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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이야기

사/ㅣ 2007. 3. 5. 04:15 Posted by 로드365
아, 그렇구먼...



십일조 헌금에 대하여

흔히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 교회는 아주 부자 교회입니다. 언제나 돈이 남아돕니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하고요. 남편은 실직했고, 큰딸애가 벌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합니다. 그런데도 꼭 십일조를 교회에 드려야 하나요? 전도사님께 물었더니 그럴수록 더 열심히 십일조를 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또는,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지 않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면 안 되나요?”

“십일조를 교회에 드려야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며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십일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다.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것을 교회에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 한편에서는 물질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십일조는 반드시 드려야 하는 것이며, 예수를 믿으면서도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아주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나서부터 축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어느 부자 장로님은 돈이 아까워 십일조 헌금 드리기를 게을리 했더니 그만 쫄딱 망하고 말았다는 간증도 꽤나 많이 들었다.

과연, 십일조란 그런 것일까?

자, 십일조에 대해 알아보자. 사람들이 입으로 하는 간증이 아니라, 성경은 십일조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구약 시대의 십일조에 대해 알아보자.


구약 시대의 십일조

말라기 3장 8-10절의 말씀

많은 목사님들이 십일조 내기를 강조할 때, 즐겨 인용하는 말씀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되어 저주를 받게 된다. 반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내려 주신다.

말씀 그대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요, 성도로서 당연히 드려야 하는 것이요, 또 안 드리면 저주를 받고 드리면 복을 받는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 것이다.

그러나 말라기의 이 말씀은 우리 신약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구약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인 것이다.

자, 창세기 14장 18-20절의 말씀을 보자.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성경 말씀 중에서 최초로 나오는 십일조 이야기이다.

자, 이 말씀을 좀 풀어보자. 성경은 풀어야 그 참 뜻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성경의 참 뜻을 깨달아 알아야 하나님을 믿어도 바르게 믿을 수 있고, 현금을 드려도 제대로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살렘왕 멜기세덱에 대해 알아보자.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원래는 여부스 족의 성읍으로 이름은 살렘이라 하였다. 주전 1000년경에 다윗에 의해서 점령당한 후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즉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인 것이다.

그럼, 멜기세덱은 누구나?

히브리서 7장 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이 누군가? 그는 구약 시대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이며,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님의 그림자이다. 그는 살렘의 왕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이다. 살렘 왕 멜기세덱은 하늘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그림자인 것이다.

이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떡과 포도주를 준다.

떡과 포도주 = 예수님의 살과 피

아브람이 누군가? 믿는 자의 조상, 구원받은 자의 조상, 영적 이스라엘이다. 아브람의 후손인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의 피로 죄를 씻어 주시고, 그의 살을 먹여 영생을 주신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축복하였을 때, 아브람은 그 얻은 것 중에서 십분 일을 그에게 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람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복을 받아 그 얻은 것 중에서 드린 것이다. 또 멜기세덱의 축복 기도를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린 것이 아니라, 그의 축복 기도를 받고 난 후에 드린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아브람이 드린 십일조는 축복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축복을 받은 대가로 드린 것이다.

다시, 창세기 28장 20-22절의 말씀을 보자.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위 말씀은,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에서의 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을 찾아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해가 저물어 길가에서 돌을 베개하고 자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다음, 그가 하나님께 드린 서원의 말이다.

야곱은 말한다. 하나님이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시고 편안히 아비 집에 돌아오게 해 주신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여기서도 십일조란, 축복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은 대가로 드리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 즉 족장 시대, 이스라엘이 애굽 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십일조는 축복 받기 위해 드린 것이 아니라, 받은 대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축복 받은 대가로 드리던 십일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보답으로 드리던 십일조가 율법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차츰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즉 십일조가 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변해 가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보자.

