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영화속 캐릭터들이 쿨한척해서 거부감이 들곤 했는데 바람난 가족 캐릭터들은 쿨하더라. 아주 화려하거나 흥행 돌풍 감독은 아니지만 쌔끈한 현대정서를 표현할 줄 아는 감독. 감독의 삶도 웬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만나보고 싶은 감독.
임상수 감독 인터뷰(1) - 나는 느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할뿐.
황석영의 원작 소설 ‘오래된 정원’을 영화화한 임상수 감독을 1월 11일 오후 2시 광화문에 있는 t-class 커피숍에서 만났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까지 내놓는 작품마다 논란이 일어 문제적 감독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임상수 감독은 ‘나는 작가적 양심을 가지고 예술가로서 내가 판단해서 느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면서 ‘영화는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다. 진영논리를 가지고 영화를 표피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임상수 감독은 고은 선생과의 대담에서 ‘차이와 공존을 생각할 때 영국의 테러사건이 떠오른다’고 하면서 이등시민으로 모멸받으면서 살아왔던 이슬람인들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그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영국인들의 위선을 지적한 바 있다. 그걸 보면서 무지는 위선을 낳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상대방에 대한 무지 또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위선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권력을 잡고 있는 민주화운동 세력에게서도 비슷한 위선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들은 여전히 힘겹게 사는 노동운동 진영이나 서민들에게 ‘세상이 좋아졌는데, 왜 그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지 이해가 안간다’고 말하기도 하지 않는가?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그런 류의 정치적인 해석을 경계하고 있었고, 좀 더 정교하게 영화를 봐주기를 원했다. ‘내가 사실을 보여주면 그 사실이 생각을 낳을 거라고 기대했다’고 한 임상수 감독의 말이 어쩌면 모든 예술 행위, 내지는 사회를 향한 발언의 목적이자 본질일 것이다.
장정일은 ‘공부’를 통해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문화의 중요성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문화는 이미 추인된 사회현상에 의문을 제시할 뿐 아니라 새로운 현상을 재빨리 진단한다. 적어도 제대로 된 문화라면, 그 사회가 어물쩍거리고 있는 지체를 메워주어야 한다’
임상수 감독의 얘기를 들으면서 진보, 개혁 진영에서는 과연 문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승호(이하 지) - 고은 선생과의 대담에서 ‘차이와 공존을 생각할 때 영국의 테러사건이 떠오른다’고 하시면서 이등시민으로 모멸받으면서 살아왔던 이슬람인들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그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영국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는데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무지가 위선을 낳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감독님이 그동안 해오셨던 영화가 우리 사회에 있는 모습 중 하나를 그대로 보여줬는데, 한국 사회에서 잘 안받아들여졌던 것 같습니다. 낯설어하기도 하고, 인터넷 리플을 보면 굉장히 안좋은 쪽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았는데요.(웃음)
임상수(이하 임) - 인터넷 리플이 대중의 어떤 반향을 말해주는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죠. 대중의 반향이라는 것은 어떤 커다란 덩어리의 의견인데, 인터넷에 실린 몇 몇개의 개별적인 리플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구요. 전 제 영화가 한국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는데요.(웃음)
지 - ‘그때 그 사람들’도 한국 사회에서 잘 받아들여졌다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정치적인 논란 때문에 흥행 면에서도 손해를 보신 것 같고, 잘 안받아들여진 측면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임 - 말지까지 임상수의 흥행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구요.(웃음) 그 영화를 만들었을때 그 정도의 반응은 예상을 했던거죠. 그래서 잘 안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재판까지 가리라는 것도 염두에 뒀었지만, 그걸 자르라는 판결은 뜻밖이었어요. 상영 금지 아니면 상영을 할 수 밖에 없는건데, 상영 금지는 부담스러웠을 거고 그래서 상영이 되리라고 생각했던거죠. 그런데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보고, 저 쪽의 노회함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달았구요. 예상보다 격렬하게 반대하는 측이 있었는데, 박근혜씨를 놓고 대권을 다투는 쪽에서는 한편의 영화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반응을 보인거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고 생각하구요.
흥행이 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말지까지 걱정을 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흥행된 작품이어야지 일단 그 의미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는 식으로 흥행만이 모든 것이라는 분위기가 과도하기 때문에 얘기하는건데요. 사실은 흥행이 되게 중요하긴 하지만, 흥행이 됐건 안됐건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놓으면 (한국의 DVD 시장이 약하긴 하지만) DVD로도 출시가 되고, 케이블 TV에서 끊임없이 돌아가거든요. 한편의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는 경우보다는 부분 부분 보는 경우가 많겠지만, 어쨌거나 영화를 한편 제작해 놓는다는 것은 흥행의 여부와 상관없이 수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98년에 만든 작품도 여전히 돌아가거든요) 그렇게 돌아간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예상했던 방식으로 한국 사회에 작품이 안착했다고 보는거죠.
지 - 감독님 영화들을 보고 불편해하는 태도 역시 한국 사회의 위선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현실에서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는 일을 영화를 통해서는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고, 그런 일이 없다는 듯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감독님 말씀은 그래도 영화를 만들어놓으면 계속 돌아가니까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영향을...
임 - 끼친다고 자기 위안을 삼는거죠.(웃음)
지 - 이번 영화를 보면서 많은 분들이 임상수 감독님의 이전 영화와 다르다고 느낀 것 같은데요.
임 - 영화 감독은 다른 영화를 만들어야죠.(웃음) 부드러워졌다, 따뜻해졌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아요. 다음 작품에서 하나도 안변했다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재가 멜로 드라마, 러브 스토리로 풀어야되는 얘기고, 상업감독으로서 80년대라는 시대를 다룬 영화를 대중들에게 어떻게 프레젠테이션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를테면 ‘그때 그 사람들’ 같은 경우는 폭력, 총격전 이런 것들로 포장한 것이고, ‘바람난 가족’은 섹스 이런 식으로 포장해서 내보낸거였는데, 이번 것은 부드러운 러브스토리로 포장을 해서 내보낸 것 뿐이지, 제가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 - 원작에 비해서 현우보다 윤희의 비중이 더 커져서 이념보다 사랑이 더 강조된거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은데요.
임 - 그런 얘기야말로 정말... 이념보다 사랑을 중요시 여겼다구요? 아직 이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 있습니까?(웃음) 이거는요. 오현우가 이념을 위해서 싸웠던 인생이 완전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지 않습니까? 얼마나 허망한 상황이겠어요. 자기 일생을 바친건데. 그런데 영화 결말에는 그 남자가 어떤 살아갈 힘을 얻는건데, 그것은 한윤희가 보여준 사랑이랄까, 타인에 대한 태도, 세상에 대한 태도 이런 것에서 힘을 얻었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의 관계는 이런거 아닐까요? 오현우가 이념을 위해서 일단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려야겠다, 민주주의를 얻어야겠다, 그 다음에 사회주의를 얻어야겠다는 목표가 있었을텐데, 그 다음에 그 목표를 이룬 다음에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 그게 오히려 제일 중요한 궁극적인 목표였는데, 그 중간 목표들을 이루려는 싸움에 몰두하다 보니까 어떻게 살고 싶었던 것인가에 대한 것을 잃어버린게 아닌가, 그런데 한윤희가 보여준 사랑이나 삶이 그것을 가르쳐준게 아닌가 하는거죠.
그렇게 살 수 있다면, 한윤희처럼만 살 수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내 일생을 낭비해버린 아무 것도 아닌 상황에서도 인생을 다시 한번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던거고, 80년대의 아무리 엄혹한 시절이었다고 할지라도 한윤희 같은 생각과 한윤희 같은 삶의 태도를 보였으면 그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적으로 아름답게 살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느냐 하는거죠.
내가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 것인지 말하는게 아니잖아요.
지 - ‘그 사람을 왜 기다리고 있냐?’는 질문에 한윤희가 ‘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고 했는데요. 신영복 선생이 언젠가 했던 ‘지금도 운동 진영에 남아 있는 사람을 보면 강한 이념이 있었다기 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가진 사람이 남아 있는 것 같다’는 얘기와 같은 맥락인 것 같은데요. 그런데 한쪽에서는 그걸 보면서 김지하 시인이 예전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라고 했던 것을 연상하기도 하는 것 같거든요.
임 - 대단히 질문이 정치적이면서도 표피적이예요. 김지하씨가 ‘죽음의 굿판을 거두어라’고 딱 한마디만 말씀하셨는데, 그거는 여러 가지 맥락이 있는 거잖아요. 이를테면 분신하는 자살을 누군가가 사주했다, 어떤 조직이 사주했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거구요. 그 글을 조선일보에 썼다는 것하고, 그런 여러 가지 맥락이 생략된 말이잖아요. ‘얘들아, 자살하지 마라’고 김지하가 그 시절에 얘기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누가 과연 토를 달 수 있는 말이겠어요.
지 - ‘이념보다 중요한 건 삶의 태도’라고 말하는 방식이 80년대를 참혹하게 지낸 사람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기도 했을 것 같긴 합니다.
임 - 그 상처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조직이 사주했다, 이런 것 때문에 생긴 상처지 ‘얘들아 죽지마라’라는 말에 어떻게 상처를 입을 수가 있어요. 실제로 자살을 자발적으로 하려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얘야, 자살하지 마라’라고 얘기했을때 거기에 어떻게 상처를 입을 수가 있겠어요. 고마운 얘기지.
ⓒ cinewel.com
지 - 그때는 그게 한 삶의 선택이기도 했지 않습니까? 가령 전태일에 대해서 태어나서부터 영웅으로 살다가 영웅으로 죽은 것처럼 묘사하는 것도 그렇지만, ‘얼마나 뜨거웠겠니?’라는 감상적인 태도로만 접근하는 것도...
임 - 저는 정확히 그렇게 본거예요. 그 장면을 제가 어떻게 연출을 했느냐 하면, 그 여자 애가 어떤 부당함에 항거하기 위해서 자살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다만 경찰이 잡아갈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신나를 뒤집어 쓴거고, 위협하기 위해서 라이터를 들었던 것인데, 경찰이 와서 붙잡으니까 얼떨결에 불은 켜진 것이고, 얼떨결에 자기도 예상치 않았던 불이 자기 몸에 붙게 된 것이고, 떨어져서 죽게 된 것으로 연출을 했어요. 그래서 그 여자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엄마, 뜨거워’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여자가 마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표현이 안됐죠. 바깥에서 본 사람들은 그걸 열사라고 표현을 하고 있죠. 저는 그런 걸 너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하는거죠. 어땠을까요? 그 여자가 만약에 죽지 않고, 살수 있는 선택을 우리가 할 수 있게 해준다면...
지 - 감독님 의도가 정확하게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있고, 지금 민주화 세력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 상황을 가지고,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고, 사회 요직에 있는 상황에서 많은 실망감을 준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은데요. 17년간 감옥에 있다가 나오니까 어머니가 1,000만원 짜리 옷을 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게 출세한 운동권에 대한 은유로 읽힐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머니 입장에서는 보상을 해주고 싶었을 거구요.
임 - 거기에 돈 얘기가 딱 두 번 나오는데요. 윤희가 시장에서 애 업고 있는 여자한테 석류를 사는데 300원인가를 받죠. 그 차이만큼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1,000만원짜리 옷을 지금 이 시대에 사는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지 - 비난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위화감을 조성하는건 사실 아닐까요? 아직까지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으니까.
임 - 사람들이 다 바라고 있는거 아닌가요? 우리 솔직하게 얘기합시다.(웃음) 천만원 짜리 옷을 사입는 상황을 누구나 바라는거 아닐까요? 내가 못하니까 화가 날뿐이지. 386이 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되고, 출세했다고 쳐요. 출세라는 말 자체도 비아냥이 깔려 있는 단어잖아요. 다들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뭡니까? 돈 많이 벌고, 출세하려는거 아닌가요? 그걸 나쁘게 보지는 말자구요. 386이 예전에 운동권하다가 정치권에 들어간게 뭐가 나쁜 일이겠어요. 가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거겠죠. 그런 상황이 이 영화에 있는데, 임상수가 그걸 비꼰건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요.
왜 그걸 질문하는지 이해가 안가는데, 그걸 보고 마음이 찔리는 사람은 찔리는거고, 그걸 보고 누굴 생각하면서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소한 거고, 그걸 보고 ‘저게 뭐 어때?’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전 그것만 보여주는거예요. 그게 정확히 우리의 삶의 모습인거고, 그게 옳으냐, 그르냐는 사실 제가 얘기하고 있지 않죠. 단칼에 그게 옳으냐, 그르냐 하고 얘기할 수 없는거잖아요.
