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ㅜ

꾸바 음악

로드365 2001. 11. 14. 21:10
담배 피우면서 꾸바 음악 탐사하기 (1)  - Intro : 꾸바 음악은 라틴 음악과 왜 다른가?

연휴 첫날 저녁에 TV를 보니 김희선이 오랜만에 나왔다. 뜻밖에도 그녀의 무대는 노래로 시작되었는데, 그녀가 부른 곡은 살세로(salsero) 마르끄 안쏘니가 부른 "Di Melo"였다(그녀의 '연기'가 연기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나로서는 그녀의 '노래' 역시 노래인지 아닌지 헷갈렸지만). 방송자막에 의하면 이 노래의 장르는 '차차차'다.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가 진짜 차차차가 아니듯이, 이 곡도 차차차라기보다는 그냥 '라틴 팝'이라고 불러야 할 곡이다. 차차차의 고향은 꾸바이지만 이 히트곡에게 고향을 묻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5년 전쯤 신승훈과 클론이 유행시켰던 맘보(mambo)도 마찬가지고, 2년 전 임현정의 히트곡 "첫사랑"의 리듬은 룸바(rumba)라고 알려져 있다. 맘보, 룸바, 차차차 모두 '꾸바'라는 이름과 불가분한 음악이다. 그 뿐인가 작년 'B양'이 불렀던 히트곡 제목에 명시된 라틴 팝의 주류인 살사(salsa)도 꾸바와 무관하지 않다(물론 그 노래 역시 살사 리듬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음악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은 '다르게' 들린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하긴 신중현의 음악과 클론의 음악을 똑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의 장르는 '꾸바 음악(cuban music)'이라고 불린다. '꾸바 음악'이란 무엇인가. 그건 그냥 라틴 음악의 한 가지 아닌가. 꾸바 음악이란 '꾸바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보통명사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를 수반하는가.  

'꾸바 음악'이라는 용어는 미국 등지에서 1940-50년대까지 사용되는 용어였다. 그때는 '볼룸 댄스 음악'인 라틴 음악의 하나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던 음악이었다. 당시의 아바나는 '카리브해의 라스 베가스'로서 국제적 향락문화의 본산이었고 그래서 아바나에서 유행하는 음악들은 미국으로 쉽게 수출되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 현재 라틴 음악의 주류로 자리잡은 살사(salsa)를 들어봐도 1940-50년대 유행했던 꾸바 음악의 영향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입문서들에는 '살사의 기원은 꾸바 음악'이라는 내력이  따라다닌다. 이는 꾸바 출신의 살사 음악인들이 강조하는 점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꾸바계인 '살사의 여왕' 셀리아 크루즈(Celia Cruz)에 의하면 살사라는 용어는 "꾸바의 손(el Son)을 미국 시장에서 마케팅하기 위한 상업적 조어"라고 잘라 말한다. 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금시초문인 단어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멀쩡한 명칭을 놓아두고 개명을 한 것일까? 여기에는 상업적 마케팅이라는 이유 외에도 꾸바가 1959년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미국의 적성국(敵性國)이 되었다는 사실이 크게 작용한다. 이때부터 '꾸바 음악'이라는 명칭은 1960-70년대 남한에서 '북한 음악'이라는 단어가 주었던 무시무시한 느낌이나 비슷했던 모양이다  

또한 '살사의 탄생지가 꾸바'라는 사실은 '재즈의 고향은 뉴올리언스'라는 말이나 비슷하게 되었다. 음악이 한번 유통되기 시작하면 특정 집단에 배타적으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살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오늘날 살사는 꾸바라기보다는 뿌에르토 리꼬(정확히 말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뿌에르또 리꼬계 미국인)의 정체성과 보다 긴밀하게 연관되는 씬을 이루고 있다. 나아가 뿌에르또 리꼬 뿐만 아니라 까리브해의 섬나라들과 중앙 아메리카 지역 전체의 정체성으로도 확대되기도 한다. 현재 살사의 베테랑들 중에서 셀리아 크루즈(Celia Cruz)는 꾸바계, 띠또 뿌엔떼스(Tito Puentes)는 뿌에르또 리꼬계, 루벤 블라데스(Ruben Blades)는 빠나마계다.주)  

주) 살사의 지역성(locality)과 정체성(identity)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꾸바와 뿌에르또 리꼬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얄궂은' 운명을 가진 케이스다. 스페인계 식민주의자와 노예 출신의 흑인의 비중이 비슷하고, 인종들 사이의 혼혈화가 진전되어 제도적 인종차별이 없다는 문화적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두 지역은 정치적으로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뿌에르또 리꼬가 커먼웰스(commonwealth)라는 이름으로 미국의 실질적 식민지인 반면(뿌에르또 리꼬 주민들에게는 미국 시민권이 부여된다), 꾸바는 사회주의 독립국이자 적성국으로 '무역제재대상국'이었다. 함께 히스패닉계로 분류되면서도 미국 내에서 꾸바계와 뿌에르또 리꼬계 사이의 관계도 그리 매끄럽지 않다. 참고로 꾸바계의 커뮤니티는 마이애미에서, 뿌에리또 리꼬계의 커뮤니티는 뉴욕에서 가장 발전되어 있다.

그래서 '꾸바 음악'이란 이미 팝 음악의 시스템에 정착한 살사와는 상이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살사가 '라틴 음악'이라는 범주에 속한다면 꾸바 음악은 '월드 뮤직'에 속한다. 그게 무슨 말일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라틴 음악이든, 월드 뮤직이든 음악 장르의 용어는 마케팅을 위한 범주다. 한국에는 아직도 미분화된 대량 마케팅(mass marketing) 밖에는 별다른 마케팅 전략이 없지만, 영미의 '현대화된' 음악산업 시스템은 전문화된 수요층을 겨냥하는 틈새 마케팅(niche marketing)을 발전시켜 왔다. 라틴 음악도, 월드 뮤직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라틴 음악의 수요층과 월드 뮤직의 수요층은 '다르다'. 라틴 음악이 미국 내의 히스패닉계 '서민'들을 겨냥한 '대중' 음악이라면, 월드 뮤직은 소수의 호사가들을 위한 음악이다. 당연히 공연장의 규모나 분위기도 상이하다. 마르끄 안쏘니의 공연이 록 콘서트와 비슷하다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공연은 재즈 콘서트(혹은 클래식 콘서트)와 비슷하다.

물론 라틴 음악의 청중과 (월드 뮤직으로서) 꾸바 음악의 청중 사이에 중복이 없으라는 법은 없다. 또한 꾸바 출신의 젊은 음악인들이 라틴 음악의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할 전망도 내려볼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고립되고 폐쇄되어 왔던 꾸바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미지수지만 대체적으로 개방의 방향으로 나간다면 음악산업의 시스템에도 변화가 동반될 것이다. 미국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특징으로 인해 꾸바 사회의 개방은 문화적 교류를 급진전시킬 것이다. 이는 마이애미처럼(어느 정도는 뉴욕도) 꾸바계 주민들이 많은 곳에서는 이미 진행 중인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월드 뮤직의 하위장르로서 꾸바 음악'에는 특정한 이미지가 동반된다. 음악인들은 오랫 동안 음악과 함께 살아온 나이든 인물들, 말하자면 '1959년 이전의' 분위기를 간직한 사람들이다. 40년 가까이 폐쇄된 사회에서 음악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를 알 도리 없는 사람으로서는 이상하지 않은 반응이다. 이들의 음악은 당시에는 천대받는 음악에 속했을지 모르지만(어쨌든 '사교 댄스 클럽'에서 연주되던 음악이므로) 지금은 고귀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앞으로도 흔히 보고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아니라 언제 아스라히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음악이다. 고약한 발상이지만 연주인들이 사회주의 혁명 이후 이런저런 고초를 겪은 사연이 첨가되면 음악이 주는 감동이 배가될 것이다.  

2000년 한국에서의 월드 뮤직 붐의 선봉장 역시도 꾸바의 할아버지(그리고 할머니)들이었다. 다름 아니라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 말이다. 작년 연말 공중파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장르별 연말 결산을 하는 특집 방송에서도 이 점이 특히 강조되었다. 이를 두고 "2000년 한국에서 월드 뮤직 붐은 거품이다, 1990년대 초반의 '재즈', 1990년대 중반의 '록', 1990년대 후반의 '인디'처럼"이라는 말로 끝내버리면 너무 맥이 빠진다. <서편제>의 이상 열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민족성', '냄비근성'을 들먹이면 더욱더. 실제로 꾸바 음악은 '북한 음악 붐의 전주곡'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는 게 생산적일 것이다.

(너무 자주 언급하는 느낌이 있지만) 데이비드 바이언(David Byrne)은 1991년에 발매된 꾸바 음악의 컴필레이션 음반의 제목을 "Dancing with the Enemy"라고 붙였다. 그는 라이너 노트에서 "정치는 우리의 적인가? 정부는 우리의 적인가? 공산주의자들도 좋은 시간을 보냈을까? 우리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음악은 공산주의적인가? 음악은 자본주의적인 것일 수 있는가? 당신은 어떤 경우에 음악을 더 잘 즐기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이 음악들은 쿠바인들이 지난 30년간 춤춰왔던 음악이다. 이제 당신의 차례다"라는 것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공연장을 보러가는 한국인들은 어떤 대답을 보일까.

