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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혹은 내일 나는 상당히 낙천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현재가 제일 좋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다. 배우로서도 계속 나아길 거라는 희망이 있고. 외모로 보았을 때는 서른살 때쯤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던 때가 아니었을까.
- 장만옥 인터뷰 한 대목 -






장만옥 스토리, 아직 우리를 설레게 하는..  



장만옥이 왔다. <영웅>과 함께, 좁다란 홍콩의 골목에서 빠져나와 중국의 산하를 비상하며 ‘날으는 눈’(飛雪)이 되어. 1984년 데뷔한 뒤 20년간 스쳐간 수많은 영화 속 편린에 비쳐진 장만옥에 대하여, 뜨거운 완탕국수를, 기름묻은 닭고기를, 파인애플이 끼워진 소시지 꼬치를, 무언가를 오물거리며 먹을 때 가장 사랑스럽던 그녀의 입술에 대하여. 그 치명적인 매혹에 대한 보고서.

순수의 수동, 거부할 수 없는 몸짓

“마스크는 왜 하지?” 주눅든 어깨에 얼굴을 가릴 듯 큰 마스크를 쓰고
문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유덕화는 묻는다. “…사람들에게 전염될까봐서요.”
- <열혈남아>
“이 콜라 얼마지?” 숨막힐 듯 더운 여름, 체육관 매점에 박제된 듯
고개 숙인 여자에게 장국영이 묻는다. “
… 병값 빼고 20원이에요.”
- <아비정전>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죠?” 한쪽 빰에 흉터를 가리기 위해
귀와 얼굴을 칭칭 감은 거리의 여자에게
제레미 아이언스가 묻는다. “신경쓰지 마세요.”
- <차이니스 박스>
“안녕하세요. 옆집에 사시죠?” 단단하게 쌓아올린 성벽처럼
목 끝까지 치파오의 깃을 올린 채 좁은 계단을 오르는
부인에게 양조위가 묻는다. “아… 네….”
- <화양연화>

주성치가 한 영화에서 “내 소원이 장만옥의 가슴을 보는 것”이라고 농담을 했을 만큼, 영화 속의 장만옥은 늘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존재다. 마른 편이지만 나약해 보이지도 여성적인 선을 잃지도 않는 그녀의 육체는 주물처럼 부어넣은 듯 온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라텍스 의상을 입고 파리의 지붕 위를 달리는 <장만옥의 이마베프>에서 그 ‘고혹한 보석’(慢玉)의 진가를 발휘하지만 좀처럼 검은 코스튬은 그녀의 살갗을 떠나지 않는다. <영웅>에서 하늘로 치솟는 듯 아이라인을 강조한 눈매로 처음 등장하는 ‘비설’ 역시 붉게 휘날리는 휘장 사이에 가려져 어른어른 그 모습을 허락할 뿐이다.
<열혈남아>를 찍을 당시 왕가위는 “연기가 미숙했던 장만옥에게 많은 대사는 스트레스로 작용할 거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사를 지우는 대신 “장만옥이 온전히 자신의 몸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집중할수 있도록” 지도했다. 쫑알거리는 대사 대신 아무런 의지없는 손놀림으로 60년대 젊은이의 허무와 무료를 드러내며 단련되기 시작한 장만옥의 ‘보디랭귀지’는 실로 매염방, 양자경 등과 3인의 여협으로 등장했던 두기봉의 <동방삼협>를 비롯해 발레 동작에 가까운 무술을 보여주는 많은 무협극에서나 성룡표 오락물에서도 몇백 마디 대사보다 더 확실히 그녀를 표현하는 무기로 자리잡았다.

특히 <화양연화>에서의 장만옥은 서양 배우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도저히 분석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리듬감을 몸 안에 품은 채 걷고, 말하고, 웃는다. 마치 오우삼이 주윤발의 우아한 거동에서 신화적 기운을 발견했던 것처럼 왕가위는 장만옥 몸에 흐르는 기묘한 리듬감을 간파해낸 것이다. 플루트같이 긴 목선에서 떨어지듯 흐르는 팔의 선, 뻗은 종아리에서 무릎으로, 다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며 굽이치고 휘감기는 그 아찔한 선의 매혹은 마릴린 먼로식의 뇌쇄가 아니라, 장만옥만의 고혹적인 자태로 자리잡아 우리의 시선을 그녀가 사라져가는 골목 끝까지 눈이 시리도록 응시하게 만든다.

관금붕: “데뷔 초, 완령옥이 등장한 영화의 대부분은
전통물, 로맨스, 괴기물투성이였어요.
그녀에겐 늘 평범한 역할만이 주어졌죠,
말하자면 들러리였죠. 그러다 1929년 리엔화 감독을 만난 뒤에
그녀는 비로소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어요.”
장만옥: “음… 나와… 비슷한데요?”
- <완령옥> 중

1983년 미스홍콩으로 발탁되고 대회 2주 뒤에 첫 번째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은 장만옥의 배우인생은 시작부터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가속을 품은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배우가 된다는 것에 대해, 내가 배우라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때였어요. 그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게 좋았고, 비서 같은 일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는 게 좋았을 뿐이죠. 오히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헤어 드레서였어요.” 귀여움을 발산하던 <개심귀3-개심귀당귀> 같은 코믹물이나 늘 찡찡거리는 성룡의 장식품 같은 여자친구로 등장했던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꽃병처럼 예쁘게 놓여 있는 역”이나 “입을 크게 벌리고 토끼처럼 놀란 표정의 리액션만 반복”했던 그녀를 두고 평론가들은 ‘감정의 부족상태’라고 비난했다. 예쁜 얼굴로 잠깐 피었다 한철이 지나면 지고 마는 여느 아이돌 스타들의 예정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특별히 좋아했던 기억은 없어요. 연기를 시작한 이후에도 영화에 대해 관심을 두진 않았었죠. 진짜 진정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배우가 된 지 3, 4년 뒤 왕가위를 만난 이후였죠.” 자신의 영화적 스승을 꼽아달란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왕자웨이”(왕가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는 내 속에 있는 일종의 문을 열어준 사람이었어요. 연기란 그저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퍼올리는 작업이란 것을 일깨워주었죠. 내가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무언가를, 단지 얼굴과 눈이 아닌 모든 몸이 따라가는 연기 말이에요.”
“미스홍콩에 뽑힌 장만옥을 보고 당시 많은 감독들은
그녀가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가
좋은 배우가 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관금붕)



