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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교, 보그 Vogue 황진이 촬영기

로드365 2011. 6. 11. 21:16
글에 내공이 보인다.
누가 쓴 글일까? 
찾았다. 김지수 에디터. 



송혜교 보그 vogue 황진이 촬영기.  2007.5.22

“황진이는 그 시대의 슈퍼 모델이었지요. 기생들, 특히 장안에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던 트렌드세터 황진이는 그 시대의 패셔니스타였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입고, 어떤 헤어 스타일을 하고 다녔는지가 여자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는 거죠.” 영화 <황진이>의 미술감독이자 의상 큐레이터인 정구호가 <보그>가 사랑하는 거장 파올로 로베르시의 파리 아틀리에 정원에서 부서지는 햇빛을 받으며 이야기한다. 

사과와 청포도, 패스트리, 주스와 에스프레소가 케이터링 된 2층 메이크업룸에선 송혜교가 가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줄리앙 디스의 동양적인 메두사 헤어를 머리에 이고 갸우뚱거리다 창 밖의 우리를 향해 환하게 윙크한다. 1시간 전부터 헤어 스타일리스트 줄리앙 디스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테판 마레는 ‘황진이’의 헤어와 메이크업이 파일링 된 사진 앨범을 보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의 기생이라구요? 너무나 아름답군요. 특히 이 섬세한 가르마와 놀라운 양감의 헤어 피스는 도전정신을 자극합니다.”

1년 전인가, 공리와 장쯔이도 <게이샤의 추억>을 마친 후 미국 <보그> 촬영을 위해 파올로의 스튜디오를 찾았었다. 그녀들은 몸에 꼭 끼는 기모노를 입었고, 하얗게 분장을 했다(그때도 메이크업은 스테판 마레가 맡았다). 줄리앙 디스와 함께 세계적인 투톱 헤어 스타일리스트 오딜 질베르는 이 중국 여배우들의 머리를 마치 부채를 꽂은 일본식 미니 정원처럼 팽팽하고 아기자기하게 디자인했다. 공리와 장쯔이의 자연스러운 포트레이트 사진과는 달리, 연출된 게이샤의 모습은 일본과 중국이 뒤섞여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오늘. 동시대적이고 세련된 오딜 질베르에 비해 아트풀하고 조형적인 헤어 스타일리스트 줄리앙 디스는 일본 게이샤를 연기하는 중국 배우가 아닌, 한국 기생 ‘황진이’를 연기하는 한국 여배우를 재창조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줄리앙은 존 갈리아노 쇼를 위해 디자인했던 자신의 메두사 헤어 모형(여기저기 뱀과 사과가 휘감긴), 부드러운 깃털과 장신구, 생사로 땋은 가채 샘플들을 두고, ‘파리에 온 황진이’를 위한 즐거운 공상을 시작했다 (린다에반젤리스타의 머리를 좀더 세워달라는 칼 라거펠트에게 브러시를 던지고 나갔던 ‘전설적인 캐릭터’ 줄리앙 디스가 ‘굿 인스피레이션!’이라는 말로 순수한 경의를 표하다니!).

같은 시각, 피팅룸에선 <잘루즈>의 편집장인 이자벨 빼뤼(파리 <보그> 패션 기자 출신의 유명 스타일리스트로 크래그 맥딘 같은 사진작가를 발굴해서 작업했다)가 짧은 상의와 폭 넓은 치마로 이뤄진 컬러풀한 코리안 꾸뛰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녀가 해체된 저고리와 치마를 퍼즐 조각 맞추듯 스타일링 하는 동안 3층 스튜디오에선 사진작가 파올로 로베르시가 자연광을 좀더 부드럽게 여과시키기 위해 필름의 감도를 체크하고 있다.

파올로 로베르시, 스테판 마레, 줄리앙 디스… 세계 최고의 트리오가 모인 이 예술 현장에 함께 있자니 감격스러운 기분이 든다. 스티븐 마이젤, 피터 린드버그와 함께 세계 3대 패션 사진가로 꼽히는 파올로. 동시대의 작가들이 감각적인 하이테크놀로지와 눈부신 영화 조명으로 세련된 패션 아이콘을 생산하는 동안, 오로지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빛과 협력해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4차원 시간의 틈새’ 를 만들어내는 이 60대 거장이 <보그 코리아>의 표지를 촬영하다니! 16세기 여인과 21세기 여인의 드라마틱한 조우라는 이번 컨셉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화장품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 시세이도사의 아트 디렉터로도 활동 중인 세계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테판 마레와 꼼므 데 가르송, 존 갈리아노, 디올 쇼에서 늘 놀랄 만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줄리앙 디스의 합류. 파리 14구의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파올로의 ‘스튜디오 돌체’에 이자벨 아자니, 니콜 키드먼, 모니카 벨루치, 까뜨린느 드뇌브에 이어 송혜교의 폴라로이드가 전시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송혜교와 황진이가 있다. 

16세기의 기생과 21세기의 여배우는 한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측면에서 대중들에게 비슷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 또한 놀랄 만한 발견이지만, 송혜교에게는 ‘황진이적’인 유전자가 강하게 내재돼 있다. 송혜교와 잠깐이라도 시간을 나눈 사람이라면 그걸 느낄 수 있다. 처음에 21세기의 황진이로 전지현을 추천했던 영화사의 한 관계자도 송혜교를 만나본 후 생각을 바꿨다고 전해진다.

 송혜교는 영묘한 조선 백자 같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 동그랗게 뜬 검은 눈동자, 까마귀 날개처럼 선명하게 휘어든 검은 눈썹, 그리고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살결, 늘 물기가 어린 듯한 흰 자위, 옥돌같이 가지런한 치아. 어떤 그림도 여백 속으로 흡수해내는 고요한 백자처럼, 온화한 미소와 품격이 그녀를 빛나게 한다. 우리는 파리로 오기 전 인천 공항의 라운지에서 처음 만났고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녀는 <황진이 비평전-남한 작가가 본 북한의 황진이>를 읽고 있었고, 나는 홍석중의 <황진이>를 읽고 있었다. “영화 <황진이>는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요. 그 소설을 읽고 있으면 한국어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알게 돼죠. 영화사에서 곧 <황진이>의 북한 상영을 추진한다고 들었어요.

” 그렇게 되면 송혜교의 바람대로 원작자인 북한 소설가 홍석중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불평등한 신분 제도에 대한 반감으로 천민이 되지만 조선의 위선을 조롱하면서 운명을 개척한 자유혼, 임꺽정과 황진이는 닮았다. 영화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놈이’라는 화적과 기생 황진이, 당대 제도의 모순으로 주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리고 소설과 드라마, 영화에까지 이어지는 황진이 신드롬은 사극의 액세서리로 한정되어 온 기생들과 ‘기방 문화’에 대한 관심을 돌출시켰다.

