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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빌] 저질영화를 예술적으로 감상하는 법


꼴통을 만나면 “도대체 그 속에 뭐가 들었나 머리통을 한번 쪼개봤으면 좋겠다”고들 말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은 그의 쪼개진 머리통이다. 우리는 [킬빌]을 통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쓰레기들을 만난다. 한정수 js_han@cultizen.co.kr 


마르셀 뒤샹은 변기 하나를 뜯어놓고 외친다.
“이것이 예술이다.”

요셉 보이즈는 죽은 토끼의 귀에 대고 설명한다.
“의미를 가진 것은 뭐든지 예술이야.”

앤디 워홀은 수프 통조림 서른 두 개를 세워놓는다.
“그러니까 이것도 예술이지.”

하지만 34년만에 김포공항으로 돌아온 백남준의 천기누설.
“내가 해먹어봐서 알지만, 예술은 몽땅 사기야.”

일본풍의 이 깜찍하고 천박한 망가 인형은 얼마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수억 원에 팔려나갔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 특별한 역사적 에피소드가 얽혀 있는 것도 아니다. 소위 ‘네오팝 아트’다. 계보적으로 볼 때 네오팝은 다다이즘, 레디메이드, 팝아트의 적자(嫡子)다. 이 인형은 최첨단의 아방가르드 작품인 것이다.

이 흐름은 애초에 ‘일상성의 예술’이라는 지극히 계몽적인 화두로 시작하였지만, 이후 ‘인용과 복제’라는 후기산업사회의 존재방식을 고스란히 예술에 반영함으로써 누천년의 미학적 질서에 큰 타격을 입히고 현대예술의 중심축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들을 복권하기에도 지치고, 전통적이고 근엄한 것들을 엿먹이는 놀이에도 질려버린 그들은 좀더 색다르고 의미심장한 ‘미학적 쓰레기’를 찾아나선다. 현재의 네오팝 아티스트들이 주목하는 것은 아시아의(특히 일본의) B급 대중문화 코드다. 그것의 키치적 복제다(‘B급의 키치적 복제’라는 표현도 참으로 요령부득이지만).

쿠엔틴 타란티노를 키운 것은 8할이 쓰레기다(생긴 것도 참으로 더럽지 않은가). 비디오숍 점원으로 일하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그는 특히 동방의 개발도상국들이 폭포수처럼 쏟아내던 B급 헤모글로빈과 ‘불구대천(不俱戴天) 내러티브’를 새새끼처럼 받아삼켰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영화감독이 되었다. 폭풍전야.

이 푸른 눈의 오타쿠가 새삼스럽게 ‘쓰레기들의 스펙터클’을 약속하고 미라맥스로부터 받은 댓가는 백지수표였다. [킬빌]이 서있는 자리는 소위 ‘네오팝’의 현재 좌표와 이웃해 있다. 몹시 닮았다. 아시아의(특히 일본의) B급 대중문화 코드를 키치적으로 복제한다는 점에서. 평지돌출의 일개 오타쿠가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점에서(네오팝에는 다카시 무라카미라는 오타쿠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막강한 수사학이 뒤를 받치고 있다는 점에서. 비싸지만 없어서 못 판다는 점까지.

가다가다 꼴통을 만나면 “도대체 그 속에 뭐가 들었나 머리통을 한번 쪼개봤으면 좋겠다”고들 말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은 그의 쪼개진 머리통이다. 우리는 [킬빌]을 통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쓰레기들을 만난다. 그리고 탄성을 지르며 무릎을 친다. 우와! 엄청난 쓰레기통이군!

쓰레기통에는 질서도 필요 없고 논리도 필요 없다. 주인공은 처참하게 당했다. 당한 거다. 그리고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래야 복수를 할 수 있으니까. 이제는 무자비하고 통쾌한 복수다. 악당들의 인산인해를 조자룡 헌 칼 쓰듯 깍둑썰기로 조져내면 되는 거다. 코에이나 세가의 슈팅 게임처럼 외가닥 길을 따라 난이도만 증가하면 되는 거다.

브라이드가 걸어간 길은, 쇼 브러더스가 개척한 혈로(血路)이자 마카로니 범벅의 난장판이며 사무라이들의 손무덤이요 야쿠자들의 발무덤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질풍노도의 시기에 허겁지겁 받아먹었던 동방의 온갖 B급들을 숨가쁘게 복제한 것에 불과하지만, 오마주의 이름으로 일단 스크린에 걸린 이상 그건 최첨단의 코드 예술이 된다.

네오팝 아트를 관람하는 문화적 서민들의 반응은 대략 두 가지다. "야호! 저건 나도 좀 아는 건데!" 또는 “쳇! 쓰레기장에 굴러다니던 거 아냐!” 우리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을 소화하는 방식도 그와 유사하다. 열광하거나 뜨악해 하는 방식이 참 닮았다. 도대체 우리는 백남준에 감탄해야 하는가, 치를 떨어야 하는가. 어쨌든 작금의 문화적 사기는 충분히 재미있으니 자문자답하자면 오, 오불관언. 그저 키득거리며 머리가 아닌 몸으로 버티면 그만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킬빌 인터뷰  


<연합인터뷰>'킬빌'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 "한국은 내가 좋아하는 나라다. 그래서 2편에 한국인 캐릭터를 출연시켰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40)이 5년만에 '킬빌'로 관객들을 찾는다. 전 동료들에게 무참히 공격당한 킬러의 복수극을 그린 영화 '킬빌'은 그동안 '저수지의 개들', '펄 프픽션' 등 연출작과 시나리오를 쓴 '트루 로맨스' 등에서 종종 '오마주'로 등장했 던 동양 액션 영화에 대한 헌사가 들어 있는 작품.

영화 홍보차 일본을 방문한 타란티노 감독을 18일 오후 도쿄의 임페리얼 호텔에 서 만났다.

"헬로, 감사합니다"라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넨 감독은 "60~70년대 홍콩의 쇼 브라더스 작품들과 일본의 야쿠자, 사무라이 영화 등 동양의 다양한 액션영화와 마 카로니 웨스턴 무비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을 혼합했다"고 영화에 대해 설명했다,

'킬빌'의 주인공은 '펄프 픽션'에서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여배우 우마 서먼. 감독은 기획 때부터 우마 서먼을 여주인공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2001년 출산한 우마 서먼을 위해 영화 제작을 2년여 동안 연기할 정도로 신뢰가 두터운 편.

그는 우마 서먼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설명이 쉽지는 않지만 둘 사이는 감독 과 배우로서 서로 좋아하는 관계"라며 "어떤 다른 감독보다 서먼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는 그녀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속에서 복수를 하거나 복수의 대상이 되는 주요 인물들은 한결같이 여성 캐릭터다.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를 묻자 "매력적이기 때문"이라는 대답 이 나왔다.

"미국과 달리 아시아의 액션 영화에서는 여성 캐릭터들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 고 이런 부분이 매력적이었습니다. 여성들이 액션 영화에서 인기를 모아 10대 중반 의 젊은 여자애들이 자신의 역할 모델로 생각하며 자라기 바랍니다. 남자애들이 남성 액션 스타의 사진을 방안에 붙여놓는 것처럼 말입니다."

감독은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미녀삼총사' 등 다른 영화에 비하면 주인공들이 명예심이나 존경심 등 전투의 규칙을 지킨다는 것이 특징이라며 미국 관객 중 40% 가 여성이라고 전했다.

'킬빌'은 감독이 드러내 놓고 밝히듯이 아시아 액션영화에 대한 헌사다. 영화의 첫 화면도 "후카사쿠 긴지 감독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국내에는 '배틀로얄'로 알려진 긴지 감독은 70년대 야쿠자 영화의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난 1월 '배트로얄2'를 유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긴지 감독의 '흑장미의 저택'이 영화속 일본인 캐릭터인 오렌 이시이의 캐릭터 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타란티노는 "완성된 영화를 긴지 감독이 못보는 게 제일 안타깝다"고 말했다.

"'킬빌'에 가장 많은 영감을 준 것은 '배틀로얄'입니다. 또 긴지 감독은 시놉시 스 단계에서부터 상의를 했고 기술이나 미술 면에서 조언을 해 줬습니다. (일본에서 시사회를 갖는)이 자리에 그가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네요".

