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락밴드 퀸의 리드보컬.
1946년 9월 5일~ 1991년 11월 24일1 유년 시절
아프리카 잔지바르[1] 출생으로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8세기에 이슬람교도에 쫓겨 인도로 피신한, 불을 숭상하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라고 한다. 그의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이다. 파로크란 이름이 영어로 발음하기 불편해서, 프레디란 별명을 많이 썼다. 프레디 머큐리는 파로크란 이름보다 프레디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했고, 퀸을 결성하면서 프레디란 이름으로 아예 개명하기 이른다.(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과거 잔지바르 시절의 잔재를 완전히 지울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인도 봄베이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를 해야했던게 무척 괴로웠던 모양이다. 덕분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랐다. 음악에는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보였다. 학창시절에 합창부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아마추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다. 가족이 영국으로 이주하고 프레디 머큐리도 영국에서 대학을 마쳤는데 그래픽 디자이너 학사. 그래서 퀸의 앨범 자켓 디자인의 대부분은 프레디가 했다고 한다. 아래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 이 로고는 나이트 앳 더 오페라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
2 가수로서
보컬로서 역량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대학시절부터였다. 단 그때에는 천하의 프레디 머큐리도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 그때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할지 몰랐다."라고. 그 뒤로 혼자 엄청나게 연습을 했는지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어느정도 안정된 보컬을 보여주게 된다.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보컬 부분에서 누구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가끔씩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2.1 퀸
대학 재학 중에 아마추어 밴드 활동[2] 을 하다가 로저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가 이끌던 스마일을 보고 살짝살짝 접근을 해오더니 보컬 팀 스타펠이 탈퇴하자 바로 그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베이시스트 존 디콘을 영입. 퀸이 탄생하게 되었다. 후일 로저는 웬 이상한 녀석이 공연마다 와서 공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프레디였고 그 잔소리가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고 밝혔다.
참고로 팀 스타펠은 퀸을 나온 이후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지만 그렇게 결과가 좋지 못했고, 이후 음악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본인의 재능을 자각인 이유인지 자신은 퀸이 잘 될 것이라 알고 있었고, 음악을 그만둔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하기도.
아무래도 당시에, 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엘리트였고 음악을 하지 않았아도 먹고 살 길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까, 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평전에 따르면[3] 프레디 머큐리는 대학의 명물이었고, 그가 양성애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친구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고.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특이한 인종의 그가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며, 매일 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달링' 같은 말들을 남자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녔으니 눈치 못채는 사람이 이상했을지도. 대학에 다닐 때는 무척 화려하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봐.'라고 말했었다고. 프레디 머큐리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당시 친구들이 모두 숙취에 쩔어서 새벽에 방에 널브러져 있을 때, 프레디 머큐리는 기타를 들고 존 레논의 노래를 연주하며 불렀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줬었다고. 대학 친구들은 그때부터 프레디가 뭔가 될 법한 떡잎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밴드 이름을 QUEEN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 머큐리였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속어 뜻으로 QUEEN이란 단어에는 '동성애자'와 같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자기는 죽어도 밴드명을 QUEEN으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다른 멤버들도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된다.
퀸 초기에는 글램락의 영향으로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를 주로 입었는데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다. 강한 인상과는 달리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그럭저럭 소화를 했다. 날개 의상은 곧 자취를 감추지만 타이즈는 퀸 중반기(1976~1978)에도 종종 보인다.[4]
퀸 결성 초반에 프레디 머큐리는 유난히 무대와 의상에 집착했다고 한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다고.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입겠어!'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고. 특히 나이가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콘서트 때 이런 옷입고 무대를 뛰어다니는데 좀 민망하긴 하다.(...)
프레디 머큐리가 어릴 적에는 인도에 유학까지 보낼 정도로 집안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영국에 가족들이 이민 온 이후에는 집안 사정이 많이 안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디 머큐리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만 했는데, 비행기 화물칸에서 짐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알아주는 뮤지션이라고 뻥을 쳤다. 단순한 허세였지만, 프레디 머큐리 스스로가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첫번째 발언이었다.