잠시 황진이가 살았던 중종 시대로 돌아가 보자. 궁궐엔 수옹사라는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있었고, 사대부 집안에도 작은 미용실이 있다. 그 미용실엔 장안에서 손놀림이 좋은 출장 미용사들이 드나들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의 여인들처럼 조선 시대 여성들도 머리에 건축을 하듯 가능한 한 높이 올리기를 바랐다. 18세기 프랑스 여자들이 철사, 거즈, 천, 말총, 인조 머리카락 뼈대와 파우더로 머리를 높이 쌓아 올리기 전에 16세기, 이미 조선의 여자들은 3미터가 넘는 머리카락 피스와 염색한 생사, 갖가지 장신구, 비녀, 보석으로 거대한 가채를 만들어냈다. 
여자들은 가채로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신분을 과시했다. 처음에 궁중에서만 허락되었던 가채는 허영심 강한 반가 부인들의 유행에 불을 붙였고, 돈 많은 중인들과 여염집 아낙들도 경쟁적으로 가채를 틀어 올리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멋을 추구하기 위해 미쳐 날뛰던 시대였죠. 가채는 여자들의 자존심의 상징이었습니다”라고 <황진이>의 메이크업과 헤어를 담당했던 한필남은 말한다. 높이와 부피를 기준으로 한 럭셔리 헤어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여러 사회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옷에 따라 머리의 격식을 추구했던 궁중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가채 무게에 짓눌려 어린 궁녀들이 목이 꺾여 죽어나갔다. 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의 여자들은 가채 제작자들에게 머리카락을 팔고 스킨 헤드에 머릿수건을 두르고 다녔고, 한편에선 반가 부인들과 기생들의 경쟁적인 가채 값을 대느라 이중고에 허덕이던 양반들이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임금이 내린 ‘가채금지령’도 부녀자들의 패션 욕구를 통제할 수 없었다. 송시열의 사신기나 영정조 실록 등에는 그 시대 신문물로서 가채 풍속에 대한 한탄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슈퍼 모델 황진이는 어떤 가채를 했을까?

“황진이는 시대를 앞서갔던 여성이었죠. 모던한 여성이라면 높이나 부피 대신 패션의 다른 면에 주목했을 겁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푸프 스타일처럼 웨이브 텍스처로 가채를 만든다거나 하이그로시 광택의 머리 장식을 사용한다거나… 레이스를 두르기도 했을 거예요. 지금의 파리 헤어 쇼에 등장할 만한 미래적이고 조형적인 헤어 말입니다.” 헤어 스타일리스트 한필남은 황진이를 위해 일본의 <게이샤의 추억>보다 훨씬 패셔너블한 헤어를 고안했다.

그렇다면 중종 시대 패셔니스타로서 황진이는 어떤 의상을 입었을까? “황진이의 삶은 그 누구보다 모던했습니다. 그녀는 보통 기생들처럼 유혹적인 레드 컬러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고상하고 권위적인 블랙으로 자신을 스타일링 했겠죠. 황진이처럼 자아가 강한 여성이라면 사대부 여자들이 질투하고 흠모할 만큼 갖춤새를 더 탄탄하게 했을 겁니다. 

관습의 룰을 파괴한 차갑고 과감한 배색, 레이스와 자카드 원단의 사용, 극도로 볼드한 노리개 등등.” 영화 <황진이>와 이번 <보그>의 황진이를 위해서 동시에 의상을 디렉션한 디자이너 정구호는 이 패션 드라마가 로코코와 바로크 시대의 중간쯤에 있기를 바랐다. “가는 선으로 꽃과 당초무늬를 그리고 금빛으로 채색하기를 즐겨 했던 로코코 스타일은 무엇보다 황진이의 저고리에서 만개했지요.” 반면 정교한 검은 장, 검정색 하이그로시 거문고, 검은 바닥, 검은 먹과 벼루, 검은 협탁 위에 검정색 한복을 입고 앉은 바로크적인 여인도 존재한다. “게이샤는 공동 생활을 하고 유니폼처럼 엄격한 옷을 입었지만, 조선의 기생, 특히 황진이는 ‘디퍼런트 에너지’가 존재했어요.”

그것은 황진이가 기생이 되기 전에 했던 행동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상사병으로 죽은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집 안 구석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을 황진이가 직접 상여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진이는 죽은 총각의 관 앞에 마주섰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나온 꽃무늬의 붉은 스란치마를 활짝 펴서 관을 덮었다. “이승에서 보답할 수 없었던 사랑을 저승에서는 꼭 갚아드리렵니다. 그 약속에 대한 표적으로 제가 마련해 가지고 있던 혼례 옷을 당신의 영전에 바치오니 받아주세요.” 한편, 스타일적인 것을 넘어서 검은 칼날처럼 내리 꽂는 일필휘지의 풍자적 문장가로 한 시대 사대부들을 쥐락펴락했던 황진이가 송혜교에겐 어떻게 다가왔을까? “사람들이 <황진이> 포스터를 보고는 유관순이나 신사임당 같다고 하더군요. 하하. 하지만 제가 춤추고 노래하고 색기를 부리는 모습이 어울릴까요? 아닐 거예요. 저는 하지원 씨가 드라마 <황진이>에서 너무 멋진 춤과 에너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왜 아니겠어요? 저 또한 이 시대의 황진이는 저 혼자이고 싶죠. 하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제 안의 황진이를 불러냈어요. 춤과 노래를 절제하는 대신 양반을 지식과 학문으로 위압하고 가지고 노는, 그런 황진이요.”

비천한 신분이었던 황진이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만든 것은 그녀의 문학적인 재능이었다. 장윤현 감독은 황진이를 자유로운 혼을 가진 문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영화 <황진이>를 앞서가고 있었던 도시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했다. 16세기라는 시대에 깃든 모던한 빛, 지리적으로 번영을 누렸던 송도라는 도시의 기묘한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아우르면서.

나이 열 다섯에 이웃마을 선비를 상사병에 빠지도록 만들어 죽음으로 내몰고, 생불(生佛)로 추앙받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으며, 대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한 일화의 주인공 황진이. 황진이의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황진이와 교유했던 인물들의 기록을 통해 중종 6년(1512년)에 태어나 중종 36년(1541년)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조선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또 당대의 시조에 파격적인 표현으로 활력을 불어넣은 시인으로, 과감한 일탈을 통해 인습에 대항한 당대의 신여성으로, 황진이는 21세기에 더욱 신화적인 권력을 부여받고 있다. 이렇게 황진이는 사록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그녀를 부를 때마다 다른 존재가 되었다. 북한 작가 홍석중이 불러들인 황진이와 송혜교의 교차점은 ‘기품’에 있었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혜교의 눈은 늘 아이처럼 반짝거리고 입술은 방긋이 열려 있다

그러나 위선이나 거짓을 보고 화가 났을 때 그녀의 눈은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된다. 파리의 크리스챤 루부탱 사건이 그랬다. 유럽의 거만한 숍마스터가 혜교의 일행 중 한 명을 얕잡아보고 뱀피 구두를 팔지 않겠다며 인종차별적인 폭언을 했을 때, 멀리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혜교는 카운터로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 “Are you Christian Louboutin? I think you are crazy.” 매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반면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나 홀로 미술관을 거닐 때 그녀의 눈은 열 길 깊은 우물 속에 내려앉은 별빛과 같다. 그 맑은 빛 속에 잠긴 혜교의 명상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그 뒤로 해질녘 에펠탑을 보며 함께 와인을 마시고 직사광선을 피해 로댕 갤러리와 피카소 미술관을 구경하고, 파리의 밤 거리를 푸조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고, 쇼핑몰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혜교가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자존감이 강한 소녀라고 생각했다. 

