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ㅜ

꾸바음악,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로드365 2002. 2. 6. 21:11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쿠바. 우리에게는 시가와 럼주, 야구 그리고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나라. 그러나 이들 말고도 쿠바가 자랑하는 또 다른 보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Buena Vista Social Club)’이다.

‘환영받는 사교 클럽’ 이라는 뜻을 지닌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쿠바 음악계의 백전노장들로 구성된 아프로-쿠반 재즈(Afro-Cuban Jazz) 그룹. 1997년에 낸 동명의 음반으로 순식간에 세계적으로 30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으며 그래미상을 수상함으로써 세계를 카리브해의 열풍으로 몰아넣었다. 미국, 유럽에서 열렸던 이들의 콘서트는 연이은 매진을 기록했으며, 2000년 호주 올림픽 아트 페스티발의 개막무대를 장식했고, 지난 8월 일본 투어에서는 발매 30분만에 티켓이 동이 나 버렸다. 이름 뜻 그대로 어디에서나 환영받게 된 ‘부에나 비스타’는 이제 세계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음악이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쿠바

쿠바는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일찍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오는 유럽세력의 관문이 되었으며 백인, 혼혈, 흑인 등의 여러 인종이 조화롭게 융화를 이루고 있는 나라이다. 쿠바의 문화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그리고 원주민의 전통이 혼합된 형태인데, 그 바탕에는 수세기 동안 이어진 스페인의 식민통치와 그들이 데리고 온 수많은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존재하고 있다. 백인들은 이들 흑인 노예들을 사탕수수와 담배 재배에 동원시킴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거두었다.

다양한 인종이 섞이면서 발생한 이질적인 여러 문화의 결합과 충돌은 새로운 삶의 양식과 오락거리의 등장을 낳았다. 그 중에서도 쿠바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결과물이 바로 ‘아프로-쿠반 뮤직 (Afro-Cuban Music)’이라고 일컬어지는 쿠바 특유의 음악이다. 콩가와 봉고, 클레이브와 같은 아프리카의 전통 타악기들과 플루트, 바이올린, 트럼펫, 기타 등과 같은 유럽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선율은 서로 어우러져 쿠바 음악에 독특한 요소를 가미해 주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손(son)이라는 음악스타일이며 이것이 쿠바 음악의 뿌리를 이루게 되었다. 쿠바 음악은 제3세계 음악으로서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나 룸바(rumba), 볼레로(bolero), 맘보(mambo), 차차차(cha-cha-cha), 살사(salsa) 등과 같이 오늘날 팝계와 가요계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은 모두 쿠바의 거리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흔히 ‘쿠바인들의 피 속에는 음악이 흐른다’고 말하여지듯, 그들만의 농짙은 색깔과 문화적인 다양성이 가장 아름답게 반영된 쿠바의 음악은 쿠바가 가진 가장 풍부한 자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1980년대 몇몇 실험적인 대중음악가들이 비영어권 국가의 민속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 점차 주목받기 시작한 쿠바의 음악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성공으로 인해 변방의 음악에서 세계 중심의 음악이 되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탄생

