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All You Need Is Love"가 국내에서 유명하지만 대부분 러브 액츄얼리 OST로 알고 있다(...)
목차
1 경력
1.1 I was the Warl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1.2 But Now, I'm John : 비틀즈 붕괴와 솔로 활동
1.2.1 비틀즈의 붕괴
1.2.2 솔로 활동
1.3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
1.4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
2 기타
2.1 솔로 디스코그래피
1 경력
1.1 I was the Warlus : 유년부터 비틀즈 전성기까지
비틀즈 시절의 존 레논. 국내에서는 안경 쓴 이미지가 많이 굳어졌지만, 이 시기의 존 레논은 상당히 미남이다.
어릴 때의 가정환경은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존 레논이 어릴 때 가출해 실종되었고, 어머니인 줄리아 레논도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언니인 메어리 부부(통칭 미미 이모)에게서 자랐다. 6살 때 아버지가 돌아와 몇주간 같이 생활했었고, 후에 어머니가 데리고 가지만 같이 살지는 못하고 다시 미미 이모 곁에서 살게되었고, 아버지는 다시 실종됐다. 존 레논은 근처 고아원이었던 스트로베리 필즈(Strawberry Fields)에서 자주 놀았으며, 이 때 Walrus(바다코끼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15살 때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을 듣고 락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근처에 살던 어머니의 집을 오가며 밴조를 배워 음악에 관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6살 때 보호자인 미미 이모를 졸라 17파운드짜리 기타를 구입하고, 비틀즈의 전신이 되는 밴드 "쿼리멘(The Querrymen)"을 결성하여 활동한다.[2] 친구의 소개로 폴 매카트니와 만나게 되고 폴이 밴드에 합류한다.[3] 얼마 후, 밴드에 공석이 생기자. 폴의 소개로 조지 해리슨을 만났고, 밴드에 합류한다.
그러다 존 레논이 17살 때, 어머니 줄리아 레논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어머니의 죽음은 존 레논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똑같이 유방암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폴과의 우정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폴에게서 기타를 배우기도 했다고(존은 코드 잡는 게 서툴렀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특히 어머니와 관련된 곡을 자주 썼으며, 첫째 아들 이름도 줄리안 레논으로 지었다. 1960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가 합류하고 밴드 명을 "실버 비틀즈"로 변경하고 활동하다가 후에 피트 베스트가 들어오자 밴드명을 "비틀즈"로 결정한다. 이후 스튜어트 서트클리프는 밴드에서 개인적인 사정[4]으로 탈퇴하게 되고, 피트 베스트는 나머지 멤버의 불만 때문에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즈(Rory Storm and Hurricanes)'의 드러머 링고 스타로 교체되게 된다. Please Please Me 녹음 때까지만 해도 링고 스타의 자리는 불안 불안했으나, 결국 링고 스타로 확정된 채 본격적으로 비틀즈가 출범한다.
비틀즈 활동 초기 존 레논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거의 대부분의 곡을 썼으며, 이 둘의 협력은 레논-매카트니라고 칭해진다. 그러나 'Rubber Soul'에서부터 존 레논의 자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In My Life', 'Nowhere Man' 등이 바로 그런 곡.
사실 'Rubber Soul' 녹음 전부터 존 레논은 비틀즈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고 말았다. 존 레논은 "비틀즈는 예수보다 유명하다(popular)"라고 발언했는데, 이 때문에 기독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비틀즈 상품을 모아놓고 불태우는 등 큰 반감을 사게 되며. 비틀즈는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고 존 레논은 "한 인간으로서 신이나 예수보다 위대하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냥 친한 기자와 한 얘기일 뿐 오해다."라고 꼬리를 내렸다.[5][6] 이 뒤로 기존 음악성과 아이돌을 탈피한다. 결과적으론 아이돌 그룹에서 역사상 실험적인 밴드로 남는 터닝 포인트가 된다. 게다가 이 뒤로 라스트 옥상 라이브를 제외하곤 라이브가 없긴 하다.
존 레논의 실험적인 작곡의 예론 싱글 음반 'Paperback Writter/Rain'에서 처음 등장한 백마스킹을 생각해낸 것이었고, Revolver에서 사이키델릭 곡을 대부분 작곡한 것 등이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서부터는 폴 매카트니가 밴드의 주도권을 잡게 되는데, 이때부터 레논-매카트니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둘이 큰 대립 구도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당시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의 곡을 합쳐 만든 'A Day in the Life'는 비틀즈 역사상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곡 중 하나이며, 폴 매카트니는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에게 'Hey Jude'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Yellow Submarine'에서는 녹음 중간 존 레논이 장난으로 개 짖는 소리를 냈다가 폴 매카트니와 함께 그것을 바탕으로 곡을 작곡한 'Hey Bulldog'이 수록되어 있다.