데뷔작 <열혈남아>로 장만옥과 처음 인연을 맺은 왕가위는 장만옥에게 영화적 식견을 넓혀주었을 뿐 아니라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자의식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 또한 그동안 액션, 코믹물의 밝은 조명 아래 편편하고 귀엽게만 느껴오던 장만옥의 얼굴 역시 왕가위의 어두운 공간에 놓이면서 툭 불거진 광대뼈와 거칠게 꺾인 턱선이 동그란 눈매와 볼선을 따라 묘한 긴장와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었다. 결국 상업적인 큰 성공을 얻진 못했지만 왕가위의 <열혈남아>를 거쳐 장만옥을 “재발견”한 관금붕은 1989년 자신의 작품 <인재뉴약>에 그녀를 캐스팅하기에 이른다. 뉴욕이라는 거대도시의 공기에 눌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홍콩 출신 레즈비언 아교 역으로 출연한 장만옥은 그해 대만 금마장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따내고 이어 매염방으로 내정되어 있던 <완령옥>의 주인공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종종 그레타 가르보에 비교되기도 했던 무성영화 시대 중국 최고의 여배우였지만 황색 저널리즘의 오해속에 스물다섯살 나이에 자살한 ‘완령옥’의 짧은 인생을 담은 이 영화를 위해 장만옥은 실존 인물들을 만나 스스로 인터뷰하고 <신여성>을 비롯한 완령옥의 출연작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연기를 분석했다. 결국 그러한 과정을 거쳐 관금붕과 장만옥의 대화로 이루어진 <완령옥>의 인상적인 첫 시퀀스는 아무런 시나리오 없이 완성되었고, 나아가 장만옥은 <완령옥>으로 홍콩 여배우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다. 홍콩영화가 오락성 위주의 뻔한 판박이만을 생산해내며 점차 쇠락의 길로 향해가던 순간, 한 여배우의 연기인생은 아주 다른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1분이 쉽게 지날 줄 알았는데 영원할 수도 있더군요.
그는 1분을 가리키면서 영원히 날 기억할 거라고 했어요.
그 말에 맘이 끌렸어요…. 하지만 이젠 이 시계를 보면서
1분 내로 그를 잊겠어요.”/ <아비정전>

연기가 결국 배우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장만옥의 심장은 이별에 익숙해야 했다. 그녀의 눈은 세상 모든 것들이 결국엔 자신을 떠나버릴 것을 아는 자의 것이다. 부두를 서성이며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 없는 남자” 소화의 호출을 기다리던 아화였을 때도 (<열혈남아)>, 체육관 매점에서 이제는 세상에서 발을 떼어버린 아비를 기다리던 수리 첸이었을 때도(<아비정전>), 사막으로 서독을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자애인이었을 때도(<동사서독>), 영국인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가짜 롤렉스 시계와 “마지막 식민공기”까지 팔아대는 억센 홍콩 여자 진이었을 때도(<차이니스 박스>), 불가능성의 사랑을 떠나보내고 멍하니 창 밖을 응시하는 수리 첸이었을 때도(<화양연화>),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자리에, 누군가를 보내야 하는 자리에 늘 그녀가 있었다. “단 1분만이라도 영웅이 되고 싶어”라고 외치는 거리의 사내들 속에서, “천하”를 위해 칼을 빼어드는 협객들 속에서(<영웅>) 장만옥은 그렇게 끊임없이 기다렸다. 심지어 <신용문객잔> 같은 무협물에서조차 그는 선택받지 못한 여자로 남았다. 그러나 인내의 시간은 그녀에게 단련된 심장과 함께 능동을 자극하는 위대한 수동성의 힘을 허락해주었다.

“장만옥은 아무 생각이 없다. (웃음)
장만옥은 연기론이랄 게 없는 배우다. 그러니까 훌륭한 배우다.
예를 들어 로버트 드 니로는 연기론이 너무 많다.
이런 성격의 인물과 저런 성격의 인물을 연기할 때
각기 다른 많은 방법론이 있다. 어떤 인물을 연기해도
기가 막히게 해내지만 그건 드 니로의 연기이지
등장인물의 삶이 아니다. 장만옥은 그렇지 않다.
그냥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연기한다.
그래서 제일 좋은 연기자는 많이 배우지 않은 사람이다.
지식이 없고 생활경험이 많은 사람이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다.”
- <첨밀밀> 진가신

1984년 왕정의 <청와왕자>로 영화에 데뷔한 뒤 벌써 20년 가까이 연기를 해오면서, 덤프트럭에 실려온 쓰레기처럼 무더기로 쏟아지는 홍콩영화 속에서 압사당하지 않은 채 생존해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장만옥의 답은 간단하다. “ 그저 누군가 끊이지 않고 나를 캐스팅하니까 출연하는 거죠. (웃음) 늘 한편의 영화를 끝내고 나면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게 마련이고 그 다음 영화에서는 더욱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그 욕심이 계속해서 연기를 하게 만드는 동력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슬럼프는 비켜가지 않았다. “내 몸이 용문객잔이에요”라며 사내를 향해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는 <신용문객잔>의 안주인 연옥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타고난 매력에 상응해 끊이지 않았던 스캔들 속에서 황색언론의 표적이 되었던 장만옥은 이동승과의 염문설에 이르기까지 지친 마음과 93년 한해에 11편의 영화를 필모그래피에 올리면서 탈진한 몸을 더이상 가동할 의지를 잃었게 되었고, 1994년 <청사>를 마지막으로 연기활동을 중단하는 상태에 이르렀다.

