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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세대'와 '시대'의 비극

자/ㅗ 2002. 8. 28. 18:02 Posted by 로드365

 조영남의 글과 말과 활동은 사실 대부분의 보편적인 한국 50대 남성을 여과없이 반영하는 것들이다. 좋게 말하면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체득하고 있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속물이다.  


우리 시대의 DDR('딴따라'의 조영남식 표현이다) 조영남은 되게 바쁜 사람이다. 조영남 본인의 말만 들으면 더욱 그래 보인다. 그의 말에 의하면 표 값이 10만원인 디너쇼를 해도 1000명이 모이고, 열린 음악회에도 늘 3만 인파가 몰려든다. 본업인 '가수'로서도 성공한 사람 처럼 보인다.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과 일본 신주쿠 한 복판에 있는 한식점에서 식사하고, 최은희-신상옥 부부와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 있는 한식집에서 냉면을 먹으며, 연극인 박정자와 서울 명동 양식집에서 포도주를 마신다니 사회적으로도 탄탄대로를 달리는 모양이다. 또 조영남의 말로는 본인이 국회의장 박관용과도 친분이 있고, 소설가 출신 국회의원 김홍신과 막역한 사이라니까 권력 실세와도 상당한 연줄을 지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역시 조영남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결혼을 세 번이나' 하고, 수많은 스캔들을 뿌리고 다닌 '매력남'이다. 여기에 화투패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기도 하며, 베스트셀러가 된 신학 서적을 저술하기도 했으니 대중들에게 조영남이 다재다능한 예술인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화면이나 지면으로 드러나는 조영남은, 엄밀히 말해 예능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예능인이라면 어느 정도 언어 사용을 절제하고, '정치적 가치 중립'을 표방하며 사생활의 매체 노출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영남에게는 그런 면이 드러나지 않는다. 조영남은 방송에서건 지면에서건 말을 '함부로' 하는 인물이며, 한나라당 당원인데다가 세 번의 결혼을 자랑으로 삼는 특이한 예능인이다. 조영남식으로 표현하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평범한 50대 아저씨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조영남의 글과 말과 활동은 사실 대부분의 보편적인 한국 50대 남성을 여과없이 반영하는 것들이다. 좋게 말하면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체득하고 있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속물이다. 조영남은 같은 50대라도 세상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어느 정도는 패배주의 성향이 있는 홍세화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대강 살아가는 드라마 속의 박영규(=속물 남성) 쪽에 훨씬 맞닿아 있다.

조영남의 사상

가령 이념적인 면에서 조영남이 보여주는 것은 극도의 순진무구함과 특정 신문 논조 따라 읊기로 대표되는 '백지 상태'이다. "나는 조선일보를 본다"고 2001년 여름(안티 조선이 한창 열을 뿜던)에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은 정치 성향이나 대담함 여부를 떠나서 그가 이념적으로 공백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사상적으로 '제로' 상태임을 은연중에 고백해 버린다.

저는 그전에도 그랬고 10년째 살고 있는 지금 집에서도 계속 조선일보를 구독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남들이 많이 보길래 따라했던 겁니다. 그리고 아무런 하자가 없었습니다.(조선일보 독자와의 대화 '조영남의 내가 조선일보를 보는 이유' 중에서)

'남들이 많이 보기에' 조선일보 애독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조영남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실제로 조선 구독자의 대부분은 특별히 그 논조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혹은 '경품과 무가지' 때문에 조선을 본다. 그리고 '아무런 하자 없이' 보다 보면 논조에 동의하게 되어 버린다. 조선일보 사설에 나온 이야기를 마치 자신의 주장인양 줄줄이 읊는 아저씨들과 조영남은 그렇게 먼 거리에 있지만은 않다. 다음과 같은 조영남의 말은 어떤가.

조선일보가 너무 극우라는 말도 웃깁니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 남쪽 대한민국에서 극우가 푸대접 받는 걸 다 보게 됩니다. 저는 해방 후에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일방적인 극우교육을 받고 정신무장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무장을 풀고 극좌를 하라니, 이거 어디 얼이 빠져 견디겠습니까.

한마디로 자신이 어릴 때부터 반공 교육을 주입식으로 받고, 성인이 되어서는 개발 독재의 휘하에 일개미가 되어야 했던 세대라는 고백인 셈이다. 극우 아니면 죄다 극좌라는 '한국논단'식 견해는 차치하고서라도.

조선일보는 방송국 친구들 말대로 정부·여당을 심하게 '까는' 경향이 농후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정부와 권력의 잘잘못을 따지고 까는 신문이 아니면 무슨 재미로 신문을 본단 말씀입니까. 신문이 할 일이 솔직히 '까는 것' 말고 뭐가 있습니까. 조선이나 동아나 대대로 잘 까서 오늘날 대표 신문이 된 것 아닙니까. 우리는 바로 그 '까는 신문'에 얼마나 충심으로 박수를 보냈으며 얼마나 찬양을 해왔습니까.

조선일보가 박정희-전두환 시절에는 정부-여당을 '전혀' 까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조영남은 무관심하다. 조선이나 동아나 대대로 잘 '용비어천'해서 오늘날 대표 신문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무심한 모양이다. 이는 단순히 의도된 무관심이라기보다는 '까는 신문'에 충심으로 박수를 보내며 찬양한 덕분이라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렇기에 김용갑 의원의 '친북 좌파' 발언은 그에게는 색깔론이 아닌 단순히 웃자고 한 얘기로 둔갑한다. 조영남은 그런 Fact를 종합해 본인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물론 이념적으로 공백 상태가 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제 나름대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주체적인 인간상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문제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50이 넘은 남자가 온전히 '주체'로서 사상적 백지 상태가 된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특히, 어릴 때부터 '그냥' 아무 신문이나 보고, 개발 독재 하에서 반공 기치를 주입받으며 자라고, 가치관 형성의 계기도 없이 돈벌이에 휩쓸려 나이를 먹은 세대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거대 신문의 의도에 충실히 영합하는 조영남이란 인물은 한 특정 세대의 사상적 공백 상태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하다.

조영남의 인맥

조영남의 폭넓은 인간 관계는 이미 서두에서도 드러났지만, 연예계와 정치계를 넘나들고 나이와 활동 분야를 막론한다. 조영남은 얼마나 자신의 벗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던지, 이런 글을 스포츠 조선에 기고하기도 했다.

유명인들과 특정 장소가 아닌 그냥 보통 장소에서 보통 옷차림으로 아무 제목도 없이 만나 불고기나 냉면이나 포도주를 나누는 일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이쯤에서 당신은 당연히 충격을 받아야 한다. 당신이 사람 같으면 이런 경우에 질투심을 느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럴 때 꼭 삐지는 사람이 있다.
"어머! 난 유명인 안 밝혀! 취미 없어. 밥맛없어!"
이러면서 말이다. 나는 평소에 두리뭉실 비교적 양순한 편인데 DDR(딴따라) 쪽의 이름만 들어도 괜히 눈살을 찌푸리거나 짜증을 내는 인간들,TV를 안 본다거나 연예인들을 모른다며 우아를 떠는 일부 돼먹지 않은 인간들을 보면 나는 울컥 무자비한 살해의 충동을 느끼곤 한다.
살인은 대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도 바락바락 우기다가 졸지에 피해를 당한 경우가 작년 한 해에 74건이나 있었다.
"아! 조영남 저 인간이 뭔데 생긴 건 꼭 뒷마당 머슴처럼 생겼는데 우리나라 최고의 지휘자를 만나고, 우리나라 최고의 명배우 명감독을 만나고,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배우 박정자 윤석화 등을 줄줄이 사탕으로 만난단 말야?"
이런 식으로 덤비다가 당한 거다.(조영남의 횡설수설 '유명인도 별 게 없다' 중에서)

뿐만 아니라 그는 쉴 새 없이 자신의 든든한 '빽'과 유명한 벗들을 자랑하고 글의 소재로 활용한다.

오래간만에 조영남의 이름으로된 초대장 하나를 만들었다. 이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한달가량 공연되는 진짜 브로드웨이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구경오라는 초대장이다. 만일 돈을 내고 구경할 경우 얼마짜리 티켓에 해당되는 거냐. 10만원이상 내야되는 티켓이다... 무슨 돈으로 그 많은 초대장을 보냈느냐, 아니면 무슨 빽이 있는거냐?... 전번에 '캐츠'를 우리나라에 들여왔던 사람이 다름아닌 CMI 회사의 대표 정명근씨다. 정명화, 경화, 명훈 음악형제의 제일 윗형이다... 어느날 정사장을 만나 "전번에 내가 내 친구들한테 '오페라의 유령' 표 10장을 사서 내 친구 이성미, 주병진, 류시현 등등한테 줬더니 그렇게들 좋아하더라. 그런데 방송국의 이남기 김영선 신종인 등등한테 표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가 펑크를 내서 이번엔 하늘이 무너져도 표를 사줘야 한다"고 했더니, 정사장 왈 "거, 표 10장으론 해결이 되겠소? 아는 사람 죄다 부르시오. 표 값은 내가 계산하리다."
이렇게 된 것이다...나는 내가 아는 친구들, 지인들, 정치인들, 문화계 인사들의 이름을 죄다 댔다. 그래서 무려 400명으로 늘어났다. (조영남의 횡설수설 '여름밤 우정의 초대장' 중에서)

지난주 금요일(12일) 오후 6시 나는 박관용 국회의장과 저녁을 함께 했다. 그것은 일종의 특별한 체험같은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회의장과 식사를 함께 하겠다는 상상이나 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하는게 상책이다. 동네 어른이나 학교의 스승 정도로 여기고 "식사나 한번 하실까요?" 했다간 냥패를 겪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영남의 횡설수설 '국회의장과의 만찬' 중에서)

이렇듯 조영남에게 있어 인간관계, 광범위한 커넥션은 일종의 '권력'이다. 하다못해 영화 한 편 보러 갔던 얘기를 하는데도 함께 간 여자들이 어떤 유명인인지 시시콜콜 털어놓는다. 김홍신 의원 이야기는 거의 모든 글에서 빠지질 않는다. 입당을 놓고 민주당이냐 한나라당이냐로 고민하다가 친구가 있는 한나라당 쪽을 택한다는 이야기는 사상적 공백의 차원을 넘어 '인맥'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는 세대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만 같다.

이는 사실 조영남 개인만의 특성이 아니라, 그가 속한 세대 차원의 광범위한 '삶의 포즈'이다. 그리고 일반화된 한국 사회의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 관계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나보다 꿀리지 않아야' 하고, 나에게 실제적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직장을 다니는, 좋은 학교를 나온, 명망있는 상대에게는 적극적으로 친분을 맺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 상대와 친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내 아는 사람 중에 검사가 있는데' 내지는 '내 친구가 대기업 이사를 지내는데' 하는 식으로 만방에 떠벌인다. 대단한 사람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스로도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속성을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본인도 유명인이면서 유명인들과 친함을 과시하는 조영남은 참으로 특이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냥 순수해서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속물'의 태가 묻어 난다.

조영남의 성공시대

조영남이 그가 속한 세대를 대변하는 사례는 그 외에도 더 있다. 이혼 경력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젊은 여성들을 편력한다고 과시하는 조영남은 지하철에서 여성의 몸을 유심히 관찰하는 중년 남성의 시선을 상기시킨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농담과 조소와 궤변으로 대충 마무리짓는 그의 글은 목청 높은 사람이 승리하는 중년 세대의 법칙을 간접 증명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서두에 언급한 조영남의 '성공한 인생'이 그가 대변한 세대의 특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조영남은 끊임없이 노래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며 쉴 틈 없는 인생을 보낸다. 하지만 비평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예술 활동 가운데 어느 하나도 '성취'라고 부를만한 부분이 없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그의 성공이란 것이 실제는 '인간관계'와 '언론권력'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가짜'임을 깨닫게 해 준다.

조영남의 성공에는 일종의 패턴이 존재한다. 가령 그의 전시회 같은 경우. 전시회에 수 백 명의 각계 인사(전부 친한 사람들이다)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작품의 예술성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대신 각계에 걸친 인간관계는 없는 예술성도 만들어내는 마법을 발휘할 수 있다. 우선 '조선일보' 문화면에서 조영남의 전시회를 보도하고, 방송의 연예 프로그램에서 취재함으로 '홍보'의 기회를 얻는다. 아울러 전시회와 관련해 예술계 인사들의 '립서비스' 몇 마디가 이어지면 이는 작품을 실제로 본 일이 없는 대중들에게 '그림도 잘 그리는 구나'하는 식의 '고정관념'을 부어 넣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가 노래하는 공간은 실상은 관제 노래자랑 대회로 전락한 '열린 음악회' 뿐이며, 그곳에서 그는 성악도 가요도 아닌 모호한 창법으로 남의 노래들과 본인의 유일한 히트곡 '화개장터'를 열창한다. 이따금씩 음반도 내지만, 거기서 예술적 성취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조영남의 글을 정기적으로 실어주는 매체는 '스포츠조선'과 '조선일보' 뿐이다. 정상적인 편집장이라면 '비속어'가 난무하고 자기 자랑 이외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는 조영남의 칼럼 같은 것은 지면에 싣지 않을 것이다. 물론 조영남은 공개적으로 조선일보를 옹호하는 친 조선 필자이므로 조선 편집장 입장에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다.