6개월 간격을 두고 두 편으로 나뉘어 개봉된다. 1편은 주요 배경이 일본인 만큼 일본 영화의 스타일이 많이 반영된 편이지만 홍콩영화의 액션신이나 서부영화의 스 타일도 섞여 있다.

그는 "후반부 액션신이 사무라이 영화의 전투 장면과 일본의 '아니메', 쇼브라 더스 영화,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 등이 동전이 돌아가듯 균형을 이루 며 섞여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이나 홍콩에 비해 한국의 액션영화나 한국인 캐릭터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the five fingers of Dead)'가 미국에서 개봉한 최초의 쿵후영화인 것은 알고 있는지 물으며 한국팬들에게 "2편에 한국 인 캐릭터가 등장하며 미국의 코리아 타운이 배경으로 나오니 기대해 달라"고 당부했다.

"70년대 흑인 감독들이 할리우드에서 활약했던 것처럼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나 쇼브라더스에서 일하는 한국인 감독을 많이 봤습니다.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한 국 작품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고요. '똑순이'라는 뜻이 한국의 강한 여성을 뜻 하는 말 맞죠?"

그는 일본 방문에 이어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던 것에 대해 "2편의 후반 작업이 진행중인 관계로 한국 방문이 힘들어졌지만 2편을 가지고 꼭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펄프픽션'이 극장에서 상영된 최초의 나라인 만큼 뜻이 깊은 나라입니 다. 제가 얼마나 한국을 좋아하는지 팬들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사진 있음>  bkkim@yna.co.kr (끝)



쿠엔틴 타란티노의 귀환, 살아 있는 장르영화의 전도서 <킬 빌>  


<재키 브라운>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은 전작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더욱 더 순수한 영화광의 자세로 돌아갔다고나 할까. 아니면 그냥 제멋대로 한바탕 난장을 벌였다고나 할까. 홍콩의 무협영화,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와 야쿠자영화, 스파게티 웨스턴 등의 장면과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와 짜깁기한 <킬 빌>은 무척 자극적이면서도 한없이 가벼운 영화다.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폭력의 향연 속에서도 희한하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일부에게는 순수한 오락이며 유희이지만, 누구에게는 지나치게 가벼운 제스처에 불과한 영화 <킬 빌>은 타란티노의 전작들처럼 논쟁적이다. 하지만 한편의 영화를 두편으로 나누었고, 이제 전반부만을 본 상태에서 <킬 빌>을 판단하기는 이르다. 우선 <킬 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타란티노가 좋아했던 그 ‘싸구려영화’들의 흔적과 지난 6년의 과정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타란티노처럼, 그 폭력적인 홍콩의 무협영화에 한때 열광했던 <킬리만자로>의 오승욱 감독이 <킬 빌> 감상기를 보내왔다. - 편집 권은주

쿠엔틴 타란티노가 지독한 영화광이란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그가 보았던 수많은 영화의 장면과 대사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아니 통째로 가져온다. 94년 5월21일, <펄프픽션>을 공개한 뒤 기자회견에서 한 기자가 <저수지의 개들>이 임영동의 <용호풍운>을 표절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무시하거나 화를 낼 것이라는 예측과는 정반대로 타란티노는 <용호풍운>에 대한 열렬한 찬사를 늘어놓았고, 확실하게 “훔쳐왔다”고 단언했다. “영화의 요소는 모든 곳에 있다”는 말과 함께.
그거야말로 타란티노의 힘이다. <재키 브라운>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킬 빌>은 타란티노가 열광했던 영화들을 한데 모아놓은 일종의 베스트 앨범이다. “나는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를 상영하는 ‘그라인드하우스’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킬 빌>은 그런 영화관에서 상영된 그라인드하우스 무비에 바치는 영화다. 복수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모든 장르와 서브 장르의 요소를 섞어넣었으니까…. 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영향을 받았고, <킬 빌>의 경우 그걸 한데 섞은 스튜처럼 만들고 싶었다. 그걸 모두 집어넣어 관객이 영화관을 나갈 때 5편 정도의 영화를 본 것 같은 기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우선 마카로니 웨스턴적인 요소가 있다. 거기에 일본의 사무라이영화, 그것도 구로사와 아키라가 아니라 <자토이치>나 후카사쿠 긴지의 야쿠자영화 같은 것. 비행기로 도쿄 상공을 나는 장면은 도호영화사에서 만든 괴수영화의 영향을 받았고, 실제로 도호의 고지라 세트를 빌렸다. 난 그들의 열렬한 팬이니까 그에 대한 트리뷰트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홍콩 쇼브러더스의 영화가 있고 지금 일본의 대중영화들, 폭력적이며 와일드한 이시이 다카시, 이시이 소고의 영화들도 들어 있다.”


영화의 신도가 쓴 장르의 전도서 <킬 빌>

<킬 빌>을 준비하면서 타란티노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그 수많은 영화들을 보는 것이었다. 아마 다음 연출작이 될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인글로리어즈 배스터드>(Inglorious Bastards)의 시나리오를 쓰고, 우마 서먼과 다시 만나 <킬 빌>을 쓰는 도중 타란티노는 집에 영화관을 만들었다. 1년 이상의 설계를 통해, 모든 영화광이 꿈꾸는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영화의 필름 프린트를 모아, 날마다 영화를 봤다(그가 비디오 세대라는 것은 일종의 편견이다). “나에게 영화는 종교와도 같다. 한마디로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신앙과도 같다. 영화를 향한 내 마음은 절대 배반이라는 것을 모른다.” 타란티노에게 영화는 종교이고, 영화관은 신성한 예배당이다. 그가 ‘교회’라고 부르는 이 영화관에서, 타란티노는 <킬 빌>을 위한 준비를 했다. “옛날,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쇼브러더스의 영화를 모두 챙겨 봤다. 보지 않았던 영화들은 물론, 이미 봤던 것들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 이런 영화의 음악, 사운드, 미술, 줌숏 같은 것들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익혀졌다. 1년 반 정도는 쇼브러더스 영화에 그리고는 다른 홍콩 무협영화, 일본 애니메이션, 사무라이영화, 야쿠자영화 같은 것들만 봤더니 세상에서 이런 영화들만 만들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 모든 것들은 <킬 빌>에서 한데 엉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언뜻 보기에 <킬 빌>은 우리가 이미 보았던 것들의 짜깁기, 페스티시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고, 타란티노만의 세계가 있다. 아무리 영화에 정통하다 해도, 타란티노처럼 대중문화 중독자라 해도 미처 알아차릴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그의 세계 속에 녹아들어가 있다. 양념의 이름이 무엇인지 정확히 몰라도, 그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식어 있을 때 더욱 맛있는.

타란티노식으로 재창조된 세계

타란티노의 세계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브라이드가 타고 가는 비행기에는 일본도를 꽂는 칼집까지 마련되어 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현실의 논리’를 떠올리는 순간, 당신은 타란티노의 세계에서 이탈하게 된다. “관객이 모든 것까지 알 필요는 없다. 자신의 세계와 신화를 만드는 경우, 어떤 의문에도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답을 관객에게 제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가 그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거지. 하토리 한조가 어떻게 오키나와로 흘러오게 되었는가, 그 과거를 말할 수도 있다. 그는 왜 30년간 검을 만들지 않았는가, 대머리 남자는 누구인가, 빌의 인생이 그뒤 어떻게 되는가 등등의 모든 것을. 하지만 관객에게 대답할 필요는 없는 거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된다. 이 세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느껴주기만 하면 된다. 내가 완전히 조종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타란티노의 영화들
유창한 이야기꾼 혹은 거짓말쟁이
 

타란티노의 ‘영화는 모두 다 혼돈인 채로 존재한다. 지금까지 봐온 영화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들어가 있다. 그의 영화제작 자체가 영화에 대한 트리뷰트 행위다’ . 쿠엔틴 타란티노가 만들어낸 세계가 현실과 부딪치면, 그 세계는 순식간에 증발해버린다. 타란티노가 <올리버 스톤의 킬러>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다. “내가 쓴 것은, 약간 비현실적인 세계를 방랑하는 오락영화다. 하지만 올리버 스톤은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영상만으로 본다면 굉장히 테크닉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이야기한 뒤, 그가 하고 싶어하는 것과 나의 시나리오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어한다. 내 경우는, 설명하지 않은 채 그냥 놔둔다. 그는 테마를 보여주고, 주장하고, 영상으로 보여준다. 관객이 영화관을 나올 때, 무언가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는 거다. 그는 고상한 영화를 찍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나는 오락영화를 찍는 것에서만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재키 브라운>   <트루 로맨스>  