“내가 왜 영화를 계속해서 찍어야 하는지 자문했는데 답을 찾을 수가 없었죠. 그냥 많은 것들이 무의미했고 지겨워졌어요. 상상이나 할 수 있어요 난 거의 8주에 한편꼴로 영화를 찍었고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 한심한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심지어 자신조차 영화관에서 보기 싫은 영화도 있을 정도로 무분별한 출연과 정신적 공황상태까지 겹쳐지며 최악으로 달리던 장만옥은 이후 2년 동안 어떤 영화에도 출연하지 않은 채 지친 심신을 달랬다. 그런 그에게 진가신이 <첨밀밀>을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배우생활을 시작했을 때 영화를 대하는 그녀의 모든것은 “완전히 변해”있었다. “<첨밀밀>을 찍고 난 이후부터는 1년에 한편 이상의 작업을 안 하는 편이에요. 대단한 변화죠. 그리고 그때부터 영화작업을 진정으로 즐기면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널리스트: 르네 비달 감독의 영화를 봤소?
매기 청: 네, 비디오로 봤죠. 그의 이미지들, 특히 강한 이미지들이 좋았어요.
저널리스트: 하하하하. 상당히 예의가 바르시구만. 그의 영화는 지루해요.
어떤 사람들도 그런 영화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구. 친구들 돈 끌어모아서 찍는 영화들,
그런 건 자기만족에 불과해요. 대중들에게 봉사하는 영화를 찍어야 해요.
존 우 같은 영화, 장 클로드 반담 같은 영화. 그런 걸 영화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르네 비달의 시대는 갔어!.
매기 청: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세상에는 그런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도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진지하게 영화를 찍고 있구요.
- <장만옥의 이마베프> 중

한물간 프랑스 감독이 <동방삼협>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장만옥을 캐스팅해 뱀파이어영화를 리메이크하려고 하지만 결국 무산되고 만다는 해프닝을 통해 프랑스 영화판을 풍자한 ‘영화에 대한 영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장만옥의 이마베프>에서 ‘한때는 휼륭했지만 더이상 휼륭하지 않은’ 극중 감독 르네 비달에 대해 장만옥은 그를 부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끝까지 감독을 옹호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철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과 관련된 의견을 많이 내는 편이긴 하지만 내가 그 영화를 선택한 이상 결국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건 감독의 의도를 최대한 가깝게 표현해내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영화가 상영될 때, ‘내가 저렇게 하자고 해서 저런 식으로 표현된 게 좋았어’라고 스스로 만족하기보다는 감독이 ‘연기를 참 잘했어’ 하고 인정해주는 편이 훨씬 좋다는 거죠.” 그렇게 장만옥은 철저히 감독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려는 배우다.
“장이모 감독을 비롯해 다른 많은 감독들은 나에게서 강하고 억센 부분을 찾으려고 해요. 하지만 왕가위는 끊임없이 내 여성스러운 부분을 끄집어내죠. ” 결국 붓을 쥐고 있는 사람에 따라 장만옥은 늘 다른 장만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3초 동안 클로즈업을 찍겠다고 한다면 정확히 3초 안에 연기를 끝내야 하는” 장이모 감독의 영화와 “아무런 스크립트 없이 촬영장에 등장하는” 왕가위의 영화 속에서 각각 아주 다른 느낌으로 채색될 수 있었던 것은, 다작으로 다져진 모든 홍콩 배우들의 공통적인 유연함일 수도 있겠지만, 백지상태에서 역할과 촬영환경을 받아들이는 작업태도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인정해요. 저는 다른 어떤 배우들보다 감독에 따라 많은 부분 영향을 받는 배우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깊어져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해요. 서서히 ‘장만옥다운’무언가가 생겨나는 것 같은 느낌….”


“아가씨 같은 홍콩 사람은 처음 봐요.
옷차림이나 행동이나 전혀 홍콩 사람 같지 않거든….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군. 나와 인터뷰해줄 수 있겠소 ”
- <차이니스 박스> 중

매기 청(Maggie Cheung), 어쩌면 그녀는 이 이름으로 살았던 시절이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1964년 홍콩에서 태어나 8살 때 영국의 켄트로 가족이 이민간 뒤 동네와 학교에서 유일한 중국 아이로 “심한 놀림을 받으며” 자라났던 소녀는 17살 때 다시 홍콩으로 건너왔고, 우연히 에이전트에 발탁되어 84년 미스홍콩으로 선발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홍콩 배우로서 살았던 십여년을 거쳐 <장만옥의 이마베프>를 인연으로 만난 프랑스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결혼해 파리와 홍콩을 오가며 살았고, 지난 2001년 3년6개월 만에 결혼생활이 파경을 맞은 이후 중국영화 <영웅>에 출연했다. “나는 70%의 영어와 70%의 중국말을 써요. 그 두개의 언어가 가끔 내 안에서 충돌하곤 하죠.” 이런 그녀의 바이오그래피를 아는 사람이라면 웨인왕의 <차이니스 박스> 속 진은 마치 장만옥을 두고 만들어진 역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다. “진 역을 놓고 다른 어떤 배우도 생각할 수 없었어요. 누구도 장만옥의 영국식 영어와 광둥어가 섞인 독특한 억양과 목소리를 흉내낼 수 없다고 생각했죠. 그녀는 영국과 중국을 한몸에 품고 사는 사람이에요” (웨인왕) 현재는 “좋은 친구 사이로 남아 있다”는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장만옥의 이마베프>를 찍으며 그녀에게 전형적인 중국 여인의 연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상당부분 유럽인다운 태도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영화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반겼죠.”
하지만 이런 코스모폴리탄적인 성장과정과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에도 불구하고 장만옥은 스스로를 “어딜 가도 홍콩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장환경이나 지나온 경험들은 나를 보통의 홍콩 사람들보다는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죠. 홍콩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런 폭탄머리 스타일조차 이해 못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많아요. (웃음) 하지만 그뿐이에요. 난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본 적은 없었어요. 그저 ‘포용력 있는’ 홍콩 사람일 뿐이죠.”

