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洪尙秀 SangSoo Hong
서울 출신, 1961년생.
3 기타 등등
여담인데 참 후덕하게 생기셨다. 사진을 보면 덕후?! 이런 반응이 나올 정도. 안노 히데아키하고 닮았다. 나이도 비슷.
소송방지를 위해 길게는 얘기 못하겠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의 행태는 감독 자신의 반영이라는 루머가 있다.[13] 또한 자신의 영화가 칸느 영화제 경쟁 부문에 여러 번 올랐음에도 상은 하나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이 많다는 얘기도 있다. 콩상수? 2010년 하하하가 칸느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으면서 그 불만은 풀어질듯.
다소 주류 영화계와 거리를 두는 인상이지만, 의외로 잘 나가는 영화 감독들과 친한 사이라고 한다. 배우들 사이에서도 선호도가 높아서 유명한 배우들이 노개런티로 출연하길 자청한다고 한다. 또 술을 굉장히 좋아해 영화에 등장하는 술은 모두 진짜 술이다. 그래서 촬영하다가 배우가 술에 취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14][15]
원래부터 2년에 한 편 씩 낼 정도로 다작 감독이였는데 영상원 교수를 겸임하면서 영화화를 찍기 힘들어서 결국 교수를 그만두고, 2008년부터는 1년에 하나씩 작품을 내고 있다. 그리고 그 텀이 갈수록 줄어들어 2010년에는 무려 1년에 두 편 5월엔 하하하, 9월엔 옥희의 영화를 개봉하기에 이른다. 아마 전에 비해 홍상수 감독의 최근 영화가 조금이나마 더 대중성을 띄게 되었고 대부분의 배우들이 노개런티로 출연했기에 제작비가 많이 절감되어서인 듯 하다. 사실 카메라를 모두 디지털 화 하고 스테프를 10~5명 혹은 그 이하로(!!!) 줄이면서 그야말로 남들 뮤비 찍을 돈으로 장편영화를 만드는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다. 게다가 초기에 비해서 분명히 상업적으로 히트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옥희의 영화는 무려 사람들에게 돈을 벌어다줬다고(?) 한다.
대략 밤과 낮 이후로 관광 영화 되가고 있다! 하하하-통영, 첩첩산중-전주, 잘 알지도 못하면서-제천, 제주도, 밤과 낮-파리... 다만 영화를 보면 사실 그 지리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남녀가 만나서 자고 헤어지고 한다. 다만 여행이란 상황의 특수성을 감독이 좋아하지 싶다.
사실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오! 수정 때에는 정상적인 시나리오가 있었다고 한다. 그 뒤부터 시나리오를 사전에 준비하지 않고 당일에 써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준비가 없는 것은 아니며 트리트먼트 정도는 준비하고 찍었다고 한다. 그 준비량이 점점 없어져서 옥희의 영화에서는 거의 백지상태로 현장에 왔다고...
시나리오를 쓰지 않지만 치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로케이션이 되는 현장에 몇번이고 둘러보고, 배우와 잦은 대화를 나눈 뒤 그때의 인상들을 바로바로 시나리오에 반영한다고 한다.[16] 배우들이 홍상수 감독과 자주 작업하고 싶어하는 이유도 이런 방식이 배우에게 있어서 굉장히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인듯 하다. 촬영은 항상 시나리오내의 시간 순서대로 촬영하기로도 유명하다.[17] 그렇기 때문에 날씨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풀리면 풀리는 대로 영화에 반영한다. 그러니까 극장전의 눈내리는 씬은 기적에 가까운 씬.
작품과는 다르게 GV등에서는 말을 잘 안하는 편이다. GV에서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은 "글쎄요"와 "저는 그런거 모르고요." 정도. 재미있는 것은 관객들이 홍상수 감독이라는 이유로 굉장히 진지하고 철학적인 질문을 자주 던진다는 것. 거기에 대답하는 홍상수 감독을 보고 있으면 이건 거의 본인의 영화다.
많은 한국 영화감독들이 그렇듯이 사생활이 굉장히 알려지지 않아있다. 다른 감독들과의 차이점이라면 다른 감독들은 사생활에 아무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홍상수는 일상의 정제되지 않은 면(아무래도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절대 그리지 못할)을 탁월하게 묘사한다는 데에 당연히 관심이 집중될 만 하다. 굉장히 많은 루머가 떠도는 편이고 자신도 침묵과 미소(?)로 일관하는 편이라 그 카오스는 더더욱 커지고 있다. 여태까지 인터뷰를 통해 확인된 것은 중2때부터 음주를 즐겼고(...) 엘리트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가정이 있고(교수를 역임하는 이유라고 밝힌 바 있다), 어머니가 과거 전설적인 영화 제작자 전옥숙이라는 것이다.
4 필모그래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12 개봉 예정) (2012년 7월 현재 촬영 완료)
다른나라에서 (2012)
북촌방향 (2011)
옥희의 영화 (2010)
하하하 (2010)[18]
어떤 방문 - 첩첩산중 (2009)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09)
밤과 낮 (2008)
해변의 여인 (2006)
극장전 (2005)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2004)
생활의 발견 (2002)
오! 수정 (2000)
강원도의 힘 (1998)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
5 참고자료
<극장전> 극장에 도착하다 - 홍상수 인터뷰 ①
<극장전> 극장에 도착하다 - 홍상수 인터뷰 ②
인터뷰 홍상수 감독, 그의 추종자들을 만나다
인터뷰 분위기가 홍상수 작품스럽다6월1일 일곱 번째 특강, 홍상수 감독이 말하는 ‘홍상수 월드’에 영향을 준 인물들
말.2005.06. 극장전-정성일
theDVD 2005.07.한국영화의 작가주의-정성일
오!수정 키노 인터뷰
티티엘 반복 속의 차이 -정성일
말2002.04 생활의 발견 -정성일
서브 1998.04.강원도의 힘 -정성일
문화예술. 1998.05 강원도의 힘-정성일
뉴스플러스 1998 강원도의 힘-정성일
말.1998 강원도의 힘-정성일
미디어 오늘 1996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정성일
포스코신문 1996 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정성일
[2] 이기우씨 인터뷰 기사링크(
![[http]](http://rigvedawiki.net/r1/imgs/http.png)
[3]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노개런티로 출연한 배우들의 그야말로 위엄 쩐다...고현정을 시작으로 김태우, 정유미, 문성근, 김상경, 유준상, 하정우, 문소리, 엄지원, 예지원, 김강우, 김규리, 윤여정 등 독립/예술 영화 진영에선 찾아보기 힘든 캐스팅이다.
[4] 프랑스의 유명 배우로, 경력이 굉장히 화려하다.
[5] 그러나 프랑스를 제외하고 다른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타거나 수상 후보에 오른 적이 많으며, 프랑스 이외의 지역에서 인기가 별로 없다고 그것이 영화의 완성도가 낮다거나 홍상수 감독의 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실력 하나 만큼은 국내 감독 중 다섯 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특히 씨네21이 선정하는 올해의 감독에도 여러 번 선정됐다.
[6] 최근에는 홍상수 감독을 포함 5명을 넘지 않는다.
[7] 재미있는건 이렇게 스태프와 제작비를 줄인 이유는 경제적 이유일지 모르지만 심지어 예술적으로도 이익이 되었다. 스태프가 적고 투자비도 적다보니 더욱더 감독이 자신의 의도대로 영화를 지도할 수 있게 되었다. 자잘한 의견교환, 조율도 블록버스터에 비해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된다고 한다.
[8] 최근 작품에선 이러한 법칙이 미약하지만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렇지만 기본적인 틀은 비슷하다...
[9] 예술 계열의 교수일 때도 물론 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남자주인공인 유지태는 대학의 미술 강사였다.
[10] 단 '오! 수정'은 같은 남녀가 똑같은 시간축을 지나되 미묘하게 행동이 달라지는 식으로 변주되었다.
[11] 여기에는 어폐가 있는데, 죽음을 생각하거나 시도하는 사람은 무수히 많지만 사실 실제로 죽음을 맞이하는 캐릭터는 첫번째 작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말고는 손에 꼽는다. 감독 자신이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며 특별한 이유 없이 캐릭터가 죽는것에 부정적인 표현을 썼다.
[12] 다만 에릭 로메르와 홍상수의 동일한 관계를 단순히 내러티브와 설정으로 한정하고 있다는 평도 있다. 에릭 로메르는 구조보다는 묘사에 치중한 작가이지만, 홍상수는 훨씬 더 구조에 공을 들이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13] 실제로 시네 21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에 많이 들어간다고 이야기를 하긴 했다.
[14] 옥희의 영화에 등장하는 패트병소주는 진짜 소주다. 원래 술집 한곳을 잡아 촬영을 하려고 했지만 여건이 안되, 진구의 가방에 소주를 넣어다니는 걸로 설정했다. 진구 역을 맡은 이선균은 촬영 내내 소주를 홀짝홀짝 까며 좋아했다고. 그리고 오! 수정,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에서 배우들이 펼지는 취중 연기는 실제상황이다. 특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엄지원씨는 술에 취해 구토하는 장면에서 괴로웠다고 회고했다.
