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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 이것이 인생이다!

나/ㅓ 2012. 9. 7. 18:02 Posted by 로드365



[매거진S] 너클볼, 이것이 인생이다!

2012-09-06 


타임머신을 타고 온 1800년대 사람이 있다면, 처음 보는 자동차는 물론이거니와 현대인들의 빠른 걸음걸이에 깜짝 놀랄 것이다. 베이브 루스가 타임머신을 타고 온다면, 요즘 투수들의 구속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놀란 라이언은 1974년 100.9마일(162.4km)을 던져 기네스북에 올랐다. 그로부터 23년 뒤인 1997년, 롭 넨은 처음으로 공식경기에서 102마일(164.2km)을 찍었다(랜디 존슨의 최고 구속도 102마일이다). 하지만 넨 이후 불과 14년 만에, 최고 구속은 106마일(170.6km)로 4마일이 더 늘어났다(2011년 아롤디스 채프먼).


최근 메이저리그의 '투고타저' 현상을 설명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10년 전에 비해 투수들이 더 빠른 공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010년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92마일로 측정됐는데, 이는 10년 전인 2000년의 91마일에 비해 정확히 1마일이 늘어난 것이었다.


투수의 구속은 리그의 수준과도 관계가 있다. 더 빠른 속도의 공을 때려내기 위해 타자는 더 빠른 배트 스피드 또는 더 뛰어난 타격 기술을 장착해야 하며, 수비수는 더 빨리 날아오는 공을 대처해야 한다. 물론 스피드가 전부는 아니다.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음에도 제구가 안 돼 사라진 투수들은 부지기수이며, 그 좋은 배트 스피드를 가지고도 좋은 공을 골라내지 못해 공갈포가 된 타자들도 많다. 하지만 야구에서의 성공에 있어 스피드가 핵심적인 토대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빠르게 더 빠르게'가 모토인 이 시대를 보기 좋게 역행하는 공이 있다. 갈수록 빨라지는 스마트폰의 시대에 오히려 명품이 된 다이얼 전화기와도 같은 공, 바로 너클볼이다. 이미 단축 버튼에 익숙해진 타자들은 다이얼이 다시 돌아오는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춤추는 나비

공의 회전을 극도로 줄임으로써, 솔기(실밥)의 비대칭으로 인해 힘에 큰 불균형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공의 궤적이 아주 이상해지는 공


<야구 물리학>의 저자 로버트 어데어 교수가 내린 너클볼의 정의다. 너클볼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그누스 계수'라는 용어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물리학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R A 디키가 해준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야구에서 투수가 던지는 공들은 최대한 많은 회전을 줘서 원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게 목적이란다. 하지만 너클볼은 그 회전을 없애는 게 목적이야."


일반적인 패스트볼은 투수의 손을 떠나 홈플레이트에 도달할 때까지 10회 정도 회전을 하게 된다. 반면 너클볼은 그 회전을 한 바퀴 이내로 막아야 하는데, 회전이 최대한 억제된 공의 경우 주변의 공기 흐름이 실밥에 걸림으로써 난기류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불규칙한 움직임을 갖게 되는 것이다. 타자들로부터 '나비' '댄서' 등의 별명을 얻은 너클볼은, 18.44미터를 날아오는 동안 바람의 영향을 받아 이리저리 흔들리며, 심지어 홈플레이트에 이르기 전까지 두 세 차례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개리 셰필드는 너클볼을 '유령'으로 부르기도 했다.