4와 1/4. 이것이 지금까지 타란티노가 만든 영화다. <저수지의 개들> <펄프픽션> <재키 브라운> <포룸>의 한 에피소드. 그리고 <킬 빌>(아직은 1/2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을 떠올려본다면 뒤틀린 캐릭터와 신랄한 대사, 시제의 재편성, 복수(複數)의 주관(主觀), 맞물린 시공간 등이다. 타란티노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는 건 무엇에 관한 이야기냐는 것이다. 여기에선 스토리가 모두다. 하지만 내가 잘하는 것은 스토리와 스토리 사이에 일어나는 것 즉 대화, 캐릭터들이다. 우선 인간에서부터 시작해 그들을 어떤 설정에 던져놓고, 그리고 뭐가 일어나는가를 지켜보는 것뿐이다.” 펄프 장르의 뻔한 전형적인 인물과 플롯에서 출발하지만, 전혀 의외의 사건과 감흥으로 드라마틱하게 달려나가는 것이 타란티노의 특기다. 자신은 이야기보다 이야기의 사이에 관심이 있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이야기가 구축되는 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그래서 타란티노는 위대한 이야기꾼, 혹은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쟁이 타란티노의 이력은 오래전부터 시작한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의 사랑을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해 죽음을 꾸며내기도 했다. 배우 지망생 시절 이력서에는 고다르가 만든 <리어왕>에 출연했다는 거짓말이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그 영화를 안 볼 테니까 거짓말도 안 들킬 거라 생각해서”라고 태연하게 농담성 변명을 하는 그 순수함. 타란티노는 장 뤽 고다르를 대단히 존경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사의 이름을 고다르 영화 <외부인들>에서 가져왔고, <저수지의 개들>을 찍을 때에는 모든 스탭에게 <네 멋대로 해라>를 보여주면서 “할리우드 B급 범죄영화를 자신들 나름대로 리메이크했던 누벨바그의 방법을 나 나름대로 시도해보겠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말할 때마다 바뀌는 베스트 10에서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대신 짐 맥브라이드의 <브레드레스>를 슬쩍 올려놓는 위악을 떨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이야기’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마주친 <올리버 스톤의 킬러> 프로듀서를 공격한다던가 하는 해프닝까지 포함하여 쿠엔틴 타란티노의 세계는 수많은 거짓말과 농담, 전설과 신화로 풍성해졌다. 어쩌면 그 모든 이야기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자신도 관객도 함께 즐기는.

경박하지만 깊이있는

타란티노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들로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저 모방만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그의 영화는 번들거리는 포즈만으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까지 꾸준하게 전진해갔다. 타란티노는 영화의 소재 속에 자신의 경험을 집어넣는다. 비현실적이면서도 너무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진실한 어조로 들려주는 타란티노의 영화는 현실과 픽션이 절대 분리할 수 없는 긴밀함으로 엮여 있다. <펄프픽션>처럼, 시공간의 구조가 마구 맞물리는 듯한. “<저수지의 개들>의 녀석들은 뭘 해도 안 된다. 올바른 일을 해도 세상은 등을 돌리고 있고. 그걸 썼을 때, 난 내 작품의 영화화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포 룸>  

영화로 먹고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란 생각에 필사적이었다. 10년 동안이나 그렇게 고전해왔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이, 모든 것이 예상과는 다르게 나와서,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운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남자였다. 그게 <저수지의 개들>에는 잘 반영되어 있다. 최악의 운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 거다. 어긋난 기대의 연속으로 폭발 직전인 남자들의 이야기. 그런데 <펄프픽션>은 행운이 따르고, 자비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저수지의 개들>의 뜻하지 않는 성공으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가 됐을 때 그걸 썼다.” 그 진솔한 고백처럼, 타란티노의 영화는 결코 그 자신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쿵후와 코믹북에 미쳐 있는 <트루 로맨스>의 클레런스가, 타란티노의 젊은 날의 자화상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허구적인 이야기와 나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뭉개버리는 방법’은 타란티노의 영화가 관객을 매혹하는 주된 이유다.

<펄프픽션>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뒤에도 너무 경박하고 세상을 ‘유희’로만 바라보지 않느냐는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게다가 타란티노의 행보는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 <데스페라도>와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멍청한’ 연기를 하고, 연극 <어둠이 올 때까지>의 연기는 ‘최악’이라는 비난을 받고, 그를 비난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싸움을 했다. 타란티노가 ‘원 히트 원더’로 끝나버리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다수의 희망섞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으로 역전 홈런을 날렸다. 전작들과 다르게 <재키 브라운>은 젊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며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중년 남녀의, ‘어딘가 삶에 지친 일상의 미묘한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타란티노의 최고작이라 할 <재키 브라운>은 그 천방지축의 타란티노에게도 ‘깊이’가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준 작품이다.

그는 영화광이다, 200% 확실한

그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타란티노가 세상 그 누구 못지않게 영화를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좋은 감독의 조건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영화를 사랑하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대부분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물론 할리우드에는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혹은 감독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도 많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 영화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한 사람들이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리처드 링클레이터, 폴 토머스 앤더슨, 웨스 앤더슨, 캐슬린 비글로…. 모두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작품에 나타난다.” 타란티노의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는 속도가 상당히 더딘 이유도 그것이다. “최근에는 더 작은 규모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찍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내가 찍는 모든 영화를 사느냐 죽느냐의 물건으로 만들고 싶다. 나의 지금까지의 ‘영화사’를 보면 알겠지만, 10년 뒤에도 모든 영화를 가리키며, 저 영화는 살아서 호흡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 영화는 만들어져야만 했었다, 그게 나에겐 전부다. 내 영화를 좋아하는 팬에게, 내 새 영화가 이전 작품과 비슷한 정도의 흥분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처녀작과 비슷할 정도로. 아직 안 본 팬들에게도 마찬가지고. 20년 뒤에 내 영화를 발견하면, 다른 작품들을 모두 보고 싶어질 정도로, 모든 것을 내 뜻대로 찍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킬 빌>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 한없이 가벼운 스타일, 특히 아시아 무술영화의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 같은 것들은 단지 제스처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본 것은 <킬 빌>의 전반부뿐이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후반부를, 결말을 봐야만 한다. 수많은 비난들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한 가지만은 말하고 싶다. <킬 빌>은 타란티노가 말하는 ‘오락영화’다. <킬 빌>에는 타란티노가 좋아했던 수많은 영화와 CF, 만화 등의 기억이 현란하게 재현되어 있다. <킬 빌>을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타란티노가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였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세트에서 배우들의 연기지도를 하면서, 타란티노는 얼마나 기쁘고 벅찼을까. 그런 즐거운 마음이 <킬 빌>을 보는 내내 전해졌다. 그 순수한 열정, 그 단순한 유희정신이 일말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내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2편을 보고도 아쉬움이 지속된다면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일이지만, 지금은 그 유혈낭자한 오락을 즐기는 것이 우선이다.

