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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 후츠파 Chutzpah

라/ㅜ 2013. 5. 3. 13:46 Posted by 로드365



미국 프로야구 LA다저스 소속의 류현진(26) 선수가 1일 LA 홈구장에서 기분좋은 3승을 달성했습니다. 이날 12개의 삼진에다 메이저리그 데뷔후 첫 타점까지 올리며 기염을 토한 모습을 지켜본 소감 어떠셨습니까? 류현진은 19세 고졸 신인으로 한국 프로야구에 입단한 첫해인 2006년, 투수 부문 다승·탈삼진·평균자책점 1위에 오르며 신인왕과 MVP까지 움켜쥐었죠. 한국 프로야구에서 이후 7년 동안 활약하다가 올해 미국으로 건너간 첫번째 토종(土種) 한국인 메이저리거입니다. 그런 그가 미국에서 어느 한국인 선수도 이루지 못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성공 스토리를 써가는 비결은 뭘까요? 


①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야구는 내 인생의 전부” 


“현진아, 야구 한 번 해 볼래?” 아버지 류재천씨가 이렇게 말하면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류현진의 눈이 반짝거렸다고 합니다. 심부름을 시키면 입부터 쭉 내밀다가도 “야구장 데려갈께” 한 마디에 순한 양(羊)이 됐다는군요. 아버지와 같이 틈만나면 인천 도원야구장을 찾았던 류현진은 그해 인천 창영초등학교에서 캐치볼테스트에 합격한 후 1996년 9월말부터 이 학교 야구팀에서 선수 인생을 시작했지요.


류재천씨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현진이는 그때부터 야구 외에는 도통 다른 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5~6학년 형들보다 4학년인 현진이의 폼이 더 유연하고 예뻐 ‘신동(神童)’으로 불렸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듣고 그대로 흡수했다. 승부욕이 남달라 게임에서 지고서는 분을 참지 못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류현진은 훈련이 힘들다거나, 선배들이 못살게 군다거나, 놀고 싶다고 해서 야구하기 싫다고 도망가는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땡볕에서 고생하는 아들이 안쓰러워 류씨가 “야구 좀 쉬어가면서 해라”고 하면, 류현진은 “아빠 난 야구해서 평생 먹고 살테니 걱정 마세요”라며 큰소리치며 절대 글러브를 벗지 않았다고 합니다. ‘프로페셔널로서 야구’를 하겠다는 DNA를 어렸을 때부터 타고났던 걸까요?


고교 1년때 혹사로 인해 고2 때 왼쪽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아 선수생활 중단 위기에 몰렸을 때도 이런 DNA는 큰 힘이 됐습니다. 당시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침 7시 직행버스를 타고 인천 집을 출발해 서울 잠심 재활센터에서 치료를 받다가 밤 9시가 돼서야 귀가하는 생활을 7개월 동안 했답니다. 다시 마운드에 설 수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는 참 속상한 상황인데도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인상조차 찌푸린 적이 없었다고 하네요.


재활 다음해인 2005년 청룡기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 주전 투수로 뛰어 모교인 인천 동산고 우승의 주역이 됐던 류현진은 소감을 묻는 말에 “고 2때 다친 후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동료를 보면 견딜 수 없었다. 분(憤)을 삭이며 마운드에 오를 생각만 하면서 혼자 학교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승부근성 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에게 야구는 삶의 전부였던 거죠. 그가 수술을 받고 나서 찍은 팔꿈치 사진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것도 그걸 보면서 투지를 불사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류현진의 야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 류재천(57)씨와 어머니 박승순(54)씨입니다. 야구를 좋아했던 류 씨는 당시 살던 인천 주안동 집 앞마당이 길어 류현진과 캐치볼 놀이를 했는데, 아들이 재능을 보이자 아예 옥상에 라이트와 그물까지 설치해 놓고 야간훈련까지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선수로의 길을 열어준 아버지는 이후 자나깨나 류현진의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코치이자 멘토 역할을 했습니다. 아들의 담력과 배짱을 키우기 위해 공동묘지와 바이킹도 숱하게 애용했답니다.


“인천 월미도에 가면 바이킹 타는 데가 있는데 하루는 전날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도 꾹 참고 현진이와 함께 올라탔다가 기절 직전에 내렸다. 부평에 있는 공동묘지도 자주 들렀다. 새벽 1~2시쯤 현진이를 태우고 공동묘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현진이를 내려놓고 난 밑에서 기다렸다. 나도 마음이 결코 편치 않았다. 주위가 온통 어두컴컴한데다 공동묘지의 으스스한 분위기까지 더해져 현진이가 밑에 내려왔을 때는 옷이 흠뻑 젖어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버지가 바이킹을 타라고 해도, 공동묘지에 가자고 해도, 홈런을 맞더라도 도망가지 않는 피칭을 하라고 닦달해도 류현진은 무조건 ‘네’ 하면서 뜻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류현진이 메이저리그 시범경기에서 제구력 난조로 고생한 뒤 “다음 경기에선 볼넷을 한 개도 주지 않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만, 이는 아버지가 어린시절부터 강조한 “경기에 져도 좋으니 볼넷을 절대 내주지 말라”는 교훈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타자와 정면승부를 벌이지 못하고 도망가면 진정한 남자가 아니다”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얘기했다고 합니다. 류현진은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습니다.


