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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명. 충무로 영화판의 대모

사/ㅣ 2003. 2. 10. 19:01 Posted by 로드365
갈무리 글 중간 쯤 있는 이은과 이동진의 글이 새롭다.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감독과 영화는 ‘닮은꼴’

심재명 / 2000-03-10 /

‘생긴 대로 찍는다’는 얘길 많이 한다.

감독의 말투나 억양을 보면 그 사람이 만들 영화 생김새가 대충 짐작이 간다는 말이다.
아직 영화를 그리 많이 제작하진 않았지만 나 역시 거듭 그 말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조용한 가족’을 만들 때. 김지운 감독은 회의 때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났다.
표정을 읽을 수 없게 선글라스로 위장(?)한 채 말없이 빈 종이에 만화를 그리고 앉아 있던 감독 때문에 그 회의는 프로듀서의 일방적 의견 제시로 끝나버리곤 했다.
‘반칙왕’에서 주인공 대호는 마스크를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 나타나거나, 아버지 앞에 앉아 빈축을 산다.
두렵고, 피하고 싶은 자리일 때 자기 얼굴을 마스크로 숨긴 대호의 모습은 피곤하게(!) 구는 제작자 앞에 선글라스 쓰고 앉아 프로듀서를 당황하게 했던 감독과 기묘하게 닮았다.
그때가 생각나 ‘반칙왕’의 시사회장에서 나는 박장대소했다.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은 각색 작가 한 명 없이 2년여 만에 혼자 시나리오 작업을 끝낸 끈기와 집요함의 소유자다.
아내가 직장 나간 빈 아파트에서 주로 시나리오를 썼다는데, 그의 데뷔작엔 한낮의 아파트 풍경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촬영장에선 생각의 매듭이 잘 안 풀릴 때면 슬쩍 현장을 떠나버려, 스태프들이 감독을 찾아 다니는 일이 왕왕 있었다.
아마도 생각의 정리를 위한 일종의 가벼운 산책을 나갔던 것 같은데, 그런 감독의 모습이 헌책방이라는 혼자만의 공간에 숨어들던 남자 주인공 서민기의 모습,
차계부를 꼼꼼히 정리하고 영수증을 일일이 모으며 일상을 챙겼던 그 주인공과 겹쳐진다고 얘기하면 오버센스일까?

사람, 그 속에 숨어있는 가치관, 인생관은 그 사람의 눈빛과 말투와 손짓 발짓에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
한 편의 영화엔 감독의 ‘모든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프로듀서는 그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일 수 있도록 뒤에서 밀고 옆에서 발걸음을 같이 한다.
어떨 땐 정확하고 합리적인 재단사처럼, 또 어떨 땐 주술사처럼 감독의 숨겨진 마음과 재능과 열망을 꿰뚫어보며,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여배우의 ‘가슴’보다 ‘정열’을...
심보경 / 2000-03-24 /
격세지감을 느낄만큼 한국 영화의 정사신 표현 방법과 수위가 대담해졌다.
벌건 대낮에 거리낌없이 남자를 리드하는 여자, ‘앗싸’ 따위의 추임새가 들어간 노래를 깔아 남녀의 성행위를 시니컬하게 희화화한 어떤 영화, 꽤 알려진 20대 초반 풋풋한 여배우가 거리낌없이 가슴을 드러낸 빅 클로즈 업.
이제 성적 팬터지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는 고루해 보이고, 과격하고 솔직하며 단출하게 하고 싶은 얘기를 보여주는 정사신이 더 모던해 보이는 요즈음이다. 물론 그런 영화에서 ‘스타’를 만나기란 아직 하늘의 별따기다.
그러나 정작, 열기띤 스크린의 이면은 어떤가.
특별한 재주를 가진 감독이 아니라면 대부분 정사신 촬영이 가장 곤혹스러운 숙제라고 토로한다. 대부분 스태프가 자리를 피해주고, 촬영, 조명 등 주요 스태프중 대장들만 남아 조심스레 작업한다. 배려가 좀 모자란다 싶을 때 스타배우는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마련이다. 아주 리얼해 보이는 정사가 펼쳐지는 화면 너머로는 좁은 자리를 차지한 동시 녹음기사의 맨발, 막간을 이용해 팔굽혀 펴기를 하는 남자배우, 분장을 고치는 여배우의 손짓, 미리 짜간 콘티를 수정하느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감독이하 스태프의 땀과 먼지가 있을 뿐이다.

제작 현장의 비즈니스는 또 어떤가.
그 곤혹스러운 노출 신 때문에 배우와 제작자, 감독은 지겨운 신경전을 벌인다. 어떤 매니저는 시나리오를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우리 배우는 가슴 밑으로는 절대 안된다”고 으름장을 놓는가 하면, 또 어떤 배우는 그 장면만 삭제하면 출연을 고려해보겠다며 사전검열까지 한다. 제일 황당한 일은, 계약 때 노출과 정사신을 모두 감수(?)하겠다고 해놓고, 막상 촬영장에서 벗는다, 못 벗는다 실랑이를 벌여 그렇지 않아도 걱정이 태산인 감독을 실망, 절망시키는 경우이다.
어떤 제작자는 톱스타와 계약당시, 그런 불상사를 미리 막아 볼 요량으로 ‘유두노출 다반사’라는 기발한 조건을 계약서에 명시한 적이 있지만, 결국 그 톱스타는 촬영 전날 잠적해버리고 부랴부랴 대역을 기용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영화를 심심풀이 땅콩쯤으로 생각하는 관객이 아니라면, 어줍지 않은 이야기를 선정성으로 대신하려는 못난 제작자와 감독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배우의 젖꼭지보다는 그녀의 성실한 연기몰입이 보여주는 ‘진정성’을 더 보고 싶어한다.
물론, 꼭 필요할 때 여배우의 아름다운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면 더 좋겠지만.
[심보경 명필름 기획실장]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이브의 힘 막강
심재명 / 2000-03-31 /

‘시네마 천국’에선 이브의 힘도 막강해졌다
12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하고 S극장 기획실 영화 광고 카피라이터로 취직했을 때, 친척들은 내게 ‘혹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묻거나 아니면 극장에서 표 파는 일을 하는 거냐고 궁금해 했다. 기획실이란 말이 아직 어색하고 마케팅이란 단어는 존재조차 하지 않던, 선전실, 선전부장, 우다이 문구(헤드 카피), 도안사(디자이너)란 말이 더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영화계에서 여성의 숫자는 극히 적었다.
그 당시 이미례 감독은 여성이란 점 때문에 유독 눈길을 끌었고, 영화 광고 만드는 일 때문에 구두굽을 부러뜨려 가며 극성스레 동판사와 인쇄소를 들락거렸던 나는 극장 기획실에서 일하는 거의 유일한 ‘젊은 여자’였다. 그즈음 해서 영화계에는 젊은 인력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내 또래의 여성들도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기획실 직원들끼리 종종 갔던 MT에서 밤새 함께 고민을 나눴던 여성 선후배, 동료들은 지금 <쉬리>의 마케팅 총 책임자, <반칙왕> <주유소 습격사건>의 제작자, <미술관 옆 동물원>의 프로듀서가 되어있다.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녀들은 한 방에 끝내자는 성마른 야심보다는 끈기와 성실, 겸손함으로 자신들의 영화 커리어를 쌓아왔다.
얼마 전 조사에 의하면 여성영화인의 숫자가 무려 500여명에 이른다. 양적으로도 급성장했지만, 프로듀서, 시나리오, 연출 등 영화의 최종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인력들의 숫자도 늘어 그 질적인 발전이 현저하다.
그녀들이 이제 영화계 내에서의 저변 확대와 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연대’하고자 여성 영화인 모임이란 이름으로 모였다. 한 개인의 부와 명예의 성취보다도 ‘영화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같이 발전하자는 순수한 의지가 돋보이는 모임이 될 것이라고 나는 자신한다.
제임스 L. 브룩스의 ‘브로드캐스트 뉴스’에서 여주인공 홀리 헌터는 방송국 PD로 격무에 시달리고, 조직의 쓴맛(!)을 볼 때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으앙’ 울음을 터뜨리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씩 웃는 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그 12년 전, 일에 지쳐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일주일에 한번 쯤은 내 방에서 몰래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바보처럼 울었던 내게, 홀리 헌터는 괜히 반가운 존재였다.
‘도대체 나의 가능성은 뭐야?’라고 회의하며, 영화 한편의 결과에 따라 질질 짜며 스스로를 자책했던 그때의 못난 나보다 훨씬 영민하고, 저돌적이고 발랄한 요즘 젊은 여성 영화인들을 보면 나는 유쾌하고 자랑스럽다. 이 원고를 쓰는 시간은 밤 10시.
우리 사무실에서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여성들이네요, 호호.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영화제목과 흥행의 관계는?
심재명 / 2000-04-21 /

제목은 영화의 얼굴이다.
때때로 영화가 갖고 있는 폼새나 알맹이보다 더 그럴싸한 제목 때문에 덕을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첫 인상 직후 그 사람의 정체와 본질이 금방 파악되듯, 관객도 제목 뒤 영화의 ‘진심’을 금세 알아버리고 만다. 그래도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좋은 제목 하나, 열 한석규 부럽지 않다”는 식으로 좋은 제목 만들기에 골몰한다.
그 옛날, <아무도 없었던 여름>이란 영화가 극장 안이 텅텅 비는 재난을 당했던 것을 제목 탓으로,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제목이 주는 그 반어적 의미 때문에 흥행에 날개를 달았다는 얘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접속>은 멜로 드라마 제목이라기보다 첩보 영화 같다, 너무 딱딱하다는 주위의 의견들이 많아, 수 차례 설문 조사로 후보 제목을 뽑아냈다. "블루노트", "고백", "입맞춤" 따위의 지금보면 낯간지러운 제목도 후보로 올라갔고, 나처럼 소질 없는 프로듀서는 "접촉"이란 제목을 주장하기도 했다.
<접촉>은 후에 에로 비디오로 나왔다.
제목 잘 짓기로 소문난 우노필름 차승재 대표는 <8월의 크리스마스>, <플란더스의 개> 같은 은유와 상징이 풍부한 제목을 주로 선호한다.
"우리들의 성생활"이란 직선적인 제목이 그를 거쳐 <처녀들의 저녁식사>란 멋들어진 이름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 <약속>의 흥행 성공으로 한때 충무로에선 두 어절, 혹은 글자 제목이 흥행을 ‘보장’한다는 엉뚱한 오해가 생긴 적이 있다.
몇몇 영화 제작자들이 두 글자 제목 멜로물 시나리오만 다투어 읽었던 해프닝이 있었다.
정말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영화 제목은 솔직 담백하게 영화 소재나 주제를 압축하고, 거기에 상상의 여지를 줄 수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박하사탕! "접촉"이 좋다고 박박 우겼던 내가 웬 잘난 체?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스타같지 않은 스타’
심보경 / 2000-05-05 /

‘태어날 때부터 스타’들이 있다.
박중훈, 이정재, 정우성, 박신양 등이 그렇다. 연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스크린에 데뷔할 때부터 주연으로 시작하는 연기 인생의 주인공들이다. 아무리 박중훈이 배우가 되고자, 합동영화사를 들락거리며 빗자루를 들고 청소까지 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주연으로(깜보) 영화를 시작했다.
단숨에 청춘 영화의 히어로(젊은 남자)로 영화계에 입문한 이정재나, 신세대 톱스타의 상대역(구미호)으로 데뷔전을 치른 정우성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시선을 사로잡는 완벽한 미남형이건, 시대의 유행을 창조하는 개성과 매력의 소유자이건, 고무공처럼 튀는 카리스마의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연기자들도 있다.
거리에 나서도 도통 보통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평범한 외모, ‘시작부터 스타’가 아닌 밑바닥부터 거슬러 올라간 연기 경력의 주인공들이다.
그 중 한 사람이 송강호이다.
달무늬, 별무늬가 요란한 셔츠를 입고 어디서 진짜 양아치 건달을 스크린에 불러 세운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초록물고기>에서의 그.
그가 <조용한 가족> 캐스팅 당시 우리 사무실 마당에 들어섰을때, 과연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뿔테 안경에 가방을 어깨에 둘러 맨 모습은 배우라기보다 마치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온 작가 지망생 같았다. <넘버 3>와 <반칙왕>을 거친 그는 정통 연기를 진짜로 치는 사람들에겐 낯설지만,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개성을 스스로 창조해낸 드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얼마 전 새벽 고속도로에서 옆차로를 달리는 그의 자동차와 마주쳤다. 조수석에 앉아 실내등을 켠 채 콘티북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 어디서나 집요함과 성실함으로 무장한 그의 태도가 그의 평범한 외모를 압도한다는 생각이 또한번 들었다.
150만원으로 시작한 그의 영화 개런티가 1억5000만원을 돌파했다는데, 아직 그의 차는 중소형급, 그것도 LPG다. 차 트렁크에 LP 가스통을 싣고 다니는 스타는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어느 사회학자가 “스타는 시대의 ‘열망’을 대변하는 존재”라고 했는데….
스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고급차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스타 같지 않은 스타, 송강호씨.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변수많아 촬영기간 한 두철은 ‘기본’
심재명 / 2000-05-19 /

봄날이 간다.
저녁식사를 하러 나간 사무실 앞 거리의 황혼녘은 5월이어서 그런지 웬지 풍요롭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름을 너무 좋아해 그 계절이 끝나갈 즈음엔 퍽이나 슬퍼진다고 했다. 나는 봄이란 계절이 너무 좋아 5월이 훌쩍 중반을 달리니 하루키같은 심정이 되어 가는 계절을 아쉬워한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찍기 좋은 계절이다.
일기변화도 심하지 않고 덥지도 춥지도 않아 촬영 효율성이 높을 때다. 언제나 좋은 계절에 촬영을 하겠다고 희망도 하고 계획도 세우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시나리오 작업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거나, 캐스팅이 지연되는 등 변수가 많은 게 영화작업이어서 계획은 언제나 수정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 한겨울의 혹한 속에서 크랭크인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사의 찬미> 촬영 당시 나는 영화 제작을 배워보겠다고 나선 신출내기 기획실장이었다. 8월의 찜통 더위 속에서 홍난파(이경영 분)는 두터운 외투를 입고 가짜 눈을 맞아가며 자살한 윤심덕(장미희 분)의 집을 찾아간다. 삐걱 문을 열고 들어가 가짜 먼지가 덮인 그녀의 유품들을 쓰다듬는 홍난파. 그때 낮 기온은 32-3도를 오르내렸고, 어두운 실내를 표현하느라 건물의 창문을 온통 검은 종이로 가린 채 촬영을 진행하는 스탭과 배우는 비오듯 땀을 흘렸다.
8월의 마포에서 일제시대 경성의 겨울을 만들어가는 그들.
더위도 무심하게 견디는 영화 선배들을 바라보며 괜히 가슴 한 구석이 찡해졌던 기억이 있다. 한겨울에 바다 속에 뛰어들어가는 장면을 찍느라 전신마비를 일으킨 배우도 있고, 정수리가 벗겨질 만큼 더운 날씨에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에서 촬영을 하다가 졸도해서 실려간 스탭들도 나오는 것이 영화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가까이까지 걸리는 촬영기간.
바지를 두세개 겹쳐 입은 채 눈 쌓인 산 속에서 크랭크인을 맞았던 스탭들이 한두계절을 훌쩍 보내고 반팔 셔츠를 입은 모습으로 촬영 종료를 축하하는 악수를 건네는 일은 흔한 풍경이다. 추위와 더위, 졸음과 피로를 견디며 뛰어다녔던 ‘영화인’들의 눈빛은 몇달 후 완성된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다시 살아난다.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진심'으로 팬과 숨쉬는 영화를 위해
심재명 / 2000-06-02 /

누군가가 내게, 왜 영화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갑자기 막막해진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인 후 그저, “좋아서”라고 대답할 뿐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으냐고 물으면 더 막막해진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는 영화”라고 속으론 대답하지만, 정작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장황하고 핵심이 없다.
나는 남편과 함께 영화사를 운영한다.
부부가 듀엣으로 활동하는 가수처럼 둘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서로에 대해 정말 잘 알고 있는가 자문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때때로 늦은 밤, 당신은 왜 영화를 만드느냐, 요즘 심정은 어떤가식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한 배를 탄 영화인으로서 중간점검을 한다.
언제나 남편은 그런 식의 대화가 끝나면, 조리없고 논리없는 나를 ‘전망부재의 인간’으로 몰아붙이곤 하지만 별 도리가 없다. 생각이 짧은 나를 스스로 인정하는 수밖에. 얼마전 우리는 김기덕 감독의 <섬>을 제작, 개봉했다.
개봉에 임박해서는 그야말로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초조하다. 레일 위를 천천히 오르며 출발을 기다리는 롤러코스터에 앉아있는 기분이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까? 그러던 중, 어느 단체 창립행사장에서 <섬>을 안 좋게 본 어느 여성평론가가 남편을 붙들고 “그런 영화를 왜! 왜! 왜 만들었어요?”하고, 무대 위에선 연극 배우같은 말투로 물었다.
옆에 서있던 나는 잠시 머리 속에서 그녀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과격한 상상을 했으나, 현실에선 그저 비실비실 웃었을 뿐이다. 비겁하게. 영화를 비평하는 일은 그녀의 소임이지만, 제작자에게 왜 만들었느냐니? 물론 좋아서 만들었지. 몸과 마음을 바쳐가며.
혹평을 늘어놓은 평론가에게 술 취한 목소리로 한 새벽에 쌍소리해가며 원망하는 제작자도 있다지만, 찬사를 보내는 이에게 간이라도 빼 줄 듯 고마움을 전하는 것도 실은 독선이고, 지나친 주관이다.
찬사와 비난에 들뜨고 광분하면 영화 만드는 일은 헛된 공사가 되어버린다. 적어도 영화적 상식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10년 20년이 지나도 보는 이와 만든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영화라고 인정되는 영화가 진짜다. 좋아서 영화 일을 하지만, ‘진심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제대로 된 노력은 하고 있는 걸까? 지금, 나는.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대가와 신인의 공존을 꿈꾸며
심보경 / 2000-06-16 /
80년대를 풍미했던 배창호 감독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든 새 영화와 1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 온 대가 김수용 감독의 신작이 연이어 개봉된다. 참 오랜만에 극장에서 만나게 되는 ‘어른’들이다.
관객의 욕망을 훤히 꿰뚫고 있는듯한 안목으로 빈틈없고 정교하며 화려한 연출을 선보여 거듭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배창호 감독은 80년대 한국영화 보기에 몰두했던 일부 386세대의 ‘스타’였다.
그는 <황진이> 이후 자기 내면을 성찰하기 시작하면서 작품 간격이 뜸해지더니, <러브 스토리>같은 독립영화 방식으로 우리 앞에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신작 역시 한국영화계의 구조 변화에 염증(?)을 느낀 그가 어렵게 찾은 대안적 방식으로 만든 작품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 배창호 감독의 영화와는 ‘청춘’을 같이 보냈으나, 김수용 감독의 영화는 훨씬 낯설다. TV에서 명절 때면 틀어대는 한국 영화 특선에서 81년작 <만추>를 여러번 본 경험과 <허튼소리>를 극장에서 본 기억이 전부다. 부끄럽게도.
한국영화의 ‘얼굴’들은 너무 자주 바뀐다.
데뷔작으로 평단과 대중의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입성했다가, 어느덧 시름시름 사라져가는 한국영화계의 경박한 모습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제 겨우 30세의 나이로 <매그놀리아>를 만들어 세계영화계를 뒤흔드는 청년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과, 64세의 나이에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주류의 장르영화로 미국 흥행가를 압도한 노장 리들리 스콧이 공존·공생하는 할리우드에 비교해보면 우리 영화계는 지나치게 젊기만 하다.
원로도 대박을 터뜨리고, 신예도 걸작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풍토, 적어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나란히 영화를 만들어 서로 영향받을 수 있는 세상이, 훨씬 더 풍요로울 것 같다.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영화와 관객이 처음 만나는 ‘포스터’
심재명 / 2000-06-29 /  

포스터는 마케팅의 얼굴이다.
한국 영화산업에서 영화 마케팅 만큼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분야가 또 있을까 싶은데, 마케팅이 관객과 1대1로 만나는 지점이 포스터다.
배우 송강호는 얼마 전 새 영화 포스터 촬영을 위해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끼만 먹고 볼 살을 뺐다. 영화 촬영을 위해서도 아니고, 광고 사진 한장을 위해 배우가 체중을 조절하는 시대, 그야말로 영화 마케팅은 이렇듯 발전의 속도에 피치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야 참 한가했다.
영화 현장 사진 중에서 막연한 감으로 선택한 한 컷을 오려 붙이기도 했고, 여자 주인공 얼굴에 다른 사람 몸을 갖다 붙여 어색한 조합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게 80년대다. 그때의 원시적 디자인 작업에 비하면, 요즘 포스터는 철저하게 사진, 비주얼, 마케팅 전문가의 손을 거치며 ‘비주얼 폭격’에 동원된다.
관객들이 무심히 보고 지나치면 곤란하다.
그래서 포스터는 참신한 크리에이티브와 실행 능력을 발판 삼아 발전해왔다. 수많은 시안들은 수십번 모니터 과정을 거쳐 메인 컷을 정하고, 포스터 외 각종 전단, 광고에 또 어떤 사진과 디자인을 쓸 것인지 결정하게 된다. 사진 촬영은 사실 시작일 뿐이다.
컴퓨터 그래픽 등의 공정을 거쳐 사진을 다시 만지고 디테일을 다듬고, 비주얼에 걸맞은 레이아웃을 뽑아낸다.
나는 우리 포스터가 극장에 나붙고, 지하도 등에 대형 광고물이 부착될 때면 어김없이 그곳으로 달려가 몇시간씩 지키고 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포스터에 시선을 던지는지 열심히 훔쳐본다.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시선을 잡아 끈다 싶으면 고요하던 가슴은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영화와 관객이 마케터라는 존재를 중매쟁이 삼아 그렇게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찍을 영화는 많은데 ‘배우’가 없다
심보경 / 2000-07-12 / 921

“배우가 없다.” 언제나 탄식처럼 던지는 ‘배우기근’에 대한 푸념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여기서 배우란 ‘스타’란 개념과 오버랩되는 의미로, 상업영화의 흥행과 완성도를 어느 정도 책임질 수 있는 이름과 동일하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 영화계의 진짜 스타의 숫자를 세려면 열 손가락이면 충분하다.
그들에게 1년에 기획되는 100여 편의 시나리오가 달려가고, 10편 정도가 그들의 손에 의해 선택되고 나머지는 기획자체가 무산되거나, 차선의 캐스팅으로 어렵게 영화화된다. 요즘 우리 영화계는 배우가 제작사나 감독에 의해 선택되는 게 아니라, 배우에 의해 ‘그 영화’가 선택되는 기현상을 보인다.
수요(시나리오)와 공급(배우)의 극단적인 불균형 때문이다. 그들을 원하는 영화편수는 줄을 설 만큼 많다보니 그들의 개런티는 끝모르게 올라간다. <접속>때 4000만원을 받았던 전도연의 개런티 상승 곡선은 거의 직선을 달린다. 4000만원에서 1억원(약속), 1억5000(내마음의 풍금), 1억7000(해피엔드), 급기야 최근 출연을 확정한 영화에서 2억원을 돌파했다는 충무로 ‘유비통신’의 전언이다.
<닥터봉>에서 6000만원을 받았던 한석규는 3억원을 넘어선 지 오래전 일이다. 300만원으로 영화 연기를 시작한 송강호는 1억5000만원대의 스타가 돼있고, <해피엔드>에서 1500만원을 받았던 주진모에게 누군가가 3억원을 제시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이야기도 들린다.
2억원대를 이미 돌파했다는 정우성, 박신양을 캐스팅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이다. 영화배우 데뷔작 <접속>때 만났던 전도연을 <해피엔드>로 끌어들이느라 애를 쓰며 개런티 협상을 할 때, 그 사이 가파르게 올라간 개런티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서 배우의 몸값 상승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한번 올라간 개런티는 다시 내려 올 줄 모른다. 1000만불을 호가하던 더스틴 호프만이나, 로버트 레드포드도 나이가 들고, 흥행력이 떨어지면서 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조정되고, 강등되는 경우를 우리 영화시장에선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우리 영화계는 몸값은 높은데, 그만큼 효용성이 떨어진다 싶으면 ‘캐스팅 안하면 된다’ 식으로 정리한다. 그래서 최고를 달리던 과거의 스타는 자신을 찾지 않는 영화계에 배신감을 느끼고, 한참 영화를 만드는 이들은 ‘지금 잘 나간다’는 배우에게 매달려 개런티 상승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앞다투어 일조를 하게 된다.
‘스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산력’이 곧 영화산업의 발전을 가져오는 것 아닐까.
2억원짜리 스타를 기용해 안전한 장사를 도모하는 것보다 치열한 자세로, 새로운 눈으로 ‘스타’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이상 영화만드는 이들이 자존심 덜 구기고 영화일을 할 수 있는 지름길일 것이다.
<여고괴담>, <반칙왕>, <박하사탕>.새로운 개념의 영화,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키는 영화, 그런 영화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경쟁력! 그것이 필요하다.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시나리오 거절하는 네마디는?
심재명 / 2000-07-26 /

할리우드 이면을 풍자하고 조롱한 로버트 알트먼의 <플레이어> 주인공은 야심차지만 비열한 영화 제작자다.
그에게 매달리는 수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검토해보고 연락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말뿐. 결코 다시 연락하는 법이 없다. 꽤 오래 전 이 영화를 보면서 한달에 1만여권 가까이 도착하는 시나리오 더미에 파묻혀 사는 할리우드 제작자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도 제작자가 되었다.
그만큼은 턱없지만 우리 영화사에도 시나리오가 꽤 날아온다. 일주일에 서너편, 한달이면 30편이 넘는다. 기획실 시나리오 담당자의 ‘검토’를 거치지만, 생면부지의 작가지망생들이 쏘아 올린 시나리오에서 ‘물건’을 건진 적은 거의 없다. 개인적 친분이 있거나 정말 적극적인 이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면, 마음에 없는 빈소리를 해야 될 상황이 난감해지곤 한다.
대부분의 제작자들 태도가 비슷하리라고 보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표준치’ 답변을 뽑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 별 토를 달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이건 별 재미없다는 뜻이다. 이하 괄호 안은 진짜 속마음)
두번째, “보긴 보았는데 다시 검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재론의 여지가 없다)
세번째, “다음에 연락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다시 연락하지마)
마지막으로,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연락을 기다리다간 시간만 버릴걸)…

나도 한때 대충 위의 답변들을 상황에 맞춰 써먹었는데, 이젠 방법을 바꾸었다. 솔직하게 “영화화할 의사가 없습니다”로. 너무 매정해보일까?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약을 덜 올리면서 가장 정확한 진심이 될 것 같아서.
시나리오는 어떤 제작자, 어느 감독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그 무엇이다. 한 영화 주간지 시나리오 공모 당시 예심에서 보기좋게 떨어졌다가 또다른 공모전 심사위원들에게 새삼 발견되어 멋지게 영화화된 게 <미술관 옆 동물원>이다.
10년 가까이 영화사를 떠돌다가 어느 여성 프로듀서 눈에 띄어 세계적 히트작이 된 게 <사랑과 영혼>이다. 누구의 손에 의해 선택되느냐에 따라 그 시나리오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수도 있고, 영화사에 빛나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제작자 말 절대로 액면 그대로 믿지 마세요.
그렇지만 지망생 여러분! 기본기는 최소한 갖추고 꿈을 키우세요.


[심자매의 충무로 이야기] 영화 마케팅은 '전쟁'보다 '연애'
심재명 / 2000-08-16 / 1463

새로 개봉할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마케팅 때문에 마음이 초조한 어느 일요일, 책상 앞에 앉아있어도 달게 탄 커피 한잔을 마셔도 마음 속 소요를 잠재우기 어려워 사무실을 나와 지하철을 탔다.
이제 막 출발한 본격적인 마케팅의 첫 페이지, 첫줄이 가물가물해서 오는 불안감이 그 이유였다. 지하철 가판대에서 막 깔리기 시작한 모 영화주간지를 사서 우리 영화 광고를 확인하곤 하릴없이 도심의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영화포스터를 바라보며, 극장 앞에 내걸린 간판을 올려다보며, 그 첫 페이지의 첫줄이 마음 속으로부터 불현듯 솟아오르기를 기다리며 걷고 또 걸었다.
한국 영화 한편의 마케팅비가 평균 제작비와 맞먹을 만큼 상승하고,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퍼부어지는 마케팅의 융단폭격은 흡사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하고, 그 전략과 전술은 날로 고도화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요즘, 영화마케팅이 ‘전쟁’이라기보다는 누군가와 새로 시작하는 뜨거운 ‘연애’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총탄을 퍼붓고, 영토를 빼앗고, 기어코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전쟁이 아니라, 그를 혹은 그녀를 사로잡고 매혹시켜서 나와 우리의 영화를 만나러 오게끔 해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마케팅은 ‘연애’와 참 많이 닮았다.
마음에도 없는 헛된 미사여구와 공허한 치장으로 접근하다간 금방 들통나기 마련이어서, 마케터는 진심으로 자신의 영화와 잠재관객과 사랑에 빠져 진심어린 연애편지를 써야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편이다. 단 눈이 멀어 장점만 보고, 느끼고, 전하는 게 아니라 단점까지 파악하고 현명하게 숨기는 냉정한 시력도 잃지 말아야하는 것이 보통 연애와 다르다면 다를까.
물론 이 연애는 수억원의 돈이 함께 들어가는 꽤 비싼 것이기도 하다.
지하도를 어슬렁거리는 동안 우연히 10년 전에 다녔던 극장에서 청소일을 하시는 아저씨와 마주쳤다. 구부정한 키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는 여전하셨다.
광고 카피 한 줄 뽑아내겠다고 야한 영화 상영하는 극장문을 수십 번 드나들던 나를 혀를 차며 바라 보셨었지 아마.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만 이렇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나요.
저는 또 연애편지 잘 써보겠다고 이렇게 ‘열에 들뜬 채’ 거리를 쏘다니고 있습니다.


[부일시론] PIFF와 한국영화 발전
심재명 / 2000-10-14 / 305

5회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는 이제 어느 정도 안정된 기반을 쌓은 듯 보인다. 회를 거듭하면서 아시아의 중요한 국제영화제로서의 위상을 정립해나가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는 영화제를 기획하고 조직하고 집행하는 사람들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그 저변에는 무엇보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의 성원과 지지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높은 객석 점유율과 놀라운 유료 관객수를 보더라도 우리 관객이 제대로 된 영화제와 좋은 영화에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 알 수 있다.

‘열기’와 ‘안정’ 인상적
며칠 전 직접 본 부산국제영화제의 풍경은 이제 ‘열기’와 ‘안정’의 두 모습을 함께 가져가고 있다는 인상이었다.재미있었던 건, 영화제의 영화를 보기위해 ‘노숙’까지 감행하는 ‘극렬 영화광’들을 심심찮게 발견했다는 것이다. 새벽 2시의 극장 앞에서 햄버거와 콜라로 배를 채우고 가져온 침낭을 펴는 모습을 보곤 그들의 끔찍한(?) 영화사랑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하니 영화제는 활기가 넘칠 수밖에.
영화제에서 볼 수 있는 관객의 뜨거운 관심말고도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입장에서 우리 관객의 남다른 한국영화사랑에 새삼 놀라곤 한다.
지난해 <쉬리>가 가져온 경이적 흥행기록에 힘입어 한국영화 시장 점유율이 40%까지 육박했다.한국영화산업의 일대 부흥의 시기가 도래했다는 장미빛 청사진을 펼치는 쪽과 그것이 <쉬리>가 가져온 특수상황 이어서 결코 낙관할 수 없다는 신중론이 서로 비등하기도 했다.

적극적인 관객들이 있기에
올 상반기 한국영화 시장 점유율이 25% 수준을 간신히 유지하자 역시 99년은 이례적인 해였다는 다소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싶었다. 수치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적 발전 또한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칙왕>, <비천무>, <공동경비구역JSA>로 이어지는 화제작들의 흥행성공으로 올해의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은 35% 수준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높은 자국영화의 점유율의 이면엔 영화인들의 재능과 노력 외에도 무엇보다 한국영화를 ‘기다려주는’ 적극적인 자세의 관객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우리나라 만큼 자국영화 사랑에 능동적이고 그 수준이 높은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셀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감독이 우리영화 <반칙왕>을 보고 대중적이기 보다는 실험적인 영화라고 평했다는데 이 영화가 이룬 서울 80만, 전국 200만명이라는 관객동원 수치는 그의 평가대로라면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공동경비구역JSA>의 서울관객 200만명에 육박하는 관객수도 놀랄만하다. 한 해를 통털어 지난 99년에 이어 최고의 흥행작이 자국 영화라는 점은 실로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영화의 거듭되는 높은 시장점유율 유지를 위해서는 관객의 적극적 수용자세와 그 기대치를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 해야한다는 것이다.
수요(관객)와 공급(영화,영화인)이 서로를 자극하고 긴장시키면서 영화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바람직한 시장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좋은 영화 만들기’ 숙제로
형편없는 완성도로 영화를 만들어놓고 관객이 어느 정도 들면 ‘역시 관객은 우리편이다’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안이한 자세는 곧바로 한국영화의 질에 실망하는 관객들을 만들고 곧 자국영화를 외면하게 하는 길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또한, 다양한 한국영화 만들기를 고민하고 생산해 냄으로써 영화관객의 입맛을 다채롭게 개발시키는 적극적 제작태도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관객의 열렬한 성원과 지지에 부응하는 좋은 한국영화 만들기가 영화인들에게 관객이 부여하는 숙제인 셈이다.
어찌 보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참으로 행복한 고민이요, 기꺼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자국영화시장이 초토화되어 자신이 만든 영화를 들고 해외 영화제를 떠도는 외국의 유명 감독들의 쓸쓸한 행보를 꼭 상기하지 않더라도.


[부일시론] 블록버스터 유감
 심재명 / 2000-11-04 / 369

바야흐로 한국 영화계는 지금, ’블록 버스터’의 계절이다. 블록 버스터(block buster)의 사전적 의미는 ‘초대형 폭탄’이라는 뜻으로 막대한 돈을 들인 영화를 일컫는다.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개념이자 영화 용어로, 스타시스템을 적극 활용하고, 큰 제작비를 들여 흥행 성수기를 겨냥해서 만든 영화들을 지칭한다.
‘크게 들여 크게 번다’는 철칙을 가지고, 흥행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 철저하게 장르영화의 컨벤션에 충실하며, 주로 볼거리, 들을 거리에 치중하는 이러한 영화들은 헐리우드 영화산업의 외형적 덩치를 키워가며,서로 뒤질세라 제작비 경신의 기록을 세워가며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쏟아지는 대작 영화들
그런 헐리우드적 영화개념이 이제 우리 한국 영화계에도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있다. 90년대 중반, 해외로케를 감행하며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제작한 몇 편의 영화들이 속속 흥행에 참패하면서 그 열기가 위축되더니, 지난해 99년,<쉬리>라는 초유의 흥행작으로 대작영화를 만드는 유행은 다시 시작된 듯 싶다. <쉬리>이전 <퇴마록>, <유령>, <자귀모>가 그럭저럭 수익을 챙겼고, <쉬리>이후, <텔미썸딩>, <비천무> 등이 이익을 남겼다. 여기에 <공동경비구역JSA>가 초대박을 터뜨렸고, 이들 제작비를 훨씬 상회하는 <싸이렌>, <단적비연수>, <리베라메> 등이 개봉했거나 대기중이다.그 어느 해보다 대작 영화들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에게 아직 블록 버스터 영화의 개념 정립이나, 전략이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많은 돈을 들여 만드는 건 쉬운 일이나, 그만큼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공식이나 목표가 뚜렷하냐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개념정립. 전략 불확실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한 짜임새 있는 확실한 시나리오, 흥행을 담보하는 확실한 스타, 많은 돈을 쏟아 부은 만큼의 확실한 볼거리,많은 관객을 빠른 기간내에 끌어모으기 위한 확실한 유통망과 시즌 겨냥 등 얼마나 전략적으로 접근하느냐가 이른바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기본개념 들일텐데, 이 공식에 얼마나 철저하냐고 묻는다면, 글쎄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30, 40억원이 들어가는 대작들이 유통되어 큰 수익을 창출하기엔 너무 좁은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는 우리와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헐리우드의 배급시스템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또한 우리에게 있어 해외시장은 아직 불확실한 미답의 땅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크게 들여 크게 번다’는 공식보다는 ‘크게 들여 크게 망할 수도 있다’는 위험이 항상 따르기 마련이다. 또한 철저한 제작 스케쥴 관리를 간과하는 엉성한 제작방식 때문에 목표한 개봉시기를 놓쳐서 흥행전략에 큰 차질을 가져오기도 한다. 다시 말해, 큰돈을 들이는 만큼, 확실하고 정확하게 그 돈을 쓰는 것이 대작 영화를 만들 때 갖춰야할 기본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크기’보다 ‘내용’이 중요
요즘 영상사업에 투자하고자 몰려드는 자본이 1천억이니, 2천억원이니 하는 얘기가 간혹 들린다. 90년대 초반 영화산업에 야심을 갖고 뛰어든 대기업들이 IMF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함께 대부분 손을 뗐고, 그 자리를 주로 벤처 캐피탈의 자본이 대신하고 있다. 이윤을 목표로한 자본은 투자가치가 없으면 바로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쉬운 법이다. 초대작들이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고 흥행에 참패한다면, 이 결과는 바로 한국 영화산업의 위축이라는 모양새로 전이될 것이다. 얼마 전,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한국 영화가 상영되는 강남의 모극장에서 하루 관객이 50명이 넘지 않아 그 극장의 최악의 일일 관객수를 기록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
헐리우드 같은 초유의 영화선진국이 아닌, 산업적으로 아직은 불완전한 한국영화시장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크기’보다 ‘내용’이 아닐까. 무모하고 엉성한 그야말로 무늬만 블록 버스터인 영화의 양산은 곧 한국 영화를 지지하는 관객의 신뢰도를 잃고, 한국 영화의 산업적 경쟁력을 잃게 되는데 앞장서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갑자기 찾아온 이 블록 버스터의 계절에….


[부일시론] 한국영화와 여성 영화인
심재명 / 2000-12-02 / 527

지난 11월10일부터 3일간 <한국여성영화축제>가 열렸다.
2000년 4월에 발족한 ‘여성영화인모임’이 주최한 행사로 올 한 해 동안 여성영화인들의 작품 활동을 조망하기 위해 기획된 말 그대로 ‘작은 축제’였다. ‘과거’ 부문에서는 당대의 톱스타이자 배우로만 알려진 최은희씨의 연출 작품을 발굴해서 감독으로서의 선배영화인에 대한 재조명을 꾀했으며, ‘현재’ 부문에서는 두드러진 활약과 성과를 거두고 있는 여성제작자들의 작품을 모아 상영했다. ’미래’ 부문에서는 여성감독들의 단편영화를 예심을 거쳐 수상작을 가리는 경선형식으로 젊은 여성영화인들의 재능과 가능성을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 외에도,여성영화인모임이 주축이 되어 제작하고 있는 ‘여성영화인의 역사’라는 다큐멘터리의 축약본을 만들어 여성영화인들과 함께 우리의 영화역사,여성영화인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자리를 토론과 함께 진행하였으며,기타 알찬 이벤트들도 마련하였다.

연대감 느끼게 한 여성영화축제
이 행사를 준비하고,참여한 한사람으로서 나름대로의 감회가 꽤 크다고 말하고 싶다. 예상보다 적은 인원과 관객이 이 축제를 찾았지만, 이 행사를 통해 ‘한국영화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여성영화인들의 ‘연대감’ 또한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첫날 ‘감독 최은희’를 알리는 자리에 참석한 대선배 최은희씨의 소회 어린 눈물을 보며, 그리고 그의 수십년의 활약이 담긴 영상자료를 보며 나 또한 가슴이 뜨거워짐을 굳이 감추고 싶지 않았다. 개막식과 최은희씨의 연출작 ‘민며느리’ 상영이 끝나고 가졌던 리셉션 자리에는 평소에 뵐 수 없었던 원로 여성영화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의 편집을 시작으로 올해 박종원 감독의 최신작 ‘파라다이스 빌라’까지 편집기사로만 50여년을 살아온 여성편집기사 2호 이경자 선생님, ’단종애사’에서 ‘장군의 아들’까지 역시 50여년을 의상일에만 매달려 온 이해윤 선생님을 가까이서 뵙고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이제 겨우 영화계 경력 10년차인 나는 ‘평생’을 영화와 함께 한 그분들 앞에서 머리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최은희씨 ‘민며느리’ 뜨거운 감동
오후 7시 행사에 맞춰 양수리 자택에서 오후 2시부터 외출을 서두르셨다는 선배님의 올곧고 그러면서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의 깨끗하고 순수한 눈빛과 마주하면서 영화에 인생을 바친 그분들의 일에 대한 사랑과 영화에의 헌신이 그저 존경스럽기만 했다. 가는 차편을 걱정하시며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가시는 그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선배와 후배,그리고 그들이 각자 걸어온 길, 걸어가는 길, 걸어갈 길에 대한 세대간의 따뜻한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곧 ‘한국영화계’를 튼튼하게 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과거 속에서 미래 희망 찾아야
과거 없이 현재가 없고, 또한 미래도 없듯이 지난 과정을 들추어보고 정리하고 지침으로 삼는 인식이 우리 젊은 영화인들에게 필요하며 또한 마땅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어느 문화학자가 이야기하듯 21세기는 ‘디지털’과 ‘페미니즘’이 그 화두가 될 것이라고 한다.
여성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계에서의, 한국영화 역사속에서의 여성영화인의 족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더듬을 수 있는 자리는 계속 마련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그 행사를 통해 절감했다. 또한 그저 ‘오늘’만 있고 ‘오늘의 성공’만 중요한 근시안적 태도가 아닌, 영화역사의 발전과 변화와 전망에 대한 ‘겸손한 인식’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 소중한 자리이기도 했다.


