 출발했다.
우리는 패배한 도시를 군소부족(群小部族)의 흉포한 녹색인 전사들의 손에 넘겨 주고 출발했다. 그들은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고, 동료끼리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으므로 도시의 상공에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으며 마치 지옥의 참상을 천상(天上)의 눈으로부터 가리운 것 같았다.
오후로 접어들자 헤리움의 빨간 탑과 노란 탑이 보였다. 그러나 잠시 뒤 헤리움을 포위하고 있는 조댕거 군의 진지에서 대 우주선대가 날아와 우리를 향해 공격했다.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선은 모두 앞머리와 꼬리에 걸쳐 헤리움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지만, 조댕거 군에겐 그런 표시가 없어도 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녹색인 전사는 조댕거 군이 이륙함과 거의 동시에 포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발백중의 정확한 사격으로 밀려오는 비행선단을 향해 소화기(小火器)를 퍼부어 대었다.
헤리움의 쌍동이 도시는 우리가 우군(友軍)임을 알아차리고 엄호(掩護)를 위해 몇백 척의 우주선을 날게 했다. 이리하여 내가 처음 보는 본격적인 공중전이 시작된 것이다.
녹색인 전사를 태운 비행선은 헤리움과 조댕거의 선단이 전투하고 있는 상공을 선회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서크 족에겐 공군이 없기 때문에 중포(重砲)를 사용하는 기술을 몰랐으며, 그리하여 중화기가 소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그들의 소총은 훌륭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사실이다.
양군은 최초에 같은 고도에서 선회하고, 스치고 지나가며 편현제발(片舷齊發)을 되풀이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조댕거의 진지에서 떠오른 거대한 우주선 한 척의 선체에 큰 구멍이 뚫렸다. 우주선은 기우뚱하고 흔들리며 곤두박혀 전복했고 승무원이 3천 미터 아래인 지상으로 콩알처럼 후두둑 추락했다. 이어서 우주선도 승무원 뒤를 쫓듯이 무서운 힘으로 낙하하여 해저의 부드러운 모래땅 속으로 거의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헤리움 군에서 와아 하는 환성이 일어났다. 그리고 용기 백배하여 조댕거 군에게 용맹스럽게 덤벼들었다. 두 척의 헤리움 군 비행선은 솜씨있게 조종하여 적의 머리 위로 떠올라서 바닥의 포문을 열고 작열하는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헤리움의 전투 비행선은 차례차례로 조댕거 군 위에 떠오르는 데 성공했다. 짧은 시간 안에 포위된 전투 비행선의 대다수가 파괴되고 덧없는 잔해가 되어 대 헤리움에 치솟은 빨간 탑을 향해 표류해 가고 있었다. 남은 몇 척은 도망치려고 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척의 소형 비행정에게 둘러싸였다. 그 머리 위에는 거대한 헤리움의 전투 비행선이 당장이라도 그들의 비행선 안에 칼싸움 부대를 태우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전투는 끝났다. 조댕거의 비행선대가 지상의 포위진에서 용감하게 날아간 지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때의 일이다. 파괴를 모면한 조댕거의 비행선에는 붙잡힌 비행선의 회항원(回航員)이 타고 헤리움의 도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항복한 용감한 이들 비행선에는 비장한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된 규칙을 따라서 패한 비행선의 선장들은 스스로 지상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용감한 남자들은 국기를 머리 위로 높이 들고, 거대한 비행선의 치솟은 앞머리에서 차례차례 지상으로 뛰어내려 무참한 최후를 마쳤다.
항복은 기정 사실이 되어서도, 그들 전원이 비참한 투신 자살을 이행함으로써 남은 비행선이 항복해 올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고 용감한 전사들은 애석하게도 무참한 죽음을 이행했다.
싸움이 끝나자 우리는 헤리움 공군의 지휘 비행선에 접근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목소리가 닿는 곳까지 비행선이 접근하자 나는 큰 소리로 데저 소리스 공주가 우리의 비행선에 타고 있다고 알리고, 공주를 지금 곧 수도로 데려가기 위해 그쪽으로 옮기고 싶다고 소리쳤다. 내가 한 말의 뜻이 그들의 귀에 들어갔는지 그 쪽에서 와 하는 환성이 일어나고 다음 순간 비행선 여기저기에서 헤리움 왕녀의 깃발이 일제히 올랐다. 다른 비행선도 그 신호를 받아 뜻을 이해하자마자 환성을 올리고 왕녀의 깃발을 햇빛 속에 펄럭였다.
비행선은 계속 접근해 왔다. 그리고 우아하게 방향을 바꾸어 우리가 타고 있는 비행선에 앞머리를 대자 십여 명의 장교가 이쪽으로 옮겨 탔다. 그들은 엄호물(掩壕物) 뒤에서 나온 몇백 명의 녹색인을 보고 놀라서 우뚝 멈춰섰으나, 마중나온 칸토스 칸의 모습을 보자 달려나와 일제히 에워쌌다.