[15] 하하하 에서는 유준상이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 술에 잔뜩 취해서 큰아버지댁에서 꼬장을 피우다 쓰러져 자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로 술에 취해서 한 연기다. 한마디로 촬영하다 진짜로 잤다. 그 장면이 맘에 안든 홍상수 감독이 여러번 테이크를 갔지만 자고 일어나서 점점 술이 깨는 바람에 결국 제일 처음 테이크를 사용했다고 한다.
[16] 유준상의 엉까지마가 영화에 나온 이유. 하하하에서 유준상이 다리를 다치는 것도 원래는 없는 설정. 진짜로 다치면서 병원씬이 생겼다.
[17] 대개 영화는 로케이션과 배우의 사정에 따라서 왔다갔다 하면서 촬영을 한다.
[18]유준상씨의 인터뷰가 올라와 있다.(
![[http]](http://rigvedawiki.net/r1/imgs/http.png)
홍상수 감독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남정욱의 시네에로티카] 변두리 인생 Sex를 빼면 뭐가 남을까
홍상수 감독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과거의 한 여자를 찾아가는 두 남자의 이틀간 이야기
성현아 눈부신 외출 시선
연기하는 친구가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오디션을 봤다. 대뜸 묻는 말이 "섹스 좋아하쇼?" 하길래 "좋아하긴 합니다만…" 했는데 그 뒤로 연락이 없었다.
나중에 필자와 앉아 패인을 분석해보니 답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미지근한 대답이 아니라 "전혀 좋아하지 않소" 아니면 "그냥 환장합니다"의 둘 중 하나가 정답이었다는 생각이다. 물론 가능성은 후자다.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에서는 섹스가 중요한 코드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그리고 친구가 맡을 뻔했던 배역은 유지태와 김태우가 차고 앉았다. 친구는 분루를 삼켰지만 어쩌랴 정보가 부족했던 것을.
본인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야'하다. 비속어를 동원해서 좀 더 밀착 묘사하자면 '야리꾸리'하다.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다음 작품이었던 <강원도의 힘>에서는 양념 정도로 등장하지만 이후 작품들인 <오! 수정>과 <생활의 발견>에서는 섹스가 전면으로 부상한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달려와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지만 자기 코드를 제대로 발견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야함은 세련된 에로티시즘과는 거리가 멀다. 생긴 것부터 '강북 룸펜(lumpen)'의 이미지인 그는 저잣거리 잡놈, 잡년들의 싸구려 에로티시즘을 실감나게 잡아낸다. 더 살아봐야 별 뾰족한 수 없는 허접한 등장 인물들이 술의 힘을 빌어 '교미' 수준으로 얽힌다. 남녀상열지사가 벌어지는 공간도 호텔이 아니라 대부분 여관인데, 그나마 장급도 아닌 듯 이불은 꼬질꼬질하고 창가에 어른거리는 근처 유흥업소의 네온은 신산하기 짝이 없는 변두리 삶 그 자체다.
등장 인물들이 섹스를 하면서 내뱉는 대사도 하나같이 삼삼하다. 절대로 '영화체'가 아니라 '생활 언어' 일색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녀 혹은 그와 섹스하면서 주고받는 대사는 얼마나 유치하고 한심한가. 어쩌면 이번 영화에서는 '×지'나 '×지'같은 날단어가 튀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본질적으로 '떡영화'(섹스 영화의 질 낮은 표현) 감독인 홍상수가 3류로 떠밀리지 않은 이유는 섹스를 은폐하는 교묘한 전술 덕분이다. 아무리 질탕한 섹스 장면에서도 관객들은 에로틱한 화면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옷은 벗었지만 삶의 지겨운 무게는 그대로인 등장 인물들이 관객의 몰입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섹스'를 보고 있으면서도 '인생'을 보고 있다는 착시를 안겨주는 이 전술에는 어떤 박수도 아깝지 않겠다.
그러나 이 '야비한' 전략이 홍상수 감독이 미리부터 마련해 둔 잔머리라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뻔뻔하고 애초부터 돌려 말하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다. 세상을, 인생을, 섹스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우연찮게 보호막의 역할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두 남자가 낮술의 힘을 빌려 과거의 한 여자를 찾아가는 48시간 동안의 이야기라고 한다. 남자야 누가 나오든 상관없지만 과거의 여자역을 성현아가 맡았다고 하여 안테나가 바짝 선다. 감독도 노출에 '자기 검열'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배우들도 가장 헌신적으로 벗어준다는 소문이니 확실하게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만은 그의 '전술'에 휘말리지 않고 '찐한 것'에 몰입할 각오다.
홍상수 선생, 총체적 발기불능 상태인 한국 사회에 화끈하게 불을 질러라.
백상시네마 이사.소설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홍상수식 영화구조 탐문하다
“호기심만이 진정한 진정성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영화예술> <세계 영화사> <영화스타일의 역사> 등 영화 연구 입문서를 비롯한 다양한 저서를 내놓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 교수가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은 <씨네21>은 모종의 ‘공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보드웰 교수와 홍상수 감독의 만남을 주선하는 일이었다. 영화의 언어구조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온 ‘구조주의자’ 보드웰 교수가 남달리 눈여겨본 영화인 목록에 홍상수 감독이 자리해 있다는 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는 홍상수 감독의 내러티브와 비주얼이 보여주는 미학적 특성이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미니멀리즘 유파에 속해 있는 동시에 그 이상의 개성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계 영화사>의 개정판과 그의 새로운 저서에 이러한 연구내용을 담아낸 바 있다. 지난 9월 공항 검색 강화로 비행기를 놓쳐 USC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불참한 보드웰 교수가 발표하려던 주제 또한 “홍상수: 아시아의 미니멀리즘을 넘어서”였다. 세밀한 분석가로 이름난 세계적인 영화학자, 그로부터 ‘사랑의 메스’를 받은 감독은, 따라서 늦게나마 서로 만나야 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부산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 11월17일,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강연이 예정돼 있던 보드웰 교수, 그리고 뉴커런츠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은 홍상수 감독을 어렵사리 한자리에 모셨다. 마침 이들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고, 이 사실을 먼저 알았던 보드웰 교수가 자신의 새 저서 <세계 영화사> 개정판을 홍 감독 방에 선물로 남긴 뒤였다. 이에 홍상수 감독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긴 두권짜리 <화인열전>을 답례 선물로 준비해 들고 나타났다. 그는 보드웰 교수에게 자신이 특별히 좋아한다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펼쳐 보여주며, 영화의 영감, 그 원천에 대한 힌트를 흘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 시간 남짓 얼굴을 마주한 이들은 엄청난 속도와 밀도로, 영화 만들기와 영화 분석에 대한 속깊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편집자
아시안 미니멀리즘을 넘어서
보드웰: 어제 강연에서 나는 ‘아시안 미니멀리즘’을 이야기했다. 롱테이크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이뤄진 어떤 미학적 경향은 아시아영화에서 매우 보편화돼 있다.당신 영화의 미니멀리즘적인 특성으로 <오! 수정>의 무대화 방식을 예로 들어보면,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함께 앉아 술 마시는 장면이 있다.재훈이 자리를 뜬 다음 수정이 그 자리로 옮겨 앉고 나서, 옆에 있던 두 남녀가 화면의 전면에 자리잡게 되는 상황부터가 흥미롭다. 그 남자와 여자는 메인 캐릭터들의 메아리처럼 그들의 행동을 모방해 보이고 있다.영수가 수정에게 술 마시기를 강권하고 있을 때 앞에 앉은 여자가 코냑병을 기울인다.난 늘 궁금했다.이런 장면을 구상할 때 사전에 얼마나 계획하고 또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홍상수: 신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 중 몇개는 촬영 전에 이미 결정되고 나머지는 촬영 중에 현장에서 만들어진다.그리고 그렇게 의식적으로 선택된 요소와는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촬영 중에 만들어져 영화 속에서 어떤 일관성을 갖고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런 것들은 촬영 직후에 모니터링과 편집 중에 발견하게 되고,그때 그곳에 놔두느냐 아니면 버리느냐, 하는 선택의 과정을 거친다. 이런 무의식적으로 컨트롤되는 요소들이 신 안으로 들어와 자기 자리를 잡게 되는 과정은 언제나 내게 약간은 신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그것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우연보다 훨씬 많은 우연의 중첩과 깊은 저층에서 어떤 목적을 가진 힘이 요소들간의 연결을 의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현상이다. 어쩌면 이런 요소들이 의식적으로 집어넣는 요소들보다 내가 더 비밀스럽게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특히 배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런 종류의 요소들은 가장 가치있게 받아들여진다.
