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ㅗ

최경태 화백

로드365 2011. 6. 3. 02:16


"예술은 끊임없이 개기는것, 

  사회에 끊임없이 개기는것 !!" (최경태)

 

 

 소녀예찬(http://blog.naver.com/dbscnddyd/20054823467)을 쓰면서 사실은 나의 글보다 최경태 선생님의 그림을 봐주길 바랬다. 나의 글은 최선생님의 그림을위한 양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들 그림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 자못 실망했다. '그림 죽인다, 작가가 누구냐' 는 리플이 줄을 잇고 못이기는 척 '아, 따로 시간내서 최선생님에 대한 포스트를 한번 해보죠' 이럴 꿍꿍이속이었지만 이제 어쩔수 없다. 남들이 뭐래건 내맘대로 최경태 선생님 특집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시덥잖은 예술평론하나만 짧게 하고 들어가겠다.

가끔씩 우리는 음란물과 구분이 안되는 예술작품들을 접한다. 이런 "예설" 작품들을 접한뒤

예술한다는 새끼들은 다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변태싸이코들이라고 욕하기도하고 김C야 말로 이시대의 진정한 민중 아티스트였다고 농담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궁금하다. 왜 인간의 벗은몸은 그렇게도 거리가 먼 '아트' 와 '음란'에 잇닿아 있는지.

 

 



폭력으로 작용한 남자 성기의 사례.1 (MBC 방송사고)

 

 인간은 성(性)적인 동물이다. 누가 뭐래도 섹스의 동물이다. 숫캐와 더불어 발정기에 구애받지 않고 교미를 할수 있는 거의 유일한 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수황시리즈의 슈퍼스타 초코와 바닐라가 도합 100여개에 달하는 조개맛을 보는게 가능했던 것이다.) 유인원류의 일종인 보노보와 더불어 섹스를 단순한 출산을 위한 수단이상의 사회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기이한 종이다. 인간은 섹스애니멀이다. 윤리적이나 철학적으로 변명하려 들지마라.이는 자연과학적 사실진술이다. 다시한번 복창하자. 인간은 섹스 애니멀이다. 

 

 고로 이런 인간에게 '섹스' 의 상징인 '벗은몸(특히 그 정적인 성기)' 은 매우 효과적인 표현양식이된다. 일단 사용하면 효과는 즉각적이고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남녀를 불문하고 인간의 나체는 고압전류가 흐르는 표현양식인 것이다. 이게 일종의 사회적 왜곡에 의해 남자의 성기는 폭력여자의 성기는 외설로 구분지어 지지만 폭력과 외설 둘다 아주 강한 자극을 동반한다는점에선 일맥상통한다. 

 

 

폭력으로 작용하는 남자 성기의 사례.2 (알몸으로 노점상 부부를 협박하는 용역직원)

 

 

 따라서 이 강도높은 전달력과 호소력을 가진 표현양식(코드)에 예술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주목하는 건 당연하다. 이들의 밥벌이인 즉슨 코드에 메시지를 담아보내는 것이니까. 마치 불안붙는 연탄에 불붙이는 번개탄처럼 남자와 여자의 벗은몸은 예술가들에게 매우 요긴하게 쓰인다. 현재 세계의 권력구조가 남성중심적인 관계로 남자의 벗은 몸보단 여자의 벗은 몸은 좀더 빈번히 사용되는 것인데, 이렇게 사용되는 여자의 벗은몸은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자신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는데 활용된다. 그러나 양날의 검처럼 이 전달력 높은 표현양식은 스스로가 메시지를 잡아먹어버릴 정도로 위험한 녀석이라서 자칫 잘못하다간 '아트' 와 '외설' 의 경계가 모호해 지는 것이다.

 

 

 

 

빠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몽상가들로 유명한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들이 좋은 예가된다.