그렇지만 바보스럽게도 나의 대답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꾸바에서 이제까지 어떤 음악이 유행해 왔는가를 추적해 보는 것이다. '사회주의 나라의 음악'으로서의 꾸바 음악이 아니라, 반드시 꾸바에서 여기까지 전해져 온 음악 뿐만 아니라 이미 국제적 댄스음악이 된 룸바, 맘보, 차차차는 물론 단존(Danzon), 라틴 재즈(혹은 아프로-꾸반 재즈), 손(son), 팀바(timba), 송고(songo)에 이르는 복잡하고도 풍부한 음악적 자산을 탐사해 보는 작업이다. 꾸바인을 그릴 때  빠지지 않는 담배 한 대 피운 다음에. 20010131





담배 피우면서 꾸바 음악 탐사하기 (3) : 여기 손이 온다 Here Comes the Son

Son, Son, Son Here it comes!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지겨운 느낌마저 있지만 아무래도 이들의 작품이 가장 구하기 쉬운 텍스트가 되어 버렸으니 이어서 해보자. 영화도 드디어 오늘(3월 1일) 개봉하니까. 무엇보다도 이들의 음반 부클렛에는 한국의 대중가요 음반들처럼 개별 곡들의 장르(혹은 스타일)가 친절하게 적혀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의 음반에는 '외국' 음악의 장르가 적혀 있지만 이 음반에는 '자국'의 음악 장르명이 적혀 있다.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손(son), 단손(danzon), 과히라(guajira), 볼레로(bolero), 아메리까나 인플루엔차(americana influenza) 등이다. 간단히 해설하면 아메리까나 인플루엔차는 재즈, 블루스, 고스펠 등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스타일이라고 치고, 과히라와 볼레로도 오마라 뽀르뚜온도의 음반을 평하면서 대략 언급했다. 단손은 일단 맘보나 차차차의 기원을 이루는 스타일이라고 이해해 두면 대세에 지장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손이다. 실제로 1990년대 후반 꾸바 음악의 르네상스는 손(son)의 부활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전에도 몇 차례 언급했지만 손은 현재 라틴 팝의 주류의 하나가 된 살사(salsa)의 기원이 되는 음악이고,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의 음반에서 "Chan Chan", "Da Camino a La Vereda", "El Cuarto de Tula", "Candela"가 모두 손에 속한다.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의 손과 마르끄 안소니의 살사의 관계는 머디 워터스의 블루스와 에릭 클랩튼의 블루스 사이의 관계와 비슷하다. 형식과 스타일 면에서는 분명히 관련이 있으면서도 '느낌'이 많이 다르다는 뜻이다. 게다가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의 음반에서 듣는 손과 예전의 손도 느낌이 다르다.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변화가 없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손은 20세기 초 꾸바 동부의 오리엔떼(Oriente) 주의 산악지대에서 탄생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곳 지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만자닐로(Manzanilo), 관타나모(Guantanamo), 산띠아고 드 꾸바(Santiago de Cuba) 등의 도시가 손의 고향이라는 정보가 유익할 것이다. 꾸바의 수도인 아바나가 서북부에 위치한 것을 감안한다면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고 흑인 거주민이 많은 곳이다. 이렇듯 처음 태어났을 때의 손은 지역으로는 지방, 계급으로는 하층, 인종으로는 흑인의 음악인 셈이다. 그 점에서 손은 최초의 '아프로 꾸반' 대중음악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 전에도 대중음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거나 흑인 음악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음악 어법을 가지고 전국적 음악이 된 음악으로는 최초라는 뜻이다.

손은 1차 대전을 겪고 난 뒤인 1920년대에는 수도인 아바나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대중화되었다. 손을 연주하던 그룹은 7인조(septet)였다. 기타, 콘트라베이스, 트레스(기타와 비슷한 꾸바 악기), 트럼펫에다가 봉고, 마라카스, 끌라베의 퍼커션이 추가된 편성이다. 봉고는 손바닥으로 두들겨서 통통거리는 소리가 나게 하는 조그만 북이고, 마라카스는 나무로 만든 케이스에 식물의 씨앗을 집어넣어 손으로 흔드는 악기다. 옛날 가요를 아는 사람이라면 유복성 악단의 봉고 연주와 새샘 트리오의 "나성에 가면"에서 마라카스 연주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손에서 가장 특이한 퍼커션은 끌라베(clave)다. 막대기 두 개로 두드리는 타악기인 끌라베는 이른바 타임 키퍼(time keeper) 역할을 수행한다.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의 "El Cuarto de Tula"를 주의깊게 들어보면 클라베의 역할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클라베의 패턴은 네 비트에 대해 각각 두 번으로 박자를 쪼갠다. 첫 번째 박자에서는 세 번, 두 번째 박자에서는 두 번 타격을 가한다.

아메리카 지역의 대부분의 음악 형식이 그렇듯 손 역시도 '순수한' 아프리카 음악은 않았다. 간략히 설명하면 아프리카의 리듬과 퍼커션이 스페인의 멜로디와 화성 패턴과 결합한 것이 손의 특징을 이룬다. 이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형식을 만들어내었는데, 소네로(sonero)라고 부르는 리드 보컬이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면 소네오(soneo)라고 부르는 합창이 나오면서 '주고 받기(call and response)' 형식이 이어진다. 도식적으로 분해한다면 소네로의 노래가 '스페인 멜로디의 영향'이라면, 주고 받기는 리듬과 더불어 '아프리카 음악의 영향'인 셈이다.  

손 역시 시대가 변하면서 변모했다. 1930년대가 되면 손은 쿠바의 상류 계급까지 확산되었고 쿠바 국내에 머물지 않고 미국 등지에서 댄스 광란(dance craze)을 야기했다. 당시 룸바라고 알려진 음악 스타일 중에는 손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전국적·국제적 확산과 더불어 손은 다소 매끄럽고 온순하게 변해갔다. 그렇지만 1940년대에 다시 한번 변화가 찾아왔다.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 그리고 손 몬뚜노(son montuno)

영화를 본 사람은 중반부에서 루벤 곤잘레스가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자막에는 '알세뇨'로 표기됨)라는 인물에 대해 언급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사진도 한 장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아르세니오에 대한 루벤의 기억은 각별해 보였다. 넙적한 얼굴과 큰 머리로 보아 중앙 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흑인의 빛바랜 흑백 사진이었다.  말이다(이상하게도 그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는 맹인이었다). 1970년에 고인이 되었지만 로드리게스야말로 넓게 보면 꾸바 음악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인물일 것이다.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는 콩고로부터 노예로 꾸바에 건너온 선조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 1911년 쿠바 서부 마딴사스(Matanzas)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말발굽에 차이는 사고를 당한 뒤에는 평생을 맹인으로 지내야 했다(영화에서는 이와 관계된 재미있는 일화도 들을 수 있다). '놀라운 맹인(El CIe해 Maraviloso)'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기는 했지만. 1937년 호세 인테라인(Jose Interain)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셉떼또 벨라마르(Septeto Bellamar)의 멤버로 연주와 레코딩 경력을 시작한 그는 '많은 곡을 작곡하고,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의 리더'라는 전통적 음악인의 전형이자 1940년대 꾸바를 풍미한 꼰준또(conjunto)의 선구자다. 꼰준또란 음악 장르가 아니라 '그룹'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그룹에는 전형이 있다. 앞서 언급한 7인조 편성에 트럼펫, 피아노, 그리고 콩가가 추가된 것이 특징이다. 트럼펫은 파워를. 피아노는 섬세함을, 콩가는 묵직한 톤을 각각 확보해주었다. 특히 콩가는 아프리카로부터 직접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그때까지도 터부시되던 악기였고, 따라서 콩가를 도입했다는 사실 자체가 손의 '아프리카화(혹은 아프로꾸바화)'를 유도한 것이었다. 또한 콩가와 더불어 팀발레와 카우벨 등 여러 퍼커션을 실험적으로 도입했다.

단지 악기편성 만이 아니라 음악 형식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로드리게스는 끌라베의 연주 패턴을 반대로 하거나 연주 도중에서 즉흥 연주 부분을 삽입했다. 손 몬뚜노(son montuno)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이 즉흥연주 부분을 지칭하다가 뒤에는 로드리게스가 만든 새로운 스타일을 지칭하게 되었다. 소네로의 리드 보컬이 후렴을 반복하고 소네오의 합창과 주고 받기하면서 트럼펫, 피아노, 트레스의 솔로 즉흥연주가 종종 삽입되는 손 몬뚜노의 형식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로드리게스에 이르러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보컬과 퍼커션으로 연주하는 아프로꾸바인의 전통적 음악인 과광코(guguanco)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손 몬뚜노는 '자유분방함', '자연발생성' 등의 단어로 표현되는 아프리카 음악(특히 콩고 음악)의 특징을 부활시키면서 손을 새롭게 정의하였고 "A Belen le Toca Ahora", "La Yuca de Catalina", "Juventud Amaliana" 등의 손의 고전을 남겼다. 물론 시력을 되찾으려는 수술을 실패한 뒤 지은 "La Vida es un Sueno(인생은 하루밤의 꿈)"이라는 구슬픈 볼레로도 이 시기의 작품이다.

그렇지만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1953년에 그는 후배인 트럼펫 주자 섀뽀띤(Chappotin)에게 그룹(꼰준또)를 물려주고 혈혈단신 뉴욕으로 이주했다. 여기서도 그는 꼰준또 편성에 플롯과 팀발레를 추가하고 손에 다른 음악적 요소들을 도입하는  음악적 실험을 계속했다. 1960년대 초 발매한 [Quindembo/Afromagic]라는 앨범 타이틀은 그의 말년의 지향을 상징한다. 퀸뎀보란 콩고어로 '여러 가지를 뒤섞기'를 뜻하는데, 이때의 음악은 손과 재즈, 그리고 빨로 꽁고(Palo Congo)라고 부르는 아프로쿠바인의 종교적 의식을 담은 음악을 뒤섞은 것이었다.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는 1968년 발표한 [Arsenio Dice]를 마지막으로 1970년 12월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뒤의 그의 활동은 쿠바에서만큼 많은 추종자를 낳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영향은  1960-70년대 형성된 '뉴욕 살사'의 전위들에게 뚜렷이 남아 있다. 그의 고전들이 살사 클럽에 다양하게 변주되어 연주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단손, 볼레로, 과히라, 과광코 그리고 또....