지 - ‘내가 사실을 보여주면 그 사실이 생각을 낳을 거라고 기대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그게 임상수 영화를 관통하는 얘기라는 생각도 듭니다.
임 - 지금 얘기한 것도 그런거네요.
지 - 사실을 보여주고자 할때 어떤 점에 중점을 두시나요?
임 -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객관적이고자 한다고 하는 것은 척할 뿐이지, 사실은 객관적일수가 없죠. 저의 어떤 의도 같은 것이 있지만, 그 의도를 숨길 수는 없는거예요. 사실은 숨길 수 없지만, 제가 만든 영화를 봤을때 내 의도에 반대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도 나의 의도를 알 수는 있지만, 내가 만든 영화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걸 수 없을만큼 객관적이면 된다고 생각하는거죠. 그럴려면 말그대로 사실에 중점을 두어야죠. 그래야지 나랑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설득해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거죠.
지 - 전 ‘눈물’하고 ‘바람난 가족’을 좋아하는데요. 그 영화들을 좀 뜨거운 영화였던 것 같은데, ‘그때 그 사람들’은 좀 냉소적인 면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임 - 바람난 가족이 가장 냉소적이라고 하던데. 그걸 뜨겁게 보셨어요?
지 - 표현 자체는 쿨하게 하신 것 같은데, 문화 지체라는 것이 사람들의 인식이나 사회 변화와 제도와 시스템간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 아닙니까? 그걸 극복하려는 뜨거운 의지를 봤다고 할까요? 표현 방식과는 무관하게요.
임 - ‘그때 그 사람들’은 냉소적이었다고 보세요?
지 - 소재가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모두 다 나쁜거 아니냐?’는 태도였던 것 같고, 감독님의 고민이 더 깊어지거나, 혼란스러웠던 상황이었던 것 같아서요.
임 - 그럼 이번 영화도 그렇게 보셨나요?
지 - 아니요. 오히려 그렇지 않아서 임상수 감독님 영화 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임 - 그럼 유일하게 제 영화 중 냉소적인 영화로 ‘그때 그 사람들’로 보시는거네요.
지 - 인터뷰이께서 질문도 많이 하시고, 공격적이셔서 당황스러운데요.(웃음)
임 - 공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웃음) 제가 이 인터뷰를 의미 있는 인터뷰로 하고 싶을 뿐이예요. 386을 비판한거냐, 아니냐 하는 식은 정말 재미없는 인터뷰라는거죠.
지 - 이 영화의 화두가 화해와 치유라고 하셨는데요.
임 - 아니예요.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찌라시에 나온거고, 신문에 나온거죠.
지 - 영화 마지막 부분 대사에 윤희가 ‘우리가 살아 왔던 모든 것과 화해하자’고 얘기한 것을 그렇게 해석한 것 같은데요.
임 - 아까 제가 찌라시라고 한 것은 우리 영화사에서 뿌린 찌라시를 말한 겁니다.(웃음) 그 문장은 황석영씨 소설에 있는 문장이죠. 사실은 오현우의 입장에서 누구랑 화해가 가능하겠어요. 5공화국 사람들하고 화해가 가능하겠어요? 그런 화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화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화해란 말은 그럴때 쓰는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윤희의 입을 통해서 화해라고 한 것은 ‘그 자신 안에서, 오현우의 삶 자신 안에서 화해할 수 없는 미움 때문에 더 이상 상처를 받지 말자’ 라든가 자기 인생에 대해서 너무 비하하고, 잘못 살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든다고 해도 그런데로 자기 자신의 인생과 화해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되지 않을까요? 저도 그 문장이 좋아서 쓰긴 했는데,0 쓰면서도 계속 생각을 했던 거예요. 타인과의 화해라는 것은 인간이 잘 할 수 없는거라고 생각해요. 말이고, 위선일 뿐이지.
지 - 감독님 말씀을 들으니 이해가 가는데, 그걸 보고 ‘도대체 가해자가 반성을 하지 않는데, 무슨 화해냐?’하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거든요.
임 - 정치 관련해서 인터뷰 하시니까 그런건데요.(웃음) 한편의 작품은 겉으로 보고 그런 식으로 ‘임상수가 화해하자고 했는데, 가해자가 반성을 하지 않는데 무슨 화해냐, 임상수 틀렸어’라고 얘기하는 것은 제 영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거예요. 한 편의 작품이라는 것은 굉장히 깊숙이 이해를 해야지, 그런 식의 얘기는 표피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반론에 지나지 않는거죠. 물론 그 말 자체는 맞는 말이예요. 가해자가 반성을 하지 않는데 무슨 화해를 하겠어요?
지 - 전 사실 정치적인 쪽보다 문화적인 쪽에 더 관심이 많은데요. 문화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사회에서 소통되는 정치적인 맥락 같은게 있다고 보구요. 감독님 영화 같은 경우는 설명이 많이 필요한 영화인 것 같고, 거기에 대해서 감독님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적절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웃음)
임 - 사실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낸다는 것은 크게, 길게 연설을 하는거죠. 한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보낸다는 것은 큰 권력인거죠. 아주 많은 연설을 한건데, 거기에 덧붙여서 다시 설명을 한다는 것은 좀 맥빠지는 일인 것 같아요. 인터뷰는 프로모션을 위해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좀 더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을거라는 기대 때문에 풍성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본질적인 말이 될 수는 없는거죠. 영화 그 자체보다 본질적일 수는 없는거고, 그런 식의 표피적인 이해만 당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오해받는 것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건 제가 할 일이라기 보다는 영화를 생산하고 났을때, 그 다음에 그 영화를 가지고 글을 쓰시는 분들, 그런 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게 제일 적절한거라고 생각을 하죠.
지 - 영화 평론가 이상용씨와의 인터뷰에서 “한윤희의 캐릭터는 단순히 저항하는 시대가 배경이 아니라 저항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너무 저항에만 몰두하다 잃어버린 무엇을 보여주는 인물이다”라고 하셨는데요. 저항에 몰두하다 잃어버린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임 - 그거는 제가 110분간의 이번 영화에 걸쳐서 그거를 묘사하기 위해서 애를 썼는데, 그걸 다시 제 입으로 얘기하라고 하면 너무한거 아닙니까?(웃음)
지 - 원작에서 시위를 한 다음에 감옥에 가라고 종용하는 장면을 영화에서는 말리는 것으로 수정한 이유는 뭔가요? '저항자들에 대한 비판‘이라고 표현하셨던 것 같은데요.
임 - 저 같았으면 말렸을 것 같아서 바꿨어요. 오래된 정원 원작에서는 말리지 않죠. 오히려 존경심을 표하고 그러는데, 저는 소설에서 그 부분이 한윤희답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지 -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40대 중반이 됐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도 주류다. 더 이상 불평불만으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얘기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요.(웃음)
임 - 무슨 오해요? 뭐 이렇게 오해가 많은 사회야.(웃음)
지 - 이 작품이 감독님 영화 인생에서는 여러 작품 중 하나겠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이 영화를 보면서 감독님의 저항 의식이 줄어든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거든요.
임 - 그 바로 윗 문장 기억하세요? ‘나는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보통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래디컬할 자유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대 중반이...’ 이렇게 된겁니다. 그럼 대답이 됐나요?(웃음)
기술적이거나 미학적인 테크닉이나 태도를 버려가면서까지 상업적으로 배려할 생각은 없다
지 - ‘이렇게 감독을 아끼지 않는 사회는 처음이야’라고 하신 적도 있으신데요.
임 -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치졸한 불평, 불만이었네요.
지 - 한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자산과 경험, 에너지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건데, 그런 경험을 한 사람에 대해서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임 - 그런 맥락은 아니구요. 그건 꼭 영화 감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 사회 전체가 어떤 공적인 인물에 대해서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는데 인색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거죠. 존경을 표할 사람은 존경을 표하고, 비판할 사람은 비판을 해야 되는데, 너무 씹는데만 주력하는 것도 물론 역사적 배경이 있죠. 한때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존경을 받을만하게 일관성 있게 살아가지 못한 탓도 있을텐데, 사회 전체적으로 존경심을 표하는데 인색한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그 정도를 표현한거예요.
지 - 변영주 감독도 ‘감독은 상해보험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얘기하던데요.
임 - 자기가 무슨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영화를 찍었다고 그래?(웃음)
지 - 우리가 박지성씨나 강수진씨의 발을 보면서 감동을 하지 않습니까? 노력에 대한 경외심일텐데요. 정신적인 상해는 눈에 띄지 않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정신적인 작업을 하다가 상해를 입은 것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김기덕 감독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도 경악을 했구요. 그렇게 열심히 영화를 찍은 사람이 마음에 안드는 얘기 좀 했다고 ‘한국을 떠나라’는 반응도 많았지 않습니까? 아까 리플이 전부는 아니라고 했지만, 지금 인터넷은 거의 리얼 스페이스하고 같은 부분이 있고, 네티즌의 의견이라는 식으로 해서 여론을 선도하는 부분도 있거든요. 일부 신문이 진짜 여론이 아닌 것을 가지고 자신의 아젠다 설정 능력을 가지고 여론인양 호도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거죠.
임 - 인터넷 리플은 읽지도 않고, 무시해야될 것 같아요. 정신건강상.(웃음)
지 - 인터넷 리플을 보면 ‘눈물’ 같은 경우는 별점이 한개 아니면 다섯 개더라구요. 문제적 영화를 많이 만들다보니까 영화외적인 논란이 많았구요. 그게 영화적으로는 저평가 받은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임 - 그렇지 않구요. 영화적으로만 말씀드리자면 제 영화를 제가 의도했던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긴하죠.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얘기를 하는 감독이 아니거든요.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도했던데로 잘 쫓아오면 재밌게 즐길 수 있는건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식의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거죠. 그것은 ‘눈물’ 뿐만 아니라 제 영화 전체에서 그런 것 같아요.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구요. 그 부분은 상업 감독으로서 되게 괴로운 부분인데, 많은 사람을 잘 이해시켜서 잘 끌고갈 수 있어야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감독이 되는건데요. 그걸 제가 잘 못하고 있는거죠. 그런 고민은 계속하는건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하고 있는 기술적이거나 미학적인 테크닉이나 태도를 버려가면서까지 그 사람들에게 맞춰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러지 않고서도 그런 사람까지 끌고갈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 그런 점이 어려운 부분이죠. 또 한가지는 어차피 한편의 영화를 본다는게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 상황들을 이해하려는 시도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걸 만든 감독을 이해하려는 시도인데요. 타인을 이해하려는 점에 있어서 내 입장에서는 그 사람들을 끌고 가지 못한게 저의 실수 내지는 제가 잘못한거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한편의 영화나 그 영화를 만든 사람, 그 영화에 나오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죠.
지 - 논란이 되는 부분들 때문에 더 보여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눈물만 하더라도 “이 영화를 대한민국의 모든 10대들이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요.
임 -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예요. 제가 그런 거 가지고 새삼스럽게 한국 사회를 그런 수준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런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지 - 작가주의 감독이기도 하지만, 영화라는게 많은 돈이 투입되니까 자본에 대한 책임도 져야 되니까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많으실텐데요. 그런 논란을 예상하셨지만, 그런 논란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못보게 되는 그런 상황을 고민하실텐데...
임 - 그냥 그런거예요. 세상은 그런거예요. 뭔가 맞으면 우루루 와서 다 보는거고, 안맞으면... 거기서 제가 생각하는 제일 중요한 것은 그거예요. 타인을 이해하려는 자세에 있어서 너무 편협한거 아닌가 하는거죠.
지 - 전 감독님이 영화를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참 낯설어 보이지만, 이해할려고 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삶이다’라는 것 같은데요. ‘눈물’에서도 ‘이 친구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사랑 밖에 없다’라고 얘기하신 것 같구요. 그걸 사회에 대해서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임 - 상업감독으로서의 제일 큰 고민이라고 얘기했잖아요. 제가 가진 미학적인 원칙을 버려가면서까지 영합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저의 고민이죠.
지 - 딴지일보 인터뷰를 통해서 ‘나도 이제 터질때가 됐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요.(웃음) 이번 영화가 그럴거라고 보십니까?
임 - 안터졌네요.(웃음)
지 - 아직 개봉 첫 주말도 안지났는데요. 정확하게 알 수 없지 않나요?
임 - 정확하게 알 수 있어요.
지 - 프랑스에서 연출하기로 하신 작품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임 - 아직 결정된 것은 없구요. 기사에 나온데로 얘기중인거죠.
지 - 기사 나온걸 보니까 거의 확정이 된 것 같던데요.