어느 지방도시의 작은 상영관에서 노모자이크로 에바그린의 보ㅡ오ㅡ지를 감상했을때 내가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어디 보오지뿐인가, 몽상가들에선 남자들의 "좆" 도 여과없이 나온다. 좆과 보오지만 나오다 뿐인가. 이들은 사이좋게 합체까지도 한다.

 

자 퀴즈하나 내자. 그 사람도 없고 으슥한 상영관 안에서 충용무쌍은 유명한 여배우의 '보ㅡ오ㅡ지' 에 열광하며 딸계의 네임드로써의 본분에 충실했을까?(쉽게 말해 전완근 운동을 했느냐 이말이다.) 정답은 좆까다. 서지도 않았다. 일단 분량자체부터 짧았을 뿐더러 준비되지 않은 장면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와 왠지 모르게 그로테스컬하게까지 느껴지는 에바그린의 보-오-지는 딸감으로 부적합했다.  베르톨루치의 영화에서 보-오-지와 좆의 효용성은 관객들에게 성적 흥분을 주기위한게 아니다.

 

 우리의 짓누르는 모든 사회적 구습으로부터, 압제로 자유로워지기 위한 혁명의 시기였던68의

시대상을 표현하는데 고압전류가 흐르는 표현양식을 사용해 전달력을 높이는게 그의 전략일 것이다. 노골적인 정사장면 묘사로 유명한 빠마탱과 에로망가 뺨치는 패도지향적 설정, 남매덮밥이 등장하는 몽상가들을 보고 남은 잔상은 실패한 혁명 68에 대한 진한 향수와 쓸쓸함, 그리고 실패한 혁명뒤 다가온 반혁명적 기조에 대한 분노같은 것이다.

 

 벗은 몸은 구습에 대한 저항 더 나아가서는 공격이다. 흐물흐물한 사람들의 정신을 바짝차리게 만드는 전기 충격기로 쓰인다. 가령 그 유명한 엠비씨 럭스 성기노출 사건 당시 당사자들이 '그냥 재미삼아 했어요' 가 아니라 '이명박 서울시장에 대한 사보타주였다!'  '아이돌 중심의 한국 대중가요계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라고 기자들앞에서 한마디만 했으면 그놈들 한큐에

대물로 클 수도 있었을거다.

 

 

 

 

 최근에는 색,계가 이와 같은 맥락의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정사씬이랑 흥건히 젖은 땀과 육즙으로 어떤 시퀀스보다 습도가 높아야한다. 그러나 화면뿐만 아니라 스크린을 뚫고 전해지는 공기까지 너무나도 건조하고 깔깔한 색계의 정사장면은 참 딸맛 떨어지게 만든다. 결국 영화를 보고난뒤에 머릿속에 남는건 홍콩 제일의 미녀라는 탕웨이의 겨털과 공허함이다.

 

 남녀의 벗은몸과 성기가 예술에서 맡은 임무는 바로 이것이다. 충격과 공포ㅡ그리고 번개탄. 이 번개탄으로 연탄에 불을붙여 아랫목을 땃땃하게 만들지 않고 고기를구워버리면 그때부터 남녀의 벗은몸과 성기는 "외설" 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쉽다.

 

 

 

 

 


낸시랭 - 찜질방(2005)

 


Kelly

 따라서 낸시랭과 켈리의 작업은 그냥 외설에 가깝다. 팝아트란 자신의 벗은몸을 자본으로

이용해  인기를 얻는게 아니다. 불편함(혹은 사회에 대한 공격, 불협화음, 새로운 메시지로 번역될 수 있는)을 발생시키는 방법으로 대중문화를 이용하는 것이지 본인이 대중문화의 일부가 되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렇게 낸시랭과 켈리의 벗은몸은 '아트' 가 아닌 '딸감' 이다.  아 씨발 한참 잘나가다 얘기가 샐뻔 했는데 이제 진짜 본론, 오늘의 히어로 최경태 선생님의 이야기로 들어가야겠다. (원래 냄비들 까고 씹는게 주전공이다보니 잠시 헛발질을;;;;;;)

 

 

 

 

 

 


  최선생님을 보면 누구나 쉽게 "여고생의 에로티시즘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외설화가" 라고 첫인상을 정의한다. 그러나 곧 80년대말, 90년대초 민중판화나 벽화의 범주에 포함될 최선생님의 초기작을 보면 잠시 혼란에 빠진다. '허,,사회적 의식이 있는 양반이 다 깊은 뜻이 있어서 미친척 하는걸까' 이런 식으로.