이쯤 되면 조영남의 불가사의한 성공 신화에 조금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못생긴 외모와 난삽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 칭송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 성공을 거두는 보편적인 방식을 잘 말해준다 하는 편이 올바를 것이다. 조영남의 경우를 보면,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기득권층에 면밀히 영합'하는 사상과 생활 방식을 지니며, 그 둘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영리하게 활용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일반적인 중년의, 속물 남성들의 살아온 방식과 궤적이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비극적인 개발 독재의 철퇴를 미처 사고와 판단이 성숙되기도 전에 두들겨 맞은 '어른 세대'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 남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런 조영남과 그의 세대는 20대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뻘' 되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는 엄청난 비극이다. 얼마 전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은 "50대가 20대를 잘 이끌어서 좌편향의 30대를 압박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단순무식한 극우 논객(보수층에게조차 놀림감이 되는)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치밀한 발상임에 틀림없다. 조영남과 같은 '아버지뻘'의 50대가, 비슷한 특성을 지닌 20대를 구슬러서 '속물'의 인생 패턴을 답습하게 한다면 이는 역사의 퇴행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행히도 20대는 많은 부분에서 조영남과 그 세대의 특성을 닮아가고 있다. 미디어를 맹신하고 주류와 권위에 순응하며, 정치와 이념 문제에 있어 최대한 무관심하고 물질적인 성취에 경도되는 특성은 50대나 20대나 부전자전이다. 아버지가 구독하는 조선일보를 아들이 함께 보는 현상은 굳이 소년조선의 유소년 세뇌 전술이 아니라도 필연적이다. (20대 청년 조성모는 광고 화면을 통해 '저는 조선일보를 봐요'라고 속삭인다) 이는 반공을 몸으로 받아들이며 자라 '극우의 이론화'의 경지에 이른 60대와 아들뻘인 386의 관계와는 경우가 다르다. 386은 세상과 마찰하려는 이론적-현실적 필요를 느낀 이들이지만, 그나마 민주화된 지금의 20대는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쿨'하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실제로는 주류 입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속물의 성장 과정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문화적인 영역 하나만을 놓고 스스로 쿨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조영남, 혹은 그의 세대에 대해서는 가급적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최대한 '싫어하는' 혹은 '부정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다. 돌려 말하면, 조영남처럼 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예컨대 조영남처럼 조선일보만 보지 말고 다른 좋은 책도 좀 읽고, 없는 능력으로 여러 분야 손대지 말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좀 더 진솔하고 대가 없는 인간관계를 맺어 나가는 등의 노력 말이다. 조영남 세대는 죽고 나면 비참할 뿐이다. 문상객으로 이성미-이경실이 찾아올지는 몰라도 정명훈이나 조수미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고, 남겨놓은 업적이 없으니 나중에 이름 석자 기억해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달라진 건 조선일보 구독자가 하나 줄었다는 사실 정도일 것이다. 이런 삶이 되면 굉장히 심난할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조영남은 조갑제와는 달리 '무시'나 '폄하'의 대상이 아니다. 적극적인 '부정'의 대상이다. 조갑제야 그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없으니 무시해도 상관이 없지만, 조영남은 그 백지와도 같은 천진함을 무기로 삼아온 인물이다. 그래서 조영남에 대해서는 무시하지 말고 '철저히' 싫어해 줄 것을 권한다. 최소한 그래야 '가짜'나 '속물'이나 DDR 인생은 되지 않을 것 아닌가. 어찌보면 이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배성록 beatlebum@orgio.net
비틀범  : http://imazine.hihome.com/






조영남의 '진짜' 가수론  

우리가 이 태생적인 리버럴리스트를 만난 것은, 미국 동서부를 잇는 순회공연을 막 끝내고 돌아온 그가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도 못한 어느날 오후였다. 뉴욕, 워싱턴, 라이베이거스, 보스턴 등에서 각각 러닝타임 3시간의 공연을 흡족하게 치른 그는, 이번 공연이 자신의 생애에 기록될 '베스트' 공연들이었다고 스스럼없이 밝혔다. 그는 "가수생활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너무 환영해준 탓에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가 되기도 했다"는 소감도 덧붙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떻게 3시간의 솔로 공연이 가능하느냐"는 질문에,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스타일로 노래하면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일찌감치 70년대부터 익혀둔 노래에 대한 노하우가 발휘된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60~70년대 배워둔 노래들은 진정한 노래였다.  


그러니까 청중들에게 먹힌 거다. 그것만이 지금 승산의 요인이다. 김건모나 조성모 같은 친구들이 가면 두세 시간을 무슨 방법으로 하겠나. 물론 그들이 가면 전혀 다른 관객들이 오긴 하겠지만. 난 나대로의 방법을 터득했다고 본다"고 답했다.

GQ 거기서부터 질문을 시작하겠다. 당신이 진정한 노래를 익혔다는 1970년대는 누군가의 표현대로라면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로 불린다. 그리고 당시 당신과 한 무리를 이뤘던 일군의 가수들은 대중음악사에 각각의 개성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니까 다음의 질문들은 한 번도 현장을 벗어난 일이 없는 당신이, 70년대의 가수들과 그 이후의 가수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조영남 내 생각에 가수는 노래만 해서는 안 된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봐라. 그들은 시인이자 철학자들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도 철학자였다. 철학이 아니면 마약이나 퇴폐로 빠지는 거다. 지미 핸드릭스 같은 경우는 퇴폐로 영혼을 특이하게 만든 거다. 아티스트는 남과 다른 존재다. 남과 같은 존재가 아티스트인가? 다 같은 존재라면 뭘 볼 게 있나. 달라야 된다. 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좋은 쪽으로 내달렸다. 미술, 신학 등의 방향으로. 그래서 이렇게 된 거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치열하게 데카당스 쪽으로 영혼을 연마하는 식을 택하느냐, 그래서 그것으로 아티스트가 될 거냐, 아니면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냐, 이런 문제로 잔머리를 많이 굴렸다.

GQ 요즘 가수들을 바라보는 조영남의 직접적인 코멘트부터 듣고 싶다.
조영남 요즘 가수들은 모두 안절부절, 불안해한다. 얼굴 편한 경우 봤나? 방송 나와서는 웃겠지만, 그 내면으로 들어가봐라. 기초가 없는 데다, 앨범이 안 팔리면 일거에 깨진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그건 김건모, 조성모 같은 톱도 마찬가지다. 부풀려 놓은 몇 억짜리 리치를 못하면 한 순간에 잊혀진다는 생각 때문에 엄청나게 불안해한다.

GQ 당신이 대중음악에 입문하고 활약했던 70년대는 안 그랬다는 얘긴가?
조영남 우린 안 그랬다. 송창식, 조동진, 이장희, 윤형주, 김도향, 양희은, 김민기, 김정호, 김현식 등등. 그때는 인기가 우릴 띄우고 인기가 우릴 떨어뜨린다는 사고가 없었다. 맨날 붙어다니고, 이장희네 칙칙한 아파트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그냥 눌러 살고. 그러니 내가 보기에 요즘 가수들은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것 같다.

GQ 흔히 말하는 라이벌 의식도 없었나? 만약 없다면 혹시 당신만의 기질이 발동한, 너그러운 판단은 아닌가?
조영남 진짜, 진짜, 진짜, 없었다. 그게 있다면 뭉치고 다녔겠나. 그 시절의 알리바이에 대해서는 사진가 김중만이 증인 서 줄 거다. 우리에겐 서로 라이벌이라는 것을 느낄 구조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 윤형주가 송창식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꼈겠나? 개성이나 창법에서 둘이 워낙 다른데. 그런 걸 떠올리면 우린 참 젠틀했던 것 같다. 요즘 친구들은 돈 버는 걸 삶의 기준으로 여기고, 앨범 몇 장 파는 것에 목을 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경우는 판을 몇 장 찍는 줄도 모르고, 파는 줄도 몰랐다. 그만큼 음악경제에 관심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도 지금 성공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으니까, 라이벌 의식도 굉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앞서 말했지만 요즘은 극히 커머셜화됐다. 요즘 벌어지는 좋지 않은 상황, 앨범이 팔리는 게 가수들 인격의 기준이 되는 것들, 그것은 가수들의 잘못이 아니다. 예전에는 앨범 팔리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게 기준이었다면 조영남은 가수도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GOD 몇 장 팔았다' 그게 기준이다. 컴퓨터의 등장 이후에는 인간 자체가 컴퓨터화, 기계화, 커머셜화된 거다. 우리 시대에는 교통, 통신이 없었다. 가야 만나고 얼굴 봐야 얘기하고. 그런데 지금은 핸드폰 가지고 모든 걸 다 한다. 그리고 그만큼 선택권이 많고 다양한 시대가 도래했다. 그만큼 인간관계의 내용이 달라졌다. 다시 말해 시대가 바뀐 거다.

GQ '그때 그 사람'들은 모두 당대를 뛰어넘어 지금까지 이름을 남겼다. 가수들 이외에도 최인호 같은 작가, 문호근 같은 음악가들, 지금은 뮤지컬 연출가로 이름이 높은 김민기, 명 MC로 불리는 이상벽, 음악평론가 이백천 등이 함께 거론되면서 그 연대를 증명하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다.
조영남 난 어느 때는 두렵고 공포스럽다. 나하고 눈을 마주친 사람들이 모두 성공했으니까. 재미있는 존재들이어서 만났던 김홍신, 김한길이 정치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샌님같았던 작가 최인호가 이름 높은 소설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이장희, 윤형주는 음치였다. "어차피 너희는 가수 안돼"라고 수없이 얘기했다. 그런데 전설적인 가수가 되지 않았나.

GQ 70년대 이후를 풍미한 '그때 그 사람'들,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김세환, 조동진 등에 대한 짧은 품평을 곁들여달라.
조영남 윤형주는 조금 과장해 말하면 귀공자다. 집안도 아주 좋았고, 목소리나 모든 것이 귀공자였다. 그런가 하면 송창식은 천민이다. 고향이 어딘지, 나이가 몇 살인지, 뭘 하던 놈인지 아무것도 몰랐었다. 그야말로 정체불명. 송창식은 각설이 수준에서 머물렀어야 하는데, 가수가 됐다. 이장희는 혁명가다. 시 쓰는 혁명가. 체 게바라 같은 놈이다. 노래하는 재능은 제일 떨어졌다. 대한민국 누구나 가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조동진? 그냥 낚시로도 평생 살 수 있는 조태공이다. 아주 바위 같은 존재다. 노래도 그렇지 않나. 조동진의 노래는 강이고 바다고 바위다. 김세환은 평민이다. 아무 문제도, 아무 특징 없이 잘 자란 인간. 정상적인 것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수 하는 게 얼마나 쉬운가 하는 것을 다 보여준 존재들이다. 나? 나는 윤형주와 송창식의 중간이다.

GQ 당신이 보고 듣기에 7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를 통틀어 절창으로 부를 만한 진짜 가수가 있다면 누구인가?
조영남 송창식, 배호, 정훈희, 유재하, 김광석, 김정호, 김현식. 내가 참 신기한 게, 유재하, 김정호, 김현식 같은 죽은 친구들과는 관계가 없었다. 미국 있던 시절이니까. 김광석은 직접 봤었다. 요즘 가수는 윤미래, 그런데 요즘은 조금 시원치 않다. 그렇게 좋았는데….

GQ 윤미래 이외에 요즘 가수들 중에 노래 잘한다는 가수는 없나? 앞서 언급한 대로 가수가 노래만 잘해선 되는 시절이 아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신 나이가 됐을 때도 여전히 이름을 걸고 활동할 만한 가수, 혹은 그럴 가능성이 엿보이는 가수는 누구인가?
조영남 전혀 없다. (GQ 그건 요즘 풍토 때문인가?) 풍토 때문은 아니다. 난 왜 보아가 그렇게 인기있는지에 대해 이해를 못 하겠다. 물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건 아니다. 당신이 질문하기 때문에 내 생각을 말하는 거다. 보아 노래를 몇 번을 들었는데, 난 왜 저게 잘하는 건지에 대해서 아직도 모르겠다. 보아보다 노래 잘하는 친구들은 많다고 생각한다.

GQ 앞서 답변에서 유추한다면, 현재의 톱 가수를 포함해서 40대까지라도 활동할 거라고 생각되는 가수가 전혀 없다는 말인가?
조영남 지금 보기엔 없다. 외국에는 많다. 우리의 경우에는, 에바 캐시디나 이번에 그래미상을 석권한 노라 존스 같은 형태의 가수가 없다. 제니퍼 로페즈, 셀린 디온 같은 가수가 한 명도 없다.

GQ 에바 캐시디, 노라 존스 같은 형태의 가수가 없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조영남 그런 가수들이 진짜로 노래 잘하는 가수다. 스탠더드한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 에바 캐시디는 'Over the Rainbow'를 불러서 유명해졌다. 예를 들자면 그런 노래를 잘 불러야 된다. 즉, 나를 감동시켜야 된다는 거다. 에미넴 같은 경우 정말 날 감동시킨다. (GQ 에미넴은 전혀 다른 랩 장르 아닌가? 그래도?) 물론이다. 장르가 달라도 가슴이 뭉클한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 에미넴의 노래에 대한 의지, 분노는 철학적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날 감동시키는 가수가 없다. 보아? 뭘 노래하는지를 모르겠다. 도대체 한 마디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한동안 윤미래가 참 잘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요즘은 스피릿이 짧게 느껴진다.

GQ 톱 가수들 중 김건모 같은 가수들은 노래 잘한다는 소릴 듣지 않나?
조영남 잘한다. 하지만 날 감동시키진 못한다. 그냥 재미있게 노래한다는 생각은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요즘 가수들에게서 송창식이 '우리는' 부를 때, 이장희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부를 때 같은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보첼리가 노래부를 때 봐라. 셀린 디온은 소름끼치게 잘한다. 그런 경우가 우리 가수들 중에는 많지 않다.

GQ 어쩌면 그런 관점, 즉 스탠더드한 노래를 잘 불러야 노래를 잘하는 것이다라는 관점은 당신이 속한 세대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조영남 천만에! 앞서 말했지만 에바 캐시디가 내 연배와 관계있는 선택인가? 그래미를 석권한 노라 존스는? 그게 연배와 관련된 관점이라면 어떻게 그들이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겠나.

