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김정일의 여인들

가/궁금하다.이것 2011. 12. 20. 15:57 Posted by 로드365

고영희


지난 17일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성혜림·김영숙·고영희·김옥 등 4명의 여인과 동거하며 6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동거녀인 성혜림은 김 위원장보다 다섯살 연상으로 1960∼70년대 초 북한 영화계를 주름잡은 최고의 여배우로 꼽힌다.

1937년 경남 창원 출생인 성혜림은 6·25전쟁 때 좌익계열 지식인인 부모를 따라 월북한 뒤 카프 작가 리기영의 장남 리평과 결혼해 딸을 낳았으나 1960년대 말 문예부문을 지도하던 김 위원장의 눈에 들어 전 남편과 이혼하고 미혼이자 연하인 김 위원장과 동거했다.

이혼녀 신분으로 1971년 김 위원장과 사이에서 장남 정남을 낳았으나 평생 숨겨진 여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김 위원장이 여러 여인과 동거를 하면서 성혜림은 신경쇠약과 우울증, 신경성 질환, 당뇨병 등 여러 지병으로 1980년대 초부터 러시아의 크렘린 정부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다가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등졌다. 

김 위원장은 성혜림의 사망 소식에도 끝까지 그를 외면했지만 장남 정남 부부가 모친을 임종하며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그나마 위로했다는 후문이다.

김 위원장의 두번째 동거녀는 김영숙(1947년생)이다. 그는 김 위원장의 네 여인 중 유일하게 김일성 주석의 정식 허락을 받아 결혼식을 거친 공식 부인이다. 

함경북도 인민보안국 타자수를 거쳐 노동당 간부부에서 문서원으로 일하다가 간부부 사무실을 들락거리던 김 위원장의 눈에 들어 결혼했다고 한다.

김영숙은 다른 동거녀들과 달리 뛰어난 예술적 재능이 없고 착하기만 한 순종적인 시골여인으로, 김 위원장의 바람기를 견제하거나 속앓이를 드러내지 않고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봉건시대의 전형적인 내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김 위원장과 슬하에 설송, 춘송 두 딸만 둬 공식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했고 김 위원장의 관심에서도 완전히 멀어졌다.

그의 딸 설송은 결혼했고 춘송은 미혼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별다른 직업 없이 김 위원장의 딸로서의 대우만 받고 있을 뿐 생모와 마찬가지로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김 위원장이 생전에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재일교포 출신의 고영희로, 김 위원장의 후계자 김정은의 생모다.

제주도 출신 고경태의 딸인 고영희는 1960년대 재일교포의 대규모 북송 때 부모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간 뒤 만수대예술단 무용수로 활동하던 1970년대 중반 김 위원장과 동거에 들어가 2004년 유선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줄곧 김 위원장과 함께 살았다. 

김 위원장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수기 ’김정일의 요리인’에서 “고영희를 알고 난 뒤부터 김정일의 여성 편력이 줄었다”고 말할 정도로 고영희에 대한 김 위원장의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영희는 두 아들 정은과 정철, 딸 여정을 낳았고, 김 위원장의 공식 부인으로, 북한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자리를 굳혔었다. 

그러나 ‘김정일의 여인’으로서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한 그의 삶도 오래가지 못했다.

대북소식통들에 따르면 고영희는 1998년께 유선암을 진단받아 한쪽 유방을 떼어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으나 유방 절단이 김 위원장의 여인 자리를 위태롭게 만들 것으로 판단, 의료진의 만류에도 절단 대신 항암치료를 선택했다. 이것이 결국 5년여 뒤 재발을 불러와 파리의 한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사망했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고영희는 아들 중 한 명을 김 위원장의 후계자로 내세우려고 장남 정남과 그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고영희가 정남의 후계자 선정을 견제하기 위해 위조여권으로 일본을 방문한다는 정보를 흘리도록 했다는 얘기도 내놓고 있다.

비록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2009년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됨으로써 망자의 소원은 뒤늦게 이뤄진 셈이 됐다. 

고영희의 사망을 눈앞에 둔 시점에 김 위원장의 안방을 차지한 또다른 여인은 김옥이다.

김 위원장의 생전에 사실상 퍼스트레이디로, 김 위원장이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킨 최후의 여인이기도 하다. 