가끔은 익명의 여행을 즐기다가도 어느새 관심의 초점이 되고 마는 그녀가 내 가슴을 두드린다-내 나이를 아세요? 난 너무 어렸을 때부터 대중 앞에 나왔어요. <가을 동화>의 서정적인 소녀에서 <올인>의 성숙한 처녀로 대중과 함께 키가 자라고, 마음이 자라고 사랑도 키웠어요. 그래서 난, 오래 전부터 미련이 없어요. 지금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해도 말이죠-라고.

 거슬러 올라가면 송혜교는 <순풍산부인과>의 귀여운 수다쟁이 여고생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다. 17~19세까지 젖살이 오른 통통한 얼굴과 도톰한 입술로 시트콤의 마스코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모든 시트콤 스타가 그렇듯이 그걸로 끝이었다. 누가 장난기 가득한 말괄량이 여자 아이를 눈물의 멜로 여왕으로 쓰고 싶어 하겠는가? 

“다행히도 <가을동화>의 윤석호 PD님이 시트콤을 보지 않으셨더라구요.” 서정적인 화면과 순정만화식 캐릭터는 스무 살의 그녀에게 꼭 맞는 옷이었다. 

한마디씩 끊어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송혜교식 대사’도 신선했다.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해”라고 한 템포 쉬어가는 그녀의 동화적인 말투를 흉내 내며 즐거워 했다. 원빈과 함께 한류 신드롬의 스타가 됐고, <올인>의 여주인공으로 세기의 로맨스를 찍었으며, 같은 또래의 아시아 스타인 정지훈과 두 번째 순정만화 드라마 <풀하우스>로 한류의 정점에 섰다. 하지만 더 나아갈 곳이 없었다. 

첫 영화로 차태현과 <파랑주의보>라는 또 한 편의 ‘송혜교식’ 동화로 도돌이표를 찍은 후, 그녀는 한 홍보 인터뷰 자리에서 지나가듯 ‘황진이’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 “전 그녀가 기생이라는 것밖에 아는 게 없었어요. 하지만 왠지 마음이 끌렸죠.” 그 인터뷰는 마침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던 장윤현 감독의 눈에 띄었고, 그녀는 <황진이>라는 진정한 성장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멋진 남자들의 구애에 익숙한 자본주의 사회의 ‘신데렐라 동화’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그것은 신데렐라에서 천기로 떨어진 다음, 계급 사회의 허상을 깨닫고 비웃는 일종의 ‘여성 혁명가’에 대한 탄생 설화였다. “황진이가 기생을 선언하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드라마에서는 통쾌하게 묘사됐지만, 사실 그 장면은 한 인간에겐 너무나 슬픈 추락이었지요.”

이 세상 가장 진귀한 구경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다. ‘황진사댁 고명딸’이 종의 딸이고 기생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달려든 손님들은 오입쟁이들만이 아니었다. 

체면에 기생방 출입을 할 수 없는 양반들도 호기심에 황진이를 불러가려고 안달을 했다. 날이 저물고 홍등이 내걸리기 무섭게 한 패가 들어서면 또 한 패가 들이닥치고,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손님 사태였다. 이때 소설 속 황진이의 독백은 애달프다. “간혹 당신도 꾸며낸 일화의 주인공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집집의 안방 사랑방들마다 지어낸 저의 정사를 지껄이느라고 수다스러운 입들에서 자개바람이 일 지경이랍니다. 

초여름 벽계수라는 서울 양반과 저를 입에 올려 한창 찧고 까불어댈 때는 과장된 이야기라 사실과 비슷한 대목들이 없지 않더니만 이번 지족암의 생불 이야기는 어떻게나 전도된 거짓말을 지껄여대는지 막 듣기가 고달프군요.” 추락, 음모, 정사, 스캔들, 그리고 화적이 된 ‘놈이’와의 불꽃 같은 사랑을 치른 후 송혜교는 자연스러운 포스를 내뿜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미소 한번으로 당신을 황홀하게 만들 수도 있고, 눈빛만으로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다.

자,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이자벨 빼뤼가 한 시간 동안 고심하며 위아래를 맞춘 세미 고전의 한복은 황진이가 영화에 입고 등장하는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21세기 모던한 파리지엔의 눈에도 16세기 황진이의 패션 감각은 이미 완벽했던 셈. 디자이너 정구호가 옆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다. “<보그>를 위해 따로 몇 벌의 서구식 한복을 제작했는데…. 결국은 서로 맞춘 듯이 ‘황진이’로 다시 돌아왔군요.” 파올로가 피팅룸으로 들어와 이자벨과 다시 머리를 맞댄다. 그리고 이자벨은 몇 개의 한복 치마를 가져와 파올로 앞에서 레이어드를 시작한다. 평면 재단인 한복 치마를 뒤로 여미지 않고 가슴 앞으로 여미자, 트임 안쪽으로 한 벌의 치마가 더 드러난다. 과연 한복 특유의 고상한 컬러 배리에이션을 고려한, 파리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이자벨다운 레이어드였다.

그리고 송혜교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꾸밈없는 내추럴 헤어에서 벗어나 거대한 헤어 피스를 골조로 머리 꽂이와 대형 노리개로 건축한 미래적인 스타디움을 머리에 이고 있다. “가채를 올리면 올릴수록 부유한 여인이라고 했죠? 어때요? 좀더 올릴까요? 괜찮겠어요?”라고 헤어 건축가 줄리앙 디스가 농담을 했다. 이 스타디움이 놀라운 건 반전과 입체성이다. 전통적으로 머리 뒤태를 장식하는 뒤꽂이가 앞으로 이동해 헤어 피스의 둥근 곡선을 창날처럼 가로질렀다. 

뿐만 아니라, 탄력적으로 휜 둥근 피스들이 사방으로 정교하게 교차하고 있어 360도로 회전 앵글을 잡아도 제각각 독특한 조화로움을 뽐냈다. 이윽고 송혜교는 미래적인 아미달라 여왕과 조선의 명성황후의 혈통을 이은 듯한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파올로의 카메라 앞에 섰다. 스튜디오 분위기는 진지함으로 출렁거렸다. 