'Magical Mystery Tour'에서 존 레논은 'Strawberry Fields Forever'[7], 'I am the Walrus'[8]라는 곡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해간다.
1.2 But Now, I'm John : 비틀즈 붕괴와 솔로 활동
1.2.1 비틀즈의 붕괴
비틀즈 해체 직전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 둘은 마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화의 씨앗은 이미 비틀즈 중반기부터 있었다. 존 레논은 비틀즈 데뷔 이전부터 신시아라는 여자와 결혼한 상태였는데[9], 이 때 즈음해서 오노 요코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존 레논은 신시아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고 있었고, 반면 오노 요코에게는 과도하게 빠지게 된다. 오노 요코를 좋아하게 된 것이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은 것 때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모성애를 그리워하던 존 레논이 연상의 오노 요코에게 빠지게 되었다는 것. 본인이 사랑한다는데 할 말이야 없지만 이 때 존 레논은...설명하기 힘들 지경이다.
결국 존 레논은 신시아와 이혼하고 오노 요코와 재혼한다. 신시아와 이혼하기 전부터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줄리안 레논에게 무관심했고 이혼 후에도 무관심했다.[10] 존 레논이 죽은 후에 재산은 전부 오노 요코가 가져갔고 오노 요코는 줄리안 레논에게 한푼도 나누어 주지 않았다. 결국 소송끝에 줄리안 레논은 약간의 재산을 나눠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설명이 조금 빨랐던 것 같지만, 이 때 혼란을 겪었을 첫째 아들(존 레논과 신시아의 아들) 줄리안 레논에게 폴 매카트니가 써준 곡이 바로 'Hey Jude'이다. 이 때 이후의 분열에서 오노 요코가 큰 역할을 차지했기 때문에, 지금도 비틀즈 팬들 중에는 오노 요코를 "마녀", "일본 잡귀"라고 칭하며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이후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의 사랑에만 너무 치중하자 폴 매카트니의 불만이 몹시 커졌다. The Beatles 녹음 당시 존 레논이 이렇게 오노 요코에게만 빠져 녹음실에도 심심하면 오노 요코를 데려오고 녹음에까지도 참여시키자 이런 내부의 분열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11] 그러나 이 사이에서 존 레논의 자의식은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The Continuing Story of Bungalow Bill'에서는 살생에 항의하고, 'Julia'에서는 어머니를, 'Everybody's Got Something to Hide Except Me and My Monkey'에서는 오노 요코와의 사랑을 노래한다. 'I'm So Tired'에서는 당시의 고뇌를 그리고 있으며, 전위 예술가였던 오노 요코의 영향으로 'Revolution 9' 등을 작곡한다.
Let It Be와 Abbey Road에서는 멤버들이 마지막으로 뭉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불화가 곡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으나, 결국 이 때 폴 매카트니와는 죽을 때까지도 화해하지 못할 정도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고 존은 후기 비틀즈 부터의 폴의 모든 성과와 노력들을 부정하고, 폴이 주도해서 만든 애비 로드 메들리와, Let it Be 등 거의 대부분의 폴의 작품들을 폄하하였다. 초기 레논-매카트니 체제의 화합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결국 비틀즈 해체 직후, 서로를 디스해대며 싸워댔으나, 링고 스타가 나서서 그만두게 했다.
이후 존 레논은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영향을 받아 갖가지 기행을 한다. 오노 요코와 함께 며칠동안 알몸으로 침대 안에 틀어박혀 있는다든가(일명 베드인 사건. 반전 시위의 일환이었다. 이 사건은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에도 영향을 주었다.), 솔로 음반 자켓에 알몸으로 사진을 찍는다든가(앞뒤면 다)...
1.2.2 솔로 활동
솔로 시절의 존 레논. 비틀즈 때 시작된 '안경 쓴 더벅머리 아저씨'의 이미지가 이 무렵 확고해져갔다.
비틀즈 해체 직후 폴 매카트니가 왕성한 활동을 보인 것과 달리 존 레논은 우울증에 빠져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어렸을 때의 애정결핍과 여러 가지 심적인 문제들에 대해 직면,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통해 만든 앨범이 바로 플라스틱 오노 밴드(Plastic Ono Band). 덧붙이자면 이 시점 이후로 자신이 만들고 키워온 비틀즈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된다.