야구공에 실밥이 있는 이유는 골프공에 딤플(dimple)이 있는 이유와 같다. 공을 일정한 방향으로 회전시켜 더 멀리 나가고 컨트롤이 쉽게 만들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너클볼은 회전이 쉽게 되도록 실밥을 만든 야구공의 제조 목적을 부정한다. 일부러 컨트롤이 어렵고 속도가 느려지도록 던진다. 던지는 투수도 공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다면 그 공을 치는 타자는 더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것이 발명한 사람의 아이디어다. <박기철의 플레이볼> 중


목적이 '회전의 최소화'이다 보니, 너클볼은 손끝으로 공을 채서 회전을 걸어주는 게 아니라 공을 그대로 밀어 던진다. 그리고 과거에는 손가락 관절(knucle)에 끼우고 밀어 던졌지만(이것이 '너클볼'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지금은 대부분 손끝을 세우고 손톱 끝으로 밀어 던진다(때문에 너클볼 투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강한 악력과 함께 단단한 손톱이다. 이에 너클볼러들은 항상 손톱 줄과 매니큐어를 가지고 다니면서 손톱을 정성껏 관리한다).



손가락 관절에 끼워 잡았던 예전 그립 ⓒ gettyimages/멀티비츠


일반적인 투수들은 공을 최대한 힘껏 던지기 위해 (공에 최대한의 회전을 걸어주기 위해) 지렛대 효과를 극대화하는 투구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엄청난 근력 운동을 하거나, 극단적인 스트라이드를 채택하거나, 몸을 최대한 비틀어 던지는 투수들도 있다. 반면 보폭을 작게 가져가며 팔에 힘을 뺀 채 던지는 너클볼은 부상에 자유롭다. 너클볼 투수들이 롱런하는 이유다(명예의 전당 너클볼러인 호이트 윌헴은 만 50세 생일을 보름 남겨놓고 마지막 등판을 했다). 또한 공에 회전이 없다 보니 반발력이 작아 잘 맞은 타구라도 멀리 날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너클볼 투수가 많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너클볼을 제대로 던지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10대 때부터 30년이 넘도록 너클볼만 팠으며, 역대 10명 뿐인 300승-3000탈삼진 달성자인 필 니크로가 은퇴 후 "내가 과연 그 공을 마스터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라고 말한 것처럼, 너클볼은 제대로 제어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또한 너클볼을 제대로 알고 있는 코치가 거의 없다 보니 대부분 독학으로 배워야 한다. 역시 너클볼러였던 조 니크로의 아들인 랜스 니크로는, 타자로서 실패한 후 평범한 회사원 생활을 하다 애틀랜타 구단으로부터 '너클볼 투수가 되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랜스 니크로는 큰아버지 필 니크로와 두 달이 넘는 집중 수업을 했음에도 결국 너클볼 투수가 되지 못했다.


너클볼을 던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또 하나는 강심장이다. 배리 본즈, 앨버트 푸홀스 같은 타자 앞에서 팔에 힘을 빼고 공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타자에 대한 두려움은 너클볼 투수가 자기도 모르게 손목에 스냅을 주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해서 회전이 걸려 버린 너클볼의 종착지는 단 하나, 담장 너머밖에 없다. "빠른 공은 구사가 제대로 되지 않더라도 운 좋게 통할 때가 있다. 하지만 너클볼에 그런 요행은 없다. 너클볼은 '칠 테면 쳐 봐라'는 불같은 의지를 가지고, 대단히 고요하게 던져야 하는 공이다." 찰리 허프의 말이다.



너클볼을 던지는 웨이크필드의 모습 ⓒ gettyimages/멀티비츠


너클볼을 따라다니는 불청객들도 있다. 많은 폭투와 포수 패스트볼, 그리고 많은 도루 허용이다. 특히 포수들은 일반적인 포수 미트보다 더 큰 너클볼 전용 미트를 가지고도 포구하는 데 쩔쩔매는데, 1987년 찰리 허프의 너클볼을 받았던 지노 페트랄리는 1이닝 패스트볼 4개라는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세웠으며, 덕 미라벨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마다 웨이크필드의 공을 받느라 큰 애를 먹었던 제이슨 배리텍은 2004년 챔피언십시리즈 5차전에서 1이닝 3개라는 포스트시즌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은 R A 디키의 공에 많이 익숙해진 뉴욕 메츠의 포수 조시 톨리는 처음 받아본 디키의 너클볼 5개를 모두 놓쳤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너클볼의 가장 큰 약점은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함이다. 덕아웃에서 너클볼 투수의 아슬아슬한 피칭을 지켜보는 것을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삐걱거리는 흔들의자에 앉은 느낌>이라고 말한 한 감독의 말처럼, 너클볼이 주는 불확실성은 감독들이 가장 꺼리는 것 중 하나다. 그렇다 보니 너클볼 투수에게 우선적인 기회가 주어지는 일은 없다.


