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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화양연화>의 사랑과 슬픔, 노희경

로드365 2001. 11. 14. 21:19


불륜, 나약한 인간에게 찾아든 잔인한 시험

리첸(장만옥)이 걷는다. 다른 한방향에서 차우(양조위)가 걸어나와 리첸을 느리게 스쳐지나간다. 분명 찰나일 그 순간이 의도적인 느린 속도로 보여진다. 주시하지 않아도, 곳곳에 느림이 있다. 카메라가 느리고, 그들의 걸음이 느리고, 주변의 공기가 느리고, 전개가 느리다. 감독은 계속 느린 화면을 보여주면서 놓치지 말기를 강요하고 서둘러 보지 않기를 강요한다. 느린 화면은 간혹 정지화면과도 같게 느껴진다. 계속된 그 느림 속에서 우리가 본 건 그녀, 그일 뿐 아무것도 없다. 좁은 집의 구조도, 그곳을 장식했던 구조물들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냥 남자와 여자가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걷거나 했을 뿐이다

왕가위의 느림에는 이유가 있다
사랑이 모든 걸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온몸의 촉수가 그를 향해 있던 안타까운 그 시절엔 그가 없는 공간에서도 그의 주시를 받는 것처럼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 날은 다른 사람 앞에서도 웃음이 나지 않아 묵묵부답 입을 닫았었다. 그때, 그 지독스런,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예민함이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보는 내내 되살아났다. 하여, 나도 모르게 자꾸 숨이 죽여지고 마른침이 삼켜지고, 아팠다. 사랑이 믿음보다 눈물보다 먼저 요구하는 것, 그것은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예민함이다. 그 예민함과 관찰은 실제의 시간보다 그 시간의 시간을 훨씬 느리고 길게 한다. 왕가위는 그것을 잡아내고 있다. 지금 그가 뒤에 있다, 섣부르게 휘청이지 말자. 리첸은 흙탕길을 하이힐로 걸으면서도 물이 튀지 않게 한다. 좁은 골목 그들이 앞뒤에서 걸었던 시간은 분명 찰나일 것인데, 온몸의 촉수가 그 시간을 마냥 늘어뜨린다. 차우는 고개를 숙인 듯 해도 리첸의 걸음걸이를 보았을 것이고, 말하지 않아도 앞서 걷는 리첸의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제자리 걸음을 한 것처럼 현실적인 시간과 상관없이 그들은 오래 그 골목을 걷고 또 걸은 것처럼 지쳐 있다. 말하지 않아도 공기로 느끼고,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이 움직여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한다. 찰나의 시간이 영원 같던 경험은 사랑의 기억 속 어디에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수롭지 않는 전화통화가 이어지다 잠시 그가 말을 멈출 때, 내가 그를 언짢게 한 건 아닌가,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 그렇게 괜한 자괴(?)의 미궁으로 빠져들던 그 초조의 몇초 몇분은 분명 찰나가 아니었다. 우리가 차우의 담배연기, 리첸의 작은 웃음, 차우의 흰와이셔츠와 반지르한 검은 머리, 리첸의 홍콩식 드레스와 마른 손가락, 그 사사로운 것들을, 누가 누구를 사랑했느냐 안 했으냐, 그가 그녀를 안았느냐 말았느냐보다 먼저 기억하는 것은 모두 예민함과 관찰에 주안점을 둔 왕가위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 그와 그녀를 통해서만 자기 확인이 가능한 사랑의 독선 때문이다.

