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Nirvana의 [Nevermind] 발매 20주년

나/ㅓ 2011. 10. 31. 04:17 Posted by 로드365



나는 지금 기억의 액셀러레이터를 바닥까지 꾸욱 밟아 두뇌를 풀가동하려는 중이다. 우선, 1991년 하반기에 있었던 나의 추억들을 복원해 테이프를 재생해본다. 몇 가지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메탈리카(Metallica),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 본 조비(Bon Jovi) 등이 이른바 ‘탑 쓰리’를 형성하며 슬로우 모션으로 내 대뇌피질을 스윽하고 지나간다.   

아니다. 무언가 결정적인 일격이 부족하다. 그들의 음악은 진실로 위대했지만, ‘나를 대변하는 목소리’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니까, 내가 닿을 수 없는 별천지에 사는 ‘록 슈퍼스타’들이었다. 그들은 루비콘 강의 저 너머에 있는 이상향이었을 뿐, 내가 발 딛고 서 있던 당대의 어떤 기류와 공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젊은이들을 위한, 9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우리만의 사운드트랙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변화에 대해 가장 예민하고 가장 먼저 발기하는 그 사회의 성감대는 보통 당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었다. 90년대 초반도 마찬가지다.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메탈 밴드들의 인기는 여전했지만, 그들이 ‘리얼 부(富)’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만큼 그에 대한 반감도 늘어만 가던 시절이었다.


젊은이들은 그들을 발전(發電)해줄 수 있는 새로운 원동력을 필요로 했다. 압도적인 연주력으로 청중들 위에 군림했던 기왕의 메탈 사운드는 더 이상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70년대의 펑크(Punk)가 그러했듯이, 수평적인 시선에서 비참한 청춘의 현재를 노래로 토해내 줄 누군가가의 존재가 절실했다. 메탈만이 아니었다. [타임]지의 조쉬 타이런기엘(Josh Tyrangiel)이 지적했듯, 록셋(Roxette),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폴라 압둘(Paula Abdul) 등이 지배하고 있던 당시의 빌보드 차트는 말 그대로 ‘그들만의 화려한 리그’일 뿐이었다. ‘Smells Like Teen Spirit’의 등장은 그래서 결코 우연이 아닌, 시대의 필연적인 요구에 가까웠다.


사실 본작 [Nevermind]는 1991년 9월 발매 당시에 그렇게 폭발적인 피드백을 얻지는 못했다. 소속사인 [게펜 레코드]에서도 소닉 유스(Sonic Youth)가 1990년 발표한 작품 [Goo]의 판매량과 비슷한 레벨인 50만장 정도를 기대했었다고 한다. 빌보드 앨범 차트 144위로 데뷔한 성적은 그래서 레코드사의 예상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Smells Like Teen Spirit’이 점차 스스로 덩어리를 불려가면서 그 누구도 예측 못했던 징후들이 발생했다. 당시 MTV가 기획했던 특집 프로그램이었던 [The Alternative Show]에서 이 곡의 뮤직비디오가 프라임 타임에 배치되더니, 결국 시청자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거의 매일 MTV 전파를 타고 방영되었던 것이다.


너바나가 유럽 투어를 준비하고 있던 11월 들어서는 그 인기 그래프가 한층 가속 페달을 밟았다. 앨범은 단번에 차트 35위까지 상승했고, 유럽 투어는 완전 매진되어 아메리카 대륙 밖에서도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기실 이 과정에서 [게펜 레코드]가 직접적으로 관여해 이뤄낸 성과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와 관련, [게펜 레코드]의 대표인 에드 로센블랫(Ed Rosenblatt)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별로 한 게 없어요. 그 음반을 우선순위로 홍보할 계획이 전혀 없었거든요.”라고 고백했던 바 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레코드사 간부의 증언에서도 나타나듯, [Nevermind]의 성공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닌, 밑에서부터 위로 치고 올라온 자연스러운 전복(顚覆)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대중음악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터지고 만다. 1992년 1월 11일자 빌보드 차트에서 [Nevermind]가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를 밀어내고 최상위 터치다운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일개’ 펑크 록 밴드가 팝계의 최강의 ‘공룡’을 꺾어버린 터닝 포인트 정도가 아니었다. 대중음악 저널리스트 지나 아놀드(Gina Arnold)가 선언한 것처럼 “우리가 마침내 승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너바나의 전기 [Come As You Are]를 쓴 마이클 애저래드(Michael Azerrad)에 따르면, ‘우리’는 바로 “화려함에 눈 먼 메인스트림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10여년 전인 1980년대부터 꾸준히 성장해온 언더그라운드, 인디펜던트, 아웃사이더의 저변”이었다. 너바나는 이 앨범으로 그러한 비주류 연대의 상징으로 급부상한 것이었다.