GQ 다른 나라 역시 비슷한 상황일 텐데, 미국 가수들의 경우 스탠더드를 잘 소화하는 반면, 우리 가수들이 그렇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조영남 우리의 경우는 무식해서 그런 거다. (GQ 한국의 가수들이?) 아니다. 교육이 그렇다는 거다. 우리나라에는 전인교육이라는 게 없었다. 음악이 뭔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음악이 삶, 윤리, 도덕, 물리, 수학과 함께 뭉뚱그려진 것 중의 하나가 아니라, 별개의 플레이, 게임처럼 되어버렸다. 심히 우려된다.

GQ 그것을 교육계 풍토라고 한다면,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계 풍토는 그런 가수들만 양산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조영남 장사가 되니까. 그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GQ 70년대 당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시점을 잠시 언급하고 싶다. 당시 '대중음악 르네상스의 근거지'로 불리던 음악 감상실 <세시봉>에는 '성점감상실(星占鑑賞室)'이라는 독특한 품평 시스템이 있었다. 작곡가, 가수, 노래 제목을 전혀 알려주지 않고 노래를 들려준 다음 솔직한 코멘트와 함께 별점을 매기는 방식이 그것이다. 당시 회고를 보면 별 10개 만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고도 하고, 그 결과가 주간신문에 실리고, 그 별점과 코멘트는 전문 평론가는 물론 객석의 관객도 함께 했다. 이 방식은 서태지가 '난 알아요'로 데뷔하던 시절 평론가 이백천이 모 공중파 방송국에서 똑같이 재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시스템을 장황하게 언급하는 이유는 이런 시스템을 요즘 다시 도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은 트렌드에 발맞춰 거기에 걸맞는 가수를 '제작'하는 방식 아닌가?
조영남 그런 절차는 자생적으로 생겨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점차적으로 내가 선호하는 류의 가수가 생겨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 가지 사례를 말하면, 요즘 미국에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아메리칸 아이돌>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남자 둘, 여자 한 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미 전역을 돌면서 심사하는 내용인데, 거기서 1등을 하면 레코드를 취입시켜준다. 심사위원의 면면도 확실하다. 그 중 영국 출신의 레코드 제작자는 완전히 스타가 됐다. 기본적인 심사방식은 노래부른 가수를 앞에 두고 코멘트하는 방식인데, 형편없이 몰인정한 코멘트가 튀어나오면 오디션 본 친구가 화내면서 나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심사위원끼리의 평가도 엇갈리기 일쑤다. 그러면 그들끼리 또 싸운다.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ARS 채점 방식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오디션에 참가해서 순위에 오른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가 거의 스탠더드한 팝이라는 점이다. 물론 오디션에 응하는 친구들 모두 엄청나게 잘한다. 이런 사례만 봐도 한국과 미국은 풍토가 다르다. 내가 지금 이 프로그램을 하려고 생각 중이다.

GQ 이런 프로그램이 생기면 국면 전환이 가능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여전히 강고한 모습을 띠고 있는 요즘 대중음악계의 풍토는, 노래는 필요없고 춤만 잘추면 된다는 댄스 가수들, 컴퓨터로 한 음 한 음 따다 음악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가수들이 TV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그런 풍토가 전체 대중음악계의 폭을 얇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조영남 그러니까, 그 친구들이 시간이 흐르면 인생이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소리없이 사라진 가수들이 얼마나 많나. 분명한 것은 그 시스템이 가수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 군상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거다.

GQ 혹시 당시에는 70년대 대중음악계의 좌장이라 말할 수 있는 평론가 이백천 선생이 사감처럼 굴어서 분위기가 엄격했던 것 아닌가?
조영남 천만에! 정반대였다. 우리 때는 오디션이라는 게 없었다. 그냥 노래 잘하면, 잘한다고 생각되면 올라가서 노래했다.

GQ 앞서 말한 프로그램이 한국에서 제작된다면 연배 있고 감식력 있는 가수, 프로듀서, 음반 제작자 등으로 심사위원이 구성되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후보로 꼽을 만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조영남 질문 좋다. 하지만 금세 떠오르지 않는다. 만약 한다면 나와 반대 의견을 가진 제작자, 표현력이 있는 사람이면 좋을 것 같다.

GQ 당신이 크리티컬한 코멘트를 하면서 악역을 한다면 흥미로울 것 같다.
조영남 악역도 하고, 좋은 역할도 하겠지. 노래라는 것은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도 하도 이렇게 불러보라고도 하고. 물론 미국처럼은 되지 않을 거다. 우리화되겠지.

GQ 미국과 우리는 풍토가 달라서, 미국은 스탠더드하게 노래를 잘해야 다른 노래도 잘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경우는 어느 하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박지윤은 절대 스탠더드한 노래를 못 부를 것 같다. 그런데도 그 가수의 창법을 좋아하는 팬들은 그런 노래만 좋아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지지를 보낸다. 다른 사례로 윤미래의 노래를 좋아하면 그런 노래만 들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만약 앞서 언급한 프로그램 심사위원석에 앉아있다는 가정하에 어떤 방식의 코멘트를 할 수 있을까?
조영남 노래를 잘한다는 것이 뭔가를 알려주고 싶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 앞서 말한 노라 존스, 에바 캐시디의 노래가 왜 잘하는 노래인지 알려주고 싶다는 거다. 찬송가도 잘 부르고, 동요도 잘 부르는 가수가 진짜 가수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싶다는 거다.

GQ 당신의 언급은 대중음악을 소비하는 10대 혹은 20대 수용자층에겐 낡은 세대의 입장으로 읽힐 수도 있다. 만약 그 세대가 당신에게 '스탠더드를 못해도 자기 노래만 잘하면 되지 않나?'라고 되묻는다면 어떻게 답할 수 있나? 예를 들어 이정현 같은 경우는 라이브 무대에서 무리수가 있어보이
지만 팬도 많다. 그리고 트렌디한 노래를 소화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대중들 역시 지지한다. 그 대중들은 오히려 당신의 관점을 구세대적 기준이라고 되물을 수 있다. 만약 그런 사례가 당신에게 오디션을 보러 온다면 어떤 방식으로 언급하겠나?
조영남 그럼 이렇게 말하겠지. "너는 '바꿔'로 선풍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긴 하지만, 나는 전혀 감동이 없다. 네가 만약 지금 셀린 디온의 'Power of Love'나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네 스타일로 불러서 날 감동시키면 그때 난 널 잘하는 가수라고 인정하겠다. 그렇게 되면 '바꿔'도 잘한다고 포함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부르라는 것을 못 부르면 좋은 가수라고 할 수 없다. 만약 그런 기준을 두고 구세대라고 하면 당연히 난 구세대이다. 단지 네가 나에게 물었기 때문에, 내 기준을 대답하는 거다. 그 구세대의 기준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그냥 '바꿔'만 부르면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노래만 부를 거냐는 거다. 조금만 지나면 네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서른 살만 되면 청중은 등을 돌리는데, 그때도 '바꿔, 바꿔'만 할 거냐. 가수로서의 네 인생이 얼마나 긴데. 조금 덜 선풍을 일으켜도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이 네 노래를 따라부를 줄 알아야 40세가 되어도 노래를 하고 있을 거다"라고 어드바이스할 것 같다. 그건 아마도 심금을 울리는 어드바이스가 될 거다. 물론 요즘 친구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안다. 요즘 가수들은 인기를 얻지 못하면 다른 길로 간다고 쉽게 말하고 방송에 나가는 것에만 몰두해 있다. MTV 같은 프로에 몇 번째 나와서 노래하느냐 하는 게 그들의 관건 아닌가? 그런, 전전긍긍해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들을 보면 측은하다.

GQ 요즘 대중음악계 풍토 중에서 프로듀싱에 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어쨌든 가수를 '찍어내는' 풍토의 한 편에는 그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조영남 최근 한국 대중음악의 프로듀싱은 일본을 따라가는 것 때문에 망한 거다. 이수만이 가수를 조립하는 사례 같은 게 그렇다. 훈련에 의해서 가수를 찍어내기 시작하면서 음악 감성들 자체가 변질되기 시작했다. 조영남, 조용필, 김현식까지는 가수를 조립하는 게 아니었다. 찍어내는 시기는 서태지를 포함해서 그 이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탠더드를 한 번도 한 일이 없다. 비틀즈? 얼마든지 스탠더드를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스탠더드, 얼마나 좋은가. 스탠더드 없이 그냥 자기 노래만 찍어내기 시작한 걸 서태지가 턴 시키고, HOT, GOD, 신화에서부터 찍는 가수가 양산되기 시작한 거다. 내 생각에는 그 와중에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한두 명쯤은 나올 줄 알았는데, 없다. <열린음악회>에서 내가 듀엣 한번 하자고 쫓아다닐 만한 가수가 없다. 이선희 같은 가수가 나올 듯 하면서도 안 나온다.

GQ 당신은 70년대 이후 몇 년의 미국행을 제외하면 늘 현장에 있던 가수이다. 그렇다면 요즘 풍토에 대해서 비판적인 코멘트를 던질 수 있는 선배의 자격도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된, '찍어내는' 가수들을 양산해냈던 이수만 혹은 가수들보다 엔터테이너만을 양산하는 매니지먼트 풍토에 대해서 비판적인 코멘트를 한 일은 없나?
조영남 그게 나쁘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런 현상만 있을 뿐이지. 그리고 난 그런 현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비판적인 코멘트를 해대며 나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그렇게 다양하게 살아야 된다. 애석한 것은 균형이 맞지 않는 풍토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왜 비틀즈가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비틀즈가 나오려면 철학도 있고, 시도 쓸 수 있는 존재들이 등장해야 된다. 우리 가사들을 보면 시라고 얘기하기 이전에, 랩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니다. 예술, 물리, 철학은 한 사람의 리더, 초인적인 경향의 영웅이 바꾸는 경향이 있다.

GQ 서태지에 대한 조영남의 평가가 궁금하다.
조영남 굉장히 재주가 많은 친구, 한국화된 독특한 한 장르를 가진 친구다. 하지만 내 취향의 음악은 아니다. 비틀즈가 아니라는 거다. 그의 시에서 한 구절이라도 좋은 게 있다면 평가가 후하겠지만, 그런 건 안 보인다. 비틀즈는 얼마나 시적인가. 너바나, 핑크 플로이드는 얼마나 어마어마한가. 그들은 시인이며 철학자다.

-GQ-







조영남의 횡설수설, 스포츠조선 칼럼  



조영남 - 뚫린 길은 다 가봐라

지금 스포츠조선의 `조영남 칼럼'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들께선 한가지 실험에 참여하고 있는거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대단히 중대한 실험이다.

`사람이 만취 상태에서도 온전한 글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거다.

어제, 엄밀히 말해서 오늘 아침까지다.

새벽 다섯시 반까지 나는 양주 두병을 마셨다.

내 친구 이장희가 묵고 있는 신라호텔 방구석에서 였다.

이장희는 왕년에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건 너' 등을 직접 만들어 부른 인간이다.

해외에서 돌아온 친구와 나는 밤새 술을 퍼마셨고 아무 줄거리도 없는 얘기들을 한도 끝도없이 늘어 놨다.

맨 이런 얘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친구녀석들은 모두 웃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구 얘기부터 시작할까?

가령 송창식을 보자.

그 인간은 낡은 기타와 노래만 빼면 깡통 놓고 육교 밑에 앉아있는 거렁뱅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은 계룡산에서 내려온 듯한 산신령이 되어버렸다.

김도향이도 마찬가지다.

윤형주는 아버지 엄마가 `의사가 되거라, 의사가 되거라'했는데 의대 때려치고 바락바락 노래를 하더니 지금은 젊잖은 예배당의 장로님이 되셨다. 할렐루야!

김세환, 이 인간은 도무지 나이를 잊었다.

예쁜 색시와 일식집을 차렸다가 손님들이 주는 술을 많이 받아 마셔야 된다며 때려치고 자전거 한대를 샀다.

자기 말로는 상당히 비싼 자전거란다.

그 자전거를 타고 어딜 쏘다니냐.

하다못해 잔 심부름을 한다거나 자장면 배달을 한다면 모르겠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곳은 산이라고 한다.

내가 `얌마 자전거를 타고 어떤 산을 올라가냐'고 악악됐는데도 산으로 올라간단다.

올라갔다가 또 그걸 타고 내려온단다. 허구헌날 그짓이다.

조동진이가 허구헌날 낚시질 가는 건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자전거를 타고 등산을 한다니 참.

김민기는 어떤가.

그 좋은 베이스 바리톤의 노래는 무자르듯 싹 끊고 지금은 얄궂은 극장문만 매일 열고 닫는다. 느닷없이 극장지기가 됐다.

이장희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음치였는데 무슨 귀신장난인지 천하의 명가수가 됐다가 어느날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사라지더니 지금은 LA 최대의 방송사 사장이 되어버렸다.

이남기란 작자는 TV 방송국의 일개 쇼 PD였는데 무슨 내막이 있는건지 지금은 느닷없는 SBS의 보도본부장 자리에 올라가 앉았다.

김한길은 아무 소설이라도 써서 먹구살고 방송 MC로도 충분히 먹구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더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자리까지 올라가 있다.

조영남은 그야말로 `화개장터' 이후 히트곡 하나를 못내고 느닷없는 미술 전시회를 지금 성곡 미술관에서 버젓이 열고 있다.

아! 이나라에는 이토록 인물이 없단 말인가.

술깨기 전에 한마디만 더 하겠다.

`한 우물만 파라' `한길만 가라' 이건 영 틀린 말이다.

나보다 나이가 젊은 인간들 한테만 얘기하겠다.

뚫린 길이 있으면 다 쑤시고 가봐라.

김한길 조차도 여러길을 헤매다가 제 길을 가고 있다.

내 친구들을 보면 알것 아니냐.

