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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팔라닉, 하이재커 텐더 브랜슨의 교훈, 권태를 물리치는 법

로드365 2003. 11. 12. 21:08

내가 즐겨 쓰는 권태 퇴치법의 핵심은 고통과 불안이다. 볼테르가 말했다고 한다. '인간 정신은 불안의 발작 상태와 권태의 마비 상태로 나눠져 있다.'


텐더 브랜슨은 보잉 747 한 대를 하이재킹한다. 공포에 떠는 승객들을 공항에 내려놓고 마지막 남았던 조종사는 낙하산에 매달아 떨어뜨렸다. 자동 비행 상태로 연료를 다 태우고 나면 엔진 네 개가 차례로 꺼지면서 천 톤짜리 쇠덩어리는 텐더 브랜슨과 함께 호주의 오지에 처박히게 되어 있다. 이 기묘한 하이재커는 척 팔라닉(Chuck Palahniuk)이 소설 [서바이버](최필원 옮김, 책세상)에서 창조한 캐릭터이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마초 포르노의 대부'라 불렀던 영화 [파이트 클럽]의 원작자, 척 팔라닉 말이다.

텐더 브랜슨은 원래는 솜씨가 기적적인 가정부였다. 그는 쓸만한 생활의 지혜를 많이 알려준다. 랍스터만큼 먹기 번거로운 것은 비둘기 요리라고 한다. 잔뼈가 많기 때문이다. 유리잔 파편은 식빵조각을 이용하면 깨끗이 쓸어낼 수 있다. 셔츠 깃에 묻은 립스틱은 식초를 발라 문지른다. 전자레인지 속에서 물을 끓인 후 닦아내면 벽에 찌든 음식 찌꺼기들을 제거할 수 있다. 정액 등 단백질로 된 얼룩들은 찬 소금물에 헹군 뒤 일반 세탁을 하면 된다. 그리고 피아노 건반에 묻은 핏자국은 분유 가루로 닦으면 깨끗해진다고 한다.

텐더 브랜슨은 솜씨가 뛰어날 뿐 아니라 기계의 정확성과 지구력을 갖고 있다. 17년 동안 노부부의 저택에서 정해진 작업 시간표에 따라 한 치의 오차 없이 요리하고 빨래하고 쓸고 닦고 잔디를 깎는 일을 거듭해왔으니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권태로운 일상에 묻혀 사는 것 뿐"이라고 자조하지만 그에게 삶의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은밀히 운영하던 자살 핫라인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던진다. '혹시 권태롭지 않은가. 견딜 수 없이 무료하지 않은가. 확 죽어버리면 어떨까. 당장 말이다. 간단한 방법도 많다. 수면제를 탄 술을 들이 킨 후 비닐 봉투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되거든.' 한편 가정부로 일해 번 돈을 고향 크리디시로 부치는 것도 낙이라면 낙이다. 반소비주의와 반쾌락주의를 신봉하는 폐쇄적인 밀교 집단 크리디시는 각 가정의 장남을 제외한 아이들을 가정부로 교육시켜 문명 세계로 내보내어 고향을 부양하도록 해왔는데, 텐더 브랜슨도 크리디시 교회 지구가 세상에 파견한 완전무결한 가정부 중 하나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 텐더 브랜슨은 해방되었다. 고향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크리디시 집단의 몇 안 되는 생존자(서바이버) 중 하나로 남게 되고 이런 저런 극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하이재커로 변모하기에 이른다.

나는 [서바이버]에 뜨거운 찬사를 보낼 의사가 없다. 날 선 하위 문화 정서나 급진적인 비관은 흥미 유발에는 강점이 있지만 다소 피곤하다. 고상하기 이를 데 없는 형이상학적 아포리즘을 소화하는 일이 고단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스피디하고 유머 넘치는 이 소설은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설은 세상의 핵심이 권태와 무기력이라는 확신을 갖도록 유도한다. 이런 독후감은 제법 오래 지속되었다. 역시 소설은 사고의 환경이 될 수 있다. 영화는 사고의 계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영화표 한 장과 두 시간의 관람 행위로 고급한 정보나 각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세상은 믿게 되었지만 이건 정말 이상한 집단 착란인 것 같다. 엔터테인먼트는 그냥 놀이일 뿐이다. 스스로 비평을 만들거나 타인의 비평에 도전하는 고단한 과정 없이는 영화 감상이 폼 나는 취미 생활이 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 세상의 핵심이 권태와 무기력이라는 나의 독후감으로 되돌아가 보자.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무기력과 권태를 떨쳐버릴 수 있을까. 단 전제는 하이재킹을 하거나 자살하거나 하이티로 떠나거나 하는 반문명적인 해결책은 접어두자는 것이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나는 음주로 권태에 맞서는 습성을 갖고 있다. 이 습성은 아주 오래 묵은 것이다. 폭음을 하고 나면 몸이 쑤시고 기력이 쇠하고 속이 다 뒤집힌다. 하지만 개운하다. 권태의 감상 그러니까 신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자기 인식이 꼬리를 내린다. 새로운 건수가 생긴 것도 아닌데 삶의 비관을 멈추게 만드는 에틸알콜의 힘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투자와 후유증이 적은 편에 속하는 권태 퇴치법도 있다. 소파에 멍청히 앉아 이종격투기 중계방송을 보고 있으면 무의식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명치가 울컥거릴 지경에 된다. 그리고 단편 범죄 소설 두세 편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살인이나 방화 등을 차근차근 치밀하게 준비하는 인간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나면 세상이 훨씬 흥미롭게 보인다. (여담으로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정영목 정태원 편역, 도솔)에서 발견한, 억지스럽기 때문에 더욱 반짝이는 문구를 하나 옮긴다. "범죄자는 창조적 예술가이다. 하지만 탐정은 단지 비평가일 뿐이다.")