 

 

 

 

최경태_나는야 자랑스런 대한의 아들_목판화_39×54cm_1990

 

 

 

최경태_코리아 판타지_캔버스에 유채_1140호_1992 (부분)

 

선생님의 초기작들은 때깔좋은 자본주의적 이미지와 무채색의 민중을 병치시킨 몽타주나 김지하의 오적 삽화로 쓰이면 좋을것 같은 거친 터치의 판화가 주를 이룬다. 

 

 

그때는 투사의 시대였다. 지금은 한나라당  국K-1이라고 거들먹거리던 이들도 그땐 머리띠를 질끈동여매고 최루탄 속으로 달려가던 대학생들이었다. 당시 시대상이 그러할진데 정치색이 짙은 그림을 그렸다고 무조건 사회참여적이고 '여고생의 보지뒤에 깊은뜻을 숨긴 현자'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고 볼수도 있다. 그때는 그때고 이제 시간이 흘러 세월이 태평해지니까 숨겨진 '변태성'에 눈을 뜨고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것에 매진하고 있는거라는 해석도 타당해 보인다.

 

 그럴까. 그럴지도. 그러나 지금은 바야흐로 주적(主敵)을 잃어버린 시기다. 십수년전만해도 대한민국은 억압받았고 암울했다. 그만큼 피아가 확실했다. 해방이후엔 친일파, 전후엔 빨갱이들, 이후엔 폭압적인 살인정권 시대마다 적은 분명히 정해져 있었고 누구나 싸울 의지만 결연하다면 피를 튀길수 있는 시대였다. 그리고 오늘날은 그 살인정권의 끝물을 탔던 대머리 영감에게 명패를 집어던진 용감한 초선의원이 전직 대통령이 된 그런 때다. 갈등은 해소되고 적은 사라진것도같다. 우리의 주적은 간부라는 농담속에서나 존재할것 같다. 그러나 실은 그게아니다. 사회는 더욱 복잡하고 정신없이 변해갔고 거기에 따라 적은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혹자는 적을 미국이라고도 하고 자본이라고도 부르고 수구적 집권세력이라고도 부르고 북의사주를 받은 이들이라고도 부른다. 이젠 보수와 진보를 80년처럼 금긋듯이 나눌수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적은 다양해졌고 피아는 불분명해졌다. 

 

 바로 이런 오늘날 최경태 화백은 여전히 전쟁중이다. 그는 독재정권, 미국대사관같은 젊은날에 싸웠던 적들과 다른 새로운 적을 만나 새로운 방법으로 여전히 치열하게 붓질중이다.

 


교복을 반쯤 풀어헤친 여고생들의 사타구니를 정밀묘사하는 최경태의 작업은 공격이다.

끊임없이 사회에 엿을 먹이는 공격이다. 그런데 왜 하필 여고생일까?

 

 


"여고생" 은 그가 발견해낸 번개탄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파괴력이큰 표현양식인 것이다. 이미 2000년즈음해서 벗은몸을 통해서 외설시비에 휘말렸던 그였지만 그가 그린 여자들의 벗은몸은 베르톨루치나 이안이 그려낸 여자들의 벗은몸만큼 큰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냥 길가던 만보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출동한 경찰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을뿐이지 그의 메시지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찾아낸 다이아몬드가 바로 교복과 소녀, 여고생인것이다.