왕가위는 틀렸다, 추억이라고 모두 잊혀지진 않는다.
리첸과 차우가 외출을 하고 온 날, 그들은 차 속에서 이런 말을 한다. 누가 우리를 볼지 모른다. 따로따로 가자. 그말에 아무런 이의없이 차우가 내리고, 리첸이 간다. 그러나 차가 떠난 골목 어귀엔 도시에 흔한 도둑고양이 한 마리조차 지나가지 않는다. 다른 남자의 아내를, 다른 여자의 남편을 사랑하는 데는 그만큼 철두철미한 외부에 대한 시선이 경계물로 남아 있다. 이렇듯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한 그들은 절대로 결백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 결백을 주장한다.
리첸 : 사람들이 우릴 볼지도 몰라요.
차우 : 그러면 어때요, 우린 결백한데.
무엇이 결백하다는 것일까. 그가 그녀를 쓰러뜨리지 않는 것, 그들이 만나서 키득거리지 않고 만지지 않은 것, 피치 못할 사정을 제외하곤 서로가 한방에 있지 않은 것, 서로가 한방에 있으면서도 욕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 상대에게 가슴에 맺힐 말, 사랑한다는 고백을 절대로 하지 않는 것. 도대체 그들은 뭐가 결백하다는 것일까. 차우가 회사에 남아 혼자 담배를 피울 때, 우리는 그가 분명 옆집 여자 리첸을 사모함을 안다. 리첸이 흑임자죽을 끓여 그에게 들고 갈 때, 우리는 그 행동이 아픈 옆집 남자에 대한 동정이 아닌, 그리움인 것도 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분명코 결백하지 않다.
마음을 스쳐가는, 단순한 떨림 그 정도는 용서할 수 있는 사회의 관습에 기대서 그들은 동정을 요구한다. 우리를 용서하소서.
영화를 보는 내내 차우의 아내가, 리첸의 남편이 부러워짐은 리첸과 차우의 고뇌가 너무도 안쓰러운 때문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차우는 왜 리첸을 안아주지 않는 걸까. 아무도 듣지 않는데 사랑한다는 그 흔한 고백 한번 하면 어때서…. 마지막 영화의 자막처럼 모두 다 지워지고 사라질 추억이면 그 순간 최선을 다해 서로에게 표현해도 상처는 안 될 것인데. 여기에 왕가위의 잘못된 해석이 있다.
왕가위가 자막에 쓴 문구대로라면 이들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망각의 강에 다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누구는 앙코르와트 사원의 한 기둥에 차우가 입을 대고 한 말이 ‘잊어지더라, 혹은 슬픔도 지나가더라’라고 해석한다. 분명 왕가위의 자막에 그뜻의 해석을 의지한다면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나는 차우가 한 말이 그렇게 깨달은 듯한 문구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차우는 굳이 앙코르와트 사원의 기둥을 찾아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확실히 해서 입을 대고 문구 하나를 묻는다. 그말은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추정해본다. 그가 그곳으로 가기 얼마 전, 그는 리첸으로 여겨지는 전화 한통을 받는다. 거기서 리첸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데, 그는 얼어붙듯 굳는다. 그녀일 것만 같아서다. 아니다라고 말하지 말자. 리첸은 어떤가, 오래 전 지나간 사람의 집구경을 와서 방문만을 열어보고도 눈물이 그렁하지 않던가. 아픔이 사그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차우가 사원 기둥에 남긴 그말이 ‘더는 고통스럽지 않게, 다신 이런 고통이 오지 않게’ 그렇게 아직은 사무쳐 있는 말일 것만 같다.
고름은 째야 아문다는 말이 있다. 후속편을 보지 않아도 리첸의 남편과 차우의 아내는 헤어졌을 것이다. 고름 같은 사랑을 은밀하고 몰염치하게 즐기며 짜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우와 리첸은 어떤가. 그들은 사랑이라는 고름을 그냥 가슴에 채워둔 채, 멍울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이다. 때문에 결코 그들의 사랑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리 된 것은 사회의 관습 때문이다. 그들이 제도에 순종하는 나약하고 평범한 우리 같은 사람들인 때문이다. 우리가 리첸과 차우에게 애정을 준 까닭도 그 때문이다.
몇년이 지나가도 참아지지가 않아서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들은 아직도 결백을 주장할까 생각해본다. 나는 그들에게 결백을 강요한 주변이 마냥 밉다. 내가 만약 그들 곁에 있었다면, 그들에게 결백의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사람들의 편견을 반영하는 말이지만, 차라리 타락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름 같은 사랑, 다 짜내고 잊을 수 있게, 정말 잊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은 신의 잘못이다