노병장(윌헴)과 너클지(니크로)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따르면, 1901년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1경기라도 던진 투수는 7833명이다. 그러나 그 중 너클볼이 주무기였던 투수는 7~80여명밖에 되지 않는다. 100명 중 1명이었던 셈. 하지만 이는 초창기 너클볼 투수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올해 5이닝 이상을 던진 565명 중 너클볼 투수는 단 1명이다.


다른 구종과 마찬가지로, 너클볼을 가장 먼저 던진 명백한 1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1908년을 전후해서 나타난 루 모렌, 냅 루커, 에디 시콧, 에디 서머스를 공동 발명자들로 여기고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큰 성공을 거둔 투수는 풀타임 2년차인 1909년에 14승5패 1.94를 기록한 시콧이었다(시콧은 이후 '블랙삭스 스캔들'의 주연 중 한 명이 됐다). 하지만 시콧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본인이 또 개발한 '샤인 볼'(공을 최대한 매끄럽게 만든)로 주무기를 바꾸었다.


이에 너클볼을 확실한 주무기로 삼았던 최초의 투수는 1933년부터 1953년까지 20년을 뒤며 191승을 기록한 더치 레너드로 인정받고 있다. 데뷔 이듬해 14승을 올렸지만 곧바로 어깨를 다치며 28세 시즌까지 통산 18승에 그쳤던 레너드는, 1938년 너클볼을 장착하고 나타났고 44살까지 롱런했다. 특히 1944-1945년 워싱턴 세너터스(현 미네소타)는 선발투수 5명 중 4명(레너드, 미키 해프너, 로저 울프, 자니 니글링)이 너클볼 투수이기도 했다. 1940년대는 투수의 절반 가까이가 너클볼 섞어 던졌을 정도로 너클볼이 정점에 오른 시기였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필 니크로 ⓒ gettyimages/멀티비츠


그러나 이후 너클볼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데, 너클볼의 쇠락이 시작된 1952년, 불세출의 영웅이 나타났다. 호이트 윌헴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잡지에서 우연히 본 레너드의 너클볼 그립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윌헴은 이후 철저한 독학 만으로 자신의 너클볼을 완성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투수로 데뷔한 후 너클볼을 배운 다른 선배들과 달리, 너클볼 투수로 데뷔한 윌헴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윌헴은 3년간의 군 복무와 6년 간의 마이너 생활을 보낸 1952년이 되어서야 만 2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9세에 데뷔해 만 49세까지 활약한 윌헴은 처음으로 200세이브와 1000경기에 도달한 투수가 됐으며, 지금도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124구원승을 기록했다. 36살에 선발투수로 변신해 15승과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며, 1958년 통산 9번째 선발 등판에서는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 팀인 양키스를 상대로 1-0 노히트노런을 따냈다(이후 양키스를 상대로 노히터에 성공한 1명은 나오지 않고 있다). 1985년 결국 윌헬름은 너클볼 투수 최초이자 구원투수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앞서 오른 제시 헤인스는 베테랑위원회를 통한 입성이었으며, 테드 라이언스는 첫 10년 간 너클볼러가 아니었다). 롭 네이어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너클볼을 던진 투수로, 필 니크로가 아닌 윌헴을 꼽기도 했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너클볼은 가장 마지막에 배우는 공이다. 역사상 너클볼러인 채로 프로에 입단했던 투수도 단 두 명뿐으로, 윌헴을 제외한 나머지 한 명은 바로 필 니크로다. 어린 시절 광부인 아버지로부터 너클볼을 배운 후 한 우물만 판 니크로는, 심지어 프로 팀에 입단하기 전에는 제대로 된 패스트볼 그립도 알고 있지 못했다. 니크로는 역사상 가장 화려한 (가장 난폭한) 너클볼을 던졌고, 1997년 풀타임 너클볼 투수로는 윌헴에 이어 두 번째로, 너클볼 선발투수로는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필 니크로 레전드 스토리 보기]