뒤이어 데저 소리스와 내가 앞으로 나갔으나, 그들의 눈에는 왕녀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기품있게 그들의 환영을 받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조부를 섬기는 고관이었으므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존 카터에게 인사를―" 그녀는 사관들에게 명령하고 내가 있는 쪽을 보았다. "헤리움의 왕녀를 구하고 오늘의 승리를 가져온 것은 이분입니다."
그들은 예의바르게 나를 맞이하고 나의 노고를 위로하며, 칭찬의 말을 퍼부었다. 그들이 가장 감격한 것은 데저 소리스의 구출과 헤리움의 구원에 있어 용맹한 서크 족의 원조를 얻은 일인 듯하였다.
"인사말은 나보다도 다른 한 사람에게 해주시오." 나는 말했다. "그 사람은 이분입니다. 여러분, 이분은 바르슴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이며, 위대한 정치가의 한 사람인 서크 족의 황제 타르스 타르카스입니다."
나를 맞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기품있는 태도로 예의바르게 이 위대한 서크 인에게 환영의 말을 전했다. 놀랍게도 타르스 타르카스도 그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기품있는 말과 태도로 인사를 했다. 말수는 적었지만 서크 족은 격식을 중히 여기는 민족이므로 습관적으로 대단히 위엄있고 품위있는 예법을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데저 소리스는 그쪽 비행선으로 옮겨 탔으나 내가 함께 가지 않았으므로 실망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으므로, 육상에서 포위하고 있는 조댕거 군을 쳐부숴야 한다. 그 일이 끝날 때까지는 타르스 타르카스 옆을 떠날 수 없다고 나는 설명하였다.
헤리움 공군의 사령관은 우리의 지상 공격에 협력하여 헤리움의 육군 부대가 도시에서 공격하도록 수배하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둘로 나뉘어, 데저 소리스는 승리에 취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조부 타르도스 모르스 황제의 궁전으로 돌아갔다.
멀리 녹색인 전사의 말을 태운 수송선단(輸送船團)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 중에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짐을 나르는 대(臺)가 없었으므로 넓은 들판 한가운데에서 이 동물들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도시에서 약 10마일쯤 떨어진 지점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 갈고리를 써서 내렸으므로 작업은 밤중까지 걸려서야 겨우 끝났다. 그 동안 조댕거 군의 기병대가 두 번 습격해 왔으나 이쪽의 손해는 아주 적었고 해가 저물자 적은 일찌감치 퇴각해 버렸다.
마지막 한 마리를 내리자 타르스 타르카스는 곧 전진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세 분대(分隊)로 나뉘어 남쪽, 동쪽, 북쪽의 세 방향에서 조댕거 군의 진지로 다가갔다.
적의 본진(本陣) 1마일 앞에서 그들의 전초선(前哨線)과 부딪쳤다. 미리 타협해 놓았던 대로 이것을 계기로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 군은 싸움에 흥분하여 날카로운 소리로 울어 대는 말을 타고 무서운 함성을 지르며 조댕거의 진지를 향해 쏜살같이 돌진했다.
적은 방심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교묘하게 참호(塹壕)가 파여 있었으므로, 우리 군은 몇 번이나 되돌아갔다. 정오가 거의 되자 나는 전투의 귀추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조댕거 인은 극지(極地)에서 극지로 띠 모양으로 통하고 있는 그들의 수로 주변의 곳곳에서 모아들인 백만 명의 전사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한편 이에 맞설 녹색인 전사는 10만도 못된다. 헤리움이 보내기로 한 원군(援軍)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정각 정오에 조댕거의 진영과 도시 사이의 경계(境界) 일대에서 포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다시 타르스 타르카스는 돌격 명령을 내렸다. 흉포한 전사를 태운 말은 적진을 향해 다시 전차(戰車)처럼 돌진했다. 이와 동시에 헤리움의 전투 부대는 우리와는 반대쪽에 있는 조댕거 군의 방어력을 돌파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조댕거 군은 돌쩌귀 사이에 낀 형태가 되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제는 더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최후의 조댕거 병사가 투항(投降)했을 때 도시 정면의 평원(平原) 일대는 처참한 수라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살육은 끝났다. 포로는 헤리움으로 연행했다. 우리는 바야흐로 승리의 영웅이 되어 모두들 대오(隊伍)를 짜고 대 헤리움의 문을 들어서서 당당하게 개선했다.
넓고 큰 길 양쪽에는 여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전투 중 도시 안에 머물러 임무를 맡았던 소수의 남자들도 섞여 있었다. 우리를 맞아 박수와 환성은 끝없이 계속되었고, 머리 위에는 금, 은, 백금 등의 보석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온 거리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군중을 흥분시키고 열광케 한 것은 용맹스러운 서크 족의 모습이었다. 무장한 녹색인 전사가 헤리움의 문을 들어선 일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우군(友軍)으로 온 일은 적색인들을 감격케 했다.
