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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 도그마95 (dogma95)

라/ㅏ 2003. 8. 9. 17:06 Posted by 로드365


누벨바그 작가주의를 비판한 순수의 서약

dogma란 교의, 교리를 뜻하는 말로 1995년 3월 13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라스 폰 트리에, 토마스 빈터베르그, 크리스찬 레브링, 소렌 크라히 야콥슨 등 4명의 감독이 모여 선언한 순수의 서약 (The Vow of Chastity) 10계명을 가리킵니다.

1. 촬영은 로케이션을 통한다.
2. 사운드는 이미지와 동떨어지게 제작하지 않는다
3. 카메라는 핸드 헬드를 사용한다
4. 특별한 조명은 사용하지 않는다
5. 옵티컬 작업과 필터는 금지한다
6. 영화는 피상적 행동을 피한다
7. 지리학적 간격은 금한다
8. 장르 영화는 수용하지 않는다
9. 35mm 필름이어야 한다
10. 감독은 크레딧에 올리지 않는다.


'도그마 95'에 동참하는 감독들이 늘어나면서 덴마크에 도그마 재단이 설치되었습니다. 이 단체에서 도그마 95에 일치하는 영화에 대해 '도그마 영화' 로 인정하고 있는데, 2000년엔 변혁 감독의 <인터뷰>가 7번째 도그마 영화로 선정되어 화제가 됐습니다.

도그마95 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 10번째 계명 "감독의 이름을 크레딧에 올리지 않는다" 에서 출발해 봅니다. 프랑스 누벨바그는 오락물로서의 영화에 예술이란 호칭을, 감독에겐 예술가 (작가) 라는 명칭을 부여했고 현대 영화에 있어 커다란 영향을 끼쳐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나는 감독으로서 개인의 취향을 자제할 것을 맹세하며 더 이상 작가 / 아티스트가 아님" 을 선언하면서 누벨바그를 비판하고 나섰을까요?

발터 벤야민은 '영화가 교양계층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중의 예술로서 근대 예술의 신비적 측면을 탈신비화할 것' 이라고 기대했고, 레닌 또한 영화가 부르주아의 예술과는 다른, 새롭게 지배계급이 된 프롤레탈리아트의 예술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0세기초 아방가르드 (전위영화) 운동은 영화가 가진 이러한 혁신적 가능성에 주목한 결과였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독일의 표현주의, 20년대 소비에트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이 2차 세계대전 휘말리고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되면서 아방가드르를 비롯한 영화운동이 침체었고, 그사이 헐리우드는 줄거리를 가진 영화의 오락성에 주목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헐리우드 오락영화가 전세계에 대량 보급되었고 유럽 지식인들에게 있어 영화는 미국 소비자본주의의 천박한 문화적 상징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프랑스의 영화감독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이 <카메라 만년필> 라는 글을 통해서 '영화의 스타일은 소재와 그 소재를 수용하는 영화작가의 주관적인 태도에 의해 통제되어야하며, 영화작가는 소설가와 같은 기능을 해야'하고, 영화작가에게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주장은 트뤼포에 의해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데 그후 트뤼포를 위시한 <까이에 뒤 시네마>의 영화동료들은 '작가정책' 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내용이 아닌 씬의 구성 / 미장센의 스타일에서 감독의 개성을 찾아 예술가의 칭호를 부여하려고 했고, 오락물로 전락한 영화에 천재의 창조성이란 개념을 부여해 예술로 승화시키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세계관을 표현할 수 있고, 부패한 사회 안에서도 인간적인 가치의 낙관적인 측면을 표현할 줄 안다는 식의 애매모호한 작가개념은 영화를 위대한 작가 (감독) 의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것으로 재단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 평론가 앤드류 새리스는 미국영화만을 '유일하게 좋은 영화'로 끌어올린다는 목적으로 이를 이용했고, 이제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는 '작가'라는 신비한 기준으로 순위가 매겨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영화를 오락거리로 여기는 주류 영화이론에 대한 반발로 작가주의가 등장했고, 작가주의는 새로운 주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작가"라는 신비한 개념으로 영화를 읽어내려하는 시도는 신비성으로 치장하고 소수 엘리트에게만 향휴되던 기존의 예술개념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 것입니다.