[부일시론] 새로운 기회가 오고 있다
심재명 / 2001-01-30 / 475

몇년 전까지만 해도,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메릴 스트립 같은 대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는 흥행이 보장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만 내걸면 30만명 이상은 관객이 몰리던 때도 있었다. 몇 안되는 영화 잡지의 표지는 항상 리버 피닉스니,키아누 리브스니, 더 거슬러 올라가 소피 마르소나 나스타샤 킨스키 같은 외국의 스타가 아니면 안되는 적도 있었다.

한국영화 위기를 기회로
지금은 어떤가. 메릴 스트립이 나오고, 웨스 크레이븐이라는 유명 감독이 만든 ‘뮤직 오브 하트’가 언제 개봉되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가고, 로버트 드니로의 최신작이 전도연, 고소영 등 한국의 여배우들의 출연작 앞에서 맥을 못추는 형국으로 바뀌었다. 그야말로 서양영화와 자국영화 간의 ‘전세 역전’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자국영화의 선전과 득세는 기록 수치로도 입증되고 있다. 지난 99년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39.7%였다. 물론 98년의 25.1%에 비해 엄청난 신장세를 보인 것은 ‘쉬리’라는 초특급 흥행작 덕이기도 하나 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지켜온 24~25대의 점유율만 보더라도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지난해 ‘공동경비구역 JSA’를 비롯한 한국영화의 선전으로 점유율은 33%대를 웃돌았다. 세계적으로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25% 가량 유지되고 있는 나라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니, 한국의 경우는 ‘자국 영화의 활황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선전은 역설적으로 1984년 외화 수입 자유화나 88년 시작된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직배와 맞물린다. 84년 한국 영화가 38%의 관객 점유율을 이룬 이후 계속되는 점유율 하락과 88년 시작된 할리우드 직배 영화의 쏟아지는 물량 속에서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리는 듯 하더니, 그러한 위협을 합리적 제작시스템을 갖춘 프로덕션의 형성과 유능한 젊은 인력들의 대거 유입, 대기업 및 창업투자 전문금융회사가 참여함으로써 얻게된 제작 자본의 안정화, 유통 배급 시스템의 전문화 및 거대화 등으로 극복해가면서 한국 영화는 ‘위기’를 ‘기회’ 삼아 도약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99년 말, 2000년 초부터 본격화한 창업투자회사들의 영화에 대한 투자 열풍은 한국영화의 제작 규모를 키우는데 일조해 왔다.지난해부터 시작된 소위 한국형 ‘불록버스터’ 열풍은 여기에 기인한다.

새 형식.기법 야심작 ‘속속’
그렇다면 2001년 한국영화 전망은 어떤가. 또다른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조짐들이 역력하다. 우선 아직 안정된 시장이나 흥행 구조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변화를 예고하는 30억원 규모의 ‘마리 이야기’나, 새로운 형식의 SF 애니메이션 제작을 목표로 다양한 기법을 총동원하는 60억원짜리 ‘원더풀 데이즈’, 장선우 감독과 박재동 화백이 함께 준비하는 ‘바리공주’프로젝트들은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가능성과 실험에 승부수를 거는 새로운 야심작들이다.
여기에 디지털 영화나 인터넷 영화에 관한 실험은 유능하고 젊은 감독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 ‘무사’나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등 규모와 형식, 나아가 내용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 돋보이는 기대작들도 기다리고 있다.아 울러 ‘제노사이드’, ‘로스트 메모리즈’, ‘내추럴 시티’ 같은 실사 SF 영화도 곧 제작에 착수할 예정이다.

여성감독들 성장도 괄목
거대 자본에 힘입은 애니메이션, SF영화에 대한 실험과 도전 외에도 한국 영화계는 지난 80년간 배출했던 여성 감독들의 숫자를 능가할 만큼의 많은 여성 감독들이 등장했거나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영화관과 세계관은 곧 한국 영화의 의미있는 ‘대안’으로 자리잡을 듯하다.
일일이 거론하기도 숨이 찰만큼, 2001년의 한국영화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면서 한국 영화의 산업적 가능성에 대한 도전과 그 잠재력에 대한 실험에 피치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영화가 영화 선진국들의 영화에 비해 왜소성을 면치 못했던 과거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 지금의 터전을 만들어왔다면 이제는 찾아온 이 ‘기회’를 또 다른 도약의 받침대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부일시론] 베를린 영화제를 다녀와서
심재명 / 2001-03-01 /

‘공동경비구역 JSA’의 경쟁부문 초청건으로 얼마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이 영화제완 인연이 깊어 우리 영화사가 제작한 ‘접속’이 98년 포럼 부문에, ’조용한 가족’이 99년 포럼부문에 초청되었고 ,2001년에 ‘공동경비구역 JSA’가 경쟁부문에 나가게 되었다. 98년 겨울에 이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심하고 제작기획서를 만들 때부터의 목표가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출품한다는 것이었다.
분단의 현실을 그린 이 영화가, 과거 분단 국가였던 독일, 그것도 분단의 경계선에 놓여 있던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이방인들에게도 보여지길 희망했던 것이다.
희망은 현실이 되었고, 이 영화를 가지고 포츠담 광장의 중심에 위치한 본부이자 메인 상영관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의 빨간 주단을 밟았다.

‘공동경비구역 JSA’ 호평
공식상영은 예상보다 더욱 성황이었다. 1천600석이 일찌감치 매진되었고, 관객 반응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과연 서구인들이 한반도의 정치, 역사적 상황을 압축하고 있는 공간으로서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삼엄하게 대치하고있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상황과 그것을 영화적으로 풀어낸 화법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그들의 대체적 반응은, 코믹한 부분은 거의 우리 관객 수준만큼 공감하는듯 했다. 이를테면, 오경필 중사가 ‘남조선보다 더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꿈’이라고 내뱉는 신에서는 폭소와 박수가 터져 나왔고, 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침을 뱉는 장면이나, 남성식 일병이 마치 애인사진을 꺼내놓듯 스을쩍 고소영이라는 스타의 사진을 보여줄 때도 한국의 관객만큼 박장대소했다.
그들이, 결국 서로 총을 겨눌 수밖에 없는 라스트의 상황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이 사라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 갈때부터 시작된 진지한 박수로 그들의 호응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었다.
‘경계를 넘어선 영화’라고 호평하는 등,독일의 각 언론 매체들의 호의적인 리뷰를 통해서 우린 비교적 성공적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아쉽게도 수상의 기쁨까지는 누리지 못했다. 역사와 현실을 민감하게 반영하는 영화제인지라,정치적 상황의 미묘한 동질성에서 오는 관심과 주목이 어쩌면 수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했으나, 그건 쓸데없는 기대가 되었던 셈이다 .

아쉽지만 수상의 기쁨 못누려
또한 아직도 서구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빛나는 주목을 받기에는 뭔가 아직도 때가 덜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 시각은, 서구의 명망있는 국제영화제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수동적인 입장에서 느낀것 뿐이다. 일찍이 장이모와 궁리를 발견, 세계적 스타로 만든 베를린이나, 왕자웨이와 량차오웨이, 트란 안 훙을 키운(?) 칸과 베니스에 비해 우리는 이제 칸 경쟁부문에 입성했다고 흥분했고 수상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했을 뿐이다.

세계적 명성의 한국영화 기대
국제영화제는, 영화의 상품으로서의 지나친 상업주의를 견제하며, 올곧은 영화정신, 영화작가를 발견하고, 평가하는 의미에서 그 존재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60년대에 ‘마부’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80년대에 ‘씨받이’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긴 했으나, 그런 새로운 발견이 지속적인 한국영화에의 관심과 주목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국영화산업의 규모가 커지고, 성장하고 있는 요즈음 아울러 세계적인 명성을 성취하는 한국영화, 한국영화감독, 한국영화배우도 탄생하길 기대한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참가라는 공식적인 일정말고는 영화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로얄 팔라스트에서 위치를 옮겨 포츠담 광장에 새로 세운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와,거대한 규모와 위용을 자랑하는 소니센터에 위치한 멀티플렉스를 오가며 나 역시 영화제에서 발견하게 되는 ‘영화의 보석’을 만나려고 돌아다녔다.
영화제작자로서,혹은 참가자로서 오는 묘한 긴장과 비즈니스가 아니라면, 그저 관객의 입장에 베를린의 음습한 날씨와 하늘에도 불구하고 영화제는 ‘흥분된 정서적 고양’을 주는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나는, 우울하기 짝이없는 그 날씨 속에서 부산국제영화제의 파란 하늘과 에너지를 떠올렸다.



[부일시론] 부산 이야기
심재명 / 2001-03-29 /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본 사람이라면, 로마를 직접 갔을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이 이 영화가 아닐까. 금방 미장원에서 자른 숏 커트의 머리와 앙증맞은 스카프를 날리며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오드리 헵번이 걸어 내려오던 ‘스페인 계단’이며, 스쿠터 소리가 요란하던 로마의 거리 등 이 영화로 각인된 로마라는 도시의 기억은, 이 영화가 만들어진 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워낙 유서 깊고 유려한 풍광의 도시이긴 하지만,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 한 편이 불러일으키는 이 도시에 대한 정서적 감흥은 더욱 친근하고 특별하며 대단한 것이다.

명화속에 각인된 세계도시들
우리는 그렇게 영화를 통해, ‘공간’과 ‘시간’을 새삼 새롭게 인식하고 기억하게 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음습한 자줏빛 벽돌과 회색빛 하늘을 영국영화 ‘트레인 스포팅’을 통해 만났고, 왕가위의 영화들에서 도시 뒷골목의 그늘과 명멸하는 불빛이 교차하는 홍콩이란 공간의 매력을 새삼 깨달았다. 영화의 배경이 된 어떤 도시나 공간에 대해 새롭고도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온 세계의 영화들은 정말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나라의 경우는 불행히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만들어지는, 동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곳은 ‘서울’이라는 도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이란 대도시를 매력적으로 인상 깊게 그려낸 영화는 과연 몇 편이나 될까.
인물이 숨을 쉬고, 움직이는 배경이 되는 공간에 대해 탁월한 시각으로 해석해낸 창작자들의 눈에도 문제가 있겠지만, ’서울’이라는 도시가 갖는 매력 없음, 재미 없음에도 그 원인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친구’서 그려진 부산의 향수
서구의 문화적 트렌드를 정신없이 따라가는 국적불명의 외양을 하고 있는 강남, 회색 콘크리트와 졸렬한 감각이 어지러운 강북, 그야말로 정체성 없는 ‘서울’이란 도시는, 또한 경망스러운 미술적 안목과 더해져 요상한 모습으로 우리의 영화에 드러나왔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자기비하일까. 최근 몇몇의 한국영화에서,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벗어난 공간에서 촬영을 진행하는 시도들이 있어 왔다. 군산을 주 배경으로 한 ‘8월의 크리스마스’, 인천을 중심으로 촬영한 ‘파이란’,부산이 아마도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 등등이 그러하다.
그렇고 그런 영화의 배경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새로운 이미지를 던져주고, 또 다른 정서적 환기를 불러일으키는데 적절한 시도들이 아니었나 싶다.
며칠 전 시사회에서 본 ‘친구’는 아마도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영화로 남을 듯싶다. 자갈치 시장을 가로지르며 질주하는 청춘 군상은 묘한 지역적 정서와 맞물려 더욱 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바다와 하나가 되어 뛰어 놀던 유년의 묘사는 부산이라는 공간이 영화의 ‘운명적’ 배경이 되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어쭙잖은 감각으로 꾸미거나 바꾸지 않고도,있는 그대로의 그 공간이 주는 매혹과 내러티브를 튼튼하게 받쳐주는 힘을 ‘부산’이라는 도시가 다해 주었다고, 영화를 보며 내내 생각했다.

영화도시 부산의 미래 밝다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어른이 된 감독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부산영상위원회’란 이름으로 영화제작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지원해주고 협조해주는 시스템이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을 것이다. 언제나 비협조적인 분위기에서 시간에 쫓겨 장소와 거리를 빌려놓고 빠듯한 촬영을 진행해야 하거나, 아예 촬영 허락을 불가하는 성역과도 같은 장소를 매번 발품만 팔거나 군침만 삼키다가 돌아서야 했던 기억들과 비교해 보면, ‘부산영상위원회’의 존재는 대단히 고무적으로 여겨진다.
영화에 대한 적극적 협조와 애정은 그 도시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 쇄신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영화 ‘친구’를 보면서, ‘부산영상위원회’의 더 큰 발전을, 부산이라는 도시와 사람들의 영화에 대한 애정의 발전을 마음 속으로 기원했다.


[매경춘추] 기본기
심재명 / 2001-01-05 /

얼마전에 나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 화가 난 적이 있다.
분명히 이야기 한 내용인데 틀리게 기록된 것이다.
현상과 상황에 대한 ‘분석’이나 ‘전망’이 아닌, 그저 ‘사실’일 뿐인 내용이 잘못 기재되었을 때 오는 허탈한 황당함이란...... 문장의 뉘앙스가 다르게 편집되고, 인터뷰이의 의견이 인터뷰어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재해석되는 것이 아닌, 이를테면 심재명이 오재명으로 표기된다거나, 98년도에 있었던 일이 99년도에 있었던 것으로 틀리게 씌어있는 기사를 보면 왜 기본적 사실을 정확하게 쓰는 것에 대해 이토록 무심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이가 분명 그 자리에서 정확하게 이야기한 사실조차 기록할 기본적 소임조차 다하지 못하면서 무슨 어줍잖은 ‘단상’은...... 이런 원망이 드는 것이다.
지난 한해는 <공동경비구역JSA>로 실로 바빴던 한해였다. 과분한 성공까지 따라주어 그 바쁨은 배가 되었다.
수많은 인터뷰를 했고, 나를 비롯한 이 영화에 관련된 사람들과 사건들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렸다.나를 수식하는 문장 중에 가장 많았던 표현은, ‘미다스의 손’, ‘마케팅의 귀재’였다.
정말 낯 뜨거운 칭찬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에게, 네가 정말 마케팅의 귀재야? 라고 물어봤을 때 내 속마음은 ‘그렇다’라고 자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당한 감으로 해치운 적도 비일비재했고, 능력 이상의 운도 따라 주었고 완벽한 일처리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실수와 무지함을 드러내는 내 자신을 시도 때도 없이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나 ‘기본기’를 다지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지만, 게으름과 어리석음으로 훌쩍 넘어가는 수도 왕왕 있었던 나였음을 누구보다 내 자신이 알기에, 그런 수식어에 얼굴이 붉어지게 되는 것이다.
군데군데 오기된 기사를 보면서, 나는 그 ‘기본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 평가받는 세상이 아니라,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부끄러워할 줄 아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1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를 제작한 프로듀서보다는, 프로듀서가 갖추어야할 자격조건에 다가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영화 프로듀서, 정확한 ’Fact’를 기록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기자, 최고의 개런티를 받으려고 애쓰는 배우보다는 스스로 최고라고, 아니 최고가 되고자 부단히 몸과 마음과 영혼을 연마하는 연기자, 그런 사람이 많은 세상, ‘기본기 ’를 갖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기대해본다.
새해에.



[매경춘추] 여성감독
심재명 / 2001-01-11 / 387

2001년 영화계, 올 한해에 데뷰작, 혹은 차기작을 내놓는 여성감독만도 8 ~9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96년 ‘세친구’를 만들었던 임순례 감독은 5년만에 ‘와이키키 브라더 스’를 완성, 상반기에 관객과 만날 것이고, 영상원 출신 1호감독이 될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란 영화의 크랭크 인을 목전에 두고 있다. ‘세친구’의 조감독을 지낸 박경희 감독은 ‘쉬리’의 여전사 김 윤진을 내세워 새로운 감성의 여성영화 ‘미소’를 준비중이며, 내달 촬 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작품성과 흥행성면에 서 모두 성공한 이정향 감독도 두번째 영화의 시나리오를 막 탈고했다고 한다. 한국의 여성감독 중 가장 많은 연출편수를 보유한 이미례 감독도 오랫만에 신작을 내놓을 예정이다.
1919년 ‘의리적 구투’로 시작된 한국영화 역사 80년동안 만들어진 한 국영화는 약 5000편에 이른다. 그 긴 시간동안 등장한 여성감독의 숫자 는 모두 8명 그들이 만든 영화는 20편에 불과하다. 참으로 빈약한 편수 여서 한국영화 역사로 이야기할 때 ‘변방’의 의미정도가 아니라 아예 ‘희귀한 그 무엇’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서방의 영화역사 속에서도 여성감독의 목소리는 미미한 편이지만, 특히나 가부장적 가치 관과 남성중심적 시각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경우는 더더욱 여성이 영화계에서의 자기역량을 펼 기회를 얻기에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감독으로서의 창조적인 재능과 깊이있는 세계관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보다는 제작현장의 카리스마와 통솔력이 더 필요한 ‘야전사령 관’으로서의 능력이 더 우선시 되었던 과거의 제작현장 분위기가 과거 여성감독을 쉽사리 수용하기 어렵게 했던 것이다.
이제 한국영화의 제작시스템은 실로 합리화, 전문화를 향해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고, 영화를 꿈꾸는 여성인력의 숫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녀들의 영화에 대한 욕망과 영화계의 내적·외적 발전이 서로 맞물려 더이상 영화감독이, 영화계라는 곳이 남성전유물적인 직업이나 공간이 아님을 막 증명해 가고 있다.
한국영화 80년동안 등장한 여성감독이 모두 8명, 이제 2001년 한해에 80 년동안 배출한 숫자를 넘는 8~9명의 여성감독의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실로 엄청난 변화의 가속도가 이난가. 누군가가 21세기의 화두는 ‘디지털’과 ‘여성주의’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듯이, 막 21세기를 맞는 한국영화계에서 ‘그녀’들의 빛나는 활약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매경춘추] 가치관의 차이
심재명 / 2001-01-25 / 289

휴일에 네 돐이 갓 지난 딸아이와 영화 '치킨 런’을 보았다.
꼬마 관객 중에 최연소로 보이는 내 딸이 글씨를 못 읽는 통에 앞뒤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가며 계속 자막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매일 알을 낳지 않으면 도끼에 목이 날아갈 판인 농장의 암탉들, 그 중 끈질기게 탈출을 시도하는 암탉, '진저’는 비록 닭이긴 하지만 내가 본 수많은 영화 중에 단연 돋보이는 주체적 '여성 캐릭터’였다.
억압을 억압으로 느끼지 못하고 그것이 그저 운명이려니 체념하는 많은 닭들을 설득하고 의식화 교육(?) 을 시켜가며 끊임없이 구체적 방법으로 자유를 획득하는 길을 고민하는 그녀가 참으로 기특해 보였다.
그 와중에 나타난 '날 수 있는’ 닭, '록키’의 등장은 그녀들에게 구세주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의 정체가 곧 들통나고 '진저’를 선두로 한 농장의 암탉들은 자발적으로 탈출의 방법을 구체화한다.
영화를 다보고 나온 나는 딸아이에게 누가 제일 멋있었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서슴없이 '록키’란다.
일단 머리 모양이 너무 멋있고, '진저’ 가 치킨 파이 기계로 끌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달려가 구해 주었으니까 단연코 '록키’가 멋지다는 거였다.
나는 입에 침을 튀겨가며 '진저’가 얼마나 똑똑하고 진취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인지를 이제 네 돐이 지난 아이 수준에 맞게 이야기하려 노력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아이의 막무가내로 '치킨 런’에서 제일 멋진 존재는 '록키’로 결론이 나버렸다.
딸아이와 말도 안되는 대화를 통해 얻은 결론은 이렇다.
'자신의 가치관 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자세’라는 것이다.
누구는 극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휘파람을 부는 '록키’같은 인간이, '미스 고지식’이라고 불릴 만큼 삶을 치열하고 절박하게 고민 하는 '진저’같은 인간보다 더 매력적으로 여겨도 아무 문제 없다는 생각이다.
어린 아이가 닭 농장의 주인 '트위디’ 여사가 왜 폭압적인 존재인지, 그들이 왜 그토록 자유를 염원하는지를 알기란 아직 요령부득이지만 언젠가는 '진저’가 왜 괜찮은 인물인지를 알게 되겠지. 또한 알아야 하고. 세상이 어떻게 잘못되었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건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필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삶의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 지는 정말 '자유’ 이다. 멋진 방랑자 '록키’나, 현명한 리더 '진저’도 아닌, 극한 상황에서도 ‘뜨개질’을 멈추지 않는 평범한 한 조연급 아줌마 닭에게 인간적 매력을 느껴도, 그런 모습으로 사는 것에 행복을 느껴도 크게 잘못은 없는 것이다.
세상사의 모든 잘못된 문제는 모두 다 똑같은 생각을 함으로써 획일화 되는 것, 혹은 내 생각과 다르면 안 된다는 '독단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암탉들의 반란을 보고 난 후 든 한 아줌마의 생각이었다.



[매경춘추] '와호장룡'의 이안 감독
심재명 / 2001-01-31 / 321

지금 서구 영화계에선 이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의 열풍이 대단하다 고 한다.
얼마전 있었던 제 88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이안 감독은 감독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명성을 미국 내를 비롯 전세계에 알렸으며, 영화의 예술적 성취에 주목하는 LA비평가협회 등 각 비평가협회에서 뽑는 2000년 최고의 영화에 빠짐없이 선정되기도 했다.
이러한 폭발적 관심은 여자 주인공 장즈이에게도 이어져 단번에 세계적 여배우로 부상 중에 있으며, 며칠 전 열렸던 선댄스 영화제의 월드시네마 부문에 출품된 장이 모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은 그녀의 인기에 힘입어 '관객상'을 수상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이미 선댄스 이전 유수의 국제영화제에 출품되고 수상도 한, 시간이 '좀 지난' 작품인데도 말이다.
<와호장룡>을 만든 이안 감독은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서 수학한 후, 대만의 중산층 가족 이야기부터 영국의 멜러 시대극, 미국 남북전쟁 시대를 웨스턴 무비로 풀어내는 등 주제와 장르에 대한 실험과 그 행보가 가히 코스모폴리탄적이었다.
<결혼 피로연>, <음식남녀>, <센스 & 센스빌 리티>, <라이드 위드 데블> 등이 그러하다.
그의 신작 <와호장룡>은 일종의 중국의 무협영화이면서 동양의 '정신'을 깊이있게 끌어내 무협물 그 이상의 경지와 영화적 수준을 구현해내었다.
<와호장룡>은 특히나 컴퓨터 그래픽 등의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낸 가공의 액션이 아닌 인간이 손으로 만들어낸 지극히 동양적 액션이 돋보이는 새로운 '스타일'을 굉장한 수준으로 창조해낸 것이 유독 서구 영화계와 서구의 관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것 같다.
세계는 지금 아시아 영화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와호장룡>은 그 관심의 중심에서 가장 중요한 기폭제로 기능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몇몇 아시아 감독들은 서구인의 눈으로 본 '오리엔탈리즘'의 수준을 넘어서 아시아의 문화적 특성을 감독의 내부에서 승화시켜 개성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숙성시킨 영화들을 속속 만들고 있는 것이다.
<와호장룡>이 작품적 평가 뿐만 아니라 흥행몰이에도 성공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이다.
같은 아시아권의 영화인으로서 이안 감독에게 놀라운 존경을 보내고 싶을 따름이다.
전세계를 향해, 한국 연기자가 나오고 한국의 풍광이 나오면서도, 이국정서로서 수용되는 것이 아닌, 세계인이 공감하고 환호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드는 세계적 한국 감독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그닥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다.



[매경춘추] '캐스트 어웨이'와 톰 행크스
심재명 / 2001-02-06 /

며칠 전에 개봉한 최신작 <캐스트 어웨이>는 아직 보지 못했다.
시간을 내서 극장에 가 꼭 관람하리라 마음먹은 바, 그 가장 큰 이유는 소재보다도 , 주제보다도, 헐리우드 박스오피스를 점령한 놀라운 흥행성적보다도 다른 데 있다.
바로 <캐스트 어웨이>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있다.
말 그대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기획자인 톰 행크스라는 배우의 불굴의 의지에 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는 작업을 위해 영화의 주인공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생활하며 '살아남기' 위한 전략과 에피소드들을 실제로 체험하며 만들어 내었다고 하며, 주인공을 맡은 톰 행크스는 앞부분의 씬들의 촬영을 꽤 통통한 자신의 육체로 끝내고는, 1년여의 시간 동안 초인적인 체중감량을 무인도에서의 실생활과 함께 감행했다는 후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영화 속 톰 행크스의 놀라운 변화를 낱낱이 목격하며 그 리얼리티를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의 영화를 위해 그야말로 목숨을 건다는 말이, 인생을 바친다는 의미가 톰 행크스라는 배우를 통해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런 황당한 무용담 같은 이야기를 가끔 듣게 된다.
영화 <분노의 주먹> 때 20Kg 가까이를 증량한 로버트 드니로의 투혼(?), 영화 출연을 위해 바퀴 벌레를 씹어먹었다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만용(?),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생이빨을 돌로 부러뜨려가며 늙은 노파역을 열연했다는 <나라야마 부시코>의 여배우, 적나라한 정사씬을 위해 촬영 하루 전날 남녀배우를 한방에 몰아넣고 문을 잠가버렸다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매서운 집념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충격에 가까운 감상을 느끼게 한다 . 제대로 된 영화화를 위해, 그렇듯 인생을 거는 일들은 그 어떤 드라마틱한 영화의 내러티브보다 더한 감동을 줄 때가 있다.
우리가 영화 속 ‘환타지'를 냉소하지 않고, 열광하고 감동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데에는 그런 사람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들 때문일 것이다.
굶주린 부랑아 역을 해내야 하는 배우가 윤기 흐르는 통통한 얼굴을 분장으로 아무리 가린다 해도 우리는 그 게으른 속임수를 알아차리곤 한다 . 세상을 부끄럽지 않게 사는 데에는,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 그렇게 목숨을 걸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매경춘추] 독일판 '접속'
심재명 / 2001-02-19 /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공동경비구역JSA' 때문에 지금 나는 며칠째 베를린에 머물고 있다.
어제는 영화제가 한창 열리고 있는 이곳에서 좀 떨어진 일반극장을 찾았다.
우리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 '접속'을 리메이크한 독일 영화를 보기 위해서. 98년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접속'을 인상깊게 본 독일의 한 프로듀서가 리메이크 판권을 사고 싶다고 제의해와서 계약을 한지 만 3 년만에 독일판 '접속'을 베를린의 한 극장에서 보는 경험은 꽤 색다른 것이었다.
지난해 칸느에서 만난 독일의 그 프로듀서는 제명 때문에 고민이라고 했었는데 결국 영화는 '접속'의 남녀주인공 ID인 '여인2&해피엔드'란 제목 을 달고 있었다.
남자주인공이 아이가 있는 라디오 음악프로 DJ이자 뮤지션으로 설정된 것 이외에는 우리 시나리오 그대로였고, 디테일한 에피소드들까지 그대로 사용되어 있었다.
남자주인공을 맡았던 한석규와 독일배우와의 비교, 서울이라는 도시와 베를린 풍경의 비교, 채팅장면의 차이 등을 음미하며 보는 재미가 남달랐다.
짝사랑을 하는 여자, 사랑의 상처가 있는 남자, 그들이 얼굴도 모른 채 각자의 외로움을 통신으로 소통하는 영화의 주제와 그 정서를 서양인들이 그대로 옮겨 다시 만들었다는 상황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서로 다른 국민성과, 서로 다른 풍습을 사는 사람들이지만 '영화'라는 매체는 그 모든 차이를 관통하는 '공통된 정서적 언어'를 갖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접속'의 독일판 영화 '여인2&해피엔드'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은 아주 작고 오래된 복합관으로, 매점과 매표일을 겸하고 있는 여직원이 달랑 혼자 로비를 지키고 있는 상영관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접속'은 1000석이 넘는 극장의 모든 좌석을 연일 매진시키면서 그해 흥행1위를 차지했고, 독일판은 단8명이 앉아있는 초라한 극장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는 것. 물론 상영기간이 꽤 흐른뒤라곤 하지만 독일영화가 자국에서 맥을 못추는 독일영화시장을 반영하듯 흥행성적은 실망스럽다는 것이 그 프로듀서의 전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극장앞 거리에는 사랑하고 지지하는 관객이 있는 서울 , 발전하고 있는 한국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서울이 그리워졌다.
어서 돌아가, 꼼꼼히 시나리오를 읽고 사람들을 만나고 회의를 하고, 영화를 만드는 그 매일의 일상에 다시 몸을 담가야지하는 의욕도 불끈 솟았다.



[매경춘추] 한국영화 희망있다
심재명 / 2001-02-23 /

2001년 한국영화의 흥행성적표나 작품적 성과를 두고 누구는 심각하게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또 누구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분기별로 봤을 때, 99년 상반기의 <쉬리>, 2000년 상반기의 <반칙왕>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분명 신통찮은 성적을 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블록버스터 영화의 제작에 힘을 쏟다보니 전체적 내용 부실을 가져왔다거나, 풍부한 자금이 돌아다니는 환경 속에서 안이한 제작 태도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다 수긍할만한 논리이다.
그러나 현재의 결과를 놓고 무조건 부정적으로 우려의 시선만 보내는 것도 너무 독단적이고, 단선적인 시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낙관적이다 . 이를테면, 99년, 2000년에 좋은 결과를 내고 평가를 받았던 감독들이 현재 차기작을 준비중이거나, 막 촬영을 시작하는 데서오는 '일시적 공백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즉, 99년의 흥행작 <주유소 습격사건>을 만든 김상진 감독은 이제 다음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한국 영화계의 버팀목이자 중견인 장선우 감독의 신작도 촬영중이며, 배창호 감독이나 임권택 감독의 차기작도 구체적으로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있다.
여기에, 98년의 수작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의 다음 영화도 촬영을 시작했으며, 장윤현, 김지운, 박찬욱, 홍상수 감독 등도 상반기 내에 제작에 돌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기에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개봉을 준비하고 있으며, 정재은 감독의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 >도 한창 촬영 중이어서 실로 여성 감독들의 약진도 기대된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반기부터 쏟아져나올 이 기대작들 사이에서 우리 영화사가 만든 영화가 경쟁해야 하는 살떨리는 긴장감을 느낄 정도 이다.
또한 순수한 관객의 입장에선 한국의 중견 감독들의 야심작부터, 작가주의 감독의 신작, 흥행감독들의 화제작, 여성감독들의 세계관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흥분이 될 정도이다.
너무 안일한 낙관주의일까? 중요한 것은, 낙관과 비관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라 '거시적 안목 '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 문제는, 정확한 근거와 분석없이 예단하거나 속단하는 데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고 본다.
넓게 바라보고 깊게 생각하는 자세야말로 '튼튼한 기준'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내가 바라보는 이후 한국 영화계의 전망도 게으른 태도에서 오는 낙관주의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영화 일선에서 일하는 한사람으로서 현재의 부진과 문제점을 통해 그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고 반성하고, 계획을 세우는 자세가 필요하겠지, 물론. 어쨌든, 아직도 나는 희망적이다.



[심재명의 오! 캐스팅] 1. 하늘의 '별' 따기
심재명 / 2001-09-20 / 291

'명필름' 의 심재명 대표가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담은 '오 캐스팅!' 을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명필름은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등 일련의 히트작을 기획.제작한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영화사입니다.
스타 배우를 둘러싼 캐스팅 전쟁 이야기, 배우와의 인연, 개런티 이야기 등을 담게 됩니다.

***어르고 달래고... 새영화 시작때마다 '스타님'모시기 전쟁

내가 대표로 있는 '명필름' 의 초기 시절 이야기이다. 2년간 시나리오 작업을 힘들게 마친 뒤 마지막으로 캐스팅 작업에 들어갔다.
한데 이게 웬일. 만나는 스타들마다 '못하겠다' 는 답만 보내왔다. 그러다 분명하게 거절의사를 밝히지 않은 배우 J씨를 어렵게 연락해 만날 약속을 하곤 감독과 함께 매니저 사무실로 향했다.
반신반의하는 그를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 고민하면서 1분이라도 늦을세라 한강 다리를 쌩하니 달렸다. 그러나 정작 배우는 한 시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시쳇말로 바람맞은 것이다. 자리를 주선한 매니저보다, 내가 더 무안해졌다. 함께 간 신인 감독은 배우 얼굴 한번 못보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도대체 제작자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망신을 감독과 함께 '더블' 로 당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더 무안한 건, 그 일이 있은 뒤 다시 약속이 잡혀 그 배우를 만나러 갔을 때 일이다. 함께 간 감독은 진지하게 자신의 연출 의도와 캐릭터를 열심히 설명했다. 며칠 후, 매니저로부터 최종적인 거절의 답을 전화 수화기를 통해 들어야 했다.
이후 나는 다른 연기자들을 만나느라 영화 촬영장, 방송국 앞, 극장 앞, 호텔 커피숍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밤낮으로 들쑤시고 돌아다녀야 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90년대 초반 빅히트한 로맨틱 코메디를 기획했던 영화사의 당시 캐스팅 담당자들은 목표로 하는 여배우 Y씨를 잡기 위해 방송국 출입을 뻔질나게 했으나 접촉에 실패, 급기야 그녀의 집 앞에서 몇날 몇일을 잠복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 바람에 그 작전도 실패. 우여곡절 끝에 다른 여배우 H씨를 만나, 그 지난한 캐스팅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캐스팅 전쟁은 과거보다 더 치열하면 치열해졌지 나아진 건 없다. 회유와 애원을 섞어가며 끈질기게 매달리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접근해 어르고 달래서 성공하는 인간적인 캐스팅 작전은 다 옛날 이야기다.
매니지먼트 사업이 기업화되고, 제작 시스템이 거대화.전문화되면서 요즘 캐스팅 과정엔 냉정한 비즈니스의 논리가 더 크게 작용한다.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다.
물론 아직도 냉정한 비즈니스 한 켠에선 스타를 잡기 위해 촬영장에서 하염없이 죽치고 기다리거나, 전화통을 붙잡고 하루에도 수십번씩 다이얼 버튼을 누르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동료 제작자가 '점 찍어둔' 모 여배우의 마음을 돌리려고 해외로 떠나는 그녀를 뒤쫓아 공항까지 카레이스 벌이듯 힘겹게 달려가 간발의 차이로 설득에 성공했다는 아슬아슬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톱스타가 잠이 깨 눈을 떠보니 어떻게 들어왔는지 자신의 침대 머리 맡에 모 캐스팅 담당자가 귀신처럼 홀연히 서 있어서 화들짝 놀랐다는 서늘한 이야기도 들린다. 오! 스타여.


[심재명의 오! 캐스팅] 2. 임자는 따로 있는 법
심재명 / 2001-09-27 / 254

<내마음의 풍금>에서 짝사랑에 얼굴 붉혔던 수줍은 열일곱 초등학생 홍연의 전도연씨.
<친구>에서 가래 끓는 목소리로 "내가 니 시다바리가?" 를 읊조렸던 동수의 장동건씨.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건들거리는 어깻짓에 쌍소리를 내뱉으며 범인을 잡으려 내달렸던 우형사의 박중훈씨.

우리는 그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배우와 배역의 완벽한 일체, 혹은 새롭고도 매혹적인 캐릭터의 탄생을 어두운 객석에 앉아 목격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더할 나위 없는 적역 연기였다는 평가를 듣는 영화 치고 성공하지 않은 영화 없고, 연기자들의 열연.호연과 더불어 작품의 완성도는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배우와 그 극중 인물이 운명처럼 조우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적역이다 싶은 연기자를 캐스팅하고자 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불발되고, 그 다음에 만난, 혹은 돌고 돌아 이루어진 캐스팅으로 일생일대의 적역, 또는 최고의 연기파, 또다른 스타가 탄생하는 사건(?)이 생겨나기도 한다.
<친구>의 동수역은 애초에 정준호씨가 맡기로 했다. 그러나 제작비 확보에 어려움이 따르고, 일정이 지연되면서 스케줄 문제로 물러난 그 자리를 장동건씨가 대신했다. 완벽한 외모가 오히려 짐이 되었던 그는 이 영화에서 그 잊을 수 없는 탁음의 발성과 치켜 뜨는 강렬한 눈빛 연기로 비열하고도 연민에 찬 젊은 깡패 역을 열연함으로써 자신의 연기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마련했다.
<박하사탕>은 안티 스타시스템이란 기치를 내걸고 제작한 작품이다. 그러나 처음의 캐스팅 안은 최고의 스타 한석규씨였다. 사정이 여의치 않자 이창동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새로운 얼굴에 승부수를 띄웠다. 한국 영화계는 그런 이유로 <박하사탕> 의 영호로 영원히 기억될 설경구라는 낯선 배우를 얻게 되었다.
<공동경비구역JSA>의 북한군 중사 오경필 역은 먼저 최민식씨에게 보내졌다. 삶의 주름살이 파인, 맏형 같은 이미지에 적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쉬리> 에 이어 또다시 북한사람을 연기한다는 것을 우려해 그가 고사한 이 배역은 송강호씨에게 넘어갔다.
'코믹 연기엔 발군이나 정극 연기는 글쎄…' 라고 많은 이들이 의아해 했으나, 결국 오경필 중사는 송강호라는 걸출한 배우에 의해 유머러스하면서도 인간적인, 페이소스 넘치는 캐릭터로 창조되었다.
지금 한창 촬영 중인 <피도 눈물도 없이> 의 등장인물인, 과거 금고털이범이었으나 지금은 택시 기사로 돌아온 경선 역엔 원래 이미숙씨가 캐스팅됐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이혜영씨로 바뀌었다. 덕분에 우린 류승완이라는 젊은 감독에 의해 재해석될 왕년(?)의 스타 이혜영이란 배우와 다시 만날 설렘을 누리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 역할은 그 배우 아니면 안돼' 같은 경우도 있지만, 또 때론 다른 길을 돌아서,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캐스팅으로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적역 연기' 를 확인하게 되는 행복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임자는 따로 있는 법이다.



[심재명의 오! 캐스팅] 3. 의리의 사나이들
심재명 / 2001-10-04 / 265

톱스타 박중훈씨의 데뷔작은 20여년 전에 제작된 이황림 감독의 <깜보>다. 당시 박씨는 주인공에 캐스팅되기 위해 제작사인 합동영화사를 매일같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결국 장 폴 벨몽도를 닮은 듯한 외모의 새내기였던 그는 전형적인 미남미녀 연기자가 득세하던 그 시절에 이 감독에 의해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 이후 박씨는 청춘 스타로 발돋움하고 누구보다 활발하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며 영화 배우의 길을 걸었다.
이후 그는 이 감독의 새 영화에서 단 한 신 분량의 장면에 등장하거나 주인공으로 나서기도 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유는 자신을 영화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 감독에 대한 '보은' 때문이었다. 전화 한 통 받고 현장으로 달려가 이 감독의 작품에 카메오로, 단역으로 얼굴을 내미는 박중훈이란 배우의 인간적인 모습은 최근작 <인연>의 주인공으로까지 이어졌다.
엄청난 에너지로 개성 넘치는 영화들을 쏟아내고 있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엔 어김없이 배우 조재현씨가 등장한다. 김 감독의 데뷔작 <악어>부터 최근작 <수취인불명>까지. 이쯤이면 감독의 분신 같은 존재라고 할 만하다.
심지어는 <섬>에서 '의리 출연' 이라는 명분 아래 다방 레지의 포주 역을 맡아 단 두 신을 위해 추위에 떨며 저수지 물에 빠지는 힘든 연기를 불사했다.
번득이는 눈빛과 악동 같은 표정과 말투로 밑바닥 인생을 연명해가는,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을 소화해내는 조재현이란 배우 덕분에 김 감독 영화엔 강렬한 생기가 돈다.
국민배우 안성기씨는 배창호 감독과 10여 편이 넘는 영화에서 호흡을 맞춰왔다. 일찌기 배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20여년이 흐른 지금, 한창 촬영 중인 영화 <흑수선>으로 이어진다. 눈빛만 봐도 서로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두 사람은 그 완벽한 호흡으로 80년대 한국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가며 대중성과 신뢰를 확보하는 성과를 만들어왔다.
그것이 '의리' 이든 '보은' 이든 지속적으로 호흡을 맞춰온 영화 작업은 단순히 인정에 끌리는 것 이상의 결과를 끌어낸다.
조재현씨의 연기자로서의 파워는 김기덕 감독에 의해 발견되고 발전하는 면이 분명히 있고, 안성기씨는 배창호 감독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고 성숙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은 그런 '환상의 커플' 을 만나는 일이 점점 쉽지 않다. 매니지먼트 사업이 거대화하고 한국 영화의 산업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냉정한 비즈니스 논리' 또는 '
철저히 작품 자체로 판단하는 것' 이 인간적으로 끌려서 캐스팅에 응하는 것에 우선한다.
그러나 영화는 무엇보다 사람이 중심인 비즈니스이다.
인정사정 봐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많이 알고 이해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작업이 더 큰 가능성과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을 선배들의 영화 만들기를 통해서 요즘 새삼 절감하게 된다.