원래 ‘부에나 비스타’ 클럽은 1930-4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쿠바의 수도 하바나 동부의 고급 사교장이었다. 이 시기,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의 자본이 고수익을 낳는 사탕수수 재배와 고급 시가 생산을 위해 몰려들면서 카바레, 클럽과 같은 사교장들이 번성하기 시작했고 쿠바 최고의 뮤지션들이 이 곳에 모여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러나 쿠바 혁명이 일어나자 ‘부에나’를 비롯한 여러 클럽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간 백인 손님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연주를 하던 연주자들은 갈 곳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쿠바 음악의 황금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던 1996년, 기타리스트이자 제3세계 음악의 대부로 불리우는 프로듀서 라이 쿠더(Ry Cooder)는 런던에 있는 음반사 ‘월드 서킷’의 사장 닉 골드(Nick Gold)와 함께 아프리카와 쿠바 기타리스트들의 합동연주를 기록하고자 1996년 쿠바로 향하였다. 그러나 함께 오기로 했던 아프리카 연주자들이 비자문제로 인해 파리에 주저앉게 되자, 이 두 사람은 연주자를 모두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여 한 명 한 명 연주자를 끌어모으던 이들은 오디션을 하면서 평균연령 60세가 넘는 노인 연주자들이 들려주는 신들린 노래와 연주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에 지어진 하바나의 허름한 에그램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녹음은 편집없이 라이브로 진행되었고 불과 6일만에 끝이 났다. 앨범은 영화스러웠던 옛 클럽의 이름을 따서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라 명명되었으며 ‘월드서킷/논서치 World Circuit/Nonesuch’ 레이블을 통해 출시되었다. 맘보, 볼레로, 단손 등과 같은 쿠바음악의 본류와 함께 아프로-쿠반 재즈와 라틴 재즈의 진수를 보여준 이 음반은 발매와 동시에 클래식과 팝, 재즈계로부터 열렬한 환호와 찬사를 받았다. 그 후 콤파이 세군도(1907년생, 기타/보컬), 이브라힘 페레(1927년생, 보컬), 루벤 곤잘레스(1919년생, 피아노), 오마라 포르투온도(1930년생, 보컬), 엘리아데스 오초아(1946년생, 기타) 등 쿠바음악의 노장들로 구성된 이 특별한 밴드는 빌보드 차트와 월드뮤직 차트를 강타하며, 1997년 그래미상에서 베스트 트로피컬 라틴 퍼포먼스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와 '파리 텍사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의 명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는 오랜 친구였던 라이 쿠더의 소개로 동명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 이들의 삶과 음악을 조명함으로써 2000년도 아카데미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Viva La Musica Cubana! ? Time

영원히 묻혀버리는 듯 했던 쿠바음악 황금기의 전설적인 음악과 연주는 이렇게 한 장의 음반과 한 편의 영화로 인해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다. 70세를 훌쩍 넘긴 ‘부에나 비스타’의 뮤지션들은 모두가 쿠바음악의 산 증인들이나 다름없다. ‘손’이 아닌 ‘혼’으로 연주하는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1919년생), 쿠바의 ‘냇 킹 콜’과 ‘에디뜨 피아프’로 불리우는 보컬리스트 이브라힘 페레(1927년생)와 오마라 포르투온도(1930년생).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깊은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 이러한 그들의 음악 속에는 식민지배, 혁명, 독재와 경제적 제재 등으로 얼룩진 순탄치 않은 역사,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순수함을 잃지 않은 쿠바인들의 낙천적인 모습이 녹아들어 있다. 카리브해를 닮은 듯 느릿하고 유장한 라틴리듬, 삶의 애환을 묵묵히 담아내는 서정적인 멜로디, 감미롭지만 애수가 깃든 보컬…...음악을 삶이자 동시에 신앙처럼 여기면서 살아왔기에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들려주는 이들의 음악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그윽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2001년 2월 이들은 미수교국인 한국에 순수한 열정과 경이로운 연륜으로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선사한다.

2001년 동아시아 & 호주 투어 일정
 

2월
5 (월) ? 6 (화)
LG Arts Center
한국

8 (목) ? 10 (토)
Tokyo International Forum
일본

13 (화) ? 14 (수)
Hong Kong Cultural Center Concert Hallnbsp
홍콩

18 (일)
Harbour Pavillion
싱가포르

21 (수)
Perth Entertainment Centre
호주 퍼스

24 (토) ? 25 (일)
Melbourne Concert Hall
호주 멜버른

27 (화) ? 28 (수)
Sydney Opera House Concert Hall
호주 시드니

3월
1 (목)
Sydney Opera House Concert Hall
호주 시드니

2 (금)
Sydney Opera House Forecourt (야외공연)
호주 시드니

4 (일)
Brisbane Convention and Exhibition Centre
호주 브리스베인



내한 뮤지션 소개

Ibrahim Ferrer 이브라힘 페레 :
1927년생, Lead Vocal
Ruben Gonzalez 루벤 곤잘레스:
1919년생, Piano
Omara Portuondo 오마라 포르투온도:
1930년생, Vocal
Orlando ‘Cachaito’ Lopez 올란도
‘카차이토’ 로페즈:1933년생, Double Bass
Manuel “Guajiro” Mirabal 마누엘
‘구아히로’ 미라발 :1933년생, Trumpet/
ClaveLazaro Villa 라사로 빌야:1953년생, Backing Vocal/Maracas