도그마95 는 누벨바그 영화 미학과 테크놀로지의 태풍이 몰아치는 오늘날 영화판에서, 화장술을 벗어버리고 환상이 아닌 영화를 만들자고 하는 서약입니다.

도그마95 는 발표 당시부터 상업성을 의식한 쇼라는 비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또한 잔혹한 아픔이 느껴지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 이후 라스폰 트리에 감독의 연출작 목록은 <킹덤>, <댄서 인더 다크> 등 좀 의아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역시 도그마 95의 가장 큰 의미는 발터 벤야민이나 레닌이 말했던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다시한번 상기시켰다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가 어떤 의미의 예술인지 고정불변인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변하고 있으니까요.




★ 도그마 95 : 순수의 서약 (전문번역)
From 나우누리 아이즈 영화사랑 동호회

도그마 95

도그마 95는 영화감독들의 모임으로 코펜하겐에서 1995년 봄에 결성되었다. 도그마 95는 오늘날 영화에 나타난 '어떤 경향들'에 대해 맞서는 것을 목표로 천명한다. 도그마 95는 구원 행위다! '1960년대'는 그걸로 됐다. 영화는 죽었고 구원을 요청했다. 누벨바그의 목적은 옳았지만 방법은 그렇지 못했다. 누벨바그는 잔물결로 끝나고 말았다. 개인주의와 자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잠시 영화를 만들었지만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 물결은 감독들처럼, 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그 물결은 결코 그들이 비판했던 사람들보다 강하지 않았다. 반부르주아 영화는 그 자체가 부르주아가 돼버렸다. 부르주아 미학이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개념은 시작부터 부르주아의 로맨티시즘에 불과했다.

틀렸다! 도그마 95의 감독들에게 영화는 개인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급속히 이뤄지고 있고 그 결과 영화는 궁극적으로 민주화될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누구든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매체에 접근하기 쉬워질수록, "아방가르드"는 더욱 중요해진다. 아방가르드란 말에 군사적 / 전투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규칙이 바로 그 해답이다. 우리는 영화에 동일한 유니폼을 입힐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영화는 퇴폐주의로 흐를 것이기 때문이다. 도그마 95는 순수의 서약으로 알려진 논박할 수 없는 일련의 원칙을 통해 개인적인 영화에 맞선다.

1960년대는 그걸로 됐다. 영화가 너무나도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었다고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화행위는 더욱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퇴폐적 필름메이커들의 '최상'의 임무는 관객을 우롱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것일까? 그것이 "영화 100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인가? 환상으로 감정을 소통시킬 수 있단 말인가? 예술가 개인의 자유선택으로? 영화연출법 (드라마투르기) 은 우리가 우상으로 받드는 금송아지가 되어버렸다. 캐릭터의 내면이 플롯을 정당화하는 것은 지나치게 복잡하기만 할 뿐 "고급 예술"이 아니다. 또한 전에 없이 피상적 행동과 피상적 영화가 칭송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황무지와 같다. 파토스의 허상과 사랑의 허상일 뿐이다.

도그마 95에게 영화는 환상이 아니다. 오늘날 영화는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의 결과로 신을 향한 화장술만을 강화시키고 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사용 때문에 누구나 어느 때라도 치명적일 정도로 감각적인 것에 쉽게 노출됨으로써 진실의 마지막 알갱이마저 내버려질 수 있다. 환상은 영화가 뒤로 숨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었다. "도그마 95"는 순수의 서약이라는, 논박할 수 없는 원칙으로 환상의 영화에 맞선다.


★ 순수의 서약 THE VOW OF CHASTITY

나는 "도그마 95"에 의해 확정되고 결정된 다음 서약들을 준수할 것을 맹세한다.