3집이 나오기 전까지는 여타 다른 무명 밴드가 그렇듯이, 금전 사정이 안 좋았다. 이는 프레디 머큐리도 마찬가지였다. 퀸이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 출연을 했을 때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그는 가전제품가게에 진열된 텔레비전으로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길거리에서 봐야만 했다고.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작은 옷, 장신구 가게를 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생활비를 벌려고 여기저기 손을 써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장사를 할만한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 일화가 있는데, 가게를 보던 도중 프레디 머큐리가 입던 재킷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한 손님이 프레디의 재킷을 맘에 들어했다. 마침 프레디는 잠깐 외출 중이어서, 로저 테일러만 있었는데 손님에 재킷을 맘에 들어하자 푼돈을 받고 그것을 팔아버렸다. 잠시 뒤에 돌아온 프레디는 로저 테일러가 자신의 재킷을 팔아버린 걸 알고, 펄쩍 뛰면서 화를 냈고 직접 재킷을 되찾아왔다고 한다. 어쨌든 장사는 시원치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접게 된다.
데뷔 앨범인 <Queen>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리면서 명곡 <Bohemian Rhapsody>가 수록된 <A Night at the Opera>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번인데 자기 까는 소리를 줄창 들으니 좋은 감정이 생길리가 만무. 인터뷰도 잘 안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다. 특히 사생활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문란한 사생활을 파헤치는 찌라시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무대 위에서는 확실한 프로였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가창력도 있지만,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 역시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몸이 아프든 기분이 안 좋든 무대 위에만 올라가면 항상 열정적으로 관객들을 압도하며 최선을 다해서 공연을 펼쳤다. 물론 공연을 중간에 그만두는 일도 없었고, 노래를 부르다가 가사가 틀리거나 연주가 엉켜도 그것에 얽매이는 일도 없었다. 딱 한 번 공연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둔 적이 있는데, 너무 열정적으로 무대를 휘젓고 다니다가 발목이 삐어서 그랬었다고...(..) 이 열정적인 뮤지션의 모습은 커트 코베인의 유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커트 코베인은 자신은 프레디 머큐리처럼 음악과 공연을 즐길 수 없다며 유서 첫머리에 한탄 비슷하게 적어 놓았다.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거친 락뮤지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장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런 음악 성향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판타지 전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심사 덕분에 퀸 초창기 음악 가사에는 '요정'이나 '괴물', '정의의 기사'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음악적 부분, 특히 가창력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 통칭 미성의 전설, 3옥타브[5] 가까이되는 음역을 자랑하며 그 음역만큼이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그야말로 일품.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목소리가 굵어진 케이스다. 초창기 앨범, 퀸 1집을 들어보면 멜로디가 재미없어도 프레디의 미성 덕분에 들어볼만한 곡이 몇 곡 있을 정도. 평론가들이 매일같이 퀸의 음악을 깠어도 프레디 머큐리의 가창력만큼은 인정하고 접고 들어갔으니....(..).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것 같은 그런 마성의 목소리는 아직까지 경탄의 대상. 아직까지도 미성으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나오면 '제 2의 프레디 머큐리' 운운할 정도니 말 다했다.
전문적인 보컬 수업은 받은 적이 없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나이를 먹고 계속되는 투어로 80년대 중, 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디씨 락갤에서는 프레디가 낫냐 xx가 낫냐 떡밥이 심심치 않게 도는데 그런거에 현혹되지 말자.
80년대에 낸 솔로앨범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프레디 머큐리는 70년대와 80년대 보컬이 차이가 있다. 70년대에는 아름다운 미성과 높은 음역이 특징이었다면 80년대에 들어서서는 파워풀하고 남자다운 굵고 무거운 목소리를 보여준다. 참고로 콧수염을 처음 기른것도 1980년부터다. 즉, 이때부터 아예 노래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까지 바꿔버린 것.[6]
80년대 이후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어 버린 건 추측이 굉장히 많다. 70년대에 콘서트에서 너무 질러대서 목이 나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고, 70년대에 무엇보다 목 관리에 철저했던 프레디 머큐리가 80년대 이후 갑자기 목 관리를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가 변해 버렸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 프레디 머큐리가 콧수염을 기른 이후부터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어서 그런 추측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왜 갑자기 목소리를 그렇게 바꿨는지 본인이 밝힌 적은 없다. 다만 80년대부터 퀸의 음악 스타일이 프레디의 목소리에 맞게 변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퀸의 음악이 프레디의 목소리를 따라갔는지, 프레디의 목소리가 퀸의 음악을 따라갔는지는 미스테리.