그 외

Alejandro Pichardo ? 1941년생, Trumpet/Guiro
Jesus “Aquaje” Ramos - Trombone
Demetrio Muniz - 1948년생, Trombone
Antonio Francisco Jimenez Sanchez ? 1946년생, Tenor Sax
Rafael “Jimmy” Jenks ? 1959년생, Tenor Sax
Javier Zalba ? 1955년생, Alto Sax/Flute
Pantaleon “Sanchez” - 1923년생, Alto sax
Ventura Gutierrez Garcia ? 1953년생, Bariton sax
Angel Terry ? 1956년생, Congas
Filiberto Sanchez ? 1938년생, Timbales
Robertico “El millionario” ? 1932년생, Bongos/Cowbell/Guiro
Adolfo Pichardo Perez ?1939년생, Piano

이브라힘 페레 Ibrahim Ferrer : 1927년생, 보컬리스트

72세에 첫 데뷔 앨범 를 발표하고, 73세에 라틴 그래미상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상을 수상한 이브라힘 페레는 언제나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로 인해 ‘뮤지션 중의 뮤지션’이라 여겨진다. 손(son)과 볼레로(bolero)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평가받는 이브라힘은 쿠바 안팎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누렸던 ‘부에나 비스타’의 다른 뮤지션들과는 달리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가 ‘부에나’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이제는 인간문화재급의 아티스트가 되었다.

이브라힘은 1927년 산티아고의 한 사교댄스장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어려서부터 먹고살기 위해 거리에서 노래를 해야 했다. 1941년 산티아고의 한 악단에 들어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1950년 파초 알롱소(Pacho Alonso)가 이끄는 밴드에서 리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전업 뮤지션이 되었으며 쿠바음악의 전설적인 존재인 ‘오르케스타 데 차핀 Orquesta de Chapin’과 ‘베니 모레 Benny More’의 밴드에서 객원주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59년 알롱소의 밴드는 ‘로스 보쿠코스Los Bocucos’라고 이름을 바꿔 하바나로 진출하였으며, 커피원두를 분쇄하는 소리에 기원을 둔 필론(pilon) 리듬을 개척하면서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브라힘은 이들과 20년 이상을 함께 활동하며 손(son)과 구아라차(guaracha) 그리고 빠른 템포의 곡들을 불러 인기를 누렸지만, 자신의 솔로 앨범 녹음을 하기까지는 40여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하루하루의 연주로는 생활을 지탱하기 힘든 쿠바의 다른 뮤지션들처럼 이브라힘도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이 하바나 구시가지에 위치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소량의 연금으로 생활을 지탱하고 있었으며, 부족한 부분은 구두를 닦는 것으로 꾸려나가고 있었다. 1996년 쿠더와 함께 ‘부에나 비스타’의 앨범작업을 추진하면서 지나간 시절의 볼레로 가수를 찾고있던 프로듀서 후안 마르코스 드 곤잘레스(Juan de Marcos Gonzalez)는 마침 하바나의 거리를 한가로이 걷고 있던 이브라힘을 발견했다. 그리하며 이브라힘은 ‘부에나 비스타’ 앨범의 ‘도스 가르데니아스 Dos Gardenias’를 통해서 진정한 볼레로 가수로서의 재능을 활짝 펼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나자신을 채찍질하여 왔지요. 그리고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나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1962년에 유럽에 갔었던 것이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졌을 때 나는 파리와 동유럽에서 파초 알롱소의 밴드와 함께 연주하다가 발이 묶였었죠. 모든 것들이 해결되고 나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35년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지금 나는 삶에 대한 의욕이 넘칩니다. 나는 지금 노인의 몸으로 청년 시절에 꾸었던 꿈 속을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루벤 곤잘레스 Ruben Gonzalez : 1919년생,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나 의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신 반세기가 넘는 음악생활을 통해 독창적인 피아노 소리를 확립한 그는 아프로-쿠반 스타일 피아노 연주의 개척자로서 쿠바 음악계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1919년 산타 클라라에서 태어난 루벤은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15세의 나이에 시엔푸에고(Cienfuego) 컨서바토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 낮에는 의사로 일하고 밤에는 음악을 하려는 계획으로 의대에 진학하였으나 너무나 강렬한 쿠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하바나로 가서 전업 뮤지션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있는 모든 쿠바 음악의 연원을 찾을 수 있는 음악의 황금기였던 1940년대, 이 시기에 걸쳐 쿠바음악에 혁명을 일으켰던 천재 음악가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즈(Arsenio Rodriguez)는 젊은 피아니스트 루벤의 연주를 우연히 듣고 감탄하여 함께 연주할 것을 제의하였다. 아르세니오는 많은 조언을 통해 루벤의 연주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쿠바음악의 싱코페이션(syncopation)을 터득하는 동시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연주를 해야한다고 말했다. 또한 다른 연주자들이 무엇을 하건 상관하지 말고 누가 듣더라도 루벤 곤잘레스의 음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자기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라고 충고하였으며, 루벤은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갔다.