손 이전에 단손이 있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반으로 돌아와보자. 앨범과 같은 이름의 트랙인 "Buena Vista Social Club"과 "Pueblo Nuevo"는 단손이라는 장르 이름을 달고 있다. 음반에는 피아노 중심의 재즈 스타일로 편곡되어 있지만 본래의 단손 역시도 '라운지 스타일'의 댄스 음악이다. 단손은 아프리카 리듬의 영향도 없지는 않지만 유럽의 영향이 더 강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럽의 대무(對舞)인 콘트라단자(contradanza)가 꾸바에 건너와 변형된 스타일이 단손이다.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자면 1845년 아이티 혁명으로 인해 쿠바로 쫓겨온 프랑스계 난민들이 전파한 아바네라(habanera)가 19세기 말 경 대중화된 것이 단손이다.  

단손은 처음에는 티피카스(tipicas)라는 브래스 밴드에 의해 연주되다가 점차 샤랑가(charanga)라는 악단에 의해 연주되었다. 샤랑가란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클라리넷, 플롯, 베이스, 드럼(더블 드럼)과 귀로와 팀발레 등의 퍼커션이 추가된 일종의 오케스트라다. 단손은 손이 대중화되면서 쇠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1930년대에 피아노와 합창이 어우러진 스타일로 다시 한번 인기를 끌었다. 손과 비교해 볼 때 피아노와 멜로디의 역할이 크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우아하고, 템포가 느려서 천천히 춤추기 좋은 음악 스타일이었다. 맘보와 차차차는 모두 '샤랑가가 연주하는 단손'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단손은 쿠바 음악 중에서 서양의 음악 전통에 가장 가까운 음악이었고, 맘보와 차차차 등이 쿠바 외부의 연주자들에 의해 쉽게 수용되었던 것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단손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볼레로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19세기 말 꾸바의 산띠아고에서 발생한 느린 템포의 낭만적 발라드다. 볼레로는 가수 베니 모레(Beny More)의 "땅콩장수(El Manisero)"(작곡은 모이제스 시몬스(Moises Simons))라는 고전을 남겼고, 1940-50년대 에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특징으로 인해 볼레로는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올드 팝송의 팬이면 누구나 들었을 멕시코의 트리오 로스 판초스(Trio Los Panchos)로부터 라틴 팝의 슈퍼스타인 멕시코의 루이스 미구엘(Luis Miguel)과 콜롬비아의 찰리 자(Charlie Zaa)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 이브라힘 페레르와 오마라 뽀르뚜온도가 함께 불렀던 "Silencio"(이브라힘 페레르의 독집에 수록되어 있다)처럼 느린 템포 위에서 가수의 절창이 폐부를 찌르는 노래다. 마리아 떼레자 베라(Maria Teresa Vera)라는 전설적 볼레로의 디바가  작곡한 "Veinte Anos"는 시대를 초월한 명곡에 속할 만하다(음반에는 '꾸바의 에디뜨 삐아프'라고 불리는 오마라 뽀르뚜온도의 목소리로 재해석되고 있다).

한편 "Guantanamera"라는 곡으로 유명한 과히라(guajira)라는 장르도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이 되기 이전의 꾸바의 음악의 정서를 전달해준다. 앨범에서 엘리아즈 오초아(Elias Ochoa)가 마치 '농촌 블루스'를 듣는 듯한 느낌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본래 촌부(村婦)를 뜻한다는 장르 이름이나 소박한 리듬에서 느낄 수 있듯 농촌 지역의 삶을 노래하는 장르다. 그 외에도 앞에서 언급한 과광코(el guaguanco), 6/8박자 리듬을 가진 스타일을 지칭하는 아프로(afro), 또하나의 퍼커션인 마림바(marimba)를 앞세운 샹구이(el changui), 아프리카 리듬이 보다 강한 꽁가(la conga) 등이 1950년대 이전의 꾸바 대중음악의 다양한 스타일을 이루고 있다.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의 음악은 이런 오래된 스타일,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스타일을 망라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꾸바 음악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살사처럼 꾸바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별도의 스토리가 된 살사 뿐만 아니라 이라께레(Irakere) 등의 라틴 재즈(Latin Jazz), 로스 반 반(Los Van Van)로 대표되는 송고(songo), NG 라 반다(NG La Banda)가 이끌었던 띰바(timba) 등에 대해서는 다시 기회를 미루어야 할 듯하다. 라이 쿠더의 말처럼 "음악이 강물처럼 흐르는" 꾸바 음악과 함께 흘러가려면 담배 한 갑을 다 피워도 모자랄 듯하다. 20010228  





담배 피우면서 꾸바 음악 탐사하기(4): 누에바 뜨로바

누에바 뜨로바: 누에바 깐시온의 꾸바 버전

1991년 혁명 이후의 꾸바 음악을 미국시장에 소개한 루아카 밥(Luaka Bop) 레이블의 [Cuba Classics] 시리즈의 제 1탄의 주인공은 실비오 로드리게스(Silvio Rodriguez)라는 인물이었다. 이 음반의 표지에는 커다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실비오의 음악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의 음악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의 음악은 매우 대중적이다(인기있다). 그는 작년(1990년) 칠레에서 9만명의 청중을 앞에 두고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가졌다. 당신이 꾸바 음악에 룸바와 차차차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음악을 듣고 놀라게 될 것이다. 이건 아름답고, 미묘한 가사를 가진 팝 음악, 그리고 어떤 전형적 꾸바 스타일(cuban styling)을 가진 팝 음악이다".

미국인들에게 '아름답고 미묘한 가사를 가진 전형적 꾸바 스타일의 팝 음악'이라고 설명해야 어떤 음악인지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꾸바에서는 '누에바 뜨로바'라고 부른다. '누에바'란 '새롭다'는 뜻의 형용사고 '뜨로바'는 '음유시인'이라는 뜻의 명사인 'trovadore'의 축약어이니, 직역한다면 '신음유가요' 정도쯤 될 것이다. 오늘 들어볼 꾸바 음악이 바로 누에바 뜨로바다.  

사진 1: [Cuban Classic 1: Silvio Rodriguez](Luaka Bop, 1991)의 음반 커버

그 전에 한가지 사실을 더 언급하자. 꾸바 음악이 미국시장에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가 루아카 밥의 시리즈 음반은 아니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의 대통령 재임시기(1977-80)에도 어느 정도 해빙 무드가 있었고, 음반이 정식 발매되지는 않았어도 공연은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때 최초로 미국 순회공연에 나선 꾸바의 음악인들인 그루뽀 몽까다(Gruppo Moncada) 역시도 누에바 뜨로바에 속하는 그룹이다. 그렇다면 누에바 뜨로바는 꾸바 음악의 여러 장르들 중에서 다른 것보다 먼저 '적성국'에 소개되고 수용된 음악이라는 뜻일 것이다. 추론하면 수출하는 측은 '꾸바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으로 생각했고, 수입하는 측은 '꾸바 음악 가운데 비교적 좋은 음악'으로 판단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뛰어넘어 예술성이 뛰어난 대중음악'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누에바 뜨로바는 꾸바에 고유한 명칭이지만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이라는 말로 통칭되는 1960-70년대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노래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발전했다. 칠레의 빅토르 하라(Viktor Jara)와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 아르헨티나의 아따후알빠 유빵뀌(Atahualpa Yupanqui)와 아르헨티나의 메르체데스 소사(Mercedes Sosa) 등은 한국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고, 넓게 본다면 브라질의 '노바 무지까 뽀뿔라이레 브라질레이라(Nova Musica Populaire Brasileira: 새로운 브라질 대중음악)도 여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누에바 뜨로바는 범(凡) 라틴 아메리카적 대중음악의 일부다(이는 종종 다른 나라에서 창작된 음악을 커버하여 연주하는 연대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뜨로바로부터 누에바 뜨로바로  

그런데 왜 '누에바' 뜨로바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19세기부터 존재해 왔던 뜨로바라는 장르의 존재 때문이다. 꾸바 최초의 대중음악이라고 할 만한 뜨로바는 과라차, 과히라, 뿐또, 룸바, 볼레로 등 국지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노래형식들을 포괄하고 유럽(주로 이탈리아)의 오페라의 멜로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뜨로바는 한두명의 가수가 기타 반주로 연주하고 끌라베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고 20세기 초에는 6인조 그룹의 형태로 발전했다. 지난번에 언급한 마리아 떼레자 베라(Maria Teresa Vera)나 베니 모레(Benny More)같은 경우는 1910년대부터 뜨로바의 '레코딩'을 남긴 뜨로바 가수로 기억해둘만 하고, "El Manisero(땅콩장수)"라는 국제적 애창곡도 뜨로바의 산물이다. 뜨로바는 1920년대 이후 손(son) 등 아프로-꾸바 댄스음악이 대중화됨에 따라 쇠퇴했지만, 초기의 트리오 형태로 꾸바 각지에서 연주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꾸바 혁명 이후 '전통 문화(native culture)'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누에바 뜨로바로 '업데이트'된 것이다.

그렇지만 누에바 뜨로바를 혁명 이후 사회주의 정권의 '정책적 육성'의 산물로 간주하기도 힘들다. 1950년대 중반부터 까를로스 뿌에블라(Carlos Puebla)는 로스 뜨라디시오날레스(Los Tradicionalles)라는 그룹을 이끌면서 전통적 노래형식을 발굴하고 시적·문학적 가사, 시사적 메시지를 담았다. 이 점에서 그는 '꾸바 혁명의 음악적 대표자'로 불리며, 그의 업적은 우디 거쓰리(Woody Guthrie)나 피트 시거(Pete Seeger)같은 미국의 모던 포크 음악인들에 비견할 만하다. 누에바 뜨로바는 혁명 이전부터 존재하던 뜨로바의 전통과 혁명 이후 정권의 야심적인 문화정책이 결합하여 태어난 것이다.