내가 변변치 않은 힘으로 데저 소리스를 위해 한 일이 헤리움 인들에게 알려진 모양으로, 그들은 저마다 나의 이름을 불렀다. 궁전을 향해 큰길로 걸어가니 나와 나의 말에게 수많은 장식을 달아 주며, 사납고 용맹스러운 모습을 한 울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나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장려한 건물로 다가가자 사관(士官)의 일대(一隊)가 우리를 따뜻이 맞아들여 타르도스 모르스로부터의 감사 표시를 받아 달라고 하며 타르스 타르카스와 서크 족의 왕 및 그에게 협력한 녹색인들, 그리고 나에게 말에서 내려 뒤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궁전의 정문을 향해 계속되는 높은 계단 위에 황제의 일족(一族)이 서 있었다. 우리가 아래쪽 계단까지 가자 위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내려왔다. 그 남자는 남성의 거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훌륭한 사나이로 키가 크고 태도가 훌륭했으며, 근육과 골격이 늠름하여 지배자의 풍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가 바로 헤리움의 황제 타르도스 모르스라는 것은 누구에게 물어 보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제일 먼저 인사한 것은 타르스 타르카스였다. 그가 입 밖에 낸 첫말은 이 두 종족 사이에 싹튼 우정을 영원한 것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타르도스 모르스가 바르슴의 가장 위대한 전사를 만나뵐 수 있게 된 것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황제는 열의를 다해 말했다. "그러나 맹우(盟友) 타르스 타르카스의 어깨 위에 손을 얹을 수 있는 것은 그보다 더욱 큰 명예입니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이에 답하여 말했다.
"바르슴의 녹색인 전사는 다른 세계의 남자가 와서 일러 주기까지는 우정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서크 족이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의 진심어린 말에 대해 인사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사람 덕분입니다."
타르도스 모르스는 녹색인의 황제와 왕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우정과 감사의 말을 했다.
내 차례가 오자 그는 나의 어깨에 두 손을 얹고 말했다.
"잘 왔소, 나의 아들이여. 자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헤리움에서, 아니, 바르슴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우리 일족이 기꺼이 줄 것이오."
다음으로 우리는 소(小) 헤리움의 왕이자 데저 소리스의 아버지인 모르스 카쟉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타르도스 모르스 바로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아버지인 황제보다 더 이 회견에 감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거듭 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너무 감동한 나머지 목이 메어 잘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호전적(好戰的)인 바르슴 인 사이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용감하고 대담무쌍한 전사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모든 헤리움 인과 마찬가지로 그도 딸 데저 소리스를 숭배하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무사히 돌아온 일을 생각하면 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화성의 위기
서크 족과 그 동맹 부족(同盟部族)은 열흘 동안 헤리움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런 뒤 그들은 값비싼 선물을 산더미같이 받고 모르스 카쟉이 지휘하는 1만 명의 병사를 호위병으로 삼아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났다. 소 헤리움의 왕은 소수의 귀족을 거느리고 새로 이루어진 평화와 우호의 정리(情理)를 거듭 다지기 위해 먼 서크까지 그들과 동행하였다.
소라도 아버지 타르스 타르카스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타르스 타르카스는 일족의 왕과 족장 앞에서 그녀가 그의 딸이라는 것을 선언했다.
3주일 뒤 모르스 카쟉과 막료(幕僚)들은 타르스 타르카스와 소라를 데리고 데저 소리스와 나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서크로 향했던 비행선을 타고 돌아왔다.
9년 동안 나는 헤리움의 평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일하고 타르도스 모르스 집안의 왕자로서 헤리움 군에 참가하여 싸웠다. 민중은 언제까지나 나의 명예를 칭송했다. 그리고 비길 데 없는 나의 왕녀 데저 소리스에겐 날마다 새로운 경애(敬愛)의 표시가 전해졌다.
궁전 옥상에 있는 황금 부화기에는 눈처럼 흰 알이 하나 들어 있었다. 벌써 5년 동안이나 황제의 친위대 병사 10명이 계속 지키고 있다. 데저 소리스와 나는 내가 도시에 머물러 있을 때면 언제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손에 손을 잡고 이 자그마한 성단 앞에 서서 섬세한 알의 껍질이 터지는 날을 즐거움으로 삼고 장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나는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을 맺어 준 기구한 로만스며, 우리들의 행복을 더해 주고 희망을 이루어 주는 이 기적에 대해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그 마지막 밤의 일을.
그날 밤은 아득히 먼 하늘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비행선의 희고 강렬한 섬광이 보였으나 이런 것은 흔히 있는 일이므로 특별히 주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빛은 번개처럼 헤리움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 속도로 보아서 뭔가 이변(異變)이 일어나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비행선은 황제에게 다급함을 고하는 전령(傳令)이라는 것을 빛으로 신호했다. 그리고 궁전의 발착장으로 유도해 줄 정찰기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초조하게 선회하면서 대기하고 있었다.