 

 

괴물에서 봉준호의 이미지 메이킹중 가장 칭찬받을 만한것이 바로 여중생이다

 

 소녀는 내일의 어머니가 될 존재고 사회가 지켜주어야할 가냘픈 약자다. 교복은 제도권안에서 소녀가 안전하게 보호받고 훈육되고 있다는 증거다. 봉준호의 괴물에서 교복차림의 현서가 괴물의 둥지아래에서 빗물을 받아마시는 장면은 비극성을 극대화하고 분노를 유발한다. 교복입은 소녀가 있어야할 곳은 학교지 괴물의 둥지가 아니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하교길에 장갑차에 짓눌려 영안실에 눕게된게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산것도 이들이 교복을 입은 여중생이었다는 이유가 컸다. 소녀와 교복은 '생물학적 미완성' 과 '사회적보호가 필요함' 을 상징하는 심볼이다. 이 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존재 여중생이나 여고생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굉장히 순도높은(그만큼 민감한)소재인데, 그들이 상처입거나 핍박받거나............더 나아가서 벗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최경태의 작업은 '교복입은 소녀가 괴물에게 핍박당하는' 봉준호의 괴물과 완벽하게 대칭적이다. 무감동해진 대중들을 자극하기위해서 최선생님의 교복입은 소녀라는 소재선택은 너무나 탁월했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2000년대초 소녀,여고생 연작은 전량 압수,소각처리되었고 최선생님은 사법처리 되셨기때문이다.

어쨌거나 이로써 성공이다. 많은이들은 뜨끔했고 광야에서 외치는 어느 화가의 입을 틀어막으려했다는건 그만큼 그가 위험하고도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했다는 증거니까.

 

 그 뒤로 일어난 선생님의 화풍 변화가 주목할만하다. 분서사건 이전의 여고생들의 눈빛을 보면 몹시 불편하다. 아이들의 눈빛은 쾡하고 찌르는듯 하다. 자못 불량해 보이는 이 아이들의 모습은 일견 최경태 작가를 닮아있기도하다. 지갑속의 만원짜리에 그려진 세종대왕이 운보 김기창의 자화상이라는 말처럼 그림속의 모델이 화가의 얼굴을 닮는게 드문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 아이들이 최화백의 그 공격적인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얼굴은 대한민국 사회를 질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든다. 다분히 정치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이라고 할 수 있다.

 

 


최경태 - 자화상(부분) 과 여고생 시리즈 (2000-2001)

 


 

새디스틱몽키 연작(2004)

 

 

 첫번째 포르노그래피전 이후 모든 작품이 압수, 소각되고 형까지 치른뒤 최선생님은 한동안 자기검열에 빠져 한동안 나체를 그리지못하셨다고 한다. 고작 할수 있었던게 착의상태에서 수갑이나 개목걸이같은 소도구로 에로티시즘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거나 그림옆에 '나는 너와 하고싶다' 같은 텍스트로 메세지를 대신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런 과도기를 지나 최화백의 소녀들은 급격히 변해간다. 아이들은

더 섹시해지고 예쁘장해졌다. 눈을 내리깔고 아랫입을을 지긋이 깨문채 '오빠 나랑 한번 하자' 하는

듯한 모양새로 우리를 바라본다. 양식적 갈래를 굳이 따지자면 분서사건 이전의 소녀들이 민중판화적 '깔깔함'이 남아있는 표현주의였다면 2004년 이후의 소녀들은 고전적인 사실주의 묘사다. 사진을 보고 그대로 정밀묘사한 소묘처럼. 실제로 최선생님께선 어린 아마츄어들을 모델로 섭외해서 사진을 찍고 그걸 자료삼아 작업하신다.

 

 

 
 뉴욕에서 열린 개인전(2007.5) 포스터

 

 분서 이전의 소녀들은 스스로 대한민국을 욕하는 창(矛)과 같았다. 대한민국의 썩은 치부를 째기위해 일부러 날을 세운 매스같은 느낌이었다. 2005년 이후의 소녀들은 훨씬더 유해졌고 야해졌다. 이제 칼이 아니라 그냥 보지 그 자체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게 더 좋다. 더 자연스럽다. 억지로 개한민국이 썩었다고 말하려는 듯한 눈빛이 아니라 그 자체가 썩은 대한민국의 일부분인 자기지시적인 모습이다. 더 야하고 더 진실해진만큼 메세지는 더 분명하게 와닿는다.