보드웰: 숏을 어떤 순서로 구성하는지도 궁금하다.배우들의 위치를 정한 뒤에 카메라 포지션을 정하는 것인가, 아님 카메라 포지션을 정한 다음에 배우들의 위치를 정하는 것인가.
홍상수: 카메라 포지션을 먼저 정하는 편이다.그런 다음에 연출부들이나 스탭들을 대역으로 해서 정확한 움직임을 결정한다.배우들은 다른 곳에서 리허설을 거의 마치고 마지막 순간에 카메라 앞으로 데리고 나온다.배우들이 카메라 앞에 섰을 때는 이 테이크가 단 한번의 테이크라는 느낌을 갖도록 최대한 배려하려고 한다.
보드웰: 그러려면 테이크를 많이 가진 않겠다.두세 테이크 정도.
홍상수: 일반적으로 서너번 정도의 테이크를 가고, 어떤 경우는 열번 넘게도 가는 것 같다.연기의 선도는 테이크가 갈수록 당연히 떨어진다.그러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다른 요소들, 꼭 타이밍이 맞아야만 맛이 나는 요소들, 연기의 신선도와 상관없는 이런 요소들 때문에 테이크가 많아지는 경우가 꽤 많다.
보드웰: 차이밍량이나 허우샤오시엔처럼 당신과 비슷한 감독들의 경우, 모두가 작은 디테일에 충실한 것 같다.이런 방식의 장점은 신을 리얼타임으로 전개해 나간다는 것인데, 그러고는 배우의 작은 제스처와 사물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이야기를 채워나간다.<강원도의 힘>의 금붕어 장면이나 서로 술을 따라주는 장면이 그렇다.당신은 캐릭터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디테일을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런 부분들은 아까 말한 리허설의 연장과도 같은 촬영 방식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인가.
홍상수: 영화 만들기의 전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작은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그것들이 계속 전체라는 구조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보드웰: 당신은 배우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촬영하는 경우가 많다.이런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배우들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세밀히 관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교육적이라고 생각한다.미국영화, 심지어 유럽영화를 둘러봐도, 그렇게 배우들이 자신을 드러내도록 기다려줄 만큼의 인내심이 엿보이는 예는 없다.
홍상수: 한신에 10가지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그중 적어도 3∼4가지는 모든 관객이 관람 중에 꼭 알아차려야 하는 요소일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이 누구냐, 그 한 관객의 그 순간의 상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도 그런 관객의 의식의 필터를 피해서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은 3∼4가지보다 많은 요소들이 다수의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드웰: 맞는 얘기다.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감독들은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중요한 포인트는 명시하는 동시에 일부는 이해하고 또 다른 일부는 그렇지 못할 작은 디테일들을 함께 배치한다.내가 당신의 영화나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서너번씩 반복해 보길 즐기는 이유는 처음 볼 때 모르던 것들이 다시 볼 때는 보이기 때문이다.나는 이것이 시야를 넓게 잡은 화면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숏 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내 단번에 볼 수 없는 요소들도 다시 보면 보이게 하는 그런 장치 말이다.
<생활의 발견>, 전작들과 같고 다른 점‥‥‥‥‥‥‥‥‥‥
보드웰: 당신의 영화는 많은 요소들로 꽉 차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매우 생략적이기도 하다.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부 보여주지 않으면서, 드라마틱 포인트를 넌지시 알려주는 식이다.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가 이런 갭을 채워주고 있다고 생각한다.최근의 아시아영화를 보면 미니멀리즘적 스타일로 접근하면서도 기본적인 것들을 채우지 않는다.당신 영화에서 보이는 것 같은 조밀함은 없다.
홍상수: 언뜻 보면 단순한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단순한 상황 속에 다른 종류의 요소들이 중첩되고, 그런 요소들이 시간상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가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영화의 형태였던 것 같다. 맨 처음 영화를 만들 때 첫 촬영날부터 이런 식의 형태가 마치 내 속에 오래 존재했던 것처럼 나의 모든 영화적 결정들을 지배해왔다.
보드웰: 영화학교 출신인 걸로 알고 있는데, 학교에서 콘티 그리는 법이나 스토리보드 작성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나.그리고 학교에서 만든 습작들은 어떤가. 장편영화와 유사한가.
홍상수: 학교에서 실험영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스토리보드 같은 건 만들어본 적이 없다. (웃음) 2편인가 장편을 만들고 나서, 학교 때 만든 습작들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장편에서 시도했던 거의 모든 것이 이미 그 단편들 속에 존재했다는 걸 알고 무척 놀랐다.
보드웰: 그 작품들을 DVD에 넣을 생각은 없는지.
홍상수: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다.(웃음)
보드웰: 한국에 돌아와서 장편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홍상수: 돌아왔을 때 나는 일단 생활을 위한 돈을 벌고 여유가 생기면 16mm 카메라를 사고, 그래서 최소한의 경비를 쓰는 단출한 독립적 형태로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다 4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때 갑자기 충무로 안이건 밖이건 힘들 테니 일단 충무로쪽부터 시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영화사를 찾아갔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터랙티브’하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관객은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요소들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게이머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런 효과는 다른 아시아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다.당신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모더니스트인 것 같다. 표면적인 장치들이 거대한 전체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기막히다. ”
보드웰: 매우 인상적인 데뷔였다.내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본 것이 96년 홍콩영화제에서였을 거다.그러니까 그뒤로 2년에 한편씩 작품을 만들어온 셈인데, 최근 <생활의 발견>을 보고 좀 놀랐다. 놀림당한 기분이랄까. (웃음) 이전 세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어떤 트릭 같은 것을 기대했던 것 같다.그런데 이 영화는 뭐랄까, 소설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홍상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 교차 시점이 동원된 지점은 호수에서 오리배 타면서 라이터 빌리던 남자와 골목길에서 다시 마주치는 장면 정도인 것 같다.나머지 부분에선 다중 시점을 동원하진 않았다.이전 세 작품에서 당신은 다중 시점을 동원했고 시점의 변화 형태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늘 궁금했는데, 당신은 왜 그런 방식에 관심을 갖는가.
홍상수: 내게는 어떤 상황이나 아주 구체적인 대사나 신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영화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의 과정이 뒤따랐다. 그건 보통의 형태나 논리로는 끼워넣어지지 않는 것들이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런 형태가 만들어진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그런 형태가 먼저 내 속에 존재해 있었고, 그런 형태가 그런 상황이나 대사나 신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생활의 발견>에서는 그전의 영화 속에서 구조가 하던 기능을 인물 행위 속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서, 그러니까 반복과 모방의 모티브를 통해서 나타내려고 했다.
보드웰: 요즘 아시아영화들은 지나치게 생략적이라 때론 그 스토리가 공허하게 느껴질 정도다. 드라마의 단계를 무시하고, 캐릭터의 백그라운드에 침묵하며, 개개의 에피소드가 자기충족적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내러티브의 역할이 적다는 것이다. 당신의 영화를 보면서 든 생각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터랙티브’하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게임처럼. (웃음) 관객은 스토리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주어진 요소들을 통해 ‘문제 해결’에 도전하는 게이머의 자세를 갖추게 된다. 그런 효과는 다른 아시아영화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다.당신이 이런 문제를 다루기에 가장 적절한 모더니스트인 것 같다. 표면적인 장치들이 거대한 전체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 둘 사이의 밸런스가 기막히다. 개개의 신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찾아내게 할 뿐 아니라, 신과 신 사이의 연결점도 생각하게 한다. 이런 식의 영화 만들기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매우 신선하다. 그런데 혹시 <생활의 발견>을 만들 때 관객이 당신의 전작들을 다 봤을 거라는 가정을 했나.
홍상수: 그런 가정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는다. 매번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 내게는 다른 종류의 동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아주 막연한 영화에 대한 느낌과 구체적인 형식에 대한 실험 욕구 같은 것이다. 인물 전반에 대한 느낌도 나이가 들수록 천천히 변해가는 것 같다. 전작보다 가벼운 느낌을 생각했던 것 같고, 좀전에 말한 구성의 기능을 모티브화한다는 것 정도가 처음에 있었던 것 같다.
보드웰: 당신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캐릭터들이 미디어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생활의 발견>의 남자 주인공은 영화배우이고, <오! 수정>의 인물들은 TV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나는 이것이 당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 영화 만들기의 자기 반영적 작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홍상수: 지금까지는,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공간이건 상황이건 직업이건 간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선택한 것 같다. 그것은 영화를 만들면서 해야 하는 수많은 결정들이 어떻게 잘못돼 갈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익숙함이 판단에 어떤 직감적 레퍼런스로 존재하길 바랐기 때문인 것 같다.
보드웰: 혹시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옛날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역사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은 없나.아님 다른 장르영화라도.
홍상수: 많은 다른 가능성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지금까지 내 안의 영화적 욕망은 두 가지로 나뉜다.한쪽 욕망은 지금까지 해온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서 어떤 정수에 도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머티리얼(material)이나 틀 속에 나를 집어넣고 어떤 것이 나올까를 보고 싶은 욕망이다.이 두 욕망은 계속해서 공존해왔다.