이외에도 비틀즈 해체 시기를 전후하여 존 레논은 아내 오노 요코와 함께 베트남전 반전 평화 운동을 시작하여, 미 내의 반전 분위기를 북돋았다. 이 시기의 존 레논은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원제 The US vs John Lennon)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비틀즈 해체 이후 존 레논은 'Plastic Ono Band', 'Imagine' 등의 음반을 냈다. 이 때 그의 사상은 한 단어로 된 세 곡('God', 'Love', 'Imagine')으로 대표되는데, 대체적으로 반전 평화주의자(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 Imagine 중), 무신론자(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 - God 중)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의 반전사상은 그의 곡 곳곳에 배어 있으며, 베트남전에 반대해 MBE 훈장을 반납하기도 했다.
존 레논은 1975년 이후로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5년간 가정주부로 생활한다. 이는 어렸을 때 불안한 가정환경이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1.3 The Dream is Over : 세상을 떠나다
중년기의 존레논. 중년포스가 남다르다. 그러나 그의 중년은 너무나도 짧았다.
1980년 'Double Fantasy'를 제작하고 활동을 시작하려던 찰나, 존 레논은 뉴욕 자택 앞 에서 마크 채프먼이라는 자신의 광적인 팬에게 총을 맞았다. 이 때 마크 채프먼은 존 레논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존 레논을 따라하는 데 미쳐있었고 마침내 "내가 존 레논이다"라는 생각에까지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에 존 레논이 둘일 수는 없다'라는 생각에 존 레논을 죽였다. 그리고 30년째 교도소에 갇혀 있다...2009년 그는 가석방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더불어 존 레논 몇몇 팬들은 아직도 나오기만 하면 채프먼도 죽인다며 그를 영원히 절대 용서못한다고 이를 갈고 있다...[12]
그는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Are you John Lennon?"이라는 말에 "Yes..."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명 인사인만큼, 폴 매카트니와 함께 음모론의 주역 중 한 명이다. FBI가 채프먼을 이용해서 그를 죽였다는 음모론도 있는데,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FBI는 지금도 레논의 파일을 비공개로 지정해 놓고 있다.
사실은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반전운동을 벌이다 영국의 보수언론에 쫓겨 미국으로 왔는데, 거기서도 보수언론이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생긴 상황이다. "뉴욕 시보"라는 앨범을 낼 때 레논은 닉슨=마오쩌둥이라고 까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검찰총장(?)이 "레논은 사회적으로 위험한 인물이다"라고 하여 경계를 강화한 것.
1.4 Strawberry Fields Forever : 죽음 이후의 존 레논
타임지에서는 존 레논의 죽음은 날을 "음악이 죽은 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비틀즈에서의 큰 비중, 독특하고 확고한 사상, 극적인 삶과 죽음 때문에 존 레논은 비틀즈 멤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또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팬들에게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손꼽히는 신적인 존재. 그러나 막상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곡은 All You Need Is Love, Acroos the Universe 같은 것만 빼면 사실상 전부 폴 매카트니의 곡이다. 이는 딱히 우리나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
대중적인 곡을 주로 써 대중들에게 넓은 사랑을 받는 폴 매카트니와는 달리 비록 전성기 시절 히트곡의 인기는 폴 매카트니에게 밀렸지만 죽은 지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재평가를 받으며 수많은 대중,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이 그의 곡들이다.
단 여기서 명심할 것은, 매카트니의 곡이 그 대중성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으나 음악적 스팩트럼을 폭넓게 지닌 훌륭한 곡이라는 사실이다. 레논의 곡이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으니 음악적인 곡/매카트니의 곡이 대중에게 사랑을 받으니 조야한 곡이라는 이분화된 편견은 버리자. 자세한건 폴 매카트니 항목의 '음악적 성향' 참조.
롤링스톤즈지 독자 선정 '20세기 가장 위대한 작곡가 1위'. 그의 대한 평가는 이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2 기타
오아시스의 멤버였던 리암 갤러거가 존 레논의 유명한 빠다. 사실 리암의 거친 행동도 존 레논과 상당히 닮았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존 레논 빠라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아이팟터치 1세대의 32기가 모델 발표였던 1월 이후 출시된 아이팟터치 제품군의 표지에는 존 레논의 Imagine 노래가 실행되어있고 존 레논의 앨범아트가 붙어있다.