그 점에서 꾸바의 누에바 뜨로바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누에바 깐시온과는 상이한 정치적 컨텍스트 하에서 발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 누에바 깐시온이 군부독재라는 적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탄생하고 발전했다면 누에바 뜨로바는 1959년의 혁명이 성공한 뒤에 조성된 상황 속에서 일궈졌다는 이야기다. 정부의 직·간접적 후원을 받은 <영화예술 및 영화산업 연구소> 산하에 '음향실험 그룹'이 만들어졌고 여기서는 예술음악인과 대중음악인의 협동 작업을 통해 민속음악을 발굴하고 악기들을 개발·개량하는 등의 작업을 꾸준히 전개해 왔다. 또한 1972년 이후에는 꾸바 전역에 대표부를 둔 대중적 조직으로 발전했다. 누에바 뜨로바는 꾸바전역에 대표부를 둔 청년조직을 갖춰 대중에게 다가갔다. 조직의 회원들은 작품, 예술, 정치, 조직에 관한 문제를 고민하며 자체적인 조직과 활동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누에바 뜨로바의  가수들은 민중 공원, 아바나(Havana), 광장,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활동하고, TV와 라디오에서 특별 시간을 할애받는 등 보다 많은 청중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특히 노엘 니촐라(Noel Nichola)와 빈센테 펠리우(Vincente Feliu) 등의 인물들이 누에바 뜨로바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상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누에바 뜨로바의 가사가 조국에 대한 사랑, 혁명과 혁명 영웅의 찬미, 사회적·정치적 저항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니까라구아, 칠레,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나라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빼놓을 수 없다. 즉, 누에바 뜨로바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음악이다. 이런 '무거운' 주제에도 불구하고 시적 가사와 서정적 멜로디는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말하자면 정서적 공감과 정치적 교양 양면 모두에서 효과적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 가운데 1970년대 중반부터는 누에바 뜨로바의 '대중스타'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실비오 로드리게스와 빠블로 밀라네스(Pablo Milanes)다.

누에바 뜨로바의 국제적 스타: 실비오 로드리게스와 빠블로 밀라네스

1976년에 레코딩 경력을 시작한 실비오 로드리게스의 음악은 꾸바의 민속음악에 바탕을 둔 누에바 뜨로바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이 말은 촌스럽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정갈하고 담백하다는 뜻에 가깝다. 영미의 싱어송라이터들의 느낌과 함께 프랑스 샹송의 영향도 보인다(샹송 역시 음유시인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초기에는 어쿠스틱 기타 한 대로 연주하는 소박한 노래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악기를 사용하여 대곡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보여줄 때도 있다. 그럴 때조차 플루트나 브래스 섹션을 이용한 편곡을 이용한 어쿠스틱 편곡으로 특유의 담백함을 잃지는 않는다(물론 (1986)처럼 아프로 꾸바 음악의 리듬을 대폭 차용한 작품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 친숙한 멜로디와는 반대로 그의 가사는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독재정권의 폭정과 그 아래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낭만적 곡조와 급진적 메시지가 조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속음악에 바탕하면서도 '모던'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실비오 로드리게스가 소박한 정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빠블로 밀라네스의 음악은 '고품격 팝'의 느낌이 보다 진하게 배어 있다. 특히 최근의 발표작들은 여느 이지 리스닝 음악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안락한 무드를 선사한다. 언뜻 들으면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의 음악으로 착각될 정도로. 이는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뉴에이지풍의 악기편성과 흡사한 편곡 때문이지만, 바이브레이션이 많은 낭만적 톤의 목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곡의 가사는 넬슨 만델라의 옥중 투쟁이나 살바도르의 아옌데의 피살같은 과격한 주제를 담고 있을 때도 있지만, 평이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경우도 많다. 서양 세계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상황에서 사회주의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처럼 부드럽고 감미로운 팝 음악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 의아스러울 정도다.

이제 정리하자. 누에바 뜨로바는 민속음악과 대중음악이 만나 민족문화를 형성한 모범적 사례일까? 한 나라의 대중음악이 진정한 민중들의 삶을 반영함과 동시에 그들의 지지를 받고, 그 민중의 삶이 전통에서 이어지는 자국의 고유성을 담고 있다는 점은 분명 좋은 점이다. 또한 예술성의 추구와 사회성의 반영이라는 동시에 달성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불현듯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영웅적으로 훌륭했던 시기를 박제화한 것 같다는 느낌 말이다. 또한 음악이 너무도 '건전'해서 민중의 '퇴폐적' 정서와 괴리될지 모른다는 점도. 누에바 뜨로바가 '민중가요이자 관변가요'라고 한다면 다소 심한 표현일 것이다. 다음 문장을 음미해 보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자. "망명한 꾸바 음악인들은 빠블로 밀라네스가 까스뜨로를 견고하게 지지하는 것을 조롱했고, 다른 이들은 그가 센티멘털하고,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재즈 팝에 손을 대는 것을 비판했다. 그렇지만 그는 쿠바의 전통음악과 현대음악 사이의 가장 중요한 고리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고, 이 지위는 새로운 밀레니엄에 접어들어도 확고한 상태다".




담배 피우면서 꾸바 음악 탐사하기(5): 아프로꾸반 재즈와 '월드 뮤직'으로서 룸바

아프로꾸반 재즈

1978년 이라께레라는 꾸바의 재즈 밴드가 컬럼비아 레코드(현 소니 뮤직)와 계약을 맺었다. 지난번 언급했듯이 민주당 카터 행정부 하에서 해빙 무드가 조성되고, 몇몇 꾸바 그룹이 미국 공연을 시작한 시점이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꾸바의 음악인 중에서 '자본주의' 미국의 메이저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은 것은 이번이 최초였다. 레코딩 계약을 체결한 동기는 다소 복잡하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아바나에서 미국과 꾸바 양국의 재즈 음악인들의 합동 콘서트를 주관했는데, 직접 콘서트를 본 컬럼비아측 인사에서 이라께레의 연주에 감탄했던 것이다. 그 결과 [Havana Jam]이라는 이름으로 두 종의 앨범이 발표되었고, 이 음반은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재즈 팬들의 흥미를 유발시켰다. "공산주의 나라에도 재즈가 남아 있다니..."라는 놀라움이 덧붙여진 것이지만.

이제까지 소개했던 꾸바의 여러 음악 스타일들에서 재즈의 영향을 감지하기는 어렵지 않다. 쏜(son)은 재즈로부터 직접 영향받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재즈와 유사한 악기편성과 악곡형식을 가졌고, 맘보는 단손(danzon)이 미국에 건너가 빅 밴드 재즈와 만나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오래된 음악들 외에도 (지난 주에 본) 누에바 뜨로바의 고품격 팝에서도 재즈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고, (다음 주에 볼) 쏭고(songo)와 띰바(timba)에서도 재즈의 영향이 강하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단지 '재즈로부터 영향받은' 음악 스타일이 아니라 '재즈 음악계에서 재즈라고 인정하는' 음악을 말한다. 이 경우에도 꾸바 음악의 영향과 꾸바 출신 음악인의 업적을 추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른바 아프로꾸반 재즈(Afro-cuban jazz) 혹은 라틴 재즈(Latin Jazz)라고 불리는 음악 스타일은 미국에서 재즈의 한 갈래로 이미 성립한 상태였다.


아프로꾸반 재즈란 말 그대로 재즈의 음악 어법과 꾸바 음악의 퓨전으로 발생했는데, 통상 1947년을 전후해서 탄생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드러머이자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댄서였던 차노 포소(Chano Pozo)가 뉴욕에서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와 공동 작업을 한 사건이 아프로꾸반 재즈의 효시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클라리넷 주자인 마리오 바우사(Mario Bauza)가 재즈의 즉흥연주와 꾸바 리듬의 혼합을 실험해 왔다. 꾸바 출신으로 1930년대에 뉴욕으로 이주한 바우사는 차노 포소를 디지 길레스피에게 소개한 인물이자, 자신의 사촌형제 사이인 마치토(Machito)의 밴드 아프로꾸바노스(Afrocubanos)의 음악 감독으로, 아프로꾸반 재즈의 숨은 실력자로 활동했다. 다.

1950년대 뉴욕에서 아프로꾸반 재즈는 뿌에르또 리꼬계인 맘보 밴드의 리더 띠또 뿌엔떼스(Tito Puentes), '라틴 재즈의 비(非) 라틴인 리더'인 칼 티야더(Carl Tjader)의 인기와 더불어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아프로꾸반 재즈는 '가장 대중적인 스타일의 재즈'로 불렸는데, 이는 재즈가 '쿨'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상황에서도 '댄서블'한 감각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꾸바와의 문화적 교류가 단절된 이후에도 아프로꾸반 재즈는 밥(bop)의 뿌리를 넘어 다양한 형태의 퓨전을 계속해 나갔다.


한편 까스뜨로 정권 하의 꾸바에서도 아프로꾸반 재즈는 명맥을 유지했다. 꾸바의 국립예술학교(Cuban National School of the Arts)에서는 재즈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하여 교육하였고, 이를 통해 많은 재즈 연주인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1970년대 초 오르께스트라 꾸바나 드 무지까 모데르나(Orquesta Cubana de Musica Moderna)를 모태로 1973년에 결성된 이라께레는 꾸바를 대표하는 재즈 밴드로 성장했다. 이라께레는 정규 밴드라기 보다는 '슈퍼그룹'에 가까웠다. 198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트럼펫 연주자 아르뚜로 산도발(Arturo Sandoval), 색소폰 주자 빠뀌또 드리베라(Paquito D'Rivera)가 모두 이라께레를 거쳐갔고, 피아니스트 추초 발데스(Chucho Valdes)는 오랜 기간 동안 그룹을 이끌어 왔다. 이라께레는 라틴 재즈, 비밥, 꾸바 민속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전염성 강한(infectuous)' 리듬과 결합시켜서 즉흥연주를 발전시켜 왔다.