보드웰: 당신 세대 감독들의 작품을 보면, 다른 영화를 참조하거나 언급하는 경향들이 있다. 그런데 당신 영화는 그렇지 않다.시네필적인 요소나 분위기가 없다고 할까.
홍상수: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 중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내가 대가들로부터 따라하고 싶고 실제로 배웠으면 하는 것은 그들의 밸런스 감각이고, 어떤 최선의 의미의 진정성이고, 자신의 삶과 영화, 그리고 영화 작업의 현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대가의 영화에서 어느 부분을 선호하게 되는 건, 거기서 바로 그런 능력을 확인했거나 아니면 내 속에 이미 있는 어떤 경향을 표현해내는 훌륭한 예가 되었기 때문인데, 그런 선호가 나를 틀로서 기억으로서 억압하게 하지는 않았다.
보드웰: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파탈>을 보면, 자신의 영화를 비롯한 다른 영화에 대한 인용으로 가득하다.흥미롭긴 하지만, 섞어놓기 게임 같다고나 할까. 다른 영화를 인용하지만 정작 자기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이, 이젠 지겹다.당신이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홍상수식 영화구조와 보드웰식 영화 분석 ‥‥‥‥‥‥‥‥‥‥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영화 중 그대로 따라하고 싶은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내가 대가들로부터 따라하고 싶고 실제로 배웠으면 하는 것은 그들의 밸런스 감각이고, 어떤 최선의 의미의 진정성이고, 자신의 삶과 영화, 그리고 영화 작업의 현실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 같다.”
홍상수: 내 영화 속의 여러 요소 중 특히 집중하는 요소들이 있고, 다른 요소들은 따라오게만 하는 식인데, 그런 다른 요소들이 어떤 때는 집중해온 요소들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그런 변화가 일어날 때 가장 큰 만족감을 느낀다.나는 모르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 같고, 호기심만이 진정한 진정성의 근거라고 생각한다.나는 영화작업의 과정에서 많은 것을 모른 채 시작하고 미리 정해두지 않는다.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보드웰: 사람들은 일정 부분은 의식적으로, 또 일정 부분은 직관을 통해 영화를 만든다.계획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고, 이들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이런 것들이 결국엔 영화‘구조’라는 결과물로 나타난다.무엇이 계획된 바고 무엇이 우연한 결과인지 정확히 가를 순 없겠지만, 내가 영화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의 패턴으로서 관객에게 매우 강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홍상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건 그건 결국 나의 선택인 것이다.그것이 계획을 통해서 일어났건 발견을 통해서 일어났건.그리고 그런 두 종류의 선택이 내 영화의 두 동력을 이루는 것 같다.
보드웰: 영화를 컨트롤하는 일은 꽤 다층적이다.이거냐 아니냐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을 끊임없이 마주치게 된다.그 선택의 결과가 풍부한 구조로 형상화되고 분석할 수 있는 것이 된다.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다고 해도, 우연히 얻은 효과라고 해도, 어쨌든 자의에 의해 선택됐고 영화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홍상수: 어떤 영화감독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내가 영화를 만들기 전에 모든 걸 계획하고 준비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더이상 영화를 만들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다.
보드웰: 흥미로운 생각이다. 히치콕은 스크립트와 스토리보드를 준비하는 것이 한편의 영화에 대한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멍청한 배우들이 대사를 버벅거리고 카메라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촬영 현장이 지겨워진다고 말하곤 했다.그는 완벽한 통제를 원했고 그런 욕망을 과장한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당신 생각에 동의한다.많은 영화감독들이 영화 만드는 과정을 ‘계획’은 물론 ‘발견’에도 비유한다.
홍상수: 그 두 단어를 좋아한다.나는 영화 만들기의 모든 단계에서 ‘과정’을 믿고, ‘발견’을 믿는다.
시점, 그리고 기억에 관하여‥‥‥‥‥‥‥‥‥‥
보드웰: <오! 수정>을 흑백으로 찍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홍상수: 무엇보다 내가 흑백 시절의 고전영화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꼭 한번은 흑백을 찍고 싶었고, 촬영 시간대인 겨울과 흑백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또 다른 이유는 흑백이라는, 컬러보다 조금 더 단순한 자극체 속에서 영화 속에서 필요로 하는 작은 디테일간의 비교가 좀더 쉽게 이루어졌으면 했다.
보드웰: 당신의 영화를 보면 매번 전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는 네 사람의 시점을 서로 다르게 교차시키고 있고, <강원도의 힘>에서는 두 사람의 시점으로 전개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는 점에서 좀더 복잡한 시도를 하고 있다.<오! 수정>은 또 다르다. 두 사람이 겪은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르게 표현해낸 것이다.한 버전은 마일드하게 또 다른 버전은 터프하게 담아냈는데, 관객은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진다.양립 불가능한 신을 통해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 저의는 무엇이었나.
홍상수: 그런 혼란을 통해서 관객을 매혹시키는 동시에 그 혼란이 바로 영화가 중심으로 삼은 질문을 관객에게 체험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드웰: 경이로운 시도라고 생각한다.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혹시 릴을 잘못 끼운 건 아닌지, 아까 제대로 못 본 것인지, 못 볼 걸 본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둘 중 어느 것이 맞는 버전이라고 단정하지 않은 것 또한 신선한 시도였다.40년대 미국영화를 보면 이른바 착각을 유도하는 플래시백이 유행했었다.플래시백을 두어번 동원하는데, 대개 나중 버전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장치였다.유명한 예로 <크로스 파이어>를 들 수 있다.살인 용의자의 증언에 따라 상황이 재연되고 나서 같은 상황을 다른 시점으로 다시 보여주는데, 이전과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라쇼몽>도 마찬가지다.플래시백이 동원될 때마다 이전 버전을 수정하는 경향이 있고, 결국엔 마지막 버전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곤 하는 것이다.당신의 영화에선 플래시백이 아니라 시점의 교차라고 해야 맞겠지만 말이다.
홍상수: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 상황에 따라그 사람의 욕망에 따라 변질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따라서 의문을 남기는 것이어야지, 무엇이 ‘진실’인지를 판정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드웰: <롤라 런>의 경우는 서로 다른 미래 상황들을 나열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SF적이라고 볼 수 있다.그 작품에선 앞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버전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에피소드간의 상관관계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반면 당신의 영화는 두 상황이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매우 모호한 느낌을 준다.그런 의미에서 매우 소설적이라고 느껴지는데, 혹시 문학 작품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나.
홍상수: 영화만큼이나 문학과 미술 작품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는다.문학이나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많이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영원한 연구 대상, 그의 미래의 영화
보드웰: 최근에 롱테이크를 즐겨 쓰고 화면의 심도를 중요시하는 감독들에 대한 연구서를 집필했다.루이 푀이야드, 미조구치 겐지, 테오 앙겔로풀로스, 허우샤오시엔 등이 주된 연구 대상이다.당신도 해당되는데, 첫 번째 챕터에서 <오! 수정>의 화면 구성을 분석했고, 마지막 챕터에서 <생활의 발견>에 대해 썼다.다른 유럽 감독들과 비교해 보이기도 했다. 오타르 요셀리아니(<월요일 아침>) 같은 감독.요셀리아니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건 유감이다.그 역시 롱테이크를 좋아하고 독특한 코미디를 구사한다.캐릭터도 당신 맘에 들 거다.만날 술 마시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웃음)사회의 낙오자들이랄까.그를 비롯한 몇몇 유럽 감독들을 당신과 비교해봤는데, 모두 느리고 사려 깊고 심미적인 영화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이 저서는 말하자면, 최근의 영화들이 무작정 컷 수를 늘려가고 있는 데 대한 저항인 셈이다. 당신도 당분간은 갑자기 컷 수를 엄청나게 늘린다든지 하는 변화는 시도하지 않길 바란다. (웃음) 당신의 영화를 언급할 수 있어서 기뻤다.특히 나는 <오! 수정>의 먹는 신을 언급했는데, 당신 영화엔 특히 먹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그것은 다른 아시아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다.허우샤오시엔도 그렇고, 홍콩영화를 봐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지만, 감독 개인의 스타일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미난 것은 기타노 다케시의 예다.그의 영화엔 먹고 마시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그건 그가 그런 장면들을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란다.<하나비>에서 사내의 눈에 젓가락을 꽂는 장면은, 먹고 마시는 장면에 대한 혐오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웃음)세상엔 두 종류의 감독이 있는 것 같다.오즈나 브레송처럼 비슷한 걸 시도하면서 그 안에서 정련의 과정을 거치는 쪽과 오시마 나기사처럼 매번 전혀 다른 작품을 내놓는 쪽.당신은 어느 쪽을 지향한다고 생각하나.