그녀는 “가슴을 졸라매서 산소 호흡기가 필요해요”라고 스태프들에게 농담을 건넨 후, 이윽고 심호흡을 하고 전체적인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 과도한 디지털 시대에, 오로지 한 번의 셔터로 시공을 초월한 즉석 폴라로이드 사진을 만들어내는 파올로 로베르시의 조용한 마술이 시작됐다. 굵은 바리톤이 깔리며 “레이디! 오케이! 굿! 땡큐!”로 이어지는 그 마술. 그리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분 후, 오전 11시의 부드러운 햇살 아래 드러난 것은 생동하는 육신이 아니라 우수 어린 기품이었다. 사진이 한 장 한 장 나오고 어시스턴트들이 가져올 때마다 파올로는 마치 의사가 X-ray 필름을 걸듯 신중한 손놀림으로 보드에 폴라로이드를 붙였다. “한 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황녀를 보는 것 같군”이라고 파올로가 말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엉뚱하게도 파올로의 손이 얼마나 크고 부드러운가를 지켜보았다. “눈빛이 따뜻하면서 슬퍼요”라고 스테판 마레가 거들었다. 파올로는 가슴을 졸라매 상체의 볼륨을 죽인 한복의 형태를 보고, 송혜교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녀가 두 손을 허벅지에 모으고 다리를 살짝 앞으로 내밀자 레이어드 된 연두색 치마가 과감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송혜교는 파올로의 리드에 맞춰 조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연인처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가 “레디”라고 외치면, 스튜디오는 순식간에 호흡을 멈추고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파올로가 찰칵 하고 셔터를 누르는 그순간엔, 온 우주가 운행을 정지한다. 피사체와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그의 이런 작업 방식 때문에 한국 스태프의 인원도 5명 이하로 제한되었다. 파올로의 작업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날아온 사진작가 오중석도 숨을 죽이고 그의 작업을 지켜본다. “거장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영광이에요.” 아틀리에의 야외 정원에서 이탈리안과 한식으로 유쾌하게 점심을 먹은 후 촬영은 계속 되었다. 송혜교는 점점 더 과거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배경에 서는 순간 화면은 어떤 에너지로 꽉 차 보였다.

오후가 되자 파올로는 컬러를 아예 배제하고 흑백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고리를 벗고 한복 드레스만 입은 송혜교가 등을 돌린 채 카메라 쪽을 돌아봤을 때, 우리는 ‘아!’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순간엔 동양과 서양의 경계도 사라지고 과거와 현재의 구분도 무의미해졌다. 아무도 예측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표지 컷이었다. 튕겨나갈 듯이 치솟는 감정의 엑스터시도 아랑곳없는 관조의 눈빛. 아! 저 모습이 지금은 사라져버린 우리 한국 여인의 진짜 초상화구나! 

파리로 간 조선 궁녀 리심 같기도 하고,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같기도 한!

우리 모두 <보그 코리아>의 표지를 장식할 한국의 첫 여배우 송혜교를 보며 자랑스럽고 벅찬 기분이 들었다. 촬영은 해가 지기 직전인 오후 8시까지 진행됐다. 파올로는 꾸뛰르적인 한복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녀의 인내력, 배려심, 풍부한 감성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보는 우리는 그녀의 가녀린 목이 부러질 것 같아 내내 가슴을 졸여야 했지만.
 
다음 날 ‘파리에 온 황진이’를 자축하기 위해 선상 파티가 세느 강변에서 열렸다. 바쁜 일정 때문에 홍콩으로 떠나면서 아쉬워하던 디자이너 정구호가 “아마, 7시쯤 비가 올 거예요”라고 짓궂은 예언을 했지만, 비구름 대신 예고 없이 스테판 마레와 줄리앙 디스가 샴페인을 들고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아, 이렇게 행복한 밤이 또 있을까. 송도의 박연폭포 앞에서 열리던 사대부의 연회만큼이나 낭만적인 파리의 밤이 깊어가는 동안, 송혜교는 샴페인을 들고 선상을 누비며 서울 사람과 파리 사람을 잇는 훌륭한 호스티스 역할을 했다. 세느 강 저 너머에서 송혜교를 알아본 일본인 관광객들이 셔터를 눌러댔다. “혜교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줘요. 

할리우드 톱 스타와 수많은 촬영을 해봤지만, 그녀처럼 따뜻한 기류가 흐르는 여배우는 처음이에요. 백도화지 같은 얼굴, 부드러운 미소,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태도에 감동받았어요. 전 손이 두껍지만, 메이크업 할 땐 모든 걸 느낄 수 있죠.” 스페판 마레는 이미 송혜교의 열성 팬이 되었다. 줄리앙 디스는 조선의 가채에 대단한 영감을 받은 듯 그 제작 과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보다 트래디셔널한 작업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소망도 피력하면서(물론 1등석 항공권을 끊어줘야겠지만!). 세느 강에 반사되는 창날 같은 별빛의 공격을 받은 듯,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대중의 환호성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환호성들이 들꽃과도 같이 섬세하게 새겨놓은 감성의 무늬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겨 넣듯 그들과 일일이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파티가 끝난 후, 나는 호텔로 돌아와 바에서 송혜교와 마지막 샴페인을 나누었다. 그녀의 얼굴에선 여전히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요즘엔 혼자 계신 엄마에게 남자 친구, 아들, 남편, 딸의 1인 4역을 한다는 이야기-“제가 엄마의 보호자예요.”, 한류에 예민한 중국 언론이 송혜교가 장미 목욕에, 우유 보톡스를 맞는다는 루머를 퍼뜨린 일-“인터넷에선 키가 작다며 상처를 주죠”, 북한 금강산 온천의 아름다운 풍류-“백화점에 구찌도 있더라구요.”, 그리고 ‘요즘엔 사소한 일에도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다’고, “이 상태로 남자 만나면 곤란하겠죠?”라는 귀여운 푸념과 함께.