신명기 14장 28-29절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또 신명기 26장 12-15절의 말씀

“제 삼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 할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고하기를 내가 성물을 내 집에서 내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기를 주께서 내게 명하신 명령대로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명령을 범치도 아니하였고 잊지도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애곡하는 날에 이 성물을 먹지 아니하였고 부정한 몸으로 이를 떼어두지 아니하였고 죽은 자를 위하여 이를 쓰지 아니하였고 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였사오니 원컨대 주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하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복을 내리소서 할지니라”

이 말씀으로, 십일조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방법 내지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족장 시대에는 복을 받은 대가로 드리던 십일조가 율법 시대에 와서는 복을 받는 수단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족장 시대에는 율법이 없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다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 복을 받았다.

그러나 율법 시대에는 율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 그리고 십일조도 율법의 하나가 된 것이다. 율법 시대에는 율법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십일조도 율법의 하나이다. 따라서 율법에 따라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고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율법은 하나도 지키지 않고 오직 십일조만 드린다고 해서 복을 받지는 않는다. 그는 다른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로 인하여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십일조 뿐 아니라, 모든 율법은 그것을 지키면 축복이요, 지키지 않으면 저주인 것이다. 각별히 십일조만 지키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포함해서 모든 율법은 이것을 지키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형벌 내지는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명기 28장 1-68절의 말씀은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요는, 십일조도 율법의 하나요 따라서 다른 모든 율법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다른 모든 율법도 십일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지키면 복이요 지키지 않으면 저주인 것이다. 각별히 십일조만이 그것을 지켰다고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닌 것이다.

지금도 많은 목사님들이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고 말라기 3장 8-1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소리 높이 외친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복을 받으십시오.”

그러나 이 말라기 말씀은 구약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인 것이다. 만일, 이 말씀대로 지금 우리가 십일조를 드려야 복을 받는 것이라면, 또한 우리는 다른 모든 율법도 함께 지켜야 한다. 말라기의 말씀을 따라 십일조를 드려야 복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율법도 다 지켜야 하고, 아무리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도 다른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저주를 받고 말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은 완성되었고,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모든 구약의 율법은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내면 축복을 받고, 내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외치는 목사님들은 우리를 데리고 구약 율법 시대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십일조라고 하는 구약 시대의 율법으로부터도 물론 해방되었다. 십일조를 드린다고 각별히 복을 받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각별한 저주를 받는 것도 아니다.

잠깐 여기서, 구약 시대의 십일조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그래야 십일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확실하게 알아야 그것을 근거로 해서 확신을 가지고 내든지 말든지 할 수 있다.

구약 율법 시대에,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어디에 어떻게 사용되는 것일까?

민수기 18장 21절의 말씀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는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주어진다.

다른 말씀을 보자.

신명기 14장 22-27절의 말씀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십일조는 절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서 가족들이 함께 먹는데 사용된다. 그리도 성전에서 일을 하지 않는 레위인들에게도 주어 함께 먹고 즐긴다.

또 말씀을 보자.

신명기 14장 28-29절의 말씀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십일조는 분깃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 과부들을 구제하는데 사용된다.

결국, 구약 시대의 십일조는, 그 삼분의 일은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에게 주어지고, 삼분의 일은 매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가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 사용되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곡간에 모아 두었다가 객, 고아, 과부, 분깃 없는 레위인을 구제하는데 사용된다.

만일, 지금 우리가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 말라기에 기록된 십일조와 같은 것으로, 그것을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드리면 축복을 받고 안 드리면 저주를 받는 그런 것이라면, 드린 십일조도 또한 구약의 십일조처럼 그렇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곧 일년 동안의 수입을 다 합계해서 그 십일조를 떼어 그 중 삼분의 일은 교회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의 생활비로 드리고, 삼분의 일은 교회에 나와서 함께 즐기며 친교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 남지 삼분의 일은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사용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교회는 어디에도 없다.

앞에서 인용한 신명기 14장 22-29절의 말씀에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다.

“....하라 그리하면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주시리라”

말하자면, 십일조는 드리기만 하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용하여야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대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느헤미야 13장 10-12절의 말씀을 보자.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그 처소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수축되고, 성전이 정비되어 다시 율법이 선포되고 그때까지 끊겼던 십일조가 다시 드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느헤미야의 부흥 운동도 잠시요,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또다시 안일에 빠지고 십일조 드리는 일에도 게을리 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몇 해씩 가뭄이 계속되었고, 밭의 소출은 줄어들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저버리셨기 때문에 비를 내려주시지 않는 것이라고 불평을 말하며 더욱 십일조 드리는 일을 게을리 했다. 갈수록 성전은 퇴락하고, 레위인들은 다시 성전을 떠났다. 이때, 말라기 선지가 나와 외치게 되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지 않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하나님을 믿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비를 내려 주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실 것이란 말씀이다.