지금은 술이 거의 다 깼다.[가수]


기사 링크 : http://sports.chosun.com/life/topic/column/list_ync.asp







조영남, 인물탐험  



56세에 다시 뜨는 노래꾼」 趙英男의 女難과 배신, 人生과 예술
『내 유산은 내가 죽을 때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여인의 차지…그러나 한 여자라면 서운하다』

●『예수는 네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어요. 이런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말이 예수의 가르침 중 핵심이지요』
●『나는 한번도 여자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어요. 언제나 내가 먼저 도망을 쳤지요. 배신하는 것은 언제나 나였어요. 마음이 맞아 만나고, 만나다 보면 불꽃이 타오르게 되고, 그때쯤 되면 반드시 과속을 해서 충돌ㆍ파멸할 것이란 생각이 들고…완급 조절을 하게 됩니다. 충돌해 본 경험이 있어서지요. 그걸 여자들은 이해 못하더군요…』
●『나는 여자가 끊이딜 않았어요. 그것도 하나가 끝나고 다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오버랩되듯 자연스레 대상이 계속 바뀌는 겁니다…』

李珖求 자유기고가





8년째 「체험, 삶의 현장」 진행
『내가 왜 다시 뜨기 시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예수의 샅바를 잡다」
몇 대째 기독교 믿어온 집안
「아버지의 병=나의 성공」
金連俊 총장이 발탁
女難의 시작
통기타 가수 선두주자
『펄 시스터스와 제가 트리오를 만든 걸 아시나요』
『넓은 물에 나가니 예쁜 여자도 많더군요』
대중가수가 되다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李兌榮여사와의 인연
어머니의 예수, 나의 예수
예수가 위대한 이유
예수論을 생방송 강의
『여자 때문에 울어본 적이 없어요』
30년 만의 콘서트
가볍게, 즐겁게, 조금씩 깨작깨작…
이백천과 오태석
절제와 치열함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TV에서 가수 趙英男(조영남·56)을 보아 왔다. 매주 화요 일 저녁의 「체험, 삶의 현장」과 주말 저 녁의 「열린 음악회」가 그것이다. 본인의 오프닝 멘트를 빌리자면 「체험, 삶의 현 장」에서는 「현장 감독」이란다. 요즘은 「열린 음악회」는 쉬고 있고, 고정으로 나 가는 프로는 「체험, 삶의 현장」 뿐이다. 본업이 가수인데, 음악 쪽은 쉬고 있고, 생활교양프로에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체험…」은 올해로 8년째다. 드라마 「전 원일기」 다음 가는, 보기 드문 長壽(장수 ) 프로그램이다. 시청률에 따라 프로의 존 폐가 덧없이 명멸하는 실정에 대해서는 일 반 시청자보다는 방송 종사자들이 때로 自嘲(자조)하기까지 하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바인데, 방송계 사람들은 드라마도 아닌 「체험…」의 장수를 가리켜 「기적」이라 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그러면서 『건전하면서도 재미와 웃 음이 있고, 사회 각계각층의 저명인사가 등 장해, 그야말로 평범한 이웃들의 「삶의 현 장」에서 땀을 흘리며 진실을 나누는 모습 이 가슴에 와 닿도록 만든 것이 장수의 첫 째 비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 내 용과 포맷에 못지 않게 결정적인 것은 조영 남과 李敬實(이경실·35)에게 사회를 맡긴 , 캐스팅이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요즘 「체험…」의 시청률은, 가히 폭발적 이었던 초창기 때 인기에 비한다면 다소 떨 어져 있지만, 그래도 15∼20% 선은 유지하 고 있다. 그 정도라도 대단한 수치다. 작년 에 4개월 가량 趙英男은 잠시 「체험…」을 떠났었다. 똑같은 사람이 너무 오래 한 것 같다는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趙英男과 이경실이 떠나자 「체험…」의 시 청률은 급전직하했다. 새로 바뀐 MC들의 역 량이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맛이 달랐기 때 문이었다. 7년여 동안이나 趙英男·이경실 콤비의 기탄 없는 언사와 자유분방한 진행 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의 입맛인지라, 조· 이 콤비가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 왔어도 오 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이 콤비가 돌아오면서 시청률은 다시 상승곡선을 그 리고 있다.
趙英男은 올해 56세 아니면 57세가 된다. 6·25 前에 황해도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월남한 것은 확실한데, 태어난 해가 해 방 직전인 1944년인지, 해방되던 1945년인 지가 애매하다. 본인은 『두 가지 설이 있 다』고 익살을 부린다. 『확인해 줄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는데, 두 분 모두 지금은 경 기도 軍浦(군포) 땅에 잠들어 계시기 때문 에 확인할 길이 없다』고 한다.




연예계는 일반적인 연령이 적용되지 않는 동네여서, 특히 연기자의 경우는 50대 후반 이라 해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가수는 다르다. 얼굴의 주름은 원숙과 노련과 중후의 표현이 필요로 하는 소도구가 되는 것이나, 가라앉은 성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팬에 대한 예의가 아니 다.
그래서 趙英男도 어느 때부터인가 노래를 접고, 진행자로 돌아선 것인지 모르겠는데 , 가수에게 돌아갈 진행자의 자리란 것이 많지는 않을 것이기에 앞으로 조영남은, 당 분간은 지금처럼 일주일에 한 프로 정도를 맡아 「생활」은 하겠지만, 시쳇말로 새롭 게 뜨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처럼 보 였다. 사람들도, 본인도 대충 큰 차이 없이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趙英男이 2001년 들어 느닷없이 뜨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본인 스스로 『내가 왜 다시 갑자기 뜨기 시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토로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뜨기 시작하는 조짐은 2000년 연말 부터 나타났다.

그 전까지는 일주일에 한두 번 TV에 얼굴을 내밀고, 연말이면 디너 콘서트 한 번 여는 정도가 고작이었건만, 지난해 연말부터 2 월까지 두어 달 사이에 趙英男은 「체험… 」이나 「열린 음악회」 말고 거의 한 週도 거르지 않고 각각 다른 프로에서 TV에 얼 굴을 나타냈다. TV에 나오는 것뿐만 아니라 각 신문과 유력 월간지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돌아가면서 한 번씩, 모양도 다양하게 記事(기사)로, 인터뷰로, 대담으로, 칼럼으 로 趙英男을 다루어 주었다. 지난 2월은 가히 피크였다. 간단히 예시하 자면 이렇다. 2월9일 금요일, KBS에서 「체 험…」의 녹화가 있었다. 그것은 2월13일 방영되었다. 2월10일에는 SBS에서 아침 생 방송이 있었다. 오전 11시에 「행복찾기」 2부에 나가 한 시간 동안 강연을 했다. 2월16일에는 SBS가 자랑하는 아침 토크쇼 「한선교·정은아의 좋은 아침」에 손님으 로 초청을 받았다. 2월17일에는 똑같은 SB S의 「행복찾기」에 나가 前週에 이어 다시 한 시간 동안 강연을 했다. 그리고 2월20 일 밤에는 EBS에서 정운영씨가 진행하는, 화제의 책을 소개하는 프로에 초청되어 대 담을 나누었다.

한국 방송사상 한 사람이 이처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TV에 등장한 것은 기록적인 일 이었다. 시쳇말로 「趙英男 신드롬」이라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신문·방송에 서는 하루가 멀다 않고 趙英男을 찾았을까.




기폭제는 趙英男이 지난해 연말에 펴낸, 「 예수의 샅바를 잡다」라는 제목의 한 권의 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샅바」는 물론 씨름판의 용어다. 그러니까 그 책의 제목 이 뜻하는 바는 예수와 한 판 씨름을 해보 겠다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한 집 건너 미용실, 두 집 건너 PC방, 세 집 건너 교회라고 한다 . 어딜 가나, 아무리 두메산골이라도 10가 구 정도만 모여 있는 곳이면 으레 교회 십 자가를 볼 수 있다.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 서방이 맞는다는 俗諺(속언)은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집 사님」이 맞는다는 것으로 대체되었다고 한 다. 그렇게 온통 기독교 천지요, 너도 나도 예수, 예수 하는데, 도대체 예수가 우리에 게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을 정면으로 묻고 싶다는 그런 뜻이었다.

시도한 뜻의 진지함에 비해 제목이 일단 도 발적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獨生子(독생 자), 神(신)이요, 인류의 구세주인데, 감히 맞붙어 한 판 드잡이질을 해보겠다니. 그 러나 거기까지는 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 다. 趙英男다운 기발함이요, 재치가 번뜩인 애교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도대체 예수가 우리에게 무엇이냐, 정말 나와 우리의 죄 를 赦(사)해 주고 永生(영생)의 길로 인도 하는 구세주냐 하는 것에 대해 한번쯤 진지 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그저 남들이 믿 으니까, 나도 믿는다는 식보다는 훨씬 바람 직한 신앙인의 자세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것은 不敬(불경)도, 僭濫(참람)도 아니었 다. 성경에도, 「믿음의 조상」의 계보 속 에도, 천사를 붙잡고 밤새도록 씨름을 해서 축복을 받아냈다는 야곱과 같은 인물이 등 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趙英男이 「예수…」를 통해 정말로 온몸을 던져 처절하게 고민하고 기도해 보니 예수 야말로 나와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임을 확 인할 수 있었다 라든가, 이제 인류의 종말 과 예수의 再臨(재림)이 임박했으니 모두 회개하고 구원을 받자라고 했다면, 趙英男 의 「예수…」는 야곱 이야기의 현대적 패 러디로 적어도 기독교 쪽에서는 갈채를 받 았을 것이다. 그러나 趙英男이 「예수…」 에서 말한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 니고, 신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수는 우 리가 믿어야 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의 행적을 연구하고,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하는 「위대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가수 趙英男이 어떻게 예수에 대한 얘기를 쓰게 되었는지를 말하자면, 사연은 좀 길 어진다. 趙英男은 이미 가수로서 뿐만 아니 라 화가로도 어느 정도는 이름이 알려져 있 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어 그 나름의 평판 을 얻기도 했다. 일찍이 가수 치고는 별난 가수임을 공인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 나 趙英男의 「예수…」는 별난 가수의 연 장선이나 또다른 해프닝 같은 것은 아니었다.


趙英男은 이른바 母胎信仰(모태신앙)이었다 . 양친 가정 모두 몇 대째 기독교를 믿어온 집안이었다. 어머니 金貞信(김정신) 권사 는 靈力(영력)이 뛰어나고 기도가 능력 있 는 것으로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1·4후퇴 때 남하해 趙英男 가족은 충청도 삽교에 터전을 마련했고, 趙英男은 중학교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 대목에서 趙英男은 『내가 「내 고향 충 청도」라는 노래에서 「1·4후퇴 때 피난 내려와…」라고 수도 없이 불러제꼈는데도 노래 제목만 보고 내가 충청도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니 그것 참 이상 한 일』이라면서 웃는다.

아버지(趙勝楚·조승초)는 성실한 농부였고 손 재간이 좋은 목수였다. 어머니와는 달 리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는데, 趙英男이 초 등학교 5학년 때 중풍으로 쓰러져 끝내 자 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대신 쓰러지고 나 서부터 예수를 영접해 세상을 뜨는 날까지 머리맡에 양철 소변통과 함께 성경책을 놓 아두고 읽고 또 읽었다.

얼마나 읽었는지, 자식들이 머리맡에 앉아 『아버지, 이사야서』하면 척하니 단숨에 이사야서를 펼쳤고, 사도행전 하면 척하니 사도행전을 펼칠 정도였다. 趙英男이 어머니를 따라 예배당에 다닌 것 은 물론이었다. 趙英男은 어려서부터 노래 를 잘 불렀고, 그림도 사실은 어려서부터 선생님보다도 잘 그린다는 말을 들었다. 따 로 배운 것은 아니었다. 하루 세 끼 굶지 않으면 다행이던 시절이어서 그럴 형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잘 부르고, 잘 그렸으 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 『물구나무서서 노래를 불러도 일등』이 었으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오페라 아리아를 불렀 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가을 학예회 때인데 , 담임 선생님이 나더러 독창을 하라고 하 시는 거예요. 동네에 보건소 비슷한 기관이 있었는데, 미국 사람들이 많았어요. 무슨 봉사단체 같은 곳에 속한 사람들이었겠지 요. 그 미국 사람들이 이번에 학예회를 보 러 오니 특별히 「오돌치」라는 노래를 불 러보라는 거예요. 「오돌치」가 무슨 소리 인지는 나도 몰랐고 선생님도 몰랐는데, 당 시 숭실대학 영문학과에 다니는 동네 형에 게 배워서 내가 노상 흥얼거리던 노래였지 요.

노래 시작이 오돌치 바 치오 어쩌구저쩌구 여서 나는 그냥 「오돌치」라고 알고 있었 어요. 아무튼 뜻도 모르는 채로 나가서 냅 다 불렀는데, 미국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더 라구요. 나중에 음악대학에 들어가서야 「 오돌치」의 정체를 알았지요. 푸치니의 오 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그 유명한 아리 아 「별은 빛나건만」이더군요. 그걸 초등 학생이 불렀으니 미국 사람들이 놀란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정식 악보를 보니 까 내가 그때 불렀던 「오돌치」와 음정 박 자는 물론이고 이탈리아어 가사까지 한 군 데도 틀리지 않고 똑같았으니까요』





삽교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趙英男은 고 학을 해야 했다. 아버지가 쓰러졌고, 어머 니의 힘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벅찼다.
『쓰러진 아버지는 말하자면 우리 가족에게 는 무거운 짐이었지요. 돈을 벌어 오시기는 커녕 일년 내내 가족들에게 오줌 지린내를 맡게 하셨으니까요. 특히 여름철의 그 냄 새는 가히 살인적이었지요. 그러나 지금 나 는, 지금의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성공 을 한 셈이라 치면, 「아버지의 병=나의 성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벌어야 했거 든요. 자립하지 않으면 안 되고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이 내 삶의 어떤 추진력이 된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가 있어요. 아버지가 쓰러지시기 전에는 목공 일에 워낙 솜씨가 좋으셔서, 집안에 필요한 가구 같은 것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직접 만드셨지요. 어릴 때 아버지가 뭘 만드시면 나도 옆에서 뚝딱거렸는데, 아버지 보시기 에 내 하는 짓이 오죽 알량했겠어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한 번도 너 그만 해라, 저리 가서 놀아라 하시지 않았어요. 그저 웃으면서 「놀멘 놀멘 하라우」 하셨지요 . 놀멘은 이북 사투리예요. 급하게 만들려 고 하지 말고 놀면서 천천히 해 보라는 말 씀이었어요. 그게 내 무의식 어딘가에 뿌리 를 내린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하든지 그저 즐기는 기분으로, 천천히 놀면서 하는 것 말이에요. 예전에 제가 살아온 얘기를 써 서 책을 낸 것이 있는데, 아시지요? 그 책 제목이 「놀멘 놀멘」이잖아요』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로도 날렸다. 그 시골 촌구석에서 서울의 명문 사대부고(서울대 학교 사범대학부속 고등학교)에 응시를 했 다. 낙방이었다. 2차에 대광고등학교에 응 시했는데, 거기서도 낙방이었다.