“전, 황진이 얼굴이 정말 궁금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사진도 없고 역사에도 기록이 없으니… 제가 정말 잘 한 걸까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황진이가 창도읍에서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이후부터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그때 나이는 갓 서른. 하지만 인간은 몇 해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추억속에 얼마나 깊은 자욱을 남겼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프레임 속에 갇힌 스물 일곱의 송혜교가 당신에게 황진이가 소유했던 세상에 대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 쉬이 감을 자랑마라 / 일도 창해하면 / 다시 오기 어려워라 / 명월이 만공산할제 / 쉬어감이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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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그 시대의 슈퍼 모델이었지요. 기생들, 특히 장안에 스캔들을 뿌리고 다녔던 트렌드세터 황진이는 그 시대의 패셔니스타였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입고, 어떤 헤어 스타일을 하고 다녔는지가 여자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는 거죠.” 영화 <황진이>의 미술감독이자 의상 큐레이터인 정구호가 <보그>가 사랑하는 거장 파올로 로베르시의 파리 아틀리에 정원에서 부서지는 햇빛을 받으며 이야기한다. 사과와 청포도, 패스트리, 주스와 에스프레소가 케이터링 된 2층 메이크업룸에선 송혜교가 가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줄리앙 디스의 동양적인 메두사 헤어를 머리에 이고 갸우뚱거리다 창 밖의 우리를 향해 환하게 윙크한다. 1시간 전부터 헤어 스타일리스트 줄리앙 디스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테판 마레는 ‘황진이’의 헤어와 메이크업이 파일링 된 사진 앨범을 보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의 기생이라구요? 너무나 아름답군요. 특히 이 섬세한 가르마와 놀라운 양감의 헤어 피스는 도전정신을 자극합니다.”

1년 전인가, 공리와 장쯔이도 <게이샤의 추억>을 마친 후 미국 <보그> 촬영을 위해 파올로의 스튜디오를 찾았었다. 그녀들은 몸에 꼭 끼는 기모노를 입었고, 하얗게 분장을 했다(그때도 메이크업은 스테판 마레가 맡았다). 줄리앙 디스와 함께 세계적인 투톱 헤어 스타일리스트 오딜 질베르는 이 중국 여배우들의 머리를 마치 부채를 꽂은 일본식 미니 정원처럼 팽팽하고 아기자기하게 디자인했다. 공리와 장쯔이의 자연스러운 포트레이트 사진과는 달리, 연출된 게이샤의 모습은 일본과 중국이 뒤섞여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오늘. 동시대적이고 세련된 오딜 질베르에 비해 아트풀하고 조형적인 헤어 스타일리스트 줄리앙 디스는 일본 게이샤를 연기하는 중국 배우가 아닌, 한국 기생 ‘황진이’를 연기하는 한국 여배우를 재창조한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줄리앙은 존 갈리아노 쇼를 위해 디자인했던 자신의 메두사 헤어 모형(여기저기 뱀과 사과가 휘감긴), 부드러운 깃털과 장신구, 생사로 땋은 가채 샘플들을 두고, ‘파리에 온 황진이’를 위한 즐거운 공상을 시작했다(린다에반젤리스타의 머리를 좀더 세워달라는 칼 라거펠트에게 브러시를 던지고 나갔던 ‘전설적인 캐릭터’ 줄리앙 디스가 ‘굿 인스피레이션!’이라는 말로 순수한 경의를 표하다니!).

같은 시각, 피팅룸에선 <잘루즈>의 편집장인 이자벨 빼뤼(파리 <보그> 패션 기자 출신의 유명 스타일리스트로 크래그 맥딘 같은 사진작가를 발굴해서 작업했다)가 짧은 상의와 폭 넓은 치마로 이뤄진 컬러풀한 코리안 꾸뛰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녀가 해체된 저고리와 치마를 퍼즐 조각 맞추듯 스타일링 하는 동안 3층 스튜디오에선 사진작가 파올로 로베르시가 자연광을 좀더 부드럽게 여과시키기 위해 필름의 감도를 체크하고 있다.
 

파올로 로베르시, 스테판 마레, 줄리앙 디스… 세계 최고의 트리오가 모인 이 예술 현장에 함께 있자니 감격스러운 기분이 든다. 스티븐 마이젤, 피터 린드버그와 함께 세계 3대 패션 사진가로 꼽히는 파올로. 동시대의 작가들이 감각적인 하이테크놀로지와 눈부신 영화 조명으로 세련된 패션 아이콘을 생산하는 동안, 오로지 창문으로 흘러 들어온 빛과 협력해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4차원 시간의 틈새’를 만들어내는 이 60대 거장이 <보그 코리아>의 표지를 촬영하다니! 16세기 여인과 21세기 여인의 드라마틱한 조우라는 이번 컨셉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으로 된 화장품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 시세이도사의 아트 디렉터로도 활동 중인 세계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스테판 마레와 꼼므 데 가르송, 존 갈리아노, 디올 쇼에서 늘 놀랄 만한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줄리앙 디스의 합류. 파리 14구의 조용한 주택가에 위치한 파올로의 ‘스튜디오 돌체’에 이자벨 아자니, 니콜 키드먼, 모니카 벨루치, 까뜨린느 드뇌브에 이어 송혜교의 폴라로이드가 전시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송혜교와 황진이가 있다. 16세기의 기생과 21세기의 여배우는 한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측면에서 대중들에게 비슷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 또한 놀랄 만한 발견이지만, 송혜교에게는 ‘황진이적’인 유전자가 강하게 내재돼 있다. 송혜교와 잠깐이라도 시간을 나눈 사람이라면 그걸 느낄 수 있다. 처음에 21세기의 황진이로 전지현을 추천했던 영화사의 한 관계자도 송혜교를 만나본 후 생각을 바꿨다고 전해진다.
 

송혜교는 영묘한 조선 백자 같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 동그랗게 뜬 검은 눈동자, 까마귀 날개처럼 선명하게 휘어든 검은 눈썹, 그리고 눈처럼 희고 부드러운 살결, 늘 물기가 어린 듯한 흰 자위, 옥돌같이 가지런한 치아. 어떤 그림도 여백 속으로 흡수해내는 고요한 백자처럼, 온화한 미소와 품격이 그녀를 빛나게 한다. 우리는 파리로 오기 전 인천 공항의 라운지에서 처음 만났고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녀는 <황진이 비평전-남한 작가가 본 북한의 황진이>를 읽고 있었고, 나는 홍석중의 <황진이>를 읽고 있었다. “영화 <황진이>는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요. 그 소설을 읽고 있으면 한국어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알게 돼죠. 영화사에서 곧 <황진이>의 북한 상영을 추진한다고 들었어요.” 그렇게 되면 송혜교의 바람대로 원작자인 북한 소설가 홍석중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불평등한 신분 제도에 대한 반감으로 천민이 되지만 조선의 위선을 조롱하면서 운명을 개척한 자유혼, 임꺽정과 황진이는 닮았다. 영화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놈이’라는 화적과 기생 황진이, 당대 제도의 모순으로 주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리고 소설과 드라마, 영화에까지 이어지는 황진이 신드롬은 사극의 액세서리로 한정되어 온 기생들과 ‘기방 문화’에 대한 관심을 돌출시켰다.