 

이전의 소너들이 대한민국이 썩었다고 입으로 말하고 있다면

지금의 소녀들은 대한민국의 썩은 모습 그자체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후자의 것이 더욱 높은 전달력과 호소력을 가진다.

 

소녀들이 야해지고 최선생의 터치가 미려해질수록 현실의 반영은 정확해진다.

 

 


최경태 - 스케치 

선은 미려하고 소녀들은 더 요망해보인다. 그만큼 대한민국에 대한 묘사는 정확해진다.

 

 

 

그러나 최선생님이 단순한 "물신 자본주의에 어린아이들까지 일그러진 대한민국의 현실을 꾸짖기위해 자극적인 표현양식을 선택하신 도덕적인 투사" 셨다면. 나는 오히려 그분을 싫어했을것이다. 위선적이라면서. 최선생님은 그보다 앞서 그저 소녀들을 좋아하고 탐닉하고 싶어하는 한명의 욕망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좋아하는것이 또 훌륭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컨테이너라는걸 자각하고 계시는 위대한 변태다. 그래서 나는 최선생님을 존경한다. 사회적 메세지나 운동이전에 나에게 너무나도 절실한 에로티시즘적 코드를 공유해주신 최선생님의 글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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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아다라시판타지 2004-12-16 최경태

 

나는 이 말 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당근 그녀들도 알고잇을거고..

CF나 영화 드라마에서 고딩의 활약- 자본주의 메카니즘.
아다라시 이미지의 상품성은 위력이 잇지..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교복 비스므리한 것만 나오면

고정!
문근영의 쪼그려앉기 중딩 사각팬티 노출은 친절하신 피디님의 써비스. 특히 비에 흠뻑 젖은채 응급실에 실려온 문근영의 런닝과 속치마 차림은 거의 죽음이엇지! 

일본고딩: 스커트가 짧고 넓다. 당연히 팬티노출 컨셉(포르노의 과도한 교복이나 실제나 별반 다르지 않다)  브라우스는 헐렁하다- 순진해요. 만화 같은 다리를 만들기위해 루즈삭스-귀엽기도 하죠..
우리는 순진하고 가와이하며, 아다라시지만, 야하기도 하답니다-하고싶지?  실제 고딩포르노의 연출자들은 어려보이고 귀여운 모델을 찾아낸다. 하지만 일본서도 미성년자 포르노는 당근 불법이다. 모델들은 모두 19세 이상이다 (불법거래되는 다큐는 제외) 그저 고딩의 이미지를 연출할 뿐!

한국고딩: 치마가 타이트하다 (학교는 치마의 길이를 규제한다-정말 쓰데없는 규제다) 팬티라인이 치마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역시 서비스다.  브라우스 역시 입고 꼬맨듯 낀다. 특히 고 1 때 줄인 교복을 고 3 때 까지 입는 고딩들이 잇는데(일부러 그런다) 죽인다.그야말로..가슴이 빠방한 애들은 옆구리가 움직이기 불편한정도로 타이트한데 - 아저씨들 넋이 나가는것은 당연! 브래지어 끈이 도드라져..그 치마를 입고 버스를 탈때 보면..안타까운 에로티시즘이..교복이쁘게(섹시하게) 입기의 절정은 춘추복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을 줄인다. 긴팔브라우스의 팔부분만 타이트하게하고. 조끼는 끼게 입는다..규제를 피해 최대한 효과를 보려는.. 코르셋의 "조임" 페티시와 반디지의 상상까지 가능하다. 교복이미지의 최고는 물에 젖은 하복이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점심에 비가 오면 여고앞에 진을 쳐라! 운이 좋으면 비에 젖어  달라붙은 교복의 모습을 볼수잇다.  그녀들은 "교복아다라시" 프리미엄 이미지를 몸으로 느끼고 잇다.