홍상수: 막연하게 느끼는 것은 한시적으로는 당신이 말한 오즈 식의 파고듦과 정련을 해나갈 것 같다.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만든 틀이라고 생각드는 것이 억압적으로 작용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그런 경우를 사실 많이 상상하곤 한다.서서히, 그렇지만 같은 강도를 가진 움직임으로 변해나가고 싶다.
보드웰: 오즈는 닫힌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영화를 다듬었지만, 서서히 벗어나는 것 역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아주 좋은 생각이다.
진행 김혜리 vermeer@hani.co.kr·정리 박은영 cinepark@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오,수정>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 영화다
2000.04.27 김영진 편집위원
`영화감독은 일생에 단 한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장 르느와르의 경구가 홍상수의 영화만큼 들어맞는 것은 없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신작 <오! 수정>에 이르기까지 홍상수 영화의 알맹이는 똑같다
`영화감독은 일생에 단 한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장 르느와르의 경구가 홍상수의 영화만큼 들어맞는 것은 없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신작 <오! 수정>에 이르기까지 홍상수 영화의 알맹이는 똑같다. 서투르고 음흉하며 위선적인 남자와 여자가 만나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여러 사람의 시점으로 동일한 상황을 변주했고 <강원도의 힘>이 1, 2부로 나누어 남녀의 시점에 따라 에피소드를 나눴다면 <오! 수정>은 남녀의 기억에 따라 상황을 따라간다. 영화가 모두 5부의 구성으로 나뉘어 되풀이되고 변주되는 구성은 이제까지의 홍상수 영화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일상의 세부를 여러 겹의 시점으로 포개놓는 것은 영화의 재현이 얼마나 삶과 밀착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스타일이다. 이번에 홍상수는 등장인물의 기억이라는 필터에 의지해 영화의 재현 개념 뿐만 아니라 조금 더 과격하게 자기 스타일을 비틀었다. 여러 번 되풀이되는 동일 상황은 남녀의 기억에 따라 세부가 매우 다르다. 심지어 공간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홍상수는 자기 편의에 따라 삶의 기억을 변주하는 인간을 멀리서 관찰하고 있다. 이 영화의 전체 커트 수는 150개 남짓이다.
조금 지겹지 않은가. 사실 기억을 핑계로 대고 등장인물의 시점에 따라 이야기를 마음대로 비틀고 영화 속에서 말해지지 않은 간극들을 관객들로 하여금 짜 맞추게 하는 홍상수식 퍼즐 맞추기는 이제 조금 식상하다. 그러나 <오! 수정>은 홍상수의 영화가 훨씬 더 원숙해졌음을 알린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에서 간헐적으로 드러났던 그의 유머감각이 전면에 나온다. `오! 수정’이란 제목과 `처녀, 그녀의 남자에게 옷을 벗다'란 영문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모든 상황은 희극적으로 변주된다. 이를테면 잠자리의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실수를 범한 남자가 화가 난 여자에게 거꾸로 항의하는 대사가 가관이다. “수정 씨 이름 부른 거지 그 사람 이름 부른 게 아니잖아요.” <오! 수정>에는 이런 식의 부조리한 유머를 만끽하게 하는 대사가 규칙적인 호흡으로 툭툭 새어 나오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을 조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웃겼는데도 뜻밖에 여운으로 남는 것은 모멸감이다. 성적 불안감, 망상증, 환상에 갇힌 남성의 자아와 그런 남자를 요리하기 위해 처녀인 척 하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서 허우적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 결코 유쾌한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 수정>은 전작들에 비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등장인물의 기억 조각을 따라 이야기를 재조립하면 이들의 넝마 같은 진심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홍상수는 그것이 곧 우리 모습이라고 어느 때보다 여유 있게 의표를 찌른다. 자칫 냉소적이고 독단적으로 비치는 홍상수 영화는 자질구레하고 아름답지 못한 일을 소재로 코미디를 연출하면서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났다. 정보석, 이은주, 문성근의 연기는 무리가 없어서 관객들에게 등장인물이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납득시킨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런 웃음이 굴러 나온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정보석이 연기하는 재훈은 수정에게 전화를 걸어 제주도에서 첫 번째 정사를 치르는 대신에 우이동의 아는 호텔에서 거사를 치르자고 전화로 제안한다. 채근하는 재훈에게 수정은 “누가 제주도에 환장한 줄 알아요?”라고 쏘아붙인다. 그때 화면 밖에서는 수정의 회사 직원들이 마당에서 배드민턴 치는 소리가 들린다. 인물의 불안한 내면과 욕망과 평범한 일상 정경을 홍상수는 무심하면서도 잔인하게 늘어놓는다. 얼음이 언 호수 가에서 낭만적인 데이트를 즐기는 수정과 재훈은 얼음 바닥 밑에 있는 뽀뽀 껌 포장지를 발견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입맞춤을 나눈다. 이 감상적인 순간이 지나면 다음 장면에서 재훈은 호텔 방에서 수정의 젖가슴을 세차게 빨다가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산통을 깬다. <오! 수정>의 유머는 몸서리쳐질 만큼 냉혹하다. 영화 중반에 수정이 타고 가다 산중턱에 멈춘 고장난 케이블카처럼, 이 영화에 그려진 인생이란 지리멸렬하고 잠깐 행복하고 근본적으로는 잔인한 것이다. 등장인물에게서 자기 거울을 본 관객이 모욕감을 느껴도 하는 수 없다.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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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는 <오! 수정>의 잔인한 신이다
2000.05.20 김봉석(영화 평론가)
아주 특별한, 정말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멋진 인생'을 제쳐놓는다면, 우리 모두의 인생이란 의심의 여지없이 '3류'다. 홍상수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극단적인 칭찬 아니면 진한 불쾌함을 꺼내놓는 것은
아주 특별한, 정말 극소수에게만 허락된 '멋진 인생'을 제쳐놓는다면, 우리 모두의 인생이란 의심의 여지없이 '3류'다. 홍상수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극단적인 칭찬 아니면 진한 불쾌함을 꺼내놓는 것은, 그런 이유다. 홍상수의 영화는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자신도 삼류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굳이 그것을 직면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서, 웃으면서, 화를 내면서 관객은 자신의 얼굴을 본다. 홍상수는 결코 따뜻하게 그들을 감싸지도 않는다. 자, 현실은 이렇지요, 라고 친절한 듯이 펼쳐 보일 뿐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공간, 누구나 알고 있는 상황, 누구나 알고 있는 결말들이 그려진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가, 장막의 뒤에 가려있던 것들이다. 의도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급적 다른 이들이 보지 말아줬으면, 또는 보고도 못 본 척 해줬으면 하는 것들만을, 홍상수는 '비열하게' 끄집어낸다.
홍상수 영화의 '키워드'가 된 듯한 '공간'의 개념은 <오! 수정>에서도 독특하게 작용한다. <강원도의 힘>에서 강원도와 인사동이라는 공간은, 왕가위의 <중경삼림>이나 <동사서독>에서 드러나는 공간의 의미 이상으로 관객에게 파고 들었다. 일상적으로 경유하고 머무르는 낯익은 공간에 인물들을 몰아넣고, 홍상수는 집요하게, 잔인하게 묻고 또 묻는다. 당신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이냐고. 인사동이란 삶의 더께가 수북히 쌓인 낡은 공간에서 술을 마시고 간통을 하고, 휴양지인 강원도에서는 긴장을 풀며 새로운 무엇인가를 모색하려 그들은 방황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통곡을 하는 것 말고는 탈출구가 없다.
<오! 수정>은 공간을 탈색시킨다. 흑백영화는 인물의 영화다. 공간은 배경으로 머무르고, 추상화된 공간 속에서 우리의 3류 주인공들이 배회한다. 어디도 마찬가지다. 재훈의 으리으리한 저택도, 침대 하나를 놓으면 꽉 차는 수정의 비좁은 방도, 똑같은 질감으로 다가온다. 그 회색의 공간을 그들이, 아니 우리들이 떠돌아다닌다. <오! 수정>은 전작들에 비해, 인물들에게 훨씬 많은 자유를 준다. 심지어 감정이입까지도 허용한다. 홍상수가 만들어놓은 통로를, 힘겹게 빠져 나오려 애쓰던(결국 누구도 도망치지 못했지만) 전작과 달리 <오! 수정>의 재훈과 수정은 스스로 움직이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오! 수정>의 5개 단락에서, 2부에 해당하는 '어쩌면 우연'과 '어쩌면 의도'는 각각 재훈과 수정의 동일한 사건의 서로 다른 기억이다. 재훈은 수정과의 만남이 우연, 그리고 '운명'이었다고 믿는다. 선배인 영수가 우연히 수정을 동반하여 화랑에 들렀고, 우연히 경복궁에서 수정을 다시 만났고, 우연에 우연이 겹쳐 재훈은 수정에게 연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정은 다르다. 처음 화랑에 갔을 때, 운전기사에게 점심하라고 지폐를 내주는 폼새나 사방에서 풍기는 '돈냄새'를 감지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재훈이 하루 한번은 들른다는 경복궁으로 간 것도 수정의 의도였다.