[심재명의 오! 캐스팅] 4. '거물급' 조연들
심재명 / 2001-10-11 / 307

한때 영화계엔 이런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한국영화는 두 가지로 나뉜다. 명계남씨가 나오는 영화와 나오지 않는 영화로….'
그만큼 명계남씨가 약방의 감초처럼 이 영화, 저 영화에 등장했다는 이야기다.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에서 시작한 영화연기가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 김상진 감독의 <돈을 갖고 튀어라>로 본격화하면서 정말 쉼없이 다양한 영화에 얼굴을 내밀었다.
때론 전형적인 연기로, 때론 적역을 맡아 종횡무진 누볐던 그는 TV 드라마도 마다하지 않았고, 지명도와 신뢰를 쌓은 후엔 CF에도 종종 등장했다. 내가 알기론 개런티 협상도 항상 "알아서 주는 대로 받는다"는 원칙으로 편하게(?)임했다.
"제작자나 감독이 원하면 어디든 달려간다"는 생각으로, 개런티가 5백만원이든 천만원이든, 그 이상이면 더 좋고…하는 식으로 영화연기를 했던 그였다. 그러니 그를 캐스팅할 때 속 끓이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그런 그를 통해 '적역'연기를 얻어낼 것이냐, 아니면 '식상한' 연기를 끌어낼 것이냐는 1백% 그를 캐스팅하는 당사자의 눈과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한해에만 '명계남 출연영화'를 10여편 이상 쏟아냈던 그도, 이제는 <초록물고기>, <박하사탕>을 프로듀서한 제작자로,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운동의 선봉에 서는 한 사람으로, 부산영상위원회의 대표로 정신없이 바쁘게 뛰고 있다. 명계남씨만큼은 아니지만 요즘 일련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배우는 기주봉씨다. <조용한 가족>에서 '방하나 있어요?'라고 물으며 산장의 첫손님으로 등장, 이튿날 자살한 이른바 '고독남'역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은 그는, <북경반점>,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공동경비구역 JSA>, <순애보>, <소름>, <세이예스>등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작은 키에 선굵은 얼굴, 저음이 독특한 인상을 풍기는 그는 명계남씨와 마찬가지로 연극배우로 오래 활동한 경력의 소유자로,코믹한 연기부터 정통 연기까지 폭넓은 소화력으로, 단 한 신에 등장해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연기자다.
요즘 부쩍 영화로 만날 수 있는 또 한 사람의 연기자는 이대연씨다. 일찍이 박재호 감독의 <내일로 흐르는 강>에서 동성애자역으로 주인공을 맡았던 그는, 이후 <박하사탕>, <공동경비구역 JSA>등에서 작지만 인상 깊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현재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배창호 감독의 <흑수선>, 박철관 감독의 <달마야 놀자>, 이미연 감독의 <버스, 정류장>에 연달아 출연하고 있다. 아마도 11월부터 내년 초까지 쉼 없이 그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제작자와 감독은 대체로 주연배우의 캐스팅에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조. 단역의 캐스팅에 그들의 선구안이 빛날수록, 그 배우들의 연기가 빛날수록 영화는 완성도와 함께 보는 맛이 더해진다.
특정 조연배우를 보기 위해 개봉 첫날부터 표를 사진 않지만, 극장문을 나설 때 영화에 대한 평가와 인상에는 주연배우 못지않은 조.단역 배우들의 연기 조화와 수준도 중요한 잣대가 된다. 조연 전문배우는 없다. 단지, 훌륭한 조연 연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을 뿐이다.



[심재명의 오! 캐스팅] 5. 개런티는 성적순
심재명 / 2001-10-18 / 295

올해 <친구>가 나오기까지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쉬리>와 <공동경비구역JSA>에 동시에 출연했던 배우이자 지난해 흥행 순위 1,2위에 나란히 랭크된 '…JSA'와 '반칙왕'의 주연배우는? 다 알다시피 송강호씨다.
<초록물고기>에서 별무늬.달무늬 요란한 셔츠를 입고 많은 사람들이 진짜 양아치 건달을 캐스팅했을 거라고 오해를 할만큼 리얼한 연기를 보여줬던 그는 이 영화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화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단역으로 출연한 경력도 있지만. 그때 그가 받은 개런티는 3백만원으로 알려졌다.
<초록물고기>에서 <공동경비구역JSA>까지 6편. 그리고 현재 촬영 중인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받은 개런티는 드디어 3억원을 돌파했다고 한다.3백만원에서 3억원은 1백배의 차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단역의 기회를,조연의 기회를 그냥 놓쳐버리지 않고 최선의 자세로 최고의 연기를 구현해내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시나리오와 캐릭터를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선택해 '송강호식'으로 탄생시킨다. 그 힘이 1백배 상승이란 결과를 낳았다.
보통 신인연기자가 주연으로 데뷔한 경우에 받는 개런티는 적게는 1천만원에서 3천만원선. 이후 그 영화가 성공하면 10배로 뛰는 것은 시간문제다. <무사>의 주진모씨는 그의 데뷔작 <댄스댄스>에서 1천5백만원을 받았고, <해피엔드> <실제상황>을 거쳐 <무사>에서 10배 가까운 개런티를 챙겼다.
여배우 중 현재 최고의 개런티를 받는 전도연씨는 그녀의 스크린 데뷔작 <접속>에서 4천만원, 이후 <약속>, <내 마음의 풍금>으로 1억원대를 넘어서 <해피엔드>로 1억7천만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로 2억원대를 넘기더니, 현재 촬영 중인 <피도 눈물도 없이>로 2억6천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 역시 송강호씨처럼 단 한번도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큰 실패 없이 성공을 거듭하며 얻게 된 고액의 개런티인 셈이다. '…JSA'에서 1천5백만원을 받았던 신하균씨는 <킬러들의 수다>와 <복수는 나의 것>, 단 두 작품으로 1억원대의 강(?)을 건넜다.
반대로 흥행에 실패하면 개런티가 하향조정되는 계약 방식이 충무로에 통용되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단 올라간 개런티는 다시 내려오지 않고, 캐스팅 담당자는 시장 내에서 그 배우의 가치가 예전같지 않다고 판단됨에도 불구하고 높은 개런티를 지불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캐스팅을 꺼리거나 아예 리스트에서 지우는 식이 요즘의 풍토다. 그런 이유로, 한때 최고의 연기자이자 스타이며 당연히 최고의 개런티를 챙겼던 배우들을 요즘 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개런티 상승곡선은 무척이나 가파르고, 그것이 하향곡선을 그리는 일은 거의 전무한 것이 한국 영화계의 개런티 지표인 셈이다. 배우 기근을 외치며 '그 밥에 그 나물'식으로 특정 스타만 바라보면서 얻게 된 자업자득일지도 모르겠다. 제2의 송강호는, 예리한 눈과 도전적인 캐스팅 전략으로 승부하는 영화 만드는 이들과, 자신에게 온 작은 기회도 절대 놓치지 않는 또 다른 무명의 연기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심재명의 오! 캐스팅] 6. 스타의 변신은 무죄
심재명 / 2001-10-25 / 330

할리우드산 로맨틱 코미디 영화하면 떠오르는 배우들은?
단연 멕 라이언이다.좀 젊은 여배우로는 줄리아 로버츠, 르네 젤위거가 있겠다. 남자 배우로는 휴 그랜트나 빌리 크리스탈,톰 행크스 정도?
어쨌든, 할리우드엔 '장르'를 책임지는 배우들이 있다. 액션 영화 하면 아놀드 슈워제네거나, 실베스타 스탤론, 장 클로드 반담이나 스티븐 시걸 같은….
우리는 "어떤 장르의 대표 배우"란 개념이 아직 약하다.물론 할리우드처럼 '장르영화의 공식'을 철저히 수행하는 제작 방식이 아닌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한때 청춘의 표상 같은 유지태는 작가주의 냄새가 짙은 <봄날은 간다>에 등장하고, 거칠 것 없는 신세대 스타의 이미지였던 배두나도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별볼일 없는 주변부 삶을 사는 스무살 소녀를 연기했다.
<쉬리>의 흥행과 완성도에 기여했던 최민식은 <파이란>에서 '장르영화' 혹은 고정된 깡패의 이미지가 아닌 사람냄새 짙은 3류 인생, 3류 건달로 분했다.
<순애보>의 소심하고 하릴없는 동사무소 말단 직원 이정재와 '흑수선'의 강렬한 눈빛의 열혈 형사 이정재와의 이미지 간극은 무척 크다.
즉 할리우드처럼 모 배우하면 어떤 장르가 떠오르거나,그만큼의 안정적인 기대 심리를 유도하는 것에 비해, 우리나라 영화 배우들은 빅스타임에도 작은 영화 혹은 작가주의 영화와 대규모 제작비의 영화나 장르영화를 넘나들며 고정된 이미지보다는 여러 캐릭터로 변신한다.
그래서 역대 스타임에도 관객 2만명짜리 흥행 참패작을 낳기도 하고, 2백만명의 대박 성적표를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안게 되는 '리스크'이다. 스타마저도 고정된 이미지가 없으니, 그만큼 '안정된 흥행 파워'도 없는 것이다. 최소한 그를 기용하면 일정 정도의 흥행이 보장된다거나, 관객의 기대 심리가 어느 정도라고 예측할 수 있는 기준이 상대적으로 희박하다는 것이다.
물론 스타는 흥행을 위한 안전장치이자, 치열한 흥행전쟁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무기이며, 연기력까지 탁월하다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제 1조건이긴 하지만, 아닌 경우도 너무 많은 것이 우리 영화계의 현실이다.
유지태, 이영애라는 특급 스타 커플도 그보다 스타 파워가 약하다는 신은경에게 철저하게 패배했다. 물론 흥행성적에서다. 이요원, 배두나라는 신세대 스타는 주말 관객 전국 1만5천명을 모았다. 결국 단순히 스타 캐스팅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타의 이미지와 영화의 장르 혹은 소재나 주제 등등이 함께 맞물려 상승효과를 내느냐, 그렇지 못하냐이다. 그렇다면 만드는 이들의 고민이나 부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배우의 시장가치와 연기력, 그리고 영화 속 캐릭터와의 이미지 부합 여부까지 치열하고 꼼꼼하게 따져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민 끝에 결론이 났다고, 그 결론대로 캐스팅이 이루어지지 않는 험난한(?) 현실이 또한 떠억 버티고 있으니…
그러나 언제나처럼, 영화 만드는 이들의 바람은 '배우를 살리는 영화', '영화를 살리는 배우'와의 행복한 조우뿐이다.


[fn 에세이] 전주에서의 2박3일
심재명 / 2001-04-30 / 154

제2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전주를 찾았다. ‘대안영화’를 주창하며 1회 대회를 치러냈던 전주국제영화제는 2회 대회 개막을 앞두고 2명의 프로그램머가 사퇴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며 이번 영화제를 준비했다. 우리 회사가 만든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개막작으로 선정되면서 지난해 김기덕 감독의 ‘섬’에 이어 두번째로 이 영화제와 인연을 맺게 된 우리는 어찌보면 한국영화계라는 지형도 속에서 ‘대안영화’ 2편을 만든 셈이기도 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영화를 통해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우리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꿈’을 접고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과 만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삶에 대해 어떤 환상도 심어주지 않는 지독한 영화, 그러나 그것이 냉소나 자학이 아닌 따뜻한 위로를 슬쩍 던지는 영화가 바로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27일 저녁 7시. 전북대 문화관의 1800여 좌석이 가득 채워진 가운데 이 영화는 상영되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따뜻한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영화의 첫 시사회를 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시작하는 건 개인적으로도 참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주에서의 첫날은 그렇게 흐뭇하게 시작되었다. 맛과 멋의 도시 전주는 지금 친절한 시민들과 맛난 음식, 그리고 노란 점퍼를 입은 열혈 자원봉사자들로 정겨운 분위기다. 7일동안 30여개국 210여편의 영화들이 선보이는 이번 영화제는 ‘대안영화’라는 대전제에 ‘급진영화(Radical cinema)’를 화두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대거 마련했다고 한다.
영화제는 말 그대로 ‘영화의 축제’다. 이곳에선 평소의 문화편식에서 벗어나 영화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경험할 수 있다. 영화제에서 마주치는 낯선, 혹은 보석같은 영화들은 삶에 대해 또다른 각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것이 영화축제의 맛이요, 멋이다.
전통 한옥이 즐비한 전통의 도시 전주에서 ‘대안영화’와 ‘급진영화’를 만난다는 것이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일견 서로 어우러져 가며 새로운 영화정신을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류’에만 편승하려고 아둥거리는 사람들에게 ‘새로움’과 ‘다름’이 더 큰 가치일 수 있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널리 알리는 영화제로 거듭 나길 전주국제영화제에 바란다. 영화는 곧 삶이기도 하므로. 파이낸셜 뉴스



[fn 에세이] ‘부족함’이 가져다준 ‘행복’
심재명 / 2001-05-07 / 415

어린이날에 어버이날이 연이어 있는 5월이다. 매스컴에서는 각종 문화 행사 가이드 등을 내보내느라 바쁘고 가정의 달을 이유로 관련 기획기사, 특집 프로그램 등을 쏟아낸다. 유치원생 딸을 둔 나는 바쁜 일과로 정신 못 차리다가 뒤늦게 어린이날에 뭔가를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어린이를 위한 문화 행사들을 찾아보고 전화 다이얼을 돌려 보았다. 며칠전에 이미 여기저기의 공연 티켓이 대부분 매진되었다는 소식뿐이다.
놀이공원을 찾는 일은 도저히 엄두가 안나 아예 생각을 접고 꾀를 낸 것이, 아는 분을 통해 편법(?)으로 뮤지컬 티켓을 구하는 것이었다. 워낙 남의 부탁에 소홀함 없이 배려하는 그 분은 어김없이 구하기 힘든 그 티켓을 내게 쥐어주셨다.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엄마가 편법까지 동원하여 구한 표인지를 알 턱이 없는 아이는 부모 손 잡고 더없이 좋은 좌석에서 신나게 어린이 뮤지컬을 관람하였다. 정서적 풍요와 세련된 문화의 향유를 경험하게 해주고 엄마의 마음에, 다른이에게 어려운 부탁까지 서슴없이 한 것이 과한 욕심이자 미욱한 짓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문득 들었다.
얼마전 본 이란 영화 ‘천국의 아이들’의 가난한 남매는, 오빠가 잃어버린 여동생의 꾀죄죄한 분홍 신 때문에 오전반, 오후반을 활용하여 신발을 나눠 신으며 부모에게 사실을 숨긴다. 오빠가 여동생의 신발을 얻기 위해 운동화가 상품으로 걸린 달리기 시합에 나서 발이 부르트도록 뛰는 장면이나, 정작 자신의 낡은 신발을 신고 다니는 아이를 뒤늦게 발견하고도 자신들보다 더 못한 처지임을 확인하곤 순순히 돌아서는 남매의 착한 눈망울이 가슴을 쳤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매의 아버지는 자전거 뒤에 어렵게 번 돈으로 산 새 신을 달고 집으로 향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나지만, 그 남매는 아버지의 선물이 얼마나 기쁠 것인가. 가난한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서로 이제는 버려도 될 만큼 닳아버린 오빠의 신을 번갈아가며 신고 달렸던 그 무구한 남매에게 새 신은 또 얼마나 소중한 선물이 되었을까.
‘결핍’이 오히려 더 큰 ‘행복감’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나 역시 경험하며 자랐다. 나의 윗세대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5월의 그 쨍한 햇빛과 푸른 하늘 밑에서 비싼 놀이공원 행차 대신 엄마가 시켜준 자장면 한 그릇을 먹으며 마냥 기뻤던 때가 있었다. 모자람 없이 자라는 요즘의 아이들, 그리고 자식 일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챙겨주고 안겨주는 요즘의 어른들, 나를 돌아보면서 ‘부족함’ 속에서 느꼈던 행복과 ‘감사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파이낸셜 뉴스



[fn 에세이] 영화계 인력난
심재명 / 2001-05-14 / 1729

연이어 몇 백만명이 몰리는 영화들이 나오고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30%대를 유지하는 한국 영화계는 말 그대로 호황을 맞은 분위기다. 한국 영화에 투자하려는 벤처 캐피털의 돈이 2000억원을 육박한다는 등, 제작사의 이름을 내건 회사들의 숫자가 알게 모르게 100개가 넘었다는 등, 영화전문 투자 사이트가 여기저기 생겨나고 모모 영화들은 1분만에 투자 마감을 했다는 등의 소식이 들려온다. 근 2,3년간 50여 편의 제작 편수를 유지하던 한국 영화계가 올해는 70편이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때아닌 호황을 맞은 분위기 속에서 실제로 영화 제작을 진행하면서 피부로 느끼는 것은 심각한 ‘인력난’이다. 요즘 영화계는 ‘배우’와 ‘촬영기사’가 없어 크랭크인을 못한다는 한숨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온다. 주로 젊은 영화인들 중심으로 재편된 제작시스템은 젊은 스태프를 요구하고 있으며 속칭 잘나간다는 젊은 촬영기사를 구하는 일이 마치 스타 캐스팅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원로 촬영기사들의 개점 휴업 상태와 비교해 보면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다.
배우쪽은 더 심각하다. 스타라고 불리는 연기자들은, 조금 과장을 섞어 하루 건너 시나리오가 날아온다고 한다. 제작자나 감독이 직접 그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고 처음 생긴 영화사가 건넨 시나리오가 배우한테 채 전달이 안된다는 뒷얘기도 들린다. 감독이 어떤 의도로 이 영화를 만들려는지 배우와 만나 의견을 나눌 수 있었던 과거의 풍경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배우들은 시나리오 만큼이나 제작사나 배급사, 심지어 투자사까지 저울질해보고 출연을 결정하는 ‘비즈니스’적 마인드로 무장(?)돼 있어 ‘감독에 대한 믿음’ 때문에, 혹은 ‘인간적 의리’ 때문에 출연 결심을 하던 과거 시절의 풍경들은 이제 ‘옛날 옛적 한국에서’ 식의 먼 얘기가 되어 버렸다.
며칠전 모 TV 프로그램에서 배우 안성기, 감독 배창호의 더블 인터뷰를 보았다. 10여 편이 넘는 영화를 같이 해왔다는 이들은 지금도 새 영화를 함께 찍고 있다. 여전히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각자의 작업 방식을, 서로의 영화관을 이해하면서 지속적으로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배우, 감독, 촬영기사의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호흡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요즘 영화계. 한국영화의 산업화·거대화의 과정에서 겪는 ‘사람난’ 속에서 인간적 만남, 인간적 호흡을 기대하는 것이 너무 뒤처진 발상일까.
사람끼리 만나 제대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것일텐테…꼭 뒷북치는 얘기는 아니라고 우기고 싶다. 파이낸셜 뉴스



[fn 에세이] 세대차이
심재명 / 2001-05-28 / 338

얼마 전 영화하는 친구와 극장에 갔다. 마지막 회의 표를 파는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극장 안은 젊은이들로 북적댔다. 그 시간에 영화를 보러 온 마흔이 다 된 아줌마는 우리 둘 뿐이었다. 궁금한 것은 줄을 선 관객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한결같이 빨간 장미 다발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거의 4∼5명 중에 1명 꼴이었는데 그 광경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왜 모두 장미꽃 다발이람. 친구와 오늘이 무슨 날일까로 이 얘기 저 얘기 꿰맞추어 보았지만 영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줄을 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극장 안에 들어가자 영화가 시작됐다. 지난 73년에 만든 공포영화 ‘엑소시스트’가 디렉터스컷(감독편집판)으로 다시 상영되는 극장 안, 아마도 73년엔 태어나지도 않았을 많은 ‘청춘’들이 좌석을 꽉 메우고 있었다.
나는 현란한 사운드와 화면으로 공포감을 강요하는 요즘 영화가 아니라서 더욱 마음 편히 영화에 젖어들었다. 원한에 사로잡힌 자의 끔찍한 복수극이나, 온갖 잔인한 장면의 노출을 위한 특수효과가 시각을 사로잡는 식의 영화가 아닌 것이 오히려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이가 어려보이는 관객일수록 영화가 영 재미없다는 반응이었다. 이를테면 여자 주인공 리건의 엄마가 스카프를 두르고 등장하면 실소를 터뜨리는 식이었다. 우리가 지난 60∼70년대 한국영화식 구투의 대사 억양을 들으면서 웃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그런 식의 웃음이 터져나오고 내 옆 자리에 앉은 여자 아이들은 무슨 공포영화가 이리도 안 무섭냐는 대사를 연발했다.
그날, 빨간 장미에 대한 궁금증은 다음날 풀어졌다. 그날이 바로 ‘성년의 날’이었던 거다. 성년이 된 기념으로 왜 장미꽃을 주고 받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성년이 된 날은 뭘 했지. 아마도 종로로 우르르 몰려나가 어른이 됐다는 우쭐한 기분에 들떠서 맥주를 마셨던 것 같다. 그날 나는 극장 밖에서,그리고 극장 안에서 피부로 느끼는 ‘세대차이’를 경험했다. 서로의 생각을, 서로의 감각을,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세대간에 벌어지는 씁쓸한 ‘오해’이자 ‘세대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영화를 만드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으니 다른 세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자 하는 운명을 타고난 셈이고 그래서 행복한 일 아닌가. 물론 “저 어른들이 만든 영화, 정말 고리타분해”라는 말을 듣게 되는 날, 정말 절망스럽겠지만.파이낸셜 뉴스



[fn 에세이] 블록버스터의 계절
심재명 / 2001-06-04 /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1호탄 격인 ‘진주만’이 지난 주말 한국에서도 개봉됐다. 개봉 전 온갖 매스컴으로부터 악평만을 받아온 이 영화는 국내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호된 비판을 들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블록버스터 영화를 극장 가서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 나는 온갖 ‘악평’에도 불구하고 1억6000만달러나 쏟아부었다는 그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 유명한 제작자와 감독이 어째서 그런 식의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나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격으로, 일제히 쏟아지는 악평에 슬그머니 이의를 제기하고 싶기도 했다.
지난 주 어느 영화잡지에서는 이 영화가 집중적으로 다뤄지고 있었다. 편집장의 글에서, 어느 기자의 취재수첩에서, 개봉영화 소개에서, 평론가 리뷰에서 ‘진주만’은 간접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지겨우리만치’ 많이 다뤄졌다. 그 잡지의 소중한 지면을 그 영화와 배급사의 문제 지적에 할애하고 있었다.
이 영화의 문제는 잘못 만들어진 블록버스터 영화가 늘 그렇듯, 그렇고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단순하기 짝이 없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자근자근 씹어 봤자,
그 밥에 그 나물인 밥상을 씹어 봤자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러면서 불만인 것은 여기저기서 이 사람 저 사람이 핏대 올려가며 한심한 영화라고 욕하는 것도 관객(독자)의 입장에서는 별 재미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에너지로 가리워진 영화, 숨어있는 이야기, 좀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도 유익할 정보를 알리고 들춰내는 데 애를 쓰면 어떨까. 일제히 쏟아지는 악평, 일제히 손을 들어 환호하는 찬사 일색의 ‘한가지로 통일(?)’되는 단순한 반응은 재미없는 영화보기 보다 더 재미없다.
그늘에 숨어있는 영화에 따뜻한 손을 내미는 리뷰, 모두 다 A라고 여기는 영화를 D라고 주장할 수 있는 준비된 논리, 간과하고 있었던 것을 발굴해 ‘스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권위, 뭐 이런 다양한 노력들이 보고 싶다.
‘진주만’은 지난 주의 악평 덕분인지, 개봉 첫날(1일) 11만명을 동원하는 괴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좋게든 나쁘게든 일단 많이 노출되는 것이 마케팅 측면에서는 전혀 관심권 안에 들지 못하는 것보다는 백번 나은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셈이다.
‘진주만’으로 시작된 블록버스터의 계절, 별 약효없는 악평으로 도배될 매스컴, 거기에 반비례하듯 극장 앞에 줄을 설 관객들의 행렬, 이 뻔하고 뻔한 영화의 계절이 다시 시작됐다.파이낸셜 뉴스



[fn 에세이] 아이와 함께 행복을…
심재명 / 2001-06-11 /

아이를 키우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기본적인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제대로 ‘교육’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부족하고 무지한 어른이 한 아이에게 사회성을 가르치고 재능을 길러내고 세상과 우주를 알려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어쩌면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그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와 방법을 전염시키거나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아이의 엄마이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온전히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이를 교육한다’는 생각을 버렸다.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에 서너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내가 그 짧은 시간에 과연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나의 말투와 행동과 생각이 아이에게 보여지고 그것에 아이가 영향받을 것이라는 판단에,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와 즐겁고 알차게 보내는 게 최선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아이를 키우면서 또다른 세상과 만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아 행복할 때가 많다.
이를테면 결혼 전이나 아이가 없을 때는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박물관이나 고궁, 미술전시회나 서점의 어린이 코너, 볼거리와 놀거리 많은 실내 수영장 등을 찾으면서 얻게되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아이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사기 위해 이것저것 꼼꼼히 고르다 보면 어느덧 새로운 교훈을 아이들의 책에서 얻기도 하고, 아이를 즐겁게해 줄 요량으로 보게 되는 만화영화나 어린이용 연극에서도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된다.
얼마 전엔 ‘스노우맨’이라는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봤다. 일요일 오후, 아이와 함께 본 그 애니메이션은 컴퓨터 그래픽 같은 첨단 테크놀로지가 배제된 채, 파스텔과 색연필로 표현된 부드러운 그림과 아름다운 노래로 어린이와 눈사람 간의 교감과 사랑을 꿈같은 화면에 담아내고 있었다.  어른보다 빨리 만화영화 주인공이 눈사람과 눈나라로 갈 것이고, 다른 눈사람 친구들을 만날 것이라며 이후 전개될 이야기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한 아이는 한 자리에 앉아 세번을 되풀이해서 보았다.
나는 아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만화영화에서처럼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 눈사람과 손을 잡고 하늘을 나는 그 주인공 꼬마처럼 내 아이와 손을 잡고 바다 위를 나는 꿈을.
아이 덕분에 만나는 새로운 세상, 자식 때문에 만나는 새로운 경험은 일요일 오후의 낮잠처럼 참으로 달콤하다.


[fn 에세이] 이사는 나의 취미
심재명 / 2001-06-18 / 586

며칠 전 이사를 했다. 결혼한 지 7년이 됐는데 5번째 이사이니 남이 보면 ‘이사가 취미’인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이사를 자주 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분양받은 새 아파트 입주를 위해 9개월간 잠시 지내거나, 임신을 해서 경기도를 떠나 사무실 근처로 옮기거나, 전세 계약 기간이 끝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가는 식이다.
어쨌든 7년 동안 뻔질나게 이사한 덕에 가구들은 여기저기 흠집이 났고 정수기 연결이나 가스 연결, 케이블 TV 연결 등으로 전화를 여러 번 해야 하는 수고를 겪었다.
요즘은 포장이사가 대세를 이뤄 어딜 가나 포장이사 업체를 이용하곤 하는데, 이사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늬만 포장이사’라는 점이다. TV 광고에 나오는 식으로 주인은 열쇠만 건네주고 출근했다가 새 집으로 퇴근해 보면 깨끗하게 정리된 새 집이 반겨주는 그림은 순 거짓말이다.
약속 시간에 늦게 오기 일쑤이고 여기저기 바닥을 긁으며 부주의하게 움직이다가 대충대충 짐을 부려놓고 떠나버리는 식이다. 뭐 전국의 포장이사업체가 다 그런다는 건 아니지만 몇 번 겪어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어차피 새로 정리하고 먼지를 털어내야 하는 것도 많아 체념하고 나면 그때부터 일거리가 산더미다. 정리하고 버리면서 느끼는 것은 왜 이리 그때 그때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고 싸 안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다. 저것은 무엇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니까, 저 책은 언젠가 읽으려고 둔 것이고, 저 옷은 언젠가 다시 입을 거니까…. 뭐 그런저런 이유로 짐들은 늘어만 가는 것이다. 항상 낡은 것과 오래된 것은 가차없이 버리고 새 것을 사는 낭비적 삶이 아니라 정리는 제대로, 쓸만한 것은 제대로 오래 쓰는 정리정돈 잘 하는 삶을 나는 왜 잘 해내지 못하나 하는 작은 자책감도 든다.
정리 중에 이것저것 뒤적이다 보면 몇 년 전에 썼던 애틋한 편지나 일기, 오래된 사진들이 나오곤 한다.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땐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지 하는 묘한 감회에 젖어 잠시 손을 놓고 멍해지는 순간이 있다.
‘삶의 정리 정돈’을 잘하는 사람, 예전의 감성과 꿈을 잃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먼지 구덩이의 이삿짐 한가운데서 때때로 하곤 한다. 몸은 고되지만 이사라는 이벤트(?)로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은 즐겁기도 하다.
일본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수필집에서 ‘이사가 취미’라고 했는데 어떤 생각으로 그런 취미를 갖게 되었을까.



[fn 에세이] 시간은 돈이다
심재명 / 2001-06-25 /

얼마전 모 신문에 실린 배우 박중훈씨의 영화칼럼을 읽었다. 그가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 조너선 드미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기고하고 있었는데, 새삼 느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철저한 시간관념에 관한 것이다. 워낙 제작비의 규모가 크다 보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은 곧 막대한 돈을 그저 쏟아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시간 분배나 진행, 제작 스케줄을 철저하게 지키게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몇년 전 영화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느낀 것은 한국영화를 만드는 환경에 있어서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꽤 유명하다 싶은 감독은 모든 스태프가 현장에 집합하고도 3∼4시간이 흐른 뒤에야 나타나기 일쑤였고, 톱스타라고 하는 배우들은 집합시간을 1∼2시간 어기는 것을 당연스럽게 생각했다. 영화현장에서 이런 일련의 일들은 그저 ‘그 감독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 배우는 원체 아침 잠이 많아서…’라는 푸념식으로 치부되곤 했다. 처음 경험한 영화현장은 그래서 내게 ‘시간을 지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렀다. 그때보다 훨씬 커진 한국영화 규모, 늘어난 제작비, 많아진 스태프 수로 이제는 한국영화산업도 누구 말대로 ‘작은 할리우드’ 같은 형국으로 발전했다. 터무니없는 관습이나 폐단은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제작과정의 합리성을 치열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제작 결과, 그러니까 작품의 대외적 평가나 흥행성적에 급급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사전준비를 철저히 하고 그 계획에 따라 합리적인 촬영 스케줄을 운용하고 작품의 완성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충분한 후반작업 시간을 배분하는 일보다, 언제 끝날지 모르게 늘어나는 촬영 횟수와 어설픈 진행으로 스태프들은 지치고 제작비는 상승하는 식의 황당한 현상들을 아직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태도는 영화 만드는 일에서나 사람 살아가는 삶에서나 모두 적용될 수 있는 의미있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차선을 위반하고 속도를 위반하고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고 빠른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보다 지킬 것을 제대로 지켜내면서 목적을 이루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엄격하고 철저한 사회 분위기가 우리에겐 부족한 것 같다.
계약 조항을 철저히 지키는 것, 계획된 스케줄을 지키는 것, 촬영시간을 지키는 것 등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끼리의 약속을 엄수하려는 마음가짐이 좋은 과정을, 좋은 영화를,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해본다.



[fn 에세이] 관객들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심재명 / 2001-07-02 / 657

과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오는가.
‘3년 연속 대박행진’, ‘한국영화의 힘’이니 하는 상투적인 표현이 낯설지 않을 만큼 최근 한국영화의 약진은 눈부시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상반기 영화시장 현황을 보더라도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39%. 이는 지난해 32.2%를 훨씬 웃도는 수치다. 더군다나 지난 1·4분기에 비해서는 무려 15%정도나 껑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닌 듯하다.
이처럼 한국영화 시장점유율이 높은 것은 ‘친구’라는 영화 한편의 힘에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는 개봉되자마자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을 일으키면서 독주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이미 전국관객 800만명을 돌파하고 이제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관객 동원 1000만명을 기록하느냐에 세간의 관심이 쏠려 있을 정도.
물론 다른 한국영화들도 비록 ‘친구’같은 홈런은 아닐지언정 2루타 등의 안타는 너끈하게 쳐내 한국영화에 힘을 보탰다.
동성애 코드를 가미해 화제가 되었던 ‘번지점프를 하다’가 서울에서 50여만명을 불러모은 것을 비롯해 이영애의 눈물연기가 돋보였던 ‘선물’과 이미연·박신양의 ‘인디안 썸머’도 서울관객 40만명을 넘으며 상반기 영화 흥행에 있어 상위권에 포진했다.
이에 비하면 할리우드 직배영화 ‘한니발’ ‘캐스트 어웨이’ 등은 ‘4명의 친구’ 앞에서는 속수무책.
지난해 영화시장 점유율이 절반을 넘었던 것에 비해 올 상반기 성적은 채 30%가 안되는 점유율을 보였을 뿐이었다.
자, 이렇듯 한국영화가 할리우드 직배영화를 꺾고 고공행진을 하는 것이 마냥 안심해야 할 일인가. 이제는 다시한번 한국영화를 생각해보고 현단계를 분석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한국영화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고 관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자문할 때다.
관객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관객들이 우리 한국영화에 바친 기대만큼 영화제작자나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인력들이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자만한다면 관객들은 곧 한국영화를 외면할 것이다. 왜냐하면 관개들의 시각은 영화평론가보다 더 날카롭기 때문이다.



[fn 에세이] 스타의 조건
심재명 / 2001-07-09 /

‘자고 일어나 보니 스타’라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깎아놓은 조각처럼 잘 생기거나 군중 속에 묻혀 있어도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배우들에게서 그런 얘기들이 들려오곤 했다. 그러나 요즈음 충무로의 모든 시나리오를 받아본다는 ‘톱스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그런 얘기도 옛말이 된 것 같다.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와 같은 배우들의 등장은 한국영화를 다양화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더러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영화 속의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잘 생기고 예쁜 배우보다는 기본적인 연기력과 특유의 개성과 감성을 가진 배우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접속’의 전도연이 그렇고 ‘박하사탕’의 설경구나 ‘공동경비구역JSA’의 신하균과 같은 배우들…. 우리영화 속에서 또 다시 새로운 개성을 가진 배우를 만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지난해 종로의 작은 극장에서 조용히 개봉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도 그런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엇나간 삶을 살고 있는 젊음을 보여준 류승범을 스크린을 통해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초록물고기’에서 진짜 동네 건달을 보는듯 강한 인상을 주었던 송강호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코 잘 생기지 않은, 오히려 저런 얼굴로 배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평범함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강렬한 힘이 또 한명의 ‘좋은’ 배우가 탄생하겠구나 하는 예감을 들게 했던 것이다.
매스컴을 통해 듣게 된 그의 영화 같은 삶의 내력과 현재 개봉 준비중인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촬영하는 동안 본 그의 자세와 자질은 그 예감을 믿음으로 만들어주었다. 어려운 가정 환경에 모범적이고 부지런한 형(류승완 감독)의 보호 아래 자란 그는, 그러나 음악과 춤이 너무 좋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이트클럽에서 4년 동안 DJ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형이 만드는 단편영화에 출연하면서 “형 덕분에 배우가 되어버렸다”고 하지만 그렇게 단정해 버리기엔 부족한 그 무엇을 ‘와이키키 브라더스’ 촬영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고 유연했던 그는 제도권에 길들여지거나 잘 다듬어진, 그래서 안정감은 주지만 그 이상의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는 배우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류승범을 만나며 느꼈던 신선한 흥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배우들이 더욱 많이 등장하는 것이 한국영화계를 질적으로 살찌우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fn 에세이] 한국영화, 또 한번의 ‘점프’를
심재명 / 2001-07-16 / 606

지난주에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체코의 유서깊은 도시 카를로비 바리. 프라하와 함께 유명한 관광지이자 휴양도시인 이 곳은 아름다운 수로와 오래 가꿔 기품있는 나무, 그림같은 건물들로 우리들을 반겼다.
올해로 36회째를 맞은 이 영화제는 동유럽의 전통있는 국제영화제다.
특별한 것은 이번에 ‘한국영화회고전’ 프로그램을 마련, 한국영화의 역사와 면면을 처음으로 동유럽의 영화인들과 영화관객들에게 공개했다는 것이다.
박종원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정지영감독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이광모감독의 ‘아름다운 시절’ 등 90년대 초반의 영화부터, 봉준호감독의 ‘플란더스의 개’, 김기덕감독의 ‘섬’, 장선우감독의 ‘거짓말’, 박찬욱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등 2000년까지의 영화들을 망라했다. 여기에 한국의 주목할만한 단편영화들을 추가해 총20여편의 한국영화들이 관객을 맞이했는데 매회 객석이 매진됐고 많은 관심을 끌어모았다.
그 외에도 한국의 프로듀서, 감독, 평론가, 프로그래머 등이 발제자로 나와 한국영화 토론회를 가졌으며 이 자리에서는 한국영화의 형식과 내용의 변화, 스크린쿼터제, 한국영화의 상업적 성공 등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또한 지난해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수상한 ‘박하사탕’에 이어 올해는 박철수감독의 ‘봉자’가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상영되었고 주연배우인 서갑숙씨도 참여,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펼쳤다.
나는 생애 처음 가본 아름다운 동유럽의 도시에서 다시 한번 한국영화의 ‘변화’를 경험했다.
의견이야 다를 수 있겠지만 10년 동안의 한국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다양성의 스펙트럼을 확인했다. 사실 한국영화는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그야말로 힘들고 외롭게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다.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폄하되어온 채 오랜시간을 보낸 한국영화는 어찌보면 90년대 이후부터 그 위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자가발전’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스크린쿼터제라는 보호정책하에 있지만 이제 한국영화는 산업화의 기로에서 또한번의 ‘점프’를, ‘내실있는 성숙’을 준비해야 하고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너무도 쉽게 한국영화계와 한국영화를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또는 ‘위기’ 혹은 ‘기회’라는 말들로 일축하고 있는 우리 내부의 시선이 개인적으로는 못마땅하지만 그만큼 한국영화가 관심권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서 서울에 쌓여 있는 많은 일들 생각에 미리 골치가 아파오긴 했지만 한국영화의 변화와 성숙을 기대하면서 미력하나마 그 속에 작은 씨앗 하나를 또하나 심는다는 마음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내 앞의 영화 숙제들을 하나씩 풀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fn 에세이] 마케팅은 괴로워
심재명 / 2001-07-23 / 1511

명필름이 만드는 새영화는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은 8번째 작품으로 이미 지난 봄에 완성됐다. 소위 ‘스타 시스템’으로 무장된 영화도 아니고 흥행력을 갖춘 장르영화도 아니어서 이 영화를 시장에 내놓은 마케팅팀의 속은 탈대로 타고 있다. 몇 번의 시사회와 제작진의 자체평가로 완성도도 높고,감동도 있는 영화라고 판단한 마케팅팀은 대형 릴레이 시사회를 개최,개봉 전 영화에 대한 입소문을 확산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물량을 쏟아부은 블록버스터급 대작이거나 난다긴다하는 스타로 포장된 영화,소재나 주제만으로 대중적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장르영화가 아닐 경우,지금의 영화유통, 배급상황과 흥행 경향 속에서 목표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는 일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작가주의 영화나 실험영화,예술영화도 제작비를 손해보지 않을 만큼의 흥행결과와 작품적 평가를 제대로 받아야만 한국영화계의 모습이 풍부해지고 바람직한 내용을 갖추게 되는 것이지만,그게 어디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겠는가.
오히려 ‘안티스타시스템’이란 기치를 내걸고 작품성으로 관객과 정면승부한 ‘박하사탕’의 아름다운 성공이나 저예산의 제작비로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한 ‘섬’의 의외의 성과들이 이후에도 계속됐으면 하는 게 개인적인 바람이다.
하반기에도 평균 이하의 제작비를 쓰고,스타가 나오지 않으면서도 감독의 개성이나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영화들이 몇 편 개봉 대기중이다. 윤종찬 감독의 ‘소름’ 문승욱 감독의 ‘나비’ 장현수 감독의 ‘라이방’ 등이 그것들이다.
수백만명의 관객이 몰리고 수십억원의 마케팅비를 쏟아붓는 영화들이 온통 매스컴의 주목을 얻어내고 있는 지금,그야말로 한국영화산업의 폭발적 성장이 여기저기서 얘기되고 있는 지금 스타와 돈이라는 무기없이 이 치열하고 냉정한 ‘영화시장’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외롭고 힘든 ‘전쟁’에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좋은 평가를 얻어낼 때의 기쁨은 성공이 눈 앞에 쉽게 보이는 ‘장사’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그 길을 치열하게 개척하는 사람들이 또 하나의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다양성이 공존하는 한국영화계를 기대하며 오늘도 주류에 편승하지 못한 삼류밴드의 이야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마케팅에 온힘을 쏟아붓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공동경비구역 JSA’ 만든 팀 맞아(?).