임 - 제일 중요한 문제가 결정이 안됐죠. 어느 회사에서 돈을 받을지가 결정이 되어야 되는데, 아직 현금이 오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계약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죠.
지 - 해외에서 연출 제의를 받는 감독들이 여러 가지 상황을 따지면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프랑스에서 연출하기로 결정을 한 이유는 뭔가요? 프랑스에서 연출하는 최초의 한국 감독이 되는 셈인데요.
임 - 좀 전의 질문과 이어서 얘기하자면, 한국 영화 시장이 양적으로 너무 작아요. 거기에 비해서 제작비가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수익을 내기가 되게 어려운 구조입니다. 시장 자체가 양이 적고, 시장의 질적인 면에서 취향이 대단히 편협해요. 조금 다른 식으로 얘기하면 타인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부족하다고 얘기했던 거구요. 제가 프랑스에 가서 영화를 찍게 되면 양적으로도 크게 성장을 하겠죠. 유럽 시장에다가 한국 시장까지 포함이 되는거니까요. 분명히 한국 사회보다는 질적으로도 취향이 훨씬 덜 편협하고, 여러 가지 영화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즐겨내는 취향들이 시장 내에 있는거죠. 그런 점 때문에 가는겁니다.
지 - 내용은 어떤건가요?
임 -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강수연이 마지막에 간통으로 체포되잖아요. 그래서 ‘나는 짜증나서 파리로 간다. 정치적 망명이다’고 했는데, 그 여자가 가서 여러 해를 살면서 배경도 없이, 돈도 없이, 몸 하나만 가지고 서양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서바이브해나가는 대단히 에로틱하면서, 코믹하면서,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겁니다.
지 - 그 전에 영화들 역시 에로틱한 장면이 많지만, 섹스 얘기보다는 다른 정치적인 함의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때 그 사람들’부터는 그런 장면이 없어진 것 같은데요.
임 - 그건 소재에 따라 틀린거죠. 10.26에서 무슨 에로틱한 장면을 찍겠습니까?(웃음)
지 - 지난해 8월 법원에서 원본 그대로 상영해도 된다는 판결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DVD 등으로 무삭제 버전을 출시하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임 - 1심 판결이 그렇게 나온거구요. 저쪽이랑 MK 픽쳐스 쪽에서 각각 항소를 해서 2심이 진행이 될거예요.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가집행 상황이거든요. 틀 수 있다는거지, 아마 회사 쪽 입장이 그럴거라고 생각해요. 확정 판결이 나와야 움직일 것 같아요.
지 - 법정싸움까지 벌어졌는데, 그때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옛날처럼 힘으로 눌러서 상영금지를 시킬 수 없는 상황이니까 대단히 교묘한 정치적 판결을 한 것 같은데요.
임 - 상영금지를 시킬 주체가 어디 있어요?
지 - 사실 박지만씨가 요구한 내용과도 다른 엉뚱한 부분에서 가위질을 했지 않습니까? 영화를 훼손시켜놓고, 그쪽에서 원하는 결과는 일정하게 성취했다고 보거든요. 그걸 보면서 그 분들이 영리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던데요. 적당히 욕은 먹지만, 원하는 결과는 얻어내는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임 - 왜 저한테 악역을 자꾸 시키십니까? 알고 계시면서. 제 입으로 자꾸 다시 얘기를 하라고 하시는 거예요. 얌전히 살고 싶습니다.(웃음)
지 - 예전에 계몽적인 감독이라는 말씀도 하신 것 같은데요.
임 - 눈물 같은 영화는 어떤 것 같아요?
지 - 계몽적인 영화죠.(웃음) 그 후 영화적으로 계몽을 숨기려고 너무 세련되게 만들려다보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냉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임 - 심훈의 상록수처럼 계몽적으로 영화를 찍으면 그런 감독한테는 인터뷰하러 오지도 않습니다. 예술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세련되게 찍는 것은 1차적인 기본인거죠.
배우과 감독의 관계는 대단히 미세한 인간관계에서 나오게 된다
지 - 문소리씨는 딴지일보 인터뷰에서 감독님에 대해서 재미있게 표현을 했는데요. ‘처음에는 말을 시비조로 하는데, 그걸 받아주면 오히려 재밌고 귀여우신 면이 있다’고 하던데요. 상처 안받으려고 일부러 먼저 공격적으로 얘기하는 건 아닌가요?
임 - 그렇지는 않아요. 오늘 공격적인 이유는 말지에서 인터뷰하러 온다기에, 말지는 제가 예전에 애독했던 잡지기 때문에 그것의 장점과 한계를 다 알고 있는데, 나를 인터뷰하러 온다고 하니까 ‘한계만 잔뜩 드러나는 인터뷰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거죠.(웃음) 말지가 문화적인 부분에 약하죠. 한국의 운동권 내지는 진보들이 문화적인 부분에서 약하다고 봐요.
지 -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위선을 까발리는 영화라는 면에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도 비교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두 분의 영화가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보십니까?
임 - 전혀 다른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죠. 상수라는 이름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고 봐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개인적으로 다 본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즐기지만, 영화적으로 그 사람하고 나하고 겹치는 것은 상수라는 이름 밖에 없다고 봅니다.
지 - “사실 난 박찬욱이나 허진호처럼 스타에게 인기 있는 감독은 못 된다. 하지만 ‘임상수랑 하면 뭔가 다르겠지’라는 기대들은 하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임 - 이런 건 있는 것 같아요. 배우 입장에서도 흥행이 되는 영화에 참여해야지, 잘했거나 못했거나 의미를 증폭할 수 있잖아요. 제가 흥행을 그렇게 못하는 감독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터뜨리는 감독도 아니었잖아요. 배우들은 자신들이 멋있게 표현되는 영화를 좋아하죠. 그런데 제 영화에서는 단순히 멋있게 나오지만은 않죠. 망가질 수도 있고. 처음 세 작품은 섹스신도 쎘고, ‘그때 그 사람들’ 같은 경우는 정치적인 이유로도 위험했고, 그런 점에서 선뜻 꺼려질 수도 있는 부분이 있지만, 또 한가지 생각해보자면 결과적으로 제 작품에 나와서 실패한 배우는 별로 없어요.
‘처녀’때서부터 진희경, 강수연 다 자기 필모그라피에 남을만한 연기를 했던 작품이고, 김여진도 새로 발굴된 케이스고, 눈물도 마찬가지고, 바람난 가족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문소리, 황정민도 다 좋은 배우였지만, 한 단계 더 성장한 배우가 됐던 것 같고. 그런 점에서 아까 말한 점에서는 꺼려지지만, 임상수랑 하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는 챤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 두가지 다른 요소가 있는 것 같아요.
지 - 진짜 연기를 하고자 하는 배우들이라면 감독님과 같이 작품을 하고 싶어할 거란 거죠.(웃음)
임 - 다른 감독이랑 하면 무슨 가짜 연기를 한단 말씀입니까?(웃음)
지 - 연기를 끌어내기 위한 연출력이라고 할까요? 그런 면에서는 어떤 스타일인가요?
임 - 전 잘 모르겠어요. 다른 감독들도 마찬가질텐데, 자기 방식을 가지고 하는거죠. 그 방식을 비교해서 특성화해서 얘기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건 방식이 아닌거죠. 내가 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그게 뭔지를 모르지만, 그냥 하는거죠.
지 -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본인만 알 수 있는 暗黙知(암묵지) 같은거라는 얘기군요.
임 - 대단히 미세한 인간 관계에서 나오는거거든요. 배우랑 감독의 관계는.
지 -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감독은 말 몇마디 툭 던져서 감정을 끌어내기도 하고, 끊임없이 대화를 통해서 캐릭터를 같이 잡아나가는 경우도 있고, 모든 연기를 직접 통제하는 감독도 있는 것 같은데요.
임 - 배우마다 다르고, 케이스마다 다른 것 같아요.
지 - 캐스팅할 때 어떤 점을 가장 염두에 두십니까?
임 - 캐스팅은요. 한국 영화가 제작비나 뭘로 보나 커졌기 때문에 캐스팅은 감독의 취향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아요. 산업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죠. 투자자나 제작사나 이런 사람들이 그 영화의 예산과 얼만큼 흥행이 될 영화라는 산업적인 것을 고려해서 캐스팅이 결정되죠. 물론 감독이 전적으로 배제된다는건 아닌데, 전적으로 감독의 취향대로 이루어지는건 아니예요.
지 - 그때 그 사람들 같은 경우는 정치적인 부분이 있어서 한석규씨, 백윤식씨 같은 배우를 캐스팅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임 - 어렵지 않았어요. 두 사람 다 쿨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 - 백윤식씨 같은 경우에는 ‘정치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이라는 전제를 달았다고 한 것 같구요
임 - 자기가 혼자 속으로 고민했을 부분이지, 그걸 가지고 저랑 토의하고, 같이 고민하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지 - 윤여정씨도 이번에 세 작품 연달아 같이 하셨고, 김응수씨도 그런 것 같은데요. 계속 쓰시는 배우를 많이 쓰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잘 아는 배우랑 같이 하시는게 편한 건가요?
임 - 그렇죠. 그렇다고 해서 새 배우를 발굴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팀웍 같은게 있는거거든요. 대학로에 극단 개념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그 극단에 속해있는 배우들만 가지고 했는데, 동인제처럼 구분이 명확한 극단이 있었을때 같은 배우들로 다른 작품을 하는 것과 흡사한 맥락일텐데요. 그게 편한게 있죠.
지 - 감독님이 선호하는 스타일의 배우는 어떤 배우인가요? 연극도 많이 보러 다닌다고 들었는데요.
임 - 연극 많이 안보러다니는 감독 없어요.(웃음) 잘하는 배우를 좋아하죠.
지 - ‘그때 그 사람들’은 백윤식씨를 염두에 두고 쓰셨다고 하던데요. 보통 시나리오를 쓸때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시나요?
임 - 그렇지는 않죠. ‘지구를 지켜라’, ‘범죄의 재구성’에 출연한 백윤식 선생을 보고 한건데, 두 작품의 충격이 굉장히 컸죠.
지 - 그 두 영화를 거쳐서 ‘그때 그 사람들’로 한국 사회에서 굉장한 독특한 영역을 개척한 배우가 됐는데요. 최근에 개봉했던 ‘애정 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과 ‘싸움의 기술’에서 주연을 맡았는데, 흥행면에서 실패했는데요.
임 - 타짜로는 성공했잖아요. 매 작품 성공할 수 있습니까? 되는 작품도 있고, 아닌 작품도 있겠죠.
지 - 감독님과 영화를 찍고 나서 ‘내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한 배우는 많을 것 같은데요. 없던 배우를 끌어내서 스타급으로 만든 배우는 봉태규씨 아닙니까? 예뻐보이는 두 배우는 배우로서 성공하지 못한 것 같고, 봉태규, 조은지씨가 비중 있는 주조연급 배우로 성장을 한 것 같은데요.
임 - 두 배우는 그 영화 찍을때부터 얘네는 어느 정도까지는 뜰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온 스탭들이 그렇게 생각을 했죠. ‘눈물’ 끝나고 나서 스타가 된 건 아니고, 그 이후에도 많은 작품을 했죠.
지 - 물론 그렇지만, 그 작품으로 좋은 인상을 남겨서 기회를 얻게 된 측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임 - 감독의 임무 중 하나죠. 배우를 발굴해내는게.
지 - 그때 봉태규씨 인터뷰를 했었는데요. "감독님은 '소년원에 간 창이 결국은 그가 혐오하는 어른들하고 같이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그런 어른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제 생각은 달라요"라고 얘기하는데, 그 친구 대답이 재미 있더라구요. "창이 소년원에서 열심히 복싱을 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거나,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사가 될 것 같다"라고 하던데, 그 말을 듣고나서 ‘젊은 사람들이 우리가 우려하는 것 보다 훨씬 희망적이고, 건강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성 역할에 관한 편견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 같거든요.
임 - 그렇죠.
지 - 나이가 들다보면 그 동안 영화를 만들면서 가지고 있었던 비판 의식이나 열린 마음이 없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은 없으세요?
임 -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개인적인 차이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요. 저는 아직 반도 못보여드렸습니다.
지 - 앞으로 하고 싶은 건 어떤 내용인가요?