『재수는 꿈도 꾸지 못했고, 3차 무시험으 로 진학한 것이 보문동에 있는 강문고등학 교예요. 지금은 「용문」으로 이름이 바뀌 었지요. 지금은 평준화가 되어서 학교 차이 가 별로 없지만, 당시는 명문이다 아니다 차별이 심했잖아요. 3차 무시험이었으니 오 죽했겠어요. 모교를 욕되게 하는 것 같아 좀 미안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때는 깡패학교였지요…하하』

그러나 꿇릴 것은 없었다. 그 가난한 시골 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예삿일은 아니었다. 서울에 올 라와서는 셋방살이를 하는 큰 누나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예전에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까, 어 趙英男이가 무슨 또 그림씩이나 하면서 의 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결코 어느 날 갑자기 그림을 그린 게 아니 지요. 노래나 그림이나 履歷(이력)은 비슷 하지요. 고등학교 때도 노래와 그림을 같이 했어요. 밴드부 단원이면서 미술반 반장을 했거든요. 그림 쪽의 이력으로는 그게 유 일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지만. 예배당도 계 속 다녔습니다. 신앙이 좋아서는 아니고,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을 겁니다』 노래와 그림을 병행하는 趙英男에게 인생의 분기점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 다.


『주인집 딸이 한양대에 다니고 있었어요. 내가 高2고, 주인집 딸은 대학교 2학년인 가 그랬으니 누나였지요. 하루는 날 부르더 니 「너 맨날 집에서만 꽥꽥거리지 말고 여 기나 한번 나가보렴」하는 거예요』





건네받은 것은 한양대학교가 제1회 전국 고 교생 성악 콩쿠르를 개최한다는 안내문이었 다.

『보는 순간 호기심이 발동하더군요. 독일 노래 한 곡, 이태리 노래 한 곡, 한국 가 곡 한 곡을 부르는 것이었는데, 다른 것은 그런 대로 해볼 만했지만, 문제는 이태리 노래였지요. 발음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배운 적도 없었고, 배울 데도 없었지요. 에라 모르겠다, 내 나름으 로 발음되는 대로 대충 연습을 하고, 참가 신청을 하러 갔어요. 접수하는 직원이 내 신청서류를 죽 보고는 반주자 이름이 왜 없냐는 거예요. 반주자는 없다고 했지요. 그럼 반주자도 없이 연습을 했느냐면서 어 이없어하는 것 같더니 피아노 전공의 여대 생을 한 명 소개시켜 주더군요. 난생 처음 피아노 반주에 맞춰 몇 번 불러보고 나갔 어요. 반주라는 게 그렇게 환상적이란 것도 처음 알았지요』

결과는 예선 탈락이었다. 한양대는 언덕에 들어선 학교였다. 콩쿠르가 열린 강당은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언덕이 라기보다는 산중턱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 확한 표현일 것 같았다. 해가 저무는 시간 이었다. 그날은 10월1일 국군의 날이었다. 저쪽 하늘이 느닷없이 밝아지고 있었다. 불꽃놀이였다. 폭죽 터지는 소리가 계속해 서 들렸다. 언덕길을 내려오며 어두운 밤하 늘에 찬란하게 명멸하는 불꽃을 바라보는 趙英男의 눈에서 눈물이 솟았다. 스스로도 뜻밖이었다. 눈물은 속수무책이었다. 기억 하기로는 그것이 아마도 생애 최초의 눈물 이었다.


『울면서 터덜터덜 내려오는데, 갑자기 누 가 날 부르는 거예요. 심사위원석에서 찾고 있으니 가보라는 겁니다. 심사위원들 앞에 섰지요. 그 중에서도 제일 윗자리에 앉아 있던, 뚱뚱한 양반이 집중적으로 질문을 합디다. 가정 형편이 어떠냐, 레슨은 누구 한테 받았느냐…사실대로 말했지요. 집은 찢어지게 가난하고, 레슨은 그게 뭔지도 잘 모른다…그랬더니 그 양반이 옆에 있던 비 서실장쯤 돼 보이는 사람에게 즉석에서, 이 학생에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비 일 체를 장학금으로 지급하고, 레슨비도 따로 지급하고, 레슨 해줄 선생님으로는 조상현 교수께 부탁을 하라고 지시하더군요. 그분이 알고 보니 金連俊(김연준) 총장이셨 지요. 내가 노래는 잘하지만, 이태리어 발 음이 너무 엉망이라 탈락시킨 것인데, 아무 리 생각해도 노래 솜씨가 아까워 다시 불렀 다는 겁니다.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었지요 . 다음날 동아일보의 휴지통 난에 소개가 될 정도였으니까… 나로서는 천운이었지요. 金총장님 자신이 음악을 너무 사랑하시는 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원래 옛날 연희전문에서 성악을 전공한 바리톤이 신데다 우리 가곡도 여러 편 만드신 분이잖 아요. 조상현 교수님은 당시 음대 학장이셨 어요. 발성법의 권위자이시지요』



趙英男은 이듬해 한양대 콩쿠르에서 일등으 로 입상함으로써 기대에 부응하며 보은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장학금을 받으며 한양대 音大로 진학했다. 길이 열린 셈이 었다. 총장님께서 직접 『너는 내가 세계적 인 성악가로 키우겠다』고 다짐을 줄 정도 였으니 이제 앞으로 몇 년이면 고생 끝, 행 복 시작일 것이었다. 마침내 날개를 달게 된 趙英男은 마음껏 끼를 발산했다. 탁월한 노래 실력은 인정을 받은 터였다. 삽교 바 닥을 주름잡던 개구쟁이 기질과 익살은 서 울의 대학가에서도 통용이 되었다. 趙英男 은 축제 때면 사회를 맡았고 무대에 올라가 청중을 웃기고 울렸다. 趙英男은 대학가의 명물, 유명인사가 되어 갔다.
『그대로 갔으면 아닌 게 아니라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음폭이 넓 었어요. 완벽한 테너는 아니었지만, 바리톤 치고는 아주 높은 음까지 올라갔지요. 하 이 바리톤이라고나 할까요. 그런가하면 중 저음도 좋았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상 현 선생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지요. 원래 좀 경박한 성품에다가 音色(음색)도, 어찌 보면 좀 저질이고 속되게 느껴질 정도로 화려한 음색이었는데, 조선생님을 만나 제 대로 된 발성법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이 태리 노래에 비한다면 보다 철학적이고 아 카데믹하다고 할 수 있는 독일 가곡들을 마 스터해 가는 동안 내 약점들이 저절로 커버 가 되었거든요. 요즘 툭하면 세계 3大 테너 다 해서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같은 사람들이 거창하게 공연을 하곤 하지만, 물론 훌륭한 성악가들이지만, 사실 그렇게 대단한 실력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 아무튼 그랬는데…』

아름다운 선배 여학생을 만나고, 약혼자까 지 있던 그 연상의 여인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면서 조영남의 인생은 새로운 급류를 타게 된다.


『지금 같으면야 약혼자가 있는, 年上의 여 자를 사귄다고 해서 잘 얘깃거리도 안 되겠 지만, 그때는 학교 전체가 떠들석할 정도의 스캔들이었어요. 약혼자 집에서 학교에 탄 원서를 낸다 어쩐다 난리를 피웠고, 학교에 서는 총장의 특별장학생이 임자 있는 여자 를 사귀면서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거냐면 서 학교냐, 여자냐 양자택일을 강요하더군 요. 결국 자퇴를 했지요. 그런데 지나고 보 니까 그게 내 女難(여난)의 시작이었더군요 . 그후로 지금까지 내 주변엔 여자가 끊이 질 않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두 번이나 이 혼할 정도니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보 탠다면, 내 배반의 역사의 시작이었지요. 김연준 총장님이나 조상현 선생님, 그리고 학교 당국에 말할 수 없이 큰 은혜를 입었 건만, 여자 때문에 그분들을 전부 배신한 꼴이었잖아요. 이후로도 그랬어요. 일부러 작심하고 그런 것은 결코 아닌데도, 좌우 간 은혜를 입은 사람들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먼저 배신을 하게 되곤 했습니다. 이 상한 팔자예요』

조영남은 다시 시험을 치러 서울음대생이 되었다. 학비는 훨씬 쌌지만, 장학생은 아 니었다. 집에서는 서울대 학비조차도 부치 지를 못했다. 학비를 받기는커녕 이제 는 집안의 생계도 그 책임도 조금씩 조영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서울음대 등록금은 처음에는 동신교회에 서 대주어서 걱정이 없었지요. 성가대를 하 면서 솔리스트도 하는 조건이었어요. 그런 데 추수감사절 때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교 회에서는 부활절이나 추수감사절이나 크리 스마스 같은 때에는 특별 음악예배를 보거 든요. 거기서, 그때는 내가 노래가 아니라 트럼펫 이중주를 하는 순서를 맡았는데, 연습을 하려고 譜面臺(보면대: 악보 받침대 )를 들고 다니다가 버스에 놓고 내렸지요. 그게 교회에서는 조영남이가 보면대를 팔 아먹은 걸로 소문이 나더군요. 그래서, 한 양대 그만둘 때처럼 한번 더 에라 썅 하고 교회도 끊어 버렸지요』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조영남은 명 동과 무교동으로 진출을 한다. 명동과 무교 동에는 각각 전설적인 명소, 오비스캐빈과 세시봉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 0년대 초반에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추억의 한 자락쯤은 묻어두고 있는 곳이다. 청바지와 통기타, 생음악과 생맥 주가 거기에 있었다. 「히 식스」 「키 보 이스」 등 우리 보컬그룹의 선두주자들이 생음악을 꽝꽝 울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조 영남은 카페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통기 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아르바이트 가수 가 되었다. 그 분야에선 단연 선구자였다. 조영남보다 앞선 사람으로는 당시 회현동 「문라이트」에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이찬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특히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그만이었습니 다. 팬 클럽도 생겼어요. 늘 대여섯 명의 여학생들과 어울릴 수가 있었지요. 봄 가을 에는 대학교들 축제 때마다 불려갔고, 크리 스마스 시즌에는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불렀 어요. 말하자면 대목이었어요. 나는 중저음 이나 고음을 헨델의 「메시아」에서 필요한 만큼 구사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 교회 에서는 테너 솔로, 저 교회에서는 베이스 솔로를 해냈지요. 내 여학생 군단은 나의 이런 전천후 실력과 활약에 환호하며 자랑 스러워했어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오만방 자했겠어요. 지금 한국 성악계를 이끌고 있 는 친구들이 대부분 동년배 아니면 후배였 는데, 그때는 우리가 무조건 최고라고 생각 했지요. 누구 하면 「어, 그런 애도 있었나 ? 걔가 노래를 해? 걔 노래가 무슨 노래야 ?」 그런 식이었지요. 한편으로는 그 무렵 피세영 김민기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이장 희 박상규 이상벽 고영수 양희은 윤여정 등 을 좌우간 줄줄이 사탕으로 만나서 허구한 날 붙어 다녔지요』

피세영은 영문학자이면서 한국 문단에서 수 필의 지평을 넓힌 피천득씨의 아들 로 라디 오 성우 출신의 명 DJ였고, 윤형주는 동신 교회에서 성가대를 같이 했던 후배인데, 부 친이 경희대 학장으로 당시 또래 중에서는 제일 유복했던 편이었다. 윤형주가 「없는 것이 없는」 집안의 귀한 아들이었다면, 송창식은 「있는 것이 없는」 가난하기 짝 이 없는 형편이었는데, 기묘하게도 두 사람 은 의기투합해 한국 가요사에 불멸의 듀엣 으로 남는 「트윈 폴리오」를 결성한다. 김세환은 원로 연극인 김동원씨의 아들. 홍 대 출신의 명 MC 이상벽은 경향신문 연예부 기자로 활동하다가 主특기인 MC로 돌아와 있고, 무명 가수였던 박상규는 「조약돌」 로 뜨면서 스타가 되었으며, 고영수는 개그 , 양희은은 「아침 이슬」로 장외 홈런을 때렸으며 윤여정은 스크린 배우로 데뷔해 한동안 상종가를 치닫다가 조영남의 아내가 되었다.



『세시봉에 모이는 젊은 무리 중에서는 내 가 비교적 나이가 위였지요. 대부분 동생이 었어요. 윤형주는 고등학교 때부터 동신교 회를 같이 다니면서 성가대도 같 이 한 사 이예요. 얼마 전에 가수 김창완씨가 진행하 는 음악 프로에 윤형주가 나와서 내 얘기를 하더군요. 성가대 뒷자리에 선배 하나가 있었는데, 폼은 더럽게 잡으면서도 맨날 자 기 헌금을 내가 반을 빼앗아 내고, 대학엘 올라가더니 어디서 통기타 하나를 구해 들 고 다녔는데, 만지지도 못하게 하더라. 자 기가 전도양양하고 휘황찬란한 세브란스 의 대생에서 집안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가수가 된 것은 순 전히 조영남의 영향이었다 …하하하…그러 더군요.