그러나 죽기 직전, 그러니까 1980년대 말에 담배를 끊으면서 미성이 약간 살아나기도 했다. 그때는 몸이 좋지 않아 스튜디오 음반밖에 들을 수 없지만 <Made in Heaven> 같은 곡을 들어보면 미성끼가 어느정도는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5년 발표된 사후 앨범 "Made In Heaven"의 동명 타이틀 곡에 남아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육성은 사실 80년대 솔로 활동 당시 발표했던 버전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그 곡의 미성은 죽기 직전 담배를 끊어서 살아난 미성과는 관계가 없다.
2.2 말년, 그리고
말년엔 에이즈로 고생하다 죽었는데, 91년 11월 23일 에이즈 감염 루머를 공식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 다음날 24일 사망했다. "당시 신문보도" 죽을 무렵엔 눈도 안보이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에이즈의 원인은 젊은 시절, 매일같이 즐기던 밤놀이 때문이었는데 거의 매일 밤마다 파트너를 갈아치우고 한번에 여러명과 즐기고(...)[7]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놀았는데 그 와중에 감염이 된 듯 하다.
멤버들은 88년도 즈음에 그의 에이즈 감염을 알았다고 한다. 이미 그때 즈음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급속히 초췌해지며 에이즈 감열설이 퍼지고 있었는데(본인은 강력히 부인했지만), 이 때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너희들도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거에 관해 말하고 싶지는 않고 죽을 때까지 음악을 만들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고백을 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의 뜻에 따라 더 이상 이후로 이 문제를 논하지 않고 음악작업에 몰두했다.
병색이 짙어졌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약을 먹어가며 버티고 몸이 잠깐 좋아지면 그때 다시 작곡하고 노래하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정규앨범인 <Innuendo>는 프레디가 몸이 좋아져서 언제쯤 스튜디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연락하면 나머지 세 멤버들이 데모 버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컨디션이 좋을때 스튜디오에 와서 보컬을 녹음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생전의 마지막 싱글인 <The Show Must Go On>은 음이 높아서 브라이언 메이는 그가 곡을 부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씨바...까짓거 할게'[8] 말한 후에 투병 중임에도 보드카를 쭉 들이키고 삑사리없이 한큐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9]
얼마나 마르고 초췌해졌는지 <I'm going slightly mad> 뮤직 비디오를 보면 두꺼운 화장으로도 병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 콧수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움푹 패인 두 볼이 안타까울 정도다.
프레디 머큐리는 죽기 전 일년 가까이를 두문불출했다. 저택에 틀어박혀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했다. 프레디 머큐리가 면역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집에는 그의 애인이자 이발사였던 남자와 요리사만이 있었다. 게다가 그 두 남자도 에이즈에 걸려 있었고,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지 얼마 후 모두 사망했다. 당시는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지 십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전무했다. 프레디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절친 엘튼 존이 자주 병문안을 왔었다고 한다.
특이할만한 점이라면 프레디는 죽기 직전 그나마 몸이 괜찮을 때 그림을 상당수 그렸다고 한다. 저택에 틀어박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무슨무슨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자 프레디는 'ㅅㅂ. 저 정도는 나도 그리겠네. 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몇 점 그렸다고. 그 이후로 대학 시절 경험을 살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프레디는 자조 섞엔 목소리로 애인에게 '이거 내가 죽으면 비싸게 팔릴 거야'라고 말했었다고. 그런데 정말로 프레디가 죽은 이후 그림은 비싸게 팔렸다라는 전설이 있다.
프레디가 죽은 후에는 그를 기리는 트리뷰트 콘서트도 열렸으며 이때 엘튼 존, 메탈리카, 데프 레퍼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등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그리고 퀸 멤버들이 자주 앨범 작업을 했던 스위스 몽트뢰에 프레디의 동상이 있으며 그 모습을 담은 사진이 유작이자 마지막 정규앨범인 <Made in Heaven>의 앨범 자켓으로 쓰였다.