비행선이 궁전에 착륙하고 10분 뒤, 나는 회의실로 불려갔다. 그곳에는 평의원들이 모두 집합해 있었다.
옥좌를 마련한 단상(壇上) 위에서 타르도스 모르스는 긴장한 얼굴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황제는 우리 쪽을 보고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바르슴의 몇몇 정부에 들어온 소식인데, 대기(大氣) 제조 공장의 관리인이 벌써 이틀 동안이나 무선 보고를 보내지 않고 열 군데의 중요 도시에서 끊임없이 불러 보아도 응답하는 기색이 없다고 하오.
다른 나라의 대사들은 우리에게 이 사태의 수습을 맡아 주도록 부탁하고 관리인의 조수를 공장으로 급히 보내 달라고 요청해 왔소. 그래서 천 척의 대형 비행선을 파견하여 하루 종일 조수를 찾아 헤매었는데, 조금 전에 그중 한 척이 조수의 시체를 싣고 돌아온 것이오. 조수는 그의 집 지하실에서 어떤 자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갈기갈기 찢기어 죽어 있었던 것이오.
이 일이 바르슴에 있어 어떤 뜻을 갖는가는 여러분도 다 알고 있을 것이오. 저 두터운 벽을 깨려면 몇 달이 걸릴 것이오. 사실 사람들은 이미 그 일을 착수하고 있소. 펌프 공장의 엔진이 지금까지 몇백 년 동안이나 움직여 왔듯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는 없소. 그러나 아무래도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 것 같소. 계기(計器)는 바르슴 전체에 걸쳐서 기압이 급속히 낮아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소―즉 엔진이 멎은 것이오.
여러분,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앞으로 사흘 동안이오."
황제는 말을 맺었다. 몇 분 동안 방 안은 조용했다. 마침내 한 젊은 귀족이 일어서서 칼을 뽑아 높이 머리 위로 치켜들고 타르도스 모르스에게 말했다.
"헤리움 인은 적색 민족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본보기를 언제나 바르슴에 보여 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어떻게 죽느냐 하는 본보기를 보여 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천 년은 살 수 있다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우리의 임무를 다합시다."
호올 안에 박수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리의 행동으로 민중의 공포를 덜어 줄 수밖에 없다. 모두들 슬픔과 괴로운 마음을 억누르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서 저마다 흩어져 갔다.
내가 나의 궁전으로 돌아가니, 이미 그 소문은 데저 소리스의 귀에도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들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존 카터, 우리는 정말 행복했어요." 그녀는 말했다.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몰라도 둘이 함께 죽을 수 있는 일에 감사하고 있어요."
이틀 동안 계속 공기의 공급량에 이렇다할 변화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옥상에서는 호흡이 곤란해졌다. 헤리움의 큰길이나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고 장사며 일에서 일체 손을 떼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용감하게 맞서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녀들이 남몰래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그날 낮이 되자 몸이 약한 사람은 힘없이 쓰러지기 시작하여 한 시간도 안되어서 몇천 명의 바르슴 인이 의식불명이 되었다. 이것은 질식사(窒息死)의 징조였다.
데저 소리스와 나는 왕가의 사람들과 함께 궁전 안뜰의 한 단 낮은 곳에 있는 화단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몰래 찾아오는 기분나쁜 죽음의 그림자에 겁을 먹고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으나 가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울러조차 우리를 덮치려는 재액(災厄)의 무서움을 느낀 모양으로, 슬픈 듯이 코를 킁킁대며 데저 소리스와 나에게 몸을 갖다대었다.
데저 소리스의 부탁으로 우리의 작은 부화기가 궁전의 옥상에서 운반되어 왔다. 그녀는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된 미지의 작은 생명을 온갖 감정이 어린 생각으로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호흡이 꽤 곤란해졌을 때 타르도스 모르스가 일어섰다.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눕시다. 바르슴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는 것이오. 내일이 되면 태양은 죽음으로 끝난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오. 그리고 이 세계는 추억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천공(天空)을 앞으로 영원히 날게 될 것이오. 안녕."
그는 몸을 구부려 가족 중의 여자들에게는 키스를 하고, 힘센 손을 남자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슬픔에 잠겨 황제에게서 눈길을 떼어 소리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생기를 잃고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외치며 그녀 옆으로 달려가 덥석 끌어안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나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존 카터, 키스를......" 그녀는 중얼거렸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과 행복에 찬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는데 두 사람이 갈라져야 하다니, 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인가요!"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을 때 나의 몸 안에 옛날의 기승(氣勝)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올랐다. 나의 몸 안에 버지니아의 용감한 피가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나는 소리쳤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아니, 꼭 있어.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타향에서 싸워 온 존 카터가 틀림없이 그것을 찾아 보이겠어!"