저는 고딩의 교복보다는 포르노 고딩이미지에 탐닉하고 잇고요..
나를 못견디게 하는것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와배우의 포르노를 쓰레빠 끌고 아무때나 비디오가게에 가서 볼수 없다는데 잇다. 순전히 아차하는 순간에 자랑스런 대한민국에서 태어낫기 때문인데..이부분이 억울하다..인터넷은 마스터카드도 없고 여러가지로 선택의 부자유가 잇다. 그러고 보니 인터넷은 되고 국내 포르노 제작은 않되네..흐흐 이렇게 상도덕이 불공평하다니..게다가 글로벌 시대라는데..

국내 에로비디오중에는 처제의일기 시리즈와 자유학원 시리즈가 교복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자유학원은 주인공이 고딩은 아니고 학원생인데 국적불명의 교복을 입고 나온다. 쪼그려앉기 다리벌리기로 팬티노출 서비스는 하는데, 실제 그걸할때는 교복을 모두 벗는다. 카메라가 간간히 벽에 걸려잇는 교복을 보여주면서 지금 하고잇는 여자가 교복을 입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친절을 베푼다 - 일본의 고딩포르노는 섹스를 할때 거의 절대로 교복을 모두 벗지 않는다. 하다못해 루즈삭스라도 신고 하기때문에 지금 하고잇는 그녀가 바로 고딩이다 라는 사실을 항상 알려준다..이 얼마나 정직한가!  처제의일기는 처제가 고딩은 고딩인데(교복을 입고 자전거로 학교인듯한 곳을가는 장면) 영화 에서는 그녀가 고딩이라는 사실을 알여주는 구체적인 장면은 없다 나는 궁굼해서 "빨간고추"의 연출자 공자관 이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할수 잇엇는데, 대답은 간단하다. 법이 그렇다는 거다. 미성년자와의 섹스를 암시하는 장면은 절대 불가라는 것이다....

나는 이걸 그려야겟다고 생각함! 

실제로 고딩이든 성인이든 폭행하면? 감옥에 간다..
성폭행을 연출하면? 그래서 그 이미지를 공유한다면? 
배우가 교복을 입고 배우인 아저씨와 오랄을 한다..?

그저 생각나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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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은 사회를 엿먹이기전에 솔직하고 진솔한 배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선생님은 누들누드를 그리던 당시의 양영순이나 구속이전의 마광수를 닮았다. 그의 자위행위 자체가 이미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남자가 바로 최경태 선생님이시기에 나는 숭앙한다. 딸딸이로 세상에 엿먹일 수 있었던 남자는 역사이래 디오게네스와 최경태선생님 뿐이다!

 

 부디 최선생님이 유명해지셔서 훗날 내가 '씨발 이제 좆도 모르던 것들이 어디서 주워듣고 최경태 최경태하고 아는척이야, 꼴뵈기 싫어'하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아니다, 작년부터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어 요즘 그림값이 많이 올랐는데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근사한 집을 짓고 벽에는 최선생님 그림을 잔뜩 사다 걸어야지" 하는 내 소박한 꿈이 무너질수도 있겠구나.

 

괴롭다.  이 괴로움을 끝내줄 수 있는것은 오로지 하나.,

 

 

 

소녀,, 소녀..소녀!!.... 소녀!!

 

 

 

"예술은 끊임없이 개기는것, 

  사회에 끊임없이 개기는것 !!" (최경태)

 

 

 

(인터뷰에선 선생님께서 "개기는 것" 이라고하셨지만 방송자막이 수정해서 제가 다시 손을 봤습니다.)

 

 

 

 

성지순례 좌표

http://blog.naver.com/sado1984

지금은 휴면중이지만 최선생님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