잠시 황진이가 살았던 중종 시대로 돌아가 보자. 궁궐엔 수옹사라는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있었고, 사대부 집안에도 작은 미용실이 있다. 그 미용실엔 장안에서 손놀림이 좋은 출장 미용사들이 드나들었다.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의 여인들처럼 조선 시대 여성들도 머리에 건축을 하듯 가능한 한 높이 올리기를 바랐다. 18세기 프랑스 여자들이 철사, 거즈, 천, 말총, 인조 머리카락 뼈대와 파우더로 머리를 높이 쌓아 올리기 전에 16세기, 이미 조선의 여자들은 3미터가 넘는 머리카락 피스와 염색한 생사, 갖가지 장신구, 비녀, 보석으로 거대한 가채를 만들어냈다. 여자들은 가채로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신분을 과시했다. 처음에 궁중에서만 허락되었던 가채는 허영심 강한 반가 부인들의 유행에 불을 붙였고, 돈 많은 중인들과 여염집 아낙들도 경쟁적으로 가채를 틀어 올리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멋을 추구하기 위해 미쳐 날뛰던 시대였죠. 가채는 여자들의 자존심의 상징이었습니다”라고 <황진이>의 메이크업과 헤어를 담당했던 한필남은 말한다. 높이와 부피를 기준으로 한 럭셔리 헤어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여러 사회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옷에 따라 머리의 격식을 추구했던 궁중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가채 무게에 짓눌려 어린 궁녀들이 목이 꺾여 죽어나갔다. 민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의 여자들은 가채 제작자들에게 머리카락을 팔고 스킨 헤드에 머릿수건을 두르고 다녔고, 한편에선 반가 부인들과 기생들의 경쟁적인 가채 값을 대느라 이중고에 허덕이던 양반들이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임금이 내린 ‘가채금지령’도 부녀자들의 패션 욕구를 통제할 수 없었다. 송시열의 사신기나 영정조 실록 등에는 그 시대 신문물로서 가채 풍속에 대한 한탄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슈퍼 모델 황진이는 어떤 가채를 했을까?

“황진이는 시대를 앞서갔던 여성이었죠. 모던한 여성이라면 높이나 부피 대신 패션의 다른 면에 주목했을 겁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푸프 스타일처럼 웨이브 텍스처로 가채를 만든다거나 하이그로시 광택의 머리 장식을 사용한다거나… 레이스를 두르기도 했을 거예요. 지금의 파리 헤어 쇼에 등장할 만한 미래적이고 조형적인 헤어 말입니다.” 헤어 스타일리스트 한필남은 황진이를 위해 일본의 <게이샤의 추억>보다 훨씬 패셔너블한 헤어를 고안했다.

그렇다면 중종 시대 패셔니스타로서 황진이는 어떤 의상을 입었을까? “황진이의 삶은 그 누구보다 모던했습니다. 그녀는 보통 기생들처럼 유혹적인 레드 컬러를 전면에 내세우기 보다는 고상하고 권위적인 블랙으로 자신을 스타일링 했겠죠. 황진이처럼 자아가 강한 여성이라면 사대부 여자들이 질투하고 흠모할 만큼 갖춤새를 더 탄탄하게 했을 겁니다. 관습의 룰을 파괴한 차갑고 과감한 배색, 레이스와 자카드 원단의 사용, 극도로 볼드한 노리개 등등.” 영화 <황진이>와 이번 <보그>의 황진이를 위해서 동시에 의상을 디렉션한 디자이너 정구호는 이 패션 드라마가 로코코와 바로크 시대의 중간쯤에 있기를 바랐다. “가는 선으로 꽃과 당초무늬를 그리고 금빛으로 채색하기를 즐겨 했던 로코코 스타일은 무엇보다 황진이의 저고리에서 만개했지요.” 반면 정교한 검은 장, 검정색 하이그로시 거문고, 검은 바닥, 검은 먹과 벼루, 검은 협탁 위에 검정색 한복을 입고 앉은 바로크적인 여인도 존재한다. “게이샤는 공동 생활을 하고 유니폼처럼 엄격한 옷을 입었지만, 조선의 기생, 특히 황진이는 ‘디퍼런트 에너지’가 존재했어요.”

그것은 황진이가 기생이 되기 전에 했던 행동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상사병으로 죽은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은 집 안 구석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을 황진이가 직접 상여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황진이는 죽은 총각의 관 앞에 마주섰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나온 꽃무늬의 붉은 스란치마를 활짝 펴서 관을 덮었다. “이승에서 보답할 수 없었던 사랑을 저승에서는 꼭 갚아드리렵니다. 그 약속에 대한 표적으로 제가 마련해 가지고 있던 혼례 옷을 당신의 영전에 바치오니 받아주세요.” 한편, 스타일적인 것을 넘어서 검은 칼날처럼 내리 꽂는 일필휘지의 풍자적 문장가로 한 시대 사대부들을 쥐락펴락했던 황진이가 송혜교에겐 어떻게 다가왔을까? “사람들이 <황진이> 포스터를 보고는 유관순이나 신사임당 같다고 하더군요. 하하. 하지만 제가 춤추고 노래하고 색기를 부리는 모습이 어울릴까요? 아닐 거예요. 저는 하지원 씨가 드라마 <황진이>에서 너무 멋진 춤과 에너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왜 아니겠어요? 저 또한 이 시대의 황진이는 저 혼자이고 싶죠. 하지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제 안의 황진이를 불러냈어요. 춤과 노래를 절제하는 대신 양반을 지식과 학문으로 위압하고 가지고 노는, 그런 황진이요.”

비천한 신분이었던 황진이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만든 것은 그녀의 문학적인 재능이었다. 장윤현 감독은 황진이를 자유로운 혼을 가진 문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영화 <황진이>를 앞서가고 있었던 도시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 했다. 16세기라는 시대에 깃든 모던한 빛, 지리적으로 번영을 누렸던 송도라는 도시의 기묘한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아우르면서.

나이 열 다섯에 이웃마을 선비를 상사병에 빠지도록 만들어 죽음으로 내몰고, 생불(生佛)로 추앙받던 지족선사를 파계시켰으며, 대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한 일화의 주인공 황진이. 황진이의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황진이와 교유했던 인물들의 기록을 통해 중종 6년(1512년)에 태어나 중종 36년(1541년) 서른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는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조선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또 당대의 시조에 파격적인 표현으로 활력을 불어넣은 시인으로, 과감한 일탈을 통해 인습에 대항한 당대의 신여성으로, 황진이는 21세기에 더욱 신화적인 권력을 부여받고 있다. 이렇게 황진이는 사록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에 누군가가 그녀를 부를 때마다 다른 존재가 되었다. 북한 작가 홍석중이 불러들인 황진이와 송혜교의 교차점은 ‘기품’에 있었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혜교의 눈은 늘 아이처럼 반짝거리고 입술은 방긋이 열려 있다. 그러나 위선이나 거짓을 보고 화가 났을 때 그녀의 눈은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된다. 파리의 크리스챤 루부탱 사건이 그랬다. 유럽의 거만한 숍마스터가 혜교의 일행 중 한 명을 얕잡아보고 뱀피 구두를 팔지 않겠다며 인종차별적인 폭언을 했을 때, 멀리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혜교는 카운터로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 “Are you Christian Louboutin? I think you are crazy.” 매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반면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나 홀로 미술관을 거닐 때 그녀의 눈은 열 길 깊은 우물 속에 내려앉은 별빛과 같다. 그 맑은 빛 속에 잠긴 혜교의 명상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그 뒤로 해질녘 에펠탑을 보며 함께 와인을 마시고 직사광선을 피해 로댕 갤러리와 피카소 미술관을 구경하고, 파리의 밤 거리를 푸조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고, 쇼핑몰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혜교가 겉으로는 연약해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 자존감이 강한 소녀라고 생각했다. 가끔은 익명의 여행을 즐기다가도 어느새 관심의 초점이 되고 마는 그녀가 내 가슴을 두드린다-내 나이를 아세요? 난 너무 어렸을 때부터 대중 앞에 나왔어요. <가을 동화>의 서정적인 소녀에서 <올인>의 성숙한 처녀로 대중과 함께 키가 자라고, 마음이 자라고 사랑도 키웠어요. 그래서 난, 오래 전부터 미련이 없어요. 지금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고 해도 말이죠-라고.
 