참고로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이후, 독실한 파시족이였던 프레디의 부모님들은 프레디를 조장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현대 문명에 조장이라는 풍습은 거부감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프레디의 지인들이 극심하게 조장을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잘 합의를 봐서, 프레디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골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 뿌려졌다. 그래서 프레디 머큐리의 무덤은 없다.
3 재능
디스코가 유행했을 때는, 락밴드로는 드물게[10] 디스코풍의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꽤 신선한 시도였지만 결과는 상당히 신통치 않았다.(1982년 <HOT SPACE> 앨범) 현재 이 앨범은 퀸의 정규 앨범 중 가장 흑역사로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타 반짝 유행가를 만드는 허접 디스코밴드들과 달리 퀸 답게 상당한 음악성으로 채워져있으니 버릴만한 음반은 아니다. <Back Chat>이나 <Staying Power> 같은 스타일의 곡은 몇년 후에 마이클 잭슨 이 비슷한 스타일로 앨범을 내자 미국에서 굴지의 전설적인 앨범이 되버린다. 그저 시대를 잘못탄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퀸은 이런 음악을 원래 안 하던 팀이었기 때문에 더욱 외면받았던 것도 있다.
그리고 언급을 안 할 수 없는 세기의 명곡 <Under Pressure> 역시 이 앨범에 속해있다. 퀸 멤버들이 스위스에서 녹음하고 있을 때 근처에서 작업하던 데이빗 보위가 퀸의 스튜디오로 놀러와서[11] 술 퍼마시고 잼(연주자들이 첫 코드만 정하고 즉흥연주를 하며 서로 맞춰가는 일종의 연주 놀이)을 하며 뭐가 나오는지 보자고 하고 놀았는데, 이때 이렇게 놀면서 거의 30분만에 기본 틀이 완성되었고 이 곡은 <Feel Like>이라는 이름이 붙어 나올 예정이었는데, 프레디 머큐리와 존 디콘이 데이빗 보위가 오기 전 부터 이미 그 유명한 베이스 리프를 만들어 놓았고 그것들을 세련되게 짜집기 한게 <Under Pressure>의 완성이었다한다.[12]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적 재능이 엿보이는 다른 부분이 바로 작곡 능력이다. 실제로 프레디 머큐리는 퀸 결성할 때부터 기타리스트였던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해왔다. 퀸 초창기(1, 2집)에는 보통 알려진 퀸과 프레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헤비락 작곡에 치중했고 피아노 발라드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그 이후다. 발라드 외에도 팝이나 디스코 등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기존의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던 <Hot Space>나 본인의 솔로앨범에서도 두드러진다.
대부분의 노래는 피아노로 작곡했는데, 작곡하는 것도 좀 특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거나 고뇌하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하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둔 후 나중에도 그 선율이 남아있으면 그제야 녹음하고 작곡을 시작한다고.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건 그 선율이 허접해서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라고.(...)
최근에 브라이언 메이가 직접 나와서 설명한 Bohemian Rhapsody 메이킹필름에서 그가 설명하기를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이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치의 틀림도없이 정확하다고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 하다고 설명하였다.
악기는 주로 피아노를 다뤘지만 기타도 친다.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때만 연주하는데 코드는 3개 밖에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 공연에선 6개를 친다. 참고로 82년 Hot Space 투어가진 통기타로 연주했으나, 84년 The Works 투어부터 펜더 텔레캐스터로 변경했다.
대중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뽑아내는 솜씨가 아주 일품으로, <Bohemian Rhapsody>나 <Don't Stop Me Now>,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13], <We Are the Champions>, <Killer Queen> 같은 퀸의 많은 대표곡들이 프레디의 작품이다. 위 노래들은 2011년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광고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 배경 음악으로 잘 쓰이고 있다. 노래 제목은 몰라도, 음만 들려주면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음악 최소 한두곡은 알고 있을 정도. "아~ 그거~" 하면서.