임 - ‘오래된 정원’ 같은 경우는 충무로에서 다 말리는 프로젝트였어요. 그런데 좋은 작품,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잘 찍었을 경우에 그렇게 큰 손해는 안볼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들었던 작품인데, 다시 말해서 위험부담이 컸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던 것은 아까 말한데로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란 건데, 그건 우리의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저로서는 마지막 세 작품으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현대사와 연관해서 우리들의 어떤 모습을 깊숙이 잘 포착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파리에 가서 사실은 그 한 작품만 하고 돌아오지 않고 계속 그쪽에서 작품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요. 여태까지 나의 작품이 한국인으로서, 한국 감독으로서, 한국 현대인에 대해서 발언한 것이라면, 다음 작품서부터는 세계 시민의 한명으로서, 물론 아시아의 한 감독으로서, 세계 사회에 발언하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지 - 봉준호 감독도 ‘임상수 감독이 뉴욕이나 프랑스에서 인기가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감독님 영화를 한국에서 받아들이는 것하고, 그쪽에서 받아들이는게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임 - 그런 대답은 제 입으로 하기는 그런데요. 아까 얘기한데로 상황 한계가 있는거거든요. 시장의 질 문제에 있어서 취향이 편협하지 않았을때, 여러 영화를 즐길 수 있구요. 시장의 절대 양이 컸을때 주류가 다 좋아하지 않고, 일부만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어도 수익구조를 만들 수 있게 되는거죠. 그럼으로 해서 사실은 보다 여러 가지 취향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생기는거고, 그게 양방향에서 영향을 주는건데, 그런 면에서 한국 시장이 되게 불행한거예요. 시장 자체가 좁기 때문에 취향 자체를 편협하게 만드는 악순환에 있는건데, 그런 면에서는 그쪽에서 넓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거죠. 사실 한마디로 얘기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현대 유럽 영화계가 어떤 재능의 고갈 상태인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아요.
지 - 한국 감독들에 대해서 유럽 영화계는 물론 헐리웃에서도 주목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임 - 한국의 일류 감독, 영화 잘 찍는다고 분류되는 사람들 영화를 보면, 영화를 찍어내는 모양 같은게 유럽이나 헐리웃 감독에 비해 절대로 뒤지지 않아요. 실력에서 뒤지지 않는데도 문화적 차이나, 언어적 차이, 배우가 아시아 배우라는 핸디캡 때문에 팔려나가지 못하는건데, 만듦새에 관해서는 전혀 떨어지지 않거든요. 그걸 극복해내려면 감독들이 문화적인, 언어적인 것을 극복해내야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도 쉬운건 아니죠. 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문화적, 언어적 문제를 배제하고 만듦새만 봤을때는 전혀 떨어지지가 않으니까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지 - 프랑스에서 한 작품만 연출하지 않고, 계속 하실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한국에서의 여러 가지 환경 때문에, 김기덕 감독님 같은 고민 때문에 나온건가요?
임 - 김기덕 감독하고는 조금 틀려요. 일단 큰 물이라는게 있잖아요.
지 - 감독님이 생각하는걸 구현해내기 위해서 좀 더 많은 예산이나 큰 시장이 필요한건가요?
임 - K리그의 섣부른 중간급 스타에 안주하기 보다는 프랑스 3부 리그에 간다는 뜻이죠.
지 - 거기서 영화가 더 잘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거구요.
임 - 더 잘 받아들여질 수는 없죠. 내 영화가 한국에서만큼 더 잘 받아들여지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쪽에서도 꽤 잘 받아들여지는데, 시장 상황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는거죠. 제 입장에서는.
지 - 그쪽에서 인정을 받으면 한국에서의 흥행도 유리한 면이 있지 않겠습니까? 올드보이 같은 경우도 그랬고.
임 - 그런 측면도 있겠죠. 그럴수도 있지만, 제가 거기 가서 찍는다면 프랑스 취향의 프랑스 영화가 될텐데, 한국에서 1년에 개봉이 되어서 의미있는 흥행 성적을 거두는 프랑스 영화가 단 한편이라도 있습니까?
지 - 어떤 인터뷰에서 ‘나와 함께 사는 동시대의 감독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다. 그건 세련됨이다. 물론 너무 세련되면 대중들이 즐기기에 무리가 있다. 어차피 터지는 영화는 대중들의 집단 무의식이 스파크를 일으키는 적당히 촌스럽고 적당히 천박한 영화니까’라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관객 1,000만 시대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보세요?
임 - 그건 바깥에서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구요. 한국 영화계로서는 질과는 아무 상관없이 1,000만 영화가 1년에 한편이라도 더 나오면 영화계 전체가 편해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질이 편협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뼈아픈거죠. 사회 전체적으로도 그렇고, 영화계 전체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자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대단히 괴로운거죠.
지 - 여전히 스탶들의 처우 개선은 안 이루어지고 있는데요. 그 부분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임 -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얘기할 입장에 있지는 않지만, 사실 한국 영화계는 산업 자체가 건강한 산업이 아니예요. 수익을 내는 영화들이 가끔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때 한국 영화계는 늘 적자였을 거예요. 전체 제작비랑 수익률을 따져 봤을때 수익률이 항상 마이너스였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활황인 것은 한때 좋았던 시절이 있었을거고, 돈 잃는 생각은 안하고, 로또를 기대하듯이 ‘내가 1,000만이 될 수 있다’는 심리로 자본들이 많이 유입이 됐는데, 객관적으로 봤을때 대단히 불건강한, 투자해서는 안되는, 리스크가 너무 심한 불안정한 산업인거죠.
그러면서도 그걸 지탱한게 로또 당첨되고 싶은 마음 말고는 스탶 인건비를 떼어먹고 생존해온게 한국 영화계인 셈인데요. 스탶 처우개선에 관한 문제는 냉정하게 노동 문제인건데, 노동 문제에 관해서는 사실은 한국 전체 노동계의 역사로 봤을때 긴 시간에 걸쳐서 피나는 투쟁으로 이 정도까지 온거거든요. 그런 면에서 한국 영화계에서도 노동 문제는 단박에 해결될 수는 없는거죠. 당사자들이 오랜 기간 노력을 해서 차근 차근 나아질건데, 그렇게 해야만 나아질거라고 보는거구요. 그 길로 가고 있는건데, 제작자 입장에서 봤을때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거죠.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보면 산업 전체로 봤을때 수익을 못내고 있는 구조인데, 인건비도 치고 올라오니까.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요.
절대 시장을 넓히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한류다 뭐다, 일본, 중국 시장이 제일 만만하니까 시장을 넓히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는거죠. 얼만큼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모르지만, 잘 넓히지 못한다면 한국 영화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거죠.
지 - 인구가 1억은 되어야 충분한 내수 시장이 된다고 하는 얘기도 있구요. 그래서 일본 시장을 개척하려고 하는 것일테고, 한동안 좋았던 것 같은데, 한국 영화나 문화 자체 보다는 한류 스타에만 기댄 접근과 기획으로 요즘은 더 어려워진 것 같습니다.
임 - 그런 면이 있죠.
지 - 스크린쿼터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왕의 남자’나 ‘괴물’의 흥행을 보면서 ‘자, 봐라 스크린쿼터 없이도 한국 영화 잘되지 않나?’라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임 - 누가 그래요? 그런 사람들은 정치적인 의도가 있어서 하는 헛소리들이구요. 비논리적인데, 정치적으로 이득이 있다고 해서 하는 헛소리가 너무 난무해서 골치가 아픈데요. 스크린쿼터의 문제를 FTA와 연관해서 봤을때 한국 영화계의 입장이라는 것은 되게 미미하게 취급될 것이고, FTA라는게 되게 큰 얘기이기 때문에 미미하게 취급되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일텐데요. 그렇거나 말거나 영화계 입장에서는 스크린쿼터를 그런 식으로 축소해가는게 진짜 한국 영화계를 완전히 고사시키는 놀라운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 없어요. 정말 미래에 관해서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축소됐을때 한국 영화계가 완전히 고사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요. FTA가 체결되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는 모르겠는데, 한국 영화계가 고사된다는 상황이 됐을때 그게 영화계 입장에서만 끔찍한 상황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로 봐서 끔찍한 상황이 될텐데, 물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을 것이구요. 골치 아픈 문제죠.
지 - 영화계의 투쟁 동력이라고 할까요. 이게 작년 초에 비해서 많이 없어진게 아닌가 싶은데요. ‘왕의 남자’나 ‘괴물’의 흥행 역시 음모론으로 해석되기도 하던데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된다고 보십니까?
임 - 일개 감독이 그런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웃음) 말씀하신 음모론은 별로 설득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그런다고 해서 1,000만이나 든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얼마전에도 저한테 청와대 앞에 가서 1인 시위를 해달라고 요청이 왔는데, 냉정하게 거절을 했는데요. 되게 비관적으로 보죠. 고사한다고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어요. 저는 완벽하게 고사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보는거죠. 그런 상황이 왔을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지 그런 점이 골치 아프다는거죠.
지 - 도제 시스템의 마지막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때와 지금의 영화 제작 방식의 가장 큰 차이는 어떤 건가요?
임 - 그거는 있어요. 제가 도제 했을 무렵, 90년대 중반부터 한국 영화계는 완벽한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어요. 심지어는 신상옥 감독이 돌아가셨을때 지금 우리가 누구 누구라고 할 수 있는, 제 세대의 젊은 감독서부터 아무도 그 빈소에 나타나지 않아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안성기씨가 ‘자기가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되는데,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는 식의 발언까지 한 적이 있을 정도로 허리 세대가 완전히 끊어질 정도의 완벽한 세대 교체를 했는데요. 그것은 한국 사회의 어느 부분에서도 볼 수 없는 완벽한 세대교체였습니다.
나쁜 점도 있죠. 물려 받을 것은 물려받고, 모셔야 될 분은 모셔야 되는데, 신상옥 감독의 경우만 해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안간다’ 이렇게 되는거니까요. 그런 약점이 있을만큼 세대 교체가 완벽하게 됐는데요. 약점이 있지만, 그런 장점이 작품을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 같고, 여러 가지 구세대의 관행 같은 것도 완전히 없어져버린 그런 것도 있구요. 제작 시스템 같은데 있어서도 구시대의 악습 같은 것을 일거에 없애버린 부분이 있죠. 새로 전통이 생기고, 새로운 권력이 생기면서 우리가 구시대의 악습이 되는 경향도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지 -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임 - 명시적으로 얘기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지 - ‘고인 물은 썩을 수 있다’는 우려 같은 건가요?
임 - 항상 그런거니까요.
지 - 그때 같이 계셨던 분들 중에서 작품 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하시는 분이 아닌가 싶은데요.
임 - 그렇지 않아요. 박찬욱 감독 같은 사람도 그때 사람이예요. 봉준호 감독도 조금 뒤지만, 연출부 생활을 했죠.
리플을 보면 남을 괴롭히는 인간의 야수성이 드러나는 것을 사회에서 배워가는 것 같다
지 - 영화 아카데미 출신들이 굉장히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 한국 영화 변화의 중심에 영화 아카데미도 한 역할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임 - 영화 아카데미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네요.
지 - 영화학과도 많고, 4년제에서 공부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감독 중에서는 영화 아카데미 출신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임 - 영화 만드는 것은 사실은 누가 가르쳐줘서, 배워서 잘 만들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4년제 영화학교랑 영화 아카데미가 다른 점은 4년제 학교는 19살짜리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들이 가는거잖아요. 그런데 아카데미는 그런 제한이 없죠. 그런 제한이 없기 때문에 영화 아카데미는 대학 졸업하고, 남자 같은 경우 군대도 갔다오고, 사회 생활도 꽤 한 20대 중후반의 사람들이 ‘나는 영화를 해야겠다’하고 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19살에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들어온 사람들하고는 질적인 차이가 있지 않겠어요? 사실은 영화 아카데미는 교수진이나 장비나 그런게 뛰어난 학교는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개개인의 능력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지 - 어떤 영화 학교를 맡은 분이 ‘강한 놈을 만들어서 내보내야할텐데..’라고 했더니 감독님이 ‘이미 강한 놈을 뽑아야지. 몇 년 동안 어떻게 강한 놈을 만들어’라고 하셨다던데요. 그러니까 그 분이 ‘그 놈들이 자꾸 날 속여. 강한 척해서 뽑았는데’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네요.(웃음) 강한 사람들을 골라서 교육을 잘 시켰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겠네요.
임 - 그렇죠.
지 - 배우로도 몇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습니까? 의사로 세 번 정도 나오신 것 같은데요.
임 - 제가 맡은 역할은 캐스팅하기 힘든, 혹은 캐스팅해서 하루하고 마는건데, 캐스팅해서 데려오기 힘든, 데려와 봤자 나보다 못하는, 와서 벌벌떠는 배우들을 데리고 하느니 내가 하는 게 낫겠다는 실리적인 이유로 했던거죠.
지 - ‘플란다스의 개’에도 나오셨잖아요.