김봉석 기자 lotusid@hani.co.kr




메이드인 USA의 義峽을 보다
홍콩영화 키드 오승욱의 <킬 빌> 감상기
오승욱/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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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빌>이 상영되는 극장 안, 뒤에서 누군가 끊임없이 껄껄 웃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웃음 소리인데? 거 참 많이 거슬리네…. 그는 거의 모든 장면을 껄껄거리며 보다가 마지막 결투장면에 가서는 “야, 이 영화 정말 웃긴다”라며 극장 안의 사람들이 다 듣게 말한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내 친구였다. 그는 홍콩 무협영화라고는 한편도 안 본 친구였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와 마주치자 첫 마디가 “이 영화 정말 웃긴다”였다. “뭐가 그렇게 웃긴데?” 하려다가 나의 감언이설에 속아 귀한 시간을 쪼개 영화를 보러온 또 다른 친구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쓰인다. 물론 그의 표정 역시 잘 봤다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동료들과 친구들이 모여들고 우르르 몰려 커피를 마시러 갔다. 내가 눈치를 보며 자신없는 목소리로 “짝퉁이 짱깨 영화 봤으니까 이과두주에 탕수육 먹어야 하는 거 아냐?” 했지만 모두들 못 들은 척한다. 자리를 잡은 우리는 방금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고 모두들 열몇살 때 찾아다녔던, 70년대 삼류극장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친구들은 <킬 빌>보다는 그 영화를 보는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70년대의 어느 삼류 동시상영관에 와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런 이야기들만 했다. 지구 저편에 비자가 없으면 못 가는 나라에서 만든 영화가 우리에게 70년대 삼류영화관을 생각하게 했다. 그거 진짜 웃긴다.
아시아 무협의 백미, 라스트 20분의 혈투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며 비웃겠지만, 나에게 영화의 마지막 20분은 멋있는 주인공과 그 반대편 또 다른 주인공과의 마지막 대결이라는 생각이 원초적으로 잠재되어 있다. 앞에서 전개된 이야기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 주인공의 감정선 따위도 저기 구석에 가서 혼자 등 돌리고 앉아주었으면 좋겠고, 영화의 마지막은 오로지 악당의 부하들과 싸우는 전희와 본격적인 삽입 섹스인 악당 두목과 주인공의 대결이다. 난 좀 그렇다. 내가 영화에 처음으로 매혹당하기 시작한 것은 홍콩 무협영화였고, 그 영화들은 거의 모두 라스트 20분을 대결투로 마무리한다. 피를 흘리며 배에 창과 단검이 꽂혀 무자비하게 죽어 넘어가는 대학살의 라스트 20분이 없는 장철 영화를 생각할 수 없고, 춤을 추듯 모든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대합전을 벌이는 호금전의 라스트 역시 20분이 안 넘으면 말이 안 된다. 피와 땀을 흘리며 손상당한 육체로 죽어 넘어지거나, 지친 몸을 겨우 일으켜 석양을 바라보며 표표히 떠나가는 그런 라스트에 중독되어 인격이 형성되는 소년기를 보냈으니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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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할리우드 액션영화들은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도록 꾸민 장치들이 정교하지만, 주인공과 악당과의 대결이 10분 이상 넘어 가질 못한다. 추격전을 합해본다고 해도, 그들은 몇번의 주먹질이나 총 몇방으로 생사의 결투가 해결되니 마지막의 결투 신을 20여분 꾸밀 수가 없었고, 또 드라마를 중시하는 그들의 서사방식으로 보자면 주먹질을 20분이나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홍콩영화들은 경극에서 출발해서인지, 드라마를 이끌어갈 대사신 다음에 격투, 그 다음 역시 대사신 그리고 격투, 이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대난전, 그리고 주인공과 악당의 결투 뭐 이런 식이었다고 생각된다. 서양인들의 포르노가 그런 이야기 형식과 비슷한 것 아닐까 싶은데, 하여튼 중요한 것은 마지막의 대결투다. 관객은 홍콩 무협영화를 보러 들어가면서 약속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 싸움을 얼마나 멋지게 연출하고, 우리에게 그 속에 빠져 주인공들이 흘리는 피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것이냐는 것이다. 친구는 라스트 30분의 청엽옥 결투가 감정이 실리지 않아 지루했다고 한다. 마지막 눈내리는 정원도 설득력 없이 마지막 싸움을 위해 억지로 그런 상황을 몰아간 것 같다며 구시렁거린다. 난 라스트가 죽이지 않냐고. 싸움이 멋지니까 다 용서가 되는 것 아니냐고. 설전이 오고가다 그러니까 니가 지금 그 모양이인 거야 하는 듯한 친구의 말투에서 그만 손을 들었다. 뭐 할 수 없지, 그렇게 생겨 먹은걸….

수다떠는 峽의 세계

많은 사람들이 타란티노 영화의 매력을 수다라고들 한다. 재미있게 수다를 떨기 위해 뒤에 할 이야기를 앞에다 갖다붙이고, 궁금하게 만들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찬탄을 뿜어내게 한다. 정말 그는 수다의 대왕이다. 나도 그의 수다에 매력을 느끼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다른 곳에서 타란티노의 영화를 좋아했었다. 그는 할리우드 감독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시아적인 의협을 이야기하는 감독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기사도라는 것이 아시아의 의협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달라도 한참 다르다. 내가 본 영화들 중, 아시아의 의협을 비슷하게 이야기한 서양 감독은 장 피에르 멜빌이 처음이었지 하는 생각이다(샘 페킨파의 영화에서도 협이 종종 출몰한다).

장 피에르 멜빌은 60년대 후반에 사무라이 검객과 킬러 알랭 들롱을 동일시하고 그를 검객의 자존심, 협을 손상당한 주인공으로 몰아 붙여 자살에 이르게 하는 <사무라이>를 만들었고, <레드 써클>에서는 의협으로 뭉친 범죄자들의 악몽 같은 몰살을 그려내고, <카사블랑카>의 의협판인 <리스본 특급>을 만들었었다. 멜빌이 사무라이나 수호지의 세계를 탐닉해서 그런 영화들이 나왔다면, 타란티노는 빈둥빈둥 백수 생활을 하며 사귄 건달 같은 친구들과 본 홍콩 무협이나 사무라이영화 비디오들 때문에 의협의 세계를 탐닉한 것 같다.

협이란 것은 그 태생이 왕조라는 절대폭력 속에서 독버섯처럼 생겨났고, 논리보다는 감정에 치우친 격렬한 모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사내다움이라든가, 마초와는 거리가 먼 순교적인 느낌의 것이다. 협은 비겁함과 두려움, 배신과 술수 속에 피어나는 한순간 빛과도 같은 것인데, 그것이 가장 빛을 발하는 때는 모든 것을 잃으면서 어떤 것을 얻는 죽음의 순간에 불려온다.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과 <펄프픽션>에서 협의 냄새가 아우성쳤었다면 <킬 빌>은? 아시아적인 협의 세계를 얼마나 뻔뻔스럽게 수다떨까? 주인공의 육체가 땀을 흘리고 피를 쏟으면서 협을 강요하는 장철의 주인공들에 비교하자면, 글쎄다….

 

사무라이 영화에 바친다고?

이미 <킬 빌>에서 인용된 영화와 음악의 리스트야 고수들이 저마다 한 소리를 해서 더이상 열거하는 것이 뒷북이겠지만, 그 흥미로웠던 것은 <외팔이 드래곤>(외팔이 권왕, 독비권왕)의 속편 <독비권왕 대파 혈적자>(외팔이 검객)를 인용한 것이다. 고고가 가지고 싸우는 무기가 외팔이 왕우를 죽이려는 복수승 금강의 필살 무기 ‘플라잉 킬로틴’의 사생아인 것은 확실하고, 라스트 대난전에서 자신의 싸움을 준비하려 미닫이문 뒤로 사라지는 오렌 이시이의 뒷모습에서 잠깐 <독비권왕 대파 혈적자>의 주제음악까지 몇초 동안 사용되는 것을 보면 그 영화를 아주 좋아한 모양인데. 왜 속편보다 더 경배할 요소가 많았던 <외팔이 드래곤>이 아니었을까? 모를 일이다. 사실 웃고 즐기기에는 대단한 걸작보다는 좀 떨어지는 영화가 죄의식을 덜어줄 텐데, 그런 종류의 혼성모방인가? 어차피 <킬 빌> 1편은 사무라이영화들에 대한 경배라고 하더라.

하지만 청엽옥에서의 난전을 보며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피가 튀고 머리가 잘려 피가 분수처럼 솟는 것만, 일본 사무라이영화를 닮았다. 좀처럼 일본 사무라이영화를 볼 수 없었던 나는 80년대 중반에 친구들과 여관을 잡고 한 이틀 틀어박혀 술을 마시다가, 여관에서 틀어주는 유선방송을 통해 처음 사무라이영화와 조우했었다. 물론 과감한 섹스신에 더 많은 흥미가 있었지만, 장철의 피바다를 통과한 나도 두눈 뜨고 보기에는 민망한 피바다가 연출되어 거의 질리곤 했고, 그 이후에 유명하다는 사무라이영화들 역시 기대와는 달랐다. 일본 최고의 라이벌 사사키 고오지로와 미야모도 무사시가 끝장을 본다는 <암류도의 혈투>를 보며 세기의 대결이 벌어질 거라 두근두근 기대를 했었다. 드디어 라스트! 앞으로 30분 동안 무사시와 고오지로가 싸우겠지. 나룻배에서 목검을 깎아 만든 무사시가 해안에 닫자마자 통성명도 없이(참 예의도 없다) 배에서 뛰어내려 칼을 겨누고 달려간다. 그러자 고오지로도 그의 긴 칼을 빼들고 무사시를 따라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을 달려간다. 그러더니 칼이 한번 번쩍하고 풀썩 사사키 고오지로가 쓰러진다. 뭐야 이거? 그들의 대결은 단 2분 정도였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어서 홍콩 무협영화를 볼 때처럼 ‘아직 안 싸우지?’ 하며 화장실 다녀왔더라면 그나마도 못 보고 말았을 뻔했다. 그 이후에 유명하다는 60년대의 <아들을 동반한 무사>(아기를 업은 늑대) 시리즈를 작심하고 보려다가 분수처럼 치솟는 피 때문에 질려서 단 한편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사람 반쪽으로 쪼개기, 이마 윗부분만 잘라내기, 무릎 위로 동강나버린 다리에서 분수처럼 피 솟기, 정말 체질상 안 맞아서 사무라이영화 순례는 일찌감치 포기했었는데….

