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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랭, 너 뭐냐?

나/ㅏ 2007. 2. 9. 17:44 Posted by 로드365

정치분야에 정치자영업자들이 있다면, 미술계에는 낸시 랭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중.
범수 아저씨가 영화에서 그랬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고.
어쨌든 화이링~~





난 낸시랭의 작품이 예술인지 쓰레기인지는 관심이 없다. 단지 이 여자의 '기존 관념 뽀개기'가 마음에 든다. 더욱더 존재감을 드러내고 대중에게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가 돼주길 바란다.

신디 셔먼이나 이윰처럼 자신을 오브제로 삼아 작품을 생산하던 여성 아티스트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하지만 최근 단순한 육체적 오브제를 넘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작품 활동에 주요 소재로 등장시키는 여성 아티스트들이 하나 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받지 못한 당신은 산마르코 광장에서 빨간색 하이힐에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를 입고 ‘초대받지 않은 꿈과 갈등-터부 요기니’라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 퍼포먼스로 낸시랭은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것이 화제를 뿌리며 당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낸시랭 - “지구촌 전역을 시장으로 삼았던 ‘엄마’덕에 풍요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사업 실패와 아빠의 죽음으로 나의 삶이 갑작스럽게 무너지면서 내가 꿈꾸던 현실도 달라졌다. 우리 집엔 더 이상 돈이 없었고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공부하길 원했던 나의 꿈도 무너졌다. 이 좌절감을 견디지 못해 술을 마셨고, 자살도 생각했지만 가장 밑바닥을 치고 올라오니 무언가 내안에 맑고 명료해지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 아티스트를 <바자> <엘르> 같은 패션지 쪽에서 먼저 주목하고 소개한 것은 드문 케이스다. 다르게 생각하면 예술적 관점을 떠나 당신의 엔터테이너적인 기질이나 쇼비지니스적 가치가 먼저 평가된 것일 수도 있는데...
낸시랭 - “그렇게 생각될 수 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산다는 것은 치열한 혈투와 같다. 나는 고호처럼 사후에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아티스트가 갖는 부가가치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른다. 세속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계에서 인정받는 아티스트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고 싶다. 나는 쇼 비즈니스로서의 미술을 거부하지 않는다.”

- 그렇다면 당신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낸시랭 - “나는 바닥을 한 번 집고 올라온 사람이다. 당시 절망에 빠져 있던 나를 붙잡아 준 것은 나의 꿈이었다. 나는 내 작품, 내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타인들에게 이루지 못한 꿈, 퇴색된 욕망을 이뤄주는 타부 요기니가 되고 싶다. 힘없는 소녀들의 롤 모델이 되어 자신감을 전이시키고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얻은 나를 통해 아트의 긍정적 영향을 전파하고 싶다.”


-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당신의 대중적 성공에 보수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미술계 일부의 시기 질투도 상당할 것 같다.
낸시랭 - 작가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비즈니스 마인드다. 당연한 이친데, 아닌 척 하고 있다. 나는 미술계도 돈이 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자본이 돌아야 또 발전 할 수 있는 희망도 보이는 것이다.”

낸시에게 세상에는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빠, 언니, 선생님 그리고 교수님. 누구든 만나면 팔짱부터 끼고 자신이 직접 제조한 폭탄주를 마시게 하는데, 술을 마시는 동안 남자든 여자든 ‘낸시의 애교 퍼레이드’에서 시선을 놓을 수 없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건배 구호로 “큐티(Cutely), 섹시(Sexy), 키티(kitty), 낸시(Nancy)!”를 외치게 한 뒤 자신은 구호가 끝나면 교태스러운 고양이 소리로 화답했다.