평양음악무용대학(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김옥은 1980년대 초부터 고영희가 사망할 때까지 김 위원장의 서기실 과장 직함을 갖고 김 위원장의 업무를 특별보좌해온 덕에 일찍부터 정치와 권력의 생리에 눈뜬 것으로 알려졌다. 

김옥의 아버지는 이미 1990년대부터 김 위원장의 직접 임명으로 당 재정경리부 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옥은 김 위원장의 6차례 중국 방문과 3차례의 러시아 방문에 동행했고, 2005년과 2009년 김 위원장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났을 때 모두 배석하는 등 김 위원장의 여인 중 유일하게 외교활동에 직접 동석한 여인이다.

그는 2000년 10월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의 특명을 받아 국방위 과장 자격으로 동행, 대표단의 공식 보고 외에 별도로 방미결과를 김 위원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고영희 사망 이후 사실상 북한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는 권력기관의 주요 인사를 김 위원장에게 직접 건의해 관철하고, 2006년부터 김 위원장의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하자 김 위원장을 대신해 각종 서류에 결재를 하는 등 국정 전반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김 위원장이 2008년 8월 중순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김옥의 위세는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공산당 주석의 세번째 부인 장칭(江靑)’을 방불케 했다는 것이 대북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더욱이 김 위원장은 나이가 들수록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김옥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져 김옥의 ’베개밑 송사’가 잘 통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김옥도 김 위원장이 갑자기 쓰러지자 국정 장악에 한계를 드러내며 병상의 남편을 회복시키는 데 급급하는 등 평범한 여인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대북소식통들은 전했다.



김일성의 여인들

김일성 주석의 정식 부인으로 알려진 여인은 두 명이다. ‘조선의 어머니’ 칭호를 받고 있는 김정숙과 김성애다. 이 밖에 아이를 낳고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여인이 있다.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으로 알려진 여인은 한성희다. 그녀는 강원도 출신으로, 어릴 때 만주로 이주해 김일성과 함께 공산주의 독서모임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 결혼했다. 그러나 일본군에 잡혔고, 항일운동을 포기하기로 다짐하고 석방됐다. 이후 한 농부와 재혼했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확실하지 않다.

김일성의 두 번째 부인은 김정숙(1917~1948)이다. 북한에서는 ‘성골’로 대접받는 빨치산 출신이다. 김경희와 김만일(4세에 익사), 김정일 삼 남매를 낳았다. 우상화 작업을 통해 ‘조선의 어머니’ 칭호를 받고 있다. 아이를 낳다가 숨졌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병을 앓았다는 쪽이 더 맞다.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김정숙이 죽자 김일성 주석은 1952년 김성애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전쟁 중이라 결혼은 하지 못했다. 김성애는 김 주석의 여비서였다. 김정숙이 죽기 전부터 김일성의 총애를 받아 김정숙이 마음고생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6.25가 끝나기 전인 1952년부터 동거에 들어갔다. 1953년에는 경진을 낳았고, 1955년에는 평일, 1957년에는 영일을 낳았다. 김성애는 1970년 여맹위원장이 되면서 정치에 나서게 된다. 이때 본격적으로 우상화 작업도 시작됐다. 그녀는 여맹의 한계를 뛰어넘어 각 기관 기업소를 지도하는 사진이 나오고, 책도 나왔다. 상대적으로 김정숙은 격하됐다. 당시 서서히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김정일이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찾아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당시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의 월권이 문제가 되면서 김일성은 김성애 친·인척들의 권력을 무력화시켰고, 우상화 작업도 중단됐다. 김성애와 김정일의 갈등은 이복동생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정일은 동생인 평일, 경진, 영일을 꽤 예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갈등이 깊어진 뒤로는 이들을 ‘곁가지’ 취급했다.

김 주석의 여인 중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여인이 있다. 김 주석 담당 간호사 출신으로, 아들 김현(장현, 71년생)을 낳았다. 이후 김성애의 눈을 피해 모스크바에서 아들을 키웠다. 김현은 김정일의 책임 하에 장성택의 호적에 올려져 조카(혹은 양자)로 키워졌다. 이 여인은 정체를 숨긴 채 아들의 이모로 살고 있다.