이라께레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컬럼비아 레코드와 계약한 1970년대 말 이후였다. 또한 1980년대 중반 곤살로 루발까바(Gonzalo Rubalcaba)같은 신성의 출현으로 인해 꾸바 재즈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이른바 '신(新) 냉전' 국면이 조성되면서 꾸바 음악인들의 국제무대에서의 활동은 당국의 이런저런 규제를 받았다. 몽뜨뢰 재즈 페스티벌같이 국제적 친선과 유대를 목표로 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일은 허락되었지만, '흥행'을 목표로 하는  공연은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이라께레와 컬럼비아 사이의 레코딩 계약도 '로열티는 음악인에게 직접 송금하지 않고, 미국에 유보해 두었다가 꾸바 음악인이 미국 공연을 가지게 될 경우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고서야 성사될 수 있었다. 이라께레가 자유롭게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갖기 위해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와중에 아르뚜로 산도발이 1990년 유럽 순회공연 중 로마에서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망명을 신청하는 사건도 있었다.  

'월드 뮤직'으로서 룸바  

1992년 로스 무네뀌또스 드 마딴사스(Los Munequitos de Matanzas)라는 꾸바 그룹의 전미 순회공연이 전회 매진을 기록하면서 성황리에 치러졌다. 그 뒤에는 점차 빈도가 잦아져 1996년, 1998년, 1999년 계속 공연을 가졌고 음반 판매고도 호조를 보였다. 따지고 보면 이들은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의 밀리언 셀링 음반의 초석을 닦은 셈이다.  
사전 정보 없이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꾸바 음악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 음악으로 들릴 것이다. 아프리카 각지의 음악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꽁고 음악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수꾸스(soukous)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꽁고의 '현대 대중음악'이 아니라 '전통 토속음악'으로 들린다(실제로 이들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1994년 앨범의 제목은 [Congo Yambumba]이고, 같은 이름의 곡도 있다).

"총감독이자 댄서이자 구아구아(guagua) 연주자인 디오스다도 라모스 크루스(Diosdado Ramos Cruz)와 음악감독이자 뀐또(quinto), 까혼(Cajon), 리야 바따(lya Bata)와 퍼커션을 연주하는 헤수스 알폰소 미로(Jesus Alfonso Miro)가 이끄는 그룹"(http://www.allmusic.com/cg.amg.dll)이라는 소개는 '저 악기들이 민속 악기구나'라는 생각만 들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반세기 동안 가장 인기있는 룸바 밴드였다'라는 정보는 매우 유익하다.
이런 음악이 '진짜 룸바'다. 여기서 룸바, 쏜, 살사의 관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룸바가 아프리카계 꾸바인들의 길거리 댄스음악(street dance music)이고 '민속음악'이라면, 쏜은 룸바의 영향을 받아 직업적 음악인들이 다듬어낸 '대중음악'이고, 살사는 쏜이 뉴욕 등 미국에서 국제적 영향을 흡수하여 형성된 음악이다. 아프로꾸바인(=꾸바 흑인)의 음악을 아프로아메리칸(=미국 흑인)의 음악과 비교한다면, 룸바는 블루스, 쏜(정확히 말하면 '쏜 몬뚜노')은 재즈, 살사는 로큰롤에 각각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비유는 비유로 그쳐야 한다).  


이런 연유로 룸바는 '언제나 존재했다(ever-present)'고 언급된다. 우리가 혼동하는 것은 1930년대 꾸바 밖에서 룸바라고 알려진 것(그 대부분은 쏜이었다고 세 번째 시리즈에서 언급한 바 있다)이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혹자는 룸바란 "쏜에 대한 잘못된 명명(misnomer)"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꾸바 외부에서의 룸바를 'rhumba'라고 철자법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룸바는 마탄사스 등 꾸바 서부지역에서 특히 융성하기는 하지만 아프로꾸바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룸바의 변종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로스 무네뀌또스 드 마탄사스라는 그룹이 결성된 것도 술집(bar)에서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의 음악을 들으면서 접시와 술병으로 리듬을 맞추던 게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룸바는 마치 한국의 뽕짝이나 '도롯도'와 비슷하다.  


'진짜' 룸바는 꾸바에 대한 미국의 빗장이 벗겨지기 시작하는 1980년대 후반 이래 다시 한번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때는 마침 '월드 뮤직', '월드 비트'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이 바람의 핵심은 퍼커션 연주였다. 그런데 꾸바에는 '길거리'에도 고난도의 연주력을 가진 퍼커션 연주자들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꾸바를 찾아간 월드 뮤직 애호가들은 도처에 널려있는 꾸바 음악인들에게 매료되었고, 이들 중 몇몇은 "문화적이고 교육적 목적"으로 간주되어 비자를 발급받아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꾸바 음악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은 월드 뮤직 네트워크와 아프로꾸바 음악 사이의 관계를 공고화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로스 무네뀌또스 드 마딴사스를 비롯하여 아프로꾸바 드 마탄사스(Afro Cuba de Mantanzas), 이부 오꾼(Ibu Okun)같은 룸바 그룹들이 월드 뮤직이 연주되는 워크숍이나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미국 청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꾸바에 퍼커션 연주자가 특별히 많이 남아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은 까스뜨로 정권의 공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까스뜨로는 "우리는 양키들에게 말해야 한다. 꾸바는 라틴 아메리카 나라일 뿐만 아니라 아프로 라틴 나라라는 점을 잊지 말라고"라고 호기롭게 말한 바 있다. 말로 그친 r서이 아니라 아니라 까스뜨로 정권은 실제로 꾸바 사회의 아프리카적 기원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꾸바 학자들은 아프리카를 찾아가 아프리카계 꾸바인의 기원들을 연구하였고, 1979년에는 음악, 춤, 미술, 학술 심포지움이 어우러진 '까리페스따(Carifesta)'라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 결과 꾸바에는 아직까지도 다른 카리브해 나라들에 비해 아프리카 각 지역의 흔적들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싼떼리아(Santeria)라는 아프리카에 기원을 둔 토속 종교도 형성되어 있다.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흑인 노동계급의 댄스 음악으로 '천박하고 원시적'이라고 멸시받던 룸바도 '국민 댄스음악'으로 승격되었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직업적 룸바 그룹도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여타의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민속음악과 달랐던 점이다. 간략히 말해서 룸바 음반의 표지에는 '흑인'이 등장하는 반면, 다른 나라의 민속음반은 '백인(스페인계)'이 등장한다.        


그런데 미국 행정부가 룸바 등 '아프로꾸바 월드뮤직 음악인'에게 비자를 우선적으로 발급해 주었던 것도 일종의 '역차별' 아닐까. 이는 몇 차례 언급했던 '월드 뮤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달리 말해서 '상업적'이라고 간주되는 꾸바의 인기 밴드들은 1997년까지 미국에서 공연을 가질 수 없었고, 음반회사와 계약을 체결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들이 미국시장에 진출한 데에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외화 벌이'가 필요했던 꾸바 정권 측의 필요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재즈 뿐만 아니라 월드 뮤직같이 '비정치적'이라고 간주되는 음악에도 '정치'는 어김없이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걸 가지고 "순수해야 할 음악에 지저분한 정치가 작용하다니"라면서 우울해 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담배 피우면서 꾸바 음악 탐사하기(6): 로스 반 반과 쏭고(songo)

쏭고(Songo)  
 
1988년 아일랜드 레코드(Island)의 미국 지사인 망고(Mango)는 [Songo]라는 앨범을 미국 시장에 발매했다. 앨범의 주인공은 꾸바 출신의 14인조(혹은 그 이상) 밴드 로스 반 반(Los Van Van)이었다. 1980년대 내내 지속된 신(新)냉전의 틈새를 뚫고 미국 시장을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메이드 인 꾸바' 음반이었다. 그때까지 미국에 들어온 이들의 음반은 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매된 음반의 라이센스반이거나 '밀수'된 것들이었다. 밀수에 실패하면 세관에서 압수되었고.  
 
당신이 오래 전에 꾸바 음악을 들었고 1980년대 후반에 이 음반을 집어든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설명해 보자. 그렇다면 당신은 "Titimania"와 "Sandunguera"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잊었던 어떤 음악적 정취를 느꼈을 것이다. 플루트와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서 차랑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피아노가 만드는 리듬에서 단손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느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들의 음악은 쏜(son)에 가장 가깝게 들렸을 것이다. 가공되지 않은 톤의 브라스 섹션도 그렇거니와 솔로 보컬의 선창(call)에 이은 밴드 멤버들의 제창(response)이 반복되는 악곡 구조야말로 몬뚜노(montuno)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비교적 차분한 리듬으로 시작되다가 중반부로 갈수록 그루브가 강해지고 리듬이 역동적으로 전개되면서 템포마저 빨라진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리듬 패턴은 반복적이지만 'irresisitible'하게 전개되고,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음악에 깊숙히 빠져들게 된다. '일어나서 춤춰라'고 누가 권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발로 장단을 맞추게 되지만 정확하게 리듬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브라스 섹션과 '떼창'의 볼륨이 올라가 있고 솔로 가수의 노래는 즉흥연주가 되어 있다. 한 곡의 연주가 끝나려면 페이드 아웃을 시키는 방법 밖에는 없다.  