여기서 말라기 선지가 말씀하신 십일조는, 전체 십일조 중 그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레위인을 위해 성전 곡간에 드리는 십일조였다. 아마도, 당시 백성들의 삶이 너무나 어려워서 십일조의 다른 두 가지, 성전에 올라갈 때에 사용하는 비용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는 아마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어째했거나, 백성들은 말라기 선지의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이나 유대 땅에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다.

이때, 유대교가 나타난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율법주의 바리새인들이 나온다.

누가 복음 18장 11-12절의 말씀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을 철저하게 지키며 그 중에서도 각별히 온전한 십일조 드리기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 조문에만 얽매인 나머지 율법의 정신을 잊고 말았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의 말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지키게 하신 것은 율법을 통해 우리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해서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조문 하나하나는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외형적인 조문에만 얽매이고, 십일조를 드리는 그 행위에만 붙들려서 그 안에 숨어 있는 더 귀한 것 곧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엄격한 십일조를 드리고 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들의 의를 밖으로 나타내며 자랑하려고 하였다.

구약 율법 시대에, 왜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게 되는 것일까?

십일조를 드리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시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 시대 구약 교회에서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그 드린 물질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 알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물질을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십일조 드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했기 때문인 것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복을 받으시기 빕니다.”

이렇게 외치는 요즘의 그 십일조는 도대체 무슨 뜻을 가진 십일조일까?

바리새인들의 십일조가 원래의 뜻인 의와 인과 신을 저버린 외형적이요, 자기들의 의를 자랑하기 위한 십일조였다면, 지금의 십일조, 드리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부어 주신다고 하는, 지금의 우리나라 목사님들이 외치는 그 십일조도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와 인과 신의 실천을 위한 십일조는 분명 아니다. 의와 인과 신을 위해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오직 물질 축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이기 때문이다. 돈을 드려 더 많은 돈을 얻어내겠다는 지극히 타산적인 십일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보다 나을 것이 없다. 한층 더 저속한 뜻의 십일조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십일조를 기뻐하실 리가 없다.

욥기 41장 1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받으시고 더 많은 물질로 갚아 주시니 하나님께 물질을 드려 더 많은 물질 축복을 받아라, 라고 말하는 자가 누구냐? 이 천하가 다 나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이 내게 무엇을 바친단 말이냐, 라는 뜻이다.

또, 욥기 38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이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약 교회에서는 십일조는 없어져야 하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율법적 십일조는 없어져야 하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십일조의 참 뜻은 그대로 살아서 신약 교회로 이어져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십일조

십일조의 원 뜻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의 실천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의와 사랑과 믿음의 실천이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곧 십일조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십일조의 기본적인 뜻은 잊고 단지 소득의 십분의 일을 교회에 드리는 것이 십일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의 원 뜻은 잊고 오직 십일조 드리는 것 자체를 자랑하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거르지 않고 드리는 것으로 자랑으로 여기기도 한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는, 소득 중 십일조만 드리면 나머지 십의 구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된다. 소득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이것을 드리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란 생각은, 뒤집어 보면, 나머지 십 분의 구는 모두가 나의 것이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소유라는 뜻이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 앞에 나와 묻는다.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

“어느 계명이오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신 계명이니라”

청년이 대답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

이 부자 청년은 위 계명들 뿐 아니라, 십일조도 아마 충실히 드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재산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재산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나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질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나의 소유를 나누어줌으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하늘에서 상급이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약 교회의 십일조인 것이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려서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 율법 시대의 십일조라고 한다면, 소득의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나의 모든 소유를 팔아 의와 인과 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신약 시대의 십일조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하늘의 상급이 있게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6장 9-12절의 말씀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이 말씀을 풀어 보자.