평생 그늘 속에 살아온 기구한 운명 ‘성혜림’

김정일 위원장의 정부인으로 알려진 여인은 김영숙 한 명뿐이다. 나머지 여인들은 동거녀 신분으로 부인 대우를 받았다. 부인 대우를 받은 여인들은 총 네 명. 일각에서는 김일성대학 러시아학부를 나온 혁명가 유자녀 홍일천이 첫 번째 부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정식 부인 대우를 받은 여인 중 첫 번째는 성혜림(1927~2002)이다. 성혜림은 김 위원장과 동거에 들어갈 당시, 딸까지 둔 서른세 살의 이혼녀였다. 게다가 김 위원장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연상이었다.

성혜림은 경남 창녕 출신으로 1948년 아버지를 따라 월북했다. 그녀는 스무 살에 월북한 소설가 이기평의 아들 이평과 결혼했었다. 거의 납치하다시피 한 결혼이었다. 그리고 딸 하나를 낳았다. 사랑 없는 결혼이라 행복하지 못했고, 성혜림은 영화에 몰두했다. 그러다 결국 이혼에 이른다.

성혜림은 북한에서는 유명한 영화배우로 1959년 <분계선 마을에서>로 데뷔했고, 1968년 <한 자위당원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췄다. 당시 북한 남자들이 “성혜림과 결혼하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할 정도로 미인이었다. 1960년대 우인희, 김현숙과 함께 트로이카로 불렸다. 김 주석도 총애할 정도였다.

김 위원장이 유부녀인 성혜림을 이혼시키고 만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녀의 조카 이한영의 수기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김 위원장은 성혜림이 이혼한 뒤에 만났다. 연애를 시작하던 당시 그는 28세였고 그녀는 33세였다. 1969년부터 김 위원장과 동거에 들어갔고, 1971년 김 위원장의 장남 ‘정남’을 낳았다.

정남을 낳고 나서도 그녀는 숨겨진 존재였다. 정남이 다섯 살이 되던 해 김 주석이 성혜림의 존재를 알았으나, 남한 출신에 나이 많은 이혼녀라는 사실 때문에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아들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김정일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심한 정신 장애를 겪기 시작했는데,  1973년부터 신경성 질환과 불안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74년부터 모스크바를 오가며 치료를 받았다. 성혜림은 김 위원장의 새 여인 고영희의 견제에 시달리다가 1996년 서방으로 망명, 스위스 등 외국에서 장기간 거주하며 요양하다 지난 2002년 5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현지에 안장되었다.


김정일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고영희’

김정일은 성혜림과 정남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김영숙(1947~)과 결혼한다. 당시 서른이 넘어도 아들이 장가갈 생각을 하지 않자, 김 주석이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김 위원장이 인정한 유일한 공식 부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영숙은 집무실 타자수 출신으로 김 위원장 사이에서 두 딸 설송, 춘송을 낳았다. 김영숙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빨치산 전투시절부터 김일성의 친구였다고 한다. 아들을 낳지 않아서일까? 그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세 번째 부인은 고영희(1953~2004)다. 김 위원장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은의 생모다. 북송 재일교포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북한으로 건너왔다. 유명한 혁명 무용 ‘눈이 내린다’의 주인공으로, 일본 공연에서 극찬을 받은 바 있다. 1975년부터 김정일의 타자수로 일했으며, 김 위원장과는 1976년부터 동거에 들어갔다. 1981년 아들 정철을 낳았고, 이어 정은, 여정을 낳았다.


2001년부터 김정일은 인민군 사찰을 가거나 공개 행사에 고영희와 동행하곤 했다. 측근들의 파티나 회의에서 그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고영희는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유선암으로 프랑스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때 김정일은 부인 걱정에 안절부절못했다고 전해진다. 2001년부터 고영희 우상화 작업이 시작됐으나, 2004년 5월 유선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이 작업은 중단됐다. 일각에서는 유선암이 아닌, 뇌경색이나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고 본다. 김정일이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진 여인이었다.

사실상 현 퍼스트레이디? 김옥

김 위원장의 개인 비서 김옥(1964~). 고영희 사망 후 사실상 북한의 퍼스트레이디로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 2006년부터 동거에 들어갔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재능 있는 학생들을 육성하는 평양 금수중학교와 금성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경음악단에서 활약하다 1980년대 후반 김정일의 눈에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1990년대 중반부터 김 위원장의 기술서기(간호 등을 수행)로 일했다. 김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하고 있지만 정반대의 의견으로 나뉜다.