어쨌든 이야말로 장르의 카오스

<킬 빌>에서는 사무라이영화에서 사람 죽이는 모든 장면이 컬렉션되어 보여진다. 심지어 사무라이영화에서 강간을 하다 혀가 동강나는 악당이 있었는데 <킬 빌>에서는 입술이 잘려나간다. 싸우는 모양새는 홍콩 무협영화인데 피가 솟고 죽어 넘어지는 건 일본 사무라이영화다. 그가 인용한 영화들의 냄새는 한결 같다. 아시아인인 우리가 걸작이라고 치부하는 그런 영화들이 아니라 좀 재미없어하던 아류작들뿐이다(우 탕 클랜이라는 미국에서 무협화를 파는 곳이 있다. 그곳의 리스트 대부분은 70년대 말 80년대 초, 정말 재미없어하던 아류 모방작들투성이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우리나라의 왕호와 거룡이 주연인 한국영화도 홍콩영화로 둔갑되어 있었는데 미국 애들 취향이 그런 건지 아니면 싼값에 그런 영화들만 수입했는지 모를 일이다).

또 하나 놀라웠던 것은 청엽옥 난전의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 갑자기 존 포드 유령이 출몰한다. 거구의 북군 장교 존 웨인이 총을 들고 부들부들 떠는 남군 소년병의 총을 빼앗아 엉덩이를 발로 차며 집에 가서 엄마 젖 더 먹고 오라는 장면이 있었다. <킬 빌>에서는 대사도 틀리지 않고 인용된다. 이거야 정말 카오스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쇼브러더스 영화들보다는 70년대 중반 이후 이소룡 붐 때문에 미국에 수입된 무협영화들과 일본 사무라이영화들만을 보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타란티노의 취향이 내가 정말 모르는 독특함 때문에 그런 이류 무협영화들만 가지고 혼성모방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킬 빌>이 재미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점 때문에 나에게 <킬 빌>은 흥미롭다. 내가 광적으로 빠져들었던 그 세계를 타란티노가 대상화하여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도 기술적으로 너무나 훌륭하게(우마 서먼이 탁자 위로 올라서는 장면에서 나는 경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시아영화들에서 대충 찍었던 저런 장면을 저렇게 균질하게 잡아내다니!).

홍콩영화에서 서양인들이 우스꽝스럽게 중국말을 하고 좀 비틀거리며 발차기를 하던 때가 있었다. 흑인들이 어쩡쩡하게 태권도를 흉내내는 그런 영화들도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아시아인들이 기억 저편으로 치워버렸던 불균질덩어리 영화들을 들고 미국인이 돈 벌려고 날아들었다. 홍콩과 한국의 무협영화들을 불균질덩어리로 만들던 라스트 30분 대격투라는, 흥행카드가 될지 아니면 악몽의 카드가 될지 모르는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이거야 정말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래도 난 유가휘가 흰 수염을 날리는 사부님으로 나오는 2편이 보고 싶다. 빨리빨리….




매혹적 액션영화 <킬 빌>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
세상 모든 복수담 모아 재창조한 <킬빌>
매혹적 액션영화 들고 온 쿠엔틴 타란티노를 도쿄에서 만나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6년 만에 새 영화를 만들었다. 이소룡의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우마 서먼의 사진만으로도 이미 범상치 않았던 영화 <킬 빌>이다. 인용한 영화는 세다가 지칠 정도고,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장르도 빠짐없이 들어갔다. 그러나 <킬 빌>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도 한 계단 도약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내가 만든 첫 번째 액션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타란티노를 만났다. - 편집자  도쿄=김현정 para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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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동반한 검객>에서 칼에 벤 사무라이는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건 추운 겨울 찬바람이 스치는 소리군. 항상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사무라이의 상처에서, 뿜어져나오는 핏줄기가 서걱거린다. 사막 같았던 그 비장미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이미 30년 전에 사라진, 피묻은 원한은 피로 갚아야만 하는 세계. 쿠엔틴 타란티노는 검을 든 두명의 여전사를 눈밭에 세워 바로 그 세계를 현재로 이끌어냈다. 그의 네 번째 영화 <킬 빌>은, <타임>의 표현에 따른다면, “가장 순수하고 영화적으로 독창적이었던 옛 영화들을 재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도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한” 영화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과 마카로니 웨스턴, 사무라이영화, 쇼브러더스의 쿵후영화가 <킬 빌>의 여정을 따라 몸을 섞는다. 세상 모든 복수담이 여기에 모여, 한편의 매혹적인 액션영화가 되었다.
<킬 빌>은 타란티노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그는 지금까지 시간과 공간이 뒤엉키는 복잡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대사는 폭포처럼 거셌고, 편집은 조급하게 달음질쳤다. 그러나 <킬 빌>은 면사포 아래 짓뭉개진 신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첫 장면부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낸시 시내트라가 쓸쓸한 어조로 부르는 <뱅뱅>, 검은 실루엣으로 떠오르는 코마 상태의 여인, 4년 만에 깨어나 뱃속에 있어야 마땅한 아기를 찾는 다급한 몸짓, 납작해진 배를 쥐고 터져나오는 통곡. 그 순간 <킬 빌>은 무고하게 죽은 아홉명의 목숨을 보상받으려는 처절한 복수극으로 나가려는 듯 보이지만, 곧 짧게 챕터를 끊어가면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찬란한 원색과 텍사스의 나른한 냉소로 옮겨간다. 도대체 이건 무슨 영화인가. 타란티노에게 <킬 빌>은 “앨범으로 치면 그레이트 히트 앨범”이다. 그는 여전사와 복수라는 기둥 두개를 박아두고선 숱한 애창곡들로 그 사이에 그물을 쳤다.

센 영화, 그 핏빛의 미학

타란티노는 친구들에게 듣고서야 알았다지만, <킬 빌>은 이미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다. 코넬 울리히의 추리소설을 프랑수아 트뤼포가 연출한 <검은 옷의 신부>는 결혼식장 앞에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신부가 차에 탔던 사람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내용이다. <킬 빌>도 외양은 비슷하다. 살모사 암살단의 킬러였던 브라이드(우마 서먼), 코드명 블랙 코브라는 텍사스 엘파소로 달아나 결혼식을 올리려 한다. 그러나 보스 빌과 옛 동료 네명이 들이닥쳐 식장 안에 있던 사람 전부를 죽이고, 빌의 아이를 배고 있던 브라이드의 머리를 총으로 쏜다. 브라이드는 코마 상태에서 4년을 보낸 뒤 깨어나 복수를 시작한다.