1. 촬영은 반드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소품들과 세트를 끌어들여선 안 된다. (만약 이야기 전개상 특정한 소품이 필요하다면 로케이션은 그 소품이 있는 곳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2. 사운드는 절대로 이미지와 분리하여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혹은 그 역도 안된다. (음악은 그 씬이 촬영되고 있는 곳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이상은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3. 카메라는 반드시 핸드헬드이어야 한다. 손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움직임이나 정지상태는 허용된다. (카메라가 서있는 곳에서 촬영되어서는 안된다 ; 상황과 인물에 맞춰서 촬영해야 한다)

4. 필름은 반드시 컬러여야 한다. 일체의 특수조명의 사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노출을 맞추기에 빛이 충분치 않다면 그 씬은 잘려나가거나, 카메라에 램프 하나만 부착시켜 사용할 수 있다)

5. 옵티컬 작업(필름에 인위적인 효과를 내기 위한 광학 처리)과 필터 사용을 금한다.

6. 영화는 피상적인 액션을 담아서는 안된다. (살인, 폭력 등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7.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것은 금지된다. (말하자면, 영화는 '현재,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8. 장르영화는 허용되지 않는다.

9. 영화의 형식은 반드시 아카데미 35mm여야 한다.

10. 감독 이름은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나는 감독으로서 개인적 취향을 자제할 것을 서약한다. 나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을 삼갈 것을 맹세한다. 나는 전체보다는 순간적인 것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나의 궁극적 목표는 캐릭터와 셋팅에서 진실을 뽑아내는 것이다. 나는 어떤 탐미주의적인 고려도 하지 않을 것이며, 가능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이것을 이행할 것을 서약한다. 이로써 나는 순수의 서약을 행한다.

- 코펜하겐, 1995년 3월 13일 월요일



★ "도그마 95", 영화 2세기를 열어 젖히는 독단적 아방가르드 written by amenic98

1995년 3월 13일 화요일,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도그마 95라는 종교적 이름의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 선언문과 함께 발표된 순결의 서약은 '감독의 이름은 크레딧에 오르지 않는다, 촬영은 반드시 로케이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등의 10가지 계명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선언을 주창한 사람은 <범죄의 요소>, <유로파> 등으로 깐느의 기술공헌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스타일리스트였던 라스 폰 트리에, 그와 함께 토마스 빈터베르그, 크리스찬 레브링, 소렌 크라히 야콥슨 이렇게 세 명의 감독이 이 선언에 동참하였다.

라스 폰 트리에 자신의 이전 필모그라피를 부정하는 듯한 이 선언문이 동참을 바라며 각국의 영화"작가"들에게 보내졌을 때, 그들은 이 원칙대로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그리고 원칙대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의심하였다. 더구나 도그마 95는 '현대영화의 바다고 강물'이라는 프랑스 누벨바그를 '해변으로 쓸려버릴 정도의 잔물결이 되어 허접쓰레기 오물로 변해 버렸음'을 선언하며 정면으로 비판하고, 감독의 이름을 크레딧에 올리지 않는다는 상징으로 누벨바그의 기초이론이었던 '작가정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그마 집단은 "나는 감독으로서 개인의 취향을 자제할 것을 맹세하며 더 이상 작가/아티스트가 아님"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도그마 95의 형식을 지배하는 순결의 서약은 누벨바그 영화 양식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누벨바그 세대들의 영화는 기승전결 식의 양식화된 구성에서 벗어나려 했고, 저항과 변화를 전제로 기존의 문화관습과 패러다임을 탈피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영화형식에 있어서도 현장감 넘치는 헨드헬드 촬영, 휴대용 동시녹음기의 사용, 자연광만으로 촬영가능한 고감도 필름의 사용과 줌렌즈의 사용등을 통해 누벨바그의 독특한 영화미학을 발전시켰으며, 현재성의 강조, 인터뷰의 사용, 뉴스릴 사용, 비전문 배우의 기용, 그리고 영화 속에 문학, 사상, 예술서 등의 직접인용, 자막 사용, 화면 밖 나레이터 등장으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보여주기도 했다. 누벨바그와 도그마 95는 영화 형식적으로는 차이가 있기 보단 오히려 유사한 부분이 많은 것이다. 도그마 집단은 누벨 바그의 어떤 부분을 비판하였던 것일까? 누벨바그와 도그마 95가 갈라서는 다름 아닌 지점은 작가에 대한 것이다.