임 - 봉준호 감독이 해달라고 해서 한거죠.
지 - 봉준호 감독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세요?
임 - 제가 그 친구를 평가하면 그 친구가 불쾌할텐데요. 넘어가죠.(웃음)
지 - 괴물은 어떻게 보셨나요?
임 -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한국 영화에서 나올 수 있는 탑클래스의 영화죠.
지 - ‘괴물’ 영화 치고는 저예산 영화였던 셈인데요. 일부에서는 CG의 수준가지고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독점 논란 때문에도 좀 상처를 받았던 것 같은데요.
임 - 1,000만명 든 사람이 뭘 그런 것 가지고 상처를 받아요.(웃음)
지 - 인터넷에서 리플 같은거 가끔 보십니까?
임 - 보죠. ‘그때 그 사람들’때 많았는데, 그런 건 안보는게 나은 것 같아요. 그런 걸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죠.
지 - ‘바람난 가족’ 찍다가 중간에 택시 타고 가서 노무현을 찍었다면서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임 - 여중생 학대하는 동영상이 있지 않았어요? 어쩌면 주변에서 보는 애들까지 그렇게 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거 사실은 제가 알기로는 되게 일반적이예요. 중고등학교에서 그런 왕따는 일반적인데, 걔네들이 그러는 걸 보면 무슨 생각으로 저러나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한걸음 뒤에서 보자면 걔네들은 다 어른들이 하는 걸 배워서 하는 건데요. 노무현이 대통령으로서 잘했는지, 못했는지 정확한 리포트가 안오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잘했거나, 못했거나 노무현 대통령에게 동일한 수준의 못된 이지메를 한국 사회가 하고 있는거죠. 그러니까 애들이 다 보고 배워서 하는거죠. 야수성 같이 남을 잔인하게 괴롭히고 싶은 것이 인간의 내면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면을 참을줄 아는게 교양인인건데, 챙피한 줄 알아야죠. 정략적인 이유로, 다음 대선 이런 것 때문에 그런거야, 논리적인 거죠. 그런데 전체적인 사회 상황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여중생 학대하는 동영상이랑 똑같은거죠.
임상수 감독 인터뷰(2) - 복잡한 인간사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싶다
지 - 감독님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 자체가 사회가 복잡해진 부분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바람난 가족’ 같은 경우는 메시지가 저한테 좀 더 명학하게 왔는데, 그 이후 영화는좀 더 생각해야 되는 것 같더라구요.
임 -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구요. 어차피 한국 사회에서 좌든, 우든 그렇게 쉽게 표피적으로 니편, 내편 가르는 익숙한 사고 방식으로 영화를 봤을때 그런거지, 사실은 인간사라는 것은 언제나 그래왔어요. 한국 사회가 복잡해져서가 아니라 원래 그랬던 거구요. 저는 그런 복잡한 인간사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싶어 했었구요. 그래서 제 영화를 보고 깊이 생각하게 됐다고 하면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해요. 간단하게 누구를 찬성하고, 누구를 반대하는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고, 복잡한 인간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지 - 물론 소재의 차이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느 인터뷰에서 “한 편의 영화는 결국 감독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나는 내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에 연민을 갖고 있다. 여기서 연민은 위에서 바라보는 동정보다는 옆에서 보는 공감에 가깝다”라고 하셨는데요. ‘그때 그 사람들’ 같은 경우는 우리하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니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냉소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임 -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 인물 하나 하나에 대해서 실제로 애정과 연민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것이구요. 그때 그 사람과 연관을 해서 제가 가장 기가 막히게 생각했던 것은 ‘뭣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이라는 말이 사실은 가처분 소송에 계류중인 입장에서 변호사가 ‘재판에 영향을 줄 수가 있으니까 그 말만 해라’고 해서 하긴 했어요.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멘트일 수 있고, 정치적인 멘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건 저의 본심인거예요. 그걸 다 정치적인 멘트로만 치부하고, 그 영화의 어떤 정치적인 뉘앙스만 자기 취향에 따라 읽으려고 하고, 얘기하려던 것에 대해서 약간 절망했어요. 진짜 그 사람들에 대해서 진혼하는 슬픔을 이 영화에서 느낄 수 없다니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죠. 사람들 참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지 - 감독님의 영화에서 캐릭터에 대한 연민 같은 것들, 처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무지가 위선과 편견을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성애자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것처럼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상황에 대해 무지하고,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인데,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임 -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좌절감을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을거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영화를 만드는 거예요.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충격인거죠. 그런데 그런게 없으면 무슨 볼만한 예술작품이겠어요. 그런 상황 자체가 일정한 좌절감을 주지만, 그 좌절감보다 더 큰 것은 그게 다 그런 작품의 효용인거죠. 그렇게 부딪혔을때 설득의 과정이 있지 않겠어요. 충격이나. 그게 작품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내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죠.
지 - 흥행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영화는 ‘바람난 가족’ 밖에 없는 것 같은데요. 그건 많이 보고 비판을 한 것 아닙니까? 그게 감독님의 다른 영화와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딴지일보에서 “우리 조감독이 나보고 그러더라고. 200만 가까이 들었는데, 감독님, 그 영화를 본 60%의 관객은 나오면서 그 극장 간판 발로 펑펑 찬다고, 씨발 영화 좆같잖아. 그러고 나오는 영화라는 거예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임 - 그게요. 똑같은 얘긴데, 이렇게 편협한 취향을 가진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감독들이 생존하는 방법, 생존하려는 감독의 고민 같은거거든요. 그게 저만 그런게 아니고, 감독들이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바람난 가족’ 같은 경우, 그게 맞는 표현일거라고 생각해요. 그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속았다’가 아니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적다는거예요. 그래서 ‘바람난 가족’ 같은 경우 섹스로 덧칠을 하는거죠. 프레젠테이션을 섹스로 포장을 해서 내보내는거고,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절묘하게 잘 팔아서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거죠.
그런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같은 영화들도 그렇게 관객들이 잘 쫓아올 수 있는 그런 영화가 아니예요. 저는 살인의 추억도 아주 재미있는 영화지만, 감독이 의도한대로 본 관객들은 실제 스코어보다는 훨씬 낮다고 봐요. 그걸 프레젠테이션을 잘하고, 마케팅을 잘해서 집단무의식 같은게 잘 맞아 떨어졌을때 그런 흥행 스코어가 나오는거죠. 이해하기 쉬운 영화들도 많이 있지만, 그런 영화들에 비해서는 이 영화들이 이해하기 힘든 영화인거죠. 관객보다 조금 앞서간다고 할까요? 그런 영화들의 경우는 그런 식의 마케팅 전법을 쓰는거죠. ‘그때 그 사람들’ 같은 경우는 폭력이라는 것으로 포장을 했고, 그보다 더 컸던 것은 정치적 이슈 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고, 이번 영화는 ’아름답고, 슬픈 러브스토리‘라는 포장으로 나온건데, 그게 편협한 취향의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는 발버둥 같은 것들이죠. 그게 잘 맞아떨어지냐, 안 맞아떨어지냐는 별개의 문제지만요.
지 - ‘바람난 가족’을 보면 일반적으로는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일반적인 한국 사회의 모습에 비해 정치적으로 올바른 부분도 있지 않습니까? 감독님 말씀을 들어보면 마케팅이라는 측면에서 섹스로 포장을 했고, 문소리씨의 포스터가 흥행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섹스라는 부분에 과도하게 집중을 하게 되고, 영화가 의도대로 읽혀지지 못해서 상처받은 부분도 있으실 것 같은데요.
임 - 저 상처 안받아요. 의도대로 안 읽히는 걸로 상처 안받아요. 관객이 안드는 것 때문에 상처를 받지.(웃음) 한 작품을 만들어서 그걸 소비하는 건 소비자의 입장인거예요. 저쪽에서 어떤 의도로 받아들였는지, 사실은 뭘로 알겠어요. 그게 제대로 받아들여졌건, 그렇지 않건 간에 본 사람들에게 그 영화는 어떤 영향을 발휘하는거예요. 소통하는거죠. 겉으로는 영화를 씹더라도 집에 가서 그 영화를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는거고, 인생을 살다가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때 언뜻 그 영화가 다시 생각날 수도 있는거고, 5년 후에 케이블 TV에서 다시 보고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요. 그런게 다 소통인거죠.
지 - 길게 보시는 거군요. 어차피 문제 의식을 갖게 하는 영화는 불편할 수 밖에 없는거고, 그런 것들의 영향이 모여서 변할텐데,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힘만으로 변했다고 생각할거구요.(웃음)
임 - 자기 스스로 변한거죠. 영화도 자기가 선택해서 보는거니까 자기가 변한거죠.
지 - 영어 제목이 ‘A good lawyer's wife’인데요.
임 - 원래 영화 제목은 직역을 안해요. 받아들이기 쉬운 제목을 택하는거죠. 언어적 뉘앙스가 전혀 틀리기 때문에.
지 - ‘바람난 가족’ 같은 경우는 부정적이고, 반어적인 표현 같은데요.
임 - 영어 제목도 중의적인게 있죠. good이 wife를 형용하는건지, lawyer를 형용하는건지. 제목에 대해서는 마케팅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아요.
지 - 그 영화를 조롱이라기 보다는 ‘우리네 사회의 모습이 이렇다. 이런 삶을 무조건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현실을 인정하고 방법을 찾아야하지 않겠느냐?’이런 얘기를 하시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 계몽적인 의도가 있으셨던건가요?
임 - 전혀 아닌데요.
지 - 왜 저는 제멋대로 영화를 보는걸까요?(웃음)
임 - 다 제멋대로 영화를 보는거예요.
지 - 여자들의 심리를 탁월하게 표현하시는 비결은 있으신가요? 영화 캐릭터로도 여성 캐릭터에 대해 더 공감하거나 이해하려는 부분이 많은 것 같은데요.
임 - 글쎄요. 제 실력인 것 같아요. 다른 실력 있는 감독들도 많은데,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부분에 관해서는 ‘왜들 저렇게 못하나. 간단한건데’라는 생각을 할때가 많죠.(웃음)
지 - 한국에서 여성 영화나 여성 캐릭터가 강조된 영화는 흥행에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남성 영화는 남성도 보지만, 여성도 보는데, 여성 영화는 여성 관객의 반만 본다’는 말씀을 하신 적도 있으신데요. 여성들이 여성들의 얘기에 공감하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임 - 충분히 그 말로도 납득이 갈 수 있는 말 아닌가요? 삶의 진정한 면을 한국 현대 관객들이 영화에서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거죠. 백일몽 같은 오락거리를 원하는거지, 삶의 진정한 모습이 담긴 걸 보고 싶지 않다는거죠.
지 - 본인의 자랑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는 걸 쑥쓰러워하시는 것 같은데요.
임 - 본인의 자랑을 하고 싶어하는 바보같은 인간들이 있나요?
지 -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임 - 저도 술만 마시면 잘난척을 해요.(웃음)
지 - ‘바람난 가족’을 보면 봉태규가 극장에서 ‘눈물’을 보는데, 봉태규가 나오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걸 보고 나오면서 ‘영화 재미있었다’고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그건 자기 영화에 대한 자부심 같은 건가요? 임상수식 유머인가요?(웃음)
임 - 그런건 아니구요. 전적으로 프린트를 구해서 영화를 찍으려면 저작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남의 영화를 구해서 틀기가 어려운거거든요. 해외 영화는 비싼 저작권을 물어야 되기 때문에 못 쓰는거고, 내가 찍은 영화는 제작자한테 부탁을 하면 거절을 못하니까요. ‘눈물’에는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나와요.
지 - ‘바람난 가족’에서는 ‘질투는 나의 힘’도 나오잖아요.
임 - 명필름에서 제작을 한 것이기 때문에.
지 - 장면을 고를때도 나름의 의미가 있으신건가요? 봉태규가 경찰에 쫓겨 도망가다가 가스총에 맞는 장면이었는데요. 저는 그 장면이 아무리 도망가려고 해도 결국 도망갈데도 없는, (정당한 공권력이라고는 해도) 결국 폭력에 제압이 되어서 비틀거릴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현실을 보여준 것 같아 가슴이 아팠었는데요. 그 장면에 대해서 애착이 있으셨던 겁니까?
임 - 눈물에서 유일하게 좀 잘 찍은 장면이어서 쓴거죠.
지 - 조폭 영화를 볼때 정말 진짜 같은 배우가 있잖습니까? 지나가다가 감독 협박해서 출연한 것 같은 배우들이 있는데, 성지루씨도 다큐멘타리를 보는 것처럼 리얼했거든요.