그때 나는 문득 의식의 한구석에 오랜 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아홉 가지 말이 생각났다. 어둠 속에서 한 가닥의 섬광이 번쩍 비치듯 그 아홉 가지 말이 지니는 뜻이 나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그것은 대기 제조 공장의 거대한 세 개의 문을 여는 열쇠였던 것이다!
숨이 끊어질 듯한 데저 소리스를 가슴에 꼭 안은 채 나는 갑자기 타르도스 모르스를 향해 외쳤다.
"폐하, 비행정을! 빨리! 궁전 위에 좀더 빠른 비행정을 보내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틀림없이 바르슴을 구해 내 보이겠습니다."
황제는 그 이유를 들을 생각도 않고 즉시 가장 가까이 친위대원이 있는 발착장으로 급행했다. 옥상에는 공기가 희박해져서 거의 없는 상태였으므로 그들은 바르슴의 기술이 낳은 가장 빠른 단좌(單座) 정찰정을 끌어내는 데 겨우 성공했다.
나는 데저 소리스에게 몇 번이나 키스를 하고, 따라오려는 울러에게 남아서 그녀를 지키라고 명령한 뒤 옛부터의 민첩함과 체력으로 궁전의 높은 성벽으로 뛰어올라가 다음 순간, 바르슴 전체가 희망을 걸고 있는 목적지를 향해 날아갔다.
충분히 호흡할 수 있도록 저공 비행을 해야 했지만 해저를 횡단하는 직선 코스를 택했으므로 지상 일이 미터쯤 되는 곳을 날면 되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았다. 나의 사명은 사신(死神)과 일각(一刻)을 다투는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데저 소리스의 얼굴이 줄곧 눈 앞에 어른거렸다. 궁전의 뜰을 뒤로 했을 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돌아다보니 그녀가 비틀거리다 작은 부화기 옆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만일 충분히 공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그녀가 최후의 혼수 상태에 빠져 마침내 죽고 만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무모함을 알면서도 엔진과 나침의 말고는 다 버리고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집어던져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한쪽 손으로 핸들을 조종하고, 또 한 손으로 속도 레버를 최고 속도의 위치에까지 밀고 가 죽음에 임한 화성의 희박한 대기 속을 유성(流星)과 같은 기세로 날았다.
해가 지기 한 시간 전 대기 제조 공장의 거대한 벽이 불쑥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무서운 기세로 이 혹성의 온 주민의 목숨을 쥐고 있는 작은 문 앞에 내렸다.
문 옆에는 벽을 깨려고 많은 남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결과는 부싯돌처럼 튼튼한 벽의 표면을 약간 긁는 정도였으며,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이 비록 공기를 주어도 깨어나지 못할 영원한 잠에 빠져 있었다.
헤리움보다도 이쪽이 훨씬 심한 상태여서, 호흡을 하려고 해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의식이 있는 자가 몇 명 있었으므로 나는 그중 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만일 여기 있는 문을 열 수 있다면 누구 엔진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소?"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 남자는 대답했다. "만일 곧 열 수 있으면 말입니다. 나는 앞으로 조금밖에 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헛된 일일 겁니다. 관리인은 둘 다 죽어버렸고 이 바르슴에서 저 이상한 자물통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벌써 사흘 동안이나 공포에 미칠 것 같은 사람들이 이 문 앞으로 밀려와서 그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지껄이고 있을 틈이 없었다. 나도 몹시 기운이 빠져 정신 상태를 정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마침내 힘없이 무릎을 꿇었으나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눈 앞을 막아선 문짝을 향해 그 아홉 개의 사고파(思考波)를 내보냈다. 맨 앞에 있던 화성인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죽음의 정적 속에서 눈 앞에 있는 문짝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기다렸다.
두툼한 문짝은 천천히 후퇴했다. 나는 일어서서 그 뒤를 따르려고 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쇠약해졌다.
"어서 들어가 보시오!" 나는 옆에 있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펌프실까지 가서 모든 펌프를 열어요. 바르슴에 내일이라는 날이 있게 할 유일한 기회요!"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 채 두 번째 문을 열고 이어서 세 번째 문도 열었다. 그리고 바르슴의 희망을 한 몸에 지닌 남자가 마지막 문을 지나 힘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의식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애리조나의 동굴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나의 몸은 뻣뻣하고 기묘한 옷에 싸여 있었다. 웃몸을 일으켜 앉으니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몸을 두루 더듬어 보니 이상하게도 몸에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작은 문 앞에서 의식을 잃었을 때는 알몸이었는데...... 눈 앞에 뚫린 들쭉날쭉한 구멍으로 달빛이 환한 하늘이 보이고 있다.