[fn 에세이] 도보예찬
심재명 / 2001-07-30 / 589

국제영화제 참가에, 사무실 이전에, 회사 워크숍에… 그야말로 정신없는 7월을 보냈다. 곧 촬영에 들어갈 3∼4편의 영화와 신작 ‘와이키키 브라더스’ 개봉 준비가 가져오는 중압감도 만만치 않아서 몸과 마음이 모두 바쁜 여름 한철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여유만만하게 느긋한 태도로 업무를 조정하고 끌어가는 스타일이 아니고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형이라 다른 이들보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편이다. 식욕도 떨어지고 흰 머리카락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내 몰골을 보며 이래선 안되겠다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다고 며칠 어디론가 떠나 모든 것을 잊고 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초조해진 심사를 잠재우는 방법으로 무조건 ‘걷는 것’을 택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는 식이다. 특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는 운전대를 잡는 대신 부지런히 걸었다. 족히 1Km는 될법한, 사무실에서 집까지 이어져 있는 골목길과 대로와 언덕길을 무조건 걸었다.
여름 밤의 공기는 뜨겁지만 평화롭고 잠시 멈춰서게 되는 건널목으로 마주보이는 도심은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시침을 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요한 골목과 대로와 건널목을 지나고 나면 거의 야트막한 산을 오르는 만큼의 운동량을 필요로 하는 언덕 위에 우리집이 있다.
이런저런 생각이 뒤섞이는 머리 속을 ‘단순하게’ 정리하는 마지막 코스가 이 언덕오르기이다. 더운 여름 밤, 15분을 언덕오르기에 열중하다 보면 아무 생각없이 단순한 육체의 움직임에 마음을 맡기게 된다. 흥건하게 옷이 젖어 고층 아파트 앞에 다다르면 15층이라는 높은 계단이 또 내 앞에 버티고 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대신 그 계단도 하나씩 밟아간다. 이제는 빨리 현관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드디어 도착이다.
숨을 헐떡이며 거실에 들어서면 그날 하루의 상념과 고민은 땀과 함께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사람간의 관계도, 치열한 비즈니스도, 다소의 오해와 원망도, 결과에 대한 집착도 누그러져 많이 작아져 있다.
골목길 어느 집 담벽 위에 흐드러지게 잎이 핀 나무와 가로등과 흙냄새들이 머리 속 고민들을 많이 거더내 준 듯싶다. 며칠을 그렇게 걸었더니 머리와 마음에 조금 평화가 온 것 같다. 천천히 걸으면서 또 때론 땀을 흘리며 걸으면서 상기된 볼과 눈빛으로 나의 마음과 조용히 마주했던 지난 며칠이 내겐 참 소중했다. 걸으면서 생각하는 삶, 여름이 그렇게 지나간다.



[fn 에세이] 결혼은 무덤이 아니다
심재명 / 2001-05-21 /

톱스타인 어느 여배우가 결혼을 하네 마네, 은퇴를 했네 안했네 같은 소식이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린다. 가을에 결혼하기로 했다, 아니다,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라는 등 각 신문사의 공방도 뒤따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녀로부터 공식적인 입장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은퇴를 결심했다는 식의 보도가 이미 얼마 전에 있었지만 그것 역시 그 흔한 공식적인 기자회견 없이 그저 측근의 이야기를 인용, 보도했을 뿐이다. 한 젊은 여자의 결혼 계획과 사생활이 그토록 관심을 끄는 것은 그녀가 소위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최고의 자리를 누려왔던 톱스타라는 데 있다.
그녀도 한국의 여성으로서 직업을 갖고 열심히 일해왔고 꽉찬 나이에 결혼을 계획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왜 ‘결혼은 곧 은퇴’여야만 하는가. 물론 이것도 온갖 매스컴이 만들어낸 추측일 뿐이긴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도 그녀가 영화 관련 캐스팅 제의를 고민한다는 식의 풍문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기사들이 영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영화계를 책임질 것 같은 기대로 온갖 칭송을 한몸에 받았던 그녀가 일순 영화계와 인연을 끊고 사생활 속으로 침잠해버린 것은 사실 허탈할 만큼 황당한 일이다. 2∼3편의 영화를 통해 보여준 그녀의 연기력에 대해 그토록 침이 마르게 격찬했던 말들의 잔치가 갑자기 겸연쩍게 느껴질 만큼 그 기대와 칭송이 허탈해지는 것이다.
지난 60∼70년대 많은 여배우들이 ‘결혼은 곧 은퇴’라는 것을 공식처럼 지켜왔다. 이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쪽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앞두고 짧은 사회생활을 경험하고자 한다는 배부른 이유도 있었고 결혼한 여자를 용납하지 않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통념이나 전근대적인 직업 환경 탓도 있었다. 지금은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 전업주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여성의 사회참여, 평생직업의 개념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화관객 역시 결혼한 여배우에 대한 편견은 이제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이혼한 어느 연기자는 더욱 주가가 높아졌다. 결혼을 앞두고 한시적으로 일할 분야치곤 배우라는 직업은 너무 많은 이들이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주목하는 직업이다.
어느 여배우의 결혼설 운운을 앞두고 여성의 결혼이 사회 생활과의 결별로 이어지는 따위의 구태의 모습은 이제 그만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고방식까지도.



[향기가 있는 아침]너무 진지한 한국영화팬…
심재명 / 2001-11-04 /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창밖 풍경엔 무심한 채, 책상에 코를 박고 있는 학생처럼 정신없이 이 일, 저 일에 매달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가을이 훌쩍 저만큼 문턱을 넘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을의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은, 추운 아침이다.
아침마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홈페이지 게시판에 들르는 것이 요즘 일과 중의 하나다. 지난달 27일 상영을 시작한 이 영화는 일요일 아침 현재 전국적으로는 약 5만명이 봤다. 1주일 만에 서울 18개 개봉관은 11개관으로 줄었고, 지방은 대폭 간판이 내려졌다. 낙심할 모양새이지만, 이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의 반응들은 뜨겁고도 눈물겹다. 전국적으로 하루 5,000여명이 극장을 찾는데 그 중 2,000여명이 이 홈페이지에 들른다. 남기는 글들은, 만든 이들도 놀랄 만큼 정확한 이해와 열렬한 성원으로 가득하다.
막내린 울산을 떠나 부산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돌아왔다는 사람, 아내의 동창모임을 이 영화 보는 걸로 대신하라고 아내의 등을 떼밀었다는 남편,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했다고 감독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사람, 이제 관객이 나서야 할 때라는 사람 등등.
종종 게시판의 글들을 읽다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만다. 요즘 한국 영화계의, 영화시장의 가장 큰 특징이자 문제가 특정 장르, 특정 영화 편식증이라고 여기저기서 떠든다. 자극적인 오락영화, 규모가 큰 영화, 대대적인 마케팅비를 쏟아부은 영화, 빅스타가 등장하는 영화에만 몰리는 현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홍콩영화의 말로를 들먹이면서, 한국영화의 거품현상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락영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은 터무니없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런 편식현상을 관객의 수준 탓으로 돌리는 것은 더더구나 무책임한 태도이다.
과거 한국 영화는 이른바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식이었다. 물론 영화사를 빛낼 훌륭한 영화들도 많이 나왔지만 그러한 욕심은 오히려 ‘한국영화는 재미없다’ ‘20분만 보면 다 안다’라는 식의 돈을 내고 보는 관객들로부터 한국영화 불신의 풍토를 만들어온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상업영화로서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고민하고 주력해온 ‘젊은 영화인들’에 의해서 한국영화에 대한 ‘대중적 신뢰도’가 놀라울 만큼 높아졌고, 특히나 자국영화를 외면하던 젊은층에게 이제 한국영화는 ‘먹히는 상품’이 되었다. 지금의 몇백만명 관객 동원이라는 수치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오락영화에 대한 단순비판이 아니라 큰 규모의 상업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의 영화,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예술영화, 실험성 짙은 영화들에 대한 지속적인 제작지원뿐 아니라 나아가 안정적인 배급, 유통환경 마련에 관심과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즘의 한국영화 유통시장은 막말로 번지르르하게 잘생긴 놈과, 좀 못나보이는 놈을 나란히 세워서 10초의 여유를 줄테니 갖고 싶은 물건을 고르라는 형국이다.
메인 스트림을 장악하는 상업영화와 작은 영화, 독립영화, 예술영화를 분류하고 그 성격에 맞는 시장환경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정부와 영화인들이 해내야 할 몫이다. 언제나 수요와 공급은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좋은 한국영화살리기 운동에 나서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관객들을 바라보면서 고마운 마음보다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영화인들이, 정부가 고민해야 하는 것을 그렇듯 먼저 나서주는 한국영화 관객들의 적극성에 자극받는다.
프린트 값도 뽑지 못하는 처참한 관객 수를 가지고 간판을 내리지 말라고 극장주에게 떼를 쓸 수는 없다. 한국의 모든 관객이 유치하고 경박하다고 비웃을 수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한국영화 시장의 다양한 발전을 위해 정부와 영화인들이 한께 고민해야 될 때이다. 쌀쌀하지만 한국영화를 지지하는 ‘진지한’ 관객들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아침이다.경향신문


[異口異聲 목소리를 높여라] 영화보다 재미있는 드라마
심재명 / 2002-04-14 /

먼저, 영화계는 ‘월드컵’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세계에서 가장 볼만한그야말로 지구촌 최대의 스포츠 축제가 그것도 역사상 처음으로 이 땅, 한국에서 벌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실제 경기장에서 동원될 약 170여만 명의 관중과, 시시각각 경기 중계를내보낼 TV 수상기 앞으로 수천만 명의 눈이 쏠릴 것이 불 보듯 뻔하게 예상되기 때문이다.
월드컵이 열리는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영화가 대중의 관심권에서 멀어질 것이 뻔하고, 극장가는 보기 드문 비수기의 한철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영화인들은 입을 모은다.
그런 이유로, 4~5월에 주 단위로 한국영화가 몰아서 개봉되거나, 6월 말이후로 멀찌감치 개봉 일정을 미루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약 2억 인구가 직접 발로 뛰며 즐기고 있는 스포츠이자, 400억 명의 눈을붙잡아 놓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스포츠인 축구가 한국 영화계 종사자들에겐 더할 수 없이 부담스러운 ‘존재’인 셈이다.
월드컵이 일구어내는 그 어떤 ‘영화’보다 짜릿한 드라마가 가지고 올 엄청난 파장에 영화계는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 영화계는 가장거대한 ‘경쟁작’을 만난 셈이다.
두번째, 올 한해 영화계에도 스포츠를 소재로 하는 영화들이 유독 많이만들어지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비운의 복서 김득구의 삶을 담은 ‘챔피언’, 전설적인 레슬러 역도산의 일생을 그리게 될 ‘역도산’, 조선 최초의 야구단 이야기를 소재로 한 ‘YMCA야구단’ 등. 그 외에도 몇몇 작품들이 기획 중이다.
이들 영화들은 영화적 재해석과 재구성을 통해 스포츠인들의 삶을, 그 역사를 구현해낼 예정이다. 그것이, 영화적 재미를 넘어서 진정한 의미와 감동을 전해줄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과거 영화계엔 스포츠 영화는 흥행이 안 된다는 속설이 퍼져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스포츠 경기가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상황을 뛰어넘는, 스포츠영화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제 영화계엔 많은 금기 조항들이 사라지고, 무시되고 있다. 한국 영화의 성장이 가져다 준 자신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일련의 영화들의 제작 시도가 한국영화계가 다루는 소재의 영역을 한 뼘더 넓힐 수 있는 계기가 월드컵이 치뤄지는 올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낙관한다.
살아있는 스포츠 정신이 전해주는 ‘감동’, 제대로 된 영화가 전해주는‘감동’은 다르지만 또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1996년 5월, 21세기의 첫번째 월드컵을 사상 최초로 한국과 일본이라는아시아 두 나라가 공동으로 개최한다는 역사적 발표가 있었다.
그 뜻 깊은 의미를 되새겨보면서 그 어느 해보다 멋진 ‘월드컵’, 재미있고 감동적인 ‘스포츠 영화’들이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충무로 다이어리] 그녀들의 일기
심재명 / 2001-10-11 /

이영아 팀장, 올해 나이 29살. 박재현 팀장, 올해 나이 27살.
명필름의 국내마케팅 1, 2팀장들이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주인공 브리짓처럼 과년한 노처녀도 아니면서 그녀들은 현재, 애인이 없다. 그렇다고, 브리짓처럼 골초에 술을 탐하는 것 같지는 않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 보이지도 않는다. 그녀들은, 휴 그랜트 같은 바람둥이에게 홀라당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안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콜린 퍼스 같은 ‘피플지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된 미남이 지극한 애정을 보내는 말 그대로 ‘영화 같은’ 로맨스도 물론 없다.
그녀들은 지금, 연애에 목숨을 거는 대신 ‘일’에 목을 매고 산다. 현재 목을 맨 바로 그 일은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마케팅이다. ‘사상 최대의 릴레이 시사회’라는 이벤트 때문에 벌써 몇달을 밤늦은 시간에 총알택시를 탔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녀들은, <봄날은 간다>가 무지 부럽다. 무슨 이야기냐고? 유지태, 이영애라는 스타시스템과 허진호라는 유명감독 때문에 일찍이 공중파 TV의 연예정보 프로그램들과 종합일간지, 영화주간지 등 온갖 매체에 도배되다시피 소개되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다.
빅스타 없고, 한방에 쏙 들어오는 이야기도 아닌 <와이키키 브라더스>란 물건을 머리에 이고 한손에 든 채, “어떻게 우리 배우들로 표지 한번 안 될까요”, “이런 아이템이 있는데 한 꼭지…”. 그녀들이 아이템 컨택을 이유로 여러 매체들과 통화하고 있는 모습은 거의 ‘구걸’에 가깝다.
‘스타’를, ‘이슈’를, ‘자극’을 찾아 민감하게 움직이는 매스컴은, ‘한국영화 흥행 이상 기류’ 운운하며 지금 대중문화의 소비행태를, 한국영화의 흐름을 걱정하는 듯 하지만, 또한 판매부수와, 시청률이라는 절체절명의 숙제로 표리부동하며 그녀들에게 “글쎄요…. 그게 뭐, 재미있겠어요?”라며 난감한 거절 의사를 날릴 뿐이다.
한번에 50만원 이상 들여가며 마련한 무료 시사회에 초대된 관객들 중에 보다 나가는 서너명을 발견할라치면 쫓아가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지만 차마 그렇게 못하고, 시사회 다음날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에 그 누군가가 올린 다섯개짜리 별과 상찬의 글을 읽고는 눈물이나 찔끔 흘리는 마음 여린 그녀들이다.
그녀들은 <봄날은 간다>의 30여만명의 관객동원 수가 주는 ‘흥행 이상 기류’보다는, 김기덕 감독의 역작 <수취인불명>의 1만명짜리 흥행성적표, 올해의 발견이라는 칭송이 모자람 없는 <소름>의, 그러나 소름 돋는 흥행성적표가 정말 ‘불안한 기류’라는 생각이다.
스타 없는 영화, 화려한 판타지가 없는 영화, 그 대신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용감하게’ 가고자 했던 감독의 의지가 맥없이 스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그녀들은, <나비>와 <라이방>의 마케팅을 담당하는 또다른 그녀들의 일기장도 궁금하다.씨네21



[충무로 다이어리] 새벽 5시, 그들의 진심이 궁금하다
심재명 / 2001-10-26 /

양수리 종합촬영소 제1 스튜디오. 3일째 영화 <버스, 정류장>의 촬영이 계속되고 있다. 그 큰 스튜디오 안팎으로 정적이 흐르고, 수십명 스탭의 눈은, 처음으로 어린 소녀에게 가슴에 담겨 있던 진심을 말로 꺼내 놓는 남자에게로 향해 있다. 소녀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잠이 드는 순간에서야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거…”라고 입을 여는 남자.
그동안 강북의 꾀죄죄한 거리를 헤집고 다니며 촬영을 진행했던 이 영화는 처음으로 본심을 겉으로 드러내는 그 남자처럼, 이 춥고 고요한 세트장에서 본격적인 ‘말하기’를 시작한다.
식사도 거른 채 12시간 동안 한 신을 끝낸 촬영팀은 늦은 저녁을 먹고 바로, 낙태수술을 하고 돌아온 소녀와 남자가, 남자의 방에서 본심의 언저리만 더듬는 얘기를 나누다가, 잠이 든 남자 뒤에 앉아 그만 아이처럼 울어버리는 신을 이어서 진행했다.
카메라 위치와 구도가 결정되고, 이어서 조명 세팅으로 서너 시간이 흐른 뒤 감정을 준비하고 누워 있는 남자와 침대에 앉아 있는 소녀의 연기가 시작된다. 소녀가 조용히 흑흑거리다가 이젠 소리내어 운다. 등을 뒤로 하고 누운 남자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듣고만 있다.
또다시 수십명의 스탭들은 소녀의 울음 연기를 듣거나 본다. 누구는 카메라 위치가 이게 맞는 것인지 고민할 것이고, 누구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혹시 과장된 것은 아닌지 걱정할 것이고, 또 누구는 주변의 소음을 염려할 것이며, 또 누구는 소녀의 연기에 다소 감상적인 기분이었을 것이고. 또 누구는….
2분이 넘게 흘렀다. 슬쩍 연기자 앞에 앉아 있는 감독을 보았다. 그녀는 웬일인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왜 울음 연기를 하는 소녀를 끝까지, 낱낱이 보지 않았을까.
2번 만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별 얘기없이 그 신은 마무리되었다. 울음 연기를 끝낸 여배우는 잠시 벽에 기대서 있었고, 남자배우는 다소 썰렁한 농담을 하며 촬영장을 떠났다. 사람들은 감독에게 어땠는지 묻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하고 바라보면서, 콘티북을 들여다보고 구체적으로 이런저런 얘길 나누지만 정말 감독이, 배우가 제대로 진짜 표현하고 싶은 것,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이 정확하게 이해되거나 완벽하게 소통될까? 새벽 5시의 촬영현장에서, 진짜 마음을 완벽하게 알아채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어떤 여자가 지금 “수제비가 먹고 싶어”라고 얘기했다면, 어떤 이는 ‘배가 고픈가 보군’ 할 것이고, 그녀의 수제비에 얽힌 특별한 과거 사연을 알고 있는 이라면, ‘
옛날 생각이 나나 보군’이라고 해석할 것이고, 또 누구는 ‘밀가루를 좋아하나 보군’이라고도 생각할 것 같다. 생각건대, 그 여자의 진심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수록, 알려고 노력할수록, 적어도 오해나 몰이해의 수치는 낮아질 것 같다.
별말없이 조용조용히 빛이 완성되고, 그림이 만들어지고, 몇 마디의 대사가 울리던 그 고요한 세트장에서의 저들은 서로의 진심을 알고 싶기는 한 걸까. 감독의 본심을 이해하고 있을까, 라고 궁금해졌다.
불현듯 그들의, 진짜 마음이 궁금해졌다.씨네21



[충무로 다이어리] 충무로 차차차!
심재명 / 2001-11-09 /  

내가 25살 꽃다운(?) 나이에 다니게 된 직장이 서울극장 기획실이란 곳이었다. 당시 그곳엔 모 실장이 계셨고, 나와 남모씨라는 디자이너가 있었다. 입사한 지 한두달 동안 내겐 별로 할 일이 주어지지 않았고, 특별히 뭘 가르쳐주지도 않아서 나는 죽어라고 그 전의 기획실장님이 남기고 간 주옥(!) 같은 영화광고를 모아둔 스크랩북만 닳도록 보았다.
대학 시절에 열독했던 <스크린>이란 잡지에 매번 등장했던 고명하신 분들이 내 책상 너머, 사장실 문을 드나드는 모습을 입 벌리며 바라보는 것이 신나는 일과중 하나였다. 김호선 감독, 정인엽 감독, 이황림 감독, 이두용 감독 등등이 그분들이었다. 말단 여직원이었던 나는 괜히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그때 영화광고 필름을 만들고, 동판을 뜨던 ‘현대동판사’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을 드나들면서 처음으로 나와 엇비슷한 연배의 젊은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내가 입사하기 직전까지 서울극장 기획실에 근무했던 이준익씨는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영화광고 일을 하고 있었고, 석명홍씨는 단성사 기획실에서 디자인과 카피라이팅 일을 맡고 있었다. 신철씨는 명보극장 기획실장이었고 이원기씨는 신철씨의 졸병이었다.
그들이 누구냐고? 이준익씨는 현재 시네월드의 대표이고 <간첩 리철진>과 <공포택시>를 제작했고 <메멘토>와 <러시아워2>를 수입•배급했으며, 이번에 <달마야 놀자>를 내놓았다. 석명홍씨는 시네라인I과 시네라인II의 대표로 있으며 수많은 영화광고 제작일을 해왔고, 초유의 흥행작 <친구>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신철씨는 다 아다시피 신씨네 대표이다. 이원기씨는 원필름을 차리고, 곽지균 감독의 <청춘>을 만들었다. 그 시절, 그들과 마신 커피, 밥의 양, 그리고 그들과 몰려다닌 카페와 술집의 숫자는 내 평생 사귀었던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와 드나들던 곳보다 많을 것이다.
영화계 입문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제일 막내였던 나는 그 남자들이 나누는 잡담이나 수다도 모두 생생한 현장수업이었다. 주워 삼켜도 모자랄 산교육이었다.
그들을 포함, 나 역시 지금껏 영화계를 떠나지 않고 질기게(!) 버티며 ‘영화인’으로 살고 있다. 모두들 한두편씩 대박영화를 터뜨리기도 하고, 좋은 영화라고 칭찬받는 영화도 물론 겸연쩍어해야 할 결과도 만들어내면서.
뒤돌아보면, 그들 모두 어쩌다가 영화계에 들어왔건 구체적인 계획과 꿈을 가지고 들어왔건, ‘영화’라는 상대를 눈이 아프게 마주보며 그 정체와 실체에 대해 고민하며 씨름해왔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생산하는 자’의 성실함으로 줄기차게 달려왔다는 것이다. 나, 개인적으론 앞만 보고 그저 달려오기만 하면서 만들어낸 수많은 과오와 무지와 성찰의 부족이 자꾸 부끄러워지는 요즈음, 그 시절 같이 보냈던 사람들의 성실함을 기억하며 그 부끄러움을 잠시 감추고 싶은 심정이 드는 건… 왜일까?
하여튼, 이미 대박 조짐이 보인다죠? <달마야 놀자>의 제작자 이준익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14년 전에 <씨네21>이 있었다면, 이 코너는 ‘충무로 다이어리’가 아니라 ‘충무로 차차차’쯤이 되지 않았을까? 이건 사족이었슴다.씨네21



[충무로 다이어리] 여성영화인의 생존
심재명 / 2001-11-30 / 34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에 초청된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을 보았다.
임순례 감독이 연출하고,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과 여성영화인모임이 제작주체인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님을 비롯, 이 땅에서 감독으로, 제작자로, 촬영기사로, 조명기사 등으로 일하는 여성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잡았다.
박남옥 감독이 어떻게 그의 장편 첫 영화 <미망인>을 어렵게 완성하게 되었는지, 여성으로서 수적인 ‘희소성’이 어떻게 현실적 어려움으로 대체되었는지, ‘영화’라는 것이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사로잡고 뒤흔들었는지, 그 여성들은 잘난 체하지 않고, 엄살떨지 않고, 그냥 그렇게 식탁 앞에 앉아 수다떨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 영화를 제작할 때 일이다. 크랭크인 전 영화의 목표와 위상을 공유함과 동시에 친목도모로 치러지는 워크숍에서 앞에 나가 마이크를 잡은 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해서 기쁘다, 열심히 하겠다류의 다짐 같은 이야기를 주로 꺼냈다. 그 자리에 나선 조명퍼스트 김은미 기사의 멘트가 퍽 인상적이었다.
“지금의 마음가짐이나 다짐이 이 영화가 크랭크업할 때까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때 가서 보자.”
초심이 변하지 않기를, 그저 꾸준한 자세가 최선일 터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녀가 참 미더워보였다. 그녀는 그 말처럼 언제나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고, 자상하게 후배조수들을 보살폈다.

한국의 여성감독들은 그런 마음으로, 주류의 한국영화들이 피와 죽음과 폭력을 이야기할 때, 여성이기에 운명적으로 친할 수밖에 없는 마이너리티의 삶을, 자신 바로 옆의 사람들을, 그들의 상처와 결핍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성성에 대한 편애인가. 아둔한 자기 합리화인가. 그건 모르겠다. 정재은 감독과 임순례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앞으로 나올 이정향 감독이나 박찬옥 감독의 새 영화들의 면면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꼭 편애나 자기 합리화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든다.
‘여류’, ‘여성’의 토를 달고 주목하는 매스컴의 구색맞추기나 소수의 마이너리티를 희귀동물처럼 주목해주는 구시대의 어법이 아닌, 여성들의, 여성영화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명하고 주의깊게’ 바라봐주는 시선이 함께하는 사회를 희망한다.
돌아보면, ‘여성’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그닥 변한 것 같지 않다. 변하고 있는 건 여성의 생각이나 자세일 뿐. 여성일 뿐.
그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이렇다.
검은 화면에 박남옥 감독의 목소리가 흐른다.
“영화, 그건 내 삶의 전부”라고.
50년을 의상 일에 바친 이해윤 선생님은 수줍게 이야기하신다.
“후배들이 평생 영화일을 했으면 하죠”라고.
단 한편의 영화를 연출했을 뿐인데도, 50년이란 세월이 돈도 명예도 가져다주지 못했는데도, 그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셨다.
사실 알고보면, 세상은, 영화는 그런 사람들이 변화시킨다.씨네21



[충무로 다이어리] 순진한 노력, 왜 비웃나?
심재명 / 2001-12-07 / 39

12월6일 현재, 서울관객 6만4311명, 전국 9만6776명이 본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앞으로 큰 이변이 없다면 손익분기점은커녕 금전적 손해를 꽤 보게 되었다.혹자는 욕심부리지 말고 극장 수를 줄여서 개봉했다면 장기상영 확률도 더 높지 않겠냐고 지적하기도 했으나, 현재의 유통•배급구조는 장기상영을 보장해주는 극장이 전무함에 따라 미지의 가능성을 갖고 일정 정도의 상영관을 확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철저한 시장논리와 흥행성적에 따라 별수 없이 1주일 만에 간판을 내리거나 심지어는 개봉 이틀 만에 종영되는 상황을 맞고 이런 영화를 관람하고자 하는 관객은 비디오 출시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풀이된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그렇고 <나비>와 <라이방>이 그랬다. 전국에서 최소 1, 2개관의 상영관이라도 확보되어 좀더 상영되길 희망한다는 소수 관객의 구체적인 요구가 있었기에 각 영화사들은 임대상영이나 장기상영의 가능성을 어렵게 찾아나서기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현재의 시장논리와 배급구조 때문에 너무 빨리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리는 상황 앞에서 그저 넋두리나 늘어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소수 관객의 채근에 추동돼 적극적인 방법을 찾아보고 시도한 것이다. 물론 ‘공동상영’을 제안하는 극장주도 나왔다.
12월1일치 <중앙일보> 시론에 쓴 조희문씨의 이야기처럼 ‘좋은 영화라고 흥행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 결코 아니라, 소수지만 장기상영을 희망하는 관객의 바람에 고무(?)되어, 상영조건만 마련된다면 찾는 ‘최소한의’ 관객이 있을 것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다. 조희문씨의 말처럼, ‘특정한 영화가 수준 높은 작품이라는 이유로 많은 관객이 보아야 한다며 바람을 잡고, 극장을 통째로 빌려 상영을 계속하겠다는 것은 주관적인 기준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돈을 들여서라도 기록을 바꾸고야 말겠다는 오만’이 아니라 융단폭격식으로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고 속전속결식의 결과를 내는 지금의
‘시장’에 분명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여 어떤 방법이라도 찾아내 극복해보고자 하는 자구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먼저 바람을 잡은 것은 만든 이들이 아니라 소수의 관객이었으며, 억지로라도 기록을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가 경제적 리스크를 안더라도 방법이 있다면 투자금에 대한 손해액을 최소화하겠다는 단순한 경제적 논리를 폈을 뿐이다. 몇백만명씩 관객을 동원하는 오락성 강한 상업영화와 서울 5만명, 10만명짜리 작은 영화도 더불어 ‘공존’하는 건강한 시장을 희망했을 뿐이다.
올해의 상황으로, 공급자인 영화인들은 너나없이 특정 장르의 영화만을 만들고 수요자인 관객은 그 영화들만을 즐기며 투자자는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의 시나리오는 아예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는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르게 ‘노력하는 영화인들’의 모습이며, ‘관객의 현명한 판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아직도 순진한(?) 마음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영화의 지속적인 생산이 다양한 성향의 관객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좀더 명줄 긴 한국영화계를 담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충무로 다이어리] 오자 또는 오버?
심재명 / 2001-12-20 / 28

며칠 전 모 시사주간지와 인터뷰를 했다. 기획기사 아이템으로, ‘여자의 성공’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꼭지였다. 쑥스러운 스튜디오 촬영도 하고, 장시간의 인터뷰도 했다.
각설하고, 기사를 읽는 순간 잠시 화가 났다. 결정적인 ‘오자’ 때문이었다. 내가 과거에 쓴 그야말로 알량한 영화광고 카피 중에 ‘잘까 말까 끌까 할까’라는 문장이 있는데, 여기저기 매체에 얼굴을 내밀 때마다 나에 대한 소개와 함께 종종 언급되는 낯뜨거운 카피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시사주간지는 ‘잘까 말까 끌까 할까’를 ‘잘까 말까 끌까 말까’로 오기하는 실수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자나 오보에 필요 이상으로 치를 떠는 스타일이다. 우리 직원 중에 ‘오자의 여왕’이라고 별명을 붙인 사람이 있는데 그녀의 마케팅 기획서나 보도자료를 읽을 때마다 언제나, 오자를 지적하지만 언제나 오자투성이의 페이퍼를 내밀곤 한다. 나는 그녀가 내가 없는 사이, 관계기관에 공문을 띄울 때나 협찬제안서 등을 보낼 때 ‘명필름’을 ‘맹필름’이라고 해서 보내지 않을까 걱정이다.
며칠 전 모 종합일간지의 영화 관련 기사엔 <씨네21>에서 오랫동안 만화를 그리는 ‘정훈이’씨를 ‘정훈희’라고 오기했다. ‘<버스, 정류장> 컨셉북’에 대한 기사로 필진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는데, 나는 그 기자와 통화하면서 설마 정훈이씨를 틀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지난해, <씨네21>과의 인터뷰 기사 중 틀린 정보 하나. <섬>이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두 번째로 진출했단다. <섬>은 세 번째고, 두 번째는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다. 30번째도 아니고 3번째인데, 좀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틀리지 않았을 내용이다. 이런 일들은 무수히 많다.
나는, 인터뷰이의 입장에서, 인터뷰어가 혹 오기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까, 녹음기는 잘 돌아가고 있는지, 취재노트에 잘못 쓰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해진다. 얼마 전엔, 어느 기자와 마주 앉아서 취재노트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앤’이 아니고 ‘엔’인데요, 라며 주책을 부렸다. ‘오자’나 ‘오보’에 대해 당신 너무 ‘오버’야, 라고 욕해도 할 수 없다. 정확한 ‘사실’(fact)의 전달이 인터뷰어의 1차적 자격요건이라고 생각한다.
포커스가 내내 맞지 않는 영화에서 아무리 현란한 카메라워크를 발휘한들, 앞뒤 연결동작이 맞지 않는 엉성한 콘티뉴이티로 아무리 대단한 주제를 얘기한들, 정확한 시장조사조차 되어 있지 않은 마케팅 기획서에서 마케팅 목표와 전략이 어떻다고 떠들어봤자, 분명한 연결신인데 전날 밤 술을 진탕 퍼마셔 팅팅 부은 얼굴로 현장에 나와 캐릭터가 어떻고 연기의 진정성이 어떻고를 심오하게 얘기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전망이 어떻고, 현상이 어떻고에 대한 거창한 비전과 분석을 떠나서 자신이,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내야 할 ‘사소한 임무’에 목숨을 거는 소심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잘못된 띄어쓰기, 틀린 철자법으로 종종 채워진 내 원고를 손봐주신 편집기자님, 이 지면을 빌려 인사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충무로 다이어리] 내 일기장의 기대작!
심재명 / 2002-01-04 / 37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슬슬 시작해서, 중학교 입학하면서 본격화된 나의 일기 쓰기는 사회생활 3년차 때까지 질기게 이어졌다. 햇수로 치면 13년이 넘는 긴 세월이었다. 매일 일기를 쓰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정 쓸 게 없으면, 그날 처음 맛본 신제품 라면의 맛을 상세히 기록한다거나, 새로 나온 과자 봉지를 붙여놓는 쓸데없는 짓을 하기도 했다.
묵은해를 보내며 실로 몇년 만에 그 일기장들을 들춰보았다. 이제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되었으니 거의 25년 전의 ‘잡스러운 기록’들을 꺼내 읽은 셈이다.
재미있는 건 새해가 되거나 새달이 되면 그 달에 읽어야 할 책들과 봐야 할 영화들을 번호를 매기며 적어놓고 목표를 설정해놓는 것이었다. 그 책들의 수준이래봤자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삼중당 문고 전집이나 고전이라 불리는 문학서적들 정도이고, 봐야 할 영화들은 뻔하고 평범한 수준의 것들이다.
어쨌든 목표량은 그 다음달엔 어김없이 ‘O’와 ‘X’로 읽은 것, 본 것, 그렇지 않은 것으로 분류, 정리되었다. 그중엔 억장이 무너져내리게 감동적이거나, 나아가 내 인생의 진로를 바꿔놓은 책이나 영화도 있었고, 그저 그렇게 지나가버린 별볼일 없는 것들도 있었다.
지난호 <씨네21>은 ‘2002년 최강의 프로젝트’란 제목의 기획으로 올해의 기대작들을 모아 일람할 수 있게 했다. 그 기사를 보고 옛날 버릇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봐야 하는 영화, 보고 싶은 영화의 순번을 매겨가며 쏠쏠한 재미를 느꼈던….
내 일기장의 기대작들은 이렇다. 우선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날보러 와요>가 보고 싶다. 최근 <살인의 추억>으로 제목이 바뀌었다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연극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시나리오인데 시나리오에 대한 소문이 충무로에 자자하다, 좋은 쪽으로.
<플란다스의 개>의 시나리오를 읽고, 어찌 이리도 ‘지리멸렬한 인간’ 군상을 유니크하게 그렸을까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있다. 데뷔작은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그의 두 번째 영화는 완벽한 성공이길 기대해본다.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도 무척 보고 싶다. 일찍이 한국영화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꼬부랑 할머니와 깜찍한 꼬마 아이가 오롯한 주인공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펼친 영화를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새삼재삼 궁금하다.
이정향 감독이 어떻게 자신의 유년과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반추해낼까. 마지막 장면에선 눈물 한 방울 흘리게 될까, 아니면 눈물 바가지를 쏟게 될까.
<일단 뛰어>는 감독의 나이 때문에 궁금하다. 25살의 나이(최야성 감독과 이서군 감독을 제외한다면 최연소이다)에 장편 데뷔를 한다지. 명랑코믹액션영화라는데, 스물다섯살의 감성은 어디까지일까.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는 감독보다, 소재나 주제보다 궁금한 것이 이혜영이란 배우이다. <티켓>과 <땡볕>에서 ‘강렬함’을 넘어선 ‘강력한’ 눈빛으로 보는 이의 얼을 빼놓았던 그녀가 시대를 뛰어넘어, 실로 20여년 만에 영화로 돌아온다니, 젊은 청년 감독과 관록의 여배우의 ‘미팅’이 궁금하고도 궁금하다.
그외에도 제작비 규모로, 낯선 시도로, 새로운 실험으로, 특정배우 때문에, 어떤 감독의 신작이라는 이유로 봐야 할, 보고 싶은 근거가 충분한 영화 목록은 2002년엔 특히 차고도 넘친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2002년에는, 누군가의 가슴을 비수처럼 뚫고 지나가는 ‘촌철살인’의 맛이 있는 영화, 뭉근하게 끓여낸 스튜처럼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주는 영화,
그래서 정신이 번쩍 들게, 또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까지 하는 그런 멋진 영화들이 속속 쏟아져나오길 기대한다.
새해, 첫달은 꿈을 꿀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즐겁다.


[충무로 다이어리] 제작비 거품의 시대
심재명 / 2002-01-18 /

최근, 올해 제작할 영화의 제작비를 뽑았다. 제작실장이 준 예산서를 보니 순수 제작비가 37억원이었다. 뭐라? 37억원? 특수효과 현란한 SF물도 아닌, 삿갓 쓰고 도포 입고 짚신 신었던 사람들 이야기가 이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감?
문제는 오픈세트를 짓는 것과 ‘보이지 않는’ 컴퓨터그래픽 작업에만 13억원 정도가 책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연기자들의 개런티 상승과, 스탭들의 인건비 인상도 큰 몫을 하긴 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책상에 앉아 제작비 예산서를 노려보았다. 100년 전을 살았던,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것에 경도됐던 사람들을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리고자 하는 이 이야기를 제대로 구현하는 데 규모나 형식에 대해 얼마만큼 투자해야 맞는 것일까? 그 정답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순수 제작비 60억원이네, 100억원 육박이네 하면서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제작투자 계약서에 손이 떨리고, 심장이 뛰어 사인도 제대로 못했을 천문학적 숫자에 대해, 이제 어느덧 그 정도쯤이야 하는 심정으로 둔감해진 것이 사실 요즘의 제작 풍토이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제작비에 OK 사인을 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물론 최근 한국영화의 경이적인 관객동원력에 있다. 여기서 ‘천문학적인’, ‘경이적인’이란 단어를 얘기하는 걸 할리우드 영화인들이 들으면 코웃음치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제작비 규모와 흥행결과가 정비례하냐면 꼭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지난해 서울 100만명을 넘긴 6편의 영화들 면면을 살펴보면 제작비 규모보다는, 야무진 마케팅과 코어 타깃을 향한 영악한 컨셉을 유지한, 말 그대로 기획영화의 성격이 강하다. 현재 한국영화계는, 비디오 시장이 상대적으로 많이 위축되고 해외 판권이나 기타 부가 판권의 수요 창출이 그럭저럭인 상태에서, 유달리 영화 유통/배급의 쇼윈도격인 극장 개봉과 거기에 따른 극장 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어떤 영화가 수익을 내느냐 손해를 보느냐는 수익모델의 1차 창구인 극장 흥행으로 결판나는 식이다.
그야말로 위험한 도박인 셈이다. <쉬리>가 20억원 가까운 제작비를 들인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은 그 제작비의 크기에 일단 놀라워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때는 투자사쪽에서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25억원 미만으로 제작예산을 집행해 달라고 했었다. 결과적으로 영진위 현물지원과 예비비 10%를 다 쓰고 조금 더 오버해 약 29억원의 순수제작비를 쓴 바 있다. 촬영이 한참 진행된 뒤에,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얼마냐고 제작사에 물어봐, 자못 심각한 목소리로 ‘서울 50만명인데요…’라고 응대했더니, 허걱, 땀을 흘렸던 그 표정이 엊그제 같다.
숫자 불감증! 왜 1억원이 더 필요한지, 10억원이 더 소요되는지 꼼꼼히 따져볼 일이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쓰고, 제대로 운용할 것인지 머리를 싸매고 박터지게 고민할 일이다. 많이 벌면, 허술한 과정은 용서돼도 되는 걸까.
이란 영화에 얼마의 돈을 들여 만들 것인가. 다시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 모 감독이 그랬다지. 내겐 제작비 7억원이나 70억원이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 거품의 시대에, 나라도 하이타이 더 풀지 말고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하이타이 많이 풀었다고, 빨래가 깨끗해지나. 물론 아니지!
적정량을 정확히 풀어야 뽀얀 빨래가 되지. 환경오염도 덜 되고.


[충무로 다이어리] 양말을 던지다
심재명 / 2002-02-15 /

2월 3일 일요일
3월에 개봉할 영화사운드 본 믹싱 마지막 날.
일주일 가까이 진행된 사운드 믹싱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기도 하다. 1권부터 5권까지, 총 95분의 영상과 소리를 보며 복잡한 심경이 되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작업이 모두 끝나고, 그러나 감독은 여전히 이것저것 아쉬운 표정이다. 그때까지 저녁을 못 먹은 우리는 양수리 근처의 포장마차에 들러 국수 한 그릇씩 비우다. 어둠에 싸인 양수리의 팔당대교를 달리는 차 안, 새벽 2시. 오늘 이렇게 한편의 영화를 일단락했다. 그런데 왜 마음이 텅텅 빈 듯하지.

