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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ARD HUGHES (1905-1976)


1905년 하워드 휴즈는 휴스턴에서 태어났다. 

1909년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구 제작회사에서 바위등에 구멍을 낼수 있는 드릴 바이트를 특허내게 되는데,
이것이 하워드를 갑부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1922년 그의 어머니가 죽고, 2년 뒤인 1924년 그의 아버지도 죽게 되자, 당시 18세의 하워드 휴즈에게, 집안 어른들은 다니던 대학 (Rice University)을 마치기를 원했으나, 하워드는 아버지 공구 회사를 인수하여 경영하기로 한다.
1925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카레이서 출신의 Noah Dietrich 를 만나게 되고 그를 재정 담당 비서로 고용한다
Noah Dietrich 는 그 당시 매년 $55 M 을 벌여 들여 휴즈 를 부자에서 갑부 ( Billionaire ) 로 바꾸어 놓는다. 
나이 20세에 갑부의 대열에 선 그는 영화제작자로 그리고 무모한 비행기 조종사의 일에 빠지게 되는데, 
1938년에는 당시로선 최단기간 세계일주 비행을 달성하여 영웅(Hero)적인 대접을 받기도 한다. 
비행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어느날 가장 큰비행기를 만들어 그것을 직접 조정하기로 결심한다. (Visionary) 

전세계에서 이제까지 만들어진 것중 가장 큰 비행기는 그가 1947년에 완성한 '헤라클레스'였다 
비행기날개의 너비는 320피트(거의100미터)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제작비 4천만불이 투입되었다.
8개의 엔진이 장착되어있는 이 비행기는 70피트의 고도로 겨우 천 야드만 날았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직 한번밖에 날지 못하고 박물관에 쳐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 이 비행기는 롱비치 항에 "Spruce Goose"라는 이름으로 보관되어 관광객들에게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다가, 1992년도에 Evergreen Intenational Aviation of McMinnville에 팔려서 지금은 오레곤주의 McMinnville이라는 곳에 있답니다. ) 

그는 일생에 두번 결혼 하였는데 1925년 6월 휴스턴에서 Ella Rice 와 결혼하고 바로 Hollywood 에서 살았지만, 여기서 그는 그의 부인을 수 주일동안 집안에만 감금하는 이상한 일을 벌인다. 그녀는 휴스턴으로 돌아가게 되고 1929년 이혼하게 된다. 1957년 그의 두번째 부인인 영화배우출신의 Jean Peters 와 Tonopah 에서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와도 1년 정도 같이 지내다가 서로 헤어져 지내게 되고 결국 1970년 이혼하게 된다. 

그는 당시 킹콩, 노틀담의 꼽추로 유명했던 RKO 영화사를 인수하고 이후에 미국최대의 방송사인 ABC도 사들이는데 40년대와 50년대를풍미했던 은막의 여신 '에바가드너'와 염문을 뿌리고 캐서린헵번같은 여배우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플레이보이 였다. 1946년에는 켈리포니아의 버버리 힐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고도 극적으로 살아난다. (Legend)

그는 벅시가 세운 라스베이거스의 호텔들을 사들이고 개축하여 당시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는 범죄와 도박의 도시를 돈있는 사람들의 투자처로 바꿔 관광의 도시로 있게 한 장본인으로 뛰어난 사업수완을 보인다(Genius)

ABC사 ,TWA항공사,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로얄을 소유한 억만장자는 말년에 병균을 두려워하여 닭고기와 쥬스만 마셨으며, 사람을 만나는것을 극도로 피하며, 누군가 자신을 살해할 것이라는 망상에 시달려 결국 이발사를 두려워하여 머리를 엉덩이까지 내려뜨리고 손톱도 깍지 않고 매의 발톱처럼 긴 상태로 살다가 결국 영양 실조 때문에 죽고 말았다. (Mad Man)

그가 죽고 그의 재산을 둘러싼 사촌동생들의 법정싸움은 끈질긴 뉴스거리 였으나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10명이 안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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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초의 백만장자 하워드 휴즈는 엉망으로 살았지만 억만장자가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구경도 못한 돈을 벌고 쓴 그는 보통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벽을 일삼았다.


하워드 휴즈는 부자였다. 18세에 바위를 치즈처럼 자르는 드릴을 생산하던 휴즈 공구회사의 상속자가 된 그는 평생 돈방석 위에서 살았다. 하워드 휴즈는 미남이었다. 193cm의 훤칠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이지적인 마스크를 가졌던 그는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워드 휴즈는 비행사였다. 두 번의 큰 비행 사고를 당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도 하늘을 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하워드 휴즈는 술과 담배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사교계의 황태자이면서도 마약은 물론 술과 담배도 즐기지 않았다. 하워드 휴즈는 영화를 사랑했고, 골프를 좋아했으며, 종종 침대에 홀로 앉아 색소폰을 불었다. 보석이나 시계 같은 귀금속에 마음을 주지 않았으며, 식사도 매우 검소했다. 아침에는 스크램블 에그를 먹었고, 뉴욕식 커트 스테이크에 완두콩과 샐러드면 흡족했다. 하지만 하워드 휴즈는 성격이 특이했다. 조금 특이한 게 아니라 많이 특이했다. 세균 감염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에게 서류를 전하는 직원들은 흰색 무명장갑을 껴야 했으며, 성병이 전염됐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면 의심 가는 옷과 침구를 모조리 불태웠다. 그의 집을 방문한 사람은 분필로 그려진 18cm 정사각형 안에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물 좋고 정자도 좋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부자에 미남에 영화와 하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많이 특이해도 참아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미녀의 가슴은 나의 것