결국 2003년 홍콩의 영화계는 분방한 기개로 천하를 호령했던 임청하의 웃음소리가 아니라, ‘향기로운 항구’를 적셨던 매염방의 관능미 넘치는 입술이 아니라, 애크러배틱에 가까운 무술을 선보이며 할리우드로 날아간 ‘예스마담’ 양자경의 발차기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약해 보였고, 생각없어 보였고, 자국에 대한 애정이 없어 보였던 장만옥의 가느다란 어깨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엔 불가능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만옥을 못생기게 찍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도일)

올해 나이 마흔살. 그러나 그녀도 늙는다. “물론 신인 연기자였을 땐 내가 예쁠까, 쟤가 예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이젠 그런 식의 비교나 생각 자체가 무의미한 때가 도래한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자신감이에요. 어릴 때는 누군가 네 영화는 재미없어라고 말하면 아예 보러 가지 않은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남들이 싫다고 생각해도 내가 믿는 것을 믿는 나이가 된 거죠. 이런 인식의 전환은 서른다섯살이 넘어가면서 서서히 찾아온 것 같아요. 옛날에는 모든 것을 다 알아야하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즐겼지만 지금은 그것이 진실로 아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요즘엔 모르는 게 있으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게 좋아요.”
1991년작 <완령옥>에서 관금붕은 “당신은 반세기 뒤에도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해 주길 바라나요”라고 장만옥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안 하고는 저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미래에 사람들이 날 기억하더라도 완령옥 같진 않겠죠. 25살 영화배우로서 최고 전성기였을 때 자살한 뒤 그녀는 전설이 되었어요. 나는 그렇지 않았잖아요”라고 대답했다. 2003년, 그로부터 12년이 흘렀고 장만옥은 마흔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전히 기억해주고 안 해주고에 연연하지 않지만, 이젠 사람들이 나를 끝까지 기억해줄 거라고 믿는다”는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허리가 일흔살까지 잘록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순간까지 그녀가 여전히 죽지 않고 우리 곁에 배우로 남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씨네21,  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영웅>의 양조위와 장만옥, 아직, 그들은 우리를 설레게 하고

2003.02.04 / 김혜선 기자  

지난 14일 홍콩의 스타 배우 양조위와 장만옥이 장이모우 감독이 연출한 그들의 신작 무협영화 <영웅>의 홍보차 내한해 짧은 시간 폭풍처럼 서울을 훑고 지나갔다. 허우 샤오시엔, 왕가위, 오우삼, 트란 안 훙 같은 작가주의 감독들이 사랑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되풀이해 기억하지 않으면 깜빡 잊어버릴 만큼 조용했던 양조위. 양조위가 갈아 신을 구두까지 신경 쓰며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스타 파워를 과시했던 화려한 장만옥. 전혀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가끔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곧장 의상이 걸려 있는 탈의실 앞으로 간 장만옥은 어깨를 으쓱하며 휙 돌아서 버린다. “마음에 안 들어. 안 입겠어요.” 스튜디오 안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모두들 허둥대는 앞에서 빨간 입술에 담배 한 대를 물고 선 장만옥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노, 땡큐”를 연발한다. 그때 양조위는 물끄러미 벽에 걸린 <무사>와 <고양이를 부탁해>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소동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했다. 두 사람의 이런 행동만큼이나 외모도 완전히 극과 극이다. 장만옥이 두 시간 동안이나 펑크 스타일로 머리를 매만지고 온 데 비해 양조위는 카키색 점퍼와 청바지, 티셔츠에 낡은 운동화까지 아침에 일어나 대충 시간을 보내다 온 모양새다. 그런데 사진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트 안의 유럽풍 의자에 앉자마자 두 사람은 순식간에 바뀐다. 서로 다른 둘이 함께, <화양연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내는 것이다. 아하. 대륙의 중견 감독 장이모우가 둘을 동시에 캐스팅하고 싶어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스크린에서처럼, 그들은 함께 있으면 어떤 시대에서라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더없이 친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얄미우리만큼. 그리고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평범함 속의 예민함

장이모우 감독은 양조위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주며 “파검은 당신과 비슷한, 약간 우울한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진나라 왕을 암살하지 않아 많은 이들을 배신한 데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모든 등장인물과도 생각이 다른 고독한 캐릭터”는 평소 마음속에 많은 것을 담아두고 있는 양조위의 성격을 빼다 박았다. 파검은 무예와 서예가 합을 이룬 고수다. 양조위는 20대 초반 <절대쌍교> <의천도룡기> <녹정기> 등 무수한 TV용 무협 드라마에 출연해 검을 들긴 했어도 마샬 아트의 기본기를 터득한 상태는 아니었다. 왕가위의 <동사서독>에서도 무술감독 홍금보에게 액션을 배웠지만 역시 능숙하게 소화해내지는 못했다. 파검 역시 카리스마가 충만한 모습은 아니다. 그 대신 야심과 강요의 피에 물들어 있지 않으며 강호의 패권을 다투지 않고도 ‘천하’를 품에 안는 헤아림이 스며 있다. 거칠고 억센 힘에 몸을 맞출 이유가 없는 파검은, 그래서 영락없이 ‘양조위다운’ 인간이다. 양조위는 영화 속에서 그렇게 운명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연기하며 자신을 발견해왔다. <화양연화>의 차우 역을 맡았을 때도 그는 왕가위가 만들어놓은 세트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찾아냈다.

“60년대 홍콩에서 <화양연화>의 상황처럼 당시 사람들은 이웃과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아파트는 물론 사생활까지. 세트에 들어선 첫날, 정말 놀랐죠.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홍콩과 거의 똑같았거든요. 홍콩인들은 그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외로운 것 같습니다.” <해피 투게더>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달 반 동안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내면서 양조위는 외로움이 극에 달해 향수병에 걸렸다. <해피 투게더> 촬영팀은 3개월간 촬영을 쉬었고, 양조위는 매일 술에 취해 지냈다. “그게 새로운 방식의 매소드 연기인지는 몰라도 진짜 고문 같은” 시간이었다. 주인공 아휘의 몸과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간 상태를 원했던 왕가위는 그런 양조위를 한없이 만족스러워했다. 그래서일까.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파트 안, 하얀 타일이 깔린 그 좁은 부엌에서, 장국영과 탱고를 추는 양조위의 왜소한 몸은 탱고의 나른함과 뒤엉켜 관능적으로 변한다.

