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에서 그는 '종고커'로 불린다. 386이 이제 늙다리 세대가 되어가고 있음을 이곳을 통해 실감한다. '애써도' 소통하지 못한다면 리셋 버튼을 권하는 바이다. (그런데 당신 정말 '애쓰고' 있기나 한거야?) 포지셔닝의 어려움은 인생사 영원한 숙제. 어느 타이밍에 rESeT 버튼을 눌러야 할지 나 역시 끝없이 고민하고 있는 중. ‘운동권 신화’ 임종석, 이젠 원칙 대신 타협 앞세워 | |
[1987년 그 뒤 20년] 다섯갈래의 삶 ④전대협 의장서 현실 정치인으로 | |
이정훈 기자 |
대학 친구들 만나면 욕먹어 국민들 새 미래상 제시에 관심 386세대도 경쟁 통해 인정받아야 근본 추구는 시민사회가 했으면”
“학생운동을 할 당시의 정신은 유지하려고 하지만, 철저함과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는 건 제 숙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시민사회가 해줬으면 합니다.” 1987년 대학 2학년 때 학생운동에 첫발을 들여놓은 뒤 2007년 국회 입성 8년차 의원이 되기까지 20년이 흘렀다. 생각도 많이 변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찬성하고, 여당 대변인으로서 이라크 파병에 찬성을 표하는 현실 정치인이 됐다. ‘1989년 한양대 총학생회장, 전대협 3기 의장’이라는 화려한 경력의 임종석(41)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제 원칙 대신 타협을 이야기한다. 학생운동의 신화 임 의원이 의장으로 있던 89년 전대협은 대중조직으로 성장했다. 임수경씨 방북 사건 등을 통해 통일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고, 의장의 신출귀몰한 행적은 ‘임길동’이란 별명까지 낳으며 화제를 모았다. 전대협 집회 장소인 한양대를 경찰이 에워싸자 지하철 선로를 이용해 수천명의 학생을 진입시키는 ‘전술’을 성공시켰고, 수배자 신분으로 경찰의 두겹세겹 포위망을 뚫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것도 10여차례에 이른다. 당시 여고생 잡지 인기순위에서는 홍콩 배우 주윤발을 제쳤다.
그래도 이미 ‘재미’를 붙인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자연스럽게 6월 항쟁을 맞았는데, 거리에 나가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경험이 너무 재밌었습니다. 나중에 총학생회장에 출마할 때도 반대에 부닥쳤지만, 식구들을 한명씩 설득해 출마할 수 있었습니다.” 전대협 의장이 된 뒤 수배자 신세는 당연한 결과였다. 가족들도 고생했다. 형들은 형사와 함께 그를 찾는 일에 내몰렸고, 어머니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으로 그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부담이 된 신화
이제 임 의원에게는 이런 경력이 오히려 부담이다. “대학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욕먹습니다. 나름대로 애쓰고 있고 마음이 변한 것도 아니고 단지 방향을 잘 몰라 헤매거나 힘겨워하고 있는 건데도 잘 몰라주는 것 같습니다.” ‘원칙론자’인 아내에게도 핀잔을 듣는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학생운동에 대한 고민을 편지로 토로하던 후배가 96년 그의 아내가 됐다. 환경운동연합 간사 출신으로 현재 ‘어린이 도서관’을 운영하는 아내는 아직까지도 남편보다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아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과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라’고 주문했다. 이런 비난과 요구에 임 의원은 “지난 20년은 구체제가 무너져 가는 과정이어서 개혁세력이 지지를 얻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미래상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 국민들의 큰 관심”이라며 “386 세대도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분화와 경쟁을 통해 인정받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조세나 부동산 문제처럼 일상적이면서도 세세한 부분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찬성하거나, 농민 생존권보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먼저 얘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한다. “그동안 집권을 위해 겨우 ‘51’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집권 세력이 의제를 설정하고 방향을 정할 수는 있지만 내용은 나머지 ‘49’랑 타협해야 합니다. 정치권 밖에 있는 동지들은 이런 것을 참 싫어하지만, 국가보안법만 봐도 17대 국회 초기 한나라당과 타협했으면 ‘허울’만 있는 국가보안법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을 원칙을 강조하다가 현재도 악법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타협하는 순간 근본이 무너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20년을 말한다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투옥돼 87년에도 감옥에 있었다. 박종철, 이한열 등의 희생이 없었다면, 넥타이부대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당시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국민들도 커다란 위협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분들의 희생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큰 빚이다. 하지만 6월 항쟁을 통한 민주화가 경제·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장·심화돼야 하는 것은 여전히 과제다.”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
“87년엔 남편이 감옥에 있어 옥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6월 항쟁에 넥타이부대까지 참여해 민주주의도 이뤄지고 양심수도 석방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학생들은 석방됐지만 노동운동 관련자들은 나오지 못했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만 보여줬을 뿐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오히려 탄압의 강도가 분명해진 계기가 됐다. 일부에서는 6월 항쟁을 통해 민주주의가 완성됐다고 하기도 하지만, 국민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것을 볼 때 항쟁의 완성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이영순 민주노동당 의원
“87년 당시 학생운동 그룹에서 이념 지도 및 조직 활동을 하고 있었다. 공장에 위장취업 했다가 탄로나는 바람에 공장에서 나온 상태였다. 6월 항쟁은 ‘대중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 투쟁을 승리로 이끈 민주주의 실현의 역사적 경험이다. 제도적 타협에 그쳐 미완성인 측면이 있지만, 민주화를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추세로 만들었다. 또 그 경험은 ‘혁명’ 노선을 정리하고 ‘개혁’ 노선으로 옮겨가는 계기로 작용했다.”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
“87년 6월 항쟁은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큰 전환점이며, 그 뒤 부의 재분배가 적극적으로 진행돼 경제·사회적 정의가 상승한 측면이 있다. 개인적으로 87년은 김영삼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의장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해다. 당시 경험은 생각을 많이 바꾸게 했다. 급진적인 변혁보다는 체제 내 개혁 노선이 올바른 노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김영춘 열린우리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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