200페이지가 넘는다는 시나리오의 정체가 궁금해질 정도로 <킬 빌>은 단순하다. 최소한 1편만은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다는 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타란티노는 브라이드가 복수 대상 리스트에 오른 다섯명을 찾아갈 때마다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살모사 암살단원을 여기저기 흩어놓고, 관객에게 “브라이드와 함께 멀티플렉스 사이를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어했다. 그 때문에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은 브라이드가 리스트의 이름 하나를 지울 때마다 새로운 스타일을 고민해야 했다. 타란티노가 그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인에게 상처받은 청년 같은 표정”을 짓곤 했으므로. 1편에서 그 절정은 청엽옥의 전투였다. 도쿄 암흑가의 여왕 이시이 오렌(루시 리우)은 수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것이 당연했다. 컴퓨터그래픽을 싫어하는 타란티노는 일 대 백에 달하는 그 난투극을 찍느라 <펄프 픽션>의 전체 촬영기간 10주에 육박하는 8주를 소비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가 원한대로 청엽옥 전투는 “<지옥의 묵시록>의 헬리콥터 장면이 전쟁영화에서 차지하는 것과 같은 위치”를 액션영화에서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컷 한컷을 모두 언어로 폭로한다고 해도, 그 피바다는 눈으로 확인해야만 진가를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일본을 제외한 국가의 관객은 붉은 피보라를 모노크롬으로 탈색한 흑백 버전을 보게 될 것이다. 타란티노는 아시아 관객을 위해 청엽옥을 컬러로 촬영했지만, 눈알이 뽑혀나가고 발목이 잘리는 장면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청엽옥 전투는 <금연자> <복수> <외팔이 검객> 등이 보여준 장철의 잔인한 사지절단 액션에 분수 같은 피를 사랑하는 사무라이영화의 관습을 더했다. 전선과 전선이 만나 불붙는 하얀 불꽃처럼, 처절한 핏방울이 튀어오르는 것이다. 전투의 대미, 칼날에 찢긴 오렌의 흰 기모노 위에 흐르는 일본 노래는 <학살의 꽃>이다.



"앨범으로 치면 그레이트 히트 앨범"

인터뷰 도중 오마주라는 단어를 수없이 언급한 타란티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영화들에서 버나드 허먼과 퀸시 존스, 아이작 헤이즈,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가져와 인용했다. 그것은 쇼브러더스가 좋아한 방법이었다. 타란티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골랐다는 이유에 덧붙여 이렇게 설명한다. “<구>는 <샤프트> 테마를 썼고, <태권진구주>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테마를 썼다. 저작권은 사지 않았다. 어차피 작곡가들은 알지도 못했을 테니까. <구>의 음악은 원작보다도 멋있어서 몇번을 듣고 싶어질 거다.” 타란티노가 <킬 빌>을 그레이트 히트 앨범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비유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명인 하토리 한조가 브라이드에게 일본도를 선물하는 장면에는 마카로니 웨스턴과 함께해온 엔니오 모리코네의 선율이 깔린다. 비정하고 차갑지만 지켜야 할 계율이 있는 전사들, 혹은 총잡이들이 국경을 넘어 하토리 한조의 다다미방에 발을 딛는 듯하다. 그러나 넘친다 싶으면, 타란티노는 음악을 걷어낸다. 오렌이 마지막 말을 남기는 대목에서 들리는 거라곤 겨울 바람소리와 딸그락거리는 수통 소리뿐이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의 사무라이가 들었던 세상 마지막 소리를, 오렌도 들으면서 쓰러진다.

타란티노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날마다 영화 한편을 필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한데 얽혀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펄프 픽션>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복수에 나선 여전사를 떠올렸을 때, 그 머리 속에는 하나의 목록이 타이핑되고 있지 않았을까. 타란티노는 수많은 복수극들을 참고했고, 그 절절하면서도 무자비한 정서를 <킬 빌>에 누벼넣었다. 타란티노가 아는 영화의 여인들은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다. 어느 부모는 매음굴에 팔려간 딸을 보고 절망해서 목숨을 끊는다, 남편은 살해당하고 자신은 강간당한다, 낭인들에게 살해당하는 부모를 지켜본다, 그러나 모두들 살아남아 복수를 한다. 이 사연들이 피눈물을 모아 애니메이션 파트 <오렌의 족보>에 흩뿌리는 것이다. 오렌은 아홉살 때 일본도가 아버지의 몸을 바닥에 못박는 걸 보았고, 침대 밑에 숨어 침대 위에서 죽은 어머니의 핏방울을 맞았다. 2년 뒤 그녀는 원수를 갚고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피를 음미하면서 웃는다. 오렌의 과거를 설명하는 브라이드의 내레이션은 다소 코믹하지만, <킬 빌>은 이처럼 미국인으로서는 쉽게 터득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브라이드의 사부로 출연하는 액션스타 고든 리우는 “쿵후 동작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은 당신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말했다. 타란티노는 쿵후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존중하는 법을 익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존중하면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타란티노는 <킬 빌>을 단 한컷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은 세 시간 넘는 액션영화를 시장에 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킬 빌>을 두편으로 나누어 개봉하기로 결정했다. <킬 빌> 2편은 내년 2월 미국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한때 브라이드의 연인이었던 보스 빌이 얼굴을 보여주고, “모종의 이유로 밝힐 수 없었던” 브라이드의 진짜 이름을 알 수 있고, 타란티노가 능숙하게 써내려간 좀더 많은 대사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전해지는 소문이다. 넉달간 기다리는 일은 지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킬 빌>은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는 격언으로 시작한다. 그 경구는 <킬 빌> 2편을 기다리며 몸달아하는 관객에게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듯하다.


“기모노 의상 제 고집이었죠”
도쿄에서 만난 이시이 오렌 역의 루시 리우
<타임>은 “<킬 빌>은 이시이 오렌에 관한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열한살 나이에 부모를 죽인 남자의 배를 가른 오렌은 그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눈밭에 선 루시 리우의 차가운 자태가 없었다면 그 매력은 조금 힘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킬 빌>에서 입은 흰 기모노의 안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세탁소에 가 있답니다. 피가 많이 묻었거든요”라고 농담을 던진 루시 리우는 또박또박하고 진지한 대답들을 들려주었다.

<킬 빌>은 일본 사무라이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오렌과 브라이드가 눈쌓인 정원에서 대결하는 장면에도 그 정신이 녹아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렌은 검을 뽑기 전에 신발을 벗고 눈을 밟는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 사무라이 정신이 드러나는 의식이다. 오렌은 브라이드를 동등한 전사로서 존중하고, 그녀의 복수심을 인정한다. 오렌 역시 부모를 살해한 야쿠자에게 복수를 했기 때문이다. 오렌과 브라이드는 같은 조직에 속한 킬러였으므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 오렌은 상처를 입은 뒤 “너를 비웃었던 걸 사과한다”라고 말하고, 브라이드는 “그 사과를 받아주마”라고 대답한다. 전사로서의 명예와 자존심이 배어나오는 대화다. <킬 빌>에는 또 하나 중요한 대사가 있다. 오렌은 죽기 직전 “하토리 한조의 검이 맞구나”라고 중얼거린다. 하토리 한조는 검의 명인이다. 오렌은 다른 무엇도 아닌, 명인이 만든 검에 의해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와는 처음으로 같이 일했다. 그와 작업한 느낌은 어땠는가. =타란티노는 열정적인 감독이다. 그는 무술 훈련에도 동참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직접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는 또한 배우의 의견을 들어주는 감독이다. 타란티노는 오렌이 남자아이 교복을 입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오렌이 여성적으로 보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기모노를 입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타란티노는 처음엔 거부했지만, 긴 대화를 통해 내 제안을 받아들여주었다. 이건 감독으로선 큰 양보일 수 있다. 나도 고집이 센 편인데 타란티노에게서 열린 마음을 배웠다.

<킬 빌>에는 오렌의 과거가 담긴 애니메이션이 들어 있다. 그 애니메이션이 연기하는 데 영향을 주었는지. =오렌은 사악한 여인이지만,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었다. 오렌은 어린 시절에 참혹한 일을 겪었다. 그걸 바탕으로 나는 좀더 풍부한 감정을 가진 캐릭터를 구축했고, 관객 역시 그녀를 단지 악마로만 보진 않을 거다.

<미녀 삼총사> <엑스 vs 세버> 등의 액션영화에서 강한 여성을 많이 연기했다. <킬 빌>과 당신의 전작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페이백> <미녀 삼총사> <엑스 vs 세버>는 재미있고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하지만 <킬 빌>은 성인을 위한, 액션에 섬세한 감정이 배어 있는 영화다. 머리 꼭대기만 잘리는 장면처럼 코믹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명예와 존경, 자긍을 표현해야 했다.