2월 4일 월요일
아침부터 회사 이사회의. 회사 운영이 어떻고, 올해 라인업이 어떻고, 팀장 체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등등 긴 대화가 오가다. 바로 이어서, 또다른 영화 마케팅 회의. 포스터 시안이 맘에 들지 않는데, 요렇게 조렇게 좀 고쳐보시지 하며 ‘영화의 내용과 주제’를 정확하게, 확실하게, 폼나게 전달해야 한다고 주절거리고 있는 나. 맞는 얘기 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스무살 감성을 뭘 얼마만큼 안다고?
점심 먹고 바로 4월에 크랭크인할 영화, 제작점검 회의. 예산, 일정, 미술 부서 이하 준비상황 검토. 오전엔 스무살 감성을 이야기하다가, 지금은 100년 전 이야기. 타임머신이 필요해.

2월 6일 수요일
<씨네21> 인터뷰 끝나자마자 새로 들어갈 영화의상 점검회의 자리에 끼어들다. 20여명이 넘는 캐릭터들의 의상 스케치들을 훑어보며, 호! 배우 S씨, K씨가 저 옷을 입을 걸 머리 속으로 상상하며 잠시 가슴이 뛰다.
영화 일은, 고되지만 ‘즐거운’ 비즈니스임에 틀림없어. 재능과 의욕이 번뜩이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정말 미치게 기쁘거든. 그 사람들의 에너지란 구슬을 꿰는 일이 만만치 않은 일이지만, 빛나는 그 구슬을 발견했을 땐 정말 설레거든.
회의 끝나자마자 모 매니지먼트 대표와 미팅. 구슬의 기쁨 어쩌고는 일순간 날아가고, 접선을 시도하는 연기자의 스케줄 때문에 도저히 캐스팅 제의에 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대답으로 순간 실망. 또다른 사람을 찾아야겠다.

2월 8일 금요일
아침 10시부터 3월에 개봉할 영화 TV 및 기타 광고용 동영상물 편집. 연휴 직전의 교통 지옥을 뚫고 양수리로 기어가 사운드 믹싱.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끝나고, 다시 편집실로. 새벽 2시에 다시 사무실행. 마케팅실 식구들은 그때까지 회의중. 입사 당시엔 통통했던 볼의 신입사원 M양의 안색이 피로로 가득하다. M양 부모님은 날 얼마나 원망할까.

2월 13일 수요일
연휴의 마지막 날. 설날 제사상 차리기와 설거지로 금세 거칠어진 손이 어쩌고 하며 엄살을 떨다가, 한두 사람만 나와 있는 사무실로 출근. 새로 제작하기로 한 영화의 감독과 미팅. 시나리오 모니터와 간단한 의견 제시가 오가다.
휴일이라 같이 따라나온 아이는 내 방 저편에서 신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나는 섹스 묘사가 어떻고, 중년여성의 심리가 어떻고, 불륜이 어떻고 떠든다.

2월 14일 목요일
점심시간을 활용해 세차장으로 달려가다. 대기용 사무실에서 동계올림픽 1500m 쇼트트랙 결승에 출전한 우리 소녀들의 모습을 TV로 보다. 금메달, 은메달을 목에 건 그녀들의 담대한 얼굴을 보며 눈물을 짜다.
제작실장의 호출에 후닥닥 다시 사무실로. 회의, 미팅, 회의. 오후 7시부턴 여성영화인모임 이사회의까지. 회의로 점철된 하루가 어두워지고, 오늘 막 촬영을 끝낸 또다른 영화 쫑파티장으로 직행. 오랜 촬영 일정을 마친 감독 이하 수십명의 스탭들이 건배를 하고, 덕담을 나누고, 노래를 불러젖히니, 어느덧 새벽 3시.
지친 몸으로 귀가. 마루에 양말을 던지며 그대로 납작하게 엎드려 마룻바닥과 입맞추다. 그러고보니 지난 10일간, ‘영화’에 온몸을 던졌네. 양말까지도.



[충무로 다이어리] 양은냄비처럼…
심재명 / 2002-03-15 / 28

요즘 영화 마케팅에 워낙 공력을 기울여서 그런지 영화를 다루는 매스컴 관련 매체들이 늘어나서 그런지 조금만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개봉 전 ‘영화’에 대한 여러 리뷰와 별점 및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것이다.
웬만큼 입소문이나 평가에 대해 자신감이 있는 영화는 개봉 3주 전부터 공개시사회를 열거나 하는 식이어서 보통 3주나 2주 전부터 영화에 대한 정보를 귀가 따갑도록 듣고, 보게 된다. 빅스타가 출연하거나 화제의 이슈거리가 많은 영화는 관련 기사빈도수가 더욱 늘어나서, 개봉 전 ‘인지도’는 높아지게 마련이다. 여기저기서 경쟁적으로 다뤄지고, 평가되고, 소개되지만 정작 관람을 위한 정확한 기준을 만들어주거나, 새로운 해석을 내려주는 것들을 찾아내는 건 힘들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다.
별점의 숫자는 그게 그거고, 그 많은 리뷰에서 눈에 번쩍 뜨이는 ‘발견’의 지점을 찾는 게 어렵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많던 ‘이야기’들은 영화가 개봉됨과 동시에 거의 자취를 감춰버린다. 정작 영화를 극장에 찾아가 관람하고 나서 남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를 찾을라치면 꽤 날짜가 지나간 잡지를, 신문을 찾아야 한다. 웬만큼 흥행성이 높은 영화나 대단한 완성도의 영화 아니면, 대체로 한달 뒤면 흥행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다양한 평가도 ‘게임아웃’ 돼버린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다. 더 괴로운 건 개봉도 되지 않은 영화를 가지고, 채 관람하지 않은 영화를 가지고 다양한 ‘꺼리’를 만들어 풀어내는 통에 정작 영화에 대한 개인의 이해나 선호여부 없이 숨은 그림 찾기처럼 이런저런 의미를 찾아내야 할 판이다.
한편의 영화가 많은 사람들과 어두운 극장 안에서 충분히 소통되고 전달되고 난 연후에 이곳저곳에서 뜨거운, 또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퍼져나가야 할 터인데 말이다. 매스컴은 너무 빨리, 너무 뜨겁게, 너무 거창하게 달구어지고 너무 쉽게 그 영화를 놓아버린다. 관객도 그렇다. 재개봉관도 없어진 유통•배급 시스템은 이르면 1, 2주일, 길면 1달, 정말 가끔 가다 2달여까지 간판을 붙였다가 또 냉정하게 그 영화에 이별을 고한다. 꽤 시간이 지난 뒤 어느 후미진 골목의 침침한 스크린에서 뒤늦게 만난 영화에서 새로운 재미와 의미 같은 기쁨을 발견하고, 어느 매체의 한구석에 올려진, 그 뒤늦게 찾아진 새로운 해석과 만나는 즐거움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언젠가 <씨네21>에서 ‘미안해 영화야, 늦은 사과를 받아줘’라는 제목하에 짧게나마 다시 한번 몇몇의 영화에 대해 재발견, 재해석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영화를 사려 깊은 긴 호흡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쉽다. 지금 영화는, 매스컴은, 관객은 양은냄비처럼, 그 속의 물처럼 너무 빨리 뜨거워지고, 너무 빨리 식는다. 그게 아쉽다.



[충무로 다이어리] 한국영화 리메이크 시대
심재명 / 2002-03-22 / 36

한국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미국 드림웍스사로부터 75만달러를 받고 리메이크 판권을 팔았다고 한다. <조폭 마누라>는 미라맥스사에 95만달러를 받고 역시 리메이크 판권을 팔았단다. <달마야 놀자>도 상당한 액수에 팔렸단다. 단순 판권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작 개봉 뒤의 수익에 대해서도 일정 지분을 분배받기로 했다니, 미국의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고, 세계시장을 겨냥해 배급된다면 엄청난 흥행수익을 챙길 수도 있겠다.
미국 메이저 영화사에서 영화 한편의 시나리오 만들기에 투입되는 비용은 400만∼500만달러에서 많게는 1천만달러까지 육박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초대작 영화 한편을 족히 만들고도 남는 돈이다. 그러한 규모의 헐리우드에서 100만달러 안팎의 돈을 지불하고 상업성 높은 시나리오를 확보, 개작할 수 있다면 비용적으로 꽤 효율적인 제작 방식이 될 수 있겠다 싶다.
한국의 제작자는, 1억원 내의 비용을 들여 완성한 시나리오를 10배+@(알파 기호임!)를 받고 넘겼으니, 세상에 이렇게 남는 장사가 또 있으리. 시나리오만 보고 리메이크권을 제안한 것은 물론 아니라,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국내 흥행 성적, 그리고 대중성이 종합 진단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1997년작 <접속>은 독일의 한 제작사에 당시 5만마르크 정도에 리메이크 판권을 판매한 바 있다. 덩치 큰 미국의 제작배급사가 지불하는 돈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될 돈이다. 눈물나는 대목이다, 흑. 재미있었던 것은 독일의 한 극장에서 <접속>의 리메이크판을 직접 확인하면서 느꼈던 특별한 감흥이다. 한국인의 감성과 아이디어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고스란히 번안되어 재현한 독일판 <접속>의 감성을 확인하고 우리 것과 비교하는 것은 색다른 맛이었다.
1998년작 <조용한 가족>은 일본의 제작사인 세딕 인터내셔널사에 리메이크 판권을 넘겼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가타쿠리家의 행복>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하였다. 분명 리메이크 버전이지만 감독은 거의 창작품이란 느낌이 들 만큼 나름의 재해석, 재구성으로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뮤지컬에 클레이메이션 기법까지 동원했다. <조용한 가족>을 원전으로 하고 있지만 한국영화를 빌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이 영화는, 올 7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한국에 처음 공개될 예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작성을 의심받으면서 때때로 ‘표절혐의’에 시달렸던 한국영화가, 오리지널리티의 경쟁력으로 서방의 영화계에서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줄리아 로버츠 또는 카메론 디아즈가 ‘엽기적인 그녀’가 되어 순정을 바치는 상대남자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는 헐리우드영화를 보게 되는 현실,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한쪽에서는 한국영화의 아이디어 빈곤, 소재 고갈, 특정 장르영화만의 편중 생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고가에 한국영화의 아이디어가 팔려나가고 있는 현실….
어쨌건 한국영화의 ‘상업적’ 경쟁력을 피부로 실감하게 된 요즈음이다.



[충무로 다이어리] 시사회 유감
심재명 / 2002-04-02 / 47

얼마 전 <복수는 나의 것> 기자시사회에 갔었다.
톱스타들도 떼로 오고, 온갖 매체의 카메라들이 동원되고, 여기저기 아는 이들이 보이는, 그러니까 충무로에서 기대해온 영화의 첫 공개시사회의 분위기였다.
여기저기 눈인사가 오가고, 무대 인사가 있고, 불이 꺼지고 두 시간이 좀 지났다. 불이 켜졌다. 나는 빨리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토할 것 같아서였다. 영화를 보고 토하고 싶은 심정이 드는 건, 84년쯤 외국어대 대강당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를 본 뒤 두번째이다. 토하고 싶다고 했다고 <복수는 나의 것> 관계자 여러분, 혹시 오해하지 마시라. 혐오나 경멸의 뜻은 절대 아니다. 어쨌든, 토기를 느꼈으나 아는 사람들 눈빛과 마주치면서 이빨을 악물어야 했다. 스타들의 옆모습도 훔쳐봐야 하고, 지인들도 챙겨야 했고, 수인사도 나눠야 했으니…. 결국 그걸로 감정의 배설도 제대로 못하고 <복수는 나의 것>을 본 셈이 되었다.
<집으로…> 일반시사회에 갔다. 기자시사회 때 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다 개봉일까지 버티기 힘들어 결국 또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말았다. <집으로…>를 몹시 보고 싶어 하시는 엄마와, 동반 외출을 권할 겸 아버지까지 모시고 갔다.
극장으로 들어가 앉으니 여기에서도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 얼굴이 보인다. 내 앞자리는 아는 스탭들이, 저 뒷자리엔 아는 영화사 분들이. 앞자리 스탭분들에게 부모님을 소개시키고 아는 사람의 오프닝멘트를 듣자니 영화가 시작되었다. 얼마 뒤 옆자리 엄마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를 힐끔거리며 보다가, 앞자리 아는 처녀 스탭이 연신 티슈를 눈가로 가져가는 걸 훔쳐보다가 종종 영화를 놓치곤 했다. 몇달 전 시나리오를 보면서 찔끔거렸던 기억이 있는데, 내 눈가는 점점 민숭민숭해져갔다. 엄마 옆에 앉은 아버지는 아까 극장 입구에서 선물로 준 색깔 사탕을 쩝쩝거리며 드신다.
갑자기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꼬마와 할머니의 티격태격, 알콩달콩 이야기보다 아버지의 쩝쩝거리는 소리, 엄마의 훌쩍거리는 소리에 더 가슴이 아파졌다. 갑자기 더 늙어버린 내 부모의 옆모습이. 어느덧 영화가 끝났다. 아이고, 어쩜 그리 내 얘기 같냐? 내 엄마는 영화 속 꼬마처럼 안방 벽에다 ‘할머니 봐보!’라고 낙서를 휘갈기는 만 5돌 지난 외손녀를 거두는 본인의 처지와 완벽하게 100% 감정이입, 또는 동화된 것 같다. 에잇! 나는 며칠 사이로 기대작 두편을 이렇게 날려버리다니 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시사회장은 절대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도, 참고 참았다가 돈 내고, 외롭지만 혼자 마지막 회를 찾아보리라. 그래야 온전히 두 시간 남짓 동안 그 영화는 내 것이 되고, 자막이 올라가고 불이 켜질 때 순도 100%의 내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 충무로 관계자 여러분들, 첫 공개시사회 때 시사회장 가지 마세요. 직접 초대받지 않았으면 가지 마세요. 괜히 좌석 넘쳐서, 시사회 진행자 고생시키지 말고, 참아주세요. 어수선하지 않고, 차분한 기대로만 은근히 뜨거운 시사회장 분위기 조성을 위해. 그리고, 영화인이지만, 또한 관객의 즐거움을 관객의 눈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런데 나처럼 아는 이들 쳐다보고, 훔쳐보고,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수선하게 정신 사나운 사람은 없다고요? 그렇다면, 할말 없네요.



[충무로 다이어리] 멋보다 내용이…
심재명 / 2002-04-19 / 57


모 기자가 며칠 전 기사에서 모 극장 이야기를 하면서 ‘창 밖 풍경이 보이는 상영관의 운치’ 운운하는 걸 읽었다. 그때 든 생각 하나, 그 좋은 풍경만큼 우리나라 극장 시스템이 좋은가 하는 의문.
쥐가 관객과 동석하고,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암표상이 버젓이 활개를 치던 구태의 극장 풍경은 이제 많이 사라졌다. 너도나도 멀티플렉스로 변신하면서 화려한 외관과 멋진 내부 인테리어를 자랑하고, 볼거리, 쉴거리, 먹을거리가 운집되어 있어 그야말로 단순 영화 관람을 넘어서, ‘멀티’한 오락을 제공하는 극장으로 속속 바뀌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정작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최적의 상영 시스템 구축에 있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슈퍼 35mm 촬영기법으로 시네마스코프(가로, 세로 비율이 2.35:1) 사이즈 화면을 구현한 모 영화를 제작했을 때의 일이다. 이 화면의 영화는 카메라를 슈퍼 35mm 포맷으로 전환해서 촬영한 뒤 이 네거필름을 압축과정을 거치고, 상영 시스템에서도 아나모픽 렌즈를 끼우고 영사해야 하는 복잡한 공정이 뒤따르는 시스템이다.
일본 현상소에서 압축작업을 해와 프린트를 뜬 이 영화의 기술시사가 있던 날, 영화는 웬일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포커스가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긴장되는 첫 기술시사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일본에서의 압축과정 중에 문제가 있었는지 등, 작업 공정의 앞뒤를 다시 복기해가며 긴박한 논의가 이어졌다. 당장 공개 언론시사회 스케줄이 잡혀 있었고, 개봉도 코앞으로 다가온 터라 모두의 마음이 탔다. 일단 일본으로 뛰어가기 위해, 당장 그 다음날 비행기표를 대기 예약하고, 몇 사람의 비자발급 문제를 놓고 이런저런 방법들을 떠올렸다. 그때 어떤 이가 다른 상영 시스템에서 한번 시사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음날 아침, 최근에 개관한 모 극장에서 시사를 하니 어라! 포커스가 제대로 맞는 것이었다. 압축과정 등 후반작업 공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앞서 기술시사를 연 영사실의 아나모픽 렌즈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영사실의 책임자 왈, 어떤 이상도 없으니, 일본에 가서 정밀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당당하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그 영화로 데뷔하는 촬영기사는 걱정으로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했는데…. 어쨌든 스탭들은 일본으로 튀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개봉일을 늦추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일순 모두 허탈해졌다. 엉터리 영사 시스템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던 셈이다. 이후에도 개봉 전 홍보를 위해 마련한 시사회 때마다 노이로제 상태로, 매번 상영상태를 체크해야 했다. 어떨 땐 포커스가 제대로 맞지 않고, 어떤 극장에선 입과 소리가 조금씩 어긋나고…. 공들여 후반작업한 것이 극장 시스템에서 엉망으로 구현되는 상황을 보면서 맥이 빠졌다.
한국영화의 후반작업에 들이는 공력과 수준은 점차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후반작업에 참여하는 테크니션들의 가장 큰 고민은 노력해서 만든 ‘소프트웨어’가 수준이 들쭉날쭉인 ‘하드웨어’의 벽에 부딪혀 노력한 것보다 못한 수준으로 관객과 만날 때 쓰디쓴 절망을 맛본다.
외형에 신경 쓰는 것만큼, 최적의 사운드, 최고의 화면을 위해 고민하는 이 땅의 극장문화를 기대한다. 고대한다.

P.S: M극장의 영사실장님은 몇년 전에도 그러하셨듯이, 최근에도 시사시에 극장 좌우를 돌아다니시며 사운드 상태를 체크해주셨고, 볼륨을 조절해주셨으며 화면점검을 해주셨다. 그런 분들, 그런 분을 고용하시는 극장주들 더 많아졌음 한다. 월급 많이 주시면서….



[충무로 다이어리] 참패 아니면 대박
심재명 / 2002-05-03 /

17억, 14억, 10억원…. 순제작비가 아니다. 요즘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의 마케팅 비용이다. 현재, 온 국민의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영화 <집으로…>는 순제작비 약 15억원, 마케팅비 약 17억원을 썼다. 아직도 상영중이라 최종 마케팅 비용은 상회할 것이 틀림없다.
<집으로…>는 1억7천만원이 아닌 17억원을 쏟아붓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어쩌면, 2만명도 채 볼까 말까 했을지도 모를 이 영화의 운명을 전국 200만명 이상의 큰 영화로 바꿔놓았다. 이 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정확히 보고, 현재 한국영화 시장을 예리하게 꿰뚫어본 결과이다. 결국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아니 돈을 얻은 셈이다. 더욱 다행인 것은 그 용기가 만용이 아닌, 이 영화가 어떤 면에서 대중과 조응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읽어낸 의미있는 용기라서 현재 영화계가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운아의 이야기 말고 불운한 쪽을 들춰보면 코피 쏟고 항복한 이들의 숫자는, 올해에도 부지기수이다. 올해만 해도 서울 20개관 이상을 확보하지 못한 영화 중에 단 한편도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가 없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와이드 릴리스 방식에 목숨을 걸고 자연히 첫주 흥행 성적을 위한 ‘과격한’ 마케팅비를 쏟아붓고, ‘모 아니면 도’ 식으로 흥행 성공과 실패에 영화의 운명을 맡기게 된다. 다행히도, 첫주의 흥행 성적이 괜찮다 하더라도, 완성도에 문제가 있어서 입소문이 안 좋게 날 경우는 낙차폭이 커서 요즘 영화계엔 1주 버티면 다행, 2주 버티면 롱런, 3주 버티면 대박이라고 입을 모은다.
참패: 참혹하게 패배하다.
실패: (목적으로 삼은 일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조건이 불리하거나 하여 뜻을 이루게 되지 못하는 것. (이상 국어사전에서 발췌)
요즘은, 흥행 참패, 실패의 말을 수없이 미디어 매체에서 접하게 된다. 웬만하면 참패요, 실패한 영화로 낙인찍힌다. 워낙 총제작비용이 늘어나 참패, 실패의 딱지를 이마에 달게 된 영화들의 손해 액수는 웬만하면 -10억원, -15억원이다. 쏟아붓는 만큼의 안전장치나 대책 마련은 거의 제로 상태다. 극장과 영화사가 5:5의 비율로 수익을 분배하는데, 50%의 수익률을 놓고, 제작사와 투자사는 20억∼30억원의 도박을 건다. 우리의 시장도 점차 할리우드화돼가는 추세여서 대중영화, 장르영화일수록 대규모 개봉, 과감한 마케팅비 투입의 형국으로 옮아가고 있으나 유통•배급 시스템은 과거와 똑같은 모습이다.
미국처럼 슬라이딩 시스템(Sliding scale system)을 적용, 초반의 엄청난 마케팅 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 안전판을 마련하거나, 영화의 힘으로 버티면서 개봉관 수는 대폭 줄더라도, 롱런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방식 등을 적극적으로 고민해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현재 우리는, 제작•투자사는 대박 아니면 쪽박의 성적표를 받는다. 또한, 극장쪽도 극장 수 증가, 요금 및 서비스 경쟁, 좋은 영화 유치 경쟁으로 남는 거 없다고 울상이다.
‘대박’ 아니면 ‘참패’의 극단적 양상이 아니라, ‘석패’ 혹은 ‘선전’ 또는 ‘분투’라는 용어가 많이 회자되는, 건강한 시장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아니, 큰 소망이 있다.



[충무로 다이어리] 칸을 추억하며…
심재명 / 2002-05-17 / 38

바야흐로 칸 국제영화제 주간이다.
<취화선>이 경쟁부문에 초청되고, 언제나처럼 세계 국제영화제 중 가장 큰 마켓이 열리는 터라 수백명의 한국영화인들이 칸으로, 칸으로 몰려간다. 올해는 그 숫자가 5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잠시, 충무로가 칸으로 옮겨간다고 해도 그리 큰 과장은 아닐 듯싶다.
2년 전 처음으로, 칸 국제영화제에 간(촌스럽다!) 나는, 일단 그 영화제의 화려한 위용에 놀랐고, 칸의 해변을 끼고 온 거리가 인파로 바글거리는 데 놀랐으며, 끔찍하게 비싼 물가에 놀랐다. 공식 상영의 세리머니를 위해 붉은 주단을 밟는 감독과 배우들에게 미리 사전연습을 시키는 그 용의주도함과, 팔레 드 페스티벌이라는 거대한 5층짜리 본부 건물의 거만한(?) 위용과, 공식 경쟁작들을 상영하는 뤼미에르 대극장의 2100석짜리 좌석의 규모와 가로 20, 세로 90m짜리 스크린의 크기에 놀랐다.
바로 옆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상영작들이 상영되는 750석짜리 클로드 드뷔시 극장은 뤼미에르 극장과 그 크기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그 ‘영악한’ 영화제를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그해 영화제에 참석했던 모 배우는 시간이 남아서인지, 뤼미에르 대극장에 깔린 빨간 주단과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깔린 파란 주단과 ‘감독 주간’에 초청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 깔린 비닐(?)의 폭과 길이를 면밀히 검토(!)하며, 이후엔 빨간 주단을 밟는 배우가 반드시 되겠노라며 농담 섞인 다짐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2년 전, 모 영화가 비평가 주간에 초청되어 갔을 때, 시골에서 올라와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처럼 열심히 스케줄을 체크하고, 영화보고, 마켓 시사 반응을 체크하고, 일찍 들어가 자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불현듯, 그들이 내 영화사의 영화 한편을 초청했다고 해서 이곳에 와서 왜 이 많은 돈을 쓰며(엄청 비싼 숙박비, 밥값, 교통비, 진행비) 못하는 영어 때문에 얼굴 붉히며 영화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밤마다 벌어지는 파티에 어쩔 수 없이 가끔 얼굴 내밀고 쑥스럽게 서 있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해, 그 빨간 주단을 한국인으로는 처음 밟은 <춘향뎐>팀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그 거대한 상영관에 들어선 임권택 감독, 이태원 대표, 정일성 촬영감독이 관객의 박수를 받으며 서로 어깨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진귀한 구경을 했다.
‘세 사나이의 눈물’을 현장에서 목격(!)했다는 것이나 저만큼 객석에 서 있는 모 신문사 영화담당 기자의 까만 드레스와 또 어떤 이의 어색하게 보이는 나비 넥타이와 턱시도 차림을 보면서 키득거린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던 셈이다.
자신들이 불러들인 영화에, 현란한 장식을 달아주는 거대 영화제의 요란한 제스처에 이 촌스런 아줌마는 비위가 상하기도 했지만, 영화제 기간중 어느 늦은 밤에 상영관을 들어섰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좋은 영화와의 조우는 영화제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기쁨이기도 하다. 어쨌든, 영화제에 참석한 한국영화인들에게 각자 모두 좋은 성과있기를. 술 취해서 가방 잃어버리지 않기를. 카페 의자에 무심히 가방을 걸어놨다가 소매치기 당하지 않기를. 돌아오는 비행기가 안전하기를, 텅 빈 충무로에서 하릴없는 바람을 가져본다.



[충무로 다이어리] 국민영화?
심재명 / 2002-05-30 /

지난 5월27일, <취화선>이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핫뉴스가 날아왔다. 그날 하루종일 온 매스컴이 수상 소식을 전하느라 분주했다. 다음날엔 온 지면 매체가 엄청난 면을 할애하며 임권택 감독과 그의 영화인생에 대해 소개했다. 또 그 다음날엔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한 <취화선>팀 소개와 기자회견 내용이 다뤄졌다. 그야말로, 그 한주가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선전한 한국 축구대표팀과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임권택 감독의 이야기로 채워진 셈이다. 영화계에서 밥 먹고 사는 한 사람으로서 초미의 관심은, <취화선>이 다시 ‘칸영화제 특수’를 잡아 흥행바람을 몰고올 것이냐이다. 업계의 많은 사람들이, 워낙 젊은 관객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요즘 영화 흥행경향이 가볍고, 빠르고, 자극적인 것을 선호하는 추세여서 그닥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현재 <취화선>은 ‘부활’(?)의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월요일 오후부터 관객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28일엔 심지어 어떤 극장에선 두배 이상의 관객이 들기 시작하더니만, 29일에도 역시 상승세를 보였다. 배급사에선 주말부터 개봉관 수를 대폭 늘릴 방침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런 관심이 언제까지, 어떻게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10여년 전 <서편제>의 ‘역전 신화’가 다시 이어질지, 다시 영화계에서 밥먹는 사람들과 내기를 걸 판이다. 개봉 당시, 단성사 한관에서 개봉 첫날 2천여명이 들어 제작사를 절망시켰다가, 당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었던 대통령의 관람 이후,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문화’의 변방, ‘대중문화’의 언저리에 존재했던 한국영화가 종합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하더니, 급기야 2천여명이 3천명, 심지어 전회 매진으로 역전되며 국민영화로 등극했던 그때 시절이 있었다. 기억하건대, <쉬리>는 99년 설 연후에 개봉되어 나름대로 훌륭한 성적을 기록한 바 있다. 모 종합일간지에서, 연휴 성적을 들어 <타이타닉>의 초반 성적을 눌렀다는 뉴스를 전하자 <타이타닉>을 ‘누를 수 있는’ 한국영화로 자리매김하면서 폭발적 흥행장세를 기록했다.
다음해 개봉한 <공동경비구역 JSA>는, 개봉에 맞춰 남북정상회담 소식이 전해져 바람을 타더니만, 추석 연휴 흥행성적이 <쉬리>와 비교되면서 다시 또 국민영화 자리를 차지하는 행운을 누렸다. ‘며칠간 몇명 돌파’식 뉴스와, 영화흥행을 100m 달리기 기록 경신식으로 이슈화하는 마케팅은 <친구>로 이어져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고보면, ‘국민영화’가 되려면 시대적 이슈를 만들어내거나, 만들어지는 데 동승하는 억센 운도 영화의 질적 완성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매스컴의 리뷰나 평론가의 평이나 별점엔 놀라울 만큼 시니컬한 태도를 보이는 우리 대중, 한국영화 관객이 아직도 사회, 문화적 ‘이슈’엔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이번 <취화선>의 관객 상승을 통해 확인된 셈이다. 한 문장으로 똑 떨어지는 재미있고 명확한 주제와 소재의 이른바 ‘하이 컨셉’ 영화와 스타의 등장, 코미디, 액션, 멜로가 혼성 변주된 영화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요즈음 고전적인, 그리고 의미있는 이슈 메이커 <취화선>이 작금의 흥행동향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 더 지켜볼 일이다.
베켄바우어와 차범근이 선수생활을 끝낸 이후로, 더이상 ‘축구’에 관심이 없는 나는 요즘 빨간색만 봐도 ‘또 월드컵 얘기야’ 하며 지레 심드렁해진다. 책상에 앉아 <취화선>의 관객 상승 그래프나 그려볼 참이다. 실로, ‘월드컵’과 ‘칸영화제’의 주간이다.


[충무로 다이어리] 주관적인 상반기 결산
심재명 / 2002-06-21 / 43

올 한해도 절반을 채워간다.
상반기, 그러니까 1월부터 6월까지 개봉한 영화 중 돈을 번 영화는 내가 알고 있기론 네다섯편이다. <나쁜 남자> <공공의 적> <집으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등.

혹자는, 그만한 성적이면 예년과 비슷한 수준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다. 60편에서 70편 가까이 제작되는 한해의 영화 중에 통상적으로 10여편의 정도가 흑자를 본다고 할 때, 올해도 남은 절반인 하반기를 감안하면 그리 낙담할 일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들춰보면,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 외의 영화들의 손해액이 너무 크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충 특정 영화를 들어 예를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망해서 속상한데 기자도 아닌 니가 거명까지 해가며 속을 긁을 이유가 뭐가 있냐고 따져들까봐 언급은 못하겠고, 우리 영화가 공동제작, 개봉한 최근작 <후아유>의 예를 들어보겠다.
이 영화는 순제작비 20억원에 마케팅비 약 12억원을 썼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국 약 20만명이 들었다. 극장수익 포함 기타수익을 예상해도 물경 20억원이 날아갔다. 밤 새우고, 코피 쏟고, 땀 흘리며 몸과 마음을 바쳐가면서 돈을 날릴 수도 있는 것 중 대표적인 일은, ‘도박’과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한번 일깨우게 한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친구>의 연이은 성공, <엽기적인 그녀>와 <신라의 달밤>과 <조폭 마누라>와 <달마야 놀자> <두사부일체>의 놀라운 ‘떼성공’ 이후, 지금 한국영화 시장은 코피 쏟는 제작사와 투자사로 가득하다. 과장하자면, 피바다다.
지난해, ‘와라나고’ 영화로 묶여 불렸던 이른바 상대적으로 중•저예산의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영화가 용감하게 개봉하는 예도 올 상반기엔 드물다. 모두 상업적으로 성공해보겠다고 야심찬 칼을 휘둘렀던 만만치 않은 제작비를 들인 영화들이 번번히 깨져 나갔다. 그래도 지금 현재, 쉼없이, 여전히 가열찬 영화만들기는 계속된다. 6월 말 현재 제작중인 영화만도 30여편 가까이 된다고 한다.
올해는 근 몇년 중 가장 많은 편수가 제작될 것이라고도 한다. 어떤 벤처 캐피털의 CEO가 한 말이 기억난다. “성공이 가장 큰 적이다”라는. 2∼3년 동안의 성공이 주는 달콤함이, 두려움과 긴장을 없애고 배짱만 키워놓은 거 아닐까. 논리의 비약인가? 영화사는 셀 수 없이 늘어나고, 제작비는 겁없이 올라가고, 시장의 변화 논리에 따라 마케팅비는 미친듯이 퍼부어대는 작금의 영화시장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너, 두편 연달아 망하더니 쓸데없는 비관주의자가 다 됐구나라는 비웃음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한 심정은 지금 ‘낙담중’이다. 지난해 <씨네21>에 실린 본인의 인터뷰 기사 중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어쩌고의 중간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실패를 두려워하진 않았다. 또한 매번 최선을 다했다고도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영화 산업의 욱일승천하는 성공가도가 가져온 ‘빠른 변화’-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에 기민하고 냉정하게 대처했는가라고 자문한다면 아니올시다이다. 한국영화의 미래에 대해 자만하진 않았지만 너무 우직했다고도 생각한다. 남들은 어떤가? 혹은 약삭빠른 생각을 했는가?
한국영화 산업의 바람직한 그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방법’에 대해 고민하면서 상반기를 접는다. 바야흐로, 월드컵 특수 이후, ‘월드컵 후유증’에 시달릴 대중의 마음을 잡아야 하는 숙제를 안고 하반기는 시작된다.씨네21


[충무로 다이어리] 역전의 드라마!
심재명 / 2002-07-05 /

“감동의 도가니인데요.”
“눈물의 바다에다!”

최근 영화월간지에 <챔피언>의 제작진의 대담 기사에서, 내부 모니터 시사 후 반응을 그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영화 제작에 직접 관여한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이 왜 나오는지, 어떻게 해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가 봐도 참혹해 할 완성도의 영화가 아니라면, 만드는 사람들은 그 길고, 지난한 영화 제작 과정을 겪으면서 ‘주관적’으로 빠져 버린다. 그리고 대부분은 ‘주관적’으로 사랑에 빠져버린다. 흥행을 보장해 주는 스타나, 감독이나, 이미 칭찬받은 시나리오가 있다면 그 도는 점점 더 올라간다.
수년간의 시나리오 작업 과정, 수개월의 촬영, 밤을 패가며 이루어지는 후반작업을 거치면서 자신들이 만드는 영화와 열애에 빠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참여한 영화에 침을 뱉을 만큼 냉정한 시각을 유지하고 있는 자라면, 속된 말로 무엇에도 애정이 없는 사람이거나, 냉혈 인간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제작의 최종 의사 결정권자들 뿐만 아니라, 저 막내 말단 스태프들까지 무지막지한 애정을 가지고 만든 영화라면, 그리고 영화가 완성되어 첫 기술시사회장에서 모두 ‘감동의 도가니’를 경험했다면, 자랑스러워 해야 할 일이다. 자부해야 할 일이다.물론, 투입된 만큼 뽑아내야 하는 경제적 비즈니스와 영화사에 희미하든, 뚜렷하든 족적을 남기냐, 마냐의 일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야 하는 필연의 숙제이긴 하지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완성된 영화는, 만드는 이들의 손을 떠나 시장에 던져질 때부터 그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신감에 충만했던 영화가 철저히 외면 받는 경우도 있고, 내심 불안했던 영화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 심한 경우엔, 제작사나 투자사가 마음 속에서 버린 영화가 ‘걸작’이 되는 놀라운 반전도 아주 가끔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떤 영화에 참여한 수십 명, 수백 명의 관계자 중에서, 그 영화의 가치를 가장 정확히 예측하고, 운명을 뒤바꿀 만큼의 용단을 가지고 있는 자가 존재하는 영화는 소위 ‘행복한’ 영화이다. 자만과 교만이 뒤통수를 맞을 때, 지나친 폄하가 기우로 판명되었을 때의 ‘반전’의 맛은 기막힌 자극을 준다. 영화일은 그런 ‘역전’의 드라마가 존재하므로, 짜릿짜릿한 스릴이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인디안 썸머> 기자 시사회에서, 노효정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잘 된 부분, 칭찬 받을 구석이 있다면, 제작진과 스태프들의 덕이요, 못난 부분이 보인다면 그건 나, 감독 탓이요”라는 인상깊은 멘트를 했다. 저 말이 교만일까? 겸손일까? 냉정한 평상심일까? 궁금했었다. 몇 년 전, 모 잡지에 내 인생의 영화 10편 중에 내가 제작한 영화를 두 편이나 끼워넣은 무지한 교만(?)을 부린 나는, 그 감독의 냉정한 시선이 일면 부러웠었다.
지금도 그 잡지를 보면, 낯이 뜨겁다.
그러나 어쩌랴. 내일 하늘이 무너져도, 오늘 자신들의 영화에 ‘뻑’이 가는 그 뜨거운 착각이, 이 일의 매력임을…… 아는 이들은 안다.



[충무로 다이어리] 일단 한번 믿어보시라니깐요
심재명 / 2002-07-19 /

며칠 전, 영화배우 박중훈씨와 전화 통화할 일이 생겼다. 목소리가 갈라졌기에 물었더니, 어제 “승우씨 나오는 <라이터를 켜라> 시사회 보고 기분 좋아서 승우씨 등과 술을 마셔서 그랬다”고 한다. 이제껏 김승우가 출연한 모든 영화의 흥행성적을 합한 만큼 들 것 같다고도 했다. 나는 안 봐서 모르겠다고 했던가? 아무튼.
그날 오후에 그 말이 진짜인지 궁금해져서 부랴부랴 도심의 한 극장으로 달려가 오후 표를 끊었다. 표를 끊고 주차를 위해 명동 한복판으로 차를 끌고 갔다가 휴일을 즐기는 청춘남녀의 인파에 꼼짝달싹 못하다가 겨우 차를 대고, 달려갔으나 이미 영화는 15분이 흘렀다.

꽉 찬 좌석 사이를 뚫고, 비집고 앞에서 두 번째에 앉아 목을 빼고 보았다. 15분을 놓쳐서 허봉구의 머리 힘이 왜 세졌는지, 우동 그릇이 어떻게 박살났는지를 보지 못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면서, “300원짜리 1회용 가스 라이터”를 다시 손에 넣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의 머리통이 세다는 걸 자각하지만 남용은 하지 않는, 의협심이 아니라 상황에 몰려서 위험천만하게도 기차 위로 기어올라가는, 그냥 우리 옆에 있는 조금 멍청한 친구 같은 허봉구가 관객의 마음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김승우라는 배우가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기사들을 보니, “감독님 잘 모르겠어요. 감독님이 나 많이 도와줘야 하는데”라고 김승우는 주저하고, 헷갈려 했다고 한다. 그때 감독은 대담 내용대로 “아이씨, 내 한몸 추스르기도 힘든데…” 하며 난감해했다지.
예전에, <코르셋>을 제작할 때, 김승우씨를 캐스팅하기 위해 늦은 밤 집엘 찾아간 적이 있다. 시나리오나 자신이 맡을 역할에 미심쩍어(!)하는 그에게 어쩌고저쩌고 구라를 풀었다. 어떻게 만드실 계획인데요? 이 인물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죠? 라고 물으면 제작자나 감독은, 이리저리 이것저것 현명한 답을 내놓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사실은 나도 잘 몰라요! 당신과 하면 잘될 것 같으니까 하자고 하는 거요. 이 영화가 잘될지, 안 될지는 정말 나도 잘 몰라요, 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정작 입에선 어쩌고저쩌고 쑥스러운 ‘구라’가 나온다. 뒤통수에선 땀 한 방울 흐르기 일쑤다. ‘진심’을 꼭 말로 해야 아나? 시나리오를 보고, 만들려고 모인 이들의 태도와 눈빛을 보고, 믿고 하면 되지 않나? 그런 생각도 뒤따른다. 그 어색한 심정 때문에 굳이 ‘구라’라고 속되게 표현했다.
어쨌든, 본인도 긴가민가했다고 했지만, 김승우란 배우는 적어도 내 생각에 좋은 캐릭터를 만나서 퍽 다행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긴가민가했던 의구심이 어쩌면, 더 나은 연기를 끌어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은, ‘구라’칠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 시나리오를 읽고 어쩌고저쩌고 만나서 얘기하기 전에, 그냥 전화 한 통화로 “못하겠는데요”, “어렵겠는데요”란 답이 돌아온다. 그걸로 끝이다. 또 때론 그런 전화도 오지 않는다. 의심쩍고, 긴가민가하고, 그 감독과 제작사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니라, 요즘은 애초부터 배우와 매니저의 나름의 계획과 노선에 따라 결정하고 그것을 우선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땀 뻘뻘 흘리며 “일단 한번 믿어보시라니깐요”라고 외쳤던 옛날이 그립다.