아들도 가수 데뷔할려고 뮤직비디오(샘 페킨파 감독)까지 찍었으나, 결국 자기 아버지보다는 못했다. 근데 자기 아버지 이후로 자기 아버지만한 가수도 없었다. 가수의 알파이자 오메가 정확히는 전처 신시아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과 오노 요코의 아들 션 레논이 있는데, 둘 다 가수로 데뷔했고, 둘 중에서는 션 레논이 더 잘 됐다. 특히 션 레논은 사업까지 잘 된다고.
존 레논은 숫자 9를 특별하게 여겼는데, 실제로도 숫자 9와 관련이 많다.[13] Revolution 9, One After 909, #9 Dream 등 노래에 9를 넣기도 하였다. 9번째로 만들어진, 일련번호 9가 새겨진 화이트 앨범을 특별히 자신이 소유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리마스터된 비틀즈 앨범의 발매일도 2009년 9월 9일이였다.
그의 어린시절은 영화 존 레논 비긴즈 : 노웨어 보이 에서 간접적으로 나마 느껴볼수 있다.
오노 요코 때문에 백남준과도 나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구글에서는 그의 탄생 70년을 기념해 특별히 로고를 만들었는데, 한글날과 겹치는 탓에 한국에서는 짧은 시간밖에 볼 수 없었다.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레논의 생전에 녹화했던 Imagine 영상을 리마스터링해 퍼포먼스와 함께 화려한 무대를 장식했다. 개막식을 장식한게 폴 매카트니라면, 존 레논은 폐막식을 장식한 셈. 둘이서 잘도 해먹네
2.1 솔로 디스코그래피
발매년도제목
1970년Plastic Ono Band
1971년Imagine
1972년Some Time In New York City
1973년Mind Games
1974년Walls and Bridges
1975년Rock 'n' Roll
1980년Double Fantasy
1984년Milk and H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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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존 윈스턴 레논이였지만 오노 요코와 결혼한 뒤 개명했다.
[2] 대학밴드 급이라고 볼 수 있다. 고등학교 이름이 "쿼리 뱅크(Quarry Bank)"였기 때문에 이름을 쿼리+멘(Men)으로 지었다...는 건 둘째치고, 맨날 학교를 뒤집어놓았다.
[3] 이 당시 존은 폴이 기타를 왼손잡이로 잡는 걸 보고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뭘 하겠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실력에 놀랐다. 게다가 기타를 조율할 줄 몰랐던 존은 폴이 조율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4] 자신의 정체성과 애인과의 문제 등이 겹쳤다. 비틀즈 항목 참고.
[5] 비틀즈 항목에 있다시피, 존의 말이 와전된 것이다.
[6] 2000년대에 들어 교황청에서 1966년의 예수 발언을 용서한다는 말을 했다.
[7] 이 곡과 폴 매카트니의 'Penny Lane'은 사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보다도 먼저 발표된 싱글이다. 자세한 내용은 Magical Mystery Tour 참조
[8] 이 곡 이후 존 레논은 'Walrus'라는 가사를 곡에 자주 사용하는데, 이유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만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경우도 잦다. 근데 'Glass Onion'에서는 'The Walrus is Paul'이라는 가사도 나오기에 아리송. 음모론자들은 이를 폴이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로 들이밀기도 한다. 왜냐하면 저 가사를 직역하면 "(사실) 왈루스는 폴이었지"라는 뜻인데, 왈루스는 위에서 적은 존의 별명(해마)이기도 하지만, 그리스어로 시체라는 뜻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어에 walrus 라는 단어는 없으므로 이는 루머로 추정된다.
[9] 이 때문에 존 레논은 회사로부터 신시아와의 결혼 사실을 숨기라는 요구도 받았다.
[10] 한 번은 존이 "팬들 때문에 못 살겠으니 한적한 부자 동네 가서 살자"라며 켄우드 대저택으로 이사를 갔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줄리아와 아들 줄리안만 남겨놓고 활동했다고.
[11] 폴도 자신의 애인 린다를 작업실에 데려오는 경쟁을 했다. 자세한 것은 폴 매카트니 항목 참고.
[12] 마크 채프먼은 존 레논에게 총을 쏘기 직전, 유명한 공포소설가 스티븐 킹에게 끈질기게 사인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인을 거의 해 주지 않는 스티븐 킹도 그 끈질김에 질려 결국 사인을 해 줬다는데, 만일 킹이 사인을 해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13] 존 레논과 션 레논의 생일은 10월 9일, 비틀즈가 처음으로 공연한 날도 2월 9일인 등 그의 삶 중 중요한 날들은 9라는 숫자와 연관되어 있다. 심지어 존 레논이 죽은 날인 12월 8일은 그의 고향 리버풀 시간으로 따지면 12월 9일이였다...흠좀무.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