임 - 눈물이 영화 데뷔작이었어요. 연극배우로 오래 활동을 했지만.
지 - 연극과 영화 연기는 차이가 좀 있지 않습니까?
임 - 그렇지 않아요. 배우는 다 똑같은 배우예요. 연극배우, 영화배우라는 말은 웃기는 말입니다. 매체의 특성에 따라 약간 달라지는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똑같은 거예요. 지금 활동하는 배우 중에 얼굴 이쁘고, 모델이나 미스코리아나 TV 쪽으로 해서 연기를 시작한 배우 말고, 원래부터 연기를 한 사람 중에서 연극물 안 먹은 배우가 없잖아요.
지 - 스타의 상품성에 기댄 기획의 경우 실패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임 - 케이스 바이 케이스예요. 그렇게 기획해도 좋은 시나리오, 연출이 있으면 살아나는거구요.
지 - ‘바람난 가족’에서 공사장에서 우체부가 아이를 던지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요. 김어준 총수는 그 장면을 극찬하던데, 그걸 빠르게 묘사한게 좋더라구요. 정황 설명이 구구절절 하지 않고, 아이를 그냥 공사장으로 들고 올라가서 던진 다음에 주저 앉아서 ‘엄마 나 어떻게 해?’ 하는 장면까지를 툭 하고 던지듯이 보여준게 더 충격적이더라구요.
임 - 불편한 장면이죠. 그런데 감독은 그런 걸 즐기는 거죠. 예상할 수 있는, 충격이 없는 장면을 찍는게 바보 같은 짓이죠.
지 - 그 장면만 보면 ‘복수의 나의 것’의 이미지와 비슷한 느낌이 들던데요. 감독님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신하균이 장기밀매업자들에게 가서 복수하는 장면을 좋아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임 - 어떤 점에서 비슷하죠?
지 - 하드보일드 터치라는 면에서 비슷한 것 같거든요. ‘복수는 나의 것’도 별다른 설명없이 툭툭 던지듯이 진행이 되잖습니까?
임 - 장소도 똑같아요. 신하균이 수술 받은 장소가 그 장소예요. 카메라 앵글이 다르기 때문에 잘 모르는거지. ‘그때 그 사람들’도 하드보일드 터치가 많은 영화죠. 코믹한 요소가 있지만, 하드보일드 터치가 아주 많은 영화예요.
지 - 나중에 본격적인 남성 영화를 찍을 생각은 없으신가요?
임 - 영화를 남성 영화, 여성 영화 나누는건 웃기는 것 같아요.
지 - 영화에서 보면 불륜이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한 관계로 묘사되지 않습니까? 서로에 대해서 솔직하고, 서로의 욕망에 대해서도 솔직히 인정하고, 어려운 얘기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열정적이기까지 하잖아요.(웃음) 그게 결혼 제도 안에서는 잘 안되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임 - 모든 세계의 부부들이 그래요.(웃음) 1부1처제의 가장 큰 문제가 그거 아닐까요?
지 - 아탈리는 ‘21세는 다부다처제 사회가 될 것이다’고 예언한 것 같은데요. 그런 관계들이 더 보편적이 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임 - 바람난 가족에서 사실은 문화인류학적인 일부일처제 이런 얘기를 하는건 아니었어요. 바람난 가족은 사실은 그거보다는 한국 현대인의 실존과 그게 한국 현대사와 어떻게 맞물려 있는가, 그 다음에 한국 현대사라는 것이 상당히 남성 위주의 폭력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다면, 그에 반대되는 여성적인 힘이나 여성적인 가치가 이 괴로운 현실의 탈출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얘기를 했던 것이지, 문화 인류학적인 일부일처제나 그런 걸 주로 얘기하지는 않았아요.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준 것 뿐이지.
지 - YES24에 올라온 DVD 리뷰를 보니까 “무엇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은 흔들릴 정도의 상태는 아니다. 개인의 독립성이 보장된 열린 가족, 그 가족 구성원들이 애인을 하나씩 꿰차고 있다고 해서 망가진 가족인가? 이 가족은 인물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감이 가시화되지는 않지만, 파괴되어가는 가족이라고 보기에는 서로의 사생활을 인정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가족이다. 감독은 이 가족에게서 새로운 가족의 상을 발견하지 않고 굳이 균열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을까?”라는게 있던데요. ‘왜 마지막에 굳이 불행하게 만들었느냐’하는 의미 같거든요.
임 - 사람들이 바람을 피우고 사는건 사실이고, 40대가 되면 남녀불문하고 젊은 애인 하나 가지려고 발버둥치는게 주변에서 보는 현실이기는 한데, 인간관계라는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예요. 애인 하나 두고 부부관계한다는게 쉽게 생각처럼 되는게 아니잖아요. 그게 꿈이긴 한데, 그게 오래 지속되지도 않거니와, 물리적으로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버릴게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바람을 시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 - 영화 감독으로서 자신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임 - 제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불편한 점 중 하나가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학연, 지연 이런 걸로 계속 얽혀야 되고, 위계질서라는건 어차피 폭력적일 수 밖에 없잖아요. 그렇게 얽혀야되는게 한국 사회에서 사는 어려운 점 중 하난데, 감독이 되서 좋은 점은 내 팀을 꾸리면서 주도적으로 꾸려갈 수 있으니까, 적어도 내 팀안에서는 그런 식의 인간관계가 아니고 좀 더 자유로운 그런 식의 분위기를 팀 내에서 끌고 갈 수 있는거죠. 혹시 ‘그때 그 사람들’ 붙은 버전을 보셨어요?
지 - 아뇨. 짤린 것만 몇 번 봤습니다.
임 - 하긴 붙은 버전을 튼 적이 없으니까. 그 영화에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있지만, 그런 식의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을 주로 얘기하고 있는거거든요. 학연, 지연으로 얽혀서 폭력적인 위계질서로만 얽혀져 있는. 사실 그 영화를 보면서 거기에 나온 사람들을 비웃을 수는 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직장이나 가정이나 여러군데서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이 영화 속에서 그때 그 사람들이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과 얼마나 다른가를 질문하는 영화일 수가 있는거죠. 제 팀 안에서는 최소한 그런 식의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극복하려고 하는거구요.
지 - 그때 그 사람들한테는 그런 점이 있었고, 우리한테도 이런 점이 남아 있지 않을까를 반문한 영화라는 거군요.
임 - 짤린 영화를 봐서는 그게 잘 안나타나요. 웃기는 현상인건데, 현실과 허구가 혼동될 수 있으니까 다큐멘타리를 자르라는 얘기는 다 헛소리고, 다큐멘타리에 박근혜가 나오니까 그걸 잘라내라는게 나도 알고 저 쪽도 아는 사실인데요. 그걸 잘라내서 일어나는 효과는 박정희와 그때 그 사람들에 너무 집중된 영화처럼 보인다는거죠. 사실 뒤에 다큐멘타리가 붙어 있으면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장례식에 나온 여러 사람들을 비춤으로서 ‘영화를 보는 우리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구나. 그걸 묘사했구나’ 하는 것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잘라버림으로서 박정희를 위시한 그때 그 사람들을 비웃고 만 영화처럼 보이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된거죠.
지 - 결과적으로 후회한 적은 없으신가요? 다큐멘타리를 붙였다가 그게 삭제됨으로서 영화가 훼손된 셈인데요.
임 - 그것 때문에 친구들이랑 여러 가지 얘기를 했었어요. 오시마 나기사가 찍은 ‘감각의 제국’이 60년대말인가 찍은 영화인데, 정작 일본에서는 해금된지 몇 년이 안되요. 그래도 그 영화의 가치가 훼손되는건 아니거든요. 그때 그 사람을 감각의 제국에 비유하는 것은 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런 점에서 길게 봐야된다는게 주변의 얘기인거죠. 그걸 자른 판사는 사법부에서도 거의 우스운 꼴이 되어있을 것 같은데...(웃음)
지 - 당시로서는 ‘솔로몬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임 - ‘그때 그 사람들’에 격분한 쪽에서도 이해는 하리라고 생각해요. 제가 정파적인 목적을 가지고 그 영화를 찍지 않았다는 것을 알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대권에 걸려 있는 사람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나왔던거겠죠. 저는 정파적인 이익 같은 것을 떠나서 한국 사회의 어떤 정신 상황, 극복하고 싶은 정신 상황에 대해서 작가가 양심에 따라서 찍은 영화예요. 작가가 자기 양심에 따라서 영화를 찍어야죠.
리뷰를 쓰는 사람은 대권이 걸려있건, 뭐가 걸려 있건, 리뷰자의 양심에 따라 자기가 본대로 리뷰를 써야하는 것이고, 판사는 그것이 대권이건 뭐건 자기 양심에 따라 판결을 했어야 되는데, 자기 양심에 반하는 리뷰를 쓰게 하는 어떤 세력, 자기 양심에 반하는 판결을 하게 하는 어떤 세력이 있었다고 보는겁니다. 작가나 리뷰어나 판사가 그렇게 양심을 지키지 못했을때 더 이상 작가나 리뷰어나 판사가 아니라 괴물이 되는거죠. 여전히 그런거예요. 민주화를 이뤘다고 하는데도.
지 - 사실 박정희 얘기라기 보다는.
임 - 박정희 얘기죠. 박정희 얘기예요.
지 - 그 영화를 보면 박정희가 무서운 독재자라기 보다는 외롭고, 지친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던데요. 그 밖의 사람들이 겉으로 드러난 면으로는 훨씬 더 폭력적이었구요. 박정희를 그렇게 표현하신 것은 의도적이었던건가요.
임 - 정치적 의도로 그렇게 표현한게 아니예요. 저는 감독으로서 그때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어떨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박정희라는 사람이 그날 가수랑 여대생이랑 데리고 술을 먹으면서 그렇게 사악한 모습을 보였을 것 같아요? 그렇게 때렸을 것 같아요? 눈짓만 하나 해도 알아서 기는데, 대단히 젠틀하고, 부드럽고, 그렇지 않았을 것 같아요? 거기서 그 사람을 각이 지고 사악한 면모를 가진 사람으로 그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3류 연출인거죠.
지 - ‘박정희에 대한 애정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표현하신 적도 있으신데요.
임 - 나름대로는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친구를 만날 수가 있어요. 마누라가 있어요.
지 - 영화를 영화외적인 면에서 봤던 사람들은 양쪽이 다 불편해했던 것 같은데요.
임 - 아까 말씀드렸듯이 되게 표피적으로 판단하는거예요.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난데, 좌든 우든 우리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데요. 영화가 그런 얘기를 하는게 아니거든요. 영화가 훨씬 더 깊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취향에 따라서 ‘박정희를 어떻게 그렸냐, 김재규를 어떻게 그렸냐, 왜 더 까지 않았냐?’ 뭐 그런 식으로만 보는거죠. 한국의 한다하는 날카로운 지성들도 그러고 있는거예요..
지 - 이번 영화도 그런 것의 연장이었던 것 같은데요.
임 - 물론이예요. 기자들이 질문하는게 ‘386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386을 비판한거냐?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봐야 되느냐’ 이런 식이예요. 386이 뭘 잘났다고 비판하고, 안비판하고가 그렇게 중요하겠어요.(웃음)
지 - 감독님 영화를 지식인적인 영화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그러다보니까 현실정치적인 의도가 있는게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임 - 우파를 비판하는 것은 뻔하니까, 한국의 좌파들의 어떤 문화적 감식안 같은 것에 때때로 제가 절망하는데요. 사실은 문화적 감식안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이예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좌파라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봤을때 예술 작품도 많이 보고, 그런 식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야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죠. 졸라 건방지다고 하겠네.(웃음)
지 - 스스로 찔려서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 분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문화적 감식안을 키울 수 없는 시대상황이었지 않냐?’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임 - 제가 말하는게 정확히 그거예요. 문화적 감식안 같은 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랑 뗄레야 뗄 수 없는건데, 인간에 대한 이해가 표피적인 좌파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죠.
지 - 딴지일보 인터뷰에서는 ‘팩트에 충실한 보고서’ 같은 의도였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씨네21은 “이 영화가 꼼꼼한 역사적 재현보다는 우화적이고 풍자적인 로버트 알트먼식 정치 코미디에 가까울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고 평하지 않았습니까?
임 - 그거는 짐작을 하게 하는거라는 기자의 얘기구요. 다 아시잖아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머리 속에 있으실 거 아닙니까? 풍자, 조롱 그런 얘기가 나오는데, 사실은 제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딱 잡아뗄수는 없는데, 사실 팩트를 그대로 그려도 그 자체로 풍자 당하고, 조롱당할 인간들이었고, 그런 짓거리를 했던게 사실이 아니냐는 거죠.