먼저, 불의한 재물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남의 것을 몰래 도적질 해 온 재물이 불의한 재물인가? 아니면 불의한 짓을 해서 부당하게 이익을 본 재물이 불의한 재물인가?

아니다.

불의한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물,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재물,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재물을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내 뜻대로 사용하고자 혼자 움켜쥐고 있는 재물이 바로 불의한 재물이다.

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물 중, 먹고 입고 그리고도 남은 재물을 나의 육신의 쾌락이나 연락을 위해 물 쓰듯 쓰고 있는 재물이 불의한 재물이다.

구약 시대에는 모든 소득 중 십일조만 드리고 나면 나머지 십의 구는 다 나의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나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재물을 다 하나님 뜻에 따라 사용해야할 의무를 지닌다.

나의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단지 그의 청지기일 뿐이다. 그런데, 그 재물을 “나의 것이요” 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고 잔뜩 움켜쥐고 있는 재물이 바로 불의한 재물인 것이다.

내가 정당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은 사람의 눈으로는 다 정당한 나의 소유이다.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나 개인의 소유이다. 그러나 하나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이 나에게 임시 맡기신 것으로 보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재물을 “나의 것이요” 하고 움켜쥐고 있는 재물이 바로 불의한 재물인 것이다.

율법 시대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하나님 뜻에 따라 사용하지 않고 제 뜻대로 사용하려고 제 것으로 갖고 있는 재물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그래서 불의한 재물이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불의한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그들을 너희의 친한 친구로 만들어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곧 재물도 없어지고, 이 땅도 소멸되어 없어질 때에, 그들이, 그 가난했던 자들을 네 친구로 만들었던 그 사실이, 너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인 것이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내가 불의한 재물, 곧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맡기신 재물을 하나님 뜻에 맞게 충실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늘나라의 귀한 직분도 나에게 맡겨주시지 않을 것이란 말씀이다.

마태복음 19장 27-29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또, 마태복음 25장 달란트의 비유 중 19-21절의 말씀.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달란트의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을 주인의 뜻대로 사용하였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뜻에 반하여 그것을 땅에 묻어 둔다.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기고 만다.

28-30절에서 예수님은 그 무익한 종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한 종은 작은 일에 충성된 자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귀하고 큰 직분을 받게 된다. 반면, 한 달란트를 받아 그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둔 종 곧 작은 일에 충성치 아니한 종은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기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작은 일로 우리를 시험하시고 그 작은 일에 우리가 충성을 다 했을 때,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큰 직분을 주신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작은 일에서조차 충성하지 않았을 때에는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기고 마는 것이다.

땅 = 육신

달란트를 땅에 묻다 =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자신의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다. 오직 땅이 용도로만 사용하다,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다”

있는 것 =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

작은 일에 충성치 않는 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리마저 빼앗기고 어두운 데로 떨어지고, 그 곳에서 후회하며 이를 갈고 슬퍼하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을 믿어 얻은 구원받을 권세를 빼앗기고 어두운 곳으로 떨어지고 만다.

다시 누가복음 16장 12절의 말씀.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해석하기 어려워 보이는 이 말씀의 뜻은 이렇다.

우리들이 남의 것 곧 하나님의 것에 충성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물을 하나님 뜻에 따라 사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의 것,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려야 할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리란 말씀이다.

본문 중에서,

“남의 것”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것. 이것은 “내 것 아닌 남의 것”이다.

“너희 것”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받아야 할 것. 하늘나라에 들어갈 권세와 그곳에서 받을 상급과 귀한 직분.

땅에 있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늘에 있는 신령한 것들은 다 내 것이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다시 한 번 말하자. 땅에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신령한 것이 다 내 것인 것이다.


이제 결론을 내리자.

십일조란 무엇인가?