우마 서먼 포스터 붙여놓고 ‘아~뵤’
도쿄에서 만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도쿄=김현정 parad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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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는 헐렁한 검은 티셔츠와 검은 반바지 차림으로 나타났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탔던, 어느덧 불혹에 이른 감독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타란티노는 함부로 입은 듯한 그대로가 편안해 보였다. 인터뷰도 비슷했다. 그는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길고도 분방한, 가끔은 어긋나기도 하는 답변을 수다스럽게 늘어놓았다. <킬 빌>이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저 영화광처럼 느껴지는 그 모습이 변할까 싶었다. 영화 만드는 일을 ‘모험’(adventure)이라고 표현한 타란티노는 영화 한편이 인기를 얻었다고 해서 그 모험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
<킬 빌> 1편은 브라이드와 오렌, 두 여전사를 중심으로 내세운다. 미국 액션영화로서는 드문 경우인데, 어떻게 이런 착상을 하게 됐는가. = 나는 일본영화와 홍콩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많이 보기도 했다. 쇼 브러더스가 제작한 쿵후영화나 일본 사무라이영화는 여성에게 비중있는 역할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여전사는 미국에선 낯선 개념이지만, 동양에선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한 그런 부분들을, 여전사가 존재하지 않는 미국영화에 가져오고 싶었다. 또 하나 이유가 있다면 내가 여성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성에게 힘을 부여하는 영화, 그들에게 영감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열서너살 먹은 소녀들이, 남자아이들이 슈퍼히어로 포스터를 벽에 붙여놓듯, 우마 서먼의 포스터를 붙여놓고 저렇게 강한 여자가 됐으면 하고 꿈꿀 수 있도록 말이다. 우마 서먼이나 루시 리우, 구리야마 치아키(오렌의 소녀 보디가드 고고)는 그 아이들에게 쿨한 모범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당신은 <킬 빌>을 올해 1월 타계한 후카사쿠 긴지 감독에게 바쳤다. <의리 없는 전쟁> <배틀로얄> 등을 포함하는 그의 영화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 1992년 <저수지의 개들>을 홍보하기 위해 일본에 왔을 때 후카사쿠를 처음으로 만났다. 얼마나 큰 행운이었겠는가.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그런데 막 갱스터영화를 만든 젊은 감독이 나이든 거장을 만나 질문을 퍼부을 수 있었다니! 그뒤 후카사쿠와 나는 12년 가까이 우정을 유지해왔다. 우리는 내가 일본에 올 때마다, 혹은 후카사쿠가 LA에 올 때마다 만났고, 소니 치바와 셋이서 팜스프링스에서 주말을 보낸 적도 있다. 그 무렵 후카사쿠는 미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는 아시아영화들의 영향을 받아 <저수지의 개들>을 만들었고, 그건 조금도 고치지 않고 홍콩영화라고 소개해도 누구나 믿을 만한 영화였다. <저수지의 개들>에는 다카쿠라 겐이나 소니 치바가 출연한 야쿠자영화의 흔적도 있었는데, 후카사쿠 긴지가 바로 일본 야쿠자영화와 그 스타일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감독이었다. 지금은 시네마테크들이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를 발견해서 미국에 소개하고 있다.


 
<배틀로얄>에서 영감

<킬 빌> 역시 후카사쿠 긴지의 그늘 아래 있는 영화인가. = 영화를 봐서 알겠지만, <킬 빌>은 부모라고 부를 만한 영화목록이 무척 길다. (웃음) 후카사쿠 긴지의 <검은 도마뱀>은 오렌의 캐릭터를 만들면서 참고한 영화이고 액션장면을 연출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영화는 <배틀로얄>이었다. <배틀로얄>은 최근 5년 동안 나온 영화들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라고 부를 만하다. 나는 <배틀로얄>을 보면서 <킬 빌>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특정한 장면이나 캐릭터를 인용한 건 아니고, 영감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다. 후카사쿠는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는 내가 건네준 시나리오를 읽고 코멘트를 달아주었고, 기술적인 부분, 특히 프로덕션디자인과 코스튬디자인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구리야마 치아키를 소개해준 사람도 후카사쿠였다. 지금 이렇게 일본에 왔는데, 후카사쿠는 세상을 떠나 이 영화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다.

일본과 홍콩의 액션영화는 서로 스타일이 다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의 영화들을 어떤 식으로 <킬 빌>에 담았는가. = 미국에서는 홍콩 쿵후영화를 올드스쿨 쿵후라고 부른다. 언뜻 보기에 사무라이영화와 비슷한 것 같지만, 이 두 장르는 서로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나는 <킬 빌>을 만들면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동전을 던지면 앞면과 뒷면이 교차하지 않는가. 그처럼 코미디와 드라마를 섞고 여러 가지 스타일을 적용하고 다양한 감정을 녹이고 싶었다. 예를 들면, 홍콩 쿵후영화는 전투장면나 엔딩신이 너무 길어서 처지는 실수를 하곤 한다. 청엽옥 전투는 그런 단점을 보완해 다양한 스타일과 비주얼을 섞은 장면이었다. 브라이드는 제일 먼저 오렌의 부하들인 ‘죽음의 88인회’와 사무라이 스타일로 싸우고, 고고와는 재패니메이션 스타일로 싸운다. 그 다음은 100여명의 야쿠자와 브라이드가 맞붙는 장면이다. 100 대 1의 싸움은 쇼 브러더스의 전매특허나 마찬가지라서 그 스타일로 찍었지만, 청엽옥이 일본 건물인 탓에 일본적인 비주얼과 조화를 이루는 문제가 중요했다. 마지막 눈내린 정원에서 오렌과 단둘이 벌이는 결투는 고전적인 사무라이영화 스타일에 동화적인 분위기를 더했고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을 섞었다.

오렌의 과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지. = 나는 대단한 애니메이션 팬이다. <킬 빌>은 내 열정에 따라 마음에 드는 영화를 이것저것 넣어보고 싶었다. 큰 냄비에 스튜를 끓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인 <공각기동대>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를 제작한 프로덕션 I. G.를 찾아갔다.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르니까 시나리오를 주고 한컷 한컷 설명하면 그들이 캐릭터와 콘티를 그리는 식으로 일했다.


2편에는 한국인 캐릭터도 등장

<킬 빌>은 당신의 영화 중에서 개봉 주말 성적이 가장 좋았다. 폭력의 수위가 높아서 R등급까지 받았는데, 관객이 <킬 빌>의 어떤 점을 좋아했을까. = 미국 관객은 <킬 빌>처럼 와일드하고 동양적인 정서를 가진 액션영화를 접해본 적이 없다. 미국 언론은 이 영화를 센세이션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낯선 액션 스타일이지만, 미국적인 감각으로 소화했기 때문에 흥행에 성공한 것 같다. 재미있게도 <킬 빌>은 첫주 관객의 40%가 여성이었다. 미국 여성 관객은 폭력적인 영화를 즐겨보지 않지만 이번에는 강인한 여전사들에게 끌린 모양이다. <킬 빌>의 여전사들은 전사로서의 신념과 명예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들은 진정한 전사다. 귀여운 여자들이 나와 몸에 붙는 옷을 입고 키득거리는 <미녀 삼총사>와는 다르다. 아마 아시아에서는 <킬 빌>을 다른 방식으로, 좀더 대중적인 영화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시아는 폭력을 다루는 영화에 익숙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전사들의 전통도 있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의 시각 차이를 드러내는 재미있는 예가 하나 있다. <저수지의 개들>에서 위장수사 중이었던 형사 팀 로스는 경찰이 습격하기 전에 조직의 일원인 하비 카이틀에게 자신의 신분을 고백한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비 카이틀은 그를 선의와 명예로 대했기 때문이다. 서구 관객은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한 거죠? 그런 말을 뭐하러 한 거죠?”라고 묻곤 했지만, 아시아에선 누구도 그런 걸 궁금해하지 않았다.

당신은 동양의 액션영화에 관심이 많다. 혹시 한국 액션영화도 본 적이 있는가. =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손가락>은 미국에서 처음 개봉한 쿵후영화 중 하나였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이다. 하지만 내가 좀더 좋아하는 한국 감독은 황풍(타란티노는 ‘홍펭’이라고 발음했지만, 황풍은 왕펑이라는 광둥어 이름 혹은 황펑이라는 만다린 이름으로 활동했다)이다. 황풍은 골든하베스트 소속이었던 여배우 모영(1970년대에 주로 활동했고 무술 실력이 뛰어났던 여배우. 이소룡의 <용쟁호투>, 정창화 감독의 <파계> 등에 출연했다)과 자주 일하면서 <태권진구주> <철장선풍퇴> 같은 액션영화들을 찍었다. 내용은 주로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에서 중국인과 한국인들이 함께 일본에 저항하는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홍콩 액션영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황풍이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건 70년대 미국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감독이 흑인이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런 흑인 감독은 없었다.