내가 윤형주 헌금을 반 나누자고 해서 헌금 한 건 사실이에요. 지금도 만나면 그 때 꿔 간 헌금 돈 내놓으라고 해요. 그런데 생각 해 보세요. 어차피 하나님한테 드리는 건데 , 지가 내나 내가 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 송창식은 참 희한한 놈이었지요. 과묵하 고 황당한 인물이었어요. 이루 말할 수 없 이 남루한 옷차림이었는데 얼굴은 허여멀게 서 거렁뱅이로는 또 보이지를 않았거든요. 항상 기타를 가슴에 부여안고 다녔지요. 레스토랑 가수로 데뷔할 때 부른 노래도, 뜻밖에도 오페라 「사랑의 묘약」 가운데 나오는 아리아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인 거예요. 생전 처음 듣는 창법이더군요. 오 페라 창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행가 창법 도 아닌, 송창식 특유의 창법이더군요. 아 마 지구상에서 그런 창법은 송창식의 창법 이 유일무이할 겁니다. 야 이거 선천적인 노래꾼이구나 직감했지요. 그나저나 노래는 그랬지만, 나머지는 오리무중이었지요. 초 콜릿을 물에 말아먹었다는 등 하면서 제법 무슨 귀족 행세를 하는가 하면 겨우내 팬 티 하나로 버티는 거예요. 우리는 그래서 송창식에 대해서 뭔가를 알아내겠다는 시도 를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어요』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김민기였다. 조 영남이 음대생이면서도 낮에는 주로 美大( 미대)의 서클룸이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 렸다면, 김민기는 미대생이면서도 노상 기 타만 뚱땅거리고 있었다. 김민기하고는 지 금도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다. 김민 기는 피해 다니는 생활을 하며 고생하다가 연극으로 진출했고 요즘 은 뮤지컬로 성공 했다.


『그밖에도 일일이 손꼽기가 어렵지요. 배 인순·인숙 자매 보컬인 펄 시스터즈도 그 때 만났고, 아직까지도 여성 듀엣으로 그들 을 능가하는 그룹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펄 시스터즈하고 나하고 트리오를 만든 적 이 있다는 것 혹시 아세요. 아는 사람이 별 로 없지요. 왜냐? 무대에 한 번 서보지도 못하고 끝나 버렸거든요. 우리 셋이 부르는 노래는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환상 그 자체였지만, 아무도 알아 주는 사람이 없었 어요. 꾀죄죄한 내 행색과 몰골이 결정적이 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때 검정 물들인 야전 점퍼에 워카를 신고 다녔는데, 가뜩이나 키도 작고 못 생 긴 얼굴에 행색마저 그 모양이었으니 사람 들은 노래를 듣기도 전에 관심조차 기울이 지를 않더군요. 저 얼굴로 뭐가 되겠냐는 투였지요. 나 때문에 배인순 자매는 한국 여성의 평균을 훨씬 넘는 늘씬한 몸매에 빼 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덩달아 덤터기를 쓴 셈이었지요. 아무튼 여기서 다 얘기할 수는 없고, 그 무렵 한창 청년문화다 뭐다 , 청바지에 통기타, 생맥주가 새로운 청년 문화의 상징이다 뭐다 유행했는데, 말하자 면 그때 그 풍조를 이끈 그룹이 우리들이었 던 셈이지요. 더 알고 싶으시면 내 책 「놀 멘 놀멘」을 보세요. 거기 다 있어요』



세시봉에서 숙식은 물론 등록금을 해결하던 조영남에게 다시 엄청난 변화가 찾 아왔다 . 미8군 전속 가수로 취직한 것과 TV 출연 이었다.

『잇 소 굿(It so good) 이란 뜻의 불란서 말인 세시봉은 당대를 풍미하던 경음 악의 거성이신 이백천 조용호 정홍택 선생 같은 분들의 아지트이기도 했어요. 내 가 세시 봉에 처음 가서 피아노를 치면서 현제명 선 생의 「고향 생각」을 부르자, 해 는 져서 어두운데로 시작되는 노래 있잖아요, 맨 먼저 나에게 접선을 시도한 분이 바로 이백 천 선생이셨어요. 함자의 「천」자가 「내 천(川)」자인데, 냇물을 충청도 에서는 「 똘강」이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즉흥적으 로, 버르장머리가 없었던 거지요. 「똘강 선생」이라 부른 것이 금세 퍼져서 세시봉 에서는 누구나 이백천 선생을 똘강 선생이 라 부르게 되었지요. 아무튼 미8군 가수가 된 것이나 TV에 나가게 된 것이나 모두 똘 강 선생이 주선해 주신 덕분이었지요』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TV에 출연 하면서 조영남은 학교에서 분명 무 슨 얘기 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는데, 정작 화살이 날아온 것은 학교 가 아니라 교회로부터였다. 성가대 지휘자가 조영남 을 불러 딴따라를 청산하고 학교와 교회로 유(U)턴할 것을 종용했다. 조영남은 어차 피 내친 걸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영남 은 다혈질의 지휘자 선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것으로 결별의 의 식을 치렀다.

『이응파 장로님이지요. 그분께도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교 회에 대해서도 배반을 하고 말았지요. 한양 대 2학년 때 사귀었던 年上의 여학생은 내 가 서울음대로 옮긴 이후에도 일편단심 따 라다녔어요. 그게 그런데 좀더 넓은 물에 나가니 예쁜 여자도 많더군요. 내가 먼저 도망쳤어요. 그러니까 벌써 큰 배반만 세 번씩이나 저지른 셈이지요? 그게 끝이었으 면 그래도 괜찮았겠지만, 이후에도 내 인생 은 아무튼 배반의 연속 드라마였어요. 벌받 지 않고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 살아 오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복이 많다고 하면 너무 뻔뻔스러운 말이겠지요?』 세시봉에서도, 라디오 TV 방송에서도 조영 남은 조만간 뜰 것이라는 기대가 무 르익어 가던 어느 날,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의 조용호 PD가 조영남을 부르더니 레코드 한 장을 던져 주었다. 노래를 듣고, 영어 가 사를 절반은 우리말로 바꾸어 연습해서 내 일 아침에 녹음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PD가 지정해 준 노래는 영국 출신의 가수 톰 존 스가 부른 「딜라일라」 바로 그것이었다. 미8군에 나가면서 선배 가수인 최희준 위 키리 유주용 등에게 팝송을 번안해 주곤 했 던 조영남인지라 改詞(개사)에는 이미 일가 견을 갖고 있던 터였다. 조영남은 솜씨를 발휘해 우리말 가사를 붙였다. <…어두운 골목길 그대 창문 앞 지날 때 / 창문에 비치는 희미한 두 그림자 / 그대 내 여인 날 두고 누구와 사랑을 속삭이나 / 오, 나의 딜라일라…>



『조용호 형은 알아 주는 쇼 PD였어요. 영 어도 잘 했지요. 「빌보드」라는 음악잡 지 를 보다가 「딜라일라」를 발견하고, 이 노 래야말로 조영남이가 불러야 하는 노래 라 고 무릎을 쳤답니다. 당시 나는 학생이었지 만, 학교에는 통 나가지도 않는 학생 이었 고, 가수였지만, 정식으로 데뷔한 가수도 아닌 얼치기였는데, 그런 얼치기에 다가 최 창권 악단의 반주를 붙여 노래를 녹음할 생 각을 했으니 엄청난 모험을 한 것이지요. 딜라일라가 어떤 반응을 불러올지는 용호 형도 몰랐고, 나는 물론 더 몰랐지요. 나는 딜라일라가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과 데릴라」의 그 데릴라의 영 어식 발음이라 는 것도 몰랐고, 한참 뒤에 가서야 알았지 요』

노래가 나간 다음 날 아침 조영남은 스타가 되어 있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68 년의 일이었다.


『더 이상 학교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어 졌지요. 원래 나는 오페라 가수 지망생이었 고, 오페라 가수가 되기에 별 하자도 없었 어요. 그러나 막상 공부를 해보니 이게 만 만치 않습디다. 우선 오페라를 보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고, 청중이 없으니 출연료 가 왕창 나올 리도 없었지요. 더구나, 노래 실력으로는 오페라 가수가 되기에 하자가 없었지만, 신체적인 한계란 게 있더군요. 키는 작고 얼굴은 못 생긴 데다가 머리통 은 커서 가분수죠. 그러니 아무리 분장을 하고 나가 아리아를 카루소처럼 불러제낀다 해도 그게 감동적이겠어요? 웃음부터 나오 지 않겠어요? 도대체 여자 주인공은 물론이 고 모든 출연자보다 키가 작은 주인공이란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더라 이겁니다. 그러던 차에 딜라일라 한 곡으로 일약 스타 가 된 것이지요. 잘 됐다 싶더군요. 아예 이 참에 서울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대중 가수로 나가자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지더 군요』

그러나 한 가닥 미련은 있었다. 대학을 때 려치울 때 때려치우더라도 오페라라는 것을 , 오페라의 주인공을 한 번은 해보고 때려 치우고 싶었다.


『생각지도 않은 기회가 찾아왔어요. 서울 대 開校 기념공연으로 음대에서 기획한 푸 치니의 오페라 「쟈니스키키」의 주인공을 공개 오디션으로 선발한다는 공고를 본 겁 니다. 일주일 남았더군요. 연습에 들어갔지 요. 내가, 성량으로 본다면 베르디 쪽이었 지만, 개인적으로는 푸치니를 더 좋아했는 데, 「쟈니스키키」가 마침 나에게 딱 들어 맞는 작품이더군요. 주인공으로 뽑혔지요. 세종문화회관에서, 그때는 아직 시민회관 이었지요, 이틀 공연을 했지요. 대성공이었 습니다. 단 한 편이었지만, 어쨌거나 그것 으로 오페라에 대한 恨(한)은 푼 셈이었지 요』

조영남은 대중 가수가 되었다.

『서울음대에서는 오현명 선생님에게 가르 침을 받았어요. 한양대에서 조상현 선 생님 으로부터 음악의 기술을 전수 받았다면 오 현명 선생님의 가르침으로부터는 뭐랄까, 예술적 감성을 터득했다고 할까요. 아무튼 吳선생님이 저를 무척 사랑하셨는 데, 또 그걸 한 거지요. 배반 말이에요』



「딜라일라」 이후 조영남은 당시 최고의 TV 연예프로로서, 『안녕하십니까, 안녕하 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로 시작 되던 「쇼쇼쇼」에 매주 고정 출연하는 행 운을 잡는다. 「딜라일라」 말고는 변변한 히트곡 하나 없고, 앨범도 아직 한 장 낸 적 없는 초년 가수로서는 횡재나 다름없었 다.
거기서 곽규석은 조영남을 제25대 타잔이라 고 소개를 했다. 그게 또 히트였다. 조영남 은 삼손과 데릴라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 딜라일라」 를 불렀다. 『머리를 풀어헤치 고, 윗저고리를 홀랑 벗은 채 칼 한 자루를 움켜쥐고는 그야말로 삼손이나 되는 것처 럼 「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 찼네」를 포효하듯이 불러제꼈다. 무식이 괴상한 용 기를 불렀고 용기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 던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조영남에게도 드디어 시련이 닥쳤다. 1970년, 불도저라는 별명으 로 불 렸던 김현옥씨가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신 촌 로터리 부근 臥牛洞(와우동)의 시영아파 트가 붕괴된 사건이 있었다. 서울시에서 서 민들을 위해 지었다는 아파트가 어느 날 갑 자기 붕괴해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이 었으니 사건치고도 어이없는 사건이었다. 있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날 조영남은 시민회관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없어진 TBC가 당시 미국에서 맹활 약하면서 코리안의 성가를 높이고 있던 김 시스터즈를 초청해 마련한 공연이었다. 조 영남이 먼저 나가 노래를 두 곡 부르고 김 시스터즈를 소개한다는 각본이었다. 조영 남이 먼저 부른 노래는 「신고산타령」이었 다.


『신고산이 와르르르…까지는 잘 나갔지요 . 다음에도 그냥 원래 가사 대로 함흥 차 떠나는 소∼리에 했으면 그만이었지요. 그 런데 그 대목에서 갑자기 어제 저녁 TV 뉴 스에서 본 와우아파트 붕괴가 떠오르더라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가사를 바꿨지요. 함 흥차 떠나는 소리에 대신에 와우아파트 무 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 우성을 치누나 어랑어랑 어허야 어쩌구저쩌 구 하면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내질렀 던 거예요. 객석에서는 갈채가 쏟아지고 말 입니다. 노래를 끝내고 의기양양하게 들어 왔지요. 노래도 잘했고, 반응도 열렬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칭찬을 들을 줄 알았어 요』

그런데 웬걸. 사람들이 모두 하얗게 질려 있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얼굴이 누렇 게 떠있는 것이었다. 조영남도 사태를 알아차 렸다. 어떤 시대였던가. 維新(유신) 前夜( 전야)였다. 집으로 「토껴 온」 조영남은 새벽녘에 기관원에게 끌려갔다. 치도 곤을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榮華(영화) 는 잠시였고,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 였다 . 그러나 그 뽀송뽀송한 여학생들을 못 볼 것을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 그런 조영남에게 李兌榮(이태영) 여사가 구원의 밧줄을 내려 주었다. 대한민국 최 초의 여자 변호사. 鄭一亨(정일형) 박사의 부인이며, 현 민주당 鄭大 哲(정대철) 의 원의 어머니. 당시 李여사는 이화여대 법정 대 학장이었다.