<오! 수정>은 그들의 우연과 의도를 따라다닌다. 그런데 이상하다. 각자의 에피소드에서, 그들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끼어있다. 예를 들어 영수와 운전기사의 다툼은 재훈이 결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재훈이 옛 애인과 방안에서 키스하는 것을 수정은 결코 알 수 없다. 2부와 4부는 재훈과 수정의 시점에서 보여진 다른 과거가 아니라 철저하게 전지적 시점에서 그려진 다른 '관점'이다. 세상일이 늘 그렇듯, 세상은 독자적으로 흘러간다. 재훈은 우연으로 믿었지만 의도가 개입했고, 수정의 의도대로 '연인'은 되었지만 '연인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마지막 단락의 제목처럼 대단히 씁쓸하다. 그건 결코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언사가 아니고, <오! 수정>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홍상수는 인물들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면서도, 결국 그들이 운명이라는 굴레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 아니 강조한다. 홍상수는 <오! 수정>의 잔인한 신이다.
그런데 <오! 수정>을 보고 난 후 시간이 흐를수록. 그 너저분한 인간들에게, 어쩐지 끌리는 느낌이 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정에게. 수정은 지금까지 홍상수가 그려낸 여성 중에서, 가장 풍부하고 가장 따듯한 캐릭터다. 가난한 집안의 수정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오빠는 정신이상이다. 오빠의 성욕을 풀어주기 위해, 수정은 손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해줘야한다. 아버지 같은, 지친 모습의 영수에게 끌리지만 헛된 꿈이란 것도 안다. 아내의 삼촌이 경영하는 프로덕션에서 PD로 일하는 영수는, 재능도 없고, 가족을 버릴 위인도 되지 못한다. 수정은 그 참담한 생활에서 도망치고 싶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재훈에게 접근했고,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지금까지 걸어왔던 만큼의 형극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한 고비를 넘어왔다고, 다음 고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수정에게 더욱 애착이 가는 것은, 그런 이유다. 그녀에겐 명백한 슬픔이 있고, 벗어나려는 의지가 있고,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갈 길을 안다. 이은주라는 배우의, 다소는 무표정한 듯한 그녀의 표정도 그런 애틋함을 더했을 것이다.
<오! 수정>은 홍상수 영화의 한 정점에 이른 영화다. 형식적으로, <오! 수정>은 많이 비틀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홍상수 영화의 인물 탐구는 경찰서의 '심문'과 비슷하다. 묻고, 또 묻고, 지칠 때까지 캐물어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것. 지금까지 그 답을 들으면서, 나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다음에는, 약간은 다른 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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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는 점점 더 이상한 방법으로 도를 닦고만 있다
2000.05.22 이지훈(영화평론가)
<오! 수정>을 보면서 나는 중학교 때 B자 비디오로 보았던 <그로잉 업>을 떠올렸다. 그 영화에선 이제 막 성에 눈뜨기 시작한 어린 남자애들이 나이 많은 여자의 코치를 받아가며 섹스를 배우고 있었다
<오! 수정>을 보면서 나는 중학교 때 B자 비디오로 보았던 <그로잉 업>을 떠올렸다. 그 영화에선 이제 막 성에 눈뜨기 시작한 어린 남자애들이 나이 많은 여자의 코치를 받아가며 섹스를 배우고 있었다. 그 무렵의 나 역시 여성지의 가짜 고백수기와 친구들이 빌려준 포르노 테잎을 통해 닥치는 대로 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그로잉 업>의 주인공들도 나도 한동안 유일한 관심사는 성이었으며, 그것은 마치 수많은 사이트로 들어가기 위한 포탈 게이트처럼 세상이라는 넓은 마당으로 진입하기 위한 단 하나의 통로였다. 그래, 아직 순수했지만 점점 성`맛'을 알아가던 소년들에게 섹스는 곧 세상 그 자체였다. 그런데 <오! 수정>을 보며 왜 그 영화가 떠오른 걸까.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눈으로 주인공을 응시하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감정이입이란 애당초 불가능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동일한 비중을 지닌 관찰 대상들로 비추어진다. 그것은 <오! 수정>에 등장하는 재훈과 수정에게도 그럭저럭은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기억과 그녀의 기억이 정확히 대칭을 이루며 대주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이, 우리는 또한 은근히 재훈의 입장에 동일화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재훈의 시점이 수정의 그것보다 먼저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재훈이 되었다가 점차 그를 둘러싼 세상을 파악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 재훈이야말로 <그로잉 업>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또한 그 무렵의 나이기도 하다. 남들보다 포르노를 뒤늦게서야 보고 친구들보다 늦은 나이에 자위를 배운 아이처럼 다소 늙은 모습이긴 하지만, 그는 이제 막 성에 눈뜨기 시작한 소년, 곧 모든 남성들이 거쳐온 성장기의 한 시점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어떻게 한 명의 순진하고 혈기 어린 소년이 성을 통해 세상의 실체 속으로 편입되어 가는가를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로잉 업>에서 소년들에게 짜릿한 섹스를 가르쳐주던 그 닳고닳은 여자는 누구인가? 그녀가 바로 수정이다.
재훈은 이해심도 많고 따뜻하고 순수하지만,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만 질러대고 아직 아버지와 같은 형의 보호 하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이다. 그런데 그런 재훈은 수정을 보자마자 곧장 불같은 욕망을 키워나간다. 그는 수정을 사랑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수정을 통해 여성의 육체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는 버젓이 수정과 함께 있는 공간에서 다른 여자의 입술을 탐하기도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재훈의 기억을 통해 한 명의 개인이 점점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여과 없이 지켜본다.
반면, 우리는 수정의 본모습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재훈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순진하고 내성적이며 부끄럼 많은 여자로 인식되지만, 수정의 기억으로 진입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음탕하고 전략적이며 현실적인 인물인가를 알게 된다. 그녀는 어린 소년에게 접근해 그에게 서서히 욕망의 맛을 익혀주고, 그 훈육의 과정을 독점함으로써 소년을 지배하는 늙은 창녀와도 같다. 수정은 자신의 몸을 줄 듯 안줄 듯 재훈을 애태우며,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를 높인다. 흡사 엄마와도 같은 절대적 지배력으로 재훈을 얼르고 달래며 `키우는' 수정. 그토록 원하던 삽입은 뒤로 한 채 연신 수정의 젖가슴만을 빨아대는 재훈의 모습은 엄마의 젖을 물고 칭얼대는 어린아이의 그것에 다름 아니다. 수정은 그렇게 노련한 창녀이자 절대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서 재훈을 가르친다.
그런데 사춘기의 소년들에게 성이 세상의 전부이듯이, 재훈에게도 수정은 세상의 모든 것이다. 비단 이 말은 성이 소년들에게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빗대는 것만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영화 <오! 수정>에서 재훈이 수정을 통해 성에 깨우쳐 가는 과정은 우리가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과 흡사하다. 열정이 온 몸을 싸고도는 청년 시절에,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자기를 내어주지 않는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잠시 주춤하면 다시 다가와 결코 헤어날 수 없게끔 만드는 그 세상이라는 놈. 조금 가졌다 싶으면 다시 우리를 비웃으며 넘어야 할 수많은 산을 보여주는 그 거대한 괴물. 그건 바로 수정이다.
재훈은 수정과의 삽입에 성공하고는 `세상의 왕'이 된 듯이 떠벌린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는 수정의 `버진'을 얻음으로써 그녀를 정복했다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수정이 세운 1단계의 전략에 불과하듯이, 어린 나이의 우리는 세상을 얻은 듯한 착각의 연속을 통해 결국 세상의 노예가 되어갈 뿐이다. 친절하게도 감독은 결국 재훈의 미래를 예시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용수의 모습이다. 그는 수정에, 혹은 세상에 이미 빠질 대로 빠졌다가 그 실체를 알고 방황하는 패배주의자이고, 결국 재훈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참으로 <오! 수정>은 절망적이다. 세상에 대한 거대한 무기력만이 스크린을 휘돈다. 도통 해결책은 없다. 피할 수 없는 것을 굳이 파헤쳐 우리를 한없이 위축시키는 홍상수. 그 신랄함과 냉소, 그리고 킬킬거리며 다 그렇게 사는 거야 라고 소주잔을 들이키는 얼음 같은 관조. 우리는 점점 성장하고 있지만 그것은 더 큰 함정으로의 진입이고, 홍상수는 점점 더 이상한 방법으로 도를 닦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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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의 고백과 홍상수의 냉소
<거짓말>의 장선우와 <오! 수정>의 홍상수,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나쁜 영화>와 <눈물>의 차이점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고백'과 '냉소'에 관한 지루한 길을 돌아가야만 한다. 이해해 주시길....