이 음악들이 단지 노스탤지어를 자극할 뿐이라고 항의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콘트라베이스(우드 베이스)는 일렉트릭 베이스로 바뀌어 있고, 키보드 소리가 자주(특히 브릿지 부분에서) 나오고, 가끔은 와와 이펙트를 입힌 기타 사운드도 들을 수 있다. "Que Palo Eso Ese" 같은 곡은 영락없는 1970년대의 훵크 혹은 디스코(물론 완전히 맛이 가기 전의 디스코)다. 고립된 나라에 살면서 외국에서 대중음악의 발전을 유심히 관찰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실천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퍼커션과 리듬에 주목하면 영락없는 아프로꾸바 음악이지만, 멜로디와 화성에 주목하면 '앵글로-아메리칸 팝'같은 면도 발견된다. "Muevete (Anda Ven y Muevete)"는 스페인어 가사와 퍼커션을 제외한다면 1960년대 말의 싸이키델릭 팝(혹은 록)처럼 들리고 멜로디도 뜻밖에 수려한 부분이 존재한다. 아니나 다를까 밴드의 리더이자 대부분의 곡을 작곡한 후앙 포르멜(Juan Formell)이 "비틀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 곡처럼 명시적이지 않더라도 다른 곡들도 재즈, 리듬 앤 블루스, 팝 등 미국의 대중음악을 폭넓게 수용하고 이를 라틴 리듬과 퓨전한 것이다.  
 
쏭고라는 명칭은 앨범 타이틀이자 이들이 구사하는 음악의 장르의 이름이다. 로스 반 반은 쏭고를 대표하는 밴드다. '대표된다'기보다는 쏭고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존재가 로스 반 반 자신이다. 영어로 'the go go's'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밴드는 베이스주자인 후앙 포르멜의 지휘 하에 독보적 지위를 차지해 왔다. 혁명 이후 30년 동안 한번의 은퇴와 컴백 없이 꾸바의 댄스 음악을 보존함과 동시에 혁신해 왔다. 그 기간은 뉴욕에서 살사가 형성되어 대중화된 시간과 거의 일치한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쏭고는 쏜(son)과 차랑가(charanga) 등 꾸바의 음악적 전통의 계승이자 혁신이다. 아프로꾸반 리듬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다른 캐러비언 리듬을 혼합하여 만들어진 것이 쏭고다. 여기에는 창귀또(Changuito)라는 별명으로 더욱 유명한 호세 루이스 뀐따나(Jose Luis Quintana)의 역할이 지대하다. 드럼 세트, 꽁가, 귀로의 앙상블로 만들어내는 송고의 리듬은 한 곡 한 곡마다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한 곡 내에서도 복잡무변하게 변화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러 명이 퍼커션을 합주하여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한 명의 연주로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것도 오버더빙같은 스튜디오에서의 조작(gimmick)이 아니라 실연주로 말이다. 창귀또는 1993년 밴드를 떠났지만 후앙 포르멜의 아들인 사무엘 포르멜(Samuel Formell)을 비롯한 후예들이 공백을 메우고 있다.  
 
반 반: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불행히도 1988년 발매된 음반의 판매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반 반의 음반 발매는 허락되었어도 '프로모션 투어'를 포함한 일체의 공연활동은 불허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지난 번에 언급한 대로 이들의 음악은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경우'가 아니라 '상업적'이라고 간주되어 미국 입국 비자를 발급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 무렵 꾸바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은 1990년대 말 이후 '일본 문화'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정책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 공연과 더불어 음반홍보의 양대 매체인 - 라디오 방송의 문제였다. (한국인같이) 라티노가 아닌 사람이 듣기에 반 반의 음악은 영락없는 '라틴 음악' 특히 '살사'에 가깝고 따라서 이들의 음악은 라틴 음악 전문 채널을 통해 방송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지만 라틴 음악 전문 방송국은 반 반의 음악을 방송하는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음악적인 문제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문제였다.    

첫 번째 문제의 경우 반 반의 음악은 라디오 방송에 적합한 매끄러운 라틴 음악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경이면 라틴 음악계에서도 살사 로만티카(salsa romantica) 혹은 살사 라이트(salsa lite)라고 불리는 '여성 취향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이 이미 대중화된 다음이다. 질베르토 산타 로사(Gilberto Santa Rosa), 제리 리베라(Jerry Rivera)의 음악처럼 리듬은 약하고, 멜로디는 번드르르하고, 사운드는 매끄러운 스타일이다(리키 마틴의 '댄스곡'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반드시 살사 로만티카가 아니라도 살사 음악 전체의 프로듀싱은 이미 주류 팝 음악의 매끄러운(slick) 방식에 동화되고 있었다. 이런 살사의 '주류'와 비교한다면 반 반의 음악은 나름대로 현대적이기는 해도 낯선 것이었다.  

두 번째 '정치적' 이유란 미국에 살고 있는 꾸바 망명자들의 영향력 때문이다. 마이애미를 거점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으로 유명한 이들은 까스뜨로 정권과 꾸바의 사회체제 전반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다. 이들은 라틴 음악 비즈니스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꾸바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로스 반 반의 멤버들 중에서도 1983년 이스라엘 '깐또르' 사르디나스(Israel 'Cantor' Sardinas)가 망명했다). [Songo]를 발매한 아일랜드/망고 레이블은 자메이카의 레게나 나이지리아의 주주 등 영어사용권 나라들의 음악에 특화해 왔기 때문에 라틴 음악계에 대한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라틴 음악 라디오에서 외면된 [Songo]는 월드 뮤직 라디오에서만 간간이 전파를 탈 수 있었을 뿐이다. 월드 뮤직 라디오에서 주로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프리카와 아프로캐러비언의 음악들이고 음악의 분위기는 '에쓰닉(ethnic)'하고 '루치(rootsy)'해야 한다. 월드 뮤직이라기에는 '로컬 팝'에 가까웠고, 결국 틈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까지 소개했던 다른 꾸바 그룹들과 비교한다면, 이라께레는 '재즈', 무네뀌또스 드 마탄사스는 '월드 뮤직'의 범주에 성공적으로 통합될 수 있었다. 부에나 비스따 소셜 클럽의 쏜과 단손도 '오래된' 대중음악이기 때문에 월드 뮤직으로 분류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꾸바의 1급 음악인들만 연주할 수 있는 관광 호텔에서 이들의 음악을 듣는다면 '꾸바의 향취를 듬뿍 담고도 이렇게 현대적 감각을 가진 밴드가 있다니...'라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만 라디오 채널에서는 이들의 설 자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반면 이들의 음악이 라틴 음악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낯설고 이국적'으로 들리고, 월드 뮤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현대적이고 상업적(!)'으로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 반 반은 간헐적으로 앨범을 발표하면서 틈새 시장을 넓혀갔고 1997년에는 비로소 뉴욕 공연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어틀랜틱(Atlantic)이 배급을 맡은 1997년 앨범의 타이틀 [Con Salsa Formell (살사 포르멜과 함께)]에서 드러나듯 음악산업계는 반 반을 '살사 씬'에 진입시키려는 의지도 보였다. 그리고 1999년에는 이제까지의 활동을 총결산하는 두 장짜리 CD인 [Los Van Van - 30 Years of Cuba's Greatest Dance Band](1999)를 발매하여 이들의 다양하고도 풍부한 음악 여정의 전모를 보여주었다.  
 
동영상: http://europe.cnn.com/SHOWBIZ/Music/9808/12/los.van.van.cnn/losvanvan.mov  
 
그런데 이 음반에 수록된 레코딩들 중에서 1980년대 이전의 작품과 1990년대 이후의 작품 사이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이는 한 밴드의 음악적 스타일의 변화이자 꾸바 대중음악의 트렌드의 변화이다. 이 새로운 스타일은 띰바(timba) 혹은 하이퍼 살사(hyper salsa)라는 새 이름을 달게 되었다. 띰바에 대해서는 분량의 제약 상 다음 회에 알아보기로 하자.  

그러기 전에 개인적으로 하나 궁금한 것이 있다. 과연 반 반의 정치적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체로 정서적으로 관능적인 가사에서 이들의 정치 성향을 발견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유심히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반 반은 "La Havana No Aguanta Mas(Havana Can't Take Anymore)"를 포함하여 가끔 정치적 오버톤을 가진 노래들을 레코딩했다... 하지만 마이애미에 사는 몇몇 광신도들(fanatics)들이 보기에는 이 밴드는 충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다. 반 반의 음악을 방송한 마이애미 라디오 방송국은 폭탄 위협을 받았으며, 마이애미 시장은 경찰이 올 때까지 반 반의 연주를 금지했다. 항의자들은 마이애미 공연장 외부에서 돌맹이를 던지면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공연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춤을 추느라고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라는 표현이 무슨 뜻이고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다소 복잡하다. 그렇지만 좌파든, 우파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위험해 보인다. 사회주의 꾸바에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들은 '일어나서 춤 춰'라는 로스 반 반의 음악이 빠블로 밀라네스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라드'보다는 못마땅한 것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후앙 포르멜은 플레이보이 재즈 페스티벌 장소에서 가진 CNN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꾸바라는 나라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꾸바의 민중과 꾸바의 음악적 전통을 대표합니다"라고 말했다. 참 현명한 발언이다.  