조영남은 법정대 신입생 환영음악회에 초청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인연을 맺었다. 송창 식 윤형주 김세환 고영수 등 일당을 이끌고 간 조영남에게 李여사는 첫 인사로 『얘, 너희들은 돈 안 받으면 노랠 안 하니?』라 고 물었고, 조영남은 『아닙니다. 돈 안 받 고도 노래합니다』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 그후 몇 년 동안 조영남은 李여사에게 이 끌려 불광동 소년원에서 자선 공연을 했다 . 물론 무료봉사였다. 李여사는 조영남을 갸륵하게 보았고, 두 사람은 어머니와 아들 처럼 되었다.

『영남이를 불광동 소년원에 처음 데리고 갈 때, 잘 나가는 인기 가수니 말 같은 걸 함부로 하지 않을까 해서 내심 불안했지요 . 불쌍한 애들이다, 상처받기 쉬운 아이들 이니 절대로 으스대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어요. 그런데 얘 영남이가 애들 앞에 서더니 내가 하지 말라고 당부한 짓 들을 다 해 버리는 거지 뭡니까. 「야, 나 는 요새 최고로 인기 있는 가수 형님이시다 . 비록 코는 납작하지만 대한민국 최고 미 남 가수다. 너희들 왜 머리를 빡빡 깎고 그 렇게 우중충하게 앉아 있냐. 너희들 바깥에서 나쁜 짓 했지? 그러나 괜 찮다. 그럴 수도 있는 거다. 이젠 잘못을 용서받고 어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밖에서 날 만나면 무조건 아는 체해야 한다. 알았 냐? 약속이다. 약속 안 지키면 죽인다」 뭐 하여튼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먹던 사과도 아이들 입에 물려 주고, 먹던 떡도 한 입씩 베어먹게 하는 거예요. 그러 니까 글쎄 아이들이 쟤를 너무너무 좋아하 더라구요. 금방 친형이나 친오빠처럼 대하 더라구요. 그걸 보고 아, 쟤가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아들 삼아도 되겠더 라구요』

훗날 이태영 여사가 조영남과 만나던 시절 을 회고하며 한 얘기다. 조영남은 군대를 가는 것으로 死地(사지)에서 벗어났다. 그 리고 정말 李여사의 아들처럼 신촌 이화여 대 후문 쪽인 봉원동 정일형 박사 댁에 무상으로 출입하게 되었다.


1973년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이엄 목 사가 한국을 찾았다. 여의도에서 부흥 집회 가 열렸다. 100만 인파가 여의도 광장을 메 웠다. 거기서 조영남이 특송을 불 렀다. 예 전에 복음성가였다가 개편 찬송가 40장으로 편입된 「주 하나님 지으신 모 든 세계」 라는 노래였다.
육군 상병의 신분이었다. 빌리 그레이엄이 조영남의 聖歌 솜씨에 반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聖歌 가수가 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제대와 함께 조영남은 미국으로 날아갔다. 한국 기독교단의 거목 金章煥(김장환) 목사의 도 움이 결정적이었다. 윤여정과 함께였다. 조 영남 자신이야 미국행이 不敢請(불감청)이 언정 固所願(고소원)이었지만, 톱스타의 길 을 접어야 했던 윤여정으로서는 대단한 결 단이었다. 건너가서 결혼을 했다.

『노래 실력은 내가 미국 성가 가수들보다 못할 게 없더군요.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환대를 받았어요. 돈도 금방 벌었지요. 6 개월 만에 근사한 집을 마련했으니까요. 그 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뭔가 좀 허전해지는 거예요. 노래는 내가 더 잘 부르는 것 같 은데, 이상하게도 내 노래에는, 감동이 없 는 것 같더라구요. 쉽게 답이 나오더군요. 나는 기술로 부르고 저들은 신앙으로 부른 다는 그 차이였지요. 태어나서부터 어머니 를 따라 예배당에 들락거렸지만, 도무지 신 앙이란 건 없었거든요. 그저 습관이었지요 . 성경 한 번 통독하지 못했다면 알 만하지 않습니까. 제법 고민을 했어요. 그런 나를 보고 金목사님이 그렇다면 이 기회에 본격 적으로 성경 공부를 하면서 신앙을 키우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신학교를 나오게 된 건 그래서였지요. 플로리다에 있는 트 리니티 칼리지였어요. 신학대학은 아니고 성경 전문학교쯤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5년을 공부하고 정식으로 졸업을 했습니다 . 목사가 된 건 아니지만, 목사가 될 수 있 는 자격증은 딴 것이지요. 졸업 후 2년 시 무를 하고 안수를 받으면 목사가 되는 겁니 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다운 공부를 했다는 자부심에 가슴은 뿌듯했다. 어머니 가 평 생을 의지한 예수, 새벽마다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懇求(간구)에 간구를 거듭했던 하나님, 중풍의 아버지를 13년 동안이나 붙 들어 준 예수. 그 예수를 비로소 만난 기분 이었다.


『어머니는 평생 5남매 중, 원래는 9남매였 다는데 넷은 죽고, 넷째인 나만을 위 해 기 도하시는 모습이었어요. 왜냐? 내가 생활비 를 댔거든요…하하하』

주변에서는 차제에 신앙과 음악의 접목을 필요로 하는 음악 목사로 나갈 것을 적극 권유했다.


『그러나 그건 선뜻 내키지가 않더군요. 공 부를 해서 예수를 만나 보니까, 이건 그동 안 내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예수가 아니 더라 이겁니다. 두 가지가 잘못 된 것 같았 어요. 하나는 祈福(기복) 신앙, 또 하나는 , 우리는 그동안 서양 사람들이 가르쳐 준 예수, 서양인들의 눈으로 본 예수를 믿었 지,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본 예수를 믿은 게 아니었던 거죠. 우리의 눈으로 본 예수 같은 책이 미국에 있을 리 없어서, 혹시 한국에는 있을지 몰라서, 한국의 신학대학 이나 대학교의 신학과 같은 곳에 편지를 냈 는데,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조영남이 만난 예수는 神(신)도 아니고, 신 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인간이었다. 다만 참으로 위대한 인간이었다.
『내가 본 예수를 말하고 싶었지요. 그걸 대학 노트 몇 권 분량으로 썼어요. 그리고 돌아왔지요. 노래도 하고 싶고, 여학생들 도 보고 싶고. 그것도 배반이었지요. 교단 에서 장학금을 대 줄 때는 공부를 해서 더 욱 훌륭한 성가 가수가 되어 달라는 뜻이었 는데 모른 척하고 냉큼 돌아왔으니까 말입 니다. 돌아오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 야 너 미국 갔다더니, 그래 미국 가서 뭘 하고 왔니 하면서 막 물어볼 줄 알았어요 . 그러면 점잖게 이거야 하면서 대학 노트 를 보여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빌어먹을 누가 물어봐 주어야 말이죠. 한 놈도 없더 라구요. 무지하게 민망하고 자존심 상하는 거 있죠. 시쳇말로 그렇게 쪽 팔릴 수가 없습디다.

그러다가 趙廷來(조정래) 선생을 만났지요 . 지금은 「태백산맥」이다, 「아리랑」 이 다 해서 밀리언 셀러의 작가가 되셨지만, 그때는, 실례를 무릅쓰고 사실대로 말하자 면, 남루한 신사셨지요. 趙선생이 원고를 보시더니 특이하고 재미있다고 하시면서 책 으로 내자고 하셔서 냈지요. 「한국 청년이 본 예수」라는 제목을 달았어요. 많이 팔 렸냐구요? 초판도 안 나갔을 걸요』 여기까지가, 「예수의 샅바를 잡다」가 나 오게 되기까지의 경위다. 제목은 조영남의 작품이 아니다. 조영남과 친하게 지내는 여성 카피라이터 최윤희씨의 아이디어였다 고 한다.


『만나보니 예수는 신이 아니었어요. 따라 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지요. 그러나 예수는 釋迦(석가)나 孔子(공 자)나 소크라테스처럼 凡人(범인)의 경지를 초월한 위대한 인간이었으니까 우리가 그 를 본받고 「배워야」 할 이유는 충분한 겁 니다. 위대하기로 말하면 석가나 공자나 소 크라테스나 그밖에 마호메트나 뭐 또 슈바 이처나 그런 사람들보다 훨씬 위대한 인간 이었지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 받는 사람 가운데 인간에 대한 사랑을 역설 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 없지요.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랑을 요구했어요.

그에 비해 예수는 인간으로서 도달하기 어 려운 경지의 사랑을 역설하고 요구하고 가 르쳤지요. 누구나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네 이웃을 사 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지요.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어요. 얼 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몸 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나는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다른 위대 한 인물들보다 더 위대한 이유도 거기에 있 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활동한 것은 ― 公生涯(공생 애)라고 하지요? ―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 한 것은 서른 살부터였고 활동한 기간은 불 과 3년이잖아요. 다른 위인들은 평생을 헌 신했지만, 예수는 불과 3년 동안 활동한 것 뿐인 데, 그 짧은 기간의 가르침이 2000년 동안 사실상 세계를 지배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는 신은 아니었지만, 위대한 인물보다 더 위대했기에 후대 사람들에 의해 신으로 「추앙된」 것이지요. 위인의 반열에서 한 단계 더 신분이 격상된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에 대한 나의 이해예요』



책으로 그쳤으면 또 몰랐겠지만, 조영남은 TV에 나가서도 예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굽힘 없이 피력했다.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격렬한 것이었다. 기독교단과 교인들로부 터였다. 물론 무슨 망발이냐라는 것이 주종 이었다. 조영남이 지난 2월10일과 17일, S BS의 「행복 찾기」에서 한 시간씩 자신의 예수론을 생방송으로 강의했을 때는 방송 이 나가고 나서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사이 에 SBS 홈페이지에는 50여 통의 항의성 e- 메일이 빗발쳤다. 그런데 조영남은 며칠 후 이번에는 EBS에 나가 자신의 주장을 되풀 이했다.

『내가 뭐가 잘났다고 TV에 나가 공개적으 로 그런 소리를 떠들겠습니까. 방송 국에서 부르니까 나간 것이고, 묻길래 대답한 것 이지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요. 내가 예수를 깎아 내린 것은 아니에요. 예컨대 이런 겁니다. 피아노에서 「도 미 솔」 건 반을 한꺼번에 누르면 듣기 좋은 소리가 좋 지요. 그러나 「도 파 시」 건반을 한꺼번 에 누르면 듣기 싫은 소리가 나잖아요. 그 럴 때, 아 도 미 솔을 동시 에 누르면 듣기 가 좋고, 도 파 시를 동시에 누르면 듣기 싫은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그렇게 믿으면 서 그냥 넘어가는 사람도 있고, 그런가 하 면 왜 도 미 솔을 누르면 듣기 좋고, 도 파 시를 누르면 듣기 싫은지 그 이유를 한번 따져보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잖아 요. 그런 겁니다.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 고, 먼저 예수를 좀 알자, 제대로 알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가르쳐 준 것을 그대로 따라가지 말고, 우리가 직접 알아보자는 것이지요. 인간인지, 神인지 죄우간 인류 역사에 예수라는 사람이 존재 했다는데,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20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인 것인지를 생 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내가 예수는 인간이 라고 했지만, 어쨌든 예수는 나에게는 커다 란 깨우침을 준 사람이에요. 예수를 공부하 면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 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을 읽으면서 그때 나는 펑펑 울었어요. 아, 나는 그동 안 헛살았구나. 아, 내가 지난날 한국에서 는 잘난 척하고 돌아다녔지만, 예수 같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 이구나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지요』 미국에서 돌아와 얼마 후 조영남과 윤여정 은 이혼을 했다. 결혼 생활 13년 만의 결별 이었다. 아들 둘은 엄마가 맡았다. 재산도 전부 아내에게 주었다고 한다. 엄마를 닮 아 공부를 잘해 장남 「조 얼」은 콜럼비아 대학을 졸업했고 막내 「조 늘」은 뉴욕대 학에 입학했다. 대학의 학비는 조영남이 댔 다. 대신 유산은 없다.



『다른 여자 만나는 걸 이해를 못한 거지요 . 그러나 두 아들 놈은 지금도 100% 아빠를 믿고 이해하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나는 인간 性情(성정)의 미묘한 신비 같은 것을 느껴요. 하긴 여자 치고 자기 남자가 다른 여자 만나는 걸 이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만, 나는 생각이 좀 달라요.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 이해했을 겁니다. 가정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아내나 남편이 아닌 다른 여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아내와도 그래서 헤어졌지요. 두 번째 아내와는, 아내는 아이를 갖고 싶어했 는데, 아이를 갖지 못했어요. 좌우간 나는 여자가 끊이질 않았어요. 공백이 없었어요 . 사귀다가 헤어지고, 얼마 있다가 다시 다 른 여자를 사귀고 한 게 아니에요. 공백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한 여자를 사귀는 동 안 다른 여자가 나타나, 마치 오버랩처럼 되다가 자연스럽게 대상이 바뀌곤 했어요. 계속 바뀌었던 만큼, 첫사랑이었던 한양대 선배 여학생과 윤여정의 경우를 빼고는 그 렇게 오래 지속된 관계도 없었어요. 나는 한 번도 여자 때문에 울어본 기억이 없어요. 언제나 내가 먼저 도망을 쳤지요. 배신하는 것은 언제나 나였어요. 나도 내 가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 그런 게 어쩌면 첫 사랑의 실패가 남긴, 이를테면 후유증 같은 게 아닌지 모르겠어 요. 마음이 맞아 만나고, 만나다 보면 불꽃 이 타오르게 되고, 그러면 가속도가 붙게 마련인데, 그때쯤 되면 겁이 나기 시작하는 거죠. 이렇게 全力질주를 하다가는 반드시 사고가 날 것이다, 과속의 결과는 필경 충 돌과 파멸일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 다.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걸 텐데, 막 달 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갑자기 완급조절을 하고 싶어진다 이겁니다. 충돌해 본 경험 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걸 여자들은 이해를 못하더군요. 남자답지 못하다는 거 예요. 헤어질 수밖에요. 더구나 우리 사회 는 그런 과속으로 인한 충돌이나 사고를 묵 인하는 풍토가 아니잖아요. 딜레마예요』 조영남의 사랑론이랄까, 연애론이랄까, 혹 은 「도피의 辯(변)」이랄까 하는 것인데, 조영남은 이를 다시 예술론으로 이어간다.