요약이 가능할 것 같다. 내가 즐겨 쓰는 권태 퇴치법의 핵심은 고통과 불안이다. 자기 몸을 적당히 학대하거나 처참히 주먹질 당하는 인간의 꼴을 직시하거나 타인의 생명을 앗아가기 위해 골몰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활력을 일으킨다. 이쯤에서 일반화의 비약을 위해 고상한 아포리즘을 하나 끌어드릴 수밖에 없는데, 볼테르가 도움이 될 듯싶다. 그는 '인간 정신은 불안의 발작 상태와 권태의 마비 상태로 나눠져 있다'고 했다. 착각하기 쉽지만 권태의 반대말은 즐거움이 아니다. 불안 혹은 고통이 권태의 적이다.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부터 권태에서 벗어났던 텐더 브랜슨처럼 권태로운 인간에게는 위기가 효과적인 처방이다. 그러니까 권태롭다고 산과 들과 테마 파크로 달려갈 일이 아니다. 차라리 매일 집 앞에 배달되는 일간지의 파국 경고 기사, 즉 필요 이상으로 정치적 사회적 재난을 상세 묘사하는 글들을 읽고 지옥도를 상상하는 편이 낫다. 그러고 보면 세상을 피칠갑해 놓고 세상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일간지들이야말로 이종격투기를 능가하는 권태 청소업자들이다.

이렇게 되면 권태란 배부른 소리라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위기를 잊고 안식에 익숙해지는 순간 인간은 권태를 느끼게 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권태는 인간 관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가령 상대적 박탈감이나 적대감이나 우월감처럼 말이다. 이 사실은 텐더 브랜슨의 애인이 일깨워줬다. 생식능력이 없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대리모(씨받이) 일을 하며 먹고사는 퍼틸리티(Fertility)는 텐더 브랜슨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사람들은 똑같은 드라마를 보고 똑같은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자신에 대한 기억은 불분명하면서도 시트콤의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기억은 완벽하다. 똑같은 인공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존재의 본성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권태란 고립의 상태에서만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인간들 속에 섞여 있을 때 더 지독한 권태감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저 지리멸렬한 인간들과 하나 다를 바 없어 보일 때에도 기운은 빠지고 외로워진다. 내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거대 대중 매체의 상투어와 논리와 상상력에 똑같이 물들어 있다면 삶은 지긋지긋하다.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존재의 다양한 버전을 모색하거나 그 힌트를 얻지 못할 경우 노곤해진다. 서로가 상대방의 재방송인 삶은 지겹도록 권태롭다. 그렇다면 권태의 치유법으로 술과 이종 격투기말고도 또 다른 것이 있다. 이른바 ‘개성’라는 것을 쟁취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댄디즘의 오만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가능한 독특한 해석력과 상상력을 확보해야 할 것 같다. 적어도 나 자신은 권태나 무기력의 발원체가 되지는 말아야 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의 독창성은 권태의 전염을 막는 좋은 방화벽이 될 것이다.

그런데 당장 걱정이 있다. 추석 연휴면 으레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 하게 되지만 반가운 마음은 곧 시들어버리고 길고 긴 연휴가 지겨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매번 명절 연휴 때면 누구나 실감할 것 같은데 사람들은 오랜 만에 만나 십 수년간 지속된 같은 테마, 같은 논리, 같은 규칙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묘기를 보이게 된다. 가족과 친구들은 인공 지식을 공유한 집단의 표본인 것 같다. 이번 추석 연휴 동안에는 권태의 연쇄를 깨뜨려야겠다고 결심해보지만 어쩌면 결의를 스스로 꺾고 골방으로 들어가 추리 소설을 읽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이 있다. 화투가 희망이다. 화투란 가벼운 위기와 불안을 만들어내는 게임이다. 몇 천원이나 몇 만원을 잃는 것도 싫겠지만 자존심의 경쟁이기 때문에 화투판에서는 활력이 되살아난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저급한 풍속이라고 타박하지만 우리들이 귀성 ‘전쟁’ 끝에 고향으로 찾아간 후 화투에 몰입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긴장과 위기감을 조성해서 권태에 맞서기 위한 것이다. 화투는 우리 한민족의 격투기이고 하이재킹인 셈이다.

-컬티즌, 이영재 yj_lee@cultizen.co.kr