낸시에겐 여성 작가 특유의 자의식이라든가 유식한 여자 특유의 교양 같은 게 없어 보였다. 심지어 어느 대학에 출강까지 한다는 그녀는 대책없이 무식까지 했다. 누군가 “내 생일이 하필 4·19”라고 하자, 낸시는 “4·19가 무슨 날이야?” 하고 묻고는 “생일이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파티를 하자”며 사람들을 졸랐다. 낸시는 여성이라든가 예술가 또는 지식인이라든가 한국인이라는 굴레에서 완전히 초월한 존재처럼 보였다. 대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려는 순진한 열정으로 불탔고, 모든 형태의 문화와 사람들을 찬미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 출처 1 2

낸시랭 홈페이지





-출처 : http://patzzi.egloos.com/1223297




연예인 낸시 랭의 함정
패리스 힐튼의 라이벌이 되기 쉽지 않은 예술가 엔터테이너…대중이 볼 일없는 작품으로 끝없이 권위를 창출해야하는 아이러니

▣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

혹시 연예인이 되고 싶은가? 그런데 아무리 홍익대와 청담동을 돌아다녀도 어떤 프로듀서나 연예기획사 관계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지금부터 이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준비해라. S라인 몸매와 얼짱 외모. 그것만 있어도 당신은 텔레비전에 출연할 수 있다. 외모와 춤이 되면 SBS <진실게임>에 출연할 수 있고, 인터넷에서 섹시한 춤이나 얼굴로 화제가 되면 SBS <있다 없다>와 문화방송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검색 대왕’에 출연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인상적인 모습만 보여준다면 당신은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할 수도 있고, 인터넷 언론은 바로 그 소식을 다룰 것이다. 그 다음? 아마도 당신은 모바일 화보업체로부터 촬영 제의를 받을 것이고, 모바일 화보업체는 정식으로 보도자료를 돌릴 것이다. 농담이 아니다. 거리에서 춤추는 모습이 찍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떨녀’는 이 코스를 그대로 밟아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에도 출연했고, <진실게임>에서 연 4억원을 번다고 해 화제가 된 ‘4억 소녀’와 <있다 없다>에서 단백질 인형 같은 사진으로 출연한 ‘단백질 소녀’도 모바일 화보를 찍었다. 물론 이들이 아직 스타가 되진 못했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요소만 더 갖춰지면 진짜 스타가 될 수도 있다.

캐릭터가 컨텐츠보다 먼저인 대중문화

현영을 보라. 현영이 처음에 연예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S라인 몸매를 자랑하는 각종 화보 사진과 오락 프로그램에서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었다. 그는 연예인이었지만 연기자도, 가수도 아니었다. 다만 텔레비전에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현영의 캐릭터가 점차 인기를 얻자 그는 그 캐릭터 그대로 드라마에 출연하고, <누나의 꿈> 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콘텐츠에서 캐릭터가 생긴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그 캐릭터가 되기 위한 어떤 ‘자산’을 가지고 있느냐가 연예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다. 연기와 노래, 뛰어난 말솜씨 같은 전문 분야의 능력은 그중 가장 가지기 어려운 축에 속하는 것일 뿐, 필수 요소는 아니다. 자신이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어떤 자산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면 유명해질 수 있다. 요즘 슈퍼주니어 같은 아이돌 그룹이 가수로 데뷔했으면서도 각자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일단 눈길을 끌어 캐릭터를 만들어야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낸시 랭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자산을 가진 ‘연예인’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그가 독특한 작품세계를 가진 예술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낸시 랭의 이력이 시작된 베니스 비엔날레의 퍼포먼스는 초청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자의적으로 벌인 것이었고, 그의 작품이 현재 어떤 평가를 받고, 어느 정도의 수익을 내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최근 인터넷에는 그의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연예인으로서의 낸시 랭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낸시 랭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알려질 수 있었지만, 정작 대중이 그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작품보다는 ‘메가패스’ CF나 m.net의 <트렌드 레포트 必> 같은 프로그램을 훨씬 많이 봤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건 그가 기존 예술가의 이미지를 벗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다. 앤디 워홀이 무색하게도, 한국에서 현대미술가는 대중에게 머나먼 존재다. 특히 행위예술은 여전히 ‘전위’라는 말과 통한다. 낸시 랭은 그것들을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접점을 만들어 예술가라는 자산을 가치 있게 이용한다. 그가 종종 벌이는 퍼포먼스는 실제로 그것을 본 사람이 얼마 없거나, 그 완성도가 떨어진다 해도 대중의 관심에 좌우되는 매체의 선택을 받을 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을 거리에서, 각종 행사장에서 노출하고, 비욘세의 를 틀고 자신을 추종하는 ‘리틀 낸시’와 함께 홍대 거리에서 춤을 춘다. 게다가 그는 명품을 찬양하고, 예쁜 옷과 가구를 사랑한다. 즉, 그의 예술행위들에는 포장은 예술이지만 내용물은 사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들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대중이 좋아하는 소비행위와 대중이 보길 원하는 엔터테인먼트가 낸시 랭을 통해 더욱 고급스러운 의미로 거듭난다.