『그런데 남녀가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충돌 하는 그것, 그때의 에너지가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것 아닌가요. 예술이 열정의 소산이라면 파국을 보면서도 달 려가는 사 랑의 열정만큼 다이내믹한 열정이 있나요? 보세요. 베토벤이나 고흐나 괴테나 그들의 위대한 작품들은 바로 그런 「충돌의 열정 」에서 탄생된 것이잖아요. 그게 우리와 서 양이 다른 점 같아요. 우리는 충돌을 하면 지탄을 받지만, 그래서 충돌하는 것을 피 하려 하지만, 저들은 충돌을 그렇게 문제시 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이지요』



아무튼 물의를 빚었을망정 「예수의…」 덕 분에 조영남은 아연 바빠졌고, 아직 조 영 남은 상품가치가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 있 었다. 특히 방송 후 한 시간 사이에 50여 통의 항의 메일을 기록했던 두 번째 「예수 강연」은, 사실 그 자체로는 오래간 만에 보는 감동적인 프로였다. 강연 중간 중간 에 조영남은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다.
여의도에서 불렀던 「주 하나님 지으신 모 든 세계…」도 불렀고, 윤여정과 이혼한 후 「개털」이 된 조영남이, 역시 비슷한 사 연으로 「개털」로 지내던 한 소설가 친구 와 어울리던 시절, 소설가 친구가 가사를 쓰고, 조영남이 곡을 붙였던 노래 「사랑 없인 난 못 살아요」도 불렀고, 예수가 인 류에게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는 내 용의 「인생은 사랑」도 불렀다.(「사랑 없 인…」는 「한낮에도」로 제목이 바뀌었고 , 개털로 지내던 시절의 소설가 친구, 작사 자였던 그 친구 김한길은 문화부 장관이 되 었다. 그 시절 조영남을 살려 준 것이 「화 개장터」였는데, 그 노래의 가사도 김한길 장관이 만들었다).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조영남은 『내가 예수 로부터 배운 것은 「인생은 사랑」이라 는 진리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생은 사랑」이라는 복음성가를 피아노를 치며 불렀다. 조영남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관객 도 사회자도 카메라맨도 스태프도 관계자도 일제히 숨을 죽였다. 스튜디오 전체가 숨 을 죽였다. 조영남은 그림도 잘 그리고, 글 도 재미있게 잘 쓰고, 우스갯소리도 잘 하 고…잘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러나 조영남 이 그 중에서도 제일 잘하는 것은 노래였다 . 조영남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면 그것은 역시 노래였다. 방송이 끝난 후 사람들은 『조만간 어쩌면 이 비슷한 포맷의 프로가 , 조영남이 토크를 하건 강연을 하건, 좌우 간 말을 하면서 중간 중간에 직접 노래를 부르는, 예컨대 「조영남의 오페라 산책」 이라든가 뭐 하여튼 그런 류의 프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에서의 감동이, 그것에 투자한 시간과 그것을 준비한 量(양)에 비례하는 것 은 당연하다.


『이 한 시간 프로를 위해 유례없이 열심히 준비를 하고 긴장을 하는 모습이었다. 10 년 가까이 함께 지내오는 동안 조영남의 그 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우리는 그동안 언 성 한 번 높인 일이 없었는데, 엊그제는 아 무 것도 아닌 일에 조영남이 짜증을 냈다. 그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조영남의 매니저 權哲浩(권철호·56) 씨의 말이다.

「예수…」가 아니었더라도 근래에 와서 갑 자기 생긴 여러 가지 일들이 조영남을 기다 리고 있는 중이었다. 당장 급한 것은 3월2 0∼21일 세종문화회관으로 잡혀 있는 콘서 트다. 콘서트라고는 1971년 군대에 입대하 면서 고별 리사이틀을 했던 기억뿐이니, 그 로부터 꼭 30년 만이다. 그 전에 앨범도 하 나 내야 한다. 콘서트가 끝나면, 책을 써야 한다. 한국 현대문학의 여명기를 밝혔던 요절한 천재 시인 李箱(이상)에 대한 책이 다. 감히 「評傳(평전)」이랄 수는 없겠고 , 「한국 청년이 본 예수」 비슷한 「조영 남이 본 李箱」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 시인 중에서는 李箱을 제일 좋아하 고, 李箱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나는 서정 주 시인보다 李箱을 더 높이 평가해요. 선 각자였잖아요. 우리에게 문화적 콤플렉스가 있다면, 崔仁勳(최인훈) 선생의 표현을 빌 리자면, 「세계사적 지체(遲滯)」 인데, 李箱은 그것을 극복했다고 봐요. 이상의 시는 프랑스 시를 모방 내지 카피 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어서 그를 반박하고 싶었어요. 그게 동기입니다. 현재 자료를 모으고 있어 요』

5월에는 인사동 「상(像)」 갤러리에서 개 인전을 연다. 준비를 하고 있다. 화투작업 과 함께 요즘은 태극기 작업을 하고 있다. 화투에는 「우리의 색깔」이 전부 들어 있 다. 화투의 색깔에서는 샤머니즘의 색깔이 느껴진다. 그의 작업실에는 캔버스에 화투 를 오려붙이고 찢어 붙인 작품이 수없이 있 다. 태극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圖案 (도안)이다. 그 至難(지난)한 도안품을 어 떻게 그림으로 표현하느냐 하는 것에 매달 려 있다. 그림이 팔리면 그 돈은 전부 소년 ·소녀 가장 돕기에 내놓을 것이다. 1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림이 좋아서가 아니 라 안면으로 그 정도는 팔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일들을 준비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스포츠 조선에 칼럼을 쓰고, 丹學仙院 (단 학선원)에서 발간하는 「월간단학」에 우리 大倧敎(대종교)의 창시자 羅喆(나철) 에 대한 얘기를 연재하고 있다. 최제우 최시형 의 동학에 대해서는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 이 많은데, 나철에 대해서는 왜 말들이 없 는지, 그것도 조영남은 의아하다. 나철의 大倧敎야말로 우리가 창시한 우리의 종교인 데 말이다.

그러니 「예수의 샅바를 잡다」가 아니더라 도 근자에 와서 갑자기 바빠진 것은 사 실 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니 나이를 먹어 갈수 록 인생은 기다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 다. 파도가 있고 기복이 있으니 뭐가 잘 안 될 때는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바쁘게 움직이게 되면서 아, 기회가 한 번은 더 와 줄 듯한 예감을 합니 다』

그런 예감은 예감이고, 남들이 보기에 요즘 의 조영남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 같은 데, 정작 본인은 유유자적이다. 방송 출연 은 그것대로 하면서, 놀 것 있으면 다 놀아 가면서, 가볍게, 즐겁게, 생각나면 조금씩 깨작깨작 그림을 그리고, 오고가다 심심하 면 원고를 쓴다.



『재미있고 즐겁게 살자는 게 모토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예술가가, 혹은 가수가 혼 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보여줄 것을 기대합 니다. 예컨대 김정호나 김현식이나 배호의 노래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잖아요? 그 들은 혼신의 힘으로 노래를 했지요.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마지막 한 방울 기름까 지 태워 노래를 불렀지요. 감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사람들은 잔 인해요. 그 가수의 죽음은 생각하지 않고 노래가 감동적이라는 것만 얘기하거든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예술을, 혹은 감 동을 위한 殉敎(순교)? 그런 베팅은 안 해 요. 창작을 위한 고통, 産苦(산고)? 빵모자 쓰고 파이프 물고 인상 쓰고 있으면 그게 창작을 위한 고통이고, 産苦인가요. 나는 그런 건 안 해요.

産苦란 말 자체를 싫어해요. 자기 일인데 즐거워야지요. 그리고 사실은 다른 사람들 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가 공포와 굴레의 시작이란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 일찍 터득한 편이지요. 아, 내가 사 람들을 매료시키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가짜」가 되더군요. 시쳇말로 무엇인가에 홀딱 빠졌을 때 「뻑 갔다」고 하잖아요. 근데 자기가 자기에게 뻑이 가서는 곤란해요. 사람은 이 「자뻑 」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존경을 받던 분이 나이 들어 추한 모 습을 보이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도 흔히 있 잖아요. 불필요한 말이 많아진다는 것, 그 게 바로 자뻑의 증세지요. 나는 나중에라도 은퇴공연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겁니다. 목 소리가 나오는 날까지 즐겁게 노래하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싶어요. 페이드 아웃(fad e-out)되고 싶어요. 학교 때 은사님 말고, 사회에 나와서 내가 젊었을 때 내 주변에 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둘 있 는데, 한 사람은 이백천 선생이고, 또 한 사람은 연극인 오태석 형이었습니다. 나는 그 두 분을 나에게는 젊은 시절의 비타민 과 같은 존재였다고 말하곤 합니다. 이백천 선생은 어떻게 사는 것이 효과적으로 사는 것이냐 하는, 삶의 운영에 관한 제반 요령 을 터득시켜 준 분이고, 오태석 형은 나에 게 이른바 「인텔렉추얼(intellectual)」의 충격을 던져 준 사람이지요. 知性의 향기 랄까, 위력이랄까, 그런 걸 느끼게 해 주는 사람이었지요. 만나는 순간부터 그랬어요 . 아, 이 사람은 천재구나. 이런 사람과 어 울리려면 뭘 좀 알아야겠구나. 무식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걸 느끼겠더라구요. 두 분을 만난 이후로 나는 줄곧 내 나름으로 는 인텔렉추얼을 동경하고, 선망하면서 살 아온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영남이 그의 自傳的 (자전적) 수필집 「놀멘 놀멘」에서 얘 기 해 놓은 바를 그대로 인용해 본다. <…오태석 형이 그때나 지금이나 그토록 외 골수로 물고 늘어지는 연극이란 게 얼핏 봐 도 한 마디로 지식의 유희라 볼 수 있는 것 이었다. 그가 史劇(사극)을 무대에 올리면 역사를 통달했다는 의미였고, 애정물을 무 대에 올리면 사랑에 대해서 통달했다는 의 미였다. 내가 얼핏 보기에도 연극은 모든 삶에 관한 지식의 축적이었다. 결국 지식 없이는 연극이고 나발이고 베게트고 카뮈고 간에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의미였다. 「인텔렉추얼」 우선주의, 그것은 내가 오 태석이나 혹은 똘강 이백천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최초의 비타민이었다. …똘강 비타민은 매우 구체적으로 효력을 발생시키는 명약이었다. 내가 아직도 또렷 하게 기억하는 두 가지의 똘강 비타민이 있 다. 나는 아직도 그 두 가지의 비 타민을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
첫째는 언제나 절제하라는 것이었고, 또 하 나는 언제나 치열하라는 것이었다. 절제하 라는 교훈은, 적어도 프로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는 최적의 교훈 이었다. 간 단명료한 교훈이었다. 말하자면 가지고 있 는 것을 다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었다. 너무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 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교훈을 지키려고 지금까지 내 나름으로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리 하여 지난 週에는 한국의 방송평 권위자로 부터 「대한민국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 」이라는 겸연쩍은 칭찬을 받았다. 바로 그 것이었다. 자연스럽기 위한 절제가 바로 똘 강 선생이 요구하는 절제였다. 내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마치 복싱 선수를 링 위에 올 리는 코치처럼, 내 귀에 혹이 달리도록 들 려준 똘강 선생의 교훈이 바로 절제였다. 너무 잘하지 마. 긴장하지 마. 좀 못해도 괜찮아. 틀려도 괜찮아. 그저 자연스 런 모 습만 보여 줘. 사람들이 네 기량의 100을 원해도 그저 60이나 70만 풀어 줘. 잘한다 는 소리를 들을 양으로 100을 다 풀어놓다 보면, 관객은 100을 받아 가지 고 도망가 게 마련이야. 너무 잘하려다 보면 자연스러 움이 흩어져서 반드시 역효 과가 나타나는 법이야. 그저 편안하게 자연스러운 모습만 보여 줘.

일견 내 아버지 되시는 분의 「놀멘 놀멘」 이라는 궁시렁거림과 상통되는 좌우명 이었 다.


『그러나 무대는 게임의 현장이야. 전쟁터 야. 어쨌거나 게임이나 전쟁에서는 이 겨야 해. 이기기 위해선, 일단 무대 위에 올라 갔으면 치열하게 전투를 벌어야 해. 관객은 敵(적)이야. 무찔러서 이겨야 하는 적이야 . 적이 너를 우습게 보면 너는 이미 게임에 진 것이야』

얼마 전 늦깎이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 고 한 마디 툭하고 던진 소감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야구에서 한사코 홈런만 찾는데 , 나는 일루타 몇 개로도 게임에 승산 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25년 전, 서울 무교동에서 똘강 선생 이 나에게 들려준, 60이나 70으로도 승산이 있다는 교훈과 꼭 닮았기에 나한테는 가슴 뭉클하게 들렸던 것이다>

조영남은 서울 강남구 청담동 엘누이호텔 뒤, 88도로와 접해 있는 빌라에서 가정부 할머니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입양한 딸 恩知(은지), 세 식구가 단출하게 살고 있다. 이 다음에 죽으면 자기 육신을 화장 시킬 생각이었는데, 최근엔 그것도 번거로 울 것 같아 병원에 신체를 기증하기로 했다 . 가능하면 흔적이 남지 않기를 바란다. 병 원에서 실험용으로 쓰더라도 남은 부분이 있으면 깨끗이 정리해 주기를 바란다. 유산 은, 내가 죽을 때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여 인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 여자라 면 좀 서운하다. 그것만큼은 여자들 수십 명이 개떼처럼 몰려와 악다구니를 쓰며 싸 우는 광경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