양조위를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하게 한 영화 <비정성시>에서 그는 자신이 맡은 벙어리 사진사 문청이 되어 한 소녀에게 이런 글을 써주며 천진하게 웃는다. “여덟 살 때 나무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어. 아버지가 글로 귀가 안 들리게 됐다는 걸 알려줬어. 그땐 어려서 슬픈 것도 모르고 그냥 즐겁게 놀았지.”
비극을 겪은 문청의 얼굴에서는 한 점 슬픔도 찾을 수 없다. 양조위의 수줍고 순진한 연기는 절망과 희망 사이를 이렇듯 쉽게 오갈 수 있다. 헤어진 애인이 다시 올까봐 대낮에 집으로 뛰어 들어가고 비누와 수건에게 말을 거는 <중경삼림>의 실연당한 경찰은 더 그렇다. 하지만 양조위가 해내는,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깊이 있는 연기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예민한 배우인지 눈치채지 못할 때가 많다. 그는 “몇 번이고 내 연기를 다시 볼 때마다 더 추가하고 싶은 부분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와이어를 몸에 달고 호반 위를 날 때나 스프링 베드를 의지해 몸을 날려야 할 때조차” 자기만의 리듬을 생각하는 배우의 감각을 함께 작업하지 않은 사람이야 짐작할 도리가 없다.

“내가 맡은 모든 역할에는 내 모습이 있다”던 양조위의 말이 떠오른다. 현실에서의 양조위도 비슷하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스튜디오 안을 조용하게 걸어 다닌다. 그러다 말을 걸어오면 장만옥의 사진 촬영에 방해가 될까봐 겨우 몇 마디만 속삭이듯 답한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의 고백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얘기다. 일곱 살 무렵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 그는 학교와 집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과묵한 아이로 자랐다. 말이 없었던 그 시절 모험과 액션이 가득한 무협지를 즐겨 읽었던 양조위는 <영웅>에 대해서 분명한 옹호론을 펼치기도 한다. “<영웅>을 <와호장룡>과 비교하는 것은 불공평하죠. 모든 중국인들, 특히 무협지를 본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무협 세계를 갖고 있어요. 이안에게도 장이모우에게도 자신만의 무협 세계가 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비교는 어리석은 일이에요."

양조위의 출연작들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제는 어찌됐든 모든 게 괜찮다는 듯, 슬며시 지어보이는 희미한 웃음을 만나게 된다. 그 담백함이 바로 양조위 연기의 백미다. <해피 투게더>에서 아휘가 홍콩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랬고, <중경삼림>에서의 경찰관이 실연당한 뒤 샌드위치 가게에서 비에 젖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펴볼 때나, <첩혈속집>에서 비밀 경찰 아랑이 부패 속으로 뛰어들었을 때도 그랬다. 물론 <유망의생>의 쿨한 뒷골목 의사 유문, 형사 가제트처럼 활기 넘치는 <동경공략>의 사립 탐정 린은 그가 절망 이외에 다른 눈빛도 지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유쾌함보다는 허무함과 상처받은 희미한 웃음, 짙은 눈빛으로 더 기억에 남는다.

자신의 연기를 자신 이외의 남과 비교하지 않는 양조위는 2000년 <화양연화>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97년 <해피 투게더>로 칸에 갔을 때 주위의 반응 때문에 솔직히 수상을 약간 기대하긴 했었죠. 다시 기회가 올 거라고 믿었고, 그후 나는 4년간 세 번 칸에 갔습니다.” 그러니 “운이 좋아서”라고 밝힌 겸손한 수상 멘트를 꼭 믿을 필요는 없다. 새해 초부터 <무간도>와 <영웅>으로 홍콩과 중국 박스오피스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지금, 양조위는 조금도 욕심이 없는 한편 한없이 많은 것을 끌어안으려는 배우로 살아가고 있다.

솔직하고 복잡하게

장만옥의 연기력을 서구에 알린 보석 같은 영화 <완령옥>에서 장만옥은 관금붕 감독과 중국의 전설적인 여배우 완령옥의 죽음에 대해 토론한다. 흑백 필름 속의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완령옥은 스캔들에 겁을 먹은 거죠. 배우라고 사생활을 모두 공개할 의무는 없어요. 난 그녀를 이해해요.” 관금붕이 묻는다. “당신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면 자살할 거야?” 장만옥은 호탕하게 웃는다.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겠어요. 비록 불쾌해도. 절대 슬퍼하는 모습이나 자살하는 모습은 안 보여줄 거예요. 죽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지 당신들(!) 때문이 아니니까!” 올리비에 아사야스, 이동승, 양조위 등과의 관계로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던 그녀이기에 지금 다시 보면 꽤 솔직한 얘기로 들린다.