"그녀는 주민등록등본을 내보이며 '방배동 사는 철이 엄맙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이윽고 거나해진 우리는 룸에서 나와 좁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와중에 나는 내 파트너의 엉덩이춤에 밀려 무대 아래로 떨어졌다. 그 일로 그녀는 내게 훨씬 더 살갑게 대해줬고, 그것은 내가 사고를 치는 계기가 되었다. (중략) 어느새 얇고 착 달라붙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몸은 나에게 바짝 밀착해 있었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두 팔로 나를 껴안기도 했다. 내 목 근처에 와 닿은 그녀의 손에서는 돈 냄새가 났다. 가냘픈 몸매였지만 그녀의 살들은 내 몸에 닿자 어디론가 자꾸 밀려났고, 뼈와 뼈끼리만 부딪쳤다. 룸 구석에서 어이없게도 나는 아주 불편한 자세로.... (중략) 하지만 나는 맨정신으로 그 약속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는...."(인용1)
"하지만 돌아보면 정말 공정하지 않았던 순간도 참 많았고, 나의 불공정한 행위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나의 이데올로기와 나의 사랑을 믿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공정하다고는 생각했는데 말이다. (중략) 언제나 결단을 내릴 순간에 망설이게 되거나, 내 판단을 자주 못미더워 한다. (중략) 이런 물음들에 답하지 못하고 단지 황망한 눈망울이 박힌 주눅 든 얼굴로 다시 나를 쳐다볼 뿐이다."(인용2)
앞의 인용은 출처 불명의 사실이거나 허구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뒤의 인용은 이 잡지가 웹진으로 운영되던 당시에 썼던 내 칼럼의 일부다. 이 인용문들의 공통점은? 그것은 '고백'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고백했으며 그것은 진실했을까? 오히려 내가 음흉한 마음으로 밀착했기 때문에 무대에서 떨어진 것이 아닐까? 나는 과연 혼자 룸 구석에서 불편한 자세를 취했던가?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나는 과거에는 정말 공정하다고 생각했으며 지금은 정말 망설이는가, 그리고 황망한 눈망울이 박힌 주눅 든 얼굴로 다시 나를 쳐다볼 뿐인가? 다시 고백건대, 적어도 그 고백의 신빙성은 100%와는 그리 가깝지 않다. 이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는 민완 휴머니스트 오동진의 고백, '동정의 상실'을 애송하는 낭만적 인문주의자 김영진의 고백, '조선일보'와 싸우고 또 싸우는 언론운동가 강준만의 고백, 김영삼의 너절한 고백, 김대중의 노회한 고백, 성과 사랑에 관한 서갑숙의 느끼한 고백, 선거에 대비해 만들어진 정치인들의 고백, 재벌 총수들의 억울한 고백, 저서를 펴낸 저자들의 후일담 고백, 그리고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오르내리는 익명 또는 실명의 고백들.... 심지어 이제 문학평론가 백낙청 같은 사람도 '창작과비평'의 인터넷 게시판에서 가끔 고백을 한다(이 와중에 고백하는 줄도 모르고 고백한 순진한 문필가들과 수많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게 삼가 조의를 표하고 싶다). 만약 고백이 효력을 상실하면 이제 무엇을 내놓아야 할까? 그때 우리는 유서와 자살이라는 소극적인 방식이 아니라 영상매체를 통한 실연, 재연, 자해, 자살 등을 구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그때까지 고백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잡아다가 족치게 될지도 모른다(이 문맥으로만 한정하면, 백지영 비디오 파문 또한 '강제된 고백'의 일종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고백하는 우리 시대의 풍조가 지겹고, 고백하게끔 만드는 이 시대의 메커니즘이 두렵다.
고백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민중, 정의 등을 내세우며 하는 신변잡기형 고백은 대체로 '나는 원래 이런 놈이지만 너는 정말 잘못됐다'는 식의 고백이다. 이것은 고백자가 실생활에서 조금만 흠을 잡혀도 여지없이 무너지는 고백이다. 반면 웃고 즐기는 막무가내형 고백은 대체로 어리광을 떨며 공적인 비판을 감행하는 청유형 고백이다. 이 두 고백의 공통점은 은근히 권력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 외에도 사소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오히려 풍부한 울림을 만들고자 하는 사색형, 거짓말로 점철된 후안무치형, 그리고 자아도취형, 강제된 고백형 등 고백이라고 다 똑같은 고백은 아니다. 그중 가장 모순된 고백은 아마 '권력 추구형 고백'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고백함으로써 면죄를 받거나 진실한 자리에 섰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 고백은 자주 '수사'와 혼동된다. 수사에서 참과 거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 이 시대의 수사는 자신을 팔기 위한, 남을 설득하기 위한, 상대를 이기기 위한 전술인 경우도 참 많다. 나는 이 시대에 이루어지는 많은 고백이 수사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러한 고백 혹은 수사 속에는 '어떤 열정과 사랑'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고백자 또는 수사가들은 순진하기조차 하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우리 시대는 '고백'과 '냉소'라는 양 날개로 날아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얼치기로 배운 한국 지식인들이 퍼뜨린 속류 회의주의는 냉소를 10여 년 동안 번식시켜 왔으며 지금도 진행중이다. 냉소는 어떤 고백이라도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백 속에서 (이지적으로) 약점을 잡아 비아냥거리거나, 그것을 (악랄한 방법으로) 퍼뜨리기까지 한다. 그 냉소 속에는 옳고 그른 것보다는 이익과 불익, 호와 불호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구의 개인주의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면서도 '패거리 이익'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단주의자들의 냉소! 끔찍하지 않은가? 하지만 만약 냉소 속에 성찰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성과 사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냉소'가 그치는 날까지 '고백'은 계속될 것이고, '고백'이 권력을 추구하는 한 '냉소'는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고백과 냉소는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고 사라져서도 안 된다. 다만 이젠 좀 덜 고백하고 덜 냉소하는 시대가 오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야 지루하고도 먼길을 돌아왔다. 그것은 영화 바깥 세상의 일이고, 영화 세상은 그렇지 않다. 특히 한국영화 속에서 고백과 냉소를 보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현실이 제거된 영화 속에서 고백이나 냉소를 찾는 것 자체가 아둔한 짓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선우와 홍상수는 각별히 구분된다. 그들이 만든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구분되는 것은 고백과 냉소라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공통점과 차이점? 장선우와 홍상수가 같은 점은, 둘 다 고백했다는 점이다. 차이점? 장선우는 냉소적인 반응을 예상하곤 밀어붙이며 고백했고, 홍상수는 고백과 냉소를 적절히 병행했다. 또 <나쁜 영화>는 고백했고 <눈물>은 고백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르다.
2001.02.05 / 이효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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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홍상수의 늘어난 농담, 서글픈 익살
2002.03.04 오동진 편집위원
<생활의 발견>은 현대인의 일상을 진실되게 묘사하는 데 있어 당분간 홍상수 감독의 탁월한 감각을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진정한 괴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걸작은 종종, 걸작을 만들겠다는 의지보다는 끝끝내 걸작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작가의 통렬한 자기인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솔직히 난 홍상수의 영화가 기대되지 않았다. 이렇게 얘기하면 꼭, 홍상수 감독 작품에 대해서는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천만에, 결코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얘기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란 늘 새롭고 놀라우며, 유쾌하면서도 서글플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익숙하다는 것과 새롭지 않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적어도 홍상수 감독의 작품만큼은 그렇다. 그가 한편 두편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과정을 지켜 보노라면 이건 그가 마치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보다 사실에 가깝게 풀어 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그냥 꼬질꼬지하고 하찮은 내 얘기일 뿐인데, 근데 그게 바로 당신 얘기일 수도 있잖아?"라며 슬쩍 비웃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영화의 제목이 '(홍상수의)생활의 발견'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나 주인공 경수(김상경)의 캐릭터가 자신과 거의 흡사할 만큼 완벽한 얼터 에고처럼 보이는 것도 그때문이다. 근데 그건 그의 전작 세편, 그러니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의 힘> <오! 수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모습이긴 했다. 홍상수의 영화가 익숙하다는 것은 그때문이다. 그러나 매 작품마다 그 익숙함에 뛰어난 변주를 주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홍상수 영화에게서 발견되는 경이로움이다. 그리고 그같은 변주가 가능한 건 작품을 만들 수록 그가 점점 더 자신의 생활이나 영화인생, 주변 사람들의 삶에 대해 보다 진솔하게 얘기를 풀어낼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있기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반가우면서도 놀랍게도 그의 영화는 솔직함의 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 수록, 에피소드들이 보다 미세해지면 질수록, 그래서 영화가 점점 더 감독 본인의 자전적 에세이처럼 느껴지면 느껴질 수록 관객들에게 전이되는 울림의 정도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림의 끝맛은 묘하게도 주변의 비루한 삶에 대한 동정, 연민같은 서글픔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더 농담과 익살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의 크기와 비중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때론 지나치게 잔인하고, 또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인다.