[충무로 다이어리] 현장에 가면…
심재명 / 2002-08-02 /

오늘, 점심 때 사무실에 <욕망>의 김응수 감독과 박기웅 촬영기사가 들렀다. 같이 점심을 먹는데, 금연 얘기가 오가다 김응수 감독이 박기웅 기사에게 지금 끊을 담배를 왜 촬영 중에 끊어 그리도 ‘앙탈’을 부렸냐고 했다.
“앙탈이라니요?” 촬영기사와 감독 간의 신경전을 참으로 얄궂게도 표현한다고 한바탕 웃었다. 옆에 있던 임상수 감독이 자신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겠지’ 식의 방식으로 촬영기사를 대한다고 했다.
와! 그런 사람이 <눈물> 찍을 때, 한 연기자를 벽으로 몰아 붙이며, 소리를 지르며, 거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냐고 물었다. “아, 그것은 일종의 ‘묘책’이지요. 공포 분위기 이전에 조감독한테, 그 연기자가 도망갈까봐 출구 잠그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조감독을 옆에 세워 놓고 몰아 붙였죠. 아! 그랬더니 예상치도 못하게, 그 연기자는 기절해 버리고 말대요.” 웃으며 넘어가기엔 너무 무시무시한 현장 분위기이다.
며칠 전에 영화 <오아시스>를 보았다. 차마 외면하고 싶은 ‘센’ 장면들이 많았다. 배우 설경구가 인터뷰 때 종종 ‘변태 감독’이라고 부른 이창동 감독의 촬영 현장은, 얼마나 처절하고 치열하고, 힘들었을까.
“(배우들에게) 미안해 하면서 시킬 거 다 시키는 거 정말 싫다. 강간 씬의 경우 열 몇 번이나 찍었는데도 ‘약하다’고 계속 다시 갔다. 거의 실신 상태인데 그날 밤 하나 더 찍자고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오라고 했다.” 배우 문소리의 인터뷰 내용이다. 혀를 내두를 만한, 포기 안 하는 감독이란 생각이 절로 드는 대목이다.
감독과 연기자를 비롯한 현장 스탭들 간의 관계는 어쩌면 피학과 자학이 엉킨 한판 ‘지옥도’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앙탈’ 운운하며 얄궂은 대사를 날렸던 김응수 감독의 촬영 현장에선 감독이 연기자의 뺨을 의도한 상태에서 수차례 때리고, 연기자는 울고 불고 한 연후에, 비로소 눈물 연기에 임한 일도 있다.
<오아시스>를 보고, 뒷풀이 장소에서 오가던 얘기 중에, 어떤 배우는 첫 영화 데뷔작에서 단 한 커트를 위해 팬티만 입고 2박 3일을 찍는데, 나중에는 거의 ‘정신적 공황’의 상태를 느꼈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아직도 그의 영화 데뷔작을 다른 작품으로 알고 계신다고 한다.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감독, 그 옆에서 내가 뭘 잘못했을까 노심초사하는 연기자,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카메라를 몰아 붙여보는 촬영기사… ‘
미쳐서 돌아가는’ 고통스런 촬영 현장은 옆에서 지켜보면 하나의 ‘씻김굿’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 미친 사람들의 열기는, 스크린에서 생생한 모습으로 생명력을 뿜어낸다. 그러나, 속으면 안 된다. 감독들의 미친 짓은 거의 ‘계획적인 의도’이거나, 뒷감당을 준비한 ‘묘책’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그런 ‘미친’ 짓거리들은 다 자신이 그려내고자 하는 영화에 대한 ‘제대로 된’ 광기나 욕망과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충무로 다이어리] 예술영화 전용관,설치 가능할까
심재명 / 2002-08-16 /

지난해엔 <와라나고> 상영 운동(?)이 있었다. 흥행에 실패한 영화들이, 자생적으로 자신의 ‘생명줄’을 좀더 늘려보고자 하는 생각들이 모아져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 이 4편을 모아 상영관을 잡고 공동 상영을 약 한달간 했고, 개별적으론 대관 상영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 롱런’을 하기도 했다.
이후, 문화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이른바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에 대한 대안적 상영방식 및 정책이 필요하다는 논의들이 있어왔다.
연초 문화관광부가 연두 업무보고에서 예술영화 전용관 설치 계획을 시사한 데 이어, 지난 8월6일 영화진흥위원회가 전국 주요 시•도에 7개관 이상의 예술영화 전용관을 설치•운영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예술영화 전용관 사업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전국 7개관 이상의 예술영화 전용관을 확보, 운영할 수 있는 단일 사업자를 선정해 연리 1%로 총 150억원을 융자해준다는 것이었다. 연리 1억5천만원을 받고 150억원을 빌려주는 대신, 문제는 150억원의 ‘담보 능력’이 있어야만 이 사업 신청자로서의 자격이 생긴다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예술영화를 제작하거나, 유통•배급한 경험이 있거나, 이런 일련의 사업에 대해 구체적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150억원의 담보 능력이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또한, 일반 메이저 유통 배급사가 운영하는 멀티플렉스의 경우, 1년 수익이 한 상영관당 5억∼6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대형 멀티플렉스의 경우는, 문화적 마인드가 전제되지 않는 한, 경제성만으로 보았을 때는 굳이 필요성을 느끼거나 구미가 당기는 사업이 아닐 것이다.
예술영화로 인정받은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각각 연간 상영일수의 5분의 2와 5분의 1 이상 상영해야 한다고 하는데, 예술영화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을 확보하는 문제도 현실적으로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영진위는 하드웨어인 상영관 확보나 소프트웨어인 예술영화 확보, 양쪽 모두에 스스로 불가능할 수 있는 ‘족쇄’를 스스로 채우고 시작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사업계획을 천명했으나, 그 실효 가능성은 불투명한 계획안인 셈이다.
문화관광부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생색내기가 정녕 아니라면, 구체적 묘안을 내세워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일정 액수를 확실한 사업자에게 지원, 지급하는 방법이 이 사업의 구체화와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상반기 예술영화 시장점유율은 2%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난해의 십몇%에 비하면 급전직하이다. 지난해의 일련의 대안적 상영방식의 모색이나 극장가에서 예술영화를 자주 찾아보는 것도 힘든 형편이다. 실로 1년 사이의 큰 변화이다.
정책 입안자들에게 문화에 대한, 시장경제에 대한 기본적 상식을 기대한다는 바람은, 이 땅에서 영화를 업으로 하는 이들의 기본적 ‘소망’임을 그들이 좀, 제대로 알아주었으면 한다.


[충무로 다이어리] 구조조정이라구요?
심재명 / 2002-09-04 / 55

개인적으로 꽤 즐거운 ‘외국영화 보기’가 계속된 몇달이었다. 7천원이 아닌, 7만원이라도 내고 싶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시간30여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시각적 황홀경’으로 넘쳐났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였고, 감각적이고 아이디어 넘치는 카메라 워킹과 편집이 한수 배울 만했던 <레퀴엠>,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박수치고 노래 부르고 싶은 <헤드윅>이었으며, 언제나 샘나게 부러운 워킹타이틀사의 깜찍한 <어바웃 어 보이>였다. 앞으로도 꼭 찾아보아야 할 외국영화들은 아직도 줄줄이 사탕인 것 같다.
나는 평론가나 기자가 아니니, 내 영화적 취향에 대해 비웃지는 마시길. 흠흠.
그토록 외국산에 빠져 도락을 즐기는 와중에, 얼마 전 모 영화주간지에서 이십세기 폭스코리아의 이주성 대표 인터뷰 내용을 읽었다. ‘올 여름은 영화시장 판도 변화의 시금석. 이른 판단이긴 하지만 한국영화의 구조조정이 반드시 일어날 것. 메인 스트림의 많은 한국영화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제작자들이 경청해야할 부분’이라는.
이 말이 강렬한 톤으로 다가왔다. 괜한(?) 걱정도 들었다. 내 평소 성격의 특징인 ‘오버해서 반성하기와 원망하기’가 발동했다. 맞아. 한국영화 만드는 사람들,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거 아냐? 그렇다. 나의 오버는 계속된다. 누군가는 곧 촬영에 들어갈 영화의 총촬영횟수를 70회 이상으로 잡았단다. 즉 하루에 평균 1.5신 찍겠다는 거다. 참 팔자가 늘어졌다. 스필버그는 대작 를 40회에 끝냈다고 하는데…. 누군가는 돈 벌 확신은 없지만 그저 그 감독이 꽤 재능이 있는 것 같고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의미있다 싶어서, 스타도 없고, 대중적 컨셉도 없는 이야기를 어렵게 투자자를 설득해 제작에 착수했는데, 원래 계획이나 약속을 훌쩍 넘겨 제작비를 초과해서 울상이라고 한다. ‘영화의 완성일은 며느리도 몰라. CG맨이 결정하는 거야!’라는 괴이한 농담이 충무로에 오간다는 소리도 들린다.
어느새 4억∼5억원으로 영화 한편을 만들어내는 충무로식 경쟁력은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다. 요즘은 13억∼15억원짜리를 ‘저예산영화’라고 부른다. 스탭을 착취하는 사기꾼 제작자가 되지 않고서도 저예산영화를 만들 수 있는 근거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일사불란한 제작시스템과 노하우인 것이다. 우리 영화계는 요즘 너무 배부르다. 그렇다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스포츠 트레이너가 상시 대기중이거나, 수영장이 딸린 저택을 소유한 할리우드식 부자가 아닌, 그저 정신적으로 게으른 이상한 부자인 것이다.
넌 어떠냐고? 난 게으르진 않지만 좀 무식한 편이다. 흠흠. 지나친 헛소리라고? 왜 갑자기 입 부르튼 소리냐고? ‘구조조정’ 말이 나와서 좀 흥분한 것 같다.
80년대 초, 뒤늦게 <안개마을>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을 보면서 한국영화의 매력에 빠졌던 걸로 기억한다. 극장에서 본 이장호 감독의 재기작 <바람불어 좋은 날>이나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은 그야말로 내게 ‘새로운 발견’이었다.
최근 모 신문에 배창호 감독이 <꼬방동네 사람들>을 찍을 당시의 헐벗고 열악한 제작 환경을 회고한 글을 읽고 격세지감을 느꼈다. ‘돈’이 반드시 ‘좋은 영화’를 낳는 건 아니라는 당연한 생각도 다시 한번 들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그 영화들로 마음의 양식을 얻었고, ‘한국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꿈을 키웠으며, 이 별볼일 없는 능력으로, 지금 한국영화를 만들고 있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형형한 눈빛’이 매서운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존경과 긴장을 다시 한번 한국영화에서 만나고 싶다. 오★한국영화!



[충무로 다이어리] 공존
심재명 / 2002-09-24 /

올 한해에도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들의 생명은 죽지 않고 쭉 계속되고 있다. <패밀리>에 이어 <보스상륙작전> <가문의 영광>이 이어지고 있고, <2424>가 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경찰이 룸살롱을 개업했다’는 카피로 모 정당을 자극, 정치면에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던 <보스상륙작전>이 개봉주 흥행성적 1위를 기록하는가 하면, 조폭 가문이 명문대 졸업생인 엘리트 청년을 사위로 끌어들이고자 고군분투하는 코미디 <가문의 영광>이 금주 개봉예정 영화의 예매 성적 순위 1위를 달리고 있다.
여자가 조폭 우두머리가 되거나, 조폭이 절로 가거나, 조폭이 학교에 가거나, 조폭이 신분 상승을 하려 하거나 하는 등 조폭을 소재로 한 다양한 ‘변주’가 쉼없이 가열차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조폭과 비슷한 코드로 ‘검찰’이 등장, 수사를 위해 룸살롱을 직접 차린다거나, ‘검찰’이 이삿짐센터 직원으로 신문을 위장한다는 식으로 이 역시 ‘변주’되고 있다. 가히 조폭과 검찰이 한국 대중영화계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형상이다.
한국 영화계의 ‘암흑기’라고 이야기되는 70년대 유신정권하에 무수히 쏟아져 나왔던 이른바 ‘호스티스’물 영화의 양산이 상기되기도 한다. 정부로부터의 검열 압박과 관객으로부터의 무시로 힘들었던 그 시절과, 한국영화의 국제적 경쟁력이 제고되고 관객으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지금의 양상이 무척 다르기는 하지만.
고전적이고도 영원한 소재로 쓰이는 영화 속 ‘폭력’과 ‘섹스’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불멸의 코드이다. ‘조폭’은 그 두 가지를 가장 쉽게 영화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키워드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누구는 한국영화의 질 저하를 우려하거나, 한국영화의 다양화를 가로막는 원흉이니 비판을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이 그러하듯 우리 모두가 ‘불량식품’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처럼 ‘조폭’ 소재의 영화를 계속 찾아 그 맛을 보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이창동 감독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자신의 세 번째 작품으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제 영화 연기경력 두 번째인 문소리씨는 신인연기자상을 수상했다. <취화선>에 이은 낭보이니 참으로 놀랍고, 또 반갑다. 영화인으로서 바람은, 영화제 수상으로 <오아시스>의 관객동원에 굉장한 가속도가 붙었으면 하는 것이다.
영화제용 영화, 작가주의 혹은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제 수상작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례를 남겨, 한국영화 다양성의 근간을 이루는 데 보기좋게 큰몫 했으면 하는 것이다.
자국은 갱스터 소재의 액션영화나 코미디로 넘쳐나고, 이른바 시장에서 만들어지기 어려운 영화의 파이낸싱을 위해 예술영화 감독들이 난민처럼 해외를 전전하는 과거의 대만이나 홍콩영화계의 행보가 아닌, 철저한 오락영화와 <오아시스>류의 영화도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 세계에서 드문 ‘한국형 영화시장’의 모습을 이 마당에 꿈꿔본다.
이창동 감독님, 문소리씨, 꿈을 꿀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축하드립니다.씨네21



[충무로 다이어리] 영화인 엄마
심재명 / 2002-10-10 /

어제가 새로 제작한 영화의 개봉일이어서,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부산한’ 하루를 보냈고, 언제나처럼 있는 개봉 축하 모임에 갔다가 새벽 2시쯤에 귀가했다. 늦게 귀가할 때면, 하나뿐인 딸아이는 으레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게 마련이다.
비몽사몽 늦잠을 자고 있는 사이, 이미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신 엄마가 전화를 걸어 “오늘 누구 생일잔치 한다는데, 우리 애만 선물 준비 안 했더구나, 어쩐 일이냐”고 물으신다. 참, 그렇지. 오늘 같은 반 친구가 생일잔치 한다고 초대했었지. 뒤늦게 다른 아이 집에 전화를 걸어 우리 아이도 잔치가 열리는 음식점에 같이 데려가주길 부탁한다.
부랴부랴 집을 나와, 사무실에 들러 개봉일 흥행성적을 체크하고,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반응을 살펴보고, 직원들과 간단한 회의를 하고는 빠뜨린 선물을 급히 사서 잔치 장소인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한다. 얼마 전엔 아이의 졸업앨범 촬영날짜를 깜박 잊어, 친정 엄마의 걱정을 들어야 했다. 아이를 챙기고 패스트푸드점에서 나와 급히 사무실로 돌아오면, 이제 유치원생 엄마에서 영화인으로 돌아와 책상을 지킨다. 개봉 극장 앞 카페에서, 시네2000의 이춘연 대표는 제작사가 두개였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했다. 제작업무만 하는 영화사, 개봉업무만 하는 영화사. 그만큼 개봉 준비와 흥행 결과들이 괴로운 일이라며….
그렇다. 개봉 때가 되면, 스트레스 수치는 급격히 올라가고 불안, 초조, 긴장감이 몸과 마음을 죄어온다. 수십편을 제작한 제작자라도, 영화란 것은 매번 경우의 수가 다르기 때문에 매 영화 때마다 ‘예측불허’의 상황에 놓이게 마련이다. 그 일만 매달려도 능력이 모자라 미쳐버릴 판인데, 아이를 제대로 기르는 의무와 숙제가 또 한편에 있으니 이맘때쯤 되면 한쪽에선 엄마로서의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면서,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영화계를 둘러보면, 유독 결혼 안 한 노처녀들이 득시글댄다. 기혼자라 하더라도 늦도록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들이 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기혼자 중엔 영화일을 같이 하는 커플이 많다는 것도 특징 중 하나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밤 새워 남녀가 함께 부대끼며 고단한 일을 해대는 여성 영화인들을 편하게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인가. 나 역시, 언제나 일과 아이에 대한 양육을 둘 다 잘해보려고 발버둥친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영화일이 우선식으로 하루하루가 돌아간다. 이를테면, 일이 덜 바쁠 때 몰아서 책을 사준다거나, 놀아준다거나 하다가 영화일이 정신없이 돌아갈 땐, 며칠을 친정 엄마에게 맡겨두는 식이다.
얼마 전에 본 <로드 투 퍼디션>에서 유일하게 인상적이었던 대사 한마디, “자식은 평생 부모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는. 우리 아이가 봤다면, 거꾸로 “내 부모는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현재,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에서는 한국 영화계의 여성인력의 진출 현황 및 실태 조사를 위한 설문 작업을 진행 중이다. 결과는 연말쯤에 하는 여성영화인 축제행사 기간 중에 ‘포럼’ 형식으로 발표되고, 논의될 예정이다. 결혼 전과 후의 직업에 대한 전망이나 개인의 변화 등에 대해 알아보는 항목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결과가 나 역시 몹시 궁금하다. 영화일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영화일의 특수성 때문에 기혼여성, 특히 자녀를 둔 여성영화인의 이중의 힘듦은 더하다고, 지금 나는 도대체 지극히 사적인 넋두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일하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 사회가 같이 고민해야 한다는 식의 문제제기를 하는 것인가. 결국 얼빠진 글이 되고 말았다. 원고 마감시간을 한참이나 넘기고 앉아서 말이다. 두루 죄송하다.씨네21



[충무로 다이어리] 영화제작,며느리도 모르게
심재명 / 2002-10-23 / 218

97년의 일이다. 추석 시즌에 개봉한 우리 회사의 <접속>이 이른바 말하는 ‘흥행 대박’을 터뜨리며 룰루랄라 순항 중일 때, 뒤통수가 어지러운 사고가 터졌다. 모 주간지에서 <접속>이 일본영화 모리타 요시미쓰 감독의 <하루>를 표절했다는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모 평론가가 글을 실었는데, <하루>와 <접속>의 소재 등을 들어 표절 혐의를 비교적 강하게 피력했던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 문화의 가열찬 활성화가 안 돼 있던 시기여서 그 파장이 마른 들판에 불 번지듯 퍼져나가진 않았으나, 제작사는 2년 동안 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시나리오 작업 기간의 고통과 고생이 떠올리며 ‘과격하게’ 흥분했다.
우리 회사도 시나리오 작업 마무리 중에, <하루>라는 영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모 영화 월간지에 실린 일본영화 신작 소식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고 일본에 있는 지인과 연락이 되어 비디오테이프도 구해볼 수 있었다. 당시엔, 희희낙락하며 ‘참 신인 감독이 모리타 요시미쓰 같은 거장 감독과 비슷한 발상을 했다니’ 하며 감독을 치켜세우는 농담을 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흥분한 제작사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법적 대응을 불사하겠다며, <하루>의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해 기자들에게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 사건은 법정으로까진 가지 않았고, 쌍방간의 사과 및 수용으로 끝을 맺었다.
요즘, ‘빙의’란 소재로 만들어진 일본영화 <비밀>과 한국영화 <중독>간의 묘한 감정적 난기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 각종 매체에서 소재를 근거로 두 영화가 비교되고 화제로 삼기도 했다. 곧 개봉할 <중독>의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엔 두 영화와, 특히 ‘빙의’란 소재로 설전을 벌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객관적인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밀>이 시기적절하고 재빠르게 <중독> 개봉에 앞서 개봉을 주도, ‘이슈 메이킹’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민함이 서로간의 영화흥행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더 두고볼 일이다. 그러나, 후발 개봉영화의 당사자들은 속이 탈 노릇일 것임이 분명하다. 얼마 전엔, 보다 일주일 먼저 미국영화이자 야구 소재를 다룬 <루키>가 개봉되기도 했다. 우연히 극장에서 본 <루키>의 예고편 자막을 보니 원래의 개봉 일정보다 훨씬 뒤로 돼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보다 선개봉한다는 전략을 세웠을 거라는 ‘추측’을 해보았다.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두편 모두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피아니스트>가, 재미있게도 같은 제목으로 일주일 간격으로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소재가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동시에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땐 경험도 짧고, 인품도 모자라 ‘과격’하게 흥분했었던 나로서는, <접속>이 요즘 만들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지금 같은 시절이라면, 누군가 잽싸게 <하루>를 <접속>보다 먼저 개봉하는 기지를 발휘할지도 모르는 일. 인간적 ‘상도의’보다는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로 움직이는 요즘 영화계의 변화를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는 중이다.
<씨네21>에도 매번 ‘한국영화 제작진행표’가 게재되고 있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선, 몇년 전의 홍콩처럼 쉬쉬해가며, 며느리도 몰래 영화를 찍어서 깜짝 놀래키듯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점점 생각과 행동이 굼뜬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도래하는 것 같아, 적잖이 초조해진다.



[충무로 다이어리] 네 진심을 보여줘
심재명 / 2002-11-06 /

지난해 극장에서 딸아이와 함께 본 <몬스터 주식회사>를 비디오로 빌려 다시 보았다.
극장에서 볼 땐, 한글 자막 처리된 프린트여서 옆에 앉은 젊은 청춘 관객의 눈총을 받으며 빠르게 지나가는 자막 읽어주랴, 영화를 보면서 웃으랴, 소리 지르랴 정신 없었다. 무릎에 앉혀놓은 딸아이는 어떤 장면에선 몸을 부들부들 떨며 놀라기도 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보기도 했다. 그러나 다 보고 나와서는 6살 꼬마여서인지 총체적인 관람평을 한다거나 하는 수준까진 보여주지 못하고, 외눈박이 괴물 마이키가 너무 시끄러워 얄미웠다는 허튼(?) 소감을 피력하는 정도였다.
아이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우리말 더빙판을 빌려 보았는데 영 제 맛이 나지 않았다. 수다쟁이 빌리 크리스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더욱 그랬다. 내가 <몬스터 주식회사>를 비디오로 다시 빌려본 이유는, 아이와 다시 한번 즐거워 보자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설리의 ‘그 푸른 털’의 부드럽고 미세한 움직임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인상적인 몇 장면이 기억 속에 있지만, 모든 장면을 컷 단위로 외우고 있진 못할 터. 거실에 널브러져 함께 보던 딸아이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다음에 무서운 장면이 나온다고 소리를 지른다. 슬렁슬렁 보다가, ‘엉’ 하며 자세히 보니 마이키의 손이 어딘가에 잔인하게 끼이는 컷이었다. 내 머릿 속엔 전혀 입력되어 있지 않았던 거였다. 아이와 나는 이 영화에 대해 그토록 다르게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참에 서로 의견을 꿰맞추다 보니 내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장면이나 내러티브와 다른 측면에서 아이는 자기 느낌을 갖고 있었다. 하여튼 영화의 매력은 그런 것 같다. 복잡하게 각을 세운 다면체와 같은 것이어서, 그 누구도 사실은 100% 같은 ‘느낌’으로 어떤 영화를 보게 되는 건 아니라고.
주제에 대해서 아주 극과 극의 결론을 유추해낼 수도 있고, 감독의 의도를 전혀 다르게 읽어낼 수도 있고, 형식적으로 가장 빼어난 장면도 다 다를 수 있으며 마침내, 마음속 기억의 저장고에는 어떤 이에겐 세모꼴로 또 어떤 이에겐 동그라미 모양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요즘엔 리뷰든 비평이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네티즌들의 관람평이든 모두 그게 그거다, 라는 생각이다. 평론가들이 매기는 별점도 뻔하고, 논쟁의 장은 어디
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영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리는 관객의 의견도 대부분 좋아요, 싫어요 식으로 단순하다. 색다른 시선, 튀는 관점, 깊이있는 시각을 발견해서 너와 나의 영화 경험이 폭넓어지는 기쁨을 누리는 즐거움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요즘의 영화들은 그렇게 기자들과 평론가와 관객이 허공에 불어올리는 비누방울처럼 톡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진다, 라는 생각이다. 마음속의 세모꼴과 네모꼴은 서로 꺼내보지 않고 맞춰보지 않고 그저 쟁여둘 뿐인 것 같다.



[충무로 다이어리] 제작자 똥은 개도 안 먹는다
심재명 / 2002-11-21 /

나는 가벼운 변비 환자였다. 그래서 아침마다 화장실로 직행해 큰 일을 보는, 같은 방을 쓰는 남자가 내심 부러웠다. 변비가 여러 가지로 안 좋다하여, 특단의 조치를 취해 모 식품을 복용한 이후로 증세가 급격히 호전되었다. 요즘은 아침마다 변기 위에 걸터앉는 기회가 생겼지만, 그때마다 내 머리를 스치는 경구 같은 문장 하나, “제작자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황기성 사장님이었나, 몇년 전 내게 그런 얘기를 해주셨다. 골치 썩고, 가슴앓이하고, 신경쓸 일 많은 사람 중 으뜸인 제작자의 똥은 그래서 개도 안 먹을 거라고.
20여년 전, 자주 가는 극장에서 ‘황기성사단’이란 제작사 크레딧을 보곤 가슴이 후끈 달아오른 적이 있었다. 뭐가 흥하고, 별이 빛나고, 그래서 번영하자는 뜻의 구태의연한 영화사 이름들이 난무하던 시절,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거기에 ‘사단’이란 집단적 의미를 덧붙여 만든 영화사 제목이 무척이나 모던하고 멋들어져 보였다. 그 크레딧을 달고 나온 영화들은 볼 만했고, 어떤 영화들은 빼어났다. 막연히, ‘황기성사단’ 혹은 ‘황기성 사장님’은 일정 부분 나의 역할 모델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10여년이 흘러 나 역시 제작자가 되고 나서 우연찮게 황기성사단을 자주 들락거렸다. 고민거리가 있거나, 그래서 현답을 필요로 할 때만 주로 찾아갔던 것 같다. 올해는 특히나 골치 썩은 일, 가슴에 멍든 일이 많았다. 여러 가지 사건사고가 많았는데 최근 며칠 동안엔, 모 배우와의 소송제기건으로 <공동경비구역 JSA>를 제작했을 때만큼이나 ‘명필름’이란 이름이 신문 지상에 많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문화 또는 대중문화의 총아격인(정말 그럴까)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다보니 그만큼 비즈니스의 내용은 만만치 않다. 책임질 일, 해결해야 할 일, 계산할 일, 머리 쓸 일에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소명의식까지 당최 산처럼 높다 하겠다. 나쁜 쪽으로 머리 쓸 일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예상치 못한 사건사고에 머리통을 맞는 일이 허다하니 이젠 기운이 빠지고, 상처가 깊어지는 게 장난이 아니다.
그러면서, 충무로 다이어리에 이 얘기, 저 얘기 찾아 써내려가는 것이 능력 모자란 나에겐 고통을 배가시켰다. 처음 ‘충무로 다이어리’ 꼭지를 마련하면서 정중하게 원고청탁을 했던 <씨네21>과 나와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빚을 받아내려는 자와 갚아야 하는 자의 관계처럼 되어버렸다. 원인 제공은 물론 나다. 한번의 원고 펑크와, 수시로 마감시간을 어기게 되면서 원고를 받아내야 하는 담당기자에게 매번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했다. 어쨌든, 비록 격주지만 무얼 써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턱없는 생각의 사치라고 여겨질 만큼 여러 가지로 고달픈 요즈음, 이쯤에서 그간의 졸필 행진을 마칠까 한다, 라고 써서 <씨네21>에 보냈다가, 부산에 가 있는 편집장님으로부터 12월까지는 써야 한다고, 무슨 소리냐고 한 소리들었다. 하, 원고 기고도 내 마음대로 끝을 못 내는 신세이다.
“제작자 똥은 개도 안 먹는다”라는 말을 거듭 실감하고 있는 중이지만, 당분간은 그 똥이 약으로 쓰일 날이 있을 거라는 모진 꿈을 가지고, 살아가려 한다. 일단은 충무로 다이어리도….  



[충무로 다이어리] 살아온 한해
심재명 / 2002-12-10 / 158

1월 11일 <친구> 부산경제 파급효과 178억원
영화 <친구>가 2001년 한해 동안 부산에서 만들어낸 경제적 파급효과는 178억원에 달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2월 6일 [영화제] 2월6∼17일 베를린국제영화제(독일 베를린)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제5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소재로 한 한•일합작영화 가 2월6일 개막하는 제5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3월 5일 <엽기적인 그녀> 홍콩서 2주 연속 1위
<엽기적인 그녀>가 홍콩에서 날아다니고 있다. <俄的野蠻女友>(나의 야만스런 여자친구)라는 제목으로 지난 2월21일 개봉해 유력한 할리우드 경쟁작들을 제치고 2주째 1위를 차지한 것.

4월 23일 서울영상위원회 출범기념식 열려
서울영상위원회는 영화촬영을 위한 효율적 지원시스템 구축으로 합리적인 영화 제작환경을 조성하고 지역영상위원회간 네트워크를 공고히 해 해외영화 촬영을 유치하는 등 향후 로케이션 데이터베이스 제공, 촬영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황기성 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서울영상위의 출범을 통해 영상문화 발전의 큰 걸음을 디뎠다”고 말했다.

5월 31일 시네마서비스, 플래너스와 공식 합병
시네마서비스가 5월31일로 폐업신고를 하고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와 공식 합병했다. 시네마서비스의 한 관계자는 “제작, 투자, 배급하는 모든 영화들에 대해서 ‘시네마서비스’라는 이름을 계속 쓴다”고 말했다.

7월 12일 <몽정기> 감독 교체
사춘기의 성적 몽상을 다룬 10대 코미디 <몽정기>의 감독이 교체됐다. 새로 메가폰을 잡은 사람은 부천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지낸 <자카르타>의 정초신 감독. 영화아카데미 출신 최화진 감독의 데뷔작으로 지난 5월19일 크랭크인해 촬영을 진행하던 <몽정기>는 작품의 방향을 두고 생긴 이견을 좁히지 못해 감독을 교체하게 됐다.

8월 15일 <쓰리> 홍콩 개봉 첫주, 흥행 2위
타이, 한국, 홍콩 등 아시아 3국 합작영화인 <쓰리>가 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선전하고 있다. 타이 박스오피스에서 역대 흥행성적 3위를 기록한 여세를 몰아 8월15일 개봉한 홍콩에서도 개봉 첫주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한 것.

9월 24일 <죽어도 좋아> 제한상영가 심사에 반발 영등위원 총 5명 사퇴
지난 월28일 영등위원 3명이 사퇴한 데 이어 두명의 영등위원이 추가로 사퇴하였다. 한국독립영화협의회에서는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영등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문화예술인 200여명의 성명서를 발표하며, 영등위에 회의록 공개를 요구하였다.

10월 19일‘18세 관람가’영화, 감소세 뚜렷
영상물등급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2000년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은 영화는 전체 421편 가운데 46.7%에 해당하는 197편이었던 데 비해 2001년에는 36.5%(143편), 2002년 9월까지는 23.9%(70편)로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는 영화 비율이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2000년 20.1%(85편)에 그쳤던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 영화는 2001년 34.5%(135편), 2002년 9월까지 34.5%(101편)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1월 4일 <가문의 영광>, 리메이크 판권 수출
<가문의 영광>의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는 이탈리아의 밀라노 필름마켓에서 미국의 영화제작사 워너브러더스와 <가문의 영광> 리메이크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

지나온 한해에 영화계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사화’된 것 중심으로 뽑아보았다. 지금쯤, 누군가는 기쁨의 샴페인을 터뜨릴 준비를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만 짐을 쌀 궁리를 할 것이며, 또 누구는 더욱 가열차게 내년을 기약하며 주먹을 불끈 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일들이 있었던 ‘에너제틱’한 한국 영화계, 당신은 지금 어디쯤인가. 이제 남은 한달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다가올 한해를 제대로 맞아볼 양으로, 나는 대형 서류 정리함을 큰맘먹고 샀다.




[충무로 다이어리] 배우 안성기
심재명 / 2003-01-07 /

이현승 감독의 데뷔작 <그대안의 블루>를 촬영할 때였다. 나는 ‘프로듀서’의 자격으로 그 작품에 참여했는데, 말이 그렇지 감독과 시나리오만으로 강수연, 안성기라는 당대의 톱스타가 캐스팅되고 제작사가 나선 케이스여서, 별반 영향력이나 기여도 없이 무늬만 프로듀서인 초보 시절이었다. 거기에다 현재 영화세상의 대표인 안동규씨가 이현승 감독과 먼저 결합하여 진행되었던 영화여서, 다시 말하면 나는 무임승차한 프로듀서였던 셈이다.
어쨌든, 신발 밑창이 닳을 만큼 촬영현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강수연씨가 식장에서 뛰쳐나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고속도로에서 지나가는 차를 잡으려고 애쓰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옆에 서서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그날따라 웬일인지 강수연씨의 웨딩드레스 안에 받쳐입는 페티코트를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한껏 부풀려진 페티코트를 안고 서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안성기씨가 ‘내려놓지 힘들게 왜 들고 있냐’고 예의 그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나는 평소 흠모하던 선생님 앞에서 뭔가 부끄러운 일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창피했다. 살가운 말 한마디가 고맙기도 했지만 제작과정에서, 또 제작현장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 헤매던 초보의 헤맴을 들킨 것 같아 오버하며 부끄러웠던 것이다.
안성기씨와는 그런 고맙고 겸언쩍은 기억이 몇 개 더 있다. 직접 통화를 못하고 집에 놓여 있는 자동응답기에 시간과 장소를 알려놓았는데 어김없이 부탁한 시사회에 정확히 시간을 맞춰 찾아온다든지, 캐스팅 제안을 했는데 출연하기 어렵겠다는 의사를 직접 만나서 전한다든지… 등등등. 배우 안성기에 대한 감동과 칭찬의 글들은 차고 넘쳐서 구구절절 얘기해봤자 새로울 것이 없겠다 싶지만서도.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지 않을 만큼의 정중함, 좌중을 편안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유머, 거의 ‘신의 경지’라고 여겨질 만큼 놀라운 시간 약속, 나설 때 나설 줄 아는 대외활동이나 사회적 목소리, 그가 갖는 인간적 풍모는 요즘의 막 가는 세태와는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인격이 훌륭한 배우가, 배우로서도 훌륭하다는 등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일급호텔 객실을 작살내는 행패를 부렸던, 파파라치를 보기좋게 때려눕혔던, 인터뷰를 청했던 여기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던, 그래서 가십난에 심심찮게 이름을 올린 바 있는 세계적 배우들의 면면은 그리 고상한 인격체로 여겨지진 않는다.
그러나 개판인 사생활과는 무관하게 스크린 안에선 놀라운 연기를 펼쳐보여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중요한 건 삶에 대해, 영화에 대해, 연기에 대해, 치열하게 맞장을 뜨느냐에 있다. 적어도 배우 안성기는 맞장뜨는 과격함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것 같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최근 안성기씨가 주연한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 관한 리뷰나 비평들을 찾아보니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럭저럭이거나, 별반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배우 안성기의 연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띄었다. 그 대목 때문에 극장에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근래에 그가 출연한 영화에서 안성기라는 배우의 매력이 돋보였던 작품으로는 개인적으로 <무사>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였는데, 다시 한번 새로운 영화에서 인격 아닌 ‘연기’로 진하게 감동받기를 고대한다.씨네21 382호



[동아일보] "한국영화, 철저한 비용관리로 경쟁력 키워야"
심재명 / 2003-01-02 /

2002년 한국 영화계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 넘치는 한 해를 보냈다.
투자자본의 활발한 유입으로 무려 90편이 넘는 한국영화가 제작되었고, 자국영화의 시장점유율도 2001년과 대동소이한 46%를 기록해 여전히 한국영화의 상대적 강세를 유지했다.
‘취화선’과 ‘오아시스’는 칸과 베니스에서 각각 주요 상을 거머쥐었고, 뛰어난 상업적 경쟁을 과시한 ‘엽기적인 그녀’ ‘달마야 놀자’ ‘가문의 영광’ 등은 영화산업의 본토 할리우드에 만만치 않은 가격으로 리메이크 판권을 판매함으로써 한국 장르영화의 경쟁력을 제고시켰다.
또한 쉬지않고 이어지는 멀티플렉스 건설붐이 폭발적으로 스크린수의 증가를 불러와, 스크린수 1000개 시대를 열었다. 여기에 힘입어, 잠재관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억명의 관객을 돌파한 한 해로 기록되었다는 잠정적 보도도 있었다. 한국영화 산업화의 위상은 이렇듯 가파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가시적 성과 이면에, 2002년은 많은 숙제를 한국 영화인들에게 남겨준 해이기도 했다. 순 제작비와 마케팅비의 급상승으로, 제작편수는 늘었으나 평균 수익률은 오히려 하락했다. 투자 대비 수익률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비롯한 대작영화의 흥행참패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나, 현업에 종사하는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비용상승률에 비해 수익률이 못 따라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철저한 비용관리와 상업적 경쟁력을 지켜낼 수 있는, 보다 창의적이고 합리적인 제작시스템의 창출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새해엔 영화진흥위원회 주도로 예술영화전용관을 지정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될 계획이라고 한다. 이는 상업영화의 틈바구니 속에 비명횡사하고 마는 소위 예술영화들의 숨통을 어느 정도 터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6월부터 영화계의 오랜 숙원 사업이던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이 시험운영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하니, 한국 영화산업의 과학화, 투명화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래본다. 2003년은 특히 투자, 배급사 간의 판도변화에 많은 지각변동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 어쨌든 보다 진일보한 시장구조가 이루어지는 쪽으로 기대를 걸어본다.
2002년의 사회, 경제, 정치의 변화를 매스미디어는 세대교체, 중심세대의 이동 등이란 말로 진단하기도 했다. 섣부르게도 세대혁명이란 과감한 단어를 내놓기도 했다.
언제나 유연하고, 진보적이며, 열려있는, 그럼으로써 빠르게 변화하는 분야가 한국영화계라고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새해 새아침, 이 시대적 변화 속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있는, 한국영화계의 긍정적 성장에 순기능하는 한 영화인으로 생존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



[사람이 사람에게]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
이 은 / 2003-01-10 /

“하고 싶은 것 하고 사니까 행복하니?”
영화<와이키키브라더스>에서 구청 공무원 수철이 고교동창인 밴드마스터 성우에게 묻는다.
성우는 아무대답도 하지 못한다.
밴드마스터 성우처럼 지난 십 수 년을 늘 영화 만들기로 살아온 내게도 어린시절 친구들이 묻곤 한다. “너하고 싶은 것 하고사니 좋겠다.” 고 사실 필자는 영화감독 또는 영화제작자가 되는 것이 어린시절의 꿈은 아니었다. 그저 대학입학을 앞두고 치른 학력고사 성적이 웬만한 대학에 진학할만한 점수가 못되어서 실기점수에 승부를 걸 요량으로 선택한 것이 연극영화과였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연극이나 영화를 학문으로 전공한다는 것은 평범한 가정에선 왠지 금기시되던 행위인지라 필자는 누이와 몰래 상의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뒤늦게야 부모님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필자가 대학생활을 시작하던 80년대 초의 대학은 소위 민주화의 봄이 광주에서의 학살과 신군부의 억압으로 대학교정에 사복경찰을 포함한 기관원들이 상주하며 수시로 감행되는 학내시위와 진압이 반복되는 을씨년스런 나날이었다.
젊은 감수성에 이상주의자이기도 했던 필자는 잡혀가는 선배들의 뒷모습에 가슴아파하며 어려운 가정형편을 이유로 군에 자원입대하였다. 필자가 군에서3년을 보내는 사이 현실을 직시한 동아리 친구들은 어느새 선배로서 시위에 앞장서는 위치가 되어 감옥에 수감되고 혹은 노동운동이야말로 참된 민주화운동의 올바른 방법론이라고 믿으며 공장에 취직하곤 했다.
80년대 중반, 군에서 제대하며 필자 역시 역사와 시대 앞에 부끄러운 생각에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자 노동현장에 합류하여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면서 우리사회가 처한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깊이 고민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필자의 자질을 스스로 평가컨대 평생을 노동운동을 과제로 하는 생산직노동자로 살아가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하여 대학에 복학하였다.
이때부터 필자는 스스로 영화노동자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 했다.
방법적으로는 “임권택 감독이 그러했듯이 영화 현장에서 한30여년 열심히 한 우물을 판다면 언젠가 나의 목소리로 세상에 얘기 할 수 있을 거야!” 하는 마음이었다.