비엔날레와 의류업체가 주는 신빙성?

그가 진행하는 <트렌드 레포트 必>에서는 연상녀-연하남 커플의 애정행각에 대해 인터뷰하는 것이 전부일 때도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낸시 랭은 인터뷰 등에 담긴 의미를 짚어내거나, 그것을 재료로 어떤 예술적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이런 커플을 이루는 남자를 ‘Boy Toy’라고 명명할 뿐이다.


그러면 그게 낸시 랭이란 예술가가 말하는 ‘트렌드’가 된다. 또 연예인이 입는 옷에 관한 이야기도 낸시 랭이 쓰면 꽤나 ‘있어 보이는’ 문화 칼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낸시 랭이 예술가의 타이틀을 통해 뻔하고 속물적인 어떤 대중문화들에 ‘있어 보이는’ 이미지를 덧칠하면서 스스로 대중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엔터테이너가 되려 한다는 사실이다. 낸시 랭이 예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예술가 낸시 랭이 하는 것이 ‘예술’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래서 낸시 랭의 비교대상은 앤디 워홀이 아니라 그가 라이벌이라고 밝힌 패리스 힐튼이다.

패리스 힐튼은 전문적인 연예계 활동을 거의 하지 않지만, 현재 미국에서 그 누구보다 유명한 인물이다. 호텔 재벌 힐튼가의 자식인 그는 대중이 바라는 억만장자의 모든 이미지를 충족시켜준다. 그는 대중 앞에서 아낌없이 벗고, 망가지고, 놀면서 대중의 부자에 대한 열등감과 호기심을 모두 해소해준다. 대중은 그가 망가지는 모습을 통해 부자도 별거 없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그와 함께 드러나는 부유층의 사생활을 통해 그들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킨다. 그는 자신의 자산을 정확하게 엔터테인먼트적 가치로 환산하는 능력을 가졌다. 만약 낸시 랭이 패리스 힐튼처럼 될 수 있다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자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패리스 힐튼과 낸시 랭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을 부를 가진 패리스 힐튼은 그것을 자산가치 삼아 그의 삶 자체를 엔터테인먼트화했다. 실제로 그를 확실히 스타덤에 올린 리얼리티쇼 <심플 라이프>는 그의 사생활에서 오는 이미지를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확대재생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라는 자산을 가진 낸시 랭은 계속 예술 관련 콘텐츠를 발표해야 하고, 그것이 예술계에서 인정받아야 한다. 그것은 그가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예술가의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술가의 ‘권위’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갔다는 사실, 그리고 한 의류업체의 디자이너로 발탁됐다는 사실이 그가 말하는 ‘트렌드’라는 것의 신빙성을 더한다. 실제로 대중이 그가 발표한 작품을 전혀 보지 못하더라도, 그는 계속 예술작품을 만들어내야 텔레비전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아이러니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현재 한국 대중문화계의 독특한 상황을 보여준다.

예술가 이미지마저 뒤엎을 순 없나

만약 낸시 랭이 정말 예술가의 자산을 가진 채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생산하고 싶었다면, 그는 자신의 삶 자체로 예술가의 이미지를 뒤엎는 엔터테인먼트를 보여줬어야 한다. 명품을 사는 걸 좋아하고, 자신이 속물적인 사람임을 숨기지 않는 그는 예술의 의미에 대한 논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고, 그가 벌이는 모든 해프닝이 고상한 예술가에 대한 대중의 은근한 반감을 자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명품 핸드백을 사고서 “명품 핸드백을 사는 것은 최고의 예술행위”라며 아무 생각 없는 듯이 웃고 있는 낸시 랭을 생각해보라.