그리하여 루벤은 이미 40-50대에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로 평가받는 루이즈 릴리 마르티네즈(Luis ‘Lili’ Martinez), 페루친(Peruchin)과 함께 트리오를 구성하여 활동하면서 미국 재즈의 자유로운 즉흥연주와 아프리카 리듬을 결합시킨 맘보(mambo)를 발전시킴으로서 쿠바음악의 미래를 형성해가기 시작하였다. 그 후 탱고 뮤지션들과 함께 파나마와 남미를 순회하다가 하바나로 돌아와 ‘트로피카나’와 같은 클럽에서 연주를 계속하던 루벤은 1960년대 초 차차차(cha-cha-cha)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엔리끄 요린(Enrique Jorrin)을 만나 25년간을 함께 활동했으며, 그가 죽은 80년대 중반 은퇴하였다.

그 후 하바나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습기에 벌레까지 먹은 피아노를 집에서 치워버린 관계로 가끔 피아노를 치러 에그램 스튜디오에 들르곤 했다. 마침 그 곳에서는 ‘부에나’의 음반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쿠더와 프로듀서들은 루벤이 매우 특별한 피아니스트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관절염을 앓으며 몇 년 동안 피아노도 없이 지냈던 루벤의 다시 되살아난 터치와 테크닉은 놀라운 경지였고, 라이 쿠더는 “내 일생동안 들어본 중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에게 이끌려 50년이 넘게 뮤지션으로 활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지 않았던 첫 솔로 앨범 앨범을 연이어 녹음하게 된 루벤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나와서 스튜디오 문이 열리길 기다렸고, 자신이 좋아하는 곡과 연주자들을 손수 골랐다. 그 결과 쿠바 음악의 모든 형식과 리듬이 모여 놀랍도록 생생한 사운드가 탄생했으며, 77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기차고 역동적인 연주는 평론가들의 극찬을 얻음으로서 루벤을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반열에 올라서게 하였다. 세계 각국에서 연주하는 지금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 여기는 루벤은 여생의 매일매일을 연주하며 보낼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오마라 포르투온도 Omara Portuondo : 1930년생, 보컬리스트