몸을 더듬어 보니 주머니가 만져졌다. 그 주머니에 기름종이로 싼 작은 성냥꾸러미가 있었다. 한 개비 그어 보니 희미한 불빛이 주위를 비춰 주었다. 아무래도 여기는 큰 동굴인 것 같았다. 안쪽을 보니 사람인 듯한 기묘한 것이 작은 벤치에 몸을 구부리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그것은 검고 긴 머리를 한 자그마한 노파의 미이라였다. 미이라는 녹색 가루가 조금 들어 있는 둥근 구리 항아리를 올려놓은 버어너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여자의 뒤에는 생가죽 끈에 매어단 사람의 해골이 동굴 끝에서 끝까지 즐비하게 매달려 있었다. 해골을 매단 끈에서 또 한 가닥의 끈이 늘어져 있어, 그 끝을 노파가 말라빠진 손으로 잡고 있었다. 내가 그 끈을 건드리자 해골이 흔들리면서 대각대각 낙엽과도 같은 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더없이 그로테스크하고 무서운 광경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동굴 밖의 공기는 싱그러웠다. 나는 기분 나쁜 장소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동굴 입구에 이어져 있는 좁은 바위 위에 서서 나는 애리조나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완전히 낙담하여 머리를 감싸안고 초연히 산길을 내려갔다.
머리 위에는 빨간 화성이 4천 8백만 마일 밖에서 무서운 수수께끼를 간직한 채 반짝이고 있었다.
그 화성인은 무사히 펌프실에 다다랐을까? 그 먼 혹성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늦지 않게 공기가 공급되었을까? 나의 데저 소리스는 살아 있을까? 아니면 그녀의 아름다운 몸은 헤리움의 황제 타르도스 모르스의 궁전 뜰 화단에 있는 작은 황금 부화기 옆에 차가운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을까?
10년 동안 나는 오로지 이 답을 구하여 빌었다. 10년 동안 나는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의 옆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빌면서 기다렸다. 그녀에게서 몇 천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이 지구에서 살기보다는 죽어서 그녀 옆에 누워 있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그 옛날 내가 발견한 광산은 아무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였다. 덕분에 나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부(富)가 다 뭐란 말인가!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작은 서재에 앉아 있는 오늘밤은 내가 화성에서 눈을 뜬 뒤로 꼭 20년째가 된다.
책상 옆의 작은 창문으로 화성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애리조나에서 긴 잠이 들었던 그날 밤 이후로 나를 초대한 일이 없었던 화성이 오늘밤에는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다. 저 끝없는 공간을 넘어서 아름답고 검은 머리의 여성이 어린 남아아이를 데리고 궁전 뜰에 서서 그녀에게 달라붙는 아이에게 하늘 저쪽에 있는 혹성 지구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그들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이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머지 않아 곧 그것을 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해 설
16세기 끝 무렵에서부터 머지 않아 닥쳐올 SF 시대의 태동(胎動)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줄 베르느가 《달세계로 가다》와 《땅 밑 탐험》을 발표하고, 영국에서는 라이더 하거드가 앨런 쿼터 메인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비경 전기 소설(秘境傳奇小說)을 썼으며, 이어서 H. G. 웰즈가 《투명 인간》과 《우주 전쟁》을 출판하여 문학과 과학의 기상천외한 결합은 착착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작품의 무대는 달세계의 테마를 제외하고는 어느 것이나 다 지구에 한정되어 있었다. 지저(地底)나 해저(海底), 또는 미개의 변경(邊境)이 소설의 무대가 되었지만, 주인공들은 지구의 강력한 중력(重力)에 의해 일단 지표(地表)에 못박혀 있었다. 그러나 중력의 견인력(牽引力)은 머지 않아 끊어질 것이다. 인간이 지구를 떠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 공간으로 뛰어나가 다른 혹성을 무대로 대활약하는 웅대한 스페이스 오페라의 개막이 박두했다. 막을 올릴 사람은 누구일까? 베르느 이후의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일까? 대(大) 웰즈가 있는 영국일까? 아니면 로켓 공학(工學)에 앞장선 치올코프스키가 있는 러시아일까? 아니다. 그 어느 곳도 아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의 개막은 대서양을 건너야만 했다. SF의 시조(始祖) E. A. 포우 이후 그 후계자가 없이 대륙 여러 나라에 비해 몇 발자국 뒤처져 있던 미국에서, 갑자기 스페이스 오페라의 꽃이 활짝 핀 것이다. 그 영광을 지닌 사람의 이름은 에드거 라이스 버로우즈. 작품은 <화성 시리이즈>. 그리고 버로우즈의 등장을 계기로 미국은 SF계의 제1선으로 뛰어나간 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우위(優位)를 빼앗기지 않은 것이다.