영화활동의 시작과 ‘장산곶매’
복학하고 실습작품으로 만든 첫 영화는 <공장의불빛>이었다. 송기원 선생의 단편소설<부르는소리>를 각색한 이 단편영화는 성실하게 자신의 공장을 운영해온 중소기업사장이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는 노동자들과 갈등하는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
첫 영화<공장의불빛>은 <인재를위하여><그날이오면>등의 당시 다른 시의성 있는 단편영화들과 함께 대학가에서 상영되어지고 이러한 공동상영을 계기로 단편영화를 만든 장윤현, 장동홍 등의 연출자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약속하게 되었다.
그 첫 약속의 결과는 <오!꿈의나라>였다. 이 영화를 소극장에서 일반에 공개하기로 하면서 모임의 이름을 ‘장산곶매’로 정하게 되었다.
모임의 구성원들이 하나같이 다루고 싶던 소재는 ‘광주’와‘노동운동’이었다.<오!꿈의나라>상영을 물리적으로 저지하려는 당시 정부의 상영방해는 오히려 자연발생적 모임인‘장산곶매’구성원들로 하여금 더욱 똘똘 뭉쳐서 다음 작업까지 할 수 있는 동인이 되었으며 <오!꿈의나라>를 통하여 영화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한 우리는 보다 철저한 시나리오작업과 농성중인 노동자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하여 훗날 독립영화 최고의 수작이 된 <파업전야>를 제작하였다. 완성도뿐 아니라 당시 공안당국의 상영저지를 관객과 함께 극복한 상영방식으로도 화제를 낳았던 <파업전야>는 만들고 싶은 창작자의 의지와 그것을 수용하는 대중과의 이해가 정확히 일치한 짜릿하고도 값진 경험이었다.
<파업전야>의 대중적 반향이후 ‘장산곶매’에서는 전교조 선생님들과 교육현장의 얘기를 담은 영화<닫힌교문을열며>를 역시 제작 상영하였다.
그 외에도 ‘장산곶매’구성원들이 만들고 싶어서 준비했던 영화들로는 대규모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소재로 한<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장기수 선생들의 통일의지를 담은<완전한만남> 농촌문제를 다룰<아버지의 땅>등이 준비 되었었으나 제작여건 또는 역량의 부족 그리고 구소련의 붕괴로 시작된 탈냉전, 이에 따른 이념적 단체 활동들의 구심력상실 등으로 미완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처럼 필자의 사회적 영화 활동은 자연발생적으로 그러나 운명적으로 ‘장산곶매’에서 시작되었으며 ‘당대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당대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장산곶매’의 정신은 이후 필자의 영화 활동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영화사 명필름과 영화<공동경비구역JSA>
이념의 데모대가 사라지고 광장의 문화가 온라인문화로 대체되는 그 익명성에 낯설어하며 필자는 상업영화에 투신(?)하여 명필름을 만들고 영화<접속>,<조용한가족>등의 흥행성공으로 일약 상업영화 제작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화적 가치 이전에 흥행성공을 최고의 미덕이자 가치로 여기는 영화시장에서의 성공과 더불어 찾아온 것이 IMF였다.
필자의 경제적 성공과 IMF라고 하는 낯선 손님의 방문은 마침 상업영화에 매진하던 필자로 하여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세상과 영화를 성찰 하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마음에서 검토한 소설, 괴물IMF가 지나가면 21세기, 우리의 현실은? 장밋빛 21세기가 아니라 여전히 남과 북이 바보처럼 원하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현실...“그래, 소설<광장>에서 이명준이 죽었듯이 소설의 이수혁이 죽는다.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더 죽여야 하는지 이수혁의 죽음을 통하여 작지만 힘 있게 문제제기하자 21세기를 맞는 당대인들에게.”
영화<공동경비구역JSA>는 상업영화제작자인 필자가 많은 것을 잃더라도 작은 것을 얻고자 조심스레 용기를 내어서 제작에 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남북관계가 남북정상의 만남을 포함하여 급속도로 화해무드로 전개되면서 애초의 문제제기 그 이상의 현실과의 시너지효과를 낳게 된 경우다.  결국 영화<공동경비구역JSA>를 통하여 기대이상의 성공을 얻은 필자는 마침 분단의 선배국가 독일 베를린 영화제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다음 만들고 싶은 영화로 님웨일즈의 ‘아리랑’을 읽었으며 책을 덮으며 결심했다. “그래, 다음엔 <아리랑>이다.”
서울에 돌아와 연출자로서 정지영감독과 작가로서 김석만선생, 최정미씨 그리고 자문역으로 한홍구박사와 한 팀을 이루어 자료세미나, 중국현지취재 등을 마치고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남한에서 폄훼하고 북에서 왜곡시킨 일제 식민지시대 사회주의 사상가로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초처럼 사라져 갔으나 미국기자 님웨일즈에 의한 기록으로 한 시절 남한 지식인사이에 풍미하던 김산의 일대기.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필자와 제작진은 <아리랑>을 통하여 잃어버린 혹은 망각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동시대인들에게 겸손하게 펼쳐 보이고 싶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
누군가 필자에게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고 사니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필자는 할말이 없다.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가 무언지 알 수 있다면 물론 행복할 것이다.
자본가와 싸우는 노동자의 삶을 일관되게 그려나가는 영국의 거장 켄 로치, 혁명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신뢰. 한번 현실에 들이 된 카메라를 언제나 유지하며 살아가는 다큐멘터리작가 김동원감독, 이런 분들의 작업을 보노라면 <파업전야><접속><공동경비구역JSA><와이키키브라더스>등 필자가 살다보니 만들게 되었거나 그 과정에 함께하게 된 영화들은 아직 미완이며 부족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노근리다리>처럼 미국이 우리에게 준 고통을 우리스스로 외면하며 살아온 진실에 대한 들춰냄과 한편 베트남파병을 통하여 우리가 베트남인들에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안겨준 수많은 고통에 대해 사과해야할 일들, 그 밖에도 역사적 상황이 개인의 삶에 강제하는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기위하여 아직 영화를 통하여 숙제처럼 하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들이 산재해 있다. 결국 20세기가 준 부채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게는 아직 너무 많은 것 같다. 바램 같아선 한 2년 김산의 삶에 푹 빠져서 영화<아리랑>의 제작자로서 매진하는 간절한 시간을 통하여 결과적으로 나의 이 부채 의식이 마감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 성찰할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시간을 기대해 본다. 그것이 현재로선 내게 희망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2002년 송년호(통권18호)



[충무로 다이어리] 여성 영화인 모임
심재명 / 2003-01-20 /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영화계의 여러 단체 중 ‘사단법인 여성 영화인 모임’이라는 것이 있다. ‘영화인회의’처럼 회원 수가 많지도 않고, 대외적인 목소리를 크게 내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 2000년 봄에 창립대회를 가진 이후, 다소 얌전하게, 그러나 성실하게 그 활동이 이루어져왔다.
창립 이후 3년 동안 꾸준히 진행한 사업 중 하나는, 영화계에 취업하고자 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이다. 그 내용은 홍보•프로듀서 과정, 프로덕션디자인 부문, 편집부문 등 영화제작 전반에 걸쳐 주요 영역을 다루면서 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성 영화인들이 강단에 서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 워크숍의 수강을 통해 현업에 진출한 여성들도 더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외에도 매해 연말엔 ‘여성 영화인 축제’를 연다. 그해에 여성 영화인들이 제작, 연출, 참여한 작품 중 주요한 영화를 상영하고, 회원들이 직접 투표에 나서 그해의 주목할 만한 여성 영화인들을 선정, 시상하는 행사 및 한해 영화계의 사건 및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1년치 <한국영화백서>를 펴내 발표하는 것이 주요 행사내용이다.
올해는 특히 여성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한 간담회와 설문조사를 통해 여성 영화인의 복지실태와 의식조사 및 현황분석을 마쳐 이번 ‘여성 영화인 축제’ 기간 중에 ‘포럼’ 형식으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다. 또한 하루씩 나누어 변영주 감독의 <밀애>와 국내 미개봉작인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의 상영 및 Q&A 시간도 마련되었다. 사전에, 사무국에선 연출•제작진의 인터뷰 등을 담은 두 영화의 워크북도 펴낸 바 있다.
위의 사실들을 재미없지만 바쁘게 나열한 것은, 여성 영화인 모임의 대외 홍보가 다소 미약하고 이번 행사를 치르면서도 느낀 바, 실제 회원들의 참여도가 기대보다 낮았다는 데서 다시 한번 ‘여성 영화인 모임’이란 단체를 알리고자 함이다.
2002년 한해 동안 장편영화를 연출한 여성 감독만 해도 5명에 이른다. 이는 한해에 나올 수 있는 숫자만으로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이다. 매 작품에 참여하는 여성 스탭의 경우도 30%에 육박하는 양적 성장을 보였다. 반가운 일이다. 한국 영화산업의 빠른 변화와 성장 속에 아직은, 상대적 소수인 여성들이 ‘각자 알아서 열심히’ 분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네트워킹’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제대로 된 주목과 평가, 그리고 그들간의 적극적인 유대관계가 무엇보다 유의미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 영화인들의 질적 성장과 한국영화의 성장에 상당 부분 기여한다고 생각된다.

‘포럼’을 통해 회원들이 여성 영화인 모임에 가장 크게 바라는 것에는 여성 영화인들의 복지 증진과 재교육 부문이 있었다. 2003년 사업목표와 계획을 세우는 데 중요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사항들이다. 마지막으로, 회원들의 좀더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린다. 부족한 면들은 2003년에 적극 보완, 일신할 것이다. 회비도 열심히 내주시고, 질책과 바람의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내주시길 바란다. 여성 영화인 모임의 인터넷 주소는 www.wiflim.com이다. 전화번호는 02-922-1087. 회원 가입은 언제나 열려 있다.
여성 영화인 여러분 지난해에도 수고하셨습니다. 새해엔 더욱 건승하시길. 모두 해피뉴이어!
씨네21 385호



[동아일보/3040 일과 꿈] J! 비디오 말고 극장엘 가봐
심재명 / 2003-01-30 /

J! 옛날 옛적, 그러니까 광장엔 최루가스가 가득하고, 돌멩이가 휙휙 날아다니던 그 시절, 청량리 모모 제과점에서 곰보빵 앞에 놓고 세상 모른 채 미팅하던 그 시절, 네가 내게 보낸 편지들 끝엔 항상 ‘J가’라고 써 있었지. 기억나니? 버젓한 이름 놔두고, 영문 이니셜 써가며 소녀 취향의 감상을 편지지 위에 왜 그토록 흩뿌렸는지, 참. 왜 갑자기 J타령이냐고? 오늘 시내 모 극장에서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영화 한 편을 봤거든. 김승진의 ‘스잔’과 박혜성의 경아 어쩌고 하면서 교복자율화 시대의 고교생들 얘기를 하는 청춘영화였어.

▼우스꽝스럽게 포장된 우리시대▼
난 8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40대라 당근, 그 영화를 즐겼지. 추억의 책가방을 열어본 기분으로 키득거리며. 요즘 청춘들은 ‘바람돌이’, ‘롤라장’, ‘나이스’ 뭐 이런 만화, 공간, 운동화 상표를 몰라서 어떨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감독은 그 시대 재현에 무척이나 열심이더군.
어떤 이들은 요즘 80년대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들이 붐을 이루는 것에 대해 문화적 퇴행이라고 걱정하고 있지. 나 역시 어설픈 역사적 향수는 불필요한 감상주의를 유발시키며, 이런 일련의 문화행위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중요한 건, 만든 이들이 ‘그 시대적 배경을 통해 뭘 얘기하려고 하는가’겠지.
어쨌든, 오늘 본 영화는 싸구려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적당히 쿨하고, 적당히 쾌활하게 80년대의 청춘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지. 마지막엔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무얼 하고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그들이 소위 386세대라는 쪽으로 생각이 미치더군. 그러고 보니 386세대가 인구에 유독 많이 회자되던 때에 그 세대로 불렸던 이들 중엔 이미 40대가 된 이들도 꽤 있네. 나 역시, 너 역시.
386세대는, 광주민주화운동, 군부독재, 6•10민주항쟁, 사회주의 붕괴 등의 역사적 궤적을 겪은 이들로, 정보화의 바람 속에 개인주의로 흐르는 20대보다 훨씬 적극적인 사회적 관심으로 무장하고, 이전 세대의 보수주의와 구별되는 사회비판의식을 가진 세대라고들 하지.
한국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도 그랬겠지만, 난 386세대가 한국 영화계에 미친 영향력이 크다고 봐. 이른바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386세대는 한국 영화계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보거든. 소위 그들이 만든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 <친구> <소름> 등은, 예술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함께 거머쥐며 영화관객들에게 자국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었지. 구멍가게같이 영세하던 한국영화계를 소위 산업화의 궤도에 올려놓았다고도 생각해.
너무 자화자찬이라고? 그래도 할 수 없어. 사실인 걸 뭐. 그런데 말이야,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영화들 속에서 그 시절이 지금의 10, 20대들에겐 유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해. 복고로 통칭되는 촌스러움과 순수의 코드가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 일종의 패션으로 전환되어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 나는 오늘 그 영화를 보면서, 어느 정도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했어. 386세대는 아직 이렇게 가열차게 살아가고 있는데, 벌써 우리의 지나간 청춘이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낯선 신세계로 포장되어 요즘 젊은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다는 데서 오는 일종의 서글픔, 혹은 세대간의 간극을 느꼈다고나 할까?
너무 오버라고?

▼더 가열찬 작품 만들고 싶은데▼
386세대의 영화 만들기가, 더 가열찼으면 해. 그들만의 목소리가 제대로 담겨 있는. 그리고 그들의 영화가 한국 영화관객들로부터 더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면 해. 웬 조바심이냐고? 벌써 한국영화가 너무 가벼워지고 너무 어려지고 있는 느낌 안 드니? J! 아니 진순아. 그러니까 너희 세대도 극장 와서 영화 좀 많이 봐. 가끔 비디오로 보니까 아줌마 소릴 듣지. 수요가 공급을 만드는 거야.
심재명 명필름 대표



[충무로 다이어리] 직업의 생리
심재명 / 2003-02-04 / 70

지난 1년 반 동안 이곳에 글을 썼다.
공동필자인 조종국 대표가 한번 써보라고 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별 망설임 없이 ‘그러마’라고 했다. 그 ‘그러마’가 씨가 되어, 내 생애 처음으로 한 매체에 꽤 오랫동안 글을 쓰는 처지가 되었다.
2주에 한번씩 찾아오는 마감일은, 만화가 정훈이가 이미 공표해버린 ‘마감의 비밀’을 알고부터 수요일에서 목요일, 심지어 금요일 밤으로까지 늘어졌다. 미안하게도 원고 펑크도 두번이나 냈다.
한번은 전북 임실의 산 속에서 있었던 촬영을 핑계로, 한번은 기자와의 대화 부족으로 동남아시아 어느 오지에서 뻔뻔하게 금요일 점심에 보냈는데, 그 주만 유독 마감이 목요일이어서 실리질 못했다.
어쨌든 ‘악질필자’인 셈이다. 그동안 원고를 쓰면서 느꼈던 건 ‘직업의 생리’라는 거였다.
나는 어느새 영화제작 시스템과 그 일정에 익숙해져버린 사람이란 거다. 이를테면 시나리오 개발기간 1년, 촬영 준비기간 3∼4개월, 촬영기간 3개월, 후반작업 3개월 등의 평균적 스케줄과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어 내 삶의 형태와 속도는 1년형, 아니면 2년형에 맞춰져 있었다는 걸 원고를 쓰면서 새삼 느꼈다.
사실 하루 24시간의 일정과 내용도 크게 보면 영화 한편의 출발부터 완성까지라는 대전제하에 이루어져왔다. 감독, 작가나 현장 스탭과는 달리, 매일 회사에 출근하고 회사업무를 봐야 하긴 하지만. 그러다보니 지난 10년은, 곧 약 13편의 영화를 제작한 것으로 단순요약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10년 세월’이 ‘영화 10편 제작’으로 쉽게 계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고마감을 기준으로 한 ‘2주형 인생’은 내게 낯설고 벅찼다. 무얼 쓸까에 대한 치밀한 고민은 엿바꿔먹고 언제나 벼락치기로 마감에 쫓겨 생각을 정리하고 얼렁뚱땅 수준으로 원고를 보냈다. 마음엔 ‘밀도를 가지리!’라고 주먹 불끈 쥐어보지만 또 2주 뒤엔 말짱 꽝이다. 그런 식이었다.
이제 충무로 다이어리를 마치면서 참으로 평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너, 글은 왜 쓰니’라고 누가 묻는다면 딱히 할말이 없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알량한 글솜씨를 보여주고 싶어서, 영화업계에 제대로 된 소리를 내고 싶어서, 뭐 이런 답들이 떠오르지만 사실 똑 떨어지는 답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근사치에 가까운 건, ‘쓰라니까!’다. 참으로 한심하지만 솔직한 이유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내게 ‘너, 왜 영화 만드니’라고 물으면 대답할 거리가 꽤 된다.
그래서… 이유없는 그 어떠한 행위는 되도록 삼가야, 심신의 안녕이 이루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1년 반이 지나서야 했다. 물론, 거절 못하는 약한 성격에, 매체의 영향력에 미리 주눅들고 눈치보는 소심증으로 가끔 글을 쓸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쓰라니까’라고 변명하면서 여기 쓰고 저기 쓰는 짓거리는 그만해야 할 듯싶다.
참으로 별 반응없는 원고를 1년 반 썼던 이 필자, 독자들께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꾸벅’ 드린다. 이메일로, 변비를 고친 약이 무엇인지 물어온 몇몇 분들(이 글이 가장 호응이 좋았다. 이상한 쪽으로), 문법도 맞지 않는 글이라고 게시판에 글을 올렸던 분, 자유기고가도 아니면서 이제 그만 쓰라고 책하셨던 분, 그리고 내 글을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시거나 안부를 주셨던 분들에게도 인사드린다. 나의 충무로 다이어리는 이걸로 끝이지만, 아직 대답할 거리가 꽤 많은 나의 ‘영화 만들기’는 쭈욱 계속될 것이다.

모두 행복하시길…




지난 1월22일 오전 11시, 명필름 대표 심재명씨를 만나러 서둘러 혜화동에 있는 명필름 사옥을 찾는 길에는 가는 눈발이 뿌리고 있었다. 겨울날, 오전의 청명한 공기를 맞으며 눈내리는 혜화동 주택가를 걸어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알겠지만, 이런 날은 누굴 만나도 괜히 반가워진다. 오래된 한옥이 듬성듬성 보이고, 눈을 맞은 강아지가 골목길로 뛰어나와 겅중거리며, 큰 길에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은 텅 비어 한가하다. 명필름 사옥은 바로 그 초등학교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서면 나온다.
희고 깔끔하고 전면 유리창이 있는 모던한 건물, 명필름이 여기 사옥을 만든 것은 2년이 채 안 된다. 명필름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만들 때까지는 길 건너편에 임대한 낡은 한옥에 있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렀던 건 아니지만 피카디리극장 옆건물에 있던 비좁은 명기획 사무실부터 기억을 더듬어보면, 한 회사의 성장이 사람이 커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회사도 사람과 비슷하게 나이를 먹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심재명 대표도 사옥을 지으면서 자기 집을 처음 소유한 사람의 기쁨을 느꼈으리라.

누군가는 평생 못 갖기도 하고 아니 갖기도 하지만, 만사가 그렇듯 집을 지으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정작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새로 시작된다. 명필름 역시 그랬다. 사옥을 짓고 지금까지 명필름은 전보다 많은 영화를 만들었고 여러 가지 사업을 벌였다. 지난해 명필름은 <버스, 정류장> <후아유> 등 세편을 개봉시켰고 <욕망> <질투는 나의 힘> 등 2편의 제작을 끝냈다. 2000년까지 1년에 한두편 제작하던 것과 비교하면 명실상부한 메이저 제작사의 면모다. 하지만 의욕과 열정에 비해 결과가 썩 좋지는 못했다.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손해보는 영화가 거의 없던 것과 대조적으로 지난해는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없었다. 창 밖의 눈내리는 풍경을 보며 이야기하기엔 다소 심란한 얘기지만 심재명 대표에게 지난해 명필름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이런 질문을 피하는 사람은 전혀 아니다. 마케팅 컨셉을 잡을 때도 그렇지만 심재명 대표는 솔직함의 미덕을 신뢰한다. 그것이 명필름의 힘 가운데 하나라는 걸 안다면 굳이 빙빙 돌려 질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난해 명필름이 제작한 영화 얘기부터 하자. <버스, 정류장>과 <후아유>는 손해를 본 게 확실한데, < YMCA야구단>은 돈을 벌었는지.
→ ‘똔똔’(손익분기점) 맞출 거 같은데.

관객이 얼마나 들었는데 그 정도인가.
→ 전국 160만명.

전국관객 160만명으로 수익이 안 난다는 얘기인데….
→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 순제작비가 42억원, 마케팅비 합쳐서 총제작비는 57억원 들었으니까. 시대물이다보니 돈이 많이 들더라. <취화선> 제작비는 이상 들었을 거다.

어쨌든 그 정도 영화로 돈을 못 벌었다는 건 프로덕션 과정에 어떤 문제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 사실 <버스, 정류장>과 <후아유>가 흥행에 실패했지만 처음부터 리스크가 있다는 생각을 했던 작품이고 < YMCA야구단>은 될 줄 알았는데…. 관객 성향이 변했다는 생각도 들고 제작비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고.

관객의 성향이 바뀌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 한국영화를 찾는 관객의 평균 나이가 낮아지고 있는 것 아닌가. 비슷한 유의 코미디만 흥행하는 것을 보면. < YMCA야구단>은 코미디에다 시대물, 그리고 송강호가 나오는 영화라는 조화가 관객에게 아주 세게 다가올 줄 알았는데…. 일종의 퓨전적 합체인데 예상보다 네거티브하게 다가오지 않았나. 요즘 코미디는 같은 코미디라도 쿨하고 점잖은 것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요하는 영화가 잘되지 않나. < YMCA야구단>은 너무 얌전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 자체에 대한 반성은 아니고 성향의 차이 같은 게 드러난 게 아닐까.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버스, 정류장>이 흥행에 실패한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후아유>는 조금 달랐던 거 같다. 기획 자체의 맥락이.
→ 웰메이드한 대중영화를 목표로 했으니까 기획부터 분명 달랐다. 그동안 제작 관행이 캐스팅하다 캐스팅이 안 되면 영화 자체를 접는 식이었는데, 우리는 그건 자존심 상해서 못하겠다는 거니까. 우린 캐스팅 안 돼도 끝까지 간다, 캐스팅 안 돼서 지연시키거나 포기하는 건 제작사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 라는 거다. <후아유> 같은 멜로드라마는 스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안 돼도 그냥 밀어붙였던 거다. 완성도에 최선을 다하면 스타가 나오지 않아서 부족한 면을 상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고. 결국은 안 됐지만…. 배급시기도 문제였던 거 같다. 월드컵이라는 특수상황을 예측 못한 채 개봉했으니까.

명필름은 마케팅을 잘하는 회사로 유명한데 지난해 영화를 보면 마케팅 전략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지.
→ 이전에는 남들이 안 하는 크리에이티브, 그러니까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서 마케팅을 했고 그걸로 관객을 끌어들였는데…. 이제는 유통이나 배급이 중요한 거 같다. 영화에 들어 있는 내용이나 컨셉을 살리는 것보다 어떤 시기에 어떻게 배급하느냐가 마케팅을 좌우하니까. 어떤 면에선 마케팅은 평준화되고 있고 배급이 마케팅을 대체하는 거 아닌가. 지난해 <집으로…>의 경우, 유독 마케팅이 영화를 살렸다거나 죽였다고 얘기할 수 없는 것 같고, 영화를 판단하는 능력, 그것을 풀어가는 능력, 언제 어떻게 풀 것인가 하는 것들도 중요한 마케팅이었던 거 같다.

지난해 기획영화로 성공한 사례로 <폰> <가문의 영광> <몽정기> <색즉시공>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영화들이 성공한 요인은 무엇이라고 보나.
→ <폰> 같은 경우는 소재 자체가 좋은데 그걸 공포영화가 없던 여름 끝물에 붙여서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고 틈새시장을 공략한 거다. 대중적인 소재를 가지고. 그리고 <몽정기>나 <색즉시공>도 그런 면에서 수요가 있지만 공급이 없던 틈새시장이 있는데 그걸 파고들어간 거라고 본다. 크게 성공하진 못했지만 <보스상륙작전> 같은 경우도 추석 직전에, <가문의 영광> 1주일 전에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전략이 먹힌 거 같고.

어떤 면에선 기획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예전과 달라진 느낌도 든다. 기획영화하면 일단 스타 캐스팅부터 떠올리곤 했는데….
→ 얼마 전에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조사한 걸 보니까 관객이 영화 보러 갈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64%가 어떤 스토리냐, 어떤 이야기냐더라. 그 다음에 어떤 장르냐를 보고. 어떤 감독이냐, 어떤 배우냐는 다음 문제였다. 생각해보면 할리우드도 그렇게 가고 있는 거 아닌가.

그렇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할리우드 스타 파워는 많이 죽었다.
→ 엄청난 스타가 나와서 1억달러 넘는 게 아니잖나. <트리플X>를 봐도 그렇고 <스파이더 맨>을 봐도 그렇고.

지난 연말 인터뷰에서 한국영화가 질적으로 하향평준화하는 거 아닌가라고 말했는데 어떤 의미인지.
→ 이창동 감독님 영화도 나오고 그러지만 상업주의영화에선 그런 측면이 있는 거 같다. 한국영화가 잘되고 있다지만 관객이 한국영화를 보고나서 야, 이건 정말 내 인생의 영화야, 라고 하냐 하면 그건 아닌 거 같다. 흥행적인 경쟁력이 세지고 있는 반면 그런 점에서 질적으로 낮아지는 거 아니냐 싶다. 놀란 게 다들 나처럼 생각할 줄 알았는데 다 다르더라. 그건 아마 자기 위치가 어떠냐, 자기의 영화 취향이 어떠냐에 따라 다른 거 같다. 질적, 양적으로 공히 성장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다.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 영화들이 양극화되는 거 같다. 작가주의영화거나 흥행영화거나. 과거에는 작품성도 있고 흥행성도 있는, 그런 영화를 선호했다면 이제는 하나만 잘하면 된다는 거다. 그런 면에서 관객 성향도 변한 게 아닌가.

그렇다면 명필름은 어디로 가야 하나. (웃음)
→ 큰일났다. 우린(웃음)… 두 가지 다 해야 하는데….



너무 일찍 결론에 도달했다 싶은데 눈치빠른 사진기자 이혜정씨, 이때 “사진부터 먼저 찍자”며 심재명 대표의 말을 자른다(역시 9년차 기자는 뭔가 다르다).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동안 심재명 대표의 방을 천천히 둘러보니 정면 책장에 줄잡아 20개가 넘는 상패가 보인다. “그동안 상 정말 많이 타셨네요” “상으로만 따지면 다른 제작사보다 훨씬 많은 편이죠.” 그런가 하면 심재명 대표의 방 오른쪽에는 미국의 영화주간지 <버라이어티>가 각국을 대표하는 10명의 제작자를 뽑아 찍은 기사가 액자로 걸려 있다. 워킹타이틀(<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빌리 엘리어트>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을 만든 영국의 영화사)처럼 내로라 하는 영화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 이은 감독의 환한 웃음과 더불어 쑥스러운 듯 고개숙이며 웃고 있는 사진 속 모습이 심재명 대표의 성격을 드러내주는 듯하다. 그는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많은 영화인이 모인 자리에서도 조금 뒷전에 서 있으며 대외적인 일은 주로 이은 감독의 몫이다. 하긴 심재명 대표는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던 시절, 영화운동을 하던 이은 감독이 너무 논리적이고 똑똑하게 말하는 데 매력을 느껴 사귀게 됐다고 한다.
그는 지난 1년6개월 동안 <씨네21>의 ‘충무로 다이어리’ 코너를 썼다. 유심히 읽어본 독자는 다 알겠지만 제작자로서 심재명 대표는 겉보기보다 훨씬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지난해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명필름의 여러 사업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그의 말은 좀더 간명해진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말, 심재명 대표는 묻지도 않은 얘기까지 줄줄 읊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그의 글에서 느껴지듯 머리에서 오래 숙성해서 정리된 것만 끄집어낸 것 같다.

지난해 명필름은 5편에 투자해서 3편을 개봉시켰는데, 이렇게 많은 영화를 관리해보니 어떻던가.
→ 여력은 되는데 이전에 과작 형태로 하면서 신경쓰는 것만큼 신경쓰긴 힘들다. 시장의 변화라든가 관객 성향의 변화라든가 그런 변화를 간과한 게 있는 거 같다.

지난해 코스닥 등록을 위한 심사를 받았는데 등록에 성공하진 못했다.
→ 영화제작사는 리스크가 큰데, 앞서 제작사로서 등록한 케이스도 없고, CJ는 제작사가 아니라 유통사로서 가능했던 거 같다. 우리가 첫 번째 케이스라서….심사위원회에서는 우리가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던 거 같다.

최근 CJS연합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후 명필름은 어떻게 할 것인지.
→ 아직 공식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서 뭐라 말하기 그렇다. CJS가 어떤 마인드로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면서 어떤 반응을 말하긴 힘들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거 같은데 긍정적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게 2강이 합치면 또 다른 경쟁자가 또 생길 수도 있고. 예전엔 3강이 맞는 거 아니냐, 그런 얘기도 있었지만 두고 봐야지.

예전엔 신씨네, 우노필름, 명필름이 손잡고, 거대 배급사에 맞서서 제작사가 연대하는 형태인 SUM이라는 걸 만들기도 했는데.
→ 잘 안 됐다. 아무 구속력이 없으니까. 지금은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는 거 같다.

최근 금융자본이 제작사와 투자사의 관계를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이런 움직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아무래도 제작사가 전보다 불리해질 거 같은데.
→ 전에는 약속된 제작비를 오버하지 않으면 제작사는 리스크가 없었다. 투자사와 제작사가 5:5나 6:4로 수익을 나눴는데…. 올해부터 그런 게 아니라 지난해에도 7:3, 8:2로 변화는 있었다. 그게 아니면 총제작비 가운데 마케팅비는 먼저 비용으로 제한다거나. 투자방식이 바뀌는 건 대세 같다. 제작사가 많아지고 투자심리는 위축되니까. 당연한 수순인 거 같다.

그간 이픽처스(해외 세일즈 회사)나 라이트림(조명기자재 대여회사) 같은 자회사도 생겼는데 이픽처스에선 어떤 성과가 있나.
→ 해외 세일즈라는 게 기본적인 콘텐츠가 있어야 하는데 일단 우리 회사 작품 위주로 하니까 아직은 내놓을 만한 성과는 없다. 해외 합작이나 외화에 대한 투자 등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는 중이다.

그럼 투자한 외화가 있나.
→ 지아장커의 <임소요>에 투자를 했다. 전체 제작비가 5억원인데 1억원 정도. 공동제작사로 올라 있고 국내 배급권도 갖고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임소요> 개봉시키라고 선동한 글도 봤을 텐데.
→ (웃음) 개봉시켜야지. 어차피 배급권을 갖고 있는데. 아직 개봉일정을 못 잡고 있다.


지난해 흥행성적이 부진했지만 명필름에 별다른 변화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올해 개봉할 편수만 해도 이미 3편이 확정됐다. 지난해 제작을 끝낸 김응수 감독의 <욕망>과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을 시작으로 지난 연말부터 촬영에 들어간 <바람난 가족>이 늦어도 올 추석에는 극장에 걸릴 예정이다. 세편 모두 스타 캐스팅에 기댄 영화는 아니어서 제3자의 눈으로 보기엔 흥행하는 게 만만찮은 일처럼 보이는데 정작 심재명 대표는 담담하다. <섬>이 흥행에서 실패한 뒤 상심해서 앓아 누웠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맷집이 좋아지셨나봐요”라고 묻자 그는 “그럼요. 그때는 첫 경험이었으니까 파장이 컸죠. 지금 생각해보면 <섬>은 해피한 케이스였어요”라며 웃는다.
임상수 감독과 <바람난 가족>을 같이 하게 된 계기는.
→ 감독에 대한 신뢰가 제일 컸었고.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눈물>을 봤을 때 좋았고 감독으로서 프로가 아니겠나 싶었고.

<바람난 가족> 출연계약 문제로 김혜수씨와 시끄러웠는데 어떤 생각이 드나.
→ 계약서를 잘 써야겠다, 다. 김혜수씨는 영화와 TV를 둘 다 할 수 있다는 거였고, 우린 그럴 수 없다는 거였으니까. 손해배상소송까지 간 건 이런 문제가 사적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였다. 또 이런 일이 닥칠 텐데 공론화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방송사든 영화사든 캐스팅 때문에 애를 먹고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거니까. 사실 우리 입장에선 이런 소송을 내면 매니지먼트사한테 깐깐한 제작사라는 인상을 줄 거고 득볼 게 없는데 5억원 손해배상을 하라고 요구한 것도 돈을 받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공론화하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다. 계약금을 돌려받는 걸로 정리가 됐고. 이젠 서로 조심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 가장 먼저 개봉할 영화는 <질투는 나의 힘>인가.
→ 아니다. <욕망>을 먼저 하게 될 거 같다. 배급방식을 고민 중인데 CJ랑 의논 중이다. 예술영화전용관에 풀 것인지, 일반상영 방식을 택할 것인지. 그 형태가 정해지면 개봉일자도 정해진다. 3∼4월에는 할 거 같은데….

=<섬> <와이키키 브라더스> <버스, 정류장>처럼 이런 영화를 몇 차례 개봉해봤는데… 어떤 대안이 있다고 보나.
→ 무엇보다 이런 영화는 예산을 줄여야 한다. 4억∼5억원 정도로 제작하면 크게 돈을 벌 순 없겠지만 리스크는 줄일 수 있다. 저예산으로 해야 하는데 <욕망>도 제작비 9억원이 들었으니까 리스크가 있을 거 같다. 작가주의영화들의 경쟁력은 따로 있고 그런 영화를 만드는 프로듀서나 감독도 따로 있는 거 같다.

2001년엔 신인 감독 영화 중에 <소름>을 인상적인 영화로 꼽았는데 지난해 영화 중에는 무엇이었나.
→ <품행제로>다. <씨네21> 베스트5는 뭐였나

<생활의 발견> <오아시스> <복수는 나의 것> <죽어도 좋아> <취화선>이었다.
→ <죽어도 좋아>를 아직 못 봤다.

<품행제로>는 어떤 면이 좋았나.
→ 대중영화로서 쿨한, 감정 과잉이 별로 없고 만듦새나 형식에 대해 공을 많이 들인 거 같다. 시나리오나 이야기 구조에선 허술한 점이 있지만 영화가 표방하는 캐릭터나 캐스팅이라든가 연기라든가,난 깜짝 놀랐다. 대중영화로서 미덕이 많은 거 같다. 요즘에 과잉의 영화를 많이 봐와서, 그렇지 않은 게 너무 좋더라. 처음엔 류승범이 싸움하면서 난리나잖나. 그런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던 게 너무 좋았다. 완전히 개싸움이 돼버리잖나. 진실은 이런 거고 결국 무용담 좋아하는 고삐리들의 과장된 그걸 완전히 뒤집어버리더라구. 그런 사고 자체가 쿨하면서도, 영화를 대하는 태도나 사고방식에서 진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화도 자주 보나 최근 영화 중에 좋았던 건 뭐였나.
→ 아주 최근 영화는 별로 없고 <어바웃 어 보이> 좋게 봤다. <피아니스트>,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있잖나.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정말 대단하더라.

<어바웃 어 보이> 얘기하니까 생각나는데 워킹타이틀의 작품이잖나. 당신이 꿈꾸는 영화가 워킹타이틀의 영화와 비슷한 거 아닌가.
→ 지금도 워킹타이틀영화처럼 만들 자신있다. (웃음) 그런데 워킹타이틀은 작가, 감독, 배우, 네트워킹이 정말 좋다. 휴 그랜트가 나오고. 음악 쓰는 타이밍도 비슷하고. 그걸로 영국뿐 아니라 할리우드도 점령했잖나.

지난해 작품들이 흥행이 안 되고 투자여건도 나빠져서 위축되진 않나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는 대단한 위기감을 느끼는 거 같던데.
→ 위기감이나 그런 건 별로 없다. 정말 위기라서 일부러 내색을 안 하는 걸로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즐겁게 좋은 감독을 만나서 일하면 되는 거다. 뭐, 지난해엔 시장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으니까 좀더 발빠르게 움직이고. <바람난 가족>도 잘 찍히고 있고. 심보경 이사가 <바람난 가족>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데 문소리씨에 대해 ‘괴물’이라고 하더라. 문소리씨 연기에 놀라나보다. 올해 괜찮을 거 같다. 난.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나왔을 때 소복이 쌓일 만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을 맞으며 언덕길을 걸어올라 국밥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요즘 시사회를 한 영화들, <이중간첩> <클래식> <디 아워스> 등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들려준 비사 한 가지.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실은 창대한 프로젝트였단다. 한석규와 송강호를 캐스팅하려고 매니저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던. 정말 두 배우를 써서 만들었다면 어떤 영화가 나왔을까 관객은 얼마나 들었을까 영화를 뜻대로 만드는 일은 감독에게나 프로듀서에게나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다.

씨네21   글 남동철 namdong@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심재명의 2001년 한국영화 결산

질문내용.
1. 올해 한국영화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하나 꼽는다면 무엇입니까.
2. 개인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이 있습니까. 발상의 전환을 유발시킨 사건이나 계기가 있었는지.
3. 올해 본 영화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좋았던 작품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올해 한국영화계를 돌아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안은 있습니까.
5.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올해 목표했던 것이나 예상했던 것과 크게 어긋났던 일이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6. 내년의 한국영화계를 어떻게 전망하시나요.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7. 내년에 가장 기대하는 작품은 어떤 것입니까. 직접 제작하는 작품을 빼고 말한다면 어떤 영화인가요.

심재명 명필름 대표
“어떤 영화를 만들지, 공황상태에 빠졌다”

1.특정 장르 영화의 놀라운 흥행. 서울 150만명 전국 3400만명 넘는 영화를 5편씩 배출하는 놀라운 관객 동원력은 제작 규모나 장르 등 가이드라인은 물론 유통, 배급까지 산업적으로도 불가피한 변화를 가져온다.

2.1번 답과 같다. 어떤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생존할 것인지 공황상태에 빠졌다. 명필름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마케팅 전략이나 작품 선택이 맞을 것인지 이런 흐름에 어떻게 ‘조응’할 것인지 근본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지게 됐다.

3.윤종찬 감독의 <소름>.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가련함, 연민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처연함과 상처에 대한 통찰을 공포영화의 틀에 담아냈다. 극단적 롱숏에서 클로즈숏으로 가는 움직임 등 형식미에서 겉으로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모든 컷, 숏, 조명, 음악, 미술이 하나같이 새로웠다.

4.다양성의 상대적 결핍. 예전에는 흥행 결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예측 불가능성이 있었고 예기치 못한 영화가 폭죽을 터뜨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스타와 큰돈, 대대적 마케팅, 많은 극장을 쏟아붓는 성공의 ‘공식’이 생긴 듯하다. 출발과 끝이 뻔해진 것이다. 반면 한국영화의 위상과 산업적 지위 제고는 긍정적인 면이다. 어느 해보다 문제적 영화, 감독이 많이 등장했다는 점도 반갑다. 이런 싹들을 구조적 결함으로 질식사시키지 말고 영화인, 정부, 시스템이 협동하여 가능성을 가꿔나가야 한다.

5.<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처음부터 손해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는데, 피부에 와닿은 결과는 그보다 더 나빴다. 그렇다고 좌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와이키키…>로 인해 영화를 제작하고 배급하는 방법론을 더 넓고 다양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보람이다.

6.박찬욱, 홍상수, 임권택 감독 등 신뢰받는 감독들의 신작이 나오는 해고 그 영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여성감독의 활약도 두드러져 위상을 높이는 한해가 될 듯하다. 배급면에서는 CJ와 시네마서비스의 양자구도가, 코리아픽처스 등 여러 배급사가 합류한 군웅할거식 시스템으로 대체될 것이다. 시네마서비스의 역할이 축소된다기보다 판 자체가 커질 것이다.

7.<후아유>가 ‘업그레이드된 <접속>’으로 탄생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깜찍한 대중영화이면서도 단순한 상업영화로 보기에는 어딘가 아쉬움을 남기는 완성도 높고 새로운 감수성과 정서를 잡아낸 대중영화를 예상한다. 타사 영화로는 좋은 시나리오에 한창 물오른 세명의 배우가 공연하는 <복수는 나의 것>과 홍상수 감독의 팬으로서 그의 가장 편하고 재미난 작품이 될 듯한 <생활의 발견>을 고대하고 있다.





“캐스팅엔 피도 눈물도 없다”

명필름은 캐스팅이 쉽겠다고? 아니다. 우리도 힘들다. 요즘은 옛날처럼 의리 따지는 시대가 아닌 것 같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다. (웃음) 돌아보면, 명필름에서 제작한 작품 중 가장 캐스팅 때문에 애를 먹은 건 <접속>이었다. 이미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스탭 구성까지 마친 상태에서 한석규, 전도연 캐스팅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요즘은 더 힘들다. 다들 다작은 안 하려고 하니까. 배우들 입장에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생명력도 고민해야 할 테고, 자기 플랜도 세워야 하고, 또 자신이 속한 매니지먼트사와 이미지에 대해 지향점을 맞추기도 해야 할 테고. 그러니 자본에 비해 스타가 없는 셈이다. 다행히 명은 메이저라고 불러줘서 투자사의 입김에 휘말릴 정도는 아니다. 그랬으면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욕망>은 힘들었겠지.

송강호씨? 좋은 배우이고 무게도 있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흥행을 100% 보장하는 배우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인지도야 도움이 되긴 하겠지. 그렇다고 <시월애>의 전지현과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다르지 않나. 그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사회적인 트렌드를 반영하고 분명한 장르가 있고 대중적인 이슈를 제기할 수 있는 소재라면 사실 유명하지 않은 배우라도 된다. 결과는 자신있다. 캐스팅하는 데 시간 오래 뺏겨서는 안 된다. 최근에 그런 적이 한번 있는데, 괜히 그런 후회가 들더라. 막연히 기대하지 말고 공격적인 캐스팅을 애초부터 생각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나마 2개월 정도에서 막을 내렸지만 좋은 교훈 하나 얻었다. 우리의 원칙과 할 일? 완벽한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는 캐스팅 작업에 안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 아 그건 스타일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듯싶고. 두 번째는 <와이키키…>나 <라이방> 등 작지만 다양한 시도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정도.




처음 같은 떨림으로, 다시 출발선에 서다
제작자 심재명(명필름 대표)을 규정짓는 정체성은 '복합적인 마이너리거'다. 그는 '한국에 사는' 여성이고 기혼자이면서 한 아이의 엄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영화인'이라는 수식어보다.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자리매김이 더 어울린다. 여성이고, 엄마이면서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심재명을 만났다.