담배 피우면서 꾸바 음악 탐사하기(7): 띰바 그리고 살사 속의 꾸바 팝

'신세대 밴드(Nueva Generacion La Banda)'와 띰바(Timba)

<마이애미 헤럴드(Miami Herald)>는 NG 라 반다를 소개하면서 "이 음악은 당신의 아버지의 꾸바 음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에네 헤'라고 발음되는 NG라는 접두어는 'Nueva Generacion'의 약자다. '새로운 세대'라는 뜻이다. 새로운 세대의 꾸바 대중음악은 띰바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990년대 이후 로스 반 반의 음악 역시도 띰바에 속한다. 그렇지만 반 반처럼 30년을 정상의 지위에 있었던 '꾸바의 롤링 스톤스'에게 새로운 왕관은 조금 어색하므로 왕관은 1988년에 결성된 NG 라 반다에게 돌아간다.
그렇기는 해도 반 반과 이라께레가 없었다면 NG 라 반다도 태어날 수 없었다. 리더인 호세 루이스 꼬르떼스(Jose Luis Cortes)는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로스 반 반에서,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이라께레에서 주요 멤버로 활동한 존재다. 그가 보다 젊은 세대의 뮤지션들과 함께 결성한 16인조 밴드가 NG 라 반다이다. 자연스럽게도 NG 라 반다의 음악은 두 밴드의 종합판이다. 로스 반 반이 꾸바 대중음악에 록, 소울. 훵크의 요소를 혼합했다면, 그리고 이라께레가 아프로꾸바 음악을 재즈와 섞어냈다면 NG 라 반다의 음악이 어떨지는 유추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반 반의 향취(flavor)와 이라께레의 공격성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는 꼬르떼스의 바램처럼 이들은 재즈의 즉흥연주를 꾸바의 댄스 리듬과 결합시키고 양자의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띰바(Timba)는 이제까지의 꾸바 음악보다 정열적이고 광적이다. NG 라 반다의 대표곡들인 "Conga de los Reftranes", "La Bruja", "Los Sitios Entros"를 차례로 들어보자. 곡은 서서히 절정부를 향해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고조된 분위기를 만들고 이후 계속 이어나간다. 퍼커션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은 매우 긴밀하여 노래와 악기를 위해 '반주'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비트들 사이로 관악기의 간주와 보컬의 노래가 스며나오는 것 같다. 연주가 진행될수록 리듬 패턴은 더욱 복잡해지고 8마디(혹은 16마디)를 기준으로 계속 변한다. 관악기는 공격적이면서도 화려한 기교로 예정되지 않은 곳에서 밀고 들어온다. 보컬은 한 명이 선창하면 여러 명이 합창하는 몬뚜노의 형식을 따르는데 쏜이나 쏭고보다 더욱 즉흥감이 강해서 '샤우트 아웃 콜 앤 리스펀스(shout-out call and response)'라고 부른다. 후반부로 갈수록 노래는 고음으로 치달으면서 노래 뿐만 아니라 구호를 외치거나 일상 대화같은 자유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화답하는 합창도 반복하는 것 같으면서도 분위기에 따라 슬쩍 변한다. 통상적인 팝송 형식에 있는 절정부라고 할 것은 아니지만 듣는 이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부분이 서너번 등장한다.

위 곡들 중에서 "Conga de los Refranes"는 '꽁가', 'La Bruja"는 '살사', "Los Sitios Entros"는 '룸바'로 각각 분류할 수 있는 리듬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곡들은 모두 띰바다. 그때 띰바란 무슨 의미인가? 조던 레빈(Jordan Levin)은 <마이애미 헤럴드>지에 쓴 기사를 인용한다면 "띰바는 당신의 아버지의, 혹은 당신의 할아버지의 꾸바 음악이 아니고, 부에나 비쓰다 소셜 클럽의 국제적 히트작인 달콤한 전통적 사운드도 아니다. 그건 현재 꾸바의 사운드, 리듬적으로 긴밀하고 가차없이 에너지넘치는 음악이다. 이 음악은 직업적 음악인들이 댄스 플로어의 청중을 위해 연주하는 음악이며, 가사 역시 거리의 언어로부터 가져온 것이며 거리의 언어의 일부가 되고 있다". 띰바는 현재 꾸바 의 길거리 댄스 음악이다.


쏭고가 로스 반 반의 독보적인 음악이었던 반면, 띰바는 일군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NG 라 반다 뿐만 아니라 빠울리또 이 수 엘리떼(Paulito y Su Elite), 이삭 엘가도(Issac Elgado), 마놀린(Manolin), 샤랑가 아바네라(Charanga Habanera), 엘 메디꼬 드 라 살사(El Medico de la Salsa) 등 아바나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음악인과 그의 밴드들이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국립예술학교를 나와서 먹고 살만한 직업적 음악인들이지만, '가난한 이웃에서 흘러나오는 사운드'에 주목했던 인물들이다(NG 라 반다의 "La Expressiva"같은 곡은 아바나의 가난한 이웃에 대해 헌정하는 곡이다).


이런 음악이 나오게 된 배경은 미국에서 힙합이 나오게 된 배경과 비슷하다. 1980년대 말 이후 꾸바 정권이 '특별한 시기'라고 부르는 경제난이 도래하면서 직업적 음악인들은 생계를 위해 보다 많은 청중, 특히 젊은 청중들을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 반이 젊은 음악인들을 영입하여 라인업을 재정비한 것도 이런 이유가 크게 작용햇다. 또한 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는 '외화벌이'를 위해 관광객들을 위한 새로운 댄스 음악도 필요했다. 그래서 띰바는 살사보다 더 정열적이고 춤추기 좋은 음악으로 발전해 나갔다. 가사 또한 아바나의 거리의 은어가 많이 들어가고 콘돔의 사용, 마이애미의 친구 등에 대한 이야기 등 과거에는 금기시되었던 주제도 등장한다.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대중음악이 통상 그렇듯 가사의 의미는 모호해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도 특징적이다.

살사와 띰바 에 대한 대안인가, 살사의 진보적 전위인가

1990년대 띰바 밴드들은 꾸바 음악의 각종 컴필레이션 음반의 단골 손님이 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헤미스피어 레이블의 3부작 외에도 [Salsa Cubana: Gold Collection](Fine Tune, 1998), [Salsa Cubana](Universal Latino, 1997), [Cuban Salsa](Sony International, 1999), [Cuban Salsa](Sony International, 1999)[Cuban Salsa](Absolute Best, 2000) 등이 그것이다. 특이한 것은 헤미스피어 레이블을 제외하고 다른 음반사들에서 꾸바 음악은 '살사'라는 범주 내에서 마케팅되고 있다는 점이다. 살사의 기원을 이루는 쏜이나 룸바야 그렇다 치더라도 쏭고나 띰바처럼 살사와 뿌리는 같더라도 여러 모로 다른 음악도 마찬가지라는 점은 미심쩍다.
헤미스피어 레이블에서 발매한 [The Story of Cuba]의 라이너 노트는 띰바를 "라틴 아메리카에서 살사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반면 어떤 학술 문헌에서는 NG 라 반다를 로스 반 반, 이라께레와 함께 "살사 음악의 진보적 전위 progressive vanguard of salsa music)"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자의 살사는 '협의의 살사'이고 후자는 '광의의 살사'라고 해버리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그래서 살사'에 대한' 대안이라고 부르든, 살사 '중의' 전위라고 부르든 쏭고와 띰바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꾸바 외부에서 살사의 형성과 변천에 대해 개략적으로나마 설명하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마치 '얼터너티브 록'을 말하기 위해서 '클래식 록'과 '주류 록'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영어로 'sauce'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인 살사는 현재 주류 라틴 음악의 한 갈래로 정착해 있다. 선진국들의 메가스토어에 가보면 살사는 힙합이나 레게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수십장의 음반이 놓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수십개의 선반에 음반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예상했듯 살사의 기원과 내력은 혼동스럽다. 대중음악 입문서를 펼쳐 보면 살사가 "미국 내에서 살고 있는 꾸바인과 뿌에르또 리꼬인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로이 셔커, [대중음악 사전], 한나래, p. 265-266)'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음악적으로 본다면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의 음악이 아메리칸 재즈와 합성되어 만들어진 음악'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문화적 기원은 복잡하다. 한마디로 살사는 이민자들(혹은 디아스포라)의 음악인 셈이다. 캐러비언들의 대중음악이 처음부터 혼합된 음악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살사는 혼합된 음악이 다시 한번 혼합된 음악이다. '혼합의 혼합(the mixture of mixture)' 혹은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diaspora of diaspora)'인 셈이다.  


그래서 살사에는 보통 세 가지 내력이 따라다닌다. 첫째는 살사의 기원과 본질이 꾸바에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현재의 살사는 뿌에르또 리꼬 노동계급의 삶의 표현이라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범(범)캐러비언(pan-carribean) 나아가 범라틴적(pan-latin) 의식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살사를 대표하는 베테랑 음악인들의 국적은 다양하다. 거기에 쿠바와 푸에르토 리코 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각종 음악들이 살사에 침투해 있고, 소울/훵크나 록의 요소를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다.


이렇게 대중화되면서 살사를 간단명료하게 정의하는 일은 '재즈'나 '록'을 정의하는 것처럼 어려워진다. 음악이 한번 유통되기 시작하면 특정 집단에 배타적으로 고착될 수 없다는 특징은 살사에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장르든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고전적 시기'(간단히 말해 전성기)가 있게 마련이다. 살사의 경우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의 10여년간이 이에 해당된다. 무대('씬')는 물론 뉴욕이다.

살사의 전개와 확산  

살사의 거점은 파니아(Fania)라는 인디 레이블이었다. 파니아는 1964년 밴드리더인 조니 파체코(Johny Pacheco)에 의해 설립되어 '공동체적으로' 운영되다가 1967년부터는 헤리 마수치(Jerry Masucci)에 의해 보다 '기업적으로' 경영되었다. 이전부터 꾸바계 음악인들이 '뮤지션들 사이의 은어'로 사용하던 살사라는 단어를 장르 이름(이자 마케팅 용어)으로 만든 장본인도 파니아의 경영진들이었다(이건 마치 훵키(funky)라는 단어가 뒤에 훵크(funk)라는 '장르'가 된 것과 비슷하다). 1970년대 중반 파니아는 미국과 뿌에르또 리꼬에서 판매되는 살사 음반의 약 80%를 차지할 정도로 살사 음반의 총판같은 역할을 했다.  