1959년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등장하기 이전, 혹은 1952년 프랑수아 트뤼포가 <까이에 뒤 시네마>에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을 발표하기 이전 프랑스 영화는 "영화적으로 예술적"이지 못했다. 트뤼포의 표현에 의하면 기존의 프랑스영화는 문학적인 기질을 지닌 시나리오 작가들의 취향에 휘둘리고 있었으며, 누가 감독하더라도 그것은 시나리오 작가의 영화이지 감독의 영화가 아니었다. 이들의 영화는 고상한 듯 보이지만 시각적으로 진부한 '질의 전통'을 대변하는 것뿐이었다.

이런 문학적인 '질의 전통'의 영화가 된 이유는 다름 아닌 토키의 발명이었다. 사운드의 도입은 무성영화 시대 이후 아방가르드 영화들이 개발한 풍부한 시각적 표현력을 훼손시켰지만, 19세기 유럽의 리얼리즘 소설이 정교화한 이음매 없는 핍진성의 창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내러티브와 영화의 결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내러티브 영화의 우위는 유럽에서가 아니라 할리우드에서 먼저 활성화되었다. 유럽의 영화가 이 1차대전에 의해 정체되고 있을 무렵 미국은 내러티브 영화가 가진 대중 오락물로서의 유용성에 주목하였다. 1차대전 이후 미국영화의 산업적 우위와 사운드의 도입은 할리우드적 리얼리즘 영화의 우위를 가져왔고, 유럽의 모더니스트들에게 이미지의 예술로 비춰졌던 영화는 서사물로서의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세계영화 흐름이었던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 미국의 장르영화 등은 모두 19세기 유럽 리얼리즘 소설이 확립한 고전적 내러티브에 따라 시공간을 조직하고 있었다.