1911년에 그즈음 미국의 한 잡지인 <올 스토리 매거진>의 편집부에 장편소설 원고가 들어왔다. 지은이는 부기계(簿記係), 카우보이, 철도 경찰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역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혀 이름도 없는 30대 남자였다. 그러나 편집자는 그 기상천외한 소설 내용에 끌려서 채택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버로우즈의 역사적인 <화성 시리이즈>의 제1작인 이 작품이 《화성의 달 아래에서(Under the Moons of Mars)》라는 제목으로 다음해인 <올 스토리> 1912년 2월호에 연재되어 SF의 재미를 몰랐던 독자 대중의 화제를 모아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버로우즈는 이때 노만 비인이라는 펜 네임을 썼으나(본인은 노말 비인으로 할 작정이었는데 오식(誤植)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Normal Bean이란 보통 누에콩이라는 뜻과 정상적인 남자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이런 소설을 쓴 작자는 조금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비난을 야유해 줄 작정이었던 것 같다), 뒷날 1917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될 때 이 작품은 《화성의 프린세스》라고 제목을 바꾸고 작자 이름도 본명인 버로우즈로 고쳤다.
제1작의 호평에 힘을 얻은 버로우즈는 계속 다음해인 1913년 1월호에서 5월호에 걸쳐 같은 <올 스토리>에 《화성의 대원수(大元帥) 카터》를 집필하여, 당대의 인기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그 후 버로우즈는 1941년까지 존 카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화성 시리이즈>의 연작(連作)을 계속하여 현재 이 작품들은 전 10권의 단행본으로 나와 있다.
버로우즈가 제1작인 《화성의 프린세스》를 발표했을 무렵에는 아직 사이언스 픽션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구와 화성을 무대로 한 웅대한 스케일, 괴기 모험 소설의 드릴과 SF적 흥미가 혼연일체가 된 그 비할 바 없는 재미는 이른바 스페이스 오페라의 전형(典型)을 확립한 것으로, 20년대의 SF 흥륭(興隆)과 아울러 많은 후계자를 낳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23년 괴기소설과 SF를 중심으로 한 <위어드 테일즈> 지(誌)가 창간되고, <화성 시리이즈>의 속간(續刊)과 평행하여 26년에는 SF의 아버지 휴고 건즈백에 의한 세계 최초의 SF 전문지 <어메이징 스토리>가 창간되자 SF계는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28년에는 같은 지상(紙上)에 E E 스미드의 <스카이라크 시리즈>와 필립 노란의 <벅 로저스 시리즈>가 연재되어 존 카터의 후배는 연달아 대우주로 날아갔다. 1930년 해리 베이스에 의한 <어스타운딩 SF> 지의 창간에 의해 SF 유행은 하나의 정점(頂點)에 이르고, 스페이스 오페라의 무대도 태양계 우주에서 다시 은하계(銀河系) 우주로, 나아가서 안드로메다 성운(星雲)으로 차츰 규모를 확대해 간다. 말하자면 버로우즈는 이 찬란한 스페이스 오페라 시대의 개막 투수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버로우즈는 <화성 시리이즈>와 병행하여 마찬가지로 유명한 <타잔 시리즈> 23권을, 그리고 금성과 달과 지구 내부를 무대로 한 SF 미스테리, 웨스턴 모험소설 등 광범한 분야에 걸쳐 모두 60권 이상의 장·단편을 썼으며, 오락 문학의 영역에서는 국민의 모든 계층에서 애독되는 미국에서 가장 열광적인 인기 작가가 되었다. 또한 뒤마의 《삼총사》나 중국의 《수호지(水湖志)》, 또는 《서유기(西遊記)》, 그리고 도일의 《셜록 홈즈》처럼 국민이 청년 시절부터 애독하고, 나아가서 늘그막에도 재독 삼독하는 영웅적인 국민 문학이라 할 수 있는 점이 있다. 미국에서 그런 것을 구한다면, 우선 이 버로우즈의 모든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국민 문학의 매력은 즉 주인공의 매력에 통한다. 지구에서 혼잣몸으로 화성(火星)으로 날아가 요괴(妖怪)와 같은 BEM(우주 생물)을 상대로 종횡무진 활약을 하고,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義)가 두터우며 정(情)에 약한 영웅 존 카터의 매력을 빼고서 <화성 시리즈>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주 활극의 본질이 서부 활극과 같이 피카레스크 어드벤처 로망스(악한 퇴치의 모험 로망스)에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가련한 미녀와 악인과 남자다운 주인공이라는 삼자(三者)의 도식(圖式)은 18세기 이후 변함이 없는 일이다. 이 도식에 바탕을 두는 한 그곳에는 항상 건강한 입김이 있다. 나머지는 작자의 수완 나름이다. <화성 시리이즈> 전편(全篇)을 통해 일관된 작자의 놀라운 상상력과 넘치는 유머와 교묘한 구성, 효과적인 복선(伏線)과 강렬한 서스펜스, 요컨대 작자 버로우즈는 타고난 이야기 작가이며, 붓끝에서 탄생한 존 카터는 바야흐로 불후의 인간상으로서 달타냥이나 손오공과 어깨를 겨루는 존재가 된 것이다. 삼총사를 모르는 프랑스 인이 있을까? 손오공을 꿈꾸지 않는 중국의(그리고 한국의) 소년이 있을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존 카터와 인연이 없는 미국인은 없을 것이다. <화성 시리즈>는 단순한 SF의 테두리를 벗어난 국민적 문학인 것이다. 작자의 얼마쯤 예스럽고 흐뭇한 로랜티시즘을 웃어 주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문학에 중독된 불행한 견해가 아닐까? 여자에게 잘 반하는 존 카터, 칼에 약한 겁쟁이 달타냥, 섹스 비대증에 걸린 손오공 등에 무슨 존재 이유가 있겠는가? 후대(後代)의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자의식 과잉의 작중 인물들과 비교하면, 존 카터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화성의 캬롯트인 울러 한 마리를 예로 들어 보아도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는지 모른다. ―지은이가 울러의 묘사에 소비한 페이지는 잘 생각해 보면 아주 적은 양이긴 하지만......