프레디 머큐리의 존재감은 라이브 공연에서 더더욱 커지는데, 특유의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조련선동스킬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태디엄 공연을 해나가는데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 관중 조련은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그가 라이브 중에 관중들과 주고받는 부분프레디 머큐리의 노래 교실이 비춰지고, 그의 영상과 목소리를 따라 관중들이 따라 부르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여기서 쓰인 영상은 1986년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 라이브 공연의 모습이다.
4 잡다한 이야기
세간엔 게이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정확하게는 양성애자였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 사귀던 메리 오스틴과 무척 깊은 관계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헤어지고 그 때부터 수많은 애인,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그렇지만 메리와는 무척 사이가 좋아서 죽을 때까지 함께 했고 프레디가 본인의 유일한 '친구'라며 깊이 신뢰했다.[14] 프레디와 사귀던 여자친구, 남자친구 중에 메리를 질투해서 그걸 항의하다가 프레디와 헤어진 사람들도 꽤 있을 정도. 프레디 역시 누구도 메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늘 입버릇 처럼 말했고 가족 이상으로 신뢰하는 전 애인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프레디가 죽고 나서 런던의 대저택을 상속받았다. 또한 A Night at the Opera에 실린 "Love of My Life"라는 유명한 발라드곡 역시 메리 오스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강렬한 콧수염과 독특한 무대 매너 덕분에 굉장히 호쾌하고 터프해보이지만 무척 수줍음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파파라치식으로 달려드는 언론을 피해 많은 연인들에게 의지하곤 했지만 배신도 많이 당하면서[15] 상처를 많이 받았던 모양.
오페라와 발레를 무척 좋아해서 성악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스페인의 유명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제가를 불렀다. 그러나 프레디가 91년 에이즈로 사망하자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고 취소 크리...
워낙 열정적이고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왠지 덩치가 큰 걸로 기억되지만, 175cm 가량으로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았다.
먼 훗날, 동방의 한 섬나라에서 연재된 막장 만화에 찬조 출연했다.
메가쑈킹이 알타리라는 개인 사이트에서 영화 패러디 만화를 그리다가 기사 윌리엄에서 프레디 머큐리 사진을 입힌 동성애자로 비하하는 걸 그렸다가 퀸 팬들에게 쌍욕을 듣었던 적도 있다. 윌리엄을 등 뒤에서 안고 싶어한다는 공주가 나오는데 어찌 공주가 쓰던 마스크가 벗겨지니 바로 프레디 머큐리 얼굴을 덧입힌 것. 윌리엄이 분노하면서 창으로 힘껏 두들겨 패주며 끝나는 줄거리였다. 당시에도 이 만화 덧글로 프레디 팬들이 불쾌해하며 악플을 달기도 했다. 사실, 영화 기사 윌리엄에서 그의 노래가 나온 점 때문에 들어간 우스개이긴 하지만 고인드립으로 욕먹을 법했다.
한국에서도 그와 관련된--진짜로 관련되어 있다.영챔프 기획으로 신인만화가들 단편형식의 시리즈물에 단편 으로 나온 적이 있다. 요정과 관련해서 퀸의 그룸명이 퀸이 되었던 얘기를 다루고 있다.(퀸의 명곡들이 사실은 그 요정과 프레디와의 조우로 인해서 만들어 졌다는 식이다.) 만화가의 자료조사 부족이었는지 퀸의 명칭은 위에서 언급 된 동성애자를 뜻하는 퀸이다. 참고로 등장한 마녀는 프레디와 연인이 되려다 딱지맞고 햇도 돌아서 막장 타는 역, 말년의 프레디가 죽기 직전에 다시 등장해서 그를 보살핀다.
2011년 9월 5일 하루동안, 탄생 65주년을 기념해 구글 초기화면의 특별 로고가 만들어졌다. 로고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Don't stop me now'의 1절이 영상과 함께 나오는데, 가사도 영문 자막으로 뜬다.