2차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럽의 영화산업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고, 할리우드 영화산업의 세계지배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누벨바그 세대들이 영화를 보았던 40년대 후반의 유럽은 미국영화가 넘쳐 났고,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영화는 미국의 소비 자본주의의 천박한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영화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영화가 기존 예술의 예술을 극복하고 새로운 예술이 될 수 있으리라는 프랑스 아방가르드 전통과 독일 신칸트 학파의 기대가 무너져 버린 상황에서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주장은,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작가를 설정하는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예술개념에 기대게 된다. 1948년 프랑스의 영화감독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은 <카메라 만년필>이라는 글에서 '영화의 스타일은 영화의 소재와 그 소재를 수용하는 영화작가의 주관적인 태도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며 영화작가는 소설가와 같은 기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영화작가에게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것을 요구하는 이 주장은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글에 의해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트뤼포를 위시한 <까이에 뒤 시네마>의 영화동료들은 '작가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작가주의자들은 작가의 개념을 미장센의 개념과 깊게 연결시킴으로써 발전시키는데, 그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젊은 작가주의자들이 30∼4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하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2차대전 당시 상영금지되었던 미국영화들이 갑자기 프랑스 극장을 점령하게 되고, 어린 시절을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 존 포드 등이 만든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지낸 그들은 단순한 오락물로 취급받던 이들의 영화에서 스튜디오 시스템 아래 만들어진 이들 영화의 내용이 아닌, 공통적인 스타일에서 어떤 창조적 정신을 발견했다. 작가주의자들은 영화의 감독에게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고 했고, 내용이 아닌 신의 구성/미장센에 드러나는 스타일에서 감독의 개성을 찾아내려 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이런 노력은 대중 오락물로 전락한 영화에 천재의 창조성이란 낭만주의 작가개념을 부여하여 영화에 아우라의 광채를 덧씌움으로써 영화를 예술로 승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트뤼포에게 작가는 그 자신만의 특정한 개성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떤 세계관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작가는 전체적으로 부패한 사회 내부에서 인간적인 가치의 낙관적인 측면을 표현할 줄 안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 속의 인물들은 그 자신의 정신적인 노력으로 세속적인 상태를 벗어난다. 트뤼포는 작가주의야 말로 영원한 진리로의 회귀이고 낭만주의라는 프랑스의 고전적인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예술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념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 트뤼포의 작가개념은 예술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의문시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기존의 예술개념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던 누벨바그 이전 아방가르드의 에술관에 비해서도 퇴행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작가주의는 미국의 평론가 앤드류 새리스에 의해 좋은 영화, 혹은 위대한 감독이 만든 정전과 그렇지 않은 것들로 영화를 재단하는 하나의 이론체계로 격상되었다. 새리스는 미국영화만을 '유일하게 좋은 영화'로 끌어올린다는 민족주의적이고 쇼비니즘적 목적으로 작가주의를 이용했고, 급기야 주류에 대한 문제제기로 등장했던 작가주의는 또 하나의 주류가 되어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를 '작가'라는 신비한 기준으로 수직계열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작가주의는 어떤 하나의 감독을 '작가'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평가자의 주관적 기호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뛰어난 작가의 그저 그런 작품을 평범한 감독의 뛰어난 영화보다 높이 평가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포스트 구조주의와 같은 반인간주의적인 이론이 등장하여 '주체로서의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자 작가의 주체적 창조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작가주의는 그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작가주의가 이론적으로 유효한 비평방법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작가주의자들이 근대 예술 개념의 본질을 짚어내었기 때문이었다. 예술의 개념이 불안정하고, 보편적 예술의 기준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예술을 예술로 재생산하는 것은 자율적 체계로서 근대 예술 제도이다. 근대적 예술제도는 예술의 기준으로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작가를 설정하게 되는데, 이 제도 속에서 작품이면에 존재하는 역사성이나 현실성은 지워져버리고 위대한 작가와 그의 작품만이 초역사적으로 남게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이며, 근대 예술 제도는 작가에게 종교적인 후광을 가진 성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작가주의 미학 속에서 영화는,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가 근대 예술의 특징인 아우라가 부재하고 그로 인해 교양계층의 엘리트를 위한 예술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중의 예술로서 근대 예술의 신비적 측면을 탈신비화할 것'이라는 기대와, 레닌이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영화가 부르주아의 예술과는 다른, 새롭게 지배계급이 된 프롤레탈리아트의 예술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져버리며, 다시 부르주아의 예술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초창기에는 미래의 예술로서 영화에 대한 다양한 기대가 존재했다. 근대 예술 개념에 도전하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영화 매체에서 낡고 속물화된 기존 예술을 대체할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보았다. 러시아 혁명 직후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를 본 레닌은 영화에서 부르주아 예술을 대신한 프롤레탈리아트 예술의 가능성을 보았고, 발터 벤야민의 주장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아방가르드는 기존 예술의 본질을 구성하는 형식과 개념을 의심하고 해체한다. 즉 아방가르드는 근대 예술 제도가 확립해 놓은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예술을 의심하고 새로운 예술 수단과 새로운 표현 형식을 찾아내오 기존 예술의 관념을 내파하려 한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은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영화가 가진 혁신적 가능성에 주목하였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독일의 표현주의, 그리고 20년대 소비에트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이후 소비에트 영화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체되고, 앞서 언급했듯 토키의 발명과 불안한 정치적 상황은 아방가르드 운동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아방가르드는 작가주의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영화가 만들어진지 100년인 1995년, 도그마 95는 다시 아방가르드를 불러 세운다. 부르주아가 되어버린 누벨바그 영화 미학과 테크놀로지의 태풍이 몰아치는 오늘날 영화들 앞에서, 그들은 화장술을 벗어버리고 환상이 아닌 영화를 만들 것을 서약한다. 도그마 95와 함께 발표된 순결의 서약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규칙들로 영화 원형의 모습들을 복원하려 한다. 도그마 95는 영화의 근대 예술적 지위를 해체하는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무장해 영화의 2세기에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열어 젖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