먼저 김 위원장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옥은 김 위원장에게 가족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각종 파티 때 김옥은 고영희 옆에 앉았고, 고영희가 없을 때는 고영희 자리에 앉았다. 고영희와 김옥이 자매처럼 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고영희가 아이들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가 정치적 야심이 없고, 소박하며 헌신적이기 때문에 가족의 일원이 된 거라고 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여자관계가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잠시 마카오로 떠나 있기도 했다. 김옥은 2006년 1월 김정일의 방중 시 ‘국방위원회 과장’ 자격으로 동행하면서 그의 곁에서 중요한 내용을 빠짐없이 메모하는 등 세밀하게 보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른 의견으로는 김옥이 ‘대단한 미인’이고 세련된 여성이며 매우 정치적인 인물이라는 증언이다. 그녀는 김 위원장에게 반말을 하는 유일한 여성이라고 한다. 이런 당돌한 면과 남다른 영리함 때문에 김 위원장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김 위원장의 신임을 얻으며 ‘기쁨조’인물을 직접 선발하는 지위를 누렸다. 게다가 마카오로 잠시 내보내진 적이 있는데, 고영희와의 갈등 때문이라고 한다.

김정은이 김옥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마카오에서 김정남이 “김정은은 고영희의 아들이 아니라 김옥의 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이런 소문은 계속 있어왔다. 그러나 후지모토 겐지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일축했다.

처형당한 비운의 여인들

김 위원장의 많은 여인들 중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여인들이 있다. 조선노동당 작가 겸 김정일 찬양 서사시인(1호 시인)인 장진성이 쓴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로 알려진 내용이다.

북한의 미녀 영화배우 우인희. 그녀는 동료 예술인들은 물론 딸과 남편이 보는 앞에서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그녀는 부유한 재일동포 남자와 바람을 피웠고, 자동차에서 발생한 유해가스로 남자가 사망하면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우인희는 고위 간부들과 염문설이 나돌고 있었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고위 간부들은 물론 김정일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조사관들을 협박했다고 한다. 이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공개처형을 지시했고, 비밀유출에 대한 본보기로 처형됐다.

보천보 전자악단의 가수 윤혜영은 2000년 이후 김정일이 가장 아꼈던 여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금성 제1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보천보 전자악단에서 가수로 활동했다. ‘준마처녀’를 불러 인기를 모았던 가수다. 김정일은 윤혜영의 무대의상과 액세서리 구입을 위해 파리 등 유럽으로 사람들을 파견하기도 했고, 목란관도 이 시기에 다시 리모델링했다.

그녀는 보천보 전자악단 피아니스트였던 한 남성과 비밀 연인 관계였다. 관계자들의 철저한 관리와 도청 사실을 몰랐던 이들은 곧 발각되고 말았고, 이에 목란관 지붕에서 애인과 함께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죽음은 쉽지 않았다. 남자는 죽고 그녀는 병원으로 후송됐다. 김정일은 “무조건 살려낸 다음 처형하라”고 지시했고, 의식불명 상태에서 처형됐다.

아버지 모습 빼닮은 삼남 ‘김정은’

김정은은 1982년 평북 창성에 위치한 고영희 관저에서 태어났다. 이 관저는 벌써 김정은의 우상화 작업을 위한 사적지로 지정됐다. 김정은은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했다고 알려져 있다. 스포츠를 좋아했는데, 특히 농구를 좋아했다. 미국 프로농구 선수인 데니스 로드맨의 팬으로 항상 로드맨의 등 번호가 적힌 시카고 불스 티셔츠를 입고 농구를 하곤 했다. 그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김정일 위원장을 빼닮은 것으로 유명하다. 아버지처럼 그 역시 영화광이다. 유명한 영화는 모두 섭렵했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16세였던 1998년 여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다. 2000년 가을까지 2년간 스위스 리베펠트-슈타인 횔츨리 공립학교를 다녔다. 그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지는 것을 싫어했고, 매우 조용했으며 다른 이들과 말을 하지 않았다”고 증언한다. 귀국해서는 2007년까지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특설반에 다니며 본격적인 정치 수업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2009년 1월 후계자로 낙점됐다. 북한 전문가들은 그가 ‘대장’ 칭호로 시작해 조만간 열릴 최고인민위원회에서 국방위원으로 선임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또한 당 핵심 요직인 ‘권력서열 2위’인 중앙위원조직담당 비서 자리까지 가능해 보인다고 전망하는 상황이다.

/참고자료 <김정일 로열패밀리>(이한영, 시대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