한국영화에 '서푼어치'라도 관심 있는 사람으로서 제작자 심재명(39)을 모른다면 간첩이다. 안심해도 좋은 것이, 그를 모른다고 해도 사는 데 절대 지장은 없다. 영화의 언저리를 얼씬거리는 사람이라 해도, 그를 모르는 게 아무렴, 흠은 아니다. 그런데, 모른다고 '때려죽일 것'도 아닌데, 심재명은 어느새 배우나 감독만큼 낯익은 이름이 됐다. 그는 각종 여성단체에서 선정한 '자랑스런 한국 여성'인가 하면, 한국영화의 제작자 순위에서도 언제나 1∼2위를 다투는 '파워우먼'이고, 인기인만 등장하는 줄 알았던 TV-CF에도 진출한 연예인(?)이다.
또 최근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 선정 '아시아 문화를 주도하는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아줌마, 총체적 마이너리거의 집합체
그렇다고 심재명을 '스타연' 하는 제작자로 인식한다면 그건 옳지 않다. 취재원으로서의 그는, 턱없이 오만하거나 섣부르게 겸손하지 않았으며, 다만 정직할 뿐이었다.  
 "인터뷰도 많이 했고, 과분하게 성공도 했지만, 제 포지션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이미지를 싫어합니다. 평범하고 소탈한 편이고, 그렇게 비추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멋진 커리어우먼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제작자로 보여지는 건 원치 않습니다."
 임순례나 변영주 감독 정도의 체격은 돼야 할 것 같은 영화판에서 그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으로 꿋꿋하게 잘도 버텼다. 그렇다고 반대의 경우로, 여성성이 도드라지는 인물이었는가 되묻자면, 그건 아니다. 그는 '여성' 영화인보다,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자리매김이 더 어울린다.
 이 땅에서 제작자 심재명을 규정짓는 정체성은-본인이 인정하건 안 하건- 총체적인 마이너리거의 집합체다. 그는 여성이고 기혼자이면서 한 아이의 엄마다. 세상이 제아무리 바뀌어 '여성상위'를 부르짖는 시절이 왔대도, '아줌마'들에 관한, 싸잡은 편견과 불평등은 다만 수위 조절됐을 뿐이다.  

-일하는 여성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입니다. 책임의식을 느끼십니까?
"한국 사회는 아직도 감정적이고 남성 중심적 성향이 강합니다. 영화를 하거나 하려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습니다. 적게나마 영향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는 여성주의자입니다. 여성끼리의 연대랄까, 여성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여성들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 할 일을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여성 영화인들이 아직도 차별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의 다른 조직사회보다는 덜하다고 하지만, 크게 보면 여전히 그렇습니다. 영화 한 편을 예로 들 때, 최종 의사결정권을 가진 여성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물론, 처음 영화계에 들어왔을 때와는 격세지감이라 할 만큼, 좋아진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남성(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었다기보다, 여성 스스로 힘들게 개척해냈고 평가받아온 것입니다. 더 많은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갈 길이 멀지요."

-감독이라는 직업 자체가 여성에게 맞지 않는 면이 있다고 보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예전에는 구조적으로 감독이 전 스태프들을 통솔해야 했어요. 야전 사령관 개념이 강했던 만큼 지도력이 중요했지요. 현재는 제작환경도 전문화됐고, 시스템이 잘 짜여 있습니다. 남성적인 파워풀한 영향력이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우선시되지 않아요. 감독으로서의 재능이라든가 연출관, 세계관이 일정 수준에 올랐다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봅니다."



-제작자로서 주목하는 여성 감독이 있습니까?
"저는 모두 주목합니다. 다 좋은 영화를 만들 것 같으니까요. 임순례나 정재은 감독님은 물론이고, 박찬옥([질투는 나의 힘])이나 [고추 만들기]의 장희선 감독 역시 단편영화를 보면 좋은 데뷔가 기대됩니다. 모두 잘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성주의자라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여성끼리의 연대'에 주목함은 사실인 것 같다. '여성영화인 모임'의 기획이사이기도 한 그는, 정치적인 올바름을 근거로 페미니즘의 노선을 취했다기보다, 경험에 영향 받은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싶다.
4년쯤 전이던가, 기자는 그에게 '젖병세트'를 선물로 받은 기억이 있다. 언제나 사려 깊은 취재원으로 기억될 뿐 개인적인 친분은 없는 사이였다. 게다가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기자직을 관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의 선물은 난데없었다. 그는 "써보니까 정말 좋은 젖병이에요"라고, 정말이지 진지하게 말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아줌마들끼리의 동병상련에서 비롯된 연대의식 같은 게 아니었을까. 얘기는 자연스럽게 육아와 가정문제로 이어졌다. 그는 얼마 전 폐막한 부산 국제영화제에 딸과 함께 나타났다.

-행사장에 아이와 함께 오신 모습이 보기 좋던데요.
"[버스, 정류장] 막바지 촬영으로 쫓기고, 회사 일로 바쁘다 보니 아이한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새벽에 촬영 끝나는 날은 한 집에 살아도 며칠씩 못 보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제 기간이 기회겠다 생각했어요. 영화를 보는 일은 아예 포기한 채, 아이와 함께 바닷바람 쐬고, 맛있는 거 먹고 그랬어요. 에이, 이런 얘기 하면 제가 꼭 좋은 엄마인 것 같잖아요(웃음)."

-이은 감독은 육아에 도움을 주는 편입니까?
"남편은 다분히 진보주의적이고 이상주의자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가정에서는 지극히 불평등한 부부입니다. 아이를 싫어하거나 책임감이 부족한 건 아닌데, 실제적인 도움은 별로 안 주는 편이지요(웃음)."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이런 불평등을 참고 넘기는 건 어불성설인데요....
"어휴, 싸워서 될 일이 아니더라고요. 회사 일로 파김치가 됐는데, 집에서 다시 애 씻기고 놀아주다 보면 아닌 게 아니라 감독님(그는 남편이자 명필름 이사인 이은 씨를 이렇게 불렀다)에게 화가 나요. 그럼, 합리적이기 이를 데 없는 감독님은 이렇게 말하죠. '힘들면 아줌마 부르면 되잖아요.'(두 사람은 서로에게 경어를 쓴다) 아이 키우는 일은 합리적이어서 될 일이 아니잖아요. 그럭저럭 포기하는 데 익숙해졌어요."
         
-극단적인 예지만, 아이가 엄마에게 선택을 강요하면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일과 아이 중에서요? 그럴 수 있겠지요. 다행인 것이, 우리 애는 젖먹이 때부터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일하는 엄마'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내년에 승채가 일곱 살이에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일년이 아이에겐 굉장히 중요한 때잖아요. 일을 많이 줄이고, 아이와의 시간을 늘리려고 해요."

-바르게살기운동본부 회원과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스스로 많이 억압되어 있는 편이에요. 여자니까 얌전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 오래된 유교적인 가치관.... 선천적으로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이나 경외감, 부러움 그런 것이 많아요. 그러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지요.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지요, 뭐."

-아이에게 특별히 바라는 게 있나요?
"우리 아이는, (엄마보다) 조금 여유 있었으면 좋겠어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좋겠고, 그 밖에는 무엇이 되든 어떻게 살든, 특별히 기대하지 않으려 해요."

-결혼과 출산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기도 하나요?
"그럼요, 물론이에요. 결혼 전과 지금의 저는 사뭇 달라요. 굉장히 다르죠. 저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에요. 남한테 피해주는 걸 못 견뎌 하고, 앞서 말했지만 성실하게 살려고 강박적으로 애쓰는 편이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역사의식이 무엇인지 별 관심 없는 개인주의자였어요. 반면, 이 감독님은 이상주의자예요. 나의 발전뿐 아니라, 나라의 발전, 나아가 역사의 발전까지 생각해야 직성이 풀린다니까요(웃음). 서로 다른 가치관이 부딪치다 보니, 처음엔 싸움도 많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서로 조금씩 닮게 됐어요. 영화를 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결혼 전보다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할까요?"

일할 때는 '독한 X', 실제로는 수동적 성격
그는 결혼과 출산을 '인생 최고의 터닝포인트'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제작자'에게 품기 쉬운 선입견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다. '독한 X' 소리를 들을 만큼 집중적으로 일하는 편이지만, 실제로 밝히는 그의 성격은 꽤 수동적이다.
"이은 감독을 좋아했지만, 결혼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실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편이었는데, 옆에서 옆구리를 찔러대니 해야 되나 보다 생각했다."  피식 웃음이 나올 만큼 간단한 결혼사연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흘러갔던 그의 인생 얘기를 복원해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 보는 걸 좋아했다. 6학년 때인가? 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보았는데, 제목이 [잔류첩자]였던가. 간첩 나오는 반공영화였다.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주인공이 뽀뽀하는 장면에선 막 소리 지르고 그랬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는, 감독이 되고 싶단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같은 과 친구였던 미연([버스, 정류장]의 이미연 감독을 말한다)이와 친하게 어울렸다. 프랑스 문화원의 영화서클 '시네클럽'에 가입해서 열심히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이상하지, 잔 모로의 [사춘기]를 보고 난 뒤, 안국동 길을 걸어나오던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으니....  
미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내겐 너무 '부르주아틱한' 분야였던 거 같다. 취업이 잘 안돼서 출판사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서울극장에서 카피라이터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카피라이터, 그것도 괜찮겠지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목적지향형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인생에 뚜렷한 목표를 세워두고, 몇 개년 계획으로 살았다기보다 순리적으로, 다분히 그렇게 살았다.
극장 기획실 직원으로 지냈던 한 시절, 광고-홍보-배급 등을 두루 배웠는데, 그것이 큰 자산이 됐다.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편견 얘기, 앞서 나왔지만, 그런 것도 그때 많이 느꼈다. 술자리에서 짓궂게 구는 기자도 있었고, 원고를 대신 써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영화 일을 하는 자체가 행복했고, 어떻게 하면 영화를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에 밤샘 작업도 행복했다."

-카피라이터로서 히트시킨 카피도 많지 않았습니까?
"이래봬도 결혼과 성에 관한 카피에 꽤 능했답니다(웃음). [결혼 이야기]의 '잘까 말까 끌까 할까'가 기억납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상영될 때에는, '토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나누어주자'는 아이디어를 내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정말 낯뜨거운 카피인데, [투문정션]의 '그녀는 경찰을 부르는 대신 스커트를 내렸다'가 대표작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정말이지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경험이 많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무식해서 용감한' 그런 카피들을 그는 잘도 써댔던 것이다. 그는 요즘도 반짝이는 카피가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감각이 무뎌져서 안된다, 옛날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언제나 최선을'이 성공의 비밀
그가 말했던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연결된다. '옆구리 콕콕 찔렀던' 이은 대표와 결혼한 그는, 기획-마케팅 회사였던 명기획을 제작사로 체질개선시키면서 회사명도 명필름으로 바꾸었다. 지난 95년 8월의 일이다. 때마침 삼성, 대우를 필두로 한 대기업들이 영화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제작비 조달이 쉬워졌다. 프로듀서의 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다.  
명필름은 창립 작품이었던 [코르셋]을 시작으로 [접속] [조용한 가족]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섬] [해피엔드] [공동경비구역 JSA] [와이키키 브라더스] 등을 제작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원금을 까먹은 영화는 거의 없다. 칸-베니스-베를린 등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 모두 진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전국에서 관객 480만 명을 동원했다. 제작사인 명필름과 투자사인 CJ 엔터테인먼트는 시쳇말로 돈방석에 앉은 셈이다. CJ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후한 인센티브를 챙겼고, 명필름은 혜화동에 사옥을 지었다.

-명필름이 제작사로 성공을 거둔 비결은 무엇입니까?
"이태원 사장은 30편도 넘는 영화를 제작하셨잖아요. 겨우 여덟 편 내놓고 성공했다 그러면 섣부른 평가겠지요. 그렇다고, 돈도 이만큼이나 벌어놓고 그럼 이게 성공이 아니란 말이냐,라고 누군가 다그친다면 글쎄, 할말이 없지요. 일단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부터 20~30년 전에만 영화를 했대도, 집에 돈이 있어야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겠지요. 쌈짓돈을 끌어들여 제작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주요했고요, 한국영화사에 프로듀서라는 신개념을 만들어내고, 선험적으로 좋은 결과를 낸 선배들 덕분에 갖게 된 기득권도 있습니다."

-그런 얘기말고, 좀 자랑삼아 할 얘기 없습니까?
"저는 성격이 비관적이에요. 항상, 드러난 현상이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건 안될지도 모르니 좀더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조바심을 냈던 게 도움이 됐을까요. 세속적인 성공보다는 할 만한 일인지, 동기부여에 가치를 두는 편이고요. 관객들이 공감하겠는가에 항상 주파수를 맞추다보니, 관객들과의 접근이 용이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개성 있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뭐랄까, 작은 얘기에 끌리는 편이지요. 전반적으로 허술해도 개성이 살아 있으면 용서가 되는 편이에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는 정말 보기 싫고요. 예를 들면, 명필름에서 제작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개인적인 성향으로는 [소름](감독 윤종찬) 같은 영화를 좋아해요."

-영화를 만들 때, '이건 되는 영화다' 감이 잡힙니까?
"전혀요. 오히려 영화 많이 할수록 그런 감을 점점 잃어가는 것 같아요. 제작이나 마케팅 노하우가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는데, 점점 눈이 신선해지지는 않아요. 나이 먹는 게 두려워지고, 영화를 많이 했다는 경험이 오히려 매너리즘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관객들의 취향 변화가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당혹스러울 만큼 빠르지요. [공동경비구역 JSA] 때만 해도, 위험한 주제나 새로운 시도라도 최선을 다해 만들면 관객들이 와 주는구나, 그런 믿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만들고는 '과연 대중과 소통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런 의혹이 듭니다."
당혹이 깊어지면? 그러면 조폭과 액션, 코미디로 대표되는 유행의 대열에 명필름도 합류하게 되는 걸까? 그는 "글쎄, 해본다고 다 되겠느냐?"는 반문으로 말끝을 흐렸다.
'제작 심재명'이라는 자막이 오를 때의 처음 그 느낌, 그 떨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대답은 솔직하다.
"요즘 들어,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았나, 후회도 있습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 많이 소진된 건 아닐까, 별것도 없는데 쥐어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떨쳐지지 않습니다."
명필름의 내년 프로젝트는 올해보다 훨씬 전투적이다. 다섯 편의 영화가 극장에 걸릴 예정인가 하면, 물밑 작업될 영화의 라인업도 비슷한 편수다. 여기에는 외국 감독과의 합작계획도 포함돼 있다. 내년? 승채를 위해 일을 줄이고 싶다더니? 재충전이 필요하다더니? 평생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못 떨칠 것 같은 타고난 일 중독자, 그가 바로 심재명이다. 그러니 마음에 생긴 우울 하나, 친구와 술 한잔 나누든지, [배철수의 음악캠프]나 들으면서 떨칠 수밖에.

"요즘 들어,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았나,
후회도 있습니다.
정신적-육체적으로 너무 많이 소진된 건 아닐까,
별것도 없는데 쥐어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글-최지숙 기자(cjs@khan.co.kr) / 사진-서범세 기자



심재명(38) 명필름 대표의 사무실 한쪽 테이블 위에는 스테인레스 재질의 스탠드형 연하카드가 놓여 있다. 화가 임옥상씨가 보낸 이 연하장에는 “올 한해 밥굶지 말고 밥값을 제대로 하는지 주위에 밥굶는이 없는지 확인하시라”란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부담스런 연하장은 생전 처음이에요. 볼 때마다 오늘도 내가 밥값을 제대로 했는지 반성하죠.”
하지만 심대표는 올 한해 ‘밥값하기’ 걱정은 커녕 95년 창사 이래 가장 분주한 시간을 보낼 듯하다. 지난해 ‘와이키키 브라더스’ 단 한편만 개봉했던 것과 달리 올해는 상반기 ‘버스 정류장’‘후아유’‘욕망’, 추석께 ‘YMCA 야구단’을 개봉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것 뿐 아니다. ‘질투는 나의 힘’등 투자작 3편도 연내 선보인다. 해외투자작으로는 중국 신예감독 지아장커의 ‘언노운 플레저(Unknown Pleasure)’를 국내 배급한다.
이밖에 님 웨일스 유족으로부터 최근 영화화 판권을 구입한 ‘아리랑’의 연출자로 정지영 감독을 내정한 상태. 만화영화제작도 연구중이다. 일본, 중국과의 합작 모색은 물론 자회사인 DVD제작사 ASF, 디엔딩 닷컴, 이픽처스, 투자만한 음향회사 블루캡 및 조명대여사 라이트림 운영살피기 등 영화제작 외에 벌여놓은 일이 만만치 않다.
‘접속’‘조용한 가족’‘공동경비구역 JSA’‘해피엔드’‘섬’등 한해 평균 1,2편을 내놓았던 명필름이 ‘소량생산, 고품질 전략’ 대신 ‘문어발식 확장경영’에 돌입한 것일까. 심대표는 “사업다각화는 좋은 콘텐츠를 위한 환경 다지기”라며 “연간 10편내외의 작품을 내놓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솔직히 지난해 ‘와이키키 브라더스’ 흥행결과에 쇼크를 받았죠. 서울에서만 15만명을 예상했는데 너무 저조(전국 관객 약 13만명)했거든요. 저예산영화의 제작시스템이 좀더 철저해져야겠다는 고민을 깊이 했습니다. 하지만 명필름의 색깔을 바꿀 필요성은 느끼진 않아요. 리스크(위험)많은 주제, 장르의 영화를 탄탄한 완성도로 만들어내는 것이 명필름의 최대장점이거든요.”
지난 88년 영화계에 입문한 심대표는 지난해 미국 영화전문지 버라이어티, 홍콩 경제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등에 의해 세계적인 프로듀서로 선정된 바 있다. 그는 “2002년 국내 영화계에서는 대중취향과 작가주의 영화가 다양하게 공존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나 스스로 금년 한국영화가 너무 궁금하다”며 “호황기일수록 중심이 필요한 때”란 말도 잊지 않았다.
문화일보 /오애리기자





인물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어보자.
주인공은 ‘공동경비구역 JSA’로 거대한 성공을 거두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영화제작자 심재명씨(명필름 대표).
‘접속’ ‘해피엔드’에 이은 이 영화의 성공으로 심씨는 젊은 여성들에게 영화계 울타리를 넘어 ‘꿈을 이룬 이’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1.프롤로그
인터뷰 대상자를 추천하려 생각에 잠긴 방송인 박경림 모습이 멀리 보인다.
사각형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되며 컷이 바뀌면 걸걸한 목소리.
⊙박경림-‘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실력으로 여성 핸디캡을 극복한 ‘명필름’ 대표를 인터뷰해주세요.
그 에너지로 우리 영화계를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 물어봐주시고요.
장면 바뀌면 ‘명필름’ 팻말이 붙은 서울 명륜동 한옥 나무 대문.
카메라가 사무실로 개조한 한옥 마당을 훑을 때 보이스 오버(화면 밖 목소리)가 깔린다.
⊙“영화계를 바꾸겠다는 생각보단, 제작자로 적어도 두 원칙은 지키겠다고 다짐할 뿐이죠.
나 자신과 명필름, 한국영화사에 부끄럽지 않을 작품을 만들겠다는 책임감, 그리고 일단 시작했으면 자신있게 밀고나간다는 소신입니다.
말이 끝날 때쯤이면 어느새 화면 안에 들어와있는 여성.
침착한 모습의 심재명(38)씨다.
 

#2.담장 밑
일요일 오후 4시.
마당에 내놓은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을 부감으로 내려다보던 카메라가 날렵하게 몸을 낮춰 심씨 얼굴로 다가가면.
⊙심재명-대학 졸업 후 서울극장 카피라이터 모집 공고를 봤어요.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는데, (잠시 멈춘 뒤) 실제 영화사는 냉혹한 곳이더군요.
전 영화를 만들 때 출발은 순수해도 제작만큼은 철저히 따져가며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그때 배웠으니까요.
◆내레이션-몇해 전 종로3가 지하도에서 우연히 그를 본 적이 있다.
벽에 붙은 영화 포스터들을 꼼꼼히 뜯어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면 인사해야지, 생각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포스터에 붙박여있었다.
 

#3.마당
⊙심-항상 여성임을 의식해요.
명필름 첫 영화도 페미니즘적 주제를 다룬 ‘코르셋’이었어요.
영화 속에서 여성성이 왜곡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그간 한국영화는 남성 시각으로 만들어졌는데, 이제 여성 영화인들이 다른 시각으로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질문자-(TV 연예 뉴스 화면이 자료로 삽입되면서)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은퇴 논란이 이는 심은하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심-은하씨는 사회 속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고히 위치 정립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중은 이제 이혼한 여배우에게도 박수를 칠 정도로 성숙했는데, 오히려 배우들의 퇴행적인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내레이션-그의 삶을 다룬 수필집을 내자는 제안을 전한 적이 있다.
그는 예의바르게, 그러나 분명하게 거절했다.
“커리어 우먼의 환상을 심어주는 폐해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가 이유였다.
 

#4.사무실
책상 두 개가 눈에 띈다.
친동생인 심보경 기획이사와 함께 쓰는 방.
책상엔 갖가지 자료가 치쌓여 책 하나 놓을 공간도 없다.
⊙질문자-‘공동경비구역 JSA’가 명필름 대표작이 됐는데요.
⊙심-시작은 작고 순수했는데 개봉 후 엄청난 파장이 이는 걸 보고 영화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외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 다양한 분석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웃으며) 흥행이 좀 덜 됐으면 훨씬 더 진지하게 평가받았을 것 같아요.
 

#5.툇마루
사양(사양).
이은 감독과의 결혼생활이 화제에 오른다.
⊙질문자-생활 전체가 영화에 얽혀 있는 것 같습니다.
⊙심-하루 24시간이 영화로만 꽉 차 있죠.
답답하기도 하지만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입니다.
우리 부부는 영화적 동지애가 99%를 차지할 거예요.
⊙질문자-영화를 빼면 삶에서 뭐가 남을 것 같습니까?
⊙심재명-(잠시 생각한 뒤 또렷하게) 가족이 있습니다.
아이(딸)를 키우는 일은 제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일입니다.
⊙질문자-다음 인터뷰 대상자는 누구를 추천하시겠습니까?
⊙심재명-최근 여성민우회가 ‘아름다운 병원’으로 선정한 ‘은혜산부인과’ 장부용 원장이 어떨까요.
제왕절개율이 전국 최저라는데 그런 신념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6.에필로그
심씨가 대문을 나서는 질문자를 배웅하고나서 화면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내레이션-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으로 대학 시절 프랑스 문화원에서 잔 모로의 ‘사춘기’를 보고난 뒤 안국동 길을 걸어나오던 일을 꼽았다.
초라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 그리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초저녁 정적과 혼재된 그 귀갓길을 그는 잊지 못한다.
보이지 않던 ‘미래’를 투명한 ‘현재’로 만든 시발점은 그 걸음에 있지 않았을까.
조선일보/이동진기자 djlee@chosun.com





새로운 것 같지만 낡았다, 과감하지만 얌전하다, 그것이 내 영화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
2001.03.19 / 오동진, 이지훈 기자  

오랫동안 벼르던 인물이다. 하지만 쉽게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만남은 종종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예상보다 인터뷰는 흥이 나지 않았다. 인터뷰이의 자로 잰 듯한, 준비된 자세 때문이었다. 국내 최고의 프로듀서 심재명 대표와 한밤중에 벌어진 기묘한 대국 한 판. 결과적으로 기자들의 불계패.

오동진 기자 요즘 엄청나게 바쁘다던데, 어떤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나?
심재명 대표 아침엔 딸아이 유치원에 데려다줬다. 회사에선 극성 제작자고 집에선 극성 엄마라서. 스쿨버스도 없는 ‘좋은’ 유치원 보내려니까 매일 난리다. 12시에 누굴 만났는데 그건 비밀이고, 2시에 이은 감독과 또 누굴 만났는데 그것도 비밀이다. 5시에 다시 유치원에 애 데리러 다녀왔다. 그뒤론 계속 회의만 했다.
오 거 참, 비밀도 많다. 누굴 만난 건가? 올해 준비중인 <패스워드>나 <접속 2> 제작과 관련된 사람들인가?
심 그 프로젝트와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회사 운영이나 투자 쪽에 관계된 사람들이다.
이지훈 기자 올해 준비해야 할 작품이 너무 많지 않나?
심 이미연 감독의 <버스정류장>, 또 <패스워드> <후아유>, 전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우선 해외 영화제 출품을 준비하고 있고, <패스워드> <버스정류장> <후아유>는 하반기에 개봉할 거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칸 영화제 진출도 목표로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바쁘네, 정말.
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섬>과 같은 마케팅 전략을 펼 모양이다.
심 그것보다는 좀더 잘해야겠지. 솔직히 <섬>은 마케팅 면에서는 실패작이다. 그 정도로 해외에서 호평받을 줄 알았으면 먼저 해외를 돌고 그 여파로 국내에서 개봉했었으면 좋았을 거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해외에서 먼저 알려지면 국내에서 개봉하는 수순을 따를 계획이다.
이 <섬>의 마케팅 비용은 어느 정도였나?
심 제작비 4억3천만 원에 마케팅 비용은 1억7천만 원이었다.
오 <공동경비구역 JSA>의 일본 개봉 준비도 작은 일이 아닐 텐데.
의 국내 마케팅 비용이 25억 정도였는데 일본에서는 45억 가까이 될 것 같다.
의 대성공이 오히려 앞으로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는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나?
심 글쎄... 솔직히 부담스럽진 않다. 가 기대 이상의 커다란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오히려 공격적인 마케팅이나 제작 라인업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이 명필름 영화들은 모두 명필름만의 특정한 색깔이 있는 것 같다. 심대표 스스로 생각하는 이른바 ‘명필름스러운’ 영화란 무엇인가?
심 새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예전 것과 맥이 닿아 있고, 과감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또 위험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위험한, 동전의 양면 같은 영화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너무 애매한 답인가? (웃음)
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에 서 있다는 얘기인가?
심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처럼 독립영화감독과도 작업했고, <섬>처럼 게릴라 제작방식을 쓰는 김기덕 감독과 일하기도 했고.
이 그게 명필름의 상업적인 전략이라고도 볼 수 있나?
심 아니, 상업적인 전략이라기보다는 나, 이은 감독, 심보경 이사 세 사람의 프로듀서적인 성향이다. 내가 주류 영화계 출신이라면, 이은 감독은 독립영화 쪽에 관심이 많고, 심보경 이사는 광고일을 했던 사람이라 젊은 감각이 있다. 그게 섞인 거다.
오 세 사람이 각각 ‘미는’ 영화가 틀렸을 텐데, 지금까지 개인별 타율은 어떤가? (웃음)
심 (웃음) 개인별 타율이라... 얼마 전까진 내가 제일 높았는데, 이젠 이은 감독이 최고다. 를 하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사람이 이은 감독이다. 는 지금까지의 모든 타율을 잠재우는 장외 홈런이었으니까.
오 심대표는 를 끝까지 반대했었다고 들었다.
심 반대라기보다는 걱정을 했다. 이은 감독과 나는 가치관이 많이 다르다. 나는 개인과 인간에 관심이 많고 이감독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다. 는 이은 감독의 관심 분야였다. 난 상업적으로 불안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감독이 너무 강력하게 주장했고 모든 직원들이 찬성해서 하게 됐다. 나 스스로도 분단문제를 영화로 풀 수도 있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달았고.
오 명필름 내부에서 심대표와 남편 이은 감독, 그리고 동생 심보경 이사의 역할분담은 어떻게 되나?
심 예전에는 이은 감독이 대표였지만 영화진흥위원이 되면서 내가 대표직을 맡게 됐다. 유관단체의 대표는 영진위원 자격이 상실되기 때문에. 이은 감독은 제작이사고, 심보경은 기획이사다.
오 대표가 바뀌면서 회사 분위기도 달라졌겠다. 심대표 주도 체제로 바뀐 거 아닌가?
심 천만에. 예전과 다름없이 모든 것이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까지만 해도 세 사람의 만장일치가 아니면 제작하지 않았지만, <해피엔드>부터는 각자의 성향이나 판단에 믿음을 실어주는 쪽으로 바뀌었다. 각자의 프로젝트를 밀어주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오 가족회사로서 세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다.
심 나나 이은 감독은 잘 모르겠는데, 심보경 이사가 불편할 것 같다. 형부나 언니 눈치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고. 나나 이은 감독은, 가정생활은 몰라도 일에서만큼은 문제 없다.
이 가정생활에는 문제가 있다는 얘기?
심 음... 사실 우리 가정생활은 내가 무작정 희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웃음) 그건 문제다.
오 명필름은 그동안 CJ엔터테인먼트와 공공연하게 파트너십을 유지해 왔다. 최근 제작사들과 투자사들, 배급사들 사이에 파트너 관계가 변하던데, 명필름은 어떤가?
심 변화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CJ엔터테인먼트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한동안 유지될 거다. 변화? 물론 가능하지. 우리도 CJ 전에 <접속> <조용한 가족>은 일신과 함께 일했었다. 하지만 지금 CJ와 잘되고 있다. 문제가 없으니 오래갈 거다. 영화 소프트웨어의 기획은 민첩하게 상황변화에 적응해야 하지만, 배급 같은 하드웨어에선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 지속적인 파트너십이 가져다주는 장점도 있고.
하면서 CJ와 마찰도 있었을 법한데.
심 천만에. 오히려 CJ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CJ의 배급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가 개봉하면서 상승효과가 발휘됐다. 오히려 <섬> 같은 저예산 영화를 배급할 때 CJ와의 의사소통이 모자랐던 부분은 있었다.
오 시네마서비스와 손잡을 의사는 없나? 앞으로도 반시네마서비스 기조를 유지할 건가?
이 분위기 이상하게 몰고 간다. (웃음)
심 음... 사업적인 측면에서 그런 고집을 세우는 것은 안 맞다고 생각한다.
오 그래도 서로 색깔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심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명필름과 CJ의 연대도 사업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해달라.
오 그래도 명필름은 시네마서비스는 마다한다? 한번 적은 영원한 적이다? (웃음)
심 정말 아니라니깐. 함께 일할 필요성을 못 느낄 뿐이지 파트너 관계의 가능성은 늘 열려 있다.
이 그동안 실패한 작품이 거의 없었다.
심 꼭 그렇지도 않다. 첫 작품이었던 <코르셋>은 새로운 소재의 시도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았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도 흥행 면에서 기대에 못 미쳤으니까 실패한 셈이다.
오 어쨌거나 굉장한 성공이다. 요인이 뭘까?
심 '가족회사'에서 오는 장점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판단의 연속인데 혼자 일하는 제작자는 외로울 것 같다. 삼각형을 이루는 명필름의 구조가 심적 부담을 덜어주고 서로 보완을 해주는 것 같다. 일하는 스타일에선 목표나 전략보다 합리적인 과정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게 또다른 이유가 아닐까. 과정상의 누수를 막고자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이 직원들한테 가장 인기가 있는 사람은 심대표, 이감독, 심보경 이사 중 누군가?
심 심보경 이사다. (웃음) 직원들 모두 이감독과 나는 싫어한다더라. 이은 감독은 속으로는 아니지만 일할 때만큼은 냉정한 편이고 나는 무뚝뚝하다. 그러니 직원들이 좋아할 리 없지. 일은 열심히 하는데.... 사실 이사진이 너무 열심히 하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사가 너무 열심히 하니까 직원들이 부담을 느낀다. 사람 관리와 인재 발굴의 측면에서는 문제다.
이 직원은 전부 몇 명인가?
심 18명 정도?
이 그중 여자는?
심 이상한 질문이네. 인터넷 팀에는 남녀 1명씩. 제작부엔 남자가 더 많고, 이번에 새로 뽑은 직원은 5명 모두 여자였다.
이 항간에 명필름은 여자만 뽑는다는 얘기가 도는데, 그건 아니다?
심 당연히 아니다. 봐라, 남자 직원도 많다. 이번 채용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다.
오 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겠다.
심 많이 벌었다.
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로 따져서 몇 편 정도 제작할 수 있는 돈을 모았나?
이 그러면 얼만지 다 알 수 있지 않나?
심 평균 제작비가 얼만데? 글쎄, 몇 편일까. (웃음) 사실 아직 의 해외 개봉이 끝나지 않은 터라 그 영화가 얼마를 더 벌어줄지 나도 모르겠다. 이번에 일본에서도 크게 개봉하지만 좀 걱정된다. <쉬리> 이후 가장 크게 벌이는 거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수준의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니까. 자막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서도 있고 플롯도 복잡한 편이라.


오 영화계에서 활동한 지 참 오래 됐다.
심 87년 서울극장 기획실 입사부터니까 벌써 15년?
이 지금까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작품수가 몇 편이나 되나?
심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단지 타율이 높다는 것만 기억한다.
이 제작현장에 나가는 걸 좋아하나?
심 자주 나가고 또 재미있어하는 편이다. 하지만 현장에만 가면 흥분해서 날뛰는 타입은 아니다.
이 현장에선 묵묵히 지켜보는 편인가, 아니면 감독이나 프로듀서에게 간섭하는 편인가?
심 외곽에서 지켜보기만 한다.
오 하지만 편집할 땐 감독한테 많은 걸 요구하고 간섭한다던데.
심 인정한다. 예전에는 감독이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강요를 많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성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엔 좀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오 김지운 감독하고는 어땠나? 한 편만 하기에는 아까웠을 텐데.
심 사실 <조용한 가족> 끝나고 나서 한 편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김지운 감독이 아이템을 제시하지 못했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같이 하고 싶은 감독은 많았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박찬욱 감독과도 한 편 더 하고 싶었을 텐데, 다른 곳에서 한다는 얘기 듣고 섭섭하지 않았나?
심 전혀. 다음에 또 언제라도 같이 할 수 있고. 본인의 판단에 따른 결정일 뿐이다.
이 지금까지 명필름에서 두 편을 한 감독이 없다. 전부 한 편이다. 특이한 이력이다.
심 그렇다. 명필름은 인간관리라는 측면에서는 낙제인 셈이다.
오 사실 <접속>의 장윤현 감독이나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 같은 경우에는 다 명필름 제작 영화로 단번에 ‘뜬’ 셈이다. 그럼 인지상정으로라도 명필름과 한 번 더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심 그런 거 바라지 않는다. 감독과 제작자의 관계는 작품에 대한 의견과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누구 때문에 컸다는 둥 '의리'의 문제가 아니다. 비즈니스다. 단지 결과적으로 작업과정에서 감독들에게 지속적으로 같이 작업할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점은 반성한다.
이 감독들에게 다시 한번 하자고 먼저 제안을 했는데도 안 된 건가?
심 매번 제안했지만 결국.... (웃음)
오 첫 작품 성공 이후 다음 작품에서 감독 개런티 비율에 이견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심 그런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이 스탭들에 대한 대우는 어떤가?
오 우리 지금 명필름 감사중? (웃음)
심 다른 제작사에 비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합리적인 제작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고, 스탭들이 선호하는 회사라고 생각한다.
오 개인적으로 집착한다거나 꿈속에 나타나는 영화는 없나? (웃음)
심 <접속>. 캐스팅이나 제작비 마련이 제일 어려웠던 영화니까. 또 명필름이란 회사가 있기까지 반석이 된 영화고.
이 한 작품 끝나면 아쉬움 다 털어버리고 다음 작품에 몰두하는 성격인가?
심 성격이 과거집착형이라 잘 털어내지 못한다. 늘 생각하고 시달린다.
오 15년 영화 경력 동안 포기하지 않고 참 꾸준히 해왔다. 원동력이 뭔가?
심 재미있으니까. 야심이나 거시적인 안목 때문이라기보다는 영화 만드는 보람이나 책임감 때문이다.
오 영화계는 다른 직종에 비해 성차별이 적은 분야 같다.
심 그렇다.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좌우되는 분야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최종 의사 결정자는 남성이 훨씬 많다.
이 첫 영화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꼬집은 <코르셋>이었다. 여성 제작자가 영화사를 차려 처음 만드는 영화로 그런 소재를 택했다는 건 명필름의 모토에 대한 편견을 형성할 수도 있었을 위험한 선택이었다.
심 전혀. <코르셋>을 통해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 소재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결혼한 직후였는데 시장에 갔다가 뒤에서 누가 날더러 아줌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난 아줌마였고 당연히 아줌마처럼 보였던 건데. 그래서 여성의 외모 때문에 벌어지는 스토리가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오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나?
심 여성학적 이론가까지는 아니고 단지 관심이 많을 뿐이다.
오 영화 기획에 그런 면이 영향을 미쳤나?
심 적지 않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그랬다.
오 그에 반해 <섬>은 의외의 선택이었다.
심 사실 <섬> 때문에 벌어진 페미니즘 논쟁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 영화는 결코 여성을 강간의 대상으로 본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여성문제를 떠나서도 <섬>은 의외의 결과였다. 이은 감독이 좋아하는 사회적인 영화도 아니고.
심 <악어>나 <파란 대문> 같은 김기덕 감독의 전작을 좋아하던 시점에서 우연히 의기투합하게 된 결과였다. 이은 감독이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데, 김기덕 감독이 낚시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관심을 보였고 곧바로 진행된 것이었다. 나로선 주류 영화를 만들며 갖게 될지도 모를 매너리즘을 피해간다거나 김기덕 감독의 게릴라 제작방식을 배워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난 끝까지 결사반대했다. 제작비 회수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결과적으로는 <섬>으로 인해 내 자신의 제작자로서의 태도에 대해 많이 반성했다.
오 준비과정에서 김기덕 감독과 의사소통이 힘들었다던데.
심 아니다. 애초부터 감독의 의견을 중시하겠다고 마음먹은 프로젝트였으니까. 적은 돈이지만 합리적으로 잘 써보자고 했다.
오 하지만 전작들에서는 감독과의 긴장이 늘 있지 않았나? <조용한 가족> 때도 그렇고.
심 그건 사실이다. 김지운 감독이 인터뷰에서 “도망가고 싶었다”고 말한 것을 듣고 정말 놀랐다.
오 <해피엔드> 때는 최민식씨와 소원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최민식씨가 <해피엔드>와 관련해서는 절대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말도 했었고.
심 소원해졌던 건 아니다. 다만 편집과정에서 자꾸 영화의 뉘앙스가 변하는 걸 보고 최민식씨가 속상해서 그런 얘기를 한 거다.
이 보통 몇 시에 퇴근하나? 이은 감독은?
심 일찍 들어갈 땐 8시, 늦을 땐 11시나 12시. 이은 감독은 언제나 나보다 늦게 들어온다.
오 이은 감독이 밤에 어디서 뭘 하는지 늘 파악하고 있나?
심 모른다. 각자 일 보고 집에서 만난다.
이 10시나 11시쯤 이은 감독한테 어디 있느냐고 전화하고 그러지 않나?
심 (웃음) 전화 안 한다.
오 그렇게 되나? 서로 각자에게 믿음이 있다는 건가, 아니면 무관심하다는 건가?
심 서로의 영역이 분리돼 있고 저녁엔 늘 그 일을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성 영화인 모임에 나가고, 이은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나 영화인회의에서도 할 일이 있고.
오 이은 감독한테서 어떤 매력을 느껴 결혼하게 됐나?
심 <파업전야>나 <오! 꿈의 나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걸 보고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아, 영화를 저렇게도 하는구나라는 생각. 논리적이고 말 잘하는 점도 좋아했다.
오 이은 감독의 성향 자체가 늘 ‘운동’을 해야 하는 쪽 아닌가?
심 그렇다. 난 내가 잘되면 나라도 잘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이은 감독은 나라가 잘돼야 내가 잘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 영화계에서 친한 인물은 누군가?
심 사실 교우관계가 별로 없는 편이라... 많이 얘기하는 사람은 황기성사단의 황기성 대표다. 요즘도 자주 찾아뵙고 얘기를 나눈다. 황대표님한테 영화일을 처음 배웠다고도 할 수 있다. 올댓시네마의 채윤희 대표하고도 친하고.
오 같은 또래인 영화사 봄의 오정완 대표나 시네마서비스의 지미향 이사, 좋은영화의 김미희 대표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심 남자끼리도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은 많다. 근데 왜 여자끼리 안 친하다면 그렇게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가?
이 오선배, 그거 성차별주의적인 발언이야. 이은 감독과 영화 얘기 외에도 대화를 나누나?
심 거의 없다. 그래서 불화가 없다. 사소한 가정일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오 15년 동안 영화일을 해왔고, 집에서도 영화 얘기만 하고, 밖에서도 영화인만 만나고. 영화가 인생의 전부인가?
심 그렇지 않다. 난 매우 가정적인 사람이다.
이 쉴 땐 뭘 하나?
심 영화 본다.
오 정말 못 말리겠군.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행복한가?
심 글쎄... 워낙 비관주의자라서. 난 기쁜 일이 있어도 크게 기뻐하지 못한다. 늘 행복하다고 느끼며 사는 편은 아니다. 다만 영화일 하면서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는 정도다. 이거면 답이 될까?
필름2.0      정리: 신기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