왕가위의 전작 <해피투게더>가 우리나라에서 상영불가판정을 받고 그것의 상영의 가당성과 부당성을 논할 때 지면에서 왕가위, 그의 변을 들은 기억이 있다. 자세한 발언은 잊었지만 대략, 그가 홍콩과 대만과 중국 본토를 주인공에 대비시켜 놓았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그 영화는 마냥 게이들만을 다룬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게이들의 영화이든, 국토가 분절(중국의 입장에서 나온 말이겠으나)된 사람들의 상징적 대비이든 이것에 상관없이 난 그 영화의 줄거리에 이끌려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화가 났다. 도대체 야휘와 보영을 누가 만나게 한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 누가 중국을 대변하고, 홍콩을 대변하고, 대만을 대변하는지 그것보다 더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야휘와 보영을 만나게 했는가? 만나서 사랑하게 했는가? 사랑해서 매달리게 했는가? 매달리는 걸 뿌리치게 했는가? 사랑이 사람의 힘으로 좌지우지되는 게 아니라면 그들의 만남이 애초에 그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가 만나서 고통받는 그 대가는 모두 신이 대신 져야 할 짐이다.
<화양연화>의 리첸과 차우의 슬픈 만남 역시, 오롯이 그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닌 신이 함께 나눠져야 할 짐이란 생각이 든다. 리첸의 눈이 머무는 곳에 차우를 두었던 것도, 차우와 리첸이 오래 전 서로가 혼자일 때 서로를 보지 못하게 한 것도, 그들을 서로 사랑하게 한 것도 신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영화는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던져놓고 그것을 풀어가는 해답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왕가위는 <해피투게더>와 <화양연화>에서 그 해답을 모두의 결별로 마무리짓고 있다. 감당하기 어려우니 외면이 상책이었을까. 나라면 어찌했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야휘가 떠나고 좁은 빈 방에서 보영이 담배갑을 보며 통곡하던 모습이, 실제가 아닌 이별연습에서조차 아이처럼 울던 리첸이 나는 다만 너무 안쓰럽다. 그래서 빈다. 신이여, 인간에게 너무 가혹한 사랑일랑 내리지 마소서. 그리고 그들의 아픔이 당신의 실수였다고 말하여 위로하소서, 용서하소서.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것, 남의 여자를 사랑하는 것, 그외 모든 부적절한 관계. 다수의 사람들은 그 은폐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두고 달콤하다거나 자극적이라거나 황홀하다는 표현을 쓴다. 훔친 사과가 맛있다는 고전의 음담패설을 들먹이면서. 나 역시 <화양연화>를 감상하기 전, 그 음담패설의 비릿한 자극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갸웃하게 했던 것이 있다. 그들이 웃지 않는 것. 그들이 웃지 않으니 관객인 나도 웃음이 나질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카메라가 객관적이다 못해 창문 밖으로 빠져 있을 때, 리첸이, 차우가 수줍게 웃는 장면이 딱 한번 있었다. 두 사람 다 입술을 애써 오무린 채 수줍고,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들은 서로밖에는 주시의 상대가 없는데도 풀어지지 못하고, 활짝 웃지 못하고, 멈칫거린다. 불륜이란 그런 것이다. 남들 앞에서는 물론, 상대 앞에서도 끊임없이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 웃음 한번 웃는 게 서로의 사랑을 농락하는 것만 같아서 조심스러워지는 것, 그것이 불륜이다. <화양연화>의 O.S.T를 사면 몇장의 영화사진을 덤으로 준다. 아는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있어, 얻어서 보았다. 그중 한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리첸과 차우의 격렬한 키스 장면을 담은 그 사진은 본 영화 내용엔 없는 장면이었다. 아마, 그 장면을 찍어놓고 왕가위는 붙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입맞춤에서의 리첸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아프게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상상을 더 해보면, 그 입맞춤 뒤에 그녀는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의 즐거움을 앗아가버린 불륜의 대가를 그들은 받고 있었다.
삭제 컷이 아닌, 상영된 영화의 한 장면에서도 그들이 불륜의 대가를 톡톡히 받는 장면은 있다. 이별연습을 한 날, 그들은 택시 안에 있다. 그때, 리첸이 말한다. “오늘밤은 집으로 가지 않겠어요.” 그말은 분명 사랑하는 여자가 그밤 그의 품에 있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말을 들은 차우의 눈을 보았는가? 그는 고통스레 눈살을 찌푸린 채 멍하다, 말은 없다.
입을 맞추는 것도, 사랑하는 상대를 품에 안는 것도, 기쁘지 않을 만큼 그들은 고통스럽다. 만난 게 아프니, 만나서 하는 모든 행위가 아프다. 불륜에 고통받는 주인공은 왕가위의 영화 <해피투게더>에서도 나온다. 더듬어 생각해보라. 서로를 비웃을 때말고 그들이 신이나 즐기며 웃는 장면이 있는지.
내가 왕가위를 좋아하는 이유가 한 가지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그가 불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부각해 동정표를 찍게 하는 재주 바로 그것이다. 누굴 동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자비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돌을 던지는 자 옆에 서서 돌에 맞은 자를 감싸안는 일, 그것도 영화인과 작가의 역할 중 하나가 아닐까.


노희경/ 드라마작가 <거짓말><바보같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