구약 율법 시대에는, 소득 중에서 십의 일만 드리면, 나머지는 다 나의 것이요,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의 소득 중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요, 십 분의 구는 나의 것이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그 드린 자에게 복을 주셨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십일조 뿐 아니라 모든 율법이, 행하면 복을 받고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율법은 하나도 지키지 않고 십일조만 드린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다른 율법도 다 지키고 십일조도 드려야 복을 받는 것이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단 십일조뿐 아니라, 모든 율법은 그것을 지키면 다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엄격하게 드렸다. 그러나 그들의 십일조는 의와 인과 신을 저버린 형식적, 외형적인 것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십일조를 드린다는 그 자체에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을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간적 의를 밖으로 들어내 보이기 위해 드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다.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 율법적 십일조는 없어졌다. 다른 모든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어 소멸된 것처럼, 율법적 십일조도 없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소득의 십 분의 십이 다 나의 것인가? 아니다. 나의 모든 소득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나의 소득 중 내 육신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을 자고 그 밖의 활동에 필요한 지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께서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라고 나에게 임시 맡기신 하나님의 것인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것이 신약 시대의 십일조인 것이다.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고 혹은 목사님께 갖다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물질 복을 받겠다고 하는 그런 십일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먼 나라의 알 수 없는 이방 신의 십일조인 것이다. 성경에는 그런 십일조가 없기 때문이다.

율법 시대의 십일조라도 그것을 백성들이 제사장이나 장로들에게 갖다 준 것이 아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직접 과부나 고아, 분깃 없는 레위인에게 주었고,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을 위해 성전 곡간에 직접 가지고 가서 쌓아 놓았고, 또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비용과 성전에 드리는 제물과 그리고 함께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물질로 사용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구약 율법 시대의 십일조란, 모든 소득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고, 혹은 목사님에게 갖다 드리고, 그 드린 십일조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소비되고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 십일조를 드린 사람에게 물질 축복을 주시는 그런 십일조는 적어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속에는 없다. 그런 십일조는 교회에 드리고 목사님에게 드리는 “돈”이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는 아닌 것이다.

교회가 받은 십일조 헌금을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사용한다고 한다면 교회에 드린 십일조 헌금은 곧 하나님께 드린 것이 된다. 그러나 교회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그 드린 십일조 헌금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교회에 드린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린 것과 교회에 드린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슬기로운 성도들은 알아야 한다.


또 다른 십일조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 헌금이 다 옳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지금 우리 교회에서 걷고 있는 십일조 헌금은 나름대로 합당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그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필요한 비용 내지 경비가 발생하는데, 이런 비용은 그 모인 사람들에 의해 갹출되는 것은 또한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교회도, 이 지상 교회에서는, 다른 모든 세상의 집단이나 조직체처럼, 그 조직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소요되는 경비를 필요로 한다. 이런 비용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 나누어 부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또 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비용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소득에 비례해서 분담하는 것은 참으로 합리적이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드리고 있는 십일조 헌금을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성도들의 당연한 의무이며 또한 교회로서는 신도들을 향해 내라고 당당하게 강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 것이다. 이런 십일조는 말라기의 십일조와는 다른 십일조이며, 드리기만 하면 물질 축복을 부어 주신다는 그런 십일조와도 다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회는, 재물을 드리면 축복을 받는다는 이방의 우상 숭배적 헌금 개념에 말라기의 말씀으로 옷을 입혀 이것을 십일조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교회는 보다 많은 헌금을 걷어 들이고 싶은 욕심에서, 신도들은 신령한 하늘의 축복보다는 눈앞의 물질적 축복, 땅의 축복을 받고 싶은 욕심에서 이상야릇한 십일조가 생긴 것이다.

자, 이제는 눈을 뜨자. 영의 눈을 크게 뜨고 바로 보자. 이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바라보자.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고, 다시 말해, 교회에 물질을 드리고 하나님께 드렸다고 믿을 때, 하나님이 때때로 물질로 갚아주시는 것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물질 뿐 아니라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고 땀을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로 눈에 보이게 갚아 주신다. 누군가의 손을 통해 필요한 물질도 주신다. 어려운 가운데서 십일조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 금액의 갑절로 갚아주셨다는 간증을 여러 번 들었고, 또 비슷한 체험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물질을 드렸기 때문에 물질로 갑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아직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물질은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은 결코 잘 먹고 잘 살라고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도구로서 주실 뿐인 것이다.


정봉화씀 <부르는 소리> 4부 증에서


출처 : http://blog.daum.net/lovelamp/1136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