튀어나온 입에 상당한 컴플렉스가 있어서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웃고 수염도 그것을 가리기 위한 일환으로 길렀다고 한다. 80년대 말엔 면도를 했는데 그때의 수염들은 모두 가짜라고.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생전 영상을 따라 관중들이 가락을 따라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성악가 몽세라 카바예와 함께 'Barcelona'라는 곡을 부른 적 있는데, 이 곡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전에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올림픽 측에서는 에이즈로 죽은 사람의 노래를 주제가로 쓸 수가 없어서 다른 노래로 바꾸는 병크를 저지른다. 이 점을 알고 폐막식의 장면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의 20년 묵은 한풀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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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가 옆나라였던 탕가니카랑 합쳐지면서 이름이 탄자니아로 바뀌었다(세렝게티로 유명한 그 나라 맞다.). 탄자니아에서는 프레디 머큐리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잘 몰라했다. 그러나 하두 외국인들, 팬들이 탄자니아 와서 자꾸만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집 어디에요?"라고 묻기에 결국 여기서도 누군지 몰라도 하여튼 유명한 사람이라는 게 알려졌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집은 서로들 우리집이다라고 광고하거나 가르쳐줘서 진짜 태어난 집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하두 경쟁이 심해져서 프레디 머큐리 사진을 가득 붙이고 우리가 진짜 프레디가 태어난 집 원조 머큐리 하우스이라고 붙이고 걸개를 내걸지 않나, 경쟁이 장난아니라고 한다.
[2] 일부 매니아들이 보관하고 있는 이 시절 음악을 들어보면 정말로 프레디 머큐리가 몸담았던 밴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음악이 아마추어틱하다. 아무래도 아마추어 밴드의 멤버들이 퀸의 멤버들과 갭이 있는데다가 프레디 머큐리도 어릴 적이다보니 그럴수 밖에 없을 듯. 프레디 머큐리는 이 시절에 서너개의 밴드를 거치지만 모두 일이년을 있지 못하고 밴드가 해체했다. 음악 수준도 모두 고만고만했다.
[3] 국내에 정식 출판되지는 않았다. 인터넷에 비공식적으로 번역된 평전이 있으니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읽어보는 것도 좋다.
[4] 1985년 자신의 솔로 앨범 "Mr.Bad Guy"의 수록곡인 "Living On My Own"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도 타이즈를 입었는데, 촬영장소는 다름아닌 본인의 생일파티(...)
[5] 4옥타브라는 말이 돌기도 하는데, 프레디 머큐리는 4옥타브까지 올라간 적은 없다.
[6] 때문에 콘서트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70년대 공연엔 창법이 목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어서 컨디션 분배도 잘 됐는데, 80년대 공연부턴 목소리가 굵어진 대신 목에 피로가 빨리 축적되어서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딸린다. 이런 경향은 8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7] 자기 침대는 여러명이 올라와서 놀 정도로 넓다고 자랑한적도 있다...
[8] 원문은 I'll fuckin' do it, darling
[9] 시한부 인생의 막바지에서 자신의 삶을 얘기하는 듯한 가사의 이 곡을 프레디 역대 최고의 보컬 퍼포먼스로 뽑는 팬들도 많다.
[10] 사실 당시로썬 그리 드문 현상은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로드 스튜어트나 롤링 스톤즈, 키스 같은 메이저한 록 뮤지션들도 디스코풍의 곡을 발표했는 데 그게 197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Hot Space가 욕을 먹는 이유는 장르의 선회라기 보단 그 당시 디스코가 끝물이었기 때문. 디스코 열풍에 염증을 느낀 락덕후들의 '디스코 죽이기 운동'이 거세졌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11] 퀸의 동일앨범 다른 수록곡인 <Cool Cat>을 피처링하기 위해 온 것이 정설.
[12] 퀸 다큐멘터리 Days Of Our Lives 에 따르면 메인 베이스 리프를 만든건 존 디콘이었는데 다들 피자를 사러 나갔다 돌아오고나서 존 디콘이 그 리프를 까먹었고, 로저 테일러가 다시 그 리프를 기억하여 녹음을 시작했다고한다. 로저 테일러가 아니었다면... 생각만해도 ㅎㄷㄷ
[13] 이 곡은 목욕하다가 악상이 떠올라서 만들었다고 한다
[14] 메리 오스틴 역시 나중에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프레디가 대부가 되어주었다고 한다.
[15] 돈을 받고 사생활을 언론에 넘긴다던가 하는 식으로...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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