 

 

거슬러 올라가면 송혜교는 <순풍산부인과>의 귀여운 수다쟁이 여고생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다. 17~19세까지 젖살이 오른 통통한 얼굴과 도톰한 입술로 시트콤의 마스코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모든 시트콤 스타가 그렇듯이 그걸로 끝이었다. 누가 장난기 가득한 말괄량이 여자 아이를 눈물의 멜로 여왕으로 쓰고 싶어 하겠는가? “다행히도 <가을동화>의 윤석호 PD님이 시트콤을 보지 않으셨더라구요.” 서정적인 화면과 순정만화식 캐릭터는 스무 살의 그녀에게 꼭 맞는 옷이었다. 한마디씩 끊어서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송혜교식 대사’도 신선했다.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해”라고 한 템포 쉬어가는 그녀의 동화적인 말투를 흉내 내며 즐거워 했다. 원빈과 함께 한류 신드롬의 스타가 됐고, <올인>의 여주인공으로 세기의 로맨스를 찍었으며, 같은 또래의 아시아 스타인 정지훈과 두 번째 순정만화 드라마 <풀하우스>로 한류의 정점에 섰다. 하지만 더 나아갈 곳이 없었다. 첫 영화로 차태현과 <파랑주의보>라는 또 한 편의 ‘송혜교식’ 동화로 도돌이표를 찍은 후, 그녀는 한 홍보 인터뷰 자리에서 지나가듯 ‘황진이’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 그녀가 기생이라는 것밖에 아는 게 없었어요. 하지만 왠지 마음이 끌렸죠.” 그 인터뷰는 마침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던 장윤현 감독의 눈에 띄었고, 그녀는 <황진이>라는 진정한 성장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멋진 남자들의 구애에 익숙한 자본주의 사회의 ‘신데렐라 동화’와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그것은 신데렐라에서 천기로 떨어진 다음, 계급 사회의 허상을 깨닫고 비웃는 일종의 ‘여성 혁명가’에 대한 탄생 설화였다. “황진이가 기생을 선언하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요. 드라마에서는 통쾌하게 묘사됐지만, 사실 그 장면은 한 인간에겐 너무나 슬픈 추락이었지요.”

이 세상 가장 진귀한 구경거리는 다른 사람의 불행이다. ‘황진사댁 고명딸’이 종의 딸이고 기생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달려든 손님들은 오입쟁이들만이 아니었다. 체면에 기생방 출입을 할 수 없는 양반들도 호기심에 황진이를 불러가려고 안달을 했다. 날이 저물고 홍등이 내걸리기 무섭게 한 패가 들어서면 또 한 패가 들이닥치고,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손님 사태였다. 이때 소설 속 황진이의 독백은 애달프다. “간혹 당신도 꾸며낸 일화의 주인공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집집의 안방 사랑방들마다 지어낸 저의 정사를 지껄이느라고 수다스러운 입들에서 자개바람이 일 지경이랍니다. 초여름 벽계수라는 서울 양반과 저를 입에 올려 한창 찧고 까불어댈 때는 과장된 이야기라 사실과 비슷한 대목들이 없지 않더니만 이번 지족암의 생불 이야기는 어떻게나 전도된 거짓말을 지껄여대는지 막 듣기가 고달프군요.” 추락, 음모, 정사, 스캔들, 그리고 화적이 된 ‘놈이’와의 불꽃 같은 사랑을 치른 후 송혜교는 자연스러운 포스를 내뿜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미소 한번으로 당신을 황홀하게 만들 수도 있고, 눈빛만으로 당신을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다.

자,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이자벨 빼뤼가 한 시간 동안 고심하며 위아래를 맞춘 세미 고전의 한복은 황진이가 영화에 입고 등장하는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21세기 모던한 파리지엔의 눈에도 16세기 황진이의 패션 감각은 이미 완벽했던 셈. 디자이너 정구호가 옆에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다. “<보그>를 위해 따로 몇 벌의 서구식 한복을 제작했는데…. 결국은 서로 맞춘 듯이 ‘황진이’로 다시 돌아왔군요.” 파올로가 피팅룸으로 들어와 이자벨과 다시 머리를 맞댄다. 그리고 이자벨은 몇 개의 한복 치마를 가져와 파올로 앞에서 레이어드를 시작한다. 평면 재단인 한복 치마를 뒤로 여미지 않고 가슴 앞으로 여미자, 트임 안쪽으로 한 벌의 치마가 더 드러난다. 과연 한복 특유의 고상한 컬러 배리에이션을 고려한, 파리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이자벨다운 레이어드였다.

그리고 송혜교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꾸밈없는 내추럴 헤어에서 벗어나 거대한 헤어 피스를 골조로 머리 꽂이와 대형 노리개로 건축한 미래적인 스타디움을 머리에 이고 있다. “가채를 올리면 올릴수록 부유한 여인이라고 했죠? 어때요? 좀더 올릴까요? 괜찮겠어요?”라고 헤어 건축가 줄리앙 디스가 농담을 했다. 이 스타디움이 놀라운 건 반전과 입체성이다. 전통적으로 머리 뒤태를 장식하는 뒤꽂이가 앞으로 이동해 헤어 피스의 둥근 곡선을 창날처럼 가로질렀다. 뿐만 아니라, 탄력적으로 휜 둥근 피스들이 사방으로 정교하게 교차하고 있어 360도로 회전 앵글을 잡아도 제각각 독특한 조화로움을 뽐냈다. 이윽고 송혜교는 미래적인 아미달라 여왕과 조선의 명성황후의 혈통을 이은 듯한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파올로의 카메라 앞에 섰다. 스튜디오 분위기는 진지함으로 출렁거렸다.