지 - 감독님 스스로 계몽적인 부분도 있다고 하셨으니까 말씀하시고 싶은게 있으셨을텐데요.
임 - 사실 계몽적인 것은 ‘눈물’에 한해요.
지 - 그 이후는 훨씬 더 우회적이고, 복잡하게 표현하신 것 같네요. 눈물은 직선적이고, 단정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그렇게 얘기해야할 소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후의 얘기는 훨씬 더 복잡한 얘기라 감독님 생각은 있으시겠지만, 객관적으로 보여주려는 노력을 더 많이 하신게 아닌가 싶구요.
임 - 맞아요. 눈물은 소재 자체가 그런 면이 있었던거고, 미학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주제나 메시지로 내가 연출하는 사람인데, 그런 식으로 관객을 끌고 가는 것은 미학적으로 저열한 방법이예요. 되게 예민하고 세련된 관객들은 그런 작품을 싫어해요. 자기를 끌고가려는 연출이라는 것은 짜증나는거죠. 아닌척하고 객관적으로 던져 줘서 자발적으로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깨닫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더 우등한 미학적 방법인거구요.
‘그때 그 사람들’이나 ‘오래된 정원’ 같은 경우는 정치적인 함의가 쎄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제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섣불리 내보이면 관객들은 상대 안해버리는거죠. 저거는 노무현당에서 만든 영화라는 레이블이 붙어버리는거니까 더 조심하면서 객관적으로 만들어서 저쪽에서 그런 레이블링을 못하게, 심지어는 반대되는 입장에서도 겉으로는 무슨 얘기를 할지언정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들어야되는거죠.
지 - 다른 감독들끼리는 시나리오도 교환해서 보고, 교류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요. 감독님은 다른 분들하고도 별로 교류를 안하시는 것 같은데요.
임 - 많이 하지는 않죠. 저도 친하게 지내는 감독은 친하게 지내요. 봉준호, 최동훈 감독 정도.
지 - ‘눈물’때 조감독을 했던 최동훈 감독은 영화 만듦새에 있어서 최고의 상업영화 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은데요.
임 - 친구처럼 지내요. 내 조수를 했다는 것도 사실은 직업으로서 조수를 한거지, 친구로 지내요.
지 - ‘눈물’때 감독님은 가리봉동에서 선글래스 장사를 하시면서 취재를 했고, 최동훈 감독도 800명 정도를 인터뷰했다고 하던데요. 영화 만드는 방식이나 주제 의식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임 - 최동훈 감독도 복잡한 사람이예요. 지금은 상업적인 입지를 굳히고 있는거라고 봐요.
지 - 독립군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기질이 운동권이라고 볼 수 있는 아버지, 형 때문에 형성된 건가요?
임 - 운동권은 아니었어요. 형의 경우 70년대 유신 반대 데모는 누구나 하던 시절이었죠. 80년대처럼 짜여져 있던 시절은 아니니까요.
지 - 그럼 반골 기질의 지사라고 할까요?(웃음) 그런 환경과 10.26때 연도에서 흐느끼던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충격으로 인한 갈등 같은게 감독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임 - 모르겠어요. 대체로 저는 왕따였던 것 같구요.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성숙할려면 약간 농담 섞인 얘기지만, 우리 모두가 다 왕따가 될 필요가 있어요. 왕따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우루루 몰려다니기 보다는 나만의 취향을 가지고, 나만의 의견을 가지고, 그렇게 되야지 사회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더 다양하고 개성 있는 사회가 될거라고 생각해요.
지 - 태백산맥 TV 연출을 하시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임 - 안하려구요. 안할래요.(웃음)
지 - TV 연출도 생각해본적이 있으신가요?
임 - 사실은 본질적으로는 TV 연출이든, 영화 연출이든 다를게 없는데요. 관행이라고 할까, 작업 방식의 관행이 좀 다르다고 할까요? 그런게 방송 쪽이 영화랑 너무 틀리기 때문에 힘든 얘기죠. 영화는 두시간 짜리를 찍는 데만 최소한 세달을 찍고, 전체 준비를 하는데 1년에서 1년반이 (때로는 그 이상이) 걸리는데, TV는 50분 짜리 두개를 일주일 내에 찍어버리니까요. TV도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사전제작이다, 뭐다 하는데, 잘 안되고 있는 것 같구요. 그런 차이를 극복하기 힘든거죠.
지 - ‘오래된 정원’을 영화로 옮기면서 어떤 점을 가장 염두에 두셨습니까?
임 - 소설을 읽고 나서 되게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인물들이 숭고한 것인가, 내가 아는 인물들은 이렇게 늘 숭고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 높이 숭고하게 있는 주인공 캐릭터들을 내 옆으로, 땅위로, 일상 위로 끌어내리는 작업을 했던거죠.
지 -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너무 숭고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실수를 했을때 그 사람의 전체를 깎아내리는 모습도 많이 봐온 것 같거든요. 요즘은 위인전의 서술 방식도 단점까지도 기록하면서 그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쪽으로 많이 바뀐 것 같구요.
임 - 인간에 대한 이해인 것 같아요. 작가의 일이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하고자 하는 것인데, 인간이 그렇게 간단하다고 하면 이해를 그렇게 힘들게 하겠습니까? 굉장히 복잡한거죠. 정말 알 수 없는게 인간인건데, 그걸 알아내는 작업을 하는게 작가인거죠.
지 - 작품으로 설명하지 않고,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서 얘기하는 것도 힘드신 것 같은데요. 답을 찾아가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보면 ‘사람이 이런 저런 면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도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임 - 이런 얘기를 할께요. 오래된 정원에서 두 남녀가 자게 되는 과정이 너무 빠르다, 그래서 마음에 안든다는거죠. 운동권이고, 점잖은 사람인데, 너무 빨리 잔거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는데요. 보통의 러브 스토리 같으면 서로 차츰 매력을 느끼는 과정이 점점 고조되어서 자게 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되어 있어서 아쉽다는 뜻도 되는거겠죠. 사실은 두 사람이 자는 장면에서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아주 격렬하면서도 변태적인 섹스를 하는 장면을 생각했었어요. 그렇게 되는 배경은 뭐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오현우라는 인물이 멀쩡해보이지만, 사실 몇 달씩 도바리를 놓고 있는 사람의 심정은 엄청나게 불안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일거고, 그 상황에서 그런 섹스를 갈구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다가 챤스가 왔을때 그런 폭력적인 섹스로 갈 수도 있는거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결국은 그렇게 찍지 않았죠.
그렇게 찍으면 지금도 이 영화가 잘 이해가 안된다는데, 얼마나 욕하는 사람이 많아지겠어요. 진짜 그 인간들을 이해하는 측면에서는 그렇게 찍었어도 상당히 재미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죠. 그런데 한국의 시장의 편협한 취향을 극복할 수 없다, 여기서 아름답게 가줘야된다는 그런 식의 타협을 한거죠. 사실은 그 타협이 적절한 타협이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 식의 감정은 나중에 다른 영화에서도 다뤄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에 제가 그런 식으로 찍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지 - 그 전 영화에서도 섹스라는 요소가 그 사람들의 관계나 상황을 잘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고도 생각하거든요.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이상한 면이 있을 수도 있구요. 평생을 그렇게 외곬으로 살려면 괴팍한 면도 있을 수 있구요. 감독님 말씀대로 불안하니까 그럴 수도 있구요. 사실은 변태적인 섹스를 한다고 해도 상대방과의 합의만 있으면 문제가 안되는거고, 예전에는 오랄 섹스조차 변태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 않습니까? 그걸 표현하는 것이 임상수 감독님의 스타일에 더 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임 - 그런 식으로 찍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운동권에서 ‘저 새끼 미친새끼’라고 난리를 쳤겠죠.(웃음)
지 - 그런데 그 동안은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으셨잖아요.
임 - 개의해요.(웃음) 적절한 수준에서 표현을 해야죠. 그리고 실력인거예요. 그런 식의 변태적인 섹스를 묘사하고 나서도 영화가 끝났을때쯤 ‘아, 이 사람들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끌고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감독의 실력인데, 제가 그럴 정도까지는 자신이 없었나보죠.
지 - 한윤희와 영작과의 섹스를 당혹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일부 운동권에서는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가부장제와도 연결되는건데, 우리 남자들이 어렵게 투쟁을 하니까 여자들을 도구화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구요. 남자들이 군대에 갈 때도 그런 판타지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 장면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임 - 그런 견해는 만나본 적이 없어요.
지 - 래디컬한 여성주의자들 중에서는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임 - 여성주의자들을 너무 간단하게 보시는 거예요. 그렇지 않죠. 여자가 주체적으로 섹스를 하는건데. 술먹고, 술에 취해서, 주체적으로 연하의 남자랑 자는건 아무 문제가 없는 행위죠.
지 - 감독님 영화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궁극적으로 하고 싶으신 얘기는 어떤건가요? 상황에 따라 조심스럽게 얘기하시기도 할 거고.
임 - 조심스럽게 얘기한 적 없어요.
지 - 조금 전에 그런 타협을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임 - 그것은 어떤 작품을 찍어도 항상 하는 거예요. 이 영화의 수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항상 고민하고 있는거죠.
지 - 나중에 사회가 불편해하더라도 이 얘기는 꼭 해야겠다는 건 없나요?
임 - 다 하고 있어요. 저는.
지 - 황석영 선생이 영화는 보셨나요?
임 - 아직 안보셨어요. 오늘이나 내일 오시는 것 같은데, 오시면 보시겠죠.
지 - 영화에 있어서 감독의 역할은 뭐라고 보십니까?
임 - 헐리우드 시스템 말고는 다 봤을텐데, 영화를 잘 찍었네, 말았네, 연기를 잘했네, 말았네 하는게 사실은 감독 탓인거죠. 감독이 모든 걸 다 쥐고 있는거죠.
지 - 배우의 비중이나 역할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임 - 배우들의 연기 실력이라는건 그렇게 쉽게 변하는게 아닌데, 한 작품 한 작품 다르게 나오는 것에 대해서 사실은 배우들이 더 잘 알고 있어요. 시나리오서부터, 감독의 연출에 따라서 어떤 영화에서는 되게 좋은데, 어떤 영화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게 나온다는 것을 배우들이 더 잘 알고 있는거죠. 배우들이야말로 시나리오, 연출이 누군가를 제일 신경을 쓰죠. 서로 궁합이 잘 맞아야 좋은 영화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배우면서 하는거죠.
지 - 한국 영화가 성장한데는 감독들의 역할이 컸던 것 같은데요. 배우나 제작사의 경우 이름만 보고 영화를 골랐을때 어떤 편차가 있는데, 감독의 경우 ‘아, 이 감독이면 이 정도가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을 충족시키거나, 작품의 편차가 가장 적은 것 같거든요.
임 - 그런 면이 있죠.
지 - 감독이 되려면 어떤 면을 갖춰야할까요?
임 - 제가 대답할건 아닌 것 같은데요. 심각한 작가 영화를 찍든, 가벼운 오락 영화를 찍든 명백한 것은 그걸 보러 오는 대중들보다는 한수위라고 해야될까요? 그런 생각과 고민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거죠. 여러 가지 면에서.
지 - 이번 캐스팅도 의외였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요.
임 - 캐스팅의 묘미 중의 하나죠. 그런게 다 편견이잖아요. 대단히 주관적인 편견인데, 그것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통념화 되어 있으면 그것도 무시는 못하는건데요. 어떤때는 그런 통념을 쫓아갈때도 있지만, 통념을 뒤엎는, 의표를 찌르는 재미도 있는거잖아요.
지 - 작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 중에서 재미있게 보신 영화는 뭐가 있으세요?
임 - 영화 찍느라고 많이 못 봤어요. 타짜랑 가족의 탄생, 괴물 재밌게 봤어요.
지 - 내가 찍었으면 저거보다 재밌게 찍었을 것 같다는 건 어떤 게 있나요?
임 - 안 좋은 질문인데요.(웃음) 다른 감독들과 연관된 건...
지 - 누군가가 누군가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 사회가 누군가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건 조심스러워 하고, 공식적으로는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뒤에서는 앞에서 하지 못했던 얘기까지 쏟아내는 것 같거든요.(웃음)
임 - 그거는 글쓰는 사람이 해야할 일이지, 동업자로 하여금 동업자를 씹게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좋은 얘기는 할 수 있겠지만... 저평가받았다든가.