[영상] 필 니크로의 너클볼 (영상제공 : MLBKOREA)



윌헴(1952-72)과 니크로(1964-87)에 이어 등장한 너클볼러는 찰리 허프(1970-94)와 톰 캔디오티(1983-99)였다. 허프는 46세 시즌까지 216승, 캔디오티는 41세까지 151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들은 윌헴과 니크로처럼 리그를 지배하지 못했다. 허프가 하향세에 접어든 1991년 5월, 스포팅뉴스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너클볼이 멸종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허프의 손에 든 초가 다 타버리려던 찰나, 새로운 초를 가진 인물이 나타났다. 웨이크필드였다.


웨이크필드와 디키

1988년 8라운드 지명으로 피츠버그에 입단했을 당시, 웨이크필드는 1루수였다. 하지만 피츠버그가 그의 미래를 포기하는 데 1년밖에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웨이크필드의 나무 방망이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배웠으며 고등학교 때 재미삼아 너클볼을 던졌던 웨이크필드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후 너클볼을 전광석화처럼 완성시킨 웨이크필드는, 1992년 7월31일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10K 2실점(무자책)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13경기 8승1패 2.15의 성적으로 신인왕 3위에 올랐으며(1위 에릭 캐로스, 2위 모이세스 알루),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는 톰 글래빈과의 두 차례 선발 대결에서 두 번 모두 완투승을 따내는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너무 빠른 성공은 독이 됐다. 이듬해 웨이크필드에게 첫 시련이 찾아왔는데(6승11패 5.61), 너클볼러가 된 후 성공 가도만 달려온 웨이크필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1994년 웨이크필드는 트리플A에서조차 난타를 당했고(5승15패 5.84), 1995년 스프링캠프에서 방출을 당했다. 그런 웨이크필드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팀은 보스턴이었다. 보스턴은 필 니크로에게 전화를 걸어 가능성이 있겠냐고 물었고, 1992년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이미 웨이크필드의 너클볼을 본 적이 있는 니크로는 본인이 직접 나서보기로 했다. 대선배의 쪽집게 교습 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그 해 16승8패 2.95를 기록하고 사이영상 3위에 오른 웨이크필드는, 44살까지 롱런하며 결국 200승을 달성했고, 사이 영과 로저 클레멘스(192승)에 이은 보스턴의 역대 다승 2위 기록(186승)을 만들어냈다.


[영상] 팀 웨이크필드의 너클볼 (영상제공 : MLBKOREA)


웨이크필드가 등장한 1992년과 찰리 허프가 은퇴한 1994년 사이, 메이저리그에는 데니스 스프링거와 스티브 스팍스라는 또 다른 너클볼러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공은 웨이크필드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고(스팍스 59승, 스프링거 24승) 너클볼은 다시 위기를 맞이했다. 2002년 보스턴은 루이스 티안트의 추천으로 20살짜리 너클볼러인 찰리 징크를 영입했다. 하지만 징크의 너클볼은 웨이크필드의 도움과 8년 수련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2008년 징크는 마침내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는데, 4.1이닝 8실점을 기록한 그 경기가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이후로도 너클볼에 도전했다 실패한 선수들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2005년 텍사스에서는 또 다른 투수가 인생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996년 텍사스로부터 전체 1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신체검사에서 팔꿈치 인대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R A 디키(37)였다. 신체검사 후 텍사스는 당초의 계약금 제안을 81만달러에서 7만5000달러로 후려쳤다. 한편 대학 시절 본인의 오른 팔에 보험을 들어놨던 디키는 야구를 포기할 경우 100만달러의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대신 더 이상 야구는 할 수 없었다), 디키는 100만달러가 아닌 야구를 선택했다.