‘부에나 비스타’의 유일한 여성 멤버인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쿠바 음악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뮤지션으로, 쿠바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볼레로 가수로 꼽힌다. 오마라는 50여년이 넘게 프로 뮤지션 생활을 하며 쿠바음악을 세계에 알리는데 앞장서 왔지만, 역시 이브라힘 페레와 마찬가지로 <부에나…> 음반이 1997년 그래미상을 수상한 연후에야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오마라의 가족사를 살펴보면 마치 신대륙 개척사의 무용담을 듣는 듯 하다. 부유한 스페인계 집안 태생인 오마라의 어머니는 같은 계층의 사람과 결혼하는 대신에 흑인이자 쿠바의 국가대표 야구선수였던 그녀의 아버지와 사랑에 빠져 도망을 쳤다. 당시 쿠바에서 흑백간의 결혼은 인정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가정은 평화와 화합의 장소였고 여느 쿠바 집들처럼 음악이 넘쳐흘렀다. 가난해서 축음기조차도 없었지만 오마라의 부모는 언제나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것이 오마라에게는 음악레슨이 되어 주었으며 지금의 주요한 레퍼토리를 형성하게 하였다. 오마라의 부모가 자주 불렀던 ‘라 바야메사 La Bayamesa’와 같은 곡은 콤파이 세군도의 연주로 <부에나…> 음반에 담겨있기도 하다.

오마라는 언니와 함께 하바나의 전설적인 클럽인 ‘트로피카나’에서 무용수로 활동을 시작해서 주말마다 아메리칸 재즈 스탠더드 곡들을 노래하였다. 이 당시 오마라와 함께 연주하였던 뮤지션들의 연주스타일 - 아메리칸 재즈의 영향을 받은 쿠바풍의 보사노바 ? 은 필링(스페인어로 filing)이라 불리우는 것으로 오마라는 곧 ‘필링의 피앙세’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오마라는 여성 보컬 콰르텟인 ‘쿠아르테토 라스 다이다Cuarteto Las D’Aida’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냇 킹 콜, 에디뜨 피아프와 함께 공연하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1959년 오마라는 아메리칸 재즈와 쿠바음악에 두 분야에 걸쳐 모험적인 시도를 한 솔로 데뷔 앨범인 <마지아 네그라Magia Negra>를 냈으며 동료들과 함께 미국 마이애미로 가서 활동하다 쿠바가 미사일 위기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고립되기 시작할 무렵, 같이 활동하던 언니를 미국에 남겨두고 서둘러 쿠바로 돌아왔다.

혁명 후 몇 년 동안은 카스트로가 사회주의적 이상향으로서 추구한 서방세계와의 단절로 인해 쿠바역사에 있어서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음악에 있어서도 많은 뮤지션들이 망명을 해버려 채워지기 힘든 간격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오마라는 쿠바에 남아 밴드와의 공연이나 음반작업을 계속하였다. 사탕수수 수확기록을 세우기 위해 전국민이 들판으로 징집되어 일하는 동안 이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으며, 몇몇 사회주의 국가와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오마라는 1995년 다른 음반작업으로 인해 쿠바에 왔었던 라이 쿠더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오마라가 <부에나 비스타> 음반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에그램 스튜디오에 우연히 들렀을 때 쿠더는 즉석에서 그녀를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 쿠더는 볼레로 곡인 ‘베인테 아뇨스Veinte Anos’를 콤파이 세군도와 함께 불러달라고 오마라에게 요청하였고, 이 곡은 이 앨범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그 후 오마라는 다음 앨범 에도 참여하였고 이어서 그녀가 메인으로 참여한 세번째 앨범 가 나왔다.

‘쿠바의 에디뜨 피아프’라 불리우기도 하는 오마라는 쿠바 음악계가 오랫동안 품어온 보석과도 같은 존재이다. 넓은 음역과 유연함을 갖춘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오마라는 손(son), 발라드(ballade), 볼레로(bolero), 구아라차(guaracha)에서 재즈에 이르는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특유의 음색과 표현력으로 능란하게 소화해낸다. 또한 청중들과 음악적인 교감을 나누는 데에도 뛰어나, 진솔하면서도 열정이 담긴 노래로 감동을 주곤 한다. 지금은 꽉짜인 스케줄로 세계 각국에서 공연하고 있지만 국보급의 보컬리스트로서 ‘트로피카나’를 비롯한 하바나 일대의 클럽에서도 정기적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오마라 포르투온도는 이제까지 고립되어온 카리브해의 작은 섬 쿠바에서 떠오른 세계적인 디바가 되었다.