지 - 감독님께서 ‘상대방에 대해서 이해를 하자. 연민을 갖자’는 말씀을 영화를 통해 계속 하시는 것 같은데요. 소통이 안되는 시대에 소통이 되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임 - 소통이 안된다는건 어떤 의미인가요?
지 - 정치만 보더라도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적이지만 멋지다’ 이런 태도는 별로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상대방의 선한 의도는 전혀 인정하지 않구요. 아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모두가 이지메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일정하게 동의는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책임도 좀 있는 것 같구요. 옛날보다 소통이 더 어려워진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던데요.
임 - 영화 감독이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지 - 감독님 스스로 보는 진실을 찾으려고 하는데, 감독님을 이해할만한 분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할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김동원 감독께서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나 같은 모더니스트에게는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거야. '사실이나 진실은 전혀 상관없다' 라는 태도. 그 태도가 영화를 다소 맥이 빠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것 같거든”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 같거든요.
임 - 머리 속이 다 다른건데, 그런 식의 오해를 오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김동원 감독 같은 경우는 충분히 서로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 오해를 발견하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죠. 왜 그런 불일치가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구요. 그런 오해를 괴로워하지는 않습니다.
지 - “‘그때 그 사람들’은 인간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얘기한 영화다.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모두 죽고 없지만, 그런 식의 폭력적이고 촌스러운 인간 관계는 여전히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그 멘털리티가 우리를 짜증과 불행으로 몰고 간다. 나는 영화뿐 아니라 내 삶에서도 그런 촌스러움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편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서로를 이해하려면 어떤 생각들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임 - 그런 식의 인간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지만, 그런 방식으로 내가 산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라 너무 힘들고, 불행한거잖아요. 그 두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 삶을 바꿔야겠죠.
지 - 감독님이 제기한 문제들이 가령 ‘눈물’이라고 치면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애정 뿐입니다. 정상적인 애정, 아주 정상적인..."이라는 말로 대안을 제시한 것이고, “솔직히 이 영화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불편할거다. 걱정없이 행복하게 사는 어른들이 이 영화보고 화가 나고 불편해졌으면 좋겠다. 가정과 부모, 자식 관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가정을 신비화하는 게 지금 우리다"라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셨던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세상이 좀 나아졌으면 하고 만드셨을텐데, 여전히 아이들은 힘든 것 같습니다.
임 - 오래된 정원을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이 눈물 흘리면서 회한에 사로 잡히면서 보는 것 같은데, 그것을 그렇게 단순히 노스탤지어적 감성에 빠져서 볼게 아니라 그때 가졌던 이상의 반이라도 나이가 든만큼 세련된 방식으로 가지고 있어야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사회 의식 같은 것을 자기 생활 속에서라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그리고 40대 주류 가장이 됐으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애들도 사교육이나 그런 식으로 정신 없이 기를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 이해할려고 하는 사회의식이 있는 부드러운 반항아로 키우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죠. 그런 것 다 잊어버리고, 자기 삶도 다 잊어버리고, 자기 자식한테 그렇게 교육도 못하고, 영화나 보고 와서 노스탤지어적 감정에 빠져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무나 허망한 것 같아요. 물론 안그런 사람한테는 해당이 안되는 얘기였지만.
지 - 그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초심을 찾고, 인간에 대한 연민 이런 걸 회복하길 바라셨던거군요.
임 - 바란거 없어요. 던져 놓으면 알아서 그걸 보고 느낄 사람은 느끼고 하는거죠. 그것까지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영화를 감동적으로 봐줬기 때문에 고맙기는 한데, 그렇게 단절된 과거로서 생각하고 말 얘기가 아니라는거죠. 삶이 계속 연속되어져 있는건데, 지금도 어떤 의식이나마 제대로 가지고 살아가야되는게 아닌가 하는겁니다.
지 - 기질적으로 정당에 참여하는 걸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요. 다른 감독들 중에서는 민노당에 가입하신 분들도 많고, 감독님 스스로도 ‘민노당에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하신 적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임 - 부자들이 민노당을 지지하는 것을 비웃는 풍조는 대단히 웃긴 일이라고 생각해요. 부자들이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건 대단히 자연스러우면서도 귀중하고, 건강한 거라고 생각을 해요. 경향 신문에서 그런 얘기를 했던 것은 지난번 서울 시장 선거에서 강금실씨가 고군분투하는걸 보면서 안쓰럽다고 생각을 했는데, 안쓰러운 이유가 맞은 말은 다 민노당 후보가 해요.
그리고 인기 있는 오세훈 후보와의 틈바구니에서 헤매는 꼴이 마치 내 꼴인양 민망했었는데, 제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의 이익 때문에 늘 차선을 선택해왔던 것 같은데요. 길게 봤을때 민노당 같은 진보적인 세력을 키워간다는 입장에서 지금 당장의 표 효과는 안나타나더라도 그런 세력을 키워가는 것이 훗날을 위해서도 필요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지 - 공지영씨에 대한 일부 운동권의 태도도 좀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지영씨는 거기에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더라구요.
임 -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공지영씨가 학생때 운동을 했지만, 운동권에 깊숙이 연관이 된 것 같지는 않거든요. 혼자서 애 셋 키우느라고 정신없는 여잔데...
지 - 영화감독 되시고, 제일 행복하거나 불행했을때라고 생각하는때가 언제인가요?
임 - 저는 영화 감독을 아주 즐기고 있어요. 귀중한 챤스라고 생각하고 있구요.
지 -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임 - 특별히 없어요. 다만 저는 조용히 작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지, 입으로 떠들고 싶은 사람이 아니예요. 제가 할 얘기는 제작부를 통해서 다 하는거죠. 그래서 이런 인터뷰가 재미가 없는거죠. 한국 사회에서 나처럼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요. 뭘 또 얘기하겠어요. 영화를 통해서 표현의 자유를 다 누리고 있는데요. 하지만 영화 감독이라는 직업이 미디어를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제 레벨이 척지기에는 몸을 사려야되는 레벨이죠. 자기 혼자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몰라도 저 같은 경우에야 30~40억 정도 투자를 받아서 영화를 만드는건데, 거기에 대해서 책임질 수 밖에 없는거죠.
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 전체 지형으로 볼때 영화 감독들이 진보적인 성향에 있고, 한국 주류 사회에서 볼때 불편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임 - 그런 사람이 누가 있어요?
지 - ‘괴물’ 같은 경우 반미 영화로 보기도 하고, 심지어 동막골을 보면서도 빨갱이 영화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전에도 있었지 않습니까?
임 - 그건 정박아 수준의 얘기고.(웃음)
지 - 자본주의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일정하게 반자본주의 정서를 유지할 수 있는....
임 - 누가 반자본주의적이예요? 다 허구예요. 잠만 자고 일어나면 어떻게 카드 빵구를 메울까를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만 반자본주의라고 얘기하는게 말이나 되는 얘기예요? 제스쳐에 너무 한 표를 주시는 것 같아요. 본질을 파악해야지, 제스쳐가 좌파적이라고 해서 좌파는 아니잖아요.
지 - 신자유주의니, 한미FTA니 해서 너무 오른쪽으로, 자본지상주의로 가는데, 그 반대되는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거구요. 그런 제스쳐나마 필요하지 않은가 해서요.
임 - 물론이죠. 타인에 대한 연민, 비판적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거죠. 타인에 대한 연민과 비판적 사회의식을 갖는 부드러운 반항아 같은 것을 키워내겠다는게 교육의 철학이 되어야 된다고 보는데요. 그래야 나중에 성숙한 시민이 되는건데, 그런 의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교육을 시키고, 말씀드린데로 80년대 운동권이라는 사람들도 그때 운동이 다 끝난게 아니라 지금을 살면서도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비판적 사회의식을 유지하면서 일상을 살아가야 될텐데, 그런 것 다 잊어버리고 영화만 보고 찔끔거리는건 웃기다는거죠.
그게 추억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필요하다는거죠. 지금 월급쟁이를 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월급쟁이를 하면서도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된다는거죠. 최소한 386들은 그런 걸 가지고 있을거고, 그런 사람들이 노무현을 찍은거겠죠.
지 - ‘후회하지 않아’ 같은 영화들이 만들어져서 성공하는 걸 봐도.
임 - 그런 식의 비주류 독립 영화는 어디에나 있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목적이 있는 것 같지만, 몸에서부터 하고 싶은 욕구가 나오는거예요. 노래하는 것도 노래를 불러서 스타로 뜨고 싶은 생각보다도 노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모든 예술은 그런게 있어요. 소설가도 영원히 등단은 못해도 나이 50이 넘도록 소설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과 비슷한데요. ‘후회하지 않아’ 같은 영화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거죠.
자연스러운 것을 가지고 한국 영화 시장이 잘 해결못해주는게 시장이 편협한거고, 그 영화는 그런 점에서 점수를 따고 있지만, 냉정하게 미학적으로 그 영화가 얼마나 뛰어나고, 독립영화로서 얼마나 진취적인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지 -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분신 자살을 하는 시대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방식의 운동은 지났다’고 얘기하는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것 같은데요.
임 - 비정규직이 많아지는 것은 사회 자체가 대단히 불안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가 그렇게 된다는 것은 사실은 가진 사람이나 정치가나 기업하는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악영향을 미칠거라는 건데요. 일정수준은 먹고 살게 해주면서 지들이 탐욕을 부려도 부려야 되는데, 그렇지도 않은 상황에서 탐욕을 부리면 공멸로 갈 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될 것 같아요. 그게 이론적으로 성립된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구요. 기업하는 사람이나 부자나 우파들하고 어떤게 더 이익인지 냉철하게 토론해서 그 사람들이야 어떻게든 싸게 쓰고 싶겠지만, 이 정도까지는 해줘야하지 않겠느냐는 토론을 진지하게 해야되는데, 한국 사회에 아무런 토론도 안되고, 대선을 위해서 서로 헐뜯고, 구호만 외치는 것 같습니다.
되게 정교한 토론을 해도 해결될까 하는 문제를 그렇게 안하니까 그런 점이 절망스러운거죠. 언론 자체가 대단히 신뢰를 주지 못하는 정보를 양산하고 있으니까, 전체적으로 다 그렇다고 봐야죠. 한겨레가 주는 정보라고 해서 신뢰가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구요. 한겨레가 괜찮은 신문이라고는 생각하는데,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신뢰를 못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지 - 토론이 안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임 - 언론의 책임이 크겠죠. 자기가 처한 경제적 입장에 의해서만 투표를 해도 문제가 상당히 해결될텐데, 엄청난 왜곡이 그 사이에 개입을 하니까...
지 - 얼마전에 한홍구 선생을 만났는데, ‘강풀이 그린 26년을 보면서 굉장히 많은 반성을 했다,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진심어린 고백과 사과가 있어야 되는데, 처벌이 없이 그게 가능하겠느냐. 처음에 처벌이라는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또 처벌없이 용서가 가능하겠느냐’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태도가 너무 우아했던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임 - 전두환을 어떻게 처벌하겠어요? 술 취해서 하는 말이 있죠. ‘어떻게 돼지 같은 살인마한테 붙어서 꿀꿀대니?’라고 하는데, 그게 한국의 주류 사회죠. 한국에서 한다하는 사람들이 전두환한테 빌붙어서 살았는데, 어떻게 전두환을 처벌할 수 있겠어요. 테크노크라트서부터 시작해서 다 연루되어 있는데, 어떻게 전두환만 죽이겠어요.
지 - 물론 그 한 사람만 처벌하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처럼 하는 것도 제대로 된 문제해결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그런 엄청난 일에 대해 누군가의 반성과 책임은 있어야 될 것 같은데요.
임 - 해결안되는 문제죠. 김영삼이 정권을 잡은 건데, 민정당에 들어가서 정권을 잡은건데, 제스츄어만 취한거죠. 해결할 수가 없죠. 죽일래면 같이 죽어야지. 우리 모두가 다 공범인거예요. 사실은. 전두환한테 다 미루고 있는 것이지. 모두가 공범이니까 다 안전하게 지나가는거죠.
지 - ‘사실을 보여주면 그것이 생각을 낳을 줄 알았다’고 한 것을 어떤 분은 그 얘기가 과거사 청산의 핵심이라고 말씀하던데요. 각자 사실을 보여주고, 그것이 생각을 낳아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아야된다는 얘기 같은데요. 감독님 말씀이 어떻게 듣기에는 ‘모두의 책임이니까 일단은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하기 힘들고, 우리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자’고 하는건데, 어떻게 보면 공허할 수 있는 얘기 아닙니까?
임 - 한홍구 선생이 얘기한 말에 전적으로 공감해요. 처벌하고 지나갈 수 없었던 점을 지적하는거죠. 왜 구조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했는가를 지적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