2005년 디키의 구속이 급격히 저하되자, 텍사스의 오렐 허샤이저 투수코치는 디키에게 아예 너클볼 투수로 전업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디키와 찰리 허프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허프로부터 너클볼의 기초를 다시 배운 디키는, 처음에는 웨이크필드를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진도는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어느날 디키는 생각을 고쳐 먹었다. 자신 만의 너클볼을 던져야 겠다고 생각한 것. 디키의 선택은 고속 너클볼이었다.


보통 너클볼 구속은 60마일(97km)에서 70마일(110km) 사이에서 형성되며, 66마일(106km) 정도일 때 가장 좋은 움직임을 갖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디키의 너클볼은 회전이 걸리지 않은 공임이 분명함에도 구속이 81마일(130km)을 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디키의 80마일짜리 공은 웨이크필드의 66마일짜리보다 덜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타자에게는 더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또한 디키는 자신의 공에 대해 가장 완벽하게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너클볼러다. 디키는 간간히 66마일짜리 '웨이크필드 표' 너클볼까지 던지는데, 그동안의 너클볼 투수들이 너클볼과 간간히 던지는 빠른공으로 '체인지 오브 페이스'의 효과를 낸 반면, 너클볼의 구속을 제어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디키는 '패스트볼-너클볼'이 아니라 '너클볼-너클볼'로 최대 15마일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영상] R A 디키의 너클볼 (영상제공 : MLBKOREA)



2010년 35살의 디키는 메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초청선수로 참가한 스프링캠프에서 가장 먼저 짐을 싼 선수 중 1명이 됐다. 하지만 디키는 5월20일에 메이저리그에 올라왔고 11승으로 시즌을 끝냈다. 이는 디키가 데뷔 후 9년간 만들어낸 승수의 절반이었다. 지난해 36살의 디키는 메츠와 2년간 780만달러 계약을 맺고 처음으로 100만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았다. 그 때까지 디키는 14번의 1년 계약을 맺었으며, 37번이나 리그를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리고 올 해 디키는 너클볼러 최초의 사이영상이라는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고 있다.


[스타 포커스] '기적의 너클볼러' R A 디키 

[인사이드MLB] 디키의 너클볼, 왜 더 강력한가


웨이크필드가 뛰어난 너클볼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배들의 아낌없는 도움 덕분이었다. 그리고 웨이크필드도 그들로부터 받은 내리 사랑을 디키에게 실천했다. 자신의 시대에 늘 고독했고 늘 무시받았던 너클볼러들은 마치 후대 투수의 DNA에 유전정보를 새겨 넣기라도 하듯, 새로운 투수가 등장할 때마다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며 다음 계승자에게 지식을 전수해주고 있다. 웨이크필드와 디키의 도전과 그들의 끈끈한 유대감은 2012년 EBS국제다큐영화제(EIDF)에 출품돼 관객들의 큰 감동을 불러일으킨 <너클볼!>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2012년 2월17일 펜웨이파크에서 있었던 은퇴 기자회견에서 웨이크필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저를 형제처럼 대해주신 필 니크로, 조 니크로, 찰리 허프, 톰 캔디오티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너클볼의 명맥을 R A 디키가 이어갈 겁니다." 영화에서 웨이크필드의 은퇴를 접한 디키의 반응은 담담했다. "다음 선수가 나타날 때까지, 제가 잘 해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게 웨이크필드가 했던 역할이고요"

 

1995년, 방황하던 28살의 웨이크필드에게 해준 니크로의 말은, 아마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인 듯하다.


"다음에 던질 공이, 내 인생 최고의 공이라고 생각하고 던져라"


-참고 자료-

[너클볼!] 다큐멘터리 영화 2012년작

[Guide to Pitchers] 롭 네이어-빌 제임스 저

[The dying art of the knuckleball] SI.com

[야구의 물리학] 로버트 어데어 저


더 자세한 영상과 사진은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