“나는 ‘부에나 비스타’ 열풍이 생겼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음악은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지요. ‘부에나…’는 두 가지 면에 있어서 세계인의 감성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이지요. 사람들은 사랑과 행복을 느끼고 싶어하고, 쿠바의 음악이 바로 그것들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 아프로-쿠반 뮤직(Afro-Cuban Music)에 대하여

쿠바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 불과하지만 음악적으로는 전세계에 놀라운 영향력을 미쳐왔다.

살사나 라틴 재즈, 그리고 낭만적인 볼레로와 같은 음악의 뿌리는 모두 쿠바음악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대부분의 쿠바 음악은1930-40년대 뉴욕에서 Machito, Mario Bauza등이 이끄는 밴드에서 연주했던 쿠바 뮤지션들에 의해 알려졌다. 1959년 일어난 쿠바혁명과 뒤이어진 수교단절로 연주의 명맥은 뉴욕과 마이애미 또는 푸에르토리코로 대거 망명한 쿠바인들에 의해 이어졌다. 새로운 도회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은 음악은 ‘다시 만들어진 쿠바의 댄스 음악’보다는 상업적인 음악장르로 정착하기 위해 살사(salsa)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살사’라는 단어는 캐러비안 스타일의 음악을 일컬어 라틴계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단어로 오늘날 쿠바의 댄스음악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지만 쿠바에서는 쓰이지 않는 단어이다. 한편 쿠바섬 안에서도 바깥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 쿠바의 음악이 진화해가고 있었다. 그 후 진취적인 몇몇 레이블 음반사의 노력으로 쿠바의 음악은 바깥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보통 ‘쿠바 음악’이라고 할 때는 쿠바섬의 음악 뿐만 아니라 미국등지로 망명한 쿠바인들의 음악도 동시에 일컫는 것으로 본다.

쿠바음악을 대표하는 손(son)은 음악 스타일과 댄스 스타일을 동시에 일컫는다. 손은 다양한 스타일의 쿠바음악을 형성하는데 근간을 이루었다. 손을 정의하자면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기타, 콘트라베이스와 보컬 뿐만 아니라 트레스(tres:리드믹한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는 쿠바의 2현 기타), 봉고(bongo), 클라베스(claves : 2개의 스틱으로 된 타악기로 비트를 맞추기 위해 거의 모든 쿠바음악에서 사용됨) 등과 같은 악기편성으로 연주되는 전통적인 음악이다.

쿠바의 또다른 전통음악 룸바(rumba)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원시적인 리듬에 바탕하여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복잡하고도 강력한 폴리리듬(2개 이상의 리듬을 동시에 사용한 것)으로까지 발전된 것이다. 단손(danzon)은 아프리카 리듬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나 손보다는 클래식 음악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았다. 차차차(cha-cha-cha)는 E.Jorrin(쿠바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악단 지휘자)이 단손을 개조한 것으로 1950년대 중반에 세계적으로 유행하였다. 단손을 연주하는 밴드는 샤랑가(charanga)라고 불리우는데 플루트, 바이올린, 피아노, 베이스, 파일라(paila), 팀발(timbale), 귀로(guiro :호리병박 모양으로 된 과실의 딱딱한 껍질을 새겨 자국을 만들고 그 자국을 철사 브러시로 문질러 소리가 나게 한 악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차차차나 손도 연주한다.

1940년대 들어 손과 샤랑가에서 또다른 스타일의 음악이 파생되었는데 콩가 드럼과 브라스가 추가되어 사운드가 좀 더 묵직해졌으며 맘보(mambo)라고 불리웠다. 이러한 스타일의 음악을 연주한 뮤지션으로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Arsenio Rodriguez와 보컬리스트 Beny More, 베이시스트 Cachao 등이 있는데 이들의 즉흥적인 잼 세션이나 데스까르가(descarga)는 50년대의 아프로-쿠반 재즈 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언급된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이 혼합되어 형성된 쿠바음악은 오늘날 댄스음악으로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경향으로서 주로 리듬면에 있어 재즈나 대중음악에 음의 소재(素材)를 제공하여 줌으로써 세계적인 음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료제공:LG아트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