장만옥에겐 만다린어를 하는 것도, <영웅>의 촬영장에서 검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사막에서의 키스 신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고, 무명과의 결투 장면은 더더욱 힘이 들었다. “난 양자경이 아니에요. 무술 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전보다 반응 속도도 느려진 것 같긴 합니다. <영웅>의 비설은 육체적으로야 잘 맞는 역할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늘 액션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장이모우에게서 ‘대륙인의 풍모’를 느꼈다는 장만옥은 이전부터 그의 영화를 좋아했고, 액션을 즐길 작정으로 큰 망설임 없이 <영웅>에 합류했다. 왕가위와는 달리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철저히 준수하는 장이모우의 작업 스타일은 장만옥에게 새로운 영화의 매력을 상기시켰다. 붉은 옷의 비설이 노란 은행나무 잎 수북한 숲에 무심히 서서 장즈이의 날아오는 검을 귀찮은 듯 내쳐버리는 모습은 장이모우의 엄격한 연출 아래 얻어낸 장면이다. 세 가지 색 이야기 가운데 백색 이야기의 비설은 장만옥이 그동안 아끼며 보여주고 싶었던 이미지다. “가장 솔직하고 복잡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가장 로맨틱하고 여성스러운 연기를 해야 했던 푸른빛의 비설이 가장 연기하기 힘들었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영웅>은 제작 초기부터 장만옥이 연기하는 비설을 한없이 기대하게 만들었다. 장만옥이 전작 <화양연화>에서 보여준 리첸의 황홀한 이미지를 연장해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화양연화>에서 그녀의 몸짓은 매혹적이다 못해 아찔했다. 정성 들여 올린 머리, 그녀 외엔 누구도 입을 수 없을 것처럼 몸에 딱 맞는 60년대 의상 속에 길고 가녀린 목선이 보인다. 약간의 근육이 붙어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팔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가슴선과 허리선, 그리고 앉아 있을 때 살짝 열린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나는 종아리와 발목. 장만옥이 묘한 긴장과 여유로 완성한 이 실루엣에 삶의 무게를 싣고 아파트 안의 좁은 복도에 서 있다. 국수 가게로 내려가는 가파른 계단과 골목길을 걸어간다. 그럴 때마다 결코 관객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가 완성된 이후의 얘기다. 왕가위 감독과 오랜만에 다시 만난 <화양연화>에서 왕가위의 현장에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번번이 좌절감을 느꼈고, 심지어 몸이 아프기까지 했다. 양조위는 이미 자기 분량을 12일 만에 다 찍어버렸다. 왕가위 감독이 제시한 방향에 따라 장만옥도 조금씩 변화했고 왕가위는 그 변화를 스크린 안에서 가장 완벽하게 살려냈다. 소화와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는 <열혈남아>의 전화 박스 안에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등뼈와 <아비정전>에서 경관에게 돈을 갚고 돌아가는 고개 숙인 수리진의 가냘픈 등은 <화양연화>로 이어져 그야말로 절정에 이른다. 2046호의 호텔 방에서 나와 선명한 구두 소리를 배경으로 걸어갈 때의 리첸의 뒷모습은 흐르는 눈물보다 더 슬프다.

홍콩에서는 대다수의 여배우들이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 증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오디션이 정착화되지 않은 홍콩 영화계에서 신인 여배우들은 왕가위나 관금붕 같은 감독들이 새 영화를 만들 때 여주인공으로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만옥은 그런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일찌감치 올랐다. 홍콩에서 태어나 8세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갔고 학교에서 유일한 중국인으로 놀림을 받고 자란 후 십대 중반 홍콩으로 다시 돌아왔다. 스팅과 UB40를 듣고 블랙 앤 화이트 계열의 옷을 입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84년 미스 홍콩이 됐다. 데뷔작 <청와왕자>를 찍은 후 10여 년간 홍콩 영화계에서 유명 감독들에게 “미스 홍콩 출신이지만 그냥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연기도 할 수 있어요”라는 말로 자신을 설명해왔다. 그리고 그 10년간 장만옥은 홍콩 영화계에서 철저히 소모됐다. 93년에는 <청사> <전신> <동성서취> 등 무려 11편의 시대극과 멜로, 코미디, 액션영화에 출연하느라 심신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내가 나이 들었다는 것을 알 만큼 성장하기까지 힘들었습니다. 출연했던 여러 작품에 실망했고 그런 경험이 되풀이되자 좌절했었죠.” 장만옥은 2년간 휴식을 취했고, 진가신의 흠 잡을 데 없는 멜로 <첨밀밀>과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영화 <장만옥의 이마베프>로 눈부시게 돌아왔다. 서른여섯 즈음에야 비로소 열정적이면서도 진지한 배우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첨밀밀>에서 등려군의 죽음을 TV 뉴스로 보고 있는 이요의 얼굴은 마치 달을 차가운 물에 담갔다가 뺀 듯 아련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2000년, <화양연화>로 인해 숱한 인터뷰가 쇄도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6년 전엔 두려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도전적이 됐죠.” 심지어 1년에 한 편만 작업하며 충전의 시간을 갖겠다는 원칙도 고수할 수 있게 됐다.

전설적인 여배우 완령옥은 인생을 엄숙히 여겼으며 술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물었다. “난 좋은 사람인가요?” 하지만 그 완령옥의 인생을 다시 살아냈고 쇠퇴해가는 홍콩 영화계에서도 여전히 세계를 드나드는 여배우 장만옥은 정반대다. 그녀는 인생을 철저히 즐긴다. “몇 년 전부터 운이 좋다고 생각했고,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이루었어요. 지금은 보너스를 탔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이렇게 말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홍콩 TV 드라마 시절부터 안면을 익혀왔다. <아비정전>에 출연한 장만옥과 맨 마지막 신에 도박사로 등장하는 양조위가 마주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다. 서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동사서독>을 지나 <화양연화>에 이르러 둘의 호흡은 빛을 발했다. <영웅> 시나리오를 받은 후 둘은 장이모우와 함께 거의 매일 토론을 했다. 대화가 3~4시간 이상 길어진 일도 빈번했다. 장만옥은 양조위가 얼마나 민감한 배우인지를 알고 있었고, 양조위는 장만옥이 스스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을 지닌 총명한 프로페셔널이라고 여겼다. 두 사람 모두 순식간에 역할에 몰입했다. 수많은 스탭들 앞에서 시선을 교차하며 그 시선 속에서 둘만의 협의의 공간을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천성이 정반대인 두 사람이지만 때로는 똑같이 어둡고 슬픈 정서를 연기하는 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오랜 파트너십에 길들여진 탓일까? 어쨌든 두 사람에겐 또 한번 재회할 기회가 남아 있다. 왕가위의 신작 <2046>의 촬영이 재개됐기 때문이다. 양조위는 촬영 중간 중간 브루스 리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왕가위의 또다른 신작 <일대종사>에서 쿵푸 마스터로 분하기 위해 몸을 만들 예정이고, 장만옥은 “먼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는 소신대로 <2046>에 집중할 작정이다. 그들이 만들어낼 새로운 관계가 궁금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카메라 앞에 선 마흔둘의 양조위은 희미하게 웃고 마흔의 장만옥은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를 두근거리게 한다.