버로우즈는 1875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군(南軍)의 소령이었다. 그도 그 피를 이어받아 본디 군인을 좋아했으나 직업군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1906년에 결혼하여 세 아이를 낳았으며, 1912년에 처녀작 《화성의 프린세스》로 성공을 거두기까지 사업에 실패하고 갖가지 직업을 전전해 가며 고생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군인을 좋아하는 염원이 이루어져 육군 소령으로 응소(應召)하고, 마침내 작가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자 30년대 끝무렵부터는 하와이에 머무르며 일본 해군에 의한 진주만(眞珠灣) 공격을 체험했다. 작중 인물은 얼마쯤 작자의 분신(分身)인 경우가 많은데, 버로우즈와 존 카터에게서도 다분히 공통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전쟁을 좋아하는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성격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그는 66살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자원 입대하여 로스앤젤리스 타임즈의 특파원으로 부겐빌에서 마리아나 작전에 참가하여 젊은이를 능가하는 활약을 보였다. B29에 동승하여 폭격에도 직접 참가했다고 한다. 틀림없이 버로우즈는 우주선대를 지휘하여 적국에 폭탄 세례를 퍼붓는 화성의 대원수 존 카터가 된 심정으로 기사다운 행동을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1950년 3월, 7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온 세계의 버로우즈 팬은 <버로우즈 비브리오 파일>이라는 애호가 그룹을 만들어서 기관지를 발행하고, 그 본거지는 미주리 주(州) 캔자스 시티에 자리잡고 있다. 추리 소설로는 셜록 홈즈의 팬 그룹 <베이커 거리의 이레규라즈>가 유명하고, 그밖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앨런과 스베스톨의 <판토마> 애호가 그룹이 장 콕토, 아폴리네르, 시므농 등 만만찮은 회원으로 조직된 것이 있을 뿐이다. 물론 수많은 작가 중에서 세계적인 팬 그룹이 결성된 것은 버로즈우 뿐이다. 버로우즈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달을 올려다보고 그 속에서 떡방아를 찧는 토끼의 그림자를 찾던 것처럼, 마리너 4호가 날아간 5억 2천만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화성을 바라보고 존 카터와 데저 소리스의 발자국을 몽상할 수 있는 것은 버로우즈 팬에게만 허용된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우리나라에도 존 카터의 팬이 한 사람이라도 늘기를 바라며 붓을 놓는다.
오학영/역자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다. 동국대문과를 졸업하다. 1958년 <현대문학>에 희곡 《닭의 의미》 《생명은 합창처럼》으로 추천을 받고 문단에 나온 뒤 희곡 《심연의 다리》 《그 얼굴에 햇빛을》 《꽃과 십자가》 단편 《바람개비》 《침묵의 소리》 등이 있다. 1960년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다.
화성의 프린세스 / 버로우즈 동서추리문고
1978년 11월 1일 발행
역자 오 학 영 발행인 고 정 일 발행처 동서문화사
서울중구을지로5가22-1 전화 265-1123·0018·0681 등록 제2-101호(윤)
인쇄·신일인쇄 신성인쇄 달성인쇄 옵셋·평화당인쇄 제책·동협제책
1978 Printed in Korea 역자와의 협약에 의해 인지를 붙이지 않음
'아 > 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엔리오 모리코네 Ennio Morricone (0) | 2011.05.20 |
---|---|
연예인 다룬 블로그 (0) | 2011.05.20 |
FBI가 살인자에게만 한다는 심리테스트 (0) | 2007.02.04 |
에코파티 메아리 (0) | 2007.01.09 |
열대 우림의 깊은 꿈, 말콤 보세 (0) | 2007.01.07 |
언니네 이발관 (0) | 2006.07.20 |
여준영, 프레인 대표 (0) | 2005.11.14 |
에이리언alien 시리즈 (0) | 2005.03.10 |
영화음악 about (0) | 2004.07.18 |
SF소설, 그 첫발 띄기 (0) | 2003.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