당신은 우마 서먼이 출산할 때까지 기다려서 <킬 빌>을 찍었다. 서먼은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처럼 보인다. 그녀는 U라는 이니셜로 <킬 빌>의 캐릭터 작가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우마 서먼과 나는 친밀하고 다정한 사이다.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내가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거다. 우마 서먼은 <킬 빌>을 촬영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다른 영화를 찍을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비슷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왜 당신 영화에 나오면 내가 더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더 나아보일까라고. 나는 내가 당신을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킬 빌> 홍보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려던 계획이 취소됐다. 혹시 2편이 개봉하면 한국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 아직 2편을 완성하지 못해 한국에 갈 수 없었다. LA로 돌아가서 후반작업을 해야 하니까. 지금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펄프 픽션>이 가장 먼저 개봉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에 꼭 가고 싶다. <킬 빌> vol.2에는 LA의 코리아타운도 나오고 중요한 한국인 캐릭터도 등장할 거다.



너에게 오마주를 날려~ - <킬 빌>이 참고한 영화목록
쿠엔틴 타란티노는 <킬 빌>을 스튜를 끓이는 것처럼 만들었다고 했다. 무엇으로 끓였는지 모른다고 해서 스튜 맛이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어떤 희귀한 재료가 들어갔는지 안다면 감회는 각별할 터다. 이것은 아마도 길고도 긴 타란티노의 레시피 목록 중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순서는 가나다순이다).

<검은 도마뱀> 후카사쿠 긴지의 1968년작으로 괴도 검은 도마뱀의 활약을 그린 영화다. 오렌이 ‘죽음의 88인회’를 이끌고 도쿄를 활보하는 모습은 숱한 범죄자들을 거느렸던 검은 도마뱀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이 영화는 인기가 많아서 <흑장미의 관>이라는 외전을 낳기도 했다. 에도가와 람포 원작을 미시마 유키오가 희곡으로 각색한 작품.


<사무라이 픽션>  
<아들을 동반한 검객>  
<코피>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그들은 그녀를 애꾸라 부른다> 원제가 < Thriller - en grym film >인 이 스웨덴 영화는 매음굴에 팔려간 소녀가 스스로 복수에 나서는 성인영화다. 타란티노는 안대를 한 주인공의 모습에서 엘르 드라이버(대릴 한나)를 발견했다. 그는 대릴 한나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었지만, 한나는 “아니, 이거 포르노잖아요!”라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타란티노는 그녀에게 “그래도 좋은 포르노인걸요”라고 답했다.

<그린 호닛> ‘죽음의 88인회’가 쓰고 다니는 검은 마스크는 1966년 제작된 TV시리즈 <그린 호닛>에서 가져왔다. 동양 액션영화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그린 호닛>은 평범한 청년이 마스크를 쓰고 범죄집단과 맞서는, 대부분의 슈퍼히어로영화와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쿵후의 달인인 일본 청년 가토가 보조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영화화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시리즈.

<그림자 군단> 1980년대에 방영된 TV시리즈. 타란티노는 이 시리즈를 LA에 있는 일본 방송사를 통해서 봤고, 열광적인 팬이 되었다. 오렌은 <그림자 군단> 네 번째 시리즈에 등장하는 여성 닌자. 그는 오렌이 “매우 일본적이지만, 그리 흔하지는 않은 이름”이어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소니 치바가 주인공 하토리 한조를 연기했는데, 이것은 브라이드에게 일본도를 만들어주는 명인의 이름이다.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뱀파이어 소녀 사야는 세일러복을 입고 일본도를 휘두른다. 교복을 입고 일본도로 보스 마쓰모토의 배를 가르는 어린 오렌을 보면 그녀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고고도 사야를 보고 만든 캐릭터. <킬 빌> 애니메이션 파트를 담당한 프로덕션 I.G가 제작했다.

<사무라이 픽션> 청엽옥 전투에는 푸른 배경 위에 브라이드와 야쿠자들의 실루엣만 보이는 장면이 있다. 배경을 붉은색으로 바꾸면 <사무라이 픽션>과 똑같다. 타란티노는 <사무라이 픽션>을 봤지만, 골든하베스트와 쇼브러더스의 쿵후영화 오프닝 크레딧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강렬한 색채의 배경 위에서 실루엣만으로 쿵후를 보여주다가 음악으로 넘어갔다.”

<수라설희> 주인공 유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뒤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남은 소녀. 오렌의 캐릭터와 정원의 결투에 영향을 끼쳤다. 주연 가지 메이코는 주제가 <학살의 꽃>을 직접 불렀는데, 타란티노는 오렌의 마지막을 위해 이 노래를 가져왔다.

<신 의리없는 전쟁> 사카모토 준지가 감독한 이 영화에서 호테이 도모야스는 주연과 음악을 겸했다. 오렌과 브라이드가 눈쌓인 정원에서 대결할 때 처음 깔리는 빠른 비트의 음악은 호테이 도모야스가 작곡한 이 영화의 테마. 호테이 도모야스는 철없는 젊은이들이 복수하겠다고 쫓아다니는 <사무라이 픽션>의 검술 고수 카자마스리이기도 하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 <킬 빌>은 호스를 꾹 눌렀을 때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가 난무하는 영화다. 타란티노는 이런 설정이 미스미 겐지가 감독한 <아들을 동반한 검객> 시리즈를 재현한 거라고 했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은 한때 쇼군의 호위무사였던 오가미가 유모차에 태운 어린 아들과 함께 방랑하는 이야기. 사지를 절단하고 신체를 반으로 쪼개는 잔인한 장면이 많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처럼 “칼을 맞은 사무라이가 피를 흘리면서도 고통스럽게 서 있다가 쿵하고 쓰러지는” 걸 찍고 싶었다고 한다.

<직격! 지옥권> 이시이 데루오는 이시이 다카시와 함께 타란티노가 존경하는 두 ‘이시이’ 중 하나다. 그가 감독하고 소니 치바가 출연한 <직격! 지옥권>에는 한 남자가 적을 피해 천장에 몸을 밀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오렌에게 존재를 들킨 브라이드가 몸을 숨기는 대목에 인용됐다.

<천하제일권> 브라이드가 적들을 만나 아픈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사이렌 소리와 비슷한 음악이 울린다. 이 음악은 퀸시 존스가 TV영화 <아이언사이드>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 <아이언사이드>는 총에 맞아 은퇴한 형사가 백의종군하면서 범죄자들과 싸우는 영화. 그러나 라열이 출연한 홍콩영화 <천하제일권>은 이 음악을 무단도용했고, 타란티노는 <아이언사이드>가 아닌, <천하제일권>을 기리면서 이 음악을 사용했다.

<코피> 브라이드가 제거 대상 2호로 올려놓은 흑인 킬러 버니타 그린(비비카 A. 폭스)은 팸 그리어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캐릭터다. 팸 그리어는 <코피> <폭시 브라운> 등에 출연했던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의 여신. 타란티노는 <재키 브라운>에 그녀를 모셔와 경의를 표한 바 있다.

<쿵후> 미국인들이 홍콩 액션영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태어난 TV시리즈. 스승의 복수를 하고 미국으로 도망온 소림 고수가 등장한다. 소림승을 연기해 쿵후영화의 아이콘이 되었던 데이비드 캐러딘은 <킬 빌>에 살모사 암살단의 보스 빌로 출연했다.

<하니 클로더> 타란티노는 “<하니 클로더>는 복수를 테마로 삼은 영화 중에서 최고작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이 영화에서 섹스 아이콘 라퀠 웰치는 그녀의 남편을 살해하고 그녀를 강간한 세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격술을 배운다. 사격술을 가르치는 사람은 현상금 사냥꾼 토마스 프라이스(로버트 컬프). 타란티노는 “브라이드와 하토리 한조의 관계는 하니와 토마스의 그것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홍희관> 라열과 유가휘(고든 리우)가 출연한 쿵후영화. 라열은 사악한 정부관리와 함께 소림사를 불태우려는 악당 파이 메이로 등장했다. 페이 메이는 <킬 빌> 2편에서 모습을 드러낼 브라이드의 사부 이름. 라열 대신 고든 리우가 파이 메이를 연기했다. 타란티노는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고든 리우를 캐스팅한데 감격했는지, 1편에선 그에게 오렌의 심복 자니 모까지 맡겼다.

<흡혈귀 고케미드로> 사토 하지메가 연출한, 외계에서 온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영화. 브라이드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도쿄는 이 영화가 사용했던 미니어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