필름2.0 기사




이 름 : 장 만 옥 (張曼玉)

출 생 : 홍콩 (국적 : 영국)

생년월일 : 1964년 9월 20일

신 장 : 168cm

혈액형 : B형

데뷔작 : 청와왕자(1984)

출세작 : 폴리스스토리(1985)

데뷔동기 : 83년 미스 홍콩 입상을 계기로

별 명 : 고슴도치 (시도 때도 없이 머리를 고슴도치 처럼 벅벅 깍아버린다..)







장만옥 필모그래피
1984년 <청와왕자>, <연분>
1985년 <폴리스 스토리>, <성연기우결랑록>
1986년 <개심귀3>, <원진협려위기리>, <로즈>, <프로젝트 A>
1987년 <천사양록>, <심도일백>
1988년 <응소여랑>, <비묘유랑기>, <과부신랑>, <정장추녀자>, <황색고사>, <유금세월>, <폴리스스토리2>, <구애패사대>, <쌍비임문>, <달, 별 그리고 태양>
1989년 <아요부귀>, <청옥불>, <구애야경혼>, <신용쌍매협>, <대두병>, <소녀심>, <사랑의 난파선>, <열혈남아>, <불탈망적인>
1990년 <아비정전>, <홍진>, <인재뉴약>, <애재타향>, <객도추한>, <삼인신세계>, <루안살성>
1991년 <호문야연>, <부귀갈양>, <흑설>, <지재출위>, <쌍성고사>
1992년 <신용문객잔>, <트루러브>, <쌍용회>, <화! 영웅>, <완령옥>, <폴리스 스토리3>, <가유희사>
1993년 <적가비협>, <동성서취>, <경정재일격>, <의혈유정>, <동방삼협>, <무협칠공주>, <제공>, <천면은호>, <추남자>, <신경도흥비천묘>, <청사>, <신 동거시대>
1994년 <동사서독>
1996년 <장만옥의 이마베프>
1996년 <첨밀밀>
1997년 <송가황조>
1998년 <차이니스 박스>
1999년 <오귀스탱, 쿵푸의 왕>
2000년 <소살리토>
2000년 <화양연화>
2002년 <영웅>








출연작품


83
청와왕자
 

84
연분
 

85
폴리스스토리
 

87
주윤발의 미녀사냥
천영양록
 

88
폴리스스토리2
남북마타
열혈남아
삼인세계
살지연

89
유금세월
불탈망적인
로즈
객도추한
인재뉴약

90
애재타향
홍진
청옥불
과부신랑
 

91
아비정전
루안살성
부귀길상
흑설
 

92
폴리스스토리3
진적애니
동방삼협
천면은호
가유희사
신용문객잔
쌍용회
완령옥
화!영웅
 

93
대소비도
적각소자
전신
추남자
동성서취
가을날의 동화2
천검절도
심사관2
첩혈가두2
 

94
동방삼협2
동사서독
청사
신동거시대
 

96
첨밀밀
 
 
 
97
Chinese box
Irma Vep
송가황조
 
 
98
쿵푸의 왕
 


2000
화양연화
일견종정



사랑의 난파선  /  폭소 결혼 구애 작전  /  강호성시  /  달, 별 그리고 태양
소야객  /  여장부일기

(드라마) - 신찰사형(20편) / 양가장(3편) / 무림세가(10편)





 수상경력

1989
인재뉴욕 - 제26회 금마장 여우주연상

1990
홍진 - 제27회 금마장 여우조연상
불탈망적인 - 제9회 금상장 여우주연상


1991
완령옥 - 제28회 금마장 여우주연상
애재별향적계절 - Turin Film Festival "Special Jury Best Actress Award"

1992
완령옥 -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
             시카고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The Hong Kong Annual Artistic Award

1993
완령옥 - 제12회 금상장 여우주연상
             Japanese Film Critics Society "Best Actress Award"

1997
첨밀밀 - 제34회 금마장 여우주연상
             제16회 금상장 여우주연상
             제42회 아태영화제 여우주연상
             The 3rd Hong Kong Film Critics Society Awards "Best Actress Award"
             The 2nd Hong Kong Golden Bauhinia Film Awards "Best Actress Award"

1998
송가황조 - 제17회 금상장 여우주연상

2000
화양연화 - 제37회 금마장 여우주연상




장만옥, 화양연화, 2002  




“순간의 사랑이더라도 나중에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


<화양연화> 장만옥

2000.10.16 / 오동진 기자  

"왕가위의 영화는 어떤 주제, 어떤 시대배경의 작품이든 항상 모던하다는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그린다. 그의 작품들은 늘 호기심을 갖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뭔가가 있다."


홍콩 여배우 장만옥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예쁜 얼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장만옥은 그동안 무려 70여편의 작품에 출연했지만 영화들마다 각각 다른 이미지를 선보여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말을 믿지 못하겠다고? 그렇다면 웨인 왕 감독의 영화 <차이니즈 박스>에서 부랑녀로 나왔던 장만옥을 기억하기를 권한다. 그녀에게는 <송가황조>같은 영화가 있는가 하면 <아비정전>과 <동사서독>, 그리고 <첨밀밀>과 <완령옥>같은 작품도 있다. 이렇게 저렇게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뽑다 보면 분명한 사실 한가지가 떠오른다. 홍콩 여배우로서 당대 스타라는 점이다.