그게 바로 풍자고 엔터테인먼트 아니겠는가. 하지만 낸시 랭이나 그의 예술행위를 두고 진짜니 사기니 하는 평가를 내리는 대중이나 누군가 콘텐츠를 만들지 않고도, 혹은 그 창작행위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가 된다는 사실은 부정한다. 심지어 S라인 몸매와 얼짱, 심지어는 4억원을 번다는 사실마저도 연예인 데뷔의 수단이 되는 이 시점에도 말이다. 그래서 낸시 랭의 앞으로의 행보는 한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가 지금의 방향을 고수하는 한, 낸시 랭은 서울대 중퇴에 사업으로 천문학적인 금액의 투자를 받아 화제가 됐다가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돼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 유밀레처럼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는 객관적인 팩트나 평가가 존재하기 어려운 예술적 능력이 자산이기에 유밀레보다는 나은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지금의 유명세에 어울리는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예술가 낸시 랭뿐만 아니라 연예인 낸시 랭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그가 자신이 가진 예술가의 이미지를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제대로 쓸 수 있다면 그는 작품활동과 별개로 대중이 가지고 있는 예술가에 대한 욕망들을 충실히 채워주고, 패리스 힐튼이 자신의 부유함으로 엔터테인먼트를 보여줬듯 예술가라는 직업만으로도 엔터테인먼트를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낸시 랭이 좋은 예술가인지는 알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중은 이런 것들에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다만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다. 요즘처럼 무엇이든 재밌으면 연예계로 끌어들이는 때는 더욱 그렇다. 누구도 그걸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예술이건 엔터테인먼트건 ‘있는 척’하는 사기가 된다.



미술은 쇼비즈니스다!

공주병 아티스트, 사랑스런 애교덩어리, 예술계의 뉴스메이커 낸시 랭과의 만남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그동안 아티스트 낸시 랭이 구축한 이미지를 선정성이라 단정하기는 쉽다. 비키니 차림으로 관객들에게 오일을 달라고 하며 노래방 기기에 맞춰 <보랏빛 향기>를 부르는 퍼포먼스는 그야말로 ‘애교’다. 모피코트를 입고 무대에 올라 남자 모델들의 옷을 벗기고 그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한 클럽 매거진 창간호에 실린 화보에서 낸시 랭은 매맞는 아내와 가정주부, 술집 아가씨 등으로 분해 ‘팜므파탈’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어쩌면 ‘낸시랭닷컴’(www.nancylang.com)에 쏟아지는 대중들의 수근거림을 은근히 즐기는 ‘공주병 아티스트’인지도 모른다.

“서울을 파리 같은 예술의 메카로”


△ (사진/ 박승화 기자)

사실 낸시 랭만큼 현대 미술의 화두를 충실히 따르는 아티스트도 드물다. 미술로 인간의 감각을 해방시키고 행복을 안겨주는 데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의 퍼포먼스 혹은 전시 오프닝 행사에서 요란한 환영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속살’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통의 기법을 타파하고 예술의 사회성을 부여하는 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려 할 뿐이죠. 그런데 보는 사람들이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 같아요. 때론 저도 몰랐던 부분을 깨닫게 되긴 해도 의도한 것들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비난하는 목소리도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애당초 2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낸시 랭을 주목한 매체는 패션잡지였다. 그녀는 그때 산마르코 광장에서 란제리에 하이힐 차림으로 초대받지 않은 자로서 ‘꿈과 갈등-터부 요기니’라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뿌렸다. 그러다 지난해 4월 <한겨레21>의 ‘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에 ‘그 예술가, 애교덩어리!’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1년여 동안 낸시 랭의 행보는 사소한 일상사까지 온갖 매체에 노출됐다. 심지어 ‘강한 여성’을 뜻하는 신조어 ‘콘트라섹슈얼’(contrasexual) 모델로 지난 4월22일부터 케이블 여성채널 ‘온스타일’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싱글즈 인 서울 3-콘트라섹슈얼>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쯤 되면 풍기문란식 ‘사고’로 대중을 모으고, 저돌적인 ‘애교’로 대중을 껴안은 아티스트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기존 상식에 도전하는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보여줬다거나 플럭서스(Fluxus) 활동가로 반문화적인 전위운동에 나섰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가 선보이는 여성성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설치작가 이불이 남성적 시각으로 재단된 여성성을 주체적 시각에서 괴기스럽게 표현해 비평을 유도하고 퍼포먼스 작가 이윰이 자신을 포장해서 환상 속의 요정으로 거듭났다면, 낸시 랭은 여성성을 무기로 삼아 적극적으로 쇼비즈니스에 나선다는 것이다.