그러니까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할리우드 톱스타에서 촌뜨기 무명 여배우까지 하워드 휴즈 주위에는 여자가 끊이질 않았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그의 여자란 진 할로, 캐서린 햅번, 에바 가드너, 제인 러셀, 올리비아 하빌랜드, 수전 헤이워드, 진저 로저스, 베티 데이비스, 지나 롤로브리지다, 라나 터너 등등 그냥 ‘할리우드의 여신들’이라는 인명 사전을 펼치는 게 나을 정도다. ‘절세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두 번째 남편 마이클 와일딩과 결혼을 앞둔 상태여서 '작업'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대부호 휴즈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유별나다 해도 처음엔 너그럽게 이해해 주었다. 그가 약속 시간에 늦어도, 차 문을 안 열어주거나 담뱃불을 붙여 주지 않아도, 자신을 침대에 눕혀놓고 화장실에 가서 40분이나 볼일을 보아도 ‘머니’는 ‘매너’보다 힘이 셌다. 하지만 결혼을 원하는 그녀들은 “나중에 유산 상속자 명단에 당신 이름을 올려줄게”라며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던 휴즈를 못 견디고 떠났다.

하워드 휴즈의 오른팔로 30여 년간 충성을 바친 노아 디트리히는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라는 책에서 “나는 도저히 하워드의 로맨스를 일일이 기억할 수 없다. 그 자신도 다 기억하지 못할지 모른다”고 썼다. 그는 휴즈가 여배우 육성(?)을 위해 쓴 돈만 해도 몇 백만 달러가 넘을 것이라고 했다. 휴즈는 흙 속의 진주를 발굴해 여신으로 키우는 데 관심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의 글래머 스타 제인 러셀이다. 그녀는 휴즈가 다니던 치과의 접수원이었다. 가슴 큰 여자를 좋아하는 휴즈는 단번에 그녀를 발탁했다. 제인이 휴즈의 영화사 RKO가 제작한 <마카오>에 출연했을 때 그는 스튜디오에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요컨대, 러셀 양 유방의 자연스러운 윤곽이 나타나도록 극히 얇은 천의 브래지어가 필요하며 그것도 가능하면 유방 아래쪽만을 떠받치는 절반의 것이 좋아. 그리고 만약 그곳에 진짜 유두와 똑같은 인공적인 돌기를 붙일 수 있다면 이상적이라는 얘기야.” 공과 대학을 다니지 않고도 세계 유수의 비행기 전문가들이 그에게 비행기 구조에 대해 자문을 들어야 했던 ‘메캐니스트’ 휴즈는 50년대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하프 컵 브래지어’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하늘의 품도 나의 것

하워드 휴즈는 1905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났다. 하워드 휴즈의 아버지 하워드 로버드 휴즈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변호사였지만 딱딱한 법과 씨름할 사람이 아니었다. 유전 붐이 일자 텍사스로 이주한 그는 동료인 샤프와 유정을 뚫는데 쓰이는 원추형 드릴을 개발했다. 석유 붐을 타고 휴즈샤프공구회사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로버드 휴즈는 샤프의 지분을 5천 달러에 사서 휴즈공구사로 이름을 고쳤다. 하워드가 열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 애린 휴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열여덟 살 되던 해 아버지 로버드 휴즈가 중역 회의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고아가 된 하워드 휴즈는 휴즈공구사를 물려받았다. 그는 친척들에게 돌아갔던 지분의 일부를 전부 빼앗아 100% 자신의 회사로 만들었다. 하지만 공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휴즈공구사 회의에는 전혀 참석하지 않았으며, 공장을 방문한 것도 30년 동안 딱 한 번이라고 한다. 그는 가끔 “휴즈 공구사는 요즘 어때? 얼마나 벌어?” 같은 질문만 할 뿐이었다.


할리우드에서 멀지 않은 오하이오에서 학교를 다닌 하워드 휴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다. 삼촌 루퍼트 휴즈가 시나리오 작가인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공구로 돈을 벌어 영화에 쏟아부었다. 몇 편의 영화를 실패한 후 하워드 휴즈는 <지옥의 천사들>이라는 초대작을 만들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두 명의 비행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공중전을 제대로 찍겠다는 욕심으로 스턴트맨 대신 직접 비행기를 타고 촬영한 이 영화는 제작기간 3년, 제작비 380만 달러가 들었다.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하워드 휴즈는 하늘을 누비는 비행기를 멋지게 담겠다고 마음에 드는 구름이 나타날 때까지 6개월을 기다렸다. 긴 촬영 기간 동안 유성영화가 발명되자 “역시 사운드를 넣어야겠어. 다시 한번 찍는 거야”라며 필름을 왕창 버렸다. 하워드 휴즈가 제작한 영화 중에는 <스카페이스>같이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도 있었지만 많은 작품이 돈으로 바른 쓰레기였다. 후에 그는 RKO를 인수해 50년대 후반까지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날렸다.

더불어 세계 제일의 비행사가 되고 싶었던 하워드 휴즈는 5층 빌딩 높이에 축구장만한 날개를 가진 전설적인 비행기 ‘헤라클레스’를 직접 설계했고, 91시간 동안 비행을 하는 세계 일주 기록을 세웠으며, 70년대까지 팬암과 함께 미국~유럽 직항 독점권이 있었던 항공사 TWA를 인수해 하늘을 재패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군수 사업으로 부를 늘이고, 한때 NASA의 우주 개발 사업까지 손을 댄 그는 60년대 말엔 라스베이거스에 일곱 개의 카지노를 굴리며 호텔 왕으로 군림했으나 말년엔 대저택에 진공 유리방을 지어 놓고 칩거했다. 머리를 허리까지 기르고 손톱이 15cm가 넘도록 자르지 않고 크리넥스 박스를 신발로 신고 다닌 기행은 현재까지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