장만옥을 만난 것은 부산영화제 끝물인 지난 13일, 부산 코모도호텔에서였다. 그녀가 부산에 온 것은 자신의 출연작 <화양연화>가 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되기 때문이었다. 20대의 방송 스탭들은 모두 다 장만옥을 만난다는 것에 흥분해 있었으며 때문에 기자는 촬영이 제대로 될지,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후배기자들을 다독인 것은 오히려 기자가 아닌 장만옥 본인이었다. 그녀는 매우 지적이고 세련된 태도로 인터뷰에 응했으며 창문으로 들어 오는 햇빛의 변화를 지적하며 카메라 노출을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녀가 인터뷰 도중 한쪽 다리를 슬쩍 들어 올려 그 미끈한 두다리를 포갰을 때는 카메라가 흔들리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화양연화>는 불륜에 빠진 두 남녀의 사랑얘기다. 하지만 아름답고 슬픈 내용이다. 난 당신이 영화속에서 불행한 것 같아 마음아팠다. 지금은 행복한가?
(웃음) 고맙다. 사람들 모두가 그렇겠지만 살다 보면 기분나쁜 일을 많이 겪는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난 행복하다고 느낀다. 지금 그렇다. 행복하다.

<화양연화>를 본 젊은 관객들은 답답해 하더라. 주인공들이 손한번 잡지 못하고. 실제로 당신은 어떤가. 애정관계에서 적극적인 편인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주인공들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전통적인 분위기에다 자기들 사랑을 함부로 표현할 수 있었던 세대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시대는 윤리적인 측면에서나 섹스에 대한 생각에서나 생각들이 많이 변했다. <화양연화>에서의 주인공같은 처지라도 요즘 신세대들이라면 분명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다. 나? 나 역시 그런 신세대들과 비슷한 생각이다. 사랑은 마음이 끌리는 쪽으로 해야 하는 거니까. 도덕적으로 이게 옳다고 생각한들 마음이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 나중에 ‘넌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란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 그렇게 후회하느니 결과적으로 나쁜 경험이 될 수 있을지라도 차라리 그 순간의 감정이나 행복에 충실하고 싶어하는 쪽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과의 관계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No!(웃음)

난 당신이 아사야스 감독과 같이 올 줄 알았다
아마도 그는 영화제로부터 별도로 초청받은 것으로 안다. 그의 작품 <운명>이 상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별적인 인터뷰도 많을 거고 여러가지 인터뷰도 있을 거다.

당신이 출연한 아사야스 감독의 데뷔작 <이르마 벱>을 보면서 고통스러웠다
(웃음) 정말인가? 근데 왜?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으니까
(또 웃음) 영화는 늘 두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이 있듯이 예술성이 강한 것과 상업성이 높은 것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영화인지 모르고 극장에 들어갔다가 끔찍해 하며 나오기도 하고(당신처럼) 또 어떤 사람들은 <타이타닉>같은 영화를 보면서 ‘디스거스팅’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관객의 입장에서 두가지 경향 모두를 좋아한다. 그리고 배우로서는, 두가지 측면을 어떻게 좁힐까를 고민하고. 그래서 처음 <이르마 벱>의 시나리오를 봤을 때 큰 흥미를 느꼈다. <이르마 벱>은 예술영화를 어떻게 대중적으로 만들까를 고민하는 영화인들의 얘기니까. 그런 점말고도 4주동안 파리에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조건이 마음에 들었었다.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파리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스타 대접을 받는 것은 종종 소외감을 느끼게 하니까. <이르마 벱>을 찍을 때는 마치 한명의 스탭으로서 일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홍콩배우들처럼 헐리우드를 택하지 않고 <이르마 벱>을 택한 것은 그만큼 당신의 예술영화적 지향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해도 되는 건가?
그렇다. 하지만 사실 난, 예술영화니 상업영화니 하는 구분은 좋아하지 않는다. 난 감독이 솔직하고도 진실하게 얘기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도 헐리우드가 왜 이제껏 당신을 가만 놔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건 당신처럼 나도 모르는 일이다(웃음). 다만 여배우가 헐리우드에 진출하려면 여러가지 통과의례가 있는 것으로 안다. 사람들도 많이 사귀어야 하고 파티에도 자주 가야 하며 또 어떤 때는 연줄도 필요하다고들 한다. 근데 난 그런 게 싫다. 좋은 시나리오를 누가 보낸다면 그걸 읽어 볼 생각은 있어도 오디션 결과 때문에 전화통 옆에서 기다릴 생각은 없다. 12년전 처음 데뷔할 때라면 모를까… 그리고 난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

<화양연화>를 보면서 당신이 갈아 입고 나오는 옷의 수자를 세다가 지쳤다. 나중에 영화사 얘기를 들으니 41벌쯤 된다고 했다. 근데 그 옷을 중국에서는 뭐라 부르나?
음…춘삼? 만다린어로는 치파오라고 한다. 근데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의 의상이 매우 중요하다. 영화를 봐서 알겠지만 무대가 집과 사무실 정도밖에 안된다. 여주인공의 옷이 바뀐 건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 하루 혹은 일주일이 지났다는 것을 표현해 준다. 그러니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갈아 입는 옷이 몇벌이나 되는지 세는 노력을 할 필요는 없다.

60년대 여성의 역할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텐데
물론이다. 어릴 때 기억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어머니 생각을 많이 했다. 어머니의 옛날 사진도 많이 봤고. 그때의 의상, 헤어 스타일, 아이 라인이 슬쩍 올라가는 식의 메이크 업 등등말이다.

왕가위감독과 작업을 많이 했다. 그를 평가한다면?
그의 영화는 어떤 주제, 어떤 시대배경의 작품이든 항상 모던하다는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을 ‘매우’ 매력적으로 그린다. 그의 작품들은 늘 호기심을 갖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뭔가가 있다.

배우로서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사람을 꼽으라면?
영화를 보는 관점은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키워줬다. 배우로서의 능력은 왕가위가 으뜸이었고…연기자는 노력하기에 따라 여러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메릴 스트립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왕가위감독의 작품이 많다. <열혈남아>가 기억이 많이 난다.

공중전화 박스에서의 키스신이 기억난다
(웃음) 그런가. 관금붕감독의 작품 <완령옥>도 잊을 수 없고 왕가위감독의 또 다른 작품 <동사서독>과 <아비정전> 그리고 진가신감독과 함께 일한 <첨밀밀> 역시…하지만 요즘엔 <화양연화>를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필름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