그녀는 “가슴을 졸라매서 산소 호흡기가 필요해요”라고 스태프들에게 농담을 건넨 후, 이윽고 심호흡을 하고 전체적인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 과도한 디지털 시대에, 오로지 한 번의 셔터로 시공을 초월한 즉석 폴라로이드 사진을 만들어내는 파올로 로베르시의 조용한 마술이 시작됐다. 굵은 바리톤이 깔리며 “레이디! 오케이! 굿! 땡큐!”로 이어지는 그 마술. 그리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분 후, 오전 11시의 부드러운 햇살 아래 드러난 것은 생동하는 육신이 아니라 우수 어린 기품이었다. 사진이 한 장 한 장 나오고 어시스턴트들이 가져올 때마다 파올로는 마치 의사가 X-ray 필름을 걸듯 신중한 손놀림으로 보드에 폴라로이드를 붙였다. “한 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황녀를 보는 것 같군”이라고 파올로가 말했다.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엉뚱하게도 파올로의 손이 얼마나 크고 부드러운가를 지켜보았다. “눈빛이 따뜻하면서 슬퍼요”라고 스테판 마레가 거들었다. 파올로는 가슴을 졸라매 상체의 볼륨을 죽인 한복의 형태를 보고, 송혜교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녀가 두 손을 허벅지에 모으고 다리를 살짝 앞으로 내밀자 레이어드 된 연두색 치마가 과감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송혜교는 파올로의 리드에 맞춰 조용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연인처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가 “레디”라고 외치면, 스튜디오는 순식간에 호흡을 멈추고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파올로가 찰칵 하고 셔터를 누르는 그순간엔, 온 우주가 운행을 정지한다. 피사체와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그의 이런 작업 방식 때문에 한국 스태프의 인원도 5명 이하로 제한되었다. 파올로의 작업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 날아온 사진작가 오중석도 숨을 죽이고 그의 작업을 지켜본다. “거장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영광이에요.” 아틀리에의 야외 정원에서 이탈리안과 한식으로 유쾌하게 점심을 먹은 후 촬영은 계속 되었다. 송혜교는 점점 더 과거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배경에 서는 순간 화면은 어떤 에너지로 꽉 차 보였다.

오후가 되자 파올로는 컬러를 아예 배제하고 흑백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고리를 벗고 한복 드레스만 입은 송혜교가 등을 돌린 채 카메라 쪽을 돌아봤을 때, 우리는 ‘아!’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순간엔 동양과 서양의 경계도 사라지고 과거와 현재의 구분도 무의미해졌다. 아무도 예측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표지 컷이었다. 튕겨나갈 듯이 치솟는 감정의 엑스터시도 아랑곳없는 관조의 눈빛. 아! 저 모습이 지금은 사라져버린 우리 한국 여인의 진짜 초상화구나! 파리로 간 조선 궁녀 리심 같기도 하고, 조선의 마지막 국모 명성황후 같기도 한!

우리 모두 <보그 코리아>의 표지를 장식할 한국의 첫 여배우 송혜교를 보며 자랑스럽고 벅찬 기분이 들었다. 촬영은 해가 지기 직전인 오후 8시까지 진행됐다. 파올로는 꾸뛰르적인 한복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녀의 인내력, 배려심, 풍부한 감성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보는 우리는 그녀의 가녀린 목이 부러질 것 같아 내내 가슴을 졸여야 했지만.

 



다음 날 ‘파리에 온 황진이’를 자축하기 위해 선상 파티가 세느 강변에서 열렸다. 바쁜 일정 때문에 홍콩으로 떠나면서 아쉬워하던 디자이너 정구호가 “아마, 7시쯤 비가 올 거예요”라고 짓궂은 예언을 했지만, 비구름 대신 예고 없이 스테판 마레와 줄리앙 디스가 샴페인을 들고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아, 이렇게 행복한 밤이 또 있을까. 송도의 박연폭포 앞에서 열리던 사대부의 연회만큼이나 낭만적인 파리의 밤이 깊어가는 동안, 송혜교는 샴페인을 들고 선상을 누비며 서울 사람과 파리 사람을 잇는 훌륭한 호스티스 역할을 했다. 세느 강 저 너머에서 송혜교를 알아본 일본인 관광객들이 셔터를 눌러댔다. “혜교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줘요. 할리우드 톱 스타와 수많은 촬영을 해봤지만, 그녀처럼 따뜻한 기류가 흐르는 여배우는 처음이에요. 백도화지 같은 얼굴, 부드러운 미소,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태도에 감동받았어요. 전 손이 두껍지만, 메이크업 할 땐 모든 걸 느낄 수 있죠.” 스페판 마레는 이미 송혜교의 열성 팬이 되었다. 줄리앙 디스는 조선의 가채에 대단한 영감을 받은 듯 그 제작 과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보다 트래디셔널한 작업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소망도 피력하면서(물론 1등석 항공권을 끊어줘야겠지만!). 세느 강에 반사되는 창날 같은 별빛의 공격을 받은 듯,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대중의 환호성과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 환호성들이 들꽃과도 같이 섬세하게 새겨놓은 감성의 무늬들을 하나하나 가슴에 새겨 넣듯 그들과 일일이 따뜻한 포옹을 나눴다.

파티가 끝난 후, 나는 호텔로 돌아와 바에서 송혜교와 마지막 샴페인을 나누었다. 그녀의 얼굴에선 여전히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요즘엔 혼자 계신 엄마에게 남자 친구, 아들, 남편, 딸의 1인 4역을 한다는 이야기-“제가 엄마의 보호자예요.”, 한류에 예민한 중국 언론이 송혜교가 장미 목욕에, 우유 보톡스를 맞는다는 루머를 퍼뜨린 일-“인터넷에선 키가 작다며 상처를 주죠”, 북한 금강산 온천의 아름다운 풍류-“백화점에 구찌도 있더라구요.”, 그리고 ‘요즘엔 사소한 일에도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다’고, “이 상태로 남자 만나면 곤란하겠죠?”라는 귀여운 푸념과 함께.

“전, 황진이 얼굴이 정말 궁금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사진도 없고 역사에도 기록이 없으니… 제가 정말 잘 한 걸까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황진이가 창도읍에서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이후부터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그때 나이는 갓 서른. 하지만 인간은 몇 해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추억속에 얼마나 깊은 자욱을 남겼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프레임 속에 갇힌 스물 일곱의 송혜교가 당신에게 황진이가 소유했던 세상에 대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 쉬이 감을 자랑마라 / 일도 창해하면 / 다시 오기 어려워라
/ 명월이 만공산할제 / 쉬어감이 어떠하리
 
 
- 사진가 파올로 로베르시의 작품은 <보그> 6월호 지면을 통해 확인하세요.
- 에디터 / 김지수
- 뷰티 협찬 / 아모레 퍼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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