어머니인 박승순씨도 류현진의 중고교 시절 야구팀 총무를 맡아 선수들 뒷바라지에 직접 뛰어들었고 부족한 경비를 대기위해 발품을 팔며 파트타임 일까지 했다고 합니다. 툭하면 외지의 야구선수들을 집에 묵게 해 식사와 빨래는 물론 선수들 유니폼을 빳빳이 다려서 제공했고 그때마다 삼겹살 파티를 열어줬는데, 워낙 많은 양을 굽고 뒤집다보니 손 근육이 저렸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헌신적으로 희생하고 도와준 부모님 때문인지 류현진 선수는 “지금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 즉 VIP는 가족이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원천이자 가장 큰 힘도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③“흡연·달리기 보다 진짜 중요한 건 투수 실력”…담력·배짱·후츠파!


류현진에게서 또다른 성공DNA는 특유의 배짱과 담력 같은 감성적 요인들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공동묘지를 자주 다닌 효험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06년 8월, 19세 고졸 신인으로 한국프로야구에 태풍을 일으키던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대전 한밭야구장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류현진은 제 앞에 빙과(쮸쮸바 종류)를 입에 쭉쭉 빨면서 나타났습니다. 훈련이 끝나고 선배의 빙과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한 개 집어들고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온 겁니다. 구단 관계자들이 화들짝 놀라 빙과를 내려놓으라고 했지만, 류현진은 전혀 개의치 않고 끝까지 먹으며 자기 얘기를 하더군요. 아무리 베테랑 선수라도 공식 인터뷰라면 격식을 차리기 마련인데, “참 배짱이 두둑한 좋은 선수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죠.


이런 당당함은 다저스의 입단 계약이나 스프링캠프 때도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LA로 건너가 연봉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류현진은 마이너리그 조항 삽입(구단이 필요할 경우 마이너리그에 내려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조항을 놓고 구단과 줄다리기를 펼쳤습니다. 웬만한 선수 같으면 자신에게 큰 베팅을 한 다저스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었지만, 류현진은 끝까지 버텼습니다. 한국 최고의 투수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결국 다저스는 계약 시한 1초를 남겨놓고 류현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3600만 달러, 약 403억원이란 거금 앞에 그렇게 배짱을 부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류현진은 올 3월 스프링캠프에서도 등판일 사이에 불펜 피칭을 권하는 다저스 코치진에게 “한국에선 불펜 피칭을 하지 않았다. 하던 대로 하게 해 달라”며 자신만의  방식을 고집했습니다. ‘미국 무대에서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류현진으로선 매우 당돌한 행동이었지요.


투수 활동에 좋지않다는 흡연(吸煙) 사실이 공개됐을 때도 “내가 뭐 죄지었어?”하며 전혀 눈치보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선수단 달리기 훈련 도중 중도포기한 게 미국 현지 언론의 질타를 받을 때에도 그는 전혀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투수에게는 달리기 능력 보다 좋은 투구로써 승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자신만의 논리와 소신으로 당당하게 맞받아쳤지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맞다는 걸 발군의 ‘성적’과 ‘실력’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즘 이스라엘 창조경제의 원동력으로 꼽힌다는 ‘후츠파(Chutzpah·뻔뻔스런 자신감)’ 같은 거죠.


류현진은 매우 낙천적입니다. 안 좋은 일을 당하더라도 금세 잊어버리는 성격입니다. 한화에 있을 때 류현진은 호투하고도 승리를 날려버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타선이 침묵하거나, 그가 마운드에서 물러나면 불펜 투수들이 난타당해 역전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한화 시절 그와 친한 구단 관계자는 “다른 투수 같으면 벽을 주먹으로 치고, 소리를 지를 텐데, 류현진은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워낙 포커페이스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홈런을 맞아도, 승리를 불펜이 날려보내도 류현진은 언제나 “어쩔 수 없지, 뭐”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야구 무대인 메이저리그에서 쾌조의 3승을 올린 류현진의 앞날이 물론 장밋빛 만은 아닐 겁니다. 지난번 미국 동부원정 경기에서 나타난 것처럼 체력적인 약점과 본격 현미경을 들이댈 상대 구단의 분석도 넘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어려움도 자기 인생의 한 부분으로 동화시키는 류현진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야구에 대한 몰입, 배짱 같은 DNA로 볼 때 그가 수년 후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최고 투수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