1970년대 파니아 레이블 중심의 살사 씬의 전개를 몇 마디로 요약하는 일은 무모한 일이다. 거칠게 요약한다면 "재즈계에서 활동한 띠또 뿌엔떼스, 라이 바레또(Ray Barreto), 에디 빨미에리(Eddie Palmieri)를 선구자로 섬기고, 조니 빠체꼬, 윌리 꼴롱(Willie Colon)의 밴드리더가 음악적 변화를 주도하고 헥또르 라보에(Hector Lavoe)와 루벤 블라데스(Ruben Blades) 등의 '살세로(salsero)'가 살사의 얼굴과 목소리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종종 파니아 올스타스(Fania All-stars)라는 슈퍼그룹을 결성하여 조그만 댄스 클럽부터 양키 스타디움에 이르는 다양한 공연장에서 '단합대회'를 가졌다.

1970년대는 파니아 레이블의 사세(社勢)가 확대된 시기이자 살사가 '뿌에르또 리꼬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사운드로 정착한 시기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살사 음악인들이 뿌에르또 리꼬계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도미니까(조니 빠체꼬), 꾸바계(쎌리아 끄루즈), 빠나마(루벤 블라데스) 등 살사 음악인들은 다양한 출신 국적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뿌에르또 리꼬는 독립국이 아니라 미국령 커먼웰스(commonwealth)라는 지위로 인해 뉴욕의 뿌에르또 리꼬인 커뮤니티는 흑인(아프리칸-아메리칸) 커뮤니티와 함께 사회적으로 민감한 곳이었다. 1960년대 소울이 흑인 커뮤니티에서 수행한 것과 유사한 역할을 1970년대의 살사가 뿌에르또 리꼬계 커뮤니티에서 수행한 것이다.
단지 뿌에르또 리꼬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 동부 지역의 히스패닉계 커뮤니티에서 살사는 '헤게모니'를 가지는 음악이었다. 뿌에르또 리꼬의 봄바(bomba), 도미니카의 바차타(bachata), 아이띠의 꼼빠스(compas) 등 다양한 아프로캐러비언들의 민속음악들이 살사에 흡수통합되었다. 문제는 살사가 이렇게 '범라틴적 현대성(pan-Latin modernity)'의 표상이 되면서 아프리카적 색채는 점차 탈색되는 양상을 보였다.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살사는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뻬떼르 마누엘(Peter Manuel)같은 평론가는 살사의 '울혈(stasis)'라는 표현을 썼다. 그는 본래의 살사를 살사 칼리엔테(salsa caliente) 혹은 살사 고르다(salsa gorda)라고 부른 반면, 1980년대 등장한 살사의 변종들은 '살사 라이트(salsa lite)', '살사 로만티카(salsa romantica)', '케첩' 등으로 불렀다. 호르헤 마누엘 로페스(Jorge Manuel Lopez)같은 논자들도 "살사는 팀발레와 봉고가 전부였지만, 이제는 달콤하고 우아한 단어들이 전부다. 계집애들은 예전의 마초 살사(macho salsa)보다 이런 걸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은 살사가 "많은 젊은 라티노들과 무관하게 되었다"는 문화적 진단으로 이어진다. 또한 그 원인으로는 클럽에서 라이브 밴드로 연주되던 살사가 레코딩 테크놀로지의 영향으로 신디사이저 등 전자악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살사 특유의 자발성과 즉흥성을 상실했다는 점이 지적된다. 이런 판단은 하드 록이나 헤비 메탈의 변천과도 유사하다. 1970년대까지 백인 남성 청년의 정체성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하드 록/헤비 메탈이 1980년대 10대 소녀 취향의 '라이트 메탈(혹은 팝 메탈)'로 변질되었다는 식의 견해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일면적으로 보인다. '록 음악'이나 '헤비 메탈'과 마찬가지로 살사 역시도 '청중의 재구성'이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1970년대까지의 살사는 이제 '올드 스쿨 살사'가 되었고, 이제 '본래의' 형식을 추구하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살사 역시도 다른 장르와 뒤섞여서 '진품의(authentic)' 형태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몇 개의 하위장르를 거느린 메타장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니거스는 1990년대 후반 시점에서 살사를 몇 가지 특징적 스타일(혹은 하위장르)로 구분하고 있다. 그의 분류를 요약해서 정리해 보자.

1. '올드 스쿨' 형식을 유지하면서 현대적인 편곡을 추가하는 밴드들. 엘 그란 콤보(El Gran Combo), 파니아 올스타스(Fania All Stars), 폰체나(Poncena) 등의 베테랑 살세로들은 지금도 정력적으로 레코딩을 계속 하고 있다.
2. 힐베르또 싼따 로사(Gilberto Santa Rosa), 헤리 리베라(Jerry Rivera) 등은 198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살사 로만티카를 대표하고 있다.  
3. 빅토르 마누엘(Victor Manuel)같이 미국의 R&B에 보다 많이 영향받은 스타일은 '소울풀 살사(soulful salsa)'라고 불린다.
4. 라 인디아(La India)와 마르끄 안쏘니(Marc Anthony)처럼 댄스 클럽 DJ의 기법에서 영향받은 스타일은 '댄스 클럽 살사'라고 불린다. 여기에 DLG(Dark Latin Groove)같이 힙합과 테크노를 접목하는 새로운 그룹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5. 살사, 힙합, 재즈, 록 등이 '가볍게' 결합된 경우(예를 들어 RMM 레이블)는 '살사 패스티쉬(salsa pastish)' 혹은 여러 장르들이 상호작용한다는 뜻에서 '살사 신쎄시스(salsa synthesis)'라고 부를 수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국민음악'인 메렝게(merengue)도 넓은 의미의 살사에 포함된다. 2박자의 메렝게는 씽커페이션이 많은 살사보다 리듬이 단순해서 1980년대 이후 살사 로맨티카와 더불어 대중화되었다. 후앙 루이스 게르라(Juan Luis Guerra), 엘비스 끄레스뽀(Elvis Crespo), 올가 따뇽(Olga Tanon) 등은 메렝게의 슈퍼스타들이다. 메렝게의 인기가 높아지다보니 '살사/메렝게'라는 범주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또한 리끼 마르띤의 "Maria"에 나오는 리듬인 꼴롬비아산(産) 꿈비아(cumbia)도 만만찮은 팬층을 가지고 있다. 네거스는 이런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살사 매트릭스(salsa matrix)'라는 개념을 동원하고 있다.
결국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살사에서도 장르의 '진정성'을 둘러싼 게임이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음악 수용자들 사이에서 진짜 와 가짜(나아가 사이비) 등을 판별하고 그들 사이의 차이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게임 말이다. 그렇다면 NG 라 반다나 로스 반 반 등이 '살사 음악의 프로그레시브 뱅거드'라고 불리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비유에 그치는 것이지만 1990년대 후반 살사 음악계에서 띰바는 1990년대 초반 록 음악계에서 그런지(grunge)가 차지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아바나는 '살사의 시애틀'인 셈이다.
로스 반 반이나 NG 라 반다처럼 이미 정상에 오른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만(로스 반 반의 멤버들은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다닌다), 그렇지 못한 밴드들은 살사 로만티카라도 연주하여 생계를 위한 돈을 벌어야 태세가 되어 있는 상태다. 반면 꾸바의 '로컬' 팬들은 꾸바 음악이 계속 복잡한 리듬과 열정적 분위기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이런 딜레마는 꾸바 음악이 월드 뮤직을 '벗어나' 라틴 음악으로 통합되고자 할 때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현재로서는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다. 꾸바 음악은 라틴 음악산업에 의해 점차 통합되면서도 음악적 탁월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니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꾸바 음악은 주류 살사가 걸었던 것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될 것인가. 후자의 징후는 벌써 드러나고 있다. 성기완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사운드트랙 음반을 "싱싱하다"고 표현한 뒤, 이 음반의 성공을 엎고 뒤이어 나오는 솔로 음반들에 대해서는 우려를 보내고 있다. 그 이유는 "까딱하면 국제 대중음반 산업의 컨베이어 벨트에 비늘이며 아가미며 다 뜯긴 채 나중엔 통조림이 되어버리기 때문"(<씨네 21>, 291호, 2001. 2. 27: http://www.cine21.co.kr/kisa/sec-002700704/2001/03/010313144638021.html)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꾸바 음악은 통조림을 양산하더라도 물이 마르지 않는 대양에 사는 수많은 물고기같이 보인다. 현대의 꾸바 음악에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같은 오래된 음악만 있는 것도 아니고, NG 라 반다같은 새로운 음악만 있는 게 아니다. 록 음악에 룸바를 접목시킨 신테시스(Sintesis), 신테시스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X-알폰소(X Alfonso), '모던 쏜(modern son)'이라고 부를 만한 꾸바니스모(Cubanismo), 젊은 디바 오스달지아(Osdalgia) 등 고립된 환경에서도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제 3세대' 음악인들이 속속 출현하기 때문이다.

로스 반 반의 리더 후앙 포르멜의 장남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후앙 까를로스 포르멜(Juan Carlos Formell)의 데뷔 음반 "Songs from a Little Blue House"(RCA, 1999)는 다시 한번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뜨로바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쏜의 퍼커션 리듬이 결합되고 재즈의 향취가 더해진 음악은 꾸바가 단지 '리듬의 강국'이 아니라 '작곡의 강국'임도 증명해주고 있다. 아, 그래서 꾸바 음악 시리즈를 마치고 담배를 끊으려고 했었지만, 시리즈도 못 끝내고 담배끊기도 글렀다. 잠시 쉬웠다가 다시 돌아와야 할 판이다. 20010510


-신현준,  웹진 에 게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