△ 낸시 랭의 퍼포먼스는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초대받지 않은 자의 꿈과 갈등' 을 선보이면서 시작됐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훌륭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그것을 인프라로 삼아 부와 명예를 얻어 낸시 랭 재단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서울을 런던과 파리 같은 예술의 메카로 만들어야죠.” 이것이 쇼비즈니스를 향한 낸시 랭의 예술적 화두다. ‘문화적인 삶’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로 만들기 위해 아티스트로서 엔터테인먼트를 팔고 있는 셈이다. 그에게 ‘문화의 오락화는 문화적 죽음’이라는 말은 들리지 않을 게 뻔하다. 미국에서 태어나면서 얻은 본명 ‘낸시 랭’을 브랜드로 삼아 ‘예술자본’을 축적하는 것만이 그의 지상명제인 탓이다.

아직까지 낸시 랭의 평면 작품들은 예술자본을 축적하는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다. 아니 그에 대한 대중적 관심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젊은이들 특유의 생기와 상상력이 넘치는 ‘서울청년미술제-포트폴리오2005’전에 번듯하게 걸려 있고, 이달 초까지 서울 청담동의 갤러리 드맹에서 ‘터부 요기니 시리즈’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씨는 낸시 랭의 평면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사에 의존하는 주제를 풀어놓는 재주가 예사롭지 않다. 주제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초기의 터부 요기니 작품은 고전적 취향이 깊게 새겨져 흡입력이 있다.”

지난 5월2일 정장 차림으로 전시장에 나타난 낸시 랭은 “여자의 스타일은 핸드백과 구두로 마무리된다”면서 작품 앞으로 다가섰다. 인간의 퇴색된 꿈을 실현해주는 의미를 내포한 ‘터부 요기니 시리즈’는 명품 중독자인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잃어버린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연주했듯이, 터부 요기니 시리즈에는 명품에 다가서기 힘든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 셈이다. 신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인 메신저 ‘요기니’(Yogini)처럼 현실에서 일체의 욕망을 ‘금기’(Taboo)로 여길 수밖에 없는 현실, 그것이 바로 그에게 터부 요기니인지 모른다.

초창기의 터부 요기니는 상처 자국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지구촌 전역을 시장으로 삼았던 ‘엄마’의 사업이 망한 대학 3학년 때까지 입었던 명품 정장 200여벌을 ‘새것’으로 바꾸지 못하는 것도 그에겐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처를 바늘로 꿰맨 뒤에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건담 로봇의 몸체를 중심에 놓고 명품(루이뷔통 등)과 엘리트주의(예일대 로고 등)에 대한 욕망을 곳곳에 배치했다. “작가와 작품은 하나일 수밖에 없어요.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게 제겐 없어요. 세속적인 욕망을 표현한 것에 대해 ‘꼴값’을 떤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욕망을 숨기지 않는 게 죄인가요?”


△ 고전적 취향이 돋보이는 초기의 터부 요기니와 세속적 욕망을 드러낸 최근의 터부 요기니.

상처에 명품과 엘리트주의를 새기다

낸시 랭의 터부 요기니 시리즈는 계속해서 진화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꿈꾸는 건 건담 로봇의 해체와 조립을 통한 재창조, 이제 막 부품을 한데 모았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장밋빛 지난날에 대한 미련을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과거의 사슬을 끊고 환상적인 미래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작품 속에 살짝 드러내고 있다. 상처투성이의 요기니와 함께 수호천사 구실을 하는 건담 로봇을 작품에 배치한 게 그것이다. 그에게 요기니가 피터팬이라면 건담 로봇은 요정 팅커벨인 셈이다. 명품으로 채워진 그만의 공간에 미래를 의지할 누군가를 초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에게 다가서는 아티스트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낸시 랭. 그만큼 미술을 쇼비즈니스로 받아들이는 작가가 미술 시장에 흔치 않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작품을 통해 쇼비즈니스에 다가서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가 모델로 삼은 사람은 애니메이션과 만화 게임 등의 문화적 정서를 기반으로 자신의 작품 캐릭터를 아트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무라카미 다카시다. 무라카미가 일본 미술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바탕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을 떠올릴 때, ‘애교’와 ‘명품’으로 놀이와 예술의 경계에 서 있는 낸시 랭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