이후 ‘Smells Like Teen Spirit’과 [Nevermind]를 접한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새 시대의 록임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렸다. 뭔가 엄청난 낌새를 재빨리 감지한 언론매체들은 기존 음악들에 반발하는 ‘대안적 록’이라는 의미에서 ‘얼터너티브’라는 레테르를 붙여주었다. 음악계의 중력이 변하고, 레일 포인트가 이동을 끝마치는 순간이었다. 자연스레 이 음반 이후 너바나와 같은 시애틀 출신 밴드들은 무조건 ‘얼터너티브’ 혹은 ‘그런지’라는 딱지를 부여받아야했다. 시애틀 태생이 아니더라도 사정은 비슷했다. 시카고에서 결성되었고, 음악적 지향도 판이하게 달랐지만, 유사한 계열로 분류되었던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가 대표적이다.   


[Nevermind]라는 타이틀을 펑크의 전설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것에서 따왔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앨범의 음악적 마스트는 70년대산(産) 펑크였다. 그러나 너바나의 펑크는 선배들의 그것과는 엄연히 다른 색조를 띄고 있었다. “다이노서 주니어(Dinosaur Jr)나 머드허니(Mudhoney) 등의 밴드들이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세련되게 프로듀스된 앨범”이라는 비평가 카렌 쇼머(Karen Schoemer)의 언급처럼 그들은 선배나 동료 펑크 밴드들이 감수하지 않았던 리스크를 걸어야만 했다. 바로 ‘팝 멜로디’였다. 그 기저는 펑크에 두고 있었지만, 너바나의 그런지 록은 오리지널 펑크와는 많이 달랐다. 우선 귀에 잘 들렸고, 그래서 상업적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Smells Like Teen Spirit’은 물론이고,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의 절규가 인상적인 ‘Territorial Pissing’이나 ‘Drain You’, 우울 모드의 ‘Come As You Are’에서도 핵심은 분명 캐치한 선율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펑크는 ‘공감할 수 있는 아우성’이었고, ‘들을 수 있는 펑크’였다. 커트 코베인 스스로도 “우리 음악은 기본적으로 팝 포맷”이라며 고백한 바 있다. “허밍할 수 있고, 싱얼롱할 수 있는 거의 최초의 펑크”라는 [스핀]지의 평가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를 위해 커트 코베인은 파워 코드와 코러스 이펙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바로 이것이 그가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들 수 있었던 비기(祕技)였다. 언뜻 보면 쓰리 코드와 미니멀리즘으로 이뤄진 단순한 시스템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복잡한 디테일이 그 속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20년이 지났고, 이 음반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80년대까지 언더그라운드에서만 머물러있던 수많은 밴드들이 속속 메인스트림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그런지 록은 순식간에 팝 시장의 고원(高原)으로 떠올라 상업적인 모든 것들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사랑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더 이상 너바나와 커트 코베인이 인디의 순수성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어느새 그들은 바로 그들이 맹공을 퍼부었던 ‘백만장자 록 스타’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상업성을 비판하는 상업적 히트’라는, 록 역사의 오랜 패러독스가 반복되는 순간이었다. 


스스로를 자유롭다 생각한 커트 코베인은 결국 마치 ‘단지 속으로 들어간 문어’처럼, 자본주의라는 괴물 앞에서 자신이 이미 자유롭지 않은 상태임을 깨달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대중들 앞에서 웃는 표정의 가면을 썼지만, 그 가면이 언젠가는 자신의 맨얼굴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마치, 최전방의 지뢰밭에 들어선 민간인 같은 꼴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나쁜 죄악은 내가 100퍼센트 즐거운 것처럼 꾸미고 가장함으로써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 커트 코베인의 유서 중


위의 문장뿐만이 아니다. 그가 남긴 유서를 꼼꼼하게 되씹어보면 그가 직면했던 비극이 적어도 커트 코베인 자신에게는 얼마나 처절한 수준의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시간을 들여 수압의 변화에 천천히 순응해가는 잠수부와도 같은 능력이 그에게는 선천적으로 결락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후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자유는 그래서, ‘몰락할 자유’밖에는 없었다. 그의 자살에 무언가 ‘윤리적인 숭고함’이 느껴졌다면 그건 다름 아닌 이런 이유에서였다.


1994년 4월 5일, 커트 코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이 음반이 지니고 있는 위상은 발매 20주년이 된 지금에도 조금의 희석됨 없이 찬란하다. 실제로도 그렇다. 이후의 록 음악은 거칠게 말해서, 현재까지도 이 작품이 남긴 영향력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정도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좌표와 경계를 교란하면서, 아니, 그것을 뛰어넘어 가능한 것의 장(場) 안에서 불가능해보였던 것들을 솟아오르게 하면서, 이 걸작은 대중음악계에 완전히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해줬다. 바로 본작의 가치가 앞으로도 영원불멸일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posted by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클볼, 이것이 인생이다!  (0) 2012.09.07
너바나 Nirvana, 보고싶다! 커트  (0) 2012.08.19
넬슨 만델라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0) 2008.01.03
네트워크 여섯단계 법칙  (0) 2003.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