연극배우 출신의 조연급 영화배우인 경수는 새로 들어갈 영화의 캐스팅에서 탈락되자 충동적으로 춘천에 있는 선배를 찾아 간다. 선배의 소개로 자신의 팬이라는 여성 명숙을 만난 그는 예정된 코스마냥 잠자리를 같이 한다. 하지만 명숙은 이미 선배가 어느 정도 점찍어 놓은 여자. 복잡한 심경으로 춘천을 떠난 경수는 부산행 기차에서 새로운 여인 선영을 만나고 그녀에게 강하게 끌리게 된다. 경주에 산다는 선영을 좇아 기차를 내린 경수는 결국 그녀와 폭풍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영화는 일곱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주인공의 일상을 촘촘이 헤집는다. 얘기는 분절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적 맥락으로는 한가지의 일관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몇몇의 에피소드에서 동일하게 나오는 대사가 그걸 보여 준다. 주인공 경수는 망한 영화사에서 러닝 개런티까지 챙기다가 선배로부터 "우리가 결국 사람이 되지는 못하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란 얘기를 듣고 화를 낸다. 하지만 정작 그는 술집 여자의 속옷을 벗기려 했던 춘천의 선배나 천박한 소유욕을 앞세우는 명숙에게 똑같은 얘기를 써먹는다. 경수는 또, 자신에게 매달리는 명숙에게 미친년이라며 경멸어린 시선을 보내면서도 바로 그 다음엔 유부녀인 선영의 환심을 사려고 애쓴다. 그리고 과정이야 어찌됐든 경수는 정작 두 여인에게서는 똑같은 내용의 쪽지를 받는다. '내 속의 당신, 당신 속의 나'라는 상투적인 밀어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는, '생활을 발견한다'는 행위란 곧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삶으로 채워져 있는 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흔히 거창하게 예술을 논하지만, 혹은 이 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걱정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기와 욕정과 불신의 늪속에서 허우적 대는 모습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영화가 그 깨달음의 고통을 같이 하자며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냉소주의와 잔인함의 칼날은 예전에 비해 무뎌진 감이 있다. 근게 그게 오히려 그가 이번 영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정서적 동질감이나 연대감을 깊게 다지는 효과를 발휘한다. <생활의 발견>은 현대인의 일상을 진실되게 묘사하는 데 있어 당분간 홍상수 감독의 탁월한 감각을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진정한 괴물'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걸작은 종종, 걸작을 만들겠다는 의지보다는 끝끝내 걸작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작가의 통렬한 자기인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홍상수 감독이 결코 예상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스스럼없이 올 한해의 최고 걸작으로 부를 수 있는 이유다.
홍상수감독이 만든 영화 ‘오! 수정’을 보고 나는 영화라는 예술장르가 참 재미있는 분야라는 생각을 했다. 또, 소설을 쓰다가 어느날 갑자기 메가폰을 잡은 감독이 있는 것처럼 영화예술은 문학의 외연에 마땅히 포함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멋진 상상력만 있다면, 구현해내지 못할 장면이란 없다. 오늘날 컴퓨터그래픽은 거의 실사수준을 능가하는 실감을 충족시켜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홍상수감독이 올해 내놓은 영화 ‘生活의 發見’은 단조롭기 이를 데 없는 타이틀백이나 곳곳에서 보이는 촬영기법의 무미건조함만을 놓고 얘기한다면 촌티(이런 표현은 사실 마뜩치 않지만)가 줄줄 흐르는 영화다. 이 영화 만드는 데 참, 돈 얼마 안들었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 지경이다. 백몇십억원을 퍼부어 고작 헐리우드영화의 잡탕을 만드는 데 그치고, 흥행에도 참패했다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같은 영화(보다가 지겨워서 중간에 그만 포기했다)에 견주어 보면, 줏대있는 영화 만들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각설하고, 이 영화에는 두 여자가 나온다.
고전무용에서 현대무용, 그리고 살사에 이르기까지 현란한 춤솜씨를 자랑하는 춤꾼일 뿐만 아니라, 샹송인 ‘Ne me quitte pas' 같은 노래도 멋들어지게 부를 줄 아는 여자. 명숙은 연극배우인 경수가 춘천에 갔던 길에 선배의 소개로 만난 여자다.(그런데 뒤늦게 알고보니 선배가 오랫동안 눈독들여 온 사람이었다) 명숙은 적극적이다. 술자리에서 선배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에 경수더러 어색하지 않게 뽀뽀나 한번 하자(그걸 줄여서 ’우심뽀하‘라고 하던가?)고 당돌한 유혹을 하는가 하면, 밤늦게 집에 돌아가는 차를 잡아주겠다는 말에 ’우리 지금부터 솔직해지기로 하자‘며 남자의 용기없음을 탓한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시해오는 명숙을 안는 경수의 느낌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호박이 덩굴채 굴러들어온 것 같으면서도 편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쌀 한가마를 한손으로 번쩍 들었다는 집안내력 탓에 여자치고는 매우 힘도 세어서 슈퍼걸이라는 별명을 가졌다는 명숙. 홍상수감독은 왜 하필 키가 185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 거구인 김상경을 ’경수‘역으로 캐스팅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서로 같은 극끼리는 배척하게 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싶었을까.
정사가 끝난 뒤, 명숙은 경수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마치 경수가 사랑한다는 말을 해줘야만 자신의 적극적인 구애의 태도가 면죄부를 받거나 정당해지기라도 하는 듯이. 경수는 입장이 난감해지지만 대답을 않는다. 마치 자신의 마음 속 어딘가에 있을 사랑의 진정성을 그런 식으로 훼손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듯이. 그 다음날 명숙이 전화를 통해서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했음에도 그는 역시 싫다고 한다. 거기에 대한 앙갚음을 하고 싶었을까. 명숙은 한참 뒤 다시 전화를 해서는 경수의 선배가 한참 샤워를 하고있는 여관방에 같이 있다며 경수에게 자기가 지금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경수는 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고 툭 내뱉는다. ‘미친 년.’
춘천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열차에서 경수는 다시 선영을 만난다(이번에는 거구인 경수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몸집이 작고 깜찍한 이미지의 여자다. 보통 체구가 큰 남자는 이런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기 쉽다). 뜻밖에 선영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고, 경수는 그녀에게 묘한 호감을 느껴 부산까지 가지 않고 그녀가 내리는 경주에서 따라 내리게 된다. 어렵사리 그녀와 삼겹살집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선영은 경수가 연극배우라서 아는 게 아니라, 경수와 그녀 두 사람이 중학생이던 어느 해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해주고, 경수는 뒤늦게야 그걸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때도 지금처럼 그녀에게 묘하게 이끌려 집으로 찾아갔었던 기억까지 떠올리게 된다. 거듭된 우연은 운명이란 것의 등가물로 인식되기 쉽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일수록. 하지만, 그녀는 이미 국립대학 교수를 남편으로 둔 유부녀였다. 운명치곤 참 아쉬움만 가득 남을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인 셈이다.
경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반했다며,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노라며, 서로 같은 공간에서 잠시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한다. 그건 관객인 내가 봐도 에누리없는 진심이었다. 대책이 없는 진심이었기는 하지만. 영화라서 그런지 요즘 여자들은 그런 때 절대 빼지 않는다. 춘천에서 술값을 내는 바람에 노잣돈이 딸린 경수가 어디 여관으로 가자는 말에 선영은 콩코드호텔로 가자며 교수 사모님 티를 낸다. 정사가 끝난 뒤, 경수는 선영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적극적으로 안겨왔던 명숙이 그렇게도 듣고 싶어했지만 거짓말로도 해주기 싫어했던, ‘사랑한다’는 그 말을. 그리고는, 우리 함께 죽어버릴까, 라고 묻는다. 선영은 그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표정으로 경수를 쳐다보고.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운명적 타당성이라도 확인하고 싶은 듯 경수는 선영을 데리고 점집을 찾아간다. 점쟁이는 경수는 스님팔자라서 인덕도 없어 산천을 떠돌 팔자, 선영은 앞으로 삐까번쩍하게 오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팔자, 선영의 남편은 고관대작에 오를 신수로서 앞으로 선영은 남편덕에 호강하고 살겠다는 얘기를 해준다. 선영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고 경수는 시무룩해진다. 그리고는 다시 나오겠다며 집으로 들어간 선영은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데도 돌아올 줄 모르고 경수는 그 운명이라는 것에 쓰디쓴 침을 뱉어주며 발길을 돌린다.
홍상수감독이 발견한 ‘생활’이란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입장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 자신이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타인의 진실과 이번에는 또 다른 타인에게 외면당하게 되는 자신의 진실과의 조우? 어제의 바람둥이라도 오늘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다는 개연성? 그 모두일 수도 있고, 사실 무슨 발견이라고 떠들썩하게 내놓을만한 것도 아니다. 다만 비에 젖어 걸어가는 경수의 초라한 뒷모습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긋나는 진실이 횡행하는 생활에 대해 불평하기 보다는 다만 겸허해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을